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정보
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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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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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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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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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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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 100년을 이해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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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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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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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반공, 그리고 남북협상 : 김구, 이승만. 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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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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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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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과 민족, 그리고 좌우합작 : 박헌영, 김일성, 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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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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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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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의 민중 : 금순이는 어데로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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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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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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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① 현대 정치의 뿌리를 찾아서 : 북촌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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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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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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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향한 돌멩이질 : 이기붕과 김주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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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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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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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재야의 대통령 : 박정희와 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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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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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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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 탄생과 근로기준법 : 전태일과 정주영,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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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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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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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② 전쟁의 상흔을 찾아서 : 금정굴과 도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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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7
[한국근현대사] 9강, 금정굴과 철원평화전망대 답사
1. 고양시 금정굴 답사
희생자에 대한 묵념으로 시작된 우리의 금정굴 답사.
금을 캐던 곳이 문을 닫아 폐광굴이 되고,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장소로 사용되는 동안 그곳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단촐 하고 허름해 보이는 그 곳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고양금정굴 사건 요약*
고양 금정굴 사건은 6ㆍ26전쟁 직후 북한군을 위해 부역했거나 부역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1950년 10월 9일부터 31일까지 경찰이 고양ㆍ파주지역 주민을 일산서구 탄현동 황룡산의 금정굴에서 총살·암매장한 사건이다. 1993년 문제를 제기한 유족회와 시민단체가 1995년 9~10월 사건 현장에서 153구의 유해를 발굴했지만 안치할 곳이 없어 16년 간 서울대병원이 연구실 창고에 보관해 왔다. 서울대 의대의 1차 감정에서 희생자가 최소 153명이고, 약 10%는 여성에 10대의 유골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장에서 당시의 이야기를 들으니 불과 몇 십 년 전의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책이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였던 것이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라고해서 목숨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싶은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그리고 또 하나 “금정굴은 복 받은 곳 이예요” 라는 고양 금정굴 유족회 관계자분의 말씀도 기억에 남는데, 얼마나 많은 우리의 과거사가 밝혀지지 않고 보상을 받기가 힘들었으면, 무엇보다 우리의 관심을 받지 못했으면 그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난 곳을 복 받았다라고 까지 표현을 했을까 싶어 그저 먹먹하기만 하였다.
그래도 긍정적인 것은 고양시에서 이 사건에 계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관련 조례안을 만드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으며, 희생자 유족들이 기금을 조성해 인권평화재단을 발족하려는 준비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 겪어야할 어려움도 무수하겠지만, 금정굴이 더 이상 뒷산에 작고 허름한 굴이 아니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지 않을까.
2. 점심식사, 동두천 기지촌
금정굴에서의 일정이 길어져 조금 늦게 동두천 기치촌을 향하였다. 그 곳에서 아주 맛있는 부대찌개를 먹고 철원으로 Go Go~!!! 시간이 부족하여 거리를 돌아 볼 수는 없었지만, 버스 안에서도 이신철 교수님의 깨알 같은 설명은 계속되었다.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지만, 너무 강렬하여 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윤금이 사건’ 휴, 인터넷으로 뒤늦게 찾아본 그 이야기는 정말, 표현하는 것을 피하고 싶을 만큼 끔찍하고 아픈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3. 철원 평화전망대
<군인 '동생'이 직접 버스에 타서 인원수를 확인하고 있는 모습>
강원도 철원군 중부전선의 비무장지대와 북한지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 ‘철원 평화전망대’ 그 곳을 오르는 동안 많은 철새들을 보며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은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마냥 자유로운 곳이 아니기에 참 대조적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곳을 고등학교 때에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마냥 신나서 소풍처럼 왔다만 간 기억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똑같은 장소가 그저 ‘소풍갔던 곳’으로 기억되기도 하고 ‘우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혀있는 곳 그리고 계속 되고 있는 곳’으로 기억될 수도 있는 것은 역사에 대한 관심과 감수성의 차이인 것 같다. ‘역사감수성’을 갖게 해준 이번 수업이 답사가 정말 좋았다!
4. 월정역
*월정역 소개*
서울에서 원산까지 이어졌던 경원선의 간이역이었다. 신탄리역 다음 역으로, 남방한계선에 근접한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 폐역 상태다. 6·25전쟁 당시 월정리역에서 마지막 기적을 울렸던 객차잔해 일부분과 유엔군의 폭격으로 부숴진 인민군의 화물열차 골격이 보존되어 있다.
작고 아담한 월정역, 월정역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농지가 보이는데 그곳은 정해진 시간에만 들어가서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한다. 담벽(?)이 사라지고 농지를 마음껏 이용하고 월정역에 다시 기차가 달리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팻말이 대답을 해주는 것 같다.
5. 노동당사, 도피안사, 백마고지
*노동당사 소개*
1946년 초 북한 땅이었을 때 철원군 조선노동당에서 시공하여 그해 말에 완공한 러시아식 건물이다(그래서 벽이 굉장히 두껍게 지어졌다고). 6·25전쟁의 참화로 검게 그을린 3층 건물의 앞뒤엔 포탄과 총탄 자국이 촘촘하다. 8·15광복 후부터 6·25전쟁이 일어나기까지 공산치하에서 반공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잡혀 와서 고문과 무자비한 학살을 당하였다. 당사 뒤편에 설치된 방공호에서 사람의 유골과 실탄, 철사줄 등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그때의 참상을 알 수 있다.
금정굴에서는 북한을 위해 부역했다고 죽이고, 노동당사에서는 반공활동 하던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정말 힘들어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산’것이 아니라, ‘견뎌’온 것은 아니었을까.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해를 꿈꾸며 뮤직비디오를 찍었던 곳에서 함께 한 친구들이 공연을 보여주었다. 서태지 시대가 아니어서(?) 그런지 친구들의 공연이 더 즐겁고 예뻤던 것 같다. 이렇게 후손들이 그들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처리하고(금정굴유가족 분께서 이 일은 우리 대에서 끝내야한다고 했던 것과 같이), 문제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지금 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6. 저녁식사, 고석정
저녁의 고석정 모습을 살펴본 뒤 순두부찌개를 먹고, (배부르다고 하시면서도 다들 잘 드셨던...!ㅎㅎㅎ) 우리의 답사는... 끝나지 않았다. 버스에서 마이크를 전달 전달하며 서로의 소감을 나누고서야 그 어떤 답사보다 뿌듯한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이신철교수님, 전보임간사님, 함께했던 모든 분들! 덕분에 아주 재미있게 유익하게 잘~다녀왔습니다. 감사합니다. :-)
[한국근현대사] 8강, 재벌의 탄생과 근로기준법 : 전태일과 정주영, 이병철
1. 1960년대의 이해
- 1961 학생회담 등 통일운동 고양
1963.1.3. 민정당 결성(민주당 신·구파)
1964 제 1차 인혁당 사건
1965.6.22. 한일협정
1964.9. 베트남 파병
◆ 베트남전과 한국군 파병
1954.1.28. 이승만, 주한 유엔군 사령관 존 헐에게 한국군 1개 사단 파병 제안
1956.10.23. 남베트남 국민투표실시, 베트남공화국 수립, 남베트남 무장 봉기(베트콩)와 북의 지원
1964.5.9. 미국, 25개국에 남베트남 지원 호소 서한 발송
1964.9.11. 1차 파병
1965.3.16. 2차 파병, 건설지원단(비둘기부대)
1965.10.9. 3차 파병, 전투병력 파병 시작
1966.2 <미국대사 브라운 국무부에 서한>
‘…유일한 참전국인 우리 미국보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2~3배 더 많은 것이다. ’
1966.2.23. 한미합의의사록 서명, 브라운 각서 발송
군사부문 지원 : 한국국 현대화를 위한 장비 제공, 파병 장비와 일체의 경비 부담, 베트남 주둔 한국군 지원을 위해 C-54 수송기 넉 대 한국 공군에 제공
경제부문 지원 :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물자 중 결정된 품목과 기타 소요되는 품목을 최대한 한국에서 구매, 한국 기업의 남베트남 진출 기회와 용역사업에 참가할 기회를 제공, 한국의 경제 개발을 위한 차관 추가 제공-> 경제발전
1966.4.11. 백마부대 부산 출발
1968.2.12. 청룡 1중대, 퐁니·퐁넛 마을 민간인 70여명 학살
1968.3.16. 미라이 학살 -> 여기서 한국정부의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1971. 라오스 영토 내 호치민 통로 봉쇄 작전 개시, 라오스 중립 선언했지만 호치민 통로 묵인, 남베트남군 작전 실패. 미군 비밀 폭격
1973.3.23. 한국군 미군과 함께 철수
1975.4.30. 사이공 함락. 남베트남 패망
파병누계 : 약 8년 간 31만 2853명 참전
전과 : 사살 4만 1401명, 포로 4633명, 귀순 2482명
피해 : 4960명, 부상 1만 962명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자유우방 수호(도미노 방지)
경제성장 동력(미국 한국군 병사에게 2억3천6백만 달러 지불, 군수물자 판매 등 GDP 5배 성장)
군사적 이익 : 한미 동맹관계 강화, 한국군 현대화
베트남 민간인 학살
2. 위와 같은 시대상황을 바탕으로 지금의 ‘재벌’이 ‘정당한 방식’으로 성장 할 수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경유착’과 ‘노동착취’ 그 양 끝에 있던 사람이 전태일과 정주영, 이병철 이었던 것이다.
당시 경제성장 주요/동력 이슈는 원조경제, 경제개발계획, 한일협정, 베트남전쟁, 인력수출, 전태일, 경부고속도로(수출주도형 경제성장)로 설명할 수 있다.
[한국근현대사] 7강, 대통령과 재야의 대통령 : 박정희와 장준하
최근 다시금 주목 받고 있는(?) 박정희와 그와 반대편에 서있었던 장준하에 대한
연혁을 살펴보며, 그들의 삶과 그 시대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
1. 박정희
'박정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알고 계실텐데요~
3개국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던것, 쿠데타를 모의하던 과정 등 제가 새롭게 알게된 내용위주로 간단하게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문경/만주군관학교 -> 일본육사 3학년에 편입 -> 만주군 보병에 소위로 부임
1946 5.6
조선경비사관학교 제 2기생 재학 중 “10월 인민 항쟁” 발발
남노당 이재복이 박정희를 주목, 군사훈련경험/인맥/경상도출신/능력이 돋보였기 때문.
1949 박정희 무기징역(국방경비법 위반)-> 현역복귀, 육군8기생을 만나게 됨.
1952.5.29. 장면, 이종찬 -> 미대사관에 쿠테타 계획을 타진
1959.2 송요찬 – 부정선거를 명령
1960 박정희 – 쿠데타를 도모했으나 4.19로 인해 무산
1961 4.15 해병대 단독 쿠데타 모의 이후 몇 차례 준비했고 결국 5.16일에 실행하게 된다.
- 박정희의 연혁을 통해 살펴 본 내용 외의 것
(전 왜 이런 내용이 더 기억에 남을까요....?)
정인숙 사건, 한일협정, 베트남 전쟁, 문익환
2. 장준하
-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가
- <사상계>를 출판
* 이는 당시 자유당 정권을 신랄하게 규탄하며 4·19 혁명의 단초가 되었으며, 대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통일운동의 중심세력=학생)
중요 연혁 (+ 수업시간에 다뤘던)
1944 학병 자원입대
1945 광복군에 편입
1963 이후 야당의 길을 걷게 됨 -> 제 7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당선
제 3공화국 당시, 한일회담 반대와 박정희 비판 내용(출처 : 위키백과)
대선에서 장준하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있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장준하는 박정희 정권의 한일 협정을 일본 제국주의 군인 출신이 침략자이며 전범자 집단인 일본 자민당과 매국협상을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1964년 4월호를 긴급 임시증간호로 내놓았다. '한일회담의 제문제'는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이 나라 지식층의 의사를 비판적으로 담아낸 한일회담 반대진영의 교과서가 됐다. 이어서 1965년 7월에 '신(新) 을사조약의 해부' 를 또다시 긴급 증간호로 발행해 한일회담 반대진영의 이론적 교두보가 됐다.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집권층과 삼성의 이병철 사이에 유착이 있었다는 정보가 새어 나왔고, 야당과 대학생들이 전국적인 규탄대회를 열었다. 1966년 10월26일 민중당 주최 '특정재벌 밀수진상 폭로 및 규탄 국민대회' 에 연사로 참석했다. 장준하는 규탄대회에서 재벌총수와 정부 고위층 사이에 오간 내용을 폭로하면서 “우리나라 밀수 왕초는 바로 박정희”라고 비판하였다. 이어 "존슨 대통령이 방한하는 것은 박정희 씨가 잘났다고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오는 것" 이라는 발언도 주목을 받게 됐다.
장준하는 박정희와 재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다가, 박정희 밀수왕초 발언 등이 문제되어 구속, 한 달간 수감됐다가 1966년 12월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 뒤 1967년 2월의 공판에서는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 박정희의 반대편에 서있던 인물에 대한 탐구와 함께 더 생각해 볼 문제
1965 한일협정 이후 동아시아에 대한 개념 : 한·중·일+미국 중심으로 바뀌게 되었고 북한은 제외된 점
이상으로 후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한국근현대사] 답사① 현대 정치의 뿌리를 찾아서 : 북촌 일원
2013년 11월 9일 토요일 오전10시,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Ⅱ (현대 정치의 뿌리를 찾아서 : 북촌 일원)을 답사했습니다.
서울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단풍이 아름다운 시기에 답사를 하게 되었는데요.
이신철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휘문고등학교 옛터> <송진우 집터> <김성수 고거> <여운형 집터> <홍증식 집터: 계동열성자대회> <건국준비위원회 터> <한규설 집터> <헌번재판소:박규수 집터> <수운회관> <건국빌딩>까지를 돌아보니 그 궤적을 이해하는데 수월했던것 같습니다.
답사에 함께 못하신 분들 참고하시라고, 아주 압축적으로 정리된 자료를 공유합니다^^
지난 수업에서 잠시 공유했던 사진 구경도 제대로 하시라고 앨범도 공유합니다.
[한국근현대사] 5강, 권력을 향한 돌멩이질 : 이기붕과 김주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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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강에서는 1950년대 이후 시대상황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비교적 최근과 가까운 시점의 사건과 인물에 대한 것이어서 더욱 재미있었던 것 같은데요~!(그나마 조금 이해하기 쉬운 부분이 나와서 좋았어요!!!^^)
먼저, 격동의 시대에 대해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958년 경향신문 폐간, 보안법 파동
1959년 자유당 선거자금 모금
1960년 민주당, 부정선거 반대 운동(마산에서 시위를 시작)
3.15 부정선거(“부정선거무효”라는 시위 구문이 “이승만하야”로 바뀜)
4.18 고대생시위
4.19 비상계엄선포
4.25 교수단 데모
4.26 이승만하야
4.28 이강석(이승만의 양자), 이기붕, 박마리아, 이강옥 가족이 모두 자살
5.29 하와이 망명
여기서 이기붕(1896~1960)에 대해 좀 더 살펴보면, 그는 해방이후 이승만의 비서를 지냈으며, 자유당을 창단하였다. 1956년에는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고, 1960년 대통령선거 때 공개·부정 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4·19혁명이 일어나 결국 부통령을 사임하고, 경무대에 피신에 있다가 장남이 권총을 쏘아 전 가족이 자살하고 만다.
권력을 향했던 돌맹이질이 결국 자신에게로 되돌아간 것 같네요...!
수업의 주제가 이기붕과 김주열이니, 김주열에 대해서도 알아봐야겠죠?
그는(1943~1960) 1960년 마산상고 1학년의 몸으로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데모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 4월 11일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체로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됩니다. 이 사건이 불씨가 되어 민중의 분노가 다시 터졌고 결국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게 된 것이죠. 저는 이렇게 안타까운 사건을 마주하게 될 때면 항상 ‘나라면 어땠을까, 데모에 참가했을까?’ 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글로 읽기는 쉽지만 정말 그 상황 속에 처해있다면 그저 당연한 것이 아니기에 한 번 상상해 보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그렇게 어려운 결정을 한 사람이 처한 상황이, 그 시대가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부정선거로 인한 국민의 분노는 당시의 시대상황인 것 같지만은 않기에 우리는(특히 저는) 역사를 배우고 그들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럽게 수많은 희생으로 지켜낸 민주주의를 우리는 왜 또다시 위협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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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지켜낼 수도 있으리라 믿습니다.
Q&A 시간에는 전교조 불법화의 영향에 대한 것과 독립운동/민주화운동이 근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내용을 언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 다음주에 만나요~!^.^
감사합니다.
[한국근현대사] 4강, 전장의 민중 : 금순이는 어데로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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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세어라 금순아
- 월남과 피난 : 전쟁폭격을 피해서 내려간 사람들, 피난민/이산가족
- 월북과 납붑 : 단장의 미아리고개
- 국군포로
죽어간 민중들
- 평화에 대한 개념 -> 군대를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문화
- 보도연맹원 학살
◆ 보도연맹 사건 :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초기 후퇴 과정 중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 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협조할 것.’이라는 의심을 했다.
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가 북한과 내응하고 뒤에서 배신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우려한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국군(주로 헌병대), 경찰 또는 교도소 교도관들은 '북한군에 아직 점령되지 않고, 확보해두고 있는 남부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을 무차별 검속하고 즉별 처분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서북청년단같은 반공주의 성격의 극단적인 우파단체가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에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우발적인 학살이 아닌 철저히 일관된 명령체계에 의해 자행된 조직적인 학살이었다.
※ 위키백과 참고
- 진주외공리
‘사라진 사람들-1951년 외공리’ 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에 관한 진상규명의 유형 속에 철저히 예외적 사건에 속하며, 국가차원의 그 어떤 조사자체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산청군 외공리 사건에 대한 전말을 밝히고자 하였다.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키워드)
국가보안법, 빨갱이콤플렉스, 과거청산, 월북
살아있는 것이 역사,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전쟁 이라는 말로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
[한국근현대사] 3강, 계급과 민족, 그리고 좌우합작 :박현영, 김일성, 여운형
안녕하세요.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의 자원활동가입니다.
인사가 늦어져서 너무나 죄송합니다.
앞으로 강의 후기를 부지런히! 열심히!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10.24(3강)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도록 하겠습니다.
<계급과 민족, 그리고 좌우합작 :박현영, 김일성, 여운형>이라는 주제로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수업내용을 다시 한 번 살펴보기 전에, 근현대사 강의를 2학기 째 수강하고 있는 저를 항상 따라다니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바로 수업내용이 항상 새롭다는 것인데요, 좋게 말하면 새로워서 흥미롭다는 것이고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름 사회과목을 제일 좋아하고 역사도 잘했던 것 같은데...저는 왜 수업시간 마다 처음 듣는 얘기로 가득한 걸까요?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고등학교1학년 이후로는 역사를 접한 기억이 없던 것이었습니다. 수능을 볼 때 역사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모를 수 있나 싶기도 하지만, 지금이라도 하나하나 알아갈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고 기쁜일인지요!
서론을 이렇게 길게 말하는 이유는, 그래서, 제가 아는 것이 너무 없어서 수업내용을 충실히 정리하여 옮기지는 못하겠고
저에게 있어 인상 깊었던 것, 중요한 것, 앞으로 생각해 볼 점 등을 위주로 후기를 작성하겠다는 말을
조심스레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정말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1. 김일성(1912~1994) 과 조선인민혁명군
김일성의 연혁을 살펴보며, 그가 어떤 생애를 살았는지, 어떻게 신화가 제작 되었는지 등 배울 수 있었습니다.
민족주의와 기독교의 영향, 중학생 때부터 중국에서 활동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36년 조국광복회 조직
1937년 보천보 전투
◆ 보천보 전투 : 중일전쟁 직전 함경남도 갑산군 혜산진 보천보에서 동북항일연군 항일군이 일제 관공서를 공격 후,
포고문과 격문 살포한 사건 -> 김일성의 존재를 알리고 신화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됨, 중국공산당 내 새로운 부대 대장
1945년 조선공작단
◆ 조선공작단 :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하던 세력 가운데 일본군의 공세로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에
소련 지역으로 피신한 이들로 88여단이 구성되었다.
소련은 1945년 독일이 패배하고 일본제국의 패망이 임박하자 88여단 내에 있던 조선인들로 ‘조선공작단(단장: 최용건)’을 결성 하고
유사시 입북을 준비하게 하였다. 이때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단 조선공작단 정치군사 책임자였으며,
뒤에 소련군 소좌로 승진했다. /소련군과의 연합작전
◆ 민생단 사건 : 1930년대 간도 지역에서 수많은 조선인 항일운동가들이 민생단과 관련된 일본 첩자라는 혐의를 쓰고
중국공산당에 의해 체포, 살해된 사건이다.
2. 박헌영(1900~1955)
1925년 조선공산당 창립 : 1925년 조직된 우리나라 최초의 공산당.
러시아혁명의 성공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쳐 사회주의 사상이 적극 유입되고,
윌슨 미국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와 파리 강화회의 결과에 실망한 독립운동세력의 일부는 약소 피압박민족의 해방투쟁에
적극적인 코민테른에 기대를 걸면서 그 지원 하에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
1946년 남조선노동당 조직 : 1946년 박헌영(朴憲永)을 중심으로 11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과 남조선신민당(여운형이 창단)
3당이 합동하여 남한에서 좌익정당들은 세력을 재정비하기 위해 결성했다.
◆ 1945년 북조선 노동당 창당 : 강령으로 민주주의적 조선자주독립국가 건설,
일본인 ·민족반역자 ·지주의 토지몰수와 토지 없는 농민에게 무상분배[토지개혁],
일본인 및 민족반역자 소유의 공장 ·광산 ·철도 ·운수 ·통신기관 등의 국유화, 8시간 노동제 실시, 여자들에게 남자와 동등한 임금 지급
등을 내걸었다. 위원장에 김두봉, 부위원장에 김일성, 허가이가 선출되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김일성이란 인물과 당시 북과 남의 시대상에 대해 자세히 살펴 볼 수 있어 유익한 강의 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