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정보
강의소개 |
날짜
|
순서
|
주제
|
04.03
|
1강
|
동아시아 각국의 개항 모습은 어떻게 달랐을까
동아시아 각국이 서양 세력의 침략 속에 세계를 향해 문호를 개방한 과정을 알아본다.
|
04.10
|
2강
|
전통과 서구가 만나 만들어간 국민 국가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근대 국민 국가를 향한 동아시아 각국의 실험과 정착 과정을 살펴본다.
|
04.17
|
3강
|
청일전쟁은 동아시아 전통 질서를 어떻게 해체했을까
개항 이래 한중일 간 갈등이 전쟁으로 폭발하면서
동아시아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알아본다.
|
04.24
|
4강
|
러일전쟁, 동아시아는 왜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을까
열강의 각축 속에 벌어진 러일전쟁은 동아시아 판도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
05.08
|
5강
|
서양 문명으로의 전환기를 맞아 동아시아 사회는 어떻게 변모했을까
중국 중심 문명이 서양 문명으로 전환되어가는 양상과
그것이 초래한 사회 변화를 살펴본다.
|
05.10
(토)
|
6강
|
답사①: 한국 근대사 공간 속의 동아시아
|
05.15
|
7강
|
제1차 세계대전은 동아시아 각국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고도 일본과 중국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05.22
|
8강
|
제2차 세계대전, 거듭되는 전쟁으로
동아시아인은 어떤 고통을 감내해야 했을까
일본의 침략으로 발발한 만주사변, 중일전쟁,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인해
누구도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동아시아인의 처지를 살펴본다.
|
05.29
|
9강
|
근대 동아시아인, 민족과 계급의 이름으로 싸우고 연대하다.
거듭되는 전쟁과 식민의 역사 속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독립과 평화를 위해 싸우고 연대하면서 동아시아에 어떤 희망을 던졌을까?
|
05.31
(토)
|
10강
|
답사② : 한국 근대사 공간 속의 동아시아
|
후기 9
[동아시아 근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9강, 근대 동아시아인, 민족과 계급의 이름으로 싸우고 연대하다
[동아시아 근현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9강(5/29) 근대 동아시아인, 민족과 계급의 이름으로 싸우고 연대하다
강의소개 보기 >> 클릭
[동아시아 근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9강, 근대 동아시아인, 민족과 계급의 이름으로 싸우고 연대하다
1. 러일전쟁 전후 국제연대
*아주화친회 (1907)
-도쿄에서 배우려고 온 중국, 인도, 베트남, 일본인이 결성했다. (한국인은 일본인과 함께 자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지 않았다고 함)
- 아시아인으로서 침략주의를 주장하는 자만 제외하고는 민족주의, 공화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를 논함에 상관없이 모두 입회할 수 있었다고 한다.
-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하는 아시아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상호 원조와 협력을 한다.’ 이는 베트남과 중국의 사회주의 확산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 민족해방을 위한 반제투쟁을 목표로 한 아시아 최초의 국제연대라고 한다.
2.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주의 주도의 국제연대
*코민테른 주도하의 극동민족대회 (1922)
- 조선, 중국, 일본, 몽골 들 정식대표 140여명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인 대표단은 140여명 중 52명(여운형, 박헌영 등)이 갔고 베트남의 호치민, 인도의 로이등이 참가했다고 한다.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주의 (1928) : 조선인 공산주의자의 중국 공산당 입당
3. 1930년대 항일을 위한 한중연대
*만주(국)
- 만주사변 직후 한국독립군과 중국의용군이 합쳤다고 한다.
- 조선혁명군과 중국의용군이 합쳐, 중한항일동맹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중심으로 동북항일연군 조직(1935)을 만들었다고 한다.
*중국 (관내)
- 일본의 중국침략과 이봉창, 윤봉길 의열 투쟁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 국민당 정부는 한국 독립운동이 중국 주권 수호와 직결된다고 판단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승인(중한민족항일대동맹,1932)하고, 중일전쟁 이후 조선의용대(1938)와 한국광복군(1940)을 지원했다고 한다.
- 한국광복군은 3개 지대,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대일전에 참여했다고 한다.
4. 반제와 반전 평화를 위한 연대
*러일전쟁기 반전운동의 등장
- 반전운동의 시작은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제2인터내셔널대회였다고 한다.
-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는 ‘사람 죽이는 전쟁은 죄악이고 전생 일삼는 일본은 신의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 일본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의 반전운동이 있었다.
Plus++한국은 1990년대 이라크전 때 반전운동이 시작되었다.
*중일전쟁기 중일연대
- 하세가와 데루는 반전대일 방송을 했다고 한다.
- 일본병사반전동맹 옌안지부에서는 일본군포로가 일본군에게 투항과 탈영을 호소하는 무선방송과 잡지 “병사의 친구” 간행, 일본인반전동맹 회북연합회를 조직하고 이후 일본인해방연맹 (일본의 민주적 건설 목적, 1944)로 발전하고 전쟁의 즉시 종결과 전쟁 주모자의 처벌 등을 주장했다고 한다.
5. 무정부주의자의 국제연대
*무정부주의는 모든 정치적 조직, 권력에 저항하며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지향하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무정부주의는 사회문제해결에 대안을 찾고,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국제연대를 지향하였다.
- 신채호의 무정부주의는 동양의 평화를 위해 한국이 독립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 바진의 무정부주의는 일본의 침략 전쟁에 반대하는 역명정쟁이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1927)에 중국과 일본, 한국, 타이, 베트남, 필리핀 등에서 200여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한일구국연맹은 만주사변 이후에 조직되었으며 일본인부, 조선인부, 타이완부, 미국인부, 자유연합의 조직원리 아래 민족의 자주성과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는 이상사회 건설을 주장했다고 한다.
- 양날의 칼, 아시아주의는 서구의 아시아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아시아 제민족은 단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타루이 토오키치의 대동합방론(1893)은 서구열강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과 일본은 ‘연대’해야 하나 일본이 민주화에 앞서 있으니, 조선을 원조해야 한다고 했다.
- 판보이쩌우는 백색인종에게 연합하여 황색인종을 억압하고 있다며, 베트남인들에게 프랑스인을 적으로 간주하기 말라고 조언하고 싶다고, 다음으로 다가오는 적(일본인)은 프랑스인들보다 백배 잔인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 김옥균의 삼화주의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일본의 동양평화 주장은 침략구실이고 실제로 러시아를 막기 위한 한중일은 협력해야)이 있었다고 한다.
- 쑨원의 대아시아주의(1925)에서는 일본은 서방 패도의 앞잡이가 되지 말고 동방 왕도의 간성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동아시아의 식민지들]
1. 프랑스 식민지, 베트남
*1885년 톈진조약에 의해 프랑스 식민지화 되었다고 한다.
근왕령과 봉기가 시작되었다.
*1904년 판보이쩌우가 유신회 조직과 동유운동을 했다.
*1912년 베트남 광복회를 조직하고 민주공화국 건설을 추구했는데 이는 신해혁명의 영향이라고 본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급진화를 했다. 1925년 베트남청년혁명동지회가 1927년 베트남국민당으로 바뀌었다.
*1930년 호치민(구엔 아이 꾸옥)의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당했다.
*1941년 베트남독립동맹을 결성하며 프랑스의 지배와 일본군의 베트남 진주와 수탈, 민족분ㅇ려정책에 저항했다.
*1945년 인도차이나공산당은 군정 실시하는 ‘파시스트’ 일본 타도를 위한 무장봉기를 했다.
2. 일본 식민지, 타이완
*시모노세키조약에 따라 일본의 식민지화, 타이완총독부 설치(1895)
- 방임주의로 시작하였고 1910년대 이후 타이완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운동으로 ‘동화주의’를 채택해, 3.1운동 이후 내지연장주의에 따라 문관총독을 파견하고 지방자치를 실시했으며, 만주사변 이후 황민화정책을 펼쳤다고 한다.
*조사사업
- 1898년에 토지조사사업을 6년간하고 임야조사를 같이 했다. 1901년에는 수리하업을 하고 1903년은 호구조사, 1909년은 대만민사령이라고 일본사람 없이 타이완 사람이 회사를 못 만들게 한 것이다.
*자국의 50%가 넘는 쌀을 수출하고 사탕수수 재배와 제당업을 했다.
*1931년 이후 군수공업화를 통해 남진(동남아시아)을 위한 보급기지 역할을 했다.
Plus++ 사람도 보급했다. 징병제를 위해 1940년대 일본어 교육을 시켰다.
*타이완 민중당(1927-1931)
-타이완인 전체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해방의 실현을 주장했다.
-민본정치의 확립, 합리적 경제조직의 건설과 불합리한 사회제도의 혁파를 강령했다.
-민족주의자였으며 사회개혁주의자인 장위수가 주도했다.
-노농계급운동으로 급진화하자 우파가 1930년 타이완지방자치연맹으로 분리했다.
[동아시아 근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8강 제 2차 세계대전, 거듭되는 전쟁으로 동아시아인은 어떤 고통을 감내해야 했을까
[동아시아 근현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8강(5/2)
제 2차 세계대전, 거듭되는 전쟁으로 동아시아인은 어떤 고통을 감내해야 했을까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 일본의 만주 침략과 국제사회
만주사변(1931, 9·18) : 1931년 9월 18일 류탸오후사건 조작으로 시작된 일본의 만주침략전쟁 -> 관동군(일본)에 의한 전쟁 주도 -> 3달 동안 일본국토의 3배 크기의 지역을 점령 -> 단독 대일 교섭이 불가능해지자 중국은 국제연맹에 일본 제소 -> 제 1차 상하이사변(1932.1) 5월 국제연맹의 요구에 따라 정전협정 체결
◆ 만주사변 : 만주와 몽고는 중국 본토와 분리시켜 일본의 특수권익에 해당한다는 주장 실현, 베르사유/워싱턴체제에 대한 도전,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제재하지 않음, 소련은 일본을 비난하면서도 중립
국제연맹의 대응과 만주국의 성립 : 만주사변 이전상태로의 원상회복과 현상유지 모두에 반대하고 19개 위원회를 설립 ->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 -> 1932.3. 만주국 수립 : 푸이가 황제로 등극, 만주국 정부의 총무청 장관과 각부 차관은 일본인(제정 실시)
◆ 만주국의 시정방침 : 결제수탈, 일만의 정서, 산업개발5개년계획 -> 을사조약 직후랑 같은 상황, 보호국의 시스템으로 운영됨.
일본의 화북분리공작과 시안사건
1935 중국공산당의 8.1 선언, 항일민족통일전선, 확북 분리에 반대하는 12.9 운동
1935 중국국민당 : 공산당과 비밀협상, 법폐개혁, 중독무역협정
1936 시안사건을 계기로 국공합작을 통한 항일투쟁 시작, 일본-독일-이탈리아 파시즘 진영형성
◆ 시안사건 : 1936년 12월 12일 공산군 토벌을 위하여 산시성시안에 주둔 중인 장쉐량휘하의 구북동군(만주군)이 난징에서 독전을 위하여 온 장제스를 감금하고 국공 내전의 정지와 거국일치에 의한 항일을 요구한 사건.
2. 중일전쟁과 동아시아
쑹후전투 후 독일에 평화 중재 요청, 일본의 강화 조건 : 내몽골 자치, 화북 비무장지대 설치, 상하이 비무장지대 확대, 중국의 배일 정책 중지, 공동 반공, 일본 상품에 대한 수입관세 인하 등 + 일본군의 난징 점령(12.13)과 난징대학살(30만의 피해자) = 일본의 조직적 행위
중일전쟁의 국제화
* 1938.11. 일본은 전쟁 목적이 동아시아 신질서 건설에 있다고 천명, “중국이 굴복하지 않는 것은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이 배후에서 지원하기 때문이니, 배후의 적을 타도해야 한다.”
이에 소련은 중국과 상호불가침조약을 맺고 차관을 제공/미국·영국도 중국에 차관 제공
* 영국 : 영국은 일본을 방해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이중플레이)
* 조선은 총동원체제/병참기자화 되었고, 일본은 황국신민화 정책을 쓰며 조선어 사용을 금지
3. 아시아태평양전쟁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중일전쟁에 대한 영향
1940년의 일본 : 친독화, 난징정부, 독/일/이탈리아 3국 동맹체결 ↔ 미국 : 일본에 수출 금지, 중국 차관 제공 및 군사 원조, 영국은 미얀마 루트 재개방 중국에 대한 차관
중일전쟁에서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1941. 일소주링조약, 미일교섭시작 -> 독소전쟁 발발 / 일본 소련과의 개전 준비 + 영미와 개전 결정 <- 이에 미국은 일본자선 동결과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 전면 금지 조치
◆ 1941.12. 일분군이 진주만 미국 해군 기지 기습, 영국령 말레이 반도 상륙, 영국과 미국에 대한 개전 선포 -> 20여 개국이 일본에 선전포고[1942. 국제연합 선언에 26개국 서명]
4.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종식과 동아시아
연합군의 반격과 전후 구상(1943-1945)
1943. 전세역전 : 모스크바 4강선언 -> 카이로선언 [조선 독립 명시화]
1944. 동부전선의 소련군 반격 -> 영미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일본 폭격
1945. 얄타회담[소련의 만주이권, 쿠릴열도 할양] -> 중소우호동맹조약[불평등조약]
독일 연합국에 투항하며, 일본에 항복촉구 -> 묵살 ->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8.15 항복 공표
1946. 국제연합 출범
5. 제2차 세계대전과 동아시아인의 삶과 고통
일본의 총력전체제와 민중의 피해
1940. 일당정치, 배급제, 대정익찬회(=나치) 로 인해 의회제도 소멸, 검열 <군부지배체제>
오키나와전투 20만 명, 원폭투하 21만 명 사망
- 중국 민중의 고통
난징대학살, 세균전과 인체실험, 화학전, 위안부
한국 민중의 고통
내선일체, 황국신민서사, 일본어사용, 창씨개명, 총동원제
살아남은 자의 트라우마
노예노동, 강제노동, 민간일 학살, 원폭 피해자, 사할린 억류 조선인, 위안부, 중국잔류 일본 고아 등, 동아시아/동남아시아/태평양의 민중 2천만명 이상 희생
[동아시아 근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7강, 제 1차 세계대전은 동아시아 각국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동아시아 근현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7강 (5/15) 제 1차 세계대전은 동아시아 각국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 제1차 세계대전과 ‘21개조 요구’
1)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
-3국협상(영국-프랑스-러시아) 대 3국동맹(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이었다고 한다.
-1914년 0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항복했다고 한다.
*일본의 참전
-개전 3일 만에 영국의 참전을 요청했다.
- 일본이 영일동맹을 근거로 참전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 영국의 참전 요청을 철회하고(일본이 중국과 남양군도를 넘본다고 의심을 했다) 미국 등을 견제했다고 한다.
- 일본은 미국,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 중국의 외교사절에게 영토를 확장할 야심이 없다며 양해를 구하고 중국 앞바다와 싱가포르 방면까지만 전투구역을 제한하자는 영국의 요구를 수용했다고 한다.
- 일본의 독일에 대한 최후통첩은 중국과 일본의 해역 함정을 즉각 철수하고 자오저우만 조차지 중국을 반환하되 우선 일본에 인도를 하기만 하기로 했다고 한다.
- 일본은 1914년 08월 23일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고 한다.
*일본 국내 반응
- 참전 주도 세력은 입헌동지회를 여당으로 하는 제2차 오쿠마 시게노부내각
- 참전 비판 세력은 야당인 입헌정우회의의 하라 다카시 등, 여당의 오자키 유키오 등, <도요케자이신보>(동양경제신문)는 일본의 참전과 칭다오 영유에 대해 반대하고 사회주의자는 대역사건(1910년 일본 천왕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죄목으로 고토쿠 슈스이 등 26명의 사회주의자들이 사형당하거나 감옥에 갇힌 사건)이후 침묵
- 일본 국민은 삼국의 간섭으로 독일에 반감이 있어 참전을 지지하고 군수 경기 활성화를 기대하였고 실제로 일본경기는 부흥했다고 한다. (1914년 11억 엔의 채무국이 1920년 27억 엔 이상의 채권국이 되었다고 한다)
*동아시아와 제 1차 세계대전
- 제 1차 세계대전 초기 위안스카이 정부(베이징 정부)는 중립을 선언했다고 한다.
- 일본이 1914년 09월 산둥성을 침략하고 칭다오를 점령하여 독일 이권을 접수하고 독일령인 적도 이북의 섬들을 점령했다.
- 미국은 필리핀 통치에 위협을 느끼고 경계하였으며 영국의 자치령인 호주와 뉴질랜드의 위기감을 느꼈다.
- 일본의 전쟁터는 동아시아였다고 한다. 3국협상 측의 유럽 병력 파견 요청을 거부했다고 한다.
일본의 참전 목적은 동아시아의 독일 이권을 차지하고 만주와 내몽골의 권익을 확대하고 제국주의 열강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2) 중국 침략의 교두보, ‘21개조 요구’
- 일본은 1915년 01월 산둥에서 일본군을 철수시키라는 베이징 정부의 요구를 거부했다고 한다.
-중국 주재 일본 공사 히오쿄키는 베이징 정부에 21개조로 된 요구서를 내놓는다. 이는 독일의 조자치를 중국에 반환하기 위해 막대한 군사비를 투자하여 참전했으니,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이다.
- 21개조 요구
(1) 제 1호 독일 조자치인 산둥 지역에서 일본의 권익 확보를 보장할 것 등 4개조
(2) 제 2호 남만주와 동부 내몽골에서 일본의 특수한 지위를 더욱 강화시킬 것 등 7개조
(3) 제 3호 중국 주요 기업에 대한 일본의 참여를 보장할 것 등 2개조
(4) 제 4호 중국 연안의 항만, 도서를 타국에 양도 대여하지 않을 것 1개조
(5) 제 5호 정치, 군사, 재정 부문에서 일본인 고문을 초빙하고 중국의 치안 우지에 일본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며, 일본이 무기를 공급하도록 하거나 혹은 중일 합작으로 무기공장을 건설할 것 등 7개조
이는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과정과 흡사하며 중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21개조 요구에 대한 반응
- 중국의 반일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일본상품 불매운동과 구국저축운동, 도쿄유학생 반대운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 중국인의 조선인 공격이 있었다고 한다. 만주침략의 앞잡이라는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1916년 만주이주 조선인이 감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21개조 요구가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 서구열강에 대해서는 미국, 영국, 러시아 등의 거부 반응이 있었다고 하고 특히 5호에 강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중국의 21개조 요구 수용
- 일본은 제1호를 뺀 채 최후통첩
- 1915년 05월 09일 베이징 정부는 굴복하고 이는 일본의 국치일이 되었다고 한다.
- 위안스카이는 1916년 01월에 군주제를 부활했지만 곧 포기하고 병사했다고 한다. 돤치루이가 베이징 정부 실권을 장악했다고 한다.
1916년의 중국 국어 교과서에 ‘국치’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며, 이때부터 일본을 죽도록 미워하게 됐다고 한다.
3) 중국을 둘러 싼 열강의 각축
*중국을 둘러 싼 서구열강의 갈들 구도
- 영국은 일본이 적국인 독일, 오스트리아와 경제관계를 지속하자 일부 일본 상품에 대해 수입을 제한했다고 한다.
- 미국은 21개조 요구에 대해 러시아, 영국, 프랑스까지 끌어들여 반대하고 중국에서 열강 사이에 통상의 기회균등을 투구하면서 중국의 영토와 행정주권을 보장하도록 요구하고 조차지와 세력 범위를 중국에 요구하지 않는 대신 발 빠르게 중화민국을 승인하고 차관에 제공하였으며, 미국계 은행을 설립하였다. 이때부터 중국은 미국을 우호적으로 인식했다.
- 러시아는 21개조 요구에 불만이 있었지만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표시하지 않았고, 일본으로부터 무기와 군수품을 수입하고 있었다. 일본이 만주에 있는 러시아의 권익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 대한 영국, 미국 독일의 세력 강화를 견제하기 위해서도 일본과의 관계 악화는 곤란하였고 일본도 중국시장에 진출한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의 협력이 필요해 1916년 제 4차 러일협약이 체결되었다고 한다.
*종전 직전의 합종연횡
- 일본은 영국에 자신이 점령한 옛 독일령 중 적도 이북은 일본이, 적도 이남은 영국이 위임통치 하자고 제안했다.
- 영국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을 지지하기로 약속한다.
- 프랑스와 러시아도 일본의 제안에 동의했으나 일본과의 외교단절을 요구하고 일본은 이를 받아들였다.
- 미국은 1917년 04월 참전을 하고 유럽전쟁몰두를 위해 일본과 타협하였고, 일본 역시 중국에서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타협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 랜싱-이시이 협정에서 미국은 중국에서의 일본 특수권익을, 일본은 중국의 독립과 문호를 개방, 기회균등을 하겠다고 했다.
*중국의 참전과 베이징 정부의 친일화
- 중국의 참전을 돤치루이 정권이 1917년 08월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고 미국의 참전에 힘을 보태 협상국의 지지를 얻어내고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선전초고를 하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 니시하라 차관은 일본이 1억 4,500만엔의 차관을 제공하고 베이징 정부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기 위한 조치라고 하며 사실상 정치자금을 주었다고 한다.
- 쑨원의 관둥정부는 중화민국(미군에 의해서 쓰였다고 한다) 임시 약법을 준수하는 호법운동을 전개하며 1917년 08월 수립되었다고 한다.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 구축
- 일본은 열강과 권익을 교차 인정하는 방법으로 중국에서의 특수 권익을 인정 받는데 성공했다.
- 성공 비결은 일본이 동아시아 이외의 지역에서 지금의 제국주의 질서를 위협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동아시아에서의 열강의 대립과 갈등은 일본을 주축으로 정정하고 모든 협상의 결과는 일본의 입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고 한다.
- 제1차 세계대전의 양상은 유럽의 무력전과 동아시아의 미국, 중국, 일본, 영국, 러시아 간의 외교전이라 한다.
4)승전국의 이해관계를 조정한 파리강화회의
*파리강화회의(1919-1920)
-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 목적 때문에 시작되었다.
- 러시아를 배제한 채(러시아 혁명 때문) 독일 등 패전국에게 거대한 보상금을 부과하기로 하였다.
- 승전국의 패전국 식민지 분배로 독일 영토를 축소하고 동유럽에 8개 공화국을 수립했다고 한다.
- 국제 연맹 창설 합의를 봤다.
- 베르사유체제는 열상의 국제 협조주의의 산물이라고 한다.
Plus++
- 회의는 1919년 06월에 끝났다고 한다.
- 2.8독립선언, 3.1운동, 5.4운동과 관계가 있다.
*파리강화회의의 동아시아적 쟁점 : 산둥성문제
- 일본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모든 회의에 참석하는 최고 이사회의 일원이었고 적도 이북의 옛 독일령에 대한 위임통치권과 돤치루이 정권과 체결한 산둥밀약 (일명 파일공동방적군사협정)을 근거로 독일이 산둥성에서 갖고 있던 권익 확보를 위한 외교전을 했다고 한다.
- 중국의 대표단은 21개조 요구를 강압해서 체결했으므로 일본의 요구는 무효이고, 산둥성에 대한 독일의 권익도 마땅히 중국이 회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다.
- 일본은 비밀협약과 협정을 통해 서구열상 지지를 확보한 상태이고, 미국 역시 국제연맹의 성립에 일본의 찬성이 필요하며 일본 의견을 지지했으나 자국은 윌슨과 국외의 사이가 좋지 않아, 국제 연맹에 가입하지 못했다고 한다.
2.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 : 워싱턴 체제
1) 1919, 동아시아를 휩쓴 반제국주의의 물결
*3.1운동
- 도쿄조선인 유학생이 2.8 독립선언을 했다.
- 1919년 03월 01일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등 종교계와 학생대표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 시위가 도시에서 농촌으로 확산되어갔다. 북한지역의 80%가 3.1운동을 하며 시작되었고, 이남(남한)에서는 3월 망에서 4월초쯤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3-5월 사이 1,500여 회의 시위에 200만 명 이상 참여를 했고, 해외 이주 조선인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대중적 자발성으로 전국화와 보상화가 되었다고 한다.
- 조선 총독부의 군대와 헌병경찰을 동원한 탄압이 있었다. (제암리 학살사건)
- 서구열강의 반응은 일본인의 잔인한 탄압을 보며 비판하였으나, 한국인이 열심히 싸운 것은 몰랐지만, 중국만 이를 보고 감동했다고 한다.
- 일본은 일부 종교인의 전동에 의한 ‘폭동’이고, 조선인을 ‘폭도’혹은 ‘범인’으로 매도했으며 일본인의 피해를 부풀려 보도했지만, 실제로 시위대에 의해 죽은 일본인 민간인이 없었다고 한다. 일본의 언론 중에서 한국의 진실을 알린 신문은 단 한 개도 없었다고 한다.
- 영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등의 민족운동과 민중의 사회운동 활성화였다고 한다.
-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어졌다고 한다. 군부 영향력 축소, 내각 책임강화, 헌병 경찰제도 에서 보통경찰제도로 개편, 한글신문 감행, 집회 결사의 자유부분인정, 내선 공학제를 실행했다고 한다.
*5.4운동
- 배경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산둥성의 일본 이권을 일본에 넘기도록 결정했다.
- 1919년 05월 04일 3,000여명의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과 거리에서 시위를 하고 21개조 교섭 책임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산둥밀약의 책임자인 차오루린집에 불을 지르고 불 지른 23명의 학생들을 체포했다고 한다.
- ‘강화조약 조인을 거부하라.’, ‘밖으로 국권을 쟁취하고, 안으로 국적을 몰아내자.’, ‘반드시 산둥의 이권을 회수하자.’, ‘21개조 요구를 폐지하자.’, ‘일본상품을 배척하자.’
- 2개월에 걸쳐 22개 성과가 보이고 2,000여개의 도시로 파급되었다. 학생석방과 매국노 파면을 요구하는 시위가 확산되었고, 베이징정부는 검거와 탄압이 계속 되었다. 동맹휴학의 전국화가 되었고, 1,000여명의 학생을 체포했다. 상하이에선 (06.05) 6-7만명의 노동자와 상인이 파업과 철시를 하였다.
- 베이징 정부는 학생들을 석방시키고 06월 10일 차오루린등 친일파로 지목된 관료 세 명을 파면했다.
- 6월 16일 상하이에서 전국학생연합회가 결성되어 강화조약조인 거부운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 06월 28일 파리강화회의 중국 대표단이 베르사유강화조약 조인을 거부했다.
- 5.4운동의 경험 속에 중국인은 중화민국의 국민으로서의 의식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1919년 동아시아 민족운동의 의의
- 인도의 간디 불복종운동과 터키의 민족해방투쟁 등에 영향을 받았다.
- 3.1운동과 5.4운동의 공통점은 대중운동(민중, 대규모, 장기간)이었고, 민중의 부상과 민중운동의 활성화라고 한다.
- 3.1운동이 5.4 운동에 준 영향
- 중국인과 조선인의 연대는 3.1운동 당시 중국인 노동자가 만세시위에 동참했고, 만주 조선인 시위에 중국인이 지지해 줬으며 중국에 망명한 조선의 민족운동가와 유학생이 5.4운동에 참가했을 것이라고 한다.
- 자유주의자 요시노 사쿠조는 <조선 폭동 선후책>, <조선 언론의 자유>, <베이징 학생단의 행동을 매도하지 말라>등의 글을 통해 식민지 조선에서 무단통치 방식을 완화하고, 군벌정부의 지배에서 벗어난 중국국민과 연대할 것을 주장하며 합리적으로 통치하라고 했다.
- 3.1운동과 5.4운동으로 일본의 국제적 이미지를 실추하였고, 동아시아 질서 구상에 차질이 생겼다고 한다.
2)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의 형성 : 워싱턴체제
*워싱턴 체제의 확립
- 첫 번째 개최이유는 파리강화회의의 동아시아 문제유보 때문이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비준거부, 미국 역시 조약안 비준 거부 때문이라고 한다.
- 두 번째 개최이유는 열강의 건함이 경쟁하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해군 주력을 태평양으로 집중시키기 위해 군함을 건조하고 일본은 미국 해군을 가상 적국으로 선정하고 ‘88함대’ 계획을 발표하였고, 영국은 미국 해군력을 따라잡기 위해 군함을 건조해 미국과 유럽에서 군비축소 여론이 등장했다고 한다.
- 워싱턴 회의가 1921년 11월부터 1922년 02월까지 진행되었다고 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중국, 벨기에, 네덜란드, 포르투갈, 일본 등이 참가했다고 한다.
- 4개국 조약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주력 함정의 보유 비율은 5(미국):5(영국):3(일본)으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 9개국 조약은 중국의 주권과 독립을 존중하고 영토를 보전하며 중국에서 열강끼리 상업상의 우월권과 독점권을 부인하고 기회균등에 노력하도록 합의를 본 것이다. 하지만 베이징정부의 대표단이 요구하는 치외법권이 철폐되고, 관세 자주권을 회복하였고 조차지 반환 등의 수용을 거부하고 중국에 대한 열상의 제국주의적 이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도 않고 일본의 대륙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합의문이 있었지만 만주와 내몽골에서의 일본의 권익을 부인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 첫 번째 결과는 워싱턴 체제 이후,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의 열강 간 세력 다툼은 일시적으로 안정기를 찾았다고 한다.
- 두 번째 결과는 미국은 태평양에서의 현상을 유지하려고 하고, 베이징 정부의 주권을 존중했으며, 해군 군비 축소 등 애초 설정한 회의 목적을 달성 했다고 한다.
- 세 번째 결과는 열강은 직접적인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공동으로 사이 좋게 중국을 지배했다고 한다. 중국은 열강 사이의 동아시아판 협조 외교체제 아래서 열강들의 하위에 놓인 종속적 존재였다고 한다.
*워싱턴 회의를 바라보는 3국인의 시선
-일본은 대미 협조 외교 노선이 부상하였고, 건함 경쟁으로 한 재정 부담으로 해군군축조약을 지지하였으며 다이쇼 데모크라시 분위기 속에서 협조 외교를 중시하는 정당의 힘이 군부보다 우위였다고 한다.
- 조선은 민족운동가 중 일보는 미국이 동아시아의 개조에 나섰으니, 일본이 이에 적극 호응하지 않으면 미일전쟁이 발생할 것이라 예측하며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운동을 전개했으나 대부분은 파리 강화화의나 국제연맹에 대한 실망감으로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고, 실제 워싱턴 회의에서도 조선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고 한다.
- 중국의 베이징 정보는 워싱턴회의에 참가하고 쑨원의 관둥정부는 배제했으며, 중국 공산당의 창당과 코민테른의 영향을 받아 제국주의 체제의 재편에 불과한 여론이 등장했다고 한다. 쑨원이 소련정부의 원조를 받아 제1차 국공 합작을 이루면서, ‘반 제국주의는 반 워싱턴 체제이다.’, ‘반 베이징 정부는 반군벌’이라는 구호를 내건 국민 혁명을 개시했다고 한다.
[동아시아 근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6강, 19세기 조선-청-일본의 역사가 얽힌 공간을 찾아서
[동아시아 근현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6강 (5/10) 19세기 조선-청-일본의 역사가 얽힌 공간을 찾아서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9세기 조선 – 청 – 일본의 역사가 얽힌 공간을 찾아서
[답사후기]
1. 우정국 터 : 동아시아 사 속의 갑신정변
1884년 우정국(안국동 조계사 옆에 위치)이 개업을 알리는 축하연 자리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닐 때 갑신정변에 대해 많이 들어보았지만, 갑신정변이 가지는 의미와 그 시대의 상황을 들으며 우정국 터에 서있으니 처음에는 그냥 평범해 보이던 그곳이 새로운 장소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 느껴졌다.
일본 공사의 지원을 받아 경복궁을 장악하고 정권을 탈취한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청의 출동으로 3일 만에 쫓겨나게 되었으며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사실, 일본이 갑신정변을 일으키는 것을 도와줬다는 사실만으로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지만, 한성조약을 살펴보면 일본의 외교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당시 고종이 얼마나 무능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1885.1 한성조약 : 1884년(고종 21)의 갑신정변(甲申政變) 뒤처리를 마무리 짓기 위하여 일본과 맺은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정부의 공식 사죄와 일본인 피해자 유족에 대한 보상금과 재산보증금 지불을 요구함.
2. 일본공사관 터 : 외교전에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는 법
갑신정변 발발 직후 정변의 주역들은 일본의 최종 지원을 확인하기 위해 공사관에 들렸으며, 3일천하 후 일본으로 망명할 때에도 일본공사관에 피신했다가 떠나게 된다.
일본공사관은 임오군란 때에 불에 탔으며, 천도교중앙총부 자리로 옮김 이후에 다시 불에 타 지금의 서울예대 자리일대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당시 천도교의 교세가 얼마나 컸는지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어서 새로운 경험이 되었다.
3. 김옥균집터 : 동아시아의 풍운아, 김옥균
지금의 정독도서관 자리에 김옥균의 집터가 있다고 하여 찾아갔으나,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진 모습이었다. 어떤 이유에서 옮겨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관련이 전혀 없어 보이는 곳으로 옮기는 가있는 모습을 보니 역사의 한 부분인 우리의 문화재를 이리저리 쉽게 옮기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고 참 씁쓸하기도 하였다.
또 김옥균이 조선을 동양의 프랑스로 만들길 원하였으며, 고종이 보낸 자객 홍종우가 리홍장을 만나다는 이유로 상하이로 유인하여 암살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갑신정변과 관련된 장소들을 둘러보고 나니, 교수님께서 천재라고 말할 정도로 똑똑하고 시대를 내다볼 줄 알았던 인물이 너무 빨리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아 아쉬웠다.
4. 경복궁 영추문 : 일본군의 기습 점령으로 청일전쟁이 시작되다.
경복궁의 서쪽 출입구인 영추문은 조선시대에 문부백관이 주로 출입하던 문으로 1894년 7월 23일 새벽 5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기 위해 부수고 들어간 최초의 장소이다.
일본은 전주화약 이후 조선정부의 출군요구를 거부 하였으며, 청에 조선 공동 내정개혁을 제안하였다. 이에 청은 텐진조약의 결과에 따라 일본의 철군을 요구한다.
결국 일본은 내정개혁을 빌미로 철군을 거부하고 조선정부에 청의 철군을 요구하였지만 조선은 자주개역을 주장한다.
일본공사관과 일본군은 하나가 되어 의도적인 도발과 함께 경복궁에 대한 전면적인 점령을 목표로 기습하게 되는데, 일본은 더 나아가 ‘즉시 아산에서 청군을 몰아내 달라는 요청을 하라’라고 흥성대원군에게 요청하지만 끝까지 거부하자 무력으로 요청서를 받아내고 만다. 이것으로 청군은 더 이상 조선의 수호자가 아니라 침입자가 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청일갈등의 각축장이 되었던 조선의 모습과 당시 우리나라의 자주권, 그리고 세계열강들 사이에서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었다.
[동아시아 근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6강, 19세기 조선-청-일본의 역사가 얽힌 공간을 찾아서
[동아시아 근현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6강 (5/10) 19세기 조선-청-일본의 역사가 얽힌 공간을 찾아서
강의소개 보기 >> 클릭
[동아시아 근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6강, 19세기 조선-청-일본의 역사가 얽힌 공간을 찾아서
*우정국 터: 동아시아 속의 갑신정변
1884년 한성부 중부 견팡방 전의감 자리에 우정총국청사, 11월 17일부터 우정사무시작을 하였고,
12월 4일 우정국의 개업을 알리기 위한 축하연을 베푸는 자리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나 12월 8일에 폐지했다고 한다.
- 1883년 베트남을 보호국화하려는 프랑스화 베트남에 대한 주장을 하는 청나라의 대립이 있었다. 1884년 청프전쟁이 일어났다.
1885년 청이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하는 톈진조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 청프전쟁으로 일본에서는 서구열강이 아시아를 침략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고조되며 자유민권운동을 하던 자유당마저
일본은 아시아로 진출해야 한다며 정부와 민간대립종식을 주장했다고 한다.
- 청이 조선주둔 가운데 절반이 철수하자 이를 기회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 일본공사의 지원을 받아 경복궁을 장악하고 정권을 탈취했다고 한다.
- 청나라군의 출동으로 3일만에 실패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 경복궁의 일본인이 청군에 쫓기고 일본 거류민 피살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 일본에서 청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요구하는 강경론이 득세했다고 한다. ‘후카자와 유키치의 개전론’
- 1885년 01월 한성조약에서 조선정부의 공식 사죄와 일본인 피해자 유족에 대한 보상금화 재산 보증금을 지불했다고 한다.
- 1885년 04월 톈진조약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리훙장이 청일 양국이 조선에서 공동으로 병력을 철수하고 향후 파병 시에는
사전에 서로 통고하기로 했다고 한다.
-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은 ‘일본이 아시아의 나쁜 친구와 관계를 끊고 서양의 문명국과 함께 행동 해야 한다.’라고 한다.
- 청은 묄렌도르프 대신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여 조선에 대한 내정과 외교에 대한 간섭을 강화했다.
- 일본에서는 개전론, 개전반대론이 공존했고, 청에 러시아의 조선진출을 함께 저지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일본 공사관 터: 외교전에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는 법
첫 일본 공사관은 서대문 밖 천연정(지금의 금화초등학교)에 자리했었다. 1880년 11월 하나부사가 서울에 들어와 공간을 요청해서 공관을 요청해서 제공했다고 한다. 서대문 밖으로 정해진 것은 서울 도성 안에 외국인의 상주공간을 허락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이 공사관은 1882년 임오군란 과정에서 소실되었다고 하고, 다시 교동에 있는 현 천도교중앙총부 자리로 이전했다고 한다.
- 김옥균을 비롯한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거사를 앞두고 일본공사 다케조에 등과 일본측의 재정과 군사적 지원분제에 대해 협의를
할 당시 교동 일본공사관은 신축한지 얼마 안되어 내부 설비조차 완전히 끝내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발발 직후 정변 주역들이 고종을 모시러 창덕궁에 들어가기에 앞서 일본측의 지원을 최종 확인하기 위해
일본 공사관에 들렀다고 한다.
- 정변 주역들은 삼일천하 후 다시 일본 공사관에 피신했다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고, 그 와중에 일본 공사관은
다시 불에 탔다.
- 이후 일본 공사관은 남산 북쪽 기슭, 지금의 서울예술대학 자리 일대로 옮겼다고 한다.
*김옥균 집터: 동아시아의 풍운아, 김옥균
지금의 화동 정독도서관 자리에 있다. 김옥균이 살 무렵 붉은 언덕 위에 있다고 하여, 홍현댁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 안동출신이고 7살 때 당숙 김병기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성장했고, 1872년에 장원급제를 했다.
- 1970년 전후부터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배웠다고 한다.
- 1881년 12월 (탐색), 1882년 9월 (수신사, 유학생 파견), 1883년 (국채모집) 3차례에 걸쳐 도일했다.
- ‘동양의 프랑스가 되자’라고 생각했고, 이는 청의 탄압을 뜻한다고 한다.
- 1884년 9월 모의, 일본공사 다케조에의 협조가 있었고, 조선군 1000명과 일본군 150명이 함께 했다고 한다.
- 다케조에는 김옥균이 국채모집을 하러 일본에 건너갔을 때 묄렌도르프와 민비수구파에 협력하여 김옥균이 휴대한 고종이
국채위임장을 위조한 것이라고 본국에 허위보고를 했다고 한다.
- 삼일천하 후 일본으로 망명했고, 일본정부의 박해를 받았다고 한다.
(1886년 8월 오가시와라섬으로 귀양하고 1888년 홋가이도로 추방당했다고 한다)
- 1894년 3월 고종이 보낸 자객 홍종우가 리훙장을 만난다는 이유로 상하이로 유인하고 암살했다고 한다.
- 삼화주의: ‘조선, 청, 일본이 동맹을 맺고 서양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여 아시아를 부흥시키자!’
- 리훙장이 ‘김옥균은 조선의 반역자이니 조선으로 인도해야 한다.’고 했다.
- 4월에 김옥균의 유해가 도착하고 전국을 순회했다고 한다.
- 일본의 반응은 영웅시, 리훙장의 개입을 주장하며 청일전쟁 명분으로 활용하고 고종 정국 전환용으로 악용했다고 비난했다 한다.
- 김옥균의 죽음은 일본의 상하이행 묵인과 청의 살인 반조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경복궁 영추문: 일본군의 기습 점령으로 청일전쟁이 시작되다
경복궁의 서쪽 출입고인 영추문은 조선시대의 문무백관이 주로 출입하던 문이라고 한다.
1894년 7월 23일 새벽 5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기 위해 부수고 들어간 최초의 장소라고 한다.
- 일본은 전주화약이수 조선 정부의 철군요구를 거부하고, 청의 조선 내정개혁을 공동으로 제안했다고 한다.
- 청나라는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의 철군은 교구하고 조선의 내정개혁은 자주성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한다.
- 일본은 내정개혁을 빌미로 철군을 거부하고 일본군을 용산으로 이동시킨 뒤, 조선전부에 청의 철병에 대한 압박을 가했다고 한다.
(조선정부가 막지 못하면 일본이 청군을 직접 축출하겠다고 했다)
- 조선은 청일 양군이 철수한 수 자주적으로 개혁하겠다고 주장했다.
- 07월 22일 일본의 최후통첩으로 청국과의 종속관계 파기를 요구했다.
- 07월 23일 일본군은 제5사단 혼성제9여단의 경복궁기습 점령과 서울을 장악했다고 한다. (기습적 도발)
- 일본 공사관과 일본군이 하나되어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작전 계획은 경복궁에 대한 전면적인 점령이었다고 한다.
- 영추문을 부수고 기습해 들어오는 일본군에 저항한 것은 약 500여명의 평양 감영 소속 호위군, 총격전은 오전 7시경 고종이
포로로 잡힐 때 까지 계속 되었다고 한다.
- 경복궁을 점령하고 내각을 교체한 일본은 ‘조선 정부가 즉시 아산에서 청군을 몰아내 달라는 요청을 하도록
’ 흥선대원군에게 요청했지만, 흥선대원군은 이를 끝까지 거부했다고 한다. 일본은 무력으로 조선정부의 요청서를 받아내고,
청은 수호자가 아닌 침입자로 되었다.
- 07월 25일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군이 청군함을 격침했다고 한다.
- 07월 27일 성환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공격했다고 한다. (5,000 VS 3,500)
- 청군은 평양에 12,000명을 집중시켰다고 한다.
- 08월 01일 일본은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며 내정에 간섭하는 청과 싸워 조선을 독립을 보장’한다며 선정포고를 했다고 한다.
- 경복궁의 수정전은 갑오개혁 당시 개혁기구인 군국기무처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동아시아 근대사] 5강, 서양문명으로의 전환기를 맞아 동아시아 사회는 어떻게 변모했을까
[동아시아 근현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5강 (5/08) 서양문명으로의 전환기를 맞아 동아시아 사회는 어떻게 변모했을까
강의소개 보기 >> 클릭
0. 수업 시작 전
질문 하나, 러일전쟁을 마무리하는 조약은 왜 미국 땅인 포츠머스에서 체결되었을까?
원래 전승국가에서 조약을 체결하기 마련이다. 그럼 일본이 정말 이겼을까?
미국이 러일전쟁을 중재하고 일본이 이를 받아들였다.
일본이 쓰시마해전에서 이겨 강렬한 기억이 남아 일본이 이겼다고 생각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기지 않았다. 즉, 전승국이 없는 전쟁이었다.
생각하나, 오키나와 평화공원에서 본 것은 대일본제국의 패망이었다.
1. 서구적 세계관의 확산
*사회진화론의 수용
동아시아는 자강논리, 침략 정당화 논리, 강자옹호논리가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은 우승열패의 사상이었고, 청나라는 량치차오에 의해 적자생존이라는 논리가 있었고,
조선은 유길준의 경쟁논리가 생겨났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다 비슷비슷해서 조금만 열심히 하면 될 것 같아 경쟁논리가 뿌리 깊이 박혀있다고 한다.
*서구적 생활방식의 수용
신세대는 서구식 복장을 입고 단발이었다고 한다.
또 서구적 시간관념, 예를 들자면 시계탑, 손목시계, 24시간=1일, 7일=1주일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그리고 우리들은 현재 우리들이 쓰고 있는 태양력을, 일본은 1873년에, 조선은 1896년,
중국은 1912년 순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또 개화의 상징은 머리카락을 단발로 자르는 것이었다고 한다.
2. 근대적 지식의 확산
*근대 교육의 등장
서구화의 수단으로서의 교육을 하였고 서양식 학교에서 서양의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일본은 학제를 제정하고 의무 교육제를 실시하였고, 도쿄대를 설립했다고 한다.
1872년 메이지 정부에서는 “사람은 배워야 한다.
동네에 배우지 않은 집이 없도록 하고, 집안에 배우지 않은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한다.
부모는 반드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 배우게 해야 한다.”고 했고
1890년 교육칙어에서는 “국가가 위급할 때는 용기를 내서,
몸을 바쳐 국가를 위해 일하고 천황가의 번영을 도와야 한다.”고 하여
충성하는 국민, 충군 애국을 위해 교육시켰다고 한다.
청나라는 청일전쟁 후 중앙에서 경사대학당이라는 현재 베이징대학이 있었고,
지방에는 중학당과 소학당을 설립하였으며, 일본의 학제를 수용하였다고 한다.
조선은 갑오개혁으로 소학교, 중학교, 외국어 학교를 설립하였으나 대학교는 설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했다고 한다.
베트남은 프랑스 총독부에 의한 서양식 교육제도에 정착했고
독립운동가의 통킹의숙 (민족운동가로 기르고 미국으로 유학)을 설립했다고 한다.
일본은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을 보냈고 청나라, 대한제국, 베트남은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고 한다.
*신문의 탄생
신문은 계몽을 뜻한다고 한다. 자국어 신문을 내 민권 관념을 보급하고 여론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청나라는 영국 상인이 상하이에서 신보를 창간하고 그 이후 시보, 대공보등 여론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최초 신문은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이었고, 대중신문으로는 요미우리 신문이라고 한다.
요미우리 신문은 연예, 예술, 오락 등을 쓴 재미있는 신문으로 만들었고
나중에 일본의 신문은 전쟁보도로 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한제국은 순 한글의 독립신문으로 여론을 주도했다고 한다.
순 한글 신문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자국어 신문으로 만들자고 했다.
‘누구나 읽을 수 있는’이라는 것이 민주주의와 연계되었다고 한다.
삼국의 문화 발전의 선각자들로는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와 청나라의 후스, 그리고 조선의 안창호가 있다고 한다.
나쓰메 소세키와 후스는 국민적 소설가라고 한다. 한창호는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독립운동을 했다고 한다.
3. 서구 문물의 도입
*철도의 건설
철도는 인구를 이동시키고 상품을 유통하며 인적 교류를 촉진시키고 여행등 행동공간을 확대시킨다.
동아시아에서 철도는 침략의 첨병이라고 한다.
대한제국에서는 철도 부설권을 제국주의 국가간의 경쟁대상이었고
철도망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군대 수송에 활용되었으며, 의병의 저항이었다고 한다.
청나라에게 철도는 열강의 침략수단이었고 풍수로 인해 거부감이 들었으며,
이권회수 운동을 했다고 한다. 또 청나라 사람들은 소리를 내는 요물로 생각했다고 한다.
일본에게 철도는 문명의 이기였으며 철도부설유치운동을 했다고 한다.
일본의 첫 탑승자는 천왕이었고 일본 사람들은 철도가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근대도시의 형성.
청나라는 개항도시의 조계지였고 서양상품 판매점있었다.
일본은 개항도시에 외국인 거류지를 건설하였고 도쿄의 부국강병형 도시화 계획했으며,
벽돌의 긴자거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 대한제국은 개항장에 일본인 거주지를 만들었고
경운궁 중심의 황성 만들기 사업을 했다고 한다. 베트남의 하노이는 작은 파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여성교육과 여성 권리의식의 신장
대한제국은 현모양처를 지향했고, 일본은 양처현모, 청나라는 현처양모를 지향했다고 한다.
남녀 공학의 초등 중등교육을 받는 것이 일본에는 있었다.
조선에서는 선교사들이 세운 여 학교가 있었다.
일본의 일본 부인교풍회에서는 남녀동등권리, 일부다처와 매춘을 금지,
가사노동 분배를 위해 금주와 금연을 권장하며 이러한 권리를 주장했다고 한다.
대한제국에서는 여성통문과 찬양회가 있었고
중국은 신해혁명 아래 여성의 권리 신장을 주장하는 분위기를 고무했다고 한다.
[동아시아 근대사] 4강, 러일전쟁, 동아시아는 왜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을까
[동아시아 근현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4강 (4/24) 러일전쟁, 동아시아는 왜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을까
강의소개 보기 >> 클릭
지난수업 Q&A 요약!
- 우리나라 여성운동가의 활동은 활발하지 않았나요?
-> 대표적으로 허정숙, 박진홍 등의 인물이 있지만 월북한 경우가 많다.
+ [네이버 지식백과]
* 허정숙 : 이론가의 냉철함과 활동가의 열정을 지닌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1908 ~ 1991)
* 박진홍 : 여성 사회주의 운동가. 서울에서 노동운동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1934년 적색노동조합운동을 하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도 참여했으며, 광복 후에는 전국부녀총동맹 문교부장 등을 지냈다.
청일전쟁 후 열강의 경쟁 구도 변화
◆ 서구 열강의 중국 분할과 일본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부상을 견제하며 서구 열강(영국, 미국 vs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청>분할 경쟁이 심해해졌고, 청에 차관(배상금)을 제공하는 동시에 특권과 이권 확보에 치열했다.
독일이 자오저우만을 통치하면서 산둥성의 세력권을 강하였다. -> 칭따오 맥주의 시작.
◆ 조선에서 러일의 대립과 협상
제1차 러일협상(베베르-고무라 각서, 1896), 제2차 러일협상(로바노프-야마카다 의정서, 1896). 제3차 러일협상(로젠-니시협정, 1898) -> 조선에서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
◆ 대한제국과 독립협회
독립협회파와 친러파(이북사람 위주)의 갈등으로 의회 설립, 법률제정, 국주권제한, 민권운동 등이 강화되었다.
1899 ~ 1904년. 대한국국제 선포 이후 1인 체제
◆ 의화단 운동과 8개국 연합군의 중국 침략 전쟁
의화단운동 : 1898년 산둥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부청멸양/반제구구운동이 베이징과 텐진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청 정부는 이를 묵인하였고, 영국/러시아/프랑스/미국/일본/이탈리아/독일/오스트리아 등은 공관 보호를 이유로 연합국을 조직하여 베이징을 공략하였다. -> 의화단 토벌
2. 러일전쟁의 원인과 결과
◆ 영일동맹
- 1902년. 청과 한국에서의 상호 특권 인정하고 러시아의 청/조선 진출에 공동대처하기로 함.
러시아 : 한국 중립화론을 제기하였지만 일본은 이에 반발하였고 러시아 군대 철수를 요구했다.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에 위치한 조선-한국에는 여러 차례 중립화론이 논의되었다.
1882. 일본(일, 청, 미, 영, 독) - 1883. 청(청, 일, 미) - 1884. 급진개화파 – 1885. 독일(러, 청, 일) - 1890. 일본(영, 독, 일, 청) - 1990. 고종 – 1901. 러시아(러, 일) - 1903 고종
◆ 청러 ‘동3성환부조약’과 러일전쟁 발발
- 1903. 8 러일교섭이 지지부진 되며 1903.12 일본의 전쟁 준비에 착수한다. (러시하는 피전 입장) -> 1904. 2 일본 함대가 인천에서 러시아와 교전하고 육군 상륙과 뤼순에서 러시아 함대를 공격한다.
- 이에 서구열강들은 중립을 선언하였지만, 영국은 일본에 무기와 정보를 제공하고 영미자본가들은 전쟁차관을 제공한다. 독일은 러시아와 일본에 동시에 군수품 공급과 전쟁차관을 제공한다.
-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게 되면서 한일의정서와 제1차한일 협약이 체결되고 만다.
- 동아시아의 화약고라 불릴만한 만주지역은 러시아군으로 인한 피해와 함께 일본점령군으로 인한 피해 또한 보게 된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위해 100만의 병력을 동원(청일전쟁의 4배 이상)하였고, 8만명이 사망(청일전쟁의 6배)하였으며, 세금은 3배 이상 증가하였다.
이에 기독교인과 코토쿠 슈스이, 오오스기 사카에 등 사회주의자를 중심으로 한 반전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3. 포츠머스조약과 동아시아
◆ 서구열강과 포츠머스 조약
1905. 대한해협에서 일본 해군이 러시아 제2태평양 함대를 전멸하고, 사할린을 점령하였다.
1905.8 만주와 한국에서의 침략 이권 재분할고 이전을 위한 포츠머스 강화 회의가 열렸다.
주요<포츠머스 조약>
제2조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일본 제국이 한국에서 정치상 군사상 및 경제상의 탁월한 이익을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일본 제국 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 보호 및 감리의 조처를 취하는 데 이를 저지하거나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정한다.
제5조 러시아 정부는 청국 정부 승낙하에 뤼순, 다롄 및 그 부근 영토와 바다의 조차권과 해당 조차권과 관련되거나 일부를 조성하는 모든 권리 특권 및 양여를 일본 제국 정부에 이전 양도한다. (중략)
4. 러일전쟁의 영향
- 일본은 만주에 대한 이권 침탈을 가속화 하며 남만주(산악지대)를 세력권화하였다. 또한 관동도독부와 남민주철도주식회사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만주침략의 근거가 된다.
일본의 한국병합에서 주목할 점.
: 일본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은 영/미/프/러/독 등 각국 외교 사절을 불러 병합 결정과 시정 방침ㅇ르 통보하고 차례로 양해를 받았다. 끊임없는 외교적노력으로 이뤄낸 것이다. 반면 한국은 독자적으로 맺은 조약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외교적 노력의 결과는 찾아보기 힘들다.
▣ 우리는 이번 수업시간을 통해 각 국가별로 표면적으로 배우던 시대적 배경과 상황 등을 서구열강이 다 개입하여 어떤 상호작용과 외교가 있었는지 그리고, 동아시아적인 틀로 살펴 볼 수 있었다.
[동아시아 근현대사] 3강, 청일전쟁은 동아시아 전통 질서를 어떻게 해체했을까
[동아시아 근현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3강(4/17), 청일전쟁은 동아시아 전통 질서를 어떻게 해체했을까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867년 우리는 일본에 의한 개항을 했고, 1882년 청나라의 알선으로 미국과 조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인도에 있던 영국 외교관이 말하길 ‘세상에서 조선처럼 스스로 독립국이자 속국이라고 주장하는 나라는 없다. 또한 양쪽의 성격과 관련된 증거도 분명히 제시할 수 있는 정치상 가장 불규칙한 상태의 나라도 아마도 그 사례를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청나라와 책봉조공체제를 이어왔고 독립국인 것이 맞다. 하지만 다른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운명은 청나라의 속국이자, 자주적인 나라이고 그것을 불편해 하지 않는 것이다.
1882년 일본에 의한 적대감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그들은 별기군 창설에 따른 구식군인의 불만이 폭발하여, 일본인 교관을 살해하고 궁궐과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다고 한다. 결국 제물포 조약을 맺게 되고 일본의 군대 파견, 사과와 배상을 하게 된다. 또 청나라는 3천명의 군대를 주둔하고, 외교고문 묄렌도르프를 파견 하였다고 한다.
1884년 청불전쟁이 발발하고, 청나라의 군인들이 철수를 하게 된다. 중국이 베트남을 2000년 동안 책봉조공체제에 속해 있었는데 프랑스에게 지면서 책봉조공체제도 철수하게 되어, 중국이 조선에게 더욱 집착하게 된다. 김옥균이 일본의 지원을 받아 궁궐을 점령하고 정권을 장악했지만 청나라가 와서 제제를 하여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그 이후 청나라는 내정간섭을 굉장히 심하게 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외교외교 보낼 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불편해 하지 않고 잘 받아들였다고 한다.
1885년 톈진조약에서 리훙장과 이토 히로부미가 대면을 했다고 한다. 청일 양군이 철수하기로 하였고, 그 뒤 파병을 하게 되면 사전에 통보를 해주기로 하였다. 이것은 조선을 배제한 청일간의 조약체결이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톈진조약은 청나라가 프랑스의 베트남 보호권을 승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과 외교간섭을 강화하여, 묄렌도르프 대신,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였다고 한다. 고종은 러시아를 끌어 들여 견제하려다가 실패하게 된다. 또 고종은 친미, 반청의식이 있었다고 미국의 자료에 쓰여 있다고 한다.
청나라와 일본은 10년 동안 군사력 증강을 위해 소리 없는 전쟁을 했다고 한다. 청나라는 해군군사력 증강에 많은 노력을 하고, 1885년 해군아문을 설립하고 1888년 북양함대를 편성 했다고 한다. 반면 일본은 국방비에 예산을 31%씩이나 투자하여 징병제를 강화하고, 해군 병력과 군함을 증강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1894년 즈음에는 청나라와 일본의 군사력과 무역이 대등해졌다고 한다.
1885년 오오사카 사건은 자유민권운동 좌파가 의용군을 결성하여 조선으로 건너가 조선을 독립시키고 내정개혁을 시도하려다가 발각된 사건이라고 한다.
19세기 조선은 농민항쟁의 시대라고 할 만큼 정말 많았다고 한다. 그들은 4대 행동강령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을 살펴보면 그들은 사람의 도리, 나라의 도리 그리고 외세의 영향까지 썼다고 한다.
1884년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을 갔는데 일본정부의 푸대접을 받고, 고종이 끈질긴 암살 시도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인 세련된 홍종우가 자객으로가 김옥균의 암살을 하려고 한다. 1894년 3월 리훙장을 만난다는 이유를 대며 상하이로 유인해 암살을 했다고 한다.
청나라와 일본 양국이 조선에 출병해 5.31 농민군 전주성을 점령하고 조선정부의 청의 원병 요청을 결정하여 6월 3일에 위안스카이에게 공식 철병요청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6월 5일 일본은 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를 이유로 혼성1개 여단 6,000명을 출병하기로 결정하고 대본영을 설치한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수상이 이익선을 보호하기 위한 군비확장이라 하며, 주권선과 이익선을 주장한다. 일본은 전쟁준비를 하게 되고 6월 7일 청나라와 일본은 서로 군대를 보낸다는 통고를 하게 된다. 일본은 조선 정부의 철군요구를 거부하고 청나라에게 내정개혁 공동을 제한하지만,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개혁은 자주성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하고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에 철군을 요구한다. 하지만 일본은 내정개혁을 빌미로 철군을 거부하고 일본군을 용산으로 이동시키고, 조선정부에 청나라의 철병하라고 압박을 하겠다고 하고,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일본이 청군을 직접 축출하겠다고 한다. 반면 조선은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대가 철수를 하면 자주적으로 개혁을 하겠다고 한다. 7월 20일 일본은 조선에게 청국과의 종속 관례 파기를 요구하고, 7월 23일 일본군 제 5사단 혼성제9여단의 경복궁 기습점령과 서울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것은 의도적 도발이라고 한다. 일본은 고종을 체포하여 내각을 교체하고 내정개혁을 하는데 조선정부가 계속 말을 듣지 않아 싸우기도 했다고 한다.
7월 25일 풍도 앞바다에서 청군함 9대가 일본에게 자랑을 하러 갔는데 일본군이 청군함을 격침하고, 7월 27일 성환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공격하였다고 한다.
일본은 8월 1일 조선을 속국처럼 여기며 내정에 간섭하는 청나라와 싸워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다며 선전포고를 한다. 9월에는 관군과 청군이 뭉쳐, 일본제1군과 싸우고, 황해해전에서 일본군이 승리해, 베이징을 향해 만주로 가 단기전을 하려고 하였으나, 중국은 나라가 크기 때문에 장기전이 되었다고 한다. 청나라의 리훙장은 피전론, 국가전, 지구전, 강화조약을 시도하였고, 일본군은 제 2군을 편성하여 랴오둥 반고를 공격하여, 다롄을 점령, 뤼순 점령을 하며 2만 명을 학살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미국, 영국, 러시아의 개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1895년 2월 일본의 웨이하이웨이(북양함대 기지)의 공격을 성공시키고 타이완이라도 차지하고자 펑후다오를 점령했다고 한다.
반면 조선에서는 전봉준이 재봉기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군은 러시아와의 접촉을 막기 위해 1개의 중대를 셋으로 나누어 동로군은 충주에서 강원도로, 중로군은 청주, 옥천, 보은, 금산으로, 서로군은 천안, 홍주, 공주로 가서 북상을 막았다고 한다. 우금치 전투는 스나이더 총과 화승총, 장과 칼의 전투이고, 일본군은 별로 죽지 않았다고 한다. 정부는 ‘종사가 보존되어 있고 임금도 탈이 없으니 오히려 소란을 야기하면 화를 입을 수 있다’고 하며 일본의 편을 들어 일본 군사작전에 편의를 제공하여, 일본군이 한국군을 남쪽으로 몰아 무조건 죽이는 동학군학살작전을 펼쳐, 3만명-5만명을 죽였다고 한다. 전투 중 사망한 사람은 1명, 질병과 부상으로 죽은 사람은 36이고, 이들은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고 한다.
시모노세키 조약은 4월 17일에 체결되었고, 이토 히로부미가 조금 더 유리했다고 한다. 청나라는 당시 일본 예산의 4배인 2억을 배상하기로 약속하고, 타이완 주권을 이양하였다고 한다. 또 랴오둥 반도 할양을 했다고 전해진다. 조약의 1조는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 자주국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위의 자주 독립을 훼손할 청국에 대한 조선국의 공헌, 전례 (책봉조공체제)등은 앞으로 완전히 폐지한다.’라고 한다.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간섭으로 일본은 랴오둥 반도를 6일만에 포기하게 되는데 랴오둥 반도를 포기하는 대신 은 3천만냥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인의 청일전쟁에 대한 기억은 야만에 대한 문명의 승리이고 정의의 전쟁이었다고 한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긴 이유는 이론의 대대적인 군비 증강과 청의 군사적 한계, 즉 청나라의 군사력은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에 라고 한다. 또 일본의 위기의식과 경계심 때문이라고도 하고, 일본에 유리한 국제 정세 덕분이라고 하기도 한다.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은 대국의식이 생겨나고, 일본예산의 네 배인 배상금으로 금본위제를 실시하고, 군비증강, 중공업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고 한다. 반면 청나라에서는 서구로부터 배상금을 갚기 위해 차관 도입과 이권을 침탈되었다고 하고, 지식인들의 충격이 크고, 입헌개혁파(캉유웨이)와 혁명파(쑨원)이 크게 부상하는 반면 제대로 외교관계를 맺지 못하는 리훙장 덕분에 양무파는 약해졌다고 한다. 또 청나라는 유미유동도 많았고, 베트남도 동유를 하였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나고, 1897년에는 청일전쟁의 영향으로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여 받아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광무개혁을 하였다고 한다.
[동아시아 근현대사] 2강, 전통과 서구가 만나 만들어간 국민 국가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동아시아 근현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2강(4/10), 전통과 서구가 만나 만들어간 국민 국가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강의소개 보기 >> 클릭
참여연대 자활을 하면서 강의를 들었다.
요번에는 3국의 전통과 서구의 문화가 만나 국가와 국민의 모습은 어떠했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제일 먼저 청나라가 어땠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선생님께서 청이 제일 먼저 시작을 하여서 청의 이야기를 제일 첫번째로 하신다고 하셨다.
청나라는 태평천국운동(1851-1864)아래로 혁명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 운동을 다른 말로 하면 내란이나 다를 것 없다고 하셨고, 이때 한족이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해 한족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한다.
홍수전이 기독교로 중국을 구원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종교는 사이비종교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한다.
태평천국이 주장한 것은 사유재산 부정, 토지균분, 형제애와 평증주의 가조 청조는 타도의 대상, 서구와는 우호(양형제)이다.
양형제는 '서양은 형제'라는 의미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이라고 말씀하셨다.
태평천국이 주장한 것은 이후 동학농민운동의 주장과 관련이 있다고 하셨다.
1864년 홍수전의 사망과 함께 없어졌고, 2천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조선과 일본의 외란보다 내란이 더 무서울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고 한다.
태평천국운동이 없어지기 시작하면서 양무운동이 시작되었다.
1861년에 총리각국사무아문이 설치되었다.
이곳은 외교담당기구이고, 양무사업을 추진하며 외교사절을 파견(1868)하기도 하였다.
양무파 관료들은 태평천국운동 진압에 성공한 한인관료층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군사기술을 도입하고 철도, 항만등 기반시설을 도입하기도 했다.
철도와 항만을 도입하는 것이 근대화의 포인트라고 한다.
또 중국인들은 서양인들이 철도를 놓는 것이 풍수지리에 맞지 않다며 불평을 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변법자강운동은 캉유웨이가 러시아와 일본의 계몽 전제 군주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한다.
랸치차오 등과 학회를 설립하고, 신문삽시 발행 등으로 여론 형성을 통해 운동이 확산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운동은 일본과 관계되어 있어 청나라 관료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고, 민중이 거부감이 들어 지지를 받기 어려웠다고 한다.
무술정변은 (103일 천하)실패하게 되었다.
또 무술정변에서 캉유웨이는 입헌군주제를 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이 있었다.
바쿠후 반대파가 왕정복고 쿠데타로 신정부를 수립하였고, 천왕 중심의 근대 국가 수립과 적극적인 개국을 추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징병제와 지조개정, 의무교육제를 실행했다고 한다.
지조개정은 토지조사사업을 하고 세금을 걷는 것이라고 한다.
또 1871년에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파견하여 많은 것을 배우게 했다고 한다.
헌법은 독일식으로 일상은 영국처럼 하였다고 한다.
결국 미국과는 친했지만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은 '혼=천왕', '법=독일', '일상=영국'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일본주의라고 한다.
일본 메이지 유신과정에서 대규모 내란이 발생하지 않은 이유는 공론문화를 형성하고 천황을 매개로한 일본이란 일체감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은 1876년 개항 후,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별기군을 창설했다고 한다.
통리기무아문은 외교기관이고, 별기군은 군사력을 높이기 위함이라고 한다.
갑신정변(1884)은 문구가 상당히 선진적이었다고 한다.
위로부터의 근대 개혁 운동, 근대 국가 수립이 주요 사상이었다고 한다.
또 동학농민운동(1894)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했다고 한다.
아래로부터의 근대 개혁운동, 신분제를 폐지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갑오개혁(1894)에서는 왕실과 정부의 분리를 원했고 내각제 수립, 조세 제도 합리과, 신분제 폐지를 말했다고 한다.
내각제 수립은 갑신정변에서부터 있었던 말이라고 한다.
1898년 독립협회의 의회개설운동을 했다고 한다.
이는 시민단체의 원조라고 볼 수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