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정보
강좌 소개
“역사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살아있는 지침이다”
1. 우리는 왜 여성사를 잘 알지 못하나?
최근에 정부가 굴욕적인 협상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또다시 국가가 이들을 버린 것입니다. 극우세력들은 정부를 옹호하기 위해 이분들에게 모욕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얼마나 양심이 없는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었는지 민낯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슬픈 역사에 대해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알고 있나요?
이 문제 뿐 아니라 이 땅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많은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학교에서 배운 적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여성의 역사를 잘 모르는 이유는 바로 역사를 쓴 주체들이 남성 지배층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시각으로 기록한 역사에는 여성들의 삶이란 기록할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기록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억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제약이 있더라도 여성사를 복원해 내려는 노력은 계속되었고 이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 여인상이라는 것이 허구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 역사를 통해 현실을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여성사
사람들은 현실이 답답할 때, 그 역사적 근원을 알고 싶어 합니다. 어떤 남성들은 여성상위시대니 하면서 여성들이 억압과 차별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의 여성에 대한 인식과 사회활동에는 많은 제약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현재 대통령이 여성이라고 하지만 스스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과 감수성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단지 여성들이 어떻게 살았나를 아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역사를 통해 우리 현실의 여성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해 나갈 것인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3. 왜 여성사를 남성 역사학자가 강의하나?
주진오 선생님은 한국여성사 전공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상명대학교에서 20년 동안 한국여성사를 강의해 온 유일한 남성 역사학자입니다. 꾸준한 강의 경험을 바탕으로 함께 강의했던 여성사 전문가들과 함께 [한국여성사 깊이 읽기]를 출판했습니다.그가 여성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평소 마이너리티의 역사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여성사를 강의하면서 스스로 가지고 있던 한계를 많이 극복해 나가면서 현실의 여성문제에 대해서도 발언을 해 왔습니다. 남성 역사학자가 여성사와 여성문제를 연구하고 강의하는 것을 함께 나누는 것 자체가 소중한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이 강좌는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성문제에 관심이 있는 남성들에게도 개방되어 있으며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4.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이번 강좌는 일방적인 강의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현장 답사와 쟁점 토론 및 역사인물재판을 통해서 다양한 시각을 공유해 보려고 합니다.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결코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논리구조를 이해하는 것과 막연했던 자신의 논리를 체계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강의 일정
04.05 1강 역사 속 말없는 여성들에게 말 걸기: 왜 여성사인가?
04.12 2강 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을까? : 여왕 통치의 성공과 실패
04.26 3강 어느 고려부인의 일생 : 시집가지 않는 여자
05.03 4강 조선여인의 정체성 : 딸에서 며느리로
05.10 5강 [쟁점토론] 열녀 : 죽음인가? 죽임인가?
05.17 6강 근대 여성의 아이덴티티 : 현모양처론의 두 얼굴
05.21 7강 답사 : 국립여성사전시관 (경기도 고양시 소재)
05.24 8강 신여성의 이상과 현실 : 현실 속 해방의 꿈
05.31 9강 [역사인물재판] 나혜석 : 시대의 선구자인가, 무모한 일탈인가
06.07 10강 끝나지 않은 역사, 일본군 ‘위안부’
강사 소개
주진오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한국여성사 깊이 읽기] (푸른역사) 대표집필자.
[고등학교 한국사], [중학교 역사] (천재교육)의 대표집필자로서 한국사교과서집필자협의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강좌 정보
일 시 : 2015. 4. 5. ~ 6. 7. 화요일 오후7시~9시30분 총10회
장 소 :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
수강비 : 17만원 (참여연대 회원 30% 할인)
후기 5
<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6강
5월 10일 제 5강에서 '열녀, 죽임인가? 죽음인가?'라는 주제로 쟁점토론을 진행한 데 이어서, 17일에는 제 6강 '근대 여성의 아이덴티티: 현모양처론의 두 얼굴'을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마치 조선시대 여성상의 전형처럼 인식되고 있는 '현모양처'라는 개념이 사실 근대에야 비로소 등장하였음을 짚고 넘어갔습니다.
18세기 이후 조선에서는 가부장적 의식이 더욱 강화되는 양상이 보입니다. '시집을 간다'는 결혼개념이 기본 풍습으로 정착하였고, 열녀문 건설이나 여성 수신서 보급 등으로 여성들도 가부장적 개념을 내면화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때는 양반뿐 아니라 양인, 천민 여성도 열녀가 된 사례가 왕왕 등장합니다. 즉 열녀 개념이 하위계층에까지 퍼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또한 족보에서도 선남후녀식의, 혹은 아예 딸의 이름을 적지 않는 식의 서술이 주류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성은 이 상황에서 마냥 수동적 객체로만 살았을까요? 사실 사회의 가부장적 요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겠지만, 여성이 주체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례도 있습니다.
먼저, 독서 열풍으로 여성의 의식이 높아졌습니다. 그 배경 중 하나는 수신서/교화서의 정책적 보급으로 여성들의 언문 사용이 늘어난 것입니다. 언문은 여성이 많이 쓴다고 하여 '암글'이라고 불리기도 했지요.
반가 여성들의 경우 미래 자녀교육을 위해 출가 전에 글공부할 기회를 주는 경우가 많아, 한문까지 읽고 쓸 수 있었습니다. 유학서를 읽고, 심지어 책을 쓰는 여성도 있었습니다. 초창기에는 글을 읽고 쓰더라도 여성 자신이 그것을 숨겼습니다. 이익의 책에서 '부인은 가족을 봉양하고 봉제사, 접빈객하는 일이 있는데 어느 겨를에 책을 읽겠냐'는 말이 등장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글 읽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 여성 성리학자인 윤지당 임씨의 경우 '서책을 가까이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소설이 등장하면서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시기의 소설은 내용 전개가 흥미있고, 현실에서 이루기 어려운 판타지를 소재로 하는 경우가 많다는 특징을 보입니다. 책을 빌려주는 '세책가'나 방물장수를 통해서뿐 아니라 판소리나 이야기꾼의 낭독 등으로 소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주 독자층이 여성인만큼 여성의 구미에 맞는 이야기를 다룰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나중에는 여성 주인공이나 여성 영웅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여성의 독서가 활발해지면서 책을 쓰는 일도 늘었습니다. 여성의 작품이 사후에 문집으로 출간되기도 하고, 한중록이나 규합총서 등 유명한 여성 저서들도 이 시기에 등장합니다.
조선 후기에는 여성의 의식이 높아졌을 뿐 아니라 경제참여율도 늘었습니다. 시전에는 여성이 운영하는 점포를 뜻하는 '여인전'이 등장했습니다. 양반 여성들도 경제활동을 했습니다/ 양반 남성들이 정치/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생업에 뛰어들지 못하고 과거를 준비하는 일이 많아, 집안 살림을 꾸려가기 위해서는 여성이 일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덕무의 글을 보면 '선비의 아내는 생계를 위해 일해도 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성의 경제참여가 늘면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여성의 사례도 등장합니다. 제주 거상 김만덕이 대표적인 예인데, 상업을 통해 번 돈을 빈민 구휼에 희사한 결과 상으로 왕비를 알현하고 금강산을 유람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경제활동은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양반 여성 박씨가 동전을 주조한 사건에 대한 실록 기록을 보면 박씨가 흉악한 성품을 가졌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맥락을 보면 여성이 주체성을 보이는 것을 성품이 포악한 것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비단 조선시대뿐 아니라 현대에도 이런 모습은 있습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나아야' 한다는 가부장적 관념으로 능력있고 자기주장 강한 여성을 '기가 세다'고 깎아내리거나, '여자가 나를 무시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결국 여성이 글을 배우고 돈을 버는 것을 막으려던 이때의 관념과 큰 줄기는 같다고 할 수 있겠지요.
천주교의 등장도 여성의 의식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천주교는 여성을 중심으로 유입되었는데, 이것은 아마 모든 사람이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이념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념 때문에 국가에 의해 탄압을 받기도 했는데,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하는 것은 곧 신분제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해 중국에 처음 유입될 때 최대한 기존 유교 관습과 충돌하지 않으려 한 것과 달리 종교색을 드러내어 제사를 거부하거나 신주를 없애면서 충돌이 생긴 것, 그리고 남녀가 모여 미사를 드린다는 점 등이 탄압의 명분이 되었습니다. 또한 여성들이 동정녀로 살기 위해 여성끼리 공동체 생활을 하거나 결혼하되 동정 서원을 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윤리에 반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보편적인 종교는 아니었으며, 탄압을 많이 받은만큼 천주교 신앙이 당대 여성의 삶을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천주교 유입은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고, 여성 교육과 개화가 시작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동학도 비슷한 양상을 보입니다. 동학은 서학을 막자는 취지를 내세웠으나, 사실 서학과 유사한 개념이 많이 나타납니다. 특히 평등사상이 그렇습니다. 이런 평등사상을 기반으로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를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개화파도 서구의 여성관 변화를 수용하여 균등교육을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여성을 동등한 주체로 보았다기보다는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의 일환이거나, 여성을 남성들의 개혁을 뒷받침할 존재로 교육시키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여성교육기관 설립 운동이 진행되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은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이화학당입니다. 초기 학생의 대다수는 기생이나 고아 등 사회적 약자들이었습니다. 이는 여성교육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어 한국 단체에 의해서도 여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이것이 순성여학교입니다.
이 순성여학교가 설립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1895년 공포된 교육입국조서에 여학교 설립에 대한 조항이 있었으나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여성의 참정권, 직업권, 교육권을 주장하는 내용의 여권통문이 발표되었는데, 당대에는 상당히 급진적인 주장이어서 큰 사회적 주목과 지지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여권통문 발표는 찬양회 조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들은 성금을 모아 여학교 설립을 준비하였고, 결국 순성학교를 설립해 기초적 수준의 유학과 서양 학문, 실기 등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한계도 분명했는데, 연설회 강사진이 주로 독립협회 남성 회원이었던 점에서 알 수 있듯 여성이 담론을 주도하지 못했고, 첩의 참여 문제로 내분을 겪었으며, 순성학교도 운영난에 시달리다가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 여학교인 한성학교가 설립되었고, 1905년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여러 여학교가 설립되어 여성교육을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교육의 목적은 여성에게 평등한 교육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당대의 자료나 실제 진행된 교육의 내용을 보면, 이때의 여성교육이 현모양처를 양성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모양처론은 사실 근대적 개념입니다. 원래 조선에서 전통적 여성의 덕목은 '효부'입니다. 현모양처론은 근대적 소가족 제도의 산물이자, 일본의 '양처현모' 관념이 유입 과정에서 변형된 결과입니다. 전쟁이 잦았던 일본에서는 남성이 전쟁으로 자리를 비워도 가정을 유지하고 군인인 남편을 뒷받침할 수 있는 양처의 덕목을 강조했다면, 근대 어려움이 많았던 한국에서는 교육을 통해 미래를 도모할 수 있도록 현모의 덕목을 더 강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성이 교육을 받더라도 남성과 동등한 일자리를 구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대신 교육받은 것을 바탕으로 가정경제와 자녀교육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따라서 관립 여성교육에서도 가사를 많이 가르쳤습니다. 원래 조선의 전통적 가정관에서 자녀교육은 주로 아버지의 책임이었는데, 오히려 근대에 들어서며 이 책임조차 여성에게 떠넘겨진 것입니다. 여성교육은 현모양처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므로, 교육받은 여성이 남성의 영역을 침범하려 들 경우 가혹한 공격이 따랐습니다.
당대에도 현모양처론에 대한 비판은 있었습니다. 무보수의 여자 하인이나 다름없다는 비판과 더불어, 여성을 구속하는 모든 사상에서 벗어나자는 주장, 현모양처교육은 여성집단을 효율적으로 억압하기 위한 노예교육이라는 주장 등이 있었습니다.
<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4강
지난 5월 6일 <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4번째 강의가 있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조선시대 여성들이 살아간 모습을 다루었습니다.
먼저 같은 조선시대라도 전기와 후기 여성의 삶에 큰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갔습니다. 원래 원시 유학은 음과 양에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리학에서는 양과 음, 천과 지, 남과 여의 위치와 높이를 구별하고 이런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순리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성리학이 조선 유학 사상의 중심으로 자리하면서 조선 여성의 지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조선이 막 건국되었을 때만 해도 여성의 지위가 고려 시대에 비해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정도전은 혼인 제도에 대해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는 친영을 주장하였고, 실제로 왕실에서는 친영을 실천하여 모범을 보이고자 하였지만 실제로 사대부나 백성들은 그것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점차 여성의 행동에 제약을 더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면 경국대전에서는 과부의 재가를 금지합니다. 만약 이를 어길 경우 그 자손이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하였기 때문에, 자식이 재혼하는 어머니를 막고자 재혼 상대와 싸우는 등 웃지 못할 일들도 벌어졌다고 합니다. 같은 성종 대의 어우동 이야기에서도 여성에게 제약이 늘어가는 모습을 살필 수 있습니다. 어우동은 양반가의 딸로, 왕족과 결혼하였으나 여러 남자와의 성 편력으로 처형당했습니다. 비슷한 시대에 여성의 간음과 관련된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 시대에 갑자기 여성의 간음이 늘었다기보다는 원래 비교적 자유롭던 여성의 성적 의사결정에 대해서 갑자기 규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 외에도 국가 차원의 풍속 교화로 여성의 행동에 제약이 늘었습니다. 부녀자의 상사, 음사를 금지하면서 여성들은 이전까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던 외출과 유희를 규제받게 되었습니다. 세종대의 '내외법' 역시 여성의 자유를 축소, 규제하는 법령이었습니다.
족보 기록에서도 여성의 지위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초의 족보들은 난 순서대로 딸의 이름과 함께 여부(사위), 후부(딸의 재가 상대) 등도 기록하였던 반면, 후기에는 선남후녀식으로 작성하거나 딸의 이름은 아예 쓰지 않고 사위만 명기하며 외손에 대한 기록을 축소하는 등 여성에 대한 차별이 커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유와 지위를 잃은 여성들은 어떤 일을 했을까요? 반가 여성들이 수행한 가장 중요한 임무는 '봉제사 접빈객', 즉 제사를 준비하고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손님맞이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어 개인의 집에서 공적인 얘기를 나누는 경우가 많았던 이 시대에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손님을 어떻게 대우하느냐가 해당 양반의 정치적, 사회적 입장을 좌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봉제사와 접빈객을 위해 각 가문마다 음식 차리는 법이 발전했는데, 그것이 소위 말하는 '종가 음식'입니다. '음식디미방'과 같은 요리 비법을 출가외인이 될 딸 대신 며느리에게 물려주는 모습에서 조선시대 여성의 정체성이 딸에서 며느리로 변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가정의 경제권 역시 여성이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붕당정치에서 특정 당파가 득세하고 다른 당파는 탈락하는 과정에서 여성이 경제를 지탱하는 가정이 생겨났습니다. 몰락한 당파의 양반은 과거를 봐도 희망이 없지만, 4대 동안 과거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하면 양반 지위를 박탈당하기에 과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과거 공부만 하느라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남편 대신 아내가 가계를 꾸려가는 경우가 많아진 것입니다. '성호사설'을 쓴 이익의 글에서는 여성의 경제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드러나는데, 여기서 여성과 남성의 경제력 변화로 인한 긴장을 엿볼 수 있습니다. 현대에도 여성의 경제력이 상승하면서 이혼율이 상승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처럼 여성이 경제적 문제 때문에 힘든 점이 있어도 이혼하지 못하는 일이 많이 줄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후기, 양란 이후 여성의 삶은 많이 힘들어졌습니다. 특히 호란 때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이들을 환향녀('화냥년'의 어원)라 부르며 '정절을 빼앗겼다'는 이유로 냉정한 시선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심지어 홍제원에 큰 목욕시설을 두고 거기 들어갔다 나오면 정결해진 것으로 한다는 식의 정책도 있었으나, 실제로 그렇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습니다. 호란에서의 피해는 남성 지배층이 무능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책임을 극단적 정절의식으로 여성에게 떠넘긴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호란 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제시대 소위 '위안부'로 끌려갔다 돌아온 여성들 역시 마찬가지로 가혹한 시선을 받았습니다. 최근에야 이 문제가 주목을 받고 있지만, 자기반성 없이 일본에 대한 증오로 끝나서는 의미없는 피해의식에 불과하게 되지 않을까요? 이 사회의 책임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 사회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수자에 대한 사회의 책임을 고민하고, 또한 개인으로서도 내가 다수자로서 다른 이를 소외시키거나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내가 부담해서' 다른 소수자를 배려할 생각이 있는지 끊임없이 확장해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제약과 억압이 늘어나는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그렇다고 조선 여성을 그저 수동적이고 남편의 가문에 구속된 존재로만 볼 것은 또 아닌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조선 여성의 정체성이 딸에서 며느리, 출가외인으로 변해갔다고 하지만 실제로 딸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에게 영창대군 대신 친정 식구들을 살려달라는 서한을 보냈던 것이나, 신사임당이 친정에서 생활한 것, 혜경궁 홍씨가 벽파인 친정식구들을 살리고자 쓴 '한중록' 등에서 딸로서의 정체감이나 친정에 대한 소속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른 많은 나라들과 달리 여성이 성(姓)을 그대로 썼다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출판물에서도 여성이 나름의 영역을 발전시켜나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 이후 등장한 소설문학의 경우 한글로 쓰인 경우가 많고 판타지적 요소를 포함하며 때로는 여성이 주인공인 경우도 있는데, 주 독자층이 여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대부가 여성의 경우 드러내놓지는 못하더라도 유학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숨기다가 나중에 글이 발견되는 일도 있었지만 생전에 본인의 문집이 발간되는 것을 볼 수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한 위에 쓴 '음식디미방' 등도 여성이 만들고 전승한 내용이 책으로 나온 예입니다. 조선시대 여성을 마냥 한 맺혀 살아간 피해자, 수동적인 존재로 볼 수도 있겠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나름의 영역을 구가한 능동적 주체였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3강
3강은 ‘어느 고려부인의 일생: 시집가지 않는 여자’를 주제로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의 성과 여성의 삶에 대하여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고려시대는 성적으로 자유분방하기도, 성적 규범이 엄한 사회이기도 했다. 고려가요 ‘만전춘’과 ‘쌍화점’ 등을 보면 남녀가 사랑을 주고받는 일에 크게 거리끼지 않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신분에 따라 큰 차이가 있어, 귀족 여성들에게는 엄격하게 적용되기도 했다. ‘자녀안(姿女案)’이라는, 남편 있는 여자가 간음할 시에 그 이름과 소행을 기록하는 대장을 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여성은 풍기를 문란 시킨 죄로 바느질하는 공인으로 삼았다.
성에 대한 통제는 당시 사회의 규범이나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는다. 고려의 주요 사상이었던 불교와 유학에서 정절은 ‘상대방에 대한 신의’를 의미했다. ‘쌍무적 정절이데올로기’를 강조하며, 부부 간에 서로 도리를 지켜 간음은 물론 자기 아내와 남편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두지 말라고 하였다. 이렇게 정절 의무의 주 대상은 살아 있는 부부 간이었고, 과부가 남편 사후까지 정절을 지키라고 사회에서 강요받지는 않았다. 그래서 과부나 미혼녀가 남성과 사랑을 나누는 데 적극인 행동을 취했던 경우가 많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비하여서는 상대적으로 사회적인 분위기가 관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법제적으로 혼인 외 관계는 모두 간통으로 처벌했다. 간통은 쌍벌죄였으나 여성의 경우 부가형이 있어 더 무겁게 벌을 받았다. 그리고 이혼에 대하여는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은 한 여성 측에서 이를 요구하기는 어려웠다. 고려시대 여성은 남편 사망 후 재혼만 자유롭게 할 수 있었을 뿐이다, 남편 외의 남자와 교제하기 위해서는 이혼, 도망, 살부 등의 극단적인 방법을 꾀해야 했기 때문에 최대한 혼인관계 내에서 사랑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고려 여성들의 혼인 양상을 ‘염경애’라는 한 여성의 일생을 통해 더욱 알아볼 수 있었다. 염경애는 고려사 효우전에 등장하는 효자 최루백의 아내이다. 당대 명문가 자식이었는데, 지방 향리의 자식이었던 최루백과 혼인하였다. 최루백은 과거급제자였고, 당시 지배층은 사위의 장래성을 고려하여 혼인하였기 때문에 최루백을 사위로 맞았을 것이다. 고려의 혼인은 일반적으로 같은 계층 간에 이루어졌는데, 이와 같이 지방의 한미한 가문 출신자가 과거에 합격한 뒤 귀족의 사위가 되어 사회의 최상층에 진입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그리고 친족구조가 ‘양측적 친속제도’로서 친가, 처가, 외가도 상당히 중시되어 사위의 출세는 아들의 출세와 마찬가지로 ‘가문의 영광’에 기여하였다.
혼인의 형태는 처가에서 혼인식을 올리고 처가에서 살다가 남편 집으로 가는 식이었다. 서류부가혼, 남귀여가혼, 솔서혼 등이라 불렸다. 그리하여 처가와의 관계가 밀접했다. 여성이 혼인 뒤에도 친정부모를 모실 수 있어 상대적으로 아들 선호가 크지 않았다. 처가에서 거주하는 기간은 가족 상황이나 경제력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차이가 많았다.
혼인 뒤 여성은 전근대시대 여성에게 공통적이듯,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을 내조하며 자식을 잘 기를 것이 요구되었다. 효도에는 제사도 포함되는데 윤회봉사 형태로 여성도 제사에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있었다. 재산 상속 시 딸과 아들을 특별히 차별하지 않고 균분했기 때문이다. 제사는 주로 절에서 재(齋)를 지내는 방식으로 치렀다. 그 당시 절의 시주 명단을 보면 남편과 부인의 이름이 각기 기재되어 있다. 이를 보면 부부가 재산을 따로 소유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성들은 고리대나 상업, 무역활동을 통해 가정경제를 꾸렸다.
부계친족구조가 강고하지 않았던 사회라 여성은 사후 친정 묘역에 묻히기도 했다. 고려 여성들은 아내, 며느리로서보다 딸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고려 여성들이 혼인 이후에도 자신만의 재산을 소유하고 운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지금껏 주위에서 보아 온 여성들은 결혼 후 법적으로는 재산권을 인정받음에도 현실적으로는 재산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다음 시간에 다룰 조선시대 여성의 삶도 현실의 여성이 겪는 일들과 비교하여 깊이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2강
지난 4월 12일 '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을까?: 여왕 통치의 성공과 실패'를 주제로 한 2강이 열렸습니다. ‘원시시대부터 신라의 여왕들’까지의 시기를 ‘성별분업에서 성별불평등으로’의 흐름 속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원시시대의 경우 생물학적인 성차에 근거한 성별분업이 이루어져 주로 여성들은 채집, 남성들은 사냥을 하는 방식으로 경제를 운영했습니다. 채집은 사냥보다 안정적인 수입원이었고, 따라서 여성을 중심으로 하여 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대의 화석인골을 보면 여성들이 남성보다 40세 이전 사망률이 높았는데, 그 이유는 임신, 출산, 육아의 과정을 여성들이 겪는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여성들은 그러한 과정에서 겪는 신체의 부자유스러움 때문에 주변 상황에 빠르게 대처하기가 어려웠고, 이는 여성의 단명을 야기했던 것입니다.
구석기시대 조각상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튼실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다산과 종족 보존에 대한 염원이 담겨, 그 당시 여성들에게 기대되던 역할에 걸맞은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빌렌도프르라는 지역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바로 옆에 있는 곳으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비엔나의 자연사 박물관에 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비너스 상 중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신석기시대에는 여성들이 간단한 농경을 담당해 왔습니다.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남성들이 주로 농경을 맡아 하게 됨으로써 남성 위주의 사회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노동력이나 사회 활동에서 남성들의 참여 비중이 확대되고 가부장제로 바뀌어 나가게 됩니다.
선사시대 여성들의 모습을 우리가 자세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선사’라는 게 ‘역사 이전(prehistory)'을 의미하므로 기록이 없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록이 없었던 시대에 살았던 이들의 삶을 알기 위해 오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유추해 보기도 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여성은 웅녀입니다. 웅녀 이야기(단군신화)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달리 삼국유사는 역사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삼국유사의 ‘사’는 ‘역사 사’ 자가 아니라 ‘일 사’ 자입니다. 삼국사기는 고려시대에 편찬이 된 정사입니다. 웅녀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데, 그 이유는 김부식과 같은 유학자들이 기술했기 때문입니다. 유학자들은 유교적 합리주의에 입각해 삼국사기를 썼으므로 괴력난신의 이야기는 인정하지 않아 싣지 않았습니다. 괴력난신이란 보통 사람이 들 수 없는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린다든가(괴력), 신들이 무엇을 만들고 벌을 내린다든가 하는 귀신에 관한 일(난신) 등 불가사의한 존재나 현상을 말합니다. 이렇게 삼국사기에 들어가지 않은 남은 이야기들이 있었고, 이것들을 모아서 승려인 일연이 책으로 낸 게 삼국유사입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는 그 당시 제왕운기 등의 다른 책에도 나오는데, 내용이 조금씩 다 다릅니다. 사람들이 전해들은 이야기를 문자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단군신화와 같은 건국 신화를 보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내용이 많습니다. 이것은 다른 지역에서 이주를 해 왔다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단군신화에서 이 이주한 집단이 토착 집단인 곰을 토템으로 하는 집단, 호랑이를 토템으로 삼고 있는 집단을 만나게 되고, 합쳐져 하나의 지배 집단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힘의 우위에서 열세에 있는 쪽을 주로 여성으로, 우위에 있는 집단을 남성으로, 그리고 부족과 부족 간의 결합을 ‘결혼’이라는 형태로 나타낸 것입니다.
신라에 첫 여왕인 ‘선덕왕’이 즉위하게 된 배경에는 신라 사회가 ‘골품제’로 운영되고 있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왕위에 오를 만한 성골 남자가 단절했고, 진골에서 남자 왕을 추대하기보다 같은 골품의 여자로 그 뒤를 잇게 한 것입니다.
또한 왕권이 강화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즉위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법흥왕 시절 사상적으로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받아들여 왕실가족을 불교의 석가족과 일치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이로써 진평왕대 왕권이 강화되어 국왕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자 선덕여왕을 자신의 왕위 계승자로 삼고, ‘국인의 추대’라는 형식을 빌려 즉위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평왕 때 일본에서 첫 여성 천황인 스이코(推古)가 등극했는데, 스이코 여왕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한 적이 있고, 이 사신이 돌아갈 때 신라에서는 까치 두 쌍을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스이코 여왕의 즉위는 신라 왕실에 ‘여성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끔 영향을 미쳤으리라 봅니다.
선덕여왕의 자질에 대해 삼국유사에 세 가지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란꽃 그림을 보고 향기가 없음을 미리 알았다는 것과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백제군이 매복한 사실을 알고 섬멸하게 한 것,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알고 장지를 정해준 것입니다.
‘비담의 난’은 상대등이었던 비담이 염종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일입니다. ‘여자 임금은 잘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김유신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그리고 진덕여왕이 즉위하게 됩니다.
진덕여왕 이후 남자 왕으로만 계승하다가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릅니다. 여성으로서의 왕위계승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진성여왕을 ‘총명하고 민첩한 천성’, ‘남성과 같은 골상’이라고 발언하면서 여성이지만 외모가 남성과 비슷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선덕, 진덕 여왕들과 달리 왕위를 양위하는데, 양위를 했던 대상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조카인 헌강왕의 아들이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진성여왕의 즉위는 경문왕 직계로 왕위를 계승시키고자 하는 혈통관념에서 헌강왕의 아들인 효공왕의 성장을 기다린 임시적이고 과도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통일의 경우 통일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던 데에 여왕들의 업적이 있음에도 김춘추에 가려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역사를 해석하는 데 성차별적인 요소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여성들이 어떻게 살고 무엇을 했는지를 찾고 아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여성의 눈으로 역사를 다시 바라봐야 합니다. 왜냐면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은 당시 남성 지배층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눈으로 본 역사는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기에 중요합니다.
현 시대에 여성이 지도자, 리더가 된다는 것에 대해 편견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성에 비하여 여성이 부당하게 폄하되기도 하고, 진보적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여성에 대하여 지니는 인식은 반민주적이고 차별적이고 수구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여성들이 정치적 지도자로 성장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여성의 입장에서 보는 훈련이 부족하여 차별적인 사고를 하고 있음에도 본인이 차별적이고 남성우월주의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성들이 그러한 태도에 불편함을 느끼고 지적하면 ‘너무 예민하다’, ‘피곤하게 군다’는 말로 일축합니다.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억압의 구조입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차별하고 억압할 수 있는 권리는 없습니다.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신라에서 여왕은 비일상적인 상황에서 남왕을 대체하기 위한 방편으로 겨우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여성 인물들을 극히 제한적인 모습으로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앞으로의 강의를 통하여 여성들의 삶을 재발견·해석하고, 이로써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1강
4월 5일 화요일에 주진오 선생님의 <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첫 강의가 있었습니다. 먼저 단체 OX퀴즈 형식으로 이 강좌에 참여하는 분들이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고, 왜 여성사를 알아야 하며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 5월에 있을 두 차례의 토론을 위해 4개의 조를 구성했습니다.
<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1강. 역사 속 말없는 여성들에게 말 걸기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 준비한 몇 가지 질문에 대해 O와 X로 대답하는 형식으로 자기소개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 강좌나 역사, 개인적인 관심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갔고, 질답을 통해 아카데미 느티나무의 역사탐방 소모임 '굴렁쇠'에 대한 소개도 듣는 등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어서 주진오 선생님이 강의를 여는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주진오 선생님은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계시고, 상명대에서 최초로 여성사 강의를 시작한 분이기도 합니다. 또한 다른 사학자 5분과 함께 책 『한국 여성사 깊이 읽기』를 집필하셨습니다. <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강좌의 많은 부분이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역사 속 여성이 몇이나 될까요? 적어도 남성보다 훨씬 적은 수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기록되지 않았기에 기억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역사 연구는 사료에 근거하는데, 이 사료 자체가 문자를 이용해 기록을 남길 수 있는 남성-지배층이 취사선택하여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대 여성의 삶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따라서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남아있는 역사 속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듣기는 어렵습니다. 이렇게 부당하게 배제되었던 여성의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역사 연구 자체도 풍부해질 뿐더러, 현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도 양분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중요한 키워드는 '여성사는 죽은 과거의 이야기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역사 자체가 그렇다고 합니다. 어떤 선택을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개인이 다 경험해볼 수 없기에, 과거의 사실들로부터 간접적으로 배워나가고자 하는 것이 역사인데, 특히 여성사는 그런 의의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여성 문제를 생각해보면 답답한 부분이 많습니다. '여성이 하는' 정치가 여성정치인지, 그렇다면 여성이지만 반여성적 스탠스를 보이는 '명예남성' 정치인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여성혐오는 어디서 나오는지... 이런 문제들에 대한 고민이 현실로부터만 출발하다 보면 놓치는 부분들이 생기게 됩니다. 여성사를 공부함으로써 과거로부터 이런 문제들에 대한 기원과 해결책을 찾을 실마리를 얻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강좌에서는 과거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는 한편, 수강생 간 토론도 하게 될 것입니다.
5월에 두 차례의 큰 토론이 있습니다. 5월 10일에 하게 될 [쟁점토론]은 '열녀: 죽음인가? 죽임인가?'를 주제로 하며, 찬성측(죽음)과 반대측(죽임)을 나누어 토론하게 됩니다. 5월 31일에 있을 [역사인물재판]은 '나혜석: 시대의 선구자인가, 무모한 일탈인가'를 주제로 검사측과 변호사측을 나누어 토론하게 됩니다. 이 강좌를 수강하시는 분은 두 차례 토론 중 한 번은 참가하셔야 합니다. 일단 첫 강의에 오신 분들 중 쟁점토론 찬/반 각 5분, 역사인물재판 검/변 각 4분으로 조가 구성되었으니 혹시 못 오신 분은 4개 조 중 하나로 꼭 참가해 주세요!
주진오 선생님이 '토론에 이기는 법'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논리를 분명히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상대의 반응을 예상하여 그 주장의 논리와 문제점을 잘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별토론인 만큼 조원들 간의 협동과 유기적인 연동도 중요합니다. 토론의 승패는 해당 토론에 참가하지 않는 이들로 이루어진 '배심원'들의 거수로 결정됩니다.
이렇게 첫 강의가 끝났습니다. 이어질 강의와 토론에서 무엇을 배울지, 그래서 얼마나 생각이 달라지게 될지 기대가 됩니다. 또한 여성사를 배우는 것이 정말로 현실의 여성이 겪는 일들에 대한 고민에 도움이 될지도 궁금합니다.
다음 주 화요일에는 '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을까?: 여왕 통치의 성공과 실패'라는 주제의 강의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