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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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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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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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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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이 짓는 “새로운 민주주의”라는 전망
첫번째 마디: 안철수 현상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리 사회에 몰아쳤던 안철수 현상. 안철수 현상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바라는 새로운 정치는 무엇인가?
민주주의를 투표로 승부를 가르는 이긴 자를 위한 게임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서로가 함께 공존하는 정치공동체를 구성하는 일로 바라볼 수 있을까?
두번째 마디: 시민은 대안적 정치주체인가?
우리 정치 일상의 모든 곳에 스며있는 국민이라는 용어, 권력에서 소외된 자들마저 잃어버린 민중이란 용어. 익숙하지만 낯설게만 느껴지는 시민. 시민은 누구이며, 새로운 대안적 정치주체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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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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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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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치는 무엇을 잃어버렸나
첫번째 마디: 민주주의의 상실
청중민주주의가 우리 진보 안의 민주주의 모델이 되어버린 현실. 어떻게 우리 진보 안의 제도권 대항민주주의 세력은 참여민주주의를 멀리하게 되었을까?
두번째 마디: 진보의 상실
운동과 정치사이에서 길을 잃은 우리 진보의 모습을 돌아본다.
닫힌 진보의 열린 참여를 향한 투쟁? 진정한 참여의 의미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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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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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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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정치는 왜 위기에 빠졌는가
첫번째 마디: 상실한 정당
기존의 양당체제 속에 붕괴되어 버린 우리 정당정치의 현실. 우리 정당정치는 왜 위기에 빠졌는가?
우리는 정당을 구하기 위해 정당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가?
포스트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그 위기를 진단하고 대안을 찾아본다
두번째 마디: 선거제도와 우리 정치
우리 정당정치의 현실이 우리의 선거제도와 연관되어 있다고?
그렇다면 선거제도의 무엇이 우리의 현실을 만들었고,
어떻게 선거제도는 개혁되어야 할까?
제3당에 대한 전망은 선거제도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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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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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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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의 시대, 시민정치란 무엇일까?
첫번째 마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뀐 환경은 정치에서 어떤 의미일까?
왜 이런 환경의 전환이 전통적인 조직을 대신해
네트워크라는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냈을까?
첫번째 마디: 시민정치 3.0
일상에서 저항의 시민들이 엮어가는 네트워크 시대 시민정치 3.0
시민네트워크는 산업사회의 노동계급을 대신할 대항 정치주체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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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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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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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정치와 정당정치를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 1
첫번째 마디: 시민사회와 정당
인민이 형성하는 정치의 두 축. 시민사회와 정당. 양자는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시민사회는 정치에 중립해야 하는가? 정당과 시민사회의 경계는 어디인가?
두번째 마디: 시민정치와 정당정치의 커플링
저항시민이 주권시민을 만난다. 제도권 대항민주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정당정치 중심 모델에서 벗어나 시민정치와 정당정치가 서로 협력하는 정당-시민모델 이론과 실천을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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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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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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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정치와 정당정치를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 2
첫번째 마디: 네트워크 정당이란?
시민운동을 통해 혜성같이 등장한 오바마. 오바마를 가능하게 했던 무브온 운동은 무엇일까? 네트워크 정당은 어떻게 가능한가? 한계는?
두번째 마디: 사회운동과 결합된 새로운 정당
기존 정당을 넘어 직접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독일의 해적당, 스페인의 포데모스는 어떻게 등장했는가? 이들에게 지속가능한 미래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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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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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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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첫번째 마디: 샌더스와 코빈
시민정치를 통해 어떻게 정당을 강하게 만들 것인가?
정당은 어떻게 시민정치를 수용해야 하는가? 샌더스와 코빈을 통해 돌아본다
두번째 마디: 샌더스와 코빈을 기다리지 않는
샌더스와 코빈을 만들 수 있는 시민정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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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3
<선거제도와 정당> 3강
<선거제도와 정당>
3/31일 목요일은 김만권 선생님의 "시민정치와 정당정치가 함께하는 민주주의 새로 짓기" 의 세번째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선거제도와 정당"에 대한 강의가 진행되었으며 강의 자료를 바탕으로 내용을
정리하여 작성해보았습니다.
"선거제도와 정당" 이라는 주제에서 먼저 봐야 할 것은 선거와 투표인데, 선거제도의 기은 귀족들이 엘리트 즉,
통치자를 뽑는것으로 이는 오늘날과 비슷한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이 선거를와 투표를 통해 승자와 패자가
나뉘게 된다. 현재 우리나라는 승자와 패자가 명백하게 갈리는 양당제 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이에 내가 선택한 것이
뽑히지 않는 경우가 반드시 발생하게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패자의 정제성을 가지게 한다.
또한 선거제도는 매우 복잡하고 국가마다 다양한 선거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체계로 분류하기가
어려우며, 때문에 이론상 무한대를 가지고 있지만 큰 패턴을 가지고 있다.
우선 선거제도가 낳을 수 있는 기준으로 비례적, 비비례적 선거제도로 분류 할 수 있는데, 비례적 선거제도는
각 정당의 의석수를 자신들이 얻은 득표수에 최대한 근접할 수 있도록 하는것이 핵심이며,
비비례적 선거제도는 한 정당이 다른 정당보다 확실히 더 많은 표를 얻음으로써 강하고 안정적인 정부를 구성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또한, 득표수를 의석수로 전환하는 방식에 초점을 두는데 이에 세 가지 방식이 있으며, 첫번째로 "선거구 크기"이다.
이 방식에서 선거구의 크기는 한 선거구에서 선출하는 의원의 수이며, 1인 선출 상대다수제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가 있다. 1인 선출 상대다수제는 현재 미국과 영국이 사용하고 있는 방식이며 각 선거구에서 의원 한명을 선출한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는 스페인이 가지고 있으며 각 선거구에서 평균 7명의 의원을 선출하는데, 이는 정당이 너무
많아지는 현상이 발생 할 수 있다. 두번째로 "기표방식"으로 이 방법은 유권자의 투표방법을 결정하게 한다.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범주형과 순위형이 있다. 범주형은 유권자들이 투표용지에 기재되어있는 여러
후보 중 한명을 선택하는 방식이며, 순위형의 방식은 유권자가 투표용지에 기재되어있는 모든 후보 대상으로
선호하는 순서대로 순위를 표시하는 방식인데 이는 국가의 규모가 작은 경우에 운영이 수월하며 유지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당선결정방식"이 있는데 이 방식은 선거구의 크기가 클수록 비례성이 높아지며, 선거구의 크기가
작을수록 비례성이 떨어진다. 여기에 다양한 방식이 있는데 1인선출 상대다수제, 혹은 1위 대표제라 할 수 있는
"상대다수제" 방식과 대안투표제, 2회투표제의 대표인 "절대다수제" 방식이 있으며 2회투표제는 현재 프랑스에서만
사용하고 있다. 또한 전세계 50%의 국가가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는 "비례제"방식과 마지막으로 민주화 과정에 있는
국가에서 많이 사용되어지는 "혼합형 선거제도"가 있다.
"1인 선출 상대다수제"에 대해 알아보면 단순한 제도이다. 당선되기 위해 그 지역에서 최대득표를 얻으면 되며,
때문에 과반수나 절대다수표를 획득 할 필요가 없다. 이 제도는 소선거구제에서 시행되는데 주로 양당제를 낳는
성향이 있기에 안정된 정치체계가 형성 될 수 있다고 주장되며, 유권자가 명확한 한명의 선거구 대표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 중 25%의 지지도 없이 당선 될 수 있는 경우가 발생하며 이로 인해 대표성의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단점을 가지게 된다. 이 제도는 한사람이 이기는 구조이기 때문에 연합해야하며, 때문에 제3당은
어려움을 겪게 되어 계속 연합해야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절대다수제 혹은 대안투표제" 이 제도는 한 선거구에서 대표자를 선택하되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의 50%이상의
표를 얻을 수 있도록 한다. 허나 프랑스처럼 2차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득표최하한선을 설정하는 경우도 있기에
절대다수가 꼭 50%를 의미하는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2회 투표제는 두번의 다른 기회를 통해 투표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써, 비례성을 높이는 동시에 대표자의 정당성을 높여주는 방법으로 2번째 투표를 통해 민주주의의 보루를
지키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의회의 경우 절대다수 최다득표제로 최소득표율인 12.5%를 얻은 후보가 2차투표에
진출하게되며 이 경우에 2차 투표당선자가 반드시 50%의 표를 획득한다는 보장이 없다.
반면, 대통령의 경우 절대다수결선투표제로 진행되는데 1차 투표에서 1,2위를 한 후보자가 2차투표에 진출하며
이 최종후보는 자동적으로 과반수의 지지를 얻게 된다. 이를 통해 대표성과 정당성이 높아지는 장점이 있지만
2번의 투표가 진행되기에 비효율적인 부분이 발생하는것이 단점으로 나타나게 된다.
독일의 "혼합형 선거제도"는 비례대표제와 1인선출다수제의 결합으로 국민이 투표한만큼 의석을 받을 수 있는
구조로 이루어져있으며, 제 1투표는 선거구에 출마한 후보에게, 제 2투표는 정당투표(정당명부)에 행사한다. 또한
선출되는 비례의원의 비율은 50%가 되도록 하며 비례의석 배출에 있어 법정최소조건은 전국 5% 이상이 되도록
한다. 이 제도는 지역구에서 의석 획득이 어려운 군소정당이 제2투표를 통해 의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또한 지역구대표와 비례대표를 같이 쓰기에 혼합형 선거제도를 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2표제를 택하고 있기 때문에 독일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비례대표가 전체의석 수의 15%, 지역구와
비례대표가 5:1의 비율로 지역구 대표의 과다를 보이고 있으며, 정당득표율은 47석 즉, 15%에 해당하는 의석만
적용되어 지역구 의원수와 상관 없는 방식으로 분배되고 3% 이하의 득표는 무효처리되어 의석을 배정받지 못한다.
이처럼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선거제도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 선거제도에 대해 생각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앞서 언급했듯이 현재 우리나라는 양당제를 이루고있는데, 이는 승자와 패자를 너무 명확히 가르게
된다는 것을 느꼈다. 때문에 패자라는 인식이 박히게 되어 3당의 필요성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 3당이 안정적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현재 선거제도가 어떤 방식으로 바뀌어야 할 지 고민해봐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우리 정치는 무엇을 잃어버렸나> 2강
<우리 정치는 무엇을 잃어버렸나>
김만권 선생님의 "시민정치와 정당청치가 함께하는 민주주의 새로 짓기" 두번째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이 강의에서는 민주주의에서 도망쳐버린 우리사회와, 민주주의 모델인 샤츠슈나이더의 "책임정당모델"과
마냉의 "청중민주주의"에 대해, 그리고 이 두 모델의 공통점인 엘리트 중심의 민주주의에 대한 강의 내용을
정리하여 작성해보겠습니다.
근대사회 이후의 대의민주주의는 "참여"라는 민주주의의 이상 대신 "제도화와 절차"를 핵심으로 보았다.
제도적으로 절차를 정하고, 그 절차를 지키는 것을 핵심이라고 보고 있다. 하여, 절차적 민주주의를 잘 표현한
<정의론>에서는 공정한 절차가 공정한 결과를 낼 것이라고하는데, 반드시 공정한 결과로 나타나진 않지만
최대한 공정하게 만들 경우 당사자들이 좀 더 받아들일 수 있어 공정성이 담보된다는것이 절차주의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절차화는 제도화와 겹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 중심은 항상 엘리트들, 대표자들만 있다는 것이
문제로 제기된다. 민주주의를 절차화의 한 부분으로만 바라보고, 대표자들의 정치로 환원하는 데 있다.
정치가 제도화 되는 것은 중요하지만 강조되다 보면 제도권 밖으로 확정되는것을 경계하게 된다. 이는 실제 오늘날
민주주의자들이 제도권 정치에 집착하여 시민들의 직접적인 참여 자체를 꺼린다.
이런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아쉬움이 잘 표현 된 개념이 셀든 월린의 "도망자 민주주의"인데 월린은 단순 제도화
속으로 환원하는 당대 민주주의의 이론과 현실에 반대하였다. 월린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정부의 형태가 아닌,
존재방식으로 바라보고 이것은 구성원들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행위자로 변모하는 정치적인 순간에
일시적으로 존해한다고 본다. 하지만 위기와 변화의 시기를 보낼 때 거리나 광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변화에 참여한 평범한 시민들은 이 순간이 지나면 그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이에 따라 "도망자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가 참여에서 멀어졌다는 비판인 동시에 평범한 시민들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정치행위자로 바뀔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전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민주주의에서 도망친 우리사회의 대항민주세력이 제시하는 민주주의 모델이 샤츠슈나이더의 "책임정당모
델"과 베르나르 마냉의 "청중민주주의" 를 닮아있는것을 볼 수 있다.
먼저 샤츠슈나이더의 "책임정당모델"은 정치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빚는 갈등의 균형을 잡는 역할을 정치정당이
해야 한다는 이론으로, 민주주의는 더 좋은 정책을 만들기 위해 정당이 서로 경쟁하면서 만들어진다고 본다.
마냉의 "청중민주주의" 모델은 미디어를 통해 의사소통에 능숙한 새로운 정치엘리트들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통치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안철수 현상"으로 볼 수 있는데, 안철수는 청년 멘토 등 기존 정치엘리트들에서
볼 수 없었던 참신한 미디어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정치를 원하는 이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얻었다.
이처럼 두 모델은 차이가 있지만 명확한 공통점이 있는데, 이는 정치엘리트와 시민들을 나누며 엘리트들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책임정당모델"은 정당엘리트, "청중모델"은 대통령, 수상 등의 국가수반의 역할을 강조하는
점에서 변화의 중심은 시민이 아닌 정치엘리트들이라고 보고 있다.
정치의 중심이 엘레트라고 믿었던 샤츠슈나이더는 민주주의는 정치지도자들과 조직이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책에 대안을 확정하는 경쟁적인 정치체계이며, 시민들은 스스로 통지하지 않고, 통치 능력이 없으며
"투표"를 통해 정치갈등 과정에 참여한다고 본다. 정당은 인민의 요구를 들어주는 집단에 가까운데, 그 요구 또한
정치엘리트들이 정해주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하여, "좋은 텔레비전을 사기 위해 텔레비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 필요가 없듯이" 시민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요구만 할 뿐 적극적일 필요가 없으며 해야 하는 일은
때가 되었을 때 투표하여 대표를 뽑는것이라고 한다. 이런 엘리트중심의 민주주의에 대해 마냉은 "새로운 엘리트의
부상과 다른 엘리트들의 퇴조"라고 말하면서 정치가 엘리트들의 중심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시민들이
선거를 통해 그 엘리트들을 다른 엘리트들도 바꿀 수 있다고 말하고있다.
이렇게 두 모델은 정치엘리트들을 선호하며 시민들을 "구경꾼 유권자"로 보는데, 이는 민주주의의 핵심을 선거 혹은
투표로 환원할 때 나타나며 부정적인 표현으로 쓰면 시민들은 투표기계, 긍정적인 표현으로 쓰면 엘리트들의 공약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한국 정당주의자들은 정당정치에 대해 아무리 불만스럽고 많은 문제가 있더라도 현재는 정당정치를 대신하는,
보다 우월한 민주주의나 공동제 운영원리는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정당 외에 정치참여엔 관심을 두지 않거나
시민사회를 동등한 파트너로 여기지 않고 있다.
최창집은 "정당정치 대힌 시민정치를 앞세웠고, 정당조직보다 네트워크 형성과 온라인상 소통이 더 우월하다고 믿는
방식의 정치는 사회 집단들을 대표하기 어려운 무정형의 정치를 낳을뿐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렇듯, 시민정치는 대안이 아니라고 말하며 "현실에서 출발하라"라고 하는데 과연 정당정치만이 상실되어버린
민주주의를 회복하는데 최선의 방법인지 생각해 볼 필요성을 느끼며. 또한 앞서 월린은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진정한 행위자로 변하는 그 정치적인 순간에 존재한다고 말하였는데, 월린이 말하는
정치적인 순간은 어떠한 순간인지, 그 순간들이 현재 사회에서 존재할 수 있는지, 부족하거나 부재한다면 그 순간을
우리 평범한 시민들이 어떻게 되살릴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시민이 짓는 새로운 민주주의라는 전망] 1강
시민이 짓는 새로운 민주주의라는 전망
2016.03.17 (목) 김만권 선생님
2014년 4월 17일에 열려고 했던 강의. 그러나, 바로 전 날 세월호 사건이 터져 열 수 없었다던 강의. 세월호 2주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한 아이의 아빠가 된 만권쌤에게 묵혀 뒀던 이야기를 꺼내 들을 수 있는 7주가 시작됐다. 언제나 그랬듯이, 강의는 한 편의 시를 읽는 것으로 시작이 됐다. 김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을 읽으며 ‘마치 그 집이 민주주의의 집 같았다’며 강의 제목인 ‘시민이 짓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시에서 영감을 받으셨다고 한다.
강의는 안철수 현상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됐다. 자고로 민주주의라는 사회에서는 시민이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필연적으로 결부되어야 하기 마련이지만 지금의 시민들은 선거철에만 반짝하고 동원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셸던 월린은 ‘도망자 민주주의’라고 얘기했다. 이 도망자 민주주의가 야기하는 문제는 대의 민주주의에서 대표자들조차 국민 또는 시민의 요구에 반응하지 않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 도망자 민주주의에서 우리는 그들을 심판할 수 있는 선거일에만 자유로운 시민이 된다.
이렇게 제도권 정치 안에서 시민들에게 반응하지 않는 정치인들을 보며 신물을 느낀 대중들은 정당이라는 기반 없이 정치를 하던 안철수에 대한 기대를 걸었다. (그리고 그는 이후 ‘새정치’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안철수의 정치’로 기대를 무너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기대는 그만큼 정당 민주주의에서 청중 민주주의로 한 발 퇴보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제도권 안 정치인이 더 이상 시민에게 반응하지 않으니 정당보다 인물이 더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집단이 투표하는 것이 아닌 한 인물에 대해 개인이 투표하는 경향이 커진 것이다. 인물의 이미지, 인물이 제기하는 쟁점들만을 비추는 미디어를 통해 주권자는 수동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이러한 청중 민주주의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당 민주주의와 시민 민주주의가 함께 어우러져야 할 것이다.
청중이 되어버린, 더 이상 적극적으로 정치를 들여다보지 않으며 이따금 자극적인 주제가 내던져질 때 냄비처럼 뜨겁게 달궈졌다 식어버리는 시민들. 우리는 ‘시민’이 대안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그러다 언젠가 ‘시민’이라는 단어에 대해 누군가는 엘리트의 단어같은 느낌에 이질감이 든다는 말을 했더랬다. 그럼 대체 ‘시민’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이며, 누구를 뜻하는 단어고, ‘국민’과, ‘인민’과는 어떻게 다를까?
첫 번째로 ‘국민’이다. 이는 나라를 이루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일본 근대화 시기에 ‘people’을 ‘국민’으로 번역하기 시작하며 우리나라에선 국민학교 등 통상적으로 쓰이는 단어가 되었다(사실은 인민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한 가지. 많은 사람들이 산업화 국가를 만든 것은 시장과 자본주의라고 생각하지만, 산업화 시기의 국가(commonwealth) 목적인 ‘공통의 부’를 만들기 위해서는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기 바빠 분열된 개인을 모으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니 ‘국민’이라는 단어는 민족국가의 형성, 그리고 산업화의 시작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어 두 번째로 ‘인민’이다. ‘people’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일상적인데, ‘인민’이라는 단어는 꽤나 낯설다. 아무래도 북쪽 사람들의 단어라는 인식이 있어서일게다. 그렇다면 ‘people’, 즉 인민이라는 단어를 일상적으로 쓰는 미국은 좌파국가일까? (이 말에 수강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national people’이라는 단어가 없는 것처럼, 인민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적 주권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앞서 민족국가의 형성 및 산업화와 맞물린 개념인 ‘국민’의 성격을 떨쳐낸 것으로 보면 된다.
마지막으로 ‘시민’이다. 해외에 나가 서로의 국적에 대해 물을 때. 많은 이들이 ‘nationality’란 단어가 아닌 ‘citizenship’이라는 단어를 쓴다. ‘nationality’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본인의 권리가 있든지 없든지 그 국적 자체를 물어보는 단어지만 ‘citizenship’은 정치적 참여권리가 완전히 보장되는 것, 즉 당연하게도 네가 사는 곳은 그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고로 안정적인 민주주의를 이룬 곳에서는 ‘국민’보다 ‘시민’이라는 단어에서 ‘people’의 속성이 더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시민’은 고대 아테네에서 탄생한 개념이다. 도시를 나누던 성벽 안에서는 인간이 아닌 법이 통치하는 곳을 뜻했다. ‘법으로 지배받는 사회에서 나쁜 법을 개선할 수 있을 때 진짜 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끝까지 얘기하는 용기를 가졌던 소크라테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철학하는 삶과 정치참여의 삶이 서로 상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처형되고 만다. 이런 그리스의 전통을 로마의 공화국이 이어받았지만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로마의 공화주의의 차이점은 민주주의가 반드시 ‘법의 지배’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셜은 시민권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이야기했다. 첫 번째로,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것 같은 시민적 시민권이 있다. 시민적 시민권은 자유주의 사상의 핵심적 가치를 담은 인신의 자유, 사상과 양심의 자유, 의사 표현과 언론의 자유, 재산 획득의 자유를 말한다. 두 번째로 정치적 시민권은 1인 1표의 보통선거권을, 마지막으로 사회적 시민권은 인간적 삶을 보장받는 복지와 분배의 내용을 받는 권리를 얘기한다. 받아야 하는 권리에서 우리가 요구하지 않는 권리로 바뀌고 있기도 하다. 언제 우리가 국가에게 그런 것들을 받았냐는 듯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사람들끼리 공존하는 곳이 바로 ‘사회’의 정의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의 가치를 두고 매일을 싸울 수밖에 없음에도 무너진 민주주의의 잔해만 가득한 이 땅에서 어떤 민주주의를 함께 지어나가야 하는 것일까?
‘시민으로의 당신은, 단순한 투표 이외의 수단 말고도 어떻게 그 부분이 되고 어떻게 당신을 표현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라고 얘기한 미국의 첫 여성 대법관 샌드라 데이 오코너의 말마따나 이를 아는 시민들이 이 시대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아니, 되어야 한다. 앞으로 7주 동안의 강의가 이를 증명해줄 수 있는 강의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