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권의 정치철학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을 읽다

  • 강사

  • 기간

    • 2016. 9. 21 ~ 2016. 11. 2
  • 시간

    • 수요일 19:00~21:30 총7회
  • 수강료

    100,000

    • 파격 할인혜택
    • 참여연대 회원70,000

    각종 혜택 적용은 로그인 > 마이페이지에서 진행됩니다

    상세 정보

    정치철학으로 읽는 그리스 비극

    강의 소개 |

    인류사에 있어 민주주의를 꽃 피웠던 그리스,
    그리스인들은 왜 해마다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비극을 공연하고, 또 관람하였을까요?
    그리스인들에게 비극이란 무슨 의미였을까요?

    이 강좌는 그리스 비극을 정치에 내재된 중요한 속성,
    즉, 저항의 문제, 세대 간의 문제, 정의의 문제, 폭력의 문제,
    사랑의 문제, 결단의 문제를 읽어내고, 이를 ‘정치’와 ‘책임’이라는
    큰 틀로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강의 일정 |  

    날짜

     순서

    주제

    9.21

     1강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그리고 비극과 정치

    플라톤이 거부했던 “시”를 두고 역사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왜 우리는 비극을 읽기 위해 『시학』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정치성은 희극이 아니라 비극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9.28

     2강

    아이스킬로스 -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 카뮈, 니체

    운명이 예측 가능한 것이라면, 운명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를 카뮈와 니체로 해석한다면?

    10.5

     3강

    소포클레스 - 오이디푸스 왕 : 프로이트, 드브레

    운명을 피하려는 자들이 맞는 운명은 무엇일까?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아들은 아버지를 살해해야만 하는 운명일까?
    새로운 정치는 낡은 정치를 반드시 파괴해야만 가능한 것일까?

    10.12

     4강

    소포클레스 - 안티고네 : 소크라테스, 롤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형제살해의 끝에서 맞는 두 자매의 운명은 무엇이었을까?
    안티고네의 선택과 이스메네의 선택 중 옳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왜 정의는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운명에 처했을까?

    10.19

     5강

    에우리피데스 – 메데이아 : 세네카, 그릴파르처

    왜 사랑은 정치의 기반이 될 수 없을까?
    사랑에 빠진 자들이 질투에 눈이 멀어버릴 때, 가족과 공동체에 일어나는 혼란은?
    그리고 사랑이 일으키는 그 폭력은?

    10.26

     6강

    아이스킬로스 – 아가멤논 : 아렌트, 미노우

    정치에서 우유부단함이 만들어내는 혼란과 운명은 어떤 것일까?
    복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의 탓일까 아니면 복수한 자가 책임져야 할 몫일까?
    복수가 잇는 폭력의 사슬은 어떻게 끊어낼 수 있는 것일까?  

    11.2

     7강

    아이스킬로스 – 오레스테스 : 마키아벨리

    신이 정한 운명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가?
    인간에게 자유는 어떤 의미인가? 

    강의 텍스트 |
    <시학> 천병희 역, 문예출판사
    <그리스 비극 걸작선> 천병희 역, 도서출판 숲
    <오레스테스 3부작> 은 추후 공지 드립니다.

    강사 소개 |
    김만권  뉴스쿨에서 “정치적 적들 간의 화해를 위한 헌법짓기”를 주제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자유주의에 관한 짧은 에세이들: 현대 자유주의  정치철학입문>, <불평등의 패러독스: 존 롤스의 분배정의와 정치>, <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세상을 보는 열 일곱개의 시선: 정치와 사회에 관한 철학에세이>, <참여의 희망: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만나다>, <정치가 떠난 자리> 등을 썼고, <만민법>,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 <인민>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강의 정보 |
    일  시 : 2016. 9. 21 ~ 11. 2,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 9시30분, 총 7 회
    장  소 :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
    참가비 : 10만원(참여연대 회원 30%, 청년학생회원 50% 할인)
    20대 청년회원과 학생 신분의 회원에게는 해당 강좌에 한해 50%를 할인해 드립니다.
    카드결제 시 50%할인액이 적용되지 않으니 계좌이체를 부탁드립니다.

     

    후기 7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 읽기](7)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 자비로운 여신들

      2016.11.7 lyh1999 김만권의 정치철학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을 읽다

      정치철학으로 고대 그리스 비극 읽기 마지막 시간(11월 2일)엔 <아가멤논>에 이어서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의 나머지 두 작품을 읽었습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 왕비가 아가멤논을 죽이며 벌어진 복수는 자녀세대인 엘렉트라와 오이스테스에게로 이어지고(<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이 복수는 시민들이 참여한 재판장에서 비로소 마무리됩니다(<자비로운 여신들>). 복수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용서를 다룬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번 시간에는 화해가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이뤄지는 측면을 주목합니다.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제목은 클리타이메스트라와 그의 딸인 엘렉트라를 지칭합니다. <아가멤논>에서 클리타이메스트라가 남편인 아가멤논을 죽이고 정부인 이아기스토스가 권력을 차지하자 위협을 느낀 엘렉트라는 어린 남동생 오레스테스를 도망치게 했습니다. 극이 시작하면 성장한 오레스테스가 아가멤논의 무덤을 찾아오고, 이어 제주를 바치러 등장한 엘렉트라와 재회해 아버지를 죽인 자들에게 복수를 맹세하고, 코로스들이 이를 지지하고 나섭니다. 오레스테스는 친구 퓔라데스와 나그네로 위장하고 아이기스토스의 성에 찾아갑니다. 이들은 오레스테스가 죽었다고 거짓 소식을 전하며 아이기스토스와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접근해 이들을 살해합니다. 그러자 오레스테스는 클리타이메스트라의 혼백이 불러낸 복수의 여신들이 나타난 것을 보게 되고, 도움을 청해 어디론가 도망칩니다.

      <자비로운 여신들>에서 오레스테스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탁소에 도착해 아폴론으로부터 아테나이로 가 재판을 받으라는 명을 받습니다. 그리고 아테나이에서 아테나 여신이 재판장으로, 시민들이 배심원으로 참석한 가운데 공개 재판이 열립니다. 모친인 클리타이메스트라를 죽인 오레스테스의 유죄 여부를 두고 아폴론이 변호에 나서고, 배심원 투표가 동수로 팽팽히 맞선 결과를 본 아테나가 오레스테스를 지지하며 무죄 판결을 내립니다. 오레스테스를 쫓아온 복수의 여신들이 재판 결과를 보고 아테나이에 재앙을 내리겠다고 위협하자, 아테나는 그들이 지낼 곳을 마련해주고 아테나이를 축복해주도록 설득합니다. 이로써 복수의 여신들은 제목의 '자비로운 여신들'로 거듭나게 됩니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아가멤논>에서 남편살해,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 모친살해의 주제를 다루고 이 두 사건이 <자비로운 여신들>에서 재판이라는 제도를 통해 완결되는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연쇄적인 복수 가운데 벌어진 남편살해와 모친살해 중 어느 쪽이 더 큰 죄인지를 놓고 대립하는 갈등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오레스테이아가 왜 무죄 방면되는지 이유를 살펴보려면 그의 행동 배경에 아폴론의 신탁이 있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내게 이런 모험을 하도록 명령하신 록시아스의 강력한 신탁은 결코 나를 저버리지 않을 거예요")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는 모두 어머니의 손에 아버지를 잃었다는 원한[사적인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레스테스에게는 그 이상으로 신이 부여한 공적인 명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두번째 배경으로는 코러스로 대변되는 시민들이 오레스테스의 복수를 지지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아가멤논의 죽음 이후 아이기스토스의 참주정치에 시달리고 있던 코러스들은 무덤가에서 복수를 맹세하는 남매를 옆에서 계속 지지하며, "아르고스시 전체에 자유를 찾아주었다"고 두 사람을 죽인 일을 칭찬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 복수는 분명히 유혈을 부르는 폭력적인 방식이었고, 때문에 재판을 통한 해결이 불가피해집니다.

      <자비로운 여신들>의 재판 장면은 지금까지 이어진 사법 제도의 기원적인 측면을 보게 해줍니다. 극중에서 재판은 사건 발생장소인 아르고스가 아니라 아테네에서 열리는데, 그 이유로는 당시 이 지역의 정치적 중심지 역할이 아르고스에서 아테네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한편으론 재판 장소가 변경된 것이 재판이란 실제 사건 당사자와 관계없는 제3자가 판단해야 공정하다는 인식을 보여준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를 제도 전체에 적용하면 제도란 이해당사자가 아닌 외부자가 설계해야 한다는 것, 불가피하게 내부자가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면 제도를 만든 내부자가 이후 그 공동체를 떠나야 한다는 뜻도 됩니다.

      재판장에서 복수의 여신들은 클리타이네이메스 편에서 모친살해가 더 큰 죄라고 주장하고, 아폴론은 오레스테스를 변호해 남편살해가 더 큰 죄라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남편과 모친 모두 가족 안의 가까운 인간관계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공적인) 서약을 통해 맺어지는 관계라는 점에서 남편살해는 비혈족살해, 모자 모녀 관계는 혈연을 통해 맺어지는 관계라는 점에서 모친살해는 혈족살해라는 차이가 나타납니다.

      이 점에 근거해 복수의 여신들은 오레스테스가 혈족을 살해한 죄인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아폴론은 "제 자식의 진짜 생산자는 자궁에서 태아를 기른 어머니가 아니라 수태시킨 아버지"이며 "어머니 없이 자식이 태어나는 것이 가능하다"라고 주장합니다. 아버지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아테나가 바로 그런 경우이기 때문인데, 아테나 역시 이 점을 근거로 자신은 남자/아버지 편이라며 오레스테스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물론 지금 기준에서 보면 불합리한 논리이지만, 오레스테스에겐 신탁이라는 공적 명분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시민들의 지지가 있었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획득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테나이의 재판은 제도로서의 재판이 가져야 할 덕목들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입니다. 이 재판은 아테나가 11명의 시민 배심원과 전령, 수많은 백성들을 데리고 등장하면서 시작하는데 이는 재판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치뤄져야 함을 알려줍니다. 또한 법정에서 원고와 피고측이 자기 사정을 이야기하게 함으로써 사건을 공동체가 공유하게 하고, 나아가 여기서 성립된 정보의 공정성이 재판을 좌우한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이외에도 아테나는 재판으로 제시되는 제도가 가져야 할 덕목들을 제시합니다. 먼저 아테나는 극중의 재판이 앞으로도 존속해야 한다고 왜냐하면 판결의 공정성은 그 기준인 법이 지속적으로 적용되어야 보장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아테나는 배심원들이 뇌물에 매수되지 않는 나라의 불침번이 될 것을 주문하며 제도가 불의에 단호히 맞서야 함을 지적합니다. 또한 "무정부도 독재도 아닌 통치 형태를 유지하고 두려운 것을 도시 안에서 모두 추방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도시가 정치적 결정을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통치 형태,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용기가 재판의 공정성을 뒷받침한다는 것입니다("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면 사람들 중에 누가 언제나 의로울 수 있겠는가?")

      재판의 공정성과 지속성이 중요한 이유는 이후 아테나가 복수의 여신들을 설득하는 대목에서 더 중요해집니다. 재판에서 패한 복수의 여신들은 자신들의 룰이 무너진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하는데, 아테나는 그들에게 이 땅에 머물며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리면 시민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리라고 약속합니다. 이 약속이 지속적으로 지켜져야만 아테네는 그들의 재앙을 피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자비로운 여신들>은 사법 제도가 복수를 끊는 해결책으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고, 또한 이를 위해선 아테네의 약속과 같은 법이 지속적으로 지켜져야 하며, 법의 적용 범위를 복수의 여신들 같은 도시 외부인에게까지 확대함으로써 외부인을 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지금 우리의 법 시스템도 돌아보게 만듭니다. 법은 말의 힘을 통해 화해를 이끌어내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오레스테이아의 경우처럼 법치의 작동은 그 환경이 얼마나 공정하게 만들어져 있느냐에 좌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도 법에 의한 통치는 종종 강조되지만 부조리한 환경이 법치의 공정성을 해치는 경우가 있습니다(ex. 검찰의 기소독점). 갈등 해결책으로서의 법치가 제대로 되려면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잘못된 환경들을 고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번 고대 그리스 비극 강의는 문학적 시각에서 탈피해 정치철학적 시각으로 독해를 시도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비극은 당대의 가장 아름다운 시라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당시 인간들의 고뇌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당시 인간들과 지금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환경이 같을 수는 없지만(예컨대 고대 그리스에서 운명은 이미 신탁으로 내려져 잘 알고 있는 것이었고 그걸 당당하게 맞아들이는 자세가 자유로 칭해졌지만, 마키아벨리 시대로 넘어가면 운명은 예측불가한 것이고 그에 맞서 저항하는 게 자유라는 인식이 생겨납니다), 이들 비극은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의 자유 개념부터 마지막 강의의 화해 개념까지 지금의 정치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들이 지금 고민할만한 이슈들을 고대 그리스 비극들이 앞서서 어떻게 사유했는지 발견하는 기회를 더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 읽기](6) 아가멤논

      2016.10.30 lyh1999 김만권의 정치철학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을 읽다

      전날(10월 25일) 보도된 국정농단 파문으로 모두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모인 여섯 번째 시간(10월 26일) 강의에서 읽은 작품은 <아가멤논>입니다.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자비로운 여신들>과 함께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 중 하나입니다.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군을 지휘한 왕이지만, 동시에 온갖 악행과 끝없는 복수로 점철된 가계의 역사 가운데 우유부단하고 오만한 행동으로 화를 입습니다. (의도한 스케줄은 아니지만) 정치적 '무능함'과 '잔혹함'이라는 주제가 현재의 시국과 공교롭게도 잘 맞아떨어지고, 그래서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비극입니다.

      <아가멤논>은 <일리아드> 등을 통해 잘 알려진 트로이 전쟁 직후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기둥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필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미케네와 아르고스의 왕인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막 왕궁으로 돌아옵니다. 그의 부인인 왕비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반갑게 그를 맞이하는 척하며 아가멤논을 죽입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이것이 아가멤논에 대한 복수라고 주장하는데, 이를 이해하려면 아가멤논의 가계도와 함께 극중을 통해 밝혀지는 이전 사건들을 알아야 합니다. (아가멤논의 가계도 참조) 사건들을 시간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아르테우스(아가멤논의 아버지)의 쌍둥이 동생 티에스테스가 아르데우스의 아내를 유혹해 아르데우스의 권력에 도전함

      (2) 아르데우스는 티에스테스의 자녀들을 죽이고 티에스테스를 잔치에 초대해 죽인 자식들의 인육으로 만든 요리를 먹임.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티에스테스의 자녀 아이기스토스가 아르데우스 집안에 대해 복수심을 갖게 됨

      (3) 아가멤논이 사냥 중에 숫사슴을 마주치고, 숫사슴이 아르테미스 신의 소유임을 알면서도 쏘아죽여 아르테미스의 분노를 삼

      (4) 파리스가 아가멤논의 동생 메넬리오스의 부인인 헬레네와 사랑에 빠져 도피, 트로이 전쟁이 발발함

      (5) 아가멤논을 총지휘관으로 한 그리스 군대가 배를 타고 출정하려고 하나, 아르테미스가 바람을 멈춰세웠기 때문에 배가 출항하지 못하게 됨. 아르테미스 신의 노여움을 풀려면 아가멤논의 딸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신탁이 내려옴.

      (6) 아가멤논은 동맹의 서약이 더 중요하다며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치고,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복수심을 품게 됨

      (7)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가 불륜 관계에 빠지고, 아이기스토스가 아가멤논을 죽이라고 사주함

      (8)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아가멤논과 그가 전리품 격으로 끌고온 카산드라를 칼로 찔러 죽이고, 이후 아이기스토스가 등장해 아가멤논의 재산으로 참주 자리에 오를 의사를 밝힘

      정치적으로 독해할 때 <아가멤논>은 정치 지도자의 우유부단함(= 무능함), 복수의 잔혹함과 간교함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일리아드>에서 묘사된 트로이 전쟁 과정은 물론 <아가멤논> 작품 전반을 통해 아가멤논은 우유부단하고 지질한 행동도 곧잘 저지르는 왕으로 그려집니다. 아가멤논은 자신의 책임으로 딸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상황에 처했음에도 반성 없이 딸을 포기하고, 이피게네이아가 가문을 저주할까봐 입을 틀어막기까지 했습니다. 전쟁 중에는 여성을 전리품으로 취하려고 탐내다가 그리스군에 역병이 돌게 만들고, 아킬레우스를 분노케 하여 전황을 불리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극중에선 클리타임네스트라가 그를 추어올리며 맞이하자 신들의 색깔인 보랏빛으로 만든 주단을 밟는 오만한 행동도 합니다. 아가멤논의 행동의 특징은 다른 비극 주인공처럼 스스로 결단하고 상황을 주체적으로 바꾸기보단 상황에 떠밀려서 행동하고, 무엇이 옳은 행동인지 자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가멤논이 우유부단한 왕으로 평가받는 이유입니다. 이후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명확하게 선을 긋습니다. "사악함은 능력이지만 우유부단함은 무능이다."

      반면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복수의 잔혹함을, 이아기스토스는 복수의 간교함을 보여주는 캐릭터입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복수를 위해 아가멤논에게 자신이 정절을 지킨 것처럼 거짓말을 합니다. 말과 설득의 기술인 정치에서 정직은 중요한 덕목이지만, 복수는 이와 반대되는 특성을 지닌 것입니다. 또한 그녀는 아가멤논이 딸을 죽인 사실을 상기시키며 자신의 복수가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또한 정의의 여신들을 호명해 이 복수에 정의를 부여하고 합니다. 반면 이아기스토스는 정부에게 복수를 교사해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복수하고, 아가멤논의 재산으로 시민들을 다스리겠다고 선언하면서 복수의 폭력이 참주의 탄생을 부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코러스장은 이아기스토스에게 반발하면서 그와 싸움을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잔인한 폭력으로 잡은 권력은 시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가멤논 가문의 비극은 복수가 또다른 복수를 부르는 악순환입니다. 정치철학적 측면에서도 정치에서 위와 같은 특징들이 등장할 때 정치보복이 반복될 수 있습니다. 연쇄적인 정치보복 문제의 해결책으로 학자들이 제시하는 것은 "용서" 개념입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함으로써 보복의 순환을 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종차별 문제가 극심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제시한 "진실과화해협의회" 모델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가해자의 가해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고, 이 현장에 가해자와 피해자를 출석시켜 용서와 화해를 이끄는 모델입니다. 이 모델에 대한 반론도 물론 존재합니다. 남아프리카의 경우 전세계의 주목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할 수밖에 없는 암묵적 압력이 있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이 협의회가 만들어져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최종적 화해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용서라는 아이디어 자체에 대한 반론도 있습니다. 먼저, 용서란 가해자가 제대로 된 사죄를 해야 가능한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하루빨리 일본의 사죄를 받고 그들을 용서하길 바랍니다. 그러나 일본이 이 문제를 적당한 선에서 묻으려 하고 용서를 빌지 않는데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국정농단 사실을 떠밀린듯 인정하면서도 "순수한 마음으로" 같은 표현으로 자기 책임을 도외시하는 대통령의 (우유부단한) 사과를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가해자가 사죄하지 않거나, 제대로 사죄하지 않음에도 피해자가 용서를 한다면, 그것은 피해자가 트라우마를 덮어둔 채 망각한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천안문사태를 겪은 중국은 학교에서 이 사건을 가르치지 않고 집단적으로 잊으려 합니다. 훼손된 형태의 용서는 집단의 기억에도 악영향을 미칩니다. 제대로 된 용서가 이뤄지려면 집단 전체가 외상적 사건을 정확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가해자의 가해 사실과 그들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명확히 공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제기되는 문제는, 어떤 사건은 결코 용서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가멤논>에도 등장하듯이 아버지에게 자기 자식의 인육을 먹이고, 아버지가 자기 딸을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사건을 용서로 해결한다는 게 올바른 선택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아가멤논이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용서를 구한다면 그 용서는 과연 가능할까요? 다시 말해, 정치적인 무능함은 용서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요? 앞으로 좀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한편 Martha Minow는 <Between Vengeance and Forgiveness>에서 용서에 대한 몇 가지 조언을 주고 있습니다. 먼저 가해자는 언제까지 사죄를 해야 하는가? 사죄의 끝은 피해자가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말할 때까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도저히 용서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일 때 사람들은 대개 가해자보다 용서하지 않는 피해자에게 더 많은 비난을 보낸다고 합니다. Minow는 왜 우리는 가해자의 감성에는 민감하고 피해자의 감성에는 둔감한지를 묻습니다. 즉 제대로 된 용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피해자들에게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말할 수 있는 환경과 권리를 마련해줘야한다는 것입니다.

      Minow의 지적에 이어받아 마지막으로 제시할 아이디어는, 한국의 이념갈등에 대한 것입니다. 정치적 보복이 끊이지 않았던 현대사를 돌아볼 때, 한국의 진보와 보수는 과연 화해가 가능할까요? 앞에서 살펴본 용서의 개념을 한국의 이념지형에도 적용한다면 어떨까요? 이 고민은 다음주 오레스테이아 3부작에서 더 자세히 다룰 예정입니다.

      * 구본형의 아가멤논에 대한 칼럼을 링크합니다. 함께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 읽기](5) 메데이아

      2016.10.24 라봉 김만권의 정치철학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을 읽다

      1019일 김만권 선생님의 강의에서는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가 주제였습니다. 에우리피데스는 다른 극작가들과 달리 비극의 3요소라고 할 수 있는 신, 도시, 인간 보다는 인간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또한, 인간 내에 있는 사악함 보다는 시기심이나 질투와 같은 인간 본연의 감정(연애, 질투, 복수, 간계, 광기, 비애)들을 자신의 극에서 많이 다루었다고 합니다. 하나의 극 안에서 사건이 전환 되었을 때 인물의 어두운 측면을 잘 그려냈다는 뜻으로 이해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들은 운명이나 신에 대한 순응보다는 인간의 합리성으로 이 세계의 부조리를 폭로했다는 점 때문에 비극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비극의 3요소를 제대가 갖추지 않았다는 비판입니다. 그래서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은 비극 경연대회에서 몇 번 밖에 수상을 못했고, 결과론적으로 공적인 지원을 받아 비극을 상연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하기도 합니다. 다만, 그리스에서 상연횟수를 비교하면 다른 극작가들의 작품보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이 훨씬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에이루피데스의 메데이아는 모두가 아시다시피 적지 않은 막장요소가 가미 된 작품입니다. 남편이 외도를 한 것도 모자라 가족 간에 배신과 질투가 난무하고 종래에는 엄마인 메데이아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문학적으로만 읽는다면 메데이아는 인간의 배신과 질투가 만들어 낸 가족 복수극이며 인류 최초의 막장 드라마로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정치적으로 읽는다면 사랑이 정치의 기반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합니다.

      작품 안에서 사랑 때문에 발생하는 비극적인 상황들이 수 없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극에서 메데이아는 사랑 때문에 가족을 배신하고, 더 깊은 사랑이 찾아와 기존의 사랑을 버리고, 사랑 때문에 형제를 살해하고, 사랑하던 이에게 버림을 받고, 사랑 때문에 자녀를 살해하고,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복수와 거짓말을 하고, 사랑 때문에 이성을 잃기도 합니다. 이아손 또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용해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돌립니다. 이러한 이아손과 메데이아의 사랑을 기반으로 한 관계는 사랑이 허물어 질 때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둘 간의 사랑이 컸던 만큼 사랑이 무너졌을 때의 배신감과 그 배신감을 시작으로 한 연속된 비극은 가늠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메데이아가 크레온과 이야기를 나누며 내뱉은 탄식(아아, 사랑은 인간에게 얼마나 큰 불행을 안겨주는가?)과 메데이아의 불행을 바라본 코러스의 대사(사랑이 너무 격렬하게 다가오면 사람들에게 명성과 명예를 가져다주지 않는 법)는 사랑의 불행한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런 양날의 검이 정치의 기반이 된다면 어떤 상황이 될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랑과 정치에 관하여 사랑은 정치의 기반이 될 수 없다. 너무 사랑하면 객관적인 거리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정치의 기반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거리를 두고 인정하는 우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좋아하고 또 모방하기도 했던 세네카는 사랑에 대하여 사랑이란 감정 자체를 절제 할 수 없고 그래서 사람을 어리석게 만든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만권 선생님은 정치가 이루어지는 공간에서 모든 신뢰를 무너트리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하고, 복수하는 과정에서 거짓말을 서슴없이 한다고 합니다. 또한, 메데이아 자녀살해가 보여주는 것처럼 사랑이 무너졌을 때 사랑하는 이와 만들어낸 것의 파괴(자실살해)는 정치의 영역에서 시스템에 대한 파괴적 열망으로 드러날 수 있다고 합니다.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 읽기](4) 안티고네

      2016.10.17 lyh1999 김만권의 정치철학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을 읽다

      네 번째 강의 시간(10월 12일) 읽은 그리스 비극은 <안티고네>입니다. 세 번째 시간에 다룬 <오이디푸스 왕>을 쓴 소포클레스의 또다른 대표작으로, 오이디푸스의 비극 이후 그의 딸인 안티고네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안티고네는 죽은 오빠의 장례를 금지한 참주 크레온의 명령에 불복종하면서 죽음을 맞습니다. 정의를 행하려던 주인공이 그 때문에 오히려 대가를 치르게 되는 이야기는 정치철학 측면에서 정의론과 그에 관련된 '판단의 부담' 문제를 결부시켜 읽을 수 있습니다.

      <안티고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의 죽음 이후 왕좌를 놓고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집니다. 이 전쟁은 폴리네이케스가 타국의 군대를 끌어들여 에테오클레스에게 도전하는 형태로 벌어졌고, 테베 성 바깥에서 싸우던 두 형제가 동시에 전사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왕좌는 오이디푸스의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의 오빠 크레온에게 넘어가고,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에겐 성대한 장례를 치러준 반면, 폴리네이케스는 매국노로 지목하며 시신을 성 밖에서 죽은 그대로 부패하게 내버려두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명령을 어기는 자를 사형하겠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남편과 자식은 바꿀 수 있을지언정 혈육인 오빠는 그럴 수 없다'며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에 흙을 뿌려주고, 이를 말리는 여동생 이스메네와 의절을 선언하기도 합니다. 크레온은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하며 안티고네를 석굴에 가둬 자연사하도록 형벌을 내립니다. 크레온의 아들이자 안티고네의 정혼자인 하이몬이 반발함에도 듣지 않지요. 이는 비극적 결말로 이어집니다. 석굴에 갇힌 안티고네는 목을 매 자살하고, 안티고네의 시신을 발견한 하이몬도 크레온을 비난하며 칼로 스스로를 찔러 죽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크레온의 부인 에우리디케 역시 목숨을 끊습니다.

      안티고네가 겪는 갈등은 공동체와 가족 사이에서, 그리고 인간[왕]이 정한 법률과 신의 법[오늘날의 '인륜']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종종 사회의 많은 이슈를 정의와 불의의 충돌로 받아들입니다만, 안티고네의 경우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정의가 충돌한 딜레마를 보여준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안티고네가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러주든 그렇지 않든 둘 중 어느 쪽을 택한다고 해서 이를 절대적으로 나쁜 선택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어느 쪽을 택하든 왕률과 신률 한 쪽을 저버린 대가를 치러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안티고네의 비극은 정의가 확신하기 어려운 선택의 문제임을 드러내며, 죽음과 불명예란'판단의 부담'을 두려워하지 않는 안티고네의 용기는 숭고함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한편 크레온은 참주가 정의라는주제와 어떻게 연루되는지를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크레온은 왕위를 물려받을 때만해도 "통치와 입법으로 검증받기 전까지 한 인간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열린 태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갈등이 격해지면서 자신의 목소리가 곧 도시를 통치하는 유일한 법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또한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금하는 명령을 내리면서 그는 신의 권리도 침범하고, 하이몬을 비롯해 자신을 비판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요컨대 참주에게 있어서 정의란 곧 자신의 법이며, 법의 영역 밖에서 정의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이몬은 참주를 이성적으로 설득하려던 시민들이 실패한 이후 스스로 (참주와 같은) 광기를 보이며 비극적 결말을 맞는 인물인데, 안티고네의 죽음과 더불어 도시의 충고를 듣지 않는 참주가 시민들에게 판단의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정의와 정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안티고네>의 딜레마는 이후 정치철학자 존 롤스에게로 이어집니다. 롤스는 현대사회의 '가치다원주의'가 선택의 딜레마와 판단의 부담 문제를 불러온다고 지적합니다. 주어진 선택지들이 서로 다른 신념의 차원에 존재하고, 또한 모두 합당하기 때문에(또는 합당해 보이기 때문에)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의의 원칙에 '서열'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회 전체가 보편적으로 따를 수 있는 선택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롤스는 현대사회에선 전체 생산량의 성장보다 분배에서 정의의 문제가 발생한다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의 원칙을 스스로 제시합니다.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공리주의는 '쾌락은 늘리고 고통은 줄이라'는 원칙을 내세우지만 개개인의 쾌락/고통을 측정하기란 어렵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효용에만 집중하는 폐해에 빠집니다.) 이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원칙(정치원칙): 모든 이에게 평등한 기본권을 보장해야 한다

      제2원칙(사회경제원칙)

      - (a)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 사회적 우연성 혹은 타고난 개인적 능력이 분배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

      - (b) 차등의 원칙: 사회적 불평등은 모든 사람, 특히 사회의 '최소수혜자'에게 불평등을 보상할만한 이득을 가져오는 경우에만 정당하다

      이들 원칙에는 '서열'이 부여되어 있어 제1원칙은 제2원칙보다 우선적으로 충족되어야 하고, 제2원칙 내에서도 (b) 원칙은 (a) 원칙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이 원칙에 기반해 롤스는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을 이유로 기본적 자유, 개인의 인생 전망을 실현할 기회 등 기본권을 침해해선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여러 다양한 사회에서 분배의 정의가 구현되고 있는지 살펴보려면 가장 적게 분배받는 '최소수혜자'의 상황을 주목해야 한다는 결론도 이끌어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김만권 선생님의 과거 롤스 관련 강의 내용을 찾아보시면 좋습니다.)

      다양한 사회에 정의의 원칙을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롤스의 정의론은 자유주의자임에도 평등의 문제를 다룬 경우라는점에서 주목할만합니다. 또한 역사적으로는 두 번의 세계대전 이후로 잠잠해진 서양 학계의 정의론 논의를 되살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정의의 딜레마는 현대 우리 사회에서도 여러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중 황우석 줄기세포 연구 조작 사건의 경우를 보면, 한 쪽엔 논문을 조작해선 안된다는 연구윤리가 있고, 다른 한 쪽엔 장기적 국익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조작된 논문을 용인하지 않으면 국익에 해가 된다"는 주장이 선택이 가능한 문제, 판단의 부담 문제로 돌변한 것입니다. 그러나 롤스가 제시한 원칙을 적용해 보면 이러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난자 추출, 연구결과 조작 등 논문작성 과정 자체가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이유로 이를 정당화할 수 없다."

      최근 백남기 농민의 '병사' 사망진단서를 둘러싸고 불거진 논란 역시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 봐도 잘못된 판단이 논쟁의 대상으로 둔갑하는 현상이 사회 내에서 늘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의사의 사망진단서나 법원의 판결 등 사회 전체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공적 판단과 일반 구성원의 보편적인 믿음 사이에 격차가 커지는 현상은 한국을 비롯한 현대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공적 판단에 대한 신뢰가 사라질 때 우리는 차라리 인공지능에게 판단의 역할을 맡기는 게 낫겠다는 상상을 막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안티고네와 롤스의 정의론은 이 과제를 해결하는데 참고할 좋은 지점이 됩니다.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 읽기](3) 오이디푸스 왕

      2016.10.10 라봉 김만권의 정치철학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을 읽다

      그리스 비극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이 계시다면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안 들어보신 분은 없을 것 같습니다. 오이디푸스 비극은 이야기가 만들어 진 시대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충격적인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언대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리고 종래에는 자신의 눈을 스스로 해한 뒤 도시에서 스스로 떠나게 됩니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문학적으로만 읽는다면 운명을 피하지 못한 자의 비극적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05일 있었던 김만권 선생님의 강연에서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문학적 관점이 아닌 정치적관점에서 들여다보았습니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누구도 자신이 행한 행위의 결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라는 괴물을 해치우고 왕이 된 자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업적으로 명예로운 자리에 오른 자라고 할지라도, 지난날에 죄가 있으면 그에 대한 응당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예언을 통해 자신이 미래에 어떤 잘못을 저지를지 알고 있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부친살해와 근친상간이라는 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합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한 오이디푸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이디푸스는 한순간의 화 때문에 아버지를 살해하게 되고, 어머니와 근친상간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예언되었던 대로 자신의 현재의 죄(미래의 진실)와 마주하게 되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두 눈을 찌르고 도시를 떠나게 됩니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도 마찬가지지만 그리스 비극에는 합리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그리스 비극에서 주인공들은 최대한 이 비극을 이성적으로 접근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지만, 끝내 이 비극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고 책임을 지게 됩니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이는 자신이 절대 의도하지 않았던 행위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교훈을 남깁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이디푸스 이야기 또한 (좀 전의 이야기와는 결이 다르긴 하지만)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했음에도불구하고 결국 죄를 지은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죄(진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함을 시사합니다, 이전에 이야기 했다시피 실제로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내리는 처벌로 자기 자신의 눈을 찔렀고, 스스로 도시를 떠나게 됩니다.



      68혁명 그리고 부친살해

      오이디푸스 이야기와 함께 이날 강의의 또 다른 주제는 68혁명 이었습니다. 68운동은 시대를 바꾼 혁명으로서 종종 부친살해로 설명되곤 합니다. 긍정적으로 봤을 때에는 부친이라는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억압적인 체제에 항거한다는 의미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로는 아버지를 죽인다는폭력의 개념으로 설명이 되기도 합니다. 68혁명은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그리고 (약간은 결이 다르긴 하지만) 중국의 문화대혁명까지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항거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변화를 위해 폭력을 사용했고, 이 변화를 위한 폭력 사용의 합당함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있습니다. 실제로 68혁명은 당시 장기화 되었던 폭력으로 인해 서구에서는 테러리즘으로 보이기도 했고, 중국에서는 실제 엄청난 살생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폭력으로 변화를 만드는데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이 사용했던 폭력의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는 것 입니다. 결국 이들이 사용한 폭력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변화라는 이름으로 가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 읽기](2)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2016.10.2 lyh1999 김만권의 정치철학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을 읽다

      앞으로의 강의를 개괄한 1강에 이어 2강 시간엔 고대 그리스 비극 첫 작품으로 아이스킬로스의 작품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를 다뤘습니다.

      아이스킬로스는 지금까지 작품이 전해져내려오는 비극 작가 중 한명이고,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를 비극 3부작으로 만들었습니다. 잘 알려진대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줬다는 이유로 제우스에 의해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먹히는 형벌을 당합니다.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인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바위에 묶인 프로메테우스가 이후 헤라클레스를 낳는 이오와 조우해 제우스의 불길한 미래를 예언하고, 마지막엔 바위 전체가 붕괴해 깔리는 (익숙한) 전개를 그대로 따릅니다.

      정치철학적 시각에서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참주정'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참주정은 (완전히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지만) 오늘날 독재정치의 형태로 구현되고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에게 형벌을 가한 제우스는 다른 신들과 인간 위에서 전지전능한 수준으로 힘과 폭력을 휘두르는 참주가 됩니다. 때문에 첫 대목에서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는 같은 혈육인 프로메테우스를 자기 의지에 반하여 바위에 묶게 됩니다. 이때 추상적 개념인 '힘과 폭력'이 무대 위 등장인물로 형상화되어 헤파이스토스에게 제우스의 명령을 따르라고 협박합니다. 정치의 수단이 '말'인 반면 참주가 즐겨 쓰는 수단은 힘과 폭력이며, 연민의 감정이 없고, 권력의 편에 서는 등의 특징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반면 오케아노스처럼 제우스에게는 반대하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프로메테우스에게 제우스에게 복종하라고 설득하는 신도 등장하고, 제우스에게 적극적으로 순종하면서 프로메테우스에게 더 큰 파국을 경고하는 헤르메스 같은 신도 등장합니다. 이들 신들은 참주정치 하에서 지식인들이 취하는 다양한 태도(저항/소극적이고 나약한 순종/노예와 같은 복종 등)를 드러냅니다.

      한편 프로메테우스가 만나는 이오는 제우스에게 유혹을 받았으나 헤라의 질투로 인해 먼 길을 떠돌고 있는 중입니다. 이오는 참주가 사랑하는 여자들이 어떤 운명에 처하는지를 보여주는 경우로, 참주의 사랑을 얻은 결과가 다른 이들의 시기와 질투에 시달리는 것임을 경고하는 캐릭터입니다. 또한 비극에 늘 등장하는 코러스들은 이 작품에서 프로메테우스의 사연을 들으면서 그에게 연민을 드러내고, 그의 곁을 끝까지 지키다가 프로메테우스의 비극적 운명을 함께 당하게 됩니다. 이들은 참주의 통치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그에 함께 맞서는 도시의 시민들을 상징합니다.

      이 작품에서 참주정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참주정 하에서는 오로지 참주만 자유를 누린다. (2) 모든 사람은 노예다. (3) 참주는 배신을 일삼고 친구를 비롯해 아무도 믿지 못한다. (3) 자의적으로 법과 정의를 행사한다. (5) 정치가 책임에 대한 담론임에도 불구 참주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6) 모두가 자신을 사랑하길 원하고, 프로메테우스 같은 다른 이가 사랑을 받음으로써 자기 권력에 위협이 되는 일을 참지 못한다. (7) 헤파이스토스 같이 참주를 돕고 따르는 자도 위험에 처한다. (8) 참주는 말을 통치 수단으로 쓰지 않으므로 말이 통하지 않고 설득당하지도 않는다. (9) 참주를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고통을 주고 이오 같이 참주가 사랑하는 이들도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공포를 퍼뜨린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 같은 참주에게 저항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참주에게도 바른 조언을 하는 게 지식인의 역할이라는 것이지요. 이로 인해 지식인은 고난을 자초하고 그가 도운 시민들로부터 외면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역할에 충실헤야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참주에게 순종할 때 지식인이 처하는 가장 큰 불행이란 자기보다 못한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플라톤 역시 그런 지식인의 예입니다. 플라톤의 유명한 '동굴의 비유'에서 먼저 동굴에서 풀려나 태양빛을 본 지식인은 진리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사물의 그림자만을 보고 있는 동굴 속 사람들에게 사실을 알리려고 동굴로 돌아갑니다. 또한 플라톤은 (민주정이 아니라) 철인 통치를 선호했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지배자가 철학을 사랑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참주 디오니시오스를 찾아가 정치적 충고를 전했다가 분노를 사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속 지식인상은 이후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와도 연결됩니다. 죽음을 비켜가려고 했다는 이유로 저승에 끌려간 시지프스는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계속 밀어올리는 형벌을 받습니다. 자기 자신만의 기준을 찾기 위해 산 속 동굴에서 수련하던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화를 빚음에도 사람들의 저잣거리로 돌아가기를 반복합니다. 모두 현상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계속 변화를 만들기 위해 시도하는 인물들입니다.

      현재의 문제를 바꾸고자 하는 시도는 대개 '그렇게 해도 소용없다'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회의론에 부딪힙니다. 이는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운영, 시민운동 등에서 종종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동굴의 비유, 차라투스트라, 시지프스 등을 통해 우리는 '비효율성'의 몰락을 자초하면서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인물들을 보게 됩니다. 이들이 받는 고통은 '무엇을 해야 옳은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때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사건들이며, 나아가 정의가 곧 비극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는 감상도 갖게 합니다. 또한 '변화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변화를 추구하는 목적 자체를 무너뜨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줍니다.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 읽기(1), 아리스토텔레서의 <시학>

      2016.9.22 라봉 김만권의 정치철학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을 읽다

      자유인들에게 왜 연민과 공포가 필요했을까?

      자유인들의 도시(국가). 그리스 아테네 하면 가장 떠오르는 말이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특정 전문가가 아닌 자유인(시민)들의 토론과 합의로 법이 만들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문명을 발전시켜 나갔다. 당시, 아테네 시민들은 자신들이 합의한 사항()에 대하여 성벽을 지키듯이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 할 정도로 자신들이 만든 법에 대한 준수를 강조했다. 시민들이 법안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고, 법에 대한 준수를 강조했다는 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의지하지 않고 법에 의지하는 것을 정치의 상태로 본 것이다. 이와는 반대 상태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야만적인 것으로 인식했다. 자유로운 시민들의 합의(법에 대한 준수)는 곧 아테네 시민들에게 공동체 안에서의 주인의식을 심어주었고 자부심을 가지게 했다.

      그런데 이런 자유인들의 공동체에서 시민들에게 돈을 주고서라도 비극을 보게 만들었다고 한다. 왜 아테네에서는 다소 납득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을까. 그리고 이러한 비극들을 시민들에게 접하게 하는 것이 아테네에 무슨 도움을 준 것일까

      비극의 필요성

      아테네 비극에는 간사한 인물 혹은 이간질 하는 인물들이 잘 등장하지 않는다(우리가 기성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비극 작품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하지만 아테네에 있었던 비극 작품 속 주인공들은 이런 장치들 없이도 비극적인 상황을 겪게 된다. 주인공들이 과거에 했던 선한 행동들조차도 미래에 비극적 상황과 연결되는 경우가 있고, 비극적 상황을 인식하고 벗어나고자 노력해도 실패하는 모습들을 목격할 수 있다. 이러한 아테네 비극의 특징은 비극의 당사자인 주인공들이 어떠한 선택과 행위를 하든 비극적인 결과가 나왔을 때 당사자들이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하는 위치에 있음을 이야기 한다. 모든 불행은 자신들이 했던 모든 선택과 행위에서 연유하며, 후에 이로 인한 책임에서(혹은 이러한 책임을 지우는 운명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한다.

      아테네 비극 작품들의 이런 모습은 현실 정치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정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선택한 행위에 대해 누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공동체를 이끄는 정치지도자부터 공동체에 속한 단순한 구성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적용된다. 다시 말해서 정치는 지도자의 문제가 아니라 구성원들 각자가 어떠한 방식으로건 결과에 대하여 자신들이 했던 선택과 행동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함을 이야기 한다. 그것이 선한 선택이든, 악한 선택이든 간에 말이다. 그리고 아테네의 비극에서는 이러한 정치에서의 책임의 중요성을 의 형태로 풀어낸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비극 작품을 쓴 작가들의 면모를 보면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아테네 도시 내에서 나름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정치가들이었다. 비극 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시민의 자율성을 형상화 했고, 이것을 교육적 목적으로 활용했다.

      또한, 책임을 진다는 것을 통해 아테네의 시민들이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우리라는 존재로서 같은 의식을 반드시 공유함을 이야기 한다. , 비극은 자유인들이 정치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든 하나의 교육 프로그램이었다고 볼 수 있다.

    놓치지 마세요

    참여연대 회원 30% 할인혜택

    참여연대 후원회원(월 1만원 이상 후원)에게는 수강료 30% 할인혜택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