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권의 독서클럽 – 혼자 읽기 어려운 책 함께 읽기 2 <위기의 국가>

  • 강사

  • 기간

    • 2015. 4. 30 ~ 2015. 5. 21
  • 시간

    • 목요일 19:00~21:30 총4회
  • 수강료

    60,000

    • 파격 할인혜택
    • 참여연대 회원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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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 정보

     
    강의소개 |
    혼자서 책을 읽다가 중도에 덮었던 기억 다들 있으시죠?
    첫 장부터 막혀서 좌절했던 경험, 불친절한 번역서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나요?
    김만권의 독서클럽에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경험과 기억을 주었던 책들을 골라
    함께 읽으며 이해를 돕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두 번째 책으로 지그문트 바우만의 <위기의 국가>를 선정했습니다.
    "국가란 도대체 무엇인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위기의 순간, 과연 국가가 나를 지켜줄 수 있을까?"
    세월호 참사 이후 대한민국의 위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책.
    근대국가의 성립부터 신자유주의 시대까지
    정치와 권력을 잃은 무능한 국가에 대한 날카로운 대담을 함께 읽어 볼까요?
     
     
    강의일정 |
    날짜
    순서
    주제
    4.30
    1
    <위기의 국가> 어떻게 읽을 것인가
    5.07
    2
    1장 국가의 위기
    5.14
    3
    2장 위기의 근대
    5.21
    4
    3장 위기의 민주주의
     
    교재 |
    <위기의 국가> 지그문트 바우만, 카를로 보르도니 | 역자 안규남 | 동녘(2014)
     
    강사소개 |
    김만권
    미국 뉴스쿨에서 “정치적 적들 간의 화해를 위한 헌법 짓기”를 주제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자유주의에 관한 짧은 에세이들: 현대 자유주의 정치철학입문>, <불평등의 패러독스: 존 롤스의
    분배정의와 정치>, <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세상을 보는 열 일곱 개의 시선: 정치와 사회에
     관한 철학에세이>, <참여의 희망: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만나다>, <정치가 떠난 자리> 등을 썼고,
    < 만민법>,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 <인민>(출간예정)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에서는 2013 여름부터 <정의의 계보학 – 정의는 정의로운가?>, <자유의 계보학>,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 근대편, 고대편1>, <정치적 인간의 조건, 자유인가 평등인가>,
    <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여섯 가지 키워드1, 2>, <혼자 읽기 어려운 책, 함께 읽기1-정의론> 등을 강의했다.
     
    강의정보 |
    일   시 : 2015. 4.30 ~ 5.27 (목) 총 4회 오후 7시 ~ 9시30분
    장   소 :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
    수강비 : 6만원 (참여연대 회원 30% 할인, 20명 정원)
     

    후기 4

    • [김만권의 독서클럽-위기의 국가] 4강: 제3부 민주주의의 위기

      2015.5.28 rohsawook 김만권의 독서클럽 – 혼자 읽기 어려운 책 함께 읽기 2 <위기의 국가>

      위기의 국가를 함께 읽는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파트인 민주주의의 위기부분이었는데요, 먼저 선생님께서 우리 민주주의의 위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질문하셨습니다.

      -과거로의 회귀다(명징했던 것들이 되돌아가는 것 같다), -절차적 민주주의 이룩 이후에 어떻게 나갈 것인지 다음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지 못한다, 등의 의견이 있었고 그와 더불어, 민주주의의 질적 발전도 중요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돼야 자유롭게 정치로 들어갈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어떤 국가에 대해서건 그 국가의 입법부, 더 나아가 유권자들의 의사와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온갖 중요한 경제적 결정을 내리는 전지구적 최상층 계급이 있다.” -리처드 로티

       

      본격적으로 보르도니와 바우만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에 영향을 받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보르도니와 바우만은 각각 경제적 현상, 문화적 현상에 주목했습니다.

      보르도니는, 근대가 왕성해지고 나서 상부구조의 문화적 힘이 경제에 영향을 줄 만큼 컸는데 지금에 와보니 결국 우리 삶을 결정하는 거 여전히 경제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바우만은, 경제가 무언가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민주적 사회로 돌아가고 싶다면 우리가 보아야할 것은 문화라고 얘기합니다. ‘glocalization’. 지역이 세계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집중하여 여기서 민주주의의 포인트를 찾아야 합니다. 문화적 수용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야하는 것이죠.

       

      [포스트민주주의]

      바우만은 문화의 이정표로서 Y세대를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Y세대는 불안정성의 세대입니다. 보호 없이, 직업 불안정성을 겪으면서 거기에 소비주의 문화가 결합된 세대입니다. 1980년대 중반과 1990년대 중반 사이에 태어난 세대로서, 인터넷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최초의 인간들이고 실시간으로디지털 소통을 알고 실천한다는 점에서 문화의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로 인식되고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브라프만은 프랑스인들이 Y세대라고 할 때 흔히 Y를 영어의 why로 발음하는 것은 이 세대가 질문하는 세대라는 데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고 합니다. ‘Y세대, “자기말을 뱉고 나가버리는 대화구조가 만연한 세대이며 반민주적, 반정치적인 세대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Y세대는 대개 위키피디아의 익명의 저자들, 페이스북 친구들, 트위터 중독자들에게 질문을 할 뿐, 부모나 상사 혹은 정부당국에 결코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들로부터 권위 있고 믿을만한 답변은 고사하고 귀 기울일만한 정도의 대답도 기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Y세대는 왜 질문을 할까요? 정말 간절히 원하는 질문이 많기 때문일까요? 그게 아니라 혹시 처음 뵙겠습니다처럼 정보 전달이 아니라 당신의 존재를 알리고 당신이 언제든 함께 어울릴 준비가 되어있음을 보여주는 사교적 기능만 하는 말들인 건 아닐까요? 사람들이 많은 모임에서 소외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혹은 지루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나누는 잡담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요?

      또한 Y세대 구성원들은 완벽하거나 완벽에 가까운 직장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지 않고 현재의 일자리와 그 일자리를 제공하는 회사들에 대해 그다지 헌신적이지 않으며 삶은 다른 곳에 있다는 확신과 바로 그 다른 곳에서 살겠다는 결의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 세대들과 다릅니다.

       

      보르도니는 포스트민주주의를 반정치라고 이야기합니다. 포스트민주주의는 탈규제, 정치생활과 선거에서 시민참여의 감소, 복지국가의 쇠퇴, 경제적 자유주의의 회귀, 정치의 쇼비지니스화, 공적 투자의 감소, 최소한의 자유만을 보장하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모습들을 보입니다.

       

      포스트민주주의에 대해서 바우만의 의견에 공감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Y세대로 일컬어질 수 있는 20대들이 바우만이 얘기한 Y세대의 양상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는 생각과 소통 방식들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새로운 지구적 질서를 위해]

      보르도니는 “multitude”에 집중합니다. ‘multitude’ 다중은 시민과는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시민은 국가경계적 개념에 속한사람의 뜻이 강한 반면 다중은 그 개념 너머에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경제가 가장 효과적인 사회통제수단이기에, 이 새로운 정치는 본질적으로 경제적 결정에 좌우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민들의 수중에서 완전히 벗어나 지구적 권력의 최고 수뇌부에 있는 얼굴없는 책임자들에게 전적으로 맡겨져 있습니다. 일반시민들은 지역차원의 정치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지역차원의 정치에는 중요하다고 할 만한 활동영역이 없습니다. 그것은 늘 되풀이되는 뻔한 문제들을 관리하는 일만 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르도니는 더욱 다중에 주목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다중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김만권 선생님께서도 다중보다는 시민(citizenship)’ 개념을 다른 차원으로 옮겨 대응해야한다는 생각을 말씀하셨습니다.

       

      바우만은 소비주의 신드롬에 주목합니다. 이는 강력한 장애물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처리하기 가장 힘든 장애물입니다. 소비주의 신드롬은 소비시장들의 관행을 통해 세워진 기준들에 입각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 판단, 평가를 촉진하고 정당화합니다.

      인간이 소비되는 것입니다.

      그에 더해 일방적 종결의 권리를 이야기하는데요, 좋아하면 소비하고 매력이 없으면 소비를 중단하듯, 네트워크의 본질적 특징으로 일방적 종결의 권리가 작용합니다. 공동체와 달리 네트워크는 개인들이 모여 만들고 개인별로 탈퇴와 가입이 이루어지며 개인들이 떠나면서 해체됩니다. 도덕적으로 무감각해진 개인들, 즉 타인의 행복을 고려할 수도 없고 고려할 생각도 없게 된 사람들은 싫든 좋든 동시에 상대의 도덕적 무감각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멸감만 남고 도덕감은 사라졌다”. 소비주의는 경제의 수레바퀴에는 기름칠을 할지 모르지만, 도덕의 베어링에는 모래를 뿌립니다.

       

      4주 동안 [위기의 국가]를 읽으며 우리의 위기, 민주주의, 그리고 현대의 새로운 질서 등에 고민하고 생각을 나누는 좋은 시간들이었습니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 [김만권의 독서클럽-위기의 국가] 3강: 제2부 근대성의 위기

      2015.5.21 혠벗 김만권의 독서클럽 – 혼자 읽기 어려운 책 함께 읽기 2 <위기의 국가>

      '1부 국가의 위기'에서 글로벌리제이션과 그에 따른 위기와 국가의 변화에 대한 두 학자의 생각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몇몇 지점에서 두 사람의 생각이 미묘하게 다르기도 했으나, 현재를 '위기'로 본다는 점, 근대 국민국가가 더 이상 국민 보호라는 자신의 역할을 하려들지 않는다는 점, 그 결과 개인들이 스스로를 보호해야하는 상황에 처했다는 점 등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2부 근대성의 위기'에서는 두 사람의 견해가 갈리고 서로 설전을 벌이는 무척 흥미로운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신 강의록에 100페이지 가량 되는 2부 전체가 무척 꼼꼼하고 이해하기 쉽게 요약.정리 되어 있어, 저는 두 사람의 견해가 갈리는 포인트에 대해서 정리.인용 하는 것으로 후기를 대신하려 합니다. 


      [Point 1] 근대는 과거인가 현재인가

      보르도니는  '이미 근대와 포스트 모더니즘을 건너왔다. (아직 어떤 시대인지 알 수는 없지만...) 현재는 또 다른 시대'라고 봅니다. 세계대전 이후 노동의 변화, 탈물질화, 이데올로기의 쇠락이 근대의 붕괴를 보여주며, 그 후 혼란했던 1970년부터 20세기 끝날 때까지가 포스트 모던이었다는 것입니다. 

      "세계대전 이후에 노동의 변화와 점진적인 탈물질화 및 이것들로 인한 불안정성은 근대의 토대들이 흔들리게 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 근대의 구조는 여러개의 기둥들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지도적인 열할을 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입니다. (...)근대의 역사상 최악의 범죄들은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자행되었습니다. (...) 이제 이에올로기의 시대는 지나가 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는 낡은 도구의 신세가 된 것 같습니다." (pp.142-145)

      "자세히 들여다보면, 포스트모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1970년대에서 시작해 20세기가 끝날 때까지의 얼마 안 되는 역사적 시기, 근대의 모든 가치와 확실성들이 회의의 대상이 되었던 혼돈의 시대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p.152)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은 가 버렸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종말을 고했고, 뱃사공 역할도 끝났습니다. (...) 포스트모더니티는 근대와 아직 이름은 없지만 이미 본질적 특징들이 구체화되기 시작하고 있는 새로운 단계 사이에 놓인 과도기입니다." (p.178)

      이에 반해 바우만은 '우리는 근대가 끝났다는 것을 당장 확신할 수 없으며, 여전히 (액체화 된) 근대에 살고 있다'고 봅니다. 

      "당신은 우리가 근대를 벗어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설령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 시대의 시작이나 끝을 알 수 있다고 쳐도, 도대체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일까요? (...) 역사의 천사가 이야기하는 핵심은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는지는 알지만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pp.146, 148) 

      "우리는 근대에 작별을 고하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근대의 약속을의 결실들을 기다리고 있고 (...) 소비를 통한 행복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다른 모든 이데올로기를 압도, 정복, 소멸시킬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이데올로기입니다. (...) 근대의 거대 서사 중에서 가장 거대한 서사, 즉 경제, 과학, 기술의 삼위일체가 주도하는 지구에 대한 인간 통제의 진보라는 서사는 그 어느때보다도 건강한 상태에 있는 것 같습니다." (pp.149-151)

      "사회문화적 환경의 변화를 파악하고 이해하고 기술하기 위해서는 수정을 거쳤거나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분석 도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잘 아시겠지만, 과거에 저는 이런 변화를 더 잘 나타낼 수 있는 다른 용어가 없었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포스트모더니티'라는 용어를 사용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저는 새로운 현실들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용어를 만들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액체 상태;라는 은유였습니다." (pp.168, 170)


      [Point 2] 근대국가가 떠난 자리에 설 새로운 주체는 누구인가?

      보르도니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남긴 하나의 가능성으로 다중 (multitude)이 새로운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다중'은 인민(the people), 시민(citizen), 국민과는 구분되는 개념으로 주권자와 사회계약을 맺지 않고, 계속해서 (국가라는) 정치사회 바깥에 있던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보르도니는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면서 단련된 다중으로서의 개인이 국민국가의 빈 자리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포스트모더니티는 개인주의는 찬양하면서 근대가 발흥기에 보여주었던 연대, 타인과 문명화된 행동에 대한 존중은 거부함으로써, 가장 잘 적응하는 영리한 자들이 살아남는 상황으로 퇴보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 포스트모던적 개인은 가능한 유일한 수단인 주관주의의 정신을 통해 이 과제를 수행합니다. (...) 그러나 주관주의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중의 회귀입니다. (...) 봉건제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국민국가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에는 아직 미덥지 못한 존재로 여겨졌던 다중은 이제 명예를 회복하고 자신의 능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는 역사적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 다중은 사회적 통제를 다른 형태들로 재수립하고자 하는 강력한 압력을 견디어내게 될 최초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pp.162-164)

      "(액체 사회의) 수면 밑에서는 계속 바뀌어가는 환경에 매일 적응하는 숨겨진 사회가 형성됩니다. (...) 이러한 숨은 사회의 구성원은 다중입니다. (...) 숨은 사회의 삶은 저항의 연속입니다. 증가와 감소, 예외적 사건, 자연적.도덕적 재난, 깨진 약속, 화보된 것으로 보이는 확실성들을 수정하는 법률, 붕괴, 갑작스러운 직장 폐쇄, 배제, 주변화, 차별, 좌절된 기대, 제한적 해석, 우리의 프르그램에 들어 있지 않은 계획, 신용 사기, 심각한 범죄, 급여 미수급, 사고, 기능 장애, 실망 등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들로 점철된 삶입니다. (...) 이것이 포스트모더니티의 결과인지 아니면 단지 무수한 위기의 순간 중의 하나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저항입니다." (pp.184-185)

      한편 바우만은 '우리는 여전히 공위기 상태, 즉 주체의 부재에 따른 위기에 직면 해 있으며, 보르도니가 말하는 다중은 해답이라고 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공시적이든 통시적이든 모든 질서에 대한 불신, '질서'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회의, '유연성'과 '혁신'이라는 가치를 '안정성'과 '연속성'이라는 가치보다 위에 놓는 경향, 거푸집도 마련하지 않은 채 금속부터 녹이는 것. 이 모든 것은 현재의 공위기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합니다." (p.167)

      "'누가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고 머리를 쥐어짤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여러 위기를 겪고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나머지 모든 위기를 해결 불가능하게 하는 '메타 위기'인 주체의 위기입니다. (...) 국가라는 주체의 위기입니다. (...) 부재하는 국가에 대한 간으한 대안이 될 만한 집단 행동의 새로운 형식들을 모색/실험하는 데 열중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들이 광범위하게 존재합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중의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이 '변화의 여정 속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현상입니다. (...) 그것은 아직 실험 단계에 있습니다. 이 실험 동안에 수집된 증거는 아무리 호의적으로 보더라도 애매모호한 수준에 그치고 있으며, 따라서 (...) 합의에 이르지 못해 (...)" (pp.203-204)


      두 가지 포인트에 대한 두 사람의 신경전이 젠틀한 단어들 사이에서도 비쳐보여 읽는 내내 매우 흥미로웠던 파트였습니다. 수업을 들으시는 분들은 두 사람 중 누구에게 좀 더 설득 당했는지, 혹은 두 사람의 견해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이야기를 더 나눠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김만권의 독서클럽-위기의 국가]1부 국가의 위기

      2015.5.14 박윤채영 김만권의 독서클럽 – 혼자 읽기 어려운 책 함께 읽기 2 <위기의 국가>

      <위기의 국가> 1부. 국가의 위기

       

      위기의 국가는 보르도니와 바우만의 대담이 담긴 책입니다. 때문에 같은 것에 대해 다르게 해석하고 판단합니다. 두 학자의 입장을 그대로 정리해서 옮겨보겠습니다.

       

      1)위기의 정의

      위기Crisis 는 그리스어 κρίση에서 나온 말입니다.

       

      보르도니 Carlo Bordoni

      보르도니는 이 단어에 대해 “고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판단’, ‘재판 결과’, ‘전환점’, ‘선택’, ‘결정’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과 여기에서 ‘판단 기준’ 등을 뜻하는 ‘크라이티어리언critierion'과 ‘판단에 적합한’, ‘매우 중요한’ 등을 뜻하는 ‘크리티컬critical'이 파생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위기가 가진 ’전환‘, ’결정‘, ’판단‘, ’선택‘의 의미에 주목합니다. 전과 다른 상태로 바뀌어야 하는 때 또는 바뀐 결과가 위기의 진짜 의미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 날 위기는 주로 경제 분야에 침체가 일어났을 때로 표현하는 데에 쓰이고 있습니다. 보르도니는 이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위기‘탓으로 돌리고 있는 거라고 봅니다. 이것을 통해 개인들은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명분을 갖습니다. ’세월호 문제를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 경제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라는 말이 실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위기’라는 단어는 ‘국면’이나 ‘공황’과 같은 단어를 대체하게 되었습니다. 보르도니는 ‘국면’이란 ‘새로운 번영의 단계로 가는 과도기’를 뜻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교적 단기적이며 극복해야 할 것보다는 재충전의 시기입니다. ‘공황’은 국면보다 장기간적인 침체로 회복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케인스의 이론으로 극복될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지금의 위기는 그동안의 것들과 다릅니다. ‘국면’보다 장기적이며 ‘공황’ 때처럼 이론과 정책으로 통제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금융 중심 경제에서는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거나 투자가 발생하기 보단 ‘자본의 이동’으로 돈을 확장하기 때문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니 소비는 줄고 새로운 투자가 없으니 줄어든 소비로 인한 손실을 보상하려 기업은 값을 올리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편에선 아직 위기를 절감하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가 내게 닥치기 전에 있을 때 즐기자! 는 마인드로 소비하는 일명 ‘타이타닉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인간의 노동만이 새로운 가치 또는 부를 창조한다.” -칼 마르크스-

       

      현재의 위기의 특징은 ‘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있다’는 것입니다. 보르도니는 우리가 위기를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특히 ‘공포’에 압도되지 말고 파도를 타듯, 위기를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야 합니다.

       

      바우만Zygmunt Bauman

      바우만은 ‘위기’의 의미 중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른다는 ‘무지와 불확실성’에 주목합니다. 위기란 ‘진단과 동시에 행동이 필요하다는 뜻’인데 이것은 원하는 방향으로 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결정하여 행동해야 한다는 모순을 갖습니다. 현재의 위기는 이 어원으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이 바우만의 진단입니다. 즉, 선택한다고 원하는 대로 될 가능성이 별로 없는 위기라는 거죠. 그리고 그 원인을 ‘정치와 권력의 분리’로 보고 있습니다.

      과거 공황 때만 해도 사람들은 의지할 대상이 있었습니다. 바로 ‘국가’입니다. 그때의 국가는 ‘사태를 자기 의지와 일치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강한 국가’였습니다. 결정하고 행동하고 그 결과가 원하는 대로 되도록 강제할 수 있는 힘을 가졌었다는 거죠. ‘결정하는 것’이 정치이며 ‘결정이 진행되도록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권력입니다.

      1970년대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국가는 국민들에게 해주어야 할 역할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보편적 복지는 국가의 재원 낭비로 여겨지게 되었고 경제 발전을 위해 개인이 그 책임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시작되면서 교육, 보험, 교통, 안전과 같은 국가의 역할은 시장에게 넘어갔습니다. 개인들은 이제 국가의 역할을 시장에서 구매하는 소비자가 됩니다. 지구화로 인해 이제 시장은 지구적 차원으로 거래됩니다. 초국가적 기업들은 국경을 넘어서 세력을 키우고 확장하고 있습니다. 시장이 국가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빠져버린 국가의 역할은 여전히 비어 있습니다. ‘공위기’상태입니다.

      이제 시장은 국가가 관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국가는 그것을 관리할 수단도, 자원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국가에게 남은 것은 정치뿐인데 결정을 해도 실행 할 능력이 없습니다. 국가는 자신의 위기를 치료할 능력이 없습니다. 남은 정치의 능력을 끌어올려 ‘주체의 부재’를 채우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2)국가 없는 국가주의

      국가의 역할에 지구적 세력들이 개입되면서 각 국가들은 상호의존성이 높아졌습니다. 한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전염되는 것이지요. 그것들은 한 국가 차원에서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의 2차적 문제해결 기구 거버넌스들이 많이 생겼지요. WTO, EU 같은 것들이요. 이제 국가의 의미는 달라졌습니다.

       

      보르도니

      전지구적 차원의 문제해결 기구들이 생기면서 지구적 기구들이 국내에 개입하기도 하고 지구적 차원으로 발생 된 것들을 지역적(국내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 생겨납니다. 문제의 발생 원인과 해결이 분리되어 진행되는 것이지요. 한편 지구적 세력들은 문제를 통제하고 원하는 대로 풀어나갈 권력을 가졌지만 지역 정치는 권력을 빼앗겼기 때문에 지구적 세력들의 권력에 종속되었습니다. 지역의(국내의) 법을 따를 필요 없는 지구적 세력들이 원하는 바를 결정하면 국가는 해결해내야 합니다. 이것을 바우만은 ‘현대도시가 거대한 쓰레기통’이 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국가와 시민들의 관계가 변화하고 허술해지자 그 부분을 거버넌스가 채우게 됩니다. EU가 그 대표사례입니다. 그러나 거버넌스에는 민족 국가에 있는 ‘집단적 동일화 요소’가 없습니다. 때문에 시민들은 공동체에 대한 욕구를 정부가 아닌 다른 데서 해소하려고 방법을 찾게 됩니다. 정치의 혼란과 문제 해법들의 혼란이 반정치 감정을 키우게 되고, 이것이 공동체 참여 욕구와 결합하게 되면 전체주의나 민족주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국가는 역할을 시장에 넘겼습니다. 국가의 정치와 권력의 분리는 국가가 책임을 다 하지 않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위기의 국가는 공공복지를 제공하고 보장하는 기구가 아니라 시민에 빌붙어서 오로지 스스로의 생존에만 신경 쓰는 기생충이 됩니다. 시민들은 개인으로 생존하기 위해 점점 시장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우만

      현재의 정부에서는 서로 의사결정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중의 구속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뽑는 유권자로부터의 압력과 지구적 세력들의 압력이 그것들입니다. 그래서 정부들은 자꾸, 중요한 사항일수록, 결정을 질질 끕니다.

      ‘민주주의의 본질적 특징은 인민이 주기적 선택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점’인데 이것은 영토 내 주권 보장을 우선으로 한 베스트팔렌 모델에서는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지구적 세력들의 영향을 받는 지금 시민의 선택의 영향력은 축소되었습니다. 국가가 지구적 세력들에게 역할을 떠넘길수록 시민이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은 작아집니다. 시민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 또한 작아졌습니다.

       

      “정부는 위기의 피해자 중 하나이다. 그리고 각 정부가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취하는 조치가 모든 것을 더 불안정하게 만든다.”

      -존 그레이

       

      현재의 위기는 주체의 위기이며 영토적 주권의 위기입니다. 국가가 정치와 권력을 다 갖고 있었던 시절의 방식으로는 현재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지구적인 문제를 지역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지금, 권력을 상실한 국가는 혼자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시민들은 국가에게 해결을 기대하지 않게 됐으며 새로운 집단행동의 수단들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광장에서, 공원에서 말입니다.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하랄트 벤처는 이 현상의 근본적 원인들을 대중들의 인식의 발전에서 찾고 있습니다.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오늘날 분노가 우리들 안에 존재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을 털어내려면 광장으로 공론장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 바우만의 의견입니다.

      그리고 EU는 또 다른 하나의 실험입니다. 지구적 차원에 지역을 만들어 분열된 원인과 해결을 합치시키려는 실험이지요.

      바우만은 쿳시의 질문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전달합니다.

       

      “삶이 왜 경주에 비유되어야만 하는가, 혹은 국민경제들이 건강을 위해 사이좋게 조깅하지 않고 어째서 서로 앞 다투며 달려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분명 신은 시장을 만들지 않았다. 왜 세계는 부지런히 협력하는 벌집이나 개미집이 아니라 검투사끼리 죽고 죽이는 원형경기장이어야만 하는가?”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3)국가와 민족

       

      보르도니

      지구적 차원으로 세계가 움직이면서 국가의 경계와 민족의 구분의 의미가 모호해졌습니다. 절대적 주권은 이제 지구적 세력보다 약한 것이 되었습니다. 베스트팔렌 모델에서 국경은 물리적인 것과 동시에 정치, 법, 경제적인 것으로 힘과 관계들의 균형을 유지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균형은 깨졌습니다. 정치, 경제는 지구적 세력들의 영향을 받게 되고 그들은 법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정보의 확장은 민족 정체성, 문화 정체성을 파열시킵니다. 그것을 유지하려 할수록 지금의 세계에서 도태됩니다. 정부는 자기 마음대로 시민들을 통제할 수 없게 됐습니다. 잃어버린 권력을 찾기 위해 정부들은 경제적 동맹을 모색해왔습니다. 시장이요. 정부는 시장과 손을 잡고 국가로써의 권력과는 전략적인 이별을 합니다. 권력과 정치는 다른 차원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의 권력과 정치의 분열은 전략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국내 정치의 묵인이 없다면 초국적 권력들의 임무 수행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게 초국적인 경제 권력에 의존하는 정부가 되었습니다.

      정부의 대응 방식의 이면에는 신자유주의 철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실용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초국가적인 이동의 자유를 허용하되 원래 국가의 책임을 대부분 사적 부문으로 넘겼습니다.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통치하는 새로운 지배 형태. 이것이 바로 국가 없는 국가주의입니다.

       

      바우만

      주권의 의미는 ‘선택의 특권’입니다. 법을 일시 정지 시키고 법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제할 수 있는, 예외를 둘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지금의 국가전략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 같습니다. 울리히 벡은 독일의 메르켈 총리의 정치 전략을 일컬어 ‘메르키아벨리즘’이라고 했습니다. “메르키아벨리의 권력은 조심스러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욕구에 기초하고 있다. (...) 강제 수단으로서의 주저함. 이것이 바로 메르키아벨리의 방법이다. 그것은 회수하고 유예하고 신용을 거부하겠다는 협박이다.” 자신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협박을 통한 통제가 신 국가전략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략이 나올 수 있는 이유는 과거에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있던 상호 의존 관계에서 한 쪽이 일방적으로 깨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의존 관계는 언제든 바꿀 수 있습니다. 국내 인건비가 비싸면 인건비가 싼 국외로 가면 되는 거지요. 이 국가와의 거래가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국가와 협상하면 되고요. 때문에 ‘양호한 상태에 있게 할 필요성은 자본에게 더 이상 ’경제적 의미‘가 없습니다.’ 의존관계의 붕괴는 경쟁, 이기주의, 사회 분열, 불평등을 촉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확실성, 불안, 두려움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전략에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습니다. 관계자들이 완전히 자격을 잃게 되는 수준까지 이르러서도 안 되며 모두 협상 테이블에 있도록 붙잡아야 합니다. 어쨌든 함께 지내야 합니다. 일방적인 협박은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4)홉스와 리바이어던

      근대국가는 리바이어던이었습니다.

       

      보르도니

      리바이어던은 본래 성서적 전통에서 몸체가 수많은 인간들로 이루어진 괴물입니다. 홉스는 근대국가를 전체의 규칙성이 머리에 의해 보장되고 각 개인은 그 안에서 전체의 생명 유지를 위해 임무를 수행하는 리바이어던이라 일컬었습니다. 주권자는 전체의 행위를 결정하고 안정을 유지하려 노력합니다. 각 구성원들은 주권자에게 행위 결정권을 위임하며 주권자는 개인들을 대신해 혼란에 대한 해법을 고민하고 결정하고 실행합니다. 개인보다는 전체의 통일성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근대국가, 리바이어던입니다.

      그러나 근대국가는 사회적 차별을 먹고 삽니다. 전체의 통일을 위해 이질적인 것들은 배제되고 삭제되어야 하는 존재가 됩니다.

      현대의 대의민주주의는 그와 다릅니다. 주권자의 결정에 대해 고민 없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주권자를 뽑고, 주권을 위임합니다. 대표집단 또한 이질적인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어 국가의 동일성을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각기 다른 의견들이 합쳐진 것이 국가입니다. 주권자의 권위는 아래에서부터 주어지며 위임은 절대적이고 원칙은 권력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바우만

      근대 국가의 핵심 역할은 질서 유지였습니다. ‘베헤모스’라는 인간의 무질서한 본성을 리바이어던이 통제하는 것입니다. 통제와 질서 유지에 실패하면 국가는 실패한 국가가 되는데, 이것 외에는 어떤 경우에도 국가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질서’가 유일한 국가의 평가 기준이 됩니다. 국가는 질서 유지를 위해 감시와 통제의 방법으로 벌을 주고 권력을 행사하는 하드 파워를 사용합니다. 판옵티콘과 같은 수용소도 그 방법의 하나입니다.

      오늘날의 국가가 사용하는 힘은 다릅니다. 자발적 감시와 복종, 질서 유지를 유도하는 소프트 파워가 현대 국가의 방식입니다. 시민을 통제하려 한다는 점에서 근대 국가와 다름없습니다만 시민이 자신이 통제와 감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매우 다릅니다.

      신자유주의의 기술의 발달은 개인들의 정보 수집을 용이하게 해주었습니다. SNS와 같은 수단은 시민들의 고해성사를 공개해줍니다. 개인들이 부각되면서 과거에는 위협과 삭제의 대상이었던 개성, 다원성이 훌륭한 것으로 평가 받고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요소로 여겨집니다.

      국가의 역할도 바뀌었습니다. 노동과 자본을 연결시켜주는 것이 주 역할이었던 국가의 기능은 이제 시장과 소비자를 연결시켜주는 주선자가 되었습니다. 국가는 자본가의 투자를 유도하고, 소비자의 소비를 유도하면서 시장에 국가의 책임을 상품으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 [김만권의 독서클럽-위기의국가] 제1강 지구화의 조건과 국가

      2015.5.7 rohsawook 김만권의 독서클럽 – 혼자 읽기 어려운 책 함께 읽기 2 <위기의 국가>

      430, 김만권의 독서클럽-혼자 읽기 어려운 책 함께 읽기2<위기의 국가> 수업이 시작됐습니다. 본격적인 수업 시작에 앞서 강좌에 대한 의견들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1)강좌에 대한 기대와 신청동기는, 많은 분들께서 그 전에 들었던 김만권 선생님 수업에 대한 높은 만족도와 선생님에 대한 신뢰로 이 수업을 이어 수강하시는 분들이 가장 많았습니다. 또한 강좌에서 다룰 사회학자인 바우만에 대한 관심이 동기가 되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2) 국가에 대해 평소 가지고 있던 질문은 무엇인지 또한 나누어보았는데요, 국가의 의미 그리고 정체성은 무엇인가, 국가와 시민의 관계, 국가의 필요성, 국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 우리는 언제까지 국가 권력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가 등의 생각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나누어 본 국가에 대한 질문들이 4주간의 <위기의 국가> 수업이 진행되는 과정에 서서히 답을 찾아가길 바라봅니다.


      세계적인 석학 지그문트 바우만(오른쪽)과 이탈리아 사회학자 카를로 보르도니.

      세계적인 석학 지그문트 바우만(오른쪽)과 이탈리아 사회학자 카를로 보르도니. 


      바우만과 보르도니의 위기의 국가를 본격적으로 읽기 위해, 1강에서는 지구화에 입문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바우만은 액체근대(liquid modernity)’ 개념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 개념은 그 전에 얘기하던 근대성과는 조금 다른 개념의 근대성인데, 본래 ‘modernity’ 개념은 전통과의 단절, 합리화, 신과 봉건주의에서 탈피한 이성과 자본주의를 의미하며 그 개념이 매우 명확합니다. ‘liquid modernity’‘globality’와 관련 있는 개념인데, globality는 상호의존성이 높다는 것 이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것이죠. 누구에겐 기회가 되고 또 누구에겐 위기가 되는데, 선명하지 않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경계가 움직이고 있다액체근대개념과 연관이 있습니다. 바우만은 globality의 예시를 이렇게 들었습니다. 1) 보호망을 스스로 거부한 사람들 2) 사람들이 알아서 걸어나가게만드는 것(위기의 국가의 표지 그림이 나타내는 바입니다) 3)국가가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것.

      바우만은 이 책에서 보통 베스트팔렌모델이라 부르는 것을 포스트 베스트팔렌모델로 칭하였기 때문에, 책을 읽으실 때 포스트베스트팔렌 모델을 베스트팔렌 모델로 바꾸어 생각하시면 이해하기에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위기의 국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구화의 프로세스를 알아야 합니다. 지구화란, “기술 혁신에 기반하여 기존의 민족국가의 틀을 넘어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환경 등 인간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빠른 속도로, 그리고 대규모로 행해지고 심화되고 있는 상호의존성의 과정입니다. 지구화란 기술 혁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느끼는 경제영역에서의 지구화 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영역을 나누어 사고해야 탈출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지구성(globality)의 조건이 민족국가를 벗어나는 것이라는 것만 이해할 뿐 그 실체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지구화는 정치, 경제, 문화 등의 각 영역에서 각 영역마다의 특징을 가지면서도 서로 얽혀서 진행되고 있는 다면적 현상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새로운 글로벌 거버넌스 체제가 등장하고(WTO, IMF, WB ) 초국가적 기업이 등장하여 전세계 200대 초국가기업의 생산량이 세계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바우만이 액체근대 개념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경계(고체)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세 가지 형태가 드러납니다-국가 위로 권력이 분산되는 것(대표적으로 EU), 국가가 권력을 쥐고 있는 것, 국가 밑으로 권력이 분산되는 것(대도시 연합). 문화적으로는 하이브리디제이션(모든 문화들이 하나로 섞여드는 현상), 글로컬리제이션, 다문화주의, 문화적 국제주의, 문명의 충돌 등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정치, 경제, 문화적 양상이 모두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 현상을 너무나도 적절하게 표현한 “liquid mdernity”에 더 열광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구화가 진행되면서 정치가 시장에 종속되고, 그래서 권력이 시장으로 이동하여, 권력 없는 정치의 모습이 나타나며, 국가(보호) 없는 국가주의의 형태가 되는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는 다시 정치의 통제 아래 위치할 수 있을까요? 다시 정치가 권력을 찾아올 수 있을까요? 바우만도 과연 그것이 진짜 가능할지, 의문을 가집니다. ‘공위기라는 것이죠.

       

      베스트팔렌 모델은 지구화라는 현상이 현저해지기 이전의 세계질서를 묘사하는 모델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국민국가 중심의 세계질서, 국가주권의 절대성을 보장한 체제입니다. 우리에겐 포스트 베스트팔리아, 네오 베스트팔리아의 두 가지 옵션이 있습니다.

      과연, 국가는 정말 시장에 손을 든 걸까요, 아니면 혹시 편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걸까요? 국가가 정말 약화된 걸까요, 혹시 더 강한 국가가 뒤에서 조정하는 건 아닐까요?

       

      바우만과 보르도니가 그려내는 세계는 디스토픽 포스트 베스트팔리아’, 즉 근대의 견고한 벽이 액체화되어가는 가운데 국가가 권력을 잃었으나, 새로이 원했던 권력은 형성되지 않아 그 권력의 상실이 오히려 개인의 위기를 낳은 상황, 바로 공위기(interregnum)입니다. 바우만은, 이제 더 이상 국가는 우릴 보호해 줄 생각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개인이 알아서 할 일 이라고 말이죠, 그리고 또한 개인도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이번 시간은 <위기의 국가>를 읽기 위한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 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 본격적으로 1장에 들어가기에 앞서, 홉스에 대해 이야기해주셨습니다.

      홉스는 국가의 의무는 구성원의 보호라고 얘기했습니다. 그 유명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뜻은 각자가 각자의 해석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해석의 다름이 혼란을 만들기 때문에, 그에 대한 질서를 만드는 것이 국가입니다. 개인들은 나의 해석을 버림으로써 보호를 보장받고, 국가는 보호를 해줌으로써 해석의 권위를 가집니다, 즉 판단과 폭력을 독점하는 것입니다.

       

      첫 시간, <위기의 국가>를 위한 큰 그림을 듣고 나니 앞으로의 수업들이 더욱 기대되네요. 선생님 말씀처럼, 이해되는 부분을 중심으로 읽어가며 각자의 해석을 만들면서 우리가 가장 처음에 나누어 보았던 국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어느정도의 답들을 찾아가는 과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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