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정보
강좌 소개
역사책을 1차 사료[史料]로 직접 읽어본 경험 있으세요? 얼핏 어렵고 딱딱해 보이는 사료 읽기, 하지만 의외로 재미있습니다. 그 시대의 생생한 느낌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료는 역사를 해석하고 또한 상상하도록 만드는 보물창고입니다. 오래된 그것을 오늘 ‘나’의 눈으로 읽기에 다채롭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매력입니다. 이제껏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던 사료와 ‘역사를 한다(doing history)’는 마음가짐으로 ‘톡’한다면 나만의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 강의에서는 강사가 추출한 근대사 사료를 함께 읽고, 강의를 듣는 동시에 참여자들이 각자 해석하고 상상한 역사 이야기를 나눌 예정입니다.
강좌 일정
※ 매회 사료는 강사가 별도 자료로 준비합니다.
강사 소개
김정인 춘천교대에서 사회과교육과 교수. 근현대 민주주의 역사와 현대 대학사를 주로 연구하고 있으며, 동아시아 역사 대화에 관심을 갖고 한중일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다.
현재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100주년기획위원회 위원장과 3.1운동및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기획소통분과위원회 위원장을, 2016년부터 참여연대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 <천도교 근대 민족운동 연구>, <역사전쟁, 과거를 해석하는 싸움>, <대학과 권력>, <오늘과 마주한 3.1운동> 등이 있다.
강좌정보
일 시 : 2019. 11. 12. ~ 12. 10. 화요일 오후7시 ~ 9시30분, 총5회
장 소 :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
수강료 : 8만원
할 인 : 참여연대 1만원 이상 후원회원 30%할인, 20대 청년 50%할인(계좌이체로만 결제 가능)
계 좌 : 하나은행 162-054331-00805 (예금주 참여연대)
※ 강좌할인 및 취소환불 규정은 수강신청안내(클릭)를 꼭 확인하세요.
후기 4
[나의 역사공부 1] 사료와 '톡' 하는 법 - 계몽의 전사, <독립신문>
오늘날 정보를 SNS, 유튜브 등을 통해 접하지만, 이전에 그 역할을 한 건 ‘신문(新聞)’이었습니다. 단순히 사실을 알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렇다면 1890년대 조선의 신문은 어떻게 등장했고, 영향력을 행사 했을까요? 사료와 ‘톡’하다, 네번째 시간은 ‘계몽의 전사, 독립신문’입니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등장한 1896년
독립협회보다 먼저 만들어진 독립신문은 최초의 민영 일간지였습니다. 갑신정변(1884) 실패 후, 김홍집 등 17명을 중심으로 한 군국기무처를 기반으로 갑오개혁(1894)을 추진했습니다. 개화정책을 단행했지만 신임을 얻을 수 없었죠. 갑신정변 후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이 귀국하면서 민중계몽과 개혁정책을 알림으로써 지지를 얻기 위해 ‘독립신문’이 탄생했습니다. 이승만, 윤치호 등 개화파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후 정부의 외세의존정책에 반대,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표방한 독립협회가 세워졌습니다. 초기에는 토론회와 연설회 등 민중계몽운동의 주축이 되었으며, 양성한 활동으로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 이들은 만민공동회를 열어 고종에게 개혁안을 실행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공화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이 정부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유언비어로 인해 해산되었으며, 독립신문은 협회 해산 이후 정부의 탄압과 논조가 바뀌면서 1899년 폐간되었습니다.
순한글 사용, 권리, 그리고 문명화
독립신문은 국문판과 영문판을 내고, 세로쓰기를 하며, 투고를 받는 등 파격적인 구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을 꼽자면, 국문 사용, 권리의 중요성 강조 그리고 문명화 교육으로 볼 수 있죠. 먼저 순한글을 사용함으로써 누구나 신문을 읽기에 수월하고, 신문 속에 있는 말을 자세히 알아보게 했습니다. 독립신문 창간 당시 주시경이 참여했는데, 국문을 통해 만들 수 있게 도왔으며, 띄어쓰기를 강조했으니까요. 권리의 경우 천부인권과 법적인 보호를 강조했습니다. ‘백성마다 얼마큼 하느님이 주신 권리가 있는데, 그 권리는 아무라도 빼앗지 못하는 권리요(이하 생략)’ 부분에서 하느님이 주신 권리, 즉 천부인권을 자각하고, 권리의식이 있어야 더욱 높아질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법으로 보호해야한다는 사실을 나타냈습니다. 마지막으로 문명화는 독립신문이 추구했던 민중계몽과 연관이 있지만, 절충적 요소를 덧붙여 문명을 설명했습니다. 문명이 바라는 시민상을 제기하는 거에 그치지 않고 어떤 세력에 상관없이 공평을 가지고 재판하는 까닭에 압제 받을 필요가 없으며, 무죄추정의 원칙을 서술했습니다. 다만 문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찾기 어렵다는 게 아쉽지만 말이죠.
자발적으로 모여서 비폭력으로 맞선다
독립협회는 크게 3가지 운동을 했습니다. 자주 국권 운동(독립문 건립, 이권 수호운동 전개, 고종의 환궁 요청), 자유 민권 운동(국민 기본권 확보 운동, 의회 설립 운동, 국민 참정 운동), 자강 개혁 운동(국가 재정 일원화 요구)을 말이죠. 다양한 사회운동을 했지만, 자발적 결사체였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전통적 가치와 근대 윤리를 절충해 독립을 기초로 하여 서울이든 지방이든 모든 이의 마음이 모였다는 걸 부각했습니다. 이를 행동으로 나타난 게 만민공동회(1898)입니다. 당시 러시아는 재정장악과 절영도 침략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만민공동회 이후 철회했죠. 이는 첫번째 비폭력시위 성공 사례로 였으며, 동학농민운동처럼 지방에서 일어났던 것과 달리 서울에서 먼저 열린 시위였습니다.
신문을 통해 민중 계몽을 하고, 여론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있는 1896년의 독립신문. 그리고 민의를 반영하는 것이 중요한지를 드러낸 독립협회. 이 시점에서 민의를 파악하고, 깨어있는 것이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생각거리를 안겨주면서 말이죠.
[나의 역사공부 1] 사료와 '톡' 하는 법 - 한국인의 역동성을 발견하다, 비숍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일부 고등국어(하) 교과서에 한 기행문에서 발췌된 [외국인의 눈에 비친 19세기 말의 한국]라는 지문이 있습니다. 이 기행문은 4번의 조선 방문과 급변했던 시대적 상항 그리고 인상 깊었던 모습까지 상세히 적혔습니다. ‘정확성’이 자신의 제일 목표였고,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는 이 근대적 사료를 한 번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사료와 ‘톡’하는 법, 세번째 시간으로 이사벨라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Korea and Her Neighbours》’입니다.
허약했던 어린 시절과 장기선박여행
여성 지리학자, 대단한 필력, 크리스천.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 이하 비숍)의 생애를 짚을 수 있는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공회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빅토리아풍의 기독교적 가정교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병약했던 터라 정규 학교를 다니지 않고, 부모님께 많은 것을 배우거나 혼자서 공부(생물학, 시, 화학)했죠. 늘 허약하고 우울증으로 고생하자 의사는 그녀에게 장기 선박 여행을 권유했습니다. 캐나다와 북미주를 방문한 후 쓴 ‘미국에 온 영국 여인(The Englishwoman in America (1856))이 팔리게 되면서 글과 여행을 자기 업처럼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사망 이후 다시 병이 재발했는데, 이 시기에 만난 비숍 박사와 결혼했지만, 병으로 남편을 잃었습니다. 우울증과 고독으로 괴로워하던 그녀는 다시 여행을 떠났고, 1894년 1월 요코하마를 경유해 그 해 2월에 조선에 도착합니다. 그녀는 1897년까지 4차례 방문해 장기 체류를 했으며, 그 후 중국과 모로코를 여행했으나, 여독으로 사망했습니다.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1897년 발간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은 1894년 1월부터 1897년 3월까지 4차례에 걸친 조선 방문을 다뤘습니다. 당시 그녀가 조선을 방문했던 건 몽골 인종의 중요한 특성에 관한 자신의 연구 계획의 한 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이죠. 원작자 머리말-서장-각 장 별 내용(ex.사회적 상황, 문화)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머리말에선 자신이 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어떤 점을 우선시 했는지 밝혔습니다. 서장은 기존에 출판된 책에 조선이 어떻게 적혀 있는지, 자연지리와 가족제도, 광물, 통치형태, 개항 이후의 상황 등을 구체적으로 적었습니다. 여기서 두드러지는 점은 ‘정확성’ 입니다. 기행문의 특성상 자연지리와 인문적 요소가 필요한데, 지리학적 정보가 뚜렷했습니다. 더불어 쇄국을 유지하다가 강화도조약 이후 개항을 하게 된 외교적 상황과 한글 등의 사회문화도 기록했습니다. 바탕지식 같은 느낌으로 말이죠.
역동성과 격변의 시기를 외국인의 눈으로 바라보다
‘역동성’을 잘 묘사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머리말에선 시베리아에 갔을 대 봤던 조선인을 보고 다른 국가와 성격의 특성을 짧게 언급했지만, 이를 낱낱히 쓴 건 제 13장 1896년의 서울 에서 잘 드러났는데, ‘서울이 여러 면에서, 특히 남대문과 서대문 방향으로는 너무 변하여 옛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고 운을 뗐습니다. 있는 걸 보수하면서 때때로 주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건설되었으며, 새로 건물을 짓는 유럽식과 달랐죠. 또한 도로를 넓히고, 좋은 부지에 호텔을 세우려는 준비가 이뤄지고, 상점들이 즐비 해지기 까지. 1894년 자신이 책을 쓰기 위해 찍어둔 빈민촌 사진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졌다고 단언했을 정도로 말입니다. 또한 조선에 왔을 때의 상황도 언급했습니다.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을미사변, 단발령과 아관파천까지 급박하게 돌아가던 상황을 기록했습니다. 예를 들어 동학농민운동의 경우 동학 교도와 정부군 사이의 전국적 충돌에 관한 소문을 들었으며, 이 일이 일어난 것을 이해하게 된 걸 나타내는 부분도 있습니다.
급변하던 상황을 제3자 시각에 바라보고, 저술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史料)로 인정받고 있으나,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조선 입항은 광물을 노린, 이권침탈이 있다는 것과 사회진화론 시각이 있다는 건 아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안에선 차마 알 수 없었던 관점, 생생하게 묘사하되 정확성을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녀가 조선이라는 나라에 깊은 관심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나의 역사공부 1] 사료와 '톡'하는 법 - 서양을 빌어 새 길을 말하다- 유길준의 서유견문록
[나의 역사공부 1] 사료와 '톡' 하는 법 - 정변의 시대를 함께 겪은 이방인 알렌, <알렌의 일기>
시대 흐름 간의 연결과 사진해석
'역사'라는 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시대에 맞춰서 해석하는 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죠. 설령 자유롭게 해석을 해도 오늘날 추구하는 가치 안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하며, 약간의 상식도 필요합니다. 사진해석도 중요하게 작용하고요. 그렇다면 당시 어떤 상황이었던 걸까요? 강화도조약(1876) 이후 조선은 개화기였습니다. 농민 투쟁이 많았고, 급진개화파들은 ‘평등’을 법제화하려고 했습니다. 특히 국왕권위는 낮아지고, 내각(의회)는 높아지는 이른바 ‘입헌군주제’ 도입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서양화 속도는 늦었고, 근대화를 향한 의지도 낮았죠. 이를 보여 주는 것이 광혜원(廣惠院) 사진입니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지원해서 생긴 이 병원은 당시 홍영식의 집을 썼습니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은 이미 서양문화가 깊게 들어온 때였습니다.
선교사이자 관료였던 그, 안련(安連)
H.알렌(이하 알렌)은 1884년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들어옵니다. 신학과 의학을 공부한 후 미국 북장로교회 해외 선교부에 선교사 지원서를 제출하면서 중국으로 파송되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그는 주변 조언으로 한국으로 가게 됩니다. 그 후 갑신정변(1884)때 민영익을 치료해준 걸 계기로 신임을 얻어, 의료·선교뿐 아니라 미국 공사관 서기관(1890)에 역임하는 등 정치에도 관여했습니다. 특히 1903년 미국에 머무는 동안 동아시아 정책이 잘못되었다며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1905년 해임 이후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후에 그에 관한 평가는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한국 독립을 위한 ‘친한적’인사 혹은 미국정부의 공식 외교관이었기에 ‘친한적’외교관이 될 수 없다는 평가로 봅니다. 전자의 경우 알렌이 고종의 독립 보전 및 근대화 정책을 지지했다는 것에 주목하지만, 후자는 미국이 한반도에서 금광, 철도, 전차 등의 이권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하는, 즉 신문물이 도입했을 당시에 관여했음에 주목 했습니다. 그렇지만 의학 발전에 노력했다는 점, 주한미국공사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입장을 알렸던 점은 인정되고 있습니다.
알렌의 일기 속 1884년 그날
오늘날 <알렌의 일기>는 한국을 둘러싼 극동 아시아의 외교사가 어땠는지, 한미 외교사를 연구할 때 중요한 사료입니다. 또한 도착할 때까지의 항로, 생활사, 의학사 등 다양한 부문을 알 수 있기도 하죠. 그러나 여기서 두드러지는 부분은 바로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과 삼일천하를 다룬 기록입니다.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에게는 아주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12월 5일 금요일) 며 시작했는데, 문득 보면 정세를 모른다는 걸 짐작할 수 있지만, 두렵고 신경이 세워지던 때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자신들의 삶이 위협받고, 청나라와 일본이 싸우던 찰나였으니 피신해야 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죠. 아무튼 민영익을 밤새도록 치료하고 간호한 그는 갑신정변을 ‘최초의 암살사건’으로 지칭하며 급진개화파의 배후에 일본이 있었다(12월 11일 목요일)고 추측합니다. 나아가 일기 후반부에는 계속 전투가 일어났으며, 외국인들이 계속 서울을 떠나고 있음(12월 20일 토요일)을 저술했습니다. 그리고 갑신정변에 가담했던 인물들을 처형한 후 시내에 보인 시체더미가 있었고, 반역자의 시체임을 알게 되었다(1885년 1월 30일 금요일)는 걸 썼는데, 이는 삼일천하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당시 어떻게 흘러가고 있었는지 상상이 되고, 와닿았습니다. 물론 '일기'인 특성상 개인의 솔직한 마음도 드러나는 부분도 있었지만 말이죠. (알렌이 민영익을 정말 싫어했다든지) 그래도 사료를 읽는 것이 조금은 낯설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