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정보
* 참여사회연구소와의 공동기획 강좌로 회원할인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일시적인 위기라고도 합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참고 견디면, 좋았던 시절이 돌아올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시장 자유주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내어놓으면서도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계속될 수 있을까요?
이 위기가 지나면, 또 다시 위기가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요?
질문의 답을 찾아 폴라니의 세계로 떠납니다.
반복되는 위기의 본질이 궁금하시다면, 새로운 상상력과 만나고 싶다면 함께 해 주세요.
강사 _ 홍기빈 (<거대한 전환> 역자,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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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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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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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시장 |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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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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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라는 유토피아의 탄생 |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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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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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적 운동 |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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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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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전환과 인간의 자유 |
* 교재 <거대한 전환> 홍기빈 역, 도서출판 길 펴냄 *6월말 발행예정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홍기빈 역, 책세상 펴냄
후기 2
[홍기빈과 함께 읽는 칼 폴라니 1] 인간과 시장
* 아래 기사는 7월 9일부터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시작된 홍기빈 선생님의 폴라니 강좌에 대한 프레시안의 정리기사입니다.
"폴라니는 마르크스나 케인스 아류가 아니다"
지난해 9월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으로 본격화된 영미식 금융자본주의의 몰락이 한국에 가져다준 충격은 매우 컸다. 당장 환율이 급등하고 주가가 폭락하는 등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매우 컸지만, 못지 않게 지적, 심리적 충격도 컸다. '승승장구하던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로의 편입 만이 한국의 유일한 살 길'이라는 우파의 주장에 좌파 역시 거의 자포자기 상태로 대거리를 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미국식 금융자본주의의 표상인 투자은행들이 줄줄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이런 배경 때문에 지난해 한국 지식사회에서는 헝가리 출신의 경제인류학자인 칼 폴라니(1886~1964)가 주목받게 됐다. 1990년대 폴라니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던 홍기빈 박사(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는 "솔직히 대학원 논문을 쓸 때만 해도 한국에서 폴라니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홍 박사는 최근 폴라니의 대표작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길 펴냄)을 번역했다.
어쨌든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라고 평가되는 현 위기에서 마르크스도 아닌, 케인스도 아닌, 폴라니가 신자유주의와 다른 경제질서를 모색하는 이들에게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홍기빈 박사는 최근 폴라니 열풍에 대해 "폴라니가 하지 않은 얘기를 씌워서 비판하거나 환상을 갖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지적했다.
이런 문제의식에 기반해 홍 박사는 지난 9일부터 4회에 걸쳐 참여사회연구소 주최로 '위기의 시대에 읽는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강연을 갖는다. 홍 박사의 강연을 요약, 발췌해 게재한다. <편집자>
▲ <거대한 전환>(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길 펴냄). ⓒ프레시안 |
▲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프레시안 |
ⓒ프레시안 |
피터 드러커가 만난 칼 폴라니
며칠 후면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함께 공부하는 강좌가 느티나무에서 열립니다.
아래의 글은 참여연대가 펴내는 월간 회원소식지 <참여사회> 4월호 '최성각의 독서잡설' 코너에 실린 글로 미국 경영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피터 드러커가 만난 칼 폴라니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칼 폴라니는 그에 대한 제대로된 전기를 가지고 있지 않아 그의 생애를 온전히 알기는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하지만 아래와 같이 몇몇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폴라니의 인간적인 면모만으로도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폴라니 강좌를 수강하시는 분들 뿐만 아니라 느티나무 그늘 아래를 찾아주시는 모든 분들과 함께 나누었으면 하는 마음에 이 글을 올립니다.
실현 불가능한 대의(大義) 에 헌신했던위대한 괴짜들
최성각 작가, 풀꽃평화연구소장
드러커의『방관자의 시대』(이길진 옮김, 갑인출판사 1979년)를 처음 만난 때는 1980년 가을께였다. 갑인출판사판 초판이 나온 해는 1979년이었는데, 내가 구한 책에는 ‘재조정가 1,500원’이라는 글자가 고무인으로 찍혀 있었다. 이 나라 80년대에 ‘방관자’라는 말은 어떤 종류의 사람에게는 금기어 중의 하나였다. 책의 속표지 하단에는 ‘80년 가을, 황지에서’라고 적혀 있었다. 석탄합리화정책이 시행되기 전의 황지는 이 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광산촌이었다. 버스정류장 근처에 있던 책방 앞에는 늘 탄가루가 휘날리곤 했고, 책방 앞 레코드가게에서는 송창식의 노래가 자주 흐르곤 했다. “보이는 게 모두 돌아앉았으니 고래 잡으러 동해 바다로 가자”는.
제목 때문에 읽기 시작한 책
피터 드러커는 ‘미국 경영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살아 생전에 책을 많이 펴낸 정력가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경영 바이블’로 그의 책들이 여러 종 출간되어 있다. 그러나 80년 즈음 내게 드러커는 처음 들어본 사람이었다. 방관자는 곧 ‘비겁자’와 동의어로 느껴지던 나이였는데, 그것은 먼 곳 남녘에서 학살이 일러났는데도 나는 멀쩡하다는 데 대한 자괴감 때문에 더 가중되었는지도 모른다.
책은 “방관자에게는 자기 역사가 없다”라고 시작한다. 이어서 “방관자는 무대 위에 있기는 하나 배우는 아니다. 방관자는 청중도 아니다”라는 선언과 함께 드러커는 이 책이 “자서전도 아니요, 역사도 아니요, 단지 나의 반생半生을 충실히 담고 있되, 내가 만났던 사람과 사건들 중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사건)들만 다룬, 그래서 내 체험이나 생활이나 일은 단지 반주에 불과하다”는 말을 덧붙인다.
왠지 기분 나쁜 책 제목 때문에 제대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수년 뒤, 광산을 떠나고 나서였을 것이다. 드러커가 다룬 인물들은 가히 충격적인 인물들이었다. 드러커의 기억력은 풍성하면서도 정확했고, 반주자로서의 드러커의 관점 역시 일관되게 흐른다. 책에 담긴 인물들은 하나같이 그 재능이나 성취에서 특출하게 빼어난 인물들인지라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감탄과 감동을 자아냈고, 읽는 이의 왜소함과 무력감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좋은 책이라면 마땅히 독자의 이마를 쪼개고, 심장을 도려내고, 무방비 상태의 몸과 영혼을 위축시키거나 달뜨게 만들 것인데, 이 책이 바로 그랬다.
폴라니 가문 사람들과의 운명적인 만남
1920년대 오스트리아 빈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인물들은 한국의 기업가나 천민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나팔수들이 감당하기에는 도덕적으로 너무나 뛰어난 이상주의자들이었다. 합스부르크 가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하고, 공화제가 선포되면서 사회주의자들이 나타나고, 이어서 히틀러가 등장한다.
드러커는 격동의 현대사에서 ‘19세기적 이상’을 버리지 못했던 위대한 괴짜들을 회상한다. 19세기적 이상이란 곧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대의大義였다. 19세기적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 즉 ‘자유로우면서도 부르주아적이거나 리버럴하지 않은 사회, 번영은 하지만 경제에 지배되지 않는 사회, 공동체적이긴 하지만 마르크스적 집단주의와는 인연이 없는 사회’에 대한 꿈으로 채워진 대의였다. 이후에 전개된 현대사가 그런 꿈이 펼쳐질 자리를 깔아뭉갰다는 의미에서 그 꿈은 19세기적 이상주의자들만 꿀 수 있었던 꿈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이었을까. 드러커가 1927년에 만난 폴라니 가문의 사람들만 예로 들어보자.
드러커가 쓴 파나마 운하에 관한 논문이 독일 경제지에 실리자 〈오스트리아 에코노미스트〉에서는 젊은 드러커를 기특하게 생각해 편집회의에 초대한다. 당시 이 잡지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경제전문지였다. 마침 크리스마스였다. 어려서부터 부친의 서재에서 보던 매체의 편집회의에 초대된 영광을 드러커는 온 생애를 통해 가장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로 생각한다. 그곳에서 그는 편집장, 칼 폴라니를 만난다. 폴라니의 박식과 카리스마에 반한 드러커는 편집회의 이후 폴라니 집에 가서 아까 나누던 ‘히틀러가 곧 독일을 지배할 것’이라는 테마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청한다. 기꺼이 청을 수락한 폴라니를 따라 드러커는 그의 집으로 간다. 잡지사에서 나올 때 마침 폴라니의 월급이 나왔다. 공교롭게도 드러커가 그 수표를 받는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당시 편집장 폴라니가 받고 있던 월급은 엄청난 금액이었다.
전차로 일단 종점까지 가서 다른 노선으로 갈아타고 공장지대를 거쳐 다시 종점까지, 그 후 20분 이상 걸어서 폐차장과 쓰레기 처리장을 지나, 삐걱이는 판자 계단을 걸어올라 그의 낡은 아파트 5층에 이르렀을 때, 가족들은 크리스마스 디너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내와 8살 난 어린 딸, 그리고 헝가리 남작의 딸이었던 늙은 장모가 그들이었다. 그때 드러커는 태어나서 가장 최악의 식사를 했다. 아무렇게나 껍질을 벗긴 감자 한두 알이 성탄절 식사의 전부였다. 그들은 식사에도 손님에도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그들의 대화는 다음 달 생활비 이야기뿐이었다. 그들이 신경 쓰는 생활비는 조금 전 폴라니가 회사에서 받은 월급의 1만분의 1도 안 되는 액수였다. 그것은 함부르크의 수습서기로 재직하던 드러커가 아무리 절약해도 살아갈 수 없는 금액이기도 했다. 참을 수 없는 심정이 된 드러커가 마침내 물었다.
“끼어들어 미안합니다만, 실은 조금 전에 폴라니 박사의 수표를 보았습니다. 그 정도라면 더할 나위 없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순간 네 가족은 침묵했다. 드러커는 무한한 침묵처럼 느꼈다. 이어 네 사람이 드러커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거의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월급으로 받은 수표를 자기를 위해 쓰다니! 처음 듣는 얘기에요.” 의외의 대답에 얼굴이 붉어진 드러커가 “하지만…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라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폴라니의 아내 이로나가 엄숙한 말투로 말했다. “우리 일가는 도리를 존중하고 있어요. 빈은 지금 헝가리에서 온 피난민으로 가득합니다. 공산주의와 그 후의 백색 테러로부터의 피난민이지요. 생활비조차 제대로 벌지 못하는 사람이 숱합니다. 하지만 칼이 버는 능력은 종잇장 같지요. 칼이 월급으로 받는 수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우리 가족이 필요로 하는 것을 별도로 치는 것은 도리를 존중하는 인간으로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청년 드러커는 그날 저녁, 칼 폴라니의 집에서 크나큰 충격을 받는다. 피터 드러커가 구순이 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인간을 물신의 도구로 여기지 않는 그 특유의 도덕경영을 강조하게 된 배경에는 폴라니 가문과의 운명적인 만남 같은 것이 작용했던 것이다.
대의를 위한 이상주의자로 자식을 키웠던 폴라니가의 부모
이 책에는 프로이트, 토마스 만, 키신저와 같은 역사적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러나 드러커는 폴라니 일가를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가장 재능이 풍부한 사람들이고 가장 큰 업적을 올린 사람들이지만 그처럼 큰 실패를 겪은 사람들도 없다고 회고한다.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부친으로부터 비롯해 1960년대까지 폴라니 가문이 걸어간 길은 가히 경이적이었다. 폴라니의 부친은 헝가리 철도왕이었다. 스무 살 연하의 아내 세실리아는 러시아 백작의 딸로서 아나키스트였다. 그녀는 10대 중반에 화학실험실에서 폭탄을 만들어 경찰 간부를 살해한 무정부주의 테러단의 핵심 멤버였다.
10대 후반에 이미 전설이 된 세실리아는 다섯 아이를 낳았는데, 그들 부부는 자식들을 고성古城에 집어넣어 세속의 위선과 부패에서 완전 격리시킨 뒤 형제들끼리도 서로 만나지 못하게 유폐시킨 뒤, 가정교사에 의해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독특한 인간’으로 육성한다. 후에 장남은 피아트 회사를 만들고 사회주의 성향의 언론사 사장까지 역임하는 사업가가 된다. 뿐만 아니라 무솔로니의 친구 겸 스승으로서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공동체 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계급통합과 같은 새로운 비전으로 무솔로니를 전향시키려 했다. 그러나 친구이자 스승을 배신한 야심가 무솔로니는 파시스트가 되고, 장남은 가족들로부터 파문을 당한다. 둘째는 건축기사로서 현대 브라질 회화, 브라질 건축의 기초를 닦았다. 편집장 칼 폴라니의 여동생 모우지는 25세 이전에 공적 활동을 다 마쳤는데, ‘농촌사회학’이라 불리던 그녀의 헝가리 민족운동은 후일 이스라엘의 키브츠 탄생의 기초가 되었다. 막내인 미하엘은 과학자로서, 1920년에 이미 노벨상 후보에 올라 있었으나 2차 대전 이후에는 타락한 부르주아 자본주의와 개인을 부정하는 마르크스 사회주의를 모두 배격하는 중도를 걷는 철학자가 되었다. 폴라니가의 부모는 추구한 일은 각기 달랐으나 한 가지 목표, 즉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이상주의자들로 자식들을 키웠던 것이다.
실현 불가능한 꿈을 꾸는 이들의 형언하기 힘든 감동과 압박감
그들이 말했던 ‘인간의 도리’나 대의는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위대한 인간들과 그들이 꾸었던 꿈과 실패를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드러커의 시선은 존경에 차 있으나 냉정하기 짝이 없다. 드러커는 어떻게 자신이 방관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가. 그의 나이 14살 때 드러커는 ‘오스트리아 청년단’의 선봉에 서서 깃발을 들고 거리행진을 한다. 근교의 공업도시에서 출발한 노동자들과 합류하기 전까지의 데모행렬이었다. 그때 드러커는 갑자기 웅덩이를 만난다. 드러커는 웅덩이를 밟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군중들에 밀려 웅덩이를 밟게 된다. 그 순간, 드러커는 자신이 스스로 원치 않는 일을 타력에 의해 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타인과 다른 견해를 갖는 것이 자신의 숙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드러커는 폴라니 가문을 통해 배운 ‘인간의 도리’를 평생 동안 잊지 않았으나 공적 인간으로서의 이상이 현실에서 얼마나 실현되기 어려운 일인가를 또한 술회한다. 드러커의 반생에 스며든 인간들은 그 재능과 특출함에서라기보다 그들의 실현 불가능한 꿈 때문에 형언하기 힘든 감동과 압박감으로 읽는 이의 가슴을 조인다.
내가 지닌 갑인출판사 것은 절판되었지만, 지금도 싸게 살 수 있는 범우사판이 있고, 드러커가 자서전이 아니라고 했건만, 『피터 드러커 자서전』(한국경제신문사)이라 이름붙인 책도 출간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이 특별한 책을 젊은 날 광산촌에서 구했던 빛 바랜 갑인판으로 거듭 읽곤 한다. 내 꿈을 되살피고, 내 보잘 것 없는 좌절의 내용을 때로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때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