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 2

  • 강사

  • 기간

    • 2015. 10. 6 ~ 2015. 12. 8
  • 시간

    • 화요일 19:00~21:30 총10회
  • 수강료

    160,000

    • 파격 할인혜택
    • 참여연대 회원112,000

    각종 혜택 적용은 로그인 > 마이페이지에서 진행됩니다

    상세 정보

    강의소개 |
    1895년, 을미년이던 그 해, 청과 일본은 청일전쟁을 끝내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습니다.
    동아시아의 패권이 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던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120년이 흘러 다시 맞는 을미년, 2015년. 동아시아는 또다시 격랑에 휩싸이고 있습니다.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동아시아 재편기를 맞아 동아시아 근대가 걸었던 길을 새삼 돌아보게 됩니다.   
     
    아카데미 느티나무는 2014년에
    <동아시아 근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동아시아 현대사 - 과거 속의 냉전, 그러나 오지 않는 미래 탈냉전>라는 주제로
    봄과 가을학기에 동아시아의 근현대사를 살펴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2015년에는 동아시아사 연속강좌로
    동아시아의 근대를 만든 사람들을 탐구하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봄학기에는 전근대와 근현대 역사의 건널목인 19세기의 인물을 만나 보았습니다.
    가을학기에는 세계대전이 연이어 일어난 격동의 20세기 전반기의 인물을 탐구합니다.
    인물이라는 프리즘으로 좀 더 생동감있게 동아시아 근대의 궤적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근대의 동아시아를 엮어 오늘의 동아시아를 빚어낸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오늘의 우리는 평화로운 미래의 동아시아를 위해
    어떻게 현재를 꾸려나가야 하는지를 성찰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강의 일정 |
    날짜
    순서
    주제
    강사
    10.06
    1
    새로운 국가를 꿈꾼 사람 : 쑨원   인물보기>>
    김지훈
    10.13
    2
    새로운 국가를 꿈꾼 사람 : 고토쿠 슈스이  인물보기>>
    박삼헌
    10.20
    3
    새로운 국가를 꿈꾼 사람 : 조소앙   인물보기>>
    김정인
    10.27
    4
    세상 밖으로 나온 여성 : 히라쓰카 라이초   인물보기>>
    박삼헌
    11.10
    5
    세상 밖으로 나온 여성 : 허정숙   인물보기>>
    김정인
    11.17
    6
    세상 밖으로 나온 여성 : 쑹메이링   인물보기>>
    김지훈
    11.24
    7
    사회변혁의 길을 걸은 사람 : 요시노 사쿠조   인물보기>>
    박삼헌
    12.01
    8
    사회변혁의 길을 걸은 사람 : 천두슈   인물보기>>
    김지훈
    12.08
    9
    사회변혁의 길을 걸은 사람 : 안창호   인물보기>>
    김정인
    12.15
    10
    종합토론 : 인물로 본 동아시아 근대의 삶, 근대의 꿈
     
             
             * 11/3 은 강사분들의 해외 학술회의 일정으로 강의가 한주 순연하여 진행됩니다.   
     
    강사 소개 |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 참여연대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한국 근대 민족 운동사를 전공했다. 참여연대 창립멤버로 시민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최근 민주주의의 눈으로 한국근현대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논문으로 <근대 한국 민주주의 문화의 전통 수립과 특질>(2013),
    <한국사 연구와 교육의 시민화 경로로서의 동아시아사>(2014)를 발표했다.
    10여 년간 한중일 역사대화에 참여하여 <미래를 여는 역사>(2006) 와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근현대사>(2012)를 한중일 학자, 교사와 함께 공동 집필했다.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교육과정을 개발하고 교과서를 집필했으며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한국사를 성찰하려는 문제의식을 담은 역사 칼럼을 <참여사회>에 연재하고 있다.
     
    김지훈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교수
    중국 근현대사를 전공했으며 근현대 중국경제와 한중관계사, 중국역사교과서문제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현재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 중국위원장으로 동아시아 역사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중국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의 현황과 특징>, <동아시아의 역사 3>, <현대중국사회-역사와 사회변동>(공저) 등과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교과서의 중국사 서술>, <중일전쟁기 중국공산당의 한국인식> 등의 논문이 있다.
     
    박삼헌  건국대학교 일어교육학과 교수. 일본역사문화학회 회장
    전공은 일본근대사(정치사·사상사·도시사)이고, 현재 건국대학교 아시아콘텐츠연구소 소장을 맡아
    일본문화콘텐츠 잡지 『BOON』, 타이완문화콘텐츠 잡지 『Plum BOON』을 기획하고 있다.
    또한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 운영위원으로서 한중일 공동역사교재 편찬에 참여하여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근현대사>(공저)를 한중일 동시 출판하는 등, 대안적 사고로서의
    동아시아 문화공동체 구상을 고민하고 있다.
    저서로 <근대일본형성기의 국가체제-지방관회의・태정관・천황>(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근대도시 형성>(공저), <해방 후 한일간 상호인식과 역사교과서 편찬의 변화>(공저),
    <도시는 역사다>(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는 <천황의 초상>, <근대 일본사상사>(공역), <‘조선’ 표상의 문화지>(공역) 등이 있다.
     
    강의정보 |
    일 시 : 2015. 10. 6 ~ 12. 8 (화) 총 10회 오후 7시 ~ 9시30분
    장 소 : 참여연대 지하1층 느티나무홀
    수강료 : 16만원 (참여연대 회원 30% 할인)
     

    후기 8

    •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2] 9강. 안창호. -'≠?'

      2015.12.14 문동욱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 2
      안창호는 이름은 무수히 들어왔으나, 아는 바는 기실 없는 인물이다. 내가 안창호에 대해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연관검색어 마냥 늘 따라붙는 '도산' 이란 호와, 교과서 늘 나오는 단정한 콧수염과 세련된 정장차림 신사의 사진 뿐이다. 그나마 누군가에게 들은 서북사투리가 심했으리란 말과 엮여져 '그거 좀 안 어울리는데.' 하다가는 사투리가 어때서란 핀잔에 스스로의 편견을 부끄러워했던 기억 정도 뿐이다.

      정직히 말하자면 강의를 듣고난 지금도 그에 대해 잘 모르겠거니와, 그 이전에 그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가지도 않는다. 강의의 부제대로 그는 철저하게 '민족'과 결부된 삶으 살았다. 그것은 내게는 별 감흥을 자아내지 못하는 점이고, 보다 솔직해지자면 경계심과 불안감으로 채색된 혐오감을 이끌어낼 뿐이다.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 

      라는 말은 내 자신 그 당시 살았더라면 소극적인 체제순응자로라도 위험 대신 친일을 택했을 비루한 종자라서인지는 몰라도 이해할 수 없다. 


      우선 뒤엣 말은 왜 그것이 '민족'이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밖에는 남기지 않는다. 닮아있는 듯 하나 근본적인 차이점에서 출발한 호세 마르티의 말에 감동했던 십대때부터의 기억에 붙들려 있는 탓일지도 모르겠다. "단 한 사람 이라도 고통받는 자가 있다면 그 누구에게도 편안히 잠자리에 들 권리 따위는 없다." 사실 안창호의 말이 내게는 훨씬 편한데 말이다. 호세 마르티의 말은 아직도 때때도 문득 드러눕기 전에 떠오르고 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라도 있을 것임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모든 일과 모든 이에 대한 죄책으로 나를 짓누른다. 그래봐야 잠에 들 것이고, 남기는 것은 싸구려 위선에 불과할 부채감 뿐이지만. 여하간에 비단 나 혼자 누리는 특별한 영광은 없는지라, 안창호의 말이 적당히 내게 신조삼기에는 편리하겠지만, 그 말은 내게 일말의 공명도 불러 일으키지를 못한다. 

      앞에 말은 마치 무솔리니의 말을 연상시킨다. 

      "국가를 떠나서는 인간과 영혼의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차이인지, 차이가 존재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물론 역사에서 IF 를 가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예견을 가지고 속단으로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 행인지 불행인지 안창호는 38년에 사망했다. 지극한 민족주의자였던 대부분의 임정 요인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정치의 공간에서 그들이 바라던 나라를 건설하지 못했고 그들의 신념을 유의미한 실재적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들의 신조가 어떤 결과를 배태했을지는 다행히도 증명되지 못했다.

      비록 권력의 핵심에 거의 근접했던 철기께서 '파시즘이 뭐가 나쁜가. 개인주의에 찌들은 요즘 젊은이들이야 민족을 위한단 것에 질색을 하겠지만.' 란 희대의 명 망언을 당당히 남겨주셔 그들의 의식구조를 선명히 엿보게 해주긴 하지만 말이다. 마찬가지로 안창호 또한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배격하고 '대공大公' 곧 민족을 위하여 온 국민의 생활이 공헌되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립해 내세우기는 했지만 말이다. '극단적'이란 표현은 모호하여 무엇을 극단적이라 할지야 안창호의 속내에 달린 일이지만. 다행히도 우린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휘둘러질 전가보도인지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비록 안창호가 딱 잘라, 개인의 이익보다 사회 전반의 이익이 우선해야 했다고는 했지만. 그의 대공은 어디까지나 민족이었던 것과 연계해 짐작할 수는 충분히 있겠지만. 


      어쨌든 안창호에게는 그런 전제 아래에서나마 민주적 토론과 공론의 중요성에 대한 존중이 있지 않은가? 안창호는 그것을 강조하지 않았나? 그러니 우리는 안창호를 믿고 신뢰해도 된다. 비록 우리 모두의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결론이 전제되어 있는 하의 자유롭고 민주적인 토론이란 정권을 잡은 무정부주의자 같은 소리지만. 물론 다르긴 하겠다. 민주적인 토론을 통해 얼마나 기꺼이 얼마나 한 개인을 사회에 제물로 바쳐야 하는가, 정도라도 정할 수 있으니까. 팔 하나를 제단에 잘라 올리면 될지, 자비롭게 손가락 하나 그냥 끊어 바치면 될지, 아니면 심장까지 꺼내어 올릴지. 물론 한 개인의 감히 희생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절대 없겠지만.



      그의 포용력의 상징 대공주의. 요컨데 대공을 위한 좌우익의 화합과 단결. 그 대공은 다른 어떤 가치나 정의가 아니라 오직 민족이지만. 이미 우익의 관념인 '민족'을 논의가 허용되지 않는 '대공'의 상위차원으로 올리고 그 아래 좌우를 뭉치자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비록 민족이 전제이자, 기반으로서 민족의 힘을 키우기 위한 응집의 수단으로 사회주의를 전락시켜 활용한다는, 근본적 세계관의 차이에 대한 몰이해와 무시가 영 껄끄럽지만 넘어가자. 

      비록 비슷한 매커니즘으로 당시 독일 지역에서 활동하던 이들 중에 슈트라서 형제가 있지만. 그들이 당내 좌파로서 그런 방향으로 이끌고자 애썼던 당이 비록 민족사회주의노동자당이지만. 그 당을 통칭 나치라고 부르지만. 

      '특수 계급에 좌우되지 않는' '민중 혁명' 의 고아함이 있지 않은가. 비록 같은 맥락으로 계급이 아닌 전민에 기반한 대중혁명을 줄기차게 주장하던 에른스트 룀이 있지만. 비록 그의 소속정당은 슈트라서 형제와 같지만. 그 중에서도 그가 대표하던 조직이 SA, 통칭 돌격대이지만.

      넘어가자. 넘어가자. 38년에 죽은 안창호이고, 그의 이념을 계승한 자들이 권력을 잡아본적이 없기 때문에 이 땅에서 이루어져 검증된 적 없는 일들이다.



      다만 그리하여 민족주의를 떼어놓고 난다면 안창호에 대해 말할 것은 없다. 그의 활동이 그렇고 사상이 그렇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앞서와 같은 불길함의 그림자밖는 드리워지지 않는다. 하여 나는 더 이상 그에 대해 논할 길이 없거니와, 살펴볼 용기와 엄두도 나지 않는다. 이 땅에서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민족운동가들의 대다수들이 흔히 그렇듯이.




      p.s.

      분명히 안창호는 민족을 내세우고 사회 전반의 이익을 우선하긴 했으나 그의 훌륭한 공언들에서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지 않았다. 비록 민족과 국가의 핵심적인 부분을 제하겠지만, 그러고나면 남은 영역에서는 '자유'를 약속했으니 결코 파시즘과는 다른 것이다. 절대. 틀림없이. 


      "The Fascist State organizes the nation, but leaves a sufficient margin of liberty to the individual; the latter is deprived of all useless and possibly harmful freedom, but retains what is essential; the deciding power in this question cannot be the individual, but the State alone"

      -Benito Mussolini: What is Fascism, 1932 


      "파시스트들은 국가를 조직할 것이나, 개인에게 충분한 자유를 남길 것이다. 후자에는 모든 무익하고 해로운 자유들이 제해질 것이나, 본질적인 것들은 보전될 것이다. 이 문제에서 결정권자는 개인일 수 없으며, 오직 국가 뿐이다."    

      -베니토 무솔리니 :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1932
    •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2] 8강. 진독수. -불꽃.

      2015.12.7 문동욱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 2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2] 강좌의 여덟번째 강의는 '천두슈(진독수)'를 만나보았습니다. 
      강의 후기 정리는 자원활동가 문동욱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 아카데미느티나무 주-

      조직이나 단체가 이름을 정할 때에는 적어도 그들 나름대로라도 그 본의에 가장 걸맞는 것을 심사숙고하여 골라 정하기 마련이다. 물론 때때로 A와 B가 단지 기계적 통합을 하여 AB란 이름으로 하나가 되는 경악스럽도록 저열한 일도 일어나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이야 논할 가치조차 없는 대상이니 젖혀둔다.

      언론이나 기관지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된 경우라면 그렇다. 민족정론지를 자칭하며 시작된 조선일보가 그렇고, 남북 평화와 하나된 민중의 표방에서 출발한 -그리고 '우리'말 애호도- 한겨례가 그러며, 시민에 의한 시민의 언론을 칭하는 오마이 뉴스가 그렇다. 외국과 역사를 보아도 그렇다. 인본주의를 표방한 프랑스의 '뤼마니테' 나치 기관지이던 '민족의 감시자'와 '돌진' 이 그렇다. 마찬가지가 소련의 관영 기관지이던 '프라우다'와 '이스크라' 이다. 너무 거대한 소련 정권의 관영기관지로서만 인식되서 문제이지, 그 두개는 본래 혁명조직의 것으로 탄생하였다. 그런만큼 프라우다와 이스크라는 그들의 사명과 각오를 담고 있다. 그들 세계관의 근간인 계급주의적 입장에서 고찰과 계급의식 각성을 위한 '진실' (프라우다) , 그리고 혁명에 대한 헌신을 상징하는 '불꽃'(이스크라). 그것은 집권 이전 소수 혁명가 집단이던 사회주의자들의 나아가고 살아갈 방식에 대한 맹세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와 직접 관련되지는 않으나, 결국에 중국공산당의 창시자인 때문일까. 아니면 바로 그러한 기질의 귀결로 공산주의자 그 중에서도 끝내 좌익 반대파에 이른 것일까. 진독수는 철저하게 그 자신의 의지로 집요하도록 진실을 쫓으며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당대인들과 구별되는 그의 유학 이력부터가 그렇다. 도피성 혹은 그럴듯한 학위를 얻는 대신에 산만하도록 다만 수개월 필요를 느낀 학문을 공부하다 사회문제 역사적 흐름과 사건을 마주하면 미련없이 귀국하여 이에 투신하기를 반복한다. 결국 대다수의 잘나빠진 이른바 신지식인들과 달리 그는 그의 부귀영달을 보증해줄 학력도 이력도 뚜렷히 갖지 못했다. 그에게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사유와 경험을 통해 직접 도달하고 한편으로 끝도 없이 변화해간 사상 뿐이다. 누구도 배신 한 적 없고 어떤 영달이나 기회주의적 처신과도 무관한 그의 변화는 변절이라 부를 수 없다. 그에 있는 것은 끝도 없는 고민 뿐이다. 

      인민에게 국가는 왜 필요한가? 그에 합당한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것을 건설하기 위해 새 세대는 어떠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문학, 그보다도 언어는 어떻게 정제되어야 하는가? 이런 끝도 없는 고민을 개진하고 스스로 답을 찾는 한편으로, 시대적 흐름에 바쁘게 뛰어들었던 그는 마침내 하나의 답이던 공산주의에 이르러 중국 공산당의 창시자이자 초대 중앙 총서기가 된다. 

      이에서 사상의 궤적이 종국에 이르는 자들도 많다. 그러나 그의 불꽃은 아직도 심지에서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코민테른과 모스크바로 대표되는 국제 공산주의의 교조적 지시에 대한 반발과 의구의 결과는 직의 상실이었으며, 그 자신이 만든 중국공산당에서의 출당이었다. 진독수는 당내 독재, 관료주의, 일방적 지시자로 변한 프롤레타리아 제구궂의를 느낀 순간 마침내 이에서 돌아섰다. 그가 걸어간 길은 '추방된 예언자' 트로츠키 또한 걷는 길이었으며 때문에 트로츠키주의로 폄하되고 있는 좌익반대파의 길이었다. 당내 민주주의, 민중 여론의 반영, 노동자 국가에서 실제적인 노동자와 당간부-국가관료의 관계 등.

      여하간에 결국은 좌익이기에 국민당에 의해 체포된 그는 재판에서 망설임 없이 신념을 드러내고 그에 따라 투옥되었다. 실제적 행위와 무관히, 단지 사상과 신조로 이루어진 감금에서 양심수 정치범이라면 응당 받을만한 성원과 탄원이 국제적으로 이루어져 마침내 그는 석방되었다. 이후 그를 짓밟은 국민-공산 양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을 반제 반파쇼 투쟁의 대승적 차원에서 축성하고 지지하는 한편, 그 자신의 신조와 고귀한 자존심으로 이 모든 것을 꺽는 대신에 양당의 회유를 모두 거절했다.

      그리고는 끝내 진독수는 마침내 고립무원의, 하지만 철저하게 오롯이 자존하는 한 사상가로서 여생을 보내다 생을 마쳤다. 그가 마지막으로 천착한 문제는 인권 및 정치적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절차, 원칙, 방법으로서의 민주주의였다.

      그의 일생을 통틀어 그는 숨가쁘도록 달렸으며, 고민을 멈추지 않았고 무언가와 누군가를 추종하는 대신에 스스로의 사유로 나름의 답을 찾아 쫓았다. 그 결과 무엇에 적이 된다 해도 머뭇거리지 않았고 숙이지 않았다. 모든 것을 감수하는 동시에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그는 진실을 위해 불꽃처럼 살았다. 가장 고결한 인간 정신의 정수를 볼 수 있는 삶의 궤적을 남긴 몇 안되는 경우일 것이다.

      그의 모든 단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이 진정되기 이를데 없던 불꽃이었던 것은 부정될 수 없다. 여전히 그를 우경분자로서 -비록 '착오'로 감면해 주었어도- 규정하며 아직도 완전히 복권시키지 않은 중국공산당에서조차 그러하다. 당의 공식 선전물인 영화 건당위업에서 표현되는 진독수는 그야말로 영웅적인 투사에 다름아니다. 일방적으로 추앙되길 요구하는 이른바 위대함은 반드시 검증받고 난도질 당해야 한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그럴 대상이 아니다. 진독수가, 아니 그 이름을 지닌 한 인간이 살아간 모습이 바로 그러하다.


      오늘날 청년 세대가 듣는 소리는 딱 두 종류다. 혹자들은 그것을 진영으로 나누려고 하는데 다르다. 이른바 민주화니 산업화니 하는 것보다는 개개인 퍼스낼러티에 따라 갈릴 뿐이지 대동소이하다. 결론도 같다. 한쪽에서는 질타한다. 무기력하다, 흐리멍텅하다, 고민이 없다, 열정이 없다, 왜 우리처럼 열심히 일하지 않고 불평만 하는가, 왜 우리처럼 처절히 투쟁하지 않고 이 좋은 여건에서 비관주의에나 사로잡혀 있는가. 다른 한쪽은 참 너그럽기도 하다. 모든 것을 이해해주신단다. 힐링을 해주시겠단다. 그 너른 품안에 잠시 안겨 쓰다듬을 받으랜다.

      어느쪽이든지간에 결론은 같다. 여하튼 그들은 다 겪어보았고 해보았는데, 다 풀릴 것이란다. 그리고나면 그들은 할만큼 했기에 때가 지났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네가 바톤을 이어받아 분골쇄신 할 차례라 떠민다. 너희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미래는 너희의 것이다. ....그러니 좀 잘 좀 해봐라 쫌. 결국에 모든 것의 저변에 담겨있는 그 마지막 한마디를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할 바보는 청년 중 아무도 없다.

      1919년 6월 8일. 진독수는 '연구실과 감옥'이란 글을 매주평론에 기고하였다. 연구실에 들어가는 (당대 중국에 필요한 인재가 되는) 것과 감옥에 가는 (현실 정치와 사회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청년들의 인생에 가장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청년들에 대한 요구이자 응원이며 진타였다.  흔한 말이었다. 그리고 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진독수는 그런 말을 하며 지휘봉, 아니 그보다도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말채찍을 멋지게 휘두를만한 입장에 있었으니 말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중년이었고, 북경대학 문과대학 학장까지 역임하였으며, 잡지 '신청년' 발간으로 대표되듯 청년운동의 창시자이자 주창자였으며, 호적과 함께 백화문 보급을 통한 문학혁명의 첨병에 서있었으며, 그 전달에 있었던 중국 현대사의 최대 사건 5.4운동에 참여한 정신적 지주로서 대학생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가 이미 그와 같은 많은 위업들을 통해 당대에 가장 명망 높은 지식인었으니 말이다. 그는 기꺼이 명령하고 훈계할 법 했다.

      그런 진독수는 기고 바로 다음날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북양군벌에 반대하는 '북경시민선언'을 발표하고, 이틀 후인 6월 11일 시내에서 그 전단 인쇄물들을 홀로 직접 뿌려 베포하다 체포되어 구속되어 청년들에게 말하던대로, 연구실을 거쳐 감옥으로 들어갔다. 그는 말한마디를 남들에게 뱉고나면 스스로가 그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간 자였다. 누구도 그를 찾으려면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최선두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쫓아야 하는.
      진독수가 아름답노라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2] 7강. 요시노 사쿠조. 물거품

      2015.11.30 문동욱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 2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2] 강좌의 일곱번째 강의는 '요시노 사쿠조'를 만나보았습니다. 
      강의 후기 정리는 자원활동가 문동욱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 아카데미느티나무 주-

      1920년대는 일본현대사에서, 이채로운 시대에 속한다. 메이지 유신 이래 청일 러일 정쟁을 치르며 정신없이 달려온 국가주의 열차가 잠시 정지한 듯 보이는 시대이다. '데모크라시'와 당연하단 듯이 연결되어지는 이 다이쇼 시기는 민주주의 자유주의가 일시 꽃을 피운 듯이 보인다. 제한적이나마 집회 언론 출판이 종래에 비해, 그리고 만주사변 이래의 15년 전쟁으로 이어지는 이후 30년대에 비해 자유로웠고, 새로운 근대적 사회문화적 변동이 이루어지던 시기이다. 비록 그것이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꺽여버렸지만.

      한국에서는 '문화통치'란 미명하에 보다 교활한 회유와 분열 책동이 이루어지던 시대로만 낙인 찍혀있기도 하다. 전적으로 우리 민족의 위업 3.1운 동의 그나마 결실로. 1차세계대전의 참화 이후 전 세계를 휘감았던 이상주의의 호소와 그 힘도 도외시되고, 17년 소비에트 혁명 이후 목소리가 커진 사회주의와 그에 대한 경계심 및 예비조치적 유화정책들의 영향도 외면된 채. 즉 일본 자체에서 이루어지던 변화는 무시되고 식민지이던 조선이 그 인력에도 이끌렸을 가능성은 전적으로 배제된체 말이다. 
      하기야 아릭부케-쿠빌라이의 내전을 외면한 채 단지 고려가 끈질긴 항쟁으로 몽골에 어느 정도의 인정을 받았다거나, 누르하치-홍타이지의 변화는 외면한체 다만 인조반정의 결과 호란이 일어나거나, 사회주의 탄압로 일본 본국에서 제정된 치안유지법을 조선민족독립운동 탄압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로 설명하는 식의 자의식과잉으로 점철된 '국사' 서술에 무엇을 바라겠냐만은.

      그런 의미에서 요시노 사쿠조는 딱 좋은 타겟이다. 일본에서의 그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상징이다. 지식인으로서 언론활동가이자 대중계몽가이다. 민의 삶을 국가의 책임이라고, 그로써 국가의 존재근거로 본 시각, 민의 의향에 따라 정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은 이채로운 것이었으며, 이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참정권 확대를 내세워 보통선거권 투쟁을 이끌고 승리를 이끌어낸  준 영웅이다. 이로써 그는 현대 일본에서까지 민주주의 전통과 계보의 큰 줄기로 남아있다.

      반면에 철저히 한국식으로 보았을 때 요시노 사쿠조의 조선관은, 조선'문제'인식과 처방전은 지극히 20년대의 일본인다운 것이다. 직설적으로 국사식의 정서로 표현하자면 교활하고 가식적인 사기꾼일 뿐이다. 일본제국의 식민지 조선이란 전제 하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냈을 뿐이다. 총독부의 압제적 폭정 중단의 요구는 눈속임이고 사기에 불과할 것이다. 자치권 부여 주장은 싸구려 회유이며, 민족운동 진열을 분열시키기 위한 술책에 다름 아니다. 일시동인의 선정을 극악한 민족말살의 전조일 뿐이다. 요시노 사쿠조란 인간은 없고 문화통치란 술책을 부려대는 1920년대의 일제일 뿐이다.

      동 시기에 또다른 자유주의 언론인인 이시바시 단잔은 일본의 이익이란 관점에서 대만과 조선에 독립이란 선물을 안길 것을 주장했다. 별개의 문화적 전통을 지녀온 집단을 힘으로 영구히 지배할 수는 없기에 식민지 상실은 언젠가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그때에 패배 내지는 실패로 잃을 채 원한을 살 바에는, 미리 독립을 선물로 주어 우호 속에 우방이자 경제적 권력으로 자발적으로 기쁘게 합류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 자신이 일본인으로서, 일본의 이익을 고려하는 만큼으로 조선인에게는 조선인의, 대만인에게는 대만인의 정체성이 항구할 것이라 본 일관적 논리체계의 귀결이었다.

      다른 한 사람, 극우파이자 우승열패의 신봉자이던 기타 잇키의 조선관과 주장도 그러하다. 그에게 조선은 멸망함으로써, 존재할 가치가 없음이 증명된 나라였다. 때문에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들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에게 조선은 이미 없어진 것이고 조선인도 물론 사라진 개념이었다. 일본제국의 새 영토와 새 신민만이 있을 뿐이었다. 때문에 그는 민족동화 정책 따위를 운운하지조차 않았다. 그에게 구 조선인은 지금 당장 일본신민인 것이었다. 하여 총독부를 반대했으며, 일본 본토와 동일 행정 동일 법제 동일 권리 동일 의무의 즉각적인 시행을 주장했다. 그러고나면 그는 본디 일군만민주의자로서, 구조선인에 대한 모든 차별과 편견을 전적으로 타파할 것을 주장했다. 국가주의자인 그에게, 그것은 그것대로 일관적인 논리성을 띈다.


      요시노 사쿠조는? 그는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기독교인이며 자유주의자인 한 개인이다. 동시에 현실적인 점진론자이기도 하다. 그의 조선관은 방책으로서는 그에 일관적이기는 하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동정적이고 온정주의적이었으며, 자유주의자로서 무단통치의 폭정을 반대했고, 민의의 반영이 이루어질 자치를 내세웠다. 그렇지만 그는 전제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조선은 반드시 일본의 식민지여야 했다.

      개인적으로 그 자체에 분노하고 비난할 생각은 없다. 민족주의자들이란 본래 그런 법이니까. 그것을 민족적 관점 내에서 그나마 넘어선 것은 이시바시 단잔이다. 그는 너무나 당연한 흐름, 말했듯이 자신이 일본인임을 포기하지 않듯이 누군가는 조선인이고 대만인이란 정체성을 붙들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요시노 사쿠조 이하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은 그 정도 일관성을 보전치 못한다. 자민족의 그것만큼이나 타민족의 민족주의를 유념치 못한다.

      어쩔 수 없다. 민족주의는 근본적으로 타자에 대한 이해를 거세함으로써만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저열하고 끔찍한 것을 이리저리 구분선을 만들어 방어적 민족주의니 뭐니 하며 귀퉁이를 붙들고 미화하는 자들이야 있다. 그러나 민족주우의 요체는 바로 신채호가 말하지 않았던가. 일본 무산계급과의 연대논의가 나오자 '일본인은 사죄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와도' 라 소리지르던, 끝내 근본적으로 골수 민족주의자였던 그를 자꾸 아나키스트로 눈속임 시키려는 자들이 의지의 문제니 뭐니 그 의미를 곡해하지만, 신채호의 명쾌한 사론이야말로 기실 민족주의의 정수이다.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

      한덩이 일체적 '아' 외에는 모조리 한 뭉텅이 '비아'만이 존재할 뿐이다. 비아들은 다양성도 차이도 없다. 무엇도 중요하지 않고 '아'가 아니기 ('비')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아니 한덩이 비와와 할 것은 오직 궁극적으로 투쟁 뿐이다. Mein 'Kampf'의 저자께서 지극히 전율하며 공명하실 정수이다. 아리안인과 조선인으로서 각자 인종의 명운을 위해 서로 맞찌르고 죽어버리는 촌극으로나 귀결되긴 하겠지만.

      현실에서 맞부딫히게 되는 문제와, 이른바 시대적 맥락이나 한계는 닿아있는 것이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신념을 초지일관 하는 것은 전후자 모두와 관계가 있다. 그러나 사상과 신념의 일관성과 완결성은 조금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시대와 관계가 없다.

      요시노 사쿠조가,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일본인에 한해서만 적용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의 제한적인 '민본주의' 이념도 마찬가지다. '인민을 위한' 정치가 '인민에 의할' 때에 가능하단 점을 안 사람이 그것이 근본적으로 '인민의' 정치가 전제되어야 가능한 소리란 것을 정말 몰랐을가. 그렇다면 모호하기 그지없는 '민심' 에 귀를 기울이는 왕도정치인들 안 될 것이 무엇이고 다를 것이 무엇인가. 인민의 것이 아닌데, 허락된 영역에서 춤추는 것이 인민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는가? 감옥 안의 죄수가 묶여있지 않다면 자유로운가? 요시노 사쿠조는 자신의 논리 자체를 한발짝 내뻗는 것을 중단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근본적으로 그에게 사상은 부재하다. 그러니 그에 기반하는 활동도 표피적으로 많은 것을 이루었어도 근본적으로 공허하기 그지없다. 기둥 없이 지붕을 올릴 수는 없다. 그런 그가 기수였던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것을 전통과 기반 삼으려는 현대 일본의 민주주의에도 미래는 기대할 수 없다. 
      그건 87년 직선제 이후, 7,8,9 실질적인 노동계 대투쟁을 비롯한 사회변혁 운동을 '민주화가 이미 되었는데''빨갱이 놈들''이익만 챙기는 이기주의'로 매도하던 중산층 시민들의 이른바 민주주의가 환상에 불과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저 우연히 당첨된 복권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것은 모조리 탕진되었다. 어떠한 근본적인 여건의 변화도 없이 다음 세대인 우리에게 정치적 잔고의 파산과 높아진 정치적 소비수준만을 남겨놓은채. 마르크스는 그 무수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하나만은 반드시 옳았다. 하부가 상부를 결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생산관계니 경제관계니 하는 것만이 하부가 아니었던 점에서 그가 틀렸다고는 하지만. 결국 차세대는 하부를 우선 세워야하고 그러기 위해 저변부터 다져야 한다. 그것은 오직 일관성과 완결성으로만이 가능하다. 그것은 시대를 불문하고 명백한 사실이다.

       

    •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2] 6강. 송미령. - '권력. 여성.'

      2015.11.21 문동욱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 2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2] 강좌의 여섯번째 강의는 '쏭메이링(송미령)'을 만나보았습니다. 
      강의 후기 정리는 자원활동가 문동욱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 아카데미느티나무 주-

      '여자라면 힐러리처럼' .2007년에 나와 제법 팔려나가고 서점의 진열대들을 매우던 책이다. 당당함을 뿜어내는 만큼이나 고압적으로 강제적인 책 제목이지만 생각해보면 한심스럽고 비굴하기 짝이 없다. 지금에 힐러리는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을 한번 치루고, 국무장관을 역임하였으며 다시 미국의 유력한 대권후보이다. 그러나 07년에는? 그녀가 대선 후보 준비를 하고 있기는 하였다. 허나 그때까지 그녀는? 검증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들 기억하다시피 그녀는 영부이인었으며 그게 전부였다. 물론 그녀가 단순히 빌 클린턴의 아내가 아니라,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동지적 존재였으며 정치적 지혜를 지녔으리라고는 모두들 모두들 여기고 있던 바다. 그렇지만 애초에 그 모든 것의 근원이 합당했던가?

      어떤 공직도 아니고, 단지 선출된 대통령의 아내이기에, 그리고 대통령에게 개인적으로 지니는 영향력이 과연 합당하고 용인될 수 있는가? 그것이 정당한가? 그녀는 대통령이 공적으로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한을 공적으로 나눠가지는 -부여받는- 공직자조차도 아니었다. 그녀는 대통령이 된 빌이란 한 남자의 아내, 지극히 사적인 관계에 권력의 뿌리를 내린 존재였다. 원칙적으로 그것은 슬어버린 녹에 다름 아니다. 미국이 폐쇄적인 사회라 여성에게 그런 식 외에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참작의 여지는 있다. 그러나 그녀 이전의 여성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백악관에서 당당한 전문가, 안보보좌관으로 시작되었던 콘돌리자 라이스는? 

      기실 책이 나올때까지의 힐러리는 권력과 명성을 최악의 방식으로 누리던 여성에 불과했다. 그런대도 책 제목이 그리 역겹도록 오만방자한 것은 저자들도, 받아들일 소비자들도 아무 문제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들에게 권력과 여자는 그런식으로 밖에 연결되지 않았으리라. '여자'란 그들에게 그런 존재에 불과했을테니.


      송미령은 장개석의 아내로서,  악의적인 비아냥 담긴 표현대로, 그러나 그와 상관없이 딱 들어맞게도 '권력을 사랑한 여인'이었다. 애초에 세상에 권력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만은. 친목모임 술자리 대화라도 화제와 흐름을 자기 바랄대로 이끌고 싶기 마련인데. 여하간 그로써 송미령에게 덧씌워진 것은 유구한 중국사의 전통에 따른 '정치적 악녀'의 표상이다.

      그것은 군주를 환락에 이끄는 미색, 이른바 경국지색으로 꼽히는 서시 달기 양귀비와는 전혀 다른 증오의 대상이다. 한 고조의 아내 여후(여치), 당고종의 황후이자 후에 스스로 성신황제에 올랐던 -말년에 그 자리를 유지 못하고 끌어내려진- 무측천, 청 함풍제의 아내이자 동치-광서 연간에 섭정으로 권력을 행사한 자희태후 즉 서태후. 송미령은 신중국의 황제나 다름없는 장개석의 아내로서, 후에 그 자리를 얻는 모택동의 아내인 강청과 함께 이 이미지의 마지막 계보를 잇는다.

      강청만은 다르긴 하다. 그녀는 매도당했다기에는 실제로 저열한 악인이었고 동정이나 재평가의 여지는 없으니까. 그러나 스스로 말한대로 그녀는 모택동의 개에 불과했다. 그가 짖으란 상대에게 짖었고 물란 상대를 물었다. 그의 의중을 벗어나서는 아무 힘이 없었다. 그리고는 힘의 근원이 되던 모택동의 사망 직후, 그리 기세등등히 문화대혁명 내내 날뛰던 사인방의 나머지와 마찬가지로 눈깜짝할 사이에 권력을 상실하고 숙청당할 뿐인 존재였다. 그녀는 타인의 도구에 불과했고, 그에서 알량한 권위에 취해있던 역사의 작은 벌레에 불과했다. 민자영을 미화하는 것이 우스운만큼 그녀에게 망국의 책임을 지우는 것은 부당하다. 강청도 마찬가지다. 강청이나 민자영이나 영사적 가치와 의의는 전혀 없는, 부정적인 영향조차 미칠 수 없는 먼지에 불과한 존재들이였으니까.


      그러나 이른바 '정치적 악녀'들의 실체는 그와 조금 다르다. 그들은 혹독하고 냉정했으며 때때로 잔인했다. 그러나 그건 정치적 투쟁이 극심한 상황에서 살아남을 모두가 보이는 특성일 뿐이다. 그들이 여성이었기에 반발이 거세어 많은 피를 보았을 수는 있지만 그녀들이 여자이기에 잔인했던 것은 아니다. 물론 한 개인으로서 그런 장벽들을 으깨어버리도록 권력의지가 강하고 지독한 성미들이었던 개인들은 맞지만, 그건 그녀이기 이전에 그 사람들의 퍼스낼러티일 뿐이다. 정치적 악녀들의 신화는 결국 그 정도 인간이 아니고서는 여자는 정치와 권력에 닿을 수 없던 시대와 환경의 적자일 뿐이다. 

      그러고나면 여후의 치세는 그녀에 부정적이전 사마천마저 인정하도록 '백성의 삶은 평안했다'. 무측천의 시대는 곧 중국인들이 그리 자랑스러워하던 성당기이며 노년의 그녀를 황제에서 끌어내린 복고파조차도 황실의 큰 어른으로 모셔야 하도록 그녀는 권위를 지니고 존경을 받던 존재였다. 서태후. 무수한 날조와 매도의 신화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제국의 구심점이었으며, 때문에 중국이 해체되지 않고 그로써 인도처럼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되는 것을 피했음은, 그리고 조작과 모욕이 이루어지기전까지 그녀가 인민들에게 경애받던 '노불야' 였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과연 송미령은 어떨까. 그것이 궁금하던 터였고 아는 바가 없었기에 기다렸던 강의였으나 아쉽기 그지없다. 솔직히 아직도 평을 할만한 여지조차 찾기가 어렵다. 그녀의 삶이 어쩔 수 없이 중국의 현대사 전체와 얽혀져 있다. 그리고 중국 전체와 국제정세까지 뒤얽힌 그 무대에서 송미령의 역할과 비중은 집어내기 어렵다. 애초에 그녀의 영향력은 결국 비공개적이고 비공식적인 부분에서 더욱 크니. 정적들마저 인정한 그녀의 명민함, 지식, 어학능력과 서양 사회에 익숙함은 장개석에게 큰 조력이 되었을 것이다. 정치적 조언은 물론, 외국과의 협상에서도 그렇고 더더욱이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이미지를 개선하는데 큰 기여를 했으리라. 하지만 도리어 장개석과 국민당의 한 하위에 불과해, 그녀의 주도적인 업적이라 할만한 것은 찾을 수 없다. 그녀는 그 전체에서 일정 이상의 영향력을 지니고 권력을 만끽하며 살았겠지만, 후대인인 나로서는 그녀에 대해 추론해볼만한 근거가 없다.  전설이 된 그녀의 명민함을 보여줄만한 결정이 그녀의 이름으로 난 적부터 없지 않은가. 그녀는 거대한 역사적 존재들의 일부이고 그림자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중국 현대아세, 아시아 역사에 가장 결정적인 것은 1936년 서안사변이다. 시계에서 가장 크고 많으며 일체감을 지닌 4억 인구가 일치항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에 장개석은 반쯤은 떠밀리듯 노구교 사건에서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일본에 맞섰고, 중국은 4년간 일본제국과 홀로 전쟁을 벌였다. 그 4년이 흐르고나서야 미국은 이미 지치고 한계에 이르러가는 일본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태평양전쟁을 승리해 그 힘을 제거했다.

      송미령이 없었다면? 남경정권은 서안에서 체포된 장개석을 기꺼이 희생시키고 장학량 동북군-양호성 서북군-중공 홍군과의 내전을 벌였으리라. 장개석의 빈자리를 놓고 왕정위 이종인 풍옥상 하응흠 호종남 손과 송자문 공상희 등이 다투기에 바쁘고,  용운 염석산 서북삼마들은 할거했으리라. 국민당은 분열되고 혼란에 빠진 중국의 각부는 각기 일본에 공순하여 삼켜졌으리라. 미국은 홀로 큰 부담을 무릅쓰는 대신, 전격적으로 아시아에 수립된 거대한 제국을 인정했으리라. 허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는 천황제 군국주의의 보다 짙은 그림자 아래 놓여지고, 세계는 그 위험하고 강력한 존재를 경계하면서도 방관하고 인정했으리라.

      서안사변의 수습에서, 장개석의 유고상황에서 송미령은 유일하게 그녀가 전면에 나서 주도적으로 일을 치뤘고 국민당과 중국, 아시아와 세계를 구했다. ...근데 그게 겨우 장학량과의 로맨스로 해석되다니. 트라비아에 불과할 것이 주가 되면 우스울 따름이다. 이로써 중국 현대사 최대의 사건은 단지 한 여자와 그녀의 전 애인과 현 남편의 문제로 전락할 뿐이다. 그런식으로 되면, 장경국이 계엄해제를 비롯한 국민당의 개혁 및 체제이완을 이끈 것도 생략되면서 장새석 사후 권력투쟁도 단지 집안 서열의 일에 불과하게 된다. 국민당 신구파의 갈등은 사라지고, 적장자가 아내에게 승리하는 일에 불과하게 된다.


      장개석의 수년에 걸친 구애를 받아들인 시점이 그가 중국의 제1인자가 되고나서야인 것과, 그의 사후 국민당 당권 장악 투쟁에 나섰던 것으로 송미령이 권력을 사랑했음이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말했듯이 그건 그녀뿐 아니라 누구나 어느 정도는 대게 마찬가지이다. 중요한 것은 그 외에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가이나, 그에 대해서는 미루어 짐작해볼만한 것이 여전히 없다. 강의를 통해서도 그녀는 결국 권력을 사랑한 '여인'으로서만이 그려져 기억되고 있을뿐임이 새삼 확인되었을 뿐이다.

    •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2] 4강. 히라츠카 라이초. - '그리고 백년'

      2015.11.9 문동욱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 2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2] 강좌의 네번째 강의는 '히라츠카 라이초'를 만나보았습니다. 
      강의 후기 정리는 자원활동가 문동욱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 아카데미느티나무 주-

      히라츠카 라이초에 대해 어떻게 얘기하여야 할까. 역사에서 그게 누구라도 몇년에 무엇을 했고, 어떤 단체를 만들고, 무슨 글을 썼고 하는 연표 정리는 의미를 잘 모르겠다. 그런 식의 사실관계는 오늘날에는 헌신적인 연구자들의 기여에 따라 포털에서조차도 쉽게 자료를 찾아 볼 수 있으니. 어쨌든 내가 쓰는 것은 강의에 대한 후기이지 않겠는가.

      그러고나면 강의에서도 다루어진, 그 당시 여성운동 내에서 이루어진 논쟁들도 흥미롭지만 다루기에는 모자란 역량으로서는 막막하기 그지없다. 정조, 낙태, 폐창, 모성. 이들은 사실 큰 줄기에서 현재까지도, 그리고 영원히는 아니더라도 기약하기 어렵도록의 미래에까지도 끝없는 논쟁과 토른의 거리가 될 법한 것들이니 말이다. 그 각 운동가들의 주장과 주 논점, 접근방법의 차이는 매우 흥미로우나, 내 부족한 역량으로 다루어보아야 강의안을 옮겨적는데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나면 배우느니 도둑질이라고, 악습대로 모호하고 큰 범위로 질질 끌어 돌아보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역사가 분명히 지니는 속성은 그것이 '사실' 못잖게 지니는 '기억'으로써의 입장이다. 역사와 여성이라...

      '세상 밖으로 나온 여성들' 강의의 주제이기도 한데, 여성이 역사에서 그 이름을 남긴 것은 고대 이래 몇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몇몇조차 썩 아름다운 이름들은 아니다. 당장 우리와 우리에게 익숙한 중국에서는 폭정 혹은 망국의 근원에는 여성과 환관이 있다는 오래된, 편견으로 가득찬 레토릭하에서의 기록들이 대다수다. 그 개개의 퍼스낼러티와 별개로 그 한 인간이 악인인지 여부는 논쟁의 여지는 있겠으나, 설령 그렇다해도 어떤식으로든 그토록 강렬한 기질이 아니었더라면 그 시대에 여성의 처지에서 이름을 남길수 있었을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몇몇 악인 -이른바 악녀- 들의 존재는 도리어, 그쯤 되지 않고서는 이름 자체를 남길 여지도 없도록, 여성이 억압받고 침묵 당해왔음에 대한 증거가 되어준다.

      내 개인적으로 부끄러운 것은, 역사에 관련된 전공을 가졌기에 본 강의에서 다루어질 다른 인물들은 적어도 이름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여성 3인에 대해서는? 송미령만은 안다. 그녀 또한 처절하게 권력의 세계에서 살아가며 발자국을 남긴 한 사람으로서. 내가 기억하는 그녀는 때때로 여성임을 수단으로 삼기는 하지만 -그만큼 제약으로도 되었을테니 일방적으로 비난 받을 꺼리만은 아니지 않을까- 기본적으로 정치가이다. 한 사람의. 그것이 송미령 개인은 기뻐했을지 쓰게 웃었을지 모를 일이나,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여성' 의 한 성원으로써 기억되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여치, 성신황제(측천무후), 서태후 그리고 잔다르크 등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다른 인물들을 구태여 남성으로서 기억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그런 것과 별개로, 그들의 삶은 이른바 여성에서 실제적으로 자유로웠다고는 볼 수 없다. 당대에, 그리고 후대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여성'으로서 평가받고 대해진다. 적어도 그것이 평가에 있어서 어떤 식으로든 작용을 한다. 기계적인 공평의 잣대는 무한한 힘을 지닌 현실 앞에 무기력할뿐더러, 특별성 앞에서 차별의 도구가 되기 마련이다.

      두서없는 난론이 되어버린 것은 본래도 그렇지만, 올 한해가 페미니즘과 젠더가 폭발적인 그러나 아직 이름 붙이기 어려운 현재 진행형의 현상 그 자체를 빚어내며 아직도 한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 개개 사건이나 어떤 주장, 방식등에 대해서는 입이나 뇌가진 사람마다 제각기 하는 말과 할 말이 있고 생각이 있기 마련이다. 그 자체는 아무래도 좋다. 분명한 것은 '여성'이 개인으로서, 혹은 개념으로서 과거처럼 일방적으로 존재 자체가 깨끗히 무시당하지는 않는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혐오자들조차도, 적시는 할지언정 외면은 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러고나면 그것이 가능해진 시작도 역시 인류의 정점이던 모더니즘의 시대에서 비롯된다. 주제대로, 그때에서야 여성은 세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대로부터, 히라츠카와 초기 활동가들의 시대로부터 100여년이 지났다.

      그리고 기억에 대한 투쟁은, 작금의 한국 역사교과서문제와 마찬가지로 어디에서나 가열차다. 교수님께서 강의로 다루어주신대로, 일본 교과서 역시 각 출판사의 필진마다 나타나는 편집방향의 차이들처럼. 
      우익이라 하는 이쿠호샤 교과서는, 아예 최소한의 검정통과 기준만 충족하고는 모든 것을 제외한 극우 지유샤 교과서보다도 혐오스럽다. 여성운동을 정치 사회 운동에서 분리시킨다. 그리고는 마치 한국에서 쓰이는 '~의 꽃' 과 같은 역겨운 표현인 '나데시코' 일본사로 그것을 이름지어 별개 항목으로 넣어놓는다. 구태여 번역하자면 대강 아가씨들의 일본사쯤이 될법한, 그 천박한 어휘에 걸맞게도, 대표적 여성운동가들의 젊을적, 그들이 바라는 아름다움을 지닌 사진을 실어놓은채.

      개인적인 생각으로 극우 지유사의 태도가 차라리 낫다고 본다. 그들은 여성운동가를 증오한다. 최대한 존재 자체를 말살해버리길 원한다. 치명적인 위험으로, 위협적인 존재로 여기기에나 가능한 짓거리다. 그러나 이쿠호샤는? 그들은 너무도 가볍게 깔보고 경시하여, 속된 표현으로 입맛을 다시고 자빠졌다. 그들 보기에 좋도록 뜯어고쳐 진열이라도 하듯, 별개의 영역으로 실어놓고는 '나데시코'들로서 바라본다. 구역질 나오도록 관음증적인 정서가 느껴질 지경이다.

      이것이 100년전에 대한, 그 위대한 투쟁이 시작되었음에도  결과인 현재에 '그녀' 들에 대한 그들의 기억이다.

      철저한 적이, 음험한 자칭 친구보다 300배는 낫다. 페미니즘에서도, 성적소수자 운동에서도 이따금, 그리고 점증하는 성향 중 하나가 끽해야 서브컬쳐로서의 인정에 만족, 혹은 아예 별개로 독립된 그러나 결국은 외딴 갈라파고스적 하위문화로서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짓고 고립을 고집하는 경향들이 있던데, 그렇게 스스로까지 타자화 됨으로써 결국 앞서 본 것 같은 저열한 관음증의 대상이 될뿐이라는 명백한 사실은 왜 외면하는지 모르겠다.

      히라츠카 라이초의 시대로부터 100년이 지났다. 남은 것은 씁쓸함 뿐이다. 백년전  '여성' 이기에 억압받고 차별받던 개인들은 마침내 세상에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흔히 역사에 대해 말이라도 해볼만하다는 10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그들은 한 인간이 아니라 '여성' 으로서 남아있다. 그 또한의 집단 정체성으로서의 굴레이건만 자유로워지기는 커녕, 그럴 엄두도 못내도록 단결이 필요하도록 여전히 '여성'이기에 공격받음으로써.

    •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 II 3강 [조소앙,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015.10.26 김지문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 2

      조소앙,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강령과 삼균주의의 창시자, 이정도는 중,고등학교때 역사 수업을 잘만 들었다면 모두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사학과를 다니는 학생으로써 그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한 것은 수업을 들으며 부끄러웠다. 우연한 사건이었지만, 조소앙에 대하여 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조소앙

      조소앙은 1887년 경기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지막 성균관 입학생들 중 하나였는데, 젊은 나이인 1902년부터 신채호와 함께 보안회 활동을 했다고 전해진다. 1913년에 그는 상하이로 망명을 떠나는데, 이때 신채호, 박은식 등이 조직한 동제사에서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여기까지는 많이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한학을 배운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로써의 조소앙의 모습이다. 나는 그의 젊은 시절에 대한 묘사가 신기하다고 생각하였다. 뭔가 신념이나 이상이 있는 사람이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뚜렷한 미래의 지향이 존재하는 사람이 우울증에 걸려 책으로 극복하였다? 그에게 있어 한발 한발 걸어가는 미래는 흔들리고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그가 우울증을 견뎌냈다는 1910년대 초반에서, 그의 활동이 더 굳건해지면 굳건해질수록 증세도 호전되었다고 이야기 한것은 어느정도 비약일까?


      내가 신기하게 여긴 사실은 바로 공화국의 초석과 3.1운동에 대한 이야기였다. 교수님은 3.1운동의 영향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이 아닌, 3.1운동과 정부수립운동은 병행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예로 1917년부터 적혀진 <대동단결선언>에서 나오는 '제국의 주권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이양괴어 민국이 된다.'라는 주장과 '임시정부의 수립'에 대한 주장을 확인시키셨다. 또한 3월부터 5월까지 전국에서 진행된 3.1운동과 그 중심인 4월에 세워진 임시정부가 병행하여 만들어진 것, 모두 하나의 목적으로 오랜 준비끝에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 선언문들과 독립선언서, 대한민국 임시 헌장 등은 모두 조소앙, 그의 손을 거쳐 써 내려가졌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더 놀라게 만든 것은 독립 외교중에 그가 휘젓고 다닌 나라와 단체들이였다. 그는 1919년부터 임시정부에서 외교분야를 담당했다. 조선 문제를 다루지 않았던 파리 강화회의를 지나, 그는 네덜란드의 만국사회당대회에 참가했다. 그는 여기에서 사회민주주의적 정부 수립을 열망한다는 연설으로 각국 사회당의 당수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거기에 더해 그는 이듬해 1920년부터 1921년까지 그는 소비에트를 여행하며 공산당 대회까지 참가하였다.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별 효용이 없음을 독립운동가들이 막 깨닫기 시작하던 1920년대 초, 국제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 세력은 약소민족 독립운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효용적 가치를 깨달은 것이다. 조소앙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국민당과 소련 공산당, 전운이 다가오는 동안 조소앙은 임시정부를 이용하려는 외부세력들을 조율하고 줄타기하면서 그들이 임정을 인정하고 힘을 보태주게끔 만들려 노력하였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외교 노선에 대한 비판을 가하지만, 자신들의 상황을 가장 잘 깨닫고 노력하려 한 사람, 큰 그림을 본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다양한 사상을 접한 사람이기에, 그가 제창한 삼균주의는 여러 사상의 장점을 담고 있다. 정치, 경제, 교육의 평등과 민족과 민족의 평등, 학교에서는 이가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서술하지만, 어떻게, 왜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하다. 그의 삶과 가던 길이 그가 세운 주의의 이야기를 말해준다. 교수님은 말한다.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지만, 각박한 독립이라는 목표 속에서 이념이나 사상을 만들어낸 사람은 적다. 하지만 조소앙은 간단하고, 미약하게나마 나아갈 길을 정립하였고, 이는 우리의 헌법 속에서도 충분히 살아있다고 말이다. 그는 어두운 역사 속에서 오히려 더 진보한 체제를 정립해나가기 위해 애썼다. 과연 교과서, '올바른 역사'만을 담은 교과서에서 그가 걸어온 길을 우린 알 수 있을까?

    •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2] 2강. 고토쿠 슈스이. - '양심적' '개인'의 탄생

      2015.10.19 문동욱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 2
      자유민권운동가. 의회 사회주의자. 사회혁명가. 무정부주의자. 고토쿠 슈스이는 일본의 급변기, 그리고 세계적 사조의 격동기를 살았던 청년이다. 때문일까 그의 사상은 자주 바뀌는 한편으로, 이전의 잔흔이 다음의 자기 사상에도 남아있다. 자유민권을 외치지만 지사적 선도의식을 지니고 있고, 사회주의를 지향하지만 계급의 의미를 낮게 보고 혁명을 부정한다. 그러던 그가 마침내는 조직화된 노동자들의 총파업이란 방식의 혁명을 통한 무정부 사회를 꿈꾼다. 그것은 단지 사상의 전향이라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사다난한 속에, 끝없는 현실의 벽과 멈추지 않는 변화의 바람 속에서 안주 없이 고민과 분투를 반복한 한 청년의 삶의 궤적이다.

      그 사상의 변천 자체를 누군가는 흐름으로써, 정제되어갔다고, 누군가는 발전해갔다고, 누군가는 급진화 혹은 과겨화 되어갔다고 할 것이다. 혹자는 그때 그때 접한 신사조를 유행처럼 쫓는 지적 한량에 불과했다고, 혹은 가장 큰 배당을 노리고 신사조에 운을 건 도박사적 기회주의자에 불과했다고 평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것을 거꾸로 거슬러보고자 한다. 그의 세계관 전체에서, 내가 결정적이라고 여기는 것에 한정해서나마.

      1911년 고토쿠 슈스이는 거창한 '대역사건'으로 사형되었다. 신민으로서 천황을 내면에 절대적 존재가 아닌, 상대적 존재이자 타자로서 여긴 결과였다. 그에 무정부주의자로서의 자신의 대적인 천황이기에, 날려버리겠다는 등의 우연한 허세 발언이 나왔고 그것으로 사형이었다. 대일본제국의 신성한 국체를 받아들이고 내면화하지 않았으니 그 자체로 반역죄라면 반역죄이기는 할 것이다. 아무리 어이없도록 과장된 재판이라 해도, '대일본제국'에서 그의 존재를 용납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1909년. 그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을 칭송했다. 자신의 의를 관철시키기 위해 삶을 바친 열사로서. 어쩌면 그건 이념이나 사상적 지지라기보다도, 미의식적인 감동에 가까웠지 않을까 싶다. 헌정시의 싯구대로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는 안중근은 고토쿠에게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칭송받을만 했을테니까. 여하긴 이에서 고토쿠에게 조선인이 일본 고관을 살해했다는 것은 긍정적인쪽으로든 부정적인쪽으로든 딱히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이란 한 용사의 삶은 자세에 대한 개인적 감상과 평가만이 있을 뿐이다.

      1904년. 러일전쟁에 전 일본이 애국주의의 물결에 들끓고 있었다. 끝없이 남진해오는 저 불곰을 격파하지 않으면 종국에는 일본도 사할린처럼 집어삼켜지리라. 19세기부터 이어진 두려움에 기반한 국가와 민족의 생존 자체에 대한 절박함을 활용한, 반쯤은 자연적이고 반쯤은 조장된 애국심의 물결. 그 속에서 고토쿠는 극소수와 함께 반전론을 내걸면서, 전쟁은 오직 양국의 지배층의 이익을 위해 양국 인민의 삶을 파괴할 뿐이라 주장했다. 나아가 일본-러시아 양국 사회당의 접촉을 통한 양국에서의 반전선언이 이루어지는데 일조했다.

      그런 그가, 그 이전 청일전쟁에서는 우치무라 간조 등과 함께 마찬가지로 그 전쟁을 찬성하고 찬양하며 지지했었다. 대체 왜? 러시아는 청나라보다 더 확장지향적이었으며 강성했다. 일본국과 민족에 보다 위협이 될 것은 러시아였는데? 그 답은 아마도 그 사이 그가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면셔 민족보다도 계급으로서, 국가란 일체가 아닌 각부로 보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 이전의 고토쿠가 국수주의자라서나 국권주의자, 총단결주의자는 아니다. 그는 엄연한 자유민권파였다. 그러나 사실 일본 자유민권운동은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좌익은 물론 민간우익의 뿌리가 될 수밖에 없기도 한 이유도 그것에 있었다.

      일본 자유민권의 아버지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본디 무사 출신이었다. 무진전쟁 당시 신정부군을 이끌고 아이즈에 침입한 그는, 아이즈 주민들이 별 저항없이 삼백년간 자신들의 통치자였던 아이즈 마츠다이라 가문의 적인 신정부군에 유순히 협조적인 현상을 경험했다. 그것을 통해 그가 깨달은 것은 권리 없는 민중은 국가의 흥망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래도 고결하고 탁견을 지닌 이였다. 충성과 의무를 강조하는 세뇌 대신에, 민권운동을 주창했으니까. 

      그렇지만 그것은 결국 '민권' 자체가 가치나 목적이 아니라, '국가'를 강성하게 하는 수단에 불과하단 의미였다. 그러니 우치다 료헤이등 국수주의자들이야말로 자유민권운동의 도리어 적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토쿠 역시 초기 이른바 자유주의자(자유민권운동가) 시절에는 '국민' 의 이익이란 견지에서 제국주의와 조선 확보에 찬동했었다. 때문에 청일전쟁 역시 지지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변화 이유는 결국 '국민'에서 '인민'으로에서 밖에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한일의 특수한 관계 속에서 일부 학자를 위시한 일본인들에게 한국에서 부여하는 칭호가 있다. '양심적' 일본인이 그것이다. 그 자체에는 크게 이의없다. 애초에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말 자체가 나머지는 비양심적이란 의미는 아니니까. 비록 양심적 '일본인'의 경우에는 그런 식의 단정과 속내도 내포되어 있는 듯도 하지만.

      이 '양심적' 일본인들의 공통점은 일본 제국을 비판한다는 것이고, 그 귀결이었던 15년 전쟁 후 탄생한 일본국헌법-제국헌법이 아닌- , 이른바 '평화헌법' 을 수호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부는 아니지만 그들 다수에게 나타나는 공통점은 명백히 좌익이란 점이다.

      좌익만이 양심적이고 선을 추구하기에? 그럴리야 물론 없다 다만 좌익의 경우 하나의 문제, 즉 민족과 조국이란 것에서 자유롭기에 -혹은 자유롭고자 하기에- 일본제국이 조선에서 자행한 죄악들에도 망설임 없이 비판의 칼을 겨누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필요로 하고 살피는 것은 딱 거기까지가 전부다. 그들의 일본제국 비판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가능한 근본 동인도 애써 무시한다. 아니, 생각지도 않거나 못한다. 

      한 개인이 자신의 가치판단 기준에 따라,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그로써 주체적인 소신 즉 '양심'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성역인 영역에까지 칼을 들이댄다는 거의 의미는 말살해버린다. 

      왜냐면 그 성역은 결국 우리에게는 존재하고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기에. 그들의 양심은 그들에게만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그런 류의 양심은 있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분열이요 반역이고 배신이며 약화를 부르기 때문이다. 그게 아마 피상적인 선악의 영역으로 전락시킨 '양심적' 이란 표현으로 그들의 좌익성향을 가려덮는 이유일 것이다.

      (물론 일본 우익 중에서도, 박수받을만큼 확고한 원칙을 지닌 보수주의자로서 일본제국과 과거사 문제에 비판의 날을 세우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죄악과 거짓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명예가 더러워질 뿐이라고 믿으며 그들이 사랑하는 민족의 건전성을 위해 투쟁한다. 사상의 차이는 있겠으나마, 적어도 그들은 자신들이 확고히 지향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성역을 두지 않고 -오히려 성역을 제일 먼저 성스럽게 하는데 가깝겠지만- 비판의 날을 세운단 점에서는 경애받아 마땅할 것이다. 사실 그들의 본질이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에 애정을 품은 보수주의자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비단 사회주의뿐 아니라 모든 이념과 사상, 그리고 종교까지도 대부분은 본질적으로 인터내셔널적이다. 원리와 원칙에서 보편을 추구한다. 하지만 내셔널리즘은 그 어떤 일관적인 원칙이나 가치 대신, 처음부터 기울어진 잣대와 저울로 철저하게 특수한 집단이익만을 옹호한며 편을 가른다. '우리'는 조국을 위해 무엇도 불사해야 하지만 '저들'은 그러면 안 된다. 행위가 아니라 편이 평가의 기준이다. 갈려진 편에서 개인은 정체성을 항구적으로 못밖힌다. 그로써 사고와 사유는 금지된다. 개인은 말살된다. 개인으로서만이 가능한 '양심' 은 거세된다.

      이른바 자칭 진보진영이 민족정기와 민족의식을 따지고 든다. 친일잔재로 규정해버린 기득권이 받는 비판, 아니 그보다도 비난은 자국민에게조차 혹독했던 체제와 방식을 이 땅의 '민국'에서 시행해서보다도, 단지 타민족에 부역했다는 근원적 원죄이다. 1917년, 조선이 이미 사라진 후 태어난 청년이, 범죄적인 제국체제와 그 침략행위에 개인의 영달을 위해 참여하고자 했단 것보다도, 단지 이민족 정권에 충성했다는게 더 문제이듯이 말이다.


      슈스이의 삶과 그의 사상적 변천은 '양심적' '개인' 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되어야만 하는 굴레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헌데 우리는 어쩔 것인가? 아이들에게 "저들이 양심으로 찢기고 갈려져 약해지는 모습을 손뼉을 치며 보자. 그리고 '우리' 는 비양심으로 공고히 하나되자. 그로써 강해지자. 그러니 너는 양심같은 일탈과 배신 반역은 꿈도 꾸지말고 눈길도 주지말거라.' 라고 가르칠 것인가.  すばらしい. 了不起 . incredible. es demasiado. صعب ؛ شديد ؛ حادّ.
    •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2] 1강. 손문. -국부.영웅. 그 신화.

      2015.10.12 문동욱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 2
      쑨원. 손문. 중화인민공화국가 중화민국, 세계 각지의 화예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국부. 중화'민족'의 아버지. 


      역사는 신화의 타파와 신화에서의 탈피로 탄생하였다. 헤로도토스가 역사의 아버지로 추앙되는 이유는 그의 저작이 지니는 무수한 장점들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최로로 신이 행사하는 권능과 섭리가 아닌, 인간 행위와 의지의 소산으로 역사를 정리하였다. 그것은 단지 과거사의 문제가 아닌, 그 연원의 결과인 현재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인간에 의한 것은 신성불가침이 될 수 없다. 때문에 현재는 과거에 전적으로 속박될 이유가 없으며 미지의 미래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는 것이었다.

      이런 역사학의 대전제이자 근본적인 본질은 근대 이른바 '민족' 국가의 시대에 이르러 변질되고 퇴화했으며 타락했다. 역사는 유사신화로 전락했다. 기간테스로 대표되는 초자연적 거대한 힘의 존재는 '민족' 이 대체했다. 수천년동안 동질적이며 응집된 단일체라는, 마치 단순한 당구공과 같아 이리저리 움직일 뿐 본질엔 흔들림이 없는 단단한 존재로. 그리고 그 행로를 결정하는 큐대는 신이 아닌 영도자, 곧 영웅에게 들려있는 모습으로.

      아예 멸망은 할지언정 그 순수성과 단일성은 결코 변함이 없다는 민족. 그것을 이끌 완전무결한, 감히 비판될 수 없는 영웅, 아니 성웅들. 이로써 역사는 존경 받아야만 하는 선대의 위대한 고락의 여정을 마냥 찬미하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전락했다.


      손문. 바로 이런 류의 '근대' 로의 진입과 '민족' 국가 수립에 초조히 안달내던 아시아의 근대가 최초로 창조한 성웅. 그러나 과연 그는 무오하고 완전무결할까. 아니 애초에 그럴 수 있을까.

      그의 다사다난한 인생역정의 정리는 생략한다. 본 강의에서 9인 중 제일 유명하고 중국근대사와 결부되어 있는, 아니 그 자체로 다루어지는 터이니까. 그래도 골자만 꼽자면 청 말기 혁명파 중 한 사람으로 무수한 봉기와 실패 끝에, 신해혁명 당시 대총통으로 추대되어 민국시대의 첫 막을 연 사람. 혼란이 이어진 민국시대에 국민당을 창당하고 공산당을 포용하여 국내의 제세력을 통합해 하나된 중국을 이루고자 분투한 사람. 삼민주의라는, 독자적인 대원칙을 세워 민족의 길을 열고자 했던 사람.

      무수한 봉기 실패는 불굴의 의지와 함께 치명적인 무능력을 보여준다. 그 어떤 정세에도 절망치 않는 모습은 극도의 안이한 낙관주의이기도 하다. 정치적 유연성은 무원칙 무정견의 기회주의자적 속성이기도 하다. 넘쳐흐르는 사명감과 책임의식은 독선과 오만이자 메시아 증후군적 자아도취의 광기이기도 하다. 그가 본격적으로 엘리트주의자인 것과 마찬가지 맥락으로.

      내가 개인적으로 손문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의 흠결을 찾아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역사에서 실수 속에서 배울 점은 찾아도 단점 그 자체에서 배울 것은 없으니까. 문제는 위에 같은 쌍짓기가 허용조차 되지 않는 존재가 영웅이며 국부라는 것이다.

      강사님께서 전해주셨듯이 몇몇 부분에서 그의 도의적 무책임을 비롯한 인격적 결함은 분명하다. 그것은 그 역시 한명의 인간인 이상 당연하다. 그 자체 비난 받을 이유는 없다. 비판은 가능하겠지만. 허나 그런 그의 한계에 대한 연구 자체가 일본 등 타자에 의해서만 가당하단 것, 중국이든 대만이든 그러한 평가 자체를 용납치 않는다는 것이 다시 관건이다. 그리고 손문의 위업 아래에서 짓눌려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이다.

      문화대혁명으로 상징되는 숨길 수 없는 실패로 차라리 모택동은 역사의 존재가 되었다. 공7과3. 비록 그 배분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등소평의 그 단언으로 모택동은 공과를 모두 지닌 인간으로 공식적으로 남았다. 반면에 손문은 가히 전지전능하시고 무오하시며 온저하신 지고의 존재가 되어 민족의 신전에 올라서셨도다. 감히 무엇 때문에 사유다 필요하겠는가. 손문의 존재 자체가 건전한 이성과 사고의 한 부분을 거세해낸다. 영웅이란, 국부란 본질적으로 그런 존재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오늘날 다시금 우리 사회는 '국부' 와 영웅에 목말라 하고 있다. '국부' 란 특정단어 때문에 특정인이나 성향의 사람들에 한정된 얘기는 아니다. 차라리 어차피 진영전의 논리로 따지면 속해있는 쪽을 돌아보며 떠들어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지만, 4자필승론은 저열하기 이를 데 없는 논리였다는 개인 사견을 꺼내드는 순간 특정지방 죽이기란 소리를 듣는다. 인간으로서 가장 좋아하던 정치인이자 대통령이지만 그가 결국 한 건 도무지 정치가 못 되었다 라는 감상에 졸지에 벌레가 되어버린다. 혹자들은 또한 숨만 쉬고 있으면 지지율이 올라가는 어떤 닥터께서 백마 탄 초인 마냥 여야의 '구태' -그 기준이 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치를 쓸어버리고 새로운 정치 -마찬가지로 그 내용 실체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 를 해주리라 확신한다. 혹자들은 어디 시장의 어변 전투적으로 화려한 트윗에 열광한다. 혹자들은 인권문제를 일시적으로 행위에 대한 찬반의 문제로 전락시킨, 그로써 이제는 흔한 정치논리에 따르며 원칙을 딱히 초지일관 지키지도 않는, 자리에 따라 말이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 어떤 시장을 직업정치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평가했단 이유만으로 자칭 어버이들과 함께 하는 작자로 몰아간다.

      각지에 신성불가침하고 이견이 용납되지 않는 오직 찬미의 대상인 영웅과 신화가 가득 차있다. 그들이 뿜어내는 총천연색 위대함에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다. 어정쩡한 자칭 탈근대는 호언장담하던대로 신화를 해체하는 대신에 본능적으로 그 양식을 조잡스레 본뜬 수십 수백개의 파편적 신화를 양성해냈을 뿐이다.

      아시아 근대에서부터 역사학에, 그로써 현실을 보는 눈을 다시금 신화시대로 이끌어버린 첫 존재 손문. 그의 일생보다도 사후에 추승이 아시아를 이 지옥같은 '근대' 로 '만든' 것 아닐까.

      하지만 동시에 손문이 '우리'의 영웅은 아니기에 평가가 자유로운 덕분에 제약이 없었던 이번 강의를 통해서 영웅숭배란 끔찍한 현상 자체의 해소의 실마리가 보인 듯도 하다. 

      우상숭배를 끝내는 법은 나무토박이나 돌조각이란 본질을 기억하는 것이다. 영웅숭배를 끝내는 시작도 다를 바 없다. 그는 한명의 인간에 불과하단 자명한 본질을 상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배울점이 없다라고 하거나 인간적인 결함을 찾아내는데 매진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무수한 단점과 한계들을 직시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신을 다한 누군가들이 도리어 우리와 동떨어진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배우고 닮을 대상이 될 수 있음도 자명할 뿐이다. 신화를 벗어나서 역사가 가지는 참된 가치와 의의는 아마도 그것일 것이다. 
       

      그것은 아마 우선은 장점과 단점, 악덕과 미덕, 선과 악, 단순한 호불호와 기질가지 그 모두를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자기대로 갖춘었을 뿐인 한 인간으로써 다만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을까. 과도한 기대도 사명감 어린 비판의식도 잠시 내려놓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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