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Ⅱ

  • 강사

  • 기간

    • 2012. 8. 30 ~ 2012. 11. 8
  • 시간

    • 목요일 19:00~21:30 총11회
  • 수강료

    170,000

    • 파격 할인혜택
    • 참여연대 회원85,000

    각종 혜택 적용은 로그인 > 마이페이지에서 진행됩니다

    상세 정보

       강의소개 |

     

    역사는 부끄러움을 알기 위해 배운다고 누군가 말했답니다. 한 주가 꺾이는 피곤한 목요일 저녁을

    무거운 몸을 이끌고, 만원 전철에 시달리며 공기도 흉흉한 서울 한 복판에 오는 이유는...

    "역사적 정의"란 무엇이며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지 나의 중심을 잡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고증을 통해 사실을 증명하는 공부보단, 흐름과 인과관계를 중심에 둔 이야기로 풀어가는

    역사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다양한 역사관과 논쟁거리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중략] 

    -      <2012봄 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Ⅰ> 참여자 후기

     

    많은 분들의 기대와 성원으로 2011 <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 강좌가 2012

    앵콜 강좌로 돌아왔습니다. 최근 사용되고 있는 검인정 교과서는 과거의 교과서와 많이 다릅니다.

    내용면에서도 새로운 연구의 흐름을 많이 반영하고 있고 시각자료들도 풍부합니다.

    하지만 검인정이라는 제도 때문에 자유로운 역사서술이 되기 어려운 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교과서는 역사를 체계적으로 제시한 하나의 텍스트에 불과합니다.

     

    <교과서> 강좌는 지난 학기에 이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때로는 일방적으로 주입됐던

    역사교과서를 비판적인 검토의 대상으로 공부합니다. “역사교과서의 한계점은 무엇인지”, “교과서

    내용을 둘러싼 (시대와 주제별) 역사적, 사회적 논쟁점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또한 교과서를 집필한 역사학자들이 직접 교과서의 내용을 설명하고 토론과 논쟁을 이끌어 나가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고 그것이 우리의 현실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미래를

    어떻게 전망할 것인가라는 역사교육의 본래 목적에 충실하게 진행될 것입니다.

     

    <근현대사 강좌>는 봄, 가을 두 학기 1, 2부로 나누어 진행되며

    1부는 근대 초기부터 1920년대까지, 2부는1930년대부터 현대사를 다룹니다.

    현장에서 답사를 포함해 총 11회로 진행될 즐거운 한국 근현대사 공부에 많은 분들과 함께 하길

    기대합니다.

     

    강의 일정 |

    날짜

    순서

    주제

    강사

    08.30

    1

    서간도로 떠난 사람들

    박찬승

    09.06

    2

    임시정부 이야기: 머나먼 혁명의 길

    박찬승

    09.13

    3

    바람 부는 섬, 소안도의 항일투쟁

    박찬승

    09.15()

    4

    답사① 독립운동 그 현장으로(종로 서대문 일원)

    박찬승

    09.27

    5

    김구 이승만, 그들이 꿈꾼 나라

    이신철

    10.04

    6

    오보가 뒤흔든 해방정국

    이신철

    10.11

    7

    홍명희는 왜 북한의 부수상이 되었나

    이신철

    10.18

    8

    진주 외공리 산 속에 묻힌 사람들

    이신철

    10.27()

    9

    답사②: 여운형에서 박정희까지, 비운의 정치가들

    이신철

    11.01

    10

    5·16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이신철

    11.08

    11

    과거를 기억하는 법, 미래를 만들어 가는 법

    이신철

    4강(9.15로 변경되었습니다), 9강(10.27 예정대로 진행) 답사는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진행 예정입니다.

     

    강사소개 |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 한국근대사 중 일제강점기를 사회사상사, 사회사를 연구함

    이신철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고등학교 <한국사교과서(천재교육) 공저

     

    교재 |

    <고등학교 한국사, 천재교육> (주진오 외)

     

    참고도서 |

    <한국근현대사를 읽는다> 박찬승, 경인문화사

    <고쳐 쓴 한국근대사> 강만길, 창작과비평사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서중석, 웅진 지식하우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김성보, 기광서, 이신철, 웅진 지식하우스

     

    강의정보 |

    일시 : 2012. 8. 30 ~ 11. 8 () 11회 오후 7~ 930

    장소 : 참여연대 느티나무홀(B1)

    수강비 : 17만원(참여연대 회원 50% 할인)

     

     

     

    후기 7

    • [한국근현대사Ⅱ] 9강 답사 - 여운형에서 박정희까지 비운의 정치가들

      2012.11.9 느티나무 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Ⅱ
      AC20121103_북촌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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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근현대사II] 10강, 5.16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2012.11.8 우연필연 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Ⅱ

      들어가며

      안녕하세요. <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 II> 도 어느덧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한국전쟁(남북전쟁) 이후 이승만 정권과 장면, 그리고 박정희 정권을 아우르는 역사를 다루었습니다. 이날 26분 정도가 참석하셨습니다^^

      이날 강의장에 한 시간 일찍(6시) 도착했는데 영상물을 상영하고 있었습니다. 영상물은 이 강의에 참여하시는 한 참여자께서 제공해주셨는데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이승만의 행적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제 학창시절 근대사를 배우며 막연하게 생겼던 의문들이 이 영상물을 통해 점점 해소되어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단절되어 있던 사건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발견하거나 또는 그동안 잃어버렸던 퍼즐 조각들을 찾아 기억의 빈자리에 끼워넣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중반에 윤봉길 의사가 남기신 글귀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개인의 자유는 민중의 자유로부터 얻어진다.” 로 얼추 기억하는데, 보이는 글귀 자체에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무언가가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이날도 이 선생님께서는 조금 늦으셨습니다..(30분^^;;;).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강의에 대한 기대도 더욱 커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선생님의 강의는 역시 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전후 한국의 역사를 다루었습니다.

          

       

       

      국군포로 문제

      한국전쟁은 근본적으로 같은 민족 간의 전쟁이다 보니 포로 교환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쟁 초기 북한은 포로들에게 사상 교육을 실시하고 전향 여부를 물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풀려나지 못한 포로들을 우리 남쪽에서 추정하기로는 약 5만명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중 254명 정도가 파악되고 있는데 국군포로문제는 오늘날까지 복잡한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그동안 우리 쪽에서 북으로 보냈던 북파공작원의 수도 정확히 추산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들을 대략 7천명 정도로 추정하는데 이중 미귀환자가 얼마정도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아마 정부는 알 수 도 있겠죠..) 이들의 송환은 정치적으로 더욱 민감한 문제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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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8월 열린 제11차 이산가족 상봉에서 정현한 할아버지(왼쪽)가 국군포로로 생이별한 북측의 형 정진현 할아버지를 만나 얼싸안고 있다. 북한은 국군포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날 만남은 ‘특수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졌다.

      출처 : 세계일보

      http://www.segye.com/Articles/Issue/Inquiry/Article.asp?aid=20100615003662&subctg1=&subctg2=&sid=4000152

       

       

      어느 국군포로의 수기에 따르면, 북한군 포로 수용소에서는 정신교육을 매일 실시했다고 합니다. 전쟁 직전에 월북했던 사람들이 선동하여 인민군에 입대를 권유했답니다. 이때 국군포로의 실상은 하루 식량은 안삶은 옥수수 배급 두 차례가 전부였기에 춥고 배고픈 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전향, 북한군에 입대했다고 합니다. 특이한 점은 당시 이렇게 북한군에 재입대 했다가 다시 국군에 포로로 잡힌 경우, 전향을 다시 하면 원래 소속인 국군으로 편입시켰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포로수용소에서 자대 배치를 받은 뒤, 전후 1980년대까지 감시를 당했다고 합니다. 이 수기는 이러한 처지에 놓인 국군포로가 증언한 내용이며, 이 분은 자신의 처지와 현실에 울분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남북 모두 포로의 출신성분을 의심했습니다. 사실 상상조차 할 수 없이 힘들었던 당시이기에 우리가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현재 북한에 있는 5만명의 포로들이 자발적으로 남은 것인지, 강제로 남은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경우 인민군인데 전후에 귀환하지 못한 사람들은 지리산에 빨치산으로 남겨졌습니다. 이들을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간주하여 처벌했습니다.

      여담으로 이 선생님은 한국전쟁 때 세균전이 있었는지에 대한 의혹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몇몇 증언이 있었다고 했는데, 만일 실제로 있었다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국제적으로 금지된 대인지뢰가 전쟁중, 전후에 매설되어 한반도 도처에 있다고 합니다.

       

       

      민주주의의 부재, 50년대 한국 정치

      1948, 50, 52, 54, 56, 58, 60 순서대로 대선, 총선, 대선, 총선.... 이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한민당과 연합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당시 연합 정당인 한민당은 내각제를 선호했지만 이승만이 대통령 중심제를 주장했습니다. 결국 대통령 중심제가 관철되었고 나아가 내각 임명에서도 한민당은 배제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한민당은 야당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48년 초대 대통령 선거는 간접선거인 반면 52년에는 직선제로 바뀌게 됩니다. 이때부터 이승만의 위기이자 고민이 시작됩니다. 52년 5월 부산 정치 파동으로 헌법을 개정하는데 이때를 가리켜 ‘발췌개헌‘ 이라고 합니다.

      대통령은 중임이 불가하기 때문에 이승만이 56년에 다시 대통령을 출마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다시한번 꼼수를 써 54년 초대 대통령에 한해 그 조항을 적용하지 않는 취지의 사사오입 개헌을 단행합니다.

      60년대 선거에서 이승만은 대중의 인기가 없었습니다. 사실 이미 56년 선거 때 부통령에 장면이 당선되었고, 대통령 후보로 2등을 했던 조봉암도 이승만을 위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면암살을 시도하고 58년에는 가장 강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조봉암을 간첩죄로 처형합니다. 그래도 불안해서 1960년 우리도 잘 아는 3.15 부정선거를 저지르게 됩니다.

      60년대의 3.15 부정선거는 참 웃기는(?) 선거였습니다.

      크게 세 가지 부정이 있었습니다. 사전 투표를 조작하여 지지율을 기본 4할로 맞추고, 3,6,9인을 짝지어 공개 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야당 참관인을 투표 당일날 투표소에서 퇴장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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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당 유세에 버스와 트럭으로 청중을 동원하는 모습.

      출처: http://dugok.x-y.net/kor-his/eve/3.15masan.htm

       

       

      한마디로 말하면 50년대 한국의 정치는 이승만을 어떻게 대통령 만들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봐도 무방한 것 같습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했던가요. 우리 국민들의 피와 투쟁으로 얼룩진 4.19 시민혁명을 통해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고 새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이때 민주당이 당선되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아쉽게도 혁신과 개혁의 정치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5.16 군사쿠데타가 벌어지게 됩니다.

       

      5.16 군사 쿠데타와 박정희

      사실 이승만이 퇴진하고 5.16이 벌어지기 전까지 장면 정부가 있던 시기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를 두고 의견이 갈립니다. 5.16 쿠데타를 지지하는 세력은 4.19 혁명 이후의 대한민국을 큰 혼란의 시기로 인식합니다. 이러한 시기에 유일하게 근대화 교육을 받은 세력은 군대라고 주장하며 군대에 의한 쿠데타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합니다. 반대의 입장에서는 이 시기를 일종의 과도기로 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주화와 근대화를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가야 하는지의 문제입니다. 이를 둘러싸고 이 선생님은 몇 가지 논점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 4.19 혁명 이후 장면 정부의 혼란이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한 필요한 혼란이었는가 아니면 그냥 무능한 정부로 인한 혼란이었는가?

      -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었어도 유사한 수준의 경제 성장은 가능했는가?

      - 민주화와 산업화가 같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이선생님은 역사적 근거를 토대로 박정희의 행적을 알려주셨습니다. 박정희는 일제 강점기 일본의 위성국인 만주국의 군관이었으며 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혈서까지 썼습니다. 만주군 소위로 임관 한 뒤의 행적은 나타나 있지 않는데, 일본 패망 후 즉시 일본군을 탈출해서 광복군의 중위로 가입하게 됩니다.

      한편 해방 후 친형 박상희가 남로당의 선전부장이었는데 경찰에 사살되자 이에 남로당에 가입하여 승승장구 하게 됩니다. 그러다 여순 사건을 계기로 군대 내 이른바 빨갱이 색출작업이 진행되자 박정희는 붙잡히게 됩니다. 옛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의 구명운동과 함께 남로당 내부 조직 정보를 누설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어 국군 정보 계통의 군인으로 근무합니다.

      특이한 점은 박정희가 쿠데타 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북한에서 친형의 절친한 친구를 특사로 파견합니다. 초창기에는 남북관계가 긍정적인 분위기였지만 미국에 발각되자 돌변, 친형의 절친한 친구이자 특사를 간첩혐의로 처형시킵니다.

      여담으로 이 시기 박정희의 과거 기록을 지우기 위한 작업들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국내 기록은 이미 거의 없앴고, 그나마 미국에 있는 자료들은 문서보관소에 가서 대출하고 반납을 하지 않는 방법을 통해 경력 ‘세탁’을 시도하였다고 합니다.

       

       

      마치며

      이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경제성장과 관련하여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미국의 원조는 50년대 이후 중단되었으며 박정희 정부 시절 경제 성장 계획을 수립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함께 진행할 수는 없었을까요?

      박정희 정부의 집권 동안 경제 성장을 위해, 또는 정권 유지를 위해 희생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의 신화 이면에는 경부고속도로를 짓다가 사망한 사람들, 또 중단되었다가 막바지 작업을 위해 투입된 군인들의 희생이 있습니다. 당시 학교 진학률이 저조했고 대부분이 공장으로 가서 일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경제 성장은 한 개인의 공로나 업적이라기보다 우리 국민, 시민의 힘으로 이룩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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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부고속도로 추풍령 휴게소에 있는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탑

      출처 : 루리웹

      http://ruliweb.daum.net/news/view/MD20100204143607107.daum

       

       

      끝으로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과 관련하여 이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제 나름대로 재구성하면서 후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인물이 기념할만한 인물인지 아닌지 판단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해답은 훗날 우리가 그 인물을 기념하는 동상이나 기념관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데려갔을 때, 자녀들에게 이 인물을 본받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여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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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옥천 옥천군 금강휴게소 인근에 세워진 '경부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

      건설현장에서 순직한 77명의 순직자를 기리기 위해 세운 탑.

      “조국근대화를 향한… 거룩한 초석이 된 것이니… 우리 어찌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은혜와 공을 잊을 것이랴….”

      출처 : 지역정보포털

      http://www.oneclick.or.kr/contents/nativecult/area09.jsp?cid=80508

    • [한국근현대사Ⅱ] 8강, 진주 외공리 산 속에 묻힌 사람들.

      2012.10.31 우연필연 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Ⅱ

      10.18일에 있었던 한국근현대사 II  강좌 후기입니다. 늦은 후기 죄송합니다 ^^;

      들어가며

      오늘 강의는 이선생님께서 지방출장 다녀오신 관계로 조금 늦게 시작되었습니다.(그래봐야 5분정도 늦으셨습니다^^;) 눈에 띌 정도로 지난 시간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아카데미에 나와주셨습니다. 세어보니 대충 25분 오셨는데 남성은 저와 자원활동가 선생님 포함 여섯 명이었습니다. 다음 학기 역사 강좌에는 많은 남성분들이 관심 가져주시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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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지난 시간 다루지 못한 토지개혁 부분을 마무리하고 남북전쟁(6.25)과 관련한 쟁점들을 이야기 나눠보았습니다.

       

      위안부의 그림자

      흔히들 ‘위안부 문제’ 하면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군에 강제로 동원된 위안부 여성들을 떠올리실 겁니다. 그러나 6.25 시절 한국군에서 기생촌을 운영하였는데 이 때 위안부에 동원되었던 여성들이 다시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시기 현지 여성들을 중심으로 우리 군대에 위안부와 유사한 형태의 조직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위안부 문제는 과거에 벌어진 일제의 만행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를 포함한 전세계에서 자행되고 있는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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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http://www.koreahealthlog.com/719

       

      북한사(史)? 

      그동안 우리는 한반도 3.8선 이남의 역사를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로 배웠습니다. 국사책은 8.15 해방 이후부터 한반도 남쪽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중심으로 근현대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북한사는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 뿐 아니라 대부분 북한사를 알지 못하며 부정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볼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헌법은 우리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헌법을 따른다면 8.15 해방부터 지금까지의 북한 역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북한의 역사와 관련된 논쟁은 세 가지 정도로 말할 수 있습니다.

      1.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북한사를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까요?

      2.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해방군이고 소련군은 점령군일까요?

      당시 미군은 직접통치를 하고 소련군은 간접통치를 했다고 합니다. 미군의 역할은 근현대사를 통해 잘 알고 있지만 소련군의 경우에는 잘 알지 못합니다. 당시 북측에 진주한 소련군의 입장은 “조선의 새로운 국가는 조선인이 건설하는 것이다.” 였다고 합니다. 대신 정치위원회 설립 시 소련이 강제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1:1 비율로 구성했다고 합니다.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공산주의자에게 유리한 조건인 것입니다.

      3. 사회주의 혁명인가?

      당시 북측에서는 조선노동당 창건을 전후한 1949년 8월부터 10월 사이의 사건들을 사회주의 혁명이라 하지 않고 인민민주주의 혁명으로 불렀다 합니다. 당시 레닌, 스탈린 등이 주장한 ‘사회주의 혁명’ 은 일반적으로 다음의 네 가지 조건을 갖춰야 했습니다. 첫째, 노동자와 농민이 연합한 정권, 둘째, 사유재산 불인정, 셋째, 상공업을 허용하지 않을 것, 넷째, 토지개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 북측은 토지개혁만 실시했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이라 부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1970년대 이후 사회주의 혁명으로 규정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고 합니다.

       

       

        북한의 토지개혁

      북한의 역사는 우리 학교에서 다루지 않으며 일반 대중이 접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북한의 토지개혁은 북한 정권 수립 시기와 맞물려 있기에 우리들은 그 내막을 잘 알지 못합니다.

      몰수대상은 일본인의 토지와 일본의 국유지, 친일파와 지주들의 토지였습니다. 지주들의 경우 5정보(1정보: 3천평)이상을 소유한 지주들의 토지를 전부 몰수했습니다. 법령 시행 전까지 기부하면 상관없기 때문에 지주들이 5정보가 안될 정도로만 남기고 다 기부하여 토지 강탈을 면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농사짓는 농민들만 분배대상이었으며 토지개혁에 대한 저항은 미미했고 상당수의 지주들이 월남했다고 합니다.

      당시 종교단체의 토지도 몰수했기 때문에 종교적인 기반이 약화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특정 종교나 마을 지도자를 중심으로 잘 운영되던 마을 공동체가 토지개혁을 둘러싸고 계급 간 갈등으로 비화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남북전쟁?

      1950년에 발발한 남측과 북측의 전쟁을 우리들은 6.25, 혹은 6.25사변, 한국전쟁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한국전쟁으로 통일했고, 북측은 조선 전쟁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에 대해 생각해볼 점들이 있다고 합니다.

      우선 전쟁이 6월25일에 일어났는지의 문제입니다. 이선생님 말씀에 따르면1950년 6월 25일 전에도 38선을 중심으로 소규모 전투가 빈번하게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은 한국전쟁 혹은 남북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을 누가 시작한 것으로 볼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이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었으며 총 21개 국가가 참여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남측을 도와준 16개국과 남북, 그리고 중국, 소련, 일본 도합 21개 국가입니다. 전쟁 전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주장했고 김정일 또한 남진통일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49년 당시에도 소규모 전투가 빈번했다고 합니다.

      전쟁의 시작을 6.25로 보는 것이 문제 있다고 이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는데, 이 대목에서 저는 약간의 의문이 들었습니다. 비록 6.25 전에 소규모 전투가 계속되었다 해도, 만일 북측에서 6.25일에 맞춰 대대적으로 탱크와 무기를 준비하여 한꺼번에 밀고 내려왔다면 그때부터를 전면적인 전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날 연평도 사건과 같은 북측의 여러 군사적 시도들을 도발이라고 하지 전쟁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전투의 양상이 점점 확대되어 시작 시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는 있을지 몰라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전면적으로 밀고 내려왔다면 그때부터를 전쟁의 시작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이 땅에 전쟁이 남기고 간 깊은 상처들

      하지만 전쟁을 이데올로기적인 시각이 아닌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한 참상들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진주 외공리에서 600여구의 유골이 머리에 총탄자국이 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유골의 의복에 달린 명찰로 경기도의 모 상고 학생도 포함된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대부분은 부녀자였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누가 이들을 정확히 언제 죽였고, 이들이 왜 죽었는지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한국전쟁의 미해결 사건들이 많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초기 남한 정부에서는 평택 이남의 형무소에 있는 사상범을 모두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1500명이 처형되고 도합 3천여명이 처형된 사건이 보도연맹 사건입니다. 또한 전쟁 중에 많은 피난민들이 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했습니다.

      한편 전쟁 초기 북측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잔류파 국회의원 중 54인의 국회의원이 전향했다고 합니다. 잔류파 국회의원들 중 김규식, 조소암과 같은 민족주의자는 자의로 남고 나머지는 한강다리가 폭파되어 못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인민군의 공작도 있었지만 전향한 사람들은 공산당 지지성명을 했습니다.

      반면에 일반 민중들은 살기위해 부역을 했습니다. 이들은 훗날 북진할 때 공산당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처형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부역 혐의로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들이 오늘날 많이 밝혀졌는데, 고양시 금정굴에서는 1천여명의 민간인이 부역혐의로 굴 안에서 처형되었고 그 유골이 발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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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공리 유골들. 출처 ; http://blog.ohmynews.com/malddug/ 

       

      마치며

      이선생님께서는 우리가 이데올로기적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데올로기가 아닌 전쟁의 참상 그 자체를 놓고 일반 백성, 시민들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데올로기적인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기에 아직도 이 땅에 많은 이산가족들과 여러 피해자들이 고통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왜 죽었는지도 모르는 수많은 유골들이 이 땅 어딘가에 묻혀있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인간 생명에는 이데올로기가 없습니다. 진정한 역사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휴머니즘으로 쓰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다음시간에는 답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북촌이 정치적으로 중심지였다고 합니다. 여운형, 박헌영 등이 건국준비위원회로 활동하던 장소를 방문해 그들의 자취를 짚어보고 그 후에 박정희 대통령 시절과 관련된 청와대 주변의 여러 장소들을 둘러보는 코스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날 강의 후에는 강의실에서 간단한 안주와 함께 맥주를 마시며 뒤풀이를 했습니다. 많은 참여자분들이 남으셔서 열띤 토론을 했는데, 여러모로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언젠가는 강의실 밖에서도 이러한 자리가 마련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10월 18일 강좌 후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 [한국근현대사Ⅱ] 7강, 정치가 김구와 제주‘항쟁’ - 균형 잡힌 역사관을 위하여

      2012.10.16 우연필연 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Ⅱ

      들어가며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의 가을학기 인문학교 강좌 ‘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근현대사II’ 는 여러 가지 이유로 검정 교과서에 담지 못했던 내용들을 저자가 설명해주는 강좌입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역사적 사건을 비판적으로 설명하여 시민들이 균형 잡힌 시각을 갖추도록 하는 취지의 강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균형 잡힌 역사관을 위하여

         이번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다뤘던 미소공동위원회에 이어 해방 후 남북협상 및 정부수립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선생님께서는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협상 과정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사건들을 상세하게 설명하셨는데, 특히 북한의 정부 수립 역사도 다룸으로써 참여자들이 다양한 시각에서 역사적 사건들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이 선생님이 설명해주신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 세 가지 사항이 인상 깊었습니다.

       

       1. 4.3 제주항쟁

        오늘날 우리 정부는 4.3 제주항쟁 사건을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 행사로 규정하고 있으나 군대 등 일부 집단은 여전히 4.3 항쟁에 대해 국가를 전복하려는 시도로 간주한다고 합니다.

         당시 군경과 더불어 서북청년단 등 어용단체들이 투입되어 수많은 무고한 제주도민들이 학살당했습니다.(슬라이드로 보여주신 그림들이 말보다 더 직접적으로 와 닿았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한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사실이며, 정부가 제주 4.3항쟁에 대해 국가에 의한 폭력으로 분명하게 규정했다면 정부가 대중에 이를 널리 알리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국민들이 진실에 눈을 떴을 때 다시는 우리 역사에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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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gold_dragon/40030503119         

                                

      2. 백범 김구

         김구를 정치가로 인식했을 때 그의 정치적 선택과 행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족주의자이며 기백이 넘치는 독립운동가인 김구 선생도 어쩌면 정치적인 선택의 기로에서 장고를 거듭했을지도 모릅니다.

         (1차) 남북협상을 위해 김규식 선생과 북으로 건너갔을 때 그의 미래가 결정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만일 김구 선생이 북으로 가는 대신 남측만 시행한 총선거에 참여하였다면 여당의 수장 내지 야당의 수장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강성했으나 그에 반발하는 세력과 민족주의자들을 규합하여 대항했다면 김구로써도 충분히 승산 있는 선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북측 회담에 참석한 것이 결과적으로 그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켰고, 한편 그 시기 이승만은 남한 총선거를 통해 실질적으로 물리력(군경)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획득하였습니다. 후에 김구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이승만 세력이 군경 집단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김구가 민족주의자들과 이승만에 반발하는 세력을 규합하고 대항하는데 있어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3. 오래된 영상물 시청

         해방 후부터 정부수립까지 북한의 생활상을 담은 영상물을 시청하였습니다. 당시 주거형태나 생활 전반이 남쪽 사람들과 다른 점이 없었습니다. 김일성을 위시한 세력들이 노동당을 창당하기 전까지 태극기를 사용했다는 점이 그나마 주목할 만한 사항인 것 같습니다.

       

          

      그밖에도..  

          준비자 분들께서 맛있는 김밥을 마련해주신 덕분에 허기진 배를 채우고 더욱 열띤 자세로 강의를 경청할 수 있었습니다. 강의 시작과 말미에 멋진 멘트를 날리며 진행해주신 간사 선생님과 항상 애쓰시는 자원활동가 선생님의 노고에도 감사드립니다. 다음번 강좌와 함께 강좌 끝나고 진행되는 뒷풀이 또한 기대해 봅니다.

       

          

      마치며  

         이번 시간에는 시간이 부족해 강의 진도를 다 나가지 못했으나 이러한 부분이 시민교육의 자유로움이자 ‘멋’이 아닐까 합니다. 정해진 진도를 어떻게든 채워 나가는 것보다 내용의 깊은 성찰을 통해 조각난 역사적 사실들의 연결고리를 찾고 빈틈을 매우는 작업을 참여자들과 함께 공유하는 것이 본 강좌의 취지와 성격에 더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이번 6강의 제목인 ‘홍명희는 왜 북한의 부수상이 되었나?’에서 홍명희는 김구 선생이 남북 협상을 위해 북으로 건너가셨을 당시 함께 동행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김구 선생이 다시 남쪽으로 돌아오실 때 함께 내려오지 않고 북쪽에 남았다고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북한의 부수상이 된 홍명희가 과연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보며 제법 서늘해진 어느 가을날 밤에 열렸던 열띤 강좌의 후기를 마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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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명희(소설가, 1888-1968)                     *출처 : 네이버 인물정보

       

       

       

    • [한국근현대사Ⅱ] 5강, 오보가 뒤흔든 대한민국

      2012.10.12 서동호 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Ⅱ

      안녕하세요. 

      시작한지 얼마 안된거 같은데 벌써 강의가 중반부로 접어들었네요. 

      치열했던 독립투쟁을 거쳐 이제 해방후 한국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해방 이후의 다양한 정치인들에 대해 살펴보고, 신탁통치와 관련한 동아일보의 오보사건을 다뤘습니다. 

      오늘 후기에는 '신탁통치 오보사건'을 중점으로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1. 신탁통치 오보사건

      혹자는 '신탁통치 오보사건'을 '역사를 뒤바꾼 10대 오보'중에 하나로 꼽기도 합니다. 그만큼 한반도와 세계정세에 엄청난 영향을 준 사건입니다. 

      광복을 맞은지 4개월이 지난 후에 미국과 소련, 그리고 영국의 외상은 모스크바에서 한반도를 어떻게 할지 협상합니다. 이 회담이 모스크바 3상회이지요. 이 때 회담에 참석한 미, 소, 영과 장제으의 중화민국을 포함하는 4개국이 한반도를 신탁통치 하자는 아이디어가 구상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움직임이 저 멀리 막사과(모스크바의 당시 표현)에서 이런 논의가 진행되던 때인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에서 호외를 냅니다. 

      신문 원본.JPG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 기사 -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삼팔선분할점령.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

      당췌 읽을수가 없군요. 하얀건 종이요 까만건 글자겠죠? 그나마 보이는 사진에서 스탈린과 미국의 외무상인 번즈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련과 미국이 만나서 뭔가 했나보군요! 

      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 기사.JPG

      <위 기사를 번역한 내용입니다. - 출처 : 네이버 뉴스캐스트>

      보도 내용인 즉,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협상결과가 나왔으며, 소련은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미국은 반대하는 입장이다 라는 것인데, 문제는 이게 사실관계가 뒤바뀐, 오보라는 것입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는 앞서 말했듯 1216일부터 27일까지 미국·영국·소련 3개국의 외무장관들이 모스크바에서 모여 전후 처리 과정에 대한 문제들을 합의하려 진행한 모임이었는데이 기사가 나오던 시점인 12월 27에는 회의 내용이 채 공개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회의 내용은 이후 12월 30일에 공개됩니다.)

      기사 내용을 잘 살펴보시면 아시겠지만 '조선 독립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하여 가고있다'는 등의 추측성 발언을ㅈ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에 기반해서 쓴 기사가 아니라 회의 내용에 관한 하나의 추정, 그러니까 정확하지 않은 기사라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거죠.

       

       

       

      2. 극렬한 좌우대립

       

      하지만 사실은 이와 달랐습니다. 정작 신탁통치를 주장했던건 미국이었지요. 그리고 신탁통치에 관한 미국과 소련의 입장도 차이를 보이는데, 소련의 경우 일종의 '후견인'역할의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미국의 경우 완전한 신탁통치를 주장합니다. 

      이 보도가 발표되자 한반도는 '친탁'을 주장하는 좌익 진영과 '반탁' 주장하는 우익 진영으로 나뉘어 좌우대립이 극에 달하게 됩니다. 일제에 의한 강제통치에서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던 상황에서 또 다시 강대국에 의한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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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유명한 사진입니다. 신탁통치 반대시위 사진>

       

      이승만, 김구등의 유수의 정치가들은 일제히 '3상회의 결과 수용 불가!', '신탁통치 반대'의 구호를 내걸고 반탁운동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김구와 이승만의 재빠른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여운형, 박밀려있던 지지도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초기엔 좌익들도 "신탁통치는 우리 민족에 대한 모독"이라며 반탁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박헌영이 소련을 다녀온 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여 찬탁으로 입장을 선회하지요. 이들은 결국 우익에 의해 찬탁세력으로 치부되어 범 국민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반탁운동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친일세력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세탁해버립니다. 친일파 세력들이 친/반탁운동으로 정세가 요동치는 틈을 이용해 자신들을 '반공투사','애국자'로 둔갑시켜버린 것이 이것입니다. 

       

       

      3. 교과서와 반탁운동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때 "소련은 찬성, 미국은 반대"라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대해 외웠었습니다. 교과서에서는 동아일보의 오보내용이 역사적 사실으로 아직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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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2009년 교과서 개정안을 통해 이 내용에 변화가 오게 되는데, 201031일에 나온 금성출판사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258페이지에 "...소련이 38선 분할을 구실로 신탁통치를 주장한 반면,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하였다는 잘못된 보도였다"라고 설명한 구절이 첨가됩니다. 독립된 박스로 다룰 정도로 오보사건이 나름 비중 있게 등장합니다.

       

       

    • [한국근현대사Ⅱ] 3강, 그 섬에 가고 싶다 - 완도의 항일운동

      2012.9.21 서동호 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Ⅱ

      [한국근현대사Ⅱ] 3강, 그 섬에 가고 싶다 - 완도의 항일운동


        안녕하세요. 강좌가 없는 주를 틈타 재빠르게 후기를 올리고 있는 자원봉사자 서동호 입니다. 지난 토요일 답사는 잘 다녀오셨나 모르겠네요. 저는 성묘하러 고향에 가야해서 답사에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역사공부의 꽃은 현장답사라는 말을 들었었는데 정말 아쉽더라구요. 그래도, 다녀오신 회원분들은 뜻깊은 시간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지난 강좌는 박찬승 선생님의 마지막 강의인 만큼 강의자료부터 엄청났지요. A4용지로 서른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자료를 보고 ‘학점을 달라고 말씀드려볼까...’하는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사실 지난 시간에도 임시정부에 대한 연구나 관심이 높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왔었고, 이번 강의가 끝난 후 뒷풀이 자리에서도 선생님은 “역사학과 신입생들에게 ‘이동휘를 아느냐?’고 물으면 아는 학생이 없다”며 독립운동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크지 않은데 아쉬움을 드러내셨었죠. 그래서인지 이번 학기 강의에 대한 선생님의 열정이 남다르신 것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3회 강좌에서는 '완도의 항일운동'과 '친일파의 계보와 변명담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안부 문제'를 다뤘습니다. 각각의 주제를 하루에 강의하기에도 벅찰만큼 무거운 주제들인데 선생님의 짜임새 있는 강의로 두 시간동안 쉴틈없이 강의가 진행됐지요. 

      [영상] 소안 항일운동 기념관 및 독립운동가 송내호 선생 묘소 영상 (출처 : 소안 항일운동 기념관 자료실)

        사실 처음에 '소안도의 항일운동'이란 주제를 받아든 순간 '멍' 했습니다. "왜 완도일까?" 하는 궁금증이 떠나질 않았지요. 완도가 당시 어패류와 김의 주 생산지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부유했고, 경제적인 부가 높은 교육열와 더불어 항일운동의 전개에 영향을 미쳤다는 선생님의 말씀에도 뭔가 석연치 않은게 있었습니다. 근데 나중에 선생님이 말씀하시더군요. "완도만 이랬던게 아니고, 당시 전국적으로 항일운동의 열풍이 불고 있었다. 다만 이런 지역의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함으로서 당시 사회상을 더욱 자세하게 알 수 있다"(기억이 정확하지 못합니다만 대충 이런 뉘앙스로 기억하고 있습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역에서 일어난 일에 관심을 갖자는 식으로 저는 이해했는데, 맞게 이해 했나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이 각인이 됐던 이유는 제가 평소에 느낀 역사기술의 편향성 때문입니다. 사실 중-고등학생때 배운 역사라는게 대부분 '수도권 위주의 왕족의 역사'일 정도로 역사의 기술이 특정 지역과 계층, 집단에 편향돼 있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습니다. (역사책에 제주도는 역적죄인들이 자주 찾는 단골 귀양지일 뿐이지요) 그리고 이런 것들이 아직까지 '수도권 중심의 사고'로서 남아있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었습니다. 

        예컨대 한때 SNS등에서 확산됐던 멘션들 중에 "볼라벤 선수를 맞아 대한민국 사람들이 정말 열렬히 대비를 했으나, (중략) 아쉽게도 한반도에서 선전하지 못하고 중국으로 떠났다"는 농담이 있었습니다. 기분이 굉장히 좋지 않더군요. 수도권이야 큰 피해가 없이 태풍이 지나갔지만, 남부지역에선 태풍으로 인해 돌아가신 분도 있고, 제 친한 친구의 경우에는 부러진 나무가 차를 덮치는 바람에 '뽑은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차가 상처입었다고 슬퍼했던 기억도 있는데 말이지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이야기 (나와 소녀들과 할머니들에게) 샌드아트 영상
        소안도의 항일운동 이야기가 끝나고 친일파의 계보와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하셨습니다. 최근 대통령이 독도에 친히 다녀오실 정도로(?) 독도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은 과거에 대한 기억은 흐린 것이 사실입니다. 일본의 경우 '위안부 문제는 군이 개입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은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당시 위안부 시설을 기록한 자료들을 보면 이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위안소 규정

      1. 2원의 요금을 내야한다.
      2. 외출중이 필요하다.
      3. 사꾸라(콘돔)을 받아야 한다.
      4. 요금을 낸 후에 입장권을 받아야 했고
      5. 입장권의 효력은 당일에 한함
      6. 입실하지 않았을 경우 현금으로 바꿔준다
      7. 입장권을 산 자는 지정된 방에 들어가야 한다
      8. 시간은 30분이다
      9. 입실과 동시에 입장권을 잡부에게 준다
      10실내에서는 음주를 금한다
      11. 일을 마친 다음에는 바로 퇴실한다
      12. 군기나 풍기를 문란하게 경우 쫓아낸다.
       

      - 병참사령부 -

      우선, 병참사령부에서 낸 규정이라는 점에서 군이 개입된게 명확해 보이지요. 그리고 9조에 '입장권을 잡부에게 준다'는 문구도 보는 사람을 경악하게 합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위안부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영내 또는 주둔지로부터 도보로 이동 간으한 가까운 구역에 설치된 위안소에 식민지 여성들을 강제로, 혹은 거짓으로 끌고가 병사들을 상대로 강제적인 성노리개로 삼은 것을 말합니다. 이를 일본에서는 '종군 위안부'라고 부르지만 종군이라는 단어가 자발적인 뉘앙스를 풍기고, 위안부라는 단어 역시 성적 노리개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지요. 가슴아프지만  '성노예'라고 지칭하는게 가장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일본군 위안부 중 대다수, 적어도 상당수가 당사자의 의사에 반해서 강제로 납치당했거나 혹은 '일자리를 소개시켜 준다.',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라고 속아서 지원한 뒤 태평양 섬 등지의 외딴 곳에 성노예로 끌려갔다는 것입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도 공장에서 일하다 탈출해서 결국 위안부로 끌려간 사례를 소개해 주셨었습니다.


    • [한국근현대사Ⅱ] 2강 임시정부 이야기 - 머 나먼 혁명의 길

      2012.9.11 서동호 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Ⅱ

       

       

      안녕하세요 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 참여자 여러분. 

      이번 교과서 저자와 함꼐읽는 한국 근현대사 시즌2 자원봉사자 서동호 입니다. 

      지난 강좌가 끝나고 벌써 3일이 지났네요! 

      늦어도 강좌가 있었던 주에는 후기를 올려야 한다는 강한 심리적 압박감에 컴퓨터 앞에 앉긴 했습니다만

      글재주도 없고, 그렇다고 선생님이 강의해주시는 내용을 빠삭하게 알고 있는 것도 아니라 고민이 많습니다. 

      어떤 식으로 매주 후기를 써야하나 고민하던 차에, 그냥 '내 블로그에 쓴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써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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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승선생님(페이스북 pcs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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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여자가 삼삼오오 조를 이뤄 마련한 김밥과 떡입니다.

       

      강의 내용은 선생님께서(작성하시고 제가)수업 전에 나눠드린 강의안에 너무 자세히 나와있어서 제가 따로 요약하거나 정리할 필요가 없을것 같습니다. 대신 다음강좌 부터는 매주 제가 강의를 들으며 흥미로웠던, 혹은 새로 알게된 사실에 대해서 간략하게 적는걸로 후기를 대신하려 합니다. 

       

      그 전에, 지난 강좌 쉬는시간에 봤던 영상을 링크했습니다. 소리도 좀 작았고, 뒤에 계신 분들은 잘 안보이시는지 기웃기웃 거리시는 모습을 봤거든요. 같은 영상이니 다시 보기를 원하는 분들은 다시 한 번 감상하세요. ^^ 

       

       

      임시정부의 설립

      2강에서는 1강에 이어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시기를 다룹니다. 3.1운동 이후 4월 13일(아래 영상에는 11일이라고 나와있습니다만,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이 사실을 공표한 날이 13일 입니다.) 중국 상해에서 드디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됐습니다. 그리고 이 임시정부를 기반으로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과 외교운동이 벌어지게 됩니다. 

       

      임시정부의 수난

      과거 임시정부가 설립되는 과정에서처럼 임시정부가 세워진 이후에도 임시정부 내부에서 꽤나 많은 잡음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국내와의 연락체제의 두절과 임시정부 내의 계파간의 의견차 등이 주된 원인인데, 이승만의 위임통치(미국의 위임통치를 요청하겠다는 이승만의 주장), 이동휘의 레닌 자금 사건(이동휘가 레닌에게 받은 독립운동자금을 자신의 사회주의운동을 위해 사용한 사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처럼 어렵게 설립된 임시정부는 역시나 순탄치 않은 항해를 계속합니다. 

       

      임시정부 중심의 좌우파 결집

      이후 김구가 이끌던 한국국민당, 이청천이 이끌던 조선혁명당, 조소앙이 이끌던 재건한국독립당의 3당 통합을 이루어 내고 임시정부 역시 이를 계기로 조직을 확대하고 구조를 개편합니다. 그리고 1940년 9월에 한국광복군이 창설됩니다. 이로서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과 광복군, 그리고 임시정부의 당, 군, 정의 체제를 확립했습니다. 이에 41년 4월, 미주와 하와이의 모든 한인단체들이 총집결해 만들어진 재미한족연합회의 지지와 후원으로 이어져 해외 한국독립운동과 통일/단결의 구심점으로 자리잡습니다. 이후 41년 11월에 '대한민국 독립헌장'을 발표합니다. 

      최초로 발표된 대한민국 독립헌장에서 눈에 띄는것은 바로 경제적 형평성을 헌장에 명시했다는 점입니다.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헌장' 3장(건국)에 토지와 대기업에 대해서는 국유/국영화를 그리고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민간이 소유할수 있다는 조항을 명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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