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70년 역사기행] 제주 4·3 바람이 분다

  • 강사

  • 기간

    • 2018. 4. 9 ~ 2018. 4. 22
  • 시간

    • 월 19:00-21:30 / 토.일 종일 총4회
  • 수강료

    150,000

    • 파격 할인혜택
    • 참여연대 회원135,000

    각종 혜택 적용은 로그인 > 마이페이지에서 진행됩니다

    상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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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역사기행은 특강은 서울에서, 현장기행은 제주에서 진행합니다. 역사기행참가자는 특강에 무료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아카데미느티나무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4·3은 지금 우리 삶에 스며든  '오래된 현재'입니다.

     

    제주 4·3 많이 들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건 너무도 피상적입니다.

     

    벚꽃이 피고 산수유가 터지는 4월의 제주.  

    그 아름다운 제주에는  우리가 기억해주길 바라는 이야기와 현장이 시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제주 4·3 진실찾기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 특강을 통해 생각해보고

    역사기행에서 그 생생한 아픔의 현장을 방문합니다.

     

    강좌 일정

    일정

    제목

    강사

    단강신청

    4/09(월)

    제주4·3, 그 진실찾기의 여정

    - 4·3 진상규명 운동의 어디까지 왔나?

    -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김종민

     

     

     

    신청하기(클릭)

    4/16(월)

    국제법으로 본 제주 4·3

    - 다른 나라는 국가폭력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

    이재승

    4/21~22

    (토,일)

    현장기행

    - 백문 불여일견. 제주4.3의 생생한 현장들을 경험하는 시간

    김종민

    제주다크투어

     

     

     

    참가비

    ● 성인 15만원 (항공비 별도, 제주다크투어/참여연대 1만원 이상 후원회원 10% 할인)/ 30명 정원

    ※ 항공권은 개별적으로 예매 하셔야 합니다.(단체 예매를 하지 않습니다).

    등록은 입금순으로 4월 8일(일)까지 받습니다.

    만 19세 미만 미성년자 참가비 12만원

    * 제주 현지 참가자 및 미취학 아동 참가비용은 별도 문의 부탁드립니다 (02-723-0580, people@pspd.org)

    * 참가비에는 아래 항목이 포함되어있습니다.

    - 숙박비(2인1실-더블베드, 트윈베드, 한실 / 4인1실 도미토리)

    - 식비(4식)/ 교통비(전세버스)/ 해설사비/ 여행자보험비/ 특강비

     

     

    ★참가자 필수 사전 설문★ >> 설문링크바로가기(클릭)

    - 숙소배정, 여행자보험 등록 등을 위한 사전 설문입니다. 필수 사항이니 꼭 입력해주세요.

    - (설문 외에도 반드시 홈페이지 수강신청도 함께 완료해주세요.)

     

     

    답사 프로그램

    ● 1일차 코스(4/21,토)

    : 제주 4·3 평화공원 - 북촌 너븐숭이 기념관 - 북촌 4.3길

    10:30

    만남

    제주공항 대합실 1번 게이트 앞

    11:30

    점심식사

     

    13:00

    제주 4·3 평화공원

    제주 4·3에 대한 이해

    16:00

    북촌 너븐숭이 기념관

    [증언] 북촌리 유족회 노인회장 “나와 제주4·3”

    17:00

    북촌 4·3길 걷기

    너븐숭이 – 옴팡밭 – 북촌초등학교 등

    18:00

    저녁식사

     

    20:00

    숙소 도착

    세인트 하우스

     

    ● 2일차  코스

    : 알뜨르 비행장 - 섯알오름 - 동알오름 - 동광리 큰넓궤 - 진아영 할머니 삶터

    08:00

    아침 식사

     

    09:00

    출발

     

    10:00

    알뜨르비행장, 섯알오름

    일제 강점기 유적지, 유예비검속 학살터

    11:00

    동알오름

    일제 고사포 진지 등

    12:30

    점심 식사

     

    13:30

    동광리 큰넓궤

    제주4·3 당시 주민들의 피난처였던 동굴

    (영화 ‘지슬’의 배경)

    15:00

    진아영 할머니 삶터

    삶 속의 제주 4·3

    17:00

    제주공항 도착

     

    ※ 위 일정은 날씨 및 현지 상황에 따라 조정될 수 있습니다.

    ※ 22일 돌아가는 비행기 시간은 제주공항 도착 예정 시간 2시간 이후로 넉넉히 잡아주세요.

     
    숙소안내

    - 세인트 하우스 ( http://www.jejusaint.com/ )

     

    강사정보

    김종민 농부, 제주다크투어 자문위원, 전 제주4.3 중앙위원회 전문위원

    이재승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환불규정

    - 시작일 7일 이전 취소(~4/13,금요일까지) >> 전액환불

    - 시작일 기준 7일이내 3일 전까지(4/14,토 ~ 4/17,화) >> 참가비 50% 환불

    - 시작일 기준 3일이내 ( 4/18 수요일 이후) 취소 >> 환불 불가

    환불신청은 홈페이지 로그인-<마이페이지>에서 수강취소를 클릭 하신 후 '확인'을 눌러주세요.

    아카데미 홈페이지 비회원의 경우 이메일(people@pspd.org) 혹은 온라인 강좌취소 신청서(클릭) 을 통해 신청해주세요.

    * 본 역사기행은 정원제로 참가비로만 운영됩니다. 기행 확정 이후 취소하실 경우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에서 비용부담을 지게 되오니, 신중하게 신청해주세요.

    * 환불처리는 강좌 종료 시점(4/22,일) 이후 7일이내 일괄 처리될 예정입니다.

     

    강좌 정보

    특강 일정 및 장소 : 2018. 4. 9. ~ 4. 16. 매주 월, 19:00 ~ 21:30, 총 2회,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서울)

    기행 일정 및 장소 : 2018. 4. 21. ~ 4. 22.(토,일) , 제주도

    참가비 : 15만원(※항공비 별도, 만 19세 미만 미성년자 12만원)/

    입금계좌 : 하나은행 162-054331-00805 (예금주 참여연대)

    정 원 : 30명(입금순, 제주다크투어&참여연대 1만원 이상 후원회원 10% 할인)

    ※ 제주 현지 참가자 참가비 별도 문의 (02-723-0580, people@pspd.org)

    ※ 상단에 표기된 환불규정을 반드시 확인하세요,

     

    지속가능한 제주를 위한 우리의 약속

     

    1. 환경을 생각하는 준비물

    짐을 꾸릴 때 개인용 물통, 개인컵을 반드시 가져오세요. 도보를 하면 물을 많이 마시게 됩니다. 농촌 지역의 경우 재활용품 수거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실정입니다. PET병에 든 생수를 사먹고 버리면 지역에 묻힐 플라스틱은 늘어납니다. 또한 종이컵을 사용을 줄이기 위해 개인컵을 가져오시길 바랍니다.

     

    2. 환경을 생각하는 여행 탄소배출을 최소화합니다.

    대중교통수단인 고속버스를 이용하고, 도보로 여행함으로써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한 탄소배출을 최소화합니다.

     

    3. 지역경제 활성화

    외부에서 들어온 자본이 운영하는 대규모 호텔이나 리조트, 휴양시설이 아니라 지역민들이 현재 살고 계신 집을 이용하여 숙식을 하거나, 지역민이 직접 운영하는 상점을 이용하여 여행자들의 소비가 지역경제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여행을 진행합니다.

     

    4. 지역민과 지역의 문화를 존중하는 여행

    마을 분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 보세요. 나 하나쯤 하는 생각으로 무심코 꺾은 농작물은 지역 주민들이 소중히 가꾼 생활의 터전을 해칠 수 있으니 자제해 주세요. 또한 사진을 찍을 때는 미리 양해를 구해주세요.

     

    5. 간편한 옷차림과 편한 운동화

     

    후기 2

    • [역시기행후기] 제주, 그 어두운 동굴 속... 거기 사람이 살고 있었다

      2018.5.23 느티나무 [제주 4·3 70년 역사기행] 제주 4·3 바람이 분다

      본 후기는 <오마이뉴스>에도 함께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오마이뉴스 바로가기>> http://bit.ly/2ID56l0

      - 아카데미느티나무

       

       

      제주, 그 어두운 동굴 속...거기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경희 역사기행참가자

       

       

      영화 <지슬>이 개봉했을 때 나는 친구와 제주를 여행하고 있었다. 개봉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여행을 떠나며 우리는 제주에서 <지슬>을 보자고 했다. 마침 일정에 다랑쉬오름이 있어 영화를 제주에서 본다면 여행이 더 의미 있어질 거라고. 그러나 그 일을 실행하지 못했다. 여행 마지막 날, 극장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할 시간에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작은 레스토랑에서 커다란 새우가 들어간 크림 파스타를 먹었다. 그날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여행은 나에게 다른 의미를 남겼다. 제주에 살고 싶어졌고 매해 한두 번 제주여행을 다녀오게 만들었다. 4·3 역사기행을 신청한 것도 제주를 더 알고 싶어서였다. 수업 장소인 참여연대는 집에서 멀지 않았고, 제주로 1박 2일 간 답사를 다녀오는 강좌가 4월에 열렸으니까, 가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후기를 쓰기에 앞서 한 가지 고백을 하자면, 나는 수업을 듣고 제주4·3에 대해 알게 된 후 역사기행을 포기하고 싶었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1947년 3월 1일 3·1절 발포 사건.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통행금지령 해제. 7년 7개월. 희생자 3만 명. 당시 제주 인구의 십분의 일. 첫 수업 날 노트에 적은 내용이다. 김종민 선생님은 칠판에 연대표를 그리고 당시 기사와 자료, 생존자의 증언을 토대로 4.3의 개요를 짚어 갔다. 얼마나 끔찍한 사건이었는지. 수업 내내 너무 참담해서 마음을 추스를 겨를도 없었다. 몇 년간 사건이 지속됐고 몇 명이 죽었다는, 노트에 적어둔 숫자도 그랬지만 사람들의 증언 때문에 더 그랬다. 생존자 7000명을 인터뷰하고 진상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던 김종민 선생님에게 듣는 4·3은 ‘역사’나 ‘사건’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였다. 가족이 총에 맞아 죽은 일을 길게 증언하는 할머니와 총 맞아 죽은 게 끔찍한 일도 아닌데 뭘 그리 길게 말하느냐 타박하는 옆에 다른 할머니들. 일곱 살에 토벌대에 의해 집이 불 타 가족을 잃고, 그때 가족을 구하지 못한 일을 평생 자책하며 살아온 할아버지. 다른 어떤 설명보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 한마디에서 떠오르는 그 사람의 삶이 내겐 더 성큼 다가왔다.

       

       4·3평화공원 위령제단에서 참배 하는 역사기행 참가자

      <4·3평화공원 위령제단에서 참배 하는 역사기행 참가자들 ⓒ참여연대>

       

      역사기행의 출발은 4·3평화공원이었다. 진상을 알리고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인 만큼 많은 자료와 글을 통해 사건의 참상을 설명하고 있었고, 다랑쉬굴과 제주공항 유해 발굴 현장 등을 재연해 놓기도 했다. 수업을 통해 이미 들은 내용이었지만 다시 보는 일은 수월하지 않았다. 나쁜 일을 두 번 목격하고 겪는 것처럼 더 생생하고 참혹하게 다가왔다. 또 그래서 실감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14,000여 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위패 봉안실에 들어갈 때는 많다, 너무 많다, 는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웅장하리만치 높은 천장까지 빼곡히 찬 위패를 보면서 슬프기보다는 무력감이 밀려왔고, 그건 행방불명자묘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형무소에 사람을 가두고, 죽이고,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시신을 찾을 수 없다. 생사를 확인할 수조차 없다. 한 명이 아니고, 열 명이 아니고, 삼천구백 명. 전국에서 제주 사람 삼천구백여 명이 그렇게 사라졌다. 행방불명자묘비 사이 기념비석에는 그들이 형무소에서 집으로 보내왔던 편지의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이 편지를 받아보신 즉시 답장하여 주시고 종종 편지하여 주십시오’, ‘사랑하는 옥녀야 나는 네 생각만 나고 있다’, ‘매형에게 부탁하였으니 소와 말을 잘 관리하여 주기를 부탁합니다’ 글귀 앞에서 나는 그들이 편지를 쓸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들이 죽을 거라는 것을 알았을까, 몰랐을까, 헤아려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서울에서 진행된 수업 말미에 김종민 선생님은 이런 말을 했다. 많은 사람이 제주로 이주를 꿈꾸고, 제주가 아름답다고 한다. 당시 열 살 소년이 칠십 년이 지나 지금은 여든이 되었다. 가족을 잃은 일고여덟 꼬마가 끈질기게 살아남아 자식을 낳고 폐허가 된 마을을 일으켰다. 아름다운 제주를 만들어냈다. 4·3은 참혹했지만 그 극복의 역사는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그날 오후 우리가 걸었던 북촌리가 그랬다. 오백여명의 사람들이 하룻밤사이 학교 운동장에서 사살됐고, 한때는 남자가 없어 무남(無男)촌이라 불리기도 했던 마을. 북촌리 우리가 걷던 길에는 4·3유적지 표식과 올레길 표식이 함께 걸려 있었다. 때마침 흔치 않게 날씨마저 좋아서, 그 길을 걸으며 마음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었다. 사람들 사이 조금씩 대화가 오갔고, 표정이 밝아졌고, 웃음을 터트리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제주 북촌4·3길에서 찍은 하늘. 4·3 사건 당시 마을 주민 300여명이 학살 당했지만 이후 주민들은 다시 마을을 재건했다.

      <제주 북촌4·3길에서 찍은 하늘. 4·3 사건 당시 마을 주민 300여명이 학살 당했지만 이후 주민들은 다시 마을을 재건했다. ⓒ강은주>

       

      영화 <지슬>의 촬영지이기도 한 동광리 큰넓궤는 몇 년 전부터 출입이 통제돼 있었고, 허가가 쉽지 않다고 했다. 만약 큰넓궤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나는 4·3을 희생자가 아주 많은 끔찍한 사건으로만 기억했을 것이다. 안내를 맡아준 한상희 제주교육청 4·3담당 장학사는 우리더러 무등이왓 마을 사람들이라고 했다. 초토화작전으로 마을을 잃고 큰넓궤에 은신해 지낸 무등이왓 마을 사람의 역할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한상희 장학사는 등장부터 떠들썩했고, 우리에게 역할을 주고 난 뒤에는 이제 토벌대에게 쫓기고 있으니 빨리 빨리 움직여라, 우리는 다시 나와서 마을을 재건할 거다, 죽으려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살려고 들어가는 거다, 마을 이장처럼 우리를 이끌었다. 그래서 나는, 아마 모두 그 역할에 충실했던 것 같다. 궤는 입구가 너무 좁아서 시작부터 포기하는 사람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입구를 지나자마자 통로는 점점 더 좁아져서, 엉금엉금 기어가다 곧 납작하게 엎드려야 했다. 어두워서 손전등을 비춰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고, 앞을 보려고 고개를 들면 천장에 머리를 부딪히기 일쑤였다. 헬멧을 쓰지 않았다면 머리를 다쳤을지도 모른다. 새어들어오는 빛조차 없었다. 이유나 원리는 모르겠는데, 한두 사람 뒤에서 혹은 앞에서 불빛을 비춰줄 때가 가장 잘 보였고, 우리는 서로의 빛에 의지해 이동했다. 중간에 내가 우비에 발이 걸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바람에 앞 사람과 거리가 생겼다. 뒤에서 불빛을 비쳐주어도 앞은 어둡기만 할 뿐 아무것도 없었다. 불빛과 앞사람이 모두 있어야 했다. 통로가 좁아 앞으로 가려고 몸부림을 칠수록 숨이 막혔고, 그렇다고 옆으로 비켜날 수도 없어서 이때가 가장 막막했다.

       

       동광리 큰넓궤 입구. 참가자들이 헬멧을 쓰고 천천히 동굴 입구로 들어가고 있다.

      <동광리 큰넓궤 입구. 참가자들이 헬멧을 쓰고 천천히 동굴 입구로 들어가고 있다 ⓒ송명진>

       

      포기하고 싶을 때까지 좁은 통로를 기어가니 다리도 허리도 펼 수 있을 정도로 높고 둥근 공간이 나왔다. 한쪽으로 다시 높은 곳에 이층처럼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가 무등이왓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다. 눕는 건 물론 앉기도 어려울 정도로 돌은 뾰족했지만 그래도 궤에서 가장 ‘쾌적한’ 공간이었다. 비교적 돌의 크기가 가장 작아 땅이 평평한 편이었고, 다리를 펴고, 똑바로 앉을 수도 있었고,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마주 앉아 대화도 나눌 수도 있었다. 막상 들어와 보니 상상했던 것처럼 끔찍하다거나 무섭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냥 그때, 사람이 살던 곳이었다. 밥은 어떻게 먹었어요? 누군가 한상희 장학사에게 물었다. 궤 안에서는 불을 피울 수 없어 한 사람이 밖으로 나가 밥을 해 와야 했다. 당번은 진짜 싫겠다, 진짜 무서웠겠다, 생각하는데 한상희 장학사가 말했다. 가족들, 마을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얼른 해가지고 빨리 가야겠다, 그랬겠지요. 뜻밖의 말이었다. 그곳에서 잠시 묵념을 했고, 모든 불빛을 껐을 땐 눈앞이 정말 새까맸다. 여기가 굴이라는 것도 사람들이 옆에 있다는 것도 알아챌 수 없고 모든 게 사라질 만큼 까맸다. 거기서는 낮도 밤이었고, 온종일 밤뿐이었다. 밤만 지속되는 궤에서 두 달이나 사람이 살 수 있었던 건, 같이 있던 마을 사람들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 가족만 됐어도 버티기 어려웠을 텐데, 한 마을이, 세 마을이 같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동광리 큰넓궤 끝. 손전등을 끄고 어둠과 정적이 흐르는 동굴에서 당시 주민들의 삶을 떠올려보았다.

      <동광리 큰넓궤 끝. 손전등을 끄고 어둠과 정적이 흐르는 동굴에서 당시 주민들의 삶을 떠올려보았다 ⓒ 김수안>  

       

      나갈 때는 요령이 생겨서 들어올 때보다 수월했다. 조를 짜서 서로 떨어지지 않게 움직였고, 힘이 들면 같이 쉬었다. 마을 사람들이 밥 기다리고 있는데 이러다가는 전부 굶게 생겼다는 농담도 했다. 기어가는 것도 요령이 생겨서 앞으로만 기지 않고 옆으로도 기었고, 들어갈 때보다 속도가 훨씬 빨랐다. 동굴 입구를 나오면서 우리는 살아남은 사람들처럼 환호했다. 비가 아주 많이 내리는 흐린 날도 아주 밝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우비가 다 찢어지고, 바지도 찢어지고, 신발은 다음날 새로 사야했을 정도로 더러워졌지만 괜찮았다. 비가 너무 많이 오는 탓에 정작 우리 마을인 무등이왓에는 가지 못했지만 점심을 먹는 내내 다들 상기된 표정이었다.

       

      섯알오름에 가서야 잊고 있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무등이왓 마을은 불 타 전부 없어졌고, 궤 안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무등이왓 사람들이 사살된 곳이 섯알오름은 아니었지만, 나는 사람들이 눈앞에서 사살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 같았다. 차례로 줄을 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죽인다. 총살된 사람들은 웅덩이에 무더기로 떨어져 썩어가고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을 하러 왔을 땐 팔, 다리, 머리, 몸통만 따로 있고 온전한 시신이 없다. 신원을 구분할 수 없어 큰 뼈를 대충 수습해 안장한다. 섯알오름과 백조일손지묘. 우리가 지나온 곳 중 사람이 끔찍하게 죽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죽음이 너무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사람이 살고 있던 곳에 있다 왔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4·3의 모든 죽음이 끔찍하고 참담했지만 삶이 있었다는 걸 알고 난 후 목격하는 죽음은 그 무게가 너무 달랐다. 한상희 장학사는 이동하는 동안에도 4·3 이야기,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 이야기, 살아남은 할머니들 이야기, 마을 이야기,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섯알오름에 다녀온 뒤로는 아무 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버스에서 얼른 내리고 싶기만 했다.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비. 해설사는 늘 희생자들의 나이를 눈여겨 보라고 했다. 어린이들도 학살을 피해갈 순 없었다.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비. 해설사는 늘 희생자들의 나이를 눈여겨 보라고 했다. 어린이들도 학살을 피해갈 순 없었다. ⓒ참여연대>

       

      백조일손지묘를 끝으로 기행은 끝났고, 나는 사람들과 헤어져 남은 일정의 숙소인 바다 앞 옛집으로 갔다. 아주 피곤해서 방에 들어가자마자 곯아떨어질 줄 알았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슨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 어딘가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한 번. 어쩌면 두 번쯤, 낮에 헤어진 사람들을 생각했다. 서울로 잘 돌아갔을까. 제주 숙소에 잘 도착했을까. 자고 있나. 그러나 새벽 네 시가 돼 겨우 잠들 때까지 내가 가장 많이 떠올린 건, 밤이라는 글자와 7000명을 인터뷰한 김종민 선생님과 한상희 장학사였다. 그 사람들은 잠이 안 올 때 어떻게 했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아까 한상희 선생님 이야기 귀담아 듣고 많이 웃을 걸 싶기도 했다.

       

      기행을 다녀온 지 보름이 지났다. 누군가 제주에 가 살고 싶으냐고 물으면 이젠 쉽게 대답을 못할 것 같다. 한상희 장학사에게 들었던, 가시리와 신흥리에는 꼭 가볼 생각인데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

       

       제주 4·3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제주4·3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강은주>

       

      끝으로 한 가지 더 고백하자면, 제주기행을 떠나기 전 나는 4·3에 관한 이야기를 써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옛집 방문을 닫고 침대에 누우면서 그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게 뭐냐 하면. 나는 4·3 이야기를 쓰지 않기로 백기까지 들고 손을 떼려는데, 칠십 년 전에 벌어진 일이 그때는 살지도 않고 우리 가족 누구도 겪지 않은 그 일이, 왜 며칠 전 나한테 일어난 일처럼 여겨지는 건지. 왜 나를 휩쓸고 지나가지 않고 계속 나를 휘감고 있는 건지. 이런 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람들과 말해보고 싶다.

    • [후기] 4/16 제주 4·3 바람이 분다(2) - 국제법으로 본 제주 4·3

      2018.4.28 개똥이 [제주 4·3 70년 역사기행] 제주 4·3 바람이 분다

      제주 4·3 특강 2회차에는 이재승 교수님이 '국제법'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제주 4·3사건을 해석해주셨습니다.

      1회차 강의를 해주셨던 김종민 위원장님의 시각과 많이 달라서 인상깊었어요. 

      강의 자료와 내용을 같이 정리했습니다 :)

       

      1) 제주 4·3사건은 국제법적 책임이 존재한다.

      "국내에서 일어난 문제인데 왜 국제법으로 본다고 하는 걸까?"

      강의 제목을 봤을 때부터 조금 의아했던 부분입니다. 시작부터 이 점을 짚어주셨는데요, 제주 4·3사건은 군대가 동원되어 대략 3만명에 이르는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기 때문에 국가폭력의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이 때 책임과 문제해결에 관한 국제적 기준존재하기 때문에 '국제법'으로 해석이 가능하며, 국제법은 단순히 국가 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국가와 해당 국가 국민 간의 권리도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국제법적 근거]

      국제인도법/전쟁법 - 집단살해, 전쟁범죄, 침략범죄, 인도에 반한 범죄를 규정

      반보벤-바시오우니 원칙(피해자 권리장전)

      불처벌투쟁원칙 

      국가책임법(2001) (- 관습의 조문화) 

       

      위에서 열거한 법이나 스피치액트는 국가에 의해 자행된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해 국가책임을 물을 수 있는 관습법으로서 존재합니다.

      즉, 연성법(Soft Law)으로 직접적인 법적 권위(근거)로서 활용되지는 못하지만 입법이나 결정에서 국제관습이나 관례로 원용될 여지는 있는 것이죠. 구속력은 없지만 진실 규명과 과거 청산에 관한 기준과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2) 제주 4·3사건은 미국의 책임도 있다.

      1948년 당시 미국이 남쪽을 분할 통치하는 가운데 미국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 따라 자주권을 침해당했기 때문입니다. 점령체제 아래의 미군정은 공산당불법화(규정), 정당등록규칙, 군정위반죄 등을 만들었습니다. 

      점령체제 하에서는 민족자결의 원칙을 침해하지 않도록 점령 국가가 [중립성, 점령지주민의 이익, 잠정성]을 지켜야 합니다. 

      중립성은 정치적 역학관계에 개입하지 않는 것으로, 특히 정당등록규칙은 미군정의 좌익 통제를 의도한 규칙이므로 중립성 원칙에 위배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3) 이러한 맥락에서는 제주 4·3사건을 '항쟁'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제주 4·3사건을 두고 아직 이 사건을 어떻게 정의해야할 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지난주 김종민 위원장님은 항쟁으로 볼 수 없다고 잘라 말하셨는데, 이재승 교수님은 당시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본다면 이를 '항쟁'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미군정의 통치 아래 주권을 침해받은 상황에서 미군정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들을 천천히 서울에서부터 진압해나갔습니다. 특히 제주 4·3사건이 일어날 당시에는 헌법(1948.7.17)에 제정되기 전이었고 미군정이 만든 '국방경비법'을 적용해 군사재판을 진행했습니다. 제대로 공포된 적도 없는 이 법 조항들을 날림으로 만든 것은 당시 미군정이 즉결처형할 권리를 마음대로 규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미군정의 개입에 대한 반발이 전국적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그 마지막이 제주 4·3사건이라고 평가한다면 '항쟁'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4) 국제법적으로 제주 4·3사건의 해결은 어떻게 해야할까?

      국가책임법의 초안에는 피해자의 권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진실과 정의, 피해회복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이중 피해회복에 대한 권리는 피해자의 만족을 비롯해 원상회복, 금전배상, 재활조치와 재발방지를 보증하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피해자에게 '만족'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명시하고 위반의 인정, 유감의 표시, 공식사과 등의 방식이 있다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점이 새로웠습니다. 

       

      교수님이 중요하게 짚고 넘어간 것은 '재발방지의 보증'인데요.

      이 조치에는 악법의 개폐도 포함됩니다. 

      지난 2000년, 제주 4·3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었던 것은 진상규명운동과 함께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뤄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특별법도 사건의 국가적 책임을 인정만 했을 뿐, 2007년 개정한 뒤에도 피해자 지원과 보상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물론 특별법 제정으로 인해 도민 전체의 명예회복이 이뤄진 점은 짚고 넘어가야겠지만, 지난 강의 때도 지적됐던 것처럼 아직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도 꽤 많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국가 폭력으로 인한 피해는 '완전한 해결'이나 '최종 해결'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시며, 애초에 발생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고 지적했던 부분이 인상깊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피해자'의 범위가 어떻게든 제한이 될 수밖에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간접 피해자도 있고, 보상을 인지하지 못하는 등의 사례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혹은 보상 당시에는 몰랐는데 후유증이 심각하다던가 하는 등의.. 정말 애초에 발생하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5) 다른 나라는 어떻게 처벌&보상 했을까? 

      독일/한국/아르헨티나를 대표적으로 비교했습니다. 

      독일의 경우 패전국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전범과 나치 처벌이 강제성이 있어 쉬웠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와 아르헨티나는 주체적으로 과거청산을 추진했다는 점이 과거청산을 어렵게 만든 원인이었다고 해요.

      교수님은 아르헨티나의 과거청산을 선례로 꼽았는데, 아르헨티나 또한 1986년부터 청산 작업을 진행하다 중단이 됐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다시 재개되어 완료됐다는 점에서 우리가 참고할 만하다고 평가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86년 청산작업을 시작해 2011년까지 군경 259명을 처벌했습니다. '비뇨데'라는 독재자를 처벌하는 데 성공하면서 청산작업이 본격화했고, 인권침해 관여자를 사면해주는 사면법을 폐기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독일의 경우는 다들 아시는 것처럼 전범을 '발본색원'하는 데 충실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데, 20년이 넘도록 전범을 추적하고, 행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고 방조했더라도 유죄를 선고해 엄격한 기준을 세워 적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억책임미래재단법'을 제정해 역사를 기억하고 다시 인권이 침해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적극적인 조치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 이런 사례들로 살펴봤을 때, 아직 제주 4·3사건의 경우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아직 피해 규모가 제대로 밝혀지지도 않았고, 연좌제 피해 등을 어떻게 보상해야할 지도 논의가 필요합니다. 현재 공동체배상에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제주도의 경우 마을 단위의 피해가 행정구역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마을에 대한 지원으로 마을이 복구될 수 있는가 등등의 문제도 있어서 복잡한 사안인 것 같습니다. 그 뿐아니라 당시 군사재판의 피해자들 중에는 판결문이 없어 재심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어 군사재판의 무효화조치가 꼭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제주 4·3 사건에 대한 추가 진상조사와 사건에 대한 정의가 문제 해결의 시작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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