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정보
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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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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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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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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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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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덕과 정치는 분리된 것일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늘 정치와 함께 하던 도덕은 왜 근대에 이르러 분리된 것일까?
정말 마키아벨리는 정치가들에게 사악한 정치를 권장하며
도덕을 버리라고 말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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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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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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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주권 국가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홉스의 <리바이어던>
근대에 본격적으로 탄생한 주권국가의 개념
그렇다면 근대 주권 국가 어떻게 생겨났으며, 이 근대 주권국가로 표현되는 정치공동체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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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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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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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재산의 사적 소유는 정당화됐을까? 로크의 <통치론>
처음에는 누구도 소유하지 않았던 공적 자산인 자연이 어떻게 개인의 사적 재산으로 변모할 수 있는 것일까?
재산의 소유는 노동이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사회적 동의가 만드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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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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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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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사회는 어떻게 불평등해졌을까? 루소 <사회불평등의 기원>
애초에 모든 사람이 불평등하게 태어나지는 않았을 터
그렇다면 인간은 왜 그리고 어떻게 서로를 차별하게 된 것일까?
정말 불평등은 인간의 허영과 시기가 만들어 낸 비극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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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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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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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계몽에 도덕이 필요할까?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와 <도덕형이상학의 기초 놓기>
근대 프로젝트의 핵심, ‘계몽‘
계몽은 이제 잊혀진 프로젝트일까? 그렇다면 왜 푸코는 다시 계몽을 말했을까? 왜 하버마스는 계몽을 ‘끝나지 않은 근대의 프로젝트’라 이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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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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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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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개인은 진정 주체적인 것일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근대의 계몽 프로젝트의 핵심에 서 있는 ‘개인’
그렇다면 왜 니체는 근대 개인의 주체성을 의심했던 것일까?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한 세상 앞에 당당히 맞서는 초인을 내세운 니체가 허무주의자인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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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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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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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합리성은 합리적인가? 마르크스의 <경제철학수고>
근대의 합리성이 만들어 낸 가장 큰 괴물 자본주의.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내세운 합리성은 진정 합리적인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합리적인 노동은 어떻게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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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9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7강, 자본주의 합리성은 진정 합리적인가? - 마르크스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7강(12/23), 자본주의 합리성은 진정 합리적인가? -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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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가 많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종강 11일 만에 올리는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근대편’의 마지막 강의 후기입니다.
특별히 마지막 강의 자료는 김만권 선생님께서 수강생들의 개인 이메일 계정을 통해 공유해주셨습니다. 제 계정으로는 베버 파트만 메일이 와있긴 하던데 다른 분들은 마르크스 ppt까지 다 받으신 거죠? 오늘은 자세한 내용보다는 수업 진행과 소감 위주로 간략하게 후기를 마무리 짓겠습니다.
강의의 마지막 주인공은 칼 마르크스였습니다. 지난 보강에서 마르크스 공부를 위해 베버를 다루었었고요. 강의 초반부에는 보강을 함께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베버와 마르크스를 다시 한 번 비교해보았습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둘은 근대에 벌어지고 있는 비극의 주범으로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지목하고 어떻게 이 운명을 극복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했지만 제시한 대응 방이 달랐죠. 이에 대해서는 김만권 선생님께서 결론을 내리며 더 명확하게 설명해주시니 저도 후기를 마무리 지으며 자세히 적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계속 베버처럼 멋있게 늙어야 한다고 해서 재밌었어요. 베버는 실제로 젊은 시절의 모습보다 나이 든 모습이 중후하고 근엄해 보이죠. 반면 마르크스는 젊은 시절의 모습이 정말 꽃미남이 따로 없어서 여성 수강생 분들의 마음을 흔들었으나 중년의 모습은...ㅎ 제 생각엔 목적과 수단의 일치를 통해 개개인의 진정한 합리성을 구축할 것을 주장한 베버는 자신의 목적과 수단을 합리화해서 편한 인생을 살아서 외모가 멋있어진 반면,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적 합리성을 위해 온갖 고생을 해서 외모가 쇠퇴하지 않았을까 해요...ㅎㅎ 물론 농담. ^^;
그러고 나서 김만권 선생님께서 마르크스라는 인물에 대해, 그의 생애에 대해 말씀해주셨어요. 마르크스의 집안과 청년시절의 이야기부터 각국을 떠돌다 런던에 정착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마르크스의 삶이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지는 듯 했습니다.
학자로서 마르크스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바로 경제학자로서의 마르크스와 철학자로서의 마르크스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 두 마르크스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룬트 리세>라는 작품을 읽으면 그 오해가 풀린다고 하네요.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는 책은 아닌데 김만권 선생님께서는 수강생들에게 설명해주셨답니다. 요약하자면 ‘인간 소외(마르크스 철학) 때문에 구조 변동(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이 시작 된다’ 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의 <1884년 경제-철학수고>에 담긴 내용을 배웠습니다. 마르크스는 “국민경제학은 사적소유라는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렇지만 국민경제학은 우리에게 그 사실을 설명하지 않는다.”며 고전 경제학파를 비판했습니다. 마르크스는 경제모델들의 전제가 되는 사적소유가 애초에 왜 그런 것인지조차 고전 경제학자들은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실제로 극단적인 사적소유까지 인정하는 자본주의는 인간의 노동을 왜곡합니다. 원래 노동은 인간이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가장 창조적일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인데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을 하는 이와 이윤을 얻는 이가 다릅니다. 따라서 노동자는 이윤의 부스러기만 가져가고, 그 부스러기를 두고 또 서로가 경쟁함으로써 더 가난하고 피폐해집니다. 마르크스는 이를 ‘노동 소외’라고 명하고 구체적으로 네 가지 현상을 지적합니다. 후기에서는 생략. ^^
이런 현실을 타파하려면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붕괴시키고 그에 대항적인 합리성을 지닌 사회체제로 전환해야 합니다. 마르크스는 그 변화의 주체가 자본주의에서 가장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들이며, 이 때 이들이 갖추어야 할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합리성이 프롤레타리아 합리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보편적 역사 발전 법칙에 따라 자본의 축적이 극대화되면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계급의식’의 부재 때문입니다. 프롤레타리아들이 스스로 자본주의의 피해 당사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계급의식에 따라 사고하지 못하는 것이죠. 따라서 마르크스는 정말 이 세계가 변화하려면 노동자들이 정치 교육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합리성으로 무장하고 하나의 계급으로 확실히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2014년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실험은 시작도 전에 끝나버렸고, 오늘날 우리는 단순히 계급을 두 부류로 나누기엔 너무도 분화된 사회 속에서 각자의 가치를 가진 채 살아갑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자본가들의 헤게모니에 장악된 채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계급을 배반하는 의식과 행위에 동조하죠.
오늘 강의의 결론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베버와 마르크스입니다. 두 사상가 모두 자본주의라는 운명에 저항하고자 했으나 한 사람은 자본주의라는 주어진 운명 내에서 생각했고 한 사람은 그 운명 자체를 깨부수고자 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운명에 맞서는 일을 개인의 책임으로 넘겼기 때문에 개개인을 통합할 수 있는 더 강력한 지도자,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생각해냈다면 한 사람은 노동자들이 하나의 민주적 집단으로서 프롤레타리아적 합리성을 갖추길 바랐습니다. 이러한 철학의 차이는 실제로 두 인물의 삶에서도 차이를 낳았습니다. 한 사람은 의회정치가로서의 삶을 살았고, 한 사람은 스스로 인터내셔널을 창설했죠.
실제로 마르크스보다 조금 더 늦게 태어나고 죽은 베버는 ‘마르크스가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독단적이며 책임질 수 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마르크스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후대에 칼 뢰비트는 둘을 비교한 자신의 저서에서 ‘베버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자본주의의 병폐를 진단만 할 수 있었지만, 마르크스는 현실에 존재하는 모순을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전복시킬 수 있다는 신념하에 하나의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이렇게 마지막 강의 후기까지 쓰고 나니 비로소 종강이 실감납니다. 종강 당일에는 더 이상 강의가 없다는 생각에 슬프더니 해가 바뀌고 후기를 쓰면서는 개운한 기분도 드네요. 이 강의에 자원활동가로 참여할 수 있었던 건 정말 굉장한 행운이었어요.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또 뵙겠습니다. ^^
글: 자원활동가 김슬기라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보강, 자본주의 합리성은 진정 합리적인가? - 베버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보강(12/20), 자본주의 합리성은 진정 합리적인가? - 베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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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스 베버 (Max Weber 1864.4.21.-1920.6.14.)
느티나무에서 이례적으로 강의 보충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온갖 연말 모임을 뒤로 한, 또는 게으름을 툭툭 털고 집에서 나선 열정적인 수강생들이 스무 명 가까이 모였어요. 게다가 보강과 불금이 주는 특별한 느낌 덕인지 박주련 선생님께서는 뜨끈뜨근한 붕어빵을 두 봉지 가득, 구문숙 선생님께서는 샛노란 군고구마를 한 아름 간식으로 들고 오셨답니다. 절로 마음이 훈훈해지는 보강이 아닐 수 없지요?
오늘의 사상가는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입니다. 7강으로 준비되어있는 칼 마르크스를 공부하기 전에 꼭 비교하며 공부해야 할 사상가라서 보강으로라도 베버를 준비하셨다는 김만권 선생님의 말씀. 저는 보강이니 만큼 간단하게 후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으나 그 게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 슬픔.
마르크스와 베버는 공통적으로 둘 다 자본주의가 낳은 근대의 비극을 지적했던 사상가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합리성 안에 모순이 있다면 그 걸 깨고 새로운 합리성을 만들어서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반면, 베버는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철장(iron cage)’에 비유하며 결코 우리가 떨쳐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1.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그리고 ‘섹터’
아마 많은 분들이 이 책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김만권 선생님이 강조하신 것은 책의 내용보다 베버가 책을 썼던 이유입니다. 베버의 질문은 ‘왜 유독 서구 사회에서만 근대적 자본주의가 나타났는가?’, ‘어떻게 무한한 이윤추구 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었는가?’입니다. 정리하자면 왜 굳이 서구에서 끝없는 이윤추구가 인간의 덕인 양 하는 자본주의가 탄생할 수 있었냐는 것이죠.
책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청교도의 구원예정설로 인해 청교도인들은 열심히 일하면서도 검소한 삶을 꾸리며 부를 축적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특히 신을 위해 행하는 지속적인 노동과 부의 추구는 하나의 소명으로서도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렇게 근대적 자본주의는 서구에서 도덕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아직까지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베버는 이윤추구 행위 자체는 사회적 병폐를 만들어내지도 않고 자본주의의 특징도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사실 이윤추구는 언제나 인간의 역사와 함께했죠. 자본주의가 문제가 되는 건 그 이윤추구가 무절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절제한 이윤추구는 바로 그 프로테스탄트 윤리 정신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베버는 지적합니다.
자본주의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는 종교적 공동체인 섹트가 있었습니다. 섹트는 사람들이 모여서 신앙생활을 하는 중심적 터전이었고, 개인은 섹트로써 자신의 신용을 대외적으로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고도화, 개인주의, 도시화 등으로 인해 섹트는 급속도로 없어졌습니다. 자본주의가 자기 스스로를 제어하던 윤리적 터전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종교적 윤리로 발전한 자본주의는 섹트의 쇠퇴와 함께 계산만이 남으며 급속히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베버는 종교윤리가 상실된 자본주의는 끝없는 타락의 길로 빠질 것이며 “영혼 없는 전문가”를 양산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2. 세계의 합리화
베버는 근대 사회가 무엇보다도 탈주술화로 특징지어진다고 말했습니다. 근대의 탈주술화란 근대세계가 이성을 초월하여 중세를 지배하던 신의 원리에서 벗어나 이성의 힘으로 합리화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베버가 볼 때 근대세계의 합리화는 두 가지 차원에서 진행되었는데 첫째가 가치의 영역들이 구분된 것, 둘째가 자본주의의 발전과 맞물려 사회가 관료적·제도적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첫째, 가치 영역의 구분이란 모든 가치를 통합하던 신의 권위가 사라지고 과학, 도덕, 법, 종교, 예술 등이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가치를 추구하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베버는 이를 문화적 분화(cultural differentiation)라고 말하며 더 이상 이러한 가치들은 화해 불가능하므로 근대는 가치다원주의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둘째, 탈주술화가 낳은 합리화는 자본주의의 합리화를 낳았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이윤 극대화를 하는 데에 정확한 계산을 적용하면서 조직을 체계화시키고 노동 효율을 극대화시킨 것을 자본주의적 합리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 국가의 행정 조직에도 파고들었고, 이내 사회 곳곳으로 침투하였습니다.
더불어 베버는 이러한 극단적 합리화가 오히려 비인간화를 초래하면서 운명적으로 비합리성을 길러낸다고 말합니다. 이윤추구가 목적이 되고, 이를 위해 이성을 도구화시키는 삶의 방식이 오히려 비합리적이라는 뜻입니다.
3. 목적과 수단이 일치하는 합리성
베버는 이미 사회의 가치가 너무 분화된 버린 탓에 자본주의적 합리성에 물든 근대를 돌이킬 수 없을 것이며 이를 우리의 운명, 즉 빠져나올 수 없는 ‘철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자유를 박탈당한 채 절망하고 있자는 뜻이 아닙니다. 베버가 볼 때 철장에 갇힌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는 것이 자유를 되찾는 길이었습니다. 곧, 우리의 자유는 철장을 벗어나려는 비현실적인 소망을 버리고 합리적인 목적과 이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수단을 찾을 때 얻어진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베버는 개인들이 자신이 설정한 목적과 수단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는 책임윤리를 말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초래한 비극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개인이 더 강력한 합리성으로 무장하여 자유를 찾으라고 말한 베버.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책임을 구조나 집단이 아닌 개인에게 돌림으로써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베버는 개인이 집단에게 책임을 전가해버릴 위험성을 인지했기 때문에 자유를 쟁취할 합리성의 주체로서 개인을 지목했던 것입니다.
4. 카리스마적 지도자와 바이마르 헌법 제 48조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베버는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베버의 카리스마적 지도자 개념도 상당 부분 니체의 위버멘쉬와 맞닿아 있죠,
가치가 분화된 사회에서 각각 다른 개인들을 통합하여 국가가 지향할 점을 결단하고 이끌어갈 수 있는 이가 카리스마적 지도자입니다. 베버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전통주의, 공식적인 법적-합리적 권위와 관료적 규칙들과 단절할 수 있는 상징적 변화 및 제도와 법을 만들 수 있는 초일상적인(extraordinary) 힘’으로 정의합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그냥 어디선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의회 정치라는 시스템에서 길러진다는 것이 베버의 생각입니다. 각각 신념이 다른 수많은 군소정당들을 적절하게 규합하고 그 속에서 자기 권력을 쟁취해내어 지도자가 된 이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갖추고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요.
이렇게 보면 베버가 바이마르 헌법 초안 위원회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바이마르 헌법 제48조를 매우 강조했던 것도 이해가 됩니다. 이 문제의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통령은 국가의 평화를 위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고 공공의 안전과 질서를 위해 필요한 수단을 동원할 수 있었다.”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이 조항을 악용해 권력을 잡아 논란이 되었고, 우리나라 또한 이 조항을 따와서 문제가 되었었죠.
김만권 선생님께서 영화 ‘변호인’을 적극 추천해주셔서 저도 어젯밤에 보고 왔습니다. 영화가 끝나고도 여운이 한참 동안 가시질 않았었는데 송강호의 외침이 특히 머릿속을 맴도네요. ‘국가란 국민입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독재자로 변질되었던 역사, 독재자의 딸이 그 자신 역시 독재자가 되어 자기의 입으로 약속했던 국민 행복을 가장 거스르고 있는 오늘을 생각하니 베버의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대한 의심이 생깁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국가가 국민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괜찮은 문제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글: 자원활동가 김슬기라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6강, 근대의 개인은 진정 주체적인가? - 니체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6강(12/16) 근대의 개인은 진정 주체적인가? -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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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강, 한 강 지나오다 보니 벌써 여섯 번째 시간이네요. 김만권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수록 정치사상을 더 넓고, 깊게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어렵고 멀게만 느꼈던 정치철학을 선생님께서 쉽고 재밌게 가르쳐주셔서 흥미가 붙은 거겠죠. 김만권 선생님은 느티나무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기강사라고 불리시는데, 저도 이제 선생님의 그 타이틀 앞에 겸허히 고개를 숙이고 박수를 보내게 돼요.
매 수업의 첫머리에는 지난 시간의 내용을 잠깐 짚어봅니다. 원래는 수강생들이 써냈던 질문을 선생님께서 답변해주시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오늘은 근래 큰 화제가 되고 있는 ‘안녕들 하십니까’로 칸트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들의 안녕을 묻는 대자보 행렬들이 바로 칸트가 말했던 ‘이성의 공적 사용’이죠. 덕분에 최근 들어 깊은 회의감에 빠져 있던 선생님께서는 한 주 동안 즐거우셨다고 합니다.^^
1.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선생님께서는 니체를 기분 나쁜 사람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너네 바보지? 생각도 없지? 내가 하는 말도 못 알아듣겠지?’라고 말하는 사람이라고요. 실제로 니체는 천재였습니다. 24살에 이미 교수로 채용되었고, ‘아포리아’라고 하는 새로운 글쓰기의 형태와 ‘계보학’이라는 새로운 연구방법론을 개발하였습니다. 그것도 대충 만든 게 아니어서 ‘아포리아’는 누구든 한 번 쯤은 시도해보고 싶게 하는 매력적인 글쓰기이고, ‘계보학’ 역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진리에 대해 다시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뛰어난 방법론이라 합니다.
이쯤 되면 우리 같은 범인들은 열등감과 질투가 샘솟지 않나요? 게다가 저는 니체가 교수가 되었다는 바로 그 스물 네 살의 마지막 한 달을 보내고 있거든요. ‘니체는 벌써 이 때 교수를 하고 있었구나... 난 뭐하고 산 걸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요. 그러나 천재는 불행하다고 하던가요? 니체는 평생을 편두통과 안질환에 시달렸고, 매독에 걸리기도 하고, 심지어 마지막 10년 동안엔 심각한 정신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언제나 유명해지기를 바랐으나 딱 죽는 그 날부터 유명해졌다죠. 생전에는 학계로부터 무시당하고, 종교계와 도덕주의자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물론 니체는 이후 철학계와 문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지금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서 평가받고 있습니다.
2. 자신을 망각한 근대의 개인
우리는 원자의, 원자적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다. (...) 모든 인간질서의 목적은 인간의 생각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삶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반시대적 고찰>
계몽, 이성, 자율성으로 상징되는 근대를 살았던 사상가들은 두 가지 전제를 놓고 ‘개인’을 가정합니다. 첫째는 모든 개인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 결정에 따라 행위하고 책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외부의 제약 없이 자유롭다면 개인은 창조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자아를 실현하고 궁극적으로 사회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것이고요. 그러나 니체는 그 가정을 반박합니다.
니체는 어릴 적부터 ‘개인이 진정 주체적인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0대에 벌써 자서전을 몇 편씩 썼던 니체는 ‘나는 내가 어떻게 내가 되었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하기도 했고요. 그런 니체가 확신을 가진 하나가 있다면 바로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삶을 결정하는 활력 있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근대의 인간들은 공동체와의 깊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던 고대인들과 달리 파편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기독교를 필두로 모든 사회적 구조나 제도들이 진리라는 이름 아래 개인들이 진정할 삶을 영위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절망적인 근대의 상황은 물론, 그 상황으로 인해 자기 자신이 되는 법을 자기가 잊어버렸다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3. 기독교 비판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남아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였다. 그러나 그의 그림자는 여전히 어둠 속에 드리워져 있다. -<즐거운 학문>
개신교 목사의 아들이었던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야 맙니다. 앞서 말했듯이 니체는 기독교가 개인이 진정한 삶을 깨닫는 것을 막고 근대를 혼탁하게 하는 일등공신이라 생각했습니다. 기독교는 육체는 영혼보다, 본능과 열정은 이성과 합리성보다 열등한 것으로 여기도록 가르칩니다. 니체가 볼 때 인간에는 디오니소스적인 면과 플라톤적인 면이 있어 이것이 조화롭게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데 기독교는 오로지 플라톤적인 면만을 강조하였던 것이죠.
또한 신의 진리라는 이름 아래 기독교는 이 지상의 삶이 피상적이고 가공적이고 환상적이며 오류로 가득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오늘은 찰나일 뿐이고 현실 세계는 너무 사소하니 영원의 세계인 내세를 중시해야 한다고요. 이러한 세계관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을 열등한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인간 스스로 지상의 삶을 가치 없는 것이라고 여기게 하는 노예의 도덕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합니다.
4. 너 자신이 되어라
비록 우리의 미래가 희망을 위한 어떤 근거를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확연히 이곳에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가 우리의 법과 기준을 따라 살아가는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어야 한다. (...) 우리는 우리의 존재에 대하여 우리 자신에게 책임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반시대적 고찰>
근대의 개인들은 기독교와 개인을 기만하는 각종 사회적 장치들에 의해 짜여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니체는 지금 당신이 행하고, 생각하고, 바라는 것 모두가 당신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린 모두 속고 있는 것이고, 세상이 시킨 대로 행하고, 생각하고, 바라고 있을 뿐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정신을 차리고 진정한 나를 찾아 ‘다른 시간이 아닌 오늘을 살라’는 것이 니체의 주장입니다. 오히려 삶의 유한성을 원동력으로 삼고 자신만의 도덕, 자신만의 정의, 자신만의 삶의 기준을 찾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죠. '너 자신이 되어라!' 음, 니체가 말하는 삶의 태도가 자기계발서의 한 구절 같은 것은 제 기분 탓인가요...^^;
삶은 위대한 중요성을 가진 드물고 고립된 순간들과 수없이 많은 쉼표(자신의 삶과 사회에 책임 없이 살아가려는 수많은 대중)로 이루어진다. (...) 사랑, 봄, 모든 아름다운 멜로디, 산, 달, 바다, 이 모든 것들이 한 번은 우리에게 말을 건다. 한 번이라도 자신들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면 말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전혀 그런 순간을 갖지 못하는데, 대부분의 이들에게 실제 삶이란 심포니에서 쉼표이고 막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러나 니체는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죠. 오로지 소수의 인간만이 진정한 삶을 깨달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에 책임을 지고, 자신만의 기준으로 삶을 실천하는 극소수의 천재들만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교향곡에서 의미 있는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저는 극소수의 천재는 아닌 것 같아요, 니체가 저를 봤다면 '야, 이 쉼표야!'라고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저와 같이 평범한 대중에 속해있다고 생각되시는 분들, 기분 나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결국 니체는 자기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라고 했잖아요. 저는 니체에게 이렇게 대답해주겠습니다. '쉼표 없이 교향곡이 가능할 거 같아?'
5. 초인(Übermensch)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 말로 저기 저 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는 도덕을 지배자들이 민중, 피지배자를 통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보고,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은 이상적인 사람을 '초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초인은 첫째로 기존의 형이상학을 믿지 않으며, 둘째로 인간으로서 삶의 몰락을 두려워하지 않고, 셋째로 ‘너희는 마땅히 해야 한다’와 맞서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맞서기 위해서는 정신이 3단계를 통해 변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니체는 이를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달려야 하는 낙타(1단계), 왜 사막을 힘들게 가야하는지에 의문을 품고 자신의 자유를 쟁취한 사자(2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순진무구한 놀이하는 어린 아이(3단계)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니체는 이러한 초인의 모습을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차라투스트라는 10년 동안 자신의 기준을 찾기 위해 수련한 뒤 마침내 사회의 형이상학을 거부하는 선지자가 되어 ‘나 너희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고 기존의 행복, 이성, 덕, 정의, 연민에 대한 경멸을 연설합니다. 대중들은 차라투스트라를 비웃지만 그는 초인답게, 굴하지 않고 자신을 비웃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다시 자신의 깨달음을 이야기합니다.
니체는 세상이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대중들이 차라투스트라를 비웃어댔다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 대중과 그 대중들이 구성하고 있는 세계는 늘 그대로 반복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이 되는 법을 찾은 소수의 인간에 속한다면, 우리는 '나'의 가치와 실제로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 사이에 늘 존재하는 괴리로부터 좌절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을 긍정하고 다시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 것도 니체였습니다. 개인이 진정한 주체가 되고자 한다면 엄청난 용기와 도전으로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 도전과 용기를 희생이라 생각하지 말고, 그 자체로서 삶의 의미로 삼으라는 것이 니체의 가르침입니다.
니체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생각에 휩싸여 까만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글 : 자원활동가 김슬기라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5강, 계몽이란 무엇인가? 칸트, 푸코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5강(12/09) 계몽이란 무엇인가? 칸트, 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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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마누엘 칸트(1724~1804)
내가 여러 차례 또 오랜 시간 성찰하면 할수록 더욱 새롭고 더욱 높아지는 경탄과 경외심으로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이 두가지란, 내 머리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 안에 있는 도덕 법칙이다. - 칸트의 묘비명에 새겨진 말
늦은 시간까지 겨울비가 그치지 않았던 월요일 저녁. 느티나무 강의실은 칸트와 푸코의 사상에 대해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로 가득찼습니다. 김만권 선생님은 칸트의 묘비명에 새겨져 있다는 유명한 문장으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칸트는 모든 도덕을 나의 내부로부터 비롯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칸트 도덕의 특이성을 ‘자기입법’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도덕원칙은 자기 자신이 세운다는 것입니다. 칸트의 도덕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헤겔이 강조하는 인륜과 비슷한) 도덕과 다릅니다. 칸트가 말하는 도덕은 영어로 morals 로 표현되는데, 이는 개인이 세운 도덕원칙에 따른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헤겔과 대비하여 형이상학적 도덕주의자로 불리기도 합니다.
칸트의 계몽에 관한 신념은 당대에 대한 비판적 태도로 이해되어 푸코를 비롯한 일부 후기 구조주의 철학과 데리다 등에 스며들었습니다. 프랑스 지식인 전통으로 이어진 것이지요. 또한, 도덕에 대한 그의 신념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영미계열의 롤스주의자들이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전해듣기만 해도, 당대 철학에 미친 칸트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느껴질 정도입니다.
<임마누엘 칸트 / 출처: wikipedia>
2.계몽이란 무엇인가?(1784년)
계몽주의를 어떤 학문적인 조류보다는 정치적인 철학 사조로 하나의 사회운동이라 이해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성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운동입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발간하고 5년이 지나, 프랑스혁명이 일어납니다. 칸트는 자신이 진정으로 믿었던 계몽의 힘이 혁명으로 나타난 것에 만족했을까요? 그 답은 ‘아니다.’입니다. 칸트가 말하는 계몽이란 스스로 타자에게 이성적 숙고와 판단을 대신 부탁하는 미성숙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타자의 도움 없이 자기 자신이 이해한 것들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을 미성숙하다고 말합니다. 만약 이런 미성숙의 원인이 이해의 결핍이 아니라, 타자의 안내 없이 그것을 사용할 해결책과 용기의 결핍에서 온 것이라면, 미성숙은 자기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미성숙한 채로 남아있는 것은 게으름과 용기부족 때문입니다. 칸트는 이렇게 주문합니다.
Sapere aude!! (Dare to be wise!!)
너 스스로 이해한 것을 사용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
흥미롭게도, 칸트는 미성숙을 해결하기 위한 계몽 - 정신 성숙은 집단적으로 진행될 때 실현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성의 사적사용과 구별되는 이성의 공적사용을 강조하고 더불어 이를 위한 토대로서 자유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이성의 공적 사용이란, 한 사람이 지식인으로서 독자 대중 앞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인간이 이성을 위해 이성을 사용할 때, 이런 이성의 사용은 자유롭고 공적인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성의 보편적이고, 자유로운, 공적 사용이 겹쳐질 때 계몽이 존재합니다. 이 조건은 집단적 계몽에 필요한 조건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반대로 왜 계몽이 집단적으로 오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이성의 사용은 나를 위해서만 쓰는 것이 아니고, 타인과의 공존을 위해서 사용하는 이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이성의 본질은 도덕적 측면에 있다고 강조하며, 상호이해, 의사소통을 위한 이성을 제시했던 하버마스의 도덕적 이성과 상통하는 듯합니다. 효율을 따지고, 자기 이익을 계산하는 도구적 이성과는 다른 것이지요. ‘과감하게 도덕적이 되어라. 남과 공존할 수 있는 길이고, 공동체 안에서 살 수 있는 길이다 싶으면 과감하게 행동하라.’라고 외치는 칸트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기존의 계몽은 과학화 내지 계산에 치중했다면, 칸트는 도덕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성의 공적사용은 현실에서 어떻게 드러날까요?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공적사안에 대해서 지식인들이 글을 쓸 것을 주문합니다. 왜, 글쓰기일까요? 글쓰기가 자신의 직책을 떠나 공공사에 대해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또, 글이 공개되면 그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서 투쟁하게 된다. 이러한 글쓰기는 논의, 토론의 객관적인 기초가 된다. 따라서, 법과 지도자의 역할로서 이성의 공적사용이 항상 자유롭도록 노력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사상의 자유와 더불어 출판의 자유 모두를 보장해주는 것이지요.
실제로 공중에게 자유가 허용된다면 계몽은 거의 확실하게 이루어질 수 잇다. 거대한 대중의 지도자로 선출된 자들내에서도 그들 전체를 위해 사고하는 몇몇 사람들이 항상 있다. 미성숙의 굴레를 한번에 벗어버린 지도자들은 개인의 가치에 대해 합리적으로 존중하는 정신과 모든 인간이 그들 스스로 생각할 의무에 대해 존중하는 정신을 퍼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3. 칸트의 문제점?
칸트는 어느 시기에 이르면 미성숙에서 벗어난 계몽된 지도자가 나올 것이고, 그 지도자가 합리성이 지배하는 권력을 구축해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지식인들이 해야할 일은 묵묵히 세상의 잘못된 일을 글을 쓰며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출판의 자유, 혹은 시민의 자유가 제한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칸트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하면, 오히려 떠드는 이가 없다.’ ‘억압되어야 자유의 소중함을 안다’는 식의 논리를 폅니다. 어둠의 시대의 자유는 더 빛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에게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시민적 자유가 주어졌을 때, 때로는 이런 자유가 인간이 생각하는 일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의 자유가 넘쳐날 때, 오히려 시민은 공공사에 무관심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토크빌의 지적과 유사합니다. 생각하는 일에 대한 억압이 강할수록 인간은 더욱더 생각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키웁니다.
칸트의 ‘문제점’이라고까지 말하는데 무리가 있겠습니다만, 칸트는 혁명으로는 계몽을 달성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공중은 계몽을 아주 서서히 달성할 수 잇을 뿐이고, 혁명은 생각하는 것에 있어 진정한 개혁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즉, 칸트는 계몽이 정신의 점진적 성숙이지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혁명이 할 수 있는 일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던 억압적인 권력을 대체하는 새로운 편견의 등장이며 새로운 속박일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칸트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회의 모든 문제는 대중이 생각하지 않을 때 생겨납니다. 진정으로 사회를 바꾸고자 할 때, 우리가 해야할 첫 번째 일은 대중이 생각하도록 만드는 일이며, 계몽이란 생각하는 대중을 형성하는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4. 푸코가 말하는 계몽이란?
칸트는 계몽을 인간성이 어떠한 권위에도 복종하지 않고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게 될 순간으로 묘사합니다. 바로, 비판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무엇을 알 수 있는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무엇을 바라야 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이성을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을 정의해주는 것이 비판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정당하지 않은 이성의 사용은 허상을 따라 교조주의와 타율성을 불러일으킵니다. 반면 이성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것은 이성의 원리 내에서 이성의 정당한 사용이 분명하게 정의될 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비판은 계몽 속에서 성숙된 이성의 안내서이다. 뒤집어 말하면, 계몽이란 비판의 시대이다.
이러한 비판은 파괴를 위한 비판이 아니라, 현재 우리를 위해 존재합니다. 푸코에 따르면, 계몽은 어떤 교조적 요소에 충실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끝없이 비판하려는 철학적 에토스를 지속적으로 재활성화하는 일이 계몽이라고 주장합니다. 계몽의 관심은 어제도 미래도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현재에 있다는 것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당대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끊임없이 견지하라는 뜻이겠지요. 나아가, 잘못된 지식이 생산하는 거짓된 권력을 비판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계보학을 통해 ‘유럽중심적인 사고’와 그 배후의 권력구조를 철저히 비판했던 그의 생애 연관이 깊습니다.
푸코는 우리가 미성숙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를 살고 있다면, 우리 스스로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결여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성숙한 시대는 동시대를 향해 질문하지 않는 우리 자신들의 책임입니다. 후기 구조주의자로 평가되는 푸코가 왜 비판을 강조했을까요? 진정한 저항의 가능성은 인간이 현재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지 않는 한 생겨날 수 없다는데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무비판적 태도가 구조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없앨 뿐 아니라 때로는 억압조차 자율성이라 믿게 만든다고 우려했던 것은 아닐까요? 푸코는 우리가 진정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갖는 일에서부터 시작하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글 : 자원활동가 이난단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4강, 인간 사회는 왜 불평등해졌을까? 루소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4강(12/02) 인간의 사회는 어떻게 불평등해졌을까? 루소 <사회불평등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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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3강, 어떻게 재산의 사적 소유는 정당화됐을까? 로크의 <통치론>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3강(11/25) 어떻게 재산의 사적 소유는 정당화됐을까? 로크의 <통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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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아카데미느티나무 수강생 여러분~
고전으로 이해하는 근대정치사상 세 번째 강의 후기를 맡은 이나단입니다. 김만권 선생님께서는 로크의 저작 <통치론>을 설명해주시면서 강의를 열었습니다. <통치론>에는 시민 저항권과 더불어 또 하나의 과격한 사상을 담겨 있다고 합니다. 바로 국왕살해(Regicide)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법위에 존재하는 전제군주를 살해하라는 메시지입니다. 로크는 법의 테두리 밖에 있는 자(=왕)를 죽이는 것은 불법이 아니라는 논리로 국왕살해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입헌군주국인 영국에서 국왕살해를 내세우는 <통치론>이 당시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겠지요? 로크는 영국 내전과 네덜란드 망명생활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후, 1689년 <통치론>을 정식으로 발간하였습니다.
▲ 존 로크 (John Locke, 1632~ 1704)
1. 로크가 말한 '신뢰'
김만권 선생님은 근대정치학의 기반을 두 가지로 대별하였습니다. 하나는 로크의 전통을 따른 ‘신뢰(trust)’이고, 다른 하나는 홉스의 전통 아래에 있는 ‘두려움(fear)’입니다. 홉스는 자연상태에서 정치사회로 넘어올 때, 평판(이성)에 기초한 신약과 폭력이 요구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로크는 자연 상태에서 사람들이 모두 합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를 신뢰한다고 가정합니다. 로크에 따르면, 폭력없이도 사회를 성립할 수 있게 됩니다.
게임이론의 대표적인 사례, ‘죄수의 딜레마’ 상황도 서로를 신뢰할 때 상호이득이 되는 결과를 얻습니다. 어떤 학자는 서로 신뢰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사회적 자본이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신뢰를 기반으로 한 시민문화가 더 나은 사회, 정치, 문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사이의 신뢰를 가장 중요한 기초로 놓은 최초의 정치학자는 바로 로크이다. 사회적 자본으로서 ‘신뢰’를 강조하는 것도 로크의 흐름에서 등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감상한 마종기님의 ‘우화의 강’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결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2. '사유재산'을 강조한 로크
로크 사상 중 ‘소유(所有)’ 또는 ‘사유(私有)’에 대해 집중하는 본 강의가 최근의 경향을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이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는가, 우리가 무엇을 사유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파고들다보면 ‘우리가 어떻게 이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는가’ 라는 또 다른 질문과 만나게 됩니다. 애초에 공유되던 자연 상태의 여러 자원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파악해보고는 것이 근대국가의 성립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겠지요?
소유에 관한 이론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그것은 로크에서 출발하여 아담스미스와 마르크스에 의해 일반화된 노동가치설과 집단의지동의설(사회동의설)입니다. 먼저, 집단의지동의설에 의하면, 나의 소유와 타인의 소유가 정당하게 양립될 수 있을 때에 사적 소유가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타자들이 집단의 의지로 나의 소유를 인정해주는 것이지요. 나 자신도 집단의 일원으로서 타인의 소유를 인정해줍니다. 타인의 인정이 소유에 있어 핵심입니다. ‘사적 소유는 한 집단의 정치적 승인을 요구하는 사항’이라는 칸트의 입장과 일맥상통합니다.
한편, 로크는 사유재산의 근거로 ‘노동’을 지목했습니다. 노동이야말로 사유물과 공유물 간의 구별을 낳는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몸에서 나온 노동, 그 손에서 나온 작업은 당연히 그 자신만의 것이라 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이에 따르면, 자연의 대상물에 노동을 가한 주체인 내가 그 노동의 결과물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즉, 소유권은 나의 노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사회적 인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정치 사회가 존재하기 전부터 가질 수 있는 권리, 전정치적(前-, pre-political) 권리가 사적 소유권이라는 것입니다.
3. 소유의 단서 두 가지
인간이 공동체를 결성하고 스스로 정부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들의 재산을 보존하기 위함이다.
이렇듯 로크는 정치사회 성립의 이유 중 가장 주요한 것으로 재산의 보호를 꼽습니다. 노동가치설에 따라 노동이 순수하게 내 몸에서 나오고, 이를 통해 재산이 형성되므로 각자의 몸이 결국 재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신체적 자유를 침해받지 않는 것이 곧 사유재산을 보장받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재산이 자신의 몸이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재산권은 정치사회가 보호해야 할 중요한 개인의 권리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크는 ‘사적소유’의 권리에 두 가지 단서를 제시합니다. 먼저, 다른 사람들이 소유하기에 충분한 공유물이 남아있는 한, 노동한 자가 그의 노동이 부여된 것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하던 당시, 로크는 신이 무한한 토지를 인간에게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타인들이 소유하기에 충분한 양의 토지(공유물)이 있기에 무한한 사적 소유가 가능하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천연자원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있는 현재 상황에서 이러한 단서조항은 혁명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이 남아있지 않는다면, 사유재산권은 조건부 권리라는 의미입니다.
둘째로, 로크가 사적소유를 제한했다고 보는 또 하나의 근거는 ‘부패의 단서’입니다. 고기나 곡물을 창고에 쌓아두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썩습니다. 이와 달리, 화폐는 장기적으로 혹은 반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있습니다. 로크는 토지에서 생겨난 생산물을 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없다면 인간들이 토지개간을 적극적으로 할 유인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땅에서 얻은 이익을부패하지 않는 형태로 보관할 수 있을 때, 토지생산성이 향상된다고 보았습니다. 저는 이런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갑부가,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쌀가마니로 가지고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창고의 규모는 어떨지... 쌀은 얼마나 오래 보관할지... ‘화폐가 생겨나서 어마어마한 것들을 감추어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 재산과 정치참여
공식석상에서 쓰이는 ‘신사, 숙녀 여러분~ Ladies and Gentlemen.’이라는 표현은 일정 수준의 재산과 이에 따른 제반 권리를 가진 이들을 지칭하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로크가 개인의 사적소유권을 정당화시키려한 목적은 어느 정도 자신의 재산을 가진 인민의 정치참여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로크가 주장한 사유재산권은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인간이 가져야 할 필수조건이었고, 이 때문에 어떤 외부의 침해나 간섭으로부터 사유재산을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로크 이후로, 그가 강조한 재산권의 의미가 퇴색되었습니다. 정치적 의사표현의 목적이 아니라, 경제적 권리로서 재산권이 지나치게 중시되었습니다. 또, 근대이후의 자유주의 흐름속에서 정치적 무관심마저도 개인의 선택으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습니다.
로크를 위시한 근대 초기의 학자들이 왜 그리도 재산권 보호를 강조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현대사회에서 잊은 것이지요. 개인의 정치참여라는 역할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사유재산의 보호라는 일차적인 권리에만 집중하는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김만권 선생님은 복지와 경제민주화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나눠주었습니다. 동시에 소유는 단순히 무엇을 가지냐의 문제를 넘어서 우리를 얼마나 더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만드느냐의 문제라는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소유, 재산권을 경제적인 관점이 아니라 정치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참여의 밑바탕이 되는 소유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끝)
<마음에 와 닿았던 글>
- 정당한 시민봉기를 두고 기득권에서는 사회 분열 세력이라고 취급하면서 봉기에 참여한 시민들을 적으로 돌리며 고립시킨다. 의식 있는 시민들이 불의에 저항하는 것이 공연히 ‘소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 정당한 행위임을 알려야 한다고 본다. - 참여를 선택이라고 하면, 무관심도 선택이 된다. 많은 나라들이 의무투표제를 실시한다. - 생존하는 인간, 표현하는 인간 - 행복은 개인이 만든다. 공동체는 개인이 행복해지기위한 최소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 로크는 하나님이 어느 누구에게도 더 많은 권력과 자유를 주지 않고 똑같이 자유롭게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들은 자유로우며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 타자와의 공유물을 사회에다 만드는 것이 경제민주화 - 소유는 인간을 얼마나 자유롭게 하느냐의 문제다. - 재산권은 자유로운 정치적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조건이다. |
<질문>
- 만권쌤,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앞에 놓친 강의 두개는 자료 열심히 읽어보고 보충하겠습니다. 편찮으시다고 하니 마음이 무겁네요. 건강 챙기시고, 빨리 나으시기를... 첫 날 뒤풀이를 여섯 시간 했다고 들었어요. 이제는 예전의 체력이 아니니 체력안배 잘 하셔야 할 듯!! 왜냐하면 쌤이 아프지 않으셔야 재미있는 강의를 계속 들을 수 있잖아요. -밥주련 올림- - 칸트의 ‘집단의지 동의론’은 개인 간의 k적 소유권 분쟁 상황을 해결하는 과정 중에 ‘법, 의무, 강제력’을 상정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쟁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로크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사적 소유권 만을 놓고 보면, 재산(재화)의 “생산”보다는 “분배”의 문제가 더 중요한 것 같은데 로크는 ‘생산의 차원에서만 사적소유권을 얘기하고 있는 듯합니다. 강의안에서 보면요) - 민주주의, 자유, 평등 등. 빼앗기면 사회의 억압이 작용한다. 그러나 문제는 빼앗긴 가치조차 ‘나의 것, 누려야 할 것’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성숙한 공중’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구체적 방법은? - 국왕을 죽이는 것이 국왕은 법 위에 있는 존재니까,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아요. ‘살인’이라는 죄로라도 처벌되는 것 아닌가요? 살인죄로 처벌은 된다 할지라도 ‘국왕’이라는 존재를 죽인 것에 대한 가중 혹은 특별 처벌이 없다는 말일까요? -로크는 (아래 질문에) 어떤 답을 할까요? 1)나의 농장(나의 소유)에서 다른 사람이 노동하면 그것은 누구의 것? / 2) 내 아버지의 것은 나의 것? / 3)노예의 노동은 누구의 것? - 사적 소유에 일련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재산권의 정치적 의미가 현재의 복지국가 및 경제민주화의 주요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고전정치사상] 2강, 보충자료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2강, 근대 국가주권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홉스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2강(11/18), 근대 국가주권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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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바이어던>표지, '폭력을 독점하고 있는 가장 이성적인 집단'인 국가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0. 강의시작
2013년 11월 18일 첫눈이 내린 날, 느티나무 강의실에는 40여 명의 학생이 모였습니다. 김만권 선생님이 강의하는 ‘고전으로 이해하는 근대정치사상’ 두 번째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김만권 선생님은 지난 시간에 수강생이 남긴 쪽지질문에 답을 해주면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흥미로운 질문이 많았습니다. 이번 강좌에서 다루는 책을 모두 읽으셨는지, 또 그 책을 ‘고전’이라 할 수 있는지 등등. 김만권 선생님은 당황하지 않고(?),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홉스의 주저 [리바이어던]에는 근대국가주권은 어떻게 탄생하였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리바이어던] 원본은 4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보통 한국어 번역서는 1부와 2부까지 내용만 다루고 있답니다. 1부 ‘인간에 대하여’, 2부 ‘국가에 대하여’라는 타이틀이 달린 것을 보면, 홉스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국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참고로 3부와 4부는 기독교국가와 신학적 해석에 대한 인간의 무지(암흑)을 다룬 내용이라고 합니다.
1. 홉스의 시대적 배경과 사상적 위치
홉스의 정치사상을 깊이 공부해보기 앞서, 자연인으로서 그가 살았던 시대배경을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마키아벨리와 유사하게, 신의 시대를 벗어나는 과도기로서 가치다원주의, 신념의 사유화 문제는 당시의 큰 이슈였습니다. 게다가 홉스는 내전(영국 시민전쟁)을 겪고 프랑스로 망명하는 등 역사적인 격동기를 보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최초로 영역한 홉스는 ‘전쟁을 두려움, 공포에서 비롯된 것’ 이라고 지적하면서 자신의 탄생 역시 두려움과 관련짓습니다. 홉스의 사상을 이해할 때, 두려움 또는 공포는 중요한 단어인 것 같습니다.
영국의 시민전쟁 당시 의회파와 대립한 왕당파임에도 불구하고, 홉스는 로크, 루소와 더불어 대표적인 사회계약론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든 권력의 유일한 정당성은 인민(the people)으로부터 나온다는 주장은 마키아벨리와 홉스가 가진 공통점입니다. 근대국가에서 오로지 인민만이 정당한 권력의 원천이 된다는 이야기는 ‘불안과 공포에 기반한 인민의 동의’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김만권 선생님은 ‘인민주권의 이론적 탄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홉스의 이러한 발상은 로크의 시민정부, 루소의 인민주권이라는 이름으로 뻗어나간다고 합니다.
2. 사회계약론과 레비아탄
다시 말해, 홉스는 사회계약론으로 근대국가를 이론적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사회계약은 자연상태로부터 정치사회(국가)로 이행해 가는 과정을 정당화하는 일종의 이론적 도구인 것입니다. 여기서 자연의 상태란, 정치권위가 없는 아비규환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홉스가 가설로서 만들어낸 상태입니다.(사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회계약’이라는 것도 특정 시간, 장소에서 실제로 이루어진 ‘계약’은 아니지요.) 홉스가 이해한 인간의 모습을 따라가다보면, 자연상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분쟁이 발생하였을 경우 이를 공정하게 해결하면서도 안정된 질서속에서 불안감없이 활동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국가와 계약을 맺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일부 양도합니다.
홉스는 국가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리바이어던’ 또는 ‘레비아탄’을 사용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다괴물인 레비아탄은 고래, 용과 닮은 동물입니다. 왜 국가와 용의 이미지를 연결했을까요? 김만권 선생님은 홉스의 또다른 저작, [비히모스 – 1640~1660년 영국시민전쟁에 관한 대화]를 소개해주시면서, 근대정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두 상징물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질서, 법의 지배’를 상징하는 바다괴물 ‘레비아탄’과 ‘아나키, 혼란, 혁명, 혁명에 가담한 인민’을 나타내는 육지괴물 ‘비히모스’입니다. 유대인 성경에 나오는 두 짐승의 싸움 이야기는 레비아탄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아무래도 혁명, 아나키에 상태에서 법의 지배 상태로 바꾸는... 즉, 혼란을 잠재우고, 질서를 잡아주는 국가(레비아탄)의 승리를 암시하는 듯합니다.
3. 시민의 권리없이 인간의 권리도 없다.
강의 후반부에 김만권 선생님은 ‘정치권위가 없는 상태(자연의 상태)’에서의 인간이 갖는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먼저 아래 지문을 살펴보시지요.
새로운 세계적 상황 때문에 수백만 명의 인간이 권리를 잃고 다시는 회복할 수 없어졌을 때, 우리는 권리를 가질 권리가 존재한다는 것과... 이 권리가 어떤 조직화된 공동체에 속할 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동등한 권리를 상호보장하는 우리의 결정이 강력한 힘을 갖는 집단의 구성원으로서만 평등하게 된다. 우리의 정치적 삶은 우리가 조직을 통해 평등을 만들어낸다는 가정에 기대고 있다. - 한나 아렌트
권리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권리는 특정한 공동체 내부에 속할 권리라는 아렌트의 말이 처음에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정치권위가 있을 때, 비로소 권리가 존재한다는 말로 풀어주었습니다. 시민의 권리가 없다면 인간의 권리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난민, 미등록노동자, 재일동포 등 속해있는 국가가 없는 사람에게 ‘평등, 정의, 인권’이 주어지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국가없는 이들이 갖는 권리와 한 국가, 공동체, 정치적 권위 아래서 누리는 시민권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시민권 없이는 인간으로서 어떤 보호도 받기 어려운 ‘현실’을 홉스의 정치사상 수업에서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질문>
- 1)욕구와 욕망의 차이는? 2)정치적 판단을 포기(한 것으로 보이는)한 사람들이 권리를 회복하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3)복지를 하지 않는 국가는 재산이 없는 사람에게 정치적 권리나 견해를 갖지 않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인가? -의회정치/정당정치 - 시민의 권리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현행법상 시민권은 20세부터 적용이 되기에 미성년자는 이 권리로부터 소외되어 있습니다.(이들도 소외된 자라 볼 수 있나요?) 하지만 시민권이라는 것이 단순히 텍스트적인 지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무엇보다 그 시기에 시민권을 주고, (실제로 투표권) 시민을 경험하고 훈련하는 것을 가지는 것이 그들의 권리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과 대한민국이라는 근대국가의 성립과 연관되는 것인가요? - 복지가 모든 시민들이 정치적 권리, 의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 인간의 조건’을 형성하도록 하는 것이라 하셨는데, 현대사회에서 특히 정치 분야에서 이미 복지는 분배/소득불균형 해소의 수단으로 쓰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유럽에서 근대 이전 왕권의 근거가 ‘신의 뜻’이었다면(왕권신수설), 조선에서는 왕권을 어떻게 정당화했을까요? - 1)사회계약론이라는 용어도 일본식 한자인가요?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는 행위를 계약이라고 부르는 게 잘 이해가 안 돼서요) 2)우리나라에는 혹은 동양에는 권력의 기반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없었나요? (왕권 신수설, 사회 계약론에 대비될 수 있는...) 3)홉스는 ‘누가’ 제 3의 객관적인 판단자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 로크가 복지국가를 정치적 인간으로 만드는 것으로 봤다면 그것은 왜? 정치적 인간이 긍정인가요? - 이슬람 국가는 근대국가가 아닌가요? (종교랑 정치가 분리되어 있지 않으니..) |
<마음에 와 닿았던 문장>
- 정치권력은 폭력을 독점한 가장 이성적 존재 -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권리를 가질 권리] - 1)인간은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주권을 의탁했다. 2)홉스는 정치적 권위가 없는 상태에서 가치판단의 자유는 우리의 자유를 파괴한다고 말했다. 3)홉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정치적 권위에 복종시키는 일이,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는 자연의 이성적 목소리인 자연법에도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 근대국가, 모든 폭력을 독점하고 있는 이성적 존재 - [용서란 비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정신대 할머니, 밀양, 힘이 정의를 세우는 기구 - 국가의 본질은 결국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 1)평화를 추구하고 그것을 따르라 2)자연권으로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해 우리 자신을 보호하라! - 시민권 없이 인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 우리는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집단의 구성원으로서만 평등하게 된다. - 우리의 정치적 삶은 우리가 조직을 통해 평등을 만들어낸다는 가정에 기대고 있다. -한나 아렌트 - 시민의 권리 없이 인간의 권리란 없다. - 시민권이 시스템에 보일 권리 - “시민의 권리 없이 인간의 권리는 없다” 국가의 존재 방식을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권리까지 영향을 준 홉스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
글 : 자원활동가 이나단 / 편집 아카데미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1강, 마키아벨리-왜 도덕과 정치가 분리되었을까?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1강(11/11), 마키아벨리-왜 도덕과 정치가 분리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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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한 날씨가 무색하게 오늘 느티나무홀에는 뜨거운 기운이 돌았습니다. 김만권 선생님의 열정적인 강의는 물론, 홀을 꽉꽉 채우다 못해 의자만 놓고 앉은 수강생들의 공부 열기도 한 몫 단단히 했죠.
강의 첫 날인 만큼 먼저 네 명씩 짝을 지어 소개하고, 인사하는 시간을 함께했습니다. 나의 이름/별칭, 오늘 나를 미소 짓게 한 일, 이번 강의에 대한 기대, 이렇게 세 가지를 색종이에 적어 이야기 나누다 보니 어색함과 긴장이 솔솔 풀렸어요.
<여러분들이 자신을 소개해 준 키워드입니다>
1. 이름(별칭), 2. 나를 오늘 웃음짓게 한 일, 3. 강의에 대한 기대(목표)
- 현정(탱) / 모듬철판볶음밥 / 고전을 통해 우리 현대 사회를 돌아볼 수 있었으면... - 포비 / 술마실 기대 2차 / 無 - KJ / 커피쿠폰 / 정치철학 - 정양례 / 빼빼로 / 루소를 기다리며 - 네롱이 / 행사취소 / 막연한 기대감 - 기라 / 빼빼로 데이 / 만땅 - 정수기 / 인턴 ‘직접행동’을 할 때 한 20대 남성께서 좋은 일을 한다며 커피를 주심 / 고전, 정치사상,.. 어렵던 이 단어들과 친근해지길 - 차수련 / ? / 좋은 사람들과 좋은 말씀들으며 좋은 시간 갖기를.. - 안세연 / 선생님이랑 다시 만난 것 / 머리는 차갑게 마음은 따뜻하게. - 김현영 / 팀장님 교육 / 소개에 대한 기대? - 김창욱 / 특별한 일은 없고, 아침 해를 보았다는 점 /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할까 - 민-경인 / 굴짬뽕 / 정치를 제대로 이해하기 - 정현숙(여봉) / 전화한통 / 많음 - 함혜리 / 응4 / 명쾌한 답 - 날마다 새롭게 / 작은 아이 등교 / 새로운 출발 - 이영동 / 저녁식사 / 듣고 싶었던 것 - 박현희 / 공부하는 할머니 / 예습 - 김미연 / 방문 / 책제목만 알다가 내용이 궁금해서 왔습니다. - 주희 / 이웃 / 재회 - 징 / 홍홍홍 / +0+ - 안감독 / 고추짜장 / 휴식 - 성열훈 / 느티나무 방문 / 개근 - 호모아줌마데스 / 반가운 얼굴들 / 똑똑해 지겠지...? |
그리고 김만권 선생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한 시간 동안은 근대에 대해 고찰하며 강좌 커리큘럼을 훑어보았고, 나머지 한 시간 동안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중심으로 정치에서 도덕이 분리되는 이유를 살폈습니다.
1. 근대, 신이 사라진 시대의 가치
모든 견고한 것들은 공기 속으로 녹아들고,
모든 신성한 것들은 불경스럽게 되었다.
인간은 마침내 냉정한 사리분별,
자기 삶의 현실적 조건,
자신과 같은 인간과의 관계를 직면하도록 강요되었다.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 있는 구절입니다. 김만권 선생님은 이 글귀가 근대의 본질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하십니다.
신의 말을 사람들마다 다르게 해석하게 된 것이 근대의 시작입니다. 신의 말을 사람들이 다르게 해석한다는 건 이제 신과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의 문제로 모든 것들이 돌아섰다는 의미가 됩니다. 신이라는 이름만으로 이해될 수 있고, 인정될 수 있던 세상은 이제 혼란에 빠집니다.
신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온 무수한 견해들은 종교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여기서 많은 죽음과 파괴를 목격한 인간은 종교다원주의를 채택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종교다원주의는 나의 가치관을 주장하되 강요하지 않고 상대방의 가치관을 인정하는 가치다원주의로 발전했습니다. 대신, 개인은 자신이 주장하는 가치가 맞는 것인지 의심이 들고 그래서 늘 불안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근대에는 새로운 의견이 끊임없이 생산되어 어제의 것을 낡게 만듭니다. 이는 오랫동안 우리들이 공동체 속에서 형성해온 전통과는 단절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래서 근대에는 많은 사상가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새로이 쏟아지는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신의 말에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신 없이도 공유될 수 있는 가치를 탐구한 것이죠. 오늘 공부할 마키아벨리에 이어 홉스, 로크, 루소, 칸트, 니체, 마르크스 등이 모두 근대에 새로이 탄생한 물음들에 대해 방대한 이론과 저서로 나름의 답을 내리고자 했던 이들입니다.
그러나 답을 말하는 순간, 그 답은 견해가 됩니다. 진리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근대의 사상가들은 하나의 답에 그 다음 답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릴레이를 펼치고 있습니다. 김만권 선생님은 바로 이 500년의 릴레이를 오캄의 면도날로 정리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겠다고 합니다.
2.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의 어지러운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마키아벨리는 널리 오해받고 있는 근대사상가들 중 한 명입니다. 마키아벨리의 대표 저작 <군주론>에서 정치가의 속임수나 간계를 허용함으로써 부패와 폭력의 여지를 남기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후의 저작인 <로마사 논고>를 보면 실제로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였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군주론>은 마키아벨리가 공직의 자리에서 쫓겨난 뒤 정계에 다시 한 번 진출하기 위해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헌정한 책입니다. 그러나 정작 로렌초는 이 책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낙담한 마키아벨리는 재야에서 인문주의자들과 어울리며 <로마사 논고>, <만드라골라> 등을 저술했습니다.
3. 왜 <군주론>을 썼을까
공화주의자인 마키아벨리가 1인의 절대군주를 지향하는 듯한 <군주론>을 쓴 이유는 크게 네 가지로 풀이되는데 꽤 흥미로워서 후기에도 남깁니다.
첫째는 ‘일탈론’입니다. 마키아벨리가 몰락해가는 피렌체의 유일한 구원투수가 메디치라고 판단하여 로렌초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군주론>에서 잠깐 군주제를 옹호하는 척했다는 설명입니다. 둘째는 루소가 이야기한 ‘폭로론’입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통해 인민들이 군주의 기만과 술책에 속지 않게 해줄 지식을 제공한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셋째는 마키아벨리가 군주정을 공화정으로 넘어가기 위한 준비 단계로 보았다는 '공화정준비론'입니다. 탄탄한 군주정을 통해 안정적으로 공화정을 이룩할 수 있도록 하려고 <군주론>을 저술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기만론’입니다. 군주의 권력을 위태롭게 하고 몰락시킬 만한 기만적 조언을 제시하여 로렌초로 하여금 스스로 파멸할 수 있도록 하는 단초를 제공하려는 목적에서 <군주론>을 썼다는 것입니다.
4. 포르투나(fortuna)와 비르투(virtú)
운명이 우리가 하는 일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다면, 나머지 절반은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
포르투나는 운명의 여신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운명을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고, 대신 그를 당당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이 위대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나 <오디세이>를 보면 운명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은 채 위험에 뛰어든 용기 있는 자들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 또한 운명을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수호하기 위해 절반 정도는 인간이 운명에 저항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습니다. 그 절반의 여지는 비르투가 잡고 있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마키아벨리는 포르투나를 강과 여자에 비유합니다.
범람이 잘 일어나는 강은 때로 마을을 덮쳐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하지만 강둑을 잘 쌓는다면 피해를 막을 수도 있습니다. 더 큰 범람이 일어나더라도 다시 더 단단하고 높은 강둑을 지으면 됩니다. 이 강둑이 바로 비르투입니다.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을 미리 준비해연한 일에 대비하는 인간의 능력이죠.
또한 포르투나는 운명의 여신, 즉 여자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능력 있는 모습을 좋아하기 때문에 남자들이 능력을 키워서 포르투나를 매혹할 수 있다면 행운을 붙들 수 있습니다. 특히 변덕스럽게 마음을 자주 바꾸는 여신의 관심을 끌려면 여신을 공격적이고 거칠게 다루라는데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마음에 안 드는군요. 옛날 사람들이란... 하하. 어쨌든 핵심은 우연성이 어느 정도의 자율성에 의해 제어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5.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본질
예측할 수 없으나 저항하라, 그것이 인간의 자유다
포르투나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는 나쁜 운명이 닥쳐와도 이를 잘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훌륭한 군주일 것입니다. 절반의 가능성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군주 말입니다. 곧 '변화하는 환경을 끊임없이 살피고 적응'하는 것이 좋은 정부 또는 지도자의 비르투입니다.
아마 이 ‘적응’의 방법에서 처세술이 많이 부각되어 후대의 장 보댕과 같은 학자들에게 맹비난을 받은 거겠죠.
6. 진보와 도덕주의
마키아벨리가 말한 정치의 목적은 ‘영광의 달성’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즉 변화에 대응하는 과정에 거짓말이라던가 속임수라던가 엄한 형벌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들어가도 괜찮습니다. 이 지점에서 정치와 도덕이 분리됩니다.
주로 진보가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많이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도덕은 원칙입니다. 원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과연 진보가 도덕 원칙으로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걸까요?
아닙니다. 변하지 않는 도덕 원칙으로 어떻게 진보할 수 있겠습니까. 당장 명백하게 잘못된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서 진보 정치가 주도권을 놓친 형국을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도덕을 놓지 않는 이상 진보는 보수의 정치에 말려들어가기만 할 것입니다.
후기 마무리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인 '임시야간숙소'를 떠올려 봅니다. 우리가 읽은 것처럼 임시야간숙소는 도덕적인 방편이긴 하나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정치 행위자에 대한 경멸이 정치 영역에 대한 경멸로 넘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정치 영역으로부터의 도피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변화에 대한 무임승차입니다.
정치 영역에 대한 일말의 존중이라도 남아있다면 우리는 바꾸기 위해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단지 도덕만으로는 이룩할 수 없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정치가 쥐고 있습니다. 임시야간숙소 말고, 다음 세대를 위한 변화를 만들기 위해 깨어있는 시민이 됩시다.
<마음에 와 닿았던 질문>
- 정치꾼은 다음 선거를 준비하지만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준비한다. - 정치적이란 말의 의미는 세상의 변화에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다. - 권력은 인민의 기반 위에 세워라 - 운명에 강하게 대응하라 - 포르투나를 붙잡아두기 위해서는 비르투를 가져야 한다. - 정-치를 믿는 자의 신념은 언제나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수긍하는 것이 아니라 도전하는 데 있다. - 왜 정치를 싫어하는가? 행위자에 대한 경멸이 영역에 대한 경멸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영역으로부터 도망치게 된다. 그러나 행위자와 영역을 구분하면, 영역을 위해 행위자를 바꾸러 영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 울지말고 웃으면서 같이가자. - 근대 프로세스. 근대에 대한 정의. 정치의 본질 - 변화에 대한 유연한 적응 - 어쩔 수 없다라고 생각하면 모든 가능성은 OFF된다 - “민주적인 판사”의 시(언급해 주진 않았으나 읽어보니 좋네요) - ‘나는 정치적이다’ ‘나는 대중적이다’ 좋은 정부(좋은 지도자)란 변화하는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 늘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진보가 도덕적 원칙으로 가능하겠는가. - 내가 소중히 여기는 인식이나 사고가 많아 결론을 못내는 토론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공통의 사고가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너는 스스로의 삶을 계획하고 실천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 정치 혐오의 실체 : POLITICAL ACT를 싫어해야 할 것을 POLITICAL SPHERE를 싫어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만다. - POLITICIAN은 다음 선거를 준비하고 STATESMAN은 다음 세대를 준비한다 - 근대에 이르러서, 신VS인간 이었던 관계가 인간VS인간의 관계로, 인간은 ‘인간’을 대면해야 했다! - 마키아밸리는 군주제 아래서 <군주론>을 썼다. 지금 민주제 아래 사는 우리에게 <군주론>의 내용은 어떤 시사점을 갖는가? 단지, ‘통치의 기술’인 것인가? - 진실이라는 그 자체가 움직임을 이끌어 낸다. - 진리는 현재형이다. 진리는 설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정치는 만인이 현재 가지고 있는 가치의 합산물인 것 같다. - 권력의 본질은 비밀이다. - 그들의 계략에 맞설 수 있는 시민의 ‘도덕’이 있다. - 저 멀리 있는 정치를 능동적으로 다가가서 끌어안기 - 말씀을 재미있고 강의를 즐겁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열정적으로 강의 하시는 모습이 좋습니다. - 대중-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심이 없는 사람들. 무임승차-변화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겠다는 것. 정치를 믿는 자의 신념은 언제나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수긍하는 것이 아니라 도전하는 데에 있다! - 인간이라면 더 강하게 ‘둑을 쌓아야 한다’ -정치의 궁극적 목적은 영광의 달성이다. |
<강의에서 들었던 질문>
- 김만권 선생님은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모든 학자들의 책을 다 읽으신 건가요? - 바뀔 수 있다는 신념이 아니라 비뀌게 할 ‘비루투스’는 무엇일까? 어쩔 수 없이 정치리더의 -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쉬운 책. ‘시민’의 입장에서 군주론의 의미를 좀 더 고민해본다면? - 군주론으로 본 노무현은? - 정치적 중립과 중도의 차이는? 중도파는 기회주의적인가? - 정치가 도덕, 종교와 같은 선상에서 논의 된다는 것은 결국 그 셋 모두가 ‘방법’이라는 것인-가요? 그럼 그 방법을 통해 목적하는 것은? - 로마는 과연 “영광의 시대”였나? 강의 교재로 선택한 ‘책’들은 고전인가? 고전은 누가 평가하나? 마키아벨리식 정치는 과연 가능한가? 현실에서 기득권의 의도화된 탈정치화 시도는 어떻게 극복 가능할까? 1) 근대부터 자신만의 가치를 해석하기 시작한? 견고한 것에 대한 도전의식은 어디서부터? 경제적인 부로 인한 철학적 사유의 발전인지? 2) 대표자 민주주의록에서 “우리는 단 하루, 선거날에만 자유롭다” = 선거, 제도, 여로론에 의해 조절할 수 있다면 대표VS대의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3) 대중VS공중 대중주의에서 무임승차하는 사람은 과연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 것인지? 비용지불이란? 자신의 정치적 선택에 대한 비판인가? (EX)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정책시행으로 인한 실질적 불이익) - 오히려 마키아벨리는 공화국의 힘을, 시민의 힘을 믿고, 군주가 희생양이 되라고 하는 건 아닌가요? - 중. 고등학교 사회교과서에는 민주주의를 직접민주우의와 대의제 민주주의로 구분합니다. 대표와 대의의 차이를 생각한다면 위의 구분은 잘못된 것인가요? 만약 잘못이라면, 이 오류는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일까요? - 서양의 근대와 동양의 근대 형성에서 종교의 역할의 차이? - 운명이 왜 우연성인가? 우연히 주어진 것이기 때문인가? 왜 우연히 인가? - 사전 예습은 꼭 해야 하나요? - 마키아벨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작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김어준은 <닥치고 정치>가 생각났습니다. 그 책에서 저자가 주장한 핵심은 “정치는 연애다”라는 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정치가는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대중들을 향해 끊임없이 매력적이게 쉽게 다가가아 한다고 이야기 했던 게 흥미롭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 질문은 마키아벨리가 운영에 관한 논의를 하면서 비유한 여성성을 가진 포르투나(운명)이 어찌 보면 대중(혹은 국민) 이 이러한 것을 염두 한 것일 수도 있을까요? 포르투나의 의미를 현재적 맥락에서 바라보면 무엇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 정치적인 것의 본질은 비밀,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본질과 충돌하는데 어떻게 정치와 민주주의가 함께 갈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