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헌법의 인문학

  • 강사

  • 기간

    • 2010. 11. 2 ~ 2010. 12. 7
  • 시간

    • 화요일 19:00~21:30 총6회
  • 수강료

    90,000

    • 파격 할인혜택
    • 참여연대 회원4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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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 정보

    강사소개 |
    최갑수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 서양근대사 그 중에서도 프랑스 혁명사를 비롯한 서양
    혁명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해오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프랑스대혁명사>,
    <왕정의  몰락과 프랑스혁명>, <프랑스의 역사> 등이 있다.
     
    강의 일정 |

     

    날짜
    순서
    주제
    11.02
    1
    근대가 만든 혁명, 혁명이 만든 근대
    11.09
    2
    혁명, 사회를 바꾸다 : 러시아, 독일
    11.16
    3
    혁명, 헌법을 만들다 : 프랑스, 이란, 중국
    11.23
    4
    혁명의식 없는 혁명들 : 네델란드, 영국, 미국
    11.30
    5
    혁명에 대한 해석을 혁명하라
    12.07
    6
    대한민국 제헌헌법을 다시 읽는다
     
    강의 문제의식 |
    이 강좌의 목표는 ‘혁명’과 ‘헌법’, 이 상이한 위계의 두 사물이 갖는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 근대
    역사구조의 한 단면을 살피는 것이다. 혁명과 헌법의 관계는 참으로 모순적이며
    역설적이다. 혁명이란 기존 질서 내지 체제의 파괴를 흔히 야기하기에 초헌적(超憲的)이고
    파헌적(破憲的)이다. 하지만 혁명은 성공하자마자 언제나 새 질서를, 새 체제를, 새 헌법을
    만들고자 한다. 이런 시도가 늘 안정된 구조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혁명은 질서로의
    복귀(revolution)를 늘 꿈꾸며 그러기에 항상 비극적이다.
     
    500년에 걸치는 혁명사의 흐름은 크게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① 프랑스혁명(1789-99)을 경계로 근대적 혁명의식이 없는 앞선 시기의 혁명들(예컨대 네덜란드
    독립전쟁과 영국혁명 등)과 진정한 의미의 근대혁명을 구분할 수 있다.
     
    ② 러시아혁명(1917)이 일어나고 성공하면서 혁명의 모델에 지각변동이 나타났다. 그 이전에는
    프랑스혁명을 전범으로 하는 ‘입헌혁명론’이 혁명의 기획이었다면, 그 이후에는 러시아혁명을
    전범으로 하는 ‘사회혁명론’이 새 기획으로 부상했다.
     
    ③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른바 제3세계에서 ‘민족혁명’이 우후죽순격으로 일어났는데, 당시에
    이 거의 모든 독립혁명이 붉은 망토를 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런 세계사적 조류를 반영한다.
     
    ④ 1991년의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은 - 이것 자체가 하나의 혁명인데(동구혁명!) – 기획으로서
     혁명의 종식을 뜻한다. 과연 이것이 혁명 자체의 종식인지, 아니면 특정하게 ‘근대혁명’의
    종언을 뜻하는 것인지 판단하는 것은 아직 섣부른 감이 있지만, 어쨌듯 한 시대의 종언을
    말해주는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여기서 한반도에서 두 국가의 탄생은 독특한 의미를 갖는다. 북한은 위의 사회혁명론의
    외양을 한 민족혁명을 비교적 전형적으로 겪는 세계사적 위상을 갖는 반면에, 남한의 건국은
    특이하게도 위로부터의 입헌혁명이라는 자못 시대착오적인 과정을 겪는다. 이런 건국과정은
    남한의 국가형성에 특정한 유산을 남겨준다. ‘혁명과 헌법’이라는 이중의 프리즘을 통해
    한국현대사의 한 구조를 보고자 한다.
     
    강의정보 |
    일시 : 2010.11.02 ~ 12.07 화 오후 7시 ~ 9시 30분 총6회
    장소 : 참여연대 느티나무홀(B1)
    수강비 : 9만원(참여연대 회원 50% 할인)
     

     

    후기 2

    • 아이티 혁명에 관한 최갑수 선생님의 글

      2010.11.17 느티나무 혁명과 헌법의 인문학

      [혁명과 헌법의 인문학] 강좌 세번째 강의에서 최갑수 선생님이 아이티 혁명의 위대함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셨는데, 관련해서 참고가 되실 수 있는 글을 나눕니다. 이 글은 아이티 대지진 이후 아이티 비극의 역사적 근원에 대해 최갑수 선생님이 참여연대 월간 <참여사회>에 기고하신 글입니다.


      위대한 역사를 품은 작은 거인, 아이티

      최갑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지난 1월 12일, 카리브 해 연안의 소국가 아이티Haiti에 규모 7.0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지진의 진앙이 수도인 포르토프랭스에 가까워 사망자만 10만 명을 넘어서는 대참사를 불렀지만, 참으로 우리를 놀랍게 하는 것은 이 엄청난 사태를 수습하는데 정작 아이티 정부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할뿐더러 아예 국가의 존재감을 전혀 보이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흔히 말하는 ‘실패국가’의 극단적인 전형이 아닐 수 없다. 가관인 것은 국제사회가 힘을 합쳐 구호활동을 벌여야 하는데도 미국과 프랑스가 꼴사납게 신경전을 벌여가며 주도권 싸움을 불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가 하면 캐나다 퀘벡 주나 브라질이 보이는 남다른 정성이나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의 끼어들기도 예사롭지 않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대지진 참사는 실패국가-제국주의 경쟁-국제적 유대라는 복합적 현실의 뒤틀린 층위들의 속살을 마치 용암의 분출처럼 드러내 보여주는가? 우리는 아이티 대참사의 비극을 통해 구미세계가 빚어낸 근대세계의 명암을, 아니 차라리 섬광처럼 보이다 사라지기에 평소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추악한 현실의 단면들을 한없는 절망으로 대면하게 된다. 진정 역사의 심연은 그렇게 무섭도록 처연하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인지!

      프랑스혁명과 동시에 발생한 흑인혁명, 최초 흑인신생국가 아이티
      아이티가 어떤 나라인지 이제쯤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이티 하면 혹 ‘진흙 과자’를 먹는 중남미 최빈국에 관한 보도로 아는 이가 있었을 뿐, ‘정보통신기술’을 뜻하는 IT를 연상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아이티는 참으로 위대한 과거를 가진 영웅국가이며, 근대성의 모든 요소들을 실험하고 변용하고 또 그 희생자가 되어 스스로 형극의 길을 걸어온 ‘작은 거인’이다.
      아이티의 역사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결정적인 전환점이 프랑스혁명과 거의 동시기에 발생한 아이티혁명(1791∼1803)과 최초의 흑인신생국가 아이티의 탄생(1804년 1월 1일)이다. 이 앞 시기는 콜럼버스의 상륙으로부터 에스파냐와 프랑스의 식민지로 떨어지는 3세기에 걸친 식민시기이고, 뒤의 시기는 구미열강의 배제와 차별 속에서 꿋꿋이 버티다가 결국 미국의 사실상의 식민지로 전락한 독립시기이다. 

      20살도 못사는 노예들 ‘생도맹그 잔혹사’
      식민시기에 아이티가 겪은 역사적 행로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발견을 영유권의 근거로 삼는 유럽식 근대질서의 논리에 따라 아이티는 히스파니올라의 일부로서 에스파냐령이 되었다가 1697년에 그 서쪽의 1/3(한국의 경상도만한 크기)이 프랑스령이 되어 ‘생도맹그’라는 이름을 가졌고 이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둘째, 이런 과정에서 적어도 3백만 명의 원주민이 사실상 전멸했고 프랑스의 식민지 경영으로 아프리카로부터 수입된 흑인노예들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셋째, 18세기 후반에 들어 생도맹그는 유럽 식민지 가운데 가장 번영하여서 혁명 직전 프랑스 대외교역의 거의 2/3를 차지했고, 설탕, 커피, 원면의 유럽 소비량의 절반을 공급했다. 대농장주들은 강력한 이해집단을 형성했고, 삼각무역에 입각한 유럽의 대서양교역은 효율적인 작동을 위해 인종주의라는 새로운 형태의 배제와 차별의 원리를 빚어냈다. 넷째, 대서양 노예제의 본질은 대농장에서 열대작물을 키워 수확하는데 최소의 비용으로 노예노동을 극대화하여 최대의 이윤을 창출하려는 극단적인 노동착취와 이로 말미암은 인신파괴이다. 생도맹그의 경우, 노예의 평균 수명이 20세를 넘지 못했으니 이들의 여건이 얼마나 악랄한 것이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노예들의 지속적인 수입이 불가피했을 뿐만 아니라 노예 가운데 아프리카 태생의 비율이 매우 높았다. 프랑스혁명 직전의 생도맹그에서 백인이 30,800명, 자유유색인은 24,800명인 반면에 흑인노예는 전 주민의 90%에 육박하는 50만 명 정도였고 이 가운데 아프리카 태생은 60∼70%에 달했다. 다섯째,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 아프리카 태생의 노예들은 대부분 전사 출신이고 독자적인 문화와 전투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히 이들이 혁명을 일으키는 데 계몽사상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해왔는데, 최근에는 이들이 고유한 정치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양자가 결합하여 크레올어를 매개로 하는 ‘노예 계몽사상’, ‘흑인 공공영역’이 형성되었고, 이것이 혁명의 바탕이 되었다.

      노예들은 무감각한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프랑스혁명과의 동시성을 들어 흔히 아이티혁명을 그 아류로 간주한다. 서방의 교과서류는 아이티혁명에 대해 아예 언급하지 않거나 언급하더라도 그 역사적 중요성을 평가절하 한다. 하지만 아이티혁명은 프랑스혁명의 영향은 받았지만 그것에 못지않은 위대한 혁명이다. 프랑스혁명의 위대성을 운위할 때에 일반적으로 그것이 미국혁명과는 달리 노예해방과 노예제의 폐지를 이룩했음을 지적하는데, 사실 생도맹그에서 노예반란이 없었다면 국민공회는 대농장주들의 이익을 침해하면서까지 1794년 2월 4일에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현지에 파견된 혁명당국의 판무관이 영국과 에스파냐의 침공에 맞서 생도맹그를 지키기 위해 군복무를 대가로 반란노예들에게 자유를 주었던 것이고, 혁명의회는 이를 추인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노예흑인들은 독자적인 전투능력을 지녔다. 이들은 주변의 영국이나 에스파냐와 같은 열강들을 제압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 최강인 나폴레옹의 정예군도 물리쳤다.

      유럽열강들 군대 물리친 5만의 흑인군
      우리는 아이티혁명의 조숙성에 주목해야 한다. 아이티가 세워진 1804년은 유럽에서조차 근대성이 막 형성되기 시작하던 시기로, 이른바 근대화의 본보기랄 것도 없었고 그것을 이론화할 만한 사회과학은 아직 태동기에 머물고 있었다. 유럽의 우위라고 하는 것도 아직 이렇다 할 실체성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기에 5만의 흑인 군대가 유럽 열강의 군대를 차례로 물리칠 수 있었고, 아프리카의 게릴라전술과 유럽의 기병과 보병 연합전술을 함께 구사했던 혁명의 영웅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는 나폴레옹과 비교하여 조금도 뒤지지 않는 당대 최고의 군사전략가였다.

      생도맹그의 노예흑인들이 인신해방과 궁극적으로 정치적 독립을 이룩해냈을 때, 이들이 택한 국호는 소멸한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원지명인 ‘아이티’(‘산악이 많은 지방’이란 의미) 였다. 아프리카 출신의 노예들이 아이티를 새로운 정체성의 근거로 택했음은 이들이 당시 대서양 세계의 인종계서제의 같은 하층에 처해 있던 원주민들Amerindians과 공감대를 지녔음을 말해준다. 1810∼1820년대 라틴아메리카 혁명의 주역인 볼리바르Simon Bolivar가 두 번씩이나 아이티로 피신하고 당시 아이티의 대통령인 페티옹이 어려운 여건에서도 그를 지원했음은 혁명의 수출이라는 이데올로기 차원과 함께 중남미 특유의 국제적 유대감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국제사회 떨게한 흑인노예해방 메시지
      신생 아이티에게 가장 중요한 국내문제는 내전과 혁명의 와중에서 폐허가 된 경제를 어떻게 재건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크게 두 노선이 경합했는데, 하나는 식민지 시기의 대농장체제를 재건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토지를 광범위하게 분배하여 소농체제를 새롭게 구축하는 것이었다. 계급적인 성격을 갖는 이 논쟁에서, 크게 보아 아프리카 태생의 노예병사 일반이 소농체제를 선호했다면, 현지 태생의 물라토나 해방노예들은 집단 강제노동을 전제하는 대농체제가 그대로 유지되기를 원했다. 양 세력의 갈등과 대립이 독립 이후의 잦은 정변의 근본 요인이며, 소농체제론은 토지개혁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혁명적 전통의 운반체 역할을 했다. 우리는 19세기 말까지도 비유럽세계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유럽의 농민들조차 대부분이 예속상태에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이티의 해방노예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유를 지키기 위한 신생 경제의 건설을 고민하고 또 일정 수준에서 이룩했으며, 이는 당시의 세계사에서 결코 작지 않은 성취였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이런 아이티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이티는 노예들이 최악의 조건에서 엄청난 희생(최소한 5만 명)을 치러가면서 당시 대서양 세계의 최강대국들을 물리쳐 세운 최초의 국가이다. 그것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만이 아니라 기존의 모든 국가들에게 위협이었다. 노예해방의 메시지는 노예제를 유지하는 사회적 비용을 엄청나게 끌어올려 결국 그것의 폐지를 이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예속상태에 머물러 있던 모든 나라의 하층민을 자극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 노예가 흑인이라는 점이다. 이는 자본주의 세계질서를 떠받치는 버팀목의 하나인 인종주의를 부정하는 ‘상상할 수도 없는’ 사실이었다. 사정이 이렇기에 서방의 학계는 노예혁명이 터졌을 때부터 두 가지 배제와 차별의 전술을 구사해왔다. 하나는 그런 사실 자체를 묻어버리는 ‘침묵의 카르텔’이다. 오늘날까지도 구미의 교과서를 비롯하여 모든 개설서들은 아이티혁명에 대해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 사실의 현존을 부정할 수 없는 전문가들은 ‘평범화 전술’을 구사한다. 이들은 이 우렁찬 혁명이 있었음을 외면할 수 없기에 그 의미를 평가절하 하여 날카로움을 지워버리려고 한다. 이는 예컨대 프랑스의 좌파 역사학에도 해당한다. 그러기에 이들은 프랑스혁명이나 ‘백인 계몽사상’의 영향이나 혁명 과정에서 백인들이 행한 역할을, 그리고 아이티가 독립 이후에 오히려 더 빈곤해졌음을 강조한다. ‘그러면 그렇지! 흑인국가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하면서 말이다.

      철저하게 기획된 아이티의 비극
      우리는 실제로 아이티가 ‘실패국가’의 본보기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 나라는 중남미 최빈국이다. 오늘날 문맹자의 비율이 전 국민의 절반을 넘고 80%가 기아선상에서 허덕인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현실의 이면과 숨겨진 역사 속에서 아이티의 비극이 철저하게 의도되고 기획된 결과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최초의 성공한 노예혁명과 흑인국가는 그 휘광만큼이나 철저하게 망가져야 했다. 참으로 그것은 자본주의의 생존과 구미 중심의 세계질서 유지를 위해 실패국가의 전형이 되어야 했고, 또 실제 그렇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국제질서의 작동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아이티는 1804년에 독립하면서 국제적으로 고립됐다. 대서양 세계의 패권을 장악했던 백인 구미 국가들은 누구도 이 신생 흑인국가를 외교적으로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그 정도가 아니라 혁명의 수출을 두려워하여 경제제재 조치를 취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실제로 아이티는 1822년에 같은 섬에 있는 에스파냐의 식민지인 산토도밍고(오늘날의 도미니카 공화국)를 침입하여 노예제를 종식시켰다. 19세기 전반기에는 식민 본국이었던 프랑스가 아이티에 대한 각종 압력을 주도했다. 프랑스는 1838년이 되어서야 아이티를 무조건적으로 승인하게 되는데, 아이티는 프랑스 대농장 소유주들의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 1억 5천만 프랑을 지불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바꿔 말하면 가난한 신생국가는 출발부터 막대한 금액의 부채를 짊어져야 했고, 이는 두고두고 아이티에 부담이 되었다. 다른 나라들의 승인이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노예제 국가인 미국은 이런 국제적 행렬에 낄 수 없었다. 미국이 아이티를 승인하게 되는 것은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2년에 이르러서였다.

      먼로주의와 인도주의 앞세운 미국의 점령
      19세기 후반이 되면 아이티는 프랑스의 놀이터에서 열강, 특히 미국과 독일의 각축장으로 바뀌었다. 미국은 19세기 말에 쿠바로부터 관타나모를 장악하고, 윈드워드 해협의 건너편에 있는 아이티에 개항장을 장악하기 위해 해병대의 상륙을 시도하기도 했다. 프랑스, 미국, 독일 자본들이 아이티 지배층을 장악해 들어갔고 1843∼1911년 사이에 대통령이 된 16명 가운데 11명이 민중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났다. 아이티는 여전히 건강한 혁명의 활력을 지녔던 것이다.

      20세기가 되면서 아이티는 미국의 놀이터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1911∼1915년이 결정적인 시기였다. 이 시기에 미국 자본의 승리가 확정되는데, 다섯 명의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은 대통령궁에서 폭사하고 다른 한 명은 독살되고 나머지 세 명은 혁명으로 쫓겨났다. 마지막 대통령인 삼V. G. Sam은 프랑스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민중의 저항을 제압하고자 미국은 아예 1915년 7월에 아이티를 군사적으로 점령했다. 미국의 자본가들은 즉각 중앙은행인 ‘아이티 은행’을 장악했고, 아이티는 미국의 보호국, 사실상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미국은 이런 범죄행위를 저지르면서 뻔뻔스럽게도 ‘먼로주의’와 ‘인도주의’를 앞세웠다.

      이후 20세기 아이티의 역사는 미국의 직, 간접의 점령과 개입, 이로 말미암은 만성적인 정정의 불안, 뒤발리에Duvalier 부자의 30년에 걸친 무단독재(1957∼1986), 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끊임없는 민중의 저항과 두 차례에 걸친 민중 신부 아리스티드Jean-Bertrand Aristide의 대통령 당선과 미국이 지원한 쿠데타로 인한 망명으로 점철된다. 현재 대통령인 프레발은 2세기가 넘는 아이티의 역사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되어 임기를 제대로 채운 두 번째 대통령으로서 민중의 상당한 지지를 받았지만, 현재 많은 아이티 인들은 아리스티드의 귀환을 바라고 있다.

      과연 아이티는 대지진의 참사로부터 되살아 날 것인가? 아이티가 이보다도 더 어려운 여건에서도 새 나라를 만들고 끊임없이 민중의 활력을 되살려 왔음을 아는 우리로서는 아이티의 재생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인간성에 대한 신뢰, 이것이 아이티 역사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 [혁명과 헌법의 인문학] 강좌 추천 도서

      2010.11.2 느티나무 혁명과 헌법의 인문학

      [혁명과 헌법의 인문학] 강좌가 내일(11/2) 개강합니다.

      강좌 개강에 앞서 강의를 진행해주시는 서울대 서양사학과 최갑수 선생님께서

      아래의 책들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혁명의 탄생 - 근대 유럽을 만든 좌우익 혁명들  
      데이비드 파커 (지은이), 박윤덕 (옮긴이) | 교양인

      혁명의 역사   
      페터 벤데 (엮은이), 권세훈 (옮긴이) | 시아출판사

      비교헌법사   
      신우철 (지은이) | 법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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