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정보
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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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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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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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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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역사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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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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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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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한 선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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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재 경주대 문화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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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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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에 눈먼 못된 어미에서 벗어난 천추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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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호 광운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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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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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는 누가 죽였나? 추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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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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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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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군주의 인간적인 모습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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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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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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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기생에서 거상이 된 만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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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권 고려대 국어국문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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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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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출신에서 의사가 된제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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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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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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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들어 보는 사극 시놉시스 발표와 강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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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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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참고교재
<삼국사기>
<천추태후, 역사 그대로>, 김창현, 푸른역사(2009)
<새로 쓴 5백년 고려사>, 박종기, 푸른역사(2008)
<정조의 비밀편지>, 안대회, 문학동네(2010)
<꽃으로 피기보다 새가 되어 날아가리 : 조선의 큰 상인 김만덕과 18세기 제주 문화사>, 정창권, 푸른숲(2006)
<알렌의 일기> H. N. 알렌 저 김원모 역, 단국대학교출판부(2004)
후기 8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8강]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강좌는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강의의 끝을 맺었습니다.
8주동안 열성적으로 강의를 해주신 교수님들과 준비를 해주신 김민수 간사님, 주은경 부원장님 그리고 매 강의마다 활력을 불어 넣어주시며 수강해주신 모든 여러분들께 박수를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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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7강]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6강]
▲ 정창권 교수
교수님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 2세대라 칭했습니다. 저서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나 <향랑, 산유화로 지다>는 그러한 여성관이 녹아 있는 책들입니다. 우리는 흔히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본 여성사를 ‘남성에 의한 종속사’로 보곤 하죠. 하지만 교수님은 적어도 우리나라만은 그러한 역사의 예외지대라고 말합니다. 정치적인 지위가 아닌 일상 생활의 측면에서 봤을 때 한반도 역사상 여성의 지위는 그렇게 낮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령 16세기까지만 해도 매맞는 아내 얘기는 찾기 힘듭니다. 오히려 매맞는 남편이야기만 나오지요. 조선 중종 때는 ‘이러다 조선 남자 씨가 마르겠다’는 (다소 엄살섞인) 우려도 있었다 하네요. 이외에 처가살이라던지, 족보에 남녀의 이름을 모두 기재하는 거라던지, 자녀 간 공평한 재산분배 같은 것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런 흐름이 뒤바뀌어 남녀 사이 불평등이 심해진 것은 우리 역사 속에서 불과 2~300년 사이의 일입니다. 18세기 무렵부터 점점 악화된 여성에 대한 대우가 조선 말,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완전한 관행으로 자리잡았고, 오늘날 우리 사회의 남녀 차별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교수님이 만덕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 ‘여성사 암흑기’에 드물게 성공한 사례에 만덕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전해지는 만덕에 대한 사료로는 체제공의 <만덕전>이나, 심노숭의 <계섬전>, 정약용이나 김정희의 기록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료로는 충분치는 않아 만덕의 삶을 온전히 복원하는 데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저 성긴 정보로 만덕의 삶을 추리해 볼 수 있을 뿐이지요. 때문에 곳곳에서 반대되는 상상과 해석들이 충돌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묘미겠지요.
탐라의 양가집 딸인 김만덕은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한 기녀에게 의탁해 살았는데, 조금 자라자 그 기녀가 기안(기녀 명부)에 올려버려 기녀가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녀를 유곽의 여인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후대에 와서 왜곡된 이미지라 합니다. 기녀는 기생과는 다른 관노비입니다. 특히 제주에서는 기녀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더 나았는데, 남편을 잃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유녀(떠돌이 여성)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수님은 만덕이 적극적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싶어서 스스로 기녀가 되었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기녀가 된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볼 필요도, 수동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교수님의 해석과는 반대로 체제공은 <만덕전>에서 ‘비록 머리를 숙이고 기녀노릇을 할망정 스스로 기녀로 자처하지는 않았다. 나이 20여 세가 되자, 만덕이 자신의 사정을 울면서 관아에 호소하니, 목사가 가긍히 여겨 기안에서 빼주고 양민으로 되돌려 주었다.’라고 썼습니다. 당시 기녀들은 나이 50세가 되거나 다른 사람을 사서(대비속신) 기녀 신분에서 풀려나올 수 있었다고 하는데, 사정해서 양민이 될 정도면 재주가 좋은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양민이 된 만덕은 결혼은 하지 않고 머슴을 부려 장사를 시작합니다. 아마 포구에 객주를 차려 제주 특산물인 말총이나 우황, 미역, 전복 귤 등을 육지에 내다 팔고, 제주에 필요한 물건인 곡식, 소금, 철, 비단 등을 사 들여 온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장사 수완이 좋은지 어느새 제주 최고의 부자가 되죠. 그녀는 육지와 제주 사이의 시세 차이를 이용한 방식으로 이문을 남긴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제주에서의 곡식 100석은 육지에서의 1000석과 맞먹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실로 엄청난 차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그 시절 제주에는 기근이 주기적으로 왔다고 하는데요, 만덕이 장사를 시작한 20대부터 기부를 한 50대에 이르는 사이에도 분명 기근은 몇차례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덕은 그 사이에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겼죠. 과연 그 치부 과정이 정당했을까요? 혹 인심을 잃거나 하지는 않았을까요? 심노숭은 ‘만덕은 품성이 음흉하고 인색하여 돈을 보고 따랐다가 돈이 다하면 떠났는데, 남자가 입은 바지저고리마저 빼앗았다.’라고 썼습니다. 만덕에 대한 유일한 악평이지만, 허투루 읽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1795년, 만덕의 나이 56세 때 탐라에 큰 흉년이 듭니다. 당시 제주 인구가 47,735명이었는데, 그 1/3인 17,963명이 굶어죽을 정도의 재앙이었다고 합니다. 나라에서 곡식을 실은 배를 보내도 제주 앞바다의 거센 물살에 전복돼 막막한 상황. 이에 만덕이 곡식(일설에 의하면 500석)을 사들여 1/10은 자기 일가 친척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관아에 바쳐 가난을 구제합니다. 만덕이 구휼에 나선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있은 지 1년이 지나도록 제주 목사 이우현은 조정에 보고할 생각을 않습니다. 당시 만덕 외에도 고한록이라는 양반이 구휼에 나서, 그에 대한 보고는 조정에 올라가 포상을 받았는데 말이죠. 이에 백성들이 성화하자 그제야 이우현은 보고를 올리고, 정조는 소원을 들어주라고 명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소원이 또 가관입니다. “별다른 소원은 없습니다. 다만 한번 서울에 가서 임금님의 계신 곳을 바라보고, 이내 금강산에 들어가 일만이천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당시 제주민에게는 출륙금지령이 내려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모로 열악한 제주의 환경에 육지로 옮겨오려는 이들이 많아, 인조가 1629년에 명한 것입니다. 특히 여자들의 출륙은 더욱 엄금해서, 뭍의 남자와 혼인해 그곳으로 옮겨가 사는 것도 금지할 정도였습니다. 참 특이한 소원이다 싶지만, 따져보면 돈도 벌 만큼 번 사람에게 남은 소원이란 게 그런 굴레를 벗고픈 욕망 외에 뭐 있겠느냐는 생각도 듭니다. 더불어 애초부터 이런 소원을 성취할 흑심을 품고 구휼에 나선 것 아닌가 하는 모난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민가의 여자가 궁궐 구경하고 싶다는 바람을 꺼낸 것 자체가 그 배포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만덕은 소원을 이뤄 한양에 올라오지만, 처음에는 돌봐주는 이가 없어 힘들게 생활해야 했습니다. 왕이 명한 것임에도 참 허술하게 일처리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체제공이 정조에게 아뢰어 비변사에 머물고 선혜청에서 식량을 대주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58세에는 금강산 구경까지 마치고 한양에 한번 더 들렀다가 제주로 돌아옵니다. 따지고보면 굉장히 먼길인데 어떻게 이동했을까요? 걷더라도 힘든 길이지만, 가마나 말을 타고 간다고 해도 그 정도 거리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고생스러웠을 것 같은데요. 게다가 나이는 거의 환갑을 바라보고 있잖아요. 그 고난 다 감내하고 다녀올 만큼 정력적인 여인이었나 봅니다. 명도 굉장히 길어 74세까지 살았다고 하니까요. 이후 만덕이 소원을 성취하고 죽기까지의 기간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제주 성안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만덕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조선시대에 결혼은 필수적이어서, 과년한 자식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 부모가 처벌받을 정도였는데도 말이죠. 아마 기녀 출신이라는 신분 때문에 남자들이 꺼리거나 한 것 아니냐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식도 없었습니다. 어찌보면 참 외로운 삶입니다만, 소원을 다 이뤘으니 지루할 틈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5강]
태조 이성계를 시작으로 마지막 왕인 27대 순종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 성군이라 칭하는 왕중에서 빠지지 않는 왕이 바로 22대 정조일 것 입니다. 그는 개혁군주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시대를 조선 최고의 부흥기로 만들 었지만 그의 죽음 이후 조선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조선의 전환기로 볼 수 있는데 혹자는 정조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만큼 그의 죽음 이후 조선이 급격히 쇠퇴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번 강의는 정조를 소재로해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MBC 드라마 `이산` 입니다.
'이산' 왕의 이름을 함부로?
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다른 시대에도 왕의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왕의 이름은 불러서도 안되고 비슷한 발음을 해서도 안되는 것이 었습니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왕조 자체가 무너져 그렇겠지만 만약 지금까지 왕조가 이어져 오고 있는 상황에서 '이산'이라는 제목으로 드라마를 방영했다면 연출자는 역적중에 역적으로 몰려 큰 벌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를 방증하는 하나의 사례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함경도 지방에 이산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왕의 이름과 같다하여 지명을 바꾼 것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산'이라는 금지 된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영조를 현대의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를 말하다.
드라마와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캐릭터일 것입니다. 드라마 '이산'도 마찬가지 입니다. 드라마에서 이산은 상당히 점잖고 근엄하며 말하는 것을 최대한 절제합니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멋있는 남자입니다. 이러한 캐릭터 설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왕에 대한 이미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실제 정조는 드라마 이산에서 보여준 이미지와 비슷할까요?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조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매력적인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공부를 잘했으며 글쓰는 것을 좋아해서 저작도 많이 남겼죠. 26대 왕인 고종도 저작은 많지만 의 경우 자신이 직접 쓴 글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조의 경우는 다릅니다. 저작 대부분이 자신이 쓴 글이며 자신이 쓴 글과 남이 쓴글을 구분했다고 합니다. 대필을 시키면 반드시 대필의 흔적을 남기게 했다고 합니다. 즉 자신의 글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고 능력이 탁월했다는 증거입니다. 정조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도 많은데요. 정조의 제자들은 19세기에 위대한 학자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정약용과 서유구 등이 있습니다. 드라마에서는 정약용이 정조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데 실제로는 그 반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드라마 '이산'의 모습이 실제 정조의 모습일까?
최근까지 정조는 왕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사료에서 너무 근엄하게 번역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얼마전 발견된 299통의 비밀편지를 통해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정조는 저작도 많고 말도 많은 왕이었습니다. 성격은 다혈질이었고 자신 스스로 태양증이라고 말하고 다녔을 정도라고 합니다. 왕임에도 불구하고 우스갯소리를 자주 했으며 속된 표현도 거침없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문제로 신하가 상소까지 올렸다고 하니 짐작할 만하지 않습니까?
▲ 안대회 교수
드라마에서의 연애. 그리고 그의 관심사
드라마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사랑이야기 입니다. 이산에서도 정조가 '송연'이라는 인물과 연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허구입니다. 사극에서의 연애는 대부분 허구인 경우가 많은데요. 대부분의 왕은 많은 여성과 관계를 맺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가상인물을 만들어 드라마의 소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정조의 경우에는 이러한 가정도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정조는 여자와 사치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여자 관계도 복잡하지 않다고 하는데요. 세종대왕의 경우 자식들이 수십명에 이르지만 정조의 아들은 한 명뿐 입니다. 또한 음식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조는 오직 학문에 관심이 있었으며 관심이 생기는 분야가 생기면 그 주제에 파고드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다른 어떠한 왕보다 자료가 많고 모든 자료들이 상당히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희소성의 원칙에 의해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 상황임에도 정조의 그의 필체도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암살과 독살, 그리고 정순황후.
드라마에서 약 10번정도의 암살시도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과장 된 측면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경우 암살의 문화는 아니라고 합니다. 소현세자의 경우는 예외라고 할 수 있지만 사약을 받을 때도 왕에게 절을하고 예를 갖춘다고 합니다. 송시열의 경우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강했기에 사약을 한사발 먹고도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사발 더 먹고 죽었다고 합니다. 임금이 죽으라고하는데 안죽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충을 중하게 여기는 시대에 그렇게 많은 암살시도는 불가능이라는 것입니다. 드라마 후반부에 역적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정조의 할마니인 정순황후를 골방에 가두고 포박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러한 경우는 불가능 하다고 합니다. 조선시대는 충과 효를 중히여기는데 그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효라고 합니다. 국왕이 효를 부정하면 그 근본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연산군과 광해군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손자가 할머니를 포박하는 일은 드라마에서의 설정일 뿐이라고 합니다.
정조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니라 독살이라는 설이 많습니다. 299통의 비밀편지를 통해 그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 된 감이 있지만 이에 대한 질문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사료와 정조의 나이, 그리고 그가 오랜시간 동안 병을 앓고 있었다는 상황을 고려할 때 독살에 대한 주장은 설득력을 잃을 수 밖에 없다고 교수님께서는 답변해주셨습니다.
드라마 '이산'에 대한 교수님의 평.
드라마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은 정조와 그 시대를 흥미롭게 잘 포착하여 만든 드라마라고 하셨습니다. 소품도 비교적 잘 구현했고 특히나 주인공과 여주인공의 인물이 괜찮았다고(^.^).
다만 정확하게 고증이 안된 부분은 아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부분이지만 '이산'의 경우 조선시대의 책은 두껍고 무겁기 때문에 일본, 중국과 달리 5개의 줄로 책을 엮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6개로 엮은 모습을 포착하시고 스트레스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강의를 듣는 분들 대부분이 그러한 것 까지 하나 하나 살피시는 모습이 놀랍다는 반응이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드라마 이산이 사극 장르를 표방하여 역사를 잘 활용했으며 상상력 발달 차원에서 큰 도움을 주는 드라마라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역사가는 사실을 근거로해서 정확히 저술하는 것이지만 드라마의 연출자는 그러한 의무는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씀과 함께 드라마와 소설이 역사적 사실에 치중하다보면 그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하셨습니다.
콤플렉스와 역사..
민주주의 학교 강의를 들은 후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해 봤습니다. 복습도 열심히 하려구요..^^
콤플렉스란 무엇인가? 검색해 보니 '잠재된 감정의 복합체' 라고 한다. 어떤 객관적인 사실, 대상에 대하여 나만의 해석하는 감정의 덧씌움이 아닐까? '이것이 나의 콤플렉스야' 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밝혀버린다면 비이성적인 사유습관을 만들지 않을텐데, 부끄러운 모습에 대하여 혹은 상처받은 모습에 대하여 감추려 하기 때문에 콤플렉스는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의 동기가 된다. 그러나 콤플렉스가 반드시 나쁜 방향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좋은 방향으로 풍부한 이해력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작가 김원일처럼..
오늘을 만든 역사는 어디에서부터 기인된 걸까? 조선후기의 정치, 남북분단을 만든 상황까지는 일단 생각하지 않겠다. 남한만의 역사를 생각할 때 그것은 과거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시대적 과업을 외면한 역사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청산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권력자들(기회주의자가 대부분일 것으로 생각)은 자신의 과거를 잊기 위해, 묻어버리기 위해 새롭게 부여잡은 기회에 대하여 병적으로 집착한다. 자신의 부끄러웠던 과거를 하얗게 지우기 위하여 어떤 대상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과민반응들을 하는 것이다. 그들의 콤플렉스는 일개 개인의 삶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역사를 바꾸고, 무고한 많은 사람들을 핍박하는 내적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우리가 이들의 콤플렉스를 받아줘야 하는가? 어떤 특수집단의 사회적 생존(성공)을 위해 상식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을 계속 사회에서 몰아내야 하는 것인가?
해방된 지 65년이 지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일제청산은 단지 구시대의 과업에 불과한 것인가? 반민특위의 아쉬운 미결문제일 뿐인가? 언제적 문제인데 아직까지 그걸 걸고 넘어지나? 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용서란 용서해야 할 대상이 분명히 드러날 때 가능한 거다. 우리역사는 한번도 그들을 제대로 단두대에 세운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들의 능력을 활용한다는 속셈으로 새 시대의 옷을 입혀 주었고 새 시대의 선봉인양 행세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잃어버린 조국을 위해 자신의 삶은 물론 가족들의 안위마저 내팽개치며 고민하고 싸웠던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에 설 땅이 없었다. 초등교육에서부터 국민의례를 하도록 교육받고 의례적으로 순국선열들에 대한 묵념도 해 왔지만, 우리가 기리는 순국선열들은 누구이며 그분들에 대하여 과연 부끄럽지 않은 후손인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용서는 훌륭한 덕목이고, 잘못을 끄집어 내어 단죄하는 일은 그리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냥 용서하고 말지.. 그러나 용서를 빈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잘못된 권위에 부당하게 짓눌렸고, 여전히 새롭게 짓눌리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사 청산은 단지 특정 세력들을 단죄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통용되는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피해의 당사자들이라면 혹 보복의 의미도 생각할 수 있겠으나 오랜시간이 지난 후에도 과거사 청산이 유효한 일이 된다면, 그것은 다음세대에 왜곡된 역사를 물려주지 않으려는 가장 미래지향적인 일이 될 것이라 믿는다.
소현세자는 누가 죽였나?
들어가며
제 4강의 드라마는 얼마전 막을 내린 드라마 '추노' 입니다. 도망간 노비를 붙잡는 추노꾼 이대길, 소현세자를 보필했던 장군 송태하, 노비에서 양반으로 신분상승을 꾀한 김혜원 등의 등장인물로 기존 왕실 이야기를 다룬 사극과는 달리 민초들의 삶을 집중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시청자들로 하여금 신선했다는 반응과 함께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입니다. 인기와 더불어 시청자들로 하여금 추노꾼이 실제로 존재했는가? 당시 양반을 죽이기 위한 노비들의 비밀 결사대가 존재했는가? 등의 많은 궁금증 또한 만들어 냈습니다.
'추노'라는 드라마를 어떻게 볼 것인가?
대부분의 사극드라마와 마찬가지로 '추노' 역시 사실과 허구가 조화된 드라마입니다. 병자호란 이후 시대를 중심으로 소현세자와 노비문제를 다룬 것은 사실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전개 과정에서 소현세자의 3째 아들인 석견을 제주에서 구해오고 청으로 데리고 가는 설정. 그리고 노비들의 해방공간인 월악산, 노비들이 비밀결사대를 만들어 양반을 죽이는 장면은 허구로 볼 수 있는 것이죠. 또한 좌의정은 가공인물이지만 좌의정이 주장했던 북벌. 즉 청나라는 오랑캐가 구성원이기 때문에 순응할 수 없다는 설정은 사실로 볼 수 있습니다. 인조 이후에 왕이 된 효종이 주장했던 북벌 주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명기 교수님 께서는 '추노'라는 드라마는 사실과 허구를 잘 조화시켜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는 평가를 내려주셨습니다.
소현세자는 누구인가?
이제 드라마를 떠나 당시 조선사회와 대외관계에 대해서 알아 볼텐데요. 그 중심이 되는 것이 '소현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현세자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아야 이야기를 풀어 갈 수 있겠죠? 소현세자는 조선 후기 왕족으로 1625년에 세자로 책봉되지만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는 인물입니다. 당시 인조(제 16대 왕)는 청에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를 무척이나 아꼈다고 합니다. 청군 장교에게 부탁하여 압록강을 건널때까지 온돌에서 재워 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대목이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입니다.
"욕하면서 배운다." 교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랑캐의 나라인 청나라에 끌려간 소현세자는 그곳에서 그들의 생활 양식을 보게 됩니다. 조선과 달리 능력있는 자가 선발되어 나라의 왕이 되거나 축제를 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질박함을 보고 청나라에게서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역사에 가정은 필요없지만 만약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의 인식과 근대화가 앞당겨지지 않았을까'라는 말씀도 함께 해주셨죠. 시간이 지나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는 더 이상 조선이 청나라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두달 후에 죽고 맙니다. 돌아온 당시 인조는 소현세자를 외면했다고 합니다. 청에서 광범위한 인맥과 신임을 쌓고 돌아온 소현세자가 자신을 내치고 소현을 왕으로 올릴지 모른다는 이유에서 인듯 합니다. 소현세자의 죽음을 두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독살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는 인조의 행동에서 그 개연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소현의 사망원인을 조사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3일만에 입관. 그리고 당시 주치의를 처벌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친이라 하기에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이후의 조선
조선 전기의 양인(양반, 중인, 양민)과 천민(노비, 재인, 기생) 그리고 조선 후기의 양반, 중인, 양민, 천민. 즉 조선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다는 것을 모두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양난을 겪은 이후 신분에 붕괴가 생기게 됩니다. 일부 양반은 가세가 기울어 영향력이 약화되어 양민의 생활을 하는가 하면 부를 축적한 노비가 양반행세를 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그만큼 양난을 겪은 조선 사회가 혼란했음을 뜻하는 것이죠. 한명기 교수님께서는 현재의 천안함 침몰 사건과 연계를 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구조 작업중 돌아가신 故 한주호 준위님을 보며 우리사회의 전반적인 토대가 허약하다는 것을 느끼셨는데 당시 조선 사회도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번 사고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시 양난으로 인한 고통은 일반 백성들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 되었죠.
앞서 언급한 신분 붕괴의 한 예
한명기 교수님께서는 자료를 통해 당시의 시대 상황을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경상도 감사 공문을 보내 온 가운데 평안도 감찰사에게 보냈다. 초계군(경상의령) 이 수추(체포된 죄수) 죄인 이숙회(정확하지는 않지만 동물의 암수 구별의 숫개라는 뜻으로 노비 이름을 뜻합니다)의 건. 이자는 정원벽 집안의 노비가 양인과 결혼해서 낳은 사람으로 가세가 풍요로워지더니 스스로를 양반이라 칭했다. 그런데 재수 없게 정원벽의 부인을 만나 너는 우리 집 노비이지 않았는가? 라 면박을 주었고 남의 앞길을 막아버렸다는 분통이 쌓여 감정이 격해졌다. 식솔을 인솔하여 정원벽의 처를 얕보고 처들어가서 위협하니 이르지 않은 바가 없이 무지하게 괴롭혔다. 그래서 백여사는 스스로 물에 몸을 던져 죽는 지경에 이르렀다. <평안감형계녹(平安監營啓綠) 1844년>
노비가 도망을 선택하게 된 까닭은?
조선시대 양반들에게 가장 중요한 물질적 토대는 토지와 노비였습니다. 토지와 다르게 노비는 살아있는 동안 결혼을 통해 증식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던 것이죠. 노비의 숫자에 대해서는 설들이 분분하지만 17세기에는 약 30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600만이었으니 절반이 노비라는 이야기 입니다. 노비도 여러 부류로 나뉘게 됩니다. 궁궐, 관청이 소유한 '공노비'와 개인이 거느리는 '사노비'. 사노비 중에서도 함께 동거하는 '솔거노비'와 바깥에서 독립하며 사는 '외거노비'가 있습니다.
17세기 이후 노비들의 도망이 증가됩니다. 양난을 통해 국가의 통제가 느슨해진 이유도 있고 도망을 통해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양인의 신분으로 상승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노비들에게 부과되는 부담이 너무 과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노비에게는 크게 신공(자신의 주인에게 특정 물품을 납부)과 입역(일정한 시간동안 몸으로 노동력을 제공)이 있습니다. 이것을 화폐나 쌀로 대신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왕조실록에는 사노비 관련 자료가 없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공노비의 경우 입역을 마치면 집안이 거덜나는 정도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 부정이 많이 일어 나기 때문에 그 부담은 가중될 수 밖에 없었고 이를 미루어 볼때 부담을 회피하기 위해 도망을 택한 경우의 비율이 많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더하게 됩니다.
'추노꾼'은 과연 존재했는가?
수많은 도망 노비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드라마에서의 '추노꾼' 이대길과 같은 인물이 실제로 존재 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는 허구입니다. 도망간 노비를 잡는 일은 정부의 몫이었습니다. 1655년 효종 6년차 도망간 노비를 잡기 위해 추세도감이 설치 됩니다. 도망간 노비를 잡는 일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임시 관청으로 추세도감은 조선 전기에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효종이 추세도감을 설치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 집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효종은 북벌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약소국인 조선이 청나라와 전투를 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군사력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재정적자 상태였습니다. 국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북벌은 무의미했고 단기간에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방법으로 추세도감을 생각해 낸 것 입니다. 당시 장부상의 공노비는 19만, 하지만 신공을 바치는 노비는 2만 7천명에 불과했습니다. 16만에 노비에게 신공을 받는 다면 재정에 큰 힘이 될 것이라는 계산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문제가 생깁니다. 양난을 겪을 당시 공을 세워 노비 신분을 면해주었던 납속책. 이에 대한 증명서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드물었고 이를 선별하는 것 또한 더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또한 노비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해서 아들과 손자는 양반이 된 사례 등 문제점이 너무 컸던 것이죠. 결국 1만명 이내로 신공을 거둬드렸지만 사회적 혼란은 가중 되었고 결과적으로 추세도감을 폐지하게 됩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대외적 관계
한반도는 조선시대 명나라와 청나라 그리고 일본까지 대륙과 해양에 끼어있는 존재입니다. 현재에 와서도 G7으로 대변되는 강대국이 있죠? 지금은 G2라고도 이야기 되는데 미국과 중국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경우 중국내의 한족이 중심이 된 왕족이 계속 장악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거란과 몽골 만주등의 비 한족의 힘이 커질 때 한반도는 한족과 북방민족의 압력에 많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소현세자가 희생됬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개의 강대국 중 한쪽이 열세에 놓이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양쪽이 비등해져 사사건건 부딪치게 되면 한반도는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다다르게 됩니다. 현재보다는 조선시대가 더 심했다고 볼 수있습니다. 양난의 근본적인 이유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입니다. 또한 양난을 극복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을 뿐더러 외교적 실패로 인한 모든 고통이 민중에게 전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 항해원조? 그리고 항미원조
임진왜란은 당시 동아시아 제패를 위해 일으킨 전쟁으로 그 목표는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 였습니다. 명나라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하였습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참전이었지만 이를 빌미로 항해원조라는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왜구에 대항해서 조선을 도와준 전투. 즉 도왔다는 것에 비중을 두었고 보답하라는 늬앙스를 강조한 것입니다. 再造之恩 [재조지은]을 빌미로 조선의 지배층을 짖누르게 됩니다.
이러한 사례는 6.25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항미원조라고 하는데 북한에 국한 된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 할 당시 중국은 한국의 국군이 38도선을 넘으면 가만이있지 않겠다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이미 1950년 7월 북한군이 승승장구 할 때 중공군은 이미 15만의 군사를 열차편으로 압록강 두만강에 배치해둔 상황이 었습니다. 전세가 역전될 것이라는 예상을 모택동은 이미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해 10월 모택동의 아들 모한영도 참전하게 되는데 미군폭격으로 인해 모한영은 죽고 그 무덤을 평양에 만들었습니다. 이는 결국 조선과 마찬가지로 북한의 지배층에 대한 압박이었고 현재의 한반도 통일을 위해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병자호란 직전 상황을 보면 오늘이 보인다.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립. 하지만 결국 최종 결론은 통치자가 내리는 것입니다. 통치자는 상당히 고독하고 힘든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당시 인조는 대국을 종합적으로 보는 인물은 못되었다는 평입니다. 이것이 조선의 또 다른 비극이었습니다. 결국 척화파들이 목을 치자고 주장할 정도로 강경한 입장이었지만 대책은 없었던 것입니다.당시 최명길 [崔鳴吉, 1586 ~ 1647] 은 진짜로 싸울 것이라면 강화도를 불태우고 거기서 압록강에서 결판을 내자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지더라도 조약을 맺을 수 있으므로 백성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달랐습니다.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청나라는 압록강이 얼자마자 돌격을 해왔고 강화도로의 도망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최명길은 목숨을 걸고 시간을 끌었고 그 시간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몸을 피하게 됩니다. 45일만에 군량이 떨어지고 항복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1637년 삼전도의 치욕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상황으로 돌아 옵니다. 현재 세계의 패권은 미국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급격하게 발전하고 있는 중국이 가까운 미래에 미국을 누루고 패권을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도 일각에서 일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그 안에 한반도가 있습니다. 시대만 다를 뿐이지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조선시대와 달리 전쟁이 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합니다. 그것보다는 경제적 관점으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과 빠르게 치고 올라오는 중국 사이에 한반도는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명기 교수님께서는 하이에나(?)론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일반화 시켜보겠습니다. 현재 두 국가의 사이가 100이라고 한다면 40이 어디에 붙느냐에 따라서 무게의 추가 기울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고구려를 제외하면 125를 넘어 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언제나 한반도는 위기에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강대국의 세력이 비등비등하면 언제나 피해를 보는 것은 그 가운데에 끼어있는 한반도 입니다. 과거 조선시대의 결과가 그대로 현재에 와서 재연되지 않도록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과거처럼 모든 고통은 일반 국민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제 4강 소현세자는 누가 죽였나? 후기를 마치며
한명기 교수님은 제주도로 출장을 다녀오셨음에도 불구하고 피곤한 기색하나 없이 강의를 진행해주셨습니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강의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과거의 문제를 현재에 대입해 설명해주셨습니다. 또한 요즘 세대가 두려워(?)하는 한문을 이용해 당시의 시대상황과 한문이 갖는 고유의 장점도 설명해주셨지요 ^^
후기작성은 처음인지라, 부족한 점이 참 많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더 노력해서 제대로 된 후기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
애정에 눈먼 못된 어미? 천추태후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며, 또 배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역사학이란 단순히 과거의 사실 조각들을 수집하며 꿰맞추는 지적 퍼즐 놀이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요? 아니면 일차적인 사실보다 한 차원 높은 거대 담론의 알리바이를 확보하려는 현재적 관심의 소산일까요? 그렇다면 그 거대 담론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3월 25일, 고려 초 천추태후가 살았던 시대를 주제로 한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세 번째 강의는 풀리지 않는 질문들을 던져 주었습니다. 강의 오래하는 것 안 좋아하신다던 광운대 교양학부의 김인호 교수님도 결국 수강생들이 던지는 그 질문들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여기, 우리에게 다소 익숙한 대답을 하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2009년 KBS에서 방영된 <천추태후>입니다.
천추태후, 애정에 눈먼 못된 어미?
천추태후. 태조 왕건(1대)의 손녀이고, 경종(5대)의 부인이자, 성종(6대)의 누이이자, 목종(7대)의 어머니이자, 또 현종(8대)의 이모인 여인. 이 복잡한 가계의 원인은 지방 호족 세력과 손잡기 위해 공식적으로만 29명이나 되는 부인을 둔 왕건의 전략에 있습니다. (그래서 고려시대에는 외척의 힘이 굉장히 셌습니다. 왕욱의 딸인 천추태후가 왕씨가 아닌 황보씨인 것만 봐도 짐작이 가능합니다.) 당시까지는 아직 골품제적인 풍습이 남아서 왕족끼리만 특권을 이어가겠다는 생각에 이복형제들끼리만 결혼한 것도 족보 그리길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다 보니 왕위 계승 문제도 복잡해집니다. 심상치 않은 갈등이 예상됩니다. 하지만 수강생 중 누구도 드라마를 본 이가 없다는 걸로 보아 썩 재미있게 작품을 그려내진 못한 것 같습니다.
종래 조선의 유학자들은 천추태후를 애정에 눈이 먼 못된 어미 정도로 치부했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후, 김치양과 눈이 맞아 아들까지 낳은 여성. <고려사>는 그 관계를 ‘간통’이라 표현했습니다. 더구나 그는 아들인 목종(7대)이 18세로 장성했음에도 여성의 신분으로 섭정을 펼쳤습니다. 보수적인 유학자들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겠죠? 다분히 조선의 유교적인 질서가 반영된 평가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사랑이 불륜일까요? 고려는 예상보다 훨씬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의 사회였습니다. 지금은 그림이 남아있지 않지만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남녀 구분없이 목욕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재혼도 상당히 자유로워서 조선 초기에야 여성이 세 번째 결혼을 하면 자식이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제한하는 법이 만들어졌을 정도라고 합니다. (여성의 지위도 상당히 높았습니다. 재산상속 등에 있어서 불이익을 받지 않았죠.) 어떻게 보면 오늘날보다도 개방적인 것 같습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비칩니다.
드라마는 천추태후를 좀 더 다른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드라마 사진 속에서 철갑을 하고 칼을 움켜쥔 채시라(천추태후 역)의 표정이 결연합니다. 과거 기껏해야 남자 주인공의 보조자에 머물던 수동적 여성상을 뒤집는 적극적이고 활달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해하기 힘든 설정입니다. 과연 당시에 (태후가) 활 쏘고 갑옷 입고 그랬을까요? 또 그게 과연 진취적인 여성상일까요?” “장수가 앞에 나서서 칼 들고 싸우는 것이 아니잖아요. 후방에서 전반적인 전술 배치 등에 주력하는 것이 장수의 일인데...” 연출 상 그럴듯한 그림을 만들다 보니 생기는 왜곡에 대한 지적입니다. 덧붙여 교수님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게 되면 상상력이 제한돼 작가들이 드라마를 못쓴다”며, “드라마를 드라마로 보면 좋겠지만, 문제 |
는 사극이 사실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라는 딜레마를 토로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런 사소한 문제보다 좀 더 논란이 될 만한, 거창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나는 꿈을 꾼다. 나의 고려가 대제국이 되는 그날을...” 중무장을 한 천추태후 사진 옆에 쓰인 문구입니다. 천추태후를 고구려 계승의 꿈, 민족성 혹은 자주성 회복과 같은 거창한 담론에 연결지은 것입니다. 이전에도 제국에 관련된 드라마는 있었습니다. 고구려 건국을 다룬 <주몽>, 발해 건국 이야기인 <대조영> 등이 그랬지요. <천추태후>는 이러한 드라마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입니다. 고구려사를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에 대응하려는 의도도 엿보입니다.
KBS 다큐멘터리 <한국사 전(傳)>에서도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천추태후를 재평가합니다. 다큐는 목종대의 서경 중시 정책을 북진정책으로 해석합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처럼 말이죠. 천추태후가 불교를 중시하고, 전통행사인 팔관회를 부활시킨 것은 고려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려는 자주 의식의 발로로 읽어냅니다. 이전의 성종은 스스로 송나라의 제후국임을 청했습니다. 팔관회나 연등회를 폐지하고 중추원을 설립해 유학과 중국을 지향한 정책을 펴기도 했습니다. 천추태후는 성종대의 이러한 정책 방향을 되돌려 자주성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종과 현종 대에 받았던 거란의 침략이 목종 대에는 없었다는 점을 들어 실리외교의 결과라는 해석을 내립니다.
천추태후가 고구려 부활을 꿈꿨다? 글쎄요.
불교 및 전통을 중시했다는 것도 의심스럽습니다. 일단 김치양이 승려 출신입니다. 동주에 사당을 건립하는 등의 정책은 이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더구나 당시 불교며 팔관회와 같은 행사들은 금전을 챙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마치 오늘날 일부 종교나 행사가 그렇듯이요. 성종이 팔관회를 없앤 이유로 재정이 많이 들어 번잡스럽다는 점을 든 것만 봐도 중국 지향이라 단정짓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주성 회복이라는 그럴듯한 포장 뒤에 감춰진 속살에서 풍기는 돈 냄새를 무시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실리외교 역시 과장된 측면이 있습니다. 성종이 송과의 관계를 중시해서 거란의 침입을 불러왔다는 해석을 우리는 많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성종 13년 거란 침입으로 송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거절당하자 송과의 관계를 단절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대라 해서 반드시 일률적인 관계만을 맺은 것을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목종 역시 재위 2년에 송에 사신을 파견해 거란의 위협을 호소한 바가 있고요. 각 지역에 성을 쌓아 전쟁을 대비할 정도로 거란은 여전히 위협적이었습니다. 게다가 거란을 배척하라는 것은 훈요십조에도 기술된 태조 왕건의 유훈입니다. 고려가 후삼국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데에는 거란이 멸망시킨 발해의 유민을 포섭한 것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에 그랬던 거지요. 거란 배척을 일면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김인호 교수님은 이러한 점들을 근거로 천추태후가 대국을 지향했다는 주장을 반박합니다. 덧붙여 거대 담론에 무리하게 사실들을 엮어 넣으려는 일각의 시도에 대해 무책임하다고 비판합니다. 그러한 시도들이 일종의 콤플렉스라는 것입니다. 대륙 변방의 반도국이 갖는 콤플렉스, 식민지배 경험을 지닌 약소국이 갖는 콤플렉스 말이죠. 교수님은 그런 콤플렉스의 일종으로 우리나라가 일왕을 그냥 왕이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일본은 물론이고 다른 외국은 모두 천황이라 부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왕을 천황이라 불러도 사대를 하는 것은 아니고, 또 그런 호칭이 일왕의 격을 새삼 높이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불필요하게 명분에 집착한 것이라는 비판과 함께 이제 그런 콤플렉스에서 벗어났으면 한다는 바람이 이어졌습니다.
물론 이런 주장에 곧바로 찬반 논란이 이어졌습니다. 한 남성 수강생은 우리가 민족을 강조하는 것, 우리가 국사를 배우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며, 한두 사례로 천추태후의 고구려 계승 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민족주의에 대한 반성에도 불구하고, 현실 정치는 민족과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특히나 우리나라는 주변국의 역사 왜곡에 몸살을 앓고 있는 실정이어서 더욱 반작용이 강하게 일어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주장에 다른 여성 수강생은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19세기 유럽의 제국주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냐며, 굳이 고대사까지 민족주의를 연결짓는 것은 무리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주장을 연상시킵니다.
이 외에도 여기저기서 찬반 의견과 질문이 쏟아졌지만, 시간이 모자라 수강생들의 표정엔 아쉬움이 역력했습니다. 거대 담론이냐, 아니냐 의견은 분분하지만 그것들이 사실에 발 딛고 있어야 함에는 모두가 공감할 것 같습니다. 주변국의 왜곡에 덩달아 왜곡으로 맞서는 것은 이성에 기반해야 할 학문의 장을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치의 장으로 변질시킵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우리는 언제나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에 대항할 힘은 오직 진실에서만 나옵니다. 이 강의가 있던 주에는 2차 한일역사공동위원회의 활동 결과 발표가 있었습니다. 양국의 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이 거짓임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을사조약의 위법성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지 못하고 각국의 의견을 병기하는 선에서 활동을 접어야 했습니다. 더딘 걸음이지만 조금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단단하고 우직한 진실의 힘으로 말입니다.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 2강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 제 2강 : 한국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한 선덕여왕
강연자 : 전덕재 / 경주대 문화재학부 교수
들어가며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라시대를 예로 들자면, 군주에 대한 명칭으로 구분하는 방법이 있겠네요.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왕’ 이런 식으로 말이죠. 고려시대의 학자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역사를, 성골들이 왕위를 이어간 ‘상대’, 태종무열왕(김춘추)부터 혜공왕에 이르는 ‘중대’, 그리고 나머지 기간인 ‘하대’로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역시 고려시대의 승려인 일연은 상고(혁거세왕~지증왕), 중고(법흥왕~진덕여왕), 하고(무열왕~경순왕)로 신라 시대를 나눕니다. 승려인 일연의 입장에서는 불교식 왕명을 택한 법흥왕에서 진덕여왕까지의 시기를 신라의 전성기라 보았던 거죠.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두 번째 강의는 선덕여왕을 중심으로 일연이 말한 불교식 왕명 시대, 즉 ‘중고’ 시기를 살펴 보았습니다. 강의를 맡으신 분은 경주대 문화재학부의 전덕재 교수님. 멀리서 오셨음에도 지친 기색없이 열정적인 강의로, 수강생들의 혼과 진을 완전히 빼놓으셨습니다.
불교식 왕명 시대를 연 법흥왕
불교식 왕명 시대는 왕이 불교를 통치 수단으로 이용한 시기입니다. 불교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한 초기 단계에 나타난 것이죠. 통일신라 시대 들어 불교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 불교식 왕명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고시대의 첫 왕인 태종무열왕처럼 말이죠. 불교식 왕명 시대를 연 첫 인물은 법흥왕(法興)입니다. 이름부터 불법(佛法)을 일으킨 왕이라는 뜻이죠. 527년 불교를 공인한 데서 비롯된 왕명으로 추정됩니다.
전륜성왕을 꿈꿨던 진흥왕
법흥왕의 뒤를 이은 이는 진흥왕입니다. 영토를 크게 넓혀 한강 유역을 차지한 것으로 유명한 왕이죠. 그의 본래 이름은 삼맥종(彡麥宗) 혹은 심맥부(深麥夫)인데요, 이는 사미(승려)를 뜻한다고 합니다. 발음부터 비슷하죠. 진흥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요, 각각의 이름을 동륜(銅輪)과 사륜(舍輪, 훗날의 진지왕)으로 지었습니다. 사륜은 ‘쇠륜’이란 뜻으로, 달리 말하면 철륜(鐵輪)입니다. 동륜과 철륜이 있으니, 금륜(金輪)과 은륜(銀輪)도 있겠죠? 이 금․은․동․철륜은 불법(佛法)으로 통치하는 속세의 이상적인 왕을 칭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의 명칭이라 하네요. 아들들을 동․철륜이라 한 것으로 보아, 스스로 금륜왕으로 자처하여 불법(佛法)으로 세상을 다스리려는 진흥왕의 의중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귀족들에 의해 폐위된 진지왕
진흥왕의 뒤를 이은 것은 진지왕이지만, <삼국유사>에 따르면 ‘나라를 다스린 지 4년만에 정치가 문란하여 어지러워졌고 음란함에 빠져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고 전합니다. 귀족들이 화백회의를 열어 물러나게 한 것이지요. 이 때문에 진지왕의 아들인 김용춘(김용수)은 왕위에 오르지 못합니다. 하지만 김용춘의 아들은 훗날 왕위에 오르는데요, 그가 바로 삼국을 통일한 태종무열왕 김춘추입니다.
자신의 핏줄을 신성화한 진평왕 그리고 폐위된 진지왕의 뒤를 잇는 것은 그의 조카인 진평왕입니다. 스스로를 석가(‘석가모니’란 뜻이 아닙니다. 크샤트리아 계급의 한 종족을 의미합니다. 석가모니도 크샤트리아 계급이었지요.) 이름을 따 백정(白靜)이라 하고, 왕비 이름도 석가 어머니 이름을 딴 마야부인이라 할 정도로 불교에 심취한 사람입니다. 동생 이름도 석가모니의 삼촌 이름을 따랐지요. 집안 사람들 이름을 이렇게 바꾼 것은, 신라 왕실이 석가모니 왕실을 그대로 모방하여 스스로의 골품을 성화(聖化)시킨 것을 의미합니다. 진평왕대에 들어서 자기 핏줄이 더 신성한 골족, 즉 성골이라는 의식이 생긴 것이죠. 둘다 진흥왕의 자손임에도 진평왕의 딸인 선덕여왕은 성골이고 김용춘의 아들인 김춘추는 진골이잖아요. 즉 진지왕대까지는 없었던 성골․진골 구분이 진평왕대에 들어서 생긴 것입니다. 진평왕은 즉위했을 때(579년) 10세 전후의 어린 나이였습니다. 아무래도 그를 왕위에 앉힌 나이 많은 귀족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컸겠죠. 상대등에 올랐던 노리부(弩里夫)나 수을부(首乙夫)같은 진골 귀족들 말이죠. 자연히 왕권은 제한되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진평왕은 집권 후반에, 진지왕의 폐위에 앞장섰던 진골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애씁니다. 앞서 언급한 김용춘 |
(진지왕의 아들이자 김춘추의 아버지) 을 요직에 적극 등용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고 이는 김춘추나 김유신 같은 신귀족세력이 등장하는 배경이 됩니다. 김춘추는 물론이고 김유신 역시 전통적인 진골귀족으로부터 괄시받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 어머니인 만명과 결혼할 때 수을부가 강력히 반대했거든요. 수을부는 만명의 아버지로서, 금관가야계 왕족의 후예인 김서현이 탐탁치 않았던 것이겠죠. 아무튼 이 신귀족세력은 629년 고구려 낭비성을 함락시키는 등, 진평왕의 후원을 받아 가문간에 서로 연대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킵니다.
한반도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
579년부터 632년까지 손에 꼽을 정도로 오랜 기간 제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진평왕에게는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었습니다. 석가와 마야부인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면 석가모니가 될 수 있었을텐데요. 기껏 자기 핏줄을 성골이라 해놨더니 정작 핏줄을 이을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진평왕에게는 덕만공주, 천명공주, 선화공주라는 세 딸이 있었습니다. 천명공주는 김춘추의 어머니이고, 선화공주는 서동요의 주인공이죠. 세 공주의 생몰년도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삼국사기>는 덕만이 맏이라 기술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성골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의식 같은 것이 있었나 봅니다. 진평왕이 후원한 김용춘․김서현의 강력한 지지로 덕만공주가 여자임에도 왕위를 계승하게 되니까요. 이 과정에서 631년 칠숙과 석품 등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은 그렇게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선덕’이란 왕호 역시 불경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진흥왕이 꿈꿨던 전륜성왕의식을 계승하여 왕호를 지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으로 분한 이요원은 젊고 아름다웠습니다만, 실제 선덕여왕은 마흔이 다 되어서야 즉위했습니다.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한다면 적은 나이가 아니지요. 진평왕이 너무 오래 제위했기 때문입니다. 진평왕대에 이어서 선덕여왕의 통치기에도 구귀족과 신귀족 사이의 갈등은 여전했습니다. 상대등에도 오른 바 있는 알천이나 비담 같은 인물이 구귀족의 대표적인 존재로 추정된다고 하네요. 하지만 당시 여제동맹의 대외적 압박 속에서, 김춘추와 김유신 같은 신귀족세력이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신라가 백제에게 대야성(합천)을 빼앗긴 후, 김춘추는 고구려․일본 등 사방으로 도움의 손길을 구하다가, 결국 648년 당나라로 가서 나당동맹을 체결하는 데 성공합니다. 김유신 역시 대야성 전투 이후 신라군 총사령관이 되어 백제와의 전쟁을 수행하죠. 결국 둘은 삼국 통일의 주역이 됩니다. 이러한 신귀족의 성장에 비담 등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647년) 결국 김유신에게 진압당합니다. 이후 신귀족은 승만공주(진덕여왕)를 왕위에 앉히고 실질적으로 정국운영을 주도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합니다.
최초의 여자인 왕. 선덕은 남성 사회의 뿌리 깊은 편견 속에서 나라를 운영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앞서 언급한 비담이 반란을 일으킨 명분은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였습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당황제가 신라의 사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네요. “그대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고 있으므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게 되고, 임금의 도리를 잃어 도둑을 불러들이게 되어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 이런 부정적 시각들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선덕은 자신이 지혜를 발휘한 세가지 일, 즉 지기삼사(知幾三事)와 같은 설화를 지어 퍼뜨렸습니다. 여자라는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 큰 능력을 보여야 했으니까요. 선덕은 유언으로 도리천(忉利天)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는데요, 도리천은 불교에서 우주를 구성하는 33천(天) 가운데 하나이며 동시에 그 세계 자체를 의미한다 합니다. 그리고 선덕의 그 유언은 도리천에 환생한 후 다시 이 세상에 남자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소망을 얘기한 거라고 해석된다 합니다. 누구보다 남성이기를 갈망한 선덕의 간절한 소망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후대에 들어서도 오랫동안 선덕은 ‘여자’라는 꼬리표를 떼어버리지 못했습니다. 가령 통일신라의 헌안왕은 “우리나라의 옛일에 비록 선덕과 진덕 두 여자 임금이 있었으나,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비슷하므로 본받을 일이 못된다.” 하였구요, 김부식은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거늘 어찌 늙은 할멈이 안방에서 나와 나라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고 했습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두말할 나위 없겠죠. 그들은 심지어 선덕을 여왕이 아니라 ‘여주(女主)’라고 낮춰 부를 정도 였습니다.
선덕이 집권한 기간은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이 북쪽과 서쪽에서 압박해와 대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16년 치세 기간 전쟁으로 시달리느라 정치 개혁에 힘을 쏟을 여력은 없었겠지요. 오늘날 선덕은 김춘추와 김유신을 적극 후원하고 등용해서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여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김유신의 누이와 김춘추의 결혼을 주선한 것도 선덕여왕이었죠. 유명한 오줌싸는 꿈 일화입니다. 김유신과 김춘추 간 연대에 선덕이 모종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수강생 중 한 분은 김춘추와 김유신 역할만 강조돼 정작 선덕은 조력자 역할로 낮춰졌다며 새로운 평가 방법이 없을까 하는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될 성 부른 떡잎이었던 김춘추와 김유신의 재능을 간파하고 중용한 선덕의 용인술이야 말로, 허무맹랑한 지기삼사(知幾三事)를 지어낼 필요가 없을 만큼 멋진 지기일사(知幾一事)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