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정보
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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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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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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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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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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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의 어제와 오늘
- 고대 힌두교
- 요가, 바가바드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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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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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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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삶과 가르침
- 인도불교의 발전과 쇠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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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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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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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불교
- 선불교, 티벳불교, 서양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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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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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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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나교와 시크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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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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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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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종교, 유교
- 공자 맹자 순자
- 신유학, 유교의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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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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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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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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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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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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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도의 유래, 현대의 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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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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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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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역사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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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9
세계종교의 이해2를 듣고
오강남 선생님께
선생님,
매주 월요일 저녁마다 좋은 이야기를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다양한 종교를 간략하게나마 소개받으면서
시공간적 태생이 서로 다른 종교 모두가
결국 어떤 '하나'에 가까워지기 위해 고뇌한 인간들의 정수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유머와 유머 사이의 쉼표 같았던 순간들도 기분 좋았습니다.
소통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이 강의를 위해 힘써주신 관계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이 강의를 수강하진 못했지만 무척이나 듣고 싶어 했던 친구의 이야기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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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ㄴ가 오강남 선생님의 강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마음이 환해졌다.
말 몇 마디 혹은
글 몇 줄로 하루가 환해질 때가 있다.
[세계종교의 이해Ⅱ] 8강<노장와 장자 그리고 신도와 동학> 종강후기 전합니다^^
△참여자들의 종강 소감 포스트잇
-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어렸을 때 부터의 ‘의문’ ... 종교에 대한 모든 의문들이 많이 풀렸습니다. 건강하세요.
-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강의 감사합니다.
- 동학에 대한 새로운 발견. 동학 공부를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장자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듭니다. 선생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 여러 종교에 대한 깊이 있는 설명, 감사하게 잘 들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뭔가 정학하게 딱 집어서 말할 수는 없겠지만 뭔가 외연이 넓어진 느낌입니다. 다시 한번 만나 뵐 수 있는 강좌가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장자는 꼭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더 자유로워지는 그날까지 많이 이끌어주세요.
- 너무 좋았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 그 간 유연하고 유쾌한 명강의! 감사합니다. 넓어진 느낌 자축합니다!
- To. Sir ... With love & respect!
- 여러 종교에 대한 흥미와 자극을 환기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의 사유를 확장시키는데 앞으로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소박하지만 뜨거웠던 종강 뒤풀이
[세계종교의 이해Ⅱ] 7강, 유교와 신유학
오늘은 지난번의 유교 강의에 이어 공자를 마저 배우고, 차례로 맹자, 신유학까지 함께 공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교수님 말마따나 드라마가 제일 중요한 장면 직전에 끝나며 다음 화를 궁금하게 하듯, 도교 맛보기도 살짝.
1. 공자의 의(義)와 맹자의 사양지심(辭讓之心)
공자가 말한 ‘의’는 옳은 일이면 상관하지 않고 하는 태도입니다. 이득을 추구하는 태도인 ‘이’와 대조되는 개념이죠. 교수님께서는 요즘은 다들 ‘이’를 따져서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요즘 말로 바꾸면 ‘경제’잖아요. 우리는 자본주의, 경제제일주의를 당연하게 여기고 ‘이’를 따지는 데 익숙한 나머지 그 폐해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생각하면 경우에 상관없이 자연히 ‘의’가 상하게 됩니다. 교수님께서는 그 이치를 나무 베는 것에 비유해서 풀어주셨는데 참 잘 와 닿더라고요.
맹자 또한 양혜왕이 나라에 무엇이 이로울지 말해 달라 하자 ‘왜 이를 말하느냐’고 꾸짖었습니다. 왕이 이를 말하면 신하도, 백성도 할 것 없이 이를 추구하게 될 것이고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이라면서요. 이러한 유교 사상 때문에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사농공상이라 하여 상인을 가장 천하게 보았던 것이고, ‘이’를 추구하는 자는 도둑이라는 말까지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지금은 시민, 공무원, 대통령 할 것 없이 ‘이’를 말하지, ‘의’를 말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교수님께서는 각 나라의 지도자들은 남의 나라, 내 나라 할 것 없이 나라를 훔쳐 먹고, 성직자들은 사람의 마음을 훔쳐서 먹는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공자는 “언제나 사람의 인격을 목적으로 대하고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 했거늘 이 세상에는 물질을 갖기 위해 사람을 이용하는 일이 너무 비일비재합니다.
저는 오늘날의 사양지심이 드문 세태 또한 ‘이’를 추구하는 태도와 연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양지심은 유교에서 중시되는 맹자의 '사단'의 세 번째 덕목입니다. 사양하고 양보할 줄 아는 마음이죠. 교수님께서는 우리나라에는 이제 사양지심이 없다며 아는 사람끼리만 양보하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셨습니다. 남을 모르고, 내 인격은 뒷전으로 한 채 이익 챙기는 데 급급한 현대인들의 생활방식에서는 양보와 사양을 기대하기가 힘들겠죠.
2. 고래도 춤추게 하는 성선설, 노력하도록 채찍질해주는 성악설
맹자는 성선설을 말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반대로 순자는 성악설을 가르치죠. 중학교 때 친구들과 성선설이냐 성악설이냐를 놓고 옥신각신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데, 교수님께서는 이 둘이 궁극적으로는 같은 바를 지향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소인에서 군자, 성인으로 ‘변화’하는 것이지요. 단지 변화를 위한 성선설의 방법과 성악설의 방법이 다른 겁니다. 맹자의 성선설은 ‘너는 군자의 기질이 있으니 최선을 다해 성인으로 거듭나거라’하면서 칭찬을 통해 동기부여를 합니다. 순자의 성악설은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너는 소인배에 불과하니 정신 차리고 열심히 노력해서 위대한 성인이 되거라’는 식으로 자극하여 변화를 유도합니다. 오강남 교수님께서는 요즘의 트렌드는 맹자의 성선설에 가깝다고 하시네요. 제가 보기에도 기왕이면 좋은 말로 격려를 해주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3. 우리나라의 보배, 신유학
신유학은 유교 2탄이라기 보다는 불교, 도가 사상까지 아우르는 일종의 거대한 종합 사상체계입니다. 수, 당대를 지나 송대에 와서 일종의 유교 부흥 운동처럼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 지금 우리가 신유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인이 되기 위한 가르침을 모았다고 하여 성학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만주족의 청 왕조가 들어서면서 신유학의 계보가 거의 끊기다시피 했습니다. 대신 우리나라에서 주자학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신유학이 발전할 수 있었고, 현재 한국은 유교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생활 속에 유교 전통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한국에 이렇게 기독교인이 많은 게 부끄러운 거다’라고 까지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좋은 우리의 유교를 놔두고 왜 남의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냐는 거죠. 다소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유교를 청산해야 할 악습처럼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이기도 합니다. 남녀, 스승과 제자, 부모, 형제 등의 관계 간에 서열을 만든 것은 유교의 잘못된 형식주의입니다. 사실 유교는 ‘의’를 비롯하여 마음에 새기고, 머리에 담아두었다가 계속해서 꺼내보아야 할 좋은 가르침을 듬뿍 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 공헌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신유학을 연구하는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저부터도 그동안은 ‘유교’하면 고리타분하다거나 딱딱하다는 인상부터 떠올렸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유교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늘은 강의 내용 중에서도 몇 가지만 추려서 후기를 썼습니다. 맹자의 다른 가르침들이나 신유학의 구체적인 내용, 도교 이야기를 빠뜨려 성에 차지는 않지만 간결한 후기도 괜찮지요? 사실 이 게 저의 마지막 후기입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다음 주에 있을 마지막 강의에는 갈 수가 없어서요. 성대한 뒷풀이도 있을 텐데...... 씁쓸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도교를 마저 배우고 동학에 대해서도 알아볼 수 있다고 하니 다른 분들이 잘 들으신 뒤에 저 대신 후기 좀 올려주세요.ㅎㅎ
저의 굴곡의 2013년을 세계종교 강의로 어루만져주신 오강남 교수님 감사드립니다! 강의를 위해 힘쓰신 참여연대 분들, 함께 수업을 들은 다른 수강생 분들도 모두 수고하셨어요.
또 만나요. 언젠가, 어딘가에서.
[세계종교의 이해Ⅱ] 6강, 자이나교와 시크교, 동아시아의 종교.
힌두교 2강, 불교 3강을 지나 벌써 여섯 번째 강의에 이르렀습니다. 오늘은 공자의 말씀과 제자들과의 대화를 모은 논어 몇 구절로 시작해서 인도의 자이나교와 시크교, 동아시아 종교의 특징을 공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유교에 대해 진도의 절반 정도를 나가고 나니 두 시간 반이 꽉 차더군요.
오늘의 강의 후기는 강의 내용보다 강의를 들으며 제가 생각한바 위주로 적어나가려 합니다. 자세한 강의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오강남 교수님의 저서 <세계 종교 둘러보기>를 참고하세요. 그동안의 제 후기보다 잘 정리되어 있답니다. ^^
1. 인도의 종교, 자이나교와 시크교
자이나교와 시크교 파트에서는 ‘아힘사(불살생)’ 이야기를 하고 가겠습니다. 아힘사는 인도 대부분의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가치입니다. 특히 자이나교는 코로 들어가는 벌레가 없도록 마스크를 쓰고, 밝혀 죽는 생명이 없도록 빗자루를 쓸며 길을 지나다니기도 할 만큼 아힘사를 철저하게 실천한다고 합니다. 일찍이 우리는 간디가 아힘사를 중시했다는 것, 슈바이처 박사가 생명 경외를 추구했다는 것을 배웠었죠. 둘 다 자이나교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도 종교 중에서 유일하게 시크교만은 아힘사를 반드시 따를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신이 창조한 것 중에서 최고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때 사회생태주의의 북친이 생각났습니다. 모든 생태주의자들이 동등한 생물권을 말할 때 북친 역시 ‘다른 생물들과 동등하게 보기에 인간은 너무 진화했다’고 말했거든요. 그러므로 북친은 인간이 환경을 파괴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다른 생물들을 돌볼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말하긴 합니다. 어쨌든 인간이 다른 생물들과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생명인가, 아니면 좀 더 특별한 의미를 갖는 창조물인가 하는 점이 불교에서도, 생태주의에서도 갈리네요. 답은 우리 각자의 판단에 맡기는 걸로 하겠습니다.
아힘사를 지켜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종교마다, 주의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인간이 생태계의 먹이사슬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살생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 있을 수 있고, 그렇더라도 생명을 존중하고 아끼며 노력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단지 제 나름대로는 아힘사가 옳지만 나의 덕이 부족하여 실천에 어려움이 있을 따름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특히 요즘과 같이 비윤리적인 대량 살충·살육과 자연의 순환 고리에서 벗어난 공장형 축산업의 세상에서는 더욱 불필요한 살생을 경계해야 할 것 같아요. 교수님께서도 이에 대해서 꽤 시간을 들여 말씀해 주셨답니다.
2. 동아시아의 종교
동아시아는 예로부터 유불도, 또는 유불선이라 하여 서로 다른 종교들이 적대감 없이 공존했습니다. 1886년에 한국에 왔던 선교사 헐버트는 이렇게 말했죠.
“사회생활을 할 때는 유교인, 철학적 사색을 할 때는 불교인, 그리고 문제에 부딪혔을 때는 영혼숭배자(무속인)가 된다."
잠깐 삼천포로 빠지자면 역시 비교종교학이 중요한 학문이네요. 헐버트가 종교들이 갈라져 싸우던 서양에서 자라난 외부인이기 때문에 동양 종교에 대한 이러한 관찰이 가능했을 겁니다. 전 대한민국 사람인데도 헐버트의 말을 듣고 나니 ‘아 그렇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전통적으로 조화를 이루던 동양인의 종교관은 서양의 종교관에 익숙해진 현대의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저번 강의 때 제 옆에 앉으셨던 분의 말씀이 기억나네요. ‘종교의 믿음에 매몰되지는 않지만 각 종교마다 우리보다 먼저 삶을 겪고 고민을 했던 위대한 성인들의 가르침이 있어 그 지혜들을 쏙쏙 뽑아내면 내 인생에 좋은 지침이 된다.’
믿음이 꼭 하나여야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세계 종교 강의를 들으니 모든 종교들이 훌륭한 가르침을 가지고 있고, 배울 점들이 있습니다.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해도 전체를 배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자이나교의 천의파는 하늘의 옷을 입었다는 의미로 나체로 다닙니다. 저는 오히려 여기서는 참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천의파에서는 여자는 유혹자일 뿐 해탈에 이를 수 없다고 믿는다고 해서 실망스럽더라고요. 그렇다고 ‘천의파 나쁘다!’가 아니라 천의파에서 배울 점도 있지만 당시의 인도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거라고 받아들이는 게 옳은 것이겠죠.
동아시아의 종교들이 공통적으로 뿌리박고 있는 몇 가지 개념 중 하나인 음양도 동양의 조화로운 종교관을 잘 드러내줍니다. 음양은 우주가 음과 양의 상관관계로 이루어졌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도 잘 알다시피 음은 여성, 차가움, 어둠, 습함, 부드러움 등을 대표하는 원리이고 양은 남성, 더움, 밝음, 건조함, 강함 등을 대표하는 원리입니다. 언뜻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가 싶어도 음양의 원리는 두 가지가 상호작용하여 세상을 이룬다고 보는 조화로운 사고의 산물입니다.
<그림 1>음양의 상징물. 흑과 백이 균형잡힌 모습으로 어우러져 있다.
3. 공자가 창시한 유교
공자는 겸손하게도 술이부작(옛날부터 내려오던 것을 그대로 전수할 뿐 새롭게 창작한 것은 없다)이라 했지만 그는 분명 유교의 창조적 전수자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유명한 다음 글귀는 그의 삶을 집약하고 있다고 해요.
내가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지학), 삼십에 일어서고(립), 사십에 흔들림이 없어지고(불혹), 오십에 하늘의 뜻을 알게 되고(지천명), 육십에 하늘의 뜻을 쉽게 따를 수 있게 되고(이순), 칠십에 하고 싶은 바를 해도 올바름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종심소욕불유구). -<논어> 2장 4절
누구나 다음과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왜 나는 이런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 ‘이 세상의 근원은 어디일까.’ ‘가끔씩 괜찮고, 종종 힘들어야 하는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럴 거면 대체 누가 나에게 생명을 준 건가.’ ‘도대체 나 같은 인생이 있는 이유가 있긴 한가.’ 어릴 적 농담 삼아 생일축하 노래를 개사해서 부르던 <왜 태어났니> 노래(가사: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인구도 많은데 왜 태어났니)가 단지 재밌게만은 들리지 않는 순간이 있는 것이죠.
그럴 때 공자의 저 말이 큰 위로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법륜스님이 ‘이미 태어난 것을 어쩌겠느냐, 왜 사는지를 찾기보다는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일단 ‘어떻게’를 위해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공자처럼 흔들리지 않는 때가 있고, 하늘의 뜻을 알게 되고, 하고자 하는 바를 해도 그 뜻에 거슬리지 않는 날이 오는 거라고 생각해야겠습니다. 인생 길게 봐야죠!ㅎㅎ 중학교 도덕시간에 저 글귀를 배웠던 거 같은데 그 때는 뜻도 이해 못하고 그저 외우기만 했네요. 이제 보니 위대한 스승 공자의 70년 생이 모두 녹아있는 말인데 말입니다.
그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유교에서 수없이 많은 덕목들을 이야기합니다. 그 중에서도 교수님께서는 핵심적으로 정명(正名), 인(仁), 의(義), 충(忠)과 서(恕)를 꼽아주셨는데 저는 특히 ‘의’가 좋더라구요.
의는 이(利)와 대조를 이루는 덕목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에 따라 판단한다면 군자는 ‘옳은 일인가?’를 묻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나에게 이롭든 아니든 실천한다는 것이죠.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에 밝다’
이 말이 근 며칠 동안 시시때때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또 다시 떠오르곤 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그동안 이를 따지던 인간이었나 하는 한심함과 함께 앞으로는 ‘옮음’을 굳건히 따르리라 다짐했습니다. 마침 진로에 대한 것이나 미래에 대해 많이 혼란스러웠었는데 이제 좀 간단해진 것 같아요. 옳은지 아닌지를 따지는 일만 해도 머리가 복잡하니까 옳은 길을 갈까, 이득이 되는 길을 갈까 가지고는 고민하지 않으려 합니다.
정명(이름을 바르게 한다)은 주어진 이름에 맞도록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전 사실 여기에는 첫째, 이름 중에는 내가 택하지 않은 것도 있고, 둘째, 나의 여러 가지 이름들에 주어진 역할들이 충돌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동의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걸 사회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전자는 귀속지위, 후자는 역할갈등 쯤 되겠네요. 사람 나고 이름났지, 이름나고 사람이 난 건 아니잖아요? 공자가 말하고자 한 것을 제가 오해한 걸지도 모르지만 공자는 당시 신분, 나이, 지위 등에 따른 서열이 엄격하던 시대에 맞추어서 큰 혼란이나 문제가 없길 바라며 이러한 가치를 말한 게 아닐까 합니다.
인도 참 좋은 가치인데요, 사람됨을 의미합니다. 사람됨에 대해서는 공자의 대답도 늘 바뀐다고 하고, 쉽게 정의내리기 힘들지만 직(直)과 예(禮)를 두 가지 요소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직은 솔직하게 남을 속이지 않고 마음을 거짓 없이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고, 예는 그렇더라도 남에게 실례가 되지 않게끔 예의를 갖추는 것인데 이 둘을 균형 있게 유지해야 인입니다.
제가 이번 여름에 엄마와 크게 다투고 나서야 절실히도 깨달았던 것을 역시 수천 년 전부터 공자가 이야기하고 있었네요. 솔직한 것일 뿐이니까 괜찮을 거라는 생각에 속마음을 이야기한다 해도, 이해와 배려를 놓친 솔직함은 폭력에 가깝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맹자, 순자와 함께 유교를 마저 공부하고 노자, 장자가 있는 도교까지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그들의 인생은 우리에게 또 어떤 의미를 남기고 떠났을지 기대해봅니다.
[세계 종교의 이해Ⅱ] 5강, 동아시아의 불교
10월에 어울리지 않는 후텁지근한 날씨를 피해 많은 분들이 느티나무 그늘 아래 모였습니다. 오늘은 강의 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부원장님께서 반야심경으로 시작을 여시네요.
반야심경은 불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경이라서 그리스도교들이 주기도문 외우듯이, 불자들은 반야심경을 거의 외운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수강생 대부분은 불교를 잘 몰라서 배우러 온 사람들이지요. 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법어 반야심경 대신 시처럼 예쁘게 다듬어진 한글본 반야심경을 함께 음미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수행이 부족해서 그런가 좋은 말인 것은 알겠는데 제대로 이해가 닿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역시 오강남 교수님은 저 같은 속인들을 위해 강의안에 들어있지도 않은 반야심경에 대해 즉석에서 척척 풀이하십니다. 멋져요!
서양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선불교가 가장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합니다.
선종이라고도 하는 선불교는 원래의 범어로는 명상이라는 뜻의 ‘dhyana[자나]’라고 합니다. 이것이 중국에 오면서 ‘찬나(禪那)’가 된 것이 우리나라에 와서 ‘선(禪)’으로 읽히게 되고, 일본에서 ‘젠[zen]’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스즈키 다이세쯔로부터 처음 선불교를 전해 받았으므로 그 영향이 지금까지 이어져 Zen buddhism이라고 합니다.
한국불교는 융합하려는 노력을 통해 중국에서 갈라졌던 여러 종파들이 교와 선으로 통합되어 통불교라고도 합니다. 통불교인 한국불교에서는 교보다 선을 중시하여 ‘선주교종(선이 주고 교는 따른다)’, ‘사교입선(이론을 버리고 선에 든다)’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선불교는 붓다의 제자였던 마하카샤파를 1조로 시작되었습니다. 붓다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던 중 연꽃을 들어 보이니 마하캬사파만이 뜻을 알고 웃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염화시중(꽃을 들어서 사람들에게 보였다.), 염화미소(꽃을 드니 마하카샤파가 웃었다.)가 여기서 나온 말이지요.
시간이 흘러 기원후 6세기경, 28조인 보디다르마가 인도를 떠나 중국으로 갔습니다. 이 보디다르마가 바로 우리가 아는 중국 선의 1조 ‘달마’이고, 여기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화두가 생겨났습니다.
선의 가장 기본 가르침은 깨달음, 바로 각(覺) 또는 오(悟)입니다.
무엇을 깨닫는 것이냐고 한다면 바로 내 속에 불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강남 교수님께서 도마복음에도 “네 속에 하느님을 깨달아라.”라는 비슷한 말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교의 복음서에 대해 재밌는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는 꼭 서양 종교에 대한 교수님의 강의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다시 돌아와 선의 가르침에 의하면 내가 지금 힘든 것은 내 안에 부처님이 있는 걸 몰라서입니다. 이 상태를 무명, 법어로는 avidya, 영어로 ignorance라고 합니다.
교수님은 무명의 상태를 원숭이에 비유하여 말씀해주시네요. 아프리카에서는 코코넛에 작은 구멍을 내서 원숭이를 잡습니다. 코코넛 구멍에 손을 넣은 원숭이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손을 움켜쥐고 있다가 결국 팔이 빠지지 않아 잡아먹히고 맙니다.
무명의 우리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무명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 것은 많은 종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포인트입니다. 신체의 자유나 내 마음대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자유가 아니라 내 안의 부처를 깨달음으로써 얻는 자유인 것이죠.
전 이상하게도 여기서 갑자기 노래 ‘마법의 성’의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라는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무명에서 벗어나면 이 노래처럼 구름을 뚫고 하늘로 날아올라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만 같지 않나요? 그런데도 막상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돈도 사랑도 명예도, 지금의 이 안락도 계속 쥐고 있고 싶습니다. 원숭이를 비웃을 일이 아니네요.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깨달아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걸까요? 선불교는 그 방법으로 사물을 여여(如如), 여실(如實)하게, 곧 있는 그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불언지교(不言之敎), 깨달음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며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 등을 통해 마음으로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 역시나 힌두교를 떠올리게끔 하는군요. 심층종교들이 보편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 비슷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을 담은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달이 깨달음이고, 손가락이 깨달음에 이르는 수단이라면, 손가락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손가락이 달을 가려서는 안 되고, 우리들도 손가락이 아닌 달을 보려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살불살조(殺佛殺組)로 이어집니다. ‘내 깨달음에 조사가 방해되면 그 조사를 죽여라. 내 깨달음에 부처가 방해되면 부처도 죽여라. 죽어 마땅하다.’라는 겁니다. 아무리 부처라 할지라도 내 깨달음에 도움을 주지 않고, 방해만 된다면 성이 아닌 속으로 분류됩니다. 교수님께서는 ‘예수를 죽여라’라는 가르침은 기독교에서는 어림도 없을 거라고 말씀하시네요. 그렇죠, 바로 그래서 불교가 참 매력이 있습니다. ^^
선의 깨달음에 대해서는 서양의 철학자, 심리학자들이 다양한 견해를 내놓고 있는데 그 중 켄 윌버의 해석이 흥미롭습니다. 켄 윌버는 우리의 의식을 미이분법적 의식(pre personal consciousness), 이분법적 의식(personal consciousness), 초이분법적 의식(trans personal consciousness)으로 나눕니다. 미이분법적 의식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 이전, 자의식이 없던 상태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수님은 6~70년대의 히피들이 이 단계에 있었던 거라고 하셨습니다. 자신들은 이성을 초월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이성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우리들은 이분법적 의식으로 살아갑니다. 부끄러움과 모자람을 알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역사를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초이분법적 의식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깨달음을 통해 넘어갈 수 있는 단계입니다. 이성을 초월하는 종교의 영역이죠.
선불교에 이어 우리나라, 일본, 티벳, 서양의 불교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졌습니다.
조선시대까지의 우리나라 불교 역사에 대해서는 고등학교 때 국사 공부를 하면서 자세히 외워서 기억이 나는데 근대 불교에 대해서는 오강남 교수님으로부터 처음 들었습니다. 억불정책의 조선에서 일제시대로 넘어가면서 우리나라 불교는 일본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스님들도 더 이상 괄시받지 않았고, 절도 사대문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대처승이 많아졌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불교는 거의 다 대처승이어서 지금까지도 절을 아들에게 세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해방 이후 비구승만 남고 대처승들은 다 나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당시에는 대처승이 수천 명이었고 비구승은 불과 수백 명 정도가 있을 뿐이어서 소수가 다수를 밀어내기 위해선 외부의 힘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조폭들이 동원되었죠. 지금도 그 때 조폭들이 불교계에 개입했던 영향이 남아있어 과거 청산은 우리나라 불교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입니다.
일본 불교 중에서는 료부신토 같은 재밌는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니치렌슈가 기억에 남습니다. 니치렌슈는 매우 국수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성격의 불교로 일본을 대일본이라고 부르거나 욱일승천기를 그린 것도 니치렌슈에서 나왔습니다. 아름다운 종교의 가르침을 계승하는 과정에서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성향을 띠게 된 다른 종교들이 생각나며 씁쓸한 기분이 들었네요.
티벳 불교는 토속 종교와 어우러지면서 독특한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밀교의 특징을 가졌다고 말해지는데요, 주술을 강조하며 주문을 많이 외웁니다. 특히 우리나라 드라마를 통해 유행어가 되기도 했던 ‘옴마니 반메흠(Om mani padme hum)’이 가장 많이 외워집니다. 티벳 불교에는 큰 학파가 두 개 있는데 이름이 참 귀엽습니다. 노란모자 학파와 빨간모자 학파입니다. 이 중 다수를 차지하는 노란모자 학파의 지도자가 우리가 잘 아는 달라이 라마입니다. 달라이 라마의 뜻이 ‘큰 바다 같은 스승’이라는 것을 아셨나요? 학파 이름도 그렇지만 정치적·종교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이름에 바다가 담겨있다니 티벳 불교는 꽤 감각적인 듯합니다.^^
서양 불교는 elite buddhism, white buddhism, new buddhism이라고도 부릅니다. 기복적이거나 의례를 중시하기보다는 참선을 중시하고, 현재 불교의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한 남녀 차별 대신 남녀평등을 지향합니다. 또한 종파주의 대신 연합주의, 종교적 고립 대신 종교 간의 대화를 추구하여 몇몇 학자나 스님들은 서양불교를 역수입해 배워야 한다고 보기도 한답니다.
강의의 마지막 30분은 둘씩 짝을 지어 세계 종교의 이해를 수강하며 변화한 점이나 느낀 점 등을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서로 발표해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강의 후 카페통인에서 두 번째 뒷풀이를 함께했습니다. 수강생 중 한 분이 가져오신 와인이 어찌나 맛있던지 저는 제 안의 부처를 깨닫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와인의 매력을 깨달았네요! 성함을 까먹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아무래도 강의를 몇 번 듣고 나서인지 첫 뒷풀이 때와 달리 어색함이 풀린 채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서로 궁금한 점이나 생각한 점들을 이리저리 나누다 보니 다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시계 보고 깜짝 놀라서 일어났죠. 강의도 강의이지만 이렇게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배우는 점도 많은 것 같습니다.
밤이 깊어가는 만큼 종교에 대한 이해도 깊어갑니다.
[세계 종교의 이해Ⅱ] 4강, 동아시아의 불교
끊김 없이 오강남 교수님의 종교 이야기를 따라가고 싶었는데 지난 번 강의를 듣지 못해서 너무 아쉬웠습니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놓치고 싶지 않았었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오강남 교수님의 책, ‘세계 종교 둘러보기’를 빌렸지요. 교수님 말씀을 직접 듣는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수업 내용이 이 책에 기반하고 있으니 수업을 듣지 못한 분들은 물론 예습, 복습을 하고 싶은 분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수강생들에게는 오강남 교수님께서 매주 한 분씩 책을 빌려드리고 있습니다.
지난주 강의에서는 붓다의 출생부터 성장과 깨달음을 얻은 과정, 죽음에 이르기까지를 듣고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번 주 강의는 붓다의 입멸 이후, 불교의 발자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 초기 경전의 성립
붓다가 열반에 들고 제자들이 붓다의 말씀을 모으고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를 결집이라고 합니다. 1차 결집은 제자 크샤파가 붓다의 제자이자 사촌인 아난다에게 붓다가 하셨던 말씀을 그대로 외우도록 부탁한 것을 이릅니다. 아난다는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여시아문, 如是我聞)”는 말로 시작하여 붓다의 말씀을 줄줄 외우는데 이를 경(經, Sutra)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제자 우팔리가 주로 규범이나 예법에 관한 붓다의 말씀을 읊는데 이를 율(律, Vinaya)라고 합니다. 경과 율은 구전되어 내려오다가 후세에 글로 옮겨집니다. 마지막으로 후대 학자들이 경이나 율에 주석을 단 것이 론(論, Abhidharma)입니다. 이렇게 경, 율, 론을 ‘세 개의 바구니’라는 뜻의 트리피타카(tripitaka)라고 부르고, 한문으로는 삼장(三藏)이라고 합니다.
2. 대승불교의 등장
불교는 시간이 흐르며 여러 부파로 나뉘는데 크게 대승불교(Mahayana)와 소승불교(Hinayana)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소승불교가 개인적 수행을 통해 아라한이 되려는 소수 엘리트 중심의 불교인 데 반해 대승불교는 보살 정신을 추구합니다. 당장 열반에 들 수도 있지만 자비심이 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힘쓰면서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소승불교는 주로 스리랑카, 버마, 태국 등으로 퍼져서 남방불교라고도 불리고, 대승불교는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으로 퍼져서 북방불교라고도 합니다.
대승불교에는 중관학파와 유가학파가 대표적입니다. 중관학파는 나가르주나가 창시한 학파로 공(空) 사상을 가장 중시합니다. 궁극실재·절대는 제한을 받을 수 없으므로 비었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공(空) 사상입니다. 힌두교의 브라흐만과 매우 흡사한 대목입니다. 또한 진속이제라 하여 진리를 궁극진리(permanent truth)와 일상진리(conventional truth)로 나눔으로써 현실에서의 혼란을 피합니다.
유가학파는 오로지 의식만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유식학파라고도 합니다. 우리의 의식만은 공(空)하지 않다는 일체유심조, 우리의 의식이 시작되고 들어가는 알라야식(Alaya-vijnana)의 개념을 가르칩니다. 알라야식은 칼 융의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과도 통하는데, 우리의 생각들이 실제로는 개인적인 경험이나 성정을 토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공동 저장소인 알리야식으로부터 나온다고 합니다. 또한 여래장이라고 하여 우리가 모두 부처님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유가학파의 가르침입니다. ‘나’안에 진리가 있다는 이러한 가르침은 힌두교를 비롯한 여러 심층종교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내용입니다.
3. 중국의 불교
부모님에게서 받은 신체를 훼손할 수 없고, 자손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중국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구도에만 전념하라 하는 불교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3~4세기경의 정치 상황에 잘 맞았고, 불교에 귀의하는 것은 인류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이 받아들여져 불교가 퍼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발전한 중국의 불교는 크게 삼론종, 유식종, 천태종, 화엄종, 정토종, 선종의 여섯 종파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삼론종은 나가르주나의 사상을 토대로 성장했고, 유식종은 유가학파의 가르침을 이어받아서 삼론종, 유식종을 인도 불교에 충실한 종파라 하여 Buddhism in China라고도 합니다. 반면 나머지 천태종, 화엄종, 정토종, 선종은 완전히 중국화된 종교라 하여 Chinese Buddhism이라 부릅니다.
그 중에서도 <화엄경>을 중심으로 발달한 화엄종은 법계연기(法界緣起)를 가장 핵심적인 사상으로 말합니다. 법계연기는 온 우주가 다 연결되어있다(related interdependence)는 뜻으로 상즉, 상입의 개념을 함께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문은 집의 한 부분이지만 문이 없다면 집일 수 없습니다. 창문, 기둥, 벽, 지붕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문 없이 집 없고, 집 없이 창문도 없으며 이렇게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된 것입니다. 내 뺨에 온 우주가 들어있다는 말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습니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인데 우리는 싸울 이유가 없으니 투쟁 사관이나 진영 논리 역시 법계연기의 가르침 앞에서 힘없이 허물어집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동안 힘들고 지쳐 있던 제 마음도 함께 놀라우리만치 고요해졌습니다. ^^
<아미타경>을 근거로 뻗기 시작한 정토종은 법장의 48서원 중 18번째 서원에 따라 ‘나무아미타불’을 욉니다. 누구든지 절대적인 믿음과 정성스런 마음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면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죠. 다만 그리스도교의 최종 목표가 천국인 것과는 달리 정토종의 최종 목표는 극락왕생이 아닙니다. 정토에서 사는 것은 아직 존재가 소멸된 상태가 아니고 단지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 열반에 드는 것이 보장된 상태일 뿐입니다.
아미타불은 왼쪽에 관세음보살, 오른쪽에 대세지 보살을 거느리는데 특히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괴로운 중생들을 보살피기 위해 열 개의 얼굴, 천 개의 손을 가지고 있다 하여 ‘11면 천수 관음보살’이라 합니다. 이 관음보살은 인도에서는 남성 보살로 형상화되는데 재밌게도 중국에 와서는 여성 보살로 나타납니다. 이는 아마 완벽한 신적 존재를 표현하기 위해 남녀 양성구유(Androgyneous)의 성질이 부여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강의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모든 것이 상즉, 상입하되 의식만이 존재한다는 가르침에 유난히 절망, 분노, 미움, 자괴로 가득 찼던 저의 올해가 승화되어 단단한 무언가로 안에 차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친구가 ‘종교를 믿게 되면 어른이 되어가는 거라던데 네가 어른이 되어가나 보다’ 합니다. 음... 아마 이제야 어른이 되기 위한 100단계 중 1단계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강의를 마칠 즈음이면 1단계를 통과할 수 있을까요.^^
[세계 종교의 이해Ⅱ] 3강, 붓다의 삶과 가르침 - 인도불교
[세계 종교의 이해Ⅱ] 2강, 힌두교의 어제와 오늘, 두 번째.
[세계 종교의 이해Ⅱ] 1강, 힌두교의 어제와 오늘
오강남 교수님의 세계 종교의 이해 동양종교 편 그 첫 시간.
개인적으로 느티나무에서 듣는 첫 강연이라 머리카락 끝부터 발톱까지 예민하게 감각을 살려놓은 참이었다.
덕분에 '역시 참여연대는 뭔가 다르구나.'하는 점들을 알아챌 수 있었다.
먼저 간식! 오늘은 간사님들이 손수 맛있는 김밥을 사오셨다.
간식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매 강연마다 조별로 간식을 준비한다고 한다. 중고등학교 수업시간에 친구들과 몰래 간식을 먹다가 들키면 선생님께 많이 혼나던 것과 대조적이다.^^
둘째는 환경에 대한 배려! 김밥은 뻥튀기 그릇에 담아먹고, 종이컵 대신 사기컵이 정수기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이런 건 대학교 엠티문화에서도 좀 배워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이다!
마지막은 느티나무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 정말 다들 느티나무 그늘 아래 편히 쉬시러 오신 분들 처럼 맑고 진중한 기운을 담고 계셨다. 나도 덩달아 산뜻해지는 느낌 라라라라~!
은은한 기품을 가지신 부원장님의 오프닝에서는 도종환 시인의 '복숭아나무'를 함께 읽는 시간을 보냈다.
오강남 선생님과 함께 동양 종교를 공부하며 지나치게 화려한 꽃을 피우는 일에 연연해하지 않는 내가 되어 있기를 바란다.
오늘의 강의는 크게 두 파트의 내용을 다루었는데,
첫날이니 만큼 종교학과 종교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첫째, 힌두교 중 고전힌두교에 대한 설명이 둘째였다. 여기에서는 그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만을 정리해보았다. 마치 수업 필기하듯 교수님의 말씀을 다 노트북에 받아적었더니 교수님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수준의 강의노트가 되었었다.
그래서 다 정리해놓고 절반 정도를 지웠더니 이만큼이 나왔다. 하하!
△세계종교의 이해 1강 - 신영수님 한 마디 사진 전보임
1. 왜 이웃종교를 알아보려는가?
종교학에서는 비교가 핵심적이어서 종교학 그 자체를 비교종교학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내 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도 알아야 하는 건지 오강남 교수님께서는 네 가지 이유를 말씀하신다.
첫째는 내 종교를 더욱 깊이 알기 위해서이다. 괴테는 "한 가지 언어만 아는 사람은 자기 언어도 모른다"고 말했다. 종교학의 창시자인 맥스 뮐러(Max Muller)는 이 말이 언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 모든 지식은 관계에서 시작하여 비교에 근거한다. 교수님은 이를 연필에 빗대어 설명하셨다. 우리는 연필을 길다고 하지만 연필은 무엇과 비교해서 길 뿐이다. 기차와 비교한다면 연필은 짧은 것이 된다. 우리는 이 연필이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종교도 마찬가지로 다른 종교와 비교했을 때만이 내 종교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둘째는 내 이웃을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요즘은 다문화 시대인 만큼 여러 나라에서 온, 여러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 살고 있다. 그런데 세속화되어있다거나 종교가 없다는 것도 결국은 종교적 태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종교는 인간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 중 하나이다. 따라서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그 사람의 습관, 성격, 말투 같은 것들을 파악하듯 그 사람의 종교적 심성, 종교적 마음가짐을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즉 종교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그 사람과 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수단으로, 상대방을 정말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의 종교에 대한 이해 역시 아주 중요해지는 것이다.
셋째, 인간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웃 종교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에 대한 정의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리가 잘 아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지적인 인간 뿐만 아니라 산업시대에는 호모 파베르(Homo fabre)라 하여 공작하는 인간이 중시됐으며 호모 루덴스(homo ludens)는 놀이하는 인간, 호모 심볼리쿠스(homo symbolicus)는 상징체계를 사용하는 인간이라는 의미로 인간의 정의에 쓰인다. 그러나 다른 동물들도 지능이 있고, 연장을 만들며, 놀이를 좋아하고, 상징 체계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것들 보다도 인간만이 보유한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종교가 없는 곳이 없고 세계 어디를 봐도 종교를 가진 동물은 없다. 결국 인간은 호모 릴리지오수스(homo religiosus), 종교적인 인간으로 정의내려지며 우리는 인간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종교를 이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세계 평화를 위해서 이웃 종교를 공부해야 한다.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인 신학자 한스큉은 저서 <On being a Christian>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교 간의 대화 없이는 종교 간의 평화가 없다. 종교 간의 평화 없이는 세계 평화가 없다." 서로를 이해를 하지 못한 종교들이 전쟁을 심화시키는 사례가 많아서 나온 말인데, 올해에 새로 나온 한스큉의 책에는 이 말 뒤에 한 구절이 덧붙여졌다고 한다. "이웃종교에 대한 기초적 연구 없이는 종교 간의 대화가 없다."
즉 이웃종교에 대한 연구->종교 간의 대화->종교 간의 평화->세계 평화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의 종교 공부는 세계평화를 향한 첫 발을 내딛는 것이다.
2. 종교란 무엇인가?
초창기 종교학의 대가였던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종교의 신비성에 주목하여 압도적이고 두려움을 일으키면서도 황홀하고 매혹적인 경험(mysterium trememdum et fascinosum)으로 종교를 정의했다. 20세기의 대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종교를 궁극 관심(ultimate concern)이라고 간결하게 표현했다. 누군가가 무엇에 대해 궁극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이 종교라는 것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어떤 사람이 시간 지키는 일에 가장 관심을 갖는다면 puncutuality가 그의 종교이다. 더 나아가 그는 관심의 대상에 따라 종교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섹스, 돈, 권력에 관심을 갖는 것은 가짜종교(pseudo-religion), 공산주의, 나치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등 주의(ism)가 궁극 관심이 되는 것은 유사종교(quasi-religion), 마지막으로 신을 궁극 관심으로 두는 것이 궁극종교라고 불렀다.
오강남 교수님께서도 교수님만의 종교 정의를 내리신다. '궁극 실재와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변화의 체험, 그와 함께 오는 자유'.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진리가 한번에 얻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 진리는 알게 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추구될 수 밖에 없으므로 궁극적인 실재를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또한 변화의 체험이라는 건 '특수인식능력의 활성화를 통해 참나를 발견'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밖으로 나가면 개구리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마주하게 되고, 이미 그 세계를 본 개구리는 옛날의 개구리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깨달은 개구리가 된다. 개구리의 의식이 변화하면서 개구리 자신이 변한 것이고, 이제 개구리는 더 넓은 세상을 생각할 수 있다. 즉 의식의 변화는 특수인식능력을 활성화를 초래하여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도 볼 수 있게 된다. '돈만이 최고다'라는 의식에서 벗어나면 나도 바뀌고 돈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지면서 사물의 있는 그대로(진여 또는 실상)를 볼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변화해서 내가 자유로워지는 것, 바꿔 말해 참나의 발견을 통한 자유가 바로 종교이다.
3. 힌두교(Hinduisms)
소를 신성시 여긴다는 것 이외엔 힌두교에 대해 무지했던 나를 드디어 떨쳐버린 시간이었다. 힌두교는 기독교처럼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가지각색의 종파들이 있기에 's'를 붙여준다고 한다. 비율적으로 가장 힌두교가 많은 곳은 네팔이고, 사실 인도(India)는 힌두와 어원이 같긴 하지만 상당수 인도인들은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힌두교의 기원은 4대 문명 중 하나이며 이집트 문명보다도 발달한 문명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인더스 문명(Indus Valley Civilization, 기원전 2~3000년 전)에 있다. 인더스 문명에서 흥미로운 점은 풍요의 여신들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샥티라고 하여 여성성을 남성성만큼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힌두교에는 남성신이 있으면 그에 대응하는 여성신이 꼭 있다고 한다. 다른 종교들이 상당히 남성중심적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정말 반가운 대목이었다.
고전 힌두교에는 <리그 베다(Rig Veda)>, <우파니샤드(Upanishads)>, <마누 법도론(The Law of Manu)>, <바그바드 기타(Bhagavad Gita)> 이렇게 네 경전이 중요하다.
3-1. 리그 베다
먼저 <리그 베다>는 기원전 15세기 경 침공한 아리안족이 가져온 베다 종교의 네 가지 경 중 하나이다. 우리 아빠께서 한창 열심히 하시던 오일 풀링이 아타르바 베다에 있는 의학이라고 하셨다. (깜놀.) 리그 베다에는 태양은 태양신으로, 달은 달의 신으로, 불은 불의 신으로 76개의 자연물을 인격화시킨 76명의 신이 등장한다. 그 중 인드라 신이 가장 중요해서 리그 베다에 나오는 1000여개의 노래 중 250개는 폭풍의 신인 인드라에게 바쳐진 것이다. 왜 폭풍의 신이 가장 중시된걸까? 우스갯소리로 인도에는 더운 계절, 더 더운 계절, 진짜 더운 계절의 세 계절이 있다고 한다. 교수님 경험으로는 진짜 더운 계절에 비가 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파리, 모기, 쥐가 기승을 부려 하루 하루가 끔찍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나쁜 신의 배를 찔러서 나온 피로 비를 내린다는 폭풍의 신 인드라가 가장 중요해진 것이다.
리그 베다는 표층 종교에 속해서 신에게 현실적인 번영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 다른 말로 탄원 기도, 또는 기복을 가르친다. 또한 리그 베다는 단일신관(henotheism)이라고 하는데, 76개의 신이 다 있다는 걸 인정하면서 그 중 제일 중요한 걸 인드라신 하나로 보기 때문이다. 기독교나 이슬람교, 유대교 같은 서양 종교들은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신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유일신관(monotheism)을 가진 반면 힌두교는 다른 신들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한 신을 가장 존경하는 것이다.
3-2. 우파니샤드
우파니샤드는 기원전 9~7세기 경 구르('선생'의 인도 말)와 제자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우주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토론한 것을 대화체로 옮긴 문헌이다. 오강남 교수님은 우파니샤드를 '힌두교에서 기가 막힌 것'이라 표현하셨다. 심지어 쇼펜하우어는 "<우파니샤드>를 공부하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우리를 고양해주는 공부는 온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힌두교와 불교를 좋아했던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은 니체가 '신은 죽었다'는 명언을 남겼으며 니체하고 친했던 바그너 역시 작품에 동양 종교에 대한 영향을 듬뿍 담게 되었다는 후일담은 덤. 더 궁금한 분들은 J. J. Clarke의 <동양은 어떻게 서양을 계몽했는가(Oriental Enlightenment)를 읽으시면 된다.
기도가 중요하다고 했던 리그 베다와 달리 우파니샤드의 기본 가르침은 깨달음으로, 브라흐만(Brahman)을 이해하라는 것이다. 브라흐만은 우주의 궁극 실재(ultimate reality)라는 뜻으로 우주의 가장 기본적인 그대로를 말한다. '그래서 우주의 궁극 실재인 브라흐만이 뭔데?'에 대한 대답이 우파니샤드에는 단 한 마디, 'neti-neti'로 축약된다. neti-neti는 산스크리트어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는 뜻이다. 절대는 어떤 것으로도, 말로도 제한될 수 없으므로 말을 갖다 붙일 수 없다. 문자는 어쩔 수 없이 제한을 만들고, 따라서 말로 표현한 건 절대 진리가 아니므로 우파니샤드와 같은 심층 종교는 문자주의에 매달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도덕경의 제일 첫 구절에도 도가도비상도(도라고 할수있는 것은 진짜 도가 아니다.), 명가명비상명(이름을 붙여버리면 그것은 진짜 이름이 아니다.)이라 하여 똑같은 얘기가 나온다. 이러한 접근을 부정 신학(negative theology, apopathic theology)이라고 하여 서양 종교에도 "하느님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건 하느님을 모르는 것이다. 정말 하느님을 안다면 하느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올더스 헉슬리가 모든 종교와 사상 밑바닥에 흐르는 기본적 철학의 특징 첫 번째로 꼽은 것이 'Tat tvam asi(너는 바로 그것이다).'이다. 우리말로는 '범아일여', 도덕경에는 '지자불언 언자불지(아는 사람은 말하지 못하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동학에는 '시천주(내 안에 한울님이 있다.)', '인내천(나와 하느님이 같다.)', '사인여천(따라서 내 이웃도 하느님이다. 이웃 대하기를 하느님 대하듯 하라.)'으로 나타나 있다. 우파니샤드에서도 'aham brahman asmi(내가 브라흐만이다).'라는 말로 진정한 브라흐만은 내 속에 있으며 브라흐만과 내가 하나라고 말한다. 심오해 보이지만 심오하다.
3-3. 마누 법도론
우파니샤드가 내 안에 있는 브라흐만을 깨닫는 것을 가르친다면 마누 법도론은 법에 충실할 것을 가르치는 실천적인 책이다. 이 마누 법도론 안에 사상제도가 있어 우리가 잘 아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계급이 나오며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마누 법도론에서는 각자 계급마다 나온 곳이 다르다며 계급을 정당화하고, 계급의 역할 충실히 따를 것을 요구한다. 마누법도론은 또한 삶을 네 단계(학생-재가자-숲속거주자-산야신)로 나누며 삶의 목적도 카마(즐거움), 재물, 의무, 목샤(해탈)의 네 가지로 나눈다. 특히 카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성적 즐거움으로 보는데, 이를 극대화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책이 바로 카마 수트라라고. 카마와 재물을 넘어서면 삶의 세 번째 목적인 의무에 다다르게 되는데 심지어 창녀에게도 창녀로서 최선을 다하라고 한단다. 끝으로 마지막 삶의 목적인 목샤는 윤회의 고리에서 튀어나오는 것으로 불교의 니르바나와 같은 개념이다.
꼭 카마나 재물을 넘어서야 좋은 건가 내가 스스로에게 따져물으려는 순간, 교수님께서는 참고로 키에르케고르 실존의 삼단계가 마누 법도론의 삶의 목적 네 단계와 비슷하다 하여 설명해주셨다. 첫 단계인 심미적 단계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쾌락은 결국 자신이 쾌락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으므로 그 게 다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아, 카마나 재물만을 추구하는 것은 나를 잃는 길이구나'하고 새삼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키에르케고르 실존의 두 번째 단계는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윤리적 단계이다. 그러나 윤리적으로 살기 위해 윤리에 민감해질수록 모든 일에 윤리적일 수는 없다는 걸 깨닫게 되고, 그러면 마지막인 종교적 도약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세계종교의 이해 1강 사진 전보임
교수님이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얻으신 지혜와 오랜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아올린 지식에 빠져있으니 두 시간 반이 훌쩍 지났다.
사실 교수님은 종교에 가장 큰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계시지만 내가 보기엔 언어학이나 철학에도 조예가 깊으신 것 같았다. 나는 아직 종교의 가치나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한 때는 카를 마르크스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말에 크게 공감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렇듯 교수님처럼 두루 세상을 둘러보고, 깊게 공부하신 분들이 종교를 사랑하시고, 나같은 애송이가 종교를 경시하고 있으니 마땅히 종교를 배우고 더 이해하려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내가 애초에 오강남 교수님의 강좌를 듣고자 마음 먹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앞으로의 수업에서는 또 어떤 종교들의 어떤 이야기들에게 매혹당하게 될 지 기대가 된다.
후기 | 장슬기라(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