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 근대로의 희망 여정

  • 강사

  • 기간

    • 2014. 1. 13 ~ 2014. 2. 17
  • 시간

    • 월요일 19:00~21:30 총6회
  • 수강료

    90,000

    • 파격 할인혜택
    • 참여연대 회원62,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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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 정보

            강의소개 |

    모두들 민주주의를 걱정하는 시대입니다.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의 기억이 자꾸 떠올리며
    민주주의를 일구어온 시민의 힘에 희망을 품는 한편에선,
    걷잡을 수 없는 절망에 깊은 한숨을 내뱉습니다.
    이 암담함을 탈주하고자 민주주의의 기억을 떠올려 보려 합니다.
    민주주의를 향한 긴 도정의 출항지인 문명전환기 19세기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민주주의’는 해방 이후 미국에 의해 이식된 제도와 이념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투쟁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 강좌는 민족주의 관점의 역사관에서 민주주의 관점으로 역사를 보고
    그 안에 개념을 복원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낯선 듯 낯익은’ 민주주의 역사 공부를 통해
    험난한 세월을 헤쳐 온 ‘시민의 역동적 삶’에 공감하며
    함께 희망을 길어 올릴 수 있는 기억들을 만나게 되길 기대합니다.
     
    강의일정 |
    날짜
    순서
    주제
    01.13
    1
    인민 : 신분해방, 여성해방
    제도와 문화로서의 신분해방은 왜 100년 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을까
     
    01.20
    2
    자치 : 서학의 정착, 동학의 탄생 그리고 공동체
    인민이 공동체의 도덕과 규범, 자치의 삶을 경험하는데
    서학과 동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01.27
    3
    정의 : 공평한 세상을 향한 농민항쟁
    19세기 조선에 공평과 정의를 요구하는 항거는 왜 끊이지 않았을까
     
    02.03
    4
    문명과 도시 : 도시 문명의 꽃,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운동
    도시 문명은 자발적 결사체와 대중시위를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02.10
    5
    개인과 권리 : 개인도덕의 회통과 민권의 굴절
    - 전통적 유교덕목과 서양근대윤리의 회통으로 어떤 개인도덕이
    탄생했는가
    - 민권은 왜 국권과 우위 경쟁을 벌였을까
    02.17
    6
    독립 : 민주공화정으로의 길
    개인과 민족의 자결을 요구한 독립운동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통해
    어떤 민주공화정을 꿈꾸었을까
     
    강사소개 |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
    참여연대 운영위원회 부위원장,한국 근대 민족 운동사를 전공했다.
    참여연대 창립멤버로 시민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최근 민주주의의 눈으로 한국근현대사를 재구성
    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논문으로 <근대 한국 민주주의 문화의 전통 수립과 특질>(2013),
    <민주주의의 눈으로 보는 역사학>(2013)을 발표했다.
    10여 년간 한중일 역사대화에 참여하여 <미래를 여는 역사>(2006) 와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2012)를 한중일 학자, 교사와 함께 공동집필했다.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교육과정을
     개발하고 교과서를 집필했으며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한국사를 성찰하려는 문제의식을 담은 역사컬
    럼을 <참여사회>에 연재하고 있다.
     
      
     
    강의정보 |
    일 시 : 2014. 01.13 ~ 02.17 (월) 총 6회 오후 7시~9시 30분
    장 소 : 참여연대 느티나무홀(B1)
    수강비 : 9만원 (참여연대 회원 30% 할인)
     

    후기 6

    •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5강, 개인과 권리 : 개인도덕의 회통과 민권의 굴절

      2014.2.17 박유하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 근대로의 희망 여정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근대로의 희망 여정] 5강(2/10), 개인과 권리 : 개인도덕의 회통과 민권의 굴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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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 도덕의 회통과 민권의 굴절'이라니, 어려운 제목이다. 우선 생소하기 그지없는 '회통'이라는 말은 '함께 서로 섞인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역사에서 다음 단계로의 이행은 계단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늘은 전근대였는데 내일 갑자기 근대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함께 서로 섞이며, 큰 갈등 없이 발전해간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민권의 굴절이란 무얼 뜻하는 말일까. 사실 '민권'은 일본에서 온 단어로 서양에는 집단적 권리를 일컫는 개념이 없다. 우리 사회에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한 이유는 개인의 권리를 말하기 이전에 국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왜 자유주의가 발전하지 못했나 하는 의문에서 도달한 결론이다. 이날 강의에서는 개인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하여 개인도덕의 회통, 밖에서 들어온 천부인권론이 우리가 알고 있던 유교적 사상과 회통하는 과정, 그리고 민권이 전파되다가 국권 상실이라는 고난 앞에서 어떻게 굴절되었는지를 알아보았다.


      개인의 탄생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는 개인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가문과 신분이라는 집단 속에 자신을 묶어서 생각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자유와 권리의식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획득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언은 근대 이전에는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개인화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바로 노동이다. 노예나 농노처럼 주인이나 영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돈을 벌고 가장으로서 살아가는 근면한 자주노동은 미국 민주주의 발전의 근간이 되었다. 국가 입장에서는 굳이 개인주의를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개인적 능력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내는 세금이 국가 수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상의 변화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공사분리는 유교에서 굉장히 투철한 의식이었기에 자본주의 윤리와 전혀 충돌하지 않았다.


      제일 먼저 양반 계급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실학자들이 최초로 양반 특권 해체를 주장했고, 김옥균은 한발 더 나아가 국력 약화의 원인으로 양반 특권을 지목하며 단칼에 양반 신분을 없애버릴 것을 상소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은 관.리의 상업 활동을 제도적으로 허용하였고 독립신문 또한 '특권을 고수하는 양반은 개명 진보를 방해하는 무리'라고 비판하였으나, '굶어도 양반'이라는 말이 보여주듯 양반은 끝까지 노동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특권신분을 가리키던 말 '양반'이 '놀고 먹는 자'라는 뜻으로 전락하고 오늘날에는 누군가에 대한 불만을 표시할 때 쓰는 비하 명칭으로나 남아있는 뒷편에는 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는 셈이다. 자주노동과 더불어 성찰적 자아를 갖춘 개인의 탄생에 영향을 준 결정적 계기는 19세기 내내 일어났던 농민항쟁이다. 인민은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초유의 경험과 평민도 하늘과 일체가 될 수 있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가르쳐준 동학은 우리 스스로 이미 쌓고 있던 개인화의 토대였다.


      개념으로서의 개인과 개인도덕의 회통

      맨 처음에는 우리도 일본처럼 '개인'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고 '자기'라는 단어로 대체했다. 독립신문에서 개인이라는 단어는 주로 사적 영역을 나타내는 의미로 '재산'이나 '권리'앞에 썼으며 조금 더 깊이 들어가자면 백성 개개인 혹은 백성, 인민, 민족에서 분화한 개인적 활동을 의미했다. 우리나라에서 개념으로서의 개인은 1905년 이후 정착되었다. 여기서 개인과 국가는 독자적인 하나의 영역이자 대등한 위상이었고 개인은 더 이상 국가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었다. 회통이란 국가에서 분화된 개인이 지켜야 할 도덕과 앞서 설명한 근면한 자주노동의 개념을 민중이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1908년 윤리학 교과서에 나타난 도덕의 회통은 '유교와 기독교 어느 한 가지만 받아들이는 건 위험하고 둘 다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논리였다. 개인도덕으로 충효를 강조하면서도 용감을 강조했는데, 이는 저항을 의미하고 지킬 권리가 없으면 발휘할 수 없는 덕목이다. 남녀 평등한 권리를 말하는 부분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타고난 자질이 다르기에 서로 다른 일을 해야 마땅하다는 논리가 펼쳐진다. 생활유교의 확산은 18세기 신분제 해체의 아이러니다. 신분제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양인들이 천민이 아닌 양반의 문화, 즉 고급문화를 흉내내면서 전근대적 유교 윤리는 오히려 강화되었다. 처가살이에서 시집살이가 일반화된 데서 알 수 있듯 여성의 지위가 조선 전기보다 하락한 원인이다. 교과서에서는 근면한 자주노동을 사람의 도리라는 굉장히 유교적인 말로 표현하였고, 상황과 질문을 실어 효도, 우애, 우정, 자유, 의무와 같은 유교와 민주주의 덕목을 함께 가르쳤다. 이처럼 곳곳에서 전근대적 가치와 근대적 가치가 묘하게 뒤섞이고 있었다.


      회통으로서의 천부인권과 '권리'의 굴절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인식하던 시작점은 서양과 마찬가지로 천부인권론이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과 미국 독립선언서로 대표되는 안과 밖으로부터의 천부인권론 또한 개인화 과정과 마찬가지로 회통하며 확산되었다.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권리는 그 출생과 갖추어지게 되는 것으로서 얽매임이 없는 독립하는 정신이며 무리한 속박을 받지 않고 불공평한 눌림을 당하지 않는 것"이라는 유길준의 서유견문, "통의란 사람이 스스로의 생명을 보존하고 자유를 구하고 행복을 바라는 것"이라는 박영효, 그리고 비인간적인 형벌과 연좌제를 폐지한 갑오개혁은 결국 모두 천부인권을 이야기하고 있다. 반면 "동양 사람들은 이 뜻을 알지 못한다"는 패배주의적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였던 뎨국신문이 있는가 하면, 천부인권과 지위의 불평등이 공존할 수 있다는 논리 또한 존재했던 기록은 앞서 말한 회통의 근거라 할 수 있다.


      개념으로서의 개인을 인식한 이후에는 인권사상이 대두되는 것이 서양 근대화의 수순이다. 그러나 유럽의 '권리'라는 단어와 우리나라에서 쓰인 '민권'이란 단어는 어감이 다르다. 권리에는 개인의 권리라는 느낌이 있지만 민권에는 사람들의 권리라는 집단주의적인 느낌이 있기에 개인주의와는 연결되지 않는다. 사실 민권은 굉장히 공동체주의가 강한 일본에서 온 개념으로 유럽에는 이런 말이 없다. 인권과 분리된 민권이라는 것이 존재하게 되면서 일본에는 개인적 인권보다 평등을 중시하는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오늘날에도 개인주의와 인권의식이 비교적 낮은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이유와 더불어, 국권상실기를 거치며 민권이라는 집단 권리가 개인 권리보다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민은 국가의 근본이며 민이 튼튼해야 나라가 발전한다."는 박영효의 말은 우리나라 현대사가 입증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경제성장의 기본"이라는 말과 통하는 면이 있다. 민권이 전파되던 시기에는 박영효처럼 민권을 국권보다 중시하는 입장과 더불어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였다. "민권의식이 튼튼해야 국권도 지킬 수 있다."고 국권은 민권에 기반한다는 주장이 있었는가 하면, "국권이 없고서 민권을 구하니, 민권을 어디서 얻으리오."처럼 국권을 민권보다 강조하기도 하였다. 민권이 확립되어야 국권도 수호된다는 민권의식은 일제 치하 독립운동의 기반이었고, 독립운동이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원인이 되었다.


      생각해 봅시다

      1. 19세기 개인도덕의 회통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 유교윤리 자체가 회통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서양 자본주의 윤리와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이 상당했다.


      2. 천부인권과 민권의 대중화가 빨랐던 이유는 무엇일까?

      > 동학의 인내천 사상과 농민항쟁기 투쟁의 경험으로 사람들에게 천부인권에 대한 인식이 이미 존재했다. 비록 제도화 면에서 부족하기는 했으나 운동적 성향은 충만한 사회였다.


      3. 국권론자가 민권론자를 압도했을까?

      >  압도했을 것 같지만 그다지 설득력은 없었다. 집권층의 책임의식이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조선은 전쟁이 아니라 외교로 망한 나라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민중은 농민전쟁에서 패하고 외세의 침입을 받아 망했고 권력은 외교를 못해서 망했다고, 독립운동의 무장투쟁론과 외교론은 조선 말기 민중과 권력층의 입장을 그대로 계승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4.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결핍이 지속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 국권침탈이 민권 박탈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개인의 권리, 개인의 자유와 평등권은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국권이 상실되는 과정에서 없어졌다.


      글: 자원활동가 박유하

    •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4강, 문명과 도시 : 도시 문명의 꽃,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운동

      2014.2.17 박유하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 근대로의 희망 여정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근대로의 희망 여정] 4강(2/3), 문명과 도시 : 도시 문명의 꽃,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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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강‘문명’은 18세기 계몽주의 사조가 유행하면서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신조어이다. 문명이 국가 발전의 징표라는 주장은 유럽 사회가 발전의 정점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이는 곧 문명과 야만을 분류하는 제국주의의 논리가 되었다. 선교사와 함대를 앞세운 제국주의 열강과 맞닥뜨린 동아시아 국가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일본은 적극적으로 서구를 모방했으며, 당대 조선 사회에서도 인기 지식인이었던 청의 량치차오는 사회진화론 입장에서 강자를 추구하고 유학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문명 전환을 ‘한 몸으로 두 인생을 사는 체험’이라 일컬었듯,  19세기 조선 사회에서 유교적 어법과 근대적 사고방식이 민중의 의식에 혼재하고 있었다.  물질문명은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정신문명은 개인 일상생활에서 시민사회로 발전하였으며 그 사이에는 몇 가지 통로가 있었다.


      문명의 전파 통로, 그 첫 번째:  신문

      신문은 나라의 안과 밖, 그 넓은 세상 소식을 알려 주는 통로였다. 특히, 자국어로 된 신문은 인민의 문명화에 가장 효과적이며 민권을 깨우치는 데 있어 위력적인 병기였다. 최초의 근대적 신문은 1883년 10월 창간된 한성순보였다.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였고 외국 기사가 70%를 차지했던 이 신문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중단되었지만, 이후 하층민과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뎨국신문과 지식인과 상류층이 독자였던 황성신문처럼 특정 계층을 위한 신문이 등장했고, 외국인인 베델이 창간했기에 일제의 압력 없이 반일 논조를 펼칠 수 있었던 대한매일신보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 신문 중에서 인민의 삶에 가장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은 단연 독립신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창간된 최초의 순한글 민간신문이다. 정부 정책을 협조하고 독립협회 주장을 대변하며 국민을 계몽하였고, 보다 과격한 내용의 영문판을 통해 세계에 한국 입장을 소개하기도 했다. 가장 큰 역할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지원한 것이다. 처음엔 주 3일 발간하다가 일간으로 전환한 독립신문은 시민들이 열광적으로 구독하여 80여명이 돌려본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문명화에 관한 내용은 크게 개인, 관계, 제도의 세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개인적 측면에서는 매너의 생활화와 분수에 맞는 생활을 권장했다. 언뜻 보기엔 굉장히 서구화된 매너이지만 그 중엔 우리가 전통적으로 지켰던 예절도 상당 부분 들어있었다. 관계 면에서는 신뢰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강조했다. 인종의 차등 분별은 사람 대접하는 도리가 아니라거나 남녀를 같은 학문으로 교육하고 동등권을 주는 것이 옳다는 대목 등에서 독립신문이 인종과 양성평등을 중요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도적으로는 교육을 강조하고 기독교를 수용하였는데, 이때의 기독교는 선진 문명의 한 요소로서 포교의 개념이 아니라 기독교가 가지는 우월적 문명성을 인정한 것이었다.


      문명의 전파 통로, 그 두 번째: 학교

      학교는 서구 문명으로의 전환에 있어 가장 효율적인 제도이자 수단이었다. 조선 정부가 국민 교육에 소극적인 가운데 인민이 주도하여 사립학교를 세워 근대 교육을 선도한 특징을 갖고 있다. 조선 말기의 교육은 위태로운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 근대인으로서의 입신양명을 넘어 구국계몽을 실현하고자 했던 인민의, 시민의 국민적 역량이 발현된 근대화 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초기 정부가 주도했던 동도서기론적 교육 개화 정책은 서양 기술의 수용에 필요한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외국어, 농업, 군사 기술 등 실업교육 기관에 그쳤으며 국민교육에는 무관심하였다. 국민 교육 제도가 성립된 것은 갑오개혁 때에 이르러서였다. 우선 교육 전담 부서인 학무아문을 설치 후 학부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 주요 도시에 소학교를 세웠다. 소학교는 1895년에서 1905년까지 전국 각처에 100여개가 설립되었다. 학무아문을 학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고등교육이 누락되었는데 일제의 개입이라 추측하기도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불명이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고등교육을 선도한 것은 사학이었고, 이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사학이 강세를 보이는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사립학교인 원산학사는 개항장인 원산의 상인과 유지들이 1883년에 설립하였다. 이후 선교를 위한 기반 구축 차원에서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 기독교계 학교가 등장했다. 1908년 전국 사립학교 수는 5천여 개, 학생은 20만 명에 달해 사립학교 설립 붐이 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라를 빼앗기기 직전에는 구국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는 경우가 많이 늘어났다. 이승훈은 오산학교 개교사에서 “총을 드는 사람,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귀중한 일은 백성들이 깨어 일어나는 일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시기 교육 계몽 운동 또한 민간이 주도하였다. 독립협회 제 1회 토론회 주제가 ‘조선의 급선무는 인민의 교육’이었던 것을 보면 교육 문제가 어느 정도로 화제가 되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상동청년학원 취지서(1904)에서는 ‘빈곤이 날로 심해지고 재원이 해마다 고갈’되는 이유가 “학업을 먼저 힘쓰지 못하고 당장 생계만 구차히 도모한 데 있다.”라고 말하며 “지금 천하의 사람들이 모든 일에 학문으로 자본을 삼지 않는 자가 없다.”고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도시의 탄생

      문명화의 공간적 변형은 바로 근대적 의미의 도시의 탄생을 가져왔다. 도시의 탄생은 물질적인 서구화의 척도인 동시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서구화를 촉진하는 강력한 촉매제였다. 도시화의 첫 번째 대상은 개항도시 부산이다. 개항 직후 초량 왜관이 일본의 부산전관거류지로 개편되고 일본 영사관을 비롯하여 경부철도, 철도역사, 세관 등을 건설하여 대일무역의 거점이 되었다. 1910년에는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한성부(서울)는 “이 비상한 변화는 4개월 만에 이루어졌다. 서울 거리가 너무 변하여 1894년에 이 책을 쓰기 위해 찍은 대표적인 빈민촌의 모습이 쓸모없게 되었다.”라는 비숍의 글을 포함하여 단 몇 년 사이에 서울의 모습이 몰라보게 변했다는 회고가 여럿 보인다. 단기간 안에 도시화를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대한제국의 한성 개조 사업이었다. 경운궁 중심으로 개방적 근대 도시를 건설하기 위하여 산업 개발, 임시가옥 철폐 및 개천과 우물 정비, 공원 등 신설비 도입을 진행하였다. 3.1 운동이 일어났던 파고다 공원이 대한제국 때 조성된 인조 녹지 공간이다.


      다만 도시로 부가 집중되고 지역 격차가 심해진다는 개발의 양면성도 이때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모든 사업도 서울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상점의 상품은 서울로부터 공급된다. 모든 조선 사람의 마음은 서울에 가 있다.”는 비숍의 서술이나 “서울 백성만 위할 것이 아니라 조선 전국 인민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대언하여 주려 함.”이라는 독립신문의 한 구절을 보면 이미 양극화가 상당 부분 진행되었으리라 유추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도시화의 결과이다. 프랑스의 정치학자 토크빌은 <프랑스혁명의 문화적 기원>에서 “공권력이 집중된 중앙 정부의 소재지로서 모든 지적 활동을 독점하고 경제적 활동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라고 수도와 지방 분열을 설명한 바 있다.


      시민사회의 탄생: 도시 속의 자발적 결사체, 공론장, 집회와 시위

      도시라는 공간에 모여든 인민은 시민으로서 자발적 결사체를 결성하고 공론장을 활용하고 집회와 시위를 통해 자유로운 의사를 표현했다. 이러한 시민사회의 탄생을 상징하는 것이 자발적 결사체 독립협회와 미디어 공론장 독립신문, 그리고 저항과 비판의 인민 자치의 장이었던 만민공동회이다. 독립협회는 공공성을 지향하며 집회를 통해 자율적이고 공개적인 토론을 펼치며 여론을 형성하는 자발적 결사체의 역할을 다했다. 안건마다 회원의 직접 선거로 총대위원을 선출하여 결정하도록 하는 직접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운영한 것도 주목된다. 독립신문은 스스로가 정부와 인민을 교통케 하는 공론장임을 자부했다. 만민공동회는 근대적 시위와 집회 문화의 원형으로서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독립신문의 민주주의 담론 또한 앞에서 이야기했던 문명화 담론처럼 개인, 관계, 제도의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분석할 수 있다. 개인 민주주의의 핵심은 자유권과 주권의식이다.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사람마다 자기 신상에 자유권을 갖고 태어난다.”거나 “조선 백성들이 가진 권리가 있지만 그 권리를 쓰지 아니하니까 없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이며 나라가 잘 되고 못 되는 것은 백성의 손에 달렸다.”는 문장들이 그 증거이다. “문을 열어놓고 만민이 보는 데서” 나라 일과 상회 일을 의논해야 한다는 대목은 공개적이고 계약적인 관계의 요구이며 “지혜를 연구하고 일심합력하면 그 가운데서 강한 힘이 생겨 도리어 힘 있는 사람을 압도하는” 연대의 필요성을 이 당시부터 느끼고 있었다. 제도 면에서는 인민권 보호, 대의제, 권력 감시, 법의 형평성, 무죄 추정의 원칙 등 현대 민주주의 제도의 구성요소를 모두 포함한다. 인민들이 받아들였던 서구의 민주주의 사상과 제도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그리고 인민들은 생활의 문명화와 언론에서 말하는 내용을 수용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직접 행동에 나선다.


      1898년 김홍륙이 고종과 태자가 마시는 커피에 독을 넣은 사건을 계기로 정부가 고문과 악형, 연좌제 부활을 시도하자 인민들은 생명과 재산의 자유권 침해에 항의하였다. 법에 근거한 처벌과 고문 금지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법률과 규칙을 준수하지 않은 정권 퇴진 요구로 발전했다. 고종은 거부하였고 유생은 독립협회 비난 대자보를 붙였지만 결국 박정양 개혁 정부가 구성되는 결말을 맞았다. 미국 공사는 평화적 혁명이라고 평가하였다. 자발적 결사체에 대한 이해와 갈등 역시 팽팽한 긴장구도를 이뤘다. 정치 문제에 관한 토론과 제한된 장소에서의 집회만을 허락하는 고종의 입장에 독립협회는 정치 토론은 정부의 부정부패 때문에 반드시 필요하며 언론의 자유권은 양보할 수 없는 민권이라며 반박했다. “정법을 문란하게 하는 신하를 탄핵하고 성토하는 것은 백성의 권리”이기 때문이었다. 독립협회의 주장은 ‘법을 지키지 않은 우리를 잡아가라.’는 시민불복종운동으로 전개되었고, 고종은 ‘신하의 의무’라는 유교적 사고방식으로나마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19세기의 민중운동의 마지막을 빛낸 만민공동회의 개최와 해산은 독립협회와 함께 추진했던 의회개설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독립협회가 주장한 의회론은 입법과 행정을 분리시켜 전문화하면 국정을 능률적으로 집행할 수 있고, 공개적 찬반 토론을 통해 인민의 의사를 민주적으로 반영하는 동시에 정치의식을 높인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독립협회는 양원제를 지향하며 중추원을 개편하여 상원을 설립하였다. 헌의 6조는 의회의 조약비준권, 재정 일원화, 예결산제도 확립, 공개재판제도와 증거주의, 법률 준수 등 제반의 민주주의 정치로의 진전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전복하고 공화제를 내세울 반역을 모의하고 있다.”는 내용의 익명서가 등장하였고, 정부는 독립협회 간부 17명을 긴급 체포하고 독립협회를 불법화한다.


      처음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것은 독립협회였다. 하지만 만민공동회가 연일 만여 명을 헤아리는 시민이 참여하는 집회와 시위의 장이 된 것은 독립협회가 폐쇄되고 간부들이 죄다 체포되었을 때였다. 또렷한 지도부와 운영 방침 없이 자발적인 시민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며 꾸려간 공동체가 바로 만민공동회였던 것이다. 당시 서울 인구 17만 명 중 매일 1~2만명이 모여 연일 철야농성을 했다는 소식에 전국에서 지지를 표하며 성금, 물품을 보내왔다. 만민공동회를 엄호하던 200여명의 군인이 지지를 표명하며 스스로 해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1898년 10월부터 12월까지 이어온 만민공동회 운동은 정부의 폭력 진압에 의해 해산되었다. 하지만 일사분란한 지도부 없이 시민의 자발성에 의거해 몇 달 간 집회와 시위를 지속했다는 점, 그리고 전국에서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면서 민주주의 가치 구현을 위한 연대의 전통이 수립되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성과를 남겼다.


      “반대가 없으면 진보가 없나니” – 독립신문, 1898

      강의 시작 전에 선생님께서는 질문을 하나 던지셨다. 1894년까지만 해도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 유교적인 화법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1898년 독립협회의 화법은 근대적이다. 어떻게 사람들의 주체의식 각성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후기를 쓰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근대적 시민의식은 불과 4년 만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고 한 세기 내내 지속되어온 투쟁의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이 서서히 형성해왔다.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던 시민의식이 서구 문명이 가져온 물리적 근대화 및 우리보다 한발 앞서 꽃피운 사회사상과 맞물려 폭발적인 발전이 일어난 것이다.


      주목할만한 또 다른 지점은 19세기 말 민중들이 도달한 민주주의의 수준이 21세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거나 오히려 더 급진적인 측면마저 보인다는 사실이다. 아래는 이날 강의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사료이다.


      “개화한 나라일수록 시비하는 공론이 많고 시비가 많을수록 개화가 점점 잘 된다. 백성이 정부에 반대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나 반대가 없으면 진보가 없나니 대한 백성들은 어느 때든지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꺼리지 말고 시비하고 반대하여 정부로 하여금 방심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자.” - 독립신문, 1898.11.7


      116년 전에도 오늘날의 사회에도 이견은 존재해야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주류와 다른 의견은 존중 받지 못하고 억압당하고 있다. 그러나 권력 안과 밖의 엄청난 괴리가 존재하는 가운데 일제가 국권을 침탈한 데에서 우리나라의 불행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제와 독재정권이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려고 갖은 시도를 해왔음에도, 시민의 힘은 이른바 87년 체제라고 불리는 제도적 민주주의를 일구어냈다. 그러니 지금까지 배운 내용을 두고 우리의 시민의식이 19세기 말에 비해 별다른 발전이 없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민주주의의 발전은 이제 막 다시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글: 자원활동가 박유하

    •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동학 추천도서

      2014.2.7 레드펭귄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 근대로의 희망 여정

      김정인입니다

       ^^ 어제 올린다는 것이 그만 깜빡!!했네요. 죄송해요.

      질문 주신지 무려 2주만에 답변 드린 점 다시한번 사과드리구요.

      1. 표영삼, 동학1-수운의 삶과 생각, 통나무 ; 동학2-해월의 고난, 통나무

      표영삼 선생님은 평북 구성 출신으로 월남한 천도교인이셨습니다.

      제가  "천도교 근대 민족 운동 연구"(한울)로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고령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자료를 소개해 주시고 알고 있는 지식을 모두 알려 주려 애쓰셨던 분이시지요. 

      특히, 수운 최제우보다는 해월 최시형을 무척 좋아하셨지요.

      천도교인 중 유일하게 천도교사를 연구하던 분이셨구요.

       역사 전문가가 쓴 것은 아니지만,  신뢰가 듬뿍 가는 책들이지요.

      문득, 천도교 관련 자료를 쉬지 않고 복사하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청춘의 그 시절이 생각나네요^^

      2. 김용휘, 우리 학문으로서의 동학, 책세상

      책세상 문고라 얇고 과학도였다가 철학도로 돌아선 이력을 가진 전문가가 풀어낸 동학 책이라 추천합니다.

      근대사에서의 유토피아, 대안공동체에 관한 연구는 아쉽지만, 없네요....아님, 제가 찾아보긴 했으나, 잘 모르는 걸 수도 있구요.

      언제든 찾게 되면 이 게시판에 올릴께요...

      다른 두분의 질문, 서양인 신부의 한국인을 보는 눈과 천도교와 증산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꼭 설명드릴께요...

    •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3강, 정의: 공평한 세상을 향한 농민항쟁

      2014.2.3 박유하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 근대로의 희망 여정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근대로의 희망 여정] 3강(1/27), 정의: 공평한 세상을 향한 농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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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는 농민항쟁의 시대였다. 한 세기 내내 전국적으로 농민항쟁이 계속되었고 변란(1811년 평안도농민전쟁), 민란(1862년 농민항쟁)을 거쳐 전쟁(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진화해 나갔다. 지금까지 농민항쟁을 다룬 연구들을 살펴보면 개별 봉기의 파편에만 범위가 한정되어 있으며 연속성에 주목한 논문은 거의 없다고 한다. 농민항쟁에 대한 평가도 상당히 박한데, 이는 지금의 눈으로 과거를 보는 오류를 범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날 강의에서는 농민항쟁의 근본적 원인과 변화 양상을 전체적으로 공부해보았다. 아울러 시민의식을 지니고 근대로 나아가던 민중들, 그들이 아무리 저항해도 바뀌지 않는 조선 정부를 나란히 보며 권력 안팎의 세계가 이토록 달랐다는 것을 실감하기도 했다.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 농민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다

      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났고 갓난아이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이 집 삼대 이름 군적에 모두 실렸네
      억울한 하소연 하려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
      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갔다네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네
      스스로 부르짖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

      - 정약용 <哀絶陽(애절양: 남근을 자른 일을 슬퍼함)> 中 -

      농민의 저항 방식은 국가의 부역 의무에 응하나 고의로 일을 방해하는 일상적 투쟁과 족보를 사서 신분상승을 꾀하는 개별투쟁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관`리들의 비리를 소문으로 퍼뜨리거나 산에 올라가서 큰 소리로 폭로하기, 집회, 상소 등 온건한 방법이 통하지 않을 때 선택하는 최후의 수단이 봉기였다.

      농민항쟁의 원인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신분해방 등 평등 의식의 고조와 부정의하고 불공정한 국가권력의 부정부패다. 이중 실질적으로 민중의 삶을 고달프게 했던 것은 후자였다. 세도정치는 몇몇 가문이 중앙 관직을 독점하는 기형적인 정치 형태였다. 실력이 있어도 이들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관직에 진출할 수가 없기에 좌절한 지식인들이 봉기에 가담하거나 지도자가 되는 일이 많았다. 삼정의 문란은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지방 수령들이 백성을 가혹하게 수탈하던 시대상과 직결되어 있다. 삼정이란 전정(토지세), 군정(군포), 환곡을 일컫는다. 위에 인용한 정약용의 시는 16세부터 60세까지의 남성들이 병역의무 대신 내던 세금 군정의 문란을 짐작케 하는 작품이다. 또한 삼정 중 가장 악질적이고 19세기를 뒤흔든 주범으로 지목받는 것이 환곡이다. 본래는 춘궁기에 곡식을 꾸어주고 가을 추수 후에 갚게 하던 구휼제도마저 탐관오리들의 이자놀이로 변질된 것이다.

      일찍이 18세기에 정약용은 “만일의 상황이 발생하여 백성들이 작당하여 변란을 일으키면 그 누가 막을 것인가?”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도 정부는 변화하지 않았고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오지영에 따르면 1894년에는 백성들이 이 나라는 망해야 한다며 날마다 망국가를 불렀다고 했다. 사회를 재구성할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극단으로 치달은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백성들의 불만이 최초로 폭발한 지점은 1800년 안동 관아 습격 사건과 1801년 하동 괘서 사건이었다. 뒤이어 서북지방(함경도, 황해도, 평안도)에서 변란들이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역, 수공업, 광산 등으로 새로운 부민의 등장과 이들에 대한 수령의 수탈이 배경이었다. ‘홍경래의 난’으로 유명한 평안도 농민전쟁(1811)은 비록 패배했지만 4개월 넘게 정주성에서 저항하며 버텼다.

      재조명이 필요한 임술농민항쟁

      1862년, 단성민란과 진주민란을 도화선 삼아 전국 72개 군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합법적인 등소운동(等訴運動)을 통한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못하면 전면 봉기하여 관청을 공격하고 읍권을 장악한 후, 진압을 피해 자진 해산하는 전개방식이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참가 계층은 몰락양반과 농촌 지식인, 그리고 대다수를 차지하는 소빈농이었다. 이때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도 함께 일어났는데, 불공정한 조세제도는 부민에게도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정부는 강경대응으로 일관하였으며 권력자들이 민생을 위해 한 일은 거의 없다. 일례로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겠다며 삼정이정청을 설치했으나 결국 없던 일로 만들고 말았다. “백성은 수령에 대해 부모를 받들 듯 해야 하거늘 구타하고 짓밟기를 이에 이르렀는가.”라는 철종의 발언에서 알 수 있는 권력자들의 가치관은 굉장히 전통적인 유교 사상이다. 백성은 근대화를 향해 나아가는데 권력은 여전히 봉건적 세계라는 자기들만의 성 안에 갇혀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있었던 것이다.

      임술농민항쟁에 대한 통설적 평가는 상당히 비판적이다. 계급적 연대를 바탕으로 지역을 초월하여 정치권력에 대해 투쟁하지 못하였고, 봉건적 토지제도나 신분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조건적 경제투쟁에 머물렀다는 지적이 가장 먼저 나온다. 상위 공권력에 호소하는 청원적인 모습과 국왕의 효유문에 스스로 엎드려 죄받기를 청하는 투항적인 모습 또한 나타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반박하자면,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봉기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서 마침내 전국적 연대를 통한 정치적 투쟁으로 진보한 점을 근거로 들 수 있다. 청원적이고 투항적으로 보이는 의사표현 방식은 민중들이 추구하던 이념의 근대성과 그들 사유의 전통성이 혼재해있던 결과라 해석할 수도 있다. 이처럼 역사에서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지금의 잣대로 우리가 살지 않았던 시대를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전쟁, 봉건 체제를 타파하려 했던 민중운동

      개항 이후 1894년까지 농민항쟁 100여건 발생하였고, 1893년에는 한 해에만 무려 65건이나 일어나 “민란이 없는 고을이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1893년 3월 보은집회에서 백성들의 발언을 보면 지배층에 대한 저항, 서양의 의회제도와 민주주의 이해, 구조적 부패에 대한 비판 등 이들에게 이미 근대적 의식이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보은, 금구 집회 이후 전라도 일대에서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이 주도하여 지역적 연계를 시도하였다. 1차 봉기의 시발점인 고부민란은 조병갑의 학정에 들고 일어난 농민들이 전봉준을 지도자로 추대한 것이다. 봉기의 4대 강령, 특히 네 번째 강령인 “군대를 몰고 서울로 쳐들어가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없앤다.”는 이전에 마을 단위로 일어났다 사그라들던 농민봉기에 비해 뚜렷한 목표와 혁명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집강소를 설치해 폐정개혁에 힘쓰던 동학농민군은 청군과 일본군이 들어온 것을 계기로 재봉기하였다. 근본 목표는 더 철저한 폐정개혁이었지만 대의는 항일로써, 충청도 의병을 집결하여 봉기의 전국화를 가능케 했다. 흔히 동학농민운동에는 반제국반봉건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지만 항일 의식의 실체는 폐정개혁을 방해하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에 가까웠다. 개화파와 대원군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근대성을 가졌지만, 그보다는 구체제를 파괴하고자 하는 열망이 더 강했다. 여흥 민씨 세도정치로 돌아가던 정부는 동학군 진압에 외세를 끌어들여 내정 간섭의 여지를 주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다. 동학농민전쟁 후에도 지배층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새로운 조세항목을 만들어가며 나라가 망할 때까지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역사에서 가정을 한다는 건 부질없는 일이지만 권력자들이 조금이라도 개혁의지를 보이고 실천했다면 아래로부터의 변혁과 맞물려 조선 말기 역사가 크게 달라질 수도 있었을 거라는 미련을 버릴 수가 없다.

      19세기 농민이 요구한 정의와 전통 속에서 찾은 근대화의 길

      19세기 농민항쟁이 요구한 정의는 차별없는 공평과세였다. 봉기를 거듭하며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이념들이 추가되지만 어떤 봉기의 원인에서도 조세 관련 사항은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공평과세를 실현할 수 있을지 정부에서 논의가 없었으며, 결국 일제가 나라를 빼앗고 나서야 그들의 손에 의해 근대적 조세 제도가 만들어졌다. 원래는 관민의 합의에 따라 우리 손으로 만들었어야 했을 제도이다. 농민항쟁의 또 다른 의의는 전통 속에서 근대화의 길을 찾았다는 것이다. 중국 태평천국운동은 비자본주의적인 중국적 근대화의 길을 모색, 다시말해 전통 속에서 근대 세계로의 가능성을 발견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국을 조선으로, 태평천국운동을 동학농민운동으로 바꾸어도 틀리지 않는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농민항쟁을 실패한 계급투쟁으로 보는 것은 편향된 시각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를 전근대와 단절시킨 주범은 사회를 재구성할 의지가 없던 봉건지배층과, 한창 무르익고 있던 시민의식을 짓밟은 제국주의 열강인 것이다.

      글 : 자원활동가 박유하

    •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2강, 자치: 서학의 정착, 동학의 탄생 그리고 공동체

      2014.1.27 박유하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 근대로의 희망 여정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근대로의 희망 여정] 2강(1/20), 자치: 서학의 정착, 동학의 탄생 그리고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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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학은 천주교, 동학은 토착종교. 둘 다 조선 말기에 민중의 공감에 힘입어 널리 전파되었고 극심한 박해와 탄압의 역사가 있었음. 우리가 고등학교 근현대사 수업을 통해 알고 있는 정보는 대부분 여기까지다. 종교는 종교일 뿐 사회변화와 무관하다는 인식은 작년 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시국선언에 쏟아진 비난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권력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공격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말, “중립성을 지켜라!” 그러나 그 종교도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서 이탈하여 오로지 자기 길만을 가지는 않는다. 신분 해방이 대세였지만 권력이 개혁을 시도하지 않을 때, 평등의 욕망을 수용하고 이를 분출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 바로 서학이고 동학이었다. 그리고 일제가 권력을 잡고 전제를 선포하자, 토착종교는 대안공동체로서 식민지 권력의 바깥에서 조선인 자치 권력을 생산하고 꾸려나가는 저력을 발휘했다.

      서학의 정착

      서학은 17세기 초에 <천주실의>와 같은 한역서학서를 통해 학문으로 처음 들어왔다. 사료를 통해 초기의 서학은 하느님을 중국의 ‘상제’로 해석하고 유교윤리를 거부하지 않는 등 동아시아 문화에 맞게 현지화 된 형태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790년대에 예수회의 입장이 그 나라 실정을 고려치 않고 원칙대로 선교하자고 바뀌면서 충돌이 시작되었다. 천주교가 박해받은 이유는 유교 의례와 신분질서를 파괴한다는 데에 있었다. 신앙이 가져오는 문화적 변화는 권력뿐만 아니라 당대 사회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조상숭배와 제사를 우상숭배라 배격하고 전혀 지금과 차이 없는 결혼관에 따라 부부간 동정서약을 하는 광경은 어마어마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천주교인이 되는 것 자체가 유교적 통치 체제의 기반을 침식하는 잠재적 저항인 시대였다. 지식인들이 박해 중에 죽어나감에 따라, 그리고 수평적 우애와 보편적 인간관에 힘입어 천주교는 평민화 되어갔다. 박해를 피해 산골로 은신한 신자들이 건설한 교우촌은 신앙공동체이자 생활공동체였다. 늘 떠돌아다니며 빈궁에 허덕였던 이들은 옹기장수가 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박해를 받아 공동체가 흩어졌을 때 사람을 찾기도 쉽고 옮겨 다니는 상황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박해 받은 양반들이 상인이 되면서 신분제 해체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동학의 탄생

      서학은 조선에 들어와 정착했고, 동학은 토착 종교로서 탄생했다. 1860년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고 2대 교주 최시형이 본격적으로 포교를 시작하고 교세를 확장했다. 유교에서의 천(天)이 왕권의 통치 근원이라면 동학의 천은 모든 사람이 몸에 모신 한울님이다. 각 개인은 한울님을 모신 존재이고 존엄성, 즉 개인으로서의 권리가 있으니 사람을 대하기를 하늘처럼 하라는 뜻이다. 하느님 아래 모두가 평등하다는 서학보다 한발 앞서간 진보 사상인 셈이다. 또한 동학은 생활도덕운동으로서 바르게 살기를 강조하며 민중의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갔다. 동학 공동체 규범은 새로운 삶을 꿈꾸고 변화를 지향하지만 기존 삶의 방식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굉장히 유교적이었던 ‘통유문’과 사람에 대한 존중감의 극치를 보여주는 ‘십무천’을 나란히 놓고 보면 어렵잖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동학공동체는 다양한 유형으로 분화되었고 저마다 의미와 역할이 달랐다. 먼저 영적 생활 공동체였던 접주제와 자율적 사회 운동 조직이었던 포제가 있다. 전자는 인맥에 따라 형성되었으며 후자는 인맥보다는 지역적 관련성을 강조하였다. 조직 내에서는 반상, 남녀노소, 양천, 빈부구분이 없었다. 이재민이 발생하면 도왔고 가난한 자에겐 밥을 주었다. “비록 문벌이 천하고 미미하더라도 두령 될 자격이 있으면 두령이 되는 것이다.”(최시형) 집강소는 한때 뉴라이트 학자들에 의해 허구라는 논란에 휘말리기도 한 기관이다. 교과서에서 폐정개혁안을 빼라는 뉴라이트의 요구에 대해 이날 수업에서는 “역사적 맥락 없이 폐정 개혁안 하나만 보고 있다.”라는 비판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소는 군정과 민정 양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농민군의 개혁 사령부로서 동학농민전쟁기 등장한 최초의 자율적 민중조직이었다. 종교적 자유를 갈망하는 자각 인민이 각 지역을 연계하는 종교 조직을 가동하여 국가권력에 대항하던 자율적 공간으로서 이후 자발적 결사체가 도시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 2006년, 뉴라이트 인사인 유영익 연세대 석좌교수는 계간 <시대정신> 대담에서 현행 역사교과서의 동학농민운동에 관한 서술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동학농민군이 집강소를 통해 실현하려고 했다는 12조 폐정개혁안이 오지영의 1940년 작 <역사소설 동학사>에만 실려있는 '믿을 수 없는 사료'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동학농민운동사를 전공한 원광대 박맹수 교수는 <역사소설 동학사>는 픽션이 아닌 회고록 성격의 글이고, 동학농민운동 당시 이미 27개 조항의 요구안이 있었고 오지영은 12개조로 그것을 재정리한 것이라며 유 교수의 의견을 정면 반박했다. 12조 토지균분 조항에 오지영 개인의 의견이 반영됐을 수 있으나, "12개조 자체가 허구라는 비판은 무리"라는 반론이다. - 연합뉴스 "동학농민군 '12개조 폐정개혁안'은 허구" 논란..", 2006-05-29)

      일제 치하 ‘대안’의 자치공동체: 천도교와 상제교의 경우

      1905년 손병희가 창도한 천도교는 1910년 신도 수 100만의 최대 종교로 성장하였다. 탈권력에서 자치권력으로 전환한 자치공동체로서 3.1운동을 주도하고 1920년대 혁신, 즉 민주화운동을 지향했다. 1924년 김연국은 상제교 본부를 중심으로 계룡산 신도안에서 교인들이 자급자족적인 삶이 가능한 탈정치화된 종교 중심지를 건설하였다. 일제 당국은 천도교의 교주는 왕이고 중앙총부는 정부형태를 모방한 유민구락부(遊民俱樂部. 俱樂部: club의 일본식 음역어)라 비난하였다. 지난 시간에 배웠던 형평운동을 비롯한 모든 형태의 사회운동이 용납되지 않던 시대였다. 식민권력이 볼 때는 모두 독립운동이고 저항이기에 극심하게 탄압하였고 천도교와 상제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가, 자치. 강의가 끝난 후에도 머릿속을 맴도는 두 개의 질문

      종교가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평등을 내세운 종교가 등장하는 것은 조선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1851년 배상제교가 중국에서 일으킨 태평천국의 난은 동학농민운동과 매우 유사한 모습으로 전개되었고, 유럽에서도 평등주의적 공유제를 실현하려는 천년왕국운동이 종교개혁시대에 일어났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이 적어도 역사에서는 진리임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수업이 끝나갈 즈음 국가 ‘밖’의 자치를 추구했던 두 사회를 비교분석하는 표가 눈앞에 펼쳐졌다. 선생님은 북미 인디언 사회와 조선의 토착 종교 공동체. 국가와 권력에 대항하였고 무수한 박해에 시달렸던 19세기의 두 사회를 이야기하며 질문 두 개를 우리에게 던지셨고, 그 질문들은 뇌리에 박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국가는 자치를 파괴하는 존재인가? 국가와 사회의 관계는 무엇인가?


      + 더하기 몇가지 질문들

      숨을 멎게 하는 흥미진진한 강의였습니다^^ 동학, 최시형 그리고 유토피아 대안 공동체와 관련한 추천도서가 궁금합니다!

      - 1) 마테오리치가 천주실의를  펴낸 해가 1603년이면 중국 명 왕조대입니다. 명을 숭상하던 조선이 천주교를 승인하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겠지요? 2) Americad의 마야, 잉카 제국 멸망을 보면, Apa'on 성직자들도 현진의 이교도를 사람이 아닌 동물로 취급하는 사례를 보이는데, 조선에 온 서구 신부들은 어떠했나요?

      - 천도교와 증산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글 : 자원활동가 박유하

    •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1강, 인민 : 신분해방, 여성해방

      2014.1.16 박유하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 근대로의 희망 여정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근대로의 희망 여정] 1강(1/13), 인민: 신분 해방, 여성 해방

      강의 소개 보기 ☞ 클릭


      우리가 한국 근현대사를 배울 때 가장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이다. 

      해방 후 1948년 미군정이 신탁통치를 시작하면서 민주주의가 한국 사회에 이식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신분해방의 물결이 일고 만민평등 사회로의 진입이 시작된 시기는 그보다 훨씬 전인 19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8세기와 19세기는 세계사적으로 신분 해방의 격변이 혁명으로, 민란과 변란으로 요구되던 시대였고 조선 역시 서구나 중국, 일본 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896년에 상하귀천이 없는 만민평등의 주체인 인민을 위한 신문이 창간되었다는 선언은 서재필이 미국의 영향을 받고 쓴 것이 아니라 당대 민중들이 요구하던 내용이었다.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이 지향하는 체제는 독재의 안티테제인 민주주의일 수밖에 없었다.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근대로의 희망 여정>는 이처럼 민족주의를 넘어 민주주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며 인민, 자치, 개인도덕 등의 근대적 가치가 우리 사회의 특수성과 맞물려 어떻게 나타났는지 돌이켜보고자 하는 강좌이다.

      노비 해방의 길
      제임스 팔레라는 서구 학자는 노비가 17세기 조선 인구의 30%를 넘었다는 것을 근거로 조선이 노예제 사회였다고 주장했다. 노비가 노예와 마찬가지로 인신매매가 가능했고 주인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으며 신분이 세습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 정조 시대부터 신분제 해체의 조짐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18세기 후반 노비들이 급격히 감소한 원인은 일보다는 신분 차별 자체에 고통을 느끼는 노비의 자각이었다. 부를 쌓은 이들은 세금을 내는 양인이 되었고 그렇지 못한 이들도 수없이 도망을 쳤다. 결국 1801년 조선 정부는 중앙관청의 공노비 66,076명을 해방시킨다. 현실을 인정하고 세금을 확보하자는 입장이 폐단만 제거하자는 보수적 입장을 누른 것이다.

      1894년은 가히 노비해방의 해라 부를만하다. 동학농민운동이라는 아래로부터의 개혁과 갑오개혁이라는 위로부터의 개혁이 일어난 해이기 때문이다.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은 노비문서를 불태워 노비를 해방하자는 강력한 주장이었다. 농민군 내 천민부대의 공로를 인정받아 지위가 점점 올라갔으며 노비 출신의 지도자가 등장하기도 했다. 갑오개혁에서는 공식적으로 공사노비의 제도를 모두 없애고 인신의 판매를 금하였다. 이후 독립협회가 인권을 강조하며 불법적 노비 매매 등 노비제 잔재를 청산하는 데에 앞장섰다. 양반들의 반발과 저항이 지속되었으나 역사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여성 해방의 길
      시작은 가정부인이자 종교인, 사회인인 활인(活人)으로서의 여성관을 세운 동학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의 폐정개혁안은 과부의 재가 허용을 요구하였고 이는 갑오개혁에 반영되었다. 이후 조선의 여성해방운동은 남성 지식인 및 교육기관에 의한 계몽과 여성의 정치적 진출이라는 두 갈래 길을 걷는다. 독립협회의 여성해방론은 조혼, 축첩, 과부재가금지 등 전근대적인 관습 폐지를 주장하고 자유연애결혼, 부부 동등권 등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일본에서 들어온 현모양처론의 영향으로 여성 사학이 전국에 170여개 설립되었다. 또한 여성은 동학농민운동 전투에 참여하였고 일부는 지도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 단체 참여도 늘어났다. 국채보상운동을 여성들이 주도하였고 이후 의병운동, 3.1운동 등에서도 여성의 참여는 이어졌다.

      동시대 서양, 중국과 일본과 비교했을 때에는 아쉬운 점이 여럿 보인다. 애초에 여성을 계몽하던 주체는 박영효 등 남성 지식인이었고 여성교육도 사회인이 아닌 가정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데에 그쳤다. 그리고 여성들이 남성의 영역이었던 곳으로 정치적 진출을 했던 경우가 많은 대신 여성에 의한 여권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지는 못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백정 해방의 길
      조선의 백정은 가축 도살 및 판매자, 유기 제조인, 광대, 기생 등 특정 직업 종사자로서 천민으로의 차별 대우가 극심하였다. 무어 목사의 회고담에서는 천민 해방이 제도적으로 이루어진 1894년의 풍경이 나온다. 그 전에는 백정들이 패랭이를 쓰고 다녀야 해서 한눈에 신분이 드러났었는데 갓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령으로 기뻐했던 흑인들’이라는 표현이 참으로 적절한 비유라고 여겨진다. 이후 신분제 잔재를 없애는 과정에서 백정에 대한 차별 철폐를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었다. 조직과 와해를 거듭하던 백정들이 조직한 자발적 결사체가 바로 형평사였다.

      발단은 백정 자녀의 학교입학 거부 문제였다. 계급타파, 모욕적 칭호 폐지, 교육 권장, 상호 친목 등을 추구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일어나던 일본 특수부락민 수평운동의 영향을 받았고 그와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선 백정에 대한 차별대우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반면 일본의 부락민의 차별은 지금도 여전히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이후 형평사는 계급 해방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운동과 연계해 발전해나갔으나 1930년대 들어 극악해진 일제의 탄압 아래 다른 사회운동단체와 함께 해체되고 말았다.

      민주주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역사: 우리 역사에서 희망을 찾는 올바른 방법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평등함"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헌장 제3조다. 신분해방운동의 최종적인 지향점을 이토록 간단명료하게 서술하기도 힘들 것이다. 노비와 백정, 여성이 차별과 배제의 대상에서 평등의 주체로 거듭나기까지 1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제도 개혁과 자발적 결사체를 통한 운동이 맞물려 이루어낸 결과였다. 전근대와 근대는 칼로 자르듯 나눌 수 있는 개념이 아니고 민주주의와 평등은 외부에서 주어진다고 해서 이식되는 가치가 아니다. 일제와 독재정권 아래에서 억압당하고 후퇴하였다 해도 민주주의에 대한 민중의 열망에는 깊은 뿌리가 있다. 이제 첫 강을 들었을 뿐이지만 외세 개입이 없었어도 자발적인 근대화가 가능했을 거라는 생각에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긍정적 역사관’을 갖는 일은 일제 식민통치와 독재정권을 미화하는 이들에게 동조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에 대한 근거는 앞으로 이 강좌를 들으며 하나하나 배워가고 싶다.

      글 : 자원활동가 박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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