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프랑스 혁명사

  • 강사

  • 기간

    • 2013. 3. 13 ~ 2013. 4. 17
  • 시간

    • 수요일 19:00~21:30 총6회
  • 수강료

    90,000

    • 파격 할인혜택
    • 참여연대 회원62,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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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 정보

     

     

    강의소개 |
    2013년 많은 사람들이 <레미제라블> 영화를 보고, 원작을 읽고 있다고 합니다.
    프랑스 혁명사를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프랑스 혁명은 가히 세계사의 획을 긋는 사건이었습니다.
    구체제와 새로운 세력과의 투쟁,
    신분제를 철폐하고 만인의 법적 평등을 구현한 것으로 평가 받는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은 유럽각국의 새로운 사회체제를 탄생시킨 것은 물론,
    근대 세계의 탄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시 보는 프랑스혁명사> 이 강좌에서는
    역사의 거대한 흐름, 그것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 역사의 수많은 패배와 승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그 흐름속에서 명멸해간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역사의 진보를 위해 투쟁하고 고민했던 사람들은 프랑스혁명에서 무엇을 배우려 했는가.
     
    프랑스 혁명은 세계사에 어떤 과제를 남겼는가
    2013년 현재를 사는 우리는 어떤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배우고 성찰해 봅니다.
     
    강의 일정 |
    날짜
    순서
    주제
    03.13
    1
    프랑스혁명 1789-1799
    03.20
    2
    나폴레옹에서 파리코뮨까지 - 7월 혁명, 2월 혁명, 파리코뮨
    03.27
    3
    인물로 보는 프랑스혁명(로베스피에르, 루이16세, 당통, 브리소)
    04.03
    4
    <레 미제라블>을 통해 본 혁명과 반동의 역사
    04.10
    5
    헤겔과 맑스로 보는 프랑스혁명
    04.17
    6
    부르주아 혁명론 - 영국혁명, 미국혁명, '위로부터의 혁명' 과의 비교
     
    강사소개 |
    최갑수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 서양근대사 그 중에서도 프랑스 혁명사를 비롯한
    서양 혁명사 연구를 진행해오고 있다.
    공저로 <근대 유럽의 형성>과 옮긴 책으로 <프랑스대혁명사>, <왕정의 몰락과 프랑스혁명>,
    <프랑스의 역사> 등이 있다.
     
    강의정보 |
    일시 : 2013. 3.13 ~ 4.17 (수) 총 6회 오후 7시 ~ 9시 30분
    장소 : 참여연대 느티나무홀(B1)
    수강비 : 9만원(참여연대 회원 30% 할인)

     

    후기 2

    • [다시 보는 프랑스 혁명사] 3,4 강 후기!

      2013.4.10 지은kd 다시 보는 프랑스 혁명사

      3강. 인물로 보는 프랑스 혁명 - 당통, 브리소, 로베스피에르, 루이16세, 브리소

      프랑스 혁명 당시의 모습을 묘사한 혁명화를 함께 감상하며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치열한 전투, 학살, 국왕 재판, 삼부회의, 왕비의 모습 등 당시의 긴박함과 사람들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3강의 주제는 ‘혁명의 향배와 의미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20선’이었습니다. 혁명에서 개인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루이 16세 국왕부터 혁명기 언론인으로 두각을 나타낸 에베르까지 다양한 인물을 살펴봤습니다. 다행히 당통, 로베스피에르 등 익숙한 이름을 가진 이들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당통은 법률가 출신으로 파리코뮨의 실력자였습니다. 군주제의 몰락에 기여 했고, 법무장관에 올라 임시행정내각의 실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핵심적인 권력체였던 공안위원회를 주도하고 공포정치를 지원했지만 발병으로 고향에 머물렀습니다. 관용파로 몰려 체포, 사형됩니다. 로베프 피에르도 그랬지만, 과도한 업무로 당통과 같이 질병에 시달려 사망한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AC20130410_봄학기_프랑스혁명사

      * 공안위원회: 사실 합법적 혁명권력체로는 국민공회(단원제)가 있었습니다. 21개 위원회를 통해 행정부를 지휘하는 권력체였습니다. 이 가운데 중요한 것이 공안위원회와 치안위원회였습니다. 특히 공안위원회는 정부 행위의 모든 분야를 관장해, 국민공회가 해산할 때까지 사실상의 정부 기구 그 자체 였습니다 1973년 여름에서 열월의 반동에 이르는 공포정치의 절정기(1년 여간)에 영웅적인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어 로베스 피에르 역시 법률가 출신입니다. 엘리트로서 봉기코뮨을 거쳐 국민공회 의원이 됩니다.아까 말씀드렸던 공안위원회 위원이 되면서 죽을 때까지 혁명 정부 및 공포정치의 최고 지도자로 남습니다. 혁명의 상승기인 5년을 통째로 겪은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급격한 시류 속에서 로베스 피에르 역시 몰락직전 과로로 병사합니다. 흡혈귀, 부패시킬 수 없는 자와 같은 별명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의 결벽증적 성격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말과 행동을 일치시켜 살았던 혁명가였다고 합니다. 1974년 봄, 권력의 정점에 서면서 공포정치의 책임자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 둘 외에도 착하지만 무능했다는 루이 16세(루이 15세의 손자)와 왕비, 방데 반란(귀족 반란)을 이끌었던 샤레트, 국왕재판에서 ‘왕이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고 주장한 생쥐스트, 대표적 혁명 순교자인 마라 등 다양한 인물을 공부했습니다. 국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시세의 흐름에 민감한 자유주의 귀족이나 수재형 인재, 자유전문직업인들(법률가 등)이었습니다. 눈에 띠는 점은 이들의 연령이 비교적 짧다는 점입니다. 이들의 평균연령이 36.7세 임을 고려할 때 그들과 함께 혁명을 주도했던 이들은 이보다 더 어리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혁명가들이 권력의 정점에 있던 시기는 보통 우리 생각보다 짧습니다. 혁명이 급격하게 진화하면서 대부분 사태에 추월당했기 때문입니다. 극좌가 어느새 보수가 되는 이념 정치 변형이 일어났던 셈입니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혁명에 가담하면서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흐름을 만들었습니다. 당통의 몰락이나 로베스 피에르의 몰락도 그런 흐름 속에 있기에 볼 수 있는 사건입니다

      AC20130410_봄학기_프랑스혁명사 (2)

      금강산도 식후경 ^^ 매 시간 참여자들의 간식준비로 먹거리를 나누고 있습니다.


      4강. 레 미제라블을 통해본 혁명과 반동의 역사

      레미제라블을 통해 프랑스 혁명을 살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최갑수 교수님이 직접 발췌한 부분들을 함께 읽으며 다양한 사건의 성격, 혁명 철학, 혁명 등에 대해 서술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공화주의자가 된 이후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공화주의가 대안이라는 메시지를 부르주아에게 주기 위해서입니다. 나폴레옹 3세에 반대해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집필을 이어갔습니다. 제2제정이 몰락하고서야 망명생활을 끝내고 파리에 옵니다. 이후 하원·상원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합니다. 빅토르 위고가 민중에 대한 애정을 이 책에서 보여줬다면 찰스 디킨스는 군중에 대한 공포를 녹여 두도시 이야기를 썼습니다.

      레미제라블은 최남선이 1910년에 소설의 극히 일부분을 중역해 알린 것을 시작으로 최근 민음사 등에서 원전>>우리말로 옮긴 완역판이 처음 나왔습니다. 1권의....100페이지를 채 읽지 못하고 접어두었는데 다시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방대한 양의 책 발췌부분을 함께 읽고 대선 이후 화제가 된 영화 레미제라블의 열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대선 직후 개봉하자마자 보신 분도, 저처럼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최갑수 교수님의 자료를 보면 보편적 휴머니즘과 함께, 7월 혁명 이후와 오늘날의 우리와 ‘역사적 유사성’의 존재, 빈부의 엄청난 차이, 법의 공정성 문제, 민주화의 역사적 성과 한계 등이 레미제라블 현상을 가져온 게 아닌지 추측하고 계십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프랑스가 오늘날의 복지국가로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그리고 희생이 있었습니다. 1세기에 달하는 치열한 계급투쟁 끝에 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복지국가적, 사회민주주의적 합의의 기본틀이 만들어졌습니다. 자본주의 철폐를 주장하는 노동자 세력에게 그들의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한 체제가 안착한 셈입니다. 여전히 끊임없는 권리를 요구하는 프랑스 시민의 모습을 종종 국제뉴스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수 세기에 걸쳐 이뤄낸 성과와 더 나은 미래가 가능하다는 믿음이 그 원동력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 [다시 보는 프랑스혁명사] 1강, 2강 후기

      2013.3.26 지은kd 다시 보는 프랑스 혁명사
      2013봄학기 <프랑스 혁명사/> 2강

      1. 수요일 저녁, 프랑스 혁명사를 공부하는 사람들

      대선 이후 영화 레 미제라블이 힐링 영화로 주목받았습니다. 첫 시간, 강의 수강 계기를 나누는 자리에서도 역시 영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통치의 대상에서 나라의 주인이된 프랑스 민중들의 이야기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라는 한국에서도 '통치받음'이 되살아날 수 있다는 의심과 이미 세련된 모습으로 통치하고 있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우리를 자극했나봅니다. 그래서 모였습니다, 프랑스 혁명사가 궁금한 사람들, 강의 해주시는 최갑수 교수님의 강의를 좋아하는 사람들, 참여연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2.  다른 국가들보다 1세기이상 빠른 '현대'를 시작한 프랑스. 프랑스 혁명을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사상과 제도 등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수업을 통해서 혁명 시기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과 헌법을 집어가며 혁명의 의미를 되새겨봤습니다. 중요한 사건이 그 때마다 헌법에 반영되면서 17개 가량의 헌법이 탄생하는 계기가 됩니다. 


      3. 강의의 중심 질문은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계속된 불안정성입니다.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와 민중이 함께 일으킨 1789년 대혁명 이후에도 7월 혁명, 2월 혁명, 파리 코뮌 등 다양한 정치적 사건을 겪습니다. 왜 안정된 정치질서를 만드는 데 오래 걸렸을까요. 저는 혁명의 성과가 정치 체제에서 받아드려지는 과정에서의 왜곡, 부르주아와 기득권의 방해를 뚫고 민중들이 스스로 권리를 찾으려고 했던 에너지 등이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3-1) 프랑스 대혁명(바스티유 감옥 함락) 이후 입법의회, 입헌군주제가 시작됩니다. 이 때 1791년 헌법이등장하고 그 다음해에 제1공화정이 들어섭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황제에 올라 제1제정이 시작되면서 공화정은 막을 내립니다. 혁명을 통해 탄생한 왕정인 셈입니다. 이어서 나폴레옹 폐위 이후 군주제가 복귀 합니다. 이 때 루이 18세가 즉위했지만, 그는 혁명기에 만들어진 제도적 장치를 거의 유지합니다. 혁명의 유산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입법권을 군주, 선거제(물론 일부 부르주아까지만 주어지는 선거권입니다)에 의한 하원, 국왕이 임명하는 상원이 공유합니다. 군주가 독식하던 때와 다르게 타협의 여지가 생긴 셈입니다. 혁명의 결과로 조금씩 권한이 분산되는 정치체제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3-2) 루이 18세에 이어 샤를 10세가 즉위하고1830년, 7월 혁명으로 폐위당합니다. 7월 혁명은 1827년 선거에서 야당이 승리하지만 결과를 무시하고 일부 언론의 폐지, 새 의회 해산, 새 선거 주문, 투표권의 제한 등 반동적인 왕령을 반포합니다. 결국 파리의 소생산자층이 궐기하면서 혁명으로 비화합니다. 이 때 바리케이드가 등장하고 군대가 발포명령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민중의 궐기가 있었지만 지배층은 공화정 대신 (반동적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오를레앙가를 복귀시킵니다. 이 때 중산층의 가장 부유한 부류에게만 참정권을 확대합니다. 여전히 피 흘린 민중들에게는 정치권이 요원합니다. 


      3-3) 2월 혁명으로는 오를레앙가 복귀로 즉위한 루이 필립이 폐위 됩니다. 참정권 확대가 핵심적인 사안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왕과 의회 다수파(앞서 선거에 승리한 야당)의 충돌이 아니라 의회의 지지를 받고 있던 정부와 의회개혁운동의 충돌이었습니다. 후자의 세력에는 프랑스 정치계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좌파 세력과 중간층이 합세해 참정권 확대를 요구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이들이 군중들에게 시위에 나설 것을 촉구하자 정부는 이들 세력이 모이는 연회 자체를 금지해버립니다. 결국 민중들의 시위가 시작되고 제2공화정이 선포되기에 이릅니다. 참정권이 확대되고 1848년 성년남성 보통선거권에 기반한 선거가 시행됩니다. 그러나.......! 다시 왕당파가 의회 선거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당시 농민들은 여전히 가톨릭의 헤게모니, 즉 기득권의 헤케모니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혁명의 보수화를 의미합니다. 


      3-4) 12월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공화파 후보를 제치고 나폴레옹의 조카가 당선됩니다. 이후 왕당파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제2공화정이 무력화됩니다. 대통령은 친위 쿠데타를 통해 제2제정을 세웁니다. 그러나 예전처럼 권위주의적 제정이 아닙니다. 제정의 자유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정이 꼭 권위주의와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민주주의가 꼭 자유와 만나는 것은 아닌 것 처럼!) 하지만 제2제정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붕괴합니다. 이 때 제3공화국이 탄생합니다.


      3-5) 제3공화국은 70여년 연속 공화정을 유지하며 계속됩니다. 독일이 세운 괴로 정부인 비씨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물론 안정된 공화국이 성립하기까지 10년의 세월이 걸립니다. 프로이센에 프랑스가 항복하면서 베르사유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막대한 배상금, 알자스 로렌 지방 넘김 등을 포함한 조약이었습니다)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있던 왕당파 의원들이 일방적으로 독일에 유리한 조약을 체결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왕정복고를 꾀합니다. 파리 시민들은 이러한 보수파의 움직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결국 파리 코뮌이 나타나는 배경이지요. 이 때, 문명의 수도라는 파리에서 18,000여 명이 사망합니다. 많은 좌파들이 파리를 떠나면서 현 파리시장 이외의 모든 시장은 우파였다고 합니다. 


      2013봄학기 <프랑스 혁명사/> 2강

      4. 혁명 이후에도 공화정은 보수화되고 프랑스에서 여성이 참정권을 갖게되기까지는 또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혁명의 유산이 지워진 것은 아닙니다. 프랑스 정치사상이 좌 선회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민중들이 언제나 궐기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함께 실제로 혁명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공화국이 당연시되고, 사회당과 공산당이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혁명 속에 다양한 정치적 지평들이 잉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4-1) 프랑스 혁명사를 들여다볼수록 힐링보다는 어떤 강렬한 에너지를 느낍니다. 보수 양당체제로 귀결되는 정당 문화를 생각케하고 또, 오늘의 이 선거결과를 막기위해 저는 무엇을 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수백 년에 걸쳐 변화를 이끌어온 이들의 이야기를 보며 좀 더 먼 호흡으로 지금 이 순간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모두 에너지를 모아봤으면 좋겠습니다.


      5. 세 번째 수업이 기대되는 이유는 물론 강의 내용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최갑수 교수님이 보여주시는 강의 열정때문입니다! 다른 분들에게도 강력 추!천!합니다^.^


      5-1) 빈 공간이 많은 후기입니다 ㅜ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원활동가  강지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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