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한국인의 “바깥세상 보기”

  • 강사

  • 기간

    • 2011. 7. 8 ~ 2011. 7. 22
  • 시간

    • 금요일 19:00~21:30 총3회
  • 수강료

    50,000

    • 파격 할인혜택
    • 참여연대 회원2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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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 정보

    강의소개 |

     의 주체성은 늘 타자에 의해서 규정되어진다. “타자에 대한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도 만들어지지 못한다. 예컨대 조선시대 한반도 주민들의 자아 의식은, 중국에 지지 않는

     성리학적 문화에 대한 (때로 과도한) 자신감 (소위 소중화 인식”)과 일본이라는 또 하나의

     이웃에 대한 우월감으로 결정지어졌다.  근대 한반도의 사정은 어땠는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것은 식민모국 일본에 대한 모방 의지와 피해의식, 열등감이 하나로 아우러지는 현해탄

    콤플렉스나 해방 후 미국에 대한 이와 비슷한 애증관계다. 그러나 일본, 미국을 제외한

    세계를, 근대 한반도인들이 과연 어떻게 보고, 어떻게 관계 맺고, 그 관계에 의해서 자신들의

    주체성을 어떻게 만들어갔는가? 이 강좌의 의도는, 중국과 소련/러시아, 그리고 폴란드나

    아일랜드 등 유럽의 소국들에 대한 근대 한반도인들의 의식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오늘날

    남한인들의 자아의식에 각종 문제들을 제기해보려는 것이다. 예컨대 중국 혁명에 대한 식민지

    지식인의 커다란 관심만큼, 오늘날 우리에게 중국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과연 있는가? 쏘련의

    사회주의적 실험의 긍정적 측면까지도 고려에 넣곤 했던 식민지 시대의 온건

    자유주의자들만큼, 오늘날 남한 자유주의자들은 레드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로운가? 근대

    한반도인들의 심상지리의 이해는, 결국 오늘날 우리에게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는 데에 도움될

    수 있을 것이다.

     

    강사소개 |

    박노자 (Vladimir Tikhonov)  고국 쏘련에서 조선 고대사를 전공했으며, 지금 노르웨이에서

    살면서 주로 한국 근대사를 공부하면서 동아시아 근대에 대해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오슬로대학

    교원 노동자이며, 집에서 아들 (9)와 딸 (6개월)을 키우고 있다.

     

    강의 일정 |

    날짜

    순서

    주제

    07.08

    1

    러시아관

    07.15

    2

    중국관

    07.22

    3

    유럽 소국관

     

    강의정보 |

    일시 : 2011. 7.8 ~ 7.22 금 오후 7~ 930분 총 3

    장소 : 참여연대 느티나무홀(B1)

    수강비 : 5만원(참여연대 회원, 대학생 50% 할인)

     

     

    후기 3

    • 박노자의 <근대한국인..> 3강 후기

      2011.7.27 느티나무 근대 한국인의 “바깥세상 보기”

      7월 8일부터 여름학기 강좌로[근대한국인의 "바깥세상 보기"]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강좌는 근대 한반도인들의 러시아, 중국, 유럽 소국관에 관한 의식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현재 남한인들의 자아의식에 각종 문제들을 제기해는 의도로 기획되었습니다. 강좌소개 보기>>
      3강 <유럽소국관>의 정리 후기는 자원활동가 신다음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왜 유럽 소국관인가?

      근대 한국인의 미국에 대한 생각이 긍정적 이지많은 않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 제일 먼저 서울의 공사관을 철수 한 나라가 미국이었다. 미국은 대체로 일본을 지지하는 쪽이었고, 한국의 식민통치에 개입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한국인들의 마음에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생겼다.

      30년대 후반, 조선이 일본의 속국으로 대미항쟁을 준비하던 때부터는 미국에 대한 비판이 친일지식인에게 거의 의무화 되어 있었다. 주로 미국의 인디언 학살이나, 흑인 차별, 43년 44년 무차별 폭격, 이런 것들이 비판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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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자 교수

      한국전쟁 이후 미군정 때부터 미국에 대한 비판이 현실적으로 불가능 해졌지만 이미 구한말 때부터 미국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는 것을 위에서 알 수 있다. 지금도 미국에 대한 전적인 찬양은 극우주의자들 아니면 잘 없다.

      그런데, 유럽에 대한 인식은 좀 다르다. 예컨대 프랑스의 경우, 사람들은 신식민주의 정책, 아랍이민자들에 대한 차별 보다는 똘레랑스(관용)를 먼저 떠올린다. 인권, 평등, 박애 등을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특히 덴마크나 노르웨이 같은 북부소국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긍정일방에 가깝다. 노르웨이를 생각하면 복지국가, 평등 재분배 이런 것들이 떠오르고, 핀란드는 교육제도 등을 떠올린다. 하지만 핀란드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징용제를 시행하며, 철저히 군사화 된 나라라는 것은 잘 모른다.

      축약해서 말하자만 미국에 대한 비판은 어느 정도 균형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유럽에 대한 시각은 거의 찬양적인 태도로 일관된다. 이것의 시작은 무엇인가.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을 짝사랑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알아보기 위해서 유럽 소국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다.

      우리에게 유럽의 나라들은 어떠 의미인가?

      이광수는 조선민족개조론을 주장했는데, 이 민족개조의 궁극적 목표는 앵글로색슨족으로의 개조, 성실, 자유지향, 책임감, 협동성과 독립심. 이 모든 덕목을 완벽히 갖추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럽인들에 대한 찬양적 묘사는 극우파 이광수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중상층인 조선 지식인에게는 보편적 감정이었다. 박승철은 1920년대에 유학을 다녀 왔는데, 그가 본 영국신사는 완벽한 모델이었다.

      이런 현상은 개화기 때부터 나타난다. 유럽영웅 전기는 조선에서 가장 잘 팔리는 책이었다. 특히 나폴레옹 전기는 최남선이 발행했던 잡지에 1호부터 연재되었다. 조선의 중산층에게는 유럽의 중산층이 모델이 되는 분위기였다.

      유럽에 대한 조선인의 감정은 단연 압도감이었다. 박승철은 처음 파리에 방문 했을 때 “집이 아름답고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작은 차들이 소리를 안내고 달리고 있다. 화려하고 다채롭다”고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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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자 교수

       

      그렇다면 유럽에 대한 압도감, 모범으로서의 이미지 말고 다른 시각도 있었는가.

      세기말적 유럽, 퇴폐적인 이미지의 시각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유럽문명에 대한 환상이 일부분 깨지고, 유럽민족의 타락에 대한 관심이 고조 되었다. 이런 시각을 꼭 부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식민지 조선 중산층은 유럽의 에로티즘이 섞인 센세이션적인 이야기를 은근히 즐기는 분위기였다.

      나혜석은 파리에 다녀와서 쓴 기행문에서 ‘혼전동거’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기술하기도 했으나, ‘프랑스 여성에 대한 활동성, 전문성, 직업성 등을 본받아 조선의 여성들도 신여성으로 변화하자’고 전했다 한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도 따지고 보면 유럽의 대국에 관계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조선인의 유럽소국관

      조선인들에게 영국이나 독일은 대국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유럽의 대국처럼은 될 수 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지만, 소국에 대해서는 대체로 우리도 닮아 갈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소국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다 못해 긍정일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개화기 1888년대부터 유럽 소국이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모델로 제시된 것을 들 수 있다. 이때부터 조선에는 유럽 소국에 대한 자세한 역사적 이야기가 소개 되고, 소국에 대한 테마가 조선담론으로 제시 되곤 했다.

      하지만 개화기 때에는 유럽 소국에 대한 기본적인 것들이 소개 되는 수준이었고, 본격적으로는 식민지 시대에 독립을 찾은 폴란드와 아일랜드가 조선에 가장 근접한 모범으로 제시 되곤 했다.

      북부 소국에 대한 인식

      유럽소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불대칭성이 명확했다. 북유럽사람들은 비교적 쉽게 조선에 왕래 할 수 있었고, 조선에 대한 기록도 남길 수 있었던 반면, 조선인이 북유럽게 가는 것은 극히 어려웠다.

      개화기 때에는 스웨덴 기자들이 조선에 방문하여 자세한 기사를 쓰기도 하고, 1890년대 노르웨이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활동 했다. 덴마크 기술자들은 조선에 기술을 전하기도 하였지만, 조선인이 가서 활동을 하거나, 기록을 남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 했다고 할 수 있다.

      2-30년대에야 비로소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갈 수 있었는데, 조선인들이 느낀 것은 강력한 압도감이었다. 사회적 조직성 안정, 단결, 기술, 문명과 자연의 균형 등 모든 측면에서 소국이지만 문명적이라는 느낌을 강력하게 받았다.

      덴마크의 농업, 농민조합 이런 것들은 조선인들, 특히 개혁파나 민족주의자들에게 강력하게 와 닿았다. 특히 독일어권의 압도적 영향 안에서도 민족 언어, 정신을 고수했다는 측면이 보수적인 기독교 우파들에게 어필했고 자신의 언어와 민족성을 계승하며 나라를 잘 보존한 측면에서 덴마크는 꿈의 나라, 문명의 최상국이라고 느꼈다.

      박승철은 덴마크에 다녀와서, 그 당시 가난한 독일에 비해 덴마크는 “부유하다, 자동차도 많다, 안정적이다”라고 느꼈다고 한다. 특히 덴마크를 여행한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농업의 효율성, 생산성에 놀라고, 덴마크의 농업 기술, 국민조합, 소농경제에 도움이 되는 조합, 농업개량 등을 벤치마킹 하고자 한 것들이 많이 있다.

      스웨덴은 조선유학생들이 잘 가는 나라였다. 최영숙은 스웨덴을 보고 인간이 만든 최고의 사회로 표현했고, 돌아와서 스웨덴에 대해 “낙원에 다녀왔다.”고 극찬 할 정도로 스웨덴을 좋아했다.

      안정됨, 편리함과 같은 인식은 우리가 아직까지도 갖고 있는 유럽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들이다. 유럽 북부는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의 ‘모델’로서의 위치가 강하다. 해방 이후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의 의사들이 우리 나라에 많이 파견된 것긍정적인 인식이 더욱 강화된 계기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북부가 조선의 현실적 모델이었다면, 아일랜드 같은 경우는 영국제국에서 독립을 되찾았다는 의미에서 조선인들에게 영감을 주는 나라였다. 하지만 유럽의 소국들 중에도 에스토니아처럼 가난하고 불안정한 사회들은 조선이 벤치마킹 할 만한 나라가 아니었다고 하고, 부유하지 않은 나라들은 배울 것이 없는 나라라고 치부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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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자 교수

       

      마무리하자면, 대체로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나라들에 대한 긍정일변은 안정성, 조직성, 문명과 자연의 공생적 관계 등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평형적으로 이런 유럽 소국과 우리를 비교하기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스웨덴 같은 경우에는 강력한 농업이 있고, 노르웨이나 덴마크는 농업사회였다고 해도 영국 독일같은 대국과 쉽게 교류할 수 있는 지형적 위치가 있다.

      유럽 소국은 이를 이용하여 물질적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20년대만 하더라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은 19세기 말부터 발전해온 강력한 노동운동의 기반이 다져져 있다. 민중운동이나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탄압대상이었던 조선과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였다.

      또한 자본과 노동의 타협이 동등한 세력 대 세력으로서 위치를 갖고 있다. 이 바탕에는 강력한 노동 운동이 받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런 전제 위에 복지국가가 유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회를 유지해주는 안정망 등의 배경이 조선과 상당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이런 차이는 간과되고, 보이는 이미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 박노자의 <근대한국인..> 2강 후기

      2011.7.20 느티나무 근대 한국인의 “바깥세상 보기”

      7월 8일부터 여름학기 강좌로[근대한국인의 "바깥세상 보기"]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강좌는 근대 한반도인들의 러시아, 중국, 유럽 소국관에 관한 의식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현재 남한인들의 자아의식에 각종 문제들을 제기해는 의도로 기획되었습니다. 강좌소개 보기>>
      2강 <중국관>의 정리 후기는 자원활동가 신다음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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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자 교수

      - 들어가며

      18세기 말까지 중국은 조선인에게 하나의 우주라고 할 수 있었다. 조선의 자아는 중국을 생각하지 않고는 상상 할 수 없고, 중국과 조선은 각각 다른 나라가 아닌 국민적 형제라고 하여도 비약이지 않았다.

      조선 지식인에게 중국은 소우주로써 배움의 터전이며, 한편으로는 경계해야할 대상이기도 하였다. 이에 중국에 대한 정책은 조선의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런 중국에 대한 견해는 19세기 후반 더욱 더 재미있게 변한다.

      중국은 조선보다 서양기술배우기 운동을 먼저 시작했기 때문에 조선에게 중국은 외부세계와 연결 될 수 있는 통로였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야는 책이었다. 중국에서 들여온 지도들은 김옥균 같은 개화파 들에게는 지리교과서로 사용 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고, 한국 초기 신문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는 상해에서 발행됐던 상해신보에 쓰인 글들을 토대로 기사를 게재했다.

      중국이 조선 개화의 관문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중국은 조선과 외부세계의 연결을 어느 정도 선까지만 허가하여 주었고, 조선이 지나치게 외부와 연결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는 중국이 조선을 자신의 영향권 안에 두기 위함으로 보이게 되면서, 김옥균과 같은 급진개화파로 하여금 중국을 견제하게 만드는 구실이 된다.

      고종의 명령으로 상해에 가게 된 윤치호의 눈에 비친 중국은 더럽고 반근대적인 나라로 보였다. 윤치호는 중국을 조선근대인들이 가장 멀리해야 하는 나라라고 이야기 하였다고 한다.

      19세기 말 중국은 조선인에게 근대화의 산실이라는 생각부터 부정적 타자로서의 시각까지 다양하게 인식되었다. 각각의 인식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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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근대로서의 중국
        중국이 더럽고 비위생적인 나라라는 인식이다. 이런 인식이
        잘 나타난 것은 바로 독립신문이다. 독립신문은 중국에 대 
        한 우호적 인식 깨뜨리기를 특기로 삼은 신문이었다고 할
        정도다.


        독립신문은 서양에는 우호적이었지만 중국에는 아주 적대
        적이었다. 중국이 조선을 유교화, 보수화 시키고 발전을 가
        로 막는다는 논조의 사설을 싣기도 하고, 특히 화교들에 대
        해서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심지어는 ‘거머리같은 것들’이
        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1882년 미국이 중
        국노동자들의 이민을 금지시킨 법이 알려지자 조선 역시 화
        교들을 강력 배척하자고 피력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중국을 전근대적이라고 보는 시각은 특히 식민지 시
        대에 일본에서 공부하고 중산층 으로 안정적 생활을 영위한
        조선인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조선의 여류작가 백
        신애는 청도, 상해여행을 할 때에 본 중국인을 야만적이고
        더럽다고 묘사했다.

      2. 부정적 타자
      개별적 중국인들은 어떻게 인식 되었는지에 대해 알아보자. 간도 같은 경우 소작인의 70% 정도가 조선인들이었다. 중국인 지주 밑에서 조선인 소작인들은 많은 착취와 억압을 당했다.

      최서해는 가난한 간도 이주민의 아들이었다. ‘홍명(최서해 작)’에서 악질 중국인 지주 은씨는 소작농을 못살게 구고 심지어 아내를 빼앗는데, 결국 폭압을 견디지 못한 소작농은 지주를 살인하고 산으로 도망가는 것으로 끝난다. 주로 중국인은 되놈으로 불리며 비양심적이고 더럽고 음흉한 모습으로 많이 나타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감자’ 에도 이런 중국인 지주가 나온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최서해 같이 공산주의 계급갈등을 배우지 못한 작가들은 주로 중국인 지주와 조선인 소작농의 갈등을 종족간의 갈등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이는 오랫동안 문학계의 주도적인 인식으로 자리잡아 중국을 매우 부정적인 타자로 인식시킨 계기가 되었다.

      중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적 시각은 아직도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3. 근대적 희망
      청나라 말기 청일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뼈아픈 교훈으로 개혁을 단행했다. 이런 중국의 개혁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상당히 관심을 갖고 주목했다. 중국이 입헌군주국이 된다면, “특유의 완고함을 벗고 강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었다.

      혁명이 인민의 애국심을 배양하고 강력한 나라를 만든다는 인식은 구한말 지식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이였다. 그래서 1911년 공화 혁명이 일어났을 때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를 대단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후에 중국 공산당 활동이 본격화되는 20년대 같은 경우에는 조선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중국 공산당과 연대 할 수 있겠다는 인식이 강해졌고, 이 와중에 간도에 있는 사람들(중국인 지주와 조선인 소작농의 갈등)의 문제도 계급연대 과정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의식이 강했다.

      독립운동가들과 조선의 지식인들은 대체로 중국을 희망과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중국혁명으로 인한 폭력과 억압에서도 밝은 미래를 생각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4. 다민족, 다문화, 나아가 서양을 접촉 할 수 있는 곳
      상해는 국제적인 도시로서, 조선인에게는 작은 세계, 우주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런 도시에는 서양인들도 많이 살고 있어서 상해는 국제 도시, 작은 우주, 혁명 아지트라는 이미지가 강했고, 수많은 문화 예능계 조선인에게는 매력적인 도시의 이미지를 가졌다. 여기에 조선에서 철도를 타고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하얼빈도 위와 같은 이미지가 적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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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자 교수

      - 마치며

      종합해보면 중국에 대한 인식은 근대에 접어 들어 극단적으로 양분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조선에게 세계이자 미래였다. 상해나 하얼빈 같은 도시는 동경의 대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더럽고 비위생적인 문명의 이미지도 같이 공존했다.

      오늘날 우리는 위에 살펴본 측면 중, 부정적 인식을 많이 계승 했다. 70년대 리영희 선생은 중국의 정치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후 중국에서 사회주의가 좌절되고 자본주의로 회귀하는 양상을 통해 중국에서 미래를 본다는 시선은 사라졌다고 생각되어진다.

    • 박노자의 <근대한국인..> 1강 후기

      2011.7.11 느티나무 근대 한국인의 “바깥세상 보기”

      7월 8일부터 여름학기 강좌로[근대한국인의 "바깥세상 보기"]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강좌는 근대 한반도인들의 러시아, 중국, 유럽 소국관에 관한 의식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현재 남한인들의 자아의식에 각종 문제들을 제기해는 의도로 기획되었습니다. 강좌소개 보기>>
      1강 <러시아관>의 정리 후기는 자원활동가 신다음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근대한국인들이 갖은 '튀는' 인식, 러시아

      러시아는 근대 한국인의 세계관에서 독특한 위치를 갖고 있다. 근대 한국인의 대외 인식은 철저하게 위계적이었다. 19세기 말 이전에는 중화가 중심이었지만 불과 몇 년 새에 그 중심이 미국이나 유럽으로 바뀐다. 이는 근대 한국인들 세계 인식에서 잘 나타난다.

      조선시대 한학자 윤치호의 일기에는 흑인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는데, 당시에 미국에서 흑인들의 위치는 가난하고 백인에게 대들 수 없는 하찮은 존재 임에도 불구하고 윤치호는 그들이 ‘영어를 쓰고 미국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철저히 중화 중심의 한학교육을 받은 윤치호조차 불과 몇 년 사이에 서열의 중심을 미국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또한 민경환은 영국에 가는 길에 거쳐야 했던 싱가포르에서 말레이 사람들을 보고 “옷도 안 입고 돌아다니는 미개인들. 심지어 반인반수다” 라고 표현 했지만, 갓 태어난 백인 아기를 보고는 “참 영특하게 보이고 광채가 난다” 라고 기록했다. 

      중화 중심에서 미국중심으로 바뀐 세계질서에 대한 인식은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렇듯 철저한 위계질서의 세계관을 가진 근대 한국인에게 러시아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근대 한국인들에게 러시아란?
      근대 한국인들이 러시아를 인식하는 시각에서 는 3가지가 존재한다.

      ① 자연의 나라. 정글, 밀림이 살아 있는 나라.
      이광수의 작품을 보면, 시베리아나 바이칼 호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러시아에 대한 인식은 자연이 살아 있는 나라. 울창한 정글이나 숲이 있는 곳으로 묘사된다. 조선시대 여류작가 백신애의 작품에서도 러시아는 방랑의 나라, 원시림의 공간으로 나타난다.

      ②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나라
      이태준, 백남훈의 해방직후 소련 기록을 보면, 러시아는 문명의 최전선이라고 정의했다.  이 시각은 비단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일제 시대의 지식인들의 상당수도 러시아를 문명의 최전선으로 생각했다.
      당시의 시사잡지인 삼천리 잡지에서는 30년대 초반 기획특집으로 <우리는 아메리카의 문명을 취할까, 러시아의 문명을 취할까>라는 주제로 기사를 썼다. 이는 러시아의 문명이 아메리카와도 견줄 수 있는 고도로 발달된 문명이라고 생각하는 정서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 러시아는 일면 미국보다 나은 문명이라는 인식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③ 한국인들과 묘한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나라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 백계 망명인들이 가장 많이 살던 곳이었다. 하얼빈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많이 가던 여행지 였는데, 러시아 백계노인들이 나라 잃은 슬픔, 애수 등을 느끼며 살아가는 모습은 당시 일제시대를 겪는 한국인들의 정서와 비슷한 동질감을 가졌다고 한다. 이는 한국인으로 하여금 같은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것이어서 러시아는 묘하게 한국인들과 닮은 나라로 인식 되곤 했다.

      이 세 가지 시각으로 보아, 철저하게 위계 질서적인 한국인들의 세계관에서 러시아의 위치는 상당히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 문명인식은 어떠했는가?
      이제까지 러시아가 한국인들에게 딱 한가지로 분류 될 수 없는 위치의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러시아 근대 문명의 핵심을 알아보자.

      ① 열강
      한성순보에서는 러시아를 조선을 잡아 먹을 수 있는 무서운 나라라고 표현되었다. 유길준은 러시아 군대에 대한 과장된 통계치를 들어 막강한 군대를 가진 나라라고 인식,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1937년 이후로, 러시아는 열강이긴 해도 엄밀히 말하면 적국이었다. 우파 지식인은 소련을 가상의 적으로 설정 하고, 러시아 또는 소련을 악한 열강으로 파악하였다.  여기에 러시아 백계노인들까지 가담해 대일본제국 반공당체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소련은 더욱 악한 열강으로 인식 되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전향을 할 경우엔 적색 제국주의, 소련에 대하여 강한 반감을 드러내야 했다고 한다.

      ② 후진국
      러일전쟁때 친일파들은 러시아를 후진국이라고 인식 하였는데, 왜냐하면 그때까지 러시아는 절대 왕정 국가였다. 공화제나 입헌군주제가 없는 나라는 후진국이라고 하여 무매한 나라로 인식이 되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후진성을 지닌 러시아를 바꾸기 위해서 허무당이 활약을 하였고, 이에 일본의 진보파들은 러시아 혁명에 굉장한 관심을 가졌다.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한국인들도 러시아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여성의 권리가 향상된 측면이나, 토지제도 관련 평가, 민족자치 법률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특히 공산주의 교육학에 대해서는 아주 긍정적이어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는 이것을 집중 취재하기도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소련에 대한 나름의 동경은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30년대에 우파 지식인이나 자유지식인들 일부는 소련의 선진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여전히 후진국으로 인지했다. 이는 나희석이 모스크바를 여행하고 쓴 글에서 모스크바의 사람들은 너저분한 누더기 옷을 입고 다니며 침울하고 우울한 회색의 도시라고 묘사한 것에서 확인된다.

      ③ 문학과 예술의 나라
      최남선은 톨스토이가 죽자 잡지에 ‘토옹의 소고’ 라는 글을 쓰고 톨스토이를 자세히 소개했다. 이광수도 러시아 문학을 좋아했고 최승희 역시, 훗날 회고록에서 러시아에 가서 무용을 공부 하고 싶었다는 심정을 밝혔다. 이는 근대 한국인들이 러시아의 문학과 예술을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까지 살펴 본바 러시아는 근대 한국인에게 ‘다양한 관점과 인식을 가져다 준 독특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근대 한국인들에게 러시아의 이미지는 계속적으로 변해왔다. 한국을 침략할 수 있는 열강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후진국, 나라 잃은 백계 노인들에게는 같은 정서를 공유할 수 있는 민족이기도 했다. 또한 높은 수준의 문학과 예술의 나라라는 인식도 있다.

      러시아는 근대 한국인들의 위계적 세계관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이며, 위계 질서적인 한국인의 세계관에 균열을 준 나라라는 점에서 흥미롭게 평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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