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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소개 |
식민지 시기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학술연구는 가능하지만 그 전제 중의 하나는 ‘독립운동가’로서의 공산주의 운동가를 연구한다는 것입니다. 독립운동이 숭고한 만큼 공산주의 색채의 독립운동도 인정은 하지만, 공산주의 그 자체에 대한 주류적 서술의 입장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북한과 소련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투영이지만, 이들이 북한 정권과 스탈린주의에 의한 ‘숙청’의 희생을 당한 점을 생각하면 이성적 비판이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던 운동 그 자체의 의미를 국제적 맥락에서 되돌아보는 것이 의미 있는 작업일 듯합니다.
중국 공산운동이 20-30년대에 중국 특유의 혁명적 근대성을 창조했듯이,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민중의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를 대변하면서 국제적 시야까지 겸비하는 입장에서 조선 특유의 대안적 근대를 선구적으로 개척했습니다. 이들의 '붉은 연애'론은 현모양처론이나 단순한 지유연애론과 또 다른 근대적인 남녀관계의 상을 확립했으며, 김태준의 조선문학사 연구는 '전통'에 대한 진보적인 전유의 가능성들을 내보였습니다. 박치우 같은 공산계 철학자들은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접근의 효시를 보였고, 임화는 진보적 입장에 서서 한국 근대 문화 성립사를 체계화시켰습니다. 비록 공산주의 운동가는 아니더라도 사회주의적 입장에 선 김사량은 다민족사회에서의 소수자들의 주체성 등 현재로서도 대단히 시의적절한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문학적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이처럼 1920~30년대 공산주의 운동은 현재로서도 의미가 매우 큰 대안적 근대의 지평을 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강좌는 국제적 맥락 속에서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를 다시 읽어가면서, 이 시기 운동이 이룬 성취들의 현재성을 되새겨보려고 합니다.
강의 일정 |
날짜 |
순서 |
주제 |
6.29 |
1강 |
1920~30년대 국제적 맥락에서 본 조선 공산주의 운동 |
7.6 |
2강 |
일제시대 공산주의 운동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
강사 소개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 인문학부 교수, <붓다를 죽인 부처>, <당신들의 대한민국> 저자
강의 정보 |
일 시 : 2016. 6. 29 ~ 7. 6 매주 수요일 오후7시 ~ 9시30분, 총2회
장 소 :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
참가비 : 3만원 (참여연대 회원 30% 할인)
후기 2
잊혀진 혁명가들 : 조선 공산주의 운동과 인물들 2
7월 6일 진행된 박노자 선생님의 <조선 공산주의 운동과 인물들> 두 번째 강의 시간입니다.
평소 자주 거론되는 주제가 아니다보니 생소하게 여기실 분도 많으리라고 생각되는데요, 두 번째 강의 시간은 첫 번째 시간에 이어 공산주의 운동가들을 추가로 소개하면서 지금 시점에서 이들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탐색하는 방향으로 진행됐습니다.
1. 공산주의의 내용이 이상적이지만 실현 불가능한 일종의 유토피아를 그리는 것으로 종종 인식되지만 박노자 선생님은 조선시대 공산주의 운동가들의 주장에 의외로(?) 현실적인 부분들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지금 시점에서 봐도 시급히 이뤄야 할 유의미한 주장들이 많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노동자 해방, 노조 등 결사의 자유를 주장한 것이 그렇습니다. 지금 한국은 집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노조 활동가에게 징역형을 선고하는 나라이죠. 토지개혁 같은 문제도 그렇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토지개혁을 거론한 것은 조선인 대부분이 농민(소작농)이었고 식량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지금 한국사회를 봤다면 주택문제 해결을 의제로 제시했을 겁니다.
그 외에도 기층대중의 권익이 보장되는 근대, 철저한 밑으로부터의 민주화, 온전히 독립된 민족국가 실현, 민중적 활동의 자유 등이 그렇습니다. 다소 추상적으로 들리는 이야기일수도 있겠습니다만,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 분단체제 및 미국보호령 상황 해소, 경찰탄압 중지, 학생들의 완전한 자유연애, 부동산 부자에 대한 과세 강화 등등의 목표가 이들 구호와 연결돼 있고 아직 한국에서 실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2. 임화의 근대론
당대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문학가로 꼽히는 분이죠? 임화가 활동하던 시대 그가 가졌던 의문은 왜 식민지조선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 하는 점이었다고 합니다. 공산주의 이론에 따르면 탄압받는 '밑'(프롤레타리아)으로부터의 계급운동과 혁명이 자연스럽게 발생해야 하고, 그러자면 당시 식민지조선만큼 '약한 고리'도 없지요. 그러나 현실은 일본이 세계대공황을 파시즘으로 극복하려 하면서 공산주의에 탄압을 가하고 오히려 많은 조선 인사들이 전향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임화의 답은 조선의 근대가 '이식된 근대'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문학이란 '상부구조'가 발전하기 위해선 토대 역할을 하는 '하부구조'가 존재해야 하는데, 조선은 태생적 결함으로 자본주의를 스스로 탄생시킬 수 없었고, 일본을 통해 이를 이식받아야 했습니다. 임화는 신소설이나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도 일본에서 이식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결과 조선의 근대화는 압축적이고 파행적인 양상으로 진행됩니다. 정작 프롤레타리아들은 계급운동이나 혁명에 관심이 없고 일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 운동의 방향을 놓고 파벌다툼을 벌이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죠. 프롤레타리아 문학에서도 실제 계급현실에 기반하기보단 도식적이고 관념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됩니다.
몇몇 아시아 국가들이 '토착적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다고 평가받는 현재 임화의 '이식된 근대론'은 지나치게 서구중심적이라는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후 한국의 지식담론 역사를 보면 그의 비판을 곱씹어볼 지점들이 분명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컨대 과거 한국에서 유행했던 종속이론 같은 경우도 한국의 노동계급이 자연스럽게 생산한 것이 아니라 지식인들이 외부에서 수입해서 한국의 상황에 적용하려 했던 것이죠.
3. 허정숙, 주세죽, 박진홍 등 "붉은 여성"들의 연애론
여성 혐오 문제가 뜨거운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지금 강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대목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성문제에 있어서도 가장 급진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제기를 했던 이들은 여성 공산주의자였다고 합니다. 과거의 정조 개념을 타파하고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남녀평등을 주장함은 물론, 자유연애를 지지하면서도 그 안에 존재하는 한계들도 비판합니다.
이들의 연애론을 들여다보면 이렇습니다. 이들 여성 공산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는 "운동가"였습니다. 이들은 운동하던 남편이 감옥에 들어가자 다른 동지와 연애 관계를 맺거나(허정숙), 부부간에 호칭을 "집사람"으로 통일하는 등(박진홍) 남녀평등을 일상에서 실천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나아가 동지와의 연애 후 허물없이 동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관계가 단수일수도 복수일수도 있다고 보는 태도도 나타납니다.
당시 공산운동이 남녀평등을 지향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성의 역할은 아지트 키퍼 같은 부차적인 수준으로 제한하는 경우가 흔했다는 것, 남성 공산주의자들도 연애보다 계급운동을 우선시하면서 금욕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젠더 문제를 유보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이들의 연애론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굉장히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들 신여성 자체가 조선사회에서 매우 드무었을 뿐더러, 그 때문에 매체 일각에서는 이들의 "붉은 사랑"을 퇴폐적인 가십으로 다루려 하는 시각도 나타납니다. "여성이 이렇게까지 막 나갈줄이야" 식의 선정적인 어조의 기사가 많았던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주장은 현재에도 유효한 것이 많습니다. 허정숙은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기사에서 여성들이 집안에선 아버지/남편, 집밖에선 노동자로서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으며 그래서 여성의 경제적 독립이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한편 현재 한국 경제 역시 여성들에게 집중적으로 비정규직을 떠맡기거나 무급노동(가사노동, 가족의 사업 돕기 등)을 강요함으로써 작동하고 있습니다.
김옥엽이 "청산할 연애론"에서 쓴 자유연애 비판도 눈여겨봐야 합니다. 자유연애가 봉건시대에 비교했을 때 진보적인 것은 사실이나, 자유연애 개념에는 다음과 같은 한계가 있습니다. 첫째 자유연애 자체가 어느 정도 재산을 지닌 유산계급이어야 할 수 있는 것이고, 둘째 아무리 자유연애를 부르짖을지언정 실제 결혼에서는 계급의 논리가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자유연애가 일상화된 지금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3. '전위당 이론'과 유기적 지식인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에 혁신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반면 비판받을 지점이 있는 것도 사실인데요, 당과 대중을 수직적인 관계로 놓는 계몽주의 패러다임에서 끝내 자유롭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파업을 지도자에 의해 "영도"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는 인식, 운동을 통해 "대중을 획득한다"는 표현, 개인숭배까진 아니더라도 레닌 같은 지도자를 피라미드의 상위 위계에 올려놓는 사고방식 등이 그렇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공산운동이 보였던 문제점들이 이후 한국 좌파운동에서도 반복돼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학벌의식이나 운동가들이 노동자 위에 군림하려는 의식, 여러 운동 노선 간의 갈등, 운동 안에서 민주성이 얼마나 확보되었는가 하는 의문 등이 그 예입니다. 이에 대한 비판이 당시 공산당에서도 제기됩니다. '당이 지식인에 의해 영도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1930년대엔 일선 노동자 출신 운동가들이 그람시적 의미의 '유기적 지식인'으로서 공산운동을 주도하게 됩니다. 철도 노동자 출신으로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자리까지 오른 차금봉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5. 박치우의 민족주의 비판
박치우는 박노자 선생님이 지금 시점에서 재발굴할 가치가 높다고 꼽은 공산주의 논객인데요, 1930년대와 해방 이후 신문 칼럼을 통해 자유, 파시즘, 민족주의 등의 개념을 흥미롭게 다뤘다고 합니다.
박치우의 관점에서 근대는 잠재적으로 파시즘을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파악됩니다. 자본주의의 위기 단계에서 자본주의의 문제점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파시즘의 도래를 막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민계급의 자유를 통해 움직이는 자본주의는 이 과정에서 시민들을 조직 안에서 '통제'하려고 드는 자기부정에 빠집니다. 특히 최근 영국의 브렉시트 논란처럼 몇몇 국가들이 다시 국가경제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박치우의 관점에 비춰보면 이들 현상이 신자유주의의 위기가 부른 일종의 '퇴락'일 수 있다는 것이죠.
박치우의 민족주의 비판도 파시즘이 민족주의를 동원한다는 지점에서 나옵니다. 그는 타이나 폴란드 등을 주목하면서, 자기 국가를 '피의 공동체'로 부른다는 점에서 이들 국가를 움직이는 지배이데올로기가 파시즘이라고 봤습니다. 이들 국가처럼 식민지화를 겪지 않은 후진사회는 자연스럽게 파시즘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박치우는 파시즘이나 극우민족주의가 민족을 "피"나 "흙" 등으로 정의하지만 실제 민족은 "의식", 즉 "자각"의 공동체라며 민족성의 긍정적 의미를 살리려면 민족문화부터 발전돼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6. 결론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당대 조선에서 계급/민족/노동/여성/이성 등등의 가장 충만한 해방을 추구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판적 자율성을 확보한 개인상을 추구한 점, (파시즘의 특성인) 신비주의를 배격한 점 등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번 강연을 통해서 살펴본 공산주의 사회세력은 해방 후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소멸했다는 점이 한반도 현대사의 비극이라는 게 박노자 선생님의 지적입니다. 남한에선 반공의 이름으로 탄압받았고, 월북한 이들도 북한에서 자기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덧붙여 이번 강의를 통해 언급된 인물들에 대해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좀더 자세한 자료를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드라마에서 중요하게 언급된 인물도 있고, 박헌영과 주세죽의 연애사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잊혀진 혁명가들 : 조선 공산주의 운동과 인물들> 1강
잊혀진 혁명가들 : 조선 공산주의 운동과 인물들 1강
6월 29일 수요일, 박노자 선생님의 강의가 참여연대 아름드리홀에서 진행됐습니다. 여유를 두고 준비한 자리가 모자를 정도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수강하셔서 시종일관 열기가 느껴졌습니다.
이날 강의를 통해 조선시대 공산주의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오해와 실제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 아래는 박노자 선생님의 강의를 필기한 내용을 정리합니다.
왜 조선 공산주의인가
식민지시대의 공산주의와 조선의 공산주의는 다른데 제대로 된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모스크바에서는 중국과 더불어 조선이야말로 혁명적으로 공산주의가 발현된 나라였다고 평가했으며 조선 공산주의의 운동역량에 상당한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1925년 4월 20일 조선 공산당 창당 이후 당원은 400명 정도였습니다. 당시 인구에 비해 활동하는 공산당원의 수가 적은 편이었습니다. 많은 탄압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지식인들은 친 공산주의자들이 많았고 대부분 사회주의에도 친화적이었습니다. 수는 적었지만 영향력 부분에서는 작지 않았습니다. 이들을 통해 조선의 공산주의는 대중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지도자의 위치에서 있었던 친 공산주의자들 덕분이었습니다.
당대인들의 입장을 이해하기위해 우리는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조선 공산주의에 대한 오해
첫 번째 오해는 공산주의는 망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현재까지 실제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 통치층이 상당부분 계승되기도 했으며 러시아는 소비에트 체제로 가야한다는 것에 50% 이상이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망했다는 표현이 아닌 혁명이 보수주의 체제에 젖어들어 자본주의 체제에 영입되었다고 봐야할 겁니다.
두 번째, 공산주의 자체가 유토피아를 설정하고 시작된 것이라는 오해입니다. 하지만 당시 실제로 구체적 계획이 논의됐었으며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었으며 조선의 독립에 대해서도 얘기할 정도로 대중적이었습니다.
조선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혁명가들을 통해 오해와 실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현실적, 구체적 상황인식
1) 조봉암
화요계로 유학파 출신이었으며 원칙주의자에 계급이념이 투철했습니다. 1925년, 그는 조선혁명해서 공산주의, 민중민주주의를 도입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앞섰다고 평가를 받았고 결국 강령을 수정했습니다. 민족혁명을 통해 독립을 하고 민주혁명을 통해 85%의 농민에게 토지를 재분배 하자는 주장을 했고 이는 당시 다수 조선인들이 생각했던 새로운 세상의 모습이었습니다. 당시의 공산주의가 얼마나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박헌영
박헌영의 “8월 테제”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쟁취해야 한다는 것을 기치로 내걸었습니다. 토지를 민중에게 돌려주고 대규모 자본을 국유화 해 운영해야 하며 친일파를 압박해서 재산을 몰수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민주민족혁명에서 근대적 기초를 쌓아 공산혁명을 이뤄야 해방이후에도 유지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주장은 좌파와 우파에게 동시에 비판을 받았습니다. 좌파에게 두 단계 혁명은 덜 급진적이기 때문입니다. 국가 간 연속된 혁명이 아닌 한 나라에 국한된 혁명이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패착인 지에 대해서는 재평가가 되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재분배 체제이며 핵심부의 노동자들은 국민국가가 먹여 살리는 구조이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최근 브렉시트만 해도 65%의 노동자가 찬성했는데 이는 국민국가 안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고 싶다는 욕구 때문입니다.)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다양한 시선
3) 이재유
이재유는 국내파 혁명가였습니다. 그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민주주의민족혁명 단계에서 사형제 폐지와 반노동악법 폐지, 정치집회의 자유 등과 함께 노동자들의 경영참여를 요구했으며 이를 슬로건집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는 30년대 노동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슬로건에는 학생들의 교과서 선택의 자유와 의무적 종교교육 폐지 등이 있었으며 노동자들의 노조결성의 자유와 노동자 경영참여, 동일노동 동일임금, 1년 단기계약제 폐지 등이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1930년대 주장들은 지금도 실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얼마나 구체적으로 공산주의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는지 확인이 가능합니다. 이재유는 조선의 독립요구와 함께 국제적 연대도 함께 주장했습니다. 소비에트 독립사수와 대만의 독립촉구, 일본노동대중과의 연대 등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국제연대는 공산주의자의 조건일 뿐 양상은 다양했습니다.
4)김찬
김찬의 경우 국제연대에 비관적이었습니다. 그는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민족의식이 뚜렷한 민족적 공산주의자로 분류됐습니다. 이미 1925년 조선 공산당 창당시절부터 일본 공산당과의 협력에 비공식적으로 반대를 했으며 일본 공산당과의 제휴는 일본주의에의 항복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5) 김천해
김찬과는 대비되는 노동자 출신으로 일본에서 노동자로서 이해관계에서 시작됐습니다. 국제연대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일본과 노동 연대투쟁을 했으며 1국 1당의 코민테른의 원칙 또한 받아들였습니다.
조선 공산주의와 코민테른의 관계
6) 조동호
조선공산당 제1대회에서 코민테른에서 공산당 대표자로 선출된 조동호를 통해 조선의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었는데 이는 지원금 신청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조동호는 코민테른에 민족차별, 경찰폭압, 동양척식회사, 농민의 몰락 등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코민테른의 조선 관련 의식은 이와같은 조선 공산주의 혁명가들의 보고서를 종합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코민테른은 조선의 조선인들과 연해주의 고려인들에게 조선의 상황을 전달받았습니다.
(당시 공산주의는 현대판 사대주의라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공산주의자는 험한 길이었으며 혁명가들은 애국을 하기 위해 스스로 공산주의를 택했습니다. 그들에겐 조선해방이 가장 큰 목적이었습니다. 단 모스크바와는 후원자와 피후원자의 관계였습니다. 코민테른과 조선의 공산당은 주체적 관계맺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대주의가 아닌 지식과 돈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코민테른은 정세에 맞는 정책을 지시했으나 1930년 초반 이후 코민테른이 스탈린의 외교적 도구로 전락하면서 역기능이 심화됐습니다.)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성취와 한계
식민지 시대 공산주의 운동은 타 아시아의 공산주의 운동과 달리 성공이 어려웠습니다. 1920~30년대 조선이 일본 치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시행착오를 거쳐 합리적인 선택을 했으며, 농민과 노동자 사이에 공산조직을 심고, 민중 공산주의 조직을 심고, 좌파이념의 대중화에 중점을 두고 결실을 맺었습니다. 운동가의 대부분 해방이후 운동에 긴밀하게 연결됐으며 진보당을 이끈 조봉암을 포함해 70년대 급진운동의 동력이 됐습니다. 당시 혁명가는 공산운동 출신이거나 식민지시대 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결국 조선 공산주의 운동은 장기적으로 급진 운동의 씨앗을 뿌렸고 이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국제연대노선은 합리적이었고 국내에서는 대중노선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바람직한 조선의 미래는 지금도 획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근대화 시도는 북조선에서 시도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한은 현재도 시도의 필요가 얘기되고 있을 뿐입니다. 민주민족혁명 또한 지금도 대한민국이 독립된 민족국가라 보기 힘듭니다. 전근대적 세상에 대한 바람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1951년 조선이 독립하고 조선인들이 민주적으로 5년을 신탁통치하고 이후 대통령을 뽑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자연스럽게 좌파적 근대화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