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 문화

  • 강사

  • 기간

    • 2012. 10. 31 ~ 2012. 11. 28
  • 시간

    • 수요일 19:00~21:30 총5회
  • 수강료

    80,000

    • 파격 할인혜택
    • 참여연대 회원40,000

    각종 혜택 적용은 로그인 > 마이페이지에서 진행됩니다

    상세 정보

    강의소개 |
    중남미 문학이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한 건, 1970년대 초반 무렵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1971년 칠레의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가노벨문학상을 받고부터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미겔 안헬 아스투리아스 등
    중남미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네루다가 유독 한국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건 저항시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고 김남주 시인은 옥중에서 네루다의 작품을 원서로 읽기 위해 스페인어문법을 공부하기까지 했으니까요.
     
    우리의 제 3, 4, 5공화국 독재정권은 당시 중남미 우익 독재정권과
    발원, 형성, 붕괴 과정에까지, 너무나 흡사한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중 시민저항운동이 그러합니다.
    중남미의 경우 그 혁명의 정신적 지주로서 시인 네루다가 있으며,
    그의 시 정신을 실천적으로 옮겼던 세기의 혁명아 체 게바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제국주의 아래 신음하는 중남미를 서사적으로 풀이한
    “백년 동안의 고독”의 저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있으며,
    ‘트롤테롤코 학살사건’에 저항한 시인 옥타비오 파스가 있습니다.
     
    강의의 초점은 그들의 저서내지, 그들과 관계있는 문학작품들을 통해,
    중남미문학의 현주소를 파악하는 일에 맞춰질 것입니다.
     
     
    강의 일정 |
    날짜
    순서
    주제
     
    10.31
    1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구광렬 저, 실천문학사)
    : 체 게바라 혁명의 뿌리, 시
     
    11.07
    2
    『네루다 자서전』(박병규 옮김 / 민음사)
    : 네루다의 문학세계로 본 중남미 사회문화
     
    11.14
    3
    『백 년 동안의 고독』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저, 이가형 옮김, 하서)
    : 제 3세계를 대표하는 도시, 마콘도의 근현대사
     
    11.21
    4
    『활과 리라』(옥타비오 파스 저, 김은중외 1인 솔 출판사)
    : 시인의 눈으로 본 인디오, 메스티소의 혼융문화
     
    11.28
    5
    『파타고니아 특급열차』(루이스 세풀베다 저, 열린책들)
    : 남미 독재자들의 정치적 박해의 흔적
     
     
    강사소개 |  
    구광렬
    동물을 유난히 좋아해 일찍이 파타고니아에서 목동생활을 하고 싶었던 청년시절, 멕시코로 건너갔습니다.
    멕시코국립대학에서 중남미문학을 공부(문학박사)한 뒤,
    멕시코 문예지 “마침표(El Punto)” 및 “마른 잉크(La Tinta Seca)”에 시를,
    멕시코국립대학교 출판부에서 시집 『텅 빈 거울(El espejo vacío) 』을
    출판하고부터 중남미시인이 되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오월문학상 수상과 함께 현대문학에 시 ‘들꽃’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시집으로 『하늘보다 높은 땅(La tierra más alta que el cielo) 』,
    『팽팽한 줄 위를 걷기(Caminar sobre la cuerda tirante)』 등 몇 권의 스페인어시집과
    『불맛』, 『나 기꺼이 막차를 놓치리』 등 몇 권의 국내시집,
    장편소설 『뭄(Sr. Mum)』, 『가위주먹』
    기타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체의 녹색노트』 외 문학관련 저서 수십 권이 있습니다.
     
    UNAM동인상, 멕시코 문협 특별상, 브라질 ALPAS ⅩⅩⅠ 라틴시인상 등을 수상했으며,
    2008년 aBrace 중남미시인상 후보로 오른 뒤, 2009년에도 후보에 올랐으며,
    저서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이 젊은 비평가들에 의해 ‘2009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된 바 있습니다.
    문수산 기슭에서 좋아하는 동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울산대학교, 동리목월문예창작대, 대구교대 등지에서 시창작법과 중남미문학을 가르칩니다.
    (http://cafe.daum.net/klkoo)
     
    참고도서 |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구광렬, 실천문학사
    『네루다 자서전』, 박병규 옮김, 민음사
    『백 년 동안의 고독』, 이가형 옮김, 하서
    『활과 리라』, 옥타비오 파스, 김은중 외 1인 옮김, 솔 출판사
    『파타고니아특급열차』, 루이스 세풀베다, 열린책들
     
    강의정보 |
    일시 : 2012. 10. 31 ~ 11. 28 (수) 총 5회 오후 7시 ~ 9시 30분
    장소 : 참여연대 느티나무홀(B1)
    수강비 : 8만원(참여연대 회원 50% 할인)
     

    후기 5

    •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문화] 5강, 중남미 역사와 문화

      2012.12.7 nataliemiri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 문화

      5강 중남미 역사와 문화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4강까지는 문학작품을 위주로 한 강의였다면 마지막 5강 강의는 중남미 역사와 문화를 쭉 훑는 시간이었습니다. 

      구광렬 선생님께서는 중남미 역사와 문화를 두시간동안 다 설명한다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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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글로아메리카와 라틴아메리카로 부르는 것보다는 (지리적 지역구분), 

      문화적 요소를 포함하여 인권침해요소와 인종차별을 줄일 수 있는 북아메리카와 중남미아메리카로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합니다.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cid=3436&docId=1525737&mobile&categoryId=3436

      1.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아니라 '침략'한 것이다.

      콜럼버스의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한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지만 그는 인도의 일부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이미 그 곳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있었고 그들은 침략을 당했다. 정복자들은 그들에게 '인디오'라는 명칭을 붙였는데, 그 뜻은 인도사람이라는 것이다. 에스파냐어로 인디오, 영어로는 인디언이다. 정복자들 (에스파냐 사람들)은 3백 년 동안 남미를 지배하면서 원주민들에게 인종적 열등감을 심어 놓았다. 원주민의 유산은 미개한 것이며, 없애야 할 것으로 가르쳤다. 타완틴수요(잉카 제국) 시대의 수많은 신전을 부수고, 그 위에 가톨릭 성당을 지었다. 그리고 원주민들의 언어를 쓰지 못하게 했으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관습도 없애려고 하였다.

      미국이 정복의 역사이며, 인디오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메스티조(mestizo) = 백인 + 인디오]

      '인디오'란 북아메리카의 '인디언'과 구별하여 중남미의 원주민을 지칭하는 말. 메스티조는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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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멜다 마르코스 여사는 대표적인 메스티조 계이다

      메스티조와같은 혼혈인은 두 나라의 피가 섞여있기때문에 국가적 정체성이 희미하다고한다. 중남미는 복합민족이며 현재도 백인들이 우위에 있으며 인디오들은 스스로가 하부계층에 고립되어있다고한다.

      2. 식민지 독립의 아버지들

       - 호세마르티 (쿠바독립의 아버지)

       20110803000459_0.jpg

       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110803003623&subctg1=&subctg2=

      - 이달고신부 (멕시코독립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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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1072929051

      3. 독립후~ 현재까지

      멕시코와 쿠바혁명을 거쳐 현재에 이르러 체게발의 따님 알레이다게바라는 "사회주의의 완성은 우리의 과제"라며 연대성을 주장했다. 쿠바혁명당시 쿠바사회주의는 민생주의였다. 다른 중남미국가에 영향을 줬지만 제대로 작동하지는 못했다고한다.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68504 

      - 차베스 사회주의 관련기사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7&artid=201210161132161&pt=nv

      중남미는 황금만는사상이 지배적이며, 우리나라와는 달리 유교사상이 부족하다고한다. 국가관이 투철하지못하는 점이 국가발전에는 엄청난 저해가되는데, 이 점에는 복합민족의 구성도 한 몫하는 것 같다. 천연자원도 풍부하고 인구밀도가 적은 좋은 환경임에도 국민소득은 4~5천불이고 외채는 우리나라보다 몇 배는 많다고한다. 정치에있어서도 부패가 극에 달하였고, 대통령 한 명이 십년을 후퇴시킨다는 말도 있다고한다. 외부적으로는 미국에 종속되어있으며 백인들이 사회계층적으로 우위에 있다. 지리적으로도 미국에 큰 영향을 많이 받았고, 특히 멕시코와같은 경우는 다른 중남미와 달리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문물을 빨리 받아들였다고한다.

       

      나에게 중남미는 미지의 세계이고 문화와 예술이 있는 나라이다. 이번 강의를 통해 '체게바라'의 뜨거운 가슴을 느낄 수 있었고, 현실적인 중남미 상황에 대해 알게되자 충격도 있었다. 현실적인 상황은 안타깝지만 나에겐 아직도 궁금한 곳이다.

       

      글 : 이미리 자원활동가

    •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문화] 4강, <활과 리라>

      2012.11.23 놀이정신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 문화

      [인문학교]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문화와 역사, 3강(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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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타비오 파스 저/김홍근,김은중 공역 | 솔 

       

      옥타비오 파스의 『활과 리라』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 문화'라는 강의를 신청하고 커리큘럼에 나와 있는 도서들을 한꺼번에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했다. 그래서『활과 리라』가 소설이나 혹은 시집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감히 해보지도 않았다. 강의순서대로 책들을 읽고 책장 어느 구석엔가 놓여있던 『활과 리라』를 찾아 첫 장을 펼쳤을 때, 그 때의 당혹감이란...『활과 리라』는, '시론집'이었다. 시도 아니고 시론집이라, 과연 내가 읽어낼 수 있을까?

       

      물론, 읽어낼 수 없었다. 두 장 정도를 읽고 일말의 고민도 없이 책을 덮었다. 이건 내가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구입한 모든 책을 읽어야하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읽으면서 괴롭기만 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내 독서시간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라고 변명하며... 근데 이렇게 책을 읽지 않고서도 강의를 듣는 데 무리가 없을까, 쪼게 걱정하며 느티나무홀에 들어섰다.

        

      옥타비오 파스의 시는 어려워!

      느티나무홀에 들어서자마자 교안을 챙겨 읽었다. 책을 안 읽었으니 강의 시작 전 교안이라도 대충 훑어봐야했다. 그러다 빵 터졌다. 역시 구광렬 선생님은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솔직하시다.

       

      필자는 사실 파스의 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지나치게 지적이고 관념적이어서 뼈다귀 부딪히는 소리를 내는 듯해서다 …… 그의 시를 읽노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의 시세계를 옳게 이해하지 못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시가 그만큼 철학적이고 이성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강의도 '왜 옥타비오 파스의 시는 어려운가?'라는 화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파스의 시세계에 영향을 준 것은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당시(1940년대) 유행하던 초현실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동양사상으로 주로 중국과 인도, 일본의 시나 그림 등이다.

       

      강의는 먼저 초현실주의를 낳기까지 세계를 관통했던 사상사의 흐름을 훑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니카라과의 시인 루벤 다리오( 1867-1916)가 파리의 에펠탑을 보고 '예술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시작되었다는 모더니즘. 하지만 당시는 '모던'하다고 할 만한 것들의 등장이 너무 뜸하게 이루어졌고 이러다보니 모던한 것들을 찾기 어려웠던 이들은 신비한 것, 지금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져 고답주의를 낳았다는 이야기들... 그리고 이어지는 모더니즘 이후의 흐름. 이러한 모더니즘이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파괴되자 그 자리에 가장 먼저 허무주의가 등장했고 그 뒤를 이어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미래파, 울트라이즘, 아방가르드 등등이 나타났다....

       

      대강의 흐름만을 알면 된다고 자위하며 강의를 흐름을 숨 가쁘게 쫓는다. 어쨌든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초현실주의의 직격탄을 맞고 자란 파스는 어릴 적부터 그와 관련된 서적들을 많이 접했고 그래서 그런 詩作들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그에게 또 다른 전기가 된 것은 동양에서의 외교관 생활이었다. 일본과 인도에서 머문 기간 동안 그는 탄트라 불교와 일본의 하이쿠(俳句)에 매료되었다.

       

      결국 파스의 시가 어려운 이유는 가뜩이나 어렵게 느껴지는 초현실주의적인 글쓰기(자동기술법)에 동양의 선사상까지 접목시켰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그는 '언어의 모호성'에 대해 비트겐슈타인만큼이나 고뇌했으니, 그는 자신의 시에서 언어를 초월하는 언어를 찾고자 노력했다. 언어에 예속되어 있는,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모두 모호해질 수밖에 없는 철학의 개념들. 그 안에서 파스는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실체가 있음과 말로써만 표현될 수 있는 실재가 있음을 동시에 인정한다.

       

      잃어버린 말을 찾아야 한다. 안으로든 밖으로든

      또 그것을 꿈꿔야 한다.

      밤의 문신을 읽어내고 정오의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가면 또한 벗겨내야 한다.

      햇볕으로 목욕하고 밤의 과실을 따먹으며

      별과 강이 쓰는 글자를 해독해야 한다.

       

                                              -옥타비오 파스의 시 '깨어진 항아리' 中

       

      교안에는 파스의 시 세 편이 발췌되어 실려 있었다. 그 시들을 강의 시간에 함께 낭독해 가며 읽었다. 시낭독 후, 수강생들의 반응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요, 였다. 나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의미의 해체와 의사소통을 거세한 기호들의 나열이라.... 음, 이렇게 되면 그의 시를 읽어보겠다는 생각은 점차 멀어져 가는군...

        

      불교의 선사상 그리고 시간 개념

      파스에게 가장 감명적이었던 동양사상은 불교였다. 특히 서양의 직선적인 시간 개념과는 사뭇 다른 동양의 순환적인 시간 개념, 과거와 미래, 현재가 혼재하는 시간관, 찰라와 선불교의 '여기 그리고 지금'의 개념.

      그런데 여기서, 구광렬 선생님이 파스에게 강한 태클을 거신다. 자신의 박사 논문으로 옥타비오 파스의 시들을 연구했던 지라 그의 시세계에 나타난 동양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불교관련 책들을 엄청 읽으셨다면서, 과연 그가 동양사상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시를 쓴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셨다. 그러면서 다시 동양의 불교 역사에 대한 기나긴 설명에 들어가신다.

       

      불교는 크게 교종과 선종으로 나뉘고 교종은 텍스트 중심의 공부와 그를 통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반면 선종은 명상과 선 중심의 깨달음을 추구한다. 선종의 1祖는 달마이고 그 뒤를 이어 2조, 3조 쭉 내려오다가 6조인 혜능에까지 이어진 이야기, 그리고 그 뒤를 이는 임제종과 그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의 임제종 이야기까지. 일본인에 의해 서구에 널리 알려진 '젠' 사상은 결국 우리나라의 임제종 영향을 받은 것인데, 파스는 그런 것들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도 없이 동양사상에 대해 떠들고 글에 흉내를 내고 있는 것 같다는.... 강력한 태클!!! 실제로 고광렬 선생님은 파스와 인터뷰를 할 기회가 왔을 때 그것에 대해 물었다 한다.

       

      인터뷰 말미에 한국의 정토불교나 화엄사상 그리고 이조의 성리학 등을 전혀 공부하지 않았던 그에게 필자가 뼈있는 질문을 던졌다.

      "선생께서는 중국, 일본, 인도 등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하시지만 좀처럼 한국에 관해선 말씀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한국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 무엇보다 한국문화가 서양에 소개되어있질 않아요. 제가 의도적으로 한국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한국에 관해 알고 싶어도 번역된 책들이 없었습니다."

       

      뭐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생각하는 찰나, 그 밑에 그가 덧붙인 부분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故 김남주 시인은 파블로 네루다의 작품을 읽기 위해 옥중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근 5개 국어를 하던 파스에게 김남주 선생의 열정의 반 정도만 있었더라면, 아마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을 지도 모른다.

       

      에휴, 작가가 되기란 참 어렵네요... 쩝~

       

       

      파스여, 안녕~

      파스의 시라면 꼭 알아두어야 한다며 구광렬 샘이 'Blanco(흰색)'을 추천해 주셨다. 음양오행 사상을 소재로 삼아 쓴 시란다. 왼쪽에는 음에 해당하는 단어들을 나열하고 오른쪽에는 양에 해당하는 단어들을 쭉 나열한 시. 그러다보니 시가 엄청 길어져 보통의 책과는 다른 형태를 지닐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나온 시집의 모양은 아코디언처럼 주름이 잡혀 있는 모양새란다. 여러모로 독특하구나, 파스는. 그러시면서 그 시를 읽어보면 파스가 잘못 적어놓은 단어들이 무척 많다며 동양사상에 대한 그의 이해의 폭과 질에 대해 또 다시 성토의 말씀을... ㅋㅋㅋ

       

      이제 다음 주면 마지막 강의다. 함께 공부하기로 예고돼 있던 루이스 세풀베다의 『파타고니아 특급열차』가 절판이어서 강의는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중남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전반적이고도 총체적인 강의를 해 주실 계획이라고...

      수강생들의 반응이 뜨겁다. 나처럼 모두들 이번 강의를 들으며 중남미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리라. 다음 주 강의가 무척 기대된다. 그러나 혹 강의에 못 오시거나 강의를 듣지 못한 다른 분들을 위하여 중남미 문화와 역사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책을 추천해달라고, 강좌지기를 맡은 내가 질문했다(기특해^^).

        

      『메스티조의 나라들』(단국대 출판부)

      『중남미사』(김창환, 송산출판사)

       

       근데 어째 이 책들도 쉽게 구하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흑!

       

      글 : 자원활동가 박현아

       

       

    •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문화] 3강, 백 년 동안의 고독

      2012.11.21 느티나무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 문화

      [인문학교]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문화와 역사, 3강(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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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

      1.

      수강생들이 들고 온 책들 제목이 저마다 각각이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이 있는가 하면 백 년의 고독도 있다. 어느 것이든 약간은 어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구광렬 선생님의 말씀인즉, 제목이 잘못 번역되었다고... 문장 구성 상 제대로 된 제목은 『고독의 백 년』이란다. 고독과 백년 중 백년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또한 여기서 백년의 의미는 a hundred가 아니라 long time이다.


      다른 언어로 적힌 문학을 읽으며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이 비단 이뿐이겠는가 마는, 나의 경우는 이 책을 읽고 난 느낌 또한 이 책에 대한 평가와 설명의 글들과는 사뭇 달랐다. 다음은 교안 중 일부.


      역사적 의미가 아주 강하게 부각되어 있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콜롬비아의 과거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콜롬비아의 역사는 곧 식민지 종주국들의 지배와 억압으로 점철된 비극적인 역사나 크게 다름없었다. 라틴 아메리카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러하였듯이 콜롬비아 또한 오랫동안 스페인의 지배와 통치 아래서 패배와 좌절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게 된 계기도 이런 설명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책께나 읽는다는 유명인들의 추천 목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백 년 동안의 고독』... 대체 어떤 소설이길래, 가 이유였다. 그리고 읽고 나서,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도 강한 역사적 의미 내지 억압된 역사의 상징 같은 것을 떠올리진 않았다. 그저 팍팍한 인생살이 대한 담담한 시선과 길고 험한 역사의 흐름 앞에 휘둘리는 인간 군상들에 대한 초월적인 묘사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여전히 내게 잔잔하고 따뜻한 느낌으로만 각인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은 과연 성공적이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건 일방적인 나의 느낌이지만, 그런 부조리한 역사에 대한 예리한 비판과 통찰도 그 어둠의 세월을 살아내야했던 이들에 대한 강한 연민의 느낌도 찾을 수 없다는 것. 마르케스가 ‘팩트’의 강도를 순화시키기 위해(고발중심의 르포가 아니라 문학성을 지닌 소설을 위해) 사용했다는 마술적 장치들이 오히려 정도가 지나쳐 분노해야 할 순간 앞에서 그냥 스쳐 지나게 하고 목을 놓아 통곡해야 할 순간 앞에서 그저 한숨을 내쉬고 금세 망각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라틴 아메리카가 지닌 핏빛 슬픔의 순도를 정도이상으로 떨어뜨린 것은 아닌가... 하고 강의를 들으며 혼자 속으로 웅얼거리다 말았다.

      2.

      구광렬 선생님의 강의는 여전히 매력적이고 재밌다. 추운 날씨 탓인지 저번처럼 신발을 벗진 않았지만 전보다 열정의 강도가 떨어지거나 그러지도 않았다. 그의 이야기를 2시간 남짓 듣고 있다 보면 그의 꼬드김에 넘어가 언젠가 우리와 인종학적으로 같은 핏줄(몽고인)인 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의 구원을 위해 그와 함께 행동에 나서게 될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그가 전해주는 중남미에 대한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은 중남미의 문화와 현실에 대한 궁금증들을 해결해주기 보다 오히려 더 궁금하게 만들고 더 알게 싶게 만든다. 그가 이런 말을 할 때가 특히 그렇다.


      “마추픽추가 불가사의라구요? 아니요, 그보다 그 비옥한 땅에서, 엄청난 자연의 혜택을 입은 그 땅에서,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의 굶주리고 고통당하며 살아야 하는지, 그게 바로 라틴의 최대 불가사의지요!!!”


      백인이 95%인 아르헨티나(인디오들을 모조리 죽여서 그렇다네요, ㅠㅠ)를 제외하면 라틴 아메리카의 나라들은 대부분 백인과 인디오들의 혼혈인 메스티조의 땅이다. 그런데 그 메스티조들의 정체성이란 게, 자신의 반은 자신의 조상과 그들의 땅을 피로 물들였던 백인 약탈자로부터 온 것이고 나머지 반은 그들에게 목숨과 더불어 모든 걸 잃어야 했던 원주민에게서 온 것이니, 그들 스스로도 어느 쪽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지도 못하고,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그런 상태라고. 또 라틴의 사람들은 확연한 국가관이나 민족의식도 갖고 있지 않아서 서로 뭉치는 힘이 필요할 때 구심점의 역할을 해 주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나’의 가난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그렇게 미워하는 ‘미국’을 또 하나의 조국으로 재설정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이들이 라틴의 사람들이라니... 그것이 단적인 예로 푸에르토리코는 국민들이 모두 미국시민권을 가진 이중국적의 나라, 즉 미국의 일부분이란다(위성국가?).

      3.

      강의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에 『고독의 백 년』에서 대체 ‘고독’은 뭘 의미하는지 물었다.
      마르케스의 다른 작품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에 나오는 대령이 오지도 않는 연금을 끈질기게 그러나 한없이 무기력한 자세로 기다릴 때의 고독, 그것이 바로 라틴의 고독이라고 구광렬 선생님은 말했다. 그러면서 일상적인 삶에서 피지컬하게 느끼는 ‘고독’을 라틴에서는 목격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그들은 춤추고 놀기도 바쁘단다.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는 웬만한 춤들의 원산지가 바로 라틴아메리카다.


      고독의 백 년에서 ‘고독’은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의 ‘정체(停滯)’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잃어버린 조상의 이야기, 그들이 공유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얼굴색이 다른 이웃의 이야기 그리고 찾아야할 것이 무언지조차 잃어버린 이들의 황망한 이야기들이 라틴을 고독하게 만든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삶은 늘어지고 시간은 무기력해지기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마르케스 본인이 말하는 ‘고독’은 더 심오한 차원인 것 같다. 노벨상 수상연설문에서 그가 한 말을 옮겨본다.
      “우리 현실을 타인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행위는 갈수록 우리를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로 만들고, 갈수록 우리를 덜 자유롭게 만들며, 갈수록 우리를 더 고독하게 만드는데 이바지할 뿐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승화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백년의 고독』해설서(유왕무 저, 살림)에 실린 대목이다. 그리고 그 밑에는 친절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이는 유럽인들이 자신만의 사고방식과 논리적 잣대를 버리고, 라틴아메리카를 있는 그대로 판단하고 수용할 때, 비로소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이 해소될 수 있다는 탈중심주의적, 탈식민주의적 자세를 보여주는 대목이다’라고...


      그렇다, 언제나 문제는 이해가 아니라 수용이다. 그들을 그들의 독득한 역사와 문화 안에서 이해한다는 게 라틴아메리카 근처에도 못 가본 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이해가 아니라 그저 고개를 끄떡여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존중해 주는 게 먼저고 그게 가장 올바른 길일 것이다. 그러기엔 내 지식과 경험이 너무 천박하지만 아직 강의는 2주나 남지 않았던가.... 멕시코 현지에서 공부하고, 일상을 살고, 스페인어로 시를 쓰던 한 남자의 지혜에 기댈 수밖에!

       

      글 : 박현아 자원활동가

    •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문화] 2강, 네루다 자서전

      2012.11.21 느티나무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 문화

      [인문학교]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문화와 역사, 2강(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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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강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 중 ‘스무 번째 사랑의 시’>라는 시로 강의를 시작했다.

      사랑했던 연인을 그리며 쓴 감성적인 시였다. 네루다가 스무 살 때 냈다는 이 시는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다.

       체가 전장에서도 이 시를 자주 읽었다는데 그만큼 네루다의 시를 사랑했다.

       네루다는 체게바라가 가장 존경했던 사람이며 세계적인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인이지만 중남미의 정치, 경제가 연관된 사람이다.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정치가이기도 한 그는 혁명투사에게 영향을 많이 주는 시인이었다.

      칠레의 민중시인인 네루다의 삶을 구광렬 강사님의 유쾌한 강의로 들었다.

      ‘네루다’ (1904~1973)는 원래 필명이었다고 한다.

      가부장적이고 마초적인 아버지가 시인이 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탄압을 피하고자 처음엔 필명을 썼다.

      필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찾아보니 체코의 작가 얀 네루다의 성을 빌리고,

      파울로에서 영감을 얻은 듯 한 파블로라는 이름을 만들었다고 한다.

      네루다는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라는 선생을 만나서 그의 문학적 능력을 인정받고 발전시켰다.

      놀라웠던 점은 네루다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두 사람 모두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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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루다는 여성편력이 심했다고 한다. 부인도 여러 명이라고 한다.

      작가의 개인사를 접하니, 세계적인 시인 네루다도 평범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사님이 말씀하시길 네루다에 대해 너무 많이 포장 돼있는데 그 부분을 지적하고싶다(?)라고 하신 게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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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루다의 첫 번째 결혼식 사진 

       

      칠레에 민중 시인이자 세계적인 시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일포스티노>라는 영화로 유명한 네루다의 삶을 강사님의 유쾌한 강의로 들여다 본 기분이다.

      체가 너무나도 존경했던 네루다. 민중 시인이지만 ‘사랑’을 화두로 한 시로 더 유명하다고 한다.

      물론 나중에는 저항의식이 가득한 민중시도 집필했다.

      네루다의 시를 몇 편 찾아본 결과 <시>라는 작품이 기억에 남는다.

      체게바라로 시작해서 네루다까지 온 강의를 들으면서 중남미 역사와 문화를 훑는 기분이다. 앞으로의 강의가 기대된다.

      --------------------------------------------------------------------

      시(時)   - 파블로 네루다


      그래 그 무렵이었다… 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겨울에선지 강에선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도,
      침묵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다.
      밤의 가지들로부터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불길 속에서
      혹은 내가 홀로 돌아올 때
      얼굴도 없이 저만치 지키고 섰다가
      나를 건드리곤 했다.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입술은
      얼어붙었고
      눈먼 사람처럼 앞이 캄캄했다.
      그때 무언가가 내 영혼 속에서 꿈틀거렸다,
      열병 혹은 잃어버린 날개들.
      그 불탄 상처를
      해독하며
      난 고독해져 갔다.
      그리고 막연히 첫 행을 썼다.
      형체도 없는, 어렴풋한, 순전한
      헛소리,
      쥐뿔도 모르는 자의
      알량한 지혜.
      그때 나는 갑자기 보았다.
      하늘이
      흩어지고
      열리는 것을
      행성들을
      고동치는 농장들을
      화살과 불과 꽃에
      들쑤셔진
      그림자를
      소용돌이치는 밤을, 우주를 보았다.

      그리고 나, 티끌만 한 존재는
      신비를 닮은, 신비의
      형상을 한,
      별이 가득 뿌려진
      거대한 허공에 취해
      스스로 순수한
      심연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나는 별들과 함께 떠돌았고
      내 가슴은 바람 속에 풀려났다.

       

    •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문화] 1강,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2012.11.3 놀이정신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 문화

      [인문학교]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문화와 역사, 1강(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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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광렬지음 | 실천문학사

       

      너에게 묻는다

      1.

      강의를 맡아주신 분은 구광렬.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기도 하지만 사실 그는, 시인이다. 한국어로 쓰기도 하지만 주로 스페인어로 시를 쓰는, 그리고 그 스페인어 시를 스스로 한국어로 번역도 하는, 아주 특이한 사람이다. 이토록 특이한 분이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강의를 했다. 그것도 맨발로...

       

      2.

      첫 강의는 ‘체게바라의 홀쭉한 배낭’을 읽고 모이는 자리.

      체게바라가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사살 당할 당시 소지하고 있었다는 배낭 안에서 발견된 초록노트 그리고 그 안에 필사된 69편의 시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그 69편의 시는 총 4명의 시인들 작품이었다. 칠레 출신의 파블로 네루다, 페루의 세사르 바예호, 쿠바의 니콜라스 기옌, 스페인의 레온 펠리뻬. 책의 중간 중간 그들의 시가 실려 있어 체게바라가 게릴라전을 펼치던 전장에서 어둠을 밝혀가며 읽고 필사했던 시들을 함께 감상할 수 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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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게바라가 웬만한 월드스타 못지않게 유명한 탓도 있고 전에 평전을 읽었던 기억도 있고 해서 책의 내용이 새삼스럽진 않았지만 문학과 혁명의 그 이상하리만큼 끈끈한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듯하다. 아니, 그저 상상을 해 보는 거다.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장에서 배낭에 시집을 넣고 다니는 마음이란 어떤 걸까. 피곤한 육신을 누이고 쉬게 하는 그 짧은 휴식의 순간에 시 한편을 노트에 베껴 적는 마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세계인들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긴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안티-체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도 많은 모양이다. 그 중에서 책에 소개된 유명한 안티-체 인사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칼럼니스트 후안 호세 세브렐리. 그는 다각도에서 체를 비판하고 있다. 그중 한 대목,

       

      “게바라주의는 마르크스주의 혹은 정통사회주의와 충돌하는 것이다. 체게바라는 자연스런 해방을 교조적 카리스마로, 인민동원을 개인적 소집 차원에서, 사회민주주의를 정치적 독재로, 빈자와 노동계급을 농부로, 객관적인 조건들을 주관적인 의지로, 오로지 선진사회에서만 가능한 사회주의를 가장 가난한 국가에서 실현시키려 했다.”

       

      내용이 어려워 몇 번 반복해서 들여다보니, 결국 이 비판의 많은 부분이 체의 개인적인 매력과 카리스마에 대한 것들이라 가벼운 웃음이 났다. 인민동원을 개인적 소집 차원에서 이끌어냈다는 비난의 부분이 무척 우습다. 게릴라 시절 그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농기구를 들고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고 하는데, 이렇게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게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이 남자의 얼굴이 문득 궁금해졌다. 더욱 가관인 것은 객관적인 조건들을 주관적인 의지로 바꾸고 변화시키려 했다는 부분... 객관적인 조건들을 오로지 자신의 신념과 의지로 넘어서려 하는 게 게릴라들의 본분 아니던가, 그게 바로 혁명의 골자가 아니던가 말이다. 천식을 앓으면서도 평생 싸움의 현장을 누볐던 게바라의 착한 눈매에서,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밀림 속을 몇 십일씩 걸어다니며 투쟁했던 호치민의 깡마른 살갗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의 지닌 그 강인한 의지와 정신력이 아니던가. 체를 향해 정치적 바보라 칭했다는 이 인사를 향해 더 이상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일은 여기서 그만 두는 게 오히려 체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문학과 혁명으로 체를 그려내는 책의 내용 때문인지 문득 요즘 읽고 있는 다른 책이 떠오른다. 책과 혁명에 관해 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란 책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 책을 쓴다는 것은 책을 다르게 읽는다는 것과 책을 다르게 쓴다는 것이고 이 행위는 오로지 그 행위 자체로서도 이미 혁명임을 11-12세기에 걸쳐 일어났던 ‘중세해석자혁명’과 ‘루터의 대혁명’, 이 두 사건의 재조명을 통해 밝히고 있는 책이다.

      어려운 논증의 과정을 거치지만, 거칠게 설명하자면 이런 거다. 신의 말씀의 왜곡되어 인간의 삶을 옭아매고 있던 중세에 루터가 한 일은 성경을 되풀이해서 읽는 행위, 오로지 그것 하나였다. 그 행위 하나를 통해 세상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성경과 신의 말씀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치는 과정, 그것은 진정한 혁명의 행위였음을... 그래서 책을 읽는다는 건 곧 혁명이며 그런 불가능한 책읽기를 우린 어렵더라도 읽어내야 한다는 것.

       

      체게바라도 그랬던 게 아닐까. 시를 읽으며 그 시가 자신의 눈앞에서 목격하는 낮은 자들의 남루한 삶과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날들, 시를 읽으며 분노하고 눈물짓던 그 시간을 자신의 삶에서 지워버리지 않으려 발버둥치던 순간들. 그의 배낭에 들어있던 시집은 학문과 예술의 한 갈래로서가 아니라 그저 가지지 못한 자들, 너무나 쉽게 모든 걸 빼앗겨야 하는 이들의 삶 한 조각이었는지도 모른다.

       

      3.

       

      그러고 보니 시를 찾아 읽은 지도 아니 서점에서 시집을 사지 않은 지도 너무 오래되었다. 젊은 날 읽었던 그 많고 많은 시 중에서 오늘은 유독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가 떠오른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결국 소설은, 시는, 문학은, 책은, 나에게 ‘묻는’ 놈들이다.

      나의 부끄러움을 가리키며 말이다.

       

      글 : 박현아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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