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넘어 혁명의 불을 지펴라- 국내외 ‘세계혁명’의 전사들

  • 강사

  • 기간

    • 2014. 7. 21 ~ 2014. 7. 22
  • 시간

    • 화요일 19:00~21:30 총2회
  • 수강료

    30,000

    • 파격 할인혜택
    • 참여연대 회원2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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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 정보

    강의소개 |
     
    혁명은 늘 지역, 민족, 세계를 아우릅니다. 
    대부분의 혁명들은 특정의 나라, 민족, 문화권역의 틀 안에서 일어나지만,
    지배질서 전복이라는 혁명의 속성상 바로 타지로, 세계로 전파됩니다. 
    지배질서는 늘 일국의 경계를 넘어 세계적 연결 망 속에서만 존재하며
    따라서 일국 안에서의 혁명 준비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늘 과거나 현재 타지의 사례를 참고 합니다. 
     
    19세기 후반, 20세기 전반, 혁명이 가장 현실적으로 가능한 사회는
    제국주의 사슬의 제일 약한 고리인 러시아였습니다. 
    봉건제 모순과 자본제 모순이 중첩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민주의자든 사민주의자든 러시아 혁명가들이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만큼
    원칙상 일국 혁명이 아닌 국제혁명을 지향했습니다.
     
    국제 혁명 전사는 1919년 3.1 운동 이후에 조선에 정착되었습니다. 
    식민지하에서 활동하기 어려웠던 수많은 조선의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이
    중국이나 러시아로 망명하여
    조선 독립운동 및 중국, 러시아 그리고 세계 혁명을 위해 분투했습니다.
    그것은 한국 근대의 또하나의 전통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강좌에서는 자신의 국경을 넘어 외국의 혁명에 참여한
    이들 국제적 혁명전사들은 무엇을 꿈꾸며 어떤 운동을 펼쳤는지,
    그들의 삶과 역사는 현재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강의일정 |
     
    날짜
    순서
    주제
    07.21
    1
    세계 혁명의 돈키호테, 수질로프스키와 그의 오딧세이
    -      국제 무정부주의 운동에 투신하여 월경적, 무국가적 운동의 선봉에 섰던 크로포트킨 (1842-1921)
    -      러시아혁명의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도미하여 하와이를 거쳐 필리핀, 일본, 중국에서 거주하면서 동아시아 혁명가들과 깊이 연대했던 수질로프스키 (1850-1930)
    07.22
    2
    국제적 혁명연대에 생명을 바친 조선인들 이야기
    -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 (장지락 1905-1938)
    -      <중국인민해방군군가>를 지은 조선의 혁명적 음악가 정율성 (1914-1976)
    -      중화인민공화국 원예학의 원로가 된 조선 아나키스트 유자명 (柳子明, 1894-1985)
    -      불교 승려 출신으로 "민족 사회주의자"가 된 국제혁명가 김성숙 (1898-1969)
    -      재일조선인 운동의 선봉에 나선 김천해 (1898-?)
     
    강사소개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 인문학부 교수, <붓다를 죽인 부처>, <당신들의 대한민국> 저자
     
    강의정보 |
     
    일   시 : 2014. 07.21(월)~ 07.22 (화) 총 2회 오후 7시~9시 30분
    장   소 : 세종마을푸르메센터 4층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 66), 경복궁역 2번출구로 나와 900m직진 
    수강비 : 3만원 (참여연대 회원 30% 할인, 2만1천원)
     
     
            

        

    후기 2

    • [국경을 넘어 혁명의 불을 지펴라 - 국내외 ‘세계혁명’의 전사들] 2강

      2014.7.23 안다다씨 국경을 넘어 혁명의 불을 지펴라- 국내외 ‘세계혁명’의 전사들

      박노자 교수의 [국경을 넘어 혁명의 불을 지펴라 - 국내외 ‘세계혁명’의 전사들] 2강 (7/22)

      2강 - 국제적 혁명연대에 생명을 바친 조선인들 이야기

      -2강에서는 1910년 이후 해외에서 국제 연대에 힘쓴 조선의 혁명가들에 대해 강연.

      [강의내용정리]

      1910년 한일합병 이후 민족 운동가들의 해외 망명 가속화. 1920년대 이미 엄청난 디아스포라. 당시 민족주의자들은 중국현지인들과 협력, 혁명을 세계적, 민족적 문제로 본 사회주의, 아나키스트들은 원칙상 중국혁명과 조선혁명 분리하지 않았음.

      -신규식(1880-1922)

      공화주의 혁명가. 신채호 선생의 친척. 구한말 육사학교, 한성한어학교에서 교육받음. 중국통으로 연변에선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한국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

      신해혁명 직전 중국 망명. 손문 등 중국 공화주의자들과 친분. 1912년 상해에서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 조직,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한국 독립운동 지지 획득하는데 큰 역할. 망명객 중국사회 편입도 도와줌.

      1911년 일본에선 초기 사회주의 거의 사라진 시기. 중국 신해혁명은 아시아 최초 공화주의 혁명. 신규식은 아시아주의 입장에서 신해혁명 바라봄.

      구한말 민족 운동가들(김규흥, 김진용 등) 신해혁명의 영향으로 공화주의에 열광.

      -박은식(1859-1925)

      폭력주의, 사회주의 지향. 중국 망명 이후 합작 잡지 <香江> 주간 맡아 원세개 독재 비판하다 정간 당하기도. 사민보(四民報)에 적극적 기고. 당시 중국 최고 지식인 康有爲와 교류.

      1910년대 망명자 그룹은 대개 ‘복벽’ 즉 조선왕실의 부흥을 꾀했지만 신해혁명 후 대한광복회는 공화정 지향. 신해혁명의 영향으로 한국독립운동가 사이에 ‘만국’ 이상이 보편화.

      복벽주의 극복, 국정 이상으로 공화주의 당연시. 1919년 3.1운동과 1917년 러시아 혁명, 그리고 중국, 일본의 공산당 창당(1921-1922)과 아나키즘 운동의 급속한 성장 등으로 한국 민족운동 급진화. 제1인터내셔널 코민테른 원칙 1국 1당. 러시아의 경우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 1921년 결별.

      -유자명

      193,40년대 초반 대만 농림성에서 활동. 1950년대 중국인 호남농대 교수직. 중국 측 국제우호 인사, 조선민족, 중화민족 연대의 상징으로 생각. 소설가 巴金과 친교.

      재중 한인 아나키스트들. - 유자명, 이을규, 이정규 등등

      한국 아나키스트들 대부분은 반공주의자들.

      공산주의 원칙상 一國一黨. 식민화 이전 국가 보유 식민지를 ‘국가’로 취급.(대만, 티베트 등은 제외) 1926년 조선공산당 코민테른 승인. 일국일당 원칙은 다민족 공산당을 의미, 당시 김일성이 활동한 항일연합군에는 중국인도 참여했음. 하지만 만주공산당 중국인 지주와 조선인 소작농으로 구성돼 민족 갈등 심해 계급투쟁이 자칫 민족투쟁으로 변모할 위험 있었음. 이런 분위기 속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중국 지주와 투쟁을 벌인 조선인 소비에트 결성으로 중국인 당 지도부 1932-35년 간 ‘민생단(친일조직) 스파이 색출’이란 명목으로 431명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숙청. 이 사건으로 김일성 공산주의 안에서의 ‘민족’ 고민, 후에 주체사상으로 발전되었을 것으로 봄.

      -정율성(1914-1976, 부인 丁雪松 駐덴마크 대사 등 역임)

      1933년 중국 망명. 1936년 한중 연합 전선을 통한 일제 타도를 목적으로 한 중국 공산당 계열 ‘조선민족해방동맹’ 가입. 상해음악원에서 러시아 망명자 그를로바 교수 지도 받음. 파리국립음악원 졸업한 선성해에게 영감 받음. 좌파 시인 공목의 협력(가사를 붙여줌)으로 중국 인민 작곡가. 중국 공산당이 가장 좋아한 작곡가 등극.1945-50년 북한에서 활동했지만 중국인과의 결혼 등이 문제되어 중국으로 돌아감.

      정율성의 <중국인민해방군가> <연안송> 동영상으로 시청.

      7시부터 8시 30분까지 강의.

      이후 간략한 질의응답 후 다과회. 참가자 분들이 준비해 오신 샌드위치와 두유, 과일 맛있게 먹으며 자유롭게 담소.

      [소소한 감상]

      우리의 역사인데도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우리 혁명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슬펐음. 이념 논리에서 벗어난 온전한 우리 역사와 역사 속 인물들에 대한 객관적 수용의 날이 빨리 왔으면 싶었음.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방치된 역사 속 인물들을 연구하는 박노자 교수의 모습이 고맙기도 하면서 씁쓸하기도한 야릇한 기분 들었음. 지나친 자국중심 역사관은 문제가 되겠지만 적어도 자기 역사를 제대로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었음.

      1, 2강에서 생소한 인물들이 대거 등장해 개인적으로 강의가 편하지는 않았는데 사회과학 지식은 물론이고 역사 지식까지 얄팍한 데다 혁명이나 정치와 무관하게 살아와 더 그렇지 않았나 싶음.

      반면 박노자 교수의 방대한 지식이나 열정은 놀라웠음. 

      다음 여름에도 강의가 있다니 기대하셔도 좋을 듯.

    • [국경을 넘어 혁명의 불을 지펴라 - 국내외 ‘세계혁명’의 전사들 ] 1강

      2014.7.23 안다다씨 국경을 넘어 혁명의 불을 지펴라- 국내외 ‘세계혁명’의 전사들

      박노자 교수의 [국경을 넘어 혁명의 불을 지펴라 - 국내외 세계혁명의 전사들] 1강(7/21) 

       

      1- 세계 혁명의 돈키호테, 수질로프스키와 그의 오딧세이

      -1강에서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이르는 러시아의 혁명적 지식인들의 활동에 대해 수질로프스키를 중심으로 강연.

       

      [강의내용정리]

      1. 혁명의 일반적 특징과 러시아의 상황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함께 종말을 맞은 혁명.

      혁명은 사회주의적 색채와 민족주의적 추동력에 의해 뒷받침되는데 남민전(76.12~79.11까지 활동했던 지하운동조직)의 예를 들며 민족주의적, 국제주의적 특징이 혁명의 일반적 특징이라고 설명. 혁명이란 것은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하더라도 국제적 맥락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고.

      입헌군주제 도입과 농노제 폐지를 주장하던 러시아는 19세기 중반 토지국유화, 토지균등배분, 농민공동체에 의한 사회주의를 혁명의 목표로 내세움.

      1880년대 이후 마르크스주의 수렴, 노동자 헤게모니 잡고 사회주의 혁명 당위성 설파하며 국제주의적 냄새가 강해짐. 1825년 군사혁명 패배 이후 자유주의 사상이 강해진 것은 프랑스혁명의 경험이 크게 작용.

       

      2. 당시 러시아 혁명가들

      -니콜라이 투르게네프

      12월 혁명 비밀결사 요원으로 반란 시도 후 귀국을 포기하고 외국에 머무른 니콜라이 투르게네프는 재정러시아를 국제적으로 고발하는 등 여러 서구 국가에서 활발하게 활동.

      러시아에 유럽 신사상이 도입되는데 힘썼으며 사회주의를 최초로 언급한 인물. 하지만 그는 사회주의자가 아닌 자유주의자였는데 1830년대에 사회주의를 인정했다 함.

      -알렉산드로 헤르첸

      1848년 혁명 지켜본 초기 사회주의자. 전제왕권 산업발전까지 거부한 인물.

      -미하일 바쿠닌

      1840년대 헤겔주의 학파. 서구에 나가 활동, 1848년 혁명 직접 참여.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한 헤르첸과 달리 바쿠닌은 독일 체코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자유주의적이면서 민족주의적 입장으로 독일의 통일, 체코의 보존, 자치를 지지했으며 반슬라브주의자로 슬라브민족의 혁명 지원에 힘씀,

      바쿠닌은 체코 혁명가들,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주장했던 폴란드 혁명가들과도 연대했는데 혁명가들의 국제성을 보여준 인물이었음.

      이런 바쿠닌의 활동은 레닌의 민족주의론에 일정 정도 기여.

      1860년대 이후에는 반슬라브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로 변모.

      바쿠닌은 중국에 대해서는 회의적, 일본에 대해선 관심을 가졌지만 슬라브, 로만계 혁명가들과만 교류한 철저히 서구적 시각을 가진 인물로 동아시아의 부상을 두려워해 동아시아를 타자화 했음.

      러시아 초기 혁명가들은 폭넓은 국제연대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에 대해선 부정적 인식이 강했다고 함.

      -매치니코프

      바쿠닌 추종자, 아나키스트. <일본제국>을 저술해 일본에 러시아에 대한 관심을 불러오게 함. 1870년대, 80년대 말 일본 자유민권운동에서 러시아 인민주의자들이 하나의 본보기였다고 함.

      러시아인민주의자들은 피억압민족의 자결권을 인정했는데(보스니아, 세르비아, 터키, 오스트리아 등과 연대) 1870년대 해외 러시아 망명가들의 특징이라 함.

       

      3. 동아시아와의 만남 : 니콜라이 수질로프스키(1850~1930)

      지금의 벨라로시 가난한 귀족 출신으로 학생운동 연루, 브나로드 운동을 펼치며 혁명 선전했지만 계속된 체포 위협으로 1875년 국외망명.

      첫 망명지 런던은 당시 전 세계 혁명가들이 집결했던 곳으로 런던에서 마르크스 만나 혁명의 전선으로 가겠다 결심 루마니아로 이동, 루마니아 사회주의 보급 창시자. 루마니아에서 니콜라스 러셀(‘러셀루마니아 어로 러시아인’)이란 필명으로 활동.

      불가리아 혁명가들과 친분, 불가리아 “4월 투쟁참여. 터키, 그리스 혁명 운동에도 참여.

      이상적 사회주의, 농촌공동체 건립을 꾀하던 당시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미국사회에 대해 긍정적이었는데 수질로프스키도 처음엔 미국에 우호적이었음.

      샌프란시스코 이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현지 희랍 정교회 주교와 갈등을 일으켜 그를 고발, 러시아 이미지 실추시켰단 등등의 이유로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 교회, 종교는 지배이데올로기일 뿐이란 것이 그의 생각,

      1892년 미국국적 받고 쉬겠다며 하와이로 이주. 하지만 인종주의에 비판적이었기에 하와이에서도 원주민 권리 옹호에 앞장서고 미국의료복지정책에 관한 책도 씀. 하와이 의회 상원의 초대 의장까지 지내지만 미 중앙 권력과 갈등으로 사임. 하와이에서 반미활동.

      1905년 러일 전쟁 시 메이지일본을 러시아보다 좋게 평가. 재일본 러시아군 포로를 상대로 혁명 선전을 통해 혁명전쟁 벌일 계획 세웠다 포기.

      당시 일본과 러시아 혁명가들 동상이몽 협력관계 유지했다 함.

      다른 러시아 망명자들과 함께 일본에서 러시아혁명 신문 <볼랴> 창간, 일본 사회주의 언론에 기고. 일본 아나키즘 창시자 쿠쓰미 켓손 등 일본 혁명가와의 연대는 손문과 같은 중국 혁명가들에게 영향을 미침.

      일본 초기 사회주의운동 처음에는 사민주의였다 러시아 영향으로 무정부주의로 빠져나감. 1910년 신해혁명 이전 직접 행동론, 농민혁명론, 농촌혁명론은 손문과 모택동에까지 영향.

      신해혁명 태동기 인민사회주의자와 교류가 있었다는 것 중요.

      이후 필리핀으로 이주, 필리핀 자치운동에 참가했다 중국 천진으로 다시 이주, 중국혁명운동 관여. 1차 세계대전 시 반독일친프랑스적 입장, 이후 반전운동을 펼치다 볼셰비키혁명 터지자 러시아 혁명지지.

      혁명의 실천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평생 실천하며 살았던 수질로프스키, 말년 귀국하려던 계획 실현되지 못하고 천진에서 사망.

       

      4. 국제연대의 한계

      1차 세계대전,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국제연대 무너지고 민족국가 단위 혁명 활동으로 바뀜.

      러시아의 경우 1920년 이후 보수화로 접어듦. 스탈린주의는 보수화 징후 하나일 뿐. 사회보수화로 국내개발이 세계혁명보다 중시되어 혁명운동은 철저히 민족 국가 위주로 변함.

       

      7시부터 825분까지 강의. 5분 휴식 후 질의응답 시간 가짐.

      [몇몇 질문 정리]

      질문1. 한국사회주의에 대한 수질로프스키의 생각은 어땠는지?

      초기 메이지일본에 대한 환상을 가졌던 수질로프스키는 조선은 완전히 발전이 힘든 사회라 보았으며 식민화가 불가피하다 생각함. 조선을 주체로 보지 않고 타자로 봄.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지는 못함.

      질문2. 자본제휴의 시대에 연대 가능성은?

      직업적 혁명가가 현 자본주의사회에선 존재하기 힘들다. 정당보다는 시민사회가 그 역할을 떠안아야 하며 연대 폭이 훨씬 넓을 것 같다. 강정마을, 오키나와 연대나 한국노조와 일본중핵파의 연대의 예.

      질문3 이 강좌가 기획된 의도는?

      혁명사를 기억해야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 동아시아 긴장 전 세계적 관심. 최근 망언 남발하고 있는 아베총리 일본정부에 대해 동아시아는 민중연대 밖에 없다. 국가 환상 떠나 밑으로부터 민중운동, 국가를 상대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수질로프스키에게는 국가개념이 없었다.

       

      [소소한 감상]

      거의 알려지지 않은 러시아 혁명가들에 대한 강의가 지금의 우리 현실에 무엇을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사실 처음엔 의문이 많았음하지만 혁명사를 기억해야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는 질의응답 시간 답변으로 강의를 다시 이해하게 됨.

      개인적으로 이국의 혁명가들도 낯설었지만 오랜만에 듣는 혁명이란 단어가 낯설고 아련하게 느껴져 기분이 묘했음. 

      국가라는 이름으로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복지가 우롱당하고 있는 요즘, 국가 개념의 탈피가 우리 사회엔 정말 필요하단 생각 많이 들었음.  

      어느 참가자 분 말씀처럼... 여러 국가를 넘다들며 곳곳에서 연대의 노력을 펼치고 있는 박노자 교수의 모습이 수질로프스키를 많이 닮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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