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정보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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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삶이 사라진 공부에 중독되었나
<공부중독> 엄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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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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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간답게 살 권리는 묻는가
<인권 오딧세이> 조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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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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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가
<대한민국은 왜?> 김동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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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3
신년 북 토크 "우리는 왜" 제 3강 <대한민국은 왜?> - 김동춘.
신년 북 토크 "우리는 왜" 제 3강 <대한민국은 왜?> - 김동춘.
2016년 2월 18일 목요일, 오후 7시~9시
한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불행한가? 그 원인을 알아야 전망을 볼 수 있다. 오늘의 한국을 만든 것은 4번의 전쟁(청일전쟁, 러일전쟁, 태평양 전쟁, 한국전쟁)이다. 이런 위기가 한번 발생하면 100년의 역사가 그것에 의해 규정된다. 전쟁, 외교, 국방은 우리 일상과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정치, 경제, 사회의 판을 완전히 바꾼다. 지금 우리나라 주변에서 진행되는 것이 120년 전의 청일, 러일 전쟁 시기와 비슷하다.
1. 청일전쟁 :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의 주권’을 두고 한반도에서 서로 전쟁을 벌였다. 그럼 그 전에 조선의 주권은 누구에게 있었는가? 조선은 중국에 사대를 하는 국가로 왕의 책봉권을 청나라가 가지고 있었다. 내부 정치는 한국인들이 결정하였으나 최고의사결정(국방, 안보, 외교)은 조선이 독자적으로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청나라는 조선을 차지하려는 주변국가에게 큰 걸림돌이었다. 이러한 청나라가 손을 떼게 하는 것이 청일전쟁이다.
- 발단 : 고종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병사를 요청했다. 조선에 청나라가 오려하니 일본이 허락 없이 들어와 청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곧바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내려갔다.
- 일본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이유 : 만약에 동학군이 서울을 점령하거나 서울 근처까지 왔다면 조선이 백성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 위로부터의 개혁이 있었을 것이고, 정권은 국민의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권은 외세가 함부로 할 수 없으므로 일본의 입장에서는 동학군을 진압해야한다.
- 결과 : 일본이 이기고, 조선은 사실상 모든 통치의 보호국이 되었다. 동학의 우두머리인 전봉준은 재판을 통해 처형되었다. 그 재판의 판사는 조선인이나 뒤에서 컨트롤 한 것은 일본군이다. 이 사건은 이후 120년의 역사를 좌우한다. 우리 사회의 큰 패러다임은 이때 이후로 크게 바뀌지 않았다.
2. 러일전쟁 : 러일전쟁의 승리는 일본이 조선에 대한 확실한 독점권을 가지게 된 것으로써 그 이후 시작될 100년 동안의 조선의 비극의 시작이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수 있도록 가장 강력하게 뒤를 밀어준 나라는 미국과 영국이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러시아보다 일본이 조선을 먹는 것이 자기들에게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전쟁비용의 상당부분을 미국이 대주었다.
- 1905년 카츠라 테프트 조약 : 카츠라는 일본 외무부장관, 테프트는 미국 국무부장관의 이름이다. 이들은 뒤에서 조선은 일본이, 필리핀은 미국이 먹기로 하는 밀약을 맺었다. 미국은 언제나 일본이 동아시아 정책의 핵심이고, 일본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며 태평양 전쟁이라는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친구였다. 한국은 그 중간에 끼어있는 나라이며 과거나 지금이나 변방에 있는 부차적 고려사항이다.
지금 사드배치 문제는 그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120년의 반복이다. 남북이 가까워지는 것을 불편해하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며 일본 역시 한반도의 통일을 내켜하지 않는다. 일본의 우익들은 북한의 위협을 과장함으로써 전쟁을 할 수 있는 일본을 만들려고 한다. 자위대를 보낼 지역이 어디가 있을까? 우리의 동의 없이는 한국에 못 들어올까? 전쟁이라는 위기가 발생하면 동의가 어디 있는가? 120년 전에는 동학군이, 120년 후에는 북한이 명분이다.
3. 한국의 국제적 지위 : 한국이 군사적 주권을 행사하지 못 한지 120년이 다 되고 있다. 군사적 주권이 없으면 정치적 주권도 없다. 왜냐하면 국제정치에서는 전쟁이나 그런 상황에서 정치위에 군사가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주권이 없으면 국가가 국민의 입장에서 정치·정책을 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한국은 여전히 반 주권밖에 누리지 못 하고, 국민들은 반의 반 주권밖에 누리지 못 한다. 왜 군사·정치적으로 주권을 갖지 못 한 경우, 국민들이 반의 반 주권밖에 누리지 못 하는가?
첫째, 정책의 최우선이 북한과의 대결구도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북한과의 대결을 위해서는 그 어떤 담론도 1순위에서 2순위로 밀리게 된다.
둘째, 국민들의 불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대변해 주지 못하는 것은 곧 주권의 상실을 뜻한다. ① 역사적으로 한국에 진보, 좌파, 사회주의 정당, 노동당이 없는 이유를 살펴보면, 친일파가 권력을 잡으면서 민족주의의 가치, 정의의 가치를 존중했던 사람들,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이 다 제거되었다. 이후 사회주의 세력이 제거되었다. 그 다음에는 남아있는 우익들 중 중도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6.25때 다 제거 되었다. ② 소신 있는 사람들도 정치권에 들어가기만 하면 소신을 내팽겨 친다. 왜냐하면 다음번에 당선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당선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자금이 필요하다. 정치자금은 누가 주느냐? 돈 많은 사람들이 준다. ③ 우리나라 경제활동 인구 2500만 중 1700만이 노동자다. 그런데 이 1700만 노동자를 대변할 수 있는 정당과 정치가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공권력 혹은 대기업으로부터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내가 국민으로서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각종의 법, 언론, 시민단체가 나를 보호해주지 못한다.
4. 주권 부재의 원인 :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조건이 문제다. 그 조건은 우리가 스스로 민의 힘으로 정치나 사회를 만들고, 바꾸고, 쟁취해갈 수 있는 힘이 아직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결국 국민의 편에 설 수 있는 사람이 그 사회를 다스리는 위치에 올라갈 수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프랑스 혁명은 100년 동안 진행되며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은 그 과정을 통과했다. 그 나라에서 엘리트가 된 사람들은 적어도 국민을 위해서 일한다는 전제 위에서 일한다. 또한 위기가 닥쳤을 때 자기를 희생한다는 전제가 되어있는 사람들이 그 위치에 올라간다. 민이 스스로 쟁취한 권력이 아닌 한계가 오늘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말해주는 것이다.
5. 마무리 : 우리는 제대로 된 근대국가를 만들었는가? 헌법에 나온 내용을 국민들이 스스로 암송해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조그만 것이라도 헌신해 본 적이 있는가? 소리한 번 지른 적이 있는가? 소리를 지른 사람을 곧바로 가두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여러 가지 명분을 활용해서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는 안보의 논리를 깨고 넘어서야만 우리가 제대로 된 국가를 만들 수 있다. 그러면 국민들이 가난해 질 수는 있지만 불의에 목숨을 잃지는 않는다. 해고될 수는 있어도 곧바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안보, 국가, 외세의 문제가 국민의 생활하고 연결되어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겪었던 일을 성찰할 수 있는 국민들의 집단적인 지혜와 지성이 결국은 중요한 문제다.
질의응답
1. 시민이나 약자의 불의를 대변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려면 프랑스 혁명 같은 거대 유혈혁명이 일어나야 하는 걸까요? 점진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바뀌기 힘든가요? 과연 이 순간에 평범한 난 무엇을 해야 우리의 주권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 사람들이 왜 정치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느냐라는 질문은 잘못된 것 같다. 소통이 되면 그 다음에 행동이 나온다. 모임, 동아리에서 친구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해주고, 그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이미 빼앗겨버린 자기의 감성을 있는 그대로 되찾게 해주는 것이 이 사람들을 행동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표출의 방식은 벽을 보고 표출을 하던지, 댓글을 달던지, “이건 틀렸어.”라고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던지.. 이런 것을 통해서 커뮤니티가 살아있게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야 말로 행동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정치적 해결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해결 문제라고 본다. 정치적 행동을 하기 전에 문화적인 소통이 되어야만 그 다음에 정치적인 행동이 나온다. 자기가 속해있는 일상의 영역에서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우선 옆 사람들에게 “어, 이거 곤란한데, 이거 아니지 않아요? 이렇게 해선 안 되는 것 아닌가요?”라고 이야기를 건넬 수 있으면 된다. 그러면 우리 사회가 살아난다. 그렇지 않고 사람들이 전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살아날 수 없다.
2. 요즘 동아시아의 절망을 보는 것 같습니다. 동아시아 3국이 상호 협조하여 세상의 리더로 거듭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요? : 한국은 양쪽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외나무다리를 건너듯이 가야만하는 실정이다. 동아시아 삼국의 단합은 미국이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은 양쪽 사이의 철저한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게 가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3. 변화 가능성 : 장기적으로는 서민들의 이익을(요구를)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이 의회에 진출해서 제 3당정도의 캐스팅보드는 지어야만 여당과 야당이 함부로 못한다. 그래야만 국민들도 주권을 가진 국민이 된다. 그러려면 사회가 바뀌어야 가능하다. 분노를 결집할 수 있는 거미줄 같은 시민사회가 필요하다. 이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우리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시민사회에 참가를 하던, 발언을 하던) 혼자 있어서는 안 된다. 아주 조그마한 행동이라도 하고, 몇 사람이라도 모아서 공부모임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당장의 정치변화는 어렵지만 다음다음다음정도에는 변화의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신년 북 토크 "우리는 왜" 제 2강 <인권 오디세이> - 조효제.
신년 북 토크 "우리는 왜" 제 2강 <인권 오디세이> - 조효제.
2016년 2월 11일 목요일, 오후 7시~9시
1. 서론
상대방의 세계관이나 사상, 관심사에 대해 알고 싶을 때, 좋은 방법은 “어떤 분석 단위로 세상을 보세요?”라고 묻는 것이다. 계급, 젠더, 국가나 민족 등 사람에 따라 세상을 보는 프레임은 다양하다. 그런데 인권을 하는 사람들은 전통적인 분석단위와 굉장히 다른 차원에서 접근한다. 그들은 ‘인간’을 분석단위로 본다. 인권이라는 특수 안경을 끼면 눈앞에 있는 사람이 희미하게 (외모, 인종, 성별, 목적등과 상관없이) ‘사람’으로만 보여야지 그것이 진짜 인권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인권이라는 이야기 앞에서는 100% 인권 친화적이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국제적으로 나와 있는 인권의 종류가 과거에 비해 많이 늘어났으며 계속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인권은 계속 체득해야 하는 것이고, 누구라도 몰라서 실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권을 바라보고, 배우고, 실천할 때 ‘나는 옳고, 저쪽은 틀렸다.’는 식으로 할 필요는 없다. 비슷한 입장에서 같이 깨우쳐주고, 성찰하며 배워나가는 과정이 인권을 향해 가는 과정인 것이다.
2. 인권의 개념
1) 인권 = Human 人間 Rights 權利
- Rights의 이중적 의미 ① 도덕적으로 옳고 정당
② 법이나 제도에 근거해서 어떤 것을 요구할 자격
- 원래 권리라는 말에는 2가지 뜻이 다 담겨있다. 그래서 우리가 인권이라고 할 때, 내가 요구하는 것 이전에 ‘요구하는 내용 자체가 옳고, 정당하고, 윤리적으로 타당하다.’라고 하는 규범적인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국제적으로는 ①번 의미에 해당되는 권리도 있고, ②번 의미에 해당되는 권리도 있다. 제일 좋은 것은 ①번과 ②번이 같이 해당되는 것이다.
2)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고 정당한가?
①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보편적 권리
② 이성과 양심에 근거한 가치
③ 인간의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욕구와 이익을 존중
④ 이유 없이 차별하지 않는다.
3. 인권의 특징
1) 공적개념 : 인권은 시민과 국가(공적 주체)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였다. 최근에는 공적 주체가 국가, 지차체, 공공기관, 기업, 국제기구 등으로 다양해졌다.
2) 권리와 의무 : [로빈슨 크루소의 질문 – 무인도에 혼자 살던 로빈슨 크루소에게 인권이 있었을까, 없었을까?] 이 질문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요구를 들어 줄 상대방이 없기 때문이다. 권리는 반드시 의무를 수반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양방향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 국민의 4대 의무는 국가가 국민에게 요구함.
3) 세대별 발전
- 1세대 인권(시민적, 정치적 권리) - 고전적 권리들
- 2세대 인권(경제적, 사회적 권리) - 의식주, 의료, 사회보장, 노동과 휴식, 교육, 문화
- 3세대 인권(집단권, 연대권) - 환경, 발전
4) 불가분성
5) 최저기준 설정 : [적어도...정도는 보장해 주어야 한다.] 이 기준은 점차 올라간다.
6) 권리의 역설 : [권리보유의 역설(잭 도널리) - 권리가 있으면 권리가 사라지고, 권리가 없으면 권리가 나타난다.] 인권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고 해서 인권이 잘 보장된다는 뜻은 아니다. 인권 선진국에서는 오히려 인권 용어를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인권용어 사용을 떠나 실제로 인권이 목표로 하는 가치가 실생활에서 얼마나 구현(실천, 달성)되느냐가 중요하다.
2부 질의응답
1. 아이들에게 인권의 좋은 점을 설명하는 법 : 인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인권을 인간 존엄성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많이 본다. 인간 존엄성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길은 평화, 공존, 연대, 상생, 민주적 타협, 시민적 덕성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인권이 하나의 유력하고 중요한 길이기는 하지만, 인권만이 유일무이한 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그런데 인권이 왜 좋은 것이냐(라고 물으면)? 나의 권리를 존중해달라고 요구하고, 주장할 때는 동전의 양면처럼 ‘내가 내 권리를 주장하는 만큼 네 권리도 주장해줄게.’라고 하는 무언의 사회계약적 약속이 붙어있다. 이것을 낮은 차원에서 쉽게 설명하면 “그만큼 너도 같이 받을 수 있는 거야.”라고 하는 역지사지의 상호성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2. 한국 인권상황의 미래에 대한 질문 : 단기적으로는 암울하고, 장기적으로는 희망을 버리기 싫다. 2008년 이후에 국제적으로 한국 인권을 바라보는 지수나 수준들이 계속 내려가는 것을 보아 객관적으로 한국이 안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87년 이후에는 전체적으로 봤을 때 (기복은 있으나) 우리 인권이 향상되는 중이다. 또한 국민들의 교육 수준이 높고, 인권에 대한 의식과 기대치도 높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의 역동성에 대해서 약간은 자신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3. (개인적 경험 소개 후) 인권이 인간관계나 감정의 영역에서 어떻게 존중될 수 있을까? 인권과 인간의 감정은 어떤 관계를 갖는가? : 인권담론이 확산되면서 지금은 인권이 사적인 관계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감정, 개인적인 문제에는 너무 인권으로만 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것과 다른 차원에서 인권과 감정의 문제로 <인권의 사회심리> 라는 것이 있다. 이것에 따르면, ①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잘 되어있어도 국민의 의식이 결합되지 않으면 법이 사문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 ② 보스니아나 르완다 같은 대규모 인권사태 시 사회 심리적으로 사람들이 프로파간다에 취약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인권에서 정서와 감정, 심리의 문제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신년 북 토크 "우리는 왜" 제 1강 <공부중독> - 엄기호.
신년 북 토크 "우리는 왜" 제 1강 <공부중독> - 엄기호.
2016년 2월 4일 목요일, 오후 7시~9시
1부 : 강의
1. 서론
1) 교육의 양극화 현상 : 이제는 문화적·경제적 중산층 이상이 아니면 공부라는 테마에 관심이 없어진다. 중산층들은 가면 갈수록 공부문제에 골머리를 앓을 것이고, 더 투자를 하게 될 것이며 그것 때문에 아이들도 더 괴로워질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저소득층, 생산직 노동자, 중소기업에 다니는 부모들은 자녀가 인 서울을 할 가능성이 없다는 확신이 들 경우 공부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input보다 output이 적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이미 한국이 계급계층에 따라 공부를 대하는 태도와 전략이 합리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사회학적 배경 : 한국은 지금 학벌사회가 사실상 해체되고 있다. 과거에는 대학의 서열이 확실했으나 현재에는 학벌이라는 것의 하부가 붕괴되어 몇몇 대학을 제외하고는 대학의 서열이 무의미해졌다. 앞으로 이 경향은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지금 고3 아이들을 보면 공부를 안 하는 아이들이 많다. 왜냐하면 ‘공부를 해서 대학을 나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의미 없는 일을 우리가 왜 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그들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3) 논점 :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아이들을 데려다 놓고, 할 줄 아는 것이 ‘공부’밖에 없는 것이 문제다. 90년대 중반까지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했으나 가면 갈수록 ‘왜 가르쳐야 하는가? 왜 배워야 하는가?’라는 설명이 필요해질 것이다. 교사들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증명해야 할 것이며 그로인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교사들의 정신질환이 심각한 문제이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이 ‘공부중독’이다.
2. 본론
1) 공부중독 현상이 만들어진 이유
① 사회주도층이 된 486세대의 특수한 경험 : 486세대는 근대 한국 현대사에서 유일하게 공부로 신분상승에 성공한 세대다. 정치·경제·역사적으로 많은 것들이 받쳐준 시기에 공부를 통해 개인의 신분상승과 공적인 사회(민주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다 보니 486세대는 ‘(공부)하면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새겨졌다. 이들이 말하는 ‘공부’는 제도화(학교화)된 공부를 뜻하며 이들은 공부가 문제를 푸는 만능키라고 생각한다.
② 통치 권력의 통치술 : 한국 자본주의는 일자리를 만들 의사도 능력도 없다. 왜냐하면 기술발달 속에서 일자리가 증가할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일자리를 만들지 못 하기 때문에 취직이 안 되는 것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통치 권력의 통치술도 공부중독의 한 요인이다.
③ 주체의 입장 : 이런 압박 속에서 아이들은 실전에 나서는 것이 두려워진다. 이럴 경우 공부 중이라는 것이 좋은 핑계가 된다. 그래서 계속 공부를 하고, 스펙만 쌓는다.
2) 위 세 가지가 딱 맞아 떨어진 상황을 <공부중독>이라고 부른다. 이 현상은 개인과 계급 계층, 국가의 입장에서 한국사회가 처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면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는 알리바이가 되고 있다. 한국의 일자리 문제는 복잡하고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메시아적인 대책은 없다. 지금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가 너희들(청년들)과 같이 노력하고 있으니 포기하지 말자. 두려워하지 마라.’는 메시지와 그런 메시지가 될 수 있는 정책일 것이다.
3) 아이들 : 공부중독 현상으로 인해 학생들에게 우울증, 불안장애 등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① 무기력 : 부모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 “Yes, I can do it!” 때문에 아이들이 무기력해진다. 이 말만 보면 학생이 주체인 것처럼 보이나 그 앞에 숨어있는 말 “(You must say) Yes, I can do it!”을 보면 진짜 화자(교사, 부모, 사회, 체제)가 나타난다. 사실은 자기주도학습이 아니라 타율학습인 것이다. 또한 아이들은 이 말 뒤에 숨어있는 책무성 (If you fail it’s your fault)도 간파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기력함은 아이들의 생존전략이다. 무기력해야 실패한 다음에 받게 되는 비난과 낙오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② 우울 : 열심히 하는 아이들은 ‘할 수 있어! 더 공부해야 돼!’라고 하다가 소진이 된다. 소진이 되는 순간 자신의 잘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우울해진다. 또한 이것이 언제 내 책무로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하는 동안 계속 불안해진다.③ 분노 : 반대로 내 잘못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길도 있다. ‘나는 할 수 있고, 준비가 다 되어있는데 이 사회 때문에, 옆 사람 때문에 안 되는 것이다.’라는 것이 터져 분노로 나온다.
3. 결론 : 우리는 지금 ‘공부중독’이라는 이름으로 다함께 망가지고 있다. ‘더 공부하고, 더 경험하고, 더, 더..’ 라는 식으로 끊임없이 무리수를 두고 있다. 이러한 공부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부의 목적에 변화가 필요하다. 이제 우리는 아이들에게 ‘나를 배려하는 법, 나를 돌보는 법’을 가르쳐줘야 한다.
2부 : 질의응답
1. 교수님의 주된 관심사(대상)는 무엇입니까?
소외받는 계층, 지역아동센터, 다문화, 편부모 등 아동·청소년의 교육에 관심이 많다. 그 아이들을 데리고 우리가 할 줄 아는 것이 공부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대안을 고민 중이다. 더불어 공부를 안 하는 친구들을 위한 교육에도 관심이 있다. 이 친구들은 가면 갈수록 자기 존재에 대한 가치를 찾지 못 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 그들은 스스로도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존재의 가치를 노동에서 찾았다면 앞으로는 <이미 존재하는 것만으로 이 사회에 기여하고 있고, 이 사회의 구성원이며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미 이 사회의 공통의 것을 만들어 가는데 공동의 노력을 하고 있는 존재다>라는 것을 발견·경험·상기시켜주는 교육이 학교에서 필요하다. 이것을 위해 ‘누가 지금 공동의 교육에서 배제되고 있는가? 왜 배제되고 있는가?’에 대한 토론과 교육이 아이들에게 필요할 것이다.
또한 한 아이의 성장은 교사와 부모 공동 노력의 산물이다. 지금처럼 모든 것을 개인의 성과 문제로 만들어버리는 순간 우리 머릿속에서 공동의 노력이라고 하는 감각이 사라진다. 따라서 <내가 이 공동의 노력을 하고 있고, 이것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통의 것이다>라는 감각을 회복하자.
2. 혁신학교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교육에 무관심해진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다른 가능성의 교육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혁신학교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혁신학교는 모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에 대한 좋은 선례가 되어주면 된다. 다양한 형태의 좋은 선례들이 필요하다.
거시적으로는 이 문제를 위해서 제일 먼저 다루어야 하는 것이 대학 입시문제다. (외국의 사례를 들며) 온 국민이 다 대학을 갈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가고 싶을 때 대학을 감으로써 생애 걸친 공부를 하는 것이다.
3. 무기력, 우울, 분노 이 세 가지 길 외에 또 다른 길이 있는가?
우리는 교육의 가장 큰 목적이 아이들의 잠재력을 키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잠재력은 무한하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 아이는 무한한 존재가 되어야 하며 무한하기 때문에 노력하면 다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고전에서 찾은) 교육의 목적은 자기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다. 이는 네 분수를 알라고 주저앉히는 것이 아니라 만용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진짜 할 수 있는 일을 알게 되면 그 다음에 정성을 다해서 살 수 있다.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겸손해지고 배우려 든다. 이것이 지혜이며, 이 지혜가 있어야 자신을 배려할 수 있다. 나아가 남을 배려하고 돌볼 수 있다. 이 지혜로부터 절제가 나온다.
예를 들어, 해녀학교에서 제일 먼저 알려주는 것은 자신의 숨의 길이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아야 죽지 않기 때문이다. 물속에 들어갔을 때 내 숨의 길이가 5분일 수도 있고, 1분일 수도 있다. 5분은 탁월하고, 1분은 지질한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 탁월함이란, 1분의 숨의 길이를 가지고 내가 얼마만큼 물속에서 원하는 것을 잘 할 수 있는가를 말한다. 즉, 주어진 것을 선용할 줄 아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더 배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한계를 밝혀야 한다. 이렇게 내 무지를 드러내는 것을 ‘용기’라고 한다.
4. 마무리 : 사람들이 지혜와 절제, 그리고 용기를 갖추고 살아갈 수 있게 북돋아주는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라고 한다. 이 과정은 절대 개인의 과정이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지혜롭고, 절제하고, 용기를 내면서 살아갈 수 있게 공동의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공통의 목적이 되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고, 공공선이 되는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