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정보
강의소개 |
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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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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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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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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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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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왜 고대의 고전을 읽는가
왜 21세기 대한민국 서울에서 우리는
고대 아테네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읽는가?
도대체 이 고전들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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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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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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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소크라테스의 시민권
소크라테스는 왜 사형 당했을까 <소크라테스의 변명>
고대 아테네인들은 어떤 이유로 도시의 가장 뛰어난 현자를
사형에 처했을까? 왜 소크라테스는 성찰하는 삶을 그만두라는
도시의 명령을 거절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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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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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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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왜 죽음을 택했을까 <크리톤>
“악법도 법이라고?” 소크라테스가 큰 소리로 비웃고도 남을 이
말. 그렇다면 왜 소크라테스는 도시의 처벌을 받아들였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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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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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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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언덕 위의 플라톤 - 정의롭고 이상적인 국가
정의란 무엇인가 : <국가> 제1-2권
진리에서 탄생한 옳고 그름이 정의의 기반이라 믿었던
소크라테스에게 정면으로 도전한 트라시마쿠스와 글라우콘.
정의의 기반은 무엇이며, 법은 정의로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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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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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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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의 지배란 무엇인가 : <국가> 제4,6,7권
지혜로운 현자들이 지배해야 한다고 믿었던 플라톤.
그렇다면 현자들의 지배는 진정 가능한 것이며, 그 현자들의
지배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어떤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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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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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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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지배하는 정체의 운명은 어떤 것일까 : <국가> 제8권
21세기를 내다본 듯 돈이 지배하는 플루토크라시를 비판한 플라
톤. 아무런 철학적 근거도 없는 이 정체의 운명은 어디로 가는 것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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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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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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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동굴 속의 플라톤 - 정치가와 법률
진정한 정치가란 누구인가 : <정치가>
정치꾼과 정치가의 차이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참된 치자의 덕은 사안에 따른 적합한 치술일까, 아니면 일률적인
법의 적용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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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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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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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법률>
법은 현자들이나 전문가들만의 것일까? 시민을 설득하고 그들이
합의하는 좋은 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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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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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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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앎, 엘리트 그리고 시민(지식인)
무지가 모든 악의 시작이라고 믿었던 소크라테스. 그리고 그 지혜
를 물려받았던 플라톤. 그렇다면, 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 다른
길을 갔을까? 플라톤의 여정은 그렇게 소크라테스와는 다른 길에
서 끝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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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4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고대편] 6강, 플라톤의 형이상학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고대편] 6강(5/26), 플라톤의 형이상학
지난 강의에서 말씀하셨던 트라시마쿠스, 글라우콘, 칼리클레스 라는 정의를 바라보는 세 인물들의 시선에 대한 가 좋은 것이라서가 아니라 불의를 저지를 수 없는 허약함 때문, 즉 법은 사회적 약자들이 어쩔 수 없이 맺는 약정이다 라고 주장하는 글라우콘, 그리고 우월한 자가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정의롭다고 주장하는 칼리클레스에 대해 다시금 설명하시면서 이번 강의를 좀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셨다.
[국가]의 5~6권은 플라톤의 철인통치관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선생님께선 이 부분에 대한 설명에 앞서 먼저 동굴의 비유를 말씀해주셨다. 동굴과 언덕의 개념. 동굴에서 나온 철학자가 흐릿한 불빛만을 보다가 언덕으로 올라와 찬란한 태양빛을 보고 각성한다는 개념말이다. 이 비유에서 플라톤이 생각하는 철인정치의 두 가지 방식이 드러난다. 첫 번째로는 언덕의 개념에서 철학자가 다스리는 이상국가이고 두 번째로는 동굴의 개념에서 독재자들이 철학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방식이다. 선생님께선 여기서 언덕이 Episteme, Knowledge의 의미를, 동굴이 Doxa, Power의 의미를 내포한다고 하셨다. 이 논리를 알기에 권력들(Power, Doxa)이 지식을 생산하려 한다고 말씀하셨다.
플라톤은 올바른 삶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좋은 삶이란 존재하고 좋은 것이 올바르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해 선생님께선 플라톤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삶을 개인들이 누리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객관적인 올바른 삶을 알 수 있을까? 어떻게 개인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의 우연을 비교할 수 있을까? 선생님께선 이런 질문들이 인식론으로 이어진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정확한 지식을 알 수 있는 지적능력이 있다는 것이 ‘인식론’인데, 그것은 경험을 배제하고 얻는 지식에 관한 ‘형이상학’과 경험을 벗어나선 어떤 지식도 없다는 ‘형이하학’으로 구분될 수 있다. 선생님의 설명 덕분에 평소 난해했던 개념인 형이상학 등 흐릿한 것들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어 선생님께선 플라톤의 형이상학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플라톤 인식론의 입장은 한 마디로 의심할 수 없는 ‘실재’를 찾으려 하는 형이상학적 입장이다. 플라톤은 실재(Reality)와 외연(Appearance)으로 세상을 구분했는데. 실재는 참된 무엇이고 외연은 겉으로 보이는,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한다. 플라톤 철학은 의심할 수 없는 실재를 향한 탐구이다. 선생님께선 플라톤 철학에 대한 탐구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하셨다.
현실에선 실제로 있는 상태(실재)와 우리가 인식하는 겉모습(현상)이 다를 때가 많다. 예를 들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실재)과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외연)처럼 말이다. 이에 대해 선생님께선 실재가 가장 훌륭한 상태에 있다는 가치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하셨다. 플라톤은 실제로 가장 훌륭한 상태에 있는 실재만이 모든 질서들의 본보기(model)가 될 수 있다고 봤다. 이는 실재가 모든 생성되는 것들의 질서를 형성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이거나 기본적인 원리를 제공해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플라톤은 왜 실재가 가장 훌륭한 상태에 있다고 믿었을까? 선생님께선 그것이 실재가 ‘항상 존재하며 불멸하고 변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실제로 플라톤은 실재만이 참된 진리이며 참된 진리만이 우리가 본받을 수 있는 확실한 본(model)을 제공해준다고 그리고 실재를 본보기로 삼아야 가장 훌륭하게 아름다운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선생님께선 플라톤의 이원론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이원론이란 몸과 혼의 구분을 통해 설명이 되는데, 플라톤은 [파이돈]이란 책에서 이를 인간의 몸과 혼에 상응시켜 설명했다. 선생님께서 플라톤이 말했던 혼은 감각기관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혼만이 실재를 볼 수 있다고 하셨다. 더 나아가 혼만을 사용하여 알려고 할 때, 영원히 존재하고 불멸하며 바뀌지 않는 순수의 세계를 꿰뚫을 수 있다고도 말씀해주셨다.(여기서 ‘순수’란 경험을 배제함을 뜻한다) 혼을 사용해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선 혼의 나쁨을 제거해야 한다. 이는 혼의 순수화 과정, 즉 동굴의 비유로 치면 언덕을 오르는 과정이 필요하다. 플라톤은 아무나 ‘실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실재’를 인식하기 위해 혼을 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다듬어진 혼의 최상의 상태를 지성이라 한다. 선생님께선 ‘좋음’에도 실재가 있고 이런 좋음의 실재가 정치질서 속에 명백한 기준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올바른 상태(justice)라고 말씀하셨다.
이 몸과 혼의 개념을 정리하면 이렇다.
• 보이는 존재 → 몸 → 감각 → 생성 소멸되는 것, 변화하는 것 → 현상 → 올바르지 않은 상태 → 본이 될 수 없는 것 → 혼란 ‘의견’
• 보이지 않는 존재 → 혼 → 지성 → 항상 존재 불멸하는 것, 변하지 않는 것 → 실재 → 올바른 상태 → 본이 되는 것 → 질서 ‘(의견의 다양성을 장려하는) 원칙’
선생님께선 다음으로 지성, 추론, 믿음,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선분의 비유’를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가치판단의 필요성과 함께 철인통치에 관해 설명해주셨다. 지성을 실현하는 우월한 존재가 철학자인데 이는 순수한 혼의 결정체이다. 그리고 철학자는 질서의 부여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플라톤은 지성을 갖는 것이 통치자의 자격을 갖는 것이라고 했다. 이 철인통치에 대해 플라톤이 제시한 가능성은 앞서 말했듯이 지성을 가진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는 것과 통치자가 철학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 두 가지가 있다. 선생님께선 플라톤도 후자의 방식으로 통치자들을 보좌했던 적이 있다고도 말씀해주셨다. 마지막으로 철학자를 배출하는 집단양육, 엘리트주의에 대해 설명해주시고 강의를 마치셨다.
오늘 강의에서 선생님께서 최고의 선을 찾아내기 위해 올바른 상태와 올바르지 못한 상태를 가리는 기초적인 작업이 요구된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정의’에 관해 늘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방선거가 며칠 앞으로 다가온 지금 정치인들이 ‘정의’(올바름)에 관한 생각을 하길 바라며 누굴 뽑을지 결정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또한 정치인들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정의에 관해 생각해야하지 않나 싶었다. “신문을 읽고 라디오를 듣는 모든 일상의 남자와 여자들은 그들의 지배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믿고 그대로 행하도록 만들어질 수 있다.”라는 히틀러의 장담처럼 시민들의 박약한 정치의식은 언제 어디서든 현실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야 정치인들이 주고받는 한 쪽의 논리가 아닌 순수한 정의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일반 사람들이라면 삶의 기로에서 올바름에 관한 생각을 하지 않고 이익을 위해 결정할 것이고 이를 정당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선 소크라테스가 시민정치를 주장했다고 말씀하셨는데 강의를 듣고 정말 이런 것이 필요하다는 걸 깊게 느꼈다.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고대편] 5강, 칼리클레스-우월한 자가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정의롭다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고대편] 5강(5/19), 칼리클레스 - 우월한 자가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정의롭다
강의 5주차 수업이 진행된 5월 19일 아침에는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있었다. 김만권선생님은 오늘 담화에서 대통령이 세월호 선장의 사법처리에 관한 언급에 대해 삼권분립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평하셨다. 미국의 경우, 뉴욕대 법학대 학장이 시민불복종 운동으로 체포된 사람들을 기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행정부에 대한 권리 침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루소와 솔론의 견해를 소개하며, 법을 만드는 사람이 운용까지 해서는 안 된다고도 말씀하셨다. '법의 정신'에서 입법, 운용, 판단의 사이클을 통해 서로를 견제하는 삼권분립의 기초를 제공한 몽테스키외가 당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입법자들이었으나, 오늘날에는 행정부가 가장 두려운 대상이 되었다. 이어서 헌법재판소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는데, 독일의 경우 헌법재판소는 입법기구에 가까운 기능을 갖고 있으며, 한스 켈젠은 "본질적으로 이 기구는 입법 기구이다" 라고 규정한 바 있다. 헌법재판소는 이론적으로 공적 이성으로서 사법부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갖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비등한 위치를 갖고 있으며, '누가 헌법의 수호자인가'를 두고 서로 충돌하는 경향이 있었다. 과연 대통령이 헌법의 수호자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미국의 경우 대법원장이 헌법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기본적으로 미국 대법원장은 종신 임기를 갖는다. 그런 점에서 오늘 대통령의 발언은 공적 이성으로서의 위치를 두고 발생한 혼란의 답습이라고 할 수 있다고 선생님은 평했다. 담화에서 언급된 기구의 개편과정도 얼마나 의견을 잘 수렴하여 추진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며, 권력을 쥐는 사람이 얼마나 공적 정신을 갖고 있느냐, 즉 정치엘리트들의 정신이 어떠느냐에 달려 있다. 정리하자면, 권력분립의 문제가 우리사회에 제대로 정착이 안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입법부가 제대로 운영이 안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법부 또한 행정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특히 각 부처 수장들이 행정부 요직에 진출하고자 하는 모습을 공공연하게 보이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법률상으로도 무죄추정의 원칙이 존재함에도, 이미 세월호 선원들을 행정부 수장으로서 범죄자로 규정해 온 대통령의 발언들을 지켜본 나로서는 공감이 되었고 착찹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 시간에는 글라우콘과 트라시마코스의 정의관을 살펴보았다. 오늘 살펴 본 칼리클레스 또한 힘이 곧 정의라는 견해의 연장선에 있다. "정의는 이득이 있기에 지켜지는 것이다"라는 주장보다 더ㅡ그것이 올바르기 때문이 아니라ㅡ나아간 것으로, 강한 자, 똑똑한 자가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며,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이라는 견해이다. 칼리클레스의 정의관은 당시 그리스에서 가장 일반적인 정의관이었다.
칼리클레스는 플라톤의 '고르기아스' 라는 대화편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고르기아스의 집에 머물고 있던 칼리클레스는 고르기아스의 동의를 받아 소크라테스를 초대하였다. 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의 연설을 칭찬하면서 무엇이 정의로운지 판단하는, 철학에 기반을 둔 수사가 올바른 것이며, 이것이 없으면 그저 아첨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에 폴로스가 반발하자 칼리클레스는 옳음은, 즉 정의는 도덕성을 판단하는 철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언급된 유명한 관용구가 "Might makes right", 즉 "힘이 정의이다" 였다.
이에 관해서 선생님은 투키디데스의 '텔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수록된 멜로디언 다이얼로그에서 자세히 알 수 있는데, 아테네인들이 멜로스인들에게 항복을 권유하면서 한 말이 이를 정확히 표현한다고 하셨다. "정의는 평등한 자들 사이에서만 존재한다. 이는 자연의 질서 속에 있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실행하고 있을 뿐이다.". 멜로스인들은 힘이 아니라 불명예를 두려워 해 맞서 싸웠고 결국 패배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이미 언급되었다시피 '옳고 그름이 정의의 일부분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설명이 당시에는 매우 낮선 개념이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즘과 현재의 국제상황, 인도주의적 개입의 본질 또한 이러한 정의관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는 이후 홉스와 프리드리히 니체로 이어진다.
칼리클레스와 논쟁을 벌이던 소크라테스는 잘못된 일을 하느니 잘못된 일로 고통받겠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고대철학에서 도덕의 핵심은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어떤 면에서 보자면 노예가 자유를 얻기 위해 싸우는 것, 예를 들어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칼리클레스는 그런 부분을 반박했던 것이다.
이어서 칼리클레스의 견해를 살펴보면 법은 인간 다수를 형성하는 약한 자들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며, 더 나은 사람들이 못난 사람들보다, 강자들이 약자들보다 더 갖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의 법이라는 것이다. 칼리클레스의 주장은 아테네의 민주정을 염두에 두고 있다. 민주정이야말로 약자들이 강자들을 제약할 수 있는 유일한 체제이며, 민주정은 진정한 강자들에게 불편한 체제이다. 그의 입장을 충실히 반영한다면 인민들이 법이나 관례를 만드는 것은 인간 다수를 형성하는 약한 자들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한 것이다. 나아가 칼리클레스는 절제는 약자들의 덕이며, 강자들의 덕은 무절제라고 주장하였고, 강한 자의 사리 깊은 분별이란 자신의 우월감을 깨닫고 그 우월함을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트라시마코스와 칼리클레스의 강자를 비교하자면, 트라시마코스의 강자들은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로 통치하는 자들로, 법체계를 활용한다. 반명 칼리클레스의 강자는 우월한 임과 능력을 바탕으로 실질적으로 약자를 제압할 수 있는 자들로, 법체계를 무시한다. 선생님은 우리 사회가 직관적으로 트라시마코스식의 논리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볼 수 있으나, 그 바탕에는 칼리클레스의 논리가 있기에 작동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극단적인 사례로는 인간의 유전적 우월성에 기반을 둔 나치의 인종주의를 들 수 있으며, 이는 힘이 곧 정의라는 정의관이 극단으로 치닫은 결과였다. 또 다수결의 의의는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숫자로 표현해준다는 것인데, 칼리클레스의 논리대로라면 이 숫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고도 말씀하셨다. 그리고 승자가 모든것을 독식하는 오늘날의 시장논리 또한 이러한 사고에서 멀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힘을 추구하는, 트라시마코스, 글라우콘, 칼리클레스가 주장한 고대 그리스의 일반적 정의론에 맞서 소크라테스는 새로운 정 의관을 내세운다. 옳고 그름에 대한 지식에서 나오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 정의, 즉 도덕을 추구하는 정의론이다. 그는 무지야말로 모든 부정의의 근원이며 전문가란 올바른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제대로 지식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춘 척 행동할 때 발생한다. 지식을 갖추는 것은 자신이 무지함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는데,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현명한 단 한 가지 이유는 자신이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데 있다고도 말했다. 나아가 진정한 지식인이란 아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며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받아들임으로서 몸소 이를 보여준 바 있다. 진정한 강자를 만드는 것은 힘이 아니라 참된 지식이라고 그는 강조했으며, 진정한 지도자는 나라와 시민들의 물리적 욕구에 봉사하는 자들이 아니며, 훌륭한 시민들, 성숙한 시민들을 만드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는데, 페리클레스가 그 비판의 대상이다. 페리클레스에게 시민들이 사형선고를 내린 것은 성숙한 시민을 길러내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칼리클레스는 소크라테스가 그런 자세를 취한다면 필히 '강자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고 위협조로 말했지만, 소크라테스는 폭력이 진실을 바꾸지는 못하며, 살인하는 자들이 악한 자이고 죽임을 당하는 자는 훌륭한 자라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고 응수한다.
여기서 선생님이 오늘날은 조작 등으로 인하여 걱정스럽게도 소크라테스의 테제가 무너지고 있다고 잠시 말씀하셨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나아가 쾌락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훌륭한 것을 목적으로 삼는 변론을 들을 리는 없다고 쓸쓸히 말했지만, 칼리클레스가 평범한 이들과 함께하는 지도자가 될 것을 당부한다. 진정으로 평범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닮아가야만 그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연설도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담화에서 사람들이 대통령의 눈물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으며 플라톤은 그들을 닮아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칼리클레스를 마무리하시면서 선생님은, 이해와 설득은 지도자로서 정의와 절제를 생각하고 행동할때만 가능하며, 돈이 아니라 정의로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을 열고 들으려고 노력했지만 오늘의 눈물은 진심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누구의 잘못일까?
이어서 강의에서는 플라톤의 정의에 대한 소개가 이루어졌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와 아데이만토스는 훌륭한 나라란 각자의 성향에 맞게 수립된 나라라는 데 동의하였다. 그 세 성향으로 소크라테스는 지혜, 용기, 절제를 제시하였다. 지혜는 국가의 수호자즉 지도자들이, 용기는 국가를 무력으로 지키는 군인들이, 절제는 모두에게, 그러나 특히 노동자에게ㅡ지배를 받는 쪽에서 전제해야 지배-피비재 관계가 성립할 수 있기 때문에ㅡ있어야 하는 것들이다. 이를 포괄하는 것이 바로 올바름, 곧 정의이다. 즉 올바른 사람이란 세 덕목을 모두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지혜란 분별이 있음인데, 분별은 일종의 앎이고 무지에 기대지 않기에 지혜로운 것이다. 아데이만토스는 그것을 지도자 즉 수호자가 갖추어야 하는 것이라고 응답했고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 제일 적을 것이며, 나라가 지혜로울 수 있는 것은 지도자가 지혜롭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용기란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일단은 국가를 위해 전쟁터로 나갈 수 있는 군인들이 가져야 할 것으로 제시되었으나 곧 법과 그 영향의 '위반을 두려워하는 것', 소신에 대한 보전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되었다. 즉 시스템의 수호가 진짜 용기이며 무력을 가진 자들이 바르고 준법적인 소신을 보전하는 것이다. 절제에 대해서는 무절제한 욕구가 공정한 지배자들의 지혜에 의해 제압당해야 한다고 언급되었는데, 한결 나은 쪽과 급한 쪽 사이에 어느 쪽이 지배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라고 언급이 되었다. 정리하자면, 각자가 자기에게 맞는 일을 하는 것이 올바름이며, 이는 한편으로는 엘리트주의 혹은 계급주의라는 한계를 내포하기도 한다. 이는 다음 주에 배울 철인통치와 연결되는 부분이라고 미리 예고하시면서 선생님은 강의를 마무리하셨다.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고대편] 4강, 트라시마쿠스-권력을 지닌 강자들의 이익이 정의를 결정한다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고대편] 4강(5/12), 트라시마쿠스-권력을 지닌 강자들의 이익이 정의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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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시작에 앞서 선생님께선 세월호 참사 이후 연일 터져 나오는 망언들에 관해 언급하셨다. 칸트는 인간성(humanity)이란 내가 다른 사람의 위치에 서보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이성’의 핵심이다. 즉, 이성적인 인간이란 공감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최근 이러한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사람들을 보면서 공감능력이 결여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더 타자의 생각, 이야기, 원칙을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고 말씀해주셨다.
‘유가족이 벼슬이냐’ 비난했던 김호월 교수나 유가족에 대한 비난의 정도를 넘어서는 막말을 하는 일베 회원들같이 인간에 대한 존중이 없는 상태라면 다양성이란 아무 의미 없는 것 같다. 선생님께선 세월호 유가족 어머니가 편지를 읽을 때 왜 이 토론이 좌파냐 우파냐 생각해야 하게 만드는 시대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시대 현실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와 같다고 하셨다. 다시 말해, 새로운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해 싸우는 시대 말이다.
본격적인 강의는 플라톤에 대한 소개로 시작됐다. 선생님께선 런던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화이트 헤드는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플라톤이 서양철학에서 가지는 위상이 남다르다고 말씀해주셨다. 이어 [국가]의 구성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그 중에서도 오늘 다룰 강의 내용인 1권(트라시마쿠스)과 2권(글라우콘)에 나오는 논쟁의 배경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근처의 축제 구경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폴레마르코스라는 지인을 만나 그의 집을 방문하게 됐고 그의 아버지 케팔로스옹과 무엇이 정의인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트라스마쿠스가 합류하게 됐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고대 그리스에서 ‘정의’는 일반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잘 통용되는 행위, 즉 그 상황에서 적절하게 행동하고 있느냐를 묻는 것이었다. 전혀 도덕적인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정의의 개념을 무엇이 옳고 그른지 따지는 것으로 바꿔버렸다. 당시 ‘힘이 정의다’라는 개념에 소크라테스는 도덕 개념을 들고 왔던 것이다. 그 이후로 정의는 힘과 도덕의 파워게임이 됐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지금도 그 싸움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트라시마쿠스는 약자들이 강자들이 만든 법을 지켜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법은 강자들이 만들었으니 그들의 이익만을 위한 법이라는 말이다. 즉, 법이 강자들의 헤게모니라는 말이다. 선생님께선 정의는 더 강한자의 이익으로 귀결된다는 트라시마쿠스의 주장에 대한 예를 보여주셨다. 유명환 전 외교부장관 딸 축채사건. 홍모씨 사건. 이 두 사건은 특히 법적인 과정과 절차의 이름으로 벌어진 범죄라고 하셨다. 다음으로 외교관 2부 제도.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의 일당 5억원 황제 노역 논란.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에선 법을 따르는 일이 정말로 약자들에게 해로운 것인가 다시 생각해봤다. 선생님께선 트라시마쿠스가 ‘헤게모니’라는 단어만 쓰지 않았을 뿐 정확하게 현실을 꿰뚫고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트라시마쿠스가 주장한 것들은 현실에서 발생하는 일들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이다.
다음으로 2권에서의 글라우콘과의 논쟁 부분을 설명해주셨다. 선생님께선 먼저 2011년 당시 안철수 씨가 차기 대선후보로 급부상하자 “좋은 사람이 좋은 마음으로 들어와도 이를 키워주지 않고 따돌리는 게 정치판이다.”라고 홍준표 의원이 했던 말을 보여주시며 이것이 글라우콘이 말했던 포인트라고 말씀하셨다. 정의가 좋은 것이라서가 아니라 불의를 저지를 수 없는 허약함 때문, 즉 법은 사회적 약자들이 어쩔 수 없이 맺는 약정이라고 하셨다.
이 [국가]의 2권에는 ‘기게스의 반지’라는 재밌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선생님께선 이 이야기에 대해 먼저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리디아 라는 왕국에 성실하고 바른 기게스라는 목동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양을 치던 중 갑자기 지진이 발생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동굴이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그 안으로 들어가 반지를 줍게 되는데, 그 반지는 반지를 착용한 사람이 ‘보이지 않게’ 만들어주는 능력이 있는 신비한 반지였다. 그 투명한 능력을 가지고 왕비를 취하고 왕을 죽이게 된다는 이야기 이다. 이 반지의 ‘보이지 않는’ 능력은 권력의 본질을 상징하는데 이는 부패, 부정의를 만든다. 즉, 권력이 보이지 않고 사유화가 되면 될수록 변질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이야기이다.
선생님께선 이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J.R.R. 톨킨이라고 말씀하시며 [반지의 제왕]에 숨겨져 있는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와 권력의 속성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이 영화에서 권력을 상징하는 반지가 지닌 첫 번째 특징은 한 번 맛보게 되면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게’ 해주는 반지는 비밀권력을 상징하는데 비밀권력을 맛보게 되면 포기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영화에 거의 모든 존재가 반지를 보면 정신을 못차리는 게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비밀권력은 직접 주인을 선택하지 절대 기존의 주인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반지가 이실도르의 손을 떠나가는 장면이나, 골룸의 손을 떠나가는 장면이 이를 상징한다. 검찰이나 국정원 등 비밀권력을 동원해서 국정운영을 손쉽게 한 국가지도자는 임기가 끝난 후에 자신의 손을 떠나는 반지를 보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왕의 귀환’ 마지막 장면 중에 프로도에게 ‘모든’ 종족이 무릎을 꿇는 장면이 있는데 그 부분은 오로지 권력을 공개적으로 얻은 사람이 만인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상징한다.
선생님께선 이런 비밀권력이 게슈타포 같은 비밀 경찰이나 국정원 같은 것들로 이해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밀실에서 나온 제한되지 않은 권력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고 하시며 벤담과 푸코가 말했던 원형 감옥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이것의 핵심은 감시가 죄수들을 올바르게 행동하게 만든다는 것인데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차이는 이 감시자가 공개됐는지 여부에 있다고 하셨다. 이어 트라시마쿠스와 글라우콘의 정의관에 대해 설명해주시고 ‘엘리트와 법’에 대한 부분에 문제제기가 되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강의를 마치셨다.
이번 강의를 통해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최근 학교 강의 때 교수님께서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조를 구성해온 대로 팀플과제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방식이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자율적으로 조를 구성하게 되면 먼저 잘하는 사람들끼리 같은 조가 돼버리면 그렇지 못한 조보다 시작점에서 우위를 가지기에 불평등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친한 사람이 없는 사람들이나 대인관계가 좋지 못한 사람들은 조를 구성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해서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을 들고 문제제기를 했을 때, 그 교수님께서 ‘잘하는 사람이 더 잘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뭐가 잘못된 것인가’라는 대답을 해주셨는데 이 사고방식이 ‘강자의 이익이 정의다’라는 트라시마쿠스의 주장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생각했다.
잘하는 사람이 더 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물론 좋은 것이지만 경쟁을 강요하는 시대에서 대학교 강의에서마저 못하는 사람을 외면하고 잘하는 사람이 더 잘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남이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나만 잘되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강요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문제제기를 할 당시에 나도 좋은 조가 있었지만 조를 박차고 나와서 동기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친구들과 같은 조를 만들었었다. 난 이게 정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성적은 좋지 못했지만.
선생님께선 트라시마쿠스의 정의관이 현실을 냉정하게 그려냈다고 말씀하셨는데, 소외받는 사람들, 즉 약자를 외면하는 정의의 사고방식은 세월호 유가족의 슬픔에 공감하기보다 정부나 여당의 이익이 정의인 듯 말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지 않나 싶다. 칸트가 말했던 인간성, 즉 공감능력이 결여된 시대에 정의는 힘이 아닌 도덕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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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자유의 계보학 이후 두 달간 쉬고 다시 느티나무다.
학교나 책보다 배우는 게 많은 이곳에 다시 오니 설랜다. 이번 강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관한 철학강의다. 누구나 쉽게 들어봤을 이름들이고, 나에게도 친숙한 이름들이지만 그들의 철학에 대해서 알지는 못했다. 이번 강의를 통해 고대의 철학부터 시작해서 계속 철학공부를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강의를 듣게 되었다.
오늘 강의의 시작부터 선생님께선 9주 강의에 대해 먼저 사고의 지도를 주시고 끝나는 주에 다시 지도를 주신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장정일 시인의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이란 시를 읽어주시며 느티나무에 오는 마음이라면서 시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지치고, 힘들고, 어려운 시절 세상이 보기에 민주주의에 민감한, 공동체에 민감한 우리는 변질된 현실을 그냥 살아가지 않는다고 말씀해주셨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활동했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으로 본격적인 강의가 시작됐다. 당시 그리스 시대의 국가형태를 말씀해주시며 500인회와 추첨제를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도시를 운영할 사람들은 500인회의 동의를 통해 뛰어난 사람들이 임명됐다. 그 사람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그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도자기에 이름을 써서 투표해 도시에 해로운 자를 추방하는 제도인 도편추방제는 많이들 알고 있는데 이 제도가 똑똑하고 지혜로운 자들을 경계하는 데 쓰였다는 건 많이 알려져 있지 못한 것 같다. 더 나아가 추방으로 안될 사람들은 죽이기까지 했다.
선생님께선 소크라테스와 페리클레스의 예를 보여주셨다. 당시 아테네는 시민 종교를 통해 시민들 간의 결속력이 엄청났다고 한다. 그런 배경에서 밀레투스는 소크라테스가 새로운 ‘신’을 들여왔다고 모함했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보여주고 있듯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변론을 펼쳤다. 이 변론을 듣고 시민들은 기립박수를 보냈고 더 많은 찬성으로 그를 죽였다.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와 전쟁을 반대하는 명연설 이후 엄청난 박수를 받았지만 아테네 시민들은 전쟁을 하러 갔고 아테네는 그리스의 패권을 잃고 패망의 길을 걸었다.
이런 사례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민주주의는 황당한 것으로 여겨졌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를 타락한 정치라고 까지 말했다고 한다. 선생님께선 이런 민주주의를 두고 ‘평범한 사람들을 어ᄄᅠᇂ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살펴보자고 하셨다.
이후 선생님께선 철학이 정치의 깊은 곳까지 관여하고 소피스트 철학이 중심이었던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당시는 철학이 도시국가의 결속력을 높여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고대 아테네는 인류역사상 철학자가 사랑받았던 마지막 시대였던 것이다. 이어 니체의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이란 책을 소개해주시며 플라톤이 철학을 진리를 기다리는 행위로 바꿔버렸다는 설명을 해주셨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사유하는 것으로, 즉 행위로, 여겼는데 그걸 플라톤이 바꿔버렸다는 말이다. 철학을 성찰하는 행위로 여겼던 소크라테스의 사유는 거기서 끝나버린 것이다. 이런 뛰어난 지혜자를 추방도 하지 않고 도시가 죽였던 것이다.
선생님께선 이어서 현대의 민주주의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설명해주셨다.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시민의 정치 참여가 결여됐다는 ‘도망자 민주주의’. 시민들이 정치에 무지하고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구경꾼(Spactator)으로 존재한다고 해서 ‘구경꾼 민주주의’. 운동이 너무 세분화돼서 시민들을 모을 수 있는 힘을 잃었다는 ‘전도된 전체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는 고대 그리스에서 내려왔다고 하셨다. 너무 분화된 사적인 이익들이 아무렇게나 추구되고 이런 수단으로 민주주의를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이런 현실을 ‘범죄적 민주주의’라 해서 민주주의가 이를 용납함으로 사회가 개인들의 무절제한 이기심을 실현하는 장으로 전락해버렸다는 말도 붙여주셨다.
당시 그리스의 현실은 지금 우리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민주주의의 의미 자체가 퇴색되는 현실에 대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플라톤은 정치영역에, 소크라테스는 생활세계에 답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선생님께선 플라톤이 스승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스승과 다른 길을 걸었다고 말씀해주셨다.
앞으로 있을 8주의 강의 동안 플라톤의 작품을 통해 민주주의를 돌아봐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하셨다. 하나는 이 때 그들이 겪었던 문제가 지금도 이어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대 아테네 이후 민주주의가 있던 때가 없었다는 것이다.(18세기가 되어서 비로소 시작됐지만 근대화의 과정) 이렇게 고전을 통해 현실을 돌아봐야 하는 이유들을 듣고 고전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었고 바쁜 일상 속에서도 지금 시대와 관련해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읽을 수 있는 동기를 얻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