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정보
강의소개 |
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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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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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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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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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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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질서의 재편으로 본 3. 1운동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의 과정과 결과에 의해 동아시아 질서가 재편되는 가운데 일어난 역사적 사건입니다. 3.1운동처럼 한국사적 맥락에서만 알고 있던 대표적인 사건들이 갖는 동아시아적, 세계사적 의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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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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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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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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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 문화, 민족말살 : 식민 통치 변신의 이해
일제의 식민 통치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그리고 민족말살통치로 변화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통치의 변화를 초래한 원인은 무엇이고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를 일본과 세계사적 정치 경제적 흐름과 연결 지어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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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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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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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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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있는 그대로 보기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징적 위상과 달리 민족운동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갖는 위상과 활동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 있습니다. 교과서 서술 내용을 중심으로 차분히 그 실상에 대해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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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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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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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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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① 3.1 운동 그 현장으로(토요일 / 15시~18시)
수운회관(천도교 본부, 3.1운동 관련 장소) - 태화관 자리(3.1운동) - 파고다공원(3.1운동) - 종로2가 YMCA(대표적 일제시기 집회 장소) → 서대문 형무소 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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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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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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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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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운동의 공간 탐사 : 서울, 평양 찍고 만주, 미주까지
교과서에 등장하는 민족운동의 공간은 중앙으로서의 서울과 광주, 평양, 진주 등의 지방, 그리고 만주, 연해주, 미주, 일본 등의 국외 지역들이다. 이들 공간에 따른 민족 운동의 양상의 차이를 살피면서 이런 질문의 답을 찾아본다. “독립군들은 어떻게 중국 땅인 만주에서 무장을 하고 일본군과 싸울 수 있었을까?, 남의 땅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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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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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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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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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운동 사상 지형의 힘겨루기 : 좌우 중도
민족 운동은 독립과 해방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지만, 독립 이후 신국가 건설의 방향은 사상 지형에 따라 달랐습니다. 민족 운동의 방식도 좌와 우, 중도 세력에 따라 차이를 보였습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민족 운동 조직과 운동가를 중심으로 사상 지형의 차이와 공통 분모를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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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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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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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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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했던 해방공간 누가 어디로
해방직후에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세력들과 국내에서 건국을 준비하던 세력들이 각기 자신들의 정치노선에 맞는 새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해 경쟁과 협력을 반복했습니다. 거기에 남과 북을 점령한 미군과 소련군은 각기 자신의 국가에 유리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공작을 진행했습니다. 복잡했던 해방공간을 정치노선과 외세의 영향력, 그리고 자주적 정부수립운동을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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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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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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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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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현재의 남북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전쟁을 경험하면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한 전쟁에 대한 이해와 책임문제는 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전쟁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또 기억과 정치의 간극을 어떻게 뛰어 넘을 수 있을까? 이 같은 질문의 해답을 찾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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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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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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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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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② 현대 정치의 뿌리를 찾아서(토요일 / 10시~15시)
계동열성자대회 열렸던 집 - 여운형 고가 - 송진우 집터- 김성수 고가 - 3·1운동 모의장소(중앙고등학교) - 건국준비위원회 터 조선인민공화국선포장소(헌법재판소) - 윤보선 고가, - 10·26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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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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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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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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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산업화는 어떻게 가능했나
서구적 근대화는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그 내용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해방 이후 근대화의 과정에서 그것은 불가분의 관계로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을 두고 정치세력은 아전인수격의 해석을 일삼는다. 과연 역사에는 어떻게 기록되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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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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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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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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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나라, 내가 만들 나라
역사를 공부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는 애국심이 충만한 국민을 양성하는 도구인가? 비판적 시민을 양성하는 매개인가? 동아시아 역사 갈등의 본질과 역사인식의 문제를 통해 대한민국 역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와 동아시아 공동의 역사인식을 모색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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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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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4
복잡했던 해방공간 누가, 어디로
해방공간의 쟁점들
1945년 8월 15일, 36년간에 걸친 일본 제국의 지배는 끝을 맺었다. 그리고 3년 간 이 땅에는 정부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미군정만이 존재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미국정부도 한국정부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때 이 땅에 제대로 된 정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이야기하기 쉽지 않다.
아무튼 우리는 그 3년을 해방공간이라 부른다. 역사에서도 해방 3년사라 하여 따로 다루고 있다. 고작 3년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참으로 많은 것들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또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민족국가 수립의 열망과 좌우익 간의 정치 투쟁이 뒤엉켰고, 시위와 폭력, 암살과 실종이 혼재했다. 한편, 미국과 소련에 의해 한반도는 남쪽과 북쪽으로 찢어졌고, 남북 인민의 뜻과 아무 상관없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분단의 첫걸음을 딛게 되었다.
그래서 해방공간의 역사를 아는 것은 독립과 민족의 시간이었던 근대를 넘어 극단의 이념대립과 폭력으로 상징되는 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교과 과정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따로 떼어 가르쳤던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에 서 9월 7일부터 진행 중인 <교과서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 강좌 중 다섯 번째 강의에서는 '해방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교재로 하는 이 강좌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서술 방향과 역사 인식에 대한 전문가들의 담론을 시민들과 나누고 있다.
다음의 내용은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이신철 교수의 첫 번째 강의 <복잡했던 해방공간, 누가? 어디로??>를 토대로 재구성 및 정리한 것이다.
광복은 도둑처럼 왔다
알다시피 모든 것은 1945년 8월 15일에 시작되었다. 같은 날이지만,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한국은 독립을 맞았고, 일본은 패전국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정말 우리는 그때 독립할 수 있었을까?
사실 그건 당시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은 패전국이었고 식민지 조선은 그 일부였다. 당시 한국인들은 일본식 이름을 갖고 일본어를 국어로 사용해야 했다. 더욱이 당시 일제는 전쟁 중이었고 그만큼 폭압적이었다. 독립운동은 중국 등지에서 어렵사리 이루어졌을 뿐, 한반도나 만주에서는 거의 불가능했다. 36년에 이르는 식민지 시기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천황의 신민'으로 나고 자란 아이가 이미 성인이 되었을 시점이다. 한국을 독립국으로 보는 인식은 국내외적으로 미약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당시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건 분명히 말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그 상황에서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을 점령한 두 열강, 즉 미국과 소련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았던 것도 당연하다. 우리나라는 결국 분단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숙명론이 그나마 일리가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해방이자 광복이자 독립이라 불리던 그 순간의 전부를 설명해 주는 건 아니다. 해방공간에는 더 많은 무언가가 존재했다. 그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광복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오늘날 광복절이 언제인지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하지만 정작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던 그 순간, 대일본제국이 패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물론, 15일에 일본 천황의 항복방송이 나오기는 했지만, 라디오 자체가 흔치 않았던 시대다. 일본인들이 패색이 짙어가는 전황을 친절하게 알려 줄 리도 없었다.
그러니 당대 지식인들도 별 수 없었다. 서정주, 이광수 같은 이들은 열렬히 귀축영미를 저주하고 천황폐하만세를 부르짖으며 젊은이들을 죽음의 전선으로 떠밀었다. 오직 여운형을 비롯한 소수만이 국제정세를 면밀히 살피며 해방과 건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광복이 도둑처럼 왔다'는 표현은 그래서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그만큼 갑작스럽게 우리나라는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걸로 '식민지'가 끝난 건 아니었다.
일제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여운형과 교섭을 통해 전권을 건준의 조선인민공화국에 넘기고 일본인들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약속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미국과도 항복을 위한 교섭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일본군은 패전 후에도 미군에게 무장해제 당하기 전까지 한반도의 치안을 담당할 수 있었다. 심지어 9월 8일 미군정이 들어올 때 환영인사를 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시민들에게 발포해 무고한 3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도 일본군이었다. 해방이라지만, 그 시작은 착잡하기 짝이 없었다.
해방 직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도 온건하지는 않았다. 미소 양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는 과정도 어딘가 어긋난 부분이 많다. 일단 한반도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들어왔다. 다만 양국 군대가 들어온 시기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소련은 8월에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진격했고 미국은 9월 8일에야 인천을 통해 들어왔다. 하지만 소련은 미국이 들어오기 전에 먼저 남쪽까지 접수하려 하지는 않았다. 길게는 한 달에 이르는 이 기간에 소련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부터 의견이 분분했다. 소련으로서는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38선 이남까지 내려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반도 분할 점령을 제안한 미국의 요청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그보다는 향후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었던 소련의 정치적 포석으로 해석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 물론, 진실은 알 수 없다.
국내 상황 역시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해방은 갑작스러웠고 권력을 갖고 있던 일본인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정치적 공백을 채운 것은 혼돈이었다. 수많은 정치 세력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이들은 대부분 자치 기구를 만들고자 했다. 중도 좌파 민족주의자이자 당시 국내에서 가장 명망 있는 인물이던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거쳐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박헌영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도 조선 공산당을 결성해 정치 활동을 펼쳤다.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그리고 자파의 정치적 우위를 확립하기 위해 그들은 필사적이었다. 분명 무정부상태였던 해방공간에서 헤게모니의 선점은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당시 국제정세는 그들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연합국은 한국인들의 뜻과 관계없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한반도 내의 어떠한 정치 세력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합의 역시 이미 이루어져 있었다.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이 거기까지 꿰뚫어 보는 것은 사실 무리였다. 어쨋거나 그들은 국제정세를 입체적으로 보고 대처하지는 못 했다. 그렇기에 오늘날 해방공간의 정치활동과 국제정세를 함께 바라보면 허망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패전국 일본은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과정에서도 미국과 소련에 각각 항복하는 등 정치적 공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일본은 해방공간의 치안권을 얻었음은 물론 분단의 운명마저도 한반도에 떠넘길 수 있었다.
점령군인가 해방군인가
일본은 물러갔고 한반도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제일 먼저 논란이 되는 부분은 그들이 어떤 이름을 달고 이 땅에 들어왔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7차 교육과정의 금성교과서에 소련을 '해방군'으로 서술한 부분이 격론을 불러온 이유도 그 이름의 무게 때문이다. 하지만 한번쯤 고민해 봐야 하는 일임도 분명하다. 과연 미군은, 그리고 소련군은 점령군이었는가? 아니면 해방군이었는가?
그 실마리는 양군이 어떤 식으로 한반도와 한국인을 대했는가를 통해 풀어갈 수 있다. 먼저 소련은 공식적으로 소련 '군정'이라할 만한 직할 통치기구를 두지 않았다. 한국인들로 이루어진 인민위원회를 인정했고, 소련군 휘하 특정 부서에서 민정사업을 담당하는 형태로 한국인에게 접근했다. 민족 감정을 자극하기 쉬운 직접 통치 대신 자문역할을 자처하는 것이 소련이 한반도 북부를 지배하는 방식이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소련은 스스로 해방군으로 왔음을 자임했고, 46년 2월부터는 선거를 시행해 한국인 대표를 선출하도록 했다.
물론 이런 통치방식이 순전히 소련정부의 선의는 아니었다. 소련 역시 한반도 내에 그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부가 수립되기를 바랐다. 한반도의 정치지형도가 소련의 뜻에 부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한지역에는 여운형, 박헌영 등 좌익으로 분류되는 이들이 세력을 갖고 있었지만 정작 소련군이 주둔한 북쪽은 조만식 등의 민족주의자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당시 서북지방은 보수적 민족주의자들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황해도는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가 들어온 곳이고 자본가, 지주들의 세력도 강했다.
소련입장에서도 이들을 무시하고 북한지역을 통치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소련은 한반도의 새로운 국가건설에 있어서 사회주의계열과 민족주의계열의 합작체제를 주장했고 모든 기구를 성립할 때도 양측의 인원이 반수가 되도록 조정했다. 다만 기본적으로 중재는 언제나 소련의 몫이었다. 당연히 사회주의 계열에 유리한 상황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상당수의 북쪽 지주 자본가들은 월남을 선택하게 된다.
반면, 미군은 맥아더 포고령을 통해 자신들이 '점령군'으로 들어오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또한 서울에 미군정청을 설립하고 사령관이 전권을 행사하는, 전형적인 직접 통치 형태로 남한을 접수했다. 미군의 통치는 상당히 고압적이었다. 우선 한반도 내에 자생적으로 수립되어가던 모든 정치조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고, 인민위원회는 물리적으로 해산시켰다. 그리고 영어가 가능하며 행정경험이 있는 이들-거의 일제의 관리 출신인-위주로 미군정을 보좌할 한국인 행정조직을 재구성했다. 이는 사실상 일제의 행정조직을 복원한 셈이다. 그리고 남한지역의 유일한 합법정부는 미군정임을 천명했다. 각지를 떠돌며 독립운동을 하던 임시정부요인들은 개인자격이라는 조건을 달고서야 해방된 조국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신탁통치의 진실 혹은 거짓
1차 세계 대전 이후 승전국이 패전국들의 식민지를 독립 역량을 키울 때 까지 대신 지배하는 위임통치론이 등장했다. 하지만 몇몇 위임통치령은 사실상 식민지였다. 이들 중 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존재하던 위임통치령이 국제연합 소속의 신탁통치령이 되었다. 그런데 한국 정치인 중에도 이 위임통치론을 주장했던 이가 있다. 바로 이승만이다.
그는 미국 의회에 "조선은 독립할 의지가 있으나 아직 능력이 부족하다. 지금 일본이 그것을 가로 막고 있으니 우리가 독립할 능력을 키울 때 까지 미국이 일본을 대신해서 우리를 위임통치 해 달라" 며 청원서를 낸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이 일 때문에 1925년에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 당했다. 그리고 20여년 후, 해방 공간에서 다시 신탁통치론이 등장한다. 바로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1면 기사에 쓰인 내용이다.
'외상회의에 논의된 조선독립문제- 소련은 신탁통치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독립주장'
36년 만에 맞게 된 해방,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진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정국이었다. 간신히 독립한 조국이 다시 강대국의 사실상 식민지가 될 위기에 처했다는 불안감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사람들은 분노했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이승만과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들은 미국을 지지하며 이 움직임에 편승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동아일보 기사는 오보였기 때문이다.
미국과 소련은 분명히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한반도의 정부 수립 방안을 논의했다. 그 내용은 한반도에 민주적인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것,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해 미, 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한다는 것, 임시 정부와 협의를 거쳐,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4개국이 한반도에 대해 최고 5년을 기한으로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때의 회의 결과는 12월 28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예정보다 하루 전에 미리 회의 결과를 기사로 내버렸다. 그것도 잘못된 형태로.
이는 명백한 왜곡 보도였다. 게다가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미국은 당초 20년 정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소련은 이에 반대했다. 결국, 그 합의점으로 나온 5년간의 신탁통치안이다.
당시 우익의 뜻을 대변하던 동아일보의 의도적 왜곡 보도라는 의심을 거두기 어려운 이 사건은 거국적인 민족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 저항은 좋은 결과로 끝나지 않았다. 특히 좌파들에게는 비극이었다. 소련의 발표를 통해 회의 결과를 정확히 인지한 좌파들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 지지운동을 전개했지만, 이미 반탁으로 기운 대중들은 이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측은 곧바로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조직하여 대대적인 반탁운동에 돌입했다. 게다가 이승만, 한민당, 동아일보로 대표되는 우익세력은 박헌영을 비롯한 좌익을 찬탁론자로, 나아가 매국노로 몰아갔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애국자가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이 시기에 우익의 상당수를 점하던 친일경력자들은 애국자라는 옷으로 갈아입을 기회를 잡았다.
한편 김구의 국민 총동원 위원회는 반탁을 위한 총파업을 지시했고 당시 서울시 공무원의 70%이상이 파업에 동참했다. 이에 놀란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김구를 불러 협박했고 결국 총파업은 끝났지만, 김구는 이 짧은 쿠데타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영향력과 법통성을 선포하고자 한 셈이다.
모스크바 3상회의상의 혼란에 대해서는 두 국가의 신탁통치 개념이 가지는 차이 때문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말하자면, 영어와 러시아어의 어감 차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신탁'을 의미하는 영어 trustship은 권력을 맡기는 의미였지만 러시아어인 oneka의 경우는 일종의 후견이라는 뜻이 더 강했다. 당시 남쪽에서 회의 결과를 '신탁통치'로, 북쪽에서는 '후견제'로 보도한 것도 이런 문화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정부의 정통성, 그리고 정당성
김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노력에도, 결과적으로 한반도에는 각각 남한과 북조선이라고 불러야 할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이들 두 정부는 상대방이 아닌 바로 자신이 정통성과 정당성을 가진 정부라고 주장해 오고 있다. 도대체 정통성은 무엇이며 정당성은 또 무엇일까? 뉴라이트 측의 주장처럼 경제력으로 이겼으니 정통성은 우리가 가져온 것일까?
정통성의 근거는 기존 정치 공동체의 적통 계승여부에 달려있다. 때문에 왕조국가에서는 왕가의 혈통이 흔히 정통성으로 기능한다. 이와 달리 정당성은 민족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지지받고 인정받은 권력에게 부여될 수 있는 부가가치를 말한다. 그렇다면 남북한이 가진 정통성과 정당성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임시정부의 적통을 계승'한다는 제헌 헌법과 유엔에서 인정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말을 근거로 즐겨 내세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두 근거는 모두 설득력이 약하다.
우선 임시정부의 정통성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자. 이승만을 비롯한 임정인사들이 당시 건국정부에 참여 했으니 이는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한반도의 해방공간 정치 지형도에는 적지 않은 세력이 난립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익인 한민당에서 극좌파 조선 공산당에 이르는 다종다양한 정당과 정치세력이 해방공간에는 존재했다. 문제는 이들 모두가 임시정부와 연대하는 세력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임시정부가 해방된 대한민국의 정치권을 대표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물론 임시정부의 정치적 위상과 가치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다만, 대표성과 규모라는 측면에서 당시 임정이 하나의 정치세력 이상이 아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유엔이 인정한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부분도 심각한 오류가 있다. 아니, 사실상 날조에 가깝다. 그 근거의 원문인, 제3차 유엔 총회의 정식 정부 승인 문건에는 '선거가 가능하였던 38도선 이남에서 정통성을 가지는 유일정부임을 인정'한다고 명시되어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제헌 헌법과는 정면으로 부딪힌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인정한 적 없는 한반도 이북 지역의 통치권을 우리만 되뇌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우리의 정통성이 유엔을 비롯한 승인에서 나온다는 발상이 과연 건전한지도 의문이다. 그 생각 자체가 이미 비자주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정통성을 타국의 인정에서 찾을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북한의 경우를 보자. 일단 북한은 무엇보다도 최고지도자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을 십분 활용할 수 있었다. 또한, 건국 초기에 친일경력자 숙청을 완료했다. 북한은 정통성을 주장하기에 남한보다 조건이 좋았던 셈이다. 물론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 경력은 거짓말이 아니다. 하지만 유일한 최고지도자의 대표성을 담보해 줄 수 있을 만큼 절대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숙청당한 이들 중에는 친일파 외에도 반김일성 세력이 적지 않았다. 민족적 과제를 정치적으로 활용했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북한의 정통성도 생각만큼 공고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북한은 정치적 정당성을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이루어졌던 토지개혁과 남북한 총 선거에서 찾았다. 인민에게 지지받고 인민의 손으로 뽑은 정부임을 내세우기 위해서였다. 다만 토지분배는 차치하고서라도 선거에는 문제가 있었다. 실제로 북한은 그들이 주장하는 총선거를 통해 남북한 지역 대의원(최고 인민회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그렇게 1000명이 해주에 모여 남측 대표 210명, 북측 대표 360명을 선출하고 김일성을 최고주석으로 삼아 내각을 구성했다.
하지만 당시 북한에서는 이승만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남한 내에서 남로당은 불법단체였다. 정상적인 선거는 애초에 가능할 수 없었다. 그러니 북한에서 말하는 남북 총선거란 사실 북에서만 이루어진 반쪽짜리 선거였다. 남한 지역에서는 지하에서 활동하던 남로당원 등에 의한 비밀선거가 이루어졌지만 대표성도 실효성도 없었다. 이렇듯 허점투성이였던 선거는 결국 북한 정부의 정당성에도 한계로 작용했다. 결국 비판의 여지는 양쪽 모두에게 충분히 있었던 셈이다.
남북한 양국 정부의 정통성-정당성의 근거와 그 한계를 통해 우리는 해방공간에서 독립 정부가 반드시 가져야 했던 적통의 이상적 형태를 어렴풋이나마 그려볼 수 있다. 한반도 인민의 열망을 대표할 수 있는 정부는 민족 독립운동의 정신과 그 정치적 대표성을 이어받아야 했다. 또한 전 국민의 합법적이고 폭넓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치 공동체임을 떳떳이 자임할 수 있어야 했다. 당시의 남북한 정부 모두 자신들이 바로 그런 정부임을 주장했었고, 이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둘 중 이런 이상에 좀 더 합당한 정부는 어디였을까?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는 분명 아닐 것이다.
독립정부 수립을 위하여
앞서 말했듯이 해방공간은 수많은 정치세력이 난립하는 형국이었다. 크게 보아 좌우익 세력은 비등했지만, 그 안에는 조금씩 노선이 다른 무수히 많은 조직들이 존재했다. 그들의 이해관계와 방향성에서 같은 구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지만 1차적 목표만은 공유하고 있었다. 한반도의 독립이었다. 이는 당대 민중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탁운동 과정에서 당시까지 열세였던 우익세력이 정국 장악의 결정적 계기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도 당시 민중에게 널리 퍼져있던 독립의 열망을 공략했기 때문이다.
물론 각 세력 간 노선은 분명히 달랐다. 특히, 좌우익간의 대립은 격렬했다. 여운형, 송진우, 장덕수 등 좌.우.중도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중요인사가 암살로 목숨을 잃었다. 미소 공동 위원회 중단 이후 좌우 정치세력이 각자 독자 노선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이승만은 정읍발언과 함께 남한 단독선거를 통한 독립정부 구성 쪽으로 방향을 잡고, 친일경력자가 대거 포함된 반탁 운동 세력은 이승만 쪽으로 합류했다. 결과적으로 반탁운동은 남한단독정부 수립운동으로 이어지게 된 셈이다.
김구, 김규식을 필두로 하는 중도파는 남북 분단을 막고 통합정부 수립으로 가는 방향을 꾸준히 모색했다. 김구가 이미 단독정부를 수립한 북측에 협상을 제의하고 북한행을 택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이 때 이루어졌던 남북 협상에서는 김일성, 김두봉, 김구, 김규식이 참석했고 외국군대 철수와 통일 정부 수립을 논의했지만 실질적 성과는 없었다. 김일성측도 이미 단독정부 수립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구의 행보는 결코 가볍게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김구가 서울로 돌아온 날은 5월 6일이다. 남한의 단독선거일은 5월 10일이었다. 그리고 여운형이 죽고 없는 남한에서 김구는 이승만을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일생의 영광이 될 대통령 선거 출마를 사실상 포기하면서, 거의 승산 없는 회담을 위해 북으로 향했다. 그의 이런 의지는 오늘날 우리가 김구를 그저 무모한 민족주의자라는 식으로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분명한 이유이다.
현재 뉴라이트 역사학파에서는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반면, 김구는 정치적으로 실패한 인물이자 테러리스트로 평가한다. 어찌되었건 남한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일개 야인으로 암살당한 김구의 명암이 엇갈리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적 인물의 행보를 정치적 결과론으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신의 정치적 영달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던 이승만과 정치생명을 포기해 가며 좌우 합심의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김구를 정치적 성패만으로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을까.
테러리스트라는 용어도 그렇다. 물론, 김구의 의혈 투쟁을 영어로 번역하면 테러리즘이다. 사실 정확히 의혈 투쟁을 표현할 단어를 영어에서는 찾기 어렵다. 하지만 폭력 투쟁에 의존해야만 할 만큼 억압에 직면했던 당시 상황과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의사들의 결의를 담기에 테러리스트라는 용어는 너무 얄팍하다.
또한 김구의 독립운동이 현대의 테러리즘와 같은 형태도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주로 일본 제국 정부 요인을 대상으로 한 의혈투쟁을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오늘날의 테러와 함께 취급하는 것은 다소 무리수가 아닐까.
역사를 바라보는 자세, 애국자의 자세
2011년인 지금, 남북 분단의 역사도 어느덧 60여 년을 넘기고 있다. 그 60년 동안 남한은 경제발전을 통해 현대국가의 면모를 확립했고, 북조선은 폐쇄적이고 배고픈 사실상의 왕조국가로 전락해가고 있다. 그리고 뉴라이트를 위시한 신자유주의 지향 역사학계 일부에서는 북한의 역사를 실패한 역사로 단정하고 그 존재도 부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회주의의 실패와 "자유 대한"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물론 오늘날의 북한은 이미 사회주의국가라고 보기 어렵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위기에 봉착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을 부정하는 것은 한반도 현대사 자체에서 사회주의의 영향력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의미한다. 이는 생각보다 위험할 수 있다. 동구권의 몰락으로 상징되는 현실사회주의의 실패를 감안하고서라도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될 수 있는 건 역설적으로 사회주의의 역할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최소한 초기 자본주의의 폭주와 비인간성에 제동을 걸고 꾸준히 이의를 제기하는 기능을 했다. 소위 수정자본주의가 그것이다. '자유민주주의국가' 대한민국의 제헌 헌법에도 사회민주주의 적인 구석이 적지 않다. 이는 임시정부에 남은 좌우합작적 성과의 흔적이다. 그 어떤 정치체제도 완벽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각각의 잠재력과 한계가 분명히 있다. 인간이 양쪽의 균형을 잡아야만 그 장점을 제대로 살릴 수 있다.
또한 지금 여기의 애국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애국의 의미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제국주의 시대의 애국은 자국의 조상을 찬양하고 민족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행위였다. 피식민지 민중들의 애국도 본질적으로 이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행동은 애국일 수 없다. 인간이 과거를 기록하고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앞서 살던 이들의 행적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에는 자랑만 있을 수 있는게 아니다. 부끄러움도, 잘못도, 실수도, 악행도 얼마든지 있다. 물론, 그 모두가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다. 러시아인들은 스탈린 시대에 이루어진 대학살을 숨기거나 피하지 않고 그대로 가르친다. 이유도 명쾌하다. 그런 악행들도 그들 자신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덮어야 할 내용을 다투는 오늘날의 우리가 곱씹어 봐야 할 부분이다.
레드컴플렉스는 현대사 전반에 걸쳐 뿌리 깊게 우리의 의식을 지배해 왔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 역사를 두고 덮네 마네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이런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일반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은 장기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편견이 낳을 수 있는 건 또 다른 편견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다 객관적으로 역사를 평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런 시각의 전환을 거쳐 우리 역사교과서가 그토록 혼란스러웠던 해방공간을 어떻게 기술했는지 꼼꼼히 읽어보고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해방공간을 인식할 것인가에 대해서 재차 물어야 할 의무도 있다.
해방공간은 분명 혼란스러웠다. 죽음과 배신과 음모가 소용돌이 쳤고 오늘날 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갈등과 가능성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리고 그 씨앗들 중 열매를 맺은 이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뿌리 뽑혀진 이들의 역사를 지우려 한다. 지금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논쟁도 해방공간에서 시작한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적어도 역사를 공부한 이라면 그렇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덮거나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후세에게 과거를 가감 없이 가르쳐 직접 성찰할 기회를 주는 것이 바로 역사교육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방공간을 둘러싼 쟁점들을 배우는 일은 중요하다. 그리고 역사를 넘어 오늘날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중요한 척도로서 여전히 가치를 지니는 일이다.
교과서를 통해 본 한국근현대사 4강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교과서를 통해 본 한국근현대사 4강 후기>를 함께 공유합니다. 글은 김도형 인턴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원문 출처 :http://bit.ly/tzzyD1
역사에서 공간의 의의
'국학'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 나라의 정체성을 이루는 요소를 연구하는 학문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오늘날의 '국학'은 보통 국문학과 국사학을 일컫는다. 하지만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국학은 '지리학'을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사람이 나고 자란 땅을 아는 일이 그 사람과 나라를 이해하는 데에 필수 불가결함을 그들은 모르지 않았다. 물론 오늘날의 우리도 공간에 발을 딛고 흐르는 시간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개인의 시간이 쌓이면 역사가 된다. 즉, 역사도 결국 각각의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역사에는 종종 공간이 결여되어 있다.
한번 질문을 던져 보자. 3.1 운동은 언제 일어났을까? 그리고 한국전쟁은 언제 시작했을까? 이 정도 질문은 누구나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사건이 진행된 공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승만, 김구,
여운형의 차이를 말하는 이는 많지만 그들이 활동한 시대의 미국과 중국, 그리고 한반도의 상황에 대해 정확히 논할 수 있는 이는
드물다. 인간의 행동은 대개 공간과 조응한다. 동학농민운동에서도 남접과 북접의 활동은 전혀 달랐다. 서울과 평양의 독립운동
스타일도 차이가 있었다. 같은 시대에도 공간의 개성은 분명히 있었고 그 차이는 사람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역사의
흐름을 움직일 수 있는 비범한 인물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히틀러와 함께 근대 최악의 학살자였던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경우를 보자. 역사에서는 그가 자행한 대량 살인의 원인을 잔혹한 성격으로 본다. 그리고 생부의 폭력으로 얼룩진 유년기와 개인적 결핍을 그 이유로 든다. 하지만 스탈린이라는 '인간'의 성격을 만들고 발현시킨, 그를 둘러싼 공간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김정인 교수(춘천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는 이런 식의 단순한 접근이 얼마나 무책임할 수 있는가를 지적한다. 한 사람이 나고 자란 '공간'에 대한 충분한 고찰 없이 그를 역사적 인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학생들을 위한 역사 교육에서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아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9월 7일부터 진행 중인 <교과서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 강좌 중 네 번째 강의는 바로 '역사적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교재로 하는 이 강좌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서술 방향과 역사 인식에 대한 전문가들의 담론을 시민들과 나누고 있다. 다음의 내용은 김정인 교수의 강의 <민족운동의 공간 탐사: 서울 평양 찍고 만주 미주까지>를 토대로 재구성 및 정리한 것이다.
교과서 안의 역사공간
현행 역사 교과서에도 한반도 외에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존재했다는 언급이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충실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게다가 그 각각의 공간을 동등한 비중으로 다루지도 않는다. 우선 식민 모국이었던 일본을 보자. 일본에서의 독립운동, 언뜻 듣기에도 쉬웠을 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2.8 독립 선언을 기억한다. 해방 후 일본에 세워진 조선인학교도, 한인 거류민단과 조총련의 존재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정도 규모의 조선인 조직이 존재하려면 일본 내에서 민족운동의 맥이 면면히 이어졌어야 한다는 사실은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교과서에서의 일본 내 민족운동은 2.8 독립선언과 함께 증발해 버린다. 물론 남한 정부의 반공 강박증이 낳은 결과다. 일본 내 민족운동세력은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운동의 영향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민 모국 본토에서의, 아마도 가장 강한 탄압에 직면해야 했을 독립운동의 기록을 그런 이유로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김교수는 강조한다.
이런 식의 무시나 왜곡은 일본 외의 공간에서도 빈번히 이루어진다. 러시아가 대표적이다. 두 번의 혁명을 거쳐 소비에트 연방 성립으로 이어지는 러시아 혁명은 공간의 이름 뿐 아니라 성격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 버린다. 사실 러시아 혁명은 20세기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에서 가장 크고 가장 낙후된 나라의 최하층 노동자, 농민이 들고 일어나 짜르를 죽이고 자신들의 정부를 만든 것이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레닌이 이끄는 이 신생 정치집단은 기존체제를 유지하던 각국 지배층에게 공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소련은 계급해방은 물론 제국주의적 세계질서로부터 피압박 민족의 해방 역시 주창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레닌은 민족자결주의를 말하고 식민지독립을 통해 이를 실행했다. 김교수는 그 충격과 공포를 50년대 미국 중산층들이 원자폭탄에 품었던 두려움에 비견한다. 아마 실제로도 그러했을 것이다. 세계질서가 뒤바뀌는 일도 당시에는 가능해 보였다. 물론 그 공포는 식민지 피지배층에게는 희망이기도 했다. 일제하의 조선민중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교과서의 러시아-소련 관련 서술은 이런 분위기를 충분히 담아내고 있지 못하다. 이유도 일본의 경우와 같다.
구체적으로는 자유시 참변 같은 부정적 사건만을 강조하고, 레닌의 지원금으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한 사실 등은 제대로 언급하지
않는다. 역사적 시각에서 이는 매우 곤란하다. 반공이라는 색안경을 통해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제정러시아나 냉전시대와 달리, 당시의 소련은 전혀 우리의 가상적국이 아니었다.
더욱이 레닌은 3.1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호감을 표한 바 있다. 말하자면, 당시 소련은 국제적 연대세력으로서 광범위한 계층에게 기대감을 줄 수 있었다. 자치론자인 최린마저 소련에서 개최한 극동인민대표회의를 찾았고, 임정개혁을 부르짖던 창조파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도로 블라디보스톡을 내정했다. 일본을 제외하면, 당시 민족운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는 분명 소련이었다.
그러니 박헌영 같은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은 당연히 소련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이들의 행적은 오늘날 남북한 양쪽에서 모두
무시된다. 남쪽은 철저한 반공주의로, 북한은 김일성 항일무장투쟁 중심으로 역사교육의 방향을 잡은 까닭이다. 역시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석했던, 레닌이 인정한 조선의 대표적 사회주의자 이동휘도 교과서에서는 거의 외면당한다. 교과서의 러시아 서술은
그 어느 지역보다도 반공주의에 의해 큰 타격을 받은 셈이다.
이렇듯 일본과 러시아가 교과서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하는 것에 비하면 중국 지역에 대한 서술은 양적으로 매우 풍부하다. 중국
관내와 만주의 운동을 구분해서 언급할 정도다. 이는 물론 양 지역에서 독립운동 양상이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질적으로는
이들 공간에 대한 서술도 충분하다고 하기 어렵다.
중국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은 만주와 관내를 막론하고 매우 복잡하다. 우선 중국 관내에서의 독립운동은 국민당-공산당 간의 역학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중국관내의 조선인 민족운동 세력은 좌우 모두 국민당 정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한편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 혁명이 필요하다고 인식했고, 그에 따라 팔로군과 연합해 항일 투쟁을 벌였다.
이런 이유로 중국 공산당이 조직한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지휘관 중에는 한인들이 많았다. 무정을 비롯한 팔로군 출신의
사회주의자들은 북한 정권 수립 후 인민군에 편입되기도 한다. 이런 정치적 면면을 파악하려면 당대의 중국사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교과서는 군벌들의 할거와 국공합작, 국공내전 같은 복잡한 정치상황을 충분히 설명해 주지 않는다.
만주 서술 문제도 간단하지 않다. 만주는 중국보다 일본과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많고, 우리의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라는 인식도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일본의 괴뢰국가 만주국이 존재했고, 주변 민족들이 섞여 사는 지역이었기에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히 중국 영토인 만주에서 그토록 자유로운 민족운동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나 문제의식은 필요하다. 물론, 교과서에는 그런 건 없다. 실제로는 만주국 성립 이후 독립운동은 불가능했다. 만주군관학교출신 장교들인 박정희, 백선엽 등이 독립군 사냥을 시작한 것도 이 때 부터이지만 이에 대한 언급도 없다. 말하자면, 민족운동 공간으로서 만주에 대한 서술도 깊이 면에서는 매우 미흡하다.
교과서의 부실한 서술과는 달리 국내외를 막론하고 각각의 민족운동은 그 무대가 되는 공간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함흥지역의 높은 교육열을 배경으로 일어났다. 광주의 학생운동과 격렬한 소작쟁의는 빈부갈등과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강했던 전라도의 지역적 특성이 배경이었다. 안동 지역은 조선조 이래 유림의 전통 때문인지 민족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독립운동가를
유독 많이 배출했다.
서울과 평양은 당시에도 최고의 대도시였고, 따라서 모든 분야의 민족 운동이 존재했다. 중국과 만주에서의 독립운동도 한결
같지는 않았다. 상하이는 임시정부의 터전이었지만 30년대 상하이 사변으로 일본군에게 점령된 이후 독립운동이 어려워진다. 한편
베이징은 북경 군사통일촉성회,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등이 자리해, 반 임정 세력의 집결지가 된다. 일본과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2.8 독립선언이후에도, 이승만이 탄핵된 후에도 독립운동의 맥은 끊어지지 않았다.
역전된 남북-역사적 공간, 정치적 공간
한편, 한반도 안에서 민족운동의 공간이라는 개념은 조금 더 복합적으로 봐야 할 필요가 있다. 같은 공간이라도 시대에 따라
전혀 다른 성격과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병운동 지역과 동학농민운동 지역은 겹치지 않았다. 두 운동이 계급적-정치적으로
지향하던 방향성의 차이가 공간에 반영된 결과다. 그런가 하면 3.1운동이 확산되는 지역은 이전의 동학농민운동, 의병운동과 또
달랐다. 기존의 두 운동이 발원 지역을 시작으로 퍼져나갔다면 3.1운동은 서울과 평양으로 대표되는 근대 도시 중심의 시민 대중운동
형태로 전개되었다.
오늘날의 분단현실에서 역사적 공간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일제시대의 남북공간은 정치적으로 지금과 정 반대였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오늘날 남북한 지역의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먼저 평양 중심의 서북지방은 전반적으로 빈부-신분의 격차가 적었다. 특히 함남지역은 반상의 구별도 없다시피 했고 그 중 북청은 '공산국'이라 불렸다고 한다. 지주 소작인간 갈등도 드물고 자산가, 중소지주, 자작농의 비율도 높았다. 평북지역도 자작농 비율이 반을 넘었다.
토지가 척박해 수확량은 적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지조를 대신 부담해 주는 등 지주의 마음 씀씀이가 박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주를 큰집이라고 부를 만큼 관계가 좋았다. 이는 천도교와 기독교 세력이 매우 강하고 상대적으로 유교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지역색과도 무관하지 않다. 평안도에 대해서는 자유평등의식은 높지만 3.1운동 이후 관권, 금권과 타협해 생활문제에 치중하는
경향이 짙어졌다는 평도 있다. 다만 지역주의는 강고했다. 한마디로 보수적이고 자유주의 내지는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그렇다고 이 지역이 중앙정부로부터 소외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조선총독부를 평양으로 옮기자는 주장도 있었을 정도로 평양은 당시에도
중요한 도시였다. 어쨋거나 흔히 생각하는 '북한지역'의 이미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이다.
반면 서울 중심의 기호-호남지방은 여러 의미로 계급갈등이 첨예한 곳이었다. 이쪽은 그나마 소설 등을 통해 익숙한 모습이지만, 서북지역과 비교해 보면 또 느낌이 미묘하다. 충남 지역은 양반의 근거지로 계급사상과 빈부차별이 모두 강했고, 경기도는 아예 반촌과 민촌이 따로 살았다. 전라도는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도 풍부했지만 빈부차가 크고 지주의 횡포가 심했다. 1910년 이후 부터는 동양척식회사와 일본인 자본가의 수탈이 더해졌다. 그 결과 많은 자작농들이 소작을 거쳐 파산과 유랑의 길로 떨어졌다.
그러니 이 지역의 소작쟁의는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전쟁, 사회주의운동이 활발했던 것도 당연하다. 심지어
일제 경찰당국은 호남지역을 '사상의 제일선'이라 불렀다. 말하자면, 사회적-경제적으로 사회주의사상이 자라기 딱 좋은 토양이었다.
김교수는 한국사회에서 호남지역을 소위 '빨갱이 땅'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시점을 이 때로 잡는다. 훗날 김대중이 박정희에 의해
용공분자로 쉽게 몰릴 수 있었던 것도 이시기에 형성된 전라도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다.
이런 지역성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이들 지역이 가진 정치성향과 정 반대인 두 개의 정부가 남북에 각각 수립 되었다는데 있었다. 물론, 이는 미-소의 이해관계와 알력의 결과물이었지만, 바로 그 어긋남 때문에 한국전쟁 후까지 남북한 모두 결코 적지 않은 피를 흘려야 했음을 김교수는 지적한다. 괴리를 공유하게 된 남북 정부로서는, 그 이상의 마찰과 갈등도 공유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 남북한의 사회문제는 거울에 비춘 듯 닮은 부분이 많다. 흔히 남한 초기 좌익의 준동이라는 식으로 설명되는 반체제 운동은 우익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북한에서 똑같이 벌어졌다.
소설 <태백산맥>을 통해 친숙한 빨치산 역시 북한에도 존재했다. 구월산 부대로 대표되는 이들 '반공 빨치산'은
전쟁 전후 북한 지도부의 골칫거리였다. 김일성 본인도 민족주의자들의 암살시도와 반대시위를 수차례 겪어야 했다. 정치적 기반과
정반대의 정부가 들어섰으니 유혈사태는 예견된 거나 다름없었다. 6.25전쟁이 그토록 모질고 잔인한 비극일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이런 배경이 숨어 있다. 이후 후퇴와 수복을 반복하면서 막대한 희생을 치룬 이유도 여기에 있다. 휴전 후에도 남북은 각각 반정부
세력을 무자비하게 토벌하고 나서야 정국 안정을 꾀할 수 있었다.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은 사상적. 정치적 남북 공간과
어긋나버린 정부수립에서 잉태된 셈이다.
타자의 공간과 역사인식
우리에게는 이런 사실들이 새롭다. 이유가 있다. 그동안 우리는 무대와 조연이 없는 1인 활극의 독립 운동을 상정하며 역사를
배우고 또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물론 역사적 상상력의 빈곤이다. 게다가 우리는 과거사 청산을 완수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남는 것은 여유와 배려가 아닌 피해의식과 콤플렉스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독립운동에만 천착한다. 그 무대인 공간과 그 안의
타자에 대한 고민은 없으며,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김교수는 이런 콤플렉스와 빈곤한 역사인식이 반영된 결과물로 남한의 화폐를
꼽는다.
식민지 경험이 있는 국가의 화폐에는 일반적으로 독립운동가의 초상이 들어간다. 일본의 경우는 후쿠자와 유키치 등 근대화의 주역들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 화폐에는 온통 조선시대 인물 뿐이다. 친일논란과 좌우논란에서 모두 자유로울 수 있는 근대 인물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해방 60여년 만인 이제야 간신히 10만원권에 김구 초상이 들어갈 예정이라니 늦어도 보통 늦은게 아니다. 정치적인 제약 외에도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한 공감대 형성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필요하다. 다른 이의 역사를 아는 것은 곧 역사공간의 이해를 뜻한다. 그리고 그
공간의 또 다른 '인물'인 우리를 더 면밀히 이해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는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대표적 인물, 김구와
이승만이 활동한 공간의 예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알다시피 이승만은 전투적인 반공주의자이자 북진 통일론자였다. 보도연맹사건
등을 통해 공산주의자로 추정되는 사람이라면 가리지 않고 죽였다. 그에게 공산주의자는 민족도 동포도 아니었다. 이런 이승만을
이해하려면 당시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알 필요가 있다. 1921년부터 12년간 미국 대통령과 의회는 공화당이 장악했었다.
즉, 미국의 20년대는 경제적 풍요와 보수주의의 시대였다는 뜻이다. 헐리우드 영화, 메이저 리그, 포드 자동차 등 우리가 아는 미국 대중문화의 원형이 형성된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공황과 함께 미국은 심각하고 장기적인 경기침체를 겪는다. 그리고 정치적-문화적으로 강력한 급진주의와 저항의 조류가 대두된다. 실제로 미국사회가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많은 중산층들은 혁명과 체제전복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다. 이들의 불안감은 러시아 혁명으로 실체를 갖게 된 부분도 있다. 훗날 매카시즘 광풍의 전조인 '적색공포' 현상이 이 때 처음 일어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승만은 바로 이 시기를 미국에서 보냈다. 완벽한 이상 국가의 전복을 꾀하는 공산주의자에게 그가 발작적인 증오를 갖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미국은 9.11 전까지 한 번도 본토를 공격 받은 일이 없다.
이승만은 공포의 실체를 직접 겪지 않았기 때문에 타협의 여지도 망설임도 없는 맹목성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부분에서 드러나는 공간 경험의 바탕이 김구와 이승만의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었다는 것이 김정인 교수의 주장이기도 하다.
김구가 활약했던 중국대륙, 그 중에서도 만주는 매우 독특한 땅이었다. 만주족은 중원을 정복한 후 만주 지역을 조상의 성지라 하여 민간인의 출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 조치는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쉽게 했고 청 왕조가 약해지면서 조선, 일본 등 주변 지역에서 밀려난 이들이 만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만주는 중국의 온전한 영토가 아니라는 주변국가의 인식도 이 때 생겼다. 만주국 성립 전까지 비교적 자유로운 독립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이런 이유다. 그리고 현재 중국이 만주 대신 동북지구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도 주변국의 '만주 인식' 때문이다.
어쨌거나, 당시의 만주는 동아시아 유랑민들에게는 새로운 삶의 안식처이자 민족간, 문화간 교류의 매개지역이었다. 반면 만주는
동아시아 세계의 모순이 중첩되는, 변동의 진원지이기도 했다. 또한 모순의 돌파구로서 민족국가 간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면 물리적
충돌의 각축장이었다. 실제로 국공내전 당시 격전지는 중국본토보다 만주지역에 더 많았다. 이런 지역에서 직접 전쟁과 합작을 보고
겪은 김구의 역사인식은 이승만과 또 달랐다. 김구는 기본적으로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끝까지 좌우합작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남북총선거 관철을 위해서는 스스로의 정치생명을 거의 포기해 가면서 김일성을 만나러 갔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를 김교수는 김구의 이런 경험에서 형성된 역사인식에서 찾는다. 반면 이승만의 정치행보와 언행에서 드러나는 역사인식은 당대 미국의 강력한 고립주의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 그렇기에 지도자의 역사인식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듣기에 따라서는 오싹한 이야기이다.
역사인식의 형성은 '공간'이자 '타자'인 인문환경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한다. 환경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사람이
기록한 역사에도 반영된다. 그리고 그 역사를 배운 이들은 역사인식을 공유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도 결국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어떤 역사인식을 가지고 어떤 공간에서 어떤 맥락으로 활동했는가는 역사를 이해하는 근간이다.
하지만 교과서의 틀은 언제나 경직성과 완고함을 특징으로 하기에, 그 틀에 '인간'을 오롯이 반영 하기란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이는 꼭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역사를 배우는 이들이 껍질을 깨고 역사적 공간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 역사교육 현장에서 상상력과 여유가 부활하는 일도 꿈만은 아닐 것이다.
교과서를 통해 본 한국근현대사 3강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교과서를 통해 본 한국근현대사 3강 후기>를 함께 공유합니다. 글은 김도형 인턴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원문 출처 : http://bit.ly/n0f3fm
고종 퇴위 12년 밖에 안됐는데...한국인은 빨랐다
최근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꾼다는 역사교육과정 고시안을 놓고 논란이 치열하다. 고작 두 글자, 그것도 남한체제를 설명할 수 있는 '자유'가 붙는데도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두 글자가 갖고 있는 역사인식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의 시민이 될 학생들의 역사인식은 일차적으로 학교 교과서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역사교과서에 어떤 내용이 실리는지는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올바른 역사관과 시대정신, 그리고 객관성을 바탕으로 역사교과서를 서술해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참여연대 아카데미 인문학교>의 일환으로 9월 7일부터 진행되고 있는 <교과서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 강좌에서는 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교재로 한국근현대사의 서술 방향과 역사 인식에 대한 전문가들의 강의가 이어지고 있다. 아래에서는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김정인 교수의 세 번째 강의<대한민국 임시 정부 있는 그대로 보기>를 정리해 본다. 이하의 내용은 김 교수의 강의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역사를 보는 시각, 임시정부를 보는 시각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 한국인이라면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다. 하지만 그 이름에 지워진 꼬리표는 한두 개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흔히 임정법통론이라 불리는, 일제 강점기 민족독립운동의 총본산이라는 찬사가 가장 익숙하다. 하지만 그저 허망한 외교활동에 목을 매던 우익인사들의 독립운동 단체였을 뿐이라는 비아냥도 있다. 그리고 그 간극은 결코 작지 않다. 하지만 임정이 한국 근대사에서 한 역할을 제대로 알고 온당하게 평가하려면 단편적인 시각으로는 곤란하다. 보다 다원적이고 객관적인 역사관이 요구되는 일이다.
김정인 교수는 일관되게 모든 제도권 역사교육에 의문과 의심을 가져 볼 것을 강조한다.
우선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신년축하 기념사진을 보자.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신년축하 기념사진 /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서 갈무리 |
김구, 이승만, 안창호 등 임정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보인다. 주목할 것은 그들의 복장, 모두 깔끔한 단발에 양장 차림이다. 한복의 상징 같은 김구마저도 어색한 양복을 입고 있다. 갑오개혁 이후라지만, 아직 당대의 대중들은 한복 차림이 많았다. 당시 사진들 중에도 이렇게 전원 양장 차림의 사진은 임정을 제외하면 흔치 않다. 그렇다면 왜? 이 사진은 임정 요인들이 당시로서는 무척 개화된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비밀리에 해외활동을 해야 했던 당시 임정 요인들의 상황을 반영한다. 그저 막연히 가르쳐주는 대로 보고 듣기만 하면 이런 부분은 알 수 없다. 그럼, 눈을 크게 뜨고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읽어 보자.
임시정부란 무엇인가, 임시정부를 둘러싼 논란은 무엇인가
임시정부는 하나가 아니었다. 3.1 운동이후 한성, 만주, 상하이 등 각지에서 임시정부 수립 움직임이 있었고 1919. 4. 11. 상하이를 시작으로 곳곳에서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9월에 이르러 상하이 통합임시정부로 출범하게 된다.
3.1 운동이후 만들어진 이들 임시정부들의 공통점은 민주공화제와 삼권분립을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 헌장도 마찬가지다. 수천 년간 왕이 지배해오던 역사 속을 살아온 한국인들이 이렇게 단기간에 왕이 없는 정치체제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냈다는 점은 독특 하다. 심지어 식민모국인 일본도 입헌군주제였던 시대의 일이다. 기억하고 곱씹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김 교수는 되풀이 한다.
임시정부를 둘러싼 대표적 논란은 외교론과 무장투쟁론의 대립이었다. 특히 1980년대 말, 민주화 이후 학계에 근현대사 연구 붐이 일어나면서 무장투쟁론의 가치는 높아진다. 상대적으로 제도권에서 가르치던 외교론의 입지는 약해졌다. 하지만, 과연 외교론은 무의미한가? 독립투쟁은 반드시 무장투쟁이어야 했는가?
김정인 교수는 한국이 일본에게 망하는 과정이 외교와 조약으로 진행되었음을 강조한다. 우리는 칼로 망하지 않았다. 조약과 도장으로 망했다. 그렇다면, 독립운동은 무력으로 해야 한다는 강박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김 교수는 북한에 대한 콤플렉스와 군부 독재 치하에서 무의식적으로 체화된 군사문화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문(文)을 상징하는 세종로에 무(武)를 상징하는 이순신 동상이 서있는 현재의 광화문 거리는 우리사회에 만연한 무력숭배의 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외교론에 대한 지나친 폄하, 나아가서 임정 자체에 대한 폄하는 김 교수가 경계하는 것이다. 외교를 '자국에 유리한 조건을 만드는 일'로 정의 한다면 임정의 외교 능력은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었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중국 국민당정부와 소련의 지원을 받아내고 그 와중에 맺은 <한국광복군 행동 준승 9개항> 등의 불공정한 협약을 폐기하는 등 오늘날 정부보다도 훨씬 적극적인 외교성과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하는 부분은 좌우합작 단체로서의 임정이다. 1922년 소련의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대회>에서 임정인사들은 레닌을 만난다. 이들 중 이동휘와 여운형은 사회주의 계열, 김규식은 민족주의 계열이었다. 당시 레닌은 3.1운동에 대한 감동을 피력하였고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고 있었다. 피식민지 국가의 지도자들이 이 소비에트의 수장을 만나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들은 소련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았다. 이 후에도 임정은 사회민주주의적 이념인 삼균주의를 수용하는 등 좌우를 초월한 독립운동의 중추이기 위한 노력을 반복하지만 제도권 교육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 교육과 교수 |
역사 교과서 속의 임시정부
김 교수에 따르면, 한국 역사 교과서의 독립운동 서술은 항상 일정한 구조를 유지한다. 3.1 운동으로 시작해 임정이 수립되고, 갑자기 청산리-봉오동 전투와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비롯한 의혈투쟁이 나온 후 뜬금없이 한국광복군이 언급되고 해방을 맞이하는, 매우 익숙한 구조다.
이처럼 단순화된 독립운동사 서술 속에서 임정의 위상은 각별하다. 다시 말해 임정법통론은 한국 역사교과서의 독립운동 서술의 근간이다. 해방직후부터 한국 교육에서는 임정의 수립은 곧 주권의 회복이요, 임정은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을 총지휘한 독립운동의 총본산으로 찬양해 왔다. 이는 국정교과서와 검인정 교과서 둘 다 마찬가지다.
유신시대에는 더 심해져 민족적 정통성과 한국적 민주주의의 발현지라는 이미지가 추가 되었다. 김 교수는 이를 상대적으로 취약한 남한 정부의 정통성을 임정법통론으로 보완하려 했을지 모른다는 의견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교과서 서술 안에서 정통성에 대한 집착으로 드러난다. 1990년판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이며 유일한 정통정부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1997년판 고등학교 국사에도 '정통정부'라는 표현이 있다. 국정교과서인 2002년판 중학교 국사에서는 '자유민주주의와 민주공화정의 국가체제를 지향했다'는 표현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자유민주주의와 정통정부에 대한 집착은 반공의 이념적 지렛대가 되어 왔음은 물론, 분단정부의 정통성을 방어하는 임정법통론의 근거로도 작용해 왔다.
하지만 이는 결국 북한을 의식한 발언임을 더 드러낼 뿐 아니라 분단의식을 극복하지 못하고 확대 재생산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때문에 초기 임정이 사회주의 세력과 연관성이 있다거나 좌우합작적 요소를 추구했다는 부분은 교과서에서 의도적으로든 아니든 무시된다. 역시 분단의식의 연장선이다. 특히 초기 교과서 편찬자들의 친일 이력은 이런 경향을 더욱 부채질 했는데, 대표적인 폐해가 역사교육전반에서 해방정국의 대표적인 민족지도자 몽양 여운형이 제외된 일이다. 현재 우리가 공적으로 학습하고 기억하는 민족독립운동의 지도자는 이승만, 안창호, 김구로 모두 우익 계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임정 자체의 침체기 역시 교과서에서 잘 다루지 않는 부분이다. 이 시기 임정은 좌우익간의 이념갈등, 무장투쟁파와 외교파의 노선갈등 외에도 서북파와 기호파의 지역갈등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교과서에서는 지역갈등은 아예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1980년대 말 민주화와 함께 임정법통론에 대한 문제제기와 공론화가 가능해지면서 문제는 심각해진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배제한 채로 이어져온 임정법통론 자체의 진실성에 한계가 온 것이다. 결국 임정법통론자들은 임정의 침체를 좌익분자의 파괴공작에 의한 것으로 호도하기 시작했다. 아니면 이념을 초월한 민족지도자 김구를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로 내세워 그가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임정을 구원한 것으로 얼버무리는 식으로 무마할 수밖에 없었다. 없는 진실을 포장하려다 보니 교과서 서술의 오류는 점점 심해졌다. 임정법통론을 고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무리수를 역사왜곡을 통해 가리다보니 점점 수렁으로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3.1운동 후 대부분의 무장단체들이 광복군 사령부 휘하로 통합되어 임정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는 주장이나, 태평양전쟁 당시 광복군이 중국 각지에서 일본군과 맹렬히 싸웠다는 주장, 그리고 임정의 외교적 노력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어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독립을 약속받았다는 주장 등은 모두 사실 무근이지만 교과서에 버젓이 실리고 있다.
이런 서술들은 모두 광복군의 활약은 명실상부한 대일 전쟁이었고 외교 노선이 한국독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명제를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오롯이 목적론적인 역사서술인 셈이다. 반면 정작 김원봉의 민족혁명당이 합류 하면서 좌우합작적 성격을 되찾은 일은 임정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임에도 교과서에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즉, 임정도 임정법통론도 오늘날 교과서에서는 철저히 남한 지배 권력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담론으로서만 기능하는 것이다.
임정법통론이 가지는 정치적 함의
그렇다면 임정법통론이 교과서를 지배할 만큼 역사해석의 주류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배경에도 어김없이 정치적 안배가 깔려 있다. 김 교수는 해방이후 임정법통 계승이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짚고 넘어가야함을 강조한다.
임정법통론을 공론화 시킨 인물은 역시 이승만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대통령의 '이미지'에 적합했다. 대한제국 황실과 핏줄이 닿아있는 전주 이씨였고, 서울출신이었으며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협회와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한 개화지식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이력도 있다. 당대의 보수든 진보든. 이승만은 그들 모두를 설복할 수 있는 복합적 명망성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에 추대되었음에도 상하이에서의 6개월을 제외하고는 주로 미국에 거주하면서 교포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걷어 활동비로 충당하였다. 김 교수는 이를 재미 동포들이 갖고 있는 일종의 부채의식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고 해석한다. 결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은 국제연맹에 위임통치 청원을 했다는 이유로 1925년 탄핵된다. 그리고 알다시피, 해방 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역시 4.19 혁명으로 인해 하야한다. 두 사람이 동일인물인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물론 이승만의 방식을 무조건 비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해방 후에 친일파로 이루어진 한민당과 손잡고 미국을 배경으로 1948년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하면서도 임정의 법통 계승과 정통성을 주장하는 부분에서는 미국을 무대로 활동했던 이승만 특유의 스타일을 볼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쟁의 현장인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김구가 일관되게 친일파와의 비타협 노선을 걷다가 암살당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임정법통론은 당시에도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훗날에도 문제가 된다. 전두환 정권 당시, 독립운동사를 임정 중심으로 서술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물론 정통성 확립이 목적이었다. 이에 역사학계에서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임정 중심의 독립운동 서술은 풍부했던 우리의 민족운동을 축소, 왜곡시킨다. 뿐만 아니라 정통성을 대한민국만이 계승하였다는 주장은 분단극복을 위한 노력이 결코 될 수 없다. 말하자면, 민족의 길도 통일의 길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물론 항일 무장투쟁을 정통성으로 내세우는 북한에도 똑같은 형태의 문제제기는 가능하다.
이런 정통론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보수든 진보든 스스로가 정통임을 내세우려 하는 순간 독선의 함정에 빠지고 상대방을 배제하게 된다. 결국, 역사를 목적성을 가지고 바라봐서는 제대로 보기 어려운 것이다. 임정에 대해 견지해야 하는 시각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정부에 의해 활용되는 임정법통론의 태생적 문제 역시 여기에 있다.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 교육과 교수 |
임시정부 있는 그대로 보기
이날 김 교수가 강의한 강좌의 제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있는 그대로 보기>이다. 정권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서건, 정권의 부도덕성을 공격하기 위해서건 목적성이 전제된 역사관은 시각을 굴절시킨다. 임정에 대한 시각 역시 과대평가나 평가절하가 아닌 직시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김 교수는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과연 임정의 실체는 무엇인가? 과연 임정은 민족독립운동의 총본산이었는가? 그렇다면 그 의의와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우선, 연해주 대한 국민의회와 상하이 임시정부의 통합은 좌우합작이라는 면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임정의 탄생 과정에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연합전선이 형성 되었고 독립운동의 본부라는 정체성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
또한 초기 임시정부는 외교를 통한 독립청원운동에 역량을 집중했다. 프랑스 조계인 상하이는 비교적 안전하고 국제적 활동이 가능한 지역이었다. 임정이 위치한 공간에서 이미 외교노선에 주력하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임정의 국제적 승인과 일본식민통치의 침략적 성격 폭로가 주된 활동이었는데, 이는 현대에 티베트 등 약소국들의 방식과 유사하다. 때문에 외교노선을 함부로 과소평가 하는 것은 위험하다. 당시로서는 약소국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했다고 보는 것이 더 온당하다.
하지만 내부 침체와 파벌갈등은 분명 심각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임정은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게 된다. 소련의 재정 지원으로 1923년 1월 3일 국내외 대표 130여명이 모일 수 있었지만 결국 창조파와 개조파간의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고 만다.
이 때 김구 등의 우익 보수 계열은 임정을 고수했지만, 창조파와 개조파 다수를 차지하던 사회주의 계열이 이탈하면서 임정은 좌우합작 성격과 대표성을 잃게 된다. 이 시기의 임정은 우익 주도의 일개 독립운동 단체 규모로 전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후에는 윤봉길, 이봉창 등의 의거로 잠시 주목받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국민당 정부와 함께 고난의 유랑길을 다니게 된다.
이 시기 임정의 정체성 중 하나는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결집체라는 것이었다. 당시 독립운동의 주류는 좌파 쪽이었다. 그리고 좌익계열에 밀린 임정은 삼균주의를 수용하는 등 좌우합작적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국공합작을 경험했던 김구의 영향력일 것이다. 이 역시 남북총선거를 위해 김일성과 대화를 시도할 결단을 내리게 되는 훗날의 김구와도 이어지는 부분이다. 역시 김 교수가 강조하는 공간과 경험이 형성하는 개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결과적으로 임정은 1942년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의 합류를 계기로 좌우를 포용하는 주요항일역량으로서의 성격을 회복하게 된다.
하지만 흔히 임정의 무력이라 일컬어지는 한국광복군은 최대일 때도 그 규모가 300명 정도에 머무르는 소수 부대였다. 게다가 대부분이 장교여서 실질적인 의미의 무장세력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실제로 광복군은 전투에는 거의 참여 하지 않고 첩보업무 등을 담당했다고 한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임정의 요청으로 폐기되는 1944년까지 굴욕적 협정을 지켜야 했다. 또한 중국정부는 임정을 실질적 정부로 대우하면서도 정식 정부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다른 열강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정의 최종 목표인 국제적 승인에는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임시정부의 의의는?
앞에 썼듯이 임정은 국제열강들에게 정식정부로 승인받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이 때 승인 받지 못한 것은 미군정 시기에도 임시정부가 승인 받지 못하는 결정적인 아킬레스건이 된다. 흔히 임정의 활동, 즉 외교노선 중심의 독립운동이 무의미했다는 평가는 이 부분에서 출발하지만, 이는 사실 역설적으로 임정의 외교 활동이 갖는 중요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성패를 잣대로 삼는다면 무장투쟁 역시 일제를 이기고 나라를 되찾지 못했으니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무장투쟁의 주역인 김좌진, 홍범도를 탓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요는 노력이 가치와 진정성이 있느냐 없느냐 인 것이다.
몇 년 전 동티모르 임시정부는 국제적 인정을 받는데 성공했고 동티모르 공화국 정부로 정식수립 될 수 있었다. 국제적 승인은 그래서 중요하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임정의 외교적 노력이 무가치한 활동이었다고 봐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임정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의의는 단순히 효과적인 평화적 독립운동노선을 제시했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임정은 한국사 최초의 민주 공화정 정부였기 때문이다. 자본이나 기술은 어떠했든지 간에 한국인들의 정신적 근대화는 놀라울 만큼 빨랐다.3.1운동 직후 설립된 모든 임시 정부는 왕정 대신 민주공화정을 채택할 것을 천명했다. 1907년 고종 퇴위 이후 고작 12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는 점, 그리고 수천 년간 왕정이 존속해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혁명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김 교수는 이 외에도 1912년에 일어난 중국의 신해혁명 역시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자국의 왕이 퇴위 당하고 청 제국의 황제는 아예 사라지는 대격변의 시대 속에서 한국 민중은 스스로를 자각하고 민주제와 입헌정치에 대한 풍부한 논의를 전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군주와 국가를 분리시키고 군주를 배제하는 정치, 즉 민주 공화정체였다.
3.1운동이 제국주의와 전제정치를 부정하고 독립에 기초한 공화정을, 신분제도를 부정하고 평등에 기초한 민주정을 제시했다는 것은 이런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이상과 이념은 임정에 의해 해석되고 그 헌법에 규정될 수 있었다.
대한민국임시헌장(1944)과 제헌헌법(1948)은 전문, 총강, 국민의 권리와 의무,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경제, 회계, 헌법개정 및 부칙 등에서 거의 동일하다. 내용면에서도 두 헌법은 3.1운동의 독립정신 계승, 민주공화국, 국민주권, 기본권 보장, 권력분립 등에서 거의 일치한다. 말하자면, 헌법의 근간과 골조는 사실 상 임정시기에 만들어진 셈이다.
극심한 반공이념이 지배하던 미군정 시기에 만들어졌을 현재의 제헌헌법에도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는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이유 역시 초기 임정의 좌우합작적 성격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니,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말은 헌법적으로는 거의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비판과 피할 수 없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임정의 요인들은 일제로부터 독립된 신국가 건설의 방향을 일제 치하에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교과서를 통해 본 한국근현대사 1강
지난 7일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에 서 진행된 '교과서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 강좌의 첫 번째 강의 '동아시아 질서 재편으로 본 3·1운동'을 요약 소개합니다. 이날 강의는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김정인 교수(한중일 공동교과서 <미래를 여는 역사> 집필위원)가 진행했습니다. 다음 강의는 '무단, 문화, 민족말살 : 식민 통치 변신의 이해'를 주제로 김정인 교수가 이어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동아시아 질서 재편으로 본 3·1운동
교과서에 기재된 3·1운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가까워지는 가운데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 자결주의는 식민지, 반식민지의 민족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그러나 강대국들의 반대로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 독일의 영토에만 적용하고, 독일의 식민지는 위임통치 방식으로 승전국들이 다시 지배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많은 약소민족들은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걸고 있었고, 그 가운데 한국 민족이 가장 먼저 이를 배경으로 대규모 봉기를 감행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그것이 바로 3·1운동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 동아시아 패권 장악을 위한 전쟁
20세기 초 유럽은 삼국협상(영국-프랑스-러시아)세력과 삼국동맹(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세력으로 나뉘어 식민지를 둘러싸고 갈등했다. 양측은 발칸반도에서 정면충돌했으며, 마침내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면서 제 1차 세계대전은 시작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일본 여론도 대체적으로 참전을 지지했다. 참전에 따른 경기 활성화와 이로 인한 경제 성장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러일 전쟁 이후 만성적인 경기침체에 시달리던 일본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유럽 각국의 아시아 무역이 두절되자, 이를 대신하며 유례없는 번영기를 맞는다.
어떻게든 전쟁에 참여하고 싶었던 일본은 1902년 체결된 영일동맹을 기반으로 동맹국으로서 운명을 함께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다. 일본은 독일과 싸웠지만, 전장을 동아시아 밖으로 확대하지 않았다. 일본의 참전 목적은 동아시아에서 독일 세력을 축출하고 패권을 장악하여 제국주의 열강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었다.
중국은 일본과 달리 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나라의 힘이 약하면, 중립선언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법이다. 일본은 중국의 중립정책을 무시하며 제일 먼저 침략을 감행한다. 1914년 9월 일본 육국은 당시 독일의 조차지인 칭따오를 점령하고 산둥성 내 독일의 이권을 접수한다. 1915년 일본은 중국에게 독일의 조차지를 중국에 반환하기 위해 막대한 군사비를 투자하여 참전했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며 5개항 21개조로 된 요구서를 내밀었다.
'21개조 요구'의 골자는 첫째, 독일 조차지인 산둥 지역에서 일본의 권익 확보를 보장할 것, 둘째, 남만주와 내몽골에서 일본의 특수한 지위를 더욱 강화시킬 것, 셋째, 중국 주요 기업에 대한 일본의 참여를 보장할 것, 넷째, 정치,군사,재정 부문에서 일본인 고문을 초빙할 것, 다섯째, 중국의 치안 유지에 일본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할 것 등이었다.
이는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과 지배 과정을 연상시킬 정도로 중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내용들이었다. 이를 모두 받아들인다면 중국 역시 대한제국처럼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수순을 밟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 일본은 위안스카이가 정권에서 물러난 후 실권을 장악한 돤치루이에게 1917년부터 1918년까지 1억 4,500만 엔의 차관을 제공했다. 이는 철도 건설 등 경제적 명분으로 제공되었지만, 실제로는 돤치루이를 옭아매기 위한 수단이자 정치적 군사자금에 지나지 않았다.
동아시아, 특히 중국을 둘러싼 대립구도는 일본 대 영국·미국을 주축으로 전개되었다.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대해 서구열강은 거세게 반발했다. 미국은 각국 간에 평등하게 누리고 있는 중국에서의 특권을 침해하는 중·일간의 어떤 협정도 승인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결국, 미국은 중국에서의 일본의 특수 권익, 일본은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권익을 각각 인정하는 랜싱-이시이 협정을 체결한다.
러시아는 21개조에 불만을 갖고 있었지만 일본과의 관계 악화는 꺼렸다. 러시아는 일본으로부터 무기와 군수품을 수입하는 처지인데다가 일본이 극동 방향에서 공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중국에서 영국과 미국, 독일의 세력 경화를 견제하기 위해서도 일본과의 관계악화는 좋지 않았다. 일본 역시 중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러시아와의 동맹이 필요했다.
동아시아를 무대로 한 열강의 각축전은 종전이 가까워질수록 치열해 진다. 일본은 영국에게 자신이 점령한 구독일령 중 적도 이북은 일본이, 이남은 영국이 위임통치할 것을 제안한다. 이에 영국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을 지지할 것을 약속한다.
이렇듯 일본은 열강의 권익을 교차 인정하는 방법으로 이익을 취한다. 그 목표는 중국에서 특권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서구 열강과의 협정을 통해 일본은 중국에 대한 특수 권익을 확실히 인정받는다.
조선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설치한 조선총독부는 식민 통치의 총 본산이었다. 조선총독부는 행정 조직은 물론 헌병 경찰과 군대 등을 동원하여 조선인의 정치활동을 철저히 금지시켰다. 정치,사회단체는 대부분 해산되었고, 언론과 저술 활동은 거의 불가능했다. 무단통치가 계속되는 동안 공개적인 민족운동도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국내에서의 민족운동은 대부분 비밀결사 형태로 전개되었다.
한편, 일본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자 다음해 5월 러시아에 대한 공동방위를 명목으로 중국 정부에 비밀리에 '중일공동방적협정'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일본과 중국 군대가 극동 지역에서 공동으로 작전을 수행하며, 이를 위해 일본은 중국 군대 안에 연락원을 두는 동시에 중국 영내에 군사기지를 공동으로 건설해 사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중국으로서는 굴욕적인 요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은 한 때 동아시아 근대화의 선두주자로서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던 일본이 자신들의 주권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패권국가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3.1 운동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1917년 3월 러시아 혁명에서 혁명정부를 수립한 레닌은 각 민족의 자결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전후 평화질서의 기초로 자리 잡는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민족자결주의를 역설했다. 바야흐로 '민족자결'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당시 유럽의 정치 관행에서 보자면, 유럽의 양쪽 날개에서 주장된 민족자결주의는 대단히 진보적이며 도전적인 것이었다. 윌슨과 레닌의 민족자결주의는 용어의 동일성으로 인하여 내용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유럽 지역과 패전국에 국한시키려 한 반면, 레닌은 모든 식민지 독립을 주장했다.
물론 처음에 윌슨도 자신의 민족자결주의를 패전국의 식민지 문제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국한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베르사유 강화회담에서 해결 가능한 식민지 문제는 패전국의 식민지 문제였다. 그렇다면, 제 3세계에 반제국주의, 반식민지를 외치던 민중들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다음은 기미 독립선언의 서명자 오세창의 신문조서이다.
문 : 민족자결이란 것은 병합 또는 정복된 전 세계의 모든 나라를 포괄하는 것으로 생각했는가, 또는 직접 전란에 관계가 있는 나라에 국한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가?
오세창 : 그것은 전란에 관계된 나라에 대해서는 실행되고 그 밖의 나라에 대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문 : 그런데 조선에서 민족자결의 취지에 의하여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운동을 하게 된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오세창 : 그것은 세상의 풍조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주창하므로 가담했는데, 하나는 전 세계의 사람이 민족자결로 소요하고 있는데도 홀로 조선만이 침묵하기 있기보다 실행은 되지 않더라도 역사에 남기기 위하여 조선인도 민족자결의 의사가 있다는 것을 발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인도의 독립운동을 전개한 라이(Lajpat Lai)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인도에 적용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패전국뿐 아니라 전승국인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결론적으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당시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반제국주의 운동을 위한 구실이었다. 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3·1운동을 포함한 반식민지 민중의 독립운동 때문이었다.
윌슨은 즉각적이고 급진적인 식민지 해방에는 반대했지만, 식민지 '해방의 전도사'로 부각된 자신의 이미지를 수정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민족자결주의를 통한 미국의 전후 국제질서 수립은 영국과 프랑스, 일본 등 승전국에게는 불편한 일이었다. 결국 1921년 개최된 워싱턴 회의에서 일본은 산둥 지방에 대한 이권을 중국에 양도하게 되고, 이 사건은 미국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대립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3·1운동은 왜 평화적인 만세시위로 전개 되었나
3.1운동을 준비한 세력은 독립 만세 운동의 방향을 세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국내외를 향한 독립 선언, 둘째, 파리 강화 회의, 일본과 미국에 대한 독립 청원, 셋째, 평화적인 만세시위. 왜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과 시민은 독립선언식을 가지고 만세운동을 시작한다. 오늘날 대중의 머리에 존재하는 3.1운동의 이미지는 장이 열린 시골마을에서 한복을 입은 여학우(유관순)가 태극기를 흔드는 모습이다. 그러나 당시 시위의 시작은 도심이었다. 도시에서 시작된 시위는 철도와 간선 도로를 따라 인근 도시와 농촌 지역으로 점차 확산되어 갔다. 3월 중순 전국 화된 시위는 두 달 간이나 지속되었다.
시위가 도시에서 촉발하고 농촌으로 번져가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은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등 중남부 지방의 농촌을 배경으로 확산되었었다. 3.1운동 이후 농촌은 더 이상 민족 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중심공간으로써 그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대신 도시가 그 역할을 확고히 하게 된다. 1926년 6.10만세운동과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도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민족운동이었다. 이처럼 근대화를 거치면서 시위 공간이 변화하는 도정에서 3.1운동은 전환기적 분기점에 해당한다.
무단통치는 조선인에게 권력도 여론도 허용하지 않았다. 때문에 3.1운동을 조직적으로 주도할 지도부가 존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정한 지도부의 조직 없이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 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든 시위를 조직하고 참여하고자 했던 대중적 자발성 덕분이었다. 시민들은 남녀노소를 분물하고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이끌었다. 이런 사람들을 지칭하는 '만세꾼'이라는 단어도 생겨났다. 만세꾼은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기여했다.
2008년 광화문에 촛불을 든 여고생들이 등장했던 것처럼, 3·1운동도 탑골 공원에 태극기를 든 여학생들이 있었다. 시민들은 일본 순사가 시위에 참여한 여학우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것을 보고 더욱 분노했다. 또 당시 인쇄기의 보급은 3.1운동의 촉매재로 작용한다. 각종 유인물과 신문 등의 인쇄매체는 간단한 구호에서부터 시위 계획, 각지의 운동 상황을 알리며 투쟁을 독려했다.
3.1운동은 독립이라는 목적 달성에 있어서 실패한 운동이라고 볼 수 있으나, 3.1운동의 경험은 주체적 시민의식과 운동의식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시위의 주체들은 전쟁으로 인해 나라를 잃은 것이 아닌, 강화도 조약이라는 외교정책의 실패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교를 통한 식민지해방과, 이를 촉구하기 위한 평화적 시위를 진행했다. 또한 3·1운동은 도심에서 민중의 자발적 의지로 일어난 근대적 시위운동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5·4운동, 일본 제국주의 저항운동?
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중국은 독일에게 빼앗긴 산둥성을 되찾고, 주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다. 그러나 1919년 4월 파리강화회의는 산둥성의 이권을 일본에게 넘길 것을 결의했다.
이에 5월 4일 약 3,000여 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강화조약 조인을 거부하라', '반드시 산둥성의 이권을 회수하자', '21개조 요구를 폐지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베이징에서 시작된 동맹휴학은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정부는 학생과 청년들을 대량으로 검거하면서 적극적인 탄압으로 응수했다. 약 1천여 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었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시위는 더욱더 거세졌다. 마침내 6월 28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중국대표단은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조인을 거부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이처럼 5.4운동은 학생이 촉발하고 민중이 동참하여 강화 조약 조인 거부와 매국노 처벌이라는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며 결국 원하는 바를 얻어낸 소중한 역사적 경험이었다. 이 경험은 국민의식이 형성되면서 새로운 주체를 중심으로 국민국가를 수립하려는 운동으로 이어졌다.
동아시아적 역사 관점의 필요
우리를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더구나 현대에 들어서는 이 관계가 한층 더 강화되고 있다. 하지만 반면에 갈등의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특히 한·중·일, 3국은 역사 논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대사>교과서에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 대부분의 역사가 우리 시점, 일방적 시점에서 쓰이고 있다. 한쪽으로 치우진 역사 기술은 평면적인 역사관점을 심어주고 또 그것이 갖는 민족주의, 국가주의적 관점은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를 방해하고 갈등의 해소에 장애가 될 가능성이 크다. 세계사적, 동아시아적 흐름 속에서 우리의 역사를 이해했을 때 비로소 동아시아의 평화적 관계를 형성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