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정보
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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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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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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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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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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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의 역사적 기원과 테러와의 전쟁 10년
9.11 이후 빈 라텐 사살까지 지난 10년 세계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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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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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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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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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정치경제학 : 대테러 전쟁의 논리와 실재
테러와의 전쟁 이면에 숨은 에너지 패권과 전쟁산업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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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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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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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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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위기, 국제규범의 위기
감시와 검열, 차별과 고문의 제도화를 둘러싸고 미국과 국제사회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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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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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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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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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슈퍼파워 : 초국적 시민운동과 민주화 도미노
세계사회포럼과 위키리크스까지 힘의 질서에 맞서는 초국적 반전평화운동의 사례와 남미부터 중동까지 이어지는 민주화 도미노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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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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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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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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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 시대’의 세계질서와 한반도
전쟁이 초래한 제국의 몰락과 중국의 부상이라는 ‘G2 시대’, 세계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한반도의 미래는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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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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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5
"이명박식 '원교근공'은 틀렸다" [9.11강좌 5강]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와 프레시안은 9.11 10년을 맞아 9월 5일부터 매주 월요일 5회에 걸쳐 '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를 주제로 연속 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0월 17일 열린 마지막 강좌에서는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님이'G2 시대의 세계질서와 한반도'라는 제목으로 강연해 주셨습니다. 아래는 프레시안 김봉규 기자가 요약 재구성한 이남주 교수 강연의 주요 내용입니다. ☞강연 상세 안내 보기
▲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G2 시대를 논하기에 앞서 과거 중국의 위상에서부터 출발해보자. 근대화 이전 시기 세계 차원에서 힘의 분포를 보면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인구의 규모와 경제력이었다. 인구 규모를 보면 중국이 압도적 1위였다. 당시 경제력에 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경제사가들이 합의한 바로는 전 세계 경제의 약 3분의 1의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서유럽이 산업화를 하면서 1952년 기준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전 세계 5.8% 수준으로 하락했고 중국의 쇠퇴와 맞물려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확대됐다. 그리고 1990년대 초반 소련과 동유럽에서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함에 따라 미국은 단일 패권의 시대를 맞았다.
이를 보여주는 지표가 군사력이다. 특히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미국의 군사력 우위가 강해졌다. 미국이 전 세계 군비의 45%(2008년 기준)를 지출했다. 미국은 2000년대 들어 약 1700억 달러의 전비를 들여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수행했는데 이 전쟁이 'G2'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중국의 위상이 확대되고 미국의 영향력이 쇠퇴한 중요한 사건이 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중국이 성장하면서 미국을 추격하고 있지만 한동안 미국을 앞서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지구적 차원에서 G2를 얘기하려면 빨라도 앞으로 15~20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북아 지역에서 G2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미국에 대한 중국의 추격이 가장 빨리 진행되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 원자바오 중국 총리 ⓒAP=연합뉴스
중국이 대외적 팽장을 할 수 없는 까닭
중국의 성장을 보여주는 몇 가지 지표를 보자. 달러로 환산한 GDP로 보면 2010년에 일본을 추월했다. 미국과 비교해도 중국의 성장률은 높은 수준이다. 1990년부터 2009년까지 미국 경제가 61% 성장하는 사이 중국은 536% 성장했다. 골드만삭스는 2000년대 초반 브릭스(신흥 경제국인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보고서에서 중국이 미국을 2041년경 추월할 것이라 예측했지만 2000년대 후반기가 되자 2027년으로 시기를 앞당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군비 증강률을 봐도 미국은 9.11 테러 이전 GDP 대비 3% 선까지 떨어졌던 군비 지출을 테러 이후 2009년에는 5%에 가깝게 끌어올렸다. 반면 중국은 군비 증강률에 급격한 변화가 없다. GDP가 성장하면서 정부의 조세 수입이 느는데 따른 자연적인 증가만 있을 뿐 자원 배분상의 변화가 없다는 뜻이다.
중국이 이러한 기조를 유지한다고 가정하면 미국을 경제력에서 추월할 2025~2030년이 되면 중국의 군비는 미국의 50% 수준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 격차만 줄어들 뿐 중국이 미국을 대체할 하드 파워나 외교적 역량까지 능가하기는 쉽지 않다.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기 힘든 또 다른 이유는 내부 문제다. 중국은 경제성장의 과도기에 있어서 시스템을 안정되게 관리하는 것이 중국 지도부의 부담으로 남아 있다. 과도기 현상 중 하나가 소득 불균형이다. 소득 불평등 지수인 지니계수가 2007년 기준 0.47~0.48인데 아시아에서도 필리핀, 인도네시아 정도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수준이고 웬만한 자본주의 국가도 이 정도는 아니다. 농촌과 도시 사이의 소득 격차도 심해서 최근에는 약 1:3.3 수준까지 벌어졌다. 사회적 갈등이 유발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중국이 지금과 같은 성장 기조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우선 1980년대 산아제한 정책을 시행해 중국의 고령화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또 서방국이 과거 공업화 시기에 자원의 제약을 덜 받은 반면 중국은 자원 수요에 따라 세계 시장에 영향을 주는 구조에 놓여있다.
이러한 대내외적 제약으로 인해 중국은 성장하고 있는 힘을 대외에 사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중국을 고려할 때 중요하게 여길 변수다. 이러한 객관적 상황을 고려하면 우리도 중국과의 관계를 풀어갈 조건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상황이 이런데 G2라는 개념이 퍼진 이유는 이 용어를 미국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전쟁과 금융위기를 거치며 미국이 혼자 국제 질서의 변화를 관리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중국이 국제사회에 참여해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데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담론을 유발하기 위한 의도로 G2를 들고 나왔다.
중국 입장에서도 싫어할 일은 아니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비용을 부담하면서까지 뛰어들 필요는 없다. 앞으로도 미중관계는 예전 미소관계처럼 전면적인 대치로 가진 않겠지만 세계 질서를 공동 관리하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현실적인 중국의 대외전략은 내부적 불균형과 미국과의 격차를 조정하는 시간벌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심각한 갈등 유발을 피하면서 핵심 이익에 선택적으로 집중하고, 국제질서의 안정을 위해서는 불필요한 힘을 사용하거나 재편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미국이 질서 유지를 위해 개입하면, 중국은 이에 편승해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활용할 것이다. 쫓는 사람의 이점이라 할 수 있다. 미국과의 격차를 좁히는 방식은 그렇게 능력을 점진적으로 증진시키는 것을 통해 이뤄질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푸는 게 중요하다.
동북아 지역에서의 미중관계
하지만 앞서 말했듯 동북아 지역은 조금 다르다. 미중의 경쟁이 가장 먼저 시작될 지역이 동북아이기 때문이다. 일단 힘의 관계를 보면 동북아에서는 빠르게 두 나라의 격차가 줄어들고 있다. 미국은 자신의 힘을 전 세계 곳곳에 다 사용하고 있지만 중국이 당장 전략적 집중을 하고 있는 곳이 동북아다.
한국의 국가별 무역 비중만 봐도 한중 수교 이후 중국이 차지하는 부분이 20년 동안 10배로 늘어 22.7%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일본과 미국의 비중을 합친 것보다 많다. 구조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미국이 필요 없다는 말도 아니다. 중국 무역의 순환 고리가 결국 미국과의 교역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중국 입장에서 가장 큰 안보 우려는 대만 문제와 남중국해 해상 교통로(sea lane) 문제다. 대만 문제에 대해 중국은 아직까지 무력을 사용한 통일을 전면 배제하고 있지는 않다. 대만 독립파들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양안관계가 약화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가 됐다. 여기에 미국이 개입하면 중국의 민족주의적 타깃이 될 가능성이 있다.
남중국해 문제도 중요성이 강화되고 있다. 중국은 예전에 석유를 자급했지만 지금은 50%를 수입한다. 수입 석유 중 70%가 중동이나 아프리카에서 남중국해를 통해 들어온다. 이 때문에 남아시아 국가 및 미국과 이익 충돌이 나타나 갈등이 커지고 있다. 그 전환점을 보여준 때가 지난해다. 천안함 사건 이후 미국 항공모함이 서해로 진입하려고 해 힘겨루기 국면이 조성됐고, 조어도, 남중국해, 남사군도 문제까지 연속해서 발생했다.
이 때문에 미중관계가 동북아에서 협력으로만 가지 않으며 갈등도 발생할 거라는 예측이 힘을 얻고 있고 이게 동북아 국가들에게 딜레마로 다가오는 상황이다.
'헤징 전략'과 다자안보협력 체제
미중관계가 경쟁 관계로 바뀌었을 때 동북아 국가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극단적인 것은 미국과 중국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아직 어떤 정체성을 갖는 국가가 될지 예측할 수 없는 나라다. 예컨대 중국에서 민주화 과정이 진행된다면 대외정책이 평화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은 없다. 과거의 민주화 사태를 봤을 때 중국 지도부가 다양하게 표출될 요구와 갈등을 통제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면 민족주의적 요구가 강화되면서 대외적 쟁점에 대해 공세적 태도로 나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국이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번에 미국을 방문하기 전에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솔직하게 얘기했다. 아시아 국가들이 중국의 변화를 위협으로 느끼고 있어서 미국의 개입을 환영한다고 했다. 또 중국 견제를 위해 한미동맹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중국이 들으면 열 받을 얘기다.
한미동맹이 외교적인 자산일 수 있지만 레토릭(수사)을 그렇게 하면 중국 입장에서 대응에 나설 수밖에 없다. 한국 정부의 레토릭 중 하나가 한미동맹 강화로 중국과의 관계를 잘 풀 수 있다는 것이다. 외교적으로 미국도 중국도 전적으로 믿을 만한 국가가 아니고 활용할 수 있는 지점도 양쪽에 다 있다. 그런 차원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걸 말로 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상호작용의 메커니즘이 작동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권 초기에도 그런 레토릭이 제기됐는데 지금 그렇게 됐나?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5월 중국을 국빈 자격으로 방문했을 때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한미동맹은 냉전시대의 낡은 유산"이라는 레토릭으로 반격하지 않았나. 그래서 지금까지 중국과 경제 문제에서는 잘 되는 편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잘 풀리지 않았다.
두 번째 선택지는 일종의 원교근공(遠交近攻)론이다. 미국을 가까이하고 중국을 친다는 건데, 문제는 '공(攻)'에 있다. 원교근공은 가까이 있는 적을 소멸하기 위한 전략이고 격파 순위를 정하는 문제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중국을 격파하는 문제가 아니다. 중국의 성장을 막는 게 바람직한가를 논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발상이다. 먼 곳의 물로 가까운 불을 끄지 못한다(遠水不救近火)는 한비자의 말을 새길 필요가 있다.
중국과 친해져도 부담이 있고, 미국과의 관계만 강화하는 것도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게 동북아 국가의 딜레마이고 외교적으로 상당히 심각한 도전이다. 선택을 해야 할 상황인데, 특히 힘의 균형 차원에 한반도는 중요한 위치에 있기에 더욱 그렇다.
선택이 어려운 상황에서 단기적 대응과 중장기적 대응을 고려해볼 수 있다. 단기적 전략은 일종의 위험분산, 즉 헤징(hedging) 전략이다. 한미관계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그 관계가 중국의 이익을 위협하지 않다고 (중국에) 설명해야한다. 중국은 그런 논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본다. 중국도 단기적으로 미국과 경쟁이 전면화 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시간이 있는 셈이다.
한미 군사 동맹을 강화하는 것은 길이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인데 MD가 만들어지는 건 한미동맹이 중국을 봉쇄하는 방향으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는 미국이 한국과 일본을 묶는 군사동맹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미국이 바라는 대로 비용을 전가시키면서 군사적 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다. 이 역시 중국에 대한 제스처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당분간은 위험분산 전략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위험분산 전략이 장기적인 동북아 질서로 이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근본적인 접근 방식은 동북아에서 다자안보협력 체제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한다. 지역 안보는 지역의 소속 국가들이 공동으로 해결하자는 것이다. 일종의 집단안보체제인데, 지금까지는 이상적인 체제로 받아들여져 왔다. 각 나라별로 핵심 이익이 달라서 위협이 발생해도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결국 강대국의 협력이 없으면 다자안보협력 체제도 만들어지기 어려운데 패권국들은 이에 나서는데 소극적이다. 자기 의도대로 개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은 다자협력 체제를 통한 관리의 필요성을 느껴왔다. 그래서 주도적으로 한 게 상하이협력기구(SCO)다. 러시아, 중국,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함께 만든 SCO를 통해 중국은 국경 지역의 병력 축소에서 시작해 지금은 경제협력 논의로까지 발전시켰다.
미국 역시 장기적으로 동북아 지역에서 힘의 약화를 인정할 상황이 생길 수 있는데 그럴 때 우리가 다자협력 체제를 설득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끼리의 논의만이 아니다. 이미 (6자회담) 9.19 공동성명에서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북아 다자안보 체제를 갖추기로 6자 당사국들이 합의한 바 있다. 6자회담이라는 출발할 수 있는 무대가 있는 셈이다. 이런 방식의 접근을 위해서는 동북아의 개별 국가들이 지역 문제를 스스로 협력해서 풀려는 주체적 입장을 가져야 한다.
● 9.11 기획 강좌 전편 보기 <1강> 김민웅 "테러와의 전쟁, 미국 헤게모니 지키기의 마지막 안간힘" <2강> 김재명 "테러와의 전쟁 뒤에는 석유와 군산복합체 있다" <3강> 이태호 "위키리크스, 미국 정부 '막가파식' 전쟁몰이의 부메랑" <4강> 안병진 "9.11의 시대, 월스트리트에서 종언을 고했다" |
"9.11의 시대, 월스트리트에서 종언을 고했다" [9.11강좌 4강]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와 프레시안은 9.11 10년을 맞아 9월 5일부터 매주 월요일 5회에 걸쳐 '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를 주제로 연속 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0월 10일 열린 네 번째 강좌에서는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님이 '사라져 가는 아메리칸 드림과 새로운 체제로의 이행의 시각'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해 주셨습니다. 아래는 프레시안 곽재훈 기자가 정리한 안 교수님의 4강 강의소개 기사입니다. ☞강연 상세 안내 보기
오는 17일 열리는 마지막 강좌는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님의 강의로 'G2 시대의 세계질서와 한반도'라는 주제로 테러와의 전쟁이 거시적 국제정세에 미친 영향 등을 조망해 봅니다.
▲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 ⓒ참여연대 |
"9.11 테러, 미국이라는 비행기를 떨어트렸다"
9.11은 미국 역사를 그 전후로 나눌 만큼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당시 뉴욕에서 직접 목격한 나도 한동안 비행기만 보면 그 앞에 불타는 빌딩이 서 있는 게 보이는 등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같은 증상에 시달렸다. 특히 9.11은 미국 시민들로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던 사건이었다. 당시 미국 대학에서 정치학 강사로 일할 때였는데, 학생들에게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영화 <비상계엄>을 언급하면서 '이런 일이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다'고 말하면 다들 웃었다. 말이 안 된다는 게 그 당시의 정서였다.
그 시기에 9.11 테러를 보면서 장 폴 사르트르가 적군(赤軍)파 테러리스트들에 대해 했던 평인 '가장 견고한 체제에 대한 가장 무모한 도전'이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러시아 혁명을 이끈 레닌도 자신의 형을 비롯한 (나로드니키파) 테러리스트들이 차르 암살을 시도하다가 좌절된 것을 보면서 '그들이 증오한 체제를 더 견고하게 만들어줬다'고 비판했다.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도 민주주의를 가져온 게 아니라 전두환 정권이라는 더 견고한 체제로 이어졌다. 이처럼 테러리즘은 무모한 도전이고 오히려 체제를 더 강화하는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 당시 나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생각이 들었다. 오사마 빈 라덴이 뭘 의도했든 간에 미국은 견고하지 않은 체제였다는 것이다. 9.11 테러는 미국이라는 비행기를 경착륙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특히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은 좌파적 관점이 아니라 건전한 상식의 관점에서 봐도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미국은 당시 '가장 견고한 체제'처럼 보였지만 이미 건국 당시부터 이같은 추락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물론 미국 체제의 발생은 놀라운 민주주의적 혁명이었고 이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미국의 건국은 유럽의 잔혹한 봉건성을 뚫고 자유로운 공동체를 추구한 위대했던 실험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건국을 찬양했던 지성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은 미국이 또한 '자기 혼자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시장'이 실현된 최초의 사례였다는 것이다.
한 사람씩 돈을 모아서 합작회사 형태로 모험을 시작한 것이 미국의 초기형태다. 배[메이플라워호 : 편집자]도 그렇게 띄웠고 서부 식민시(市)도 그렇게 세워졌다. 그야말로 투기적 '카지노 자본주의'의 원형으로 세워진 나라다. 그런 면에서 미국의 출범 자체에 시장만능주의의 뿌리가 있다. 사회에 뿌리내린 연대의 정신이 아니라 자수성가, 독립, 자기 노동, 이런 정신이 미국의 정신이다. 심지어 미국에선 노숙자들조차 그냥 돈을 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은행에서 돈 찾아 나오는 사람들한테 은행 문을 열어주고 손을 내민다. 노동해야 돈을 번다는 관념이 뿌리깊은 거다.
칼 폴라니가 '자기조정적 시장'이라고 표현한 것은 결국 시장이 독립적으로 자기 혼자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시장은 곧 스스로 괴물이 되어 가고 파멸의 길로 치닫게 될 잠재성이 있다. 칼 맑스의 '자본은 스스로를 파괴한다'는 예언이 21세기 들어 다시 조망을 받는 것이나 누리엘 루비니 교수의 비관적 전망이 호응을 얻는 것은 그래서다.
"부시 행정부가 신자유주의? 지나치게 후한 평가"
그러나 폴라니에 따르면 사회는 시장이 혼자 이렇게 괴물처럼 움직이도록 놔두지 않고 필연적으로 보호운동을 펼친다. 균형을 잡기 위한 사회의 거대한 시계추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는 시장만능주의의 힘이 너무 강하다 보니 빌 클린턴 전 대통령 같은 진보성향의 인사들조차 시장의 '자기 조절적' 힘을 너무 믿었다. 또는 믿는 사람들에게 힘으로 밀렸거나. (나라는 다르지만) 노무현의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도 바로 이런 맥락이다.
빌 클린턴은 사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 약자에 대한 공감도 있고 존 F. 케네디처럼 '따뜻한 세상'을 만들고 싶어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막상 집권하자 재정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미국 자본의 건전성이 사라질 것이라는 연방준비제도(Fed) 등의 우려에 부딪혔다. 대통령도 Fed는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많은 담대한 의제들을 다음으로, 다음으로 미루다 보니 한 것이라고는 고작 약간의 증세가 전부였다. 그것도 의회에서 피 흘려 가며 싸워서 한 거다. 나머지는 공화당과 적당히 타협했고 결국 클린턴 지지층은 좌절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금융위기의 대재앙의 씨앗도 클린턴 정부 당시 뿌려졌다. 클린턴은 약자들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었지만 Fed 등의 반대로 케인스적인 정책은 할 수 없었다. 그럼 남은 건? 부자증세? 더더욱 안 된다. 그래서 한 게 서브프라임 모기지다. 이는 보수적 자본주의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위험한 것이지만, 신용등급이 낮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도 대출을 해 줘서 저소득층에 집 살 기회를 주고 경기도 부양하려는 클린턴의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지 W. 부시도 9.11 이후 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계속했다. 그나마 클린턴 때는 눈치라도 봤지만 부시는 그런 것도 없었다. 온갖 규제를 다 풀었다. '정글자본주의'라는 게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다면 부시 행정부를 보면 된다. 부시의 경제정책은 흡사 이명박 정부와도 유사하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부시 행정부 정책을 신자유주의라고 하는데 이는 너무 우아하고 세련되게 평가하는 것이다. 시장만능주의, 연고자본주의, 천민자본주의, 강압적 패권주의 등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전 세계에서 전무후무한 괴물이 탄생했다.
원래 미국은 한국과는 달리 (권력자들도) 약간의 눈치는 보는 나라이고 특히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은 한국보다 훨씬 많이 존재하는 나라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 때는 이런 원칙이 무너진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들이 세우려고 했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9.11로 인한 경기침체를 만회하기 위해 각종 규제를 다 풀고 서브프라임을 확대하는 등 위험한 '폭탄 돌리기'가 시작됐다.
부시의 안보정책도 무모한 맹동주의에 다름 아니었다. 군사력으로 겁을 주면 공포를 느낀 상대방이 알아서 미국에 고개를 숙일 것이라는 식이었다. 이는 불안하고 허약한 마초들의 심리를 보여주는 신경발작이었고 빈 라덴을 파괴하기는커녕 스스로를 망치는 어리석은 짓이 됐다. 원래 마초들의 말로라는 게 그렇다. (웃음)
이런 이유들로 부시는 미국 역사학자들이 선정한 '최악의 대통령' 명단에서 꼴찌 가까운 순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단지 진보적인 사람들만이 부시를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철학적 인물 오바마, '다크 나이트'를 자처하다"
그래서 버락 오바마의 당선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선될 때부터 오바마는 진보적인 요구만을 반영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스스로 중도주의자라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오바마가 이라크전에 반대한 것은 진보라서가 아니다. 보수라도 이라크전은 말린다. 왜냐? 그렇지 않아도 쇠퇴하던 미국의 국력이 이라크전을 거치며 급전직하했기 때문이다.
안보정책 측면을 보면 오바마는 스스로 전지구적 제국의 질서와 정의를 지키는 수호자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게 얼마나 실현 가능하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말이다. 그런 오바마의 꿈이 잘 나타난 것이 그의 2009년 노벨평화상 수락 연설이다. 당시 그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평화상을 받으러 와서 굉장히 강경한, 전쟁에 대한 연설을 했기 때문이다.
오바마의 평화상 연설에 녹아 있는 테제는 3가지다. 첫째, '악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설득할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절멸시켜야할 대상인 '악'(the evil)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그는 간디의 평화운동은 위대하지만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이는 자신에게 간디에게 가졌던 것 같은 기대를 갖지 말라는 뜻이다. 셋째, 이라크전은 '정의롭지 않은' 전쟁이라고 말했지만 아프간전에 대해서는 계속 '필요한 전쟁'이라고 암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악'에 대한 오바마의 대처방식은 (부시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탈법 또는 비(非)법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영화 <다크나이트>를 보면 배트맨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악역을 자처한다. 지금 오바마의 입장이 그렇다. 거기에 오바마의 비극과 고뇌가 있다고 본다. 노벨평화상 연설을 좀 거칠게 요약해서 말하자면 '나도 간디처럼 멋있게 살고 싶지만 이 자리는 그럴 수 없는 자리다'는 얘기다.
실제로 오바마는 부시조차 감히 하지 못했던 암살 작전을 대놓고 펴고 있다. 빈 라덴 뿐 아니라 미국 시민권자인 안와르 알올라키도 죽였다. 미국의 아프간 전략도 바뀌고 있다. 미군 인명 피해를 걱정할 필요도 없으니 무인정찰기를 통한 공격을 계속하고 있다. 대통령 권한도 더 제왕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오바마는 파키스탄에 대한 무인정찰기 공격에 대해 '미군 병사가 적의에 노출되지 않았으므로' 이는 '전쟁'이 아니고 따라서 의회의 승인 없이도 이같은 군사행동을 계속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 편집자]
심지어 오바마는 민권단체들 앞에서 '법리적으로 예방적 구금을 검토해 봐야 하지 않겠나'하고 말해 참석자들을 까무라칠 만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핵폭탄 설계도도 내려받는 시대인 21세기의 제국 운영은 오바마 같은 철학적 인물조차 '예방적 구금'을 검토하게 만든다.
문제는 이미 미국의 힘은 쇠퇴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도전적이고 열정적인 건국 정신 때문에 '청년기의 나라'로 묘사되기도 했는데 지금은 청년기에서 노년기로 접어드는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제국의 수장이 된 오바마는 패권을 안정시켜야 하지만 힘은 없다. 그의 고민과 딜레마는 여기서 생긴다.
"오바마가 상징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환상은 깨졌다"
그럼 (부시 행정부 당시) 오바마는 왜 이라크전에 반대했었나? 미국은 제국이긴 하지만 영국과는 달리 식민지가 없는 나라다. 결코 전쟁을 지속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오바마가 이라크전을 반대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상식'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오바마가 진보주의자라는 착시현상에 빠졌다. 미국의 진보‧중도‧자유주의자들은 오바마를 통해 '아메리칸 드림'을 되살리려 했다. [부시 같은 비상식적 체제를 벗어나 정상국가 미국을 회복하려 했다는 뜻 : 편집자] 문제는 지금은 그게 가능하지 않은 세상이라는데 있다. 오바마를 지지하던 자들은 환상을 본 것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안철수 현상도 부분적으로는 환상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될 때 사람들이 '그래도 잘 했잖아, 그래도 능력은 있잖아' 하는 반응이었지만 그런 기대가 깨지면서 나타난 것이 안철수 현상이고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이다. 안철수 현상은 '건강한 한국을 회복하겠다'는 일종의 '코리언 드림'이 반영된 것이다. 안철수는 '진보'가 아니라 '상식'의 아이콘인 것이다. 전체적으로 오바마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하지만 [역시 오바마와 마찬가지로] 잘 될까?
오바마 자신은 억울할 수 있다. 자신은 그런 환상을 심어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누가 심어줬든 간에 미국인들이 가졌던 환상은 깨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타난 것이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시위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말한 것처럼 이 시위는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를 넘어서 새로운 체제로 가는 이행의 시작이다. 오바마를 통해 '건강한 자본주의'를 회복하려고 했지만 그게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미국인들이 '이행'을 시작한 것이다.
"월스트리트 시위는 '포스트 9.11의 시대'에 종언을 고한다"
그런 면에서 월스트리트 시위는 지속 가능하다. 시위 자체는 끝나더라도 그 의미는 5년, 10년도 더 이어질 것이다. 이는 오바마를 탄생시켰던 '무브온' 등 시민정치와는 궤가 완전히 다르다. 무브온은 아메리칸 드림이 가능하다는 환상에 기반하고 있다. 건강한 진보의 시대를 꿈꿨고 클린턴을 탄핵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리고 오바마를 통해 건전한 자본주의를 실현하려 했다.
하지만 월스트리트 점령은 무브온이 주도한 것이 아니다. 한국으로 치자면 참여연대나 경실련 같은 온건 개혁 시민단체가 주도한 게 아니라 더 좌파적인 세력이 주도한 것이다. 미국에서 좌파들의 운동이 강력하게 힘을 발휘할 정도의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김진숙 현상과도 비슷하다. 김진숙은 민주노총의 전투적 활동가다. 옛날 같으면 '희망버스'에 탈 사람들은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에서 온 사람들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진보-보수를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도 희망버스에 탄다. 김진숙 현상은 수십 년 한국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문제제기와도 연관돼 있다. 그런 면에서 이는 월스트리트 시위와 무관한 사건이 아니다.
월스트리트 시위대가 요구한 것은 정의에 기초한 체제, 정의로운 것이 이윤을 버는 체제, 그러면서도 소련이나 북한 같은 괴물들 말고 자유로운 상상력과 시장 속에서의 가장 자유로운 교환이 존재하는 체제, 그러면서도 가장 약한 자와 가난한 자를 위한 체제다.
이는 오바마를 넘어서는 체제다. 거대한 지구적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진정 안타까운 지점이 여기다. 예를 들어 지금 Fed를 맡고 있는 벤 버냉키는 원래 경제학자로 대공황 시기 루스벨트 정부의 위기극복 정책에 대한 세계 최고의 전문가다. 그런 사람이니 믿을 만할까? 천만에. 대공황과 지금의 경제위기는 문법이 전혀 다르다. '뉴딜 정책'을 추진했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미국의 헤게모니 상승기에 대통령직을 맡았다. 지금은 퇴조기다. 루즈벨트를 100년 연구해 봐야 소용없다. 그 시대는 다시 오지 않는다.
어쨌든 이행은 시작됐다. 빈 라덴의 암살로 한 시대가 끝났다. 9.11의 시대다.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 자본주의 시스템의 새로운 진화의 시대가 시작된게 아닌가 한다. 케인스가 언급한 '자유주의적 사회주의'(liberal socialism) 등 새로운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
"위키리크스, 미국 정부 '막가파식' 전쟁몰이의 부메랑" [9.11강좌 3강]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와 프레시안은 9.11 10년을 맞아 9월 5일부터 매주 월요일 5회에 걸쳐 '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를 주제로 연속 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26일 열린 세 번째 강좌에서는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님이 '새로운 수퍼파워 : 초국적 시민운동과 민주화 도미노'라는 주제로 강연해 주셨습니다. 아래는 프레시안 곽재훈 기자가 정리한 이태호 처장의 3강 강의소개 기사입니다. ☞강연 상세 안내 보기
▲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이 26일 '새로운 수퍼파워 : 초국적 시민운동과 민주화 도미노'라는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참여연대 |
"9.11 이후 미국의 대처, 국제·국내법에 모두 위배"
9.11 이후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의 일성은 '이것은 전쟁행위'라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테러는 경찰 소관인 치안 문제였다. 그러나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나 딕 체니 부통령 등 공화당 군사전략통들은 '미국을 지키는데 국제법이 방해가 돼서는 곤란하다'며 기존의 규범에 대한 예외주의를 정당화했다. 이 때문에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두 가지 논리적 문제가 생겨났다.
첫째, 국제법과의 충돌이다. 쌍둥이 빌딩에 대한 공격을 수행한 자들은 제복을 입은 군인이 아니었고 국가의 공인된 명령체계에 따라 전쟁을 수행하는 정규전 세력도 아니었다. 따라서 비(非)국가 세력에 전쟁 선포가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비국가 세력과의 '전쟁'은 전쟁의 기본 사항을 정한 유엔 헌장과도 배치되고 제네바협정에도 맞지 않는다.
일단 부시가 전쟁을 선포하긴 했는데 상대방을 과연 뭐라고 규정할 것이냐도 문제였다. 군인? 미국은 그렇게 하긴 싫었다. 상대방이 군인이라면 제네바협정에 따라 생포했을 때 전쟁포로로 인정하고 제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테러범? 그렇게 하기도 싫었다. 반인륜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해서는 국제경찰(인터폴)이 수사해야 하고 국제형사재판소(ICC)를 통해 처벌해야 한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적 전투원'(enemy combatant)이라는 개념이다.
둘째, 국내적으로 미국의 헌법 질서에 배치된다는 문제다. '적 전투원'으로 규정한 자들을 잡아서 미국으로 데려오면 미국 헌법에 의해 미국 법을 적용해 재판받아야 하고 변호사 선임권, 묵비권 인정, 고문받지 않을 권리, 3심제 적용 등 권리를 보장받게 된다.
이 때문에 미국 국외에 지어진 것이 쿠바의 관타나모 수용소다. 법률상으로 고문을 허용하는 다른 나라에 비밀 감옥도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비밀 감옥의 존재와 수 등은 공식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랍권과 동유럽 등지에 여러 개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송도 '특별이송'이라고 매우 비밀스럽게 했다. 미국 인권단체가 발간한 보고서를 보면 '사라진 수감자들'이라는 리스트가 있는데 이들이 비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일명 '강화된 심문기법'으로 이름붙여진 사실상의 고문 방안을 도입했다. 잠을 안 재우거나 종교적·인간적·성적 수치심을 주는 등 '스트레스를 주는 취조 방법'을 사용했고 물고문도 허용됐다. 또 아프간을 침공해 테러 용의자를 잡아들일 때 '저 사람이 탈레반이다'라는 증언만으로도 증거 효력을 인정해 체포할 수 있게 했다. 피의자는 증거의 효력을 다툴 권리도 박탈당했고 심문 기한도 '무기한'으로 정해졌다. 미국 헌법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미국 시민의 권리도 제약받았다. 먼저 '애국자법'은 영장주의의 예외를 인정해 이주민을 무기한 구금할 수 있도록 했고 비밀리에 가택수색을 할 수 있게 했다. 애국자법은 또 연방수사국(FBI)이 통신업체나 도서관 사서들에게서 영장 없이도 통신기록, 도서 열람기록 등을 요구할 수 있게 했다.
다 음은 군사력 사용권한의 문제다. 미국 법에 따르면 전쟁 선포는 대통령이 아닌 의회의 권한이다. 의회의 전쟁 선포는 그 요건도 매우 까다롭다. 하지만 부시는 뭔가를 해야 했다. 그러니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비상시 군사력을 사용할 권한이 있다는 개념을 빌려 전쟁을 치렀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이런 방식이었다. 의회는 부시의 군사력 사용을 추인해줬고 이로써 전쟁을 시작하는 방식이 의회의 선전포고에서 대통령의 군사력 사용을 의회가 승인하는 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라크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버락 오바마 등 일부는 반대했지만 의회는 부시의 군사력 사용을 조건부로 승인했다. 부시는 의회가 내건 조건도 지키지 않았지만 말이다.
시민운동은 어떻게 싸웠나
미국 내 반전운동은 9.11 테러 이후에는 거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2003년 이라크전 반대 운동은 거세게 일어났다. 이후 이라크 바그다드에 있는 아부그레이브 수용소의 인권 실태가 <CBS> 방송에 의해 폭로된 것이나, '다우닝 스트리트 메모'와 '매닝 메모'의 공개는 반전 운동에 동력을 공급했다.
2005년 공개된 이른바 '다우닝 스트리트 메모'는 영국 고위관리들이 2002년 7월 부시를 만난 후 작성한 것이다. 부시를 만난 영국 관리들은 "군사행동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다. 부시는 군사행동을 통해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길 원하고 테러 연계와 대량살상무기(WMD)를 근거로 내걸고 싶어했다. 정보와 사실관계는 정책에 꿰맞춰지고 있었다"고 적었다.
2006년 <뉴욕타임스>에 공개된 '매닝 메모'는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의 외교보좌관 데이비드 매닝이 작성한 것으로 부시와 블레어의 대화를 담고 있다. 부시는 침공을 앞두고 이라크의 적대행위를 촉발할 몇 가지 방안을 블레어 총리에게 제시했는데, 유엔의 비행기처럼 위장 페인트칠을 한 미국 정찰기를 이용해 공격을 유도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이라크에서 WMD가 발견되지 않자 미국은 후세인이 충분히 국제적인 의심을 받을 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이는 '이해할 만한 실수'라고 설명했지만 이같은 메모들은 이라크전이 결코 '실수'가 아님을 보여줬다.
또 허리케인 '카트리나'도 반전 운동의 계기가 됐다. 허리케인 때문에 9.11 당시 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문제는 이것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재해였는데 주방위군이나 구급대원들이 이라크로 차출돼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는 것이다.
테 러와의 전쟁에 대해 반대 운동을 펼친 미국 단체는 여러 부류로 나뉜다. 첫째, 전국적인 반전운동 단체다. '앤서'(Act Now to Stop War and End Racism : ANSWER)나 '낫인아워네임'(Not In Our Name) 같은 단체들이 대표적이다. '낫인아워네임'은 일종의 연대체였는데 '평화로운 내일을 위한 9.11 희생자 가족 모임'도 포함하고 있었다. 9.11 희생자의 유가족들이 '우리 이름을 앞세워 전쟁하지 말라'고 한 것은 미국에 큰 충격과 감동을 줬다.
둘째, 군인 및 피해자 가족들의 단체다. 일종의 당사자 운동인데, 한국과는 달리 미국은 반전 운동에서 예비역 단체의 역할이 크다. 이라크나 아프간에 파견됐다가 전사해 훈장까지 받은 병사의 유가족도 반전 운동에 나섰다. 셋째, 시민권 단체다. 이들은 주로 변론이나 소송 등을 통해 활동했다.
넷째, 국제적 반전운동 단체다. 특히 2003년 2월 15일의 국제 반전 공동행동은 전세계 800개 도시에서 3600만 명이 참여한 최대 규모의 시위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같은해 5월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세계반전모임에서는 26개국 60여 명의 활동가들이 모여 '자카르타 평화 합의'를 열었고 2004년에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부시 등 전범들에 대한 '국제민중재판'을 열기도 했다.
이같은 국제적인 반전 운동은 세계 정세에도 영향을 미쳤다. 반전 운동을 통해 급격히 성장한 것이 세계사회포럼(WSF)이다. 2005년 브라질 WSF를 제안한 브라질의 노동자당(PT)는 나중에 급격히 성장해 룰라 대통령을 배출한다.
그러나 이슬람권의 상황은 사뭇 달랐다. 테러와의 전쟁은 이슬람권에서는 극단주의가 성장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전쟁 전에는 이라크의 알카에다 세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전후 오히려 급성장했다. 이란의 경우도 테러와의 전쟁 전 개혁파가 다수였고 심지어 의회에서 개헌선을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테러와의 전쟁이 일어나고 부시가 이란을 (이라크, 북한과 함께) '악의 축'으로 지목하자 개혁파들은 설 자리를 잃었고 미국에 맞서야 한다는 강경파의 입지가 넓어졌다.
법률적 대응
법률적인 방법에 의지한 미국 내의 반전 운동 사례들 중 주목할 만한 것 몇 가지만 살펴보겠다. 첫째, 헌법권리센터(CCR)가 시작한 관타나모 수용소 수감자들의 권리 찾기 운동이다. 일련의 소송이 2002년부터 2008년까지 6년 간 계속됐는데, 2004년 6월 미국 대법원이 관타나모 수감자라 해도 영장에 의하지 않은 구속은 불법이며 구속영장 발행을 요구할 권리를 갖는다고 판결하면서 싱겁게 이기는 듯 했다.
그러나 미국이 국방부에 구속 여부를 심사하는 재심 위원회를 만들고 의회에서 '수감자처우법'을 통과시키면서, 관타나모 수감자는 자신의 구속을 국방부 소속 위원회에 다시 심사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고 학대로부터 법률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게 됐지만 영장이 무제한 청구와 무기한 구금 또한 법으로 보장됐다. '법률에 의하지 않고 구속하면 안 된다고? 그럼 법을 만들지 뭐' 하는 식이었던 거다.
CCR 은 또 국방부의 특수군사위원회가 '적 전투원'들에 대한 수사와 재판권을 갖는 것이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아 위법하며 제네바협정에도 위반된다는 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은 2006년 9월 이들의 주장을 인정했다. 그러자 의회는 또다시 '군사위원회법'을 만들어 이를 합법화했다. CCR은 이에 다시 군사위원회법의 위헌 여부를 다투는 소송을 냈고 미 대법원은 2008년 6월 위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유사한 많은 사건들이 현재 각급 법원에 계류돼 있다.
둘째, 역시 CCR이 이끈 것으로 부시 행정부 고위관료들을 '전쟁범죄자'로 처벌하기 위한 소송이었다. CCR은 럼즈펠드를 고문 등 수감자 학대 혐의로 고발했지만 미국 국내에서는 모두 기각됐다. 전범은 국적에 관계없이 처벌할 수 있도록 한 여러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09년 3월 스페인 판사 한 명이 관심을 가지고 럼즈펠드를 조사할 용의를 밝혔지만 스페인 법무부의 만류로 좌절됐다.
셋째,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이 제기한 불법 사찰 및 도청에 대한 소송이다. ACLU는 2006년 12월 <뉴욕타임스>에 폭로된 미 국가안보국(NSA)의 도청사건에 문제를 제기했다. NSA가 영장 없이 미국 시민들의 전화를 도청한 이 사건에 대해 디트로이트 지방법원은 ACLU 측의 승소를 선언했으나 항소심에서는 판결이 뒤집혔다.
또 2007년 미 의회가 기존의 '외국정보사찰법'을 개정해 '미국보호법'을 만들고 해외와 통화하는 미국 시민의 전화에 대해서도 영장 없는 감청을 가능케 하자 ACLU는 이 법률에 대한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현재 진행 중이다.
넷째, 역시 ACLU가 제기한 '국가기밀특권'에 대한 도전이다. 2003년 7월 ACLU는 다른 인권단체들과 공동으로 테러혐의 수감자들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를 접수했으나 미국 정부는 거부했다. 그러자 ACLU는 2004년 6월 관련 자료의 공개를 요구하는 소송을 시작했고 같은해 9월 승소했다. 그러나 공개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또 ACLU는 이른바 '특별이송'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은 CIA의 항공기 운항을 대신해 주는 일종의 용역업체 '제퍼슨 데이터플랜' 사(社)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현재 진행중인 이 소송에서 ACLU는 해당 회사가 '특별이송'의 비인도적 실체를 알고도 영리를 위해 이를 돕는 조달 서비스를 제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치적 대응
▲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 ⓒ참여연대 |
대의민주주의적 수단에 호소한 사례도 있다. 첫째, 대통령 탄핵 운동이었다. '다우닝 스트리트 메모'가 공개된 이후 2005년 결성된 '애프터 다우닝 스트리트'는 2007년과 2008년 각각 체니 부통령과 부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추진하기 위해 10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 민주당 데니스 쿠치니치 의원이 탄핵안을 발의할 수 있도록 도왔다.
둘째, 예산을 무기로 이라크 철군을 이끌어내기 위한 활동이었다. 1400개 반전단체의 연대체 '평화와 정의를 위한 연합체'(UFPJ)가 여론을 이끌었고 결국 이 문제를 의회로 가져왔다. 그러나 2005년 국방 예산을 빌미로 부시 행정부로부터 '철군 일정표'를 받아내려는 시도는 압도적 표차로 부결됐다.
2006년 중간선 거 후 다수당이 된 민주당은 이라크 철군을 이끌어내기 위해 국방예산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이라크에서 철군을 시작하라고 부시 행정부를 압박했다. 그러나 2007년부터 철군을 시작할 것을 의무화한 '이라크책임법'은 부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부딪혔다.
위키리크스 사태는 미국의 '자업자득'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식 이후 발표한 최초의 4개 대통령령에서 관타나모 수용소를 1년 안에 폐기하고 고문을 중단하며 CIA의 '비밀 감옥'을 포함한 구금정책 수단을 재검토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는 의회의 반대 등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또 오바마는 고문 관련 자료를 공개하겠다던 자신의 약속에 대해서도 말을 바꿨고 고문에 연루된 CIA 조사관들도 처벌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이라크, 아프간 철군도 어떻게 될지 불확실한 상태다. 아프간에서는 탈레반과의 평화협상을 시도하고 있지만 협상을 주도해온 부르하누딘 라바니 전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앞날을 알 수 없게 됐다. 또 오바마는 파키스탄 남부 파슈툰족 거주 지역까지 공습 지역을 늘렸는데, 미국이 파키스탄과 개전 선언을 한 게 아니니 이는 불법이다.
이런 면에서 위키리크스 사태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위키리크스 사태는 테러와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사실상 (가능성이) 내재돼 있던 것이다. 테러를 막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미국의 헌법 질서와 시민권, 국제 규범 등에 대해 온갖 예외를 인정한 것이 부시의 논리였다.
이것이 시민권 진영이 전쟁에 대항하는 운동에도 온갖 수단이 동원될 수 있다고 믿게 했을 수 있다. 국가가 지정한 1급비밀을 대중이 모두 알 수 있도록 공개하겠다는 것이다. 위키리크스는 테러와의 전쟁에 대응한 시민들의 자구적 대응과 시민 불복종 운동, 안보 민주화 운동의 아이콘이 됐다.
● 9.11 기획 강좌 전편 보기 <1강> 김민웅 "테러와의 전쟁, 미국 헤게모니 지키기의 마지막 안간힘" <2강> 김재명 "테러와의 전쟁 뒤에는 석유와 군산복합체 있다" |
"테러와의 전쟁 뒤에는 석유와 군산복합체가 있다" [9.11강좌 2강]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와 프레시안은 9.11 10년을 맞아 9월 5일부터 매주 월요일 5회에 걸쳐 '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를 주제로 연속 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9일 열린 두번째 강의는 '전쟁의 정치경제학 : 대테러 전쟁의 논리와 실재'라는 주제로 김재명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님이 진행해 주셨습니다. 아래는 프레시안 김봉규 기자가 정리한 김재명 교수의 2강 강의소개 기사입니다. ☞강연 상세 안내 보기
"테러와의 전쟁 뒤에는 석유와 군산복학체가 있다"
[9.11 기획 강좌] 2강 김재명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2007년에 만들어진 <워 메이드 이지(War Made Easy)>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말 그대로 전쟁이 쉽게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이 다큐는 미국이 2001년과 2003년 각각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할 당시 제작돼 미국인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당했던 베트남
전쟁의 아픈 기억을 되살려냈다.
전쟁은 쉽게 만들어진다. 실제로 전쟁을 하는 사람은 미군들이지만, 전쟁을 기획하고 결정하는 건
미국의 대통령이다. 문제는 안 해도 될 전쟁을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워 메이드 이지>는 그런 점을 짚었고 오늘 강의
역시 전쟁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가 주제다. 결국 나오는 답은 교과서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애족애국과 동떨어진, 본질적으로 비즈니스 성격에
해당하는 전쟁을 미국이 벌였다는 것이다.
테러는 '정치적 동기를 지닌 폭력'이라고 정의된다. 우리는 오사마 빈 라덴의 알카에다나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같이 국가가 아닌 조직이나 개인에 의한 정치적 폭력을 테러라고 본다. 하지만 테러의 개념을 실제로 들여다보면 국가 테러로
인한 희생자가가 국가가 아닌 조직이나 단체에 의한 테러 희생자보다 훨씬 많다. 대표적인 게 나치 독일 시절 아돌프 히틀러가 수백만 명의 유대인과
동성애자, 장애인 등 이른바 '열등인간'을 살해한 것이다. 미국은 오바마 정부 들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지만, 이 용어 뒤에
숨은 국가적 폭력을 비즈니스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팍스 아메리카'는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
▲ 김재명 성공회대 교수. ⓒ참여연대 |
'소프트 파워' 이론으로 유명한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인류가 경험인 세 가지 국제정치제체가 있다고 했다. 로마 시절의 세계제국제체, 중세시대 봉건체제, 무정부적
국제정치체제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무정부적 국제정치제체다. 각국이 자기 나라를 자신이 지킨다고 하면서 서로 충돌하는 것이다.
세계정부가 없기 때문에 강대국이 국제법을 어겨도 제재를 할 수 없다.
유엔(UN)은 세계정부가 되지 못하고 갈등조정 능력도
허약하다. 미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결의안도 없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코피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오늘은 국제사회가 슬픈
날"이라고 한탄만 했을 뿐 국제법에 의해 미국을 전쟁범죄 혐의로 법정에 세우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이 됐다. 미국은 강력한 군사력과 월스트리트로 상징되는 자본력,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와 같은 연성(소프트) 파워로 세계를
지배했다. 미국은 로마제국 시절 누렸던 평화를 20세기로 가져와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미국이 세계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끌어가는 세상을
꿈꿨다.
미국의 논리는 패권 체제가 안정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에 대항했던 카르타고 입장에서 보면 그 평화는 로마인들의
것이었고 자신들은 노예 처지였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팍스 아메리카나는 미국의 평화이지 다른 국가의 평화는 아니다. 그래도 미국은 자비로운
패권국을 자처하며 가난한 나라를 도와주고 국제질서를 안정적으로 끌어간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배경에 기초해 미국은 9.11 테러 이후
전쟁을 벌였지만 비판적 지식인들은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가 미국이라고 지적한다. 이라크 바그다드로 진격하는 탱크에 이라크 국민들이 꽃을 던지리라
기대했지만 오히려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미국에 대한 감정만 나빠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파 지식인들은 미국의 패권이 없다면 세계는 암흑시대로
돌아간다고 반박하고 있다.
미국의 숨어 있는 국방 예산
군사력을 보면, 9.11 이후 현재 미국은 총
63개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많게는 한국처럼 몇만 명이 주둔하는 경우도 있다. 142만 명의 미군 중 25만 명에 해외에
있다.
미국의 국방비는 지난해 약 7000억 달러였다. 9.11 테러 전인 1999년에는 3000억 달러 수준이었다. 약 10년
동안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그럼 그 10년 동안 미국 경제가 두 배로 성장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미국의 정부 예산이 두 배로 늘어난
것도 아니었다. 현재 미국의 국가부채가 총 14조 달러다. 지난 10년간 엄청난 부채가 누적됐고 지금 미국의 경제가 힘든 것 역시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쓴 돈 탓이 크다.
미국의 국방비는 2001년부터 계속 상승곡선을 그렸고 오바마 행정부는 앞으로 국방비를 2010년
6980억 달러에서 2011년 6710억 달러, 2012년에는 6310억 달러로 줄이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국방예산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지출이 그 정도나마 줄어들게 된 것이다. .
게다가 미국에는 숨어있는 국방예산도
있다. 집계되는 국방예산은 국방부만 대상으로 할 뿐 미 중앙정보국(CIA) 등에 있는 대테러 전문가들이 쓰는 예산은 들어 있지 않다. 이 숨은
예산을 합치면 미국의 실제 국방관련 예산은 최소 3000억에서 7000억 달러까지 늘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 에너지부에서
핵무기 제조 및 관리에 편성한 200억 달러가 있다. 국무부는 '테러와의 전쟁' 대신에 '해외비상작전'으로 이름을 바꾼 분야에 85억 달러를,
전 세계 친미 국가들의 군 장성을 관리하는 비용인 대외군사기금(FMF)으로 55억 달러를 쓴다. 미 연방수사국(FBI)과 CIA도 테러 대비 및
해외비상작전 예산이 있다. 이런 돈들은 일반인들이 열람할 수도 없다. 미국의 국방예산이 줄었으니 앞으로 평화롭게 갈 것이라는 예상은 단면적인
얘기다.
또 미국의 국방부 예산은 기본예산과 해외비상작전 예산으로 갈려 있는데, 정부가 줄이겠다고 한 예산은 후자다. 5100억
달러에 달하는 기존 예산 중 3000억 달러는 미국 군수업체들이 받아간다. 그 돈은 줄어들지 않는다. 내년도 예산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중동정책 목표, 민주주의 확산이 아니다
냉전 시절 미국의 대소련 전략은 한마디로
봉쇄였다. 세력이 커지는 걸 막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의 대외전략을 물으면 대답이 각각 다르다. 한마디로 말하기 힘든
것이다.
<미국의 거대전략>이라는 책을 쓴 로버트 아트 미 브랜다이스대 교수는 미국의 대외전략에 대해 △ 미국 본토에
대한 공격 방어 △ 유라시아 지역에서 강대국들의 전쟁 방지 △ 값싼 석유의 안정적 공급 등을 들었다. 이 거대전략의 목표는 미국의 지구적
지배력을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는 것이었다.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진단이었다.
레이건 행정부 시절 중동지역을 책임졌던 앤서니 지니
미군 중부군 사령관은 전 세계 석유매장량의 62% 이상이 페르시아만 일대에 있는 만큼 미국과 연합국들은 걸프지역 석유자원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20세기 전반까지는 강대국들이 식민지를 소유해 자원을 가져갔지만 이제는 자유로운 접근, 즉 '효율지배'를 통해 주권은
허울로 남겨놓고 경제를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이 추진한 중동정책의 본질은 민주주의의 확산이 아니었다. 그 나라가
독재국가인지 여부가 아니라 친미 국가인지 여부가 중요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의회도 없는 독재국가지만 미국이 사우디에 민주주의를 얘기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반면에 이란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않았는데 핵무기 사찰을 해야한다고 미국 지도자들은 열을 낸다.
이집트의 경우
주요 산유국도 아니고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은 독재자였지만 오바마 입장에서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미국의 중동정책을 지지하느냐 여부가
문제였다. 무바라크는 미국의 친 이스라엘 일방주의와 석유 정책을 지지했다. 이것이 미국의 이중 잣대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중동
평화를 위협하는 나라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팔레스타인계 지식인으로 몇 년 전 사망한 에드워드 사이드 전 콜롬비아대 교수는 미국의 중동
전략을 '친미국가 만들기'라고 지적했다. 이라크의 경우 미국이 후세인을 제거한 이유는 단순히 석유 확보 차원이 아니라 후세인이 이스라엘에
미사일을 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랍을 연구하는 미국의 전문가들이 미국의 중동정책을 잘못 이끌어간다는 비판도 있다. 일례가 버나드
루이스 미 프린스턴대 명예교수의 동심원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동심원의 맨 바깥에는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 이란 등 정권과 국민 모두
미국을 싫어하는 국가가 있다. 그 안 동심원에는 요르단, 사우디, 이집트, 모로코 등 친미 성향의 정권이 있지만 국민들은 반미 성향인 국가가
있다.
마지막으로 동심원 가운데에는 쿠웨이트, 카타르, 바레인, 아랍에미리트연합(UAE) 같이 상대적으로 정권과 국민 모두 친미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있다. 미국의 중동정책은 그 중심부를 확장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단순 명쾌한 논리를 좋아하는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성격과 맞아떨어졌다. 이에 따라 공격을 당한 게 후세인과 카다피다.
미국의 중동 민주화 논리는 모순이다. 아프간과 이라크를
침공했지만 다른 국가들을 바라보진 않았다. 미국은 우방인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가진 채 팔레스타인을 탄압하는 것을 감싸면서 이란을 친미 국가로
둘러싸 포위하고 있다. 중동의 반미 감정이 높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보통 미국인들은 중동이 왜 자신들을 미워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와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둘 다 독재자이고 각 나라에서 국민적 저항이 일고 있지만, 알아사드는 리비아의 독재자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로부터 정권을 이어받아 나라를 공포로 몰아넣은 2대 독재자다. 어찌 보면 카다피보다 더 악랄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제사회가 두 나라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나토(NATO)는 리비아 인들의 인권을 지켜준다는 명분으로
공습을 가했다. 시리아는 찬밥 신세다. 이 두 독재자의 운명을 가른 변수는 석유의 유무다. 석유 때문에 카다피는 운명이 고단해진 처지가 됐지만
알아사드는 그렇지 않다.
이익이 있으면 개입하고 없으면 안하는 게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이다. 리비아 석유가 리비아에서는 하루
16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한다. 시리아에서 나오는 석유는 이보다 훨씬 작다. 유럽국들은 리비아의 석유를 탐내지만 미국은 원래 리비아 석유는
별로 수입하지 않았다. 이번 리비아 사태에서 미국은 그다지 개입하지 않은 반면, 프랑스나 영국 등이 있는 나토군이 열심이었던
이유다.
미군은 전 세계 7개의 사령부를 두고 있는데, 이중 산유국이 많은 중동 지역을 관장하는 곳에 중부군 사령부다. 미국 경제의
숨통을 쥐고 있는 중동의 석유 확보를 군사적 물리력으로 뒷받침하는 게 중부군 사령부다.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영화를
보면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의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 잘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블러드 오일'이라는 말도 존재한다. 20세기 들어
석유는 국제분쟁의 주요 원인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진주만 공습도 미국이 일본의 중국 침공을 이유로 석유 공급을 끊으려고 하자 동남아
지역의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거치적거리던 미군을 공격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문제는 석유가 유한 자원이라는 점이다. 석유
지질학자인 킹 허버트에 따르면 미국은 1970년대 석유 생산량이 정점을 찍었다. 2011년에 세계가 '오일 피크(석유생산량 최정점)'을 찍었다는
말도 있다. 2011년이 정점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세계가 오일 피크 시대로 접어든 건 사실이다. 새로운 석유 매장층을 발견한 횟수도
1950년대 이후 계속 줄어왔다.
미국 내 석유 생산량이 정점을 찍고 내려온 반면 수입량은 점점 늘어났다. 미국과 유럽 국가의 석유
시추량은 10년 이내로 바닥이 날 수 있는 반면, 중동 지역은 앞으로 50~100년 동안 석유 생산이 가능하다. 그래서 중동 석유에 대한 실효적
지배가 필요하다는 말이 자꾸 나온다.
미국은 전 세계 인구의 5%를 차지하지만 석유 소비량은 21%에 달한다. 하루 석유 소비량이
2000만 배럴이다. 연간 70억 배럴인데 석유 매장량은 전 세계의 2.2%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석유 수입량 역시 전 세계의 21%에
달한다.
미국으로선 안정적인 석유 공급원을 찾는 게 최대 과제다. 부시 대통령 시절 이전에도 미국 대통령의 가장 큰 관심사는 석유
확보였다. 당시 캘리포니아주 등에서 대규모 정전이 일어나 에너지 문제가 대두되던 시절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은 반미 독재자로 부상해 원유 판매
대금을 달러가 아닌 유로로 받겠다고 나선 후세인의 이라크에게 대량살상무기라는 누명을 씌우고 점령한 것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이라크에 석유가
없었다면 미국의 침공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반미 정권이 들어선 베네수엘라나 이란은 몇 년 전부터 미국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석유의 무기화가 필요하다고 예기한다. 러시아나 중국도 석유시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미국의 심기를 적잖게 건들이고 있다. 미국의 전문가들은
석유가격 상승 원인으로 신흥 경제국인 중국의 수요 증가를 꼽지만 본질은 석유의 수요와 공급 차원에서 경제 외적인 정치 위기가 대두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외정책이 잘못될 경우 지구촌에 엄청난 석유파동이 닥칠 수 있다. 한국도 미국과 동맹으로 묶여 있는데 이에 따른 유탄을 맞지 않을지
걱정되는 부분이다.
또 하나의 미국 경제, 군수산업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밀어붙이는 까닭에 대해 미국의 군수업체와 석유회사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 바 있다. 미국의 국방예산과 마찬가지로 무기생산 기업의
매출 역시 전쟁이 일어난 이후 배로 뛰었다. 일례로 록히드마틴이 올리는 매출은 한국의 국방예산보다 많다. 전 세계 100대 군수기업 중 미국
기업이 45개다.
미국의 무기 수출량도 엄청나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주요 재래식 무기 수출국을 보면 미국은 국제 시장에서
30%를 차지한다. 미국산 무기의 주요 수입국은 한국이 1위고 호주, UAE가 뒤를 잇는다. 파키스탄, 그리스같이 가난한 국가들도 미국의 무기는
엄청나게 들여온다. 중동국가의 국방비 비율은 국민총소득(GNP) 대비 6.8%에 달해 전 세계 평균보다 두 배 이상 높다. 친미 성향의 정권이
'오일 머니'로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사들여 중동을 세계에서 가장 군사화된 지역으로 만들고 있다.
9.11 테러 이전에는 소련의
붕괴로 재고가 쌓여 경영이 엉망이었던 미국 군산복합체는 전쟁으로 호기를 맞았다. 군산복합체란 군부와 방위산업체의 상호의존체제를 일컫는 용어다.
군부와 민간기업, 정치가가 각각의 이익을 위해 유형 무형의 제휴를 유지하면서 때때로 언론까지 끼어들어 국방 지출의 증대를 도모하는 사회적
유착구조를 말한다.
군산복합체 체제에서 퇴역 장성이 군수기업에 입사해 시장을 개척하거나 정계에 로비를 해 새로운 군사 프로젝틀
진행하는 게 대표적인 예다.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부 장관이 물러난 건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재정 지출을 줄이려는 오바마 대통령의
심기를 건들였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현재 리언 파네타 국방장관은 연방정부 예산회계를 맡던 인물이다.
'죽음을 파는 상인'들은
정부에 끝없는 로비를 벌인다. 록히드마틴이 개발하는 스텔스 전투기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오바마 대통령이 지원금을 줄이려고 하자 250명의
의원들이 서한을 보내 말혔다. 군수업계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세력이 그만큼 많다는 걸 의미한다.
칼라일 그룹은 전현직 정부 고위층을
영입해 '안면 자본주의'를 실현한 대표적 예다.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 프랭크 칼루치 전 국방장관,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 등이 퇴임 후
이곳에서 기업의 이익을 위해 일했다. 딕 체니 전 미국 부통령은 에너지기업 핼리버튼의 회장을 겸하면서 이라크 석유시설 복구 사업을 수의계약해
해마다 15만 달러의 연봉을 받고 1800만 달러의 스톡옵션을 보유했다.
미국이 국방예산 중 기본예산은 감축하지 않은 탓에
군산복합체를 당장 해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지만 장기적으로 미국의 대외정책을 평화 지향적으로 바꾸고 군수업계가 무기가 아닌 다른 제품을 만들
수 있도록 함으로써 미국의 경제구조를 개편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석유와 무기 산업을 뒤에 업은 미국의 패권주의적 대외정책의
희생자는 민초 뿐 아니라 일반 미군 병사들이다. 앞으로 우리가 걱정해야 할 건 미국이 계속 이러한 정책으로 반미 국가를 건들여 제3차 석유파동이
일어나고 전쟁으로 번질 가능성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미국의 대외정책을 계속해서 비판해야 하는 이유다.
*[9.11 기획
강좌] <1> "테러와의 전쟁, '美 헤게모니' 지키기의 마지막 안간힘"
"테러와의 전쟁, '美 헤게모니' 지키기의 마지막 안간힘" [9.11 기획 강좌 1강]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와 프레시안은 9.11 10년을 맞아 9월 5일부터 매주 월요일 5회에 걸쳐 '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를 주제로 연속 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프레시안 황준호 기자가 정리한 성공회대 김민웅 교수의 1강 강의입니다. ☞강연 상세 안내 보기
참고로 프레시안에 연재된 [9.11 10주년 세계의 시각]도 함께 소개합니다. 바로 가기
"테러와의 전쟁 '美 헤게모니' 지키기의 마지막 안간힘"
[9.11 기획 강좌] 1강 김민웅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
'9.11의 역사적 기원과 테러와의 전쟁 10년'이란 주제로 있었던 김민웅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의 첫 번째 강연을 요약해 소개한다. 두 번째 강좌는 김재명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가 '전쟁의 정치경제학 : 대테러전쟁의 논리와 실재'를 주제로 오는 19일 진행할 예정이다. 편집자
▲ 김민웅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 ⓒ프레시안 자료사진 |
9.11의 역사적
기원과 테러와의 전쟁 10년
한국 언론에 국제뉴스가 1면에 등장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다 보니 국제적인 문제가 우리의 현실과 어떻게 유기적으로 얽혀 돌아가는지를 알기가 쉽지 않다.
100년 전 동아시아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던 당시와 비교해 보면, 정보의 양은 많아졌을지 몰라도 이해력은 오히려 후퇴한 측면이 있다.
김구 선생이나 여운형 선생은 조선의 운명을 사고할 때 '상해는? 모스크바는? 동경은?' 이런 변수들을 고민하면서 세계적인 네트워크가 머릿속에서 작동했다. 그런 고민을 해야 조선의 정세를 풀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평양에서는? 워싱턴은? 북경에서는?' 이런 고민을 별로 안 한다. 정보 공개 사이트인 위키리크스가 몇 년 뒤에 알려주는 정보만을 가지고 뒷북이나 치고 있다.
마찬가지로 9.11
테러는 왜 터졌고, 그 후 10년 동안의 정세는 어떠했는지를 정리하지 못하면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의 정체를 알기 어렵다. 9.11 이후 미국이 밀어붙인 '테러와의 전쟁'은 우리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2000년 1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발표한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는 게 어려웠던
것도 9.11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군사력의 지배에서 자본의 직접 지배로
좀 긴
시선으로 9.11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세계적 패권의 상층부에는 미국과 소련이 있었다. 세계대전
당시 두 나라는 연합군을 형성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서 그 관계를 더 이상 유지할 이유가 없어지면서 각기 가진 체제적 본질상 적대 관계로 돌아섰다..
1945~48년 한국은
미군정이 지배하고 있었다. 미국은 점령체제를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질서를 한국에 만들었다. 일본 식민지 체제에 협력했던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복권시키고, 그걸 기반으로 미국이 원하는 질서를 만들었다. 거기에 치열하게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들과 좌파들은
제거했다. 파시스트의 정치적 복원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한국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일본,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이 전쟁 후에 제거됐다. 이런 나라들에서 좌파가 집권하면
미국에 불리하니까 좌파를 제거하고 파시스트들을 다시 세운 것이다. 일본에서는 우파들을 결집시켜 자민당을 만들었다. 이처럼 냉전 체제는 파시스트
세력을 복구시켜 미국과 결합해 소련과 대치하는 체제였다. 이 시기 미국의 영향권에 있던 제3세계의 정권은 대부분 파시스트 군사정권이었다.
또한 2차 대전에 참전해 대공황을 극복했던 미국에 있어 전후의 평화는 미국 자본주의 체제에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평화의 시기에도 전쟁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냉전체제다.
그런데 1980년대 말 냉전이 무너지면서 그러한 질서에
의지하는 방식이 의미가 없어졌다. 제3세계에서 군사정권 체제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내부의 심각한 반발과 반미운동의 성장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또한 군사력을 앞세워 자본주의의 패권을 유지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게 됐다. 따라서 냉전이 끝나면서는 자본이 직접 세계를 통치하는 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다. 노동은 통제하고 자본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면서 자본이 직접 세계를 통치하는 시스템이다.
한국이 걸어온 길도
정확히 그 추세와 일치한다. 냉전 시기였던 박정희-전두환 시절은 군사력이 중심이 되던 때였다. 노태우 시절은 군사력과 자본의 힘이 균형을
이뤘고, 김영삼 정부 시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서 자본시장을 개방함으로써 한국도 자본의 통치 시스템으로 들어갔다. 그
때문에 IMF 구제금융을 겪었고, 김대중 정부 시절 일정한 제약을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마침내 '권력이 자본으로 넘어갔다'는 말을 했다.
이명박 정부는? 자본 자체가 권력이 된 것이다.
냉전이 끝나면서 신자유주의는 복음이라고 선전됐다. 미국의 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을 얘기하면서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미국식
신자유주의로 오기 위한 변증법적 몸부림의 과정이었고,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역사를 꿈꿀 필요가 없다고 선전했다.
그렇게 해서 자본이
중심이 되는 시스템이 돌아가게 되었으나, 결국 도처에서 문제가 생겨났다. 중남미 국가들의 금융 위기가 잇달았고, 1997년에는 동아시아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투기 자본이 활개를 치고, 과잉생산이 구조화되면서 문제가 터진 것이다. 빚으로 쌓아올린
부채경제의 파산이었다.
한편으로 사람들이 이런 시스템의 문제를 알기 시작했다. 1999년 미국 시애틀에서는 세계무역기구(WTO) 회의를 열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시위가 일어났다. 자본의 통치가 부를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더 가난해지고 경제는
망가진다는 걸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이 진짜 의도한 것은?
그 과정을 거치면서 미국의
지배자들은 세계자본주의의 패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다시 주먹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미국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다.
10여 년간 뒷방에서 쉬고 있던 조폭들이 조지 부시 대통령의 등장과 함께 다시 밖으로 나오게 됐다.
네오콘들의 핵심 세력은 베트남전쟁 당시 정책 결정자와 이론가들이었다. 베트남전에 대해서는 미국의 제국주의 전쟁이 실패한 것이라는 평가가
있었지만, 네오콘들은 '우리가 더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본다. 세계는 갈등과 무력 충돌을 피할 수 없는데, 그걸 위해서는 어느
한 나라가 중심에서 군사적 헤게모니를 강하게 확보해야 한다고 본다.
그 와중에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이 통합되고 유로화가 통용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유럽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이
탄생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그리고 중국이 부상했다. 미국이 지배하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세력이 많아지고, 체제의 비밀을 다 알게
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을 단숨에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길은 에너지원 장악이다. 독수리(미국)가 날개를 펴서 한 쪽
날개로는 유럽을, 한쪽으로는 중국을 압도하고, 발톱으로는 중동의 원유를 장악하면 유럽과 중국의 성장을 일정하게 저지할 수 있다. 프랑스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했던 것은 그 나라가 정의로워서가 아니다. 미국의 의도를 알았기
때문이다.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란 것은 미국의 바로 그러한 전략에 따라 진행된 것이다. 9.11 테러 사건 자체가
그것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계기가 됐던 것인지는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확실한 것은, 9.11 이후 미국의 외교정책과
네오콘의 전략은 미국 헤게모니의 동요를 차단하고 유럽·중국의 성장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그 행동의 원칙은 정신이나 자본의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군사력을 확실히 장악하는 것이었다.
9.11 이후 미국은 안보국가(Security State) 시스템으로 전환됐다. 9.11이
미국인들에게 준 엄청난 충격은 2차 대전 후 미국에서 불었던 매카시즘 열풍보다 더 강력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줬다.
매카시즘은 한 마디로 냉전 체제가 들어서면서 미국 자본주의 체제와 그
대외정책에 반기를 들 좌파를 제거한 사건이다. 그러나 9.11 이후에는 그보다 더한 일이 벌어졌다. 미국의 시민적 자유가 축소되고, 안보를 위해
민주주의가 축소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의회의 승인 없이 대통령과 소수의 정책결정자들이 전쟁 개시를 결정해 전 인류의 운명을 쥐고
흔들었다. 비판을 봉쇄하고 표현의 자유를 막음으로써 언론들은 숨을 죽였다.
네오콘들은 그렇게 해서 이라크를 침공했는데, 사람들은
이라크 다음엔 동아시아의 북한을 손 볼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자 북한은 핵과 미사일 전략을 더욱 강화하는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되지 않았다. 이라크 전장에서의 저항이 생각보다 강력했기 때문이다. 이라크인들의 치열한 저항이 역설적으로 동북아시아에서의 평화를 가져다줬다고 할까.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도 생각보다 어려웠다. 미군 병사들은 전장 투입 주기가 길어지면서 지쳐갔고, 전쟁의 트라우마를 가지게
됐다.
또한 사람들은 전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게 됐다. 결국 미국은 전 세계에서 두 개의 전선을 동시에 감당할 수 있다고 큰 소리쳤던 '두 개의 전선전략'(Two Fronts Strategy)을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되고 말았다. 제국의 군대는 하나의 지점에만 집중되어야 했다. 그러나 국가적 부담은 덜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심각해졌다.
그 정치적인
결과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이었고, 체제적 부담은 2008년 금융위기로 드러났다. 그러나 오바마가 이 문제를 한 번에 풀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 오바마가 급진적인 선택을 하기가 어려운 시스템이다. 그래서 오바마 개인으로는 정치적으로 희생당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 미국의 정치 현실을 보면 실제로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
▲ 2003년 5월 1일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항공모함 애이브라험 링컨호에서 이라크 전쟁 종전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은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다. ⓒ프레시안 |
한반도, 미국의 양대 지배 전략이
중첩된 곳
동북아시아와 한반도로 시각을 좁혀 보자. 앞서 설명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한반도에는 미국이 요구하는 전쟁
시스템이 구축됐다. 6.15 공동선언과 2007년 10.4 남북 정상선언 같은 것들은 그 시스템을 돌파하기 위한 시도였다. 하지만 부시 정부는
한미 FTA를 통해 한국 내 시장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하는 등 한반도를 그냥 놔두려 하지
않았다.
한반도는 미국의 네오콘적인 군사 시스템과 미국 자본의 질서가 지배하는 방식이 중첩되는 곳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그에 대한
문제 제기나 저항의 강도는 상대적으로 낮다. 유럽처럼 진보적 사회운동의 결과로 형성된 높은 사회의식 속에서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는 힘이 약하다.
한국은 세계
1~2위를 다투는 미국의 중요한 무기 시장이다.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게 안 되는 이유를 미국의 군수산업적 이해와 관련해서 보면 당연하다. 평화체제를
만드는 순간 미국은 최대의 무기 시장을 잃게 된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미국 자본의 이익과 군사적 이익이 중첩된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면 남북관계도 안 되고, 우리의
살림살이도 거덜나는 것이다. 대학 등록금도 화끈하게 낮출 수 없고, 제대로 된 복지정책을 펴는 것도 힘들다.
교육비, 병원비, 노후 보장 같은 걸 하려면 우리의 재정 구조가 평화적인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엄청난 군사 시스템을 돌리기 위해 돈이 쏟아 부어져서는 복지가 실현될 수 없다. 복지
문제뿐만 아니라 환경 문제도 마찬가지다. 제주 해군기지 논란을 보면 환경, 평화, 복지의 문제가 같이 돌아간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시스템을
개혁하고 변화시키려면 미국의 패권 시스템을 정확히 이해하고 분석하고, 그것과 우리의 관계를 잘 짚어 내서, 그 문제를 풀어나갈 고리를 하나씩
풀어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분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연평도에서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는 작년에 충분히 경험했다.
한반도의 분단에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군사적 장치가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이걸 풀어내는 과정은 이 땅에 여러 가지로 중첩되어 있는 미국의 패권적 지배체제의 압박을
해결하는 것이며, 평화체제가 가져올 새로운 미래의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이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민주주의가 세계적 시민의 권리와 위상을
획득하는 기초가 될 것이다. 이걸 도외시하는 일체의 정치와 운동, 그리고 교육과 학문은 이 시대 동아시아가 얽혀 있는 모순을 타파하는 능력을 갖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