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정보
미래의 '보다 나은 사회'는 '
이성의 시대'라고 할 계몽주의 시대의 영향으로 처음부터 '이성의 사회'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은 삶'을 위한 목숨을 건 투쟁은, 오로지 '이성'만으로 꼭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이성 못지 않게 가난에 시달리고 불의에 분노와 억울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감성도 중요했습니다.
사생이 오가는 투쟁의 감성, 투쟁적 정서들을, 투쟁의 가요들이 대표해왔습니다.
이 강좌에서 반란과 저항의 노래들을 통해
미래를 향한 투쟁의 과거와 현재를 짚어보고 우리의 미래를 한번 가늠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강의 일정 |
날짜 |
순서 |
주제 |
강사 |
7.11 |
1강 |
동구와 서구, 한과 희망이 뒤섞인 저항의 노래 |
박노자 |
7.18 |
2강 |
일본의 저항가요 연대기 : 인터내셔널가 도입에서 후쿠시마까지 |
임경화 |
7.25 |
3강 |
<독립군추모가>에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까지 |
이영미 |
강사소개 |
박노자 오슬로대학 교수
임경화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
강의정보 |
일시 : 2012. 7.11 ~ 7.25 (수) 총 3회 오후 7시~9시30분
장소 : 참여연대 느티나무홀(B1)
수강비 : 5만원(참여연대 회원 50% 할인)
강의 별 소개 |
1강(7.11) 동구와 서구, 한과 희망이 뒤섞인 저항의 노래
<최초의 인터내셔널가 악보>
일찌감치 '소리의 문화'에 익숙했던 유럽 대중들은
19세기 민족주의 문화 운동가들이 각 지방의 소리들을 채집하여 근대적인 '민요' 개념을 창작했습니다.
표준화된 '민요'들을 전국적으로 보급하는가 하면 교회생활에서 찬송가 등이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9세기 중반부터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도 자연스럽게 나름의 '소리 문화'를 만들어나갔습니다.
그 발전에 민요와 찬송가, 심지어 군행진가에서 온 요소들이 각자 나름의 영향을 미쳤으며,
분노 연대 자신감 등 대중의 각종 감정들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요소들이 혼재돼 있었습니다.
초기의 저항 가요 상당수는 밑으로부터 자발적으로 만들어졌지만 러시아 혁명 이후에 소련이 관료화돼 가는 과정에서
노래의 창작, 보급 형태도 점차 "위로부터의 계몽"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중앙'에서 유명한 작곡가, 시인들이 만들어내고 당의 선전부서들이 보급하는 노래라 해도,
많은 경우에는 거의 '민요화'되기도 했습니다.
이 강의는 서구, 동구 사회주의 등 급진적인 반체제 운동 흐름 속에서 노래들이 맡아온 여러 역할들을 조명함으로서
이 노래들이 반영하면서 자극하는 운동의 감성이 무엇이었는지,
이 노래 속에서 민중의 어떤 욕망들이 섞여 있었는지 이야기해볼 것입니다.
2강(7.18) 일본의 저항가요 연대기: 인터내셔널가 도입에서 후쿠시마까지
[세계혁명전쟁선언]을 부른 [두뇌경찰] 1975 자주제작된 앨범 (左)
혁명가집] EP(1972) (右)
후쿠시마에서 원전사고가 나고 대기 중에만 히로시마 원폭 170발 이상의 방사능이 노출되었습니다.
하지만 관료도 정치가도 언론도 학자도 대기업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입을 모아 별거 아니라고 하며 사람들의 목소리를 막았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체제를 용인할 수 없었고, 스스로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때 “다 거짓말이었어!”라는 노래가 울려퍼졌습니다.
저항의 메시지는 멜로디를 타고 공명해 갔고, 사람들은 다시 광장에 모여 자신들의 외침을 노래에 실었습니다.
겨우 다시 찾은 광장에 노래가 돌아왔습니다.
저항가요는 언제나 체제의 모순을 폭로하고 더 나은 사회를 희구하는 반체제운동의 깃발이고 무기이자 심장이기 때문입니다.
이 강의에서는 노동운동에서 출발하여 최근의 반핵운동에 이르기까지의
일본의 저항운동사를 노래를 중심으로 하는 저항문화를 통해 살펴봅니다.
이웃나라의 저항의 소리의 월경을 도와 우리의 소리와 하모니를 이루는 연대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입니다.
연대는 이웃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3강(7.25) <독립군추모가>에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까지
근현대 우리나라의 저항의 노래는 가사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음악의 계보로 살펴보아도 아주 복잡다단합니다.
한편으로 전통적 노래였을 것이 분명한 동학군들의 노래부터,
서양과 러시아, 일본의 영향을 받은 20세기 전반 항일무장투쟁기의 노래들만 보아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1970년 이후 본격적으로 형성된 민중가요는 이러한 전통과도 완전히 단절된 채 새롭게 형성되었고
역시 20세기 전반기 못지않은 다양한 문화적 원천으로부터 조금씩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복잡한 계보를 더듬어 보는 일은, 당대 저항운동을 하던 사람들의 '뇌구조'의 일단을 살펴보는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입니다.
후기 3
반란의소리 저항의노래 - 3강 한국의 저항가요, 독립군가에서 <헌법 제1조>까지
반란의소리 저항의노래 - 3강 한국의 저항가요, 독립군가에서 <헌법 제1조>까지
2004년의 늦은 봄, 교정 한 켠에 세워진, 선배열사의 기념비 앞에서 불렀던 노래가 기억납니다. 비록 최루탄 연기의 매퀘함은 사라졌어도 자못 젖은 목소리였던 것 같습니다. 무엇이 우리들을 젖어들게 했는지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2008년의 늦은 봄, 광화문 거리에 노래가 다시 울려퍼졌습니다. 촛불 사이를 스치는 노래 속에는 웃음이 함께 했습니다. 사람들은 높이 막아선 명박산성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율동을 나누었지요.
노래가 변한 것이었을까요? 시대가 변해서였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변했던 것일까요?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2012 여름강좌 [반란의 소리, 저항의 노래] 그 마지막 이야기는 서양과 일본을 지나 드디어 이 곳, 우리들의 노래에 다다랐습니다.
한국 저항가요의 특성
박노자 선생님께서는 첫 시간에 서양 그리고 러시아 저항가요의 경우, 그 가사를 통해 무엇을 주장하려고 하는지 선명하게 알 수 있다고 하셨었죠. 그렇지만 한국의 저항가요는 어떠한 주장을 담기보다는 감성적인 경향을 보입니다. 즉, 그 시대에 있었던 저항운동의 감성적 경향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 안에 담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국 저항가요의 특징은 생산과 보급의 과정을 기성의 전문가가 아닌 수용자 집단이 주도하였다는 점입니다. 전문 창작자가 만들어서 대중에게 불리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 대중이 부르기 때문에 만들어지거나 저항가요로 소환되는 것이지요. 노래의 주인이 창작자가 아닌 수용자이기 때문에 전승과정에서 작품이 변형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방직후 시기와 1988년 이후 시기는 상대적으로 전문가의 개입이 강했던 시기였습니다. 여기에는 그 이전의 저항가요의 축적이 많았고, 민중의 조직된 힘이 강해 권력의 통제 영역 바깥의 활동이 활발해진 시기였다는 배경적 조건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막강한 민중가요 문화가 형성되고 향유된 시기는 7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였습니다. 여기에는 평소에도 대중가요보다는 다른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집단적인 자발성 욕구와 이러한 욕구를 시간적-공간적으로 지속시킬 수 있는 힘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강력한 민중가요 문화가 형성되는데 에는 결국 주구장창 생활을 함께 하며 함께 먹고 함께 노는 학생운동권과 노동운동권이 중심이었습니다.
또한 한국의 민중가요는 분단이후 해외사회주의 운동의 영향을 거의 받지 못하게 되면서 특유의 자생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식민지시대 저항가요, 기성노래의 가사 바꾸기
전통시대에는 이러한 저항가요가 있었을까요? 동학에서 불리워진 가사 등은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식민지 저항가요의 태반은 기성가요를 개사한 것이었습니다. 못갖춘마디를 특징으로 하는 서양 어법의 음악체계는 전통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것이었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기존의 서양 노래를 가사를 바꿔 부르는 형식으로 저항가요가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운동을 이끌면서 노래를 가르치고 부르며 이 문화를 향유한 사람들은 대부분 신교육을 받은 지식인층이었습니다.
이 시기 저항가요의 가장 많은 원천은 일본의 노래, 특히 일본 군가를 개사하여 부른 노래가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노래인 <봉기가>의 경우에는 일본 군가인 <아무르강에 흐르는 피>를 개사한 것입니다.
해방 직후 시기와 전쟁기
이 시기에는 매우 드물게도 전문 창작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시기였습니다. 여기에는 좌우의 인사가 함께 개입하였고 <독립행진곡>의 경우에는 <해방가>라는 제목으로 90년대까지 전승되기도 하였습니다.
해방직후 시기는 이전까지의 저항가요를 집대성한 마지막 시기였고, 저항가요조차도 분단을 통해 완전히 갈라지면서 이후세대로 전승되지 않았습니다.
4.19혁명을 전후한 시기
1950년대에는 관제 궐기대회를 제외한 데모가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민중가요의 문화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그러한 이유로 4.19혁명 당시에도 <학도호국단가>, <애국가>, <삼일절노래>, <6.25노래>등의 노래가 불렸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세대가 사회주의 운동과 절연하고 1950년대의 반공 제도교육을 받은 새로운 세대임을 보여줍니다.
한일수교반대데모 이후 유신체제 초기까지
한일수교반대투쟁 등에서부터 지식인들의 反박정희 태도가 분명해지고 결집하는 한편, 학생운동이 가열되면서 새로운 노래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시기부터는 행진을 위한 노래 이외에 구전가요 스타일의 노래 등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점차 시위가 오랜 기간의 농성과 지속성을 수반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 시기에는 <농민가>나 <정의가>와 같이 다소 구호적이고 계몽적인 경향의 행진곡 풍의 노래 등이 만들어졌습니다.
1970년대 후반, 민중가요 문화의 형성
이 시기에 이르면 적게 잡아 수십곡, 많게는 2-300여곡의 노래가 민중가요 문화로 축적되었고, 단순한 데모용 기능요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경향의 노래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1975년 긴급조치 9호 이후 총학생회가 사라지고 학내에서 집회가 불가능해지면서 학생운동이 양적으로 축소되었는데, 오히려 질적으로는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이슈 파이팅에 머물지 않는 이른바 ‘과학적 학생운동’이 시작되면서 운동권 학생들은 자신의 일상을 재조직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국내 대중가요, 복음성가 등 다양한 노래들을 민중가요로 소환하고 재해석하게 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서구 근대를 모델로 한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의 모델이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 시기는 복음성가를 비롯한 미국발 저항가요가 적극적으로 계승된 시대였습니다.
음악적으로 볼 때, 일제시대를 경유하며 형성된 행진곡의 전통보다 미국식 포크의 영향력이 강해진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김민기, 김영동, 서유석, 한대수 등 국내 대중음악인들의 노래를 저항가요의 영역으로 소환하게 되고, <아침이슬>, <친구>, <상록수> 등이 불려진 것이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제5공화국 시기, 포크의 쇠퇴와 비장한 단조의 노래들
1980년 봄은 민중가요 문화가 전 대학생 사회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고, 향후 10년동안 민중가요의 최고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70년대까지의 노래만으로는 수용자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성의 노래를 소환하는 것을 넘어서서 수용자 스스로 창작하고 그 안에서 전문가들을 창출해냈습니다.
포크의 자유로운 분위기, 명랑한 미국적 질감 등이 퇴조되면서 대신 비장한 단조의 노래로 급격한 경향의 변화를 맞게 됩니다. 이전의 행진곡들은 구호성과 계몽성을 벗고 서정성을 획득함으로써 인간의 고통과 절망, 이를 극복려는 의지를 비장한 정서로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저항가요 중에서도 행진곡 이외에 ‘서정가요’로 지칭된 노래들이 생겨났는데, 여기에는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타는 목마름으로>, <민중의 아버지>, <부활하는 산하>,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이 있습니다.
1980년을 계기로 노래운동의 지향을 확실히 한 대학 포크 서클 출신들이 1984년부터는 대학 바깥에서 전문적인 노래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즉, 비전문가 사이에서 전문가가 탄생하게 된 것인데 그렇다고 이들이 상대적으로 음악적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노래운동 활동가들의 주도로 노동자 기타반 지도가 이루어지면서 노동자 창작품들이 생겨나기도 했고, 마당극 운동의 흐름에서 파생된 민요연구회는 전통민요의 적극적 계승과 새로운 창작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저항가요를 만들어냈습니다.
6월 시민항쟁과 노동자대투쟁 이후 문민정부 초기까지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초중반의 노래 경향이 지속되면서 좀더 다양하고 일상적인 노래들이 생산됩니다. 운동이 대중화되면서 ⓵노동자 대중으로의 계층적 확산 과 함께 ⓶대중가요 공간에서의 합법적 활동이 성공하게 됩니다. 이로써 노래의 경향은 더욱 다양해지고 전문 노래운동 창작자들의 작품도 급증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접어들면 노동자가 수용하는 노동가요가 민중가요를 주도하면서 노동자노래단, 예울림, 꽃다지 등이 활발히 활동하였고, 특히 김호철 씨는 <파업가>, <단결투쟁가>, <끝내 살리라>, <포장마차> 등을 통해 노동자들의 독특한 감수성을 노동가요 속에 잘 담아냈습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노래마을 등은 대중가요 공간에서 활동하면서 <사계>,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을 통해 가요순위와 악보피스 판매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집단의 목소리에서 개인의 목소리로
이 시기에는 점차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조직력이 하락하면서 생활의 대부분을 공유하는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민중가요 문화의 쇠퇴로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민중가요는 시위장 기능요의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개인의 목소리로 이어져가는 두 갈래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결국 수용자들의 취향에 따라 새로운 길을 걸어 나가게 된 셈입니다.
2012년 오늘, 그리고 우리의 노래
다시 늘어난 ‘촛불’ 광화문 모여 ‘난장 공연’ http://news.nate.com/view/20080620n15669
MBC파업콘서트에 '나가수' 가수들도 동참 http://news.nate.com/view/20120625n12379
노찾사·꽃다지 잇따라 공연 http://news.nate.com/view/20120419n33000
트로트가수 현빈이 부른 <빠라빠빠>를 개사한
<한미FTA반대가> http://news.nate.com/view/20120419n33000
집회에 모인 시민들이 ‘난장공연’을 벌이고, 비교적 성공한 대중가수들이 ‘파업콘서트’라는 이름의 새로운 무대에 오르며, 또 한켠에서는 기존의 노래운동 활동가들이 공연을 여는...
2012년을 사는 오늘 우리에게 저항가요란 어떤 의미일까요?
노래가 변하고 시대가 변하고 우리가 변해도
오늘도 내일도, 우리의 노래는 계속될 것입니다.
첫 시간에도 이야기했듯이, 노래란, 그런 것이니까요.
글 : 자원활동가 김주호
반란의소리 저항의노래 2강 – 일본의 저항가 연대기 : <인터내셔널>도입에서 후쿠시마까지
반란의소리 저항의노래 2강 – 일본의 저항가 연대기 : <인터내셔널>도입에서 후쿠시마까지
이 나라를 걷다 보니 원전이 54기
교과서도 CM도 말했었지, 안전하다고
우리들을 속이고 변명이라는 게 ‘예상 밖’
그리운 그 하늘 가려운 검은 비
다 거짓말이었던 거야
역시 들통났네
진짜 거짓말이었던 거야
원자력이 안전하다는 건
(중략)
다 시궁창이었던 거야
도쿄전력도 훗카이도 전력도 주부전력도 규슈전력도
이제 꿈같은 거 꾸지도 않지만
다 시궁창이었던 거야
그런데도 계속할 생각이야
진짜 시궁창이었던 거야
뭔가 하고 싶은 이 기분
일본의 인기 록가수 사이토 가즈요시가 자신의 히트곡을 개사해서 부른 <다 거짓말이었어> 라는 노랫말입니다. 수업시간에 직접 동영상을 통해 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노래는 일본에서 동영상으로 만들어져 인터넷을 중심으로 울려퍼졌고 결국에는 사이토 가즈요시가 속한 레코드 회사(원전 건설회사인 東芝의 자회사 EMI Music Japan Inc.)의 강력한 요구로 인터넷에서 삭제되는 소동을 벌이게 됩니다.
지난 해 3월 일본에서는 가히 재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경악스러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후쿠시마의 원자력 발전소 방사능 유출 사건이었죠. 하지만 당시 일본의 전력회사, 관료, 정치가, 언론, 학자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사고를 축소, 은폐하려 했고 오히려 방사능이 위험하지 않다는 선전을 전개하며 공분을 샀습니다. 결국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광장으로 모여들었고, 임경화 선생님의 이야기는 바로 이곳에서 출발했습니다.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2012 여름강좌 [반란의 소리, 저항의 노래] 의 두 번째 시간은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저항가요에 대한 이야기로 꾸며졌습니다.
2011년 일본, 그리고 2008년의 기억
2011년 7월 16일 도쿄의 한 광장에서는 17만 명의 시민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바로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대한 정부의 대응에 국민들이 분노한 것인데, 이런 대규모 집회는 일본에서 무려 40년 만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앞에서 들려드린 <다 거짓말이었어>라는 저항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2008년의 광화문 앞거리를 기억하시나요? 굳건한 ‘명박산성’앞에서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짦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외쳤었지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도 <다 거짓말이었어>도 ‘눈앞의 사익보다 생명’을 외치는 시민들의 중심에서 시민들의 깃발이 되고 무기가 되고 심장이 되었”다는 임경화 선생님의 이야기는 규모도 성질도 다른 한국과 일본의 두 사건을 ‘저항의 노래’라는 하나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52년만에 ‘10만 시위’… 日국민 입열다
http://media.daum.net/foreign/newsview?newsid=20120725031104068
일본의 저항가요
저항의 노래는 혁명가, 노동가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데, 결국 체제에 반대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노래들을 모두 저항가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노동자 계급이 형성되고, 이들이 계급의식을 가지고 국가 권력에 저항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을 묶어내기 위한 도구로서 노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표현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던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더 강력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노래가 <인터내셔널가>인데, 임경화 선생님은 이 노래 하나만으로도 일본의 저항가요의 연대기를 책 한권 분량으로 쓸 수 있다고 하시니, 그 내용이 더욱 궁금해집니다.
일본의 저항가요는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식민지 시절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일까요? 그동안 한국은 일본의 대중문화를 수입금지하는 조치를 취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일본의 저항가야말로 일본의 재무장-제국주의화에 저항하고자 했던 움직임이었고 일본 저항가의 역사 속에는 조선과 일본의 연대의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1960년대 일본에서는 이른바 전공투 세대가 있었는데, 69년 3월에는 고등학생들도 데모에 주체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졸업식에서 기미가요 대신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등의 저항운동이 있었습니다. 또한 베트남전쟁 반전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퍼지면서 일본에서는 포크붐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저항가요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상징이었고 계급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저항가요를 불렀기 때문에 당시에는 상당히 고가의 악기였던 기타를 써서는 안된다는 논의도 있었다고 합니다. 다카다 와타루는 <기동대에 들어가자>라는 노래를 불러 유행시켰는데, 이 노래는 ‘자위대에 들어가서 꽃처럼 산화하자. 악의 축을 쳐부수자’라는 가사를 통해 오히려 일본이 군비증강을 통해 이미 제국주의의 길을 걷고 있다는 자위대에 비판의식을 담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 노래는 2011년에는 원전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개사하여 불리워지기도 했습니다.
<인터내셔널가>의 도입
일본의 경우에는 청일전쟁 이후 후발자본주의 국가로서의 길을 걷게 되면서 급격한 산업화의 과정을 거쳤고, 여기에 저항하기 위해 1901년에는 사회당과 같은 좌파정당이 생겨났는데, 아마도 이 무렵 <인터내셔널가>가 처음 일본에 전해였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한국의 병합은 일본에서는 국내적으로 저항세력을 초토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10년도에는 일본 내의 좌파세력이 대부분 제거되기에 이르렀는데, 변혁운동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은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였습니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민중들의 봉기는 쌀값봉기, 보통선거권 투쟁 등으로 옮겨갔고, 1920년대에 제1회 메이데이 행사가 개최되었습니다.
그리고 1922년, 일본 공산당이 창설되고 러시아 혁명 5주년 기념행사가 벌어지면서 <인터내셔널가>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적기가>나 <군가>등도 개사하여 들어왔는데, 이러한 유명한 저항가 중에는 기숙사 노래 등을 개사해서 부른 경우도 있었습니다. 외국곡들을 번안하기도 했는데 이 당시에는 검열이 너무 심해서 ‘부르주아 계급을 쳐부수자’라는 가사 등이 들어가면 발표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일본에서의 <인터내셔널가> 번역은 전혀 혁명가요 ‘스럽지’ 않은 형태로 번안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목적인지를 밝히지 않고 다만 ‘목적을 위해 목숨을 바쳐 희생하자’는 식으로 일본의 무사도와 자기희생에 바탕을 둔 혁명 저항가 등이 많이 나왔습니다.
프롤레타리아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창작곡을 만들어야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터내셔널가>와 <적기가>가 불려지는 것은 차마 1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저항가요들이 금지되고 좌파운동가들이 대거 구속되면서 이후 공식석상에서는 <인터내셔널가>를 허밍이나 라라라 등으로 바꿔 부르거나 소비에트 등의 가사를 쓸 수 없어서 ‘빛의 나라’로 바꾸어 부르기도 했습니다.
20년대 중반 이후에는 문학동맹이나 음악동맹 등이 많이 생기면서 PM 활동이나 가집 편집, 레코드 취입, 메이데이가, 라라라행진곡(인터내셔널가 허밍버전), 창작곡 제작, 음악회 개최 등의 활동이 활발해졌고, 이 과정에서 재일조선인들과의 연대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PM이 편집한 최초의 가집 <프로레타리아>를 통해 이루어진 저항가요의 조일연대는 제3회(1922) 행사에서 본격적으로 조선인 단체가 참가하고 제4회(1923) 행사에도 조선인 노동자들이 참가하면서 더욱 활기를 띄었고, 오사카 메이데이 슬로건으로는 “일조노동자 단결하라”가 채용되기도 하였습니다.
1931년 10월호에 발표된 김용제의 시 <사랑하는 대륙이여>에 하라 다로가 첼로 반주의 혼성 4부 합창으로 작곡한 곡이 제4회 프롤레타리아 대음악회(1932)를 위해서 만들어졌으나 검열로 인하여 삭제되어 연주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저항가요에서 조일합작의 효시를 이룬 작품이었습니다.
패전 이후에 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가 많아지면서 1950년대에는 메이데이 참가 인원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60년대에는 전공투를 중심으로 학생운동과 반전운동이 절정에 달했지만, 이후 고도성장에 따른 소비사회로 분위기가 전환되면서 저항운동의 불씨가 잦아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11년, 원전사고를 계기로 40여년 만에 일본의 거리에 저항의 노래가 다시 울려퍼지게 된 것입니다.
우타고에 운동의 전후사
우타고에 운동이란, 패전 후 일본공산당의 혁명운동과 깊은 관련성 속에서 합창을 중심으로 하고 서클활동을 기반으로 전개된 음악운동을 말합니다. 우타고에는 전쟁 전 PM운동의 유산을 전승하면서 사회주의 음악문화의 직수입, 전문가 집단의 인민에 대한 봉사, 공동 창작은 물론 노동운동과 반전평화운동, 학생운동을 지도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당시 대학생들은 일본사회에서 5%정도 밖에 되지 않아 크게 주목받지 못했는데, 우타고에가 48년 전학련의 결정에 맞춰 동경대학의 합창 서클을 지도하면서 일본공산당과 관련된 조직 중에 유일하게 대중성을 확보한 운동조직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때마침 미국이 태평양 비키니 섬에서 실행한 수폭실험에 일본어선이 휩쓸리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이에 맞춰 일본공산당이 미국을 적으로 규정하면서 반미운동의 움직임이 확산되기에 이릅니다. 1954년의 수폭금지운동,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거치며 우타고에 운동이 크게 성장하였고 이 운동의 가집들은 숨은 베스트셀러로 확산됩니다.
원수폭금지운동의 상징이 된 노래인 <원폭을 용서하지 않으리>는 ‘고향땅이 불타버리고 육신이 사라진 땅, 용서하지 않으리’ ‘히로시마 나가사키 비키니.. 세 번째는 피폭당하지 않으리, 세 번은 용서하지 않으리, 세 번은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가사를 통해 일본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원수폭금지운동의 중심에서 불려지고 있습니다.
운동노선이 국제운동보다는 민족운동에 집중되면서 점차 혁명성 있는 소련의 가곡들이 덜 불려지게 되었고, 대학생들은 우타고에 운동의 중심이 노동자에서 국민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저항가요는 함께 부르는 형태에서 소비되는 형태로, 그리고 합창을 하지 않는 세대로 이행되면서 점차 우타고에 운동은 고령화되어 가는 추세에 있다고 합니다.
'5월 광주정신'을 노래하는 일본인들 http://news.nate.com/view/20120517n34751
5.18 민주화운동 32주년을 맞은 지난 5월, 광주에서는 우타고에의 노래가 울려퍼졌습니다. 사회적인 위기나 모순을 깨는 강력한 첫 목소리,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저항의 노래는 민족을 넘고 국경을 건넙니다. 2008년 광화문 광장에 <대한민국 헌법 제1조>가 울려퍼지고 2011년 도쿄 고엔지에서 <다 거짓말이었어>가 불려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질 한국의 저항가요 이야기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글 : 자원활동가 김주호
반란의소리 저항의노래 1강 - 한과 희망이 뒤섞인 저항의 노래 (7/11)
[반란의 소리 저항의 노래] 1강 : 유럽과 러시아/소련의 저항가요
동구와 서구, 한과 희망이 뒤섞인 저항의 노래
한땐 나와 나의 동료들은 거친 세상에 맞서 싸우던 사람들의
분노가 되고 희망이 되어 거리에서 온 땅으로 그들과 함께 했지
그땐 그대들과 난 아름다웠어 비록 미친 세월에 묻혀 사라진다 해도
꽃다지 ‘노래의 꿈’ 중에서
노래는 변합니다. 수많은 음과 노랫말들이 새로이 나타나 불려 지다가 사그라지고 또 다른 음과 노랫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다가 또 다시 사그라지고. 우리는 매일 새로운 가수들이 새 앨범을 발표하는 음악홍수의 시대에 휩쓸려, 계속되는 새로운 음악적 시도들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래는 변하지 않습니다. 최근 몇몇 프로그램을 통해 촉발된 리메이크 열풍, 명곡의 재발견과 같은 일련의 현상은 노래가 가진 생명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자신보다 나이가 더 많은 노래를 부르는 젊은 아이돌 가수를 보며 오히려 다시 태어나는 노래를 만납니다. 노래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지요.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2012 여름강좌 [반란의 소리, 저항의 노래] 의 시작은 유럽과 러시아/소련에서 건너온 우리에겐 상당히 낯선 몇 곡의 노래로 꾸며졌습니다. 박노자 선생님은 이 노래들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을까요? 선생님의 짧은 질문으로 강의는 시작되었습니다.
△ 강연을 하고 있는 박노자 교수 (사진=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여는 말 : 우리는 왜 혁명가요를 들을까요?
지난 5월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 앞에서는 <바르샤바 노동자 행진곡>이 울려퍼졌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대통령 3선 취임을 반대하는 2만여 명의 시위대가 크렘린 궁 쪽으로 진출하려다 경찰과 대규모 충돌을 빚었고, 치열한 투석전 끝에 250여명이 체포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1993년을 끝으로 사라졌다가 19년 만에 다시 벌어진 격렬한 반정부 저항시위였지만, 사람은 변했고 노래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바르샤바 노동자 행진곡>은 폴란드 노동운동의 고전적 저항가요로서 100여 년 전 러시아어와 독일어로 번역되었고 1940-50년대에는 일본어로도 번역되었으며, 이후 북한에도 전해진 곡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곡이 100년이 지난 2012년 5월 모스크바의 거리에서 여전히 울려퍼지다니! 박노자 선생님에게는 시위대와 경찰들 사이로 날아다니는 것이 돌멩이뿐만이 아니었나 봅니다. “음악적인 감각차원에서 그 시위가 재밌었다”고 하시네요.
대중가요는 계속 바뀌지만 혁명가요는 놀랍게도 단절성보다 지속성이 더 강하다고 합니다. 실제로 영국 런던에서도 100여년전 아일랜드 노동자들이 부르던 <적기가>가 불려지고 있고, 최근 경제 위기로 시위가 격화되고 있는 남부 유럽에서도 100년 전의 혁명가요를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죽은 게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죠.
이들은 왜 노동운동가요를 불렀을까요?
유럽의 혁명가요(또는 저항가요)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에서 발달하였습니다. 특히 독일에서는 다른 유럽 선진국들에 비해 사회민주주의가 발달하고 노동조합이 잘 조직되어 있어서 노동가요들이 더욱 많이 나왔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보다 노동조합 조직율이 2배정도 높았던 당시의 독일 노동자들에겐 노동조합에서의 생활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노동조합에서 발행한 소식지와 신문을 읽고, 일이 끝나면 조합에서 만든 노동자 도서관에 모여 서클활동을 하거나 공부를 하였으며, 노동자 합창회를 만들어 함께 노래를 부름으로써 조직의 단결과 귀속의식 등을 강화했습니다. 독일의 노동자들에게는 단순 반복 작업의 정신적 긴강감을 해소하기 위해 문화생활이 필요했고 합창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1차대전 전까지 독일에서 노동가요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노동가요에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민중가요가 있는가 하면, 독일의 사회민주당과 관계된 진보적 지식인들이 노동자들을 위해 만든 노래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을 의식화 과정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는데, 나쁘게 볼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노동가요들은 노동자들의 적이 누구인지, 또한 노동자들의 정체적 계급의식을 딱 짚어 규정하면서 계급전체의 도구로 작동하였고 이러한 과정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갈망했던 의식화 과정이기도 했으니까요.
<Die Arbeidsmanner>(1870) <노동자들>
Wer schafft das Gold zu Tage? 누가 금을 빛의 세계로 가져오는가?
Wer hämmert Erz und Stein? 누가 광석과 석재를 가공하는가?
Wer webet Tuch und Seide? 누가 방직물들과 비단을 만드는가?
Wer bauet Korn und Wein? 누가 알곡과 양주를 만드는가?
Wer gibt den Reichen all ihr Brot 누가 부자들에게 그 약식을 주면서도
und lebt dabei in bitt’rer Not? 스스로 끔찍한 가난 속에서 사는가?
Das sind die Arbeitsmänner 이는 노동자들
das Proletariat 무산계급이다.
<노동자들>의 가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초기의 노동가요들은 노동자의 계급적 정체성을 규정합니다. ‘우리’와 ‘적’으로 세계를 분명히 양분화하면서 모든 것을 만드는 것은 우리이지만 결국 받아먹는 것은 부자들이며,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왜 고난을 겪는가, 우리의 적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빈의 노동자들>이라는 유명한 가요는 1927년 오스트리아의 한 사민주의 시인이 독일어로 작사하여 만든 노래인데, 그 음율은 소련의 초기 혁명가요인 <백군과 흑색 후작>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 또한 “우리”가 곧 찾아올 세계를 만들어갈 건설자, 승리자가 될 것임을 말하여 노동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자 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승리를 확신시켜주는 전투적인 음악, 이것이 노동가요의 인기 비밀 중 하나인 것입니다.
노동가요는 당시의 노동자들이 접하기 어려운 고급문화였던 오페라 등의 멜로디를 차용하여 이들에게 신분상승의 느낌을 줌으로써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초기 소련의 혁명가요 중 하나인 <우리 모닥불이여 높이 솟아오르라>는 러시아 혁명 5년 후인 1922년에 작곡되어 당시 9-16세 아이들이 속했던 “소년공산당” 조직의 당가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우리는 노동자의 아들, 딸들이며, 전투의 날이 돌아올 것이니 늘 준비되어 있으라’는 전위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재밌는 것은 이 노래가 오페라 <파우스트>의 멜로디를 차용하여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파우스트>를 접할 수 있는, 고급문화세계로의 다리 역할을 했던 것이지요. 이 노래의 특징은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동원을 유도할 수 있는 전투적이고 유쾌한 멜로디로 이루어져 있어서 집단의 귀속의식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는데 있습니다.
<우리 모닥불이여 높이 솟아오르라>
http://www.youtube.com/v/7M6UoG_T5nM&feature=related
그렇다고 노동가요가 집단의식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혁명가요의 내용은 노동운동 사상의 압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노동자들은 신문이나 잡지, 선전물보다는 노래 하나를 들음으로써 더욱 효과적으로 노동운동 사상을 이해했습니다.
특히 <인터내셔널가>는 국가의 억압, 세금에 대하 불만, 노동자 빈민의 권리구제에 대한 내용을 담으면서 후에 다양한 언어로 번역 또는 번안되어 불려졌는데, 이러한 노동가요들이 크게 인기를 끌게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들이 특수한 내용을 보편적인 내용과 잘 결합하여 사람들의 감성적인 동의를 유도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인터내셔널가>의 경우에는 파리코뮨시대의 정신과 더불어 국가와 국민에 대한 중시, 머지않아 자본주의의 타도가 가능할 것이라는 내용까지 겸비되어 사람들에게 많은 동의를 얻었습니다.
<인터내셔널가>
http://www.youtube.com/v/kEZhCB8KdWw
(제1절)
Il n’est pas de sauveurs suprêmes 최상위의 구세주는 없다
Ni Dieu, ni César, ni tribun 신도 황제도 호민관도 (소용없다)
Producteurs, sauvons-nous nous-mêmes 생산자여, 자신들을 스스로 구하자!
Décrétons le salut commun 공동의 구제를 법령으로 선포하라
Pour que le voleur rende gorge 도둑들이 없어지게끔
Pour tirer l’esprit du cachot (인류의) 정신이 감옥으로부터 나오게끔
Soufflons nous-mêmes notre forge 스스로 풀무질을 하여
Battons le fer quand il est chaud 철이 뜨거울 때에 망치질하자.
(제3절)
L’État comprime et la loi triche 국가는 탄압하고 법은 (우리를) 속이고
L’impôt saigne le malheureux 세금은 불행한 이들의 피를 빨고
Nul devoir ne s’impose au riche 부자들에게 부과되는 징세는 없다
Le droit du pauvre est un mot creux 빈민들에게 ‘권리’는 빈말일 뿐이다.
또한 노동가요들은 노동자의 기원-수난-전투-승리와 낙원이라는 역사의 전개과정을 담아냄으로써 마치 성경의 압축판과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즉, 노동자의 정체성과 수난의 과정, 불만의 확인, 최후의 결전과 승리의 과정을 감성적으로 매우 강하게 호소하면서 세계적 전파성을 과시하게 된 것입니다.
독일 사민당의 당사로 사용했던 노래 <서광을 향하여>는 노선을 달리했던 독일의 사민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서로 패싸움을 하면서도 같이 불렀을 만큼 인기 있는 노래였습니다. 심지어는 독일의 분단 후에도 양진영이 이 노래를 공유했음은 물론, 소련, 일본, 북한 등으로 번역되어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이 노래는 오스트리아 지역의 상징적인 노래로, 선택 당한 노동자 대중, 우리가 겪은 끔찍한 아동시절의 경험, 승리에 대한 확신, 그리고 과거의 민족 저항까지 환기시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용이나 전개과정이 성경의 내용과 상당히 유사하여 찬송가들이 초기의 노동가요에 상당부분 영향을 끼쳤음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최근의 집회에서도 불려지는 <서광을 향하여>는 1922년 러시아어로 번역되면서 제목을 <젊은 근위대>로 바꾸었고 공산청년당의 비공식적 당가로 사용되었습니다. 멜로디는 같지만 가사는 직역을 하면서 약간은 더 전투적인 내용이 더해졌고, 당시 러시아 민중의 대부분이 농민이었기 때문에 무산계급의 범위도 노동자에서 농민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 노래의 인기에 힘입어 소련에서는 ‘젊은 친위대’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는데, 2차대전중 독일군에 맞서 싸운 소련 지하조직의 이름도 ‘젊은 친위대’였고 이들의 이야기는 소설로 쓰여지기도 했습니다.
<서광을 향하여>는 일본어와 조선어로도 번역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상당 부분 내용이 생략되거나 제목이 바뀌는 등 각 지역의 정치 상황과 문화적 성향에 따라 변화해가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서광을 향하여(독일)>
http://www.youtube.com/v/F0ppRf85JjA
Dem Morgenrot entgegen 서광을 향하여
Ihr Kampfgenossen all! 투쟁의 동지들이여!
Bald siegt ihr allerwegen 곧 우리는 완전하게 승리하여
Bald weicht der Feinde Wall! 곧 적의 벽이 무너질 것이다!
Mit Macht heran und haltel Schritt! 힘차게 보조를 맞추라!
Arbeiterjugend? Will sie mit? 노동청년이여, 같이 오지 않을 것이냐?
Wir sind die junge Garde 우리는 무산계급의
Des Proletariats! 젊은 근위대다!
Wir haben selbst erfahren 우리는 스스로도 경험했다
der Arbeit Frontgewalt 노동이란 무엇인지
in düstren Kinderjahren 우리들의 끔찍한 아동시절에
und wurden früh schon alt. 일찍 그렇게 해서 늙게 됐다.
Sie hat an unserm Fuß geklirrt 우리들의 발에 무거워지는
die Kette, die nun schwerer wird 족쇄들이 소리를 낸다.
<서광을 향하여(러시아)>
http://www.youtube.com/v/zNDN3185HEo&list=PLCF3CFD23394EA56C&index=6&feature=plpp_video
<서광을 향하여(일본)>
http://www.youtube.com/v/uCdPfiwQKeE
위로부터의 동원일까, 아래로부터의 경험일까?
동원과 경험은 교묘하게 결부되어 있어서 정확히 구분하기가 사실상 어렵습니다. 민중들이 그 노래를 애창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율적인 동원이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민중가수나 시인들의 노래가 중앙에서 받아들여져 다시 각 지방으로 보급되는 경우도 있었고, 스탈린의 독재가 강해져 가는 상황에서는 새로운 집권자의 역사의식에 맞추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역사를 보전하면서도 윤색·가공하는 경우의 대표적인 사례가 <쇳덩어리 수병>의 경우입니다. 이 노래의 주인공인 쇳덩어리 수병은 러시아 혁명사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1919년 2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무산계급 출신으로 일찍부터 아나키스트가 된 쇳덩어리 수병은 군대에 징집된 후로는 군대와 국가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되었고 전쟁을 일으킨 고위층에 분노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제헌국회 해산사건을 통해 수류탄으로 부르주아 의원들을 해산시키면서 혁명의 아이콘이 되었고, 볼셰비키의 장교가 되어 교전 중 전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스탈린도 제헌국회를 해산시킨 쇳덩어리 수병이 아나키스트라는 사실을 말하기 어려웠고 볼셰비키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해 그 내용을 각색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다보니 그가 아나키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스트들과의 교전 중에 사망한 것으로 묘사되었고 이러한 내용은 영화로까지 제작되었습니다. 볼셰비키 정권은 쇳덩어리 수병의 전사를 형상화함으로써 그들의 정당성을 강조하고자 했고 여기에 군사주의적인 성격이 강해지면서 특이한 노랫말을 담게 됩니다.
<쇳덩어리 수병>(1936년 유행) - 가사는 ‘진짜’ 혁명영웅이었던 ‘쇳덩어리 수병’과는 무관
B степи под Херсоном - 케르손시 근방의 초원에서 풀이 높이 자란다
Высокие травы, В степи под Херсоном - курган. 그 초원 속에 한 언덕이 있다.
Лежит под куганом, 그 언덕 밑에
Заросшим бурьяном, 우거진 잡초 속에서
Матрос Железняк, партизан. 빨치산인 쇠덩어리 수병이 영면에 들었다.
Он шёл на Одессу, 그는 오데사시를 향해 진군했다가
А вышел к Херсону - 케르손시에 잘못 도착했다.
В засаду попался отряд. 그의 부대는 복병을 당했다.
Налево - застава, 왼쪽에는 적의 초소
Махновцы - направо, 오른쪽에 마크노 대장의 부대.
И десять осталось гранат. 그리고 수류탄 10개 밖에 남지 않았다.
중앙에서 각색한 노래가 있는가하면 <계곡 넘어 언덕 넘어>의 경우에는 민중들이 만든 노래 중 가장 유명한 것입니다. 이 노래는 내전이 끝났을 당시 빨치산 중의 한명이 자신들을 묘사하며 지은 노래로서, 기본적으로 공산당이나 소비에트 정권은 언급되지 않고 지역에서 자신들의 삶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주로 드러납니다. 공산당 중앙에서는 1929년부터 군악대에서 이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하였고, 점차 민중들의 기억이 붉은 군대의 레퍼토리에 편입되는 형태로 발전하였습니다.
<계곡 넘어 언덕 넘어(러시아)> (1922)
http://www.youtube.com/v/TrR3OseNUQk
계곡 넘어 언덕 넘어 사단은 진군했다
백위군의 요새인 연해주를 점령하려고
우리 기빨들은 마지막 부상들의 피로 물들었다.
흑룡강 부근 빨치산들의 기마부대들은 용감하게 진군했다.
이 시절의 명예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빨치산 부대들은 도시들을 속속 점령했다.
<계곡 넘어 언덕 넘어(일본)>
http://www.youtube.com/v/Mk6yk6-DoSk&feature=relmfu
1950,60,70년대에는 스탈린 시대를 넘어 혁명이 어느 정도 완료되었음에도 혁명가요들은 계속해서 제작되었는데, 이는 집권관료와 민중의 이해가 맞아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집권관료들은 통치 명분을 혁명으로 삼아 계속해서 혁명에 대한 기억을 강화하고자 했고, 민중은 국가기관들이 점차 사유화되고 관료들이 사적 재산을 늘려나가자 혁명의 순수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혁명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즉, 관료들은 혁명가요를 이용했고 민중들은 혁명가요를 통해 위로를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고전소설들이 영화화되며 사회주의권의 독특한 고전을 이루었는데, 영화 ≪강철이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의 주제곡인 <시간이라는 동무여>는 자신을 희생하면서 혁명을 수행해야하는 복잡한 감정, 혁명에 대한 충성과 집에 대한 그리움 등을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 노래를 통해 당시 공산당이 원했던 정신적 가치, 즉 보편적 인도주의에서부터 희생정신까지 구성원의 모범적인 형태를 노래를 매개로 만들어내고자 했고 또한 이를 인간적인 동감을 가능케 하는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붉은 군대들이 철도를 만들다가 쉬면서 풍금을 연주하며 부르는 노래인 <시간이라는 동무여>는 동지애를 강조함으로써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혁명의 세계에 빠져들게끔 하는 비장한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시간이라는 동무여>
http://www.youtube.com/v/6jVQ_eMdxh8
맺는 말 : 혁명가요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무상계급 운동에는 음악, 영화, 신문 등 노동자들만의 문화적 부문이 존재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노동자의 노래였습니다. 이들은 합창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계급의식과 귀속의식을 함양하였고, 이를 성경과 유사한 기원-고난-투쟁-승리라는 도식으로 표현해냈던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과정에서 국가적 선전선동의 역할이 컸지만 이것만으로는 혁명가요를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실제로 혁명가요의 상당수가 전투의 참가자들 또는 민중들의 자발적인 역사의식이 당에 의해 포섭되고 다시 민중으로 퍼져나가는 형태를 띠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혁명가요는 계급이라는 초민족·초국가적 개념을 사용하여 국제성과 전파성이 뛰어난 특징을 보였고, 번역보다는 번안의 형태로 현지의 상황에 맞게 가사가 바뀌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강한 지속성과 생명력은 노동운동이 약화된 현대에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혁명가요가 단순히 위로부터의 선전 도구에 불과했다면 공산당 정권의 붕괴와 함께 사라졌어야 했지만 이들은 여전히 불려지고 있습니다. 유럽의 국가 공영방송매체에서는 여전히 혁명가요를 방영하고 있고 이러한 방법은 실제로 시청률 상승효과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유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기억하고 시위에서 부르곤 합니다. 현실사회주의 국가가 붕괴하고 사회가 보수화되면서도 혁명가요들은 여전히 민중들의 감성세계를 표현하고 반영하는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20세기 후반부터 분명히 혁명가요의 역할과 비중은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최근 신자유주의의 모순으로 계급투쟁이 재점화되면서 다시 한 번 어느 정도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자원활동가 김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