젠더, 섹슈얼리티, 민주주의 - 오해와 편견을 넘어

  • 강사

  • 기간

    • 2017. 3. 28 ~ 2017. 4. 25
  • 시간

    • 화요일 19:00~21:30 총5회
  • 수강료

    80,000

    • 파격 할인혜택
    • 참여연대 회원5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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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 정보

    젠더, 섹슈얼리티, 민주주의- 오해와 편견을 넘어.jpg

     

    강의 소개 |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에서 빠져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민주 시민이라면 젠더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는데 젠더가 뭔지 모르겠고 감수성은 어떻게 발휘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성평등을 실현하는데 찬성하지만 페미니즘이나 여성 혐오란 단어에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다양성 존중과 인권은 알겠지만 동성애자, 트랜스젠더는 여전히 낯설다. 성폭력과 성차별에 반대하지만 일상 속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어렵다. 섹슈얼리티라는 단어는 많이 들어봤는데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

    이렇듯 항상 어딘가, 뭔가, 헷갈리고 의심스럽고 애매하고 잘 모르겠다는 기분을 느끼는 분들을 위한 기본 강좌입니다. 먼저 토론하고 강의 듣고 이어 질의응답과 다시 토론을 통해 머리 속을 비우고 채우고를 반복하며 인식의 전환과 확장을 꾀하는 새로운 형식입니다.

     

    강의 일정 |

    날짜

    순서

    주제

    03.28

    1강

    섹스의 사기극 : 일단은 머리 속 묵은 ‘신화’ 털어내기

    04.04

    2강

    젠더의 반란 : ‘로봇’에게도 젠더가 필요할까

    04.11

    3강

    섹슈얼리티의 질문 : 이성애만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04.18

    4강

    혐오와 폭력 : 왜 피하지 않고 공격하는 것일까

    04.25

    5강

    가족과 사회 : 인간의 조건을 묻다

     

    강사 소개 |

    한채윤  비온뒤무지개재단 상임이사

    1997년에 PC통신 하이텔의 동성애자인권운동모임인 <또 하나의 사랑>의 대표시삽을 맡으면서 성적소수자 인권운동을 시작했다. 1998년에 잡지 <BUDDY>를 창간했고, 현재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에서 퍼레이드 기획단장과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에서 아카데미팀장으로 활동 중이기도 하다.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에 대한 긍정의 과정은 여성으로서의 나를 긍정하는 과정이기도 했고, 인간다운 삶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채윤의 섹스 말하기>가 있고 공저로 <남성성과 젠더>, <성의 정치 성의 권리>,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페미니스트 모먼트> 등이 있다.

     

    강의 정보 |

    일  시 : 2017. 3. 28 ~ 4. 25 매주 화요일 오후7시 ~ 9시30분, 총5회

    장  소 :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

    참가비 : 8만원 (참여연대 회원 30% 할인)

     

    ※ 강좌할인 및 취소환불 규정은 수강신청안내(클릭)를 꼭 확인하세요.

    후기 5

    • 젠더, 섹슈얼리티, 민주주의 - 오해와 편견을 넘어서_5강 가족과 사회 : 인간과 조건을 묻다

      2017.5.16 개똥이 젠더, 섹슈얼리티, 민주주의 - 오해와 편견을 넘어

      제 5강. 가족과 사회 : 인간과 조건을 묻다 -한채윤 강사님

       

      우리에게 전제되어 있는 것.

        5강까지 진행되어 오면서 계속해서 성별의 기본형과 같이 우리에게 전제되어있는 개념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 사람을 그려보라고 했을 때 남성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기본이 되었던 것과 동성애는 학습된 것인가요?라는 물음도 이성애를 기본형으로 전제하고 이성애가 학습될 수도 있다는 고민이 없는 물음입니다. 이와 같은 예시들이 구체적인 예가 될 수 있겠습니다. 최근 돼지발정제 사건에서도 혈기왕성한 남성은 한번쯤은 다 그러한 실수를 저지른다는 성적 통념도 이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뒤에 결론 부분에서 자세히 할 것이지만, 결국 우리가 문제가 되는 사안들에 대해서 미시적인 부분들 뿐만이 아니라 거시적으로 사회 구조가 어떻게 문제들을 만들어 나가는지를 알아야 그 본질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본질을 정확히 파악해야 문제들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한국사회의 역사에서 젠더문제는 어떻게 논의되어 왔는가를 들여다보면 사회구조적으로 성별에 대해서 혹은 성소수자들에 대해서 작동하는 차별의 역사들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겁니다.

       

      2차 피해에 대하여

        2차 가해에 대한 의문점들이 많은 것 같아서 언급하려고 합니다. 2차 가해라는 단어는 없고 2차 피해만 있습니다. 2차 피해란 피해자가 1차피해를 겪은 후에 약자인 피해자가 문제를 제기하고자 할 때 가해자나 제 3자가 주는 부수적인 피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폭력 피해자는 성폭력이라는 피해와 함께 추가적으로 조직적인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2차 가해라는 단어를 쓸 때 문제가 나타나는데, 2차가해라는 단어를 쓰다 보면 1차 피해가 덮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범죄가 피해자 중심주의로 가기 때문에 제 3자나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사람까지도 2차 가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진상규명을 소홀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계속적인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강의를 마치며

        1강부터 4강까지 강조해왔던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원래 그러한 것은 없습니다. 원래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이 학습되어진 것이고, 사회적으로 주어진 직책에 따라서 역할들이 주어지게 됩니다. 가령 어머니로서의 역할, 선생님으로서의 역할, 남성으로서의 여성으로서의 역할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 역할들은 사회적으로 ‘어떠해야 한다’라는 주어진 역할이지 개인이 타고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구조가 파생하는 차별들과 부조리에 대해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너가 유별나서 그래’, ‘너만 그런 문제들에 신경 쓰는데 그러면 너가 이상한거 아니야?’라고 대하는 태도는 결코 좋은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없게 만듭니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묵살되고, 사회적 통념들과 사회적 역할들은 그대로 유지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현재 젠더 문제라고 여겨지는 의제들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을 나누는 것부터가 지양되어야 하며 한 개인으로 보아야 합니다. 남성으로서 페미니스트가 되는가?에 대한 질문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재구성 되어야 합니다. 남성으로서의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접근되어서는 안되고, 남성으로 살아 온 사람으로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로 접근해야 합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될 수 있다’가 됩니다. 즉, 우리는 남성으로서 살아왔던 사회적 구조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또한, 남성으로서 자연스러웠던 것에 대해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자연스럽지 않은 것일 수 있겠다는 태도로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것은 결코 개인이 의식적으로 구성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사회가 학습시키고 자연스럽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연스러움과 사회적 구조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개인의 의식을 정립시켜가야 합니다.

    • 젠더, 섹슈얼리티, 민주주의 - 오해와 편견을 넘어서_4강 혐오와 폭력 : 왜 피하지 않고 공격하는 것일까?

      2017.5.9 개똥이 젠더, 섹슈얼리티, 민주주의 - 오해와 편견을 넘어

      <젠더, 섹슈얼리티, 민주주의 - 오해와 편견을 넘어서>강의를 관통하는 주제는 당연시 해왔던 것에 질문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이번 강의 마지막 선생님께서 좋은 질문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해주셨던것이 기억납니다. 후기를 올리기 위해 이번 강의를 정리하고 보니 질문을 잘 하는 구체적인 방법차별, 혐오라는 낙인을 통해 감추려는 본질이 무엇인지, 차별과 혐오가 정치적으로 어떻게 활용되는지, 혐오를 통해 누가 어떤 이익을 취하게 될지 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라고 정리해 주셨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 선생님께서 제시해주신 핵심 질문은 ‘왜 한국의 개신교는 동성애 혐오를 필요로 하는가?’라는 이야기도 해주셨습니다. 아래는 강의를 정리한 것입니다.

       

      1. 차별, 비하, 혐오에 대하여

      1-1. 차별

      차별이 어떻게 구성되는가. 차별은 계급, 인종, 성, 나이, 외모, 학력 등 다양한 요인에서 작동한다. 이러한 차별로 인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당위는 실존할 수 없다. 차별 문제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차별의 작동으로 인해 누군가는 배제되고 타자화되며 불이익을 받는다는 것이다. 차별의 작동을 알기 위해서는 차별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들어오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차별은 특권 유지를 위해 이용되며 이때 차별은 정상/비정상 이분법의 방식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차별은 차별받는 개인과 차별받는 집단의 손해를 관례와 전통으로 만들어 누군가만 이익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1-2. 비하, 혐오

      비하와 혐오는 다른 종류의 작동이기 때문에 비교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하는 ‘…은 열등하다’같은 문장구조로 드러날 수 있으며 가치가 없음을 의미한다. 혐오는 ‘…따위 없어져야한다’같은 문장구조로 드러날 수 있으며 ‘내 눈에 보이지 않았으면’과 같은 방식으로 쓰인다.

      비하와 혐오를 구체적인 사례로 비교하기 위해 흑인에 대해 비하에서 혐오로 넘어가는 과정을 예로 들겠다. 미국에서 흑인이 노예였을때 백인들은 흑인을 비하했다면, 남북전쟁을 통해 노예해방이 된 후 백인들이 흑인들을 예전처럼 노예처럼 부릴 수 없게 되자 분리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혐오’를 표현한다. 비하는 일상적으로 덜 존중받는 식으로 작동되기 때문에 무시에 가깝다면 ‘혐오’는 위협이 되지 않았던 타자, 비주류가 주류의 권리를 가져간다고 주류가 여길때 드러난다.

      혐오는 생존을 위한 본능으로 필요한 감정이며 반응이다. 하지만 위의 예시에서 ‘혐오’는 혐오 대상을 죽이는 방식으로도 인권을 무시하는 범죄의 형태로 드러난다. 이 ‘혐오’는 생존을 위한 불수의적 반응과는 다르다. 혐오 대상을 한 공간에 공존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길뿐만 아니라 그 감정을 폭력으로 표출된다는 점에서 생존을 위한 혐오와 구분해야하며 가볍게 여길 수 없다. ‘혐오’를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방식, 최근의 예로는 동성애혐오를 볼 수 있다.

       

       

      2. 한국에서 개신교, 정치 상호간 영향

      2-1. 종교와 국가의 연결

      국가 내에서 ‘혐오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확산되고 강해지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국가와 종교간 영향을 고려하는것은 중요하다. 국가와 종교는 분리되어있지만 ‘그 안에서 마음 편히 잘 살아보자’는 같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와 종교간 목적이 같기 때문에 국가와 종교간 상호이해관계가 맞는 경우 협력할 수 있다.

       

      2-2. 한국과 개신교

      조선시대 말부터 종교가 국가와 어떤 식의 연결이 있고, 어떤 작용을 하는지 특이한 점들을 보자.

      - 1982~83년 태극기, 애국가가 만들어지는데 태극기에 유교적 관점이 담겨있다면 애국가는 기독교를 베이스로 하여 가사가 만들어 졌다는 점에서 개신교를 찾아볼 수 있다.

      - 1883년에는 개신교가 평안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38년에는 일본에서 한국의 신사참배를 원했는데 개신교 중 한국에 가장 먼저 만들어졌고 교인이 가장 많은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에서 신사참배를 한다. 그 외에도 헌금 납부 등 일제 부역활동을 하는데 3년 뒤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다. 이 과정에서 개신교는 큰 미움을 사게 되고 함경도, 평안도지역인 북에서 남으로 피난오며 서북청년단이 만들어진다.

      - 1945년 개신교가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기 전, 남한에의 개신교인은 약 1-2% 정도였다. 이 와중에 처음으로 만들어지는 공휴일이 크리스마스이다.

      - 1949년 이승만 정권에서도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지정하는데 이때 남한에서는 단 1%만이 개신교인이었다. 대통령 개인의 종교라는것만으로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이 될 수 있었을 것인가? 이승만때 국영방송을 통해 선교활동이 벌어졌으며, 최초의 민간방송이 기독교방송, 두 번째 방송도 극동방송이었다는것, 이승만 정권이 서북청년단의 도움을 받았음 등의 경우로 보았을때 종교와 국가가 어떤 이해관계 속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박정희 정권에는 개신교가 두가지 갈래로 나뉘게 된다. 빈민운동을 하는 진보운동방향의 갈래와 형태와 박정희 정권에 편입되는 갈래이다.

      - 80년대 전두환 정권에서는 북한, 반공의 잣대로 정권과 의견이 다른것에 대한 강한 이분법적 통제가 들어온다. 그를 대표할 수 있는 문장은 ‘너 빨갱이야?’인데 개신교에서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또한 개신교는 민주화운동에서 어떠한 발언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 김영삼 전 대통령은 매우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김영삼 대통령은 장로대통령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은 천주교 신자였으며, 이때부터 개신교 내부 비리(세습, 성추행, 이단 등)에 대한 방송 보도가 이어지고 사회적으로 개신교의 위상이 떨어지게 된다.

      -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북한에 대한 개방은 보수 개신교가 너무나도 싫어하는 것이었다. 보수 개신교는 늘 북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보수 개신교는 북한에 선교활동을 하고 북한주민을 도왔으며 통일 한국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그 이유는 북한에 교회를 건립하기 위함이었다. 보수 개신교 내 교단들은 이미 북한을 각 지역으로 나누고 재건위원회를 만들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고 그 역할을 정권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 또한 보수 개신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미국에 보이는 태도를 반미로 여겼으며 이는 보수 개신교를 불안하게 하였다. 또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가보안, 언론, 사학등과 관련한 관리역시 보수 개신교에게 충격을 주었으며 국가적 상황으로 인한 반미감정이 커지는 점 또한 불안요인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보수 개신교는 보수 개신교 집회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드는 장면을 보이기도 한다.

      -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거치며, 기독교는 권력자를 지원하는 것에서 정치 세력화 하는 것으로 바뀐다.

       

      2-3. 최근의 한국과 종교와 혐오

      종교내에서 ‘왜 동성애혐오를 할까?’ 라는 질문을 하기에는 개신교의 동성애혐오는 아주 적극적이며 그런 적극적인 혐오는 교리의 문제차원을 넘어선다. 때문에 ‘왜 한국의 개신교는 동성애 혐오를 필요로 하는가?’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최근 육군 참모 총장의 동성애자 군인 색출은 동성애자라는것만으로 범죄자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혐오가 폭력으로 드러나는 것이며, 사회적으로 집단을 배제하는 것이다. 개신교 장로이기도 한 육군대장 장준규는 한국기독군인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위의 질문 ‘왜 한국의 개신교는 현재 동성애 혐오를 폭력으로 드러내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한국 종교시설, 신자의 숫자를 보았을때 전체적으로 교인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로 개신교도 예외는 아니다. 개신교인구가 감소하여 교인의 숫자 확보가 안되면 개신교 세력을 유지시키기 어렵다. 이때 세력유지를 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를 결집시키는 방법을 취할 수 있다. 개신교에서는 외부의 적을 모두를 타락시키는 사탄으로 둘 수 있고 60-70년대에는 빨갱이라는 라벨링을 통해 외부의 적을 두었다. 그리고 지금은 빨갱이 구도를 따와서 동성애에 대입했다.

       

      3. 정리

      혐오는 낙인을 찍고, 본질과 구조를 보지 못하게 한다. 혐오는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된다. 우리는 혐오를 활용하는자가 얻는 이익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야한다. 개신교와 국가간 관계, 개신교의 혐오 이용에 대해 분석해 보기 전에는 개신교의 언어가 정치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도리, 윤리처럼 느껴지고 현혹되기도 하였다.

      여성혐오 동성애혐오가 용인되고 유지되는 상태에서 내 위치는 어디에 있는지, 나는 혐오만 받고있는 것인지, 나와 연대할 수 있는 이는 누구인지,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 젠더, 섹슈얼리티, 민주주의 - 오해와 편견을 넘어서_3강 이성애만 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2017.4.20 개똥이 젠더, 섹슈얼리티, 민주주의 - 오해와 편견을 넘어

       

      제 3강. 이성애만 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앞서 강의에서 계속해서 성차가 없다는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성차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성차’라고 불리는 것이 과연 정말 성차라고 불러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개인들의 차이는 있지만 이것이 남녀 이분법적으로 성차라고 불리는 현대의 구분법에서는 ‘성차’가 여성억압적이고, 차별적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고민을 가지고 성차란 과연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알고 듣고 인식했던 성차가 과연 있는지 말입니다.

       

      한가지 비교를 해봅시다. “나는 한국인입니다”, “나는 부산사람입니다”, “나는 마흔 여섯살입니다”라는 물음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나는 동성애자입니다”라는 말은 분명히 다르게 들립니다. 이를 들은 사람들은 ‘용기있다’ 혹은 ‘이상한 사람인가봐’라는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반대로 “이성애자입니다”라고 밝힌다면 별로 이상하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왜 이러한 차이가 나타날까요? 결국 우리에게 이성애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정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이성애자라고 여기는데, 그에 대해 얼마나 고민해보았습니까?

       

      우리는 이성애자라는 것에 추호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입니다. 내가 왜 이성애자인지 고민해본적 있을까요? 아니면 이성애자인 것은 어떻게 얻어진 것일까?에 대한 고민을 해본 사람은 있을까요?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없다면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성애가 자연스러워서 그런 것인가요? 그럼 한국사회가 오로지 이성애적 욕망만을 권장하고 용인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이성애적 욕망은 어느 정도 이성을 좋아해야 이성애적 욕망이라고 할 수 있나요? 이성애적 욕망이 없는 것은 사회적 범죄인가요? 종교적 타락인가요? 도덕적 타락인가요 아니면 그냥 자연스럽게 그럴 수도 있는 걸까요? 이러저러한 질문들을 던져보는 것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작동하는 이성애 중심적 사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이성애라는 정체성은 결코 우리가 고민해보고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제 이성애 중심적 사상이 어디서부터 유래되었는지 살펴봅시다.

       

       

      기독교의 영향

       

      기독교가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이전에 서구에서는 그리스로마신화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스로마신화에서는 최초의 여성을 ‘판도라’라고 여깁니다. 여기서 판도라라는 호기심이 많은 여자가 인류를 망하게 했다고 전승되는 것입니다. 조로아스터교, 오르페우스교(BC 7C~6C)에서도 어리석은 여성을 강조합니다. 그 뒤에 수 많은 남성들의 타락은 주목받지 않습니다. 플라톤은 여성의 자궁에 대해 여성의 몸에 존재하는 욕망의 생명체라고 설명하기도 하고, 아담과 같이 흙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 릴리스 이야기에서도 릴리스를 악한 여성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러다가 로마의 힘이 흔들리는 시대가 되자 사람들은 강력한 메시아를 원하며 메시아 사상을 가진 기독교의 세력이 확장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유일신 신앙이기 때문에 다신교 사상인 로마와는 배치되어 로마는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탄압에 기독교 신자들은 각종 고문과 사형에 처하며 순교하게 됩니다. 303년에는 디오클레디안 황제의 기독교 탄압이 거세지면서 기독교 관련 문헌을 모두 없애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등장하며 역전됩니다.

       

      로마를 통일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인정하며 정치적으로 통합에 사용하려 합니다. 기독교가 지역마다 교리가 달라 분열되자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통일하여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화되어 큰 힘을 얻기도 합니다. 이제 종교가 통일되며 다른 교리를 가진 종교들을 이단화하기 시작합니다. 국가가 이단을 적으로 여기고 기독교 교리에 일치하지 않는 종교와 사상들을 철저히 배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 걸출한 신학자들이 나타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펠라기우스가 당시 유명한 신학자였는데, 아우구스티누스가 황제에 의해 선택받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론(신의 은혜를 통해서만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을 주장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 원죄론의 핵심은 성의 타락입니다. 모두가 원죄를 가진 이유를 아담의 정액으로 인한 타락의 대물림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황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을 받아들였을까요?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이 원죄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 중 누군가가 인간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인물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은 예수님의 성육신으로 연결되고, 중세 후기에는 마리아 숭배로 이어집니다.

       

      황제의 권력에 의해서 신학자들에 의해 정리된 한가지 교리만이 존재하게 되고, 이외의 논쟁은 이단으로 여기며 말살해버립니다. 중세 후기에 들어서면 뱀이 여자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즉, 뱀의 악함은 여성의 악함과 같다는 그 시대의 인식입니다. 그럼으로써 마녀사냥이 정당화되기도 합니다. 이제 고대로부터 시작되어 중세를 거친 종교의 역사는 여성을 헌신적인 성녀 마리아와 죄악을 가져온 여성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반면 남성은 순진한 아담과 영웅 예수님으로 이미지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성억압과 여성차별은 주류 기독교 문화로부터 시작되어서 사람들의 인식으로 뿌리깊게 자리잡게 됩니다. 이성애 중심적 사고도 이러한 문화의 산물입니다. 종교는 삶을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하지만, 기독교와 같이 사회적으로 주류를 형성하게 되면 사람들의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애만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까?

       

      동성애에 관한 인식이 한국에서는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보기 위해서 드라마와 영화에서 발견되는 동성애에 관한 묘사를 봅시다. <가슴달린 남자>, <번지점프를 하다>와 같은 영화에서 남자주인공이 동성애를 느끼게 되면 그것을 이상하게 느끼며, 자신들이 여자가 될 수 있겠다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정신병원을 찾아갑니다. 반면에 <구름이 그린 달빛>, <성균관 스캔들>, <선덕여왕>에서는 남자주인공이 동성애를 느낄 때 여성이 될 위험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동성애는 근대적인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드라마나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이야기를 기록한 사관들도 동성애를 그리 문제삼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근대의 시대에는 남성 중심으로 남색과 여색이 나뉘었으나, 현대사회는 이성애를 중심으로 남성성이 상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성의 곁에는 언제나 여성이 있고, 남성성은 여성을 통해서 확인됩니다. 즉, 현대의 남성은 이성애만을 통해서 남성성을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영화에서 동성애 감정을 가지는 남자들은 여성이 될 위험을 느끼며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러한 역사의 누적물들이 현대의 문화를 만들고 현대의 이성애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원래 그런 것은 없습니다. 결국 역사가 주류의 문화를 만들고, 이끌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지금의 사회문화에 대해 고민해봐야 합니다. 이성애만이 정상일까?라는 물음도 타당하게 제기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물음 없이 현재의 사고방식을 따라가게 된다면 어떠한 변화도 일구어낼 수 없습니다. 여성 억압에 대한 그리고 이성애 중심적 가치관에 대한 역사적 인식과 문제제기를 통해서 우리는 이성애든 동성애든 무엇이든간에 하나의 사람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더 이상 그것을 성별로 나누어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 젠더, 섹슈얼리티, 민주주의 - 오해와 편견을 넘어서_2강 젠더의 반란: '로봇'에게도 젠더가 필요할까

      2017.4.19 개똥이 젠더, 섹슈얼리티, 민주주의 - 오해와 편견을 넘어

      지난 강의와 이번 강의를 들으며 흔히 말하는 일반적이라 여겨지는 것, 자연스럽다 여겨지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또한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여 생각하고 질문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전체적인 강의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1. 지난주 강의 정리, 받으셨던 질문에 대한 피드백

      지난시간의 핵심은 여, 남 생물학적 성별의 차이는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생물학적 성별 이분법이 어떤식으로 작동되는가에 대한 내용이었다.

       

      1-1. 캐롤 길리건의 돌봄의 윤리

      콜버그는 도덕 윤리의 단계를 위계적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하이츠 딜레마를 통해 여성과 남성의 평균적 윤리관을 비교해 보았을때 여성이 남성보다 윤리적 단계가 낮다고 분석했다. 즉, 콜버그의 도덕윤리 단계로 보았을때 여성의 도덕관념이 더 낮다는 것이다. 하지만 캐롤 길리건은 그것은 여성과 남성에게 주어진 지형과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여성에게는 돌봄이 요구되며, 여성은 본인이 부재한 상황이 되었을때 환자를 누가 돌볼것인지등 여성은 배려해야할 다양한 것에 대해 고려하고 있기 때문에 주어진 상황이 여성, 남성이 같은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콜버그의 윤리는 인간의 윤리가 아니라 남성의 윤리, 남성중심적 시각으로 만들어진 윤리라 볼 수 있다. 도덕 윤리에 여성과 남성이 처한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으며, 돌봄의 윤리, 배려의 윤리가 요구되는 여성, 그것에서 자유로운 남성이 바라보는 세상이 다름을 고려해야한다. 다만 이에 대한 해석으로 캐롤이 제시한 돌봄의 윤리는 생물학적으로, 진화심리학적으로 해석되면서 다시 여, 남성별의 차이를 강화하는 기반으로 이용되었다.

       

      1-2. 성별 구분 사례들 - 연구의 구성, 해석에서 연구자 관념의 영향

      연구자는 mtf트렌스젠더의 성별을 확인하기 위해 실험을 구성했다. mtf트렌스젠더에게 여성, 남성 누드 사진을 보여주고 뇌의 활성화 사진을 찍은 것을 보여주었다. 뇌 활성도 사진을 보니 남성 누드에 뇌의 활성도가 더 높았고 연구자는 mtf트렌스젠더를 여성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를 통해 남성 누드 사진에서 뇌 활성도가 더 높은 것이 실험참여자를 여성으로 결론짓는다는 연구자의 관념을 알 수 있다. 연구자는 여성은 남성의 누드사진을 보고 성적 흥분을 느끼고, 남성은 여성의 누드사진을 보고 성적 흥분을 느낀다는 관념을 가지고 연구를 설계한 것이다.

      염색체, 생식기관, 여남 성별은 세트로 작동하지 않는다. 즉, 염색체차는 성차가 아니다. 성기의 차는 성차가 아니다. 성기는 성별과 일치하지 않는다.

      뇌가 성별을 인지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실험으로 연구자는 생후 1년이 된 아이에게 여성으로 보이는 영상, 남성으로 보이는 영상을 각각을 동시에 틀어주고 스피커에서 여성의 목소리, 남성의 목소리를 틀어주었다. 아이는 여성목소리가 날때는 여성이 움직이는 영상을, 남성 목소리가 날때는 남성이 움직이는 영상을 보았으며 연구자는 이를 통해 생후 1년이 지난 아이면 성별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연구를 통해 생후 1년이면 사회화 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뿐이다. 연구의 결과로 더 합리적이게 보이는 설명을 붙이자면, 아이가 여성이라 여겨지는 외모와 목소리, 남성이라 여겨지는 외모와 목소리를 연결지을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가 얼마나 획일화 되어있는가를 알 수 있다고 정리하는 편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2. 성별, 젠더 - 성별 타고난 것인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논쟁

      2-1 젠더라는 용어의 탄생

      intersex에 대해 연구한 존머니라는 학자로부터 출발한 용어이다. 여성기에서 여성의 특성, 남성기에서 남성의 특성이 나온다면 간성은 여성과 남성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어 혼란 스러울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간성에게 성별을 물어보았을 경우 혼란스러워 하지 않았고 본인의 성별을 명확히 말했다. 이를 통해 존머니는 여성으로 길러지면 피양육자는 스스로를 여성으로 인지, 남성으로 길러지면 스스로를 남성으로 인지한다고 이야기 하였으며 자신의 성별을 인지한다는 점에서 존머니는 gender identity라는 용어를 썼다.

      즉, 생물학적 기관과 무관하게 양육자가 피양육자에게 어떤 성별을 기대하며 양육하였는가에 따라 피양육자의 성별이 결정된다고 본것이다. gerder identity는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뇌에 각인된 것이 아니라, 생후 18개월이면 gender identity를 가지게 되며 그 시기동안 아이를 어떻게 양육하는가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 시기 트렌스젠더와 관련된 연구도 나오며 이런 논쟁속에서 인간의 생물학적 성과 별도의 성별이 있으며 이를 ‘젠더’라고 명명했다.

       

      2-2 성의 정치학 - 성별은 어떤 때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사회적으로 여성, 남성에게 부여된 성 역할이 있으며 이는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만들어낸 것이며 사회적으로 부여된 성역할에서 자유로워질수있고 평등을 이야기 해볼 수 있지 않은가에 대한 담론이 나왔다. 시대에 따라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관점아래 투표권, 임신중절권, 동일노동 동일임금, 공사 이분법등의 논의가 진행 되기도 했고, 되고있기도 하다.

      하지만 주디스 버틀러는 생물학적 성, 사회적 성 모두 사회적으로 정해진 것이라고 보았다. sex가 본질적인 것이 아니고 명확히 나눌 수 없다는 것에서, gender가 사회적 해석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해석 틀일뿐이라고 본 것이다.

      성에는 다양한 이분법(선천적/후천적, 본성/양육, 신/인간)이 존재하며 적용의 잣대가 매번 바뀌는데 어떤 상황에서 어떤 잣대를 꺼내오는지, 그 잣대를 꺼내온 이유가 무엇인지를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2-3 타고난 성, 만들어진 성

      존머니는 페니스를 소실한 남아를 접하였다. 존머니는 남아를 여아로 양육하는 환경과 과정을 통해 피양육자는 자신을 여성으로 인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양육환경이 성별을 결정함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존머니는 양육자들을 페니스가 소실된 남성은 남성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설득하여 남아를 여아로 기를 수 있도록 하였고 아주 어린시절부터 여성으로 양육되었던 그는 여성이 되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성장한 그는 자신의 성별에 의문을 품었으며 자신의 성정체성이 남성이라고 정체화한다.

      이 과정에서 유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두 가지이다. 존머니가 양육자를 설득하기 위해 남아의 페니스를 강조 했던 것, 피양육자가 여성으로 길러졌던 환경에서 피양육자는 스스로를 남성으로 정체화 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쟁점에서 sex와 gender에는 여러 관념이 있고 각 관념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으며 어떤 해석틀이 필요한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페니스가 없다는 것만으로 여성으로 살게 한 것, 페니스는 다른 신체부위와 다르게 해석된다는 것, 페니스가 남성임을 결정 하는 것, 페니스의 크기가 남성임을 결정 하는 것, 왜 페니스 없음은 여성을 의미하는가, 성은 무엇인가, 성의 실체와 본질은 있는가.

       

       

      2-4 성별 이분법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인간은 존엄하다는 가치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며 이는 수단에 대한 평등이 아니라 결과적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sex, gender는 모두 해석의 도구이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점은 성별이 이미 나뉘어진 사회에서 나뉜 성별을 이를 어떻게 유용하게 쓸 수 있는가, 어떻게 해석해야 의미있는 해석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전기 요금 지원 가정에 하루 종일 집에 있게 되는 임산부를 지원 대상으로 고려하는 것, 한부모 가정을 조사할 때 편모가정, 편부가정을 구분해 조사하여 각 가정에 따른 다른 고충이 있을 수 있음을 헤아리는 것이 있다.

       

      2-5. 로봇의 성

      로봇기술이 발전하며 인간이 노동했던 영역을 로봇이 대체할 수 있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현상을 통해 우리는 여러 생각을 해볼 수 있다. 흔히 남성이 많이 하는 일을 하는 로봇은 남성 로봇인것인가. 여성형으로 만든 로봇이 흔히 남성들이 많이 하는 일을 하게 된다면 여성이 남성영역의 일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남성이 하는 일을 성별이 없는 로봇이 대체 할 수 있는 현상을 보았을때, 사실 일에는 성별이 필요 없었던 것은 아닌가.

      외형이 여성형인 섹스로봇이 나온다고 한다면, 여성형의 로봇 구입은 성매매인가, 남성의 성행위 대상은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을 띠어야만 하는가, 여성형 로봇을 섹스로봇으로 만드는 것은 인간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는 것과 얼마나 다른가에 대한 생각도 필요하다.

       

      2-6. 일상생활에서 성별 이분법, 여성 혐오, 문제의 맥락을 지우는 방식과 그에 대한 해석

      지나가는 멋진 여성을 볼 때 남성은 여성의 몸매를 보고, 여성은 여성의 옷과 악세서리를 볼것이라 말한다면 그것은 어떤 맥락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생각이며 문제인가. 우선적으로는 이성애중심적 사고방식이라는 점에서, 다른 성애를 배제한다는 방식에서 문제이다. 또한 이성애자여도 여성, 남성이 늘 그런 생각을 한다는 점에서 문제이다.

      군가산점 제도에 있어 문제는 무엇인가. 군가산점제를 홍보하는 포스터를 통해 알 수 있듯 가장 큰 문제는 군인 처우에 대한 불합리에 대한 질문이 제기 되어야하는데 성별문제로 치환되었다는 점에서 문제이다. 군가산점 제도는 부당한 대우를 받는 군인의 처우 개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시각으로 보았을때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군인이 공무원 시험을 보는 것이 아니기에 군가산점제가 군인의 처우에 대한 개선이라고 볼 수 없다.

      miss박은 여성혐오를 표현한 단어인가. 대통령의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을, 그 사람의 성격 중 여성이라는 성별을 뽑아내어 묘사한 것으로 여성혐오라고 볼 수 있다.

       

    • 젠더, 섹슈얼리티, 민주주의 - 오해와 편견을 넘어 1강 -한채윤 (비온뒤무지개 재단 상임이사)

      2017.4.4 개똥이 젠더, 섹슈얼리티, 민주주의 - 오해와 편견을 넘어

      <섹스의 사기극 : 일단은 머리 속 묵은 ‘신화’ 털어내기>

        사람들에게 최근 사회적인 이슈를 몇 가지 물어본다면 다양한 이슈들이 나오겠지만, 빠지지 않고 등장할 것이 페미니즘 혹은 여성주의일 것입니다. 이는 페미니즘 관련 도서가 서점에서 인터넷에서 인기가 많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여성주의 운동을 하고 있는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토론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참여연대에서는 여성주의 운동과 동성애 운동을 활발히 하고 계신 한채윤 강사님과 함께 젠더와 섹슈얼리티,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5주에 걸쳐 나누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강의는 <섹스의 사기극 : 일단은 머리 속 묵은 ‘신화’ 털어내기>라는 주제로 진행되었습니다.

       

      1. 사람을 그려보자

       

        강사님이 첫 번째로 던진 질문은 “사람을 그려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수강생들은 열심히 사람을 그려나갔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여성을 그려보세요”였습니다. 수강생들은 어리둥절했지만, 두 번째 종이에 여성을 그려나갔습니다. 마지막으로 강사님은 “남성을 그려보세요”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세 번째 종이가 필요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첫 번째 그린 사람을 남성으로 그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의 ‘기본형’을 생각하면 남성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말입니다. 또한, 그 남성은 포대기에 쌓인 아기이거나 5살 혹은 10살의 남성이 아닌 성인의 남성을 그립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깊이 박혀있는 사람의 ‘기본형’인 겁니다.

       

      2. 성별의 차이는 무엇인가

       

        강사님은 두 번째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성별은 이분화해서 보아 우리가 남성이거나 여성일 때 자신을 “다른 성과 구분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답변은 다양하게 나왔습니다. “목소리에서 차이가 난다”, “남성은 아니기 때문에 여성인 것이다” 혹은 “임신할 수 있으면 여성이다.” 등등 많은 답변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들은 반박이 가능한 답변들입니다. “우리가 흔히 남성의 목소리라고 하는 중 저음을 가진 여성이 과연 없을까요?”, “남성이 아니라면 꼭 여성일까요? 그리고 남성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마지막으로 “임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여성이라면, 임신하지 못하는 여성은 여성이 아닌가요?” 등 다양한 반증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별의 차이로 남게되는 답변은 신체적인 차이였습니다. 남성과 여성은 생식기관이 다르고 호르몬, 염색체에서 차이가 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과연 성별에 차이를 찾을 수 있을까요?

        한채윤 강사님은 자신이 생물학자는 아니지만, 신체적으로 성별의 차이가 있다는 것에 의문을 던지며 독학으로 성별의 생물학적 차이에 대해 공부한 결과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결과들은 성별의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선입견을 하나씩 격파하였습니다. 한채윤 강사님의 구체적인 생물학 논증을 글로 전달하기는 힘들기에 결론적인 부분들만 쓰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성별의 차이라고 흔히 이야기하는 염색체는 생식기관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또한 호르몬의 차이에 있어서 여성호르몬이나 남성호르몬이 어느 정도로 나와야 여성 혹은 남성이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척도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생식기관의 차이는 정자와 난자 결합 후 4주차에 결정이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최초의 여성생식기관과 남성생식기관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즉, 인간에게 타고난 성별은 없고, 그러므로 성별을 명확하게 구분할 차이는 없는 것입니다.

       

      3. 성별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성별에 차이가 없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별은 어떻게 주어진 걸까요? 그리고 어떻게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 침투해 있는 걸까요? 결국 성별은 사회가 만들어 냅니다. 국가가 성별을 정해서 각각의 번호를 부여해줍니다. 다만, 우리가 여기에 반항하지 않고 순응하는 것은 그것이 불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눈치챈다면 우리는 기존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성별을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별을 이분법으로 나는 남성 편 혹은 나는 여성 편으로 편 나누기하여 싸우지 말고 사회적으로 주어진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별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은 성별의 차이에서 벗어나 개인의 차이로 보는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의 명확한 차이는 위에서 보았듯이 알 수 없습니다. 즉, 사람들은 성별의 차이가 아닌 개개인들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남성과 여성으로 보지 말고 한 개인으로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나 혼자만 개인차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성별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개인차라는 시선을 강요해서는 갈등이 깊어지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성별의 차이가 어떻게 구조적으로 작동하는지 먼저 이해시키고 개인차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성별에 대한 논의가 진전이 있게 됩니다.

       

        우리가 성별의 차별을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과거로부터 이어져오는 남성중심의 사회체제는 자연스럽게 남성중심의 교육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사회에서 사회화 되었습니다. 그러니 여성의 목소리는 나오기 힘들 수 밖에 없고, 사회가 이야기하는 여성은 남성이 바라본 여성을 반영하게 됩니다. 또한, 성별을 남성, 여성 이분화하여 나누는 현상도 자연스럽게 여겨집니다. 여기서 벗어난 여성은 저항하는 혹은 공격적인 여성으로 매도되고 일반적이지 않은 여성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동성애의 영역도 마찬가지 입니다. ‘기본형’에서 벗어난 논의들은 사회에서 낙인 찍히고, 비주류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역사가 말해주듯이 끊임없는 논의와 저항만이 기존 체제를 바꿀 수 있는 길입니다. 기존 사회에 머무는 순간 변화는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연스러움에 대해 저항해야 합니다. 기존체제의 획일성에 대해 다양성으로 대응하며, ‘왜?’라는 질문은 끊임없이 던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본형’이란 개념은 없어져야 합니다. 기본형이 존재한다는 것부터가 다양성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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