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시와 공간의 인문학

  • 강사

  • 기간

    • 2010. 4. 13 ~ 2010. 6. 1
  • 시간

    • 화요일 19:00~21:30 총10회
  • 수강료

    150,000

    • 파격 할인혜택
    • 참여연대 회원7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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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 정보

     

    우리는 서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서울은 6백년 역사도시, 한반도의 수도,
    글로벌 메트로폴리스이자, ‘강남공화국’ ‘서울공화국’ ‘아파트공화국’의 오명을 지닌 문제적
    도시이기도 합니다. 전지구적 도시화의 시대, 21세기 서울의 모습을 시민의 주체적
    힘으로 새롭게 창조해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는 무엇일까요? 거대도시 서울의
    지층 속에 숨겨진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 속으로 다 함께 시공간 여행을 떠나봅니다.
     
    강좌 진행

     

    날짜
    강의 제목
    강사
    04.13
    정도定都에서 재건再建까지: 6백년 역사도시 서울
    인간에게 도시란 무엇이며, 우리에게 서울은 무엇인가?
    1394년 서울의 입지와 형태는 어떻게 결정되었는가?
    조선 전기와 후기, 서울은 어떻게 변화했는가?
    전우용
    04.20
    전통과 문명의 만남: 개항기 서울의 변화
    조선후기서울의 상업발달과 인구증가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개항은 서울에 어떤 변화를 초래하였는가?
    대한제국기 도시개조사업은 왜 실패했으며 그 의의는 무엇인가?
    전우용
    04.27
    제국과 도시: 식민지도시 경성의 공간학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시대에 도시와 도시간 네트워크는 어떤 의미를 띠는가?
    일본형 식민지도시의 전반적 특징은 무엇이며 ‘경성’은 어떤 식민지도시인가?
    왕조 수도 한양은 어떤 과정을 거쳐 식민지도시 경성이 되는가?
    김백영
    05.04
    경성에서 대경성으로: '식민지 근대'의 사회와 문화
    경성의 남촌과 북촌, 일본인과 조선인 세계의 공간과 문화는 어떻게 달랐는가?
    경성에서 대경성으로 전환과정에서 식민지도시공간은 어떤 변화 양상을 띠는가?
    일제하 '식민지 근대' 도시의 사회 구조와 문화 경험의 실상은 어떠했는가?
    김백영
    05.11
    전쟁과 도시: 한국전쟁 전후 서울의 변화
    개항과 도시성장축의 변화
    식민지배와 서울의 이중적 도시구조화
    태평양전쟁과 역사도시조직의 파괴
    한국전쟁은 무엇을 파괴했으며 서울에 어떤 변화를 초래했는가?
    전쟁과 분단체제는 서울의의 도시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안창모
     
     
    05.18
    성장과 팽창: ‘한강의 기적’과 도시구조의 변화
    경인공업벨트’와 ‘한강의 기적’ 그리고 식민지 도시구조의 탈피
    한국에서 산업혁명과 도시혁명은 어떤 상관성을 띠는가?
    강남 개발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사회적 효과를 초래했는가?
    안창모
    05.23
    답사 1- 대한제국과 덕수궁 그리고 정동
    안창모
    05.25
    대중가요로 본 서울의 도시공간
    식민지시대부터 1990년대까지 대중가요는 서울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
     각 시기 대중은 서울에 대해 어떤 감정과 태도를 지니고 있었는가?
    <노들강변>부터 <광화문연가>까지 대중가요속 서울의 근현대
    이영미
    05.30
    답사 2 - 현대 서울의 공간구조 체험
    안창모
    06.01
    세계도시 서울의 정치경제학
    천만 거대도시 서울은 어떻게 살아움직이고 있는가?
    청계천 개발, 뉴타운 개발, 용산참사 등 대규모 도시재개발의 논리는 무엇인가?
    21세기 글로벌 시대 세계도시화는 서울의 모습은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임동근
     
    일 시 : 2010년 4월13일~6월1일 화 오후 7시~9시 30분 총10회(답사 2회 포함)
    장 소 :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지하1층)
    수강비 : 15만원(참여연대 회원 50% 할인)

    강사소개
    전 우 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 / <서울은 깊다> 저자
    김 백 영 광운대 교양학부 교수 / <지배와 공간: 식민지도시 경성과 제국 일본> 저자
    안 창 모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 / <덕수궁, 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 저자
    이 영 미 문화평론가 / <광화문 연가> 저자
    임 동 근 공간연구집단 대표 / <서울에서 유목하기> 저자

     

    후기 3

    • 서울, 도시와 공간의 인문학[7강]

      2010.6.1 뚜빠뚜빠띠 서울, 도시와 공간의 인문학

      ‘노래=음악’인 걸까요? 물론 노래는 음악의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가사 덕에 문학일 수도 있죠. <서울, 도시와 공간의 인문학> 일곱 번째 강의는 대중가요를 문학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거기에 비친 서울과 도시민의 모습을 엿보았습니다. 강의를 해주신 분은 ‘음악 평론가’ 말고 '노래 평론가‘라 불리길 원하신 이영미 선생님입니다.

      ‘대중가요’라면 아무래도 소비주체인 ‘대중’의 존재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겠죠. 정의하기 나름이겠지만, 전근대적 공동체를 중심으로 점점이 조직된 것과는 다른, 대규모로 조직된 근대적 인간 집단이래야 ‘대중(大衆)’이라는 칭호가 어색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광범위한 동원의 과정에서 대중매체의 개입은 필수적입니다. 이 “대중매체에 의해 상업적으로 대량생산되고 대량유통되는” 것이 바로 대중가요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자본주의니 시장경제니 하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중심인 도시와도요. 대중가요가 도시인의 경험과 욕망을 노래하게 되는 배경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대중가요가 시작된 시점 역시 대중매체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음반인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제작된 것이 1926년입니다. 또한 식민지 조선에 일본어 방송이 시작된 것이 1927년이고 한국어 방송이 시작된 것은 그보다 두 해 뒤니까, 대략 그즈음을 우리나라에도 대중가요라는 것이 본격 시작된 시점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1934~35년 무렵에 식민지 조선의 대중가요는 전성시대를 맞게 됩니다. 이영미 선생님은 전성기가 이 시기에 찾아온 이유로 세대의 문제를 짚습니다. 1930년대 중반에 문화를 적극적으로 향유하는 세대는 1910년대, 즉 이미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이후에 태어난 이들이라는 점이지요. 이들은 독립운동에 대한 이렇다 할 신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해방을 상상하기도 힘들었습니다. 어쩌면 일본 중심의 아시아 질서가 이들에게는 당연히 주어진 전제였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 식민지 시대의 신세대들이 당대 일본에서 유행한 최첨단 스타일을 들여온 것이지요.

      하지만 외부로부터 이식된 유행은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긴장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대중가요에서 그려지는 서울은 그러한 긴장을 담고 있습니다. 과장될 정도의 화려한 불야성과 미개발된 자연녹지. 그것은 이상과 현실, 외래와 토착의 먼 간극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또한 욕망과 억압이라는 모순된 방식으로 수용된 근대화의 부조리함을 보여줍니다. 가령 김해송의 <꽃서울> 속 다음과 같은 가사에서는 화려하지만 무언가 마음 한켠을 불편하게 하는 도시를 그려냅니다.

      “수박냄새 흩날리는 노들강 / 꽃잎 시든 비단물결 으스름 / 인사않는 고운 눈동자 고운 눈동자 / 마셔라 마셔 사랑의 까페 / 오색꽃 뿌려서 춤추는 꽃서울 / 꿈속의 파라다이스여 청춘의 불야성”

      하지만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이상과 현실이라는 딜레마가 치유될 수 있을까요? 한 켠에서는 서양식 선진화의 논리가, 다른 켠에서는 민족주의의 논리가, 아직까지도 힘을 얻는 우리나라에서 외래와 토착의 갈등이 사라질 수 있을까요? 50, 60년대의 대중가요는 상대를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꾸었을 뿐, 식민지 시대와 똑같은 갈등을 반복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실제보다 과장해서 서양화한 것으로 그려낸 가사는, 서양이 욕망과 동일시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영어를 과시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그러한 사례가 될 수 있겠네요. 현인의 <서울야곡>처럼 말이죠.

      “네온도 꺼져가는 명동의 밤거리에 / 어느 님이 버리셨나 흩어진 꽃다발 / 레인코트 깃을 올리며 오늘밤도 울어야 하나 / 베가본드 맘이 아픈 서울 엘레지”

      서양의 어설픈 아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당시 서울은 시골 사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바야흐로 이촌향도의 시대였지요. 정부의 중앙집중식 개발 계획 하에서 지방은 서울의 내부식민지로 종속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마치 식민지 조선 사람들이 일본과 미국을 동경했던 것처럼, 식민지 지방은 서울을 동경의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새빨간 장미보다 새하얀 백합보다 천 배나 만 배나”(봉봉사중창단 <꽃집의 아가씨>) 예쁜 서울의 아가씨의 화려함 이면에는, “애타도록 보고픈 머나먼 그 서울을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이미자 <흑산도 아가씨>)의 동경과 소외감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세대가 바뀌고 70, 80년대에 들어서게 되면 이러한 서울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들은 서울에서 나고 자라 도시의 삶을 일상으로 여기기 때문에 거꾸로 전원을 꿈꿀 수 있습니다. 도시가 준 희망보다 상처를 더 많이 기억하게 된 세대니까요. “나는 돌아가리라 쓸쓸한 바닷가로 / 그곳에 작은 집을 짓고 돌담 쌓으면 / 영원한 행복이 찾아오리라”(양희은 <한계령>) “저 푸른 초원 위에 / 그림 같은 집을 짓고 / 사랑하는 우리 님과 / 한 평생 살고 싶어”(남진 <임과 함께>) 하지만 이들이 그렸던 전원은 다분히 이상화된 것이었습니다. 희망만 있을 것 같았던 서울이 좌절을 안겨준 것처럼, 현실의 전원은 또 다시 기대를 배신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다른 한 편에서는 고달픔을 안고 서울의 삶을 수용하는 태도도 나타납니다. 윤수일의 <아파트> 같은 곡이 그리듯이요.

      도시의 삶이 희망적이지만은 않다는 자각과 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은, 낙원으로 회피하거나 도시를 수용하는 것과는 다른 목소리로 출구를 열기도 합니다. 가령 정태춘의 곡들이 그런 특징을 보여주는데, 그의 초기작들이 자연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표출했다면, 8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문명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작품을 내놓습니다.

      “저 어둔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릴 짓누르고 간 아침 /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 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 빈 거릴 생각하오 /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 정태춘 <북한강에서>

      그리고 조금 덜 정제된, 직설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평범한 노동자가 가사를 쓰고 거기에 곡을 붙인 민중가요지만, 적나라한 감정 묘사가 감정을 쥐고 흔듭니다.

      “너희집은 큰 집에서 네 명이 살지 우리 집은 작은 방에 일곱이 산다 / 그것도 모자라서 집을 또 사니 너희는 집 많아서 좋겠다 / 하얀 눈 내리는 겨울이 오면 우리 집도 하얗지

      내일이면 우리 집이 헐리워진다 쌓아놓은 행복들도 무너지겠지 / 오늘도 그 사람이 겁주고 갔다 가엾은 우리 엄마 한숨만 쉬네 / 개새끼 개새끼 나쁜 사람들 엄마 울지 마세요

      아버지를 따라서 일터 나갔지 처음 잡은 삽자루에 손이 아파서 / 땀흘리는 아버지를 바라다보니 나도 몰래 내 눈에서 눈물이 났다 / 하늘에 태양아 잘난 척 마라 자랑스런 우리 아버지“ - 양병집 <못생긴 얼굴>

      참담하게도 여전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모자라 강의는 70, 80년대의 대중가요를 살펴보는 것에서 마무리되었습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지금 여기의 대중가요를 돌아보게 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걸그룹의 <텔미 Tellme>나 <지 Gee>같은 곡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처럼 루저의 감성을 드러내는 곡이 간간히 주목받는, 그리고 홍대 앞 철거건물 두리반을 중심으로 일군의 문화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있는 지금의 대중가요가 그리는 여기 서울의 풍경은 어떤가요? 혹 여전히 팍팍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민중가요가 사라진 원인이 궁금하신가요?

      “민중가요 문화가 정치적인 진보성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민중가요는 매체를 통해 유지되지 않습니다. 80년대에는 구전됐지요. 대안적 문화를 꿈꾸는 공동체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민중가요는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여성운동, 시민운동에서 민중가요가 생겨날 수 없는 것은 삶을 함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디가 대안이 될 수 있지만 그 역시도 메인스트림 곁에 있으니 힘이 부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수용자인 대중인데, 주류의 흐름을 거슬러 문화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마을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가 생겨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서울, 도시와 공간의 인문학[3, 4강]

      2010.5.11 뚜빠뚜빠띠 서울, 도시와 공간의 인문학

      쓰레빠.

      혹시 마음 한켠에서 ‘슬리퍼’로 고쳐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우리 말에 뿌리내린 일제의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의무감 말이죠. 하지만 가만 따져보면 ‘쓰레빠’는 ‘슬리퍼’가 표현하지 못하는 어떤 의미나 정서를 전달해 줍니다. 두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이 살짝 다르기도 하구요. 이미 수십년 우리와 더부살며 의미를 형성해 온 ‘쓰레빠’를 없애버리면 우리는 그 단어가 내포했던 것들을 함께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일제 청산은 분명 미완된 현재의 문제이지만, 과도한 강박으로 작용할 경우 오히려 우리 자신을 해치는 칼날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우리 스스로를 위해, 일제 잔재가 아닌 일제 콤플렉스를 청산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김어준은 말합니다. “쓰레빠는 쓰레빠다.”


      콤플렉스는 세상을 굴절시킵니다. 얼굴에 난 뾰루지가 불만인 사람에겐 손톱만한 것도 주먹만하게 느껴지지요. 일제에 대한 우리의 콤플렉스도 그렇습니다. 식민지 조선을 평화적이고 순박하고 선량한 민족성을 지닌 피해자로, 제국 일본을 폭력적이고 교활하고 사악한 민족성을 지닌 가해자로 과장하는 심리의 기저에는 식민지적 피해망상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선악의 이항분리가 다친 우리의 마음을 달래줄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을 명징하게 인식하고 분석하는 데는 걸림이 됩니다.


      그 식민지적 피해의식의 대표 사례로 일제의 ‘풍수단맥설’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일본이 조선왕조의 전통적 상징공간을 의도적으로 훼손했고, 토착신앙을 탄압한 대신 神道신앙을 강요했으며, 전통적 문화유산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계획적으로 약탈했다는 주장을 담고 있지요. 조선의 기를 꺾기 위해 북한산에 박았다는 거대한 쇠말뚝이며, 북한산(大)-총독부(日)-경성부청(本)을 통해 서울에 각인했다는 ‘대일본’ 같은 것들에 우리는 얼마나 치를 떨었나요. 하지만 그런 것들이 정말 일본의 치밀한 의도에서 비롯됐을까요? 혹시 일본적인 것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게 일어난 훼손은 아닐까요?


      가령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를 위해 희생되었던 두 충신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장춘단이 있죠. 일제는 그 바로 앞에 신마치 유곽과 이토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각을 세우고, 장충단을 일본인의 공원으로 만드는가 하면, 국사당을 없애고 조선신궁을 짓는 등 조선인들에게는 불쾌할 수밖에 없는 행동들을 했구요. 하지만 이러한 행동들을 꼭 일본의 악의에 의한 것으로만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남산 지역이 조선인들에게는 상징적 가치를 지니는 장소이기는 하지만, 1882년부터 서울에 진출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본거지가 그곳이었으니까요. 이미 남산을 중심으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일본인들에게는 장소가 지니는 의미와는 무관하게 한 행동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식민지는 수탈을 하기 위한 여러 가지 기본적인 도시 인프라나 철도 네트워크나 도로망 같은 인프라를 설치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든 근대적인 형태의 사회공간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일제가 조선의 전통적인 풍수지리적인 공간 조형 방식을 잘 파악하고 그것을 악의적으로 왜곡해서 민족의 정기를 꺾으려는 방식으로 도시 계획 같은 것들이 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낭설로 여겨집니다.


      경복궁 앞에 위치했던 조선총독부의 입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경복궁에 대해 과도한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으로 지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태종 때 창경궁이 지어져 양궁체제로 운영이 되었지요. 게다가 임진왜란 이후 대원군 이전까지 기간 경복궁은 버려진 빈터에 가까웠습니다. 대원군이 중건하기는 했지만 경운궁을 중건할 때 경복궁에서 많은 것을 떼어와 많이 황폐해지기도 했구요. 한반도의 500년 이하의 건물에 대해서는 평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철거를 서슴지 않았던 일본의 입장에서 지어진 지 얼마안된 경복궁의 가치란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럼에도 확실히 일본의 제국주의는 여타 서양의 제국주의에 비해 파괴적인 측면이 있었습니다. 민족 말살 정책이나 치밀한 동화정책 같은 것을 보면 말이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일본은 전세계에서 유일한 유색인종 제국주의였잖아요. 처음에는 탈아입구를 외치며 ‘유럽인이 되자’, ‘기독교로 개종하자’ 했던 일본인들이 러일전쟁에서 백인들을 이기는 등 승승장구하니까 대아시아주의 같은 황인종 제국주의를 꿈꿔볼 수 있었던 거죠. 애시당초 지배 인종과 피지배 인종이 확연하게 구분되었던 서양의 제국주의와는 다르게, 같은 인종이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형성하니까 동화정책을 펼 조건이 마련된 것입니다.


      일제가 후발 제국주의라는 점도 서양 제국주의와의 차이를 설명해 줍니다. 사실상 전세계 식민지 영토 분할이 끝나가던 시기에 뒤늦은 출발을 한 셈이니, 팽창의 공간적 제약이 있었겠지요. 결국 일제는, 먼 바다로 개척해 나가는 서양의 원격제국주의와는 달리, 대륙으로 향하는 철도제국주의로 방향을 잡습니다. 그렇다 보니 식민지에 대해서 완전영토화 전략을 취하게 되었구요. 서양 제국주의는 식민지도시를 건설할 때, 그 도시에서 차지하는 지배 민족의 인구가 0.2~0.3%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경성에 거주했던 일본인의 비중은 30%에 다다를 정도로, 일본은 조선을 그들의 땅으로 만드려고 했지요. 영국의 지배 하에 있었던 무굴제국과 비교해 봐도 차이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영국은 기존 무굴제국의 지배 시스템을 그대로 두고 통치 비용은 최소화하면서 실리만 챙기는 간접통치 방식을 취했는데, 일본은 훨씬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통치 방식을 택했잖아요. 그렇다보니 상대적으로 짧은 36년의 피지배 기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많은 영향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구요.


      일제의 완전영토화 전략은, 일본이 본국의 도시 개발 과정에서 취했던 정책들을 식민지 도시에도 비슷하게 적용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당시의 경성 개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근대 도시 형성 과정을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이죠. 오늘날 일본의 도시들을 보면 일본식 전통과 서양식 현대가 어색한 듯 자연스럽게 섞여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발견할 수 있죠. 실제로 이 전통과 현대의 알력이 근대 도시 형성 과정에서도 크게 작용했다고 합니다. 조약개정․문명개화․부국강병 등 서양화의 경향과 전통적 공간 구성 요소나 통제방식을 재동원해 변용하는 일본화의 경향이 공존했던 것이죠. 그리고 그 이면에는 자원과 역량의 부족이라는 현실적인 고려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근대화하는 급속한 개혁은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하는 것이니만큼, 전통의 것들을 어느 정도 이용하면서 생활 인프라와 같은 것들은 시민의 자발적 역할에 맡기고 나머지 자원을 군국주의 노선 강화에 이용한 것입니다. 러일전쟁 이전에는 전체 예산의 50% 이상을 군사 쪽에 쏟았다고 하니, 사회민주적 후진성은 어쩔 수 없는 결과였겠죠. 외국인들에게 보여줄 쇼케이스 격으로 만들어진 오늘날 동경의 긴자 정도만 일단 시구개정 사업에 착수합니다. 그래서 도시 계획은 일본 본토보다도 타이페이가 훨씬 더 앞서 갑니다. 경성에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비용 문제 때문에 제대로 초기 도시 계획을 하기보다는 간선도로망을 어떻게 뚫을 것인가 이것이 가장 큰 과제가 되었습니다. 1912년부터 계획된 시구개정사업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오늘날 종로․을지로․충무로 등지의 격자형 도로가 바로 이 시구개정사업의 결과물입니다.


      강의가 끝나고 이 강의의 기획의도와 관련해서 앞으로 서울이 어떻게 변화했으면 좋겠는지 묻는 질문에 선생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서울을 개발해 온 방식은, 어마어마한 발전이 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만, 위로부터 디자인된 플랜을 가지고 이루어진, 아래로부터의 참여나 지역 커뮤니티 사람들의 노하우를 활용하는 방식이 아닌, 일방적으로 이뤄진 방식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북 뉴타운 같은 계획은 강남 개발보다 훨씬 더 나쁜 계획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강북이라는 장소가 갖고 있는 장소성, 역사성을 다 사장시켜버리는 것이잖아요. 사실 그런 것들이 역사도시가 갖는 가장 소중한 재산이거든요. 서울 안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지층들의 기억, 장소성이 녹아들어 있는 것들이 색바랜 도시의 매력인데, 그런 것들을 그냥 말끔하게 고층빌딩 세워서 없애버리는 방식이 지금까지 우리가 주로 해온 방식이었죠. 그것이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의 성장잠재력을 제약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식민지 연구자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원래부터 갖고 있던 고유한 공간 운영의 노하우 같은 것들을 식민지기를 거치면서 다 폐기처분하면서 시작된 정신적인 아노미 현상이 지금까지 이어졌고, 서구에서 유행하는 새로운 패턴과 양식을 빌려왔죠. 그러다 보니까 자기 것은 아무 것도 없이 사라진 국적 없는 도시가 돼 버린 거잖아요. 스스로 자기가 갖고 있는 자산을 찾아내는 눈을 갖는 것. 그게 중요하고 그러기 위한 조건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좀 천천히 가자라는 것입니다. 너무 우리는 속도주의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아요. 사실 20세기 후반에 전세계에서 가장 빨리 변한 도시잖아요. 조금 천천히 가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 잠재력 이런 것들을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일본 같은 경우를 보면, 어떤 사람들은 일본을 형편없는 도시라 얘기하지만, 어쨌든 자신이 전통적으로 가져온 공간 노하우 같은 것들을 최대한 활용하거든요. 롯폰기힐스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수백회 이상 주민들과 면담을 하면서 계획을 수정하고 협상하고 이런 테이블들이 마련이 되고요. 그냥 마스터플랜 만들어서 확 밀어버리는 방식의 진행은 아니거든요. 그런 부분에서 도시가, 공간이 생명력을 갖는 이유는 뭔가에 대해 우리가 근본적으로 재고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디어의 문제라기보다는 사람들의 마인드를 바꾸고, 개발하는 관행이나 제도나 문화를 바꾸는 것이 훨씬 더 큰 문제인 거죠.”


      이상 광운대학교 김백영 교수님의 강의 후기였습니다.

    • 서울, 도시와 공간의 인문학[1, 2강]

      2010.4.30 pjm 서울, 도시와 공간의 인문학
      4월 13일 [서울, 도시와 공간의 인문학] 강좌가 막을 올렸다. <서울은 깊다>의 저자이신 전우용 선생님이 1강과 2강의 강의를 맡아 열강해주셨다. 전우용 선생님의 강의는 "도시"라는 공간이 생기게 된 배경과 "서울"이 조선의 도시로 자리매김한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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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강 조선이 서울에 담은 꿈

      문명과 도시

      고대 사람들은 '신'을 매우 중시했다. 자연재해나 죽음처럼 사람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일들이 빈번했고 그런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를 상정했다. 그들은 '신'이 자연 속에 있다고 믿었으며 이런 믿음은 자연숭배-하늘 숭배 사상으로 발전했다. (예를 들어 하늘나라를 옥황상제가 사는 신성한 곳으로 생각했던 식이다)

      신석기 시대 농업혁명으로 인해 발생한 잉여생산은 인구의 축적을 낳았으며 드디어 "도시"가 만들어 지기 시작한다. 도시는 농사를 짓지 않는 땅에 오로지 신을 위한 공간으로 처음 등장했다. 그 곳에 신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이 살았으며 농사일에서 자유로우며 신을 위한 의식에 치중했던 이들의 생활과 문화는 농촌보다 훨씬 화려하고 다양했다. 도시에 권력(신성권력:사제집단+세속권력:왕)이 집중되면서 이제 도시는 자신의 공간에 권력적 요소들을 드러내게 된다. 권력자들은 이런 가시적인 형태를 통해 사람들에게 도시가 선택받은 특권적인 장소임을 보여주고 싶어했고 그들의 믿음과 신뢰를 얻고자 했다.

      특히 도시의 화려하고 웅장한 건조물들은 이를 통해 건물과 그 내부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신성성을 부각하며 일반인들에게 감탄과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목적으로 장식이 발달했다.

      조선이 서울에 담은 꿈

      서울은 '새벌-서나벌-셔블-서울'의 변화를 거쳐 만들어진 단어로 순 한글말이며 "가장 신성한 땅"이란 뜻이다. ("새벌"의 "새"는 새로움, 동쪽을 뜻하고 "벌"은 땅을 의미함.)

      이성계가 고려의 수도 개경을 버리고 새로운 도읍지로 한양(서울)을 택한 것은 개경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던 구 특권 세력의 해체와 새 나라를 위한 건국이념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정도전은 이런 서울을 설계한 인물로, 그는 자신의 이상이던 유교이념을 정립하기 위해 주자성리학적 공간관을 바탕으로 도시를 건설한다.

      전조후시前朝後市 : 궁궐의 전면에 관청을, 후면에 시전을 배치

      좌모우사左廟右社 : 궁궐의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울 배치

      제후칠궤諸侯七軌 : 제후의 길(광화문)은 마차 7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는 길로 함.

      경복궁을 창건할 때도 주자성리학에 따르는 정도전의 이상이 반영된다. 경복궁을 보면, 40칸에 이르는 수정전이나 신하들과 함께 하는 연회를 열었던 경회루 등 신하들을 위한 공간이 왕을 위한 공간에 뒤지지 않음이 드러난다. 이는 신하들의 정치참여를 격려하여 신권과 왕권을 대등한 관계로 유지하고자 했던 정도전의 정치 이상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자성리학에 입각한 궁궐을 역대 조선 왕들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끊임없이 경복궁을 외면하고 다른 궁에서 기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덕분에 조선왕조의 5대 궁궐은 지금까지도 공원이 거의 없는 서울에서 시민들이 그나마 숨 쉴 수 있는 녹지와 휴식공간이 되어 주고 있다.

      조선 초 한양(서울)은 새로운 도시로서 활기가 넘쳐나는 도시였다고 한다. 과거제를 거쳐 각 지역에서 올라온 신진사대부들을 통해 각 지역의 문화가 융합되면서 한양(서울)만의 문화가 꽃을 피웠던 것이다. 세종대왕 시기의 새로운 발명과 창조가 가능했던 것도 조선 초기 수도 한양의 문화에 영향을 입은 것이었을 것이다.(2010년 서울은 어떤가?)

      에밀 졸라는 "백화점은 현대의 신전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를 바꿔 말하면 "물질(자본)은 현대의 신이다."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백화점이나 면세점이 과거의 신전이 위치하던 곳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 자본주의의 신은 자본 그 자체(물신)이지 인격이나 어떤 가치를 담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요즘 사람들의 가치 선택 기준은 "이게 돈이 되는가?"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으로는 도시가 자본의 수단으로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정말 인간적인 것은 무엇인가?"를 묻고, "우리 도시의 모습이 어떻게 되는 것이 더 인간적인가?"를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도시는 어디에 있을까? 바로 우리 자신들의 마음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일이다

      *           *           *           *           *           *           *           *

      4월 20일 참여연대에서 두번째 수업이 있었다.
      이번 강의도 전우용님의 열강으로 흥미진진한 수업이었다.

      2강 서울, 근대로 향하다

      사람을 가장 크게 변화시키는 요인은 무엇일까? 혹자는 신념이나 가치 이데올로기라고 말할지 모르고, 혹자는 지식체계의 변화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봤을 때 가장 크고 중요한 삶의 변화 요인은 바로 "자연"이다. 기후변화같은 자연문제는 앞으로도 우리 미래의 삶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요인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임진왜란 역시 17세기 소빙기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동아시아 대륙에 소빙기가 찾아오자 기상 이변으로 인한 농작물 피해와 기근, 질병이 만연하게 되고 이는 당시 동아시아에 존재하던 국가-명나라, 청나라, 조선, 일본-들이 자국의 문제를 외부를 통해 해소하는 방식을 택하게 만든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서울은 기능과 모습이 크게 파괴된다.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고 기근과 전염병은 끊이질 않았다. 많은 인구 감소로 양민의 수가 줄어들자 이를 늘리기 위해 군공과 면천을 실시하는 등 폐쇄적이던 신분제도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전쟁 후 이런 어수선함 속에서 서울의 재건을 위해 궁궐 복구와 성곽 수리 및 군사 시설 정비가 시작된다. 사회 전체가 이전의 방법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새로운 방향으로 빠르게 변화하자 실학처럼 새로운 학문이 등장해 당시 사회 모습을 다루고자 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을 거쳐 농업생산력 및 의학의 발전을 통해 인구가 증가하면서 서울도 늘어난 인구와 함께 확장하기 시작한다. 농촌의 잉여인구가 도시로 진입하며 서울 교외 지역 확장도 일어났다.

      특히 서울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시기가 두 번 있는데 한 번은 한국전쟁 직후이고 또 한 번은 양란(임진왜란,병자호란) 직후인 17세기 중반이다.

      도시공간이 계속 팽창하면서 18세기 한양(서울)은 근대적 양상을 띄게 된다. 근대적인 도시 문제(주택문제, 일자리문제, 환경문제, 범죄 등)들도 발생하는데 이는 서울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는데 한 몫을 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들을 통해 우리는 일본 우파들이 말하는 "일제침략이 조선의 근대성에 이바지했다"는 주장이 전혀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근대화와 도시화가 같은 개념에서 시작된다고 보면 이미 일제 침략 전인 18세기에 근대적인 모습이 서울에 존재했던 것이다.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당시 조선의 기득권 세력이자 비리 투성이었던 노론을 넘어서기 위해 더 아래 신분인 일반 백성들과 손잡기를 원했고 이는 민본적 절대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고종은 도시를 민본적 절대주의가 드러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시민공원과 상설시장의 등장은 백성을 위한 고종의 의도가 잘 드러난 도시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종로를 관통하는 동서축을 강조한 "황도건설"은 이 길을 주로 이용하게 될 국민에 대한 배려이자 근대성의 표지라고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자주독립, 전제황권을 도시 공간 위에 표시함으로서 고종의 정치적 의도를 잘 드러내며 조선시대 도시근대화의 면모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종로를 중심축으로 삼았던 것은 이후 일제 식민지 시기에 그나마 종로가 일본인 중심의 명동에 맞서 조선인 상권의 중심이 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질의응답 시간에 많은 질문이 오갔다. 그 중에 가장 의미심장했던 질문과 답변을 올려본다.

      "서울을 주도할 가치와 신념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도시는 그 도시 사람들을 닮기 마련이다. 서울이 세계에서 가장 추악한 도시 6위에 뽑혔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는데, 만약 그 내용이 사실이라면 서울 시민도 가장 추악한 시민 6위라는 소리다. 도시는 도시인들의 모습을 반영한다. 권력과 돈이 일차적으로 움직이는 곳이 바로 도시개발, 도시주권이다. 한강이 파괴되어도 집 값이 올라가면 상관없다는 사람들이 많으면 결국 그런 식으로 도시 모습은 흘러가게 된다. 무엇보다 서울 시민들의 모습에 따라 앞으로의 서울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나는 어떤 욕망을 가슴에 품고 도시를 바라보고 있는지, 자기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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