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읽기는 미술 감상의 첫 걸음이다. 무엇을 재현하고 있느냐를 알고 들어가면 빵점은 면할 수 있다. 주제라고 해서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옷을 벗고 목욕하는 여자 그림이 있다고 치자. 그림을 보는 순간, 비너스의 목욕이나 수산나의 목욕을 떠올린다면 당신은 이미 레전드 급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윗 왕의 편지를 받아든 밧세바의 목욕 또는 디아니 여신으로 변신한 제우스의 유혹에 넘어간 칼리스토의 목욕을 구분한다면 당신은 서양미술사학계의 폭풍간지로 등극할 자격이 충분하다.

그렇다. 불가능은 없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걸려 있는 인상파 화가 에드가 드가의 <목욕통> 안에 혼자 옷 벗고 쭈그리고 앉은 여자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미술의 역사에 출현한 모든 목욕 장면을 한 코에 꿸 수 있는 능력은 곧 당신의 것이 된다.

이 강좌에서는 서양미술의 8할 이상을 차지하는 미술 주제를 다룬다. 그리고 주제를 다루는 예술가들의 기상천외한 방식들, 그리고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재현과 도상 전통에 대한 역습도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