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정보
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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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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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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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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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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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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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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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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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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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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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그리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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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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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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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연장, 분단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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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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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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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잊어버린 우리의 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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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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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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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_전쟁의 역사를 넘어 평화의 역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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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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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3
한국전쟁 60년 기념강좌[4강]
4강 - 김동춘 교수<한국전쟁 60년, 한반도와 세계>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던가. 한국의 냉전적 사고, ‘좌파’낙인 등 현재 한국사회의 부조리를 만날 때마다 들었던 의문은 “우리나라는 대체 언제부터 이랬던 거야?”였다. 숨막히는 경쟁을 해야 하는 지금에는 외환위기라는 과거가 있었고, 부패와 기만의 정치 너머에는 청산되지 못한 역사가 있었다. 천안함 사고로 전작권 환수를 연기해야한다는 극우들의 외침에는 ‘한국전쟁’이 자리하고 있음을 4번째 강의에서 깨달았다.
한국전쟁은 남과 북만의 전쟁이 아닌 동아시아 전쟁
4번째 강사로 나선 김동춘 교수는 천안함 사고와 관련한 일본의 후텐마기지 문제 해결이 우연인 듯하지만 국제적으로 보면 같은 문제라고 했다. 후텐마기지는 대만을 보호하면서 중국을 견제하고 동아시아에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 확대할 수 있는 곳이다. 후텐마기지문제가 일본사회에 대두되면서 하토야마 전 총리가 기지이전을 약속했기 때문에 민주당이 정권을 교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전을 반대하는 미국과 협상이 지연되면서 지지율은 곤두박질 쳤고 때마침 천안함 사고가 발생하면서 이전문제가 없던 일로 결론이 났다. 비록 우연의 일치일지라도 천안함 사고가 북한어뢰로 판명나면서 후텐마기지문제까지 해결되어버린 것은 국제적인 외교문제로 볼 때 ‘미국의 영향력’면에서 같은 문제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한국전쟁 역시 국제적으로 보면 남과 북만의 내전이 아닌 미국, 소련, 중국 등이 가세한 동아시아 전쟁”이라고 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전쟁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이다. 오늘날까지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한국전쟁을 어떻게 살아있는 역사로 기억하는가”이다. 그것만이 오늘과 같은 천안함의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는 방법일 것이다.
먼저 김교수는 한국전쟁에 참여한 국가들이 전쟁 후 어떤 것을 잃고 얻었는지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북한이 러시아, 중국 먼저 의견조율한 것은 맞지만 먼저 내려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 중국, 소련, 일본 등 결과적으로 이득을 얻었다. 최대 수혜자는 경제적 부흥을 할 수 있었던 일본이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한 미국, 중국도 막 혁명을 마친 국가가 미국과 대등한 전쟁을 했다는 면에서 국제적으로 각인되었으니 나름대로 혜택을 얻었다” 일본이 기지국가라고 불린 것도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일본은 한국전쟁 3년 동안 미국의 무지를 제조하고 물자조달을 하면서 비약적으로 경제성장을 했다. 한마디로 전후 패망으로 힘들었던 일본에게 한국전쟁은 “신이 내린 전쟁”이었다.
전쟁의 명분은 정치적 득실
하지만 미국이 한국전쟁으로 이익을 얻었다는 말은 생소하다. 미국은 남한을 위해 북한과 싸워준 고마운 우국이 아니었던가. 도와주기만 했다는 생각은 순진한 착각이었다. 김 교수는 “미국이 무엇을 얻었는지 한국사회에서는 거의 거론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전쟁 후 주가가 폭등했다, 45~9년에 경기침체를 겪으며 실업률이 증가하고 문제점이 대두됐었는데 한국전쟁이 호재가 됐다. 메카시즘도 50년 1월 한국전쟁 후 부활하면서 당시 미국공산당, 미국노동계(당시 전체 노동자의 30%를 차지하면서 세력이 강했다고 함)를 일거에 없애버렸다. 미국의 진보세력이 루스벨트가 있던 30년대부터 강해지다 한국전쟁 후 약해진 것이다. 또한 군사무기와 산업이 만나면서 미국보수인 군산복합체가 만들어졌다” 지금 미국 보수의 핵인 네오콘도 한국전쟁에서 출발한다고 봐야할까. 김 교수는 한국전쟁이 세계질서를 바꾸었다고 말했다. “냉전체제를 굳히고 미국우익세력의 헤게모니가 확고하게 자리잡게 됐다. 미-소간의 관계가 고착된 것이다” 남북한의 희생자만 300만-이것 역시 정확한 통계가 아님-혹은 그 이상인 큰 전쟁에서 남북한만 폐허가 되고 가담했던 나라들은 제 이익만 챙겨 돌아간 전쟁이 아니었나 싶다.
한국전쟁을 도와준 영웅으로 보는 ‘맥아더’는 어떤 이해관계에 있었을까? 맥아더는 이승만식의 북진통일을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트루먼은 그에 반대하고 있었다. “이북까지 김일성 세력을 쫓아내면 중국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북한까지 갔다면 러시아와 전쟁이 일어나 3차 대전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트루먼 입장에서는 “북진통일을 할 이유가 없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전쟁보다 전쟁을 통한 국민단합과 전쟁을 통한 경제 살리기”가 먼저였다. 맥아더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전쟁에서는 무조건 이겨야한다는 생각이 었다. 김 교수는 “전쟁터에서 군인은 정치에 종속되는 것이다. 전쟁은 정치 중에 하나일 뿐이므로 최종지휘관은 정치가인 대통령이다. 정치는 국가의 이해관계를 고려해야하기 때문에 단순한 군인과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트루먼은 미국의 기득권, 자본가의 이해관계를 반영해 전쟁에서 지지도 이기지도 말자는 생각이었다”고 지적했다.
일방적 기억이 ‘전쟁불사론’을 만든 것.
김교수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지금까지 비극이 이어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설명했다. 우선 북한의 비극이다. “한국전쟁 후 김일성 단일권력체제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비극의 시작이다. 내부의 견제권력이 없으니 권력이 썩게 되고 실패한 공산국가가 된 것이다. 또한 ‘선군정치’하는 것도 군을 앞세운다는 이야긴데 여전히 전시체제라는 이야기다. 60년 전과 똑같다.” 남한 역시 전쟁논리가 유지되고 있다. “천안함 발생 후 전쟁기념관에서 성명발표하고 전작권 환수를 연기하려는 것은 국가와 국민의 미래보다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더 고려했다는 것이다. 이승만도 권력이 유지된다면 수백만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맥아더가 핵 사용하려고 할 때 이승만이 OK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전쟁논리는 60년 전과 같다. 바로 “분단됐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한국전쟁은 60년 전에 일이지만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 지금 정치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소설과 영화로 다루어지지 않은 사건은 역사가 아니다. 일반 시민들 속에 없기 때문이다. 전쟁 때 미군이 도와준 것은 맞지만 미군이 학살한 것은 없는 역사, 객관적으로 사실이어도 우리의 기억 속에 없으면 없는 역사다. 미디어와 교육이 만들어가야 할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보수신문이 수개월 동안 지면을 활애해 전쟁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서도 “기억정치다. 기억을 누가 선점하느냐, 과거문제가 아니라 현실정치다. 여론에 의해 정치가 바뀌는 것이다. 문제는 전쟁불사론을 잠재울 수 없는 사회라는 것”이라고 했다. 전쟁에 대한 일방적인 역사만 기억하기 때문에 ‘전쟁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김 교수는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의 문제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했다. “지금 젊은이들의 목숨에 대한 문제이고 현실로서 전쟁준비체제로서의 한국사회, 국가보안법, 징집체제, 미국에 무기구입에 돈을 퍼부어야하는 체제에 대한 것”이라면서 “우리사회가 어떻게 건강한 민주적인 사회가 되느냐. 건강한 시민의식을 가진 군인이 되느냐”로 확장될 수 있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남북한이)한국전쟁 영향 아래 여전히 있기 때문에 끌려다니지 말고 남북간의 민족적인 대타협이 필요“하다며 마무리했다.
한국전쟁 60년 기념강좌[3강]
[한국전쟁 60년 기념강좌 3강 - 한국전쟁, 그리고 사람들]
이번 강의를 듣기 전에 가장 궁금했던 것은 “김귀옥 교수님은 한국전쟁의 어떤 부분에 주목하고 계신가.”이었다. ‘한국전쟁’이 최근에 새롭게 등장한 연구주제도 아니지만, 김귀옥 교수님은 ‘여성’이라는 점과 ‘사회학자’라는 부분에서 한국전쟁이라는 문제와 그다지 친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름 사회학과 학생으로서 적지 않은 사회학 수업을 들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전쟁을 핵심 주제로 하는 수업을 들어 본 적이 있었던가? 아마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욱 김귀옥 교수님이 우리에게 전쟁에 관하여 어떤 문제와 관점을 던져주실지 기대가 되었다.
사람들의 삶을 통해 한국 전쟁을 연구
한성대학교 김귀옥 교수님은 전쟁 후 세대로서 내가 왜 한국전쟁을 연구해야 하는가를 종종 생각해본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전쟁은 피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에, ‘전쟁은 없는 것’이라고 가정을 하여 살아가고 전쟁 없는 평화를 말한다면 더욱더 행복할 텐데. 그런데도 왜 전쟁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정치학에서는 종종 전쟁론, 평화론을 이야기 하지만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사람’에 문제의식을 갖고 전쟁을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을 무렵, 사람들은 대단히 낯설어 했다고 하셨다. “전쟁은 정치학자들의 것이고 외교학자들이 그동안 연구해왔던 부분인데, 왜 사회학에서 전쟁을 연구하는가. 이 얘기는 바로 내가 왜 전쟁을 연구하는가와 왜 이 강의에 자리하신 분들이 전쟁에 직면해야 했는가라는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60년 전 한국을 가장 심각하게 뒤집었던 사건인 한국 전쟁. 여전히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으며 정전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은 한국전쟁에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고 하셨다. “그래서 ‘천안함 사건’은 처음도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도 불행하지만 이런 남북 대결구조 국면 속에서는 마지막 사건이 아닐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전쟁의 시대를 살게끔 했던 것은 무엇이냐? 가장 중요한 우리의 분수령은 틀림없이 한국전쟁입니다. 한국전쟁이 있었기에 우리는 아직도 남북통일이 되지 못하고 한반도가 평화롭지 못한 채 동북아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알기 위해서 한국 전쟁을 보지만 또 한편으로 우리가 과거를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우리의 미래를 풀어나가기 위한 하나의 출발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
김귀옥 교수님은 전쟁은 다양한 차원에서 전쟁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의 사회의 만든다고 하셨다. “전쟁은 반공주의 사회를 열었습니다. 6,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혁명 제 1공약이 반공이었죠. 우리 정부의 반공주의는 독재와 경제 성장주의 그리고 냉전이 결합된 개념으로서 북을 우리의 적으로 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합리적인 이성이 마비된 사회. 네가 나의 적이라고 여겨질 땐 어떤 말을 해도 그것의 옳고 그름을 논할 필요가 없는, 그래서 ‘적과 나’의 이분법이 작동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빨갱이냐 아니냐의 의미만을 쇠뇌당한 우리의 머릿속엔 반공의 나침반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이러한 나침반에 의해 이성이 마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은 군대적 사고가 사회전반에 뻗어있는 군사주의 사회를 만들었다고 하셨다. 폭력제일 주의,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이라 여기는 생명경시풍조.. 합리적인 이성은 필요 없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또한 전쟁을 거치면서 과거의 공동체 주의가 사라지고 이런 요소들이 결합되어 권력 있는 사람들에게 빌붙어 출세를 잘 하려는 기회주의 의식, 돈이 최고라는 황금만능주의 등 성공, 출세 중심의 가치관이 퍼지게 되었음을 지적하셨다.
전쟁은 새로운 사람을 만든다.
전쟁은 한마디로 여성의 사회를 만든다고 하셨다. 전쟁으로 많은 남성들이 전사했기 때문이다. 전쟁미망인(未亡人)이 된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 경제활동에 뛰어 들어야만 했다. 대다수의 전쟁미망인들은 식모살이나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나 그것마저 힘든 여성들은 성매매 산업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정부는 성매매 산업을 적극 지원·유지했다.
“정부가 관리하는 공창제를 제도로서 열어놓고, 법률로서 금지한 이후에도 군 당국의 묵인 하에 기지촌이 군대가 있는 모든 곳에 생겨났습니다. 철저하게 정부관리 하에 만들어 진 것입니다. 이것은 한미동맹을 수호하기 위해서 미군을 즐겁게 하기위한 우리정부의 사명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1960년대 당시 기지촌 경제가 GDP의 25%를 차지하는 경제적인 측면과 한미 간의 친선이라는 목적아래 정부는 성매매 산업과 성매매 여성들을 철저하게 관리했다.
전쟁과 고통
김교수님은 전쟁으로 인한 학살규모는 ‘모른다’가 정답이라고 하셨다. 학살 가해자 집단은 인민군뿐만 아니라 미군(유엔군), 국군, 경찰, 자위대 등 다양한 집단들이 있었고 학살의 성격도 보복, 예방, 동원의 차원에서부터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도 수없이 자행되었다고 하셨다. 또한 정부는 민간인을 동원, 경찰권을 부여하여 학살과 감시의 권한을 줌으로써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끼리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잔인한 일들이 벌어졌다. 그리고 신원조회를 통해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 친척들에 대한 일상적인 감시의 임무도 수행했다. 이처럼 전쟁의 고통은 학살자뿐만 아니라 피학살 민간인들에게도 지속되었고, 이러한 신원조회는 1980년대, 90년대에도 계속 존재해 왔다.
21세기 평화의 길은
21세기를 살면서 우리가 풀어야할 숙제에는 빈익빈 부익부, 교육의 불평등 등 다양한 문제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는 바로 ‘평화’라고 하셨다. “끊임없이 남을 의심해야 하고 평화롭게 살 수 없는 조건 속에 살면서 평화는 그저 고상한 하나의 가치가 아니라 절대 절명의 인권입니다. 이러한 기본 인권으로서 우리가 평화롭게 사는 것은 가장 중요한 권리이고 국가는 반드시 평화를 이행해야할 중요한 책무가 있습니다.”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조건 없는 대화를 해야 한다.”는 교수님의 말씀.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정부는 전혀 ‘대화’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한국전쟁 60년 기념강좌[1,2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