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삶을 사랑하는 지혜

  • 강사

  • 기간

    • 2010. 3. 23 ~ 2010. 4. 27
  • 시간

    • 화요일 10:00~12:00 총6회
  • 수강료

    90,000

    • 파격 할인혜택
    • 참여연대 회원4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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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 정보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지혜는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
    삶을 사랑한다 함은 무엇보다 나의 삶 자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한껏 기쁘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입니다.
    기쁨은 서로에게로 열려 젖어 들어가는 만남에서 비롯됩니다. 열려 젖어 들어가지
    않고서는 감각을 느낄 수 없습니다. 형형색색의 온갖 사물들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감각을 주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물며 그런 감각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꽃을 사랑하는 사람의 영롱하게 빛나는 눈빛과 표정, 그 부드러운
    음성만으로도 ‘꽃보다 사람이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살이는 삶을 밋밋하게 하고 심지어 혐오하게 합니다. 남들을 혐오하게 하고,
    나를 혐오하게 합니다. 그 속에는 삶 대신에 죽음이 힘을 발휘합니다. 죽음이 주는
    두려움이 똬리를 틀고서 우리에게서 삶의 기쁨을 앗아가고, 삶의 깊고 오묘한 감각을
    앗아가고, 만나고 있는 사람들을 앗아가고 결국에는 나를 앗아갑니다.
    그래서 철학은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는 지혜를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환희로울 수 있는 삶의 지혜와 쌍을 이루는 것이지요. 철학
    공부를 통해 이 두 지혜를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 합니다. 우리는 나의 삶을 함부로
    방기할 수 있는 권리가 애당초 없습니다. 철학적인 지혜가 필요한 까닭입니다.
     
    강사소개
    조 광 제 철학아카데미 원장. 2000년 3월에 철학아카데미를 공동 설립하여 지금까지 약
    70여 개 강좌를 개설해 강의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몸의 세계, 세계의 몸>과 <주름진
    작은 몸들로 된 몸>이 있습니다.
     
    강좌 진행

     

     
    날짜
                       강의 제목
    1
    03.23
    죽음의 필연성을 넘어서
    죽음의 필연성에서 삶의 무의미와 두려움이 온다.
    신, 국가, 자본은 죽음의 변형이다
    2
    03.30
    사물과 감각 속으로
    우주를 채우고 있는 사물은 알고 보면 온갖 감각이 응축된 것이다.
    인간은 가장 탁월한 사물이다. 인간관계는 감각의 관계다.
    3
    04.06
    언어와 개념을 거쳐
    사유는 삶의 감각을 위한 수단이다.
    사유는 개념을 수단으로 삼아, 언어를 통해 논리적으로 표현된다.
    정확한 사유에서 대화와 소통이 열린다.
    4
    04.13
    몸과 마음의 열림으로
    몸은 삶의 바탕이자 주체이다. 마음은 몸의 징표이고 수단이다. 마음의 고집을 벗어나 몸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5
    04.20
    사회적인 욕망과 권력을 넘어서
    권력은 배타적인 소유를 통해 삶을 왜곡된 방식으로 유혹하고 끝없이 시달리게 한다. 권력과 소유는 배타성을 통해 이기적인 자폐성을 심어 넣는다.
    6
    04.27
    나눌수록 커지는 가치, 예술적 삶을 향하여
    누구와도 함께 나눌 수 있는 나눌수록 더욱 커지고 심오해지는 예술적 가치. 우리의 삶이 예술적인 만큼 사랑할 수 있고, 삶을 사랑하는 만큼 예술적이다.
     
    일 시 : 2010년 3월23일~4월27일 화 오전 10시~12시 총6회
    장 소 :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지하1층)
    수강비 : 9만원(참여연대 회원 50% 할인)

     

    후기 2

    • 철학, 삶을 사랑하는 지혜[4-6강]

      2010.5.1 놀이정신 철학, 삶을 사랑하는 지혜
      tv채널을 돌리다가 커피프린스라는 드라마 재탕하는 걸 보게 되었다. 재밌다 헤헤... 쿡tv로 4일 동안 잠 안고 18화까지 전부 독파했다. 1회당 60분 정도니까 다 합치면 1000시간 이상을 이 순정만화 같은 드라마에 올인한 것이다. 난 늘 이런 식이다. 그 드라마 인기 있을 땐 모른척하다 결국 혼자 뒷북친다. 뒷북도 사이즈 큰 걸로다가 친다. 남자라도 사랑하겠다는 이 자알 생기고 섹시한 청년, 공유의 눈물섞인 대사 한마디에 온몸의 감각들이 죄다 들고 일어났다. 한마디로 감각들이 난리법석이다. 중년 여성의 냉철한 이성 따윈 내다버리기도 귀찮아 그냥 깔아 뭉개버렸다. 다 늙어가지곤 풋풋한 청춘남녀 연애 얘기에 정신줄 놓아버리는 아줌마가 하도 안쓰러워 한동안 술도 좀 먹여주고 만화책도 좀 보여주느라 이 달에 계획했던 독서스케줄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조광제 선생님 강의 들으면서 사이드 메뉴로 골라 놓은 철학책 마저 읽어야 하는데 ㅠ_ㅠ).

      나이 먹어서 서러운 것은... 몸은 늙는데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인생은 점점 균형을 잃고 자아는 분열된다. 공중회전낙법을 하다 이마에 큰 혹이 생겼을 때도 몸은 할 수 없다고 두려움을 호소했지만 마음은 받아주지 않았다. 이렇게 물리적인 나이와 상관없이 늘 10대 소년(?)의 마음으로 산다는 건......... 민폐다,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몸과 마음이 만들어 내는 불협화음, 그 소란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38년을 살아도 철들지 못하는 행동주의자, 추적 나선다.

      4강 몸과 마음의 열림으로

      38살 아줌마의 몸과 10대 소년의 마음이란 어떤 관계인지 지금부터 철학적으로 고민해 보자. 우선 몸과 마음 둘 중에서 어떤 것이 더 근원적인 걸까? 숲의 나무 하나하나 도끼로 넘어뜨리며 나가는 고된 길이 예상되므로 심약자, 노인, 어린이, 임산부 등등은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먼저 마음을 근원으로 보는 시각 : 대표적인 사람이 데카르트인데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카피를 남겼더랬다. 이 때 생각이란 내가 나를 생각하는 이른바 ‘반성적 사유’로 내 마음이 내 마음을 생각의 대상으로 삼고, 그렇게 내 마음을 대상으로 삼고 사유하는 내 마음이라는 그 주체를 또다시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또 다른 주체로서의 내 마음이 존재하고 계속 이런 식이다. 이렇게 되면 마음은 제 자신의 꼬리만을 향해 빙빙 돌 뿐 그 바깥으로 빠져나올 방법(타인과의 소통)이란 도무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유식한 말로 유아론(唯我論)적인 개인이라고 한다는데, 근대적 개인의 개념은 이런 유아론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원리상 타인을 인정할 수 없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향해 ‘목숨을 건 투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는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은 근대 자본주의의 배타적 개인이라는 개념을 낳은 이 유아론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는 이가 라이프니츠인데 그는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을 ‘모나드’라 칭했다. 이때 그가 말하는 길이를 갖지 않는 모나드란(길이를 갖는다는 것은 또 다시 무언가로 나뉠 수 있으므로 근원적이라 할 수 없다는 논리)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다.

      → 이 두 사람처럼 마음을 더 근원적인 것으로 상정하면 우리는 더 이상 타인과 소통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닫힘의 철학 위에 근대 자본주의가 철옹성처럼 서 있다.

      그렇다면 몸이 더 근원적이지 않을까 : 이런 소통불능의 상태를 피하기 위해서 우린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 몸이 더 근원적이라는, 즉 마음이나 생각 이런 것조차 마음이 아니라 몸이 하는 것으로 보자는 과감한 시각 이른바 ‘몸주체 이론’이 그것이다. 몸이 말하고, 몸이 느끼고, 몸이 지각하고, 몸이 의지를 발동하고, 몸이 판단하고, 몸이 미치고... 물론 이 논리 역시 빈틈없이 완벽하게 정당화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오류를 낳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몸은 지각된다는 것이다(보고 만지고 할 수 있으니까). 몸은 타인의 마음처럼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서로의 몸은 서로의 몸을 향해 지각의 차원에서 상당 부분 이미 열려있다. 비록 마음을 좀 더 근원적으로 보기는 했지만 의식이 하는 작용 중에서 지각작용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이라는 주장을 펼친 후설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지각작용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판단, 평가, 소원, 상상 등과 같은 작용들 또한 타인에게 어느 정도는 열려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즉, 몸은 지각적으로 타인에게 열려 있고, 우리가 흔히 정신적인 작용이라 말하는 것들 또한 이러한 지각작용을 바탕으로 해서 성립함으로 마음의 영역이라 일컬어지는 작용들조차 타인에게 어느 정도 열려 있는 것이다.

      → 이런 몸주체 이론을 받아들이면 이제 우리는 마음이 아니라 행동을, 그 행동과 절대로 뗄 수 없는 감각을 더 근원적인 것으로 보게 된다. 여기까지 오는 데 난관도 많고 힘도 들었지만 어쨌거나 이로써 소통불능의 상태를 이끈 갇힘의 철학들은 박살냈다. 몸의 판정승!

      그렇다면 마음의 대표주자로 인식되는 언어나 생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몸이 더 근원적인 것이라고 볼 때, 우리가 생각들을 주고받는다고 여기는 언어조차 실은 생각이 아니라 나의 감각과 행동들을 주고받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생각의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생각은 생각에서 생겨날 수 없다. 생각은 늘 생각을 할 대상을 필요로 한다. 즉 생각의 내용은 생각이 아닌 것들을 바탕으로 한다. 생각이 아닌 것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감각이고 행동이다.

      빰빠라빠~~~ 드디어 몸이 더 근원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감격적인 순간이다. 같은 논리를 펼치는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가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의 몸은 일반화된 구조적 장치 이른바 ‘몸틀’이라는 것을 지니고 있다. 몸틀이란 살면서 각자의 몸에 일정한 형태로 유형화된 행동방식들로서 우리 몸에 습관처럼 배어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사람마다 갖고 있는 몸틀의 종류도 다르고 수도 다르다. 몸틀의 수준과 깊이도 물론 다를 수밖에 없다. 자신이 구비하고 있는 몸틀에 따라서 행동하는 방식이 다르고 그래서 몸틀이 너무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소통이 쉽지 않다. 하지만 몸틀이 다른 사람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와는 다른 몸틀을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하는 행동으로 인해 나는 그에 대응하는 새로운 감각들을 생성해낸다. 내 세계가, 내가 향유할 수 있는 시공간이 좀 더 넓고 좀 더 깊게 확장되는 것이다.

      결국 몸을 근원적으로 보았을 때야말로, 우리는 서로에게 지각적, 감각적으로 열려 있을 수 있고 이런 감각을 바탕으로 소통을 이룰 수 있고, 이러한 소통을 바탕으로 공유적 향유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자신의 삶을 향유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타인을 향해 몸을 열어야한다. 이 시대의 철학은 닫힘의 철학이 아니라 열림의 철학이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전혀 엉뚱한 얘기로부터 시작하는 것 같아도 언제나 항상 소통과 공유적 향유라는 목적지를 잃지 않고 찾아내는 나의 길찾기 솜씨에 조금은 감탄하며 자뻑하고 있다.

      5강 사회적인 욕망과 권력을 넘어서

      4강의 정리가 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철학에 문외한인 내가 생각해보아도 몸이 마음까지도 아우르는 주체로서 당당히 우뚝 서는 이 대목이야말로 이 강좌 전체의 클라이막스 내지 결정타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결정타의 공은 이제 어디로 굴러갈 것인가? 몸이, 행동이, 감각이 중요하고 더 근원적이라는 건 이제 알겠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마 이러고들 계실 것이다. 그래서 5강 6강은 짧게 질러간다. 4강에서 숲의 나무들을 하나하나 베어내며 길을 갔다면 5강 6강부턴 그 숲 위로 헬기 타고 지나간다. 한방에 훅~~~  두두두두(헬기소리)~~~

      이쯤에서 권력이 강의에 등장하는 건 이름도 찬란한 그 미셀 푸코 덕분이다. 푸코에게 있어 권력관계란 몸의 관계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몸이 모든 것의 근원인 상태에서, 권력은 그러한 감각덩어리로서의 몸 다시 말해 그 몸의 감각들을 지배하고자 한다. ‘생체권력’이라는 멋드러진 단어를 푸코아저씨가 여기에 갖다 붙였단다. 감각의 관계는 좀처럼 눈으로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감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권력관계도 항상 명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푸코: 권력관계의 미시망). 예를 들어 군대의 지휘관과 부하 사이의 관계에 존재하는 눈에 확 띄는 권력관계들도 있지만, 일상적인 대화에서 내세우는 언어의 선택에도 분명 권력관계는 존재한다. 이는 MBC에서 다큐로 만든 걸 본 적이 있어 이해가 쉽다. 내가 모르는 어려운 영어단어들을 계속해서 사용하거나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가 화제로 떠올랐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그 공간에서 배척되고 소외되는가 하는 줄거리였다. 강준만은 이를 두고 지식폭력이라고까지 하는 것 같던데...

      이러한 권력이 오늘날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 ‘감각덩어리들’과는 어떻게 맞닿아 있는 걸까? 자본주의 아래서 감각의 양을 더 늘리기 위해서는 자본이 중요한 수단이 된다. 당연하다. 돈이 있어야 골라먹는 재미를 느낄 것 아닌가... 한편 자본의 입장에서도 자본을 더 증식시키려면 감각에 호소하여 상품을 파는 길 밖에 없다. 이렇게 감각과 자본은 서로가 서로에게 수단이 된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감각의 향유를 위해 자본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 그 자본을 얻기 위해 노동을 해야한다는 어찌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칼날을 품고 있다. 그것이 왜 칼날인고 하니... 우리가 얻고자 하는 건 감각이었는데, 그 감각을 얻기 위해 자본이 필요하고 그 자본을 얻기 위해 다시 노동을 해야하고 거기까진 좋은데 결국 노동을 하느라 감각을 향유할 여유는 점점 사라져간다는 딜레마만이 덩그러니 남기 때문이다. 결국 본말이 전도된 삶, 감각을 향유하기 위한 노동이 아니라 노동에 치여 감각적 향유라는 원래 삶의 목적마저 까마득히 잊어버린 삶을 살고 있는 우리 불쌍한 감각덩어리들만이 득실거리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감각도 노동을 강요하는 자본과의 싸움에서 여지없이 KO패 당하고 만다. 아니라고? 근사한 아파트 한 채를 감각적으로 향유하기 위해 우리가 저당잡힌 인생의 대부분이 그걸 또렷이 입증한다.

      그런 것도 감각을 향유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하실 분도 계실 것이다. 그렇다. 집, 차, 더 많은 돈을 소유하는 것도 감각이다. 마르크스는 이걸 소유감각이라고 이름붙였다. 하지만 이러한 소유감각은 실제 소비를 통해 느끼는 감각에 비하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획일적이서 제대로 된 감각이 아니다. 소유감각은 다른 모든 실재의 감각을 억누르고 폄하하는 철저히 왜곡된 감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자본을 소유함으로써 얻어지는 감각은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몸(감각)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권력감각으로까지 발전한다. 나의 돈으로 타인의 노동력을 살 수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된다. 우리는 돈으로 남의 노동력을 사는 행위를 통해, 즉 그 사람의 몸을 일정하게 구속함으로써 그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감각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결국 자본주의 아래에서 우리는 실제적인 감각은 억누르고 철저히 왜곡된 소유감각, 권력감각을 통해 타인의 삶을 통제하려드는 파시즘적인 욕망들만을 키워나가고 있는 셈이다. 즉 지금 시점에서 우리의 삶은 순수하고도 실제적인 감각의 존립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삶으로 내몰리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철학자 조광제가 제시하는 답은 이렇다. 불필요한 감각들을 정리하라!!! 왜곡된 감각들을 얻기 위한 쓸데없는 노동은 줄이고 실제 감각들을 공유적으로 향유하기 위한 시간적 공간적 여유를 충분히 확보하라!!!

      하지만 정답을 찾았다고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이 심리는 뭐지?  .말은 쉽고 실천은 어렵고, 이론은 쉽고 행동은 어렵고... 끙!

      어쨌거나 권력에서 출발하여 감각의 공유적 향유로까지 오는 길찾기(5강 정리) 또 성공~~

      6강 예술세계로의 초대

      자본의 무한한 증식이라는 전제 없이도 감각을 공유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사회, 그를 위해 국가가 자본(기술)을 독점하고 → 사용가치만을 통용시켜 돈을 줘야만 살 수 있는 상품의 수를 현격히 줄이고 → 사야하는 상품의 수가 줄어드니 그걸 사기 위해 노동해야 하는 시간도 줄어들고 → 이렇게 노동이 줄어들면 노동을 구매함으로써 얻어지는 권력감각도 줄어들고 → 이럴 줄 알았는데 권력의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이 안 되고 → 이런 사람들 간의 권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권력을 새롭게 인식시키기 위한 인간 재교육 과정이 필요하게 되고 → 그 과정에서 더 집약되고 독점적인 권력이 창출되더라~~~

      이게 공산주의가 걸어간 쇠락의 발자취다. 하지만 이 새드 무비가 마냥 슬프지만은 않은 이유는, 왜곡된 감각과 자본과 권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뭇 인간들의 몸부림이 이 세상 곳곳에서 아직 온기를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예술이 등장해 주신다. 5강과 연결시켜 이야기를 하자면, 결국 왜곡된 감각, 자본, 파시즘적 욕망, 불필요한 감각 등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순수 감각들을 향유하자는 것이 이 시대 나름의 대안이었는데 바로 여기서 우리는 예술과 필연적으로 조우하게 된다.

      정신 차리고 보니, 아니 헬기타고 한방에 간다던 5강, 6강이 왜 이러냐.. 잠시 반성적 사유 모드... 이 헬기가 1953産 소련제라서 그렇다는 변명을 깔고 어쨌든 6강은 좀 더 스피디하게 고고!!!

      전통적인 예술의 개념으로 보면, 관객 내지 청중으로 불리는 일반 대중(예술 향유자)는 항상 수동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예술에 대한 감상을 통해 간접적으로밖에 다가갈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상태라면 우리는 예술을 공유적으로 향유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20세기에 등장한 깨우친 예술가들은 예술을 극소수 있는 자들의 전유물에서 다시 일반대중에게로 돌려주기 위해 예술가과 관객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작업들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런 예술을 아방가르드(전위예술)라 칭하는데 다다이즘, 미래파, 입체파, 초현실주의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개념에서 예술을 다시 들여다보면 우린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고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술품일 수 있다. 이것이 가끔 나를 헷갈리게 만드는 현대미술의 정체다. 이러한 현대예술은 전통적인 예술관을 무너뜨리는 것 같지만 잘 생각해 보면 오히려 모든 우주적인 존재 자체를 예술로 봄으로써 예술철학의 지평을 확산시키고 있다. 즉 가끔 정말 이해가 안 가는 전위예술가들의 장난과 같은 퍼포먼스도 예술을 공유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한다면 이쁘게 봐 줄 수도 있다는 얘기다.

      현대미술의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배타적 소유를 뛰어넘어 감각의 공유적 향유를 위한 인간의 몸부림은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실패를 겪으면서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알 수 있다. 내가 바로 예술가이고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술이라는 개념. 이러한 예술의 초대에 적극적으로 응한다는 건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배타적인 소유와 그에 따른 소유감각의 쇠사슬을 끊고 나의 감각을 타인과 공유적으로 향유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통해 더욱 강화, 심화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 자본주의적인 삶의 방식을 혁명적으로 파기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내가 제일 어러워 하는 ‘예술’을 통해서도 감각의 공유적 향유(소통)라는 이 강좌 본연의 목적지를 길을 잃지 않고 무사히 찾아냈다. 저번 후기처럼 엑기스만 뽑아 박스 형태로 정리하고자 하는 욕구는 묻어 두어야겠다. 여기까지 오는 데만도 장장 6시간이 걸린 관계로... 에너지 절약을 통해 전지구적 환경재난을 막기 위해 컴퓨터 사용을 자제함으로써.... 뭔 소리냐 이건...

      강의를 마치며....

      수업을 너무 열심히 들은 관계로 박스 형태의 요약은 없어도 그동안 있었던 철학 강의 총 6강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있다.

      삶을 제대로 누리려면 제대로 된 감각을 타인과 제대로 소통하라!

      조금 쉬었다가, 난 내 몸속에 자리잡은 10대 소년의 감수성을 불러내 진지하게 소주 한잔 기울이며 소통할 예정이다(이건 인터넷을 통해 공유에 관한 온갖 정보들을 수렴하겠다는 말과 동일어이다. 이때 공유란 그 공유가 아니라 배우 공유... 헷갈려). 혹 내가 배우 공유를 좋아하게 된 것도 이 철학 강의 때문은 아닐까?

      어쨌든 서두에서 제기했던 내 개인적인 문제, 38살 아줌마 몸과 10대 소년인 마음과의 관계 정리는 대충 원만하게 이루어질 것 같다. 그 마음이 몸에서 왔다는데... 어찌 마음의 철없음을 탓하리오. 내 몸은 비록 늙었어도 여전히 한 구석에 10대 소년의 마음을 숨겨두고 있는 것을... 그게 철학을 통해서 바라본 현재의 나다.

      강의 가이드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 주신 조광제 선생님, 철학이라는 낯선 여행길의 든든한 길동무가 되어주신 수강생 여러분에게도  감사의 말 전한다.
      김간사 너도 고마워!

      사족 : 철학은... 의외로 재밌다. ㅋㅋㅋ


      철학, 삶을 사랑하는 지혜 1-3강 후기 보기 => 클릭

    • 철학, 삶을 사랑하는 지혜[1-3강]

      2010.4.10 느티나무 철학, 삶을 사랑하는 지혜
      이 글은 느티나무 자원활동가 박현아님이 보내주신 후기 입니다.

      인생에서 철학이 절실했던 순간
      내 나이 어느덧 30대 후반. 인생의 절반을 살아내면서 죽음의 공포를 지독하게 느껴 본적이 몇 번이나 있었나. 가까운 이가 공황장애를 겪는 걸 곁에서 그냥 지켜봐야 했을 때조차, 그 사람이 죽음의 공포를 온몸으로 표현해 내는 걸 목격했을 때조차도 난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여자의 몸으로 새 생명을 둘이나 세상에 내보낼 때도 그 아이들의 탄생에서 이미 그것의 일부일 수밖에 없는 죽음을 쉽게 읽어내지 못했다.

      무순처럼 아이들이 자라고 평온한 일상들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 즈음이었다, 내가 죽음을 공포로 겪어낸 것은. 잠든 아이들의 얼굴에서 형언할 수 없는 충만함을 느꼈던 그 때, 아 이 순간이 바로 찰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 되어 계속 흘러만 가고 있다는 생각, 죽고 나면 다시는 아이들과 아주 사소한 일조차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들이 실체가 되어 죽음이라는 형상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그건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오로지 혼자서 감당해내야만 하는 무척이나 외롭고도 섬뜩한 공포였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을 때도 그래서 힘들었다. 급기야 <더 로드>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는 잠든 아이들 곁에 누워 그들이 내뱉는 숨소리에서 한참이나 위로를 받아야 했다. 어디선가 읽었던 글귀도 스쳐갔다. 인간이 이루어내는 모든 것들은 결국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의 결과라는 말. 그렇게 죽음과 친해지고 나니 죽음이 도처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죽음은 내가 좋아하는 색조차 생명력을 상징하는 초록으로 바꾸어 놓았다.

      철학이 절실히 필요해지는 순간이었다. 원죄와도 같은 죽음의 공포...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삶과 죽음과 인생과 인간에 대해 열심히 생각하는 길 밖에는 없을 터였다. 나는 그렇게 철학 책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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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아카데미 조광제 원장
      1강 죽음의 필연성을 넘어서
      1강 제목이 심상치 않다. 내 속을 들킨 것만 같아 교안에 얼굴을 온통 파묻고 읽었다.
      철학의 임무는 삶을 긍정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내용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이거다! 빙고!

      삶을 긍정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이 어떻게 그렇게 만드는지 근거를 밝히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작동하지 못하도록 뿌리에서부터 잘라내는 일에 행동으로 동 참하도록 하는 것, 더 나아가 왜 우리는 그런 일에 함께 동참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이유 를 밝히는 것, 이것이 철학이다!

      진실로 명쾌한 정의가 아닐 수 없다. 바로 내가 애타게 철학을 찾았던 이유들이다. 결국 내가 극복해내야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이 주는 공포였다. 죽음의 공포는 때론 신의 모습으로 때론 국가나 자본의 모습으로 그 형태를 바꾼다. 그 공포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돈에 집착하고 소유에 집착하고 경쟁에 집착한다. 국가보안법의 존재는 죽음과 똑같은 메카니즘으로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으며 삶을 긍정하는 데 바탕을 이루는 인간의 상상력을 근본에서부터 닫아버린다.

      결국 민주화의 과정이란, 사람들의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각종 두려움들을 위반하게 만들고 그런 경험을 통해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새로운 경지를 열어나가는 과정이다. 철학은 이렇게 길을 잃은 나에게 다른 길을 열어준다.

      2강 사물과 감각속으로
      그렇게 삶을 향유할 수 있는 방법에도 종류는 있다. 배타적인 향유와 공유적 향유이다.
      이런 논의를 위해 강의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개념어들이 많이도 등장했다. 사유와 감각, 실체와 속성, 현상학, 감각덩어리, 외연과 본질, 감각이라는 수렴, 운동이라는 확산 등등.

       단순무식하게 그 줄기만 전하자면, 사람들은 외부세계를 감각기관을 통해 자신에게 끌어들여(수렴) 인식하고 그것을 다시 다른 사람들이 감각할 수 있도록 세상에 펼쳐 놓는다(확산). 그렇게 펼쳐 놓는 게 외마디 비명이든 훌륭한 예술작품이든, 이런 수렴과 확산의 과정을 통해 인류는 문화와 문명을 이루어왔다. 서로의 감각들을 주고받음으로서 우리는 더 많은 감각들을 나에게로 수렴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유 중심의 사유는 수렴에만 방점을 찍는다. 여기에서 모든 불행이 시작된다. 이렇게 확산하지 않고 오로지 수렴만 하는 배타적 향유는 주로 물질적인 것들을 그 대상으로 한다. 이에 반해 공유적 향유는 수렴과 확산의 통일을 추구한다. 공유적 향유가 많을수록 인류 모두의 인생이 한층 더 풍요로워질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삶을 긍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들을 찾아내고 그 공포들이 억눌러 왔던 나의 상상력을 다시 부활시켜 인생을 향유하도록 하고 그 방향은 공유적 항유라는 올바른 길이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여기까지 철학이 나를 이끌었다.

      3강 언어와 개념을 거쳐
      그렇다면 수렴이라는 과정을 통해 내가 받아들인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확산시켜 타인과 공유하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 이러한 흐름에서, 공유적 향유를 위한 도구로 언어가 등장한다. 나의 삶을 다른 이들의 삶과 튼실히 맺어주기 위한 씨실과 날실로서의 언어이다.

      또 다시 이를 위해 강의에서는 한 차례 어려운 개념어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차이와 지속, 존립과 존재, 외부와 내부, 차이와 지속의 통일체로서의 생성, 동일성에 의존하는 지속성, 변화 없이 설명할 수 없는 차이, 동일성의 반복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본질의 반복과 그 두 개념어 사이의 차이 등등.

      반복되는 것들을 일일이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언어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반복들을 잡아채기 위한 것들이다. 그렇게 우리는 언어를 이용하여 반복되는 것들을 파악하고 그것들을 이용하여 삶을 더욱 심화, 확대시킨다.

      하지만 언어는 반복에만 치중한 나머지 차이는 잡아내지 못한다. 아름다운 여러 사물들을 보고 ‘아름답다’라고 코드화시켜 얘기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때 ‘아름답다’는 코드는 아름다움 그 자체가 아니다. 결국 생성이라는 것은 차이와 지속의 통일체인데 그 중에서 우리는 차이를 잃어버리고 있는 셈이다. 즉, 언어가 지속성을 중심으로 생성에 접근한다면 차이에 중점을 두고 생성에 접근할 무언가가 필요하게 된다. 그게 바로 인간의 감각활동이다. 차이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무력하기만한 언어의 그 빈 공간을 메우는 것이 바로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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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아카데미 조광제 원장
      생성은 지속과 차이의 통일체라 했다. 즉, 감각이 발달하면 차이에 바탕을 둔 생성을 더 많이 확보하게 되고 그렇게 생겨난 생성을 바탕으로 지속성에 근거하는 언어 또한 더 많은 생성을 이루어낸다. 결국 감각이 발달하면 자연스레 언어 또한 발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언어는 반복이라는 지속성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감각의 도움으로 최대한 차이를 담아내려는 방향으로 발달한다.

      언어는 “나의 삶을 어떻게 공유적 향유로 메울 것인가”에 대한 답에서 출발했다. 결국 나와 타인이 사용하는 소통의 도구로서 언어가 등장했던 것인데, 우리는 흔히 소통에 감각이나 감정이 끼어들면 제대로 소통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오로지 이성적인 논리에 입각해서만 진정한 소통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소통은 자신의 감각을 오롯이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공동체적 가치를 논하는 차원에서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개념에 의거한 언어적인 소통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합리적 소통이 진정 이루고자 하는 바는 ‘공동체적인 감각의 삶을 더욱 확대시키고 심화’시키는데 있다는 사실 또한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공유적 향유를 위해 필요한 타인과의 소통에서 이성만이 그 주인공이 아님을 철학을 통해 깨닫는다.

      철학으로 꿰뚫는 삶
      죽음의 공포에서 향유를 위한 삶을 이끌어 내고, 참된 향유란 타인과의 소통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철학적 로드맵! 그 사고의 흐름이 지닌 매끄러움에 다시 한 번 감탄한다. 이 모든 것이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조광제’라는 철학자(현상학자) 덕분이다. 하지만 아직 내가 가야할, 철학과 동행해야하는 길은 끝나지 않았다.

      강의 내용 요약

      1강
      근원적인 죽음의 공포 → 그 공포는 신, 국가, 자
      본으로 형태만 바뀌고 → 사람들은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소유, 자본, 경쟁에 집착한다 → 공포에서 나를 해방시켜 민주화를 이루는 길은 이 공포의 실체를 바로 알고 물리치는 길 뿐이다 → 그리했을 때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 삶을 긍정하고 향유할 수 있다

      2강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 즉 감각덩어리들은 감각적인 수렴과 사물적인 확산으로 이루어진다 → 수렴과 확산의 통일체로서 사물이 존재하는 우주의 원리 그대로 우리의 삶 또한 수렴과 확산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 결국 진정한 삶의 향유는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공유적인 것인데 이러한 삶은 내가 세상으로부터 받아들인 것들을(수렴) 다시 타인에게 내보내야만(확산) 이루어 질 수 있다.

      3강
      내 것을 확산시킬 도구로서 언어가 존재한다 → 만물의 생성은 차이와 지속의 통일체로서만 가능한데 언어는 지속성에만 집중한 나머지 차이를 담아내지 못한다 → 그 차이를 메울 수 있는 건 바로 감각이다 → 하여 진정한 소통, 진정한 확산, 진정한 공유적 향유를 위한 삶을 원한다면 이성적 언어에만 치우친 소통이 아니라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공동체적인 감각의 가치를 함께 고려하는 소통이어야 한다.


      이 흐름이 제대로 정리된 것이라는 자신이 없습니다. 다만 늘 ‘저 하늘의 뜬 구름만 잡아대던’ 철학이라는 학문이 이렇게 나의 삶에 구체적인 모습을 띠고 다가왔다는 것에 저는 지금 흥분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철학은 진정으로 응용학문, 실용학문의 자격을 지닐 수 있겠습니다.

      철학, 삶을 사랑하는 지혜 4-6강 후기 보기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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