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 강사

  • 기간

    • 2010. 3. 11 ~ 2010. 4. 29
  • 시간

    • 목요일 19:00~21:30 총8회
  • 수강료

    120,000

    • 파격 할인혜택
    • 참여연대 회원60,000

    각종 혜택 적용은 로그인 > 마이페이지에서 진행됩니다

    상세 정보

     

    이른바 ‘사극 천하’라는 말이 있을 만큼, 사극이 인기입니다.
    그 내용은 어느 만큼 상상력이 빚어낸 것이고, 어디까지가 역사적 진실일까요.
    현존하는 사료에는 얼마나 바탕을 두고 있고 어디까지는 역사적 재해석일까요.
     
    이번 강좌에서는 바로 그 사극과 관련된 원전사료를 각 시대 역사전문가들과 함께 직접 읽어보는
    경험을 통해 당시의 시대적 진실을 깊이있게 이해합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역사 공부이자,
    사극작가들이 사료를 어떤 방식으로 활용 또는 왜곡했는지 파악하는 기회입니다. 사극의
    시청자로서 능동적인 관점과 힘을 기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시간에는 수강생들이 직접 “내가 작가라면 이러한 사료들을 활용해 어떤 스토리나
    패러디를 만들 수 있을지” 상상력을 발휘해봅니다.
     
    강좌 진행

     

    날짜
         강의 제목
    강사 
    03.11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역사드라마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03.18
    한국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한 선덕여왕
    전덕재 경주대 문화재학부 교수
    03.25
    애정에 눈먼 못된 어미에서 벗어난 천추태후
    김인호 광운대 교양학부 교수
    04.01
    소현세자는 누가 죽였나? 추노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04.08
    개혁군주의 인간적인 모습 이산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04.15
    제주의 기생에서 거상이 된 만덕
    정창권 고려대 국어국문과 강사
    04.22
    백정출신에서 의사가 된제중원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04.29
    내가 만들어 보는 사극 시놉시스 발표와 강평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강의 참고교재

    <삼국사기>

    <천추태후, 역사 그대로>, 김창현, 푸른역사(2009)

    <새로 쓴 5백년 고려사>, 박종기, 푸른역사(2008)

    <정조의 비밀편지>, 안대회, 문학동네(2010)

    <꽃으로 피기보다 새가 되어 날아가리 : 조선의 큰 상인 김만덕과 18세기 제주 문화사>, 정창권, 푸른숲(2006)

    <알렌의 일기> H. N. 알렌 저 김원모 역, 단국대학교출판부(2004)

     

     


    일 시 : 2010년 3월11일~4월29일 목 오후 7시~9시30분 총8회

    후기 8

    •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8강]

      2010.5.2 최성호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내가 만들어 보는 사극 시놉시스 발표와 강평' 이라는 주제로 마지막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마지막 강의를 위해 5주차에 조편성을 하였고 각각의 조는 조원들과 함께 모임을 갖으며 주제를 찾고 시놉시스를 만드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지난 목요일 저녁 이에 대한 발표가 있었습니다.

      발표는 1. 조 구성 2. 준비과정 3. 시놉시스 발표 4. 질문과답변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발표가 끝나면 주진오 교수님께서 부가 설명을 곁들여 주시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조의 구성은 신경임, 오영주, 황미정, 장인선 님으로 구성되었고 4개의 조 중에서 가장 많은 모임을 가졌다고 합니다. '조선의 사랑' 등 천민여성을 다룬 책들을 많이 보았으며 이를 통해 기획의도는 천민여성의 삶과 억압을 이겨내는 과정을 설정하였지만 발표 당일 사랑이야기로 급전환하였다고 합니다.

      과거를 지운여자, 과거를 용서한 남자
       
      <과거를 지운여자, 과거를 용서한 남자>라는 제목으로 수연(조선의 7대 왕인 세조의 딸)과 김정우(김종서의 손자)라는 인물을 설정하여 시놉을 전개하였습니다.

      계유정난을 통해 수양대군은 왕이 되고 그 과정에서 김종서는 살해당하고 맙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딸인 수연은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리하여 수연은 세조에게 강력하게 저항을 하고 궁을 나오게 됩니다. 궁에서 나온 수연은 화적떼에게 봉변을 당하려던 순간 이를 도와준 이가 있었는데 그는 김종서의 손자인 김정우였습니다. 이들은 서서히 정이 들었고 서로의 신분을 속인체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부모가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조와 수연은 대면하게 되고 이 장면을 김정우가 보게 됩니다. 불구대천의 원수인 세조. 그는 바로 자신의 장인이자 자신의 아이들을 외할아버지가 되는 것 입니다. 그날 밤 수연은 정우에게 이사를 가자고 청하고 자신의 사연을 모두 털어 놓게 됩니다. 정우는 그녀를 이해 할 수밖에 없었고 그 둘은 머나먼 곳으로 떠나면서 시놉은마무리 됩니다.

      주진오 교수님께서는 세조의 왕위찬탈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김종서는 무조건 좋은 사람이고 수양대군은 나쁘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고 권력을 독점하여 서로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수양대군이 아닌 김종서가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면 죽임을 당하는 것은 김종서가 아니라 수양대군이 되었을 것이 뻔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볼 때는 선과 악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냉정하게 어느편에도 서지 말고 사건의 맥락을 명확히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덕혜옹주
      다음으로 2조의 구성원은 전병훈, 이춘산, 김버들, 김미연, 장강규 님입니다. 구성원만으로도 드림팀이라는 이야기가 오고 갔는데 명색에 걸맞는 결과물을 보여주셨습니다.
      장강규 학생은 덕혜옹주로 시놉시스를 선택한 이유를  "우리는 흔히 역사 속 인물들을 업적이나 능력 위주의 결과로만 기억하고 평가합니다. 저는 조원 분들과 이번 시놉시스 주제를 정하면서 역사 속 인물이 업적과 같은 결과물을 갖고 있지 않거나 그것이 좋지 못할 경우 그 인물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느냐 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고, 마땅히 알아야 하지만 보이는 결과물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들에게서 친근하지 못한 인물을 다루어 보고자 했습니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등장인물로는 주인공 덕혜, 덕혜의 몸종인 복순 그리고 그의 일본인 남편 소다케유키, 그리고 끊임없이 덕혜를 괴롭히는 소 다케유키의 집안에서 데려온 하녀 미요. 마지막으로 덕혜와 약혼 하기로 되어 있던 박장한이라는 인물까지입니다.

      행복했던 유년시절을 회상하며 덕혜는 일본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조국 그리고 고종,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자신과 부부의 연을 맺을 뻔 했던 장한의 믿음직스럽던 눈빛을 떠올리며 꼭 다시 돌아오리라는 마음을 먹고 말입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늘 독살의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던 덕혜는 복순의 도움으로 장한을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일본 백작 집안의 소 다케유키와 강제로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임신을 하게 되고 서로의 양육관에 충돌이 일게 됩니다. 미요는 덕혜를 정신이상자로 몰아 정신병원에 강금하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일본이 패망하게 되지만 덕혜는 정신병원에 갇혀 홀로 세월을 이겨냅니다. 딸 정혜는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되고 소 다케유키는 일방적인 이혼을 선택하게 됩니다.시간이 흘러 장한의 도움으로 덕혜는 고국의 땅을 밟게 됩니다. 정신병원에서의 고통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덕혜. 정신이 온전해지자 복순은 덕혜를 데리고 덕수궁으로 나들이를 가게 됩니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즐거운 유년시절을 회상하던 찰나 한 가이드가 덕수궁으로 관람 온 관광객에게 덕혜옹주에 대한 설명을 하게 됩니다. 관광객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합니다. 이에 복순은 반박을 하려 하지만 덕혜는 이를 말립니다. 그 모습에 통곡하는 복순,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관광객들을 뒤로한 체 시놉은 막을 내립니다.


      주진오 교수님께서는 소설과 현실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덕혜옹주'라는 소설에서의 모십이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번 시놉을 볼때 소설의 영향이 많이 느껴진다는 평이었습니다. 많은 말씀중에 결혼에 관련 된 말씀은 살펴볼만 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덕혜는 불쌍하고 남편은 나쁜놈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 입니다. 덕혜의 남편인 소 다케유키는 동경대학을 나왔고 상당한 인텔리이며 미남입니다. 영친왕과는 다르게 덕혜는 왕실에서 대우를 받는 존재도 아니며 옹주라고 해서 사람들이 떠받드는 존재도 아닙니다. 하지만 민족적 관점으로 보기 때문에 앞서 언급했던 등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또한 둘의 관계에 대해서 말이 많지만 둘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는 점과 덕혜가 고국으로 돌아와 있을 당시 낙선재에 소 다케유키가 방문했다는 점으로 볼때 그들의 관계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홍경래
      다음으로 3조입니다. 구성원으로는 김성훈, 김안나, 김종우, 최성호 님입니다. 제가 속해 있는 조입니다. 제가 예비군 훈련으로 참여를 못해서 많이 죄송스러웠습니다.(ㅠ.ㅠ) 3조는 따로 모임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강의가 끝난 이후 각자의 역할을 정했습니다. 첫 만남때 관심있는 사료를 찾아오기로 했는데 김성훈님은 19세기 초에 대한 사회적 배경을 김안나님은 홍경래의 난에 가담했다고 전해지는 연홍을 저는 홍경래의 난을 조사해 와서 깜짝 놀랄만한 완벽한(?) 팀웍을 보였습니다. 그 이후에는 저를 제외하고 김종우님께서 합류하셔서 좋은 시놉을 만드셨습니다.

      19세기 초 서북지방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 주제로 하였는데 기획의도는 홍경래의 난 안에서의 민중들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난을 일으킨 홍경래를 믿을 수 없으며 그렇다고 자신을 괴롭혀 온 관군은 더 믿을 수 없어 혼란스러워 했던 민중들의 모습 말입니다. 시놉인 관게로 전체적인 맥락을 집었고 그 과정에서 기획의도가 잘 드러나지 않아 다소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서북인에 대하 조정의 뿌리 깊은 차별은 이 지역 양반들의 처지를 더욱 구석으로 몰아 붙였습니다. 비리도 심해 급제하는 이는 모두 뒷배 좋은 권세가문들의 자제들 이었습니다. 사마시에 낙방한 홍경래는 조선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불만이 가슴에 일고 있었습니다. '뒤집어야 한다.' 그는 팔도를 누비며 사람을 모았다. 신분제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박생을 비롯한 상인, 중인들 뿐만 아니라 기녀 연홍도 만나게 됩니다. 사회부조리에 대한 불만은 있었지만 체계화 된 신념은 갖지 못했고 이것이 이후에 화근이 되고 맙니다.

      1811년 흉년이 들어 민심은 크게 동요하였습니다. 홍경래 일당은 임신년 정월을 거사일로 잡았지만 비밀이 새나가 신미년 음력 12월로 거사를 앞당기게 됩니다. 관아를 털어 식량을 나누며 개혁적인 정책으로 민심을 다독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신분제 철폐를 주장하는 박생과 대립하게 되는데 홍경래와 연홍도 신분의 차이로 인해 사이가 갈라지게 됩니다. 관군의 반격이 시작되고 연이은 패배에 내부 갈등은 심화되게 됩니다. 관군은 탈환한 지역의백성에게 홍경래와 결탁했다는 누명을 씌어 무자비한 고문과 살육을 자행합니다. 결국 홍경래는 정주성으로 피하고 이를 따르던 백성들도 정주성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홍경래가 좋아서라기 보다는 관군을 피해 살아남기 위함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성에 물자가 바닥이나고 성벽까지 무너지게 됩니다. 진압과정 중 홍경래는 총에 맞아 죽고 붙잡힌 주모자들도 포로가 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처형 당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홍경래의 난은 끝이나고 맙니다.


      주진오 교수님께서는 19세기의 상인과 신분제로 인한 홍경래와 연홍이 연을 맺지 못헌 것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3조의 시놉에서 보면 박생이라는 상인이 나오는데 그는 홍경래의 편에 섰다가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배반을 하는 인물입니다. 실제로는 당시 만상의 임상옥이라는 상인도 비슷했다고 합니다. 사료에서는 홍경래에게 돈을 대줬지만 나중에는 관군으로 돌아선다고 하는데 상인의 특성상 기회에 투자를 하는 것이고 투자가치가 떨어지면 가장 먼저 등을 돌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시놉에서 박생이라는 인물을 잘 표현했다는 평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신분제 입니다. 홍경래와 연홍은 신분제의 차이와 홍경래가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연을 맺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현재의 관점이라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경우 첩이라는 것이 합법화 되어 있는 마당에 신분제로 인해 두 사람이 갈등을 겪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4조 입니다. 4조는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서 처음 모였을 당시 사료로는 삼국유사에서 원효라는 인물과 의상대사, 설총까지 포함하여 원호는 자유인, 설총은 정신적인 양아들이라는 설정으로 시놉을 구성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준비가 미흡하셔서 발표는 하지 않고 만들어 오신 시놉을 읽어보는 것으로 대체 하였습니다.

      모든 발표가 끝나고 주은경 부원장님께서는 과거 종교와 전쟁이라는 강의에서도 이번과 같은 토론 시간을 편성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 강의에서는 기대 이상의 준비와 발표로 대단히 만족스럽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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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강좌는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강의의 끝을 맺었습니다.

      8주동안 열성적으로 강의를 해주신 교수님들과 준비를 해주신 김민수 간사님, 주은경 부원장님 그리고 매 강의마다 활력을 불어 넣어주시며 수강해주신 모든 여러분들께 박수를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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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 보기> 이전 강의후기 보기
      2강 한국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한 선덕여왕
      3강 애정에 눈먼 못된 어미 천추태후
      4강 소현세자는 누가 죽였나 추노
      5강 개혁군주 정조의 은밀한 사생활 이산
      6강 제주의 기생에서 거상이 된 만덕
      7강 백정출신에서 의사가 된 제중원

    •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7강]

      2010.4.27 뚜빠뚜빠띠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어느덧 7강입니다. 남은 8강이 조별 시놉시스 발표라는 것을 감안하면, 사료를 토대로 기존 역사드라마를 재고찰하는 것은 마지막인 셈입니다. 매 강의가 끝날 때마다 주은경 아카데미 부원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죠. “우리가 모르는 게 정말 많구나.” 소크라테스는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의 무지를 성찰케 하는 방법으로 문답법을 썼다 합니다, 상대방의 대답이 막힐 때까지 묻고 또 묻는 거죠. 그리고는 이미 떡실신한 상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 저에게는 이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강의가 소크라테스의 물음보다도 곤혹스러운 질문 공세였습니다. 처음 <선덕여왕> 강의를 들었을 때의 공포스러운 좌절감을 기억합니다. 6~7세기 한반도를 종횡무진한 전덕재 선생님의 강의에 정신은 몇 번이고 길을 잃었습니다. 밀실에서도 미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강의 후기를 쓰는 일은 또 다른 고통이었습니다. 희미한 기억 조각들을 어렵게 반추하며 하나씩 꿰는 과정은 많은 인내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아리아드네의 실을 붙잡고 미로를 탈출하는 과정은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머리 속에 작게나마 복원된 과거상를 보며 조금은 이 복잡한 역사의 미로를 견딜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드라마 <제중원>을 중심으로 개화기 병원의 역사를 살펴본 7강도 저의 무지를 통렬하게 드러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괴롭고 즐거운 미로를 알려주신 분은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님입니다. 선생님이 던져주신 아리아드네의 실을 조심스럽게 쥐어 봅니다. 길을 잃을지 모르니 바짝 따라 오세요.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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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진오 교수

      조선 정부가 세운 최초의 근대식 서양 병원, 제중원. 드라마에서 그리는 제중원은 명의(名醫) 알렌의 주도로 세워진 것으로 그려집니다. 알렌은 1858년 미국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1년 동안 콜럼버스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1883년 3월 신시내티의 마이애미의과대학을 졸업하여 의사면허를 취득”, 같은 해 10월 북장로회 선교사로 중국에 들렀다가, 이듬해인 1884년 9월 우리나라에 들어온 인물입니다. 젊은 나이에 짧은 의학 경력, 과연 알렌이 드라마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훌륭한 의사였을지 의문입니다. 실제 그는 임상경험이 부족해 치료 중 환자가 죽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합니다. 아무튼 알렌은 조선 주재 미국 공사관의 무급의사로 일하다, 같은 해 12월 일어난 갑신정변 와중에 외무협판 묄렌도르프의 소개로 민영익을 구합니다. 여기서 알렌은 고종의 신뢰를 크게 얻습니다. 고종의 어의가 되는가 하면, 각국 공사관의 부속의사로 임명될 정도로요.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1885년 1월 알렌은 고종에게 제중원 설립 제안을 하게 되지요. 이 제안에 고종은 알렌에게 홍영식의 집을 줘 제중원을 설립하게 합니다. 홍영식은 갑신정변을 주도해 죽은 인물이죠. 지금 종로구 헌법재판소 안에 그 터가 있는 홍영식의 집을 조정에서 몰수했다가 넘긴 것입니다.

      1882년에 폐지된 전통적 대민의료기구인 혜민서의 후신격인 제중원은 1885년 4월에 설립됩니다. 설립 초기 잠깐 ‘광혜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며칠 가지 않아 ‘제중원’으로 부표됩니다. ‘부표’란 국왕의 재가를 받았던 것을 수정할 때 쓰는 용어라고 합니다. 갑신정변으로부터 제중원 설립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넉달. 굉장히 빠르게 일이 진척된 셈입니다. 드라마에서는 제중원을 마치 알렌이 만든 것처럼 그리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조선 정부는 이미 그 전부터 서양의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가령 고종은 1884년 여름, 잠시 조선에 왔던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가 김옥균을 통해 제안한 병원과 학교 설립에 대해 허가의 뜻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 갑신정변이 터지면서 김옥균이 역적이 되자 감리교를 통해 추진되던 방식이 막혀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감리교는 이후 선교 의사 스크랜튼이 1885년 9월에 자체적으로 진료소, 시병원(施病院)을 열었습니다. 제중원 설립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토양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 의문이 생깁니다. 고종이 서양식 병원을 추진할 생각이었다면 여러 방법이 있었을텐데, 왜 굳이 알렌에게 혜택을 주는 방법을 택했나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당시 복잡했던 한반도 주변 정세와 관련이 있습니다. 제국 열강의 한반도 지배 야욕에 고종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임오군란이니 갑신정변이니 하는 사건들에 시달린 고종에게, 미국은 그나마 조선 영토에 대한 욕심이 없는 나라로 비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본이나 청을 견제할 수 있는, 신뢰할만한 나라라는 기대를 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은 조선의 영토보다는 선교나 무역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래서 알렌을 통해 미국을 끌어 들이려는 계산이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알렌은 1901년부터 주한 미국 특명전권공사로 활동하며 친한적인 태도를 보여 루즈벨트와 갈등하다 해임됩니다. 그런 고종의 기대 때문일까요? 드라마는 미국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습니다. 미국 역시 제국주의적 팽창욕에 경인철도 부설권, 운산광산 채굴권 등을 가져간 나라인데도 말이죠. 알렌이 친한적인 태도를 보인 본심 역시 조선의 독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게 빼앗길 이권에 있었습니다. 일본은 악하게 미국은 선하게 그려놓은 드라마의 선악이분법적 민족주의는 오류라는 것이 선생님의 설명입니다. 일본 역시 개화기에 가이세(카이로세) 등 의사를 비롯해,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나라 근대 의학 발전에 기여한 바가 있음에도, 미국의 역할만 지나치게 부각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제중원 설립 후 그 안에서 알렌과 갈등을 빚게 되는 또 한 명의 선교사가 있습니다. 헤론입니다. 미국인인 그는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는가 하면, 모교로부터 교수직을 제안받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의사였습니다. 알렌보다 일찍 북장로회를 통해 조선에 파견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결국 한발 늦어 1885년 6월에야 조선에 들어옵니다. 알렌과 헤론은 물과 기름 같이 갈등했다고 합니다. “알렌은 의료 사업이 곧 선교 사업이라 직접적인 선교 활동보다는 의료 활동에 무게를 두었지만 헤론의 경우에는 의료는 선교의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목사 선교사 언더우드가 헤론 편을 들면서” 알렌은 늘 압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결국 알렌은, 1887년 조선 정부가 미국에 공사관을 설치하며 알렌을 참찬관으로 임명하자,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그 자리를 헤론이 대신하다 1890년 운명합니다. 그리고 알렌은 1889년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헤론 사후 반년간 제중원에 대한 책임을 다시 맡지요.

      아무튼 제중원은 알렌의 책임 하에 운영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가 그리는 것처럼 알렌이 제중원의 1대 원장인 것은 아닙니다. 알렌은 1대 원장은커녕, 1887년까지는 정식 직원도 아니었습니다. 제중원은 엄연한 국가 기구였고 운영권 역시 국가에 있었습니다. 1894년 에비슨이 제중원에 책임을 맡을 무렵에 가서야, 조선정부의 무관심과 불성실 등으로 제중원을 운영하기가 매우 어려워, 운영권이 북장로회선교부에 이관됩니다. 그리고 에비슨은 클리블랜드의 실업가이자 자선사업가인 세브란스가 기증한 재원으로 1904년에 조선 최초의 현대식 병원인 세브란스 병원을 건립합니다. 오늘날의 연세대학교의 ‘세’는 이 세브란스의 첫음을 딴 것입니다.

      “대한제국기에 제중원은 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해 나갔다. 평소 연합병원의 건설은 물론 의료사업을 효율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에비슨은 건축가 친구인 고든에게 부탁해 40명의 환자를 입원시킬 수 있는 병원의 설계도면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선교부의 요청으로 1900년 4월말 뉴욕에서 열린 만국선교대회에 참석한 에비슨의 강연을 들은 부호 세브란스가 병원 건립 기금으로 1만 달러를 희사하면서 병원 건축을 위한 계기가 마련되었다. 비록 1만 달러의 절반 정도를 병원 건립에 사용하라고 주장한 평양 선교사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세브란스가 금액 전부를 병원 건립에 사용하게 함으로써 무마되었다. 부지 선정 문제로 인해 지연되던 병원 건립계획은 부지 매입을 위한 세브란스의 추가 기금으로 인해 속도가 붙었고, 남대문 밖 남산 기슭 복숭아골에 병원 부지 매입이 이루어졌다.   조선정부의 건축허가 불허, 건축자재 값 폭등 등 여러 어려움이 계속되었지만, 마침내 1904년 9월 23일 새 병원의 봉헌식을 올림으로써 입원실 규모가 40병상인 한국 최초의 현대식 종합병원이 문을 열게 되었다. 병원의 이름은 기증자의 이름을 따 '세브란스기념병원'이라 불렀고, '기념'을 생략해서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세브란스의학교는 1908년 6월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 7명을 배출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드라마 <제중원>의 주인공, 황정의 모델이 된 박서양입니다. 드라마에서는 황정이 제중원 설립과 동시에 그곳에서 일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박서양은 1885년 9월 생으로 제중원이 설립된 해에 태어난 인물이라, 황정에 대한 설정은 백정 부분만 따온 것일 뿐 나머지는 허구입니다.

      “박서양은 1885년 9월 30일 최하층으로 취급받던 백정 박성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성춘은, 1893년 서울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에비슨이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직접 몇 번에 걸친 왕진을 통해 자신을 성실하게 치료해 준 것에 감명을 받아 개신교인이 되었다. (중략) 여러모로 에비슨과 인연이 있었던 박성춘은 그의 초대로 아들인 박서양의 혼인식에 참석한 에비슨에게 자식의 교육을 부탁했다. 그래서 얼마 후 박서양의 부친의 부탁을 받은 에비슨은 박서양을 병원에 데려왔고, 그의 사람됨을 알아보기 위해 처음에는 병원 바닥 청소와 침대정리 및 잡무를 시켰다. 박서양이 힘든 모든 일을 아무 불평 없이 거뜬히 처리하자 에비슨은 그에게 글공부를 시작하게 하고 1900년 8월 30일 정규과정으로 입학시켰다. 박서양은 1908년 6월 우리나라 최초의 7명의 의사 중 한명으로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졸업 직후 화학을 맡아 강의를 하다가 다음에 해부학을 가르쳤고, 외과에서 근무하였다. 또한 세브란스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학교와 후진양성을 위해 많은 활동을 했다. 그는 1918년까지 학교에 근무하다가 사임하고 만주 용정의 국자가局子街에 구세의원을 개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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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질의 응답 시간
      강의 후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혹시 근대병원의 설립에 관해 더욱 구체적인 사항이 알고 싶으시다면, 선생님이 추천해 주신 사이트 cp0804.culturecontent.com에 들어가 자료들을 살펴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 후기에 실린 큰따옴표 안의 인용문들은 모두 그곳의 글들을 붙여넣은 것입니다. 더불어 이 주제와 관련해 최근 <프레시안>에서도 황상익 서울대 교수님의 연재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료와 함께 서술된 재미있는 연재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6강]

      2010.4.20 뚜빠뚜빠띠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엉기조차 벙기조차 엉기벙기 버벙기. 무슨 말인가 싶으시죠? 어릴 적 읽었던 전래 동화 속 주인공 이름입니다. 몇 명 자식을 낳았지만 모두 일찍 죽어버려 애가 탄 부부가 있었습니다. 마침 또 하나의 아이를 갖게되자 이번에는 부디 무병장수하라는 바람으로 지은 이름입니다. 이름이 길어야 명도 길다는 무당의 조언이 있었거든요. 사람의 이름이 간혹 이처럼 어떤 사람에 대한 정보를 함축적으로 드러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이름만으로도 능히 그 사람의 일생이 짐작되는 이가 있습니다. 만덕(萬德). 재산을 털어 굶주린 백성들의 가난을 구제한 여인입니다. 누구의 기대가 섞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주술의 힘이 대단합니다.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여섯 번째 강의는 이름값 톡톡히 한 이 여인의 삶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강의는 약자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가진 정창권 고려대 국어국문과 교수님이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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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창권 교수

      교수님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 2세대라 칭했습니다. 저서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나 <향랑, 산유화로 지다>는 그러한 여성관이 녹아 있는 책들입니다. 우리는 흔히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본 여성사를 ‘남성에 의한 종속사’로 보곤 하죠. 하지만 교수님은 적어도 우리나라만은 그러한 역사의 예외지대라고 말합니다. 정치적인 지위가 아닌 일상 생활의 측면에서 봤을 때 한반도 역사상 여성의 지위는 그렇게 낮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령 16세기까지만 해도 매맞는 아내 얘기는 찾기 힘듭니다. 오히려 매맞는 남편이야기만 나오지요. 조선 중종 때는 ‘이러다 조선 남자 씨가 마르겠다’는 (다소 엄살섞인) 우려도 있었다 하네요. 이외에 처가살이라던지, 족보에 남녀의 이름을 모두 기재하는 거라던지, 자녀 간 공평한 재산분배 같은 것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런 흐름이 뒤바뀌어 남녀 사이 불평등이 심해진 것은 우리 역사 속에서 불과 2~300년 사이의 일입니다. 18세기 무렵부터 점점 악화된 여성에 대한 대우가 조선 말,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완전한 관행으로 자리잡았고, 오늘날 우리 사회의 남녀 차별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교수님이 만덕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 ‘여성사 암흑기’에 드물게 성공한 사례에 만덕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전해지는 만덕에 대한 사료로는 체제공의 <만덕전>이나, 심노숭의 <계섬전>, 정약용이나 김정희의 기록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료로는 충분치는 않아 만덕의 삶을 온전히 복원하는 데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저 성긴 정보로 만덕의 삶을 추리해 볼 수 있을 뿐이지요. 때문에 곳곳에서 반대되는 상상과 해석들이 충돌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묘미겠지요.

      탐라의 양가집 딸인 김만덕은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한 기녀에게 의탁해 살았는데, 조금 자라자 그 기녀가 기안(기녀 명부)에 올려버려 기녀가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녀를 유곽의 여인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후대에 와서 왜곡된 이미지라 합니다. 기녀는 기생과는 다른 관노비입니다. 특히 제주에서는 기녀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더 나았는데, 남편을 잃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유녀(떠돌이 여성)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수님은 만덕이 적극적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싶어서 스스로 기녀가 되었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기녀가 된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볼 필요도, 수동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교수님의 해석과는 반대로 체제공은 <만덕전>에서 ‘비록 머리를 숙이고 기녀노릇을 할망정 스스로 기녀로 자처하지는 않았다. 나이 20여 세가 되자, 만덕이 자신의 사정을 울면서 관아에 호소하니, 목사가 가긍히 여겨 기안에서 빼주고 양민으로 되돌려 주었다.’라고 썼습니다. 당시 기녀들은 나이 50세가 되거나 다른 사람을 사서(대비속신) 기녀 신분에서 풀려나올 수 있었다고 하는데, 사정해서 양민이 될 정도면 재주가 좋은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양민이 된 만덕은 결혼은 하지 않고 머슴을 부려 장사를 시작합니다. 아마 포구에 객주를 차려 제주 특산물인 말총이나 우황, 미역, 전복 귤 등을 육지에 내다 팔고, 제주에 필요한 물건인 곡식, 소금, 철, 비단 등을 사 들여 온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장사 수완이 좋은지 어느새 제주 최고의 부자가 되죠. 그녀는 육지와 제주 사이의 시세 차이를 이용한 방식으로 이문을 남긴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제주에서의 곡식 100석은 육지에서의 1000석과 맞먹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실로 엄청난 차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그 시절 제주에는 기근이 주기적으로 왔다고 하는데요, 만덕이 장사를 시작한 20대부터 기부를 한 50대에 이르는 사이에도 분명 기근은 몇차례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덕은 그 사이에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겼죠. 과연 그 치부 과정이 정당했을까요? 혹 인심을 잃거나 하지는 않았을까요? 심노숭은 ‘만덕은 품성이 음흉하고 인색하여 돈을 보고 따랐다가 돈이 다하면 떠났는데, 남자가 입은 바지저고리마저 빼앗았다.’라고 썼습니다. 만덕에 대한 유일한 악평이지만, 허투루 읽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1795년, 만덕의 나이 56세 때 탐라에 큰 흉년이 듭니다. 당시 제주 인구가 47,735명이었는데, 그 1/3인 17,963명이 굶어죽을 정도의 재앙이었다고 합니다. 나라에서 곡식을 실은 배를 보내도 제주 앞바다의 거센 물살에 전복돼 막막한 상황. 이에 만덕이 곡식(일설에 의하면 500석)을 사들여 1/10은 자기 일가 친척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관아에 바쳐 가난을 구제합니다. 만덕이 구휼에 나선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있은 지 1년이 지나도록 제주 목사 이우현은 조정에 보고할 생각을 않습니다. 당시 만덕 외에도 고한록이라는 양반이 구휼에 나서, 그에 대한 보고는 조정에 올라가 포상을 받았는데 말이죠. 이에 백성들이 성화하자 그제야 이우현은 보고를 올리고, 정조는 소원을 들어주라고 명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소원이 또 가관입니다. “별다른 소원은 없습니다. 다만 한번 서울에 가서 임금님의 계신 곳을 바라보고, 이내 금강산에 들어가 일만이천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당시 제주민에게는 출륙금지령이 내려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모로 열악한 제주의 환경에 육지로 옮겨오려는 이들이 많아, 인조가 1629년에 명한 것입니다. 특히 여자들의 출륙은 더욱 엄금해서, 뭍의 남자와 혼인해 그곳으로 옮겨가 사는 것도 금지할 정도였습니다. 참 특이한 소원이다 싶지만, 따져보면 돈도 벌 만큼 번 사람에게 남은 소원이란 게 그런 굴레를 벗고픈 욕망 외에 뭐 있겠느냐는 생각도 듭니다. 더불어 애초부터 이런 소원을 성취할 흑심을 품고 구휼에 나선 것 아닌가 하는 모난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민가의 여자가 궁궐 구경하고 싶다는 바람을 꺼낸 것 자체가 그 배포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만덕은 소원을 이뤄 한양에 올라오지만, 처음에는 돌봐주는 이가 없어 힘들게 생활해야 했습니다. 왕이 명한 것임에도 참 허술하게 일처리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체제공이 정조에게 아뢰어 비변사에 머물고 선혜청에서 식량을 대주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58세에는 금강산 구경까지 마치고 한양에 한번 더 들렀다가 제주로 돌아옵니다. 따지고보면 굉장히 먼길인데 어떻게 이동했을까요? 걷더라도 힘든 길이지만, 가마나 말을 타고 간다고 해도 그 정도 거리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고생스러웠을 것 같은데요. 게다가 나이는 거의 환갑을 바라보고 있잖아요. 그 고난 다 감내하고 다녀올 만큼 정력적인 여인이었나 봅니다. 명도 굉장히 길어 74세까지 살았다고 하니까요. 이후 만덕이 소원을 성취하고 죽기까지의 기간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제주 성안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만덕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조선시대에 결혼은 필수적이어서, 과년한 자식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 부모가 처벌받을 정도였는데도 말이죠. 아마 기녀 출신이라는 신분 때문에 남자들이 꺼리거나 한 것 아니냐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식도 없었습니다. 어찌보면 참 외로운 삶입니다만, 소원을 다 이뤘으니 지루할 틈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5강]

      2010.4.11 최성호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태조 이성계를 시작으로 마지막 왕인 27대 순종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 성군이라 칭하는 왕중에서  빠지지 않는 왕이 바로 22대 정조일 것 입니다. 그는 개혁군주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시대를 조선 최고의 부흥기로 만들 었지만 그의 죽음 이후 조선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조선의 전환기로 볼 수 있는데 혹자는 정조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만큼 그의 죽음 이후 조선이 급격히 쇠퇴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번 강의는 정조를 소재로해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MBC 드라마 `이산` 입니다.

      '이산' 왕의 이름을 함부로?

       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다른 시대에도 왕의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왕의 이름은 불러서도 안되고 비슷한 발음을 해서도 안되는 것이 었습니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왕조 자체가 무너져 그렇겠지만 만약 지금까지 왕조가 이어져 오고 있는 상황에서 '이산'이라는 제목으로 드라마를 방영했다면 연출자는 역적중에 역적으로 몰려 큰 벌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를 방증하는 하나의 사례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함경도 지방에 이산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왕의 이름과 같다하여 지명을 바꾼 것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산'이라는 금지 된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영조를 현대의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를 말하다.

      드라마와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캐릭터일 것입니다. 드라마 '이산'도 마찬가지 입니다. 드라마에서 이산은 상당히 점잖고 근엄하며 말하는 것을 최대한 절제합니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멋있는 남자입니다. 이러한 캐릭터 설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왕에 대한 이미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실제 정조는 드라마 이산에서 보여준 이미지와 비슷할까요?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조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매력적인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공부를 잘했으며 글쓰는 것을 좋아해서 저작도 많이 남겼죠. 26대 왕인 고종도 저작은 많지만 의 경우 자신이 직접 쓴 글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조의 경우는 다릅니다. 저작 대부분이 자신이 쓴 글이며 자신이 쓴 글과 남이 쓴글을 구분했다고 합니다. 대필을 시키면 반드시 대필의 흔적을 남기게 했다고 합니다. 즉 자신의 글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고 능력이 탁월했다는 증거입니다. 정조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도 많은데요. 정조의 제자들은 19세기에 위대한 학자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정약용과 서유구 등이 있습니다. 드라마에서는 정약용이 정조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데 실제로는 그 반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드라마 '이산'의 모습이 실제 정조의 모습일까?

      최근까지 정조는 왕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사료에서 너무 근엄하게 번역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얼마전 발견된 299통의 비밀편지를 통해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정조는 저작도 많고 말도 많은 왕이었습니다. 성격은 다혈질이었고 자신 스스로 태양증이라고 말하고 다녔을 정도라고 합니다. 왕임에도 불구하고 우스갯소리를 자주 했으며 속된 표현도 거침없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문제로 신하가 상소까지 올렸다고 하니 짐작할 만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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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대회 교수

      드라마에서의 연애. 그리고 그의 관심사

      드라마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사랑이야기 입니다. 이산에서도 정조가 '송연'이라는 인물과 연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허구입니다. 사극에서의 연애는 대부분 허구인 경우가 많은데요.  대부분의 왕은 많은 여성과 관계를 맺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가상인물을 만들어 드라마의 소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정조의 경우에는 이러한 가정도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정조는 여자와 사치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여자 관계도 복잡하지 않다고 하는데요. 세종대왕의 경우 자식들이 수십명에 이르지만 정조의 아들은 한 명뿐 입니다. 또한 음식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조는 오직 학문에 관심이 있었으며 관심이 생기는 분야가 생기면 그 주제에 파고드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다른 어떠한 왕보다 자료가 많고  모든 자료들이 상당히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희소성의 원칙에 의해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 상황임에도 정조의  그의 필체도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암살과 독살, 그리고 정순황후.

      드라마에서 약 10번정도의 암살시도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과장 된 측면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경우 암살의 문화는 아니라고 합니다. 소현세자의 경우는 예외라고 할 수 있지만 사약을 받을 때도 왕에게 절을하고 예를 갖춘다고 합니다. 송시열의 경우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강했기에 사약을 한사발 먹고도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사발 더 먹고 죽었다고 합니다. 임금이 죽으라고하는데 안죽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충을 중하게 여기는 시대에 그렇게 많은 암살시도는 불가능이라는 것입니다. 드라마 후반부에 역적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정조의 할마니인 정순황후를 골방에 가두고 포박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러한 경우는 불가능 하다고 합니다. 조선시대는 충과 효를 중히여기는데 그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효라고 합니다. 국왕이 효를 부정하면 그 근본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연산군과 광해군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손자가 할머니를 포박하는 일은 드라마에서의 설정일 뿐이라고 합니다.

      정조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니라 독살이라는 설이 많습니다. 299통의 비밀편지를 통해 그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 된 감이 있지만 이에 대한 질문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사료와 정조의 나이, 그리고 그가 오랜시간 동안 병을 앓고 있었다는 상황을 고려할 때 독살에 대한 주장은 설득력을 잃을 수 밖에 없다고 교수님께서는 답변해주셨습니다.

      드라마 '이산'에 대한 교수님의 평.

      드라마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은 정조와 그 시대를 흥미롭게 잘 포착하여 만든 드라마라고 하셨습니다. 소품도 비교적 잘 구현했고 특히나 주인공과 여주인공의 인물이 괜찮았다고(^.^).

      다만 정확하게 고증이 안된 부분은 아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부분이지만 '이산'의 경우 조선시대의 책은 두껍고 무겁기 때문에 일본, 중국과 달리 5개의 줄로 책을 엮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6개로 엮은 모습을 포착하시고 스트레스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강의를 듣는 분들 대부분이 그러한 것 까지 하나 하나 살피시는 모습이 놀랍다는 반응이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드라마 이산이 사극 장르를 표방하여 역사를 잘 활용했으며 상상력 발달 차원에서 큰 도움을 주는 드라마라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역사가는 사실을 근거로해서 정확히 저술하는 것이지만 드라마의 연출자는 그러한 의무는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씀과 함께 드라마와 소설이 역사적 사실에 치중하다보면 그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하셨습니다.

    • 콤플렉스와 역사..

      2010.4.8 별빛소리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민주주의 학교 강의를 들은 후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해 봤습니다. 복습도 열심히 하려구요..^^

      콤플렉스란 무엇인가? 검색해 보니 '잠재된 감정의 복합체' 라고 한다. 어떤 객관적인 사실, 대상에 대하여 나만의 해석하는 감정의 덧씌움이 아닐까?  '이것이 나의 콤플렉스야' 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밝혀버린다면 비이성적인 사유습관을 만들지 않을텐데, 부끄러운 모습에 대하여 혹은 상처받은 모습에 대하여 감추려 하기 때문에 콤플렉스는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의 동기가 된다. 그러나 콤플렉스가 반드시 나쁜 방향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좋은 방향으로 풍부한 이해력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작가 김원일처럼..

      오늘을 만든 역사는 어디에서부터 기인된 걸까? 조선후기의 정치, 남북분단을 만든 상황까지는 일단 생각하지 않겠다. 남한만의 역사를 생각할 때 그것은 과거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시대적 과업을 외면한 역사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청산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권력자들(기회주의자가 대부분일 것으로 생각)은 자신의 과거를 잊기 위해, 묻어버리기 위해 새롭게 부여잡은 기회에 대하여 병적으로 집착한다. 자신의 부끄러웠던 과거를 하얗게 지우기 위하여 어떤 대상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과민반응들을 하는 것이다. 그들의 콤플렉스는 일개 개인의 삶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역사를 바꾸고, 무고한 많은 사람들을 핍박하는 내적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우리가 이들의 콤플렉스를 받아줘야 하는가? 어떤 특수집단의 사회적 생존(성공)을 위해 상식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을 계속 사회에서 몰아내야 하는 것인가?   

      해방된 지 65년이 지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일제청산은 단지 구시대의 과업에 불과한 것인가? 반민특위의 아쉬운 미결문제일 뿐인가? 언제적 문제인데 아직까지 그걸 걸고 넘어지나? 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용서란 용서해야 할 대상이 분명히 드러날 때 가능한 거다. 우리역사는 한번도 그들을 제대로 단두대에 세운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들의 능력을 활용한다는 속셈으로 새 시대의 옷을 입혀 주었고 새 시대의 선봉인양 행세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잃어버린 조국을 위해 자신의 삶은 물론 가족들의 안위마저 내팽개치며 고민하고 싸웠던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에 설 땅이 없었다. 초등교육에서부터 국민의례를 하도록 교육받고 의례적으로 순국선열들에 대한 묵념도 해 왔지만, 우리가 기리는 순국선열들은 누구이며 그분들에 대하여 과연 부끄럽지 않은 후손인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용서는 훌륭한 덕목이고, 잘못을 끄집어 내어 단죄하는 일은 그리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냥 용서하고 말지.. 그러나 용서를 빈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잘못된 권위에 부당하게 짓눌렸고, 여전히 새롭게 짓눌리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사 청산은 단지 특정 세력들을 단죄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통용되는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피해의 당사자들이라면 혹 보복의 의미도 생각할 수 있겠으나 오랜시간이 지난 후에도 과거사 청산이 유효한 일이 된다면, 그것은 다음세대에 왜곡된 역사를 물려주지 않으려는 가장 미래지향적인 일이 될 것이라 믿는다.

    • 소현세자는 누가 죽였나?

      2010.4.4 최성호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들어가며
      제 4강의 드라마는 얼마전 막을 내린 드라마 '추노' 입니다. 도망간 노비를 붙잡는 추노꾼 이대길, 소현세자를 보필했던 장군 송태하, 노비에서 양반으로 신분상승을 꾀한 김혜원 등의 등장인물로 기존 왕실 이야기를 다룬 사극과는 달리  민초들의 삶을 집중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시청자들로 하여금 신선했다는 반응과 함께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입니다. 인기와 더불어 시청자들로 하여금 추노꾼이 실제로 존재했는가? 당시 양반을 죽이기 위한 노비들의 비밀 결사대가 존재했는가? 등의 많은 궁금증 또한 만들어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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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노'라는 드라마를 어떻게 볼 것인가?
      대부분의 사극드라마와 마찬가지로 '추노' 역시 사실과 허구가 조화된 드라마입니다. 병자호란 이후 시대를 중심으로 소현세자와 노비문제를 다룬 것은 사실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전개 과정에서 소현세자의 3째 아들인 석견을 제주에서 구해오고 청으로 데리고 가는 설정. 그리고 노비들의 해방공간인 월악산, 노비들이 비밀결사대를 만들어 양반을 죽이는 장면은 허구로 볼 수 있는 것이죠. 또한 좌의정은 가공인물이지만 좌의정이 주장했던 북벌. 즉 청나라는 오랑캐가 구성원이기 때문에 순응할 수 없다는 설정은 사실로 볼 수 있습니다. 인조 이후에 왕이 된 효종이 주장했던 북벌 주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명기 교수님 께서는  '추노'라는 드라마는 사실과 허구를 잘 조화시켜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는 평가를 내려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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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기 교수

      소현세자는 누구인가?
      이제 드라마를 떠나 당시 조선사회와 대외관계에 대해서 알아 볼텐데요. 그 중심이 되는 것이 '소현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현세자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아야 이야기를 풀어 갈 수 있겠죠? 소현세자는 조선 후기 왕족으로 1625년에 세자로 책봉되지만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는 인물입니다. 당시 인조(제 16대 왕)는 청에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를 무척이나 아꼈다고 합니다. 청군 장교에게 부탁하여 압록강을 건널때까지 온돌에서 재워 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대목이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입니다.

      "욕하면서 배운다." 교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랑캐의 나라인 청나라에 끌려간 소현세자는 그곳에서 그들의 생활 양식을 보게 됩니다. 조선과 달리 능력있는 자가 선발되어 나라의 왕이 되거나 축제를 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질박함을 보고 청나라에게서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역사에 가정은 필요없지만 만약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의 인식과 근대화가 앞당겨지지 않았을까'라는 말씀도 함께 해주셨죠. 시간이 지나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는 더 이상 조선이 청나라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두달 후에 죽고 맙니다. 돌아온 당시 인조는 소현세자를 외면했다고 합니다. 청에서 광범위한 인맥과 신임을 쌓고 돌아온 소현세자가 자신을 내치고 소현을 왕으로 올릴지 모른다는 이유에서 인듯 합니다. 소현세자의 죽음을 두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독살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는 인조의 행동에서 그 개연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소현의 사망원인을 조사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3일만에 입관. 그리고 당시 주치의를 처벌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친이라 하기에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이후의 조선
      조선 전기의 양인(양반, 중인, 양민)과 천민(노비, 재인, 기생) 그리고 조선 후기의 양반, 중인, 양민, 천민. 즉 조선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다는 것을 모두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양난을 겪은 이후 신분에 붕괴가 생기게 됩니다. 일부 양반은 가세가 기울어 영향력이 약화되어 양민의 생활을 하는가 하면 부를 축적한 노비가 양반행세를 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그만큼 양난을 겪은 조선 사회가 혼란했음을 뜻하는 것이죠. 한명기 교수님께서는 현재의 천안함 침몰 사건과 연계를 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구조 작업중 돌아가신 故 한주호 준위님을 보며 우리사회의 전반적인 토대가 허약하다는 것을 느끼셨는데 당시 조선 사회도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번 사고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시 양난으로 인한 고통은 일반 백성들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 되었죠.

      앞서 언급한 신분 붕괴의 한 예
      한명기 교수님께서는 자료를 통해 당시의 시대 상황을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경상도 감사 공문을 보내 온 가운데 평안도 감찰사에게 보냈다. 초계군(경상의령) 이 수추(체포된 죄수) 죄인 이숙회(정확하지는 않지만 동물의 암수 구별의 숫개라는 뜻으로 노비 이름을 뜻합니다)의 건. 이자는 정원벽 집안의 노비가 양인과 결혼해서 낳은 사람으로 가세가 풍요로워지더니 스스로를 양반이라 칭했다. 그런데 재수 없게 정원벽의 부인을 만나 너는 우리 집 노비이지 않았는가? 라 면박을 주었고 남의 앞길을 막아버렸다는 분통이 쌓여 감정이 격해졌다. 식솔을 인솔하여 정원벽의 처를 얕보고 처들어가서 위협하니 이르지 않은 바가 없이 무지하게 괴롭혔다. 그래서 백여사는 스스로 물에 몸을 던져 죽는 지경에 이르렀다. <평안감형계녹(平安監營啓綠) 1844년>

      노비가 도망을 선택하게 된 까닭은?
      조선시대 양반들에게 가장 중요한 물질적 토대는 토지와 노비였습니다. 토지와 다르게 노비는 살아있는 동안 결혼을 통해 증식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던 것이죠. 노비의 숫자에 대해서는 설들이 분분하지만 17세기에는 약 30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600만이었으니 절반이 노비라는 이야기 입니다. 노비도 여러 부류로 나뉘게 됩니다. 궁궐, 관청이 소유한 '공노비'와 개인이 거느리는 '사노비'. 사노비 중에서도 함께 동거하는 '솔거노비'와 바깥에서 독립하며 사는 '외거노비'가 있습니다.

      17세기 이후 노비들의 도망이 증가됩니다. 양난을 통해 국가의 통제가 느슨해진 이유도 있고 도망을 통해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양인의 신분으로 상승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노비들에게 부과되는 부담이 너무 과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노비에게는 크게 신공(자신의 주인에게 특정 물품을 납부)과 입역(일정한 시간동안 몸으로 노동력을 제공)이 있습니다. 이것을 화폐나 쌀로 대신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왕조실록에는 사노비 관련 자료가 없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공노비의 경우 입역을 마치면 집안이 거덜나는 정도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 부정이 많이 일어 나기 때문에  그 부담은 가중될 수 밖에 없었고 이를 미루어 볼때 부담을 회피하기 위해 도망을 택한 경우의 비율이 많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더하게 됩니다.

      '추노꾼'은 과연 존재했는가?
      수많은 도망 노비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드라마에서의 '추노꾼' 이대길과 같은 인물이 실제로 존재 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는 허구입니다. 도망간 노비를 잡는 일은 정부의 몫이었습니다. 1655년 효종 6년차 도망간 노비를 잡기 위해 추세도감이 설치 됩니다. 도망간 노비를 잡는 일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임시 관청으로 추세도감은 조선 전기에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효종이 추세도감을 설치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 집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효종은 북벌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약소국인 조선이 청나라와 전투를 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군사력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재정적자 상태였습니다. 국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북벌은 무의미했고 단기간에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방법으로 추세도감을 생각해 낸 것 입니다. 당시 장부상의 공노비는 19만, 하지만 신공을 바치는 노비는 2만 7천명에 불과했습니다. 16만에  노비에게 신공을 받는 다면 재정에 큰 힘이 될 것이라는 계산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문제가 생깁니다. 양난을 겪을 당시 공을 세워 노비 신분을 면해주었던 납속책. 이에 대한 증명서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드물었고 이를 선별하는 것 또한 더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또한 노비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해서 아들과 손자는 양반이 된 사례 등 문제점이 너무 컸던 것이죠. 결국 1만명 이내로 신공을 거둬드렸지만 사회적 혼란은 가중 되었고 결과적으로 추세도감을 폐지하게 됩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대외적 관계
      한반도는 조선시대 명나라와 청나라 그리고 일본까지 대륙과 해양에 끼어있는 존재입니다. 현재에 와서도 G7으로 대변되는 강대국이 있죠? 지금은 G2라고도 이야기 되는데 미국과 중국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경우 중국내의 한족이 중심이 된 왕족이 계속 장악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거란과 몽골 만주등의 비 한족의 힘이 커질 때 한반도는 한족과 북방민족의 압력에 많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소현세자가 희생됬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개의 강대국 중 한쪽이 열세에 놓이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양쪽이 비등해져 사사건건 부딪치게 되면 한반도는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다다르게 됩니다. 현재보다는 조선시대가 더 심했다고 볼 수있습니다. 양난의 근본적인 이유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입니다. 또한 양난을 극복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을 뿐더러 외교적 실패로 인한 모든 고통이 민중에게 전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 항해원조? 그리고 항미원조
      임진왜란은 당시 동아시아 제패를 위해 일으킨 전쟁으로 그 목표는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 였습니다. 명나라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하였습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참전이었지만 이를 빌미로 항해원조라는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왜구에 대항해서 조선을 도와준 전투. 즉 도왔다는 것에 비중을 두었고 보답하라는 늬앙스를 강조한 것입니다.  再造之恩 [재조지은]을 빌미로 조선의 지배층을 짖누르게 됩니다.

      이러한 사례는 6.25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항미원조라고 하는데 북한에 국한 된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 할 당시 중국은 한국의 국군이 38도선을 넘으면 가만이있지 않겠다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이미 1950년 7월 북한군이 승승장구 할 때 중공군은 이미 15만의 군사를 열차편으로 압록강 두만강에 배치해둔 상황이 었습니다. 전세가 역전될 것이라는 예상을 모택동은 이미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해 10월 모택동의 아들 모한영도 참전하게 되는데 미군폭격으로 인해 모한영은 죽고 그 무덤을 평양에 만들었습니다. 이는 결국 조선과 마찬가지로 북한의 지배층에 대한 압박이었고 현재의 한반도 통일을 위해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병자호란 직전 상황을 보면 오늘이 보인다.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립. 하지만 결국 최종 결론은 통치자가 내리는 것입니다. 통치자는 상당히 고독하고 힘든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당시 인조는 대국을 종합적으로 보는 인물은 못되었다는 평입니다. 이것이 조선의 또 다른 비극이었습니다. 결국 척화파들이 목을 치자고 주장할 정도로 강경한 입장이었지만 대책은 없었던 것입니다.당시 최명길 [崔鳴吉, 1586 ~ 1647] 은 진짜로 싸울 것이라면 강화도를 불태우고 거기서 압록강에서 결판을 내자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지더라도 조약을 맺을 수 있으므로 백성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달랐습니다.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청나라는 압록강이 얼자마자 돌격을 해왔고 강화도로의 도망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최명길은 목숨을 걸고 시간을 끌었고 그 시간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몸을 피하게 됩니다. 45일만에 군량이 떨어지고 항복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1637년 삼전도의 치욕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상황으로 돌아 옵니다. 현재 세계의 패권은 미국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급격하게 발전하고 있는 중국이 가까운 미래에 미국을 누루고 패권을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도 일각에서 일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그 안에 한반도가 있습니다. 시대만 다를 뿐이지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조선시대와 달리 전쟁이 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합니다. 그것보다는 경제적 관점으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과 빠르게 치고 올라오는 중국 사이에 한반도는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명기 교수님께서는 하이에나(?)론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일반화 시켜보겠습니다. 현재 두 국가의 사이가 100이라고 한다면 40이 어디에 붙느냐에 따라서 무게의 추가 기울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고구려를 제외하면 125를 넘어 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언제나 한반도는 위기에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강대국의 세력이 비등비등하면 언제나 피해를 보는 것은 그 가운데에 끼어있는 한반도 입니다. 과거 조선시대의 결과가 그대로 현재에 와서 재연되지 않도록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과거처럼 모든 고통은 일반 국민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제 4강 소현세자는 누가 죽였나? 후기를 마치며
      한명기 교수님은 제주도로 출장을 다녀오셨음에도 불구하고 피곤한 기색하나 없이 강의를 진행해주셨습니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강의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과거의 문제를 현재에 대입해 설명해주셨습니다. 또한 요즘 세대가 두려워(?)하는 한문을 이용해 당시의 시대상황과 한문이 갖는 고유의 장점도 설명해주셨지요 ^^

      후기작성은 처음인지라, 부족한 점이 참 많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더 노력해서 제대로 된 후기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

    • 애정에 눈먼 못된 어미? 천추태후

      2010.3.30 뚜빠뚜빠띠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며, 또 배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역사학이란 단순히 과거의 사실 조각들을 수집하며 꿰맞추는 지적 퍼즐 놀이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요? 아니면 일차적인 사실보다 한 차원 높은 거대 담론의 알리바이를 확보하려는 현재적 관심의 소산일까요? 그렇다면 그 거대 담론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3월 25일, 고려 초 천추태후가 살았던 시대를 주제로 한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세 번째 강의는 풀리지 않는 질문들을 던져 주었습니다. 강의 오래하는 것 안 좋아하신다던 광운대 교양학부의 김인호 교수님도 결국 수강생들이 던지는 그 질문들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여기, 우리에게 다소 익숙한 대답을 하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2009년 KBS에서 방영된 <천추태후>입니다.

      천추태후, 애정에 눈먼 못된 어미?

      천추태후. 태조 왕건(1대)의 손녀이고, 경종(5대)의 부인이자, 성종(6대)의 누이이자, 목종(7대)의 어머니이자, 또 현종(8대)의 이모인 여인. 이 복잡한 가계의 원인은 지방 호족 세력과 손잡기 위해 공식적으로만 29명이나 되는 부인을 둔 왕건의 전략에 있습니다. (그래서 고려시대에는 외척의 힘이 굉장히 셌습니다. 왕욱의 딸인 천추태후가 왕씨가 아닌 황보씨인 것만 봐도 짐작이 가능합니다.) 당시까지는 아직 골품제적인 풍습이 남아서 왕족끼리만 특권을 이어가겠다는 생각에 이복형제들끼리만 결혼한 것도 족보 그리길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다 보니 왕위 계승 문제도 복잡해집니다. 심상치 않은 갈등이 예상됩니다. 하지만 수강생 중 누구도 드라마를 본 이가 없다는 걸로 보아 썩 재미있게 작품을 그려내진 못한 것 같습니다.

      종래 조선의 유학자들은 천추태후를 애정에 눈이 먼 못된 어미 정도로 치부했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후, 김치양과 눈이 맞아 아들까지 낳은 여성. <고려사>는 그 관계를 ‘간통’이라 표현했습니다. 더구나 그는 아들인 목종(7대)이 18세로 장성했음에도 여성의 신분으로 섭정을 펼쳤습니다. 보수적인 유학자들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겠죠? 다분히 조선의 유교적인 질서가 반영된 평가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사랑이 불륜일까요? 고려는 예상보다 훨씬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의 사회였습니다. 지금은 그림이 남아있지 않지만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남녀 구분없이 목욕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재혼도 상당히 자유로워서 조선 초기에야 여성이 세 번째 결혼을 하면 자식이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제한하는 법이 만들어졌을 정도라고 합니다. (여성의 지위도 상당히 높았습니다. 재산상속 등에 있어서 불이익을 받지 않았죠.) 어떻게 보면 오늘날보다도 개방적인 것 같습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비칩니다.

       

      드라마는 천추태후를 좀 더 다른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드라마 사진 속에서 철갑을 하고 칼을 움켜쥔 채시라(천추태후 역)의 표정이 결연합니다. 과거 기껏해야 남자 주인공의 보조자에 머물던 수동적 여성상을 뒤집는 적극적이고 활달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해하기 힘든 설정입니다. 과연 당시에 (태후가) 활 쏘고 갑옷 입고 그랬을까요? 또 그게 과연 진취적인 여성상일까요?” “장수가 앞에 나서서 칼 들고 싸우는 것이 아니잖아요. 후방에전반적인 전술 배치 등에 주력하는 것이 장수의 일인데...” 연출 상 그럴듯한 그림을 만들다 보니 생기는 왜곡에 대한 지적입니다. 덧붙여 교수님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게 되면 상상력이 제한돼 작가들이 드라마를 못쓴다”며, “드라마를 드라마로 보면 좋겠지만, 문제

       

      사극이 사실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라는 딜레마를 토로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런 사소한 문제보다 좀 더 논란이 될 만한, 거창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나는 꿈을 꾼다. 나의 고려가 대제국이 되는 그날을...” 중무장을 한 천추태후 사진 옆에 쓰인 문구입니다. 천추태후를 고구려 계승의 꿈, 민족성 혹은 자주성 회복과 같은 거창한 담론에 연결지은 것입니다. 이전에도 제국에 관련된 드라마는 있었습니다. 고구려 건국을 다룬 <주몽>, 발해 건국 이야기인 <대조영> 등이 그랬지요. <천추태후>는 이러한 드라마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입니다. 고구려사를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에 대응하려는 의도도 엿보입니다.

      KBS 다큐멘터리 <한국사 전(傳)>에서도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천추태후를 재평가합니다. 다큐는 목종대의 서경 중시 정책을 북진정책으로 해석합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처럼 말이죠. 천추태후가 불교를 중시하고, 전통행사인 팔관회를 부활시킨 것은 고려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려는 자주 의식의 발로로 읽어냅니다. 이전의 성종은 스스로 송나라의 제후국임을 청했습니다. 팔관회나 연등회를 폐지하고 중추원을 설립해 유학과 중국을 지향한 정책을 펴기도 했습니다. 천추태후는 성종대의 이러한 정책 방향을 되돌려 자주성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종과 현종 대에 받았던 거란의 침략이 목종 대에는 없었다는 점을 들어 실리외교의 결과라는 해석을 내립니다. 

      천추태후가 고구려 부활을 꿈꿨다? 글쎄요.

       

       

      하지만 김인호 교수님은 이러한 해석들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대고구려 부활의 꿈이라고 얘기하기에는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입니다. 유일한 근거로 볼만한 게 서경 중시 정책인데, 애초에 서경은 고려 입장에서 굉장히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천추태후가 서경 근처 황주 출신인 점, 그의 연인 김치양이 그 근처인 황해도 동주 출신인 점 등이 천추태후의 의도를 순수하게 보기는 어렵게 만듭니다. 게다가 서경을 주나라의 수도인 ‘호경’으로 개칭한 것도 고구려 계승 의지에 의문을 품게 합니다.

      불교 및 전통을 중시했다는 것도 의심스럽습니다. 일단 김치양이 승려 출신입니다. 동주에 사당을 건립하는 등의 정책은 이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더구나 당시 불교며 팔관회와 같은 행사들은 금전을 챙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마치 오늘날 일부 종교나 행사가 그렇듯이요. 성종이 팔관회를 없앤 이유로 재정이 많이 들어 번잡스럽다는 점을 든 것만 봐도 중국 지향이라 단정짓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주성 회복이라는 그럴듯한 포장 뒤에 감춰진 속살에서 풍기는 돈 냄새를 무시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실리외교 역시 과장된 측면이 있습니다. 성종이 송과의 관계를 중시해서 거란의 침입을 불러왔다는 해석을 우리는 많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성종 13년 거란 침입으로 송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거절당하자 송과의 관계를 단절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대라 해서 반드시 일률적인 관계만을 맺은 것을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목종 역시 재위 2년에 송에 사신을 파견해 거란의 위협을 호소한 바가 있고요. 각 지역에 성을 쌓아 전쟁을 대비할 정도로 거란은 여전히 위협적이었습니다. 게다가 거란을 배척하라는 것은 훈요십조에도 기술된 태조 왕건의 유훈입니다. 고려가 후삼국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데에는 거란이 멸망시킨 발해의 유민을 포섭한 것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에 그랬던 거지요. 거란 배척을 일면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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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호 교수

       

       

      김인호 교수님은 이러한 점들을 근거로 천추태후가 대국을 지향했다는 주장을 반박합니다. 덧붙여 거대 담론에 무리하게 사실들을 엮어 넣으려는 일각의 시도에 대해 무책임하다고 비판합니다. 그러한 시도들이 일종의 콤플렉스라는 것입니다. 대륙 변방의 반도국이 갖는 콤플렉스, 식민지배 경험을 지닌 약소국이 갖는 콤플렉스 말이죠. 교수님은 그런 콤플렉스의 일종으로 우리나라가 일왕을 그냥 왕이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일본은 물론이고 다른 외국은 모두 천황이라 부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왕을 천황이라 불러도 사대를 하는 것은 아니고, 또 그런 호칭이 일왕의 격을 새삼 높이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불필요하게 명분에 집착한 것이라는 비판과 함께 이제 그런 콤플렉스에서 벗어났으면 한다는 바람이 이어졌습니다.

       

       

      물론 이런 주장에 곧바로 찬반 논란이 이어졌습니다. 한 남성 수강생은 우리가 민족을 강조하는 것, 우리가 국사를 배우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며, 한두 사례로 천추태후의 고구려 계승 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민족주의에 대한 반성에도 불구하고, 현실 정치는 민족과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특히나 우리나라는 주변국의 역사 왜곡에 몸살을 앓고 있는 실정이어서 더욱 반작용이 강하게 일어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주장에 다른 여성 수강생은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19세기 유럽의 제국주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냐며, 굳이 고대사까지 민족주의를 연결짓는 것은 무리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주장을 연상시킵니다.

      이 외에도 여기저기서 찬반 의견과 질문이 쏟아졌지만, 시간이 모자라 수강생들의 표정엔 아쉬움이 역력했습니다. 거대 담론이냐, 아니냐 의견은 분분하지만 그것들이 사실에 발 딛고 있어야 함에는 모두가 공감할 것 같습니다. 주변국의 왜곡에 덩달아 왜곡으로 맞서는 것은 이성에 기반해야 할 학문의 장을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치의 장으로 변질시킵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우리는 언제나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에 대항할 힘은 오직 진실에서만 나옵니다. 이 강의가 있던 주에는 2차 한일역사공동위원회의 활동 결과 발표가 있었습니다. 양국의 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이 거짓임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을사조약의 위법성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지 못하고 각국의 의견을 병기하는 선에서 활동을 접어야 했습니다. 더딘 걸음이지만 조금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단단하고 우직한 진실의 힘으로 말입니다.

       

       

    •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 2강

      2010.3.23 뚜빠뚜빠띠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 제 2강 : 한국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한 선덕여왕

      강연자 : 전덕재 / 경주대 문화재학부 교수

       

      들어가며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라시대를 예로 들자면, 군주에 대한 명칭으로 구분하는 방법이 있겠네요.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왕’ 이런 식으로 말이죠. 고려시대의 학자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역사를, 성골들이 왕위를 이어간 ‘상대’, 태종무열왕(김춘추)부터 혜공왕에 이르는 ‘중대’, 그리고 나머지 기간인 ‘하대’로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역시 고려시대의 승려인 일연은 상고(혁거세왕~지증왕), 중고(법흥왕~진덕여왕), 하고(무열왕~경순왕)로 신라 시대를 나눕니다. 승려인 일연의 입장에서는 불교식 왕명을 택한 법흥왕에서 진덕여왕까지의 시기를 신라의 전성기라 보았던 거죠.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두 번째 강의는 선덕여왕을 중심으로 일연이 말한 불교식 왕명 시대, 즉 ‘중고’ 시기를 살펴 보았습니다. 강의를 맡으신 분은 경주대 문화재학부의 전덕재 교수님. 멀리서 오셨음에도 지친 기색없이 열정적인 강의로, 수강생들의 혼과 진을 완전히 빼놓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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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덕재 교수

       

      불교식 왕명 시대를 연 법흥왕

      불교식 왕명 시대는 왕이 불교를 통치 수단으로 이용한 시기입니다. 불교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한 초기 단계에 나타난 것이죠. 통일신라 시대 들어 불교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 불교식 왕명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고시대의 첫 왕인 태종무열왕처럼 말이죠. 불교식 왕명 시대를 연 첫 인물은 법흥왕(法興)입니다. 이름부터 불법(佛法)을 일으킨 왕이라는 뜻이죠. 527년 불교를 공인한 데서 비롯된 왕명으로 추정됩니다.

       

      전륜성왕을 꿈꿨던 진흥왕

      법흥왕의 뒤를 이은 이는 진흥왕입니다. 영토를 크게 넓혀 한강 유역을 차지한 것으로 유명한 왕이죠. 그의 본래 이름은 삼맥종(彡麥宗) 혹은 심맥부(深麥夫)인데요, 이는 사미(승려)를 뜻한다고 합니다. 발음부터 비슷하죠. 진흥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요, 각각의 이름을 동륜(銅輪)과 사륜(舍輪, 훗날의 진지왕)으로 지었습니다. 사륜은 ‘쇠륜’이란 뜻으로, 달리 말하면 철륜(鐵輪)입니다. 동륜과 철륜이 있으니, 금륜(金輪)과 은륜(銀輪)도 있겠죠? 이 금․은․동․철륜은 불법(佛法)으로 통치하는 속세의 이상적인 왕을 칭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의 명칭이라 하네요. 아들들을 동․철륜이라 한 것으로 보아, 스스로 금륜왕으로 자처하여 불법(佛法)으로 세상을 다스리려는 진흥왕의 의중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귀족들에 의해 폐위된 진지왕

      진흥왕의 뒤를 이은 것은 진지왕이지만, <삼국유사>에 따르면 ‘나라를 다스린 지 4년만에 정치가 문란하여 어지러워졌고 음란함에 빠져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고 전합니다. 귀족들이 화백회의를 열어 물러나게 한 것이지요. 이 때문에 진지왕의 아들인 김용춘(김용수)은 왕위에 오르지 못합니다. 하지만 김용춘의 아들은 훗날 왕위에 오르는데요, 그가 바로 삼국을 통일한 태종무열왕 김춘추입니다.

       

      자신의 핏줄을 신성화한 진평왕

      그리고 폐위된 진지왕의 뒤를 잇는 것은 그의 조카인 진평왕입니다. 스스로를 석가(‘석가모니’란 뜻이 아닙니다. 크샤트리아 계급의 한 종족을 의미합니다. 석가모니도 크샤트리아 계급이었지요.) 이름을 따 백정(白靜)이라 하고, 왕비 이름도 석가 어머니 이름을 딴 마야부인이라 할 정도로 불교에 심취한 사람입니다. 동생 이름도 석가모니의 삼촌 이름을 따랐지요. 집안 사람들 이름을 이렇게 바꾼 것은, 신라 왕실이 석가모니 왕실을 그대로 모방하여 스스로의 골품을 성화(聖化)시킨 것을 의미합니다. 진평왕대에 들어서 자기 핏줄이 더 신성한 골족, 즉 성골이라는 의식이 생긴 것이죠. 둘다 진흥왕의 자손임에도 진평왕의 딸인 선덕여왕은 성골이고 김용춘의 아들인 김춘추는 진골이잖아요. 즉 진지왕대까지는 없었던 성골․진골 구분이 진평왕대에 들어서 생긴 것입니다. 진평왕은 즉위했을 때(579년) 10세 전후의 어린 나이였습니다. 아무래도 그를 왕위에 앉힌 나이 많은 귀족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컸겠죠. 상대등에 올랐던 노리부(弩里夫)나 수을부(首乙夫)같은 진골 귀족들 말이죠. 자연히 왕권은 제한되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진평왕은 집권 후반에, 진지왕의 폐위에 앞장섰던 진골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애씁니다. 앞서 언급한 김용춘

      (진지왕의 아들이자 김춘추의 아버지) 을 요직에 적극 등용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고 이는 김춘추나 김유신 같은 신귀족세력이 등장하는 배경이 됩니다. 김춘추는 물론이고 김유신 역시 전통적인 진골귀족으로부터 괄시받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 어머니인 만명과 결혼할 때 수을부가 강력히 반대했거든요. 수을부는 만명의 아버지로서, 금관가야계 왕족의 후예인 김서현이 탐탁치 않았던 것이겠죠. 아무튼 이 신귀족세력은 629년 고구려 낭비성을 함락시키는 등, 진평왕의 후원을 받아 가문간에 서로 연대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킵니다.

       

      한반도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

      579년부터 632년까지 손에 꼽을 정도로 오랜 기간 제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진평왕에게는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었습니다. 석가와 마야부인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면 석가모니가 될 수 있었을텐데요. 기껏 자기 핏줄을 성골이라 해놨더니 정작 핏줄을 이을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진평왕에게는 덕만공주, 천명공주, 선화공주라는 세 딸이 있었습니다. 천명공주는 김춘추의 어머니이고, 선화공주는 서동요의 주인공이죠. 세 공주의 생몰년도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삼국사기>는 덕만이 맏이라 기술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성골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의식 같은 것이 있었나 봅니다. 진평왕이 후원한 김용춘․김서현의 강력한 지지로 덕만공주가 여자임에도 왕위를 계승하게 되니까요. 이 과정에서 631년 칠숙과 석품 등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은 그렇게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선덕’이란 왕호 역시 불경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진흥왕이 꿈꿨던 전륜성왕의식을 계승하여 왕호를 지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으로 분한 이요원은 젊고 아름다웠습니다만, 실제 선덕여왕은 마흔이 다 되어서야 즉위했습니다.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한다면 적은 나이가 아니지요. 진평왕이 너무 오래 제위했기 때문입니다. 진평왕대에 이어서 선덕여왕의 통치기에도 구귀족과 신귀족 사이의 갈등은 여전했습니다. 상대등에도 오른 바 있는 알천이나 비담 같은 인물이 구귀족의 대표적인 존재로 추정된다고 하네요. 하지만 당시 여제동맹의 대외적 압박 속에서, 김춘추와 김유신 같은 신귀족세력이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신라가 백제에게 대야성(합천)을 빼앗긴 후, 김춘추는 고구려․일본 등 사방으로 도움의 손길을 구하다가, 결국 648년 당나라로 가서 나당동맹을 체결하는 데 성공합니다. 김유신 역시 대야성 전투 이후 신라군 총사령관이 되어 백제와의 전쟁을 수행하죠. 결국 둘은 삼국 통일의 주역이 됩니다. 이러한 신귀족의 성장에 비담 등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647년) 결국 김유신에게 진압당합니다. 이후 신귀족은 승만공주(진덕여왕)를 왕위에 앉히고 실질적으로 정국운영을 주도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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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덕재 교수

       

      최초의 여자인 왕. 선덕은 남성 사회의 뿌리 깊은 편견 속에서 나라를 운영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앞서 언급한 비담이 반란을 일으킨 명분은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였습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당황제가 신라의 사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네요. “그대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고 있으므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게 되고, 임금의 도리를 잃어 도둑을 불러들이게 되어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 이런 부정적 시각들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선덕은 자신이 지혜를 발휘한 세가지 일, 즉 지기삼사(知幾三事)와 같은 설화를 지어 퍼뜨렸습니다. 여자라는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 큰 능력을 보여야 했으니까요. 선덕은 유언으로 도리천(忉利天)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는데요, 도리천은 불교에서 우주를 구성하는 33천(天) 가운데 하나이며 동시에 그 세계 자체를 의미한다 합니다. 그리고 선덕의 그 유언은 도리천에 환생한 후 다시 이 세상에 남자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소망을 얘기한 거라고 해석된다 합니다. 누구보다 남성이기를 갈망한 선덕의 간절한 소망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후대에 들어서도 오랫동안 선덕은 ‘여자’라는 꼬리표를 떼어버리지 못했습니다. 가령 통일신라의 헌안왕은 “우리나라의 옛일에 비록 선덕과 진덕 두 여자 임금이 있었으나,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비슷하므로 본받을 일이 못된다.” 하였구요, 김부식은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거늘 어찌 늙은 할멈이 안방에서 나와 나라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고 했습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두말할 나위 없겠죠. 그들은 심지어 선덕을 여왕이 아니라 ‘여주(女主)’라고 낮춰 부를 정도 였습니다.

       

      선덕이 집권한 기간은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이 북쪽과 서쪽에서 압박해와 대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16년 치세 기간 전쟁으로 시달리느라 정치 개혁에 힘을 쏟을 여력은 없었겠지요. 오늘날 선덕은 김춘추와 김유신을 적극 후원하고 등용해서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여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김유신의 누이와 김춘추의 결혼을 주선한 것도 선덕여왕이었죠. 유명한  오줌싸는 꿈 일화입니다.  김유신과 김춘추 간 연대에 선덕이 모종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수강생 중 한 분은 김춘추와 김유신 역할만 강조돼 정작 선덕은 조력자 역할로 낮춰졌다며 새로운 평가 방법이 없을까 하는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될 성 부른 떡잎이었던 김춘추와 김유신의 재능을 간파하고 중용한 선덕의 용인술이야 말로, 허무맹랑한 지기삼사(知幾三事)를 지어낼 필요가 없을 만큼 멋진 지기일사(知幾一事)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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