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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4
[한국 근현대의 시간, 공간, 사람] 2강 한국인의 시간
[한국 근현대의 시간, 공간, 사람] 2강 한국인의 시간
; 새로운 역사 –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역사 후기
강연자 : 전용우
1. 현대인의 시간 : 시간의 물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간은 소비, 활용이 가능한 것으로 인식된다. 마치 시간은 돈처럼 물자가 된 세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의 경제적 사용을 위해 시간을 관리하고 그 관리된 시간에 자신을 맞추려 노력한다.
2. 근대 이전의 시간 : 동양의 관점
시간에 대한 관념은 동양과 서양에서 상이하게 나타났다. 서양의 시간은 누적되고 진행되는 것이었다. BC 몇 년부터 2016년 현재까지 시간이 누적되고 앞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동양에서는 시간이 순환한다고 인식했다. 즉 광무, 건륭처럼 연호를 짓고, 그에 맞춰 광무4년이니 했던 것이다. 10년 후에도 반드시 광무 4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시간의 순환은 국가의 최고 권력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 권력의 자리는 종교가 차지해왔고 근대 이후에도 시간을 장악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인간’의 추상화의 능력을 통한 최고의 소산인 ‘신‘이라는 존재가 ’시간‘을 통해 자신의 뜻을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최고 권력자는 자신의 권력을 통해 자원을 동원하여 천체의 운행을 예측함으로써 시간의 규칙성을 파악하고 관점을 설정하여 자신의 세력 내에 있는 사람의 시간에 대한 관점을 통제한 것이다. 최고 권력자는 주로 종교의 형태로 나타났다.
3. 도시와 농촌의 시간
도시와 농촌의 시간에 대한 관념도 사뭇 다르다. 이를 현대와 그 이전의 시대로 연결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도시의 시간 구분은 세밀하게 관리된다. 이에 반해 농촌의 시간 구분은 그 날의 날씨에 따라 좌우된다. 예컨대 해가 지면 휴식을 취하고, 해가 뜨면 일하고 비가 오면 휴식을 취하고 비가 개면 다시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엄격하지 않고 불확실한 농촌의 시간 구분 속에서 농촌의 삶을 통제하고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종교적 의례였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건 ‘신’이었기 때문이다. 종교는 하나된 활동과 의식을 통해 신의 지배를 입증 및 정당화했다.
4. 근대의 시간
- 기계 시계의 시대 : 자연과 독립된 시간의 출현과 시간의 물화
그러나, 근대에 오면서 시간은 더 이상 천체의 운행을 통해서만 관찰 및 측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계’라는 도구를 통해 계산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이 변화된다. 이제는 시간은 계산 가능한 물자(시간의 물화)로 수용된다. 그러나, 종교 및 권력자들의 시간의 지배열망은 강렬한 것이어서, 종교적 상징물인 높은 첨탑에 시간을 알리는 도구인 ‘종‘을 ’시계’로 대체하며, 시간에 대한 지배를 놓치지 않으려 시도한다.
- 한국 근대의 시간 : 근대 서양의 시간과의 충돌
한국 근대의 시간도 유사한 격랑에 맞부딪친다. 구한말 일련의 개항을 겪으며, 서양의 시간과 충돌을 인지한다. 주로 전보를 주고 받는 시간, 통상, 외교와 관련하여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결국, 1895 을미개혁을 통해 태양력을 수용하고 24시제, 요일제를 도입하게 되었다.
서력 채용에 따라 보신각의 타종은 중지되고 도성 전체에 시간을 알리는 오포가 등장한다. 더욱이 전차, 기차의 운행과 전보의 활성화로 서양식 시간은 정착되어 갔다. 또한 서양식 시간의 확대는 제중원 수업시간(오전 7시~오후 4시), 배제학당의 수업(오전 8시 15분 시작) 등으로 나타난다.
한국의 근대 시간의 관념을 나타내는 유명한 노래가 있다. ‘학교종이 땡땡땡’이다. 가사 보건대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라는 가사는 ’시간‘에 사람을 맞춘다. 즉 종소리에 지배되는 파블로프의 개와 같은 인간을 말한다.근대의 시간은 하루를 ‘같은 분량’으로 구분하고 계절에 구애받지 않는 관념을 만들어 낸다. 게다가,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소산된 전등은 낮과 밤의 구분마저 제거하였다. 이것은 과거에 ‘밤’시간을 인간이 아닌 악, 귀신의 시간으로 간주하던 관념에서의 전환이었다. 인간은 새로운 시간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5. 결론 : 우리 시대의 시간
종합하면, 인간은 시간을 계산할 수 있게 됨으로써, 종교의 시간 지배로부터 점차 벗어나고 있고 시간을 물자처럼 활용하고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시간의 물화) 또한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실시간 뉴스를 접하고, 공간을 초월한 시간의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만큼 시간을 분초 단위로 관리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현대인은 우리의 조상들보다 3배나 많은 깨어있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시간에 사람을 맞추게 됨으로써 시간에 대한 인간의 물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자신을 자연에 뿌리박은 생명체라기보다는 균질화된 시간에 딱딱 맞춰 움직여야하는 기계처럼 인식하고 자본은 그것을 통해 더욱 많은 이윤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모른다. 이러한 현대문명의 지속성과 그 안에서 삶의 생태성 회복의 필요성을 고민해 볼 때이다.
[한국 근현대의 시간, 공간, 사람] 4강 한국인의 몸과 마음
[한국 근현대의 시간, 공간, 사람] 4강 한국인의 몸과 마음
; 새로운 역사 –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역사 후기
1. 옛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대한 생각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인간은 몸과 마음이라는 2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고 각각을 달리 봤다. 고대의 성인들이 고행과 단식을 통해 몸을 학대하면, 마음의 영역이 극대화되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보기도 했다. 옛사람들은 몸은 유한하며 성장하다 늙고 죽는 것. 반면에, 마음은 불멸하고, 계속 성장하는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러한 몸과 마음에 대한 관념은 더 나아가, 몸은 소멸하는 것, 동물적 욕망 덩어리로서 죄악을 상징하게 되었고, 마음은 신과 합일할 수 있는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따라서 고정된 몸에 관심을 갖기 보단 계속해서 변화시키고 성장할 수 있는 마음에 관심을 기울였다.
2. 옛사람들의 관심 : 마음 가꾸기
몸은 헛된 것이고 타고 나는 것이므로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신의 발전은 마음을 가꾸는 것을 통해 가능하고 믿었다. 마음을 가꾸는 것은 마음 수련 등을 통해 가능하다고 믿었는데, 이러한 마음의 수련은 몸의 학대를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러한 마음 수련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완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목표점에는 신과의 합일이 있었다. 이 관념의 전제에는 사람다움이라는 것이 동물(罪)과 신(善)의 중간에서 부유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 존재를 ‘신‘에 가깝도록 만드는 것이 마음 수련이었던 것이다.格物致知 誠意正心 修身齊家 治國平天下(격물치지 성의정심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도 이러한 의미에서 誠意正心을 통한 修身을 말한 것이다.
몸과 마음에 대한 이분법적 관념은 옛사람들이 마음수련에 치중하게 했고, 신에 가까워지는 것은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에, 마음은 숭고한 것이고 몸은 비천한 것이라는 구분으로 이어졌다. 고려, 조선 등에서도 ‘부귀자는 내과, 빈천자는 외과’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몸과 마음에 대한 이분법적 관념이 강했다.
3. 몸, 독립하다
그러나, 근대의 혁명적 시간을 겪으며 인간의 몸과 마음에 대한 관념은 변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서구 유럽의 종교적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붕괴하면서 발생하게 되었다. 그 이유인즉슨 중세 기독교가 천명하고 있던 하늘, 땅, 그리고 인간에 대한 생각이 심한 반증과 반박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1543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운동에 관하여”라는 논문은 기존의 생각(‘지구는 중심이고 하늘은 동그랗다‘)을 정면으로 반박하여 하늘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또한 콜럼부스는 ‘유럽의 입장’에서 아메리카를 ‘발견(?)’함으로써, 기존의 생각(‘땅은 평평하고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어 끝까지 가면 지옥으로 떨어진다‘)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중세 기독교 세계관의 붕괴가 진행되면서, 인체 해부에 대해 ’신성모독‘이라는 생각에 반기를 들고, 직접 인간의 몸을 탐구해보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컨대, 베살리우스의 해부학혁명이 있다. 인체의 탐구는 인체를 재발견하게 했고, 인간의 몸도 유기체이며 기계처럼 이루어져 있다는 관념이 시작된다. 인간관에 대한 변화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통해 더욱 강력해진다. 요컨대, 종의 기원은 ’인간은 동물이고, 인간의 본성과 동물의 본성은 다르지 않다.‘라는 것이다.
근대 이후 인간 몸의 탐색과 재발견은 몸의 가치를 인식시켜줌으로써, 기존의 관심(몸<마음)을 ‘마음보다 몸에 대한 관심’으로 변화시킨다. 즉 몸의 느낌과 욕구는 인간의 본능이고 긍정적이라는 인식이 점차 환영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회화에서는 몸에 대한 사실적 묘사로 나타나고 몸을 보는 도구의 발전도 나타났다. 그 도구는 대표적으로 유리거울이었다. 옛사람들은 ‘마음’이 보이지도 않고, 자기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으나, 근대 이후 유리거울은 ‘자신의 모습’에 대한 인식이 가능해지도록 만들었다.
4. 한국인의 몸과 몸에 대한 생각의 변화
서양의학이 전래되기 전 한국인의 몸에 대한 관념도 서양의 것과 크게 다를 것 없었다. 몸은 고정된 것이고 죄악 덩어리였다. 마음은 바뀔 수 있는 것이고 인간이 선해지기 위한 방법은 이 마음을 수련하는 것이었다. 몸이 아픈 상태인 질병이 나타나는 것도 마음과 관련이 있는 것이므로 마음 수련(양생법)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봤다. 질병이 심해져 손 쓸 수가 없을 때는 무당을 부르는 등 영적인(마음에 관련한) 활동을 통해 질병을 치유해야 한다고 봤다. 예컨대 한민족의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질병인 천연두등을 하늘의 벌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서양의학이 전래되고 질병은 귀신 등 마음에 관련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병균이 침투해서 생기는 것이라는 인식도 전해지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질병의 치료에 있어, 의학과 무당의 총성없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후 근대화의 진전은 질병의 치유가 ‘양생‘이 아니라 ’위생’으로 가능하다는 생각이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개인위생과 청결의 수단인 ‘목욕‘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목욕탕, 찜질방 등의 등장과 보편적 확대는 이와 맥을 같이 한다. 또한 공공적으로는 거리청소, 환경미화가 시행되고 정착된다.
5. 좋은 몸 관점의 변화
서구에서 전래된 몸에 대한 재인식은 한국인들의 생각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기존의 좋은 몸에 대한 관점도 급변하게 되었다. 즉, 좋은 몸은 ‘노동과 굶주림의 흔적이 없는 몸‘에서 ’단련된 몸‘으로, ’뚱뚱하고 풍만한 몸‘에서 ’날씬한 몸’으로 급변했다. 이제! 마음보다는 몸에 대해 더 많은 신경을 쓰고, 그 몸을 가꾸는 일이 아주 중요해졌다. 몸을 움직여 단련하는 것이 고행이 아니라 운동이 된 것이다. 국가적 차원에서도 개인의 몸을 단련시켜 국력의 발전을 꾀하여, 체력단련을 권장했다. 몸 꾸미기는 ‘운동‘에 그치지 않았다. 현대 ’의복‘의 다양화와 발달은 나의 몸을 치장하고 가꾸는 수단으로 나타났고, 의복은 개인의 자아를 표현하는 도구가 되었다. 더불어, 인간의 수명에 대한 관점도 일대 변화를 겪는다. 기존에는 인명은 재천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수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몸에 대한 재인식‘은 수명이 전적으로 하늘에만 달린 것이 아닌 인간의 관리로도 연장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6. “내 몸이 나다“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져있다. 허나 마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몸은 볼 수 있는 것이다(유리거울의 역할이 매우 크다). 자신의 정체성은 자신과 타인에게도 보이지 않는 마음보다는 ‘몸’에서 드러난다.“ 이것이 많은 현대인들의 생각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매스컴의 발달과 이를 통해 보여지는 유명 연예인들의 모습은 ‘좋은 몸’의 관점이 변한 결과를 여과없이 보여준다. 매스컴의 환경에서 많은 현대인들은 거울 속의 자신을 ‘그들’과 비교하며 자신의 몸을 가꾸려한다. 압구정역에 즐비한 ‘성형외과’와 ‘헬스장’은 우리시대의 ‘몸에 대한 생각’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것들이 아닐까?
[한국 근현대의 시간, 공간, 사람] 3강 한국 근현대의 공간 ; 자연이 만든 경관, 인간이 만든 경관
시공간. 말의 순서에서도 그렇지만 역사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걸어온 여정과 흐름, 즉 시간에 더 많은 관심을 지니는 학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유구히 흐르는 시간은 인식함으로써 존재하는 다소 추상적인 관념인데 반하여 공간은 그 순간에 직접 딛고서 그 안에 있게 하는 기반으로서 실재이기도 하다. 하여 그 실재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구체성을 통해 일련의 믿은 그 자체를 형성하여 인간의 당면한 삶에 영향을 미치며 인간에 의해 변화되는 관계를 맺기도 한다.
'공간'의 형성과 변화는 인간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을까. 과거와 현재에 인간들은 공간과 영역을 어떻게, 얼마나 실감하고 인지하였을까. 현대인에게 공간과 영역은 m,km 등 수치로서 인지된다. 동시에 자신이 직접 보고 밟지 않는 곳에까지 매체 등을 통한 간접경험으로써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체감적이고 실재적인 영역이 아니라, 지도를 매개로 한 인식되고 상상된 관념적 인식이며, 이것은 거리와 면적의 계량적 수치, 혹은 교통수단과 소요시간 등으로 계산되어 재정리 구획화되어 있기도 하다.
결국 인간이 실제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공간은 이른바 생활반경일 것이다. 이에서도 현대와 전근대인에게는 차이가 있다. 강사는 출산에서부터를 통해 상징적으로 이 점을 설명한다. 현대인은 병원, 조리원, 자택 등을 출산 전후에서부터 세분된 공간들을 이동함으로써 삶을 시작하는 반면, 전근대인은 금줄, 삼칠일, 백일 등이 상징하듯 이동이 없이 뿌리내린 삶을 시작해 살아간다. 일상과 평생에 이동반경 역시 현대인이 변화된 생활 양식과 교통수단으로 끊임없이 장거리를 이동하는 반면, 전근대인은 대개 토지 고향 향토를 중심으로 한정된 영역에 근거하여 평생을 살아간다. 때문에 공간에 대한 감각이 근본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어떤 변화의 소산일까. 대개 고대 각 문화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공간의 세계관은 천원지방이다. 동시에 땅이 이루는 사각형은 농경이 시작된 후, 구획화와 합리의 산물인 인위적 모습이다. 하여 사각형은 인위와 그것이 이루어지는 공간인 지상을 상징한 반면, 원은 자연, 본디에 존재하던 것으로 하늘이자 신적영역을 상징한다. 건축물 등에서, 혹은 황제의 -천자, 즉 반신적 존재- 상징이 팔각형 등 사각에서 원으로 변해가는 모양을 취하는 것도 이 결과이다. 여하튼 지간에 '천원' 과 구별되는 '지방' 으로서 사람들은 이미 자신들의 세계인 공간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말했듯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근대의 세계는 지극히 좁았으며, 자신의 뿌리내린 세계관에 한정되었다. 여행은 특별한 사유로 이루어지는 고된 여정이었다. 반면 권력자에게는 관념적으로 광대한 영역이 천하, 세상 등으로 존재했으며 이것을 순행 등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체험 체감 하는 한편 인지하고 다룸으로써, 공간 자체를 사유함으로써 소유할 수 있었다.
또한 그런 권력에 의해 탄생된 특별한 공간이 도시였다. 도시는 자연경계가 아닌 특별한 경계 -성벽- 를 지님으로써 구획화된 인위적인 동시에 구별되는 특정한 공간이었다. 그 특별함은 도시의 주인인 권력자와 그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 나눠가지는 신성함으로 조작되었고 '구별되는 공간'으로서 도시의 특수성을 두드러지게 하였다.
산업혁명과 근대화 이후 도시는 종래의 특별히 경계지어진 공간에서 표준적인 생활의 공간으로 변화하였다. 이것은 도시 거주자의 증가 탓인데, 첫째는 도시의 유인요인에 의한 유입 및 거주 인구의 증가, 그리고 도시 자체의 증가에서 비롯되었다.
하여 도시적 삶 자체가 근대적 삶의 표준이 되었는데, 앞서 말했듯 도시는 애초에 인위적이며 기획된 공간이다. 이것은 근대성 역시 마찬가지이며 결국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근대 도시적 삶과 그 공간은 근대성이 압축적으로 표현된 산물이기도 하다.
그 변화된 삶은 교통통신 수단의 발달로 시공간이 압축된 동시에 밀집된 삶이다. 빠른 이동, 빠른 변화, 자력이 아닌 교통수단에 '실려' 이동함으로써 움직임의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되어 주변의 흐름을 바라보게 되는 것에서 인간은 변화와 속도를 하루하루 체감하게 되고, 결국 근대적 감각에서 '안정=지체'라는 느낌을 안겨주어 끝없는 변화를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며 쫓게 변해왔다.
한편으로 시공간의 압축은 인간간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단축하였으며, 거리감의 부재 즉 자기 공간의 박탈에 익숙해지는 동시에 시작적인 도시에 체감적으로 익숙해져 관념까지 근시안적인 단견에 물들었다.
그런 끝없이 변화하고 불안정한 삶 속에서 공간은 일시적인 공간에 불과할 뿐 그 자체로서 본원적인 의미를 지니는 '장소'가 되지 못한다.
그에 대한 목마름, 불변과 지속성에 대한 욕구가 투영되는 것이 불멸이어 보이도록 오래 보내온 시간 자체를 담지하고 있는 문화재들에 대한 애호이며, 동시에 공허함을 달랠 새로운 시대가치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현대 건축물, 이른바 랜드마크들이다.
시간과 공간을 2,3강에서 인간이 어떻게 인식하고 그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지를 확인한 후, 다음 마지막 강의는 그러한 인간 자체는 어떠한 속성을 지니고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며 변화해왔는지 볼 것이다.
[한국 근현대의 시간, 공간, 사람] 1강 프롤로그 ; 새로운 역사 –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역사
작은 역사, 평범한 역사,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가가 이번 첫 강의 제목이였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위해 맨 처음으로 우리에게 던져진 물음은 '역사란 무엇인가' 였다. 우선적으로 강사인 전우용 교수가 밝힌, 그에게 역사의 정의란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연과 사물과 맺어온 관계의 총체' 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인간이 시간과 공간을 인지하는 방식과 모습, 그리고 그것을 변화시켜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혹자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불변이되 시대와 환경만이 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강사의 견해에 따르면 그 변화하는 시대와 관계 맺음으로써, 또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동력으로서 사람 역시 진화의 도정에 있는 존재로서 틀림없이 변화한다.
그렇다고 해도 하여 해서 실제적으로 입에 담아지는 '역사'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역사란 '과거에 있었던 일' 이다. 혹은 게 중 특별한 가치와 의미를 지녔다 여겨져서 선별되어 기억되는 일부이다. 종래의 입장에서 역사는 '과거'의 일이었으며 그것은 동양사에서는 창고의 출납기록이 마쳐졌음을 뜻하는 '역'이란 한자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역사는 정녕 '이미 끝난 것' 에 관한 기록에 불과한가? 현대인은 이른바 역사를 얼마나 역사화 (객관화, 상대화) 할 수 있는가? 우리와 무관한 오랜 예쩐의 사실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E.H.카의 금언대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이며 '산 자가 죽은 자를 되살리는' 일이었다.
그러다 다시, 그 금언은 현재에도 나왔던 당시와 같은 유효성을 그대로 지닐 수 있을까? 어떤 이론의 어지가 없는 것일까? 강사의 견해에 의하면 현대 사회는 급속한 변화가 오히려 일상인 시대다. 새로운 것이 오히려 익숙하며 '새 것(NEW)' 자체가 가치를 지녀 신념으로서 내재화 되어 모든 것의 변화가 당연시 되는 시대이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데 하문 유리는 역사란 (정녕)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 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대화는 온전히 가능한가? 우리는 '과거'라는 거대한 존재 자체와 총체적인 대화가 가능한가? 그 대화를 통해 단숨에 핵심까지 이르는 사실을 전해들을 수 있는가? 우리는 과거를 모두 기억할 수 있는가? 우리의 대화 상대가 되는 과거는 '극히 일부' 일뿐이다. 하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과거는 기억되는 것 뿐이다. 누군가 기억에 남기고자 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전해 이어지는 일부이다. 하여 역사의 승자는 기록하는 자라 하는 것이며, 동시에 승자가 기록의 처분권을 지녀 특정한 기억만을 남기는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기억은 객관적이지 않으며 하나이지도 않다. 같은 것을 보고 다르게 느끼며 해석하듯 기억과 기억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관점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그것은 단지 방향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심도, 즉 부여하는 중요도의 차이이기도 하다. 하여 같은 사건에 대한 대치되는 기억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는 끊임없는 고민이자 논쟁이다. 보편적 동의가 이루어진 듯한 집단적 기억 역시 시대에 따라 변화되기 마련이다. 한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관의 변화가 시각의 변화를 낳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특정한 해석, 기억에만 영구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가능할까. 그리고 정당할까. 실상 그것이 국가권력에 의한 역사의 결정권-해석권 독점이었던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위험성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역사에, 기억에 '옳음' 이나 '바름' 을 부여할 수 이는가. 그것이 합당한가.
이와 같이 기억은 그 자체로도 복잡하기 이를데 없다. 동시에 우리가 과거의 '기억'에 접근하는 것은 기록을 통해서인데 기록은 반드시 모든 것을 남기지 않는다. 기록자가 '중요' 하다고 여기는 것만을 남기며 또한 감추고자 하는 것은 기록하지 않음으로써 사라지게 한다. 헌데 문자라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일부 식자층의 전유물이었다. 때문에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기록은, 그것을 통해 용이하게 대화할 수 있는 '과거'는 글의 가치관으로 걸러진 것 뿐이어 왔다.
하여 역사는 오랫동안 치자의 학문으로서, 그들에게 통치를 위한 자료집의 역할을 하거나 그들의 정통성을 보증하는 위헙의 집대성에 불과한 것이었다. 때문에 영웅과 위인들의 역사였으며 정치와 권력에 대한 기억이었다. 이러한 치자의 지위를 강탈해 전유한 것은 근대의 국가와 민족이었다. 절대적이며 무엇보다 중요한 존재로서 신성성을 가장한 '조국'과 '민족'의 역사였으며, '우리' 의 역사였다. 그 결과는 '우리'와 '저들'의 구분이며, 나아가 집단이기주의와 '저들'의 배제-말살이었으며 그 귀결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집단 학살이었다. 그 충격적인 교훈과 경험에 힘입어 반성과 재고가 이루어져 종래 국가-민족 사관의 해체가 시도되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와 '저들' 의 구별을 뛰어넘고자 한 시도는 애초에 '우리'란 무엇인가로 이어졌다. 그간 '우리' 라는 총체로 묶여 집단적 범주에 포획되어 억눌려 있던 소수자들, 더 작은 집단과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관점이 등장하였다. 하여 그간 귀 기울이지 못했던 목소리, 소수자 약자 그리고 기록되지 않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 즉 본강의 주제인 '작은 역사' 에 대한 탐구와 접근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미시사 일상사 생활사이다. 하면 기록되지 않은 역사에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그것은 다음 강의의 '한국근현대의 시간, 공간, 인간' 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그 과정을 통해서 보다 살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