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 강사

  • 기간

    • 2013. 3. 28 ~ 2013. 6. 1
  • 시간

    • 목요일 19:00~21:30 총12회
  • 수강료

    180,000

    • 파격 할인혜택
    • 참여연대 회원125,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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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 정보

     

    강의소개 |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1.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논란이 되어왔던 역사교과서.
    최근에는 교육기술과학부가 장관에게 교과서 수정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내용의 법안을
    입법 예고하면서,
     “사실상 과거의 ‘국정교과서’로 돌아가려는 것 아닌가” 역사학계의 반발이 일고 있습니다.
     
    한편 지난 18대 대선 이후 역사책 판매량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 독립운동사를 다시 공부하거나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공부하는 시민들도 볼 수 있습니다.
     
    이른바 ‘기억의 정치’라는 말이 실감나는 상황입니다.
     
    2. 현재 사용되는 ‘검인정 교과서’는 과거의 ‘국정교과서’와는 많이 다릅니다.
    내용면에서도 새로운 연구의 흐름을 많이 반영하고 있고 시각자료도 풍부합니다.
    하지만 검인정이라는 제도 때문에 자유로운 역사서술이 되기 어려운 점도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교과서는 역사를 체계적으로 제시한 하나의 텍스트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 행간의 의미를 정확하고 풍부하게 읽고 공부해야 합니다.
    역사교과서 집필자들과 함께 역사공부를 하는 것은 특히 이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지난 2011년,  2012년 아카데미 느티나무의 인기 강좌였던 <한국 근현대사>.
    이번 2013년 봄/가을학기에는 특별히 그 시대의 ‘인물과 사건’으로
    재구성해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교과서를 집필한 역사학자들과 함께 ‘근현대사 속의 인물과 사건’을 자세하게 공부하면서
    왜 근현대사 공부를 해야 하는지’, ‘교과서로 역사공부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시대 그 인물이 선택한 삶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역사의식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교과서를 둘러싼(시대와 주제별)
    역사적, 사회적 논쟁점은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4. 강의뿐 아니라, 근현대사의 중요한 현장을 답사하며 살아있는 역사를 공부합니다.
     
    강의 일정 |
    날짜
    순서
    주제
    강사
    03.28
    1
    왜 근현대사 공부인가
    주진오
    04.04
    2
    권력 앞에선 아버지도 없다: 고종과 흥선대원군
    주진오
    04.11
    3
    절친에서 제거대상 1호로: 김옥균과 민영익
    주진오
    04.18
    4
    개화는 아무나 하나: 박영효와 유길준
    주진오
    04.25
    5
    미국인과 한국인의 차이: 서재필과 윤치호
    주진오
    05.02
    6
    의형제에서 최대의 정적으로: 이승만과 박용만
    주진오
    05.04(토)
    7
    답사① 근대의 시작점: 인천 개항장 조계지
    주진오
    05.09
    8
    조선 총독의 일기를 읽는다: 데라우치, 사이토, 우가키총독
    박찬승
    05.16
    9
    임시정부를 지킨 사람들: 안창호, 이동녕. 김구
    박찬승
    05.23
    10
    불운한 사회주의자들: 박헌영, 이재유, 김재봉
    박찬승
    05.30
    11
    그 섬에 가고 싶다 : 소안도, 하의도, 암태도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박찬승
    06.01(토)
    12
    답사② 독립운동의 현장 속으로: 종로 서대문 일원
    박찬승
    ※ 7강, 12강 답사는 토요일 오전부터 진행 예정입니다. 정확한 시간은 개강 이후 확정
     
    강사소개 | 
    주진오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인문사회과학대학 학장.
    고등학교 한국사(천재교육),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중앙교육진흥연구소)와
    중학교 역사 상, 하권(천재교육)의 대표집필자이기도 하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 한국근대사 중 일제강점기를 사회사상사, 사회사를 연구함.
    <한국근대정치사상사연구> <민족주의의 시대> <근대이행기 민중운동의사회사>
    <마을로 간 한국전쟁> 등의 저서가 있음.
     
    교재 |
    <고등학교 한국사, 천재교육> (주진오 박찬승 이신철 외)
     
    참고도서 |
    <한국근현대사를 읽는다> 박찬승, 경인문화사
    <고쳐 쓴 한국근대사> 강만길, 창작과비평사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서중석, 웅진 지식하우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김성보, 기광서, 이신철, 웅진 지식하우스
     
    강의정보 |
    일시 : 2013. 3. 28 ~ 6. 01 (목) 총 12회 오후 7시 ~ 9시 30분
    장소 : 참여연대 느티나무홀(B1)
    수강비 : 18만원(참여연대 회원 30% 할인)

     

    후기 7

    •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9강 (5.23) 임시정부를 이끈 사람들

      2013.5.30 김혜수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9강은 8강과 마찬가지로 인물에 대한 연보를 살펴보며, 그 인물과 당시의 시대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특히나 임시정부는 3.1운동을 통해 만들어진 조직 중 가장 오래유지 되었고, 현재의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정부를 만들자는 국민들의 뜻을 살펴 볼 수도 있고 남과 북이 나뉘지 않았다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부가 나타났을 거라는 내용 또한 수업시간을 통해 나눌 수 있었다.

       

      내용을 다 적을 순 없지만 임시정부 시기에는 자신의 이념이나 앞으로의 방향성에 따라 굉장히 많은 조직과 모임이 만들어지고 해체되는 시기였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였는데, 그 역동의 시대 속에서 내가 더욱 집중해서 들었던 인물은 바로 안창호였다.

      안창호에 대한 뮤지컬이 만들어질 만큼 현재에도 많은 관심과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그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였고, 만민공동회에서 웅변을 하기도 하며 독립운동을 점차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1902년 미국으로 출국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한인 친목회를 발전시켜 독립신보를 창립하고 공립협회 회간을 건립하였다. 1907년 귀국하여 서울에서 전국 규모의 비밀 결사 단체인 신민회를 창립하기도 한다. 그러나 1909년 이등박문(이토히로부미)암살로 혐의를 받아 평양에서 체포되었다가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르게 되는데, 이때 거국가를 남기기도 한다. 1911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곳에도 다시 다양한 조직을 활발하게 펼쳤고,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됐을 때 노동국 총판을 맡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사실, 이런 연도나 조직의 이름을 다 기억하기는 힘들지만 내가 그에 대해 인상 깊었던 점은 조직력과 리더쉽이 정말 뛰어났었구나 하는 점이었다.

      황우석과 이광수의 글에 따르면, 그는 지조가 있고 거짓말 할 줄 모르는, 정말 강직하고 올 곧은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나는 그런 성품의 사람이 수많은 사람을 만나 설득하고 새로운 단체를 조직하고 힘을 하나로 모으는데 있어 어려움을 겪진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곧은 성품만큼 이나 새로운 세상을 위하고 민족을 위하는 그의 진심이 간절했음을 상상해 보며 글을 마친다.

       

       

    •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8강 (5.16) <총독의 일기 : 역대 조선총독과 지배정책>

      2013.5.24 김혜수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아카데미느티나무]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8강은 주진오 교수님의 뒤를 이어 박 찬 승 교수님께서

      진행해 주셨습니다. (반갑습니다. 교수님 *^^*)

       

       

      <총독의 일기 : 역대 조선총독과 지배정책>이라는 주제로 수업을 했었는데요,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해 배울 때, 조선총독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배운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조선총독에 연보와 지배정책, 또는 일기 등을 살펴보니 의외의 내용도 알게 되고 무척이나 흥미로웠습니다.

       

      수업내용은 프린트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제가 인상 깊었던 부분과 Q&A 시간에 다뤄졌던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무라이 정신 : 조선총독들은 대부분 사무라이 정신을 가지고 있던 일본인들이었는데요, 강압적이고 권력지향적인 특징을 뚜렷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더욱이 권력의 2인자였던 조선총독은 정경유착을 통해 더욱 막강한 힘을 가지고 조선을 억압하였다고 하니 더욱 안타깝네요.

       

      일본의 식민지배는 잘못된 것이지만 근현대사 발전에 기여한 측면은 인정해야하는 것인지.

      -> ‘특정대기업이 독점적으로 산업화하며, 다른 분야와의 연계성은 떨어진다. 수치가 아닌 내용면에서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라고 답변해 주시면서 수업시간에 더욱 자세히 설명하고 넘어가야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병합과정에 대한 유효성과 합법성에 대해.

      -> 당시 조선은 저항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강요된 조약이었다.

      1대총독 데라우치의 1910822일 일기를 보면 오후 4시 한국 병합의 조약을 통감 관저에서 조인을 마치다. 열석한 자는 이완용, 조중응, 부통감, 그리고 나였다. 또 오늘 29일에 발표하기로 결정하고 큰 뜻을 통지해 두었다. 합병문제는 이와 같이 용이하게 조인을 마쳤다. 라고 하며... ’하하.‘ 라고 글을 끝내고 있습니다. 저항 없이 합병이 이루어졌다는 상황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아....‘

       

      3, 5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지방순시를 대단히 많이 다녔는데요, 만난 회수별로 정리해보니 이희간, 박영효, 민원식, 선우순, 김희선 등이 눈에 띄었습니다. 특히 김희선은 임시정부의 국무차장이었으며 독립운동훈장까지 받은 인물이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습니다.

       

      대만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평가는 비교적 후하며, 2·6사건과 중일전쟁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다음수업시간에는 더욱 열심히 들어 유익한 수업후기를 올릴 것을 되새기며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스케치]5/4 인천 개항장 조계지 답사 -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근현대사 강좌 6강

      2013.5.7 느티나무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2013년 5월 4일 토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 인천 개항장 조계지 답사

       

      일정

      10:00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 입구 한중문화원 주차장 집결

      11:30까지 대불호텔 터, 제일은행, 제18은행(인천 개항장 근대건축 전시관), 일본영사관 (현 중구청)

      11:30 점심 (차이나타운 내 태림봉)

      15:00까지 청국영사관 터,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 제물포 구락부, 한미수교 백주년 기념탑, 자유공원

      15:00 인천 출발

       

       DSC_0302.png

       

       

      제물포 개항장 조계지의 역사 개관

       

      개항장 인천에 생겨난 최초의 조계는 1883년 9월 30일 일본과 체결한 조선국인천항구조계약서(朝鮮國仁川港口租界約書)에 의해 설정된 일본지계였다. 이듬해인 1884년 4월에 청국지계가 생기고 이어 10월에 각국지계가 설정되었다. 각국지계는 청·일 두 나라의 열배가 넘는 대지로 청국과 일본지계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사벨 리 버드 비숍 여사가 1894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후 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 따르면 당시에는 청국 조계가 일본 조계보다 훨씬 활발했고 중국인들이 무역에서 일본인들을 앞지르고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청국인들은 채소밭을 소유했는데 산동 지역에서 온 농사꾼들은 봄에 이곳에 건너와서 일을 하고 겨울에는 본국으로 돌아갔다.

      1882년 수교통상조약을 맺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는 각기 서울에 공사관을 개설하고 곧 서양 사람들이 개항한 제물포를 통해 입국하기 시작했다. 일본에 뒤이어 그들은 그들

      이 공동으로 사용할 각국지계를 책정했다. 제일 먼저 온 것은 이화양행이었으나 곧 철수하고 독일계 세창양행과 미국 상사 타운센드상회가 뒤를 이었다. 자유공원 광장일대에 세워졌던 세창양행의 사원 숙소는 독일 성곽을 연상시키는 멋진 건물로서 인천의 랜드마크로 이름이 높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기록되어 있다. 미국인 타운센드상회는 일본에서 김옥균과 친분을 맺고 입국한 무역회사로 화약, 광산기계, 토목용구, 석유 등을 수입하여 크게 치부했다. 특히 타운센드는 인천 최초의 증기동력기 정미소를 차려 선구자가 되기도 했다.

      이때 각국조계 안에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공원을 조성했는데, 이 역시 한국 최초의 공원이 되었다.

       

       

      1) 대불호텔 터
      서양인을 상대로 하는 근대적 숙박 시설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1888년 대불(大佛)호텔이 세워졌다. 이 호텔은 1902년 서울 중구 정동에 들어선 ‘손탁호텔’보다 14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이 호텔은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했기에 서양식으로 설계됐다. 대불호텔은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맞았으며 외국인들의 입에 맞는 서양요리도 제공했다고 한다. 대불호텔은 일제 강점기에 중국요리집인 ‘중화루’로 바뀌었다. 이 건물은 1978년 헐린 뒤 나대지로 방치되었다가 현재는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대불호텔 건너편에 중국인 이태호(怡泰號)라는 사람이 외국인 상대의 여관업을 시작하였는데 1층에는 잡화상점을 하면서 2층에 스튜워드 호텔(Steward Hotel)을 개업하여 서로 치열한 경쟁을 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커피가 처음 판매된 곳이 대불호텔이라고도 하나 언제부터 판매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을 찾기 어렵다. 미국, 영국 등 외국 사신들과 선교사, 상인들을 통해 널리 보급된 커피는 구수하고 향긋한 맛으로 곧 조선 왕족들과 대신들을 사로잡으며 기호품으로 자리잡았다. ‘가배차’나‘가비차’는 영어 발음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탕국’은 일반 민가에서 불렸던 이름이다. 커피의 색이 검고 쓴맛이 나는 것이 마치 한약 탕국과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
       
      2) 일본 제1은행
      인천이 개항한 1883년에는 개설되어 대표적 은행으로 활동하였다. 1894년 갑오 정권이 「신식화폐발행장정」으로 일본화폐의 통용을 인정하여 급속하게 성장했다. 1905년 이후 제1은행이 화폐개혁을 전담하면서부터 우리나라의 중앙은행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09년 한국은행이 창립되면서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변경되고, 1911년 한국은행이 조선은행으로 바뀜에 따라 조선은행 인천지점이 되었다.
       
      3) 일본 제 18은행
      1890년 나가사키 상인들의 업무가 번창하여 감에 따라 최초의 해외 지점으로 인천에 설치하게 되었다. 이후 약 47년간 영업하다가 1936년에 조선식산은행으로 양도하였다.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인천 개항장근대건축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4) 일본 영사관
      인천 개항 후 일본은 1883년에 전형적인 일본의 양풍 2층 목조건물로 영사관을 완성하였다. 1906년 2월에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이사청(理事廳) 청사로 사용되었고, 1910년 조선총독부 설치 이후에는 인천부 청사로 사용되었다. 해방 후 인천시청으로 사용되다가 1985년 인천시청이 이전하여 현재는 중구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5) 청국 영사관
      청국은 1884년 인천에 조계를 설치하고, 그 해 10월 영사관을 설치하였다. 그 후 영사관을 변리청, 이사서, 이사부 혹은 청관이라 칭하였다. 청일전쟁 중 일시 폐쇄되었다가 1898년 청국영사관으로 재발족하였으나 일제 말엽에 다시 폐쇄 되었다. 영사관 건물은 소실되었고 현재는 청국영사관 터에 화교중산학교가 들어서 있다.
       
      6)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
      이곳은 청국조계와 일본조계의 경계지역으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으로 연결되는 계단과 조경이 마련된 공간이다. 자유공원 서남쪽 가파른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계단을 중심으로
      청국과 일본의 건물들이 확연하게 서로 다른 양식들로 번화하게 들어서 있던 곳이기도 하였다. 중앙에 돌계단을 배치하고, 계단 양쪽에 조경 식재 공간을 두었다. 경사가 급한 점을 감안하여 계단 사이를 여유있게 두는 등 조경디자인 측면에서의 공간 이용을 강조하였다. 또 경관 측면에서 인천항을 계단 중간에서 머물면서 즐길 수 있도록 여유롭게 설계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7) 제물포 구락부
      1901년 건축된 제물포구락부는 인천에 거주하던 독일, 미국, 러시아, 영국 등 각국조계 내 외국인들의 친목을 위한 사교장으로 이용되던 곳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자기들의 사교장을 따로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 시설은 주로 서양인 전용의 시설이었다.
      1913년경 일본 재향군인회 인천연합회에 이관되어 정방각으로 불렸으며, 1934년 일본여인회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미군에게 점유되어 장교클럽으로 사용되었다. 최근까지 중구문화원에서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이전하였다.
       
      8)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자유공원 내)
      1900년대 인천 개항장에 지어진 양관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고 전해지는 서양식 건축물로, 상해에서 항만시설공사로 치부한 존스턴이 개항장의 가장 높고 경관이 수려한 곳에 별장으로 사
      용하기 위해 건축한 것이다. 해방 후 미 군정청에 접수되어 독신자 고급 장교 주택으로 이용되었다. 6.25전쟁 중 소실되어, 현재는 1982년에 건립된 한미수교 100주년기념탑이 자리하고 있다. 이 탑은 바로 1882년 제물포에서 체결되었던 한국 최초의 서양 국가와의 조약이었던 한미수호조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한편 인천에 세워진 최초의 양관은 세창양행 숙사 건물이다. 이 건물은 1883년 세창양행을 개점하기 위해 독일 함부르크에서 인천으로 온 세 사람의 사원 주택이다. 이 건물은 현 자유공원 광장 일대에 있었는데 1922년 인천부가 매입하여 인천부립도서관으로 시민에게 개방하기도 했는데 인천상륙작전 때 전소되었다.
       
      9) 자유공원
      우리나라에서 서구식 근대공원이 처음 들어선 곳이 인천이고, 그곳이 바로 자유공원이다. 1888년 만들어진 이 공원은 서울의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이 1897년에 세워졌으니, 이보다 9년이 앞선다. 이 공원은 처음 만들어질 당시 각국공원이라 불렸다. 인천항 개항 이후 인천으로 몰려든 서양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살던 각국조계 안에 공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45년 이후 한동안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을 겪고 난 1957년
      개천절에 이곳에 맥아더 동상의 제막식을 가지면서 공원의 이름을 자유공원으로 바꾸었다.
    •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5강 (5.02) 서재필과 윤치호

      2013.5.7 김혜수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주진오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명제 중 하나는 한 인물을 어떻게 하나의 수식어로만 규정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그런데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진 우리들 대부분은 무슨 사건이나 단체하면 누구이렇게 단편적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나 역시 그렇기 때문에 단순했던 인물들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가는 것은 평면그림이 입체로 변하듯 무척이나 흥미로운 것이었다.

      특히나 독립운동가로 내 머릿속에 자리 잡혀 있던 서재필이 필립 제이슨이 되어 살아간 삶은 너무 놀라웠다. 갑신정병에서 행동파를 맡았던 그는 정변실패 후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냉대를 받았고 미국으로 떠나 홀로 서기를 감행하였다. 또한 미국에서 의학 공부를 하며 미국 주류사회에 완전히 편입되어 살아가는 아메리칸 드림의 원조가 되었다. 그러던 중 그는 김홍집 정권의 요청에 따라 중추원 고문으로 취임되었고 철저하게 미국인으로 행세를 하게 된다, 더욱이 모든 비용과 건물을 조선정부가 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 신문사를 자신의 개인 소유로 등록하였으며 자신의 주택구입비까지 받았다. 독립운동을 정치활동보다는 경제활동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는 등 민족지도자가 지닌 희생적 자세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이다. 또한 미국인으로 산 서재필은 식민지배에 대해 순응하기를 권유 하였으며 식민지배의 책임은 대한제국 지배층의 무능과 민중의 무지 때문이라고 하였다. 3·1운동 후에는 태평양군축회의에 조선 문제 상정을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러한 그를 역사상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까 싶다.

      윤치호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그는 개화파의 막내로써 미 공사관 통역관을 맡았으며 일본과 상하이, 그리고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였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을 때에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교육과 종교 활동을 통해 민족의 역량을 기르고 민족성을 개조하기 위한 계몽운동에 힘썼다. 조선인들이 독립을 쟁취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열강이 조선을 도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을 위한 활동의사는 없었다. 그는 모든 판단을 함에 있어 지나치게 신중했고, 근대 시민윤리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민족주의자가 되는 길보다는 친일 활동을 통해 결과적으로 친일파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역사적 인물을 통해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2시간 반 수업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수업 후기를 마친다.

       

      참고자료

      선택역사를 갈랐다. 서재필과 윤치호 편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1022022001

       

       

    • [인물과사건으로보는한국근현대사] 3강(4.18) 절친에서 제거대상 1호로 : 김옥균과 민영익

      2013.4.25 김혜수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김옥균과 민영익 - 절친에서 제거대상 1호로

       

        저는 학교에서는 휴강이 되면 마냥 좋아하던 학생이었는데요, 4월 2째주 수업이 휴강되었다는 말은 참으로 섭섭하였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교수님이 쾌차하고 계셔서 지난주에는 유익하고 재미있는 수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네요.  공부도 중요하지만 우리 모두 건강하게 꽃피는 봄을 환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그럼 지난 수업을 한 번 정리해 볼까요?

        민영익은 민승호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명성왕후의 총애를 받았고,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요직을 맡는 등 민씨 척족의 새로운 간판으로 등장하였습니다. 또한 민영익은 고종이 진행하고 있었던 친정체제의 핵심인물로써 동도서기론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활동들을 하게 됩니다. 김옥균도 21살에 장원에 급제하며 안동 김씨의 청년스타로써 민영익의 집에는 자주 드나드는 8명의 학사들 중 한명이기도 하였습니다.

       민영익은 주요 외교업무의 책임을 지고 있었는데요, 가장 대표적인 일은 보빙사를 꾸려 미국을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김옥균의 추천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둘은 절친한 동지였습니다. 인식과 정책이 수구, 친청사대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왜 갈라서게 되었을까요?

      청에 대한 생각과 입장의 차이가 둘을 갈라놓는 가장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민영익은 미국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이었고, 러시아를 이용하여 청을 견제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하며 점진적인 방향으로 개화를 추진하였습니다. 일본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반면 김옥균은 청의 개입에 대해 일본이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하였고,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하는데 민영익이 도움이 되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갑오개혁이 발생했고, 민영익의 척족들은 급진개화파에 의해 살해당하고, 급진개화파는 일본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결국 둘 다 근대화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 둘이 힘을 합쳐 개화를 이끌었다면 조선말기의 모습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특히 지난 주 수업에서는 학교에서 빡빡하게 공부를 할 때에는 듣지 못했던 뒷이야기(?)들을 듣는 것 같아재미있었는데요, 명왕성을 발견한 퍼시벌로웰이라는 사람이 보빙사의 일행이었고 고종의 사진을 최초로 찍어주었다는 말은 ☆까지 치며 들었답니다.

       

      아래에는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참고자료들을 링크하였습니다.

       - 문화콘텐츠닷컴 : http://www.culturecontent.com/main.do

        - 선택!역사를갈랐다(서울신문연재) :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910021001

       

      이번 주에는 수업내용과 관련하여 느낀 점이나 배운 점들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많이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수업시간에 뵐께요. :-)

       

    •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2강

      2013.4.12 로아나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안녕하세요. 벚꽃들이 조금씩 움을 트고 있는 가운데 난데없이 눈이 내리는, 그런 기묘한 4월입니다. 저희 <한국근현대사> 수업은 두 번째 강의를 무사히 마쳤답니다.


       이번 시간에는 흥선 대원군고종에 대해서 배웠는데요, 여러분 흥선 대원군하면 뭐가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아마 많은 분들이 명성황후를 가장 먼저 떠올리실 것 같아요.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며느리인 명성황후의 대립은 이미 숱한 사담이나 드라마, 소설들을 통해 익숙한 내용이지요. 하지만 정작 대원군의 아들이자 조선의 왕이었던 고종은 왜 등장하지 않을까요. 고종은 정말 아버지와 아내 사이에서 기조차 펴지 못하는 유약한 왕이었을까요?

       

       고종에 대한 가장 뿌리 깊은 오해는 그가 명성황후또는 민씨 정권에 휘둘린 무능한 왕이라는 인식입니다. 고종에게 민씨들은 처가일 뿐만 아니라 외가이기도 합니다. 여흥 민씨 가문에서는 명성황후를 비롯해 인현황후와 원경황후 등 세 명의 정비를 배출했습니다. 또한 고종의 외할아버지인 남연군과 흥선 대원군 모두 여흥 민씨와 결혼합니다. 대원군에게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세력을 찾던 고종에게는 민씨들이 더없이 믿음직하고 가까운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요. 민씨 정권은 고종 스스로의 신임과 선택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고종은 12세에 왕위에 올라 10년이 넘도록 대원군의 그늘 밑에 있었습니다. 그는 신미양요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의견충돌 없이 아버지의 뜻에 따랐습니다. 하지만 미국과의 전투 후, 고종의 생각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쇄국정치는 조선의 고립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후 고종은 친정을 결심하고 아버지와 완전히 뜻을 달리하게 됩니다. 이러한 그의 강단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 있는데 바로 영남만인소 사건입니다. 면암 최익현은 대원군의 탄핵을 요구하게 되고 고종은 친정을 선언하며 대원군을 내쫓습니다. 이에 반발한 남인 유생들이 대원군의 복귀를 요청하며 쓴 만인보를 쓰게 됩니다. 고종은 크게 분노하여 만인보의 주동자를 참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이르지요.


       대원군은 결국 여러 번의 고종 암살계획을 세우며 갑오개혁과 임오군란에 참여합니다. 또한 명성황후 시해가 일어난 을미사변에도 직접적으로 참여하게 되지요. 결국 고종과 완전히 멀어지게 된 대원군은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대원군은 끊임없이 아들인 고종을 못미더워 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는 권력에서 자신이 멀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가 적당한 때에 물러날 줄 아는 미덕을 아는 아버지였다면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합니다.


       저녁시간에 이루어지는 강의라 많이 피곤하실텐데도 조는 분 한분 없는 훌륭한 수업이었습니다^^ 저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주진오 교수님의 말씀을 옮겨 적으며 글을 마칩니다.

      누군가가 평생 옳은 길을 걸어 완벽한 위인이 되거나, 평생 악인의 길을 걸어 완벽한 악인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누구든 살면서 꼭 한번쯤은 나쁜 일을 하거나 좋은 일을 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종종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제가 혹시 한순간이라도 실수를 하지 않을까 반성하면서 겸허함을 배우게 되는데. 자신의 인생에 대해 겸허를 배우는 것, 그게 곧 역사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1강(3.38)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2013.4.3 김혜수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2013 봄 학기

       

      안녕하세요.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수업에 자원활동가로 함께 하게 된 김혜수 라고 합니다. 지난주에 저는 ‘자원활동가’라는 처음 얻는 이름에 설레임과 기대감을 가득 안고 수업에 임했는데요, 많은 수강생 분들도 저와 비슷한 느낌 이지 않으셨을까 생각해봅니다. 앞으로 이곳에 수업 중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나 생각해 볼 것들, 느낀 점을 올릴 예정이니 함께 공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왜 역사교과서인가

      첫 시간인 만큼 주진오 교수님과 함께 앞으로의 수업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많고 많은 역사책들 중에 왜 역사교과서를 통해 공부하려는 것일까요?

      우리는 보통 학창시절 암기위주의 역사교육을 통해 매우 단편적인 사건들만 기억하고 있는데요, 교수님께서는 검인정의 과정을 통해 사실의 오류와 편향성을 최대한 줄이고 풍부한 자료를 담고 있는 교과서를 집필자와 함께 공부하면 그 행간의 의미를 정확하고 풍부하게 읽고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특히 개화파에 대한 일방적 미화, 집권 세력에 대한 악의적 비판, 민중의 저항 운동 등에 대해 자세히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서로 배움

      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은 역사교과서에서 발췌한 문장들 중 맘에 드는 것을 하나 씩 가져온 뒤, 왜 그 문장을 선택했는지, 그리고 왜 근현대사를 공부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발표를 부끄러워하시는 모습도 잠시, 다들 어찌나 말씀들을 잘하시는지 뒤에서 감탄하며 들었답니다.

      현재의 모습이 과거를 답습하고 있는 것 같아서, 과거의 시대상황이 지금도 계속되는 것 같아서 근현대사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는 분들이 많이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싶어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방향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라고 말씀해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의 늦둥이라고 소개하며 부모님세대의 역사를 알면 부모님과의 세대 차이를 좁힐 수 있을 것 같다고 발표해주신 내용도 기억에 남네요.

      무엇보다 경청하며 한 분 한 분의 발표를 들어주시는 모습이 인상 깊었고, 꼭 수업내용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배울 수 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느티나무 사진.jpg AC20130328_느티나무_<근현대사/></a></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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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배자라고 슬퍼하지 말자.

       역사적 평가는 시대에 딸라 다를 수 있으니 심판자가 되기보다는 다양한 측면을 바라보자는 교수님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깨어있고 싶은 욕구가 마구 마구 피어나는 저의 첫 번째 강의후기도 마치겠습니다.
      그럼 다음 수업시간에 뵐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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