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정보
강좌 소개
4・27 남북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 6・12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이 오고 있습니다. 휴전선을 경계로 정치・군사적으로 극한의 대결상대였던 북한이 이제는 평화로운 민족공동체 형성하기 위한 협력의 동반자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남과 북이 협력의 시대를 열어가는 2018년, 우리는 북한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한반도에 평화의 기반을 조성하고 통일을 완성하려면 그 상대편인 북한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하고’ ‘불가사의’한 나라로 여겨졌던 북한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북한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강의 일정
일정 |
주제 |
강사 |
11/01 |
북한 체제의 기원 - 인민 위의 계급, 계급 위의 국가 |
김재웅 |
11/08 |
북한 무력의 기원 - 조선인민군 창설 |
김선호 |
11/15 |
북한 경제의 기원 - ‘자력갱생’ 경제의 형성 |
조수룡 |
11/22 |
북한 사회문화의 기원 - 사회주의적 선전선동정치 |
박창희 |
공동기획 한국역사연구회 스타트업사업단,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강사 소개 (강의 순)
김재웅 경희대학교 한국현대사연구원 연구교수. 알려지지 않은 일반 대중들의 관점을 통하여 북한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한 공산주의자의 기록을 통해 본 한국전쟁 발발 전후의 북한」(2008), 「여성·어린이·섹스를 통해 본 해방 후 북한의 가족문화」(2014), 「미국의 대북 첩보활동과 소련의 38선 봉쇄 ― 남북 분단체제 형성을 촉진한 1946년 미소 갈등」(2015), 「북한의 38선 월경 통제와 월남 월북의 양상」(2016) 등이 있다
김선호 인천가톨릭대학교 강사. 북한사, 냉전사, 한국전쟁사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1945~1947년 북중관계의 형성과 북중혈맹의 근원」(2017), 「한국전쟁기 조선인민군의 재편과 북한 중국 소련의 이견과 조율」(2018) 등이 있다.
조수룡 서울여자대학교 강사. 주로 북한에서 나타난 냉전의 양상과 근대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전후 북한에서의 소련계 숙청과 국적문제 1954~1958」 등이 있다.
박창희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분과에서 활동하고 있다. 강릉원주대 사학과와 한국방송통신대에서 한국사 관련 강의를 하였다. 북한의 사회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사회주의적 선전선동체계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주요 연구로는 「정전 후 북한 노동자 조직의 성격 변화 - 1953~1958년을 중심으로」(2009) 등이 있다.
강좌 정보
일 시 : 2017. 11. 1. ~ 11. 22. 목요일 19:00 ~ 21:30, 총4회
장 소 : 참여연대 지하 아름드리홀
수강료 : 6만원(참여연대 1만원 이상 후원회원 30% 할인)
※ 강좌할인 및 취소환불 규정은 수강신청안내(클릭)를 꼭 확인하세요.
후기 3
[후기] 11/15(목) 북한 경제 구조의 기원 - '자력갱생' 경제의 형성/ 김상헌 자원활동가
이제는 말할 수 있는 북한 역사의 비밀 세번째 강의
- 북한 경제구조의 기원 - '자력갱생’ 경제의 형성
#1. 들어가기에 앞서
이번 강좌를 맡아주신 조수룡 강사님은 18년도 1학기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따끈따끈한 박사라고 자신을 소개하셨다. 이 따끈따끈하신 박사님은 이 북한강좌 홍보 게시물에 달린 따끈따끈한 댓글들도 정독하고 오셨나보다. 강사님은 이 댓글에서 상식적인 부분에서조차 엇갈릴 수밖에 없는 북한을 대하는 우리의 민낯이 보인다고 하셨다. 약간은 흥분한 듯한 어조 속에서 북한사학자들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편견들에 대한 설움이 살짝 읽혔다면 나의 착각일까.
어쨌든, 폭발적인 댓글이 보여주듯 모두가 관심은 있지만 진실을 알 수 없는 국가가 북한이다. 이번 강좌는 진실에 그나마 근접할 수 있는 지표 중 하나인 경제를 들여다보는 강좌였다. 특히 공산권 진영과 구 자유주의 진영이 가장 극명하게 대조되는 부분이 경제분야이기도 하기에 남한과 북한의 차이를 들여다보기에는 제격이었다.
#2. ‘고난의 행군’과 ‘자력갱생’
강사님은 북한 경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90년 대 말에 있었던 아주 중요한 경제난인 ‘고난의 행군’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고난의 행군’은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북한이 경험한 경제난이다. 이 경제난의 원인으로 다양한 것들(미국 경제 제재, 경제정책 실패, 흉작 등)이 지목됐으나, 내부적 문제라기보다는 외부적 요인, 즉 사회주의 붕괴가 원인이라는 것이 강사님의 의견이다. 미국 경제제재나 흉작 등은 언제나 있어왔던 것이기 때문에 결정적 원인으로 지목하긴 힘들다고.
이 ‘고난의 행군’은 북한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대표적으로는 북한의 시장화를 꼽을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가장 큰 차이점은 과잉생산이냐 부족생산이냐이다. 자본주의는 생산의 무정부성이 특징으로 생산에 주체가 없어서 잉여가 무조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반면, 사회주의는 국가가 생산의 주체가 되어 적정량을 생산한다. 다만, 적정량을 생산해도 필연적으로 유통과정에서 유실이 발생할 수밖에 없기에 부족생산현상이 발생한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정부는 부족한 생산량을 넘어 생산의 주체가 될 능력(배급의 능력)을 상실했고 인민들에게 자력으로 생존할 것을 주문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암시장이 발달하게 됐고 이 암시장은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북한 주민의 83퍼센트 정도가 시장에 참여하고 있는 현재, 북한은 공식경제(계획경제)와 비공식경제(암시장)가 사실상 공존하는 이중 경제 구조인데, 북한은 이 암시장을 제도권 내로 수용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계획경제 부문은 협동농장이나 국영 기업소의 형태로 운영되나, 계획 경제 부문의 원료와 자원이 시장으로 유출되고 있다. 결국 시장의 잉여는 일정 부분 국가에 의해 수취되어 계획경제를 보완하고 있다. 강사님에 따르면 이 시장(비공식)경제 분야는 경제제재로 억제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 ‘고난의 행군’ 시기에 등장한 구호가 ‘자력갱생’인데, 인민 개개인이 자신의 삶을 알아서 영위하는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자력갱생’의 구호는 1960년 대 소련의 영향력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립경제를 이루기 위해 김일성이 도입한 구호이다. 하지만 90년 대 사회주의진영이 붕괴하면서 북한 정부는 배급 능력을 상실했고, 위 구호는 각자도생의 구호로 재탄생한다. 이 각자도생의 태도는 시장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4. 대외자립경제의 불가능성
북한은 60년대에는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90년대에는 소련권 붕괴로 인해 대외자립경제를 강조해왔다. 하지만 북한 경제는 그 시작부터 불안정했다. 분단 이전부터 식량자원생산은 남한 지역에 집중돼 있었기에 북한 경제는 식량자급을 한 번도 달성하지 못했다.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으로 인해 상시적으로 안보위기를 경험하고 있었는데, 이는 20% 아래로 떨어진 적 없는 국방예산이 증명한다. 안보위협은 국방예산에의 과도한 투자 말고도 비효율적인 투자를 낳게 됐다. 단적인 예로 북한의 중공업 시설들은 대부분 지하에 위치한다. 이 외에도 동서로 이어지지 않는 철로와 같은 다양한 요인들로 인해 북한 경제는 대외자립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5. 마치며
대외자립경제가 불가능한 북한의 상황과 시장을 적극적으로 육성하는 북한경제의 구조는 현재 북한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 큰 단초를 제공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이 의욕적으로 경제제재 완화를 향해 나아가는 이유는 자립경제가 애초부터 불가능하기 때문이리라.
또한 북한의 경제상황을 들여다보며 생각보다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강사님도 계속해서 북한경제는 우리나라 군대와 많이 닮아있다는 얘기를 하셨다. 확실히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느낄 수 있었다. 북한을 가장 혐오하는 집단인 군대가 북한과 가장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했다. 가장 오랫동안 바뀌지 않았던 집단이어서 그러지 않을까. 어쩌면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의 본질은 어떤 경제체제이냐가 아니라 상명하달 식의 권위주의 체제이지 않을까 싶었다.
/김상헌 자원활동가
[후기] 11/8(목) 이제는 말할 수 있는 북한 역사의 비밀_2강_북한 무력의 기원 /하원배 자원활동가
북한무력의 기원 -조선인민군 창설
1945년 8월에 한국인들은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되었다. 하지만 한반도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38도선을 기준으로 진주함에 따라 해방과 동시에 분할되었고, 1948년에는 남과 북에 각각 단독 정부가 수립되면서 분단체제로 귀결되었다. 북한 무력의 형성과정은 이 같은 단독정부와 분단체제의 수립과정과 직결되어 있다.
조선인민군의 기원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조선의용군과 동북항일연군, 그리고 고려인이 있었다. 조선의용군은 민족주의 좌파 김원봉이 만들었던 조선의용대가 분리되어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던 일부 부대를 제외하고 만들어졌으며, 동북항일연군은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소련군인으로써 활동하던 부대였으며 김일성도 이 부대에서 활동하였다.
마지막으로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이후에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지에 거주하다가 소련군의 지시로 입북한 고려인이 있었다.
조선인민군의 창설과정은 다음과 같다. 해방 후 연합국이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진주하면서 반파시즘에서 진영대결의 방향으로 냉전이 탄생하게 되었다.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가해국인 일본이 아닌 피해국인 한반도가 분할되었으며 서울엔 미군이, 평양엔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연합군을 환영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남한은 영어가 제1외국어로 자리잡게 되었고, 북한은 러시아어가 제1외국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북한에 김일성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1945년 8월에는 보안대가 창설되었다. 이후 12월에 모스크바 3상회의가 열렸으며, 1946년에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지만 결렬되었으며, 이러한 사이를 틈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보안국이 설립되었다. 또한 군사학교인 평양학원과 북조선 중앙보안간부학교가 탄생하였다. 평양학원은 군인들에게 정치교육을 담당하는 정치장교를 양성하고, 고급군사간부를 양성하는 곳이었으며, 북조선중앙보안간부학교는 초급군사간부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1946년 8월에는 육군의 모체인 보안간부훈련소 제1,2,3소가 만들어졌으며, 8월 15일에 군사지휘부인 보안간부훈련대대부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47년 남한에서는 안재홍을 수반으로 한 남조선과도정부가 만들어지고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수반으로 한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창립되었으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기간 중인 5월에 보안간부훈련대대부가 북조선인민집단군총사령부로 개편되었다.
1948년 북한은 군대를 기반으로 정부를 만들기에 이른다. 북한지도부는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을 창설함으로써 남한 국군의 존재를 부정하고 한반도의 유일한 군대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으며, 인민군의 정통성을 김일성의 항일유격대에 부여하였다.
9월 9일에는 북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1948년 12월과 1949년 6월에 각각 소련군과 미군이 한반도에서 공식적으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소련군과 미군은 공통적으로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을 남겨 인민군과 국군을 육성하였다. 그 시점을 전후하여 북한은 무기를 국산화하고 전쟁준비를 하였다.
이듬해인 1949년 3월 소련의 지원으로 이름만 경제문화협정인 조소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하여 군사와 무기에 지원을 약속받는다. 또한 중국의 지원으로 병력을 지원받았으며, 소련군 교범을 번역해 육해공군교범과 공격전용 교범으로 활용한다. 소련과 중국의 지원으로 인민군은 급격히 증강되었으며, 남한에서는 제주4.3사건 진압을 거부한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여순사건으로 대대적인 숙군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숙군의 분위기 속에 국군 내 좌익세력이었던 강표부대와 킴블스마스호가 월북하였다. 인민군의 군사력은 더욱 증강되었으며 전쟁의 길은 다가오고 있었다. 1948년 이후 북한정부는 통일노선으로 국토완전론을 내걸었으며 대한민국정부는 북진통일론을 내걸었다.
분단과 전쟁의 원인으로는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대립이라는 냉전질서와 좌익과 우익의 대립, 남과 북의 대립이 있다. 분단은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중이며, 남한에서도 동서갈등을 비롯한 다양한 갈등이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가 북한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남한 내에서의 갈등도 극복하고 남북한의 평화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가야 한다.
/하원배 자원활동가
[후기] 11/1(목) 이제는 말할 수 있는 북한 역사의 비밀(1강)_북한 체제의 기원 /김상헌 자원활동가
북한 체제의 기원- 인민 위의 계급, 계급 위의 국가(김재웅)
1. 들어가기에 앞서
한국에서 북한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으려면 제법 용기가 필요하다.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과분한 사회적 관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참여연대도 이런 관심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나보다. 보통 활발하지 않은 아카데미 느티나무 페이스북 페이지 댓글 창에 어마어마한 수의 댓글이 달린 것을 보면 말이다. 북한은 언급만으로도 사회적 관심을 끌고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이지만 동시에 알려진 것이 없이 베일에 싸여 있기도 하다. 폭압적인 독재와 비참함이라는 추상적인 이미지만 떠다닐 뿐이다. 그래서인지 6월 남북회담 당시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매우 먼 줄 알았는데 따로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단 것을 생중계로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번 강좌가 반가웠던 이유도 한 번 제대로 알아볼 기회가 있겠구나 싶었다.
드디어 드러나는 참여연대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일부 애국자분들의 기대와는 달리 매우 차분하고 상식적인 역사수업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든지 집에서 열람할 수 있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한 강의였다.
2. 진보적인 개혁과 함께 시작된 북한정권
북한 정권의 시작은 일제 잔재의 청산으로 시작됐다. 항일운동을 하던 인물들을 위주로 구성된 북한정권은 친일청산활동과 더불어 다양한 진보적 정책들을 내놓으며 개혁을 실시한다. 지주계급에게서 토지를 몰수하는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남녀평등권법령 제정 등, 다양한 민주개혁도 이뤄졌다. 내용을 살펴보면 4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상당히 진보적인 정책들도 많았다. 특히 여성들의 자살률이 세계 2위였던 일제강점기를 고려한다면 이런 사회개혁이 민중의 큰 환영을 받았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3. 본격적인 계급투쟁노선과 2차 토지개혁
일제강점기의 지주소작제는 소작농계층을 핍박하는 폐해를 낳기에 토지개혁에 대한 지지도는 높았다. 물론 지주계층의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대다수가 노동자, 소작농이었던 북한의 인구비율상 적극적인 저항은 힘들었다. 또한 본격적으로 계급투쟁노선이 강화되면서 지주들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토지개혁 이후 북한은 본격적으로 계급투쟁노선을 추진하게 된다.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계급투쟁노선을 부과했기 때문이다. 2차 토지개혁은 이런 배경에서 실시된다. 계급투쟁노선은 민족주의 투쟁 노선을 약화시키기 위해 실시됐다. 이후 북한정권은 인민들을 출신성분과 사회성분으로 본격적으로 나누기 시작하며 인민국가의 형식을 띨 뿐인 본격적인 계급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소작농과 노동자들은 이런 계급사회에서 우대받으며 정치적 의사결정을 내리는 고위직으로 진출하게 된다. 과거 지주 계층에게 수탈당했던 경험이 개입되며 지주출신들에 대한 제도적, 법적 차별을 낳게 된다. 2차 토지개혁도 이 경향에서 벗어나지 않아 항일 운동을 했거나 토지를 자진 헌납했던 양심적 지주들마저 2차 토지개혁의 축출 대상이 됐다. 지주 출신들은 저항보다는 월남을 선택했고, 훗날 서북청년단에 가입하여 북한에서 학살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4. 자서전을 통해 보는 북한
현재 북한연구는 6.25 전쟁 당시 미군이 북진하며 노획한 문서들을 바탕으로 진행되고 있다. 미국은 이 문서들을 National Archive에 보관해오고 있다. 북한연구의 메카가 한국이 아니라 미국인 이유다. 노획한 문서들 중에는 특히 자서전이 많았는데, 이를 통해 전쟁 전 북한인민들의 일상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동시에 이 자서전은 인민에 대한 정부의 통제 수단임을 알 수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사상검열이나 출신성분 검토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자서전들은 현재 한국에서도 쉽게 검색해서 찾아볼 수 있다.
다만 한국전쟁 이후의 자료는 상대적으로 적다고 한다. 학술적 자료와 1차 자료가 전전 시기에 비해 부족하므로 역사를 촘촘히 재구성하기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북한 사회가 그만큼 폐쇄적이라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대한민국에서 자료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적다는 얘기로 들리기도 했다.
5. 강좌를 마치며
현재 북한학의 메카는 미국이라는 말이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 북한 정권을 조롱할 의도로 북한의 공식트위터를 리트윗했던 음악인이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됐던 일이 있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자료임에도 시민들이 북한에 대한 지식을 얻기 쉽지 않은 이유는 이와 같은 선례들 때문에 생긴 심리적 요인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신기했던 점은 동아시아 4개 국(중국, 북한, 남한, 일본)중에서 미국을 아름다울 미美로 쓰는 것은 우리나라뿐이란 것이다. 다른 국가는 모두 쌀 미米자를 사용한다. 이런 얘기를 듣고 나니 어딘가 기묘했다. 우리가 얻는 지식과 사용하는 글자에마저 특정한 의도가 들어있다는 얘기니 말이다.
더 이상 북한을 공부할 때 금기의 지식을 얻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기를 바라며 다음 강의들도 기대가 된다.
/김상헌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