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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자 김만권과 함께 읽는 어려운 책 1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소개
소비사회에서 강요되는 노동윤리. 이질적인 노동과 소비 사이에 숨어 있는 동질성. 강요된 노동이 우리를 어떻게 병들게 만드는지, 어떻게 비정치적인 존재로 만드는지,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함께 읽으며 살펴봅니다.
이 강좌는 혼자서는 읽기 어려운 책 한 권을 선정해, 정치철학자 김만권 선생님과 함께 읽고 살펴보는 시리즈입니다. 가급적 책을 읽어오시기 바랍니다. 해당 주제에 대한 특강과 참여자들의 소감 나눔 및 자유로운 질의 응답으로 진행합니다.
일정
날짜 |
주제 |
11.05 |
1장. 인간의 조건 |
11.12 |
2장. 공적영역과 사적영역 |
11.19 |
3장. 노동 |
11.26 |
4장. 작업 |
12.03 |
5장 행위 |
12.10 |
6장. 활동적인 삶과 근대 |
강사 소개
김만권
모두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공적 세계를 짓는 일이 정치와 철학이 할 일이라고 생각하며, 시민들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함께 말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 거리 위의 정치철학자다. 특히 청년세대가 겪는 문제들에 관심이 많다.
그동안 쓴 책으로는 책으로는 <김만권의 정치에 반하다> <호모 저스티스> <자유주의에 관한 짧은 에세이들> <불평등의 패러독스> <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참여의 희망> <정치가 떠난 자리> 등이 있으며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 <인민>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강좌 정보
일 시 : 2018. 11. 5. ~ 12. 10. 월요일 오후 7시 ~ 9시 30분 총6회
장 소 :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
참가비 : 10만원(참여연대 1만원 이상 후원회원 30% 할인, 청년학생회원 50% 할인)
* 20대 청년회원(직장인 제외)은 해당 강좌에 한해 50%를 할인해 드립니다. 카드결제 시 50%할인액이 적용되지 않으니 계좌이체(하나은행 162-054331-00805 참여연대)를 부탁드립니다.
※ 강좌할인 및 취소환불 규정은 수강신청안내(클릭)를 꼭 확인하세요.
후기 3
[후기] 11/19 철학자 김만권과 함께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읽기_두 번째 강의 3장. 노동
생소한 개념으로 가득차 있어 읽고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는 않지만 김만권 선생님의 열정 넘치는 강의와 수강생들의 향학열이 어우러져 겨울밤을 빛내고 있는 11월 19일 월요일 밤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훑어나가는 세 번째 시간이 펼쳐졌습니다. 제3장의 주제는 첫머리에 밝히고 있듯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 비판으로 요약하자면 근대세계에 내재된 심각한 문제는 노동과 작업의 구분이 없어졌다는 것과 존 로크, 아담 스미스, 칼 마르크스와 같은 석학들조차 이 두 용어를 동일한 것으로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 근대 : 지적 노동이든 육체노동이든 둘다 노동이고, 유용하다는 것을 기준으로 노동을 평가하기 때문에 지적 작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사회에 도움이 되는 서비스를 제공해야하며 그렇게 해서 수입을 얻는다. 생활의 필요로부터 해방된 상태에서 종사하는 활동과는 다르다. 결국 근대에는 공적 영역의 활동이 의미를 잃어버리고 모든 인간의 행위를 노동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기에 이르렀다. |
큰 차이가 없어보이는 노동과 작업의 구별은 저자인 한나 아렌트조차 생소하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이 구별이 의미가 있음을 뒷받침하는 현상적 증가가 많다고 주장을 하면서 로크의 표현을 빌려 신진대사를 중심으로 하는 생명유지 활동으로서 소비와 필연적으로 연계되는 우리 신체의 노동과 창조적 성격을 띠며 세계성을 지니고 있는 활동인 우리 손의 작업으로 설명합니다.
· 작업으로 만들어진 사물 : 세계안에서 고유한 장소를 점하고, 내구성을 지니며, 인간이 보기에 명확한 기능을 갖고 있는 물건 ↕ · 노동으로 만들어 낸 것 : 인간의 생명 유지에 직접 필요한 먹을 것처럼 금방 소비되는 물건, 간단하게 대체될 수 있는 물건 |
고대 폴리스에서는 노동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노동은 사적 영역에서 ‘집’에 얽매여 있던 노예의 행위이고, ‘작업’은 공적 영역의 내부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작업인’의 행위였다고 대비하고 있는데, 다만 시민이 ‘노동’에 종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까닭은 그것이 노예가 하는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 유지 행위인 ‘노동’에서 해방되기 위함이라고 아렌트는 주장합니다.
다음으로 생명(생명유지)과 노동을 살펴보면 우선 모든 구체적인 사물 가운데 가장 지속적이지 못한 것은 생명의 과정 자체를 위해 필요한 것들로서 그것들은 생산되자마자 거의 소비되어버리는 일시성을 가지고 있는데 탄생과 죽음 사이의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종에 있어서는 순환적 성격을 개인에게는 직선적이라는 특징을 지닙니다, 원래 시작과 끝이라는 두 개의 근본사건에 의해 제약받을 수 밖에 없는 생명은 엄격히 직선운동을 따르기는 하지만 이 운동은 자연의 주기적 운동을 영원히 담지하는 생물학적 생명의 원동력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은 언제나 똑같은 순환 속에서 움직이면서 그 안의 ‘노고와 고통’은 유기체가 죽어야만 끝이 나는데 이 순환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소비가 필요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명유지의 관점에서 노동과 소비는 우리의 욕망과 관련되어 물질을 파괴하여 게걸스럽게 삼키는 과정으로 특히 아렌트에게 노동은 어떤 생산적 측면도 갖지 않는 대상입니다. 하지만 로크 이래 아담 스미스를 거쳐 마르크스에 이르러 노동은 인간활동 중 최고이자 가장 상위의 지위로 갑작스럽고도 눈부시게 상승하게 되며 생산성의 원천이자 인간성의 표현 그 자체가 됩니다. 그리고 노동도구 엄청난 개선을 통해 이전의 그 어떤 시기보다도 노동이 훨씬 용이하게 되었고 필요에 종속되는 조건이 생생하게 드러나지 않게되므로써 노동과 작업의 구분이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인간 삶으로부터 필요와 필연성에 예속되는 존재의 조건을 제거하지는 못했다는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by 민동섭 자원활동가
[후기] 11/12 정치철학자 김만권과 함께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읽기_두 번째 강의 2장. 공론영역과 사적영역
첫시간의 후기에도 드러나있듯 난해한 글을 더욱 미로로 빠지게 하는 번역 때문에 다가가기 어려운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의 주요 부분을 정리해나가는 김만권 선생님의 두 번째 수업이 지난 12일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제1장 인간의 조건에 이어 책의 순서에 따라 제2장 공론영역과 사적영역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공론영역과 사적영역의 구별은 아렌트 정치철학의 열쇠인데요, 공적 영역이 폴리스의 본질적인 부분인 반면, 사적영역은 폴리스를 뒷받침하는 가족의 영역으로 생명 유지를 위한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근대 자유주의도 공·사 이분법에 기초하여 인민의 합의로 성립한 통치에 속해야 할 영역과 개인이 자기 생각대로 행동을 해도 좋은 영역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사고방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근대에는 누구나 간섭받지 않는 사적영역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던데 비해, 고대 폴리스에서는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적 영역이야말로 자유롭다고 생각한 점이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공적인”이라는 용어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나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두 현상을 의미하며 세계가 우리에게 공동의 것이고 우리의 사적 소유지와 구별되는 세계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대중사회를 사는 우리들이 견디기 힘든 것은 인간이 집단적으로 외로워지는 현상때문이며 이러한 현상에서 자신이 속할 공간을 만들어줄 강력한 권력을 갈망하는 나치즘과 같은 비극이 비롯되기도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비해 “사적인”은 본래 ‘박탈된’이라는 의미를 지니는데 여기서 완전히 사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은 우선 진정한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이 박탈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사적 소유는 자신만의 삶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참여하는 세계에 들어가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와 더불어 각자가 정치적 삶을 살아가는데 재산을 사용하지 않고 재산을 늘리려고만 하면 자유를 희생하고 필연적으로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다는 뜻을 동시에 가집니다. 여기서 아렌트는 토지나 가옥 등 개인에게 속하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는 재산(property)과 단순한 소비대상인 부(wealth)를 구별하는데 사적 소유가 한 인간이 정치적 존재가 되는데 필요한 요소로 보고 있습니다.
한편 사적 소유가 사적인 돌봄의 대상에서 공적인 관심사로 변형되었을 때 사회적인 것이 나타납니다. 사
회는 근대의 출현과 더불어 나타난 현상으로 재산소유주의 조직체로 처음 공적영역에 등장하는데 소유주들이 공론영역에 자신들의 부를 보호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경계가 불분명해졌고 결국 공사 영역 구분의 경계가 사라져버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조건에 나오는 개념을 다른 학자들의 주장과 겹쳐보며 비교해보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오늘은 다른 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통제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권력을 살펴보았는데 권력행사의 방법, 권력의 본질과 폭력과의 관계, 권력을 창출하는 지식의 힘 그리고 시대에 맞는 권력의 개념과 지향 방향 등을 마키아벨리, 홉스 등의 논의에 비추어 정리해보았습니다.
설립 초기 삼류대학으로 평가받던 미국의 시카고대학은 제5대 총장 로버트 허친스가 총장으로 부임하여 존 스튜어트 밀의 독서방법에서 착안한 고전 100권 읽기 계획을 시행하면서 지금과 같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존 스튜어트 밀의 독서법은 쉽게 쓰여진 책을 읽는다(저자나 책에 대해 설명된 책 읽기), 통독(그냥 읽기), 정독 및 필사의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한나 아렌트의 책은 쉽게 쓰여진 책은 아니지만 김만권 선생님의 친절한 해설이 곁들여지는 아카데미느티나무수업은 고전 읽기의 1~2단계를 한꺼번에 실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앞으로도 계속될 고전 읽기 강의에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작성 : 민동섭 자원활동가
[후기] 11/5 정치철학자 김만권과 함께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읽기_첫 번째 강의) 1장. 인간의 조건
후기를 작성하기에 앞서, 이 후기는 ‘아, 나는 한국어를 잘 못하는 사람인가?’라는 회의를 느끼면서 <인간의 조건>을 읽은 사람이 썼다는 말씀 올립니다.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이해한 만큼 이해한대로 적었습니다. 책과 강의를 제 이야기로 바꾸어 썼습니다. 바로 잡아야 하는 부분에 대한 의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치철학자 김만권과 함께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읽기’의 첫 강의 <1장. 인간의 조건>은 11월 5일 (월) 19시 ~ 21시 30분에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에서 열렸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철학에 관해 소개하고 ‘왜 책이 어려운지’를 설명하며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아렌트의 이야기는 ‘독자가 보기에 일관성이 없어서’ 어렵다고 합니다. 앞의 이야기에서는 ‘~는 ~하다.’라고 말하고는 뒤의 이야기에서는 ‘~는 ~하지 않다.’라고 할 때가 있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고 합니다.
(한국어인데도 이해를 못해서 자괴감을 느꼈는데, 다행스러웠습니다.^^)
‘한나 아렌트’라는 사람
아렌트는 좋은 설명을 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좋은 질문을 제시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의 이야기를 분석하기보다는 그의 질문과 시각, 설득방식에 주목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조건>의 서문은 각 장을 충분히 읽은 후에 다시 읽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아렌트는 독일에서 태어난 유태인으로 근대성의 병폐(전체주의, 정치의 상실)에 관한 연구로 이름을 알린 정치이론가입니다. 급진적 악을 다룬 <전체주의의 기원>을 내면서 유명해졌는데, <전체주의의 기원>은 <인간의 조건>, <혁명론>과 함께 아렌트의 주요 3부작으로 꼽힙니다. 이외에도 본인 철학의 개념을 다룬 <과거와 미래 사이>, -그나마(?)- 가장 쉽다고 알려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가 있습니다.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그가 이야기한 ‘악’에 대한 관점은 그의 스승인 야스퍼스가 ‘악을 그렇게 정말 크고 엄청난 것이라고 하면, 마치 그 악이 신처럼 보일 수 있다.’라고 비판했다고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사제관계와는 조금 다른, 학문적 동료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괴니히스베르크-칸트가 평생을 지낸-에서 태어난 아렌트는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하이데거의 지도를 받았으나, 하이델베르크로 옮겨 야스퍼스의 지도로 박사학위(사랑과 아우구스티누스, 1929)를 받습니다. 하지만,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독일에서 교수 자격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1933년에는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으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곧 풀려났고, 프랑스에 머물던 1941년에는 나치수용소에 끌려가기도 했으나 탈출에 성공하여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이러한 삶의 영향인지, 아렌트는 ‘삶을 둘러싼 구조보다 행위를 강조’했다고 합니다.
(나치로부터 두 번이나 탈출하다니 대단한 사람.)
<인간의 조건>과 그 배경
<인간의 조건>은 그 제목과 달리, 제한된 실존조건에서의 인간의 활동과 그 활동들의 관계에 관한 탐구이며, 그 관계의 문제가 인간 삶의 다른 방식을 만들어냄을 알리고 있는 내용으로, 인간의 조건에 대해 진지한 탐구를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렌트는 이 책을 Vita Activa(=활동적인 삶) 혹은 Amor Mundi(Love of the world)라 불러주길 원했는데, 이는 이 책이 인간의 조건을 탐구하는 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목을 믿고 ‘인간의 조건’이 언제 나오는지 찾으면서 읽으면, 끝까지 그 내용은 찾을 수 없다. 제목이 낚시(?)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을 탐구하기보다는 다양한 인간의 조건 중 인간이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생명, 세계성, 다원성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이미 전제하고 그에 따른 활동의 본질이 무엇인지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 기본적인 조건 세 가지는 이에 따른 활동 세 가지로 연결되는데 ‘노동, 작업, 행위’입니다. 원래 이 활동은 ‘행위>작업>노동’의 위계가 있었는데, 근대에 이르러 위계가 뒤집히면서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인간이 삶을 사는 데 주어진 세 가지 조건은 그 자체가 곧 제약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조건은 인간의 본성과 다르고, 또한 그 조건에 따른 인간 활동(행위, 작업, 노동)과 –활동을 해내는- 능력의 합이 인간의 본성을 구성하는 것도 아닙니다. 덧붙이면, 근대의 전체주의는 여기에서 말하는 인간(유대인)의 본성(=자발성)을 급진적 악(=수용소)을 통해 깨뜨려버립니다.
(이해한대로, 이해한 만큼 적어서 이렇습니다...)
활동적 삶과 인간의 조건
활동적 삶은 ‘노동, 작업, 행위’라는 세 가지 근본활동을 담고 있습니다. 이 활동은 인간이 사는 데 주어진 기본조건(생명, 세계성, 다원성)에 따르는 것입니다.
각 활동에 관해 살펴보면,
노동은 인간 신체의 생물학적 과정에 상응하는 활동입니다. 인간이 먹고 사는 것은 일을 해서 얻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노동이 이루어질 수 있는 근본조건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노동은 생명 때문에 하는 것이다.’라고 이해했습니다. 노동을 정글의 법칙에 나오는 물고기 잡기로 읽었습니다.)
작업은 인간실존의 비자연적인 것에 상응하는 활동입니다. 작업을 통해 자연환경과 구별되는 인간이 만든(natural이 아닌 artificial) 인공적인 것(제도, 법률, 국가 등)이 만들어집니다. 이것은 개인의 생명보다 오래 살아남습니다. 작업의 인간조건은 세계성입니다.
(‘작업은 인간이 만든 메시지(?)다.’라고 이해했습니다. 작업을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로 읽었습니다.)
행위는 사물이나 물질 없이 인간 사이에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활동입니다. 행위의 인간조건은 다원성입니다. “우리가 알기에 가장 정치적이었던 로마인의 언어에서 ‘살다’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다’는 말, ‘죽다’는 ‘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행위는 정치활동이다.’라고 이해했습니다. 행위를 창당(?)으로 읽기로 했습니다.)
“세 가지의 활동과 상응하는 조건 모두 인간 실존의 가장 일반적인 조건, 탄생성과 사멸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방인으로서 세상에 태어나는 새로운 손님의 항상적인 유입을 위해 세계를 마련하고 보존하는 그리고 이 유입을 예견하고 생각해야 하는 과제를 갖는 한, 노동과 작업은 탄생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대한민국에 태어나는 아이를 위해서, 기존 사회구성원은 분유 값과 기저귀 값, 교육비를 벌고(=노동),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다양한 제도와 정책을 만듭니다(=작업).)
“세 가지 행위 중에서 행위는 탄성성의 조건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출생에 내재하는 새로운 시작은 새로 오는 자가 어떤 것을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때만 생각할 수 있다.”
“ 이러한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행위의 요소, 즉 탄생성의 요소는 모든 인간활동에 내재한다.”
(...)
활동적 삶이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생계에서 벗어난, 더 나아가 도구를 만드는 삶과 탐욕적 살멩서 벗어난, 세 가지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1) 아름다운 것이 주어진대로 소비되는 육체적 쾌락을 향유하는 삶 (개인의 영역)
2) 폴리스에서 탁월함을 발휘하며 정체(정치?)에 관여하는 삶 (=행위하는 삶)
3) 영원한 것의 탐구와 관조에 바쳐지는 철학적 삶 (플라톤 이후 최고로 치는 삶)
(‘먹고 살기 충분한 사람들의 생각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활동적 삶은 중세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서의 ‘정치적 삶’의 표준적 번역어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나타납니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삶’은 명백한 행위를 강조하는 정치적 인간사의 영역만을 지시합니다.
노동과 작업은 자율적이고 참된 인간 삶의 방식인 비오스(bios)를 구성하기에 충분한 품위를 갖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필요와 욕구에 구속되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부지런히 움직이는 몸-노예의 역할-에 대한 경멸...(=사유할 수 없는 삶))
폴리스의 삶은 자유롭게 선택한 정치적 조직의 형식을 가리켰는데, 고대 도시국가가 몰락하면서 활동적 삶이라는 용어는 그것의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상실하고 모든 종류의 세상사로의 참여를 의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노동, 작업도 활동적 삶이라는 용어에 담김). 그러나 작업과 노동이 인간활동의 위계에서 부상하여 정치적 삶과 동일한 존엄성을 가진다는 뜻은 아닙니다.(위계는 ‘행위>작업>노동’ 순)
활동적 삶의 경쟁자: 관조적 삶
“행위를 포함한 모든 다른 활동보다 관조가 단연코 우월하다.”
플라톤, “폴리스의 삶을 완전히 이상적으로 재조직하는 것은 철학자의 탁월한 통찰에 지도받아야 하는 동시에 그것은 철학자의 삶의 방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목적도 갖지 않아야 한다.”
(무언가 대단한 선민의식 같다고 느꼈습니다.)
아렌트, “전통적 위계에서 관조에 지나친 무게를 두는 것이, ‘활동적 삶’ 그 자체 내의 구별과 명료성을 흐릿하게 하며, 겉보기와는 달리 이 조건(활동적 삶)은 근대의 ‘전통과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마르크스와 니체의 종국적인 전통 위계질서의 전복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행위>작업>노동’이라는 위계는 여전하다.)
“내가 활동적 삶이라는 용어를 쓸 때, 이 활동 모두의 근저에 놓여있는 관심은 관조적 삶이라는 하나의 포괄적 원리를 지향하는 관심과 동일하지 않으며, 동시에 이 활동적 삶이 관조적 삶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지도 않음을 전제한다.”
영원성과 불멸성
불멸성
생물학적으로 사멸하는 인간은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남겨 불멸하고자 하고 이런 일은 기억되는 역사를 만드는 행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활동적 삶에서 행위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어떤 유명 만화에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사람들에게서 잊혀질 때다.”라는 명대사가 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영원성
관조적 삶은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영원한 것, 바로 진리와 함께하는 삶입니다. 플라톤은 이 영원성이 폴리스를 지배했던 원리를 대체할, 더 높은 원리의 근원이라고 보았습니다. 아렌트는 이것에 관심이 없던 것이고요.
정리 : 이남수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