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정보
강의소개 |
아래로부터의 변혁이라는 측면에서 그 ‘사건’에 그 ‘주체’는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발전해왔는가,
‘사건과 주체’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강좌는 한국 근현대사의 전환기적 사건, 3.1운동, 8.15해방, 전태일과 광주대단지사건,
5.18광주항쟁, 87년 6월항쟁을 ‘인문정치와 주체’라는 테마로 접근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 역사적 사건속에서 주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정치적으로 사유하는
것에만 익숙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겐 이에 대해 인문학적 시선으로 고찰하며 본질적으로
접근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강좌에서는 그 개별적 사건들이 우리 사회의 변혁적 흐름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주체는
어떻게 구성되는지,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정치/사회적 주체는 어떻게 형성할 수 있을지'에 대해
미래지향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 원리를 찾아볼 것입니다.
강의 일정 |
날짜 |
순서 |
주제 |
강사 |
6.26 |
1강 |
3·1운동,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새로 쓰다 |
하승우 |
7.03 |
2강 |
8·15, 그 커다란 환호성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
이승원 |
7.10 |
3강 |
전태일 분신과 광주대단지 사건 |
김원 |
7.17 |
4강 |
5·18 광주항쟁과 저항주체 |
김정한 |
7.24 |
5강 |
6월항쟁, 다수가 만든 민주주의의 성공과 역설 |
이영제 |
참고도서 |
<인문정치와 주체> 대안지식연구회
강사소개 |
하승우 풀뿌리자치 연구소 이음 운영위원
이승원 성공회대 교수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김정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이영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원
강의정보 |
일시 : 2012. 6.26 ~ 7.24 (화) 총 5회 오후 7시~9시30분
장소 : 참여연대 느티나무홀(B1)
수강비 : 8만원(참여연대 회원 50% 할인)
후기 5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5강
드디어 마지막 5강입니다! 마지막 강의는 "6월 항쟁, 다수가 만든 민주주의의 성공과 역설"이라는 제목으로 이영제 선생님께서 강의해 주셨습니다.
평소처럼 후기는 -하다체로 작성할게요 :)
6월 항쟁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6월 항쟁의 주체들은 동시대인들로, 6월 항쟁은 좀 더 우리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6월 항쟁이 민주주의를 만들었다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호하다. 6월 항쟁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된 것은 불과 5년 전 일이고 20주년 행사에도 6월 항쟁 유가족은 참여를 거부한 일이 있었다. 6월항쟁의 성격또한 불분명하다. 6.10항쟁 혹은 87년 6월 항쟁이라고도 불리며 '항쟁'에 해당하는 부분은 contention, struggle, uprising, democratic movement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이중 가장 보편적인 말은 민주화운동에 해당하는 democratic movement이다. 이번 강의는 6월항쟁이 우리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강의였다.
민주화 요구의 분출과 억압(85년 2.12 총선~86년 말)
독재 정권하에 있으면서도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은 조금씩 분출해 나왔다. 이 열망은 신한민주당(신민당)에 대한 지지로 조금씩 표출되었다. 이들은 직선제 개헌을 내세웠으며, 85년 2.12총선에서 276석 중 67석을 획득해 제 2정당의 위치를 갖게 되었다. YS와 DJ의 합으로 신민당과 민한당이 결합함으로써 신민당 중심으로 야권통합이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의석 103석을 획득하였다. 이에 따라 개헌은 민정당이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었고 형식적으로나마 야당의 동의를 거쳐야 하게 되었다. 이제는 장외(제도 밖) 뿐 아니라 국회 안에서도 민주화에 대한 요구, 특히 직선제에 대한 요구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학생운동또한 조직력이 더욱 높아져 학원 자율화를 주장하던 학생운동은 점차 정치 민주화에 문제의식을 두었고, 점차 정치화, 급진화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정부는 학원안정법을 제정하였으나 이 조치에 대해 범야권 및 민주화 세력의 저항또한 상당하여 결국 법안은 철회된다. 이렇게 직선제 개헌 요구가 높아졌음에도 86년 전두환 대통령은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이후, 즉 89년 이후로 개헌논의를 미룬다고 발표하였으며, 민주화 세력은 이에 반발하였다. 신민당과 민추협, 학생운동을 진행한 학생들은 개헌추진본부를 결성하고 개헌 추진 서명운동에 돌입하였으며 천주교 등 종교계와 여성, 문화, 학계 등의 시국선언도 잇따랐다.
정부의 억압에도 활발했던 야당과 재야세력,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는 점차 분열된다.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현판식은 국민, 민통련, 학생운동세력 등 다양한 세력이 참여한 가운데 잘 발족이 되었으나 대학가의 반미, 전방입소 거부투쟁과 이재호, 김세진 분신사건에 대해 민국련(신민당과 민통련 간 연락기구)은 소수 학생들의 반미 논리와 과격시위에 대한 비판서명을 발표하고 민통련은 민국련을 탈퇴함으로써 한 목소리를 냈던 야당과 재야세력은 분리가 된다. 이런 가운데 4월 30일 영수회담에서 이민우 총재의 "좌익 학생을 다스려야 하며 급진세력과 단절해야 한다"는 발언에 재야 민주화 운동세력과 야당과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갈등이 폭발했던 것이 5.3 인천사건이다. 5.월 3일 인천 개헌 추진위 결성대회에서 재야 민주화 운동 세력이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면서도 신민당을 비판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한 것이 이 사건이다. 야당과 재야 세력은 갈라서게 되었고, 국회에서는 여야 만장일치로 개헌특위가 발족하였으나 여당은 의원내각제를, 야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여 의견 불일치로 개헌특위는 유명무실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운동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개헌특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야당은 다시 장외로 나와 투쟁을 진행하였다. 12월 24일에는 "선 민주화 후 내각제 협상을 할 수 있다"는 '이민우 구상'이 발표되었고, 이에 반발한 김대중, 김영삼은 통일민주당을 결성하였다.
6월 항쟁의 전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개헌 열망은 더욱 광범위 하게 퍼져나갔다. 박종철 군 추도대회가 열리면서 '고 박종철 군 국민 추도회 준비 위원회'와 같은 전국적 조직이 형성되었고 운동방식에 대한 고민도 나타났다. 2.7대회와 3.3대회와 같은 민주화 대행진도 전개되었다. 정부는 이에 대해 민추협과 전국 105개 대학 압수 수색을 시행하였고 재야 인사 7백 여명을 가택 연금하였으며, 5만 병력을 동원하여 검문, 검색하였다. 아울러 전두환 대통령은 "개헌논의를 유보하고 현행 헌법으로 정부를 이양하며, 대통령 선거를 연내에 실시한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이는 제도 내, 외에서 민주화 논의 및 개헌논의를 더 이상 허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명동 성당에서 5.18 광주항쟁 희생자 추모 미사에서 박종철 군의 고문 치사사건이 조작되었다고 폭로함에 따라 <박종철 고문 살인 은폐 조작 규탄 범국민 대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6월 10일 규탄대회가 진행될 것이 결정되었다. 5월 27일 <민주 헌법 쟁취 국민 운동 본부(국본)> 발대식이 거행되었고, 야당을 참여하도록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졌으나 야당까지 포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모든 민주화 세력이 연합되게 되었다.
6월 10일을 앞두고 정부는 검문과 가택연금을 벌이고, 6.10대회장으로 예정되어 있던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쇠한다. 6월 9일 이한열 군의 최루탄 피격 사진이 국내외 언론에 보도됨에 따라 6월 항쟁의 불씨는 더욱 촉발되었다. 6.10대회에는 전국 22개 지역 30여만명이 참여하였으며, 밤늦게까지 시위를 전개하던 "일부 학생과 시민 8백 명 가량"은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시작하였다. 이 명동성당 농성 참여자들은 온건 노선과 반대 축에 서 있던 사람들로 항쟁을 지속시키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시민들의 지지 방문이 이어졌으며, 근처 일반 회사원 '넥타이 부대'가 점심시간, 퇴근 시간을 이용하여 부담없이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시위 참여 방법은 다양하고 간단한 것들도 많았다. 6시에 손수건을 들고 흔든다든가, 9시 '땡전뉴스'가 시작할 때 불을 끄는 것 등도 포함되었다. 2만여 명이 시위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군투입 빌미가 될 거라는 우려에 해산한다. 지역에서는 시위가 확대되었다.
6월 18일 최루탄 추방대회가 열렸다. 국본은 군 투입설이 유포되는 가운데 국민대회 개최를 강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과 여야 영수회담 진행 경과를 보고 신중할 것을 제안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졌다. 24일 영수회담에서 "거둔 게 없다"고 평가됨에 따라 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는 무려 150만명이 참여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노태우 민정당대표위원은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 복권 등을 담은 6.29선언을 발표하고 전두환 대통령은 수용하나 항쟁 시위는 불법으로 간주한다고 밝힌다. 이후 김대중, 김영삼, 재야세력, 학생운동 등 민주화 세력은 분열하였다.
6월 항쟁과 중산층
"부르주아 없이 민주주의도 없다"는 베링턴 무어의 말과 같이 민주화 이행에서 중산층의 태도는 민주화의 양과 질에 관련된다. 중산층개념은 모호한 면이 많아 개념 규정조차 쉽지 않다. 당시 서울대 사회과학 연구소에서 제시한 것은 20-60평 대 아파드 거주자였는데 이에 따르면 무주택자는 제외하게 된다. 강의는 중산층을 계급적으로 보기보다는 "운동권이 아닌 세력들", 즉 소극적 지지자들로 보았다. 중산층은 처음 신민당을 통해 제도 안 에서 소극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다가 점차 적극적으로 민주화 열망을 지지하고,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의 변모는 6월 항쟁에서 다수 형성의 계기가 되었다. 이들 일반 시민, 비조직화 된 대중, 그리고 특히 넥타이 부대는 당시 민주 세력에 대해 "빨갱이"라 칭하던 반공 이데올로기를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언급되었던 것이 노동자 대투쟁이었다. 뜬금없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6월 항쟁과 시기적으로 함께 했던 (그리고 생산직 노동자도 6월 항쟁의 주체였다.) 노동자 대투쟁은 "노동 삼권의 완전 보장"을 주장하며 민주주의의 확산을 꾀했다. 이런 점에서 6월 항쟁과 연관되어 말할 수 있겠다.
6월 항쟁과 다수
6월 항쟁의 주체는 야권, 재야세력, 학생운동세력, 노동자들, 가정 주부들, 자영업자들이 공통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집단이다. 즉 "최대 다수 연합"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 '다수'라는 점이 조건이면서 한계이기도 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민주화 세력'으로 한 덩어리로 인식되나, 이들이 원하는 민주주의의 양과 질은 상이하며 그런 점에서 이들은 다수의 소수집단으로 다시 나뉠 수 있기 때문이다. 6월 항쟁의 주체로서 다수는 각자의 머릿속에 있는 민주주의 간 차이는 인정되지 않았다.
6월 항쟁은 분명 민주주의의 커다란 성과인 것은 사실이나 이러한 아쉬움이 "6월 항쟁에서 실질적으로 얻은 것은 직선제 뿐"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직접 참여는 이따금씩 이루어지며 국민들은 "선거때만 자유롭다"는 것이다. 87년 체제 이후 항쟁의 주체들은 모두 흩어지고 지금의 민주주의는 이중 압력을 받는다. 하나는 민주주의가 너무 방만하다는 입장으로 주로 보수측에서 나오는 의견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가 너무 적다는 의견으로 소수자 문제 및 사회복지를 중시하는 입장이다. 연합된 다수는 사라지고 민주주의 간의 줄세우기가 지금 사회의 자화상이다.
나가며
이번 강의 또한 흥미로웠다. 6.10민주 항쟁에서 막연하게 '민주화 세력'으로 단일하게 생각했던 존재들을 야당/재야세력/학생운동세력 등으로 나누어 본 것 또한 유익하였다. 다수가 차이에 대한 인식 없이 연합함으로써 누군가에게는 불충분한 민주주의가 주어졌다는 것이 6월 항쟁의 한계라는 지적 또한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6월 항쟁의 한계라기보다는 민주주의 자체의 한계, 그리고 연대의 한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대의 경우, 상이한 소수집단이 흩어져 있으면 각기 원하는 목표가 달성되지 않으므로 공동의 목표를 창출하여 서로 힘을 합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 과정에서 각자의 차이는 물론 염두에 두어야 하나 어느정도 유보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차이를 공동의 목표만큼이나 중시하면서 연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6.10항쟁 뿐 아니라 다른 연대, 혹은 혁명에도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분명 6.10항쟁에서 "직선제만 얻었다"는 평가는 '6월 항쟁=민주주의의 완성'이라는 일반적 생각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에는 적합할 수 있으나, 평가의 측면에서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6월 항쟁에서 얻은 직선제와 '87년 체제'가 그 때에는 유보될 수밖에 없었던 '차이'에 대한 공론화 및 개선의 초석이 되었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6월 항쟁이 "'선거때만 자유로운'인민을 만들었다"는 지적은 6월 항쟁의 한계로 다루기보다는 민주주의 혹은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로 다루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거 이외에 시민의 참여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든 것은 대의민주주의가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한계라는 생각이다. 나는 오히려 6월 항쟁은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기억'을 가져다 주었고 이러한 자신감을 토대로 이후 점차 시민의식이 향상하고 있어 대의민주주의가 보완될 여지가 증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재 시민참여가 미흡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민주화자체가 이루어진 것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한편, 현재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 정의가 서로 다르며, 6월 항쟁 이후 정치적 민주주의는 공평하게 분배되었으나 다른 영역까지 침투된 것은 아니라는 것에 대해 중요한 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민주주의를 만들어 갈 것인지 끊임없는 진통을 겪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각 주체의 합리적인 시민의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종강소감
이번 강의를 끝으로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총 5강이 끝났습니다. 모두들 날도 더운데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1층 카페 통인을 꽉 채워주셔서 마음도 따뜻했어요. (더불어 후기를 늦게 올려 죄송합니다.)
<인문 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는 다섯 분의 선생님께서 다섯 개의 다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신 거라 강의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통적인 주제의식이 꿰뚫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8년 촛불 시위때 저는 "이 많은 사람이 어디서 온 걸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그 많은 사람은 어디서 온 걸까요. 이러한 '사건'들, 강의에서 다루어진 3.1운동, 8.15해방, 전태일과 광주대단지 사건, 5.18 광주항쟁, 87년 6월 항쟁의 주체들은 역사의 전면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 경제 사회적으로 활동해 지금으로 따지면 네이버에 이름을 치면 인물 검색으로 나올 사람들이 아니라 대다수 이름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근현대사에서 각기 전환기적 사건을 만들었다는 것은 놀랍기도 하고 흥미롭습니다. 앞으로 나올 '주체'는 어떤 자들일지, 그들이 추구할 가치는 어떤 것일지 궁금합니다. 이는 미래의 어느시점에 틱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되겠지요. 그리고 미래에 부끄럽지 않을 가치를 오늘 추구해가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
자원활동가 김수진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4강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4강은 "5.18 광주 항쟁과 저항주체"라는 제목으로 김정하 선생님께서 강의해 주셨습니다. 벌써 4강이네요! 다음 강의가 마지막 강의입니다.
이후 편의를 위해 존대말은 생략하고 '-하다'체로 쓰겠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재현의 문제
재현은 현실 재구성 과정을 수반한다. 재구성 과정은 해석하는 주체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5.18 광주항쟁 또한 재현의 문제를 갖는다. 광주항쟁의 재현을 둘러싸고 많은 담론이 각축을 벌였으며, 다음에서 발펴볼 것이다.
국가 중심적 재현
국가 중심적 재현은 시민군의 형상에 주목한다. 먼저 사회 운동의 재현으로서 5.18을 바라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민중 항쟁이 아니라 혁명에서 5.18을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광주 항쟁은 크게 세 시기로 나뉠 수 있는데, 5월 18일부터 21일/5월 21일부터 26일/5월 27일 “최후의 항전”이다. 마지막 시기인 5월 26일에는 “수습파”에 반대하면서 항전을 주장하는 “항전파”가 전체 조직을 장악하는데, 사회운동의 관점은 바로 이 항전파를 국가에 대항하는 대안국가 내지는 대항국가로 바라본다. 이들 시민군은 하나의 민중 권력이었으며, “임시 혁명 권력”이었으며 “광주 코뮌”이었다. 더욱이 항전파의 주체는 노동자 계급, 사회 하층민 등의 소외계층이었다는 점은 이러한 관점을 뒷받침한다. 이 해석은 80년대 학생 운동권에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급진적인 것이 필요하다는 현실 문제 의식에 기인한다. 비록 광주항쟁의 의도는 아니었으나 광주항쟁을 맑스주의의 복원과 연결지어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역사를 이념에 끼워 맞춘다는 비판에 의해 영향력을 상실했다.
사회 운동론의 뒤를 이은 해석은 바로 민주화운동론으로, 민주 정부 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담론을 만들면서 재현된 것이다. 이 관점은 광주항쟁을 군부 독재에 대항하는 민주화 운동으로 바라봄으로써 사회 운동적 관점에서 강조했던 “새로운 국가”는 민주국가가 되므로 사회운동적 관점에서 해석했던 광주항쟁의 반자본주의적 성격은 사라진다. 항쟁의 주체 또한 시민으로 일컬어지며 탈계급적인 것으로 해석되는 등 저항성이 약화된다. 이후 광주 항쟁의 연구가 인권, 평화 등을 중심으로 정체화 된 측면이 있다.
주체 중심적 재현
사회 운동론 이후 침체된 저항적 면모를 보존하면서도 개념을 새로이 하는 가운데 등장한 이 관점은 광주 항쟁을 “새로운 주체의 탄생”으로 바라보는 입장이다. 광주 항쟁은 “가난한 사람들의 잡색 부대”였던 다중이 직업, 신분,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초인으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이들은 기존 사회로부터 부여된 정체성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넘어 서며 “유목민”으로 재탄생하는 것이었다. 기존 사회의 인칭은 사라지고 항쟁의 주체들은 “비인칭적” 존재가 되었다고 이 관점은 해석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국가 중심적 재현에 대한 비판적 측면을 갖는다. 국가 중심적 재현은 광주 항쟁을 기존 국가 권력을 전복하고 새로운 민중 권력을 수립하는 행위로 해석하였다. 주체 중심적 재현은 이러한 국가 중심적 재현에 대해 권력의 중심만 바뀔 뿐 기존 질서는 그대로라는 점에서 이를 진정한 혁명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주체 중심적 재현은 기존 질서마저도 새롭게 의미부여하는 시도로 광주 항쟁을 바라보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광주 항쟁민들을 “초인” “영웅”으로 표현함으로써 광주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과장하는 면이 있다. 도청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사람들조차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한 면모를 이 관점은 간과하는 면이 있다.
주체 구성과 사건
주체의 구성 양상은 정체화(identification), 반정체화(counter-identification), 탈정체화(dis-identification) 세 가지 방식으로 나눠볼 수 있다. 정체화는 주체화라 할 수 있는데, 사회적으로 주어진 위치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예컨대 아버지라는 역할기대에 맞추어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식이다. 반정체화란 그러한 위치 부여를 거부하는 것으로, 이 과정에서 히피, 6,70년 대 문화 운동 등의 하위문화 및 이를 토대로 한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기도 한다. 탈정체화란 주어진 위치를 벗어나 자기 자신만의 삶의 양식을 이루는 것이다. 바로 이 탈정체화를 행하는 것이 저항주체라 할 수 있다 (랑시에르). 탈정체화의 전개는 두 가지 정도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상징계(이미 주어진 의미체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즉 주어진 주체 위치 자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그 하나이며, 주체 위치 자체보다는 주체 위치가 담고 있는 의미, 기능들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그렇다면 5.18에서 저항주체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자신들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고 “군대가 어떻게!”라는 분노에 찬 시민들은 국민으로 과잉정체된 (over-identified) 상태였다 할 수 있으며, 도청에서 최후의 항전 참여자들은 새롭게 형성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탈정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건은 “상징 질서의 파열”이다. 사건은 막 발생한 상황에서는 충격이지만 사회적으로 해석되고 받아들여짐에 따라 기존 상징 질서로 포섭된다. 사건을 상징 질서로 포섭하는 과정, 의미부여하는 과정에서 기존 상징 질서를 재구성하게 되고, 이는 주어진 주체-위치의 탈 정체화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처음에는 이름 붙이기 어려웠던 사건이 점차 사회적으로 의미 부여됨에 따라 그 의미를 부여하는 기존 사회 질서 또한 재구성되고 기존 의미에 균열이 간다는 것이다. 5.18은 처음에는 “빨갱이 폭도”라 규정되었으나 이는 맞지 않는 위치지음이었고, 이에 새로운 상징의 필요성이 제기된 가운데 기존 주체 위치를 파열시킨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인문정치와 주체
위까지가 5.18과 관련된 강연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고, 마지막에는 강의 제목이기도 한 “인문 정치와 주체”의 뜻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여기서 “주체”는 누구이고 “인문정치”는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였다. 우선 배제된 사람이 가장 보편적이라는, 배제와 보편의 동일성을 전제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주체”는 “추방된 자, 배제된 자, 몫없는 자, 아무것도 없는자”라 할 수 있으며 인문정치는 이들 “‘추방된 자의 시선’(이명원)으로 보고 듣고 행하는 정치”를 의미한다. 배제된 자들(“서발턴”)의 문제는 구조적 힘을 결여한다는 것으로, 이들이 연합적 힘을 만들어 가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알 수 있도록 하고 부여하는 것이 과제가 된다.
나가며
5.18 광주항쟁 하면 떠오르는 것은 민주화 운동인데, 5.18 광주항쟁의 재현 양상들의 변화를 보니 흥미로웠다. 시민군을 새로운 혁명권력으로 보고 코뮌으로까지 간주하는 사회 운동 재현 관점이나 새로운 질서를 가지는 초인으로 바라보는 주체 중심적 재현까지. 하나하나 각 관점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한편으로는 솔직히 말하자면 “해석에 저항”하고픈 심정도 있었다. 거대 담론이 사람들을 가려버리고, 사람들의 생동감을 앗아버리는 느낌이었다. 좀 격하게 말하면 사람들이 거대 담론 내지는 이념의 도구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5.18이라는 사건이 어떤 식으로 재현되어 왔고, 어떤 식으로 의미부여 되어왔는가를 살펴보고, 이 사건에서 주체들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었는지를 훑어보았던 이 강의는 흥미로웠다.
아울러 인문정치와 주체에 대한 설명은 비록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과는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설명을 들으니 서로 다른 선생님들의, 서로 다른 강의 전반의 기저에 깔린 문제의식이 좀 더 선명하게 인식되었다. 정말 주변부 존재들 예컨대 ‘폐지 줍는 할머니’와 같은 분들의 몫은 어떻게 주장될 수 있을까.
자원활동가 김수진.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3강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3강 "전태일 분신과 광주대단지 사건: 사건을 통해 본 70년대"는 김원 선생님께서 진행해 주셨습니다. 3층 소회의실에서 강연을 진행하니 준비하고 정리하는 입장에서는 편했..어요 허허. 꾸준히 많은 분들이 나와주셨습니다. :)
그럼 평소처럼 후기는 '-하다'체로 작성하겠습니다.
사건, "숨겨진 자들이 이름을 드러내는 방법"
강연은 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사건은 공적 사료를 토대로 '중심'에 초점을 두고 기록된 역사를 뜻한다. 그러나 이 강연에서 사건은 비가시적이고 숨겨져 있던 주체가 드러나는 계기이며, 이들 주체가 자신들에게 기존에 부여된 정체성 및 의미에서 벗어나려는 흐름이다. 이러한 "잊혀진 주체"는 자기 기록을 남기지 않고 스러진다. 바로 사건을 통해 그들의 실존을 드러낼 수 있다. 이 강연에서는 70년대의 두 사건, 전태일 분신과 광주 대단지 사건을 통하여 어떤 주체가 자신의 실체를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었는지가 이야기 되었다.
전태일: 겁쟁이들과 연대
기존 역사 담론에서 전태일의 분신사건은 "낮은 수준의 운동" 혹은 우연적인 것으로 그려지며, 이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도 막연하게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죽어간 전태일에 국한된다. 그러나 전태일의 분신은 역사 서술에서 목소리를 갖지 못하고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겁쟁이" 여공들을 가시화하였다는 점에서 더 깊은 의미를 갖는다. 당시 평화시장의 노동환경이란 다음과 같았다. 노동 조직(노조)이 존재하지 않았고, 근로자들은 대개 16~20(21)세의 어린 소녀들로 농촌에서 상경한 단신이었다. 이들은 주로 가부장적 농촌 환경에서 장남 교육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 근로하고 있었고, 사적 영역인 농촌 가정에서의 가부장적 질서는 평화시장이라는 공적 영역에서도 되풀이 된다. 이들은 쉽게 "아버지" 공장주에게 이의제기하지 못했으며, 어린 나이에, 아무 연고도 없고, 그들 사이 마땅한 조직을 갖고있지 않은 상황에서 여공들이 근로기준법(권리)를 주장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전태일이 분신하기 전후 시기 대다수 여성 노동자들은 비가시적 "겁쟁이"였던 것이다.
여공들의 환경을 개선해보려 한 전태일은 67년 "시다들을 버릇없게 만든다"는 이유로 해고당하게 되고 이후 <바보회>를 결성한다. 『평화시장 근로 조건 실태조사』(1970)를 작성한 그는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에 진정서를 보내나 묵살당하고 대통령과 근로감독관에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입니다>란 진정서를 보낼것을 계획한다. 이 진정서는 대통령을 "국부"라 칭하고 자신을 포함한 노동자들을 "소자"라 칭하며 보호를 요청하는 화법을 사용하여 "지배담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만든 <평화시장 근로조건 실태조사> 설문지에는 분명 노동자에 대해 "지배담론"이 부여한 정체성을 벗어나려는 모습이 드러나 있다. 예컨대 11번과 12번 문항이다. 11번 문항 "당신 교양을 위한 서적은?"과 취미를 묻고 있는 12번 문항은 분명 지배계층이 위치지은 노동자의 관념 및 정체성에서 이탈하는 것으로, "사유하는 인간"으로서의 "노동하는 인간"(노동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았을 때 전태일의 분신은 '노동자는 묵묵히 일해야 한다'는 주어진 정체성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적, 의도적 행동이다. 그의 연대란 "겁쟁이" 여공들이 지배계층으로부터 주어진 정체성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가 이 부분의 강의에서 제기된 요지라 할 수 있겠다. 강의 앞부분에서도 제기되었듯이 "겁쟁이" 여공들과 같은 비가시적 주체는 공식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들이 드러나는 것은 전태일 분신과 같은 사건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점차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동대문 시장에서 일하던 여공들이 "'전태일이 알던 불쌍한 여공들'로만 그려지는 게" 안타까워 직접 쓴 기록을 남겨야 겠다 생각해 결국 올해 6월 12일 통과된 석사학위 논문으로 자신의 삶을 그려낸 '7번 시다' 신순애 씨의 경우이다. "평화시장 노동자에 대한 저술은 많지만 당사자가 직접 쓴 것은 처음"이라는 지도교수의 말1처럼 "비가시적 주체"들은 여지껏 드러나기 쉽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스스로 목소리를 드러내기도 한다.
1971년 광주대단지: 봉기의 사건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은 1971년 8월 10일 오후에 3-4시간 광주대단지 지역에서 일어난 집단행동으로, 지금까지도 "난동"으로 인식되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무조건적으로 비합리적이었던 폭동이 아니라 나름의 이유를 가진, 광주에서의 삶을 꿈꾸던 도시빈민이라는 산재해있던 주체들을 가시화해준 사건이다.
산업화 초기 서울시는 도시 빈민과 무허가 주택에 살고있던 사람들에 대한 대책의 일환으로 서울 근교에 정착지 조성을 함으로써 이주정책을 시행한다. 대단지 사업이 발표된 후 많은 사람들이 광주대단지로 이주하는 것을 꿈꾸는 소위 '대단지 붐'이 일었고, 이들은 대규모 이주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인구 10만 명만 모아놓으면 어떻게 해서든 뜯어먹고 산다"는 '편의주의적' 발상으로 진행된 광주대단지 조성은 전문가의 자문수렴도 거의 고려되지 않았고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주민들은 토지를 받았을 뿐이지 다른 물자는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여 이들의 생존대책이 부재한 상태에서 대단지 입주에 따른 문제는 잇따라 발생하였다. 토지는 있으나 집을 만들 능력은 없었던 이들은 입주권을 매각하고 새로 무허가 건물을 지어 살았고, 대단지에 지어진 공장은 균형있는 고용상태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리대가 성행하였고, 기아 문제도 대두되었다.
이렇게 문제가 생겨 나오는 한편 71년 총선시기에 차지철과 같은 국회의원 후보자와 서울 시장에 임명된 양택식은 대단지에 "낙원이 올 것이란 환상"을 부풀리는 데 일조하였으나 선거가 끝남에 따라 이러한 환상을 배반하는 조치들이 잇따랐다. 대단지 일대의 땅에 대해 전매금지조치가 내려져 토지 매각을 금지하고 전매 소유지에 집을 짓지 않으면 철거당할 위기에 놓여있었고, 이에 따라 대단지 주민들은 대책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고 유지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진정서 제출을 계획한다. 그러나 서울시는 분양가격을 8천원에서 만2천원으로 올려받겠다고 하여 주민들을 격분시킨다. 이에 주민들은 진정서를 보냈으나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경기도는 취득세 납부 통지를 통해 취득세를 징수한다. 이후 대책위와 주민들은 좀 더 강경한 대응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궐기대화를 개최한다.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8월 10일 궐기대회에 3만에서 6만에 이르는 주민이 모였으며, 이들은 8월 9일 서울시 부시장과 합의한대로 시장이 와서 협상할 것을 기다리나 서울 시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에 따라 표출된 주민들의 분노가 바로 8월 10일의 소요사태이다.
비록 신문에서는 이들을 비이성적 폭도로 규정하였으나 광주대단지 사건은 사실상 정부 및 정치권의 비합리적인 광주대단지 조성에 의해 쌓여온 주민의 분노가 터져나온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진정서와 협상의 단계를 거치고 난 후에도 제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상황에서 이들은 "협상보다 뭔가 확실한 행동과 분노를 보여주는 것 이외에 의사 표현의 방식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이들의 "의사표시"는 위험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어 "엄벌"에 처해지게 된다. 이 또한 민중 봉기에 대한 부정적, 혹은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시각을 보여주는 선례이다.
사건, 탈정체화의 장소
앞에서 봤던 것처럼 전태일 분신사건과 광주 대단지 사건은 비가시적 존재들, "몫이 없는 자들", 주변의 존재들이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는" 장소였다. 이 장소는 기존의 프레임에 따라 부여된 정체성에서 벗어남으로써 정치적 주체가 된다. 기존 정치에 관한 생각들, 예컨대 정당, 노동조합 등을 통한 조직화는 기존의 프레임에 따른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이들을 기존 질서에 편입시키는 것일 수 있으며, "다른 정치의 장소의 가능성"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번 강의는 의문이 가는 점이 많았다. 질문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는데, 그 중 인상깊었던 것이 "그렇다면 그 탈정체화된 존재들의 새로운 언어는 무엇인가"였다.
1 「나의 삶을 말한다 "내 이름은 '7번 시다'였어요"」,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6152148185&code=940702>.
자원활동가 김수진.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2강
7월 3일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2강은 "8.15 그 커다란 환호성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라는 제목으로 이승원 선생님(성공회대학교)께서 진행해 주셨습니다. 비가와서 안 오시는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리를 꽉 채워주셔서 훈훈했습니다.
*저번 후기와 마찬가지로 이하 편의상 '-하다'체를 쓰겠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D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까지의 기간: "한국 현대 정치의 근원이자 본질이자 축소판"
1945년이라면 반세기도 넘게 지난 상당히 과거의 일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기는 나를 포함한 지금의 20대의 조부모 세대가 몸소 체험한 시기이다. 여기서 이 시기를 몸소 체험한 선세대와 그러한 경험을 결여한 후세대 사이 상호 이해와 소통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따라서 이 시기는 여전히 현재의 기억 속에 존재하며,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현재이다. 아울러 좌/우, 진보/보수 이념이 갈라지는 기원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시기이다. 이 때의 좌/우 프레임은 해방된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지금 진보/보수 적대의 프레임의 원형을 이룬다. 이러한 적대적 대립은 세대 간 대립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공동체 형성을 방해한다.
해방전야-조선 총독부의 불안감과 여운형
해방 전날인 1945년 8월 14일 조선 총독부는 본토로부터 히로히토의 대 연합군 항복 선언문을 전달받았다. 한반도가 이남과 이북으로 나뉠 것이고, 남쪽은 미군정, 북쪽은 소군정에 의해 지배받을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일본은 자신들의 총독부가 있는 강북지역은 소련에 의해 점령당할 것이라 예측하였다. (당시 경계는 한강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측은 자신들이 본토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도와줄 조선의 정치 지도자를 찾기 시작한다. 총독부는 여운형을 선택한다. 사회주의자였고 청년층의 지지를 얻었던 카톨릭교도 여운형은 급진적이라기보다는 화합적 성향을 띄었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총독부에 5개 사항을 제시하는데 다음과 같다.
1. 모든 정치범의 즉각적 석방 ->식민지법은 더 이상 효과가 없으며 사법권은 이제 조선이 갖겠다는 의지
2. 서울 시민의 식량 확보 -> 이제 우리(조선건국위원회-이하 건준)가 정치적 권위(식량주권)을 총독부로부터 장악하겠다는 뜻
3. 조선 내 자주적 치안 보장
4. 학생과 청년들의 훈련과 조직화에 대한 총독부 개입 불가
5. 노동자와 농민 훈련에 대한 총독부의 개입 불가
위의 5개 조항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사실상 건준은 대항국가로서의 성질을 가지며 사실상 건국에 대한 구상이 있었다 할 수 있다.
조선건국위원회의 활동과 특징, 그리고 딜레마
건준은 조선 건국을 준비하며 상당히 실질적이고 활발한 활동을 하였는데, 먼저 질서유지다.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 사적 보복과 테러행위 방지, 일제 하 건설된 유효한 공공시설과 사회간접시설, 일본인이 소유하는 재산을 관리 분배하였다. 일제 공포정치의 상징격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정치범들을 대대적으로 출감시킨다. 서대문 형무소는 당시 해방을 실감할 수 있는 장소였다. 아울러 전국적으로 지방단위의 지역 건준 그리고 인민위원회와 같은 자치조직이 상당수(총 2244 개에 이름) 건설되었는데 이들은 소작제 폐지, 여성문제, 노사문제에 관하여 논의와 같은 상당히 민주적 지역 자치활동이었다. 이 때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와 같은 노동자 조직도 결성되었다.
건준의 "대항국가(counter-state)"로서의 특징을 갖는다. 대항국가란 "외세로부터의 독립이후 기존 식민통치 기구를 접수하여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아직은 미발달된 수준의 국가" (Smith)라 할 수 있는데, 종전 이후 민족자결주의를 보였던 건준이 이에 해당한다. 건준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강조하는데 양자는 어느정도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다. 먼저, 건준은 "조선의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의 건설"을 제 1강령으로 함으로써 철저하게 조선의,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국가를 수립하려 하는 민족주의적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지나칠 경우 왕조 국가로의 회귀, 파시즘이 나타날 우려가 있다. 이러한 우려를 견제하는 것이 또 다른 주요 원칙인 민주주의다. 건준은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참여의 균등성과 개방성을 강조하는 한편 친일부역자는 배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울러 실질적 민주주의를 꾀하여 조선왕조, 과두제 부활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전국 인대표자대회를 조직하여 이 목표를 달성하려 하나 이는 완벽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민주주의 논의는 미소공동회의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편 건준은 총독부에 의해 승인된 권력이라는 점에서 딜레마를 내포하고 있었다. 민주주의를 주요 원칙으로 내세우는 한편 친일 부역자는 배제하는 적대적 민족주의 모습을 보이기는 하였으나 총독부가 본토로 무사 귀환 할 수 있게끔 선택한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기관이라는 점에서 모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방 이후 최대 관심사였으며 인민들이 원했던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의 국유화와 같은 실질적인 사안은 상대적으로 간과되었다.
건준은 근대 국가로 발전하기에는 한계를 보였다. 그럼에도 9월 8일 미군의 상륙까지 건준의 해방 후 건국 준비는 굉장히 폭발적이고 역동적이었다. 당시에, 특히 여운형은 미군정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으나 1945년 9월 6일 박헌영 중심의 좌익 계열은 미군에 대항할 수 있는 외교주체로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다.
미군정의 시작
미 24군단은 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 도착한다. 이들은 <작전 명령 4호>를 통해 일본군의 무장해제, 군정실시, 외부 정치 세력의 축출, 한반도 이남의 법질서 유지와 같은 4개의 임무를 전달한다. 문제는 이들 미군들과 조선인 간의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영어 능숙자가 매우 적었고 미국은 한국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그나마의 정보는 "부르주아" 지식인, 친일자들과 같이 건준과는 다른 성격의 집단에게서 얻었다. 이들에게 들은 첫번째 정보는 건준은 친소세력이라는 것이었고, 소련의 남하를 최대한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미국은 건준을 "적"으로 간주해버렸다. 아울러 조선은 패전국의 식민지였다. 태평양 전쟁 참전 이유로 미국은 조선을 일본과 동일집단-패전국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작전명 베이커>를 통해 3개 육군 사단을 전국적으로 한반더 이남에 투입하여 모든 지역정치조직들을 감시하였다.
미군정은 소련의 남하를 최소화하고 미국의 경계(American Boundary)를 최대한 한반도로 전진배치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국내 좌익 성향의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 등 조선인의 자치조직과 대립하였다. 미군은 여운형을 만나 조선인민공화국의 공화국 사용을 중단하고 '정당'으로 명칭을 바꿀 것을 요구하여 이후 미군정과 인민공화국의 갈등이 점차 심화되었다. 한편 김구와 이승만 등 우익세력의 정치세력화가 진행되었다.
건준의 와해와 반탁운동, 분열
건준은 식량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결을 해 나아갔기 때문에 해방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45년 10월 5일 미군이 일반고시 제 1호를 통해 <미곡의 자유시장건>을 공포함에 따라 건준의 분배역할은 약화된다. 이후 미군은 일반고시 2호를 공포하는데 이는 1호와 더불어 물가의 상승을 유발하여 대략 1년 사이에 쌀 가격이 15배 상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혼란을 더한 것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였다. 45년 12월 16일 미.소.영 외무장관이 모여 조선의 독립을 포함한 전후 질서 논의가 오간 이 회의에서 소련은 1 조선의 즉각적인 독립을 위한 임시 조선정부 수립 2 미국이 요구한 신탁통치 문제 협의 3 조선에 미소공동위원회 개최를 제안하고 미국은 조선의 임시정부 수립을 명시하지 않고 5년 간의 미.소.영.중에 의한 조선의 신탁통치를 제안하였다가 거부당한다. 여기서 미국이 제기한 조선의 신탁통치는 과도정부나 자치라기보다는 네 나라끼리 합의를 통한 통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를 동아일보가 "조선, 신탁통치 결정 소련이 신탁통치 주장...미국은 즉각 독립주장"이라 오보함으로써 혼란은 가중되고 반탁운동이 전개되어 반공세력이 정치적 명분을 획득하게 된다. 특히 북에서 내려온 청년들인 김구, 이승만은 반공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반공주의 세력을 정치세력화한다. 여기서 반공-민족-민주가 결합하는 "가장 획기적 전환"이 일어나게 된다.
좌익과 우익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어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된다. 이 가운데 이승만이 6월 3일 정읍에서 자신들은 자주독립국가를 원하는데 친소세력(좌익)들이 통일국가를 원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남한의 독자적인 정부수립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좌익세력은 미군정에 대한 저항을 전면화하였고 미군정은 좌익계열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였다. 식량 부족, 물가 폭등과 더불어 이러한 혼란과 공포, 생존에 대한 열망은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경험으로 사무쳐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반공주의가 지금까지 이어진다.
나가며
8.15와 이후 3년 간의 기억이 여전히 "현재의 기억"이며, 이는 선생님의 부모세대 (나에게는 조부모 세대)의 실제 현실, 살아있는 기억이라는 점과 선세대와 후세대 간의 의견, 이념 대립 및 소통의 문제에 대한 지적이 강의 처음에 언급되었는데, 이것이 오늘 강의의 주요 지점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강의 초반에 제기된 세대 간의 대립은 정말 피부로 느끼곤 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에 진보쪽에서 유명하신 선생님께서 오셔서 강연을 하신 적이 있는데 질의응답시간에 한 유명한 보수단체로 추정되는 분께서 "그래서 당신이 말하는 주체는 [북한의] 주체 철학에서 말하는 그 주체랑 똑같은 것이냐"는 질문을 하신 적이 있어 뜬금없다고 주변 친구들이랑 생각했던 적이 있다. (강연 내용은 북한이라는 단어와 하등 관련 없는, 영국의 한 문학을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읽는 것이었다.) 이 이외에도 이런 저런 사연은 조금 있다.
여지껏 이분들에 대해 "그래, 몸소 체험하며 살아오셨으니 어쩔 수 없지 뭐. 저분들은 바뀌지도 않으실거야"라는 체념어린 생각을 막연하게 해 왔다. 그러나 강의를 들으면서 해방 후 혼란과, "그 커다란 환호성"을 감출 수밖에 없던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강의 텍스트에서 "공포"와 "생존"이라는 단어가 인상깊었다. 처음에는 지나친 단어라 생각했는데 당시 상황을 실재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잘 설명해주는 단어란 생각이 들었다. 공포는 생각을 하기 이전에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당시 상황은 극도의 혼란, 그리고 공포였을 것이다. 당시의 좌우 대립은 생존을 좌우하는 것이었을테고 이러한 공포는 몸에 정말 사무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전에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분들을 '인간으로' 다시 바라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그 공포는 온전히 전달되지 않겠지만) 하지만 여전히 계속해서 질문이 남는다. 우리가 행하는 이해의 노력과 더불어 그분들의 노력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이다. 그 소통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자원활동가 김수진.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1강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1강은 "3.1 운동,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새로 쓰다"라는 제목으로 하승우 선생님께서 강의해 주셨습니다. 첫 시간이라 가는 길에는 설레고 막상 도착해서는 마음이 편해졌어요. 다양한 나이대의, 다양한 분들을 만나 즐겁고 유익했습니다. 첫 시간은 텍스트를 복사해드렸는데요, 앞으로는 복사해드리지 않고 각기 텍스트를 준비해 오시길 부탁드리며 책은 대안지식연구회에서 나온『인문정치와 주체』입니다.
이후 편의를 위해 존대말은 생략하고 '-하다'체로 쓰겠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3.1운동, "씨알의 역사"의 신기원
3.1운동에 관해 우리에게 친숙한 이미지는 까만 치마와 하얀 무명저고리를 입고 태극기를 흔드는 유관순, 총칼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힘없이 짓밟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다층적 차원에서 서로 다른 개인이 혼재하는 복잡한 현실은 그것이 역사화되었을 때 하나의 덩어리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3.1운동 또한 마찬가지이며, 이는 유관순과 같은 하나의 사건으로 정리될 수 없다. 3.1운동은 역사학자 박은식에 따르면 "씨알의 역사", "자주하는 민의 역사"의 시작이다. 이 3.1운동의 주체는 다름 아닌 민중이었으며 이 3.1운동을 통하여 민중은 재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민중, 주체는 일반적으로 생각되듯 일원적인 존재가 아닌 다양한 존재이다. 민중의 요구사항과 투쟁 원인은 다양하였으며 이는 3.1운동에 대한 기존의 관점, 예컨대 일제에 의한 피해 이미지, 민족 대표 33인과 같은 하나의 관점으로는 포착하기 어렵다. 오히려 3.1운동은 민중이라는 다양한 주체들을 드러나게 한 사건이었다.
3.1운동의 배경
3.1운동의 저항성을 강조하는 시각은 그 이전의 저항을 상대적으로 가벼이 다룬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 이전에도 계속 저항하는 사건은 있어왔다. 1907년부터 1911년은 저항하는 역사라 할 수 있으며 이런 과정에서 1910년 조약이 이루어진 것이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조약에 의해 간단히 나라가 넘어간 것은 아니다. 단순히 뺏김/안 뺏김으로 볼 수 없는 맥락이 있다는 말이다.
식민 정치 체제는 “국가 폭력”의 형태로 경찰과 군대식 체제로 이루어져(커밍스)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경찰의 권한은 굉장히 포괄적이었으며 상당히 일상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경찰은 치안이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의 일상 구석구석을 통제할 수 있었다. 즉, 일상자체가 국가 폭력에 항시 노출되었다. 이는 3.1운동 시 경찰서를 습격한 이유를 제공하였다.
일제의 식민 정치는 ‘정치적’ 차원 뿐 아니라 일상의 영역 곳곳을 파고들었다. 사법체계에서도 재판 없이 구류, 태형 등의 처분이 가능하였으며, ‘의생규칙’을 통해 한의를 개편하는 등 사람들의 생활관습 또한 개화라는 명목으로 개조하였다. 이런 식으로 불만이 1919년 3.1운동까지 누적되었다.
3.1운동의 양태
3.1운동 이미지의 중심은 2.8독립선언과 33인 선언,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지식인층의 독립 선언은 분명 계기를 제공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사실상 일제의 식민 정치로인해 지속적으로 쌓여 온 민중의 불만이 터져 나온 것에 가깝다. 아울러 3.1운동은 서울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까지 퍼졌으며, 지방에서 더욱 오래 지속되었다.
일제가 이후 조사한 3.1운동의 원인에 따르면 민중들의 불만은 단순히 식민 지배/피지배의 구분을 넘는 더욱 다양하고 일상과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양반, 유생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 부역이 과중하다는 점, 행정관리의 오만 등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불만이 결집된 것이 3.1운동이었으며, 대개 그 불만은 식민 지배와 같은 거대담론보다는 구체적 자기 삶의 문제와 연관된 것들이었다.
시위 형태도 다양하였다. 도시락을 들고 시위꾼, 만세꾼이 국가 권력에 통제되지 않은 채 주변 지역을 돌며 독립을 외쳤으며, 한밤중에 산꼭대기에서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체포 기록을 보면 농민이나 지식인 뿐 아니라 자영업자와 같은 상인들도 상당수였는데, 이들은 동맹파업, 일본인에게 물건 안 팔기 등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3.1운동, 민중의 재발견
일반적으로 3.1운동은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실패한 사건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3.1운동은 민중의 재발견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있는 사건이다. 이 사건을 통해 민중의식이 성장하였다 할 수 있다. 3.1운동의 “실패”를 통해 왜 우리가 짓밟혔나를 생각게되었으며, 점차 걸음마 단계였던 민중의식은 의식화, 조직화 된다. 지식인층(젊은 학생층)은 이제 봉기뿐 아니라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는 농민과 같이 봉기해도 하대하던 의식이 있던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점차 지식인층은 농민층의 사람들과 조직해야 함을 깨닫게 되며, 이 과정에서 민은 대상화의 존재가 아니라 함께 일을 도모하는 존재로 생각되며, 민은 스스로 주인이 되려는 존재가 된다.
20년대는 이러한 의식화와 조직화가 폭발적으로 드러난 시기이다. 조선노동 공제회가 출현하였으며, 192,30년대에는 서울 청년회 조선 공산당이 출현한다. 19세기에도 이념이나 사상은 존재하였으나 주로 지식인 중심이었던 반면 20세기에는 점차 다른 계층에까지 퍼지게 된다. 이에 따라 지식인이 지방에 내려가 야학, 강연회를 여는 등 구체적 일상과 사상이 접전을 찾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공식 역사에서 빠져있고, 보통 3.1운동 이후는 암흑기로 다루어진다.
강의를 마치고
무언가 이슈가 되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우와 정말 혼란이다.”이다. 지금 당장 여기 벌어지고 있는 일은 이것이 정확히 무슨 일인지, 후에 어떻게 기억될는지 명확하게 답변을 내리기 어렵다. 너무나도 다양한 관점이 얽히고 섥혀 바로 옆에 산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은 그 사건과 나의 시간적, 심리적 거리와, 역사가의 관점에 의해 그 성격이 상당히 단순화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3.1운동은 막연히 조선독립을 외친 사건, 비폭력 투쟁과 같은 이미지로 기억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관순 판결문의 내용은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상당히 다른 것이었고, 민중의 요구도 어떠한 거대담론으로 쉽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일상과 닿아 있는 것들이었다. 개인적으로 난 어떠한 이념이 저항을 뒷받침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거대담론으로만 저항의 주체가 해석될 경우, 그것 또한 개별 주체의 생명력을 앗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주체’라는 한 단어로 묶여있으나 그 주체는 너무나 다양한 개인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3.1운동의 주체를 다각화한 이번 강의는 그때 당시 사람들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아울러 예전에 학교에서 들었던 강의 중 조선 후기 공론장의 태동과 관련된 강의가 떠올랐다. 3.1운동에서 민중이 재발견되었다는 것이 오늘 강의의 요지라 할 수 있겠는데, 나는 1889년즈음부터 시작된 민의 성장과 더불어 해석이 되었다. 19세기 말 신문을 함께 읽고, 각 동네마다 연설장을 만들고 서울에는 19일동안 만민공동회가 열리며 조금씩 성장하던 민중이 3.1운동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고 그 이후 더욱 조직화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문화 통치 이후 분열을 거듭하며 이러한 민중은 시민으로까지는 성장하지 못하였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그 몫은 10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원활동가 김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