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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명 | 강좌후기 | 글쓴이 | 날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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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혁명가들 : 조선 공산주의 운동과 인물들 | 잊혀진 혁명가들 : 조선 공산주의 운동과 인물들 2 | lyh1999 | 2016.7.13 | |
7월 6일 진행된 박노자 선생님의 <조선 공산주의 운동과 인물들> 두 번째 강의 시간입니다. 평소 자주 거론되는 주제가 아니다보니 생소하게 여기실 분도 많으리라고 생각되는데요, 두 번째 강의 시간은 첫 번째 시간에 이어 공산주의 운동가들을 추가로 소개하면서 지금 시점에서 이들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탐색하는 방향으로 진행됐습니다. 1. 공산주의의 내용이 이상적이지만 실현 불가능한 일종의 유토피아를 그리는 것으로 종종 인식되지만 박노자 선생님은 조선시대 공산주의 운동가들의 주장에 의외로(?) 현실적인 부분들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지금 시점에서 봐도 시급히 이뤄야 할 유의미한 주장들이 많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노동자 해방, 노조 등 결사의 자유를 주장한 것이 그렇습니다. 지금 한국은 집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노조 활동가에게 징역형을 선고하는 나라이죠. 토지개혁 같은 문제도 그렇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토지개혁을 거론한 것은 조선인 대부분이 농민(소작농)이었고 식량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지금 한국사회를 봤다면 주택문제 해결을 의제로 제시했을 겁니다. 그 외에도 기층대중의 권익이 보장되는 근대, 철저한 밑으로부터의 민주화, 온전히 독립된 민족국가 실현, 민중적 활동의 자유 등이 그렇습니다. 다소 추상적으로 들리는 이야기일수도 있겠습니다만,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 분단체제 및 미국보호령 상황 해소, 경찰탄압 중지, 학생들의 완전한 자유연애, 부동산 부자에 대한 과세 강화 등등의 목표가 이들 구호와 연결돼 있고 아직 한국에서 실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2. 임화의 근대론 당대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문학가로 꼽히는 분이죠? 임화가 활동하던 시대 그가 가졌던 의문은 왜 식민지조선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 하는 점이었다고 합니다. 공산주의 이론에 따르면 탄압받는 '밑'(프롤레타리아)으로부터의 계급운동과 혁명이 자연스럽게 발생해야 하고, 그러자면 당시 식민지조선만큼 '약한 고리'도 없지요. 그러나 현실은 일본이 세계대공황을 파시즘으로 극복하려 하면서 공산주의에 탄압을 가하고 오히려 많은 조선 인사들이 전향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임화의 답은 조선의 근대가 '이식된 근대'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문학이란 '상부구조'가 발전하기 위해선 토대 역할을 하는 '하부구조'가 존재해야 하는데, 조선은 태생적 결함으로 자본주의를 스스로 탄생시킬 수 없었고, 일본을 통해 이를 이식받아야 했습니다. 임화는 신소설이나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도 일본에서 이식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결과 조선의 근대화는 압축적이고 파행적인 양상으로 진행됩니다. 정작 프롤레타리아들은 계급운동이나 혁명에 관심이 없고 일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 운동의 방향을 놓고 파벌다툼을 벌이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죠. 프롤레타리아 문학에서도 실제 계급현실에 기반하기보단 도식적이고 관념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됩니다. 몇몇 아시아 국가들이 '토착적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다고 평가받는 현재 임화의 '이식된 근대론'은 지나치게 서구중심적이라는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후 한국의 지식담론 역사를 보면 그의 비판을 곱씹어볼 지점들이 분명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컨대 과거 한국에서 유행했던 종속이론 같은 경우도 한국의 노동계급이 자연스럽게 생산한 것이 아니라 지식인들이 외부에서 수입해서 한국의 상황에 적용하려 했던 것이죠. 3. 허정숙, 주세죽, 박진홍 등 "붉은 여성"들의 연애론 여성 혐오 문제가 뜨거운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지금 강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대목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성문제에 있어서도 가장 급진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제기를 했던 이들은 여성 공산주의자였다고 합니다. 과거의 정조 개념을 타파하고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남녀평등을 주장함은 물론, 자유연애를 지지하면서도 그 안에 존재하는 한계들도 비판합니다. 이들의 연애론을 들여다보면 이렇습니다. 이들 여성 공산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는 "운동가"였습니다. 이들은 운동하던 남편이 감옥에 들어가자 다른 동지와 연애 관계를 맺거나(허정숙), 부부간에 호칭을 "집사람"으로 통일하는 등(박진홍) 남녀평등을 일상에서 실천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나아가 동지와의 연애 후 허물없이 동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관계가 단수일수도 복수일수도 있다고 보는 태도도 나타납니다. 당시 공산운동이 남녀평등을 지향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성의 역할은 아지트 키퍼 같은 부차적인 수준으로 제한하는 경우가 흔했다는 것, 남성 공산주의자들도 연애보다 계급운동을 우선시하면서 금욕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젠더 문제를 유보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이들의 연애론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굉장히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들 신여성 자체가 조선사회에서 매우 드무었을 뿐더러, 그 때문에 매체 일각에서는 이들의 "붉은 사랑"을 퇴폐적인 가십으로 다루려 하는 시각도 나타납니다. "여성이 이렇게까지 막 나갈줄이야" 식의 선정적인 어조의 기사가 많았던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주장은 현재에도 유효한 것이 많습니다. 허정숙은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기사에서 여성들이 집안에선 아버지/남편, 집밖에선 노동자로서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으며 그래서 여성의 경제적 독립이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한편 현재 한국 경제 역시 여성들에게 집중적으로 비정규직을 떠맡기거나 무급노동(가사노동, 가족의 사업 돕기 등)을 강요함으로써 작동하고 있습니다. 김옥엽이 "청산할 연애론"에서 쓴 자유연애 비판도 눈여겨봐야 합니다. 자유연애가 봉건시대에 비교했을 때 진보적인 것은 사실이나, 자유연애 개념에는 다음과 같은 한계가 있습니다. 첫째 자유연애 자체가 어느 정도 재산을 지닌 유산계급이어야 할 수 있는 것이고, 둘째 아무리 자유연애를 부르짖을지언정 실제 결혼에서는 계급의 논리가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자유연애가 일상화된 지금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3. '전위당 이론'과 유기적 지식인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에 혁신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반면 비판받을 지점이 있는 것도 사실인데요, 당과 대중을 수직적인 관계로 놓는 계몽주의 패러다임에서 끝내 자유롭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파업을 지도자에 의해 "영도"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는 인식, 운동을 통해 "대중을 획득한다"는 표현, 개인숭배까진 아니더라도 레닌 같은 지도자를 피라미드의 상위 위계에 올려놓는 사고방식 등이 그렇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공산운동이 보였던 문제점들이 이후 한국 좌파운동에서도 반복돼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학벌의식이나 운동가들이 노동자 위에 군림하려는 의식, 여러 운동 노선 간의 갈등, 운동 안에서 민주성이 얼마나 확보되었는가 하는 의문 등이 그 예입니다. 이에 대한 비판이 당시 공산당에서도 제기됩니다. '당이 지식인에 의해 영도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1930년대엔 일선 노동자 출신 운동가들이 그람시적 의미의 '유기적 지식인'으로서 공산운동을 주도하게 됩니다. 철도 노동자 출신으로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자리까지 오른 차금봉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5. 박치우의 민족주의 비판 박치우는 박노자 선생님이 지금 시점에서 재발굴할 가치가 높다고 꼽은 공산주의 논객인데요, 1930년대와 해방 이후 신문 칼럼을 통해 자유, 파시즘, 민족주의 등의 개념을 흥미롭게 다뤘다고 합니다. 박치우의 관점에서 근대는 잠재적으로 파시즘을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파악됩니다. 자본주의의 위기 단계에서 자본주의의 문제점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파시즘의 도래를 막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민계급의 자유를 통해 움직이는 자본주의는 이 과정에서 시민들을 조직 안에서 '통제'하려고 드는 자기부정에 빠집니다. 특히 최근 영국의 브렉시트 논란처럼 몇몇 국가들이 다시 국가경제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박치우의 관점에 비춰보면 이들 현상이 신자유주의의 위기가 부른 일종의 '퇴락'일 수 있다는 것이죠. 박치우의 민족주의 비판도 파시즘이 민족주의를 동원한다는 지점에서 나옵니다. 그는 타이나 폴란드 등을 주목하면서, 자기 국가를 '피의 공동체'로 부른다는 점에서 이들 국가를 움직이는 지배이데올로기가 파시즘이라고 봤습니다. 이들 국가처럼 식민지화를 겪지 않은 후진사회는 자연스럽게 파시즘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박치우는 파시즘이나 극우민족주의가 민족을 "피"나 "흙" 등으로 정의하지만 실제 민족은 "의식", 즉 "자각"의 공동체라며 민족성의 긍정적 의미를 살리려면 민족문화부터 발전돼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6. 결론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당대 조선에서 계급/민족/노동/여성/이성 등등의 가장 충만한 해방을 추구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판적 자율성을 확보한 개인상을 추구한 점, (파시즘의 특성인) 신비주의를 배격한 점 등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번 강연을 통해서 살펴본 공산주의 사회세력은 해방 후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소멸했다는 점이 한반도 현대사의 비극이라는 게 박노자 선생님의 지적입니다. 남한에선 반공의 이름으로 탄압받았고, 월북한 이들도 북한에서 자기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덧붙여 이번 강의를 통해 언급된 인물들에 대해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좀더 자세한 자료를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드라마에서 중요하게 언급된 인물도 있고, 박헌영과 주세죽의 연애사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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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 더 재밌다 : 미국대선 따라잡기 | <미국 대선 따라잡기> 3강 후기 | 새로나기 | 2016.7.13 | |
<미국 대선 따라잡기> 3강은 미국 대선의 쟁점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으로서 불평등과 포스트민주주의에 대해 넓은 안목을 가질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현재 미국의 쟁점은 '부의 불평등 심화'인데요, 이러한 불평등은 경제적 영역에서 정치적, 사회적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으나, 제도권 정치의 해결 의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시작에 앞서, 역사비평 2016년 봄호에 실린 김만권 선생님의 <'샌더스'와 '코빈' 신드롬>을 읽어보시거나, 참여연대 팟캐스트 <톡톡! 철학 사이다 - 불평등 특집>을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후 세계를 이끌어갈 경제 시스템으로 케인스의 브래튼 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가 구축됩니다.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IMF(국제통화기금)를 중심으로 국제 질서를 마련한 이 체제는, '자본에 국적을 붙이는 것'을 지향했습니다. 케인스 경제의 기본 철학인 총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민족국가'가 적합하였기 때문이죠. 그러나 1970년대 오일쇼크와 인플레이션 이후, 소위 서방의 경제 선진국은 국내의 총수요가 소비하지 못하는 잉여생산물을 내다팔 곳이 필요해집니다. 즉, '민족국가'라는 경계가 불편해진 것이죠. 이를 배경으로 1980년대 미국과 영국은 신자유주의 전파로 지구화를 주도합니다. 이들은 WTO(세계무역기구), World Bank(세계은행), IMF를 활용해 지구적 무역 및 금융 질서를 장악하게 됩니다. '워싱턴 컨센서스'로 불리는 이 지구적 경제 질서 아래, 국가의 경계는 낮아지고, 이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경제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예외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1997년에 돈을 빌리면서 IMF의 강력한 규제 아래 구조 조정을 실행하며 노동의 유연화로 인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가장들의 자살이 연이어 발생하기도 했죠. 한편, WB의 최대 주주가 미국, ADB의 최대 주주가 일본임을 견제하며 중국이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설립으로 대응, 자국 위주의 경제 질서('베이징 컨센서스') 재편을 꾀하고 있습니다. '워싱턴 컨센서스' 하에 초국가기업은 그 규모 면에서 국가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진 존재로 변모합니다. '월마트'에 210만명, '맥도널드'에 170만명에 고용되어 있거나, 한국의 10대 재벌의 매출 비중이 전체 GDP의 85%를 차지하는 것 등이 그 사례입니다. 따라서 정치가는 기업에 의지하고, 국가는 법인세를 낮춰 기업의 탈국가를 방지하게 됩니다. 토마 피케티는 초국가적기업이 주도하는 경제적 불평등의 원인을 노동이 아니라 자본이 더 많은 이익을 취하고, 더불어 이런 자본이 세습되는 경향을 꼽습니다. 신자유주의 질서 아래 경제적 지구화는 저개발국 뿐 아니라, 발전된 국가의 노동자에게도 피해를 줍니다. 예컨대 제조업이 중국으로, 서비스업이 인도로 아웃소싱되는 것이 그 사례죠. 결국 선진국, 기업가들 위주로 무역의 이익이 돌아가며 이것이 임금으로 분배되지 못하여 계층의 불평등이 심화됩니다. '20:80'의 사회를 넘어, '1:99' 사회로 양극화가 진행된 것입니다. 이 문제는 '무엇을 소비하는가'가 정체성을 결정하는 오늘날, 소비할 수 없는 인간은 쓸모 없는 존재로 전락되고 맙니다. 이러한 불평등은 영국와 미국에서도 극심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래리 바텔스는 피케티의 데이터를 사용해 1980년과 2005년 사이 미국의 세전 실질소득 총증가분의 80% 이상이 최상위 1%에 집중되었음을 지적합니다. 또한 바텔스는 미국의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 간의 인과관계를 발견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지난 6년간 상원의원들은 소득분포 하위 3분의 1에 해당하는 유권자들을 위한 정책에 매우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빈곤지역인 뉴올리언스를 강타했을 때, 정치인들은 복원사업에 사실상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음을 사례로 제시하였습니다. 한편, 지그문트 바우만은 지구화 과정이 대량해고를 통해 잉여노동력을 배출하는 과정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죠. 포스트민주주의 사회는 민주주의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나, 직업구조의 변화나 초국적자본의 영향력 증가 등을 배경으로 정치의 에너지와 활기가 민주주의 이전 시대의 소규모 엘리트와 부유한 집단에게로 돌아가는 특징을 보입니다. 이는 민주주의 정당 모델의 동심원 구조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정당의 강력한 지도자를 핵으로, 정당 소속 국회의원, 정당활동가, 진성당원, 유권자의 순서로 점점 더 커지는 동심원 구조에서, 강력한 지도자와 기업가(혹은 시장 권력)가 타원형의 구조로 바로 연결되며 확실한 결탁구조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과거 시민권의 이루였던 권리들이 민영화되거나 민간 위탁되면서 시민들은 권리를 상실하는 것이지요. 포스트민주주의 하에서는 절차를 밟는 것만으로도 민주주의로 인정되거나, 좋은 서비스가 아니라 좋은 관계가 유의미하게 작용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이러한 지구화가 만들어낸 불평등사회에서, 지구화를 주도한 미국과 영국에 각각 '샌더스 신드롬'과 '제레미 코빈 신드롬'이 일어나면서 제도권에서 불평등을 극복하려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김만권 선생님께서 불평등을 바라보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많은 이야기들을 압축적으로 들려주신 시간이었습니다. 수업의 말미에는 '노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화두로 '기본소득', '기초자본'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벌써 다음 차시가 마지막 강의네요! 전당대회를 앞두고 마지막 시간에 어떤 이야기들로 마무리될지 기대가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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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 더 재밌다 : 미국대선 따라잡기 | <미국 대선 따라잡기> 2강 후기 | lyh1999 | 2016.7.7 | |
6월 30일 김만권 선생님의 미국 대선 따라잡기 두 번째 시간입니다. 1강에 이어 미국 정당체제의 특징을 살펴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엔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외의 제3정당은 분명 존재합니다. 루즈벨트 대통령 같이 무소속으로 당선한 경우도 있고요. 그러나 실제 선거가 양당제 시스템으로 치러지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을 우대하는 제도가 미국엔 없고, 버니 샌더스처럼 당원이 아닌 사람도 각 당에서 입후보할 수 있습니다. 외부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당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개방성을 양 당이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제3정당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입니다. (2) 각 주에서 정해놓은 선거 규칙에 제3정당이 성장하기 어려운 제한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대선 후보 출마를 위해선 일정한 수의 서명 숫자를 채워야 하는데 대규모 조직이 없는 제3정당들은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기 어렵습니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가 확산된 이래 양당의 이념적 색채가 강해졌다는 특징도 들 수 있습니다. 과거 미국 정당은 지나치게 이념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대변하는 공화당과 민주주의를 대변하는 민주당이 서로 경쟁해야 책임정당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공화당은 보수 우익 계열로, 민주당은 중도 계열로 이동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념적 일관성은 생겼지만, 공화당 내 자유주의자와 민주당 내 보수주의자 같은 온건파가 당 내에서 사라졌고, 양당이 서로 대치만 할 뿐 제도적 완성은 낳지 못하는 교착상태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1강부터 시작된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미국 선거제도를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시스템이 매우 복잡한데, 핵심은 현재 미국 선거가 금권정치, 즉 돈이 많을수록 승리하는 문제가 악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은 50만개 이상의 공직을 선출 방식으로 뽑지만 선거 참여율은 다른 국가에 비해 매우 낮습니다. 여기엔 미국 유권자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무지하다는 비판도 나오지만, 제도적으로 선거 참여를 가로막는 측면도 강합니다. 미국에서 선거에 참여하려면 각 주에 유권자 등록을 미리 해야 하는데, 이 절차가 까다롭고, 주에 따라 전과자들에게 유권자 등록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게다가 유권자들이 선거일은 알고 있어도 유권자 등록 마감일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선거에서 불리하다고 여기는 후보들이 유권자 등록 마감에 대해선 홍보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입니다. 뉴욕의 민주당 대선후보 선거에서 실제 분위기는 버니 샌더스에게 더 우호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힐러리 클린턴이 당선된 것도 유권자 등록을 한 달 전에 미리 마감했기 때문에 당일 분위기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측면이 크다고 합니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서 사상 최대의 천문학적인 자금을 썼다고 하죠? 미국에서 공직 선거에 뜻이 있는 사람은 무엇보다 선거자금 모금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TV에 나오는 소위 '의견광고' 같은 미디어 광고에 특히 돈이 많이 든다고 합니다. 필요한 만큼 선거 자금을 모을 수 없어서 미국 대선 후보를 뽑는 선거 투어 도중에 후보를 사퇴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라고 하죠.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일단 미국 정치자금에 대해서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크게 하드 머니(hard money)와 소프트 머니(soft money)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전자는 후보들에게 직접 기부할 수 있지만 단체는 기부가 불가능하고 기부 액수 등에 대한 제한도 엄격합니다. 반면 소프트 머니는 그런 제한이 없지만 개별후보가 아닌 정당 건설 활동을 위해서만 써야 한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그래서 미국 정당들은 우회로를 택하게 되는데, 후보들에 대한 지지 여부 대신 특정 이슈에 대한 찬반 의견 메시지를 실어서 광고에 소프트 머니를 대량으로 쓰는 것이죠. 미국 선거가 낙태, 동성애, 인종문제, 총기 같은 특정 이슈 중심으로 흘러가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후 2002년 미국 의회에선 중요 선거자금 규제법안을 통과시켜 소프트 머니의 편법적인 사용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연방 정부 단위의 선거에서 소프트 머니의 사용을 금지하고, 선거 전 일정 기간 동안 이슈광고 자체를 제한하는 것 등이 이 법의 내용입니다. 하지만 정당들은 여기에서도 우회로를 찾아냅니다. 연방 세법 527조에 의거해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비영리 단체인 소위 '527 단체'들이 등장합니다. 이들 단체들은 면세 혜택을 받는데다가 자신들이 지지하지 않는 후보들에 대한 공격적인 광고를 쏟아부어 논란을 일으킵니다. 이어서 등장한 단체가 최근 많이 언급되고 있는 PAC(정치활동위원회, Political Action Committee)입니다. 연방선거자금법은 미국정부와 계약관계에 있는 노동조합과 기업들이 PAC을 통해 정치자금을 형성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PAC은 특정 후보에게 직접 기부를 할 순 없지만, 대신 특정 후보의 당선이나 낙선을 위해 모금한 돈을 쓸 수 있습니다. 하드머니를 기부할 수 없는 기업, 노조 등 단체들의 우회로가 생긴 것이죠. 미국에 존재하는 PAC이 수천 개에 달한다고 하는데요, 이 중 금권정치의 정점에 있는 것이 거액을 보유한 부자들과 기업들로 구성된 "슈퍼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2010년 미 연방 법원의 판결로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스피치 나우' 시티즌스 유나이티드' 등 시민단체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법원은 특정후보와 결탁되지 않은 한 자금모금이나 이슈 광고 등을 제한할 수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PAC의 무제한적인 모금을 허용하게 된 근거로 '표현의 자유'가 동원된 것입니다. 버락 오바마의 연설 능력이 주요한 장점으로 꼽히고 있는 이유, 버니 샌더스의 선전이 놀라운 이유 역시 이러한 금권정치의 실정에서 비롯됩니다. 모금 능력이 곧 정치인의 능력으로 치환되는 상황에서 오바마의 유연한 스피치만큼 사람들이 기부하도록 설득하는데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죠. 반면 샌더스는 슈퍼팩의 지원을 거절하고 소액기부 위주로 캠페인을 펼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자금 화력을 지닌 클린턴과 대등한 경쟁을 펼쳤으니 놀라운 것으로 평가를 받는 것이죠. 미국 대선은 예비선거 - 전당대회 - 대통령선거 크게 세 단계로 치러집니다. 대부분의 주는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해 예비선거를 거칩니다. 실제 대선이 선거인단의 투표로 치러지기 때문에 예비선거는 실제 유권자들에게 후보 선택의 기회를 준다는 점, 정당의 통제력이 약하고 예상 밖의 후보가 대통령 후보로 등장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한편 주마다 선거규칙이 제각각인데, 정당에 당원으로 등록한 사람에게만 투표를 허용할 것이냐, 정당소속을 표명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투표를 허용할 것이냐 등등의 기준에 따라 Closed Primary, Semi-closed Primary, Open Primary, Semi-open Primary 크게 네 가지 방식으로 나뉩니다. 프라이머리 대신 '코커스(Caucus)' 방식을 택하는 주도 있습니다. 경선을 가장 먼저 치르는 주인 아이오와가 대표적입니다. 코커스는 미국 원주민 언어로 "함께 모여 큰 소리를 냄"이라는 뜻인데, 유권자들이 모여서 긴 토론을 거친 끝에 투표로 지지 후보를 정하는 방식입니다. 예비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자신이 지지할 대통령 후보를 뽑아줄 대의원을 선출하고, 이들 대의원들이 공화당과 민주당 전당대회에 모여 대통령 후보를 지명합니다. 예비선거 과정을 통해 대통령 후보는 실질적으로 이미 확정되기 때문에 후보 지명은 형식적이지만 여기서 부통령 후보를 함께 지명하고, 후보 지명 과정에서 분열된 당을 다시 단합시키기 위해 반대자들을 포용할만한 정당 공약을 발표합니다. 실제 대통령 선거는 유권자들이 대통령 선거인단에게 투표하고, 이들 선거인단이 다시 투표를 치러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이뤄집니다. 선거인단은 상하원 의원과 워싱턴 자치구 의원 3명으로 구성된 538명의 선거인단으로 구성되는데, 각 주는 상원의원 2명에 인구비례에 따라 각기 다른 숫자의 하원의원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마다 선거인단 숫자는 3명에서 55명까지 크게 차이를 보입니다. 대부분의 주들이 승리한 후보에게 선거인단을 몰아주는 승자독식 방식을 택하고 있기 때문에 캘리포니아, 텍사스 등 선거인단을 많이 보유한 주에서 승리하는 게 후보들에게 중요합니다. 반면 이 때문에 엘 고어처럼 유권자들에게서 많은 표를 얻었더라도 선거인단 선거에서 밀려서 낙선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지요. 한국의 대선에 비해 굉장히 복잡한데요, 김만권 선생님은 디테일에 매몰되기보다 현재 미국 정치의 복잡성과 결함이 어디서 왔는지를 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금권정치가 대표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미국의 기업과 부자들은 한 사회의 룰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세팅해줄 편을 끊임없이 탐색해왔고 이를 위해 돈의 힘을 무제한적으로 동원해왔고 이것이 불평등문제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샌더스가 이번 대선에서 이슈화시킨 것 역시 불평등문제였음을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국 역시 이 현상을 따라가는 측면은 없는지 살펴보는 게 미국 대선을 관전하는 우리의 과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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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혁명가들 : 조선 공산주의 운동과 인물들 | <잊혀진 혁명가들 : 조선 공산주의 운동과 인물들> 1강 | 오하라 | 2016.7.3 | |
잊혀진 혁명가들 : 조선 공산주의 운동과 인물들 1강 6월 29일 수요일, 박노자 선생님의 강의가 참여연대 아름드리홀에서 진행됐습니다. 여유를 두고 준비한 자리가 모자를 정도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수강하셔서 시종일관 열기가 느껴졌습니다. 이날 강의를 통해 조선시대 공산주의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오해와 실제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 아래는 박노자 선생님의 강의를 필기한 내용을 정리합니다. 왜 조선 공산주의인가 식민지시대의 공산주의와 조선의 공산주의는 다른데 제대로 된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모스크바에서는 중국과 더불어 조선이야말로 혁명적으로 공산주의가 발현된 나라였다고 평가했으며 조선 공산주의의 운동역량에 상당한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1925년 4월 20일 조선 공산당 창당 이후 당원은 400명 정도였습니다. 당시 인구에 비해 활동하는 공산당원의 수가 적은 편이었습니다. 많은 탄압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지식인들은 친 공산주의자들이 많았고 대부분 사회주의에도 친화적이었습니다. 수는 적었지만 영향력 부분에서는 작지 않았습니다. 이들을 통해 조선의 공산주의는 대중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지도자의 위치에서 있었던 친 공산주의자들 덕분이었습니다. 당대인들의 입장을 이해하기위해 우리는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조선 공산주의에 대한 오해 첫 번째 오해는 공산주의는 망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현재까지 실제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 통치층이 상당부분 계승되기도 했으며 러시아는 소비에트 체제로 가야한다는 것에 50% 이상이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망했다는 표현이 아닌 혁명이 보수주의 체제에 젖어들어 자본주의 체제에 영입되었다고 봐야할 겁니다. 두 번째, 공산주의 자체가 유토피아를 설정하고 시작된 것이라는 오해입니다. 하지만 당시 실제로 구체적 계획이 논의됐었으며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었으며 조선의 독립에 대해서도 얘기할 정도로 대중적이었습니다. 조선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혁명가들을 통해 오해와 실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현실적, 구체적 상황인식 1) 조봉암 화요계로 유학파 출신이었으며 원칙주의자에 계급이념이 투철했습니다. 1925년, 그는 조선혁명해서 공산주의, 민중민주주의를 도입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앞섰다고 평가를 받았고 결국 강령을 수정했습니다. 민족혁명을 통해 독립을 하고 민주혁명을 통해 85%의 농민에게 토지를 재분배 하자는 주장을 했고 이는 당시 다수 조선인들이 생각했던 새로운 세상의 모습이었습니다. 당시의 공산주의가 얼마나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박헌영 박헌영의 “8월 테제”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쟁취해야 한다는 것을 기치로 내걸었습니다. 토지를 민중에게 돌려주고 대규모 자본을 국유화 해 운영해야 하며 친일파를 압박해서 재산을 몰수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민주민족혁명에서 근대적 기초를 쌓아 공산혁명을 이뤄야 해방이후에도 유지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주장은 좌파와 우파에게 동시에 비판을 받았습니다. 좌파에게 두 단계 혁명은 덜 급진적이기 때문입니다. 국가 간 연속된 혁명이 아닌 한 나라에 국한된 혁명이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패착인 지에 대해서는 재평가가 되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재분배 체제이며 핵심부의 노동자들은 국민국가가 먹여 살리는 구조이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최근 브렉시트만 해도 65%의 노동자가 찬성했는데 이는 국민국가 안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고 싶다는 욕구 때문입니다.)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다양한 시선 3) 이재유 이재유는 국내파 혁명가였습니다. 그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민주주의민족혁명 단계에서 사형제 폐지와 반노동악법 폐지, 정치집회의 자유 등과 함께 노동자들의 경영참여를 요구했으며 이를 슬로건집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는 30년대 노동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슬로건에는 학생들의 교과서 선택의 자유와 의무적 종교교육 폐지 등이 있었으며 노동자들의 노조결성의 자유와 노동자 경영참여, 동일노동 동일임금, 1년 단기계약제 폐지 등이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1930년대 주장들은 지금도 실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얼마나 구체적으로 공산주의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는지 확인이 가능합니다. 이재유는 조선의 독립요구와 함께 국제적 연대도 함께 주장했습니다. 소비에트 독립사수와 대만의 독립촉구, 일본노동대중과의 연대 등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국제연대는 공산주의자의 조건일 뿐 양상은 다양했습니다. 4)김찬 김찬의 경우 국제연대에 비관적이었습니다. 그는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민족의식이 뚜렷한 민족적 공산주의자로 분류됐습니다. 이미 1925년 조선 공산당 창당시절부터 일본 공산당과의 협력에 비공식적으로 반대를 했으며 일본 공산당과의 제휴는 일본주의에의 항복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5) 김천해 김찬과는 대비되는 노동자 출신으로 일본에서 노동자로서 이해관계에서 시작됐습니다. 국제연대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일본과 노동 연대투쟁을 했으며 1국 1당의 코민테른의 원칙 또한 받아들였습니다. 조선 공산주의와 코민테른의 관계 6) 조동호 조선공산당 제1대회에서 코민테른에서 공산당 대표자로 선출된 조동호를 통해 조선의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었는데 이는 지원금 신청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조동호는 코민테른에 민족차별, 경찰폭압, 동양척식회사, 농민의 몰락 등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코민테른의 조선 관련 의식은 이와같은 조선 공산주의 혁명가들의 보고서를 종합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코민테른은 조선의 조선인들과 연해주의 고려인들에게 조선의 상황을 전달받았습니다. (당시 공산주의는 현대판 사대주의라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공산주의자는 험한 길이었으며 혁명가들은 애국을 하기 위해 스스로 공산주의를 택했습니다. 그들에겐 조선해방이 가장 큰 목적이었습니다. 단 모스크바와는 후원자와 피후원자의 관계였습니다. 코민테른과 조선의 공산당은 주체적 관계맺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대주의가 아닌 지식과 돈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코민테른은 정세에 맞는 정책을 지시했으나 1930년 초반 이후 코민테른이 스탈린의 외교적 도구로 전락하면서 역기능이 심화됐습니다.)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성취와 한계 식민지 시대 공산주의 운동은 타 아시아의 공산주의 운동과 달리 성공이 어려웠습니다. 1920~30년대 조선이 일본 치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시행착오를 거쳐 합리적인 선택을 했으며, 농민과 노동자 사이에 공산조직을 심고, 민중 공산주의 조직을 심고, 좌파이념의 대중화에 중점을 두고 결실을 맺었습니다. 운동가의 대부분 해방이후 운동에 긴밀하게 연결됐으며 진보당을 이끈 조봉암을 포함해 70년대 급진운동의 동력이 됐습니다. 당시 혁명가는 공산운동 출신이거나 식민지시대 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결국 조선 공산주의 운동은 장기적으로 급진 운동의 씨앗을 뿌렸고 이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국제연대노선은 합리적이었고 국내에서는 대중노선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바람직한 조선의 미래는 지금도 획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근대화 시도는 북조선에서 시도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한은 현재도 시도의 필요가 얘기되고 있을 뿐입니다. 민주민족혁명 또한 지금도 대한민국이 독립된 민족국가라 보기 힘듭니다. 전근대적 세상에 대한 바람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1951년 조선이 독립하고 조선인들이 민주적으로 5년을 신탁통치하고 이후 대통령을 뽑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자연스럽게 좌파적 근대화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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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 더 재밌다 : 미국대선 따라잡기 | <미국 대선 따라잡기> 1강 후기 | 새로나기 | 2016.6.27 | |
김만권 선생님을 모시고 미국 대선 따라잡기를 시작한 첫 날입니다. 미국 대선을 따라잡기에 앞서,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선, 한국을 비롯한 현대 다수의 나라들의 쟁점인 '사회 양극화', '부의 편중화'가 미국에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는데요. 미국 하위 50%가 전체 자산의 3%를 소유한다는 것, 미국의 최고 상위 자산가 14명이 지난 2년간 증식한 자산이 하위 50%의 전재산에 육박한다는 것, 미국 대졸자의 평균 학자금 대출이 3만 6천달러라는 것 등이 관련 통계자료입니다. 다만, 부의 편중화가 사회 구조상 가시화되는 정도가 약할 뿐입니다. 이 과정에서 하류층이, 더 하류층의 복지 혜택을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로 복지 증대를 반대하고 있으며 이러한 논리는 미국 뿐 아니라 영국을 비롯한 다수의 나라에서도 발견되는 바입니다. 다음, 미국 패권주의의 또다른 이름으로,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에 대해 정리해보았습니다. 첫째, 한나 아렌트의 표현에 의하면, '이 나라는 세계 최초로 말로 한 혁명의 결과로 만들어졌다'입니다. 미국은 유례가 드물게 이주민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이며, 당시 사회계약론에 기초한 메이플라워 조약을 근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폭력과 함께 한 프랑스 대혁명에 비해 차별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겠지요. 한나 아렌트는 미국이 이러한 전통을 상실하면서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또한, '말'로 하는 이러한 전통은 철학적 디베이트 과정을 동반하며 미국의 수정헌법으로 이어졌습니다. 제퍼슨은 한 세대가 대략 19년이니, 그 때마다 헌법을 개정할 수 있도록 하였고, 메디슨은 기존의 헌법을 근간으로 전달하되 과거의 문항을 사문화시키는 방식으로 새로운 조항을 추가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 과정이 모두 기록에 남아있다고 합니다. 최근 100년간 수정조항이 부재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겠지요. 둘째, <근대화론>에 따르면 경제발전이 민주주의를 이끕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경제 발전이 자유와 부를 만들었습니다. 토크빌은 '미국은 예술, 문화보다 돈벌이에 관심이 있다'고 지적하였지요.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sect'(종교적 공동체)가 자본주의의 발전에 기여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성실함과 신용의 상징인 sect가 가장 많은 집단이 미국입니다. 오늘날에도 인구의 90%가 기독교도인이며, 충실한 신자가 대다수이지요. 셋째, 대통령제를 발명한 국가입니다. 로마의 전성기에 집정관, 호민관, 원로원이 상호견제하였음에 착안하여 하나의 조직이 강건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갈등을 제도화해야 한다고 보며 대통령, 상원, 하원의 구조를 정착시키게 됩니다. 현재의 중임제는 헌법 제정 초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규정으로, 초기 2인의 대통령으로 인해 암묵적인 규정이 되었다가, 루즈벨트 대통령의 4선 이후 수정조항 22조를 추가하면서 제도로서 자리잡았습니다. 셋째, 미국은 최초의 정당 정치 국가입니다. 유럽의 정당이 계급과 이익에 따른 사적 집단으로 대중 당원을 지니고 있으며 강력한 지도자에 의해 통제되는 경향이 있지만, 미국의 정당은 중대 사안에 따라 사람들을 흡수하며 정부 장악이 아닌 선거에서의 승리를 목표로 정당을 재편해가는 느슨한 선거 연합체의 성격을 갖습니다. 정당에 대한 연방정부 차원의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주 차원에서 통제 권리를 지녀 중앙에서 통제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빌 클린턴처럼 만들어진 정치인이 대통령 후보가 되기도 하지만, 버락 오바마나 도널드 트럼프 같은 인물이 뜰 수 있는 것이지요. 또한, 전세계에서 가장 순수한 의미의 양당제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합니다. 실제 100여개 내외의 정당이 존재하지만, 민주당과 공화당 만이 대통령을 배출해 온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이후, 미국의 정당에 대해 본격적으로 살펴보았는데요. 미국 양당제는 재무장관 해밀턴(강한 중앙정부와 중상주의)과 국무장관 제퍼슨(약한 중앙정부와 중농주의)의 갈등에서 시작됩니다. 해밀턴은 엘리트와 재력가의 지지를 등에 업고 연방당을, 제퍼슨쪽에 가담한 메디슨이 남부와 뉴욕에서 반해밀턴주의자들의 규합에 성공하면서 민주공화당을 창당합니다. 대통령직을 누가 차지할 것이냐를 사안으로 두고, 이후 전국적 정당배열(arrangement)를 만들어냈으며 '버지니아 왕조'. '잭슨 민주주의', '남북 전쟁', '대중연합적 불만, 진보주의 개혁 및 공화당 다수', '뉴딜 민주당 연합'의 5개 체제를 거쳐갑니다. 이 과정에서 민주공화당 내에서 잭슨을 지지하는 이들이 모여 민주당을 창당하였고, 잭슨을 반대하는 이들이 해밀턴 사망 후 힘을 잃은 연방당을 흡수하며 휘그당을 창당합니다. 이후, 노예제가 휘그당을 분열시켜 반노예정당으로 공화당이 만들어졌고, 북부기업 소유주와 노동자들의 이익을 보호하며 산업 및 금융자본의 이익과 자신들을 동일시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공화당은 북부와 동부 노동자들에게 경제공황 이전까지 막대한 지지를 얻게 되지요. 농업이익에 기반해 통제력을 행사한 민주당은, 남부와 북부에서 혜택을 받지 못하는 약자들과 국외자들을 새로운 새력기반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다음으로 '조직으로서의 정당'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앞서 보았듯, 정당에 대한 규제는 전적으로 주정부에 맡겨져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미국 정당 정치를 지배한 개념이 머신 정치로, 유권자의 열정적 정치 지지에 대한 대가로 정당이 물적 지원 및 유용한 개입을 제공하였음을 의미합니다. 머신은 보스의 지시에 따라 표와 돈이 동원되고, 이런 동원에 대해 대가를 분배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였습니다.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뉴욕의 '태마니 홀' 등 주요 대도시의 선거와 정치가 머신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머신에 대한 견제로서 예비선거제도를 도입하게 됩니다. 이상 다소 거칠게 첫번재 강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그 복잡한 미국의 선거제도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 지도를 필참하고 올 것을 당부하셨어요.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이 미국의 대선에 미칠 영향이 더욱 궁금해지는 요즘입니다. 아래는 링컨의 공화당부터 미국 정당의 역사를 간결하게 정리하면서 트럼프의 이념적 위치를 살펴보는 참고기사입니다. 미국 정당의 역사를 짧게나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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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 : 한국 민주주의의 교묘한 장식품이자 의도된 건망증 | [월례특강]성평등, 한국 민주주의의 교묘한 장식품이자 의도된 건망증(한채윤) | 박윤채영 | 2016.6.17 | |
아카데미느티나무 6월 월례특강 후기 (윤채영) 요즘 한국은 ‘여성 혐오 범죄’와 ‘성폭력’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사람들은 ‘갑자기 늘어났다.’고 말하지만 한 여성학자는 칼럼에서 ‘원래 있어왔는데 이제야 보이게 된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협박도 여성을 향한 폭력과 협박도 늘 있어왔지만 요즘 달라진 것은 협박에서 끝나지 않는 다는 겁니다. 국경을 초월한 젠더문제와 성평등 이슈. 어디서부터 알아가야 할까요?
6월 13일 월요일 저녁, 한 채윤(비온뒤무지개재단 상임이사)님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성평등, 한국 민주주의의 교묘한 장식품이자 의도된 건망증”이라는 긴 제목을 가진 강의였습니다. 성평등이 교묘한 장식품이자 의도된 건망증이라, 그 뜻이 잘 짐작되지 않았습니다만 왠지 느낌적으로 ‘맞는 것 같아.’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강의는 ‘성평등’이라는 말에 대한 사회 인식의 변화부터 짚었습니다. 예전에는 공무원들이 ‘양성평등’이 ‘여성이 남성을 맞먹으려 하는 느낌’이라며 그 대신 ‘성평등’이라고 써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성평등’은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와 맞먹으려는 느낌’이라며 대신 ‘양성평등’이라고 써줄 것을 요청한다고 합니다. 오락가락 하는 것 같이 보이는 두 반응에서 공통적인 것은 배제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맞먹으려 든다, 는 사고 자체에 이미 평등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 실려 있는데 말이죠. 성평등 이슈는 오랫동안 있어 왔지만 아직 한 번도 한국 사회는 평등에 진짜 다가서 본 적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성평등이라는 주제는 남성과 여성을 나눈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성이 남성의 권리를 빼앗으려 한다.’라던지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 권리를 넘본다.’식의 밥그릇싸움, 권리싸움으로 비춰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뤄지는 문제들을 한 번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의에선 ‘군 가산점 제도’가 그 예였는데요, 이 문제에 대해 ‘여성들이 반대해서 못한다.’는 주장(변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만..)들이 있습니다. 꼼꼼히 따져볼까요?
첫째, 군 가산점 제도 혜택은 모든 남성에게 동등하게 돌아가는가? 가산점제도는 ‘군대를 제대해서 9급 7급 공무원을 지원하는 남성’만 받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군 면제자, 군 ‘특별’ 면제자, 그리고 공무원을 안 할 남성들에겐 그 혜택이 가지 않죠. 애초에 남성들에게도 동등하게 돌아가지 않는 겁니다. 둘째, 군 복무는 경력으로 인정이 되기 때문에 남성이 입사를 하면 같이 입사한 여성들보다 기본 호봉이 높습니다. 같은 나이의 여성들이 대리되어 있을 때 남성들은 신입이어 불평등하다? 여성이 대리 이상 올라가는 경우가 한국에서 몇이나 있는지, 유리천장의 현실을 간과한 주장이죠.
모든 남성에게 돌아가지도 않는 군가산점제도를 남녀의 밥그릇 다툼으로 모는 것처럼 사건을 젠더문제로 다루면서 근본적인 문제와 질문을 은폐시키려는 시도들이 많습니다. 최근 한 섬에서 벌어졌던 마을 사람들의 교사 성폭행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섬에 파견 된 여 교사들을 남교사로 대체한다, 는 대책도 같은 경우입니다. 또는 젠더문제를 젠더문제가 아닌 것으로 다루려는 시도들도 있습니다.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을 두고 경찰이 ‘이 사회에 아직 혐오 범죄는 없다.’고 강조하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고 화낼 대상을 바로 알기 위해선 그가 자꾸 앞에 내세우는 젠더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합니다. 도대체 ‘젠더’가 뭐기에 툭하면 그 뒤로 숨는 걸까요.
먼저 질문을 하나 할게요.
졸라맨이 있습니다.
졸라맨을 여자로 보이게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는 어떻게 말할까요? 어떤 포즈로 앉아 있을까요?
혹시 치마를 떠올리셨나요? 꽃이나 리본을 달아 주셨나요? 얇고 고운 목소리로 말을 하던가요?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졸라맨을 남자로 보이게 하기 위해선 무얼 하시겠어요?
여자, 남자라는 성별 구분에서 옷과 목소리, 태도, 말투 심지어 직업까지 연상하게 되는 것. 여성으로 만들 때와 달리 남성으로 만들려 하니 별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것. 조금은 거친 설명이지만, 그게 ‘젠더’입니다. 조금 무섭게 말하자면 여자, 남자라는 생물학적 차이에다가 ‘걸맞는’ 옷과 목소리, 태도, 역할, 사랑하는 사람의 성별까지 규정하려는 힘입니다. 이것은 제도에서도 찾을 수 있고 문화에도 녹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자와 남자는 ‘성기와 염색체’의 차이에 의해 나뉜다는 간단한 사실은 잊어버리고 겉모습과 말투, 태도 등을 통해 그 사람의 성별을 구별해내려 하죠.
사실 우린 모두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성기만으로 성별을 구분할 수 있었죠. 그러나 커가면서 겉모습으로 성별을 표시 할 것을 요구받게 됩니다. 젠더를 학습하게 되는 거지요. 이 젠더는 개별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의학/과학, 정치/통치, 예술, 종교와 함께 발달해 왔습니다. 사례를 하나씩 들어보겠습니다.
1. 의학/과학 : 호르몬과 젠더
검지와 약지가 성별과 성 정체성을 알려준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약지가 검지보다 길면 남자, 짧으면 여자, 두 길이가 비슷하면 동성애를 할 확률이 높다는 말이요. 사실 약지에는 테스토스테론 호르몬의 수용체가, 검지에는 에스트로겐 수용체가 많아서 그에 따른 길이의 차가 성별에 따라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게 ‘성적 지향성’을 좌지우지 하진 않습니다. 한 채윤 선생님은 ‘테스토스테론이 많으시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내요. 호르몬의 성별 결정 능력을 성적 지향까지 연결시키는 것은 자연의 섭리가 아니라 ‘젠더’문제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테스토스테론의 역할은 근육을 발달시키고 털을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남성의 2차 성징에도 영향을 끼치고요. 그러나 ‘성욕’을 활발히 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남성이 여성보다 성욕이 더 많다.’ 는 설 또한 틀린 말입니다.
여성과 남성은 XX와 XY, 생식기로 구별됩니다. 생물학적으로 다른 몸을 갖고 있고 그에 따른 기능이 다릅니다. 그렇지만 그게 성격, 스타일, 몸매, 말투, 역할을 결정짓는 바탕이 되지는 않습니다.
2. 정치/통치 : 열녀문
열녀문은 ‘평생 하나의 지아비를 둔 여성’을 위해 세워주는 문입니다. 이것은 고려시대 때부터 있었는데 그 의미가 고려와 조선이 달랐다고 합니다. 고려시대에는 재혼이 너무 많아서, 즉 평생 하나의 지아비만을 두는 경우가 너무 흔해서 그에 대한 보상이었던 반면 조선시대 때는 여성의 남편에 대한 복종과 헌신을 위한 나라의 통치술이었죠. 열녀가 너무 많아져서 열녀로 인정하는 기준이 점점 까다로워지고 그에 대한 보상도 점점 커졌다고 해요. 그 뿌리는 조선 통치의 주요 사상이었던 유교의 기본 ‘삼강오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삼강의 뜻은 ‘신하는 임금이 법이고 아들에겐 아버지가 법이며 부인에겐 남편이 법이다.’입니다. 주로 신하는 남성이었으니 임금의 입장에선 신하만 잘 통치하면 나라 전체를 움직일 수 있었던 거죠. 이것은 또한 신하와 임금, 부부의 사이를 동급으로 놓으면서 ‘하나의 임금만 섬길 것.’과 ‘하나의 남편만 섬길 것.’이 동금의 일이 된 거죠. 신하의 반란으로 세워진 조선 임금들의 불안은 이렇게 가정에까지 영향을 끼친 겁니다.
하나의 지아비를 섬기는 것이 온전히 여성의 몫인 것, 여성의 순결과 정조를 중시하는 사고방식은 현대에도 남아있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뒤집으셨습니다.
“정조를 지키는 것보다 정조를 빼앗지 않으려 하는 게 맞지 않은가? 뺏긴 이와 뺏은 자, 어디에 그 잘못이 더 큰가?”
3. 예술/종교 : 아담과 이브 그리고 뱀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어 벌을 받게 된 이야기는 모두 아실 겁니다. 이것은 성당이나 많은 화가들의 그림 소재가 되어 왔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다뤄왔는데도 그 표현은 변해왔다고 합니다.
15세기 16세기 그림에서 뱀은 여성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 8세기 그림에서 뱀은 날개를 달기도 하고 다리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노하셔서 뱀에게 평생 배로 다니게 하는 벌을 내리셨다는 게 성경의 내용인데 왜 뱀은 여자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일까요? 그리고 이것은 당시 여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쳐왔을까요. 여성을 꽃뱀으로 부르고 성녀와 창녀로, 마녀와 마리아로 나누는 요즘. 우리는 19세기 인식에서 얼마나 앞으로 진보해 온 걸까요?
젠더는 이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주로 ‘남성’과 ‘남성 아닌 것’으로 표현되지요. 교사와 여교사, 의사와 여의사, 군인과 여군. 이런 식으로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어서 예민해지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남성 또한 억압합니다. 돈 잘 벌어야 능력이지, 키 커야지, 집 살 능력도 돼야지 등등. 이렇게도 말합니다. ‘남자니까 괜찮아.’. ‘여 자보다 못 하는 거야?’ 식으로요.
이러한 억압이 무서운 것은 의심이 ‘나’로 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왜 난 안 맞지?” “내가 틀렸나?” 등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하게 만드는 것, 스스로 맞추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젠더의 작동 원리이자 생존 방식입니다. 게다가 젠더문제는 직장, 연애, 결혼 등 생활과 밀접한 일이기 때문에 무시하기도, 맞서 싸우기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집에 오는 길, 내가 왜 살을 빼자고 생각하기 시작했더라? 내가 왜 엄마한테 ‘엄마의 역할’을 요구하기 시작했더라? 엄마로부터 여성성을 배우지 못했다, 는 말은 왜 했지? 내 가슴이 작아서 남자가 싫어할 거라는 생각을 왜 한 걸까? 등의 물음이 생겼습니다. 내 가족들의 불화라고 생각했던 것도, 내 자존감 문제라고 여겼던 것도, 젠더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젠더는 보이는 규칙이나 지식 또는 유행이 아니라 내 위에 서 있는 권위였던 겁니다.
젠더는 우리에게 주어진 구조입니다. 그리고 그 안엔 다양한 높이의 벽들이 있고 벽들 사이에 사람이 있습니다. 어쩌면 너무 당연해서 벽의 존재를 모르며 살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성평등을 말한다는 것은 우리를 가로막은 벽을 보고 그것을 허무는 일인 것 같습니다. 성평등을 말한다는 것은 가해자를 단죄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 벽이 왜 필요한지 질문하고 벽이 없는 상태를 상상하고 제안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한 채윤 선생님의 말씀처럼 “우린 정말 많이 얘기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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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추얼 워크숍 - 삶을 예술로! 삶을 축제로! | 리추얼워크숍 <삶을 예술로, 삶을 축제로>을 마치며 | 느티나무 | 2016.6.16 | |
* <삶을 예술로, 삶을 축제로> 주제로 진행한 리추얼워크숍을 마치며 참여자들이 짧게 적어본 소감문을 나눕니다.
- 내가 경험한 리추얼 워크숍은 있는 그대로의 ‘나’와 만나 놀았던 시간이다.
- 나에게 리추얼 워크숍은 채워지지 않은 허한 마음안에 무언가 넣어주고 가라앉혀주는 시간. 생활이 리추얼로 하여 충만한 나를 만나고 삶을 즐기는 원동력이 되어준 시간. 좋은 사람과 함께 한 시간. 누구나 할것없이 편안하고 안전한 공간이어서 좋았던 시간. 감사하며 살아갈께요. 고마워요.
<2016. 6. 7. 나에게 주는 선물 리추얼>
- 잃어버린, 잊어버린 나와의 만남 타인의 삶과 나의 삶의 소통속에서 얻는 기쁨과 즐거움. 감사합니다. 모두모두
- 나를 찾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들어야 할 수업이라 생각하며, 특히 삶의 새로운 영감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강추합니다.
- 내가 나를 마음놓고 마음대로 마음껏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 나에게 리추얼 워크숍은 나를 돌아보고 내 주위를 돌아보고 내 가족을 돌아보고 그래서 나를 다독이고 보듬고 쓰다듬어줄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내가 좀더 단단해지고 유연해지고 부드러워지고 그래서 더 날카로울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매순간 눈뜨고 살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 5. 31. 마음껏 나와 다른 사람을 안는 리추얼>
- 나에게 리추얼 워크숍은 늘 의외성의 즐거움이 있다. 이건 한두마디로 할 수가 없다. 참여자들 한사람 한사람의 진실한, 구러면서도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는 힘이 만드는 엄청난 화학작용. 일상의 삶을 예술로 축제로 만들 수 있는 기본의 힘... 더불어 함께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시간이다. 함께 한분들 모두 보석같았다. 감사합니다.
- 머릿속으로 생각하면 부담되고 버겁고... 그래서 아, 몰라, 하고 싶지만 멤버들과 리추얼을 하나하나 해가다보면 네 얘기가 내 얘기가 되고 내 얘기가 모두의 마음을 모으게 되는 기묘한 체험을 하게 된다. 체감이 못된 가라앉았던 돌멩이가 솓구쳐오르고 옆에 있던, 항상 있던 누군가가 눈물겹게 애틋해지고 고마워지는... 말하자면 모든 오감을 열고 세상을 느끼고 만나게 되는 리추얼... 마법의 세계
- 허겁지겁 사라져가는, 삶의 순간순간을 맛보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빠른 시공간 속에서 리츄얼은 나를 잠시 멈춰서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관계’를 위해서는 우리는 또다른 시공간을 창조해내야 함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더 나아가 자고 일어나는 일,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삶을 풍성하게 하는 의식, 리추얼이었다는 것도 다시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결국 리추얼은 다른 곳에 있는 특별한 게 아니라, 내 삶임을... 앞으로 여기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일상의 성스러움을 회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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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 <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6강 | 전활걸고 | 2016.5.23 | |
5월 10일 제 5강에서 '열녀, 죽임인가? 죽음인가?'라는 주제로 쟁점토론을 진행한 데 이어서, 17일에는 제 6강 '근대 여성의 아이덴티티: 현모양처론의 두 얼굴'을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마치 조선시대 여성상의 전형처럼 인식되고 있는 '현모양처'라는 개념이 사실 근대에야 비로소 등장하였음을 짚고 넘어갔습니다. 18세기 이후 조선에서는 가부장적 의식이 더욱 강화되는 양상이 보입니다. '시집을 간다'는 결혼개념이 기본 풍습으로 정착하였고, 열녀문 건설이나 여성 수신서 보급 등으로 여성들도 가부장적 개념을 내면화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때는 양반뿐 아니라 양인, 천민 여성도 열녀가 된 사례가 왕왕 등장합니다. 즉 열녀 개념이 하위계층에까지 퍼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또한 족보에서도 선남후녀식의, 혹은 아예 딸의 이름을 적지 않는 식의 서술이 주류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성은 이 상황에서 마냥 수동적 객체로만 살았을까요? 사실 사회의 가부장적 요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겠지만, 여성이 주체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례도 있습니다. 먼저, 독서 열풍으로 여성의 의식이 높아졌습니다. 그 배경 중 하나는 수신서/교화서의 정책적 보급으로 여성들의 언문 사용이 늘어난 것입니다. 언문은 여성이 많이 쓴다고 하여 '암글'이라고 불리기도 했지요. 반가 여성들의 경우 미래 자녀교육을 위해 출가 전에 글공부할 기회를 주는 경우가 많아, 한문까지 읽고 쓸 수 있었습니다. 유학서를 읽고, 심지어 책을 쓰는 여성도 있었습니다. 초창기에는 글을 읽고 쓰더라도 여성 자신이 그것을 숨겼습니다. 이익의 책에서 '부인은 가족을 봉양하고 봉제사, 접빈객하는 일이 있는데 어느 겨를에 책을 읽겠냐'는 말이 등장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글 읽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 여성 성리학자인 윤지당 임씨의 경우 '서책을 가까이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소설이 등장하면서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시기의 소설은 내용 전개가 흥미있고, 현실에서 이루기 어려운 판타지를 소재로 하는 경우가 많다는 특징을 보입니다. 책을 빌려주는 '세책가'나 방물장수를 통해서뿐 아니라 판소리나 이야기꾼의 낭독 등으로 소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주 독자층이 여성인만큼 여성의 구미에 맞는 이야기를 다룰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나중에는 여성 주인공이나 여성 영웅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여성의 독서가 활발해지면서 책을 쓰는 일도 늘었습니다. 여성의 작품이 사후에 문집으로 출간되기도 하고, 한중록이나 규합총서 등 유명한 여성 저서들도 이 시기에 등장합니다. 조선 후기에는 여성의 의식이 높아졌을 뿐 아니라 경제참여율도 늘었습니다. 시전에는 여성이 운영하는 점포를 뜻하는 '여인전'이 등장했습니다. 양반 여성들도 경제활동을 했습니다/ 양반 남성들이 정치/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생업에 뛰어들지 못하고 과거를 준비하는 일이 많아, 집안 살림을 꾸려가기 위해서는 여성이 일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덕무의 글을 보면 '선비의 아내는 생계를 위해 일해도 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성의 경제참여가 늘면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여성의 사례도 등장합니다. 제주 거상 김만덕이 대표적인 예인데, 상업을 통해 번 돈을 빈민 구휼에 희사한 결과 상으로 왕비를 알현하고 금강산을 유람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경제활동은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양반 여성 박씨가 동전을 주조한 사건에 대한 실록 기록을 보면 박씨가 흉악한 성품을 가졌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맥락을 보면 여성이 주체성을 보이는 것을 성품이 포악한 것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비단 조선시대뿐 아니라 현대에도 이런 모습은 있습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나아야' 한다는 가부장적 관념으로 능력있고 자기주장 강한 여성을 '기가 세다'고 깎아내리거나, '여자가 나를 무시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결국 여성이 글을 배우고 돈을 버는 것을 막으려던 이때의 관념과 큰 줄기는 같다고 할 수 있겠지요. 천주교의 등장도 여성의 의식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천주교는 여성을 중심으로 유입되었는데, 이것은 아마 모든 사람이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이념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념 때문에 국가에 의해 탄압을 받기도 했는데,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하는 것은 곧 신분제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해 중국에 처음 유입될 때 최대한 기존 유교 관습과 충돌하지 않으려 한 것과 달리 종교색을 드러내어 제사를 거부하거나 신주를 없애면서 충돌이 생긴 것, 그리고 남녀가 모여 미사를 드린다는 점 등이 탄압의 명분이 되었습니다. 또한 여성들이 동정녀로 살기 위해 여성끼리 공동체 생활을 하거나 결혼하되 동정 서원을 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윤리에 반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보편적인 종교는 아니었으며, 탄압을 많이 받은만큼 천주교 신앙이 당대 여성의 삶을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천주교 유입은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고, 여성 교육과 개화가 시작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동학도 비슷한 양상을 보입니다. 동학은 서학을 막자는 취지를 내세웠으나, 사실 서학과 유사한 개념이 많이 나타납니다. 특히 평등사상이 그렇습니다. 이런 평등사상을 기반으로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를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개화파도 서구의 여성관 변화를 수용하여 균등교육을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여성을 동등한 주체로 보았다기보다는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의 일환이거나, 여성을 남성들의 개혁을 뒷받침할 존재로 교육시키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여성교육기관 설립 운동이 진행되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은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이화학당입니다. 초기 학생의 대다수는 기생이나 고아 등 사회적 약자들이었습니다. 이는 여성교육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어 한국 단체에 의해서도 여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이것이 순성여학교입니다. 이 순성여학교가 설립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1895년 공포된 교육입국조서에 여학교 설립에 대한 조항이 있었으나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여성의 참정권, 직업권, 교육권을 주장하는 내용의 여권통문이 발표되었는데, 당대에는 상당히 급진적인 주장이어서 큰 사회적 주목과 지지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여권통문 발표는 찬양회 조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들은 성금을 모아 여학교 설립을 준비하였고, 결국 순성학교를 설립해 기초적 수준의 유학과 서양 학문, 실기 등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한계도 분명했는데, 연설회 강사진이 주로 독립협회 남성 회원이었던 점에서 알 수 있듯 여성이 담론을 주도하지 못했고, 첩의 참여 문제로 내분을 겪었으며, 순성학교도 운영난에 시달리다가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 여학교인 한성학교가 설립되었고, 1905년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여러 여학교가 설립되어 여성교육을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교육의 목적은 여성에게 평등한 교육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당대의 자료나 실제 진행된 교육의 내용을 보면, 이때의 여성교육이 현모양처를 양성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모양처론은 사실 근대적 개념입니다. 원래 조선에서 전통적 여성의 덕목은 '효부'입니다. 현모양처론은 근대적 소가족 제도의 산물이자, 일본의 '양처현모' 관념이 유입 과정에서 변형된 결과입니다. 전쟁이 잦았던 일본에서는 남성이 전쟁으로 자리를 비워도 가정을 유지하고 군인인 남편을 뒷받침할 수 있는 양처의 덕목을 강조했다면, 근대 어려움이 많았던 한국에서는 교육을 통해 미래를 도모할 수 있도록 현모의 덕목을 더 강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성이 교육을 받더라도 남성과 동등한 일자리를 구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대신 교육받은 것을 바탕으로 가정경제와 자녀교육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따라서 관립 여성교육에서도 가사를 많이 가르쳤습니다. 원래 조선의 전통적 가정관에서 자녀교육은 주로 아버지의 책임이었는데, 오히려 근대에 들어서며 이 책임조차 여성에게 떠넘겨진 것입니다. 여성교육은 현모양처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므로, 교육받은 여성이 남성의 영역을 침범하려 들 경우 가혹한 공격이 따랐습니다. 당대에도 현모양처론에 대한 비판은 있었습니다. 무보수의 여자 하인이나 다름없다는 비판과 더불어, 여성을 구속하는 모든 사상에서 벗어나자는 주장, 현모양처교육은 여성집단을 효율적으로 억압하기 위한 노예교육이라는 주장 등이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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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본주의, 왜 분노해야 하는가 | 5월 월례특강[한국 자본주의, 왜 분노해야 하는가] | alskdj2010 | 2016.5.13 | |
한국 자본주의, 왜 분노해야 하는가-장하성(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아래에서 사용되는 그래프와 이미지는 인터넷을 통해 비슷한 그래프를 제가 찾아본 것으로 교수님께서 강연에 사용하신 그래프와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처음 발표 내용부터 내가 갖고 있던 편견(?)을 버리게 되었다. 학창 시절에 박정희 대통령 시기에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5개년에 의하여 우리나라의 경제가 크게 성장하였다고 배운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강의 시간에 처음 본 그래프부터 이런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우리나의 경제 성장은 크게 1962년과 1994년, 두 시기에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1962년까지는 경제복구 시기로 한국전쟁 이후 몰락한 경제 상황을 복구하는 시기로 구분된다. 1962년부터 1994년까지는 계획경제 시기로 경제개발5개년 등의 정책과 함께 정부의 가격통제가 있었던 시기이다. 1994년부터 현재까지는 시장경제 시기로 경제의 자율화와 개방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시장 경제는 불과 20년 밖에 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에 돌아가셨는데 그 시기까지 우리나라는 공업보다 농업의 비중이 월등히 높은 나라였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 집권 시기에 우리나라 연도별 GDP와 연도별 1인당 GDP는 매우 낮다.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 시기에 경제가 크게 발전했다는 나의 생각은 어디에서 나왔으며, 이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 자본주의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나라 근로자의 가계소득은 근로소득이 95%, 그 외의 5%는 사업소득 및 재산소득-배당소득(이자,임대료 등)이 차지한다. 우리나라 경제인구의 상위 10%, 상위50%, 하위 10% 모두에서 이런 비중이 미묘한 차이만 있을 뿐, 근로소득이 그들의 가계소득의 93% 이상을 차지하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국세청에서 발표한 개인소득 신고총액에서 또한 근로소득이 92%에 달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의 삶은 임금이 결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그래프 등을 통해 교수님께서는 임금 문제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개인적으로는 재산소득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경제의 불평등은 80~90년대에는 완하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90년대 이후에 경제 불평등은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 OECD 국가에서 중국에 이어 가장 경제 불평등이 높은 국가이다. 그렇다면 왜 경제 불평등이 지난 20년간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는가? 첫째, 경제성장과 실질 임금의 격차가 크다. 2000년에 국내총생산은 이전과 비교하여 73.8% 증가한 반면 실질임근은 그에 절반에 달하는 38.6%만 성장하였을 뿐이다. 또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격차는 갈수록 악화되었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노동자 비중은 대기업에 비해 중소기업이 월등히 많다. 게다가 자영업자의 이익은 한국 경제의 성장과 반대로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 둘째로는 고용형태를 들 수 있다. 비정규직이란 단어는 2000년 이후 등장한 단어로, OECD 국가에서는 한국과 일본만 사용하고 있는 단어이다. 또한 저임금노동자의 임시고용 비율은 상승하는데, 평균 고용기간은 감소하고 있다. 게다가 1년 미만 고용 노동자 비율은 상승하고, 최저임금은 낮은 편에 속하고 있다.
더 많은 내용이 있었지만, 이제 질문 시간에 가장 인상깊었던 내용 한가지만 언급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려고 한다. (질문 내용과 답변 내용에 생략된 부분이 있습니다.) Q. 대학을 졸업한지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열정페이를 요구하는 곳에서 일하는 등 여러 노력을 했지만 아직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 변화를 일으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10년 전에 유행한 단어가 있었다. 그것은 88만원 세대라는 말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20대,30를 어떻게 부르는가? 3포 세대, N포 세대, 나아가서는 잉여 세대라고 부른다. 나라의 주축, 희망이 되어야 할 세대들을 우리는 쓰다 남은 찌끄레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업무실적 평가를 보여주시면서) 20,30는 박근혜 대통령이 잘하지 못하고 있다고 70%가 말하는데 50,60대는 오히려 박근혜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고 70%가 말한다. 40대는 각각 50%정도이다. 이와 같이 세대마다 인식하는 것이 다르다. 사회를 바꾸려면 각계각층에서 힘이 있는 사람이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힘이 있는 사람은 40,50,60대이다. 그들은 사회를 바꿀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20,30대들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꼰대같은 말이지만 연대를 해야한다. 20,30대가 문제가 있다고, 변화가 필요하다고,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이슈를 정치이슈화 해야 한다.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기성세대라서 죄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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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 <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4강 | 전활걸고 | 2016.5.10 | |
지난 5월 6일 <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4번째 강의가 있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조선시대 여성들이 살아간 모습을 다루었습니다. 먼저 같은 조선시대라도 전기와 후기 여성의 삶에 큰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갔습니다. 원래 원시 유학은 음과 양에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리학에서는 양과 음, 천과 지, 남과 여의 위치와 높이를 구별하고 이런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순리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성리학이 조선 유학 사상의 중심으로 자리하면서 조선 여성의 지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조선이 막 건국되었을 때만 해도 여성의 지위가 고려 시대에 비해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정도전은 혼인 제도에 대해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는 친영을 주장하였고, 실제로 왕실에서는 친영을 실천하여 모범을 보이고자 하였지만 실제로 사대부나 백성들은 그것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점차 여성의 행동에 제약을 더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면 경국대전에서는 과부의 재가를 금지합니다. 만약 이를 어길 경우 그 자손이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하였기 때문에, 자식이 재혼하는 어머니를 막고자 재혼 상대와 싸우는 등 웃지 못할 일들도 벌어졌다고 합니다. 같은 성종 대의 어우동 이야기에서도 여성에게 제약이 늘어가는 모습을 살필 수 있습니다. 어우동은 양반가의 딸로, 왕족과 결혼하였으나 여러 남자와의 성 편력으로 처형당했습니다. 비슷한 시대에 여성의 간음과 관련된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 시대에 갑자기 여성의 간음이 늘었다기보다는 원래 비교적 자유롭던 여성의 성적 의사결정에 대해서 갑자기 규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 외에도 국가 차원의 풍속 교화로 여성의 행동에 제약이 늘었습니다. 부녀자의 상사, 음사를 금지하면서 여성들은 이전까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던 외출과 유희를 규제받게 되었습니다. 세종대의 '내외법' 역시 여성의 자유를 축소, 규제하는 법령이었습니다. 족보 기록에서도 여성의 지위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초의 족보들은 난 순서대로 딸의 이름과 함께 여부(사위), 후부(딸의 재가 상대) 등도 기록하였던 반면, 후기에는 선남후녀식으로 작성하거나 딸의 이름은 아예 쓰지 않고 사위만 명기하며 외손에 대한 기록을 축소하는 등 여성에 대한 차별이 커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유와 지위를 잃은 여성들은 어떤 일을 했을까요? 반가 여성들이 수행한 가장 중요한 임무는 '봉제사 접빈객', 즉 제사를 준비하고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손님맞이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어 개인의 집에서 공적인 얘기를 나누는 경우가 많았던 이 시대에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손님을 어떻게 대우하느냐가 해당 양반의 정치적, 사회적 입장을 좌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봉제사와 접빈객을 위해 각 가문마다 음식 차리는 법이 발전했는데, 그것이 소위 말하는 '종가 음식'입니다. '음식디미방'과 같은 요리 비법을 출가외인이 될 딸 대신 며느리에게 물려주는 모습에서 조선시대 여성의 정체성이 딸에서 며느리로 변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가정의 경제권 역시 여성이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붕당정치에서 특정 당파가 득세하고 다른 당파는 탈락하는 과정에서 여성이 경제를 지탱하는 가정이 생겨났습니다. 몰락한 당파의 양반은 과거를 봐도 희망이 없지만, 4대 동안 과거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하면 양반 지위를 박탈당하기에 과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과거 공부만 하느라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남편 대신 아내가 가계를 꾸려가는 경우가 많아진 것입니다. '성호사설'을 쓴 이익의 글에서는 여성의 경제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드러나는데, 여기서 여성과 남성의 경제력 변화로 인한 긴장을 엿볼 수 있습니다. 현대에도 여성의 경제력이 상승하면서 이혼율이 상승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처럼 여성이 경제적 문제 때문에 힘든 점이 있어도 이혼하지 못하는 일이 많이 줄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후기, 양란 이후 여성의 삶은 많이 힘들어졌습니다. 특히 호란 때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이들을 환향녀('화냥년'의 어원)라 부르며 '정절을 빼앗겼다'는 이유로 냉정한 시선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심지어 홍제원에 큰 목욕시설을 두고 거기 들어갔다 나오면 정결해진 것으로 한다는 식의 정책도 있었으나, 실제로 그렇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습니다. 호란에서의 피해는 남성 지배층이 무능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책임을 극단적 정절의식으로 여성에게 떠넘긴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호란 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제시대 소위 '위안부'로 끌려갔다 돌아온 여성들 역시 마찬가지로 가혹한 시선을 받았습니다. 최근에야 이 문제가 주목을 받고 있지만, 자기반성 없이 일본에 대한 증오로 끝나서는 의미없는 피해의식에 불과하게 되지 않을까요? 이 사회의 책임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 사회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수자에 대한 사회의 책임을 고민하고, 또한 개인으로서도 내가 다수자로서 다른 이를 소외시키거나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내가 부담해서' 다른 소수자를 배려할 생각이 있는지 끊임없이 확장해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제약과 억압이 늘어나는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그렇다고 조선 여성을 그저 수동적이고 남편의 가문에 구속된 존재로만 볼 것은 또 아닌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조선 여성의 정체성이 딸에서 며느리, 출가외인으로 변해갔다고 하지만 실제로 딸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에게 영창대군 대신 친정 식구들을 살려달라는 서한을 보냈던 것이나, 신사임당이 친정에서 생활한 것, 혜경궁 홍씨가 벽파인 친정식구들을 살리고자 쓴 '한중록' 등에서 딸로서의 정체감이나 친정에 대한 소속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른 많은 나라들과 달리 여성이 성(姓)을 그대로 썼다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출판물에서도 여성이 나름의 영역을 발전시켜나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 이후 등장한 소설문학의 경우 한글로 쓰인 경우가 많고 판타지적 요소를 포함하며 때로는 여성이 주인공인 경우도 있는데, 주 독자층이 여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대부가 여성의 경우 드러내놓지는 못하더라도 유학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숨기다가 나중에 글이 발견되는 일도 있었지만 생전에 본인의 문집이 발간되는 것을 볼 수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한 위에 쓴 '음식디미방' 등도 여성이 만들고 전승한 내용이 책으로 나온 예입니다. 조선시대 여성을 마냥 한 맺혀 살아간 피해자, 수동적인 존재로 볼 수도 있겠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나름의 영역을 구가한 능동적 주체였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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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 <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3강 | 나옹 | 2016.5.4 | |
3강은 ‘어느 고려부인의 일생: 시집가지 않는 여자’를 주제로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의 성과 여성의 삶에 대하여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고려시대는 성적으로 자유분방하기도, 성적 규범이 엄한 사회이기도 했다. 고려가요 ‘만전춘’과 ‘쌍화점’ 등을 보면 남녀가 사랑을 주고받는 일에 크게 거리끼지 않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신분에 따라 큰 차이가 있어, 귀족 여성들에게는 엄격하게 적용되기도 했다. ‘자녀안(姿女案)’이라는, 남편 있는 여자가 간음할 시에 그 이름과 소행을 기록하는 대장을 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여성은 풍기를 문란 시킨 죄로 바느질하는 공인으로 삼았다. 성에 대한 통제는 당시 사회의 규범이나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는다. 고려의 주요 사상이었던 불교와 유학에서 정절은 ‘상대방에 대한 신의’를 의미했다. ‘쌍무적 정절이데올로기’를 강조하며, 부부 간에 서로 도리를 지켜 간음은 물론 자기 아내와 남편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두지 말라고 하였다. 이렇게 정절 의무의 주 대상은 살아 있는 부부 간이었고, 과부가 남편 사후까지 정절을 지키라고 사회에서 강요받지는 않았다. 그래서 과부나 미혼녀가 남성과 사랑을 나누는 데 적극인 행동을 취했던 경우가 많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비하여서는 상대적으로 사회적인 분위기가 관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법제적으로 혼인 외 관계는 모두 간통으로 처벌했다. 간통은 쌍벌죄였으나 여성의 경우 부가형이 있어 더 무겁게 벌을 받았다. 그리고 이혼에 대하여는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은 한 여성 측에서 이를 요구하기는 어려웠다. 고려시대 여성은 남편 사망 후 재혼만 자유롭게 할 수 있었을 뿐이다, 남편 외의 남자와 교제하기 위해서는 이혼, 도망, 살부 등의 극단적인 방법을 꾀해야 했기 때문에 최대한 혼인관계 내에서 사랑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고려 여성들의 혼인 양상을 ‘염경애’라는 한 여성의 일생을 통해 더욱 알아볼 수 있었다. 염경애는 고려사 효우전에 등장하는 효자 최루백의 아내이다. 당대 명문가 자식이었는데, 지방 향리의 자식이었던 최루백과 혼인하였다. 최루백은 과거급제자였고, 당시 지배층은 사위의 장래성을 고려하여 혼인하였기 때문에 최루백을 사위로 맞았을 것이다. 고려의 혼인은 일반적으로 같은 계층 간에 이루어졌는데, 이와 같이 지방의 한미한 가문 출신자가 과거에 합격한 뒤 귀족의 사위가 되어 사회의 최상층에 진입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그리고 친족구조가 ‘양측적 친속제도’로서 친가, 처가, 외가도 상당히 중시되어 사위의 출세는 아들의 출세와 마찬가지로 ‘가문의 영광’에 기여하였다. 혼인의 형태는 처가에서 혼인식을 올리고 처가에서 살다가 남편 집으로 가는 식이었다. 서류부가혼, 남귀여가혼, 솔서혼 등이라 불렸다. 그리하여 처가와의 관계가 밀접했다. 여성이 혼인 뒤에도 친정부모를 모실 수 있어 상대적으로 아들 선호가 크지 않았다. 처가에서 거주하는 기간은 가족 상황이나 경제력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차이가 많았다. 혼인 뒤 여성은 전근대시대 여성에게 공통적이듯,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을 내조하며 자식을 잘 기를 것이 요구되었다. 효도에는 제사도 포함되는데 윤회봉사 형태로 여성도 제사에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있었다. 재산 상속 시 딸과 아들을 특별히 차별하지 않고 균분했기 때문이다. 제사는 주로 절에서 재(齋)를 지내는 방식으로 치렀다. 그 당시 절의 시주 명단을 보면 남편과 부인의 이름이 각기 기재되어 있다. 이를 보면 부부가 재산을 따로 소유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성들은 고리대나 상업, 무역활동을 통해 가정경제를 꾸렸다. 부계친족구조가 강고하지 않았던 사회라 여성은 사후 친정 묘역에 묻히기도 했다. 고려 여성들은 아내, 며느리로서보다 딸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고려 여성들이 혼인 이후에도 자신만의 재산을 소유하고 운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지금껏 주위에서 보아 온 여성들은 결혼 후 법적으로는 재산권을 인정받음에도 현실적으로는 재산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다음 시간에 다룰 조선시대 여성의 삶도 현실의 여성이 겪는 일들과 비교하여 깊이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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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 <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2강 | 나옹 | 2016.4.28 | |
지난 4월 12일 '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을까?: 여왕 통치의 성공과 실패'를 주제로 한 2강이 열렸습니다. ‘원시시대부터 신라의 여왕들’까지의 시기를 ‘성별분업에서 성별불평등으로’의 흐름 속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원시시대의 경우 생물학적인 성차에 근거한 성별분업이 이루어져 주로 여성들은 채집, 남성들은 사냥을 하는 방식으로 경제를 운영했습니다. 채집은 사냥보다 안정적인 수입원이었고, 따라서 여성을 중심으로 하여 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대의 화석인골을 보면 여성들이 남성보다 40세 이전 사망률이 높았는데, 그 이유는 임신, 출산, 육아의 과정을 여성들이 겪는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여성들은 그러한 과정에서 겪는 신체의 부자유스러움 때문에 주변 상황에 빠르게 대처하기가 어려웠고, 이는 여성의 단명을 야기했던 것입니다. 구석기시대 조각상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튼실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다산과 종족 보존에 대한 염원이 담겨, 그 당시 여성들에게 기대되던 역할에 걸맞은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빌렌도프르라는 지역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바로 옆에 있는 곳으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비엔나의 자연사 박물관에 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비너스 상 중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신석기시대에는 여성들이 간단한 농경을 담당해 왔습니다.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남성들이 주로 농경을 맡아 하게 됨으로써 남성 위주의 사회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노동력이나 사회 활동에서 남성들의 참여 비중이 확대되고 가부장제로 바뀌어 나가게 됩니다. 선사시대 여성들의 모습을 우리가 자세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선사’라는 게 ‘역사 이전(prehistory)'을 의미하므로 기록이 없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록이 없었던 시대에 살았던 이들의 삶을 알기 위해 오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유추해 보기도 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여성은 웅녀입니다. 웅녀 이야기(단군신화)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달리 삼국유사는 역사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삼국유사의 ‘사’는 ‘역사 사’ 자가 아니라 ‘일 사’ 자입니다. 삼국사기는 고려시대에 편찬이 된 정사입니다. 웅녀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데, 그 이유는 김부식과 같은 유학자들이 기술했기 때문입니다. 유학자들은 유교적 합리주의에 입각해 삼국사기를 썼으므로 괴력난신의 이야기는 인정하지 않아 싣지 않았습니다. 괴력난신이란 보통 사람이 들 수 없는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린다든가(괴력), 신들이 무엇을 만들고 벌을 내린다든가 하는 귀신에 관한 일(난신) 등 불가사의한 존재나 현상을 말합니다. 이렇게 삼국사기에 들어가지 않은 남은 이야기들이 있었고, 이것들을 모아서 승려인 일연이 책으로 낸 게 삼국유사입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는 그 당시 제왕운기 등의 다른 책에도 나오는데, 내용이 조금씩 다 다릅니다. 사람들이 전해들은 이야기를 문자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단군신화와 같은 건국 신화를 보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내용이 많습니다. 이것은 다른 지역에서 이주를 해 왔다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단군신화에서 이 이주한 집단이 토착 집단인 곰을 토템으로 하는 집단, 호랑이를 토템으로 삼고 있는 집단을 만나게 되고, 합쳐져 하나의 지배 집단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힘의 우위에서 열세에 있는 쪽을 주로 여성으로, 우위에 있는 집단을 남성으로, 그리고 부족과 부족 간의 결합을 ‘결혼’이라는 형태로 나타낸 것입니다. 신라에 첫 여왕인 ‘선덕왕’이 즉위하게 된 배경에는 신라 사회가 ‘골품제’로 운영되고 있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왕위에 오를 만한 성골 남자가 단절했고, 진골에서 남자 왕을 추대하기보다 같은 골품의 여자로 그 뒤를 잇게 한 것입니다. 또한 왕권이 강화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즉위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법흥왕 시절 사상적으로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받아들여 왕실가족을 불교의 석가족과 일치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이로써 진평왕대 왕권이 강화되어 국왕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자 선덕여왕을 자신의 왕위 계승자로 삼고, ‘국인의 추대’라는 형식을 빌려 즉위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평왕 때 일본에서 첫 여성 천황인 스이코(推古)가 등극했는데, 스이코 여왕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한 적이 있고, 이 사신이 돌아갈 때 신라에서는 까치 두 쌍을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스이코 여왕의 즉위는 신라 왕실에 ‘여성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끔 영향을 미쳤으리라 봅니다. 선덕여왕의 자질에 대해 삼국유사에 세 가지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란꽃 그림을 보고 향기가 없음을 미리 알았다는 것과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백제군이 매복한 사실을 알고 섬멸하게 한 것,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알고 장지를 정해준 것입니다. ‘비담의 난’은 상대등이었던 비담이 염종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일입니다. ‘여자 임금은 잘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김유신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그리고 진덕여왕이 즉위하게 됩니다. 진덕여왕 이후 남자 왕으로만 계승하다가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릅니다. 여성으로서의 왕위계승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진성여왕을 ‘총명하고 민첩한 천성’, ‘남성과 같은 골상’이라고 발언하면서 여성이지만 외모가 남성과 비슷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선덕, 진덕 여왕들과 달리 왕위를 양위하는데, 양위를 했던 대상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조카인 헌강왕의 아들이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진성여왕의 즉위는 경문왕 직계로 왕위를 계승시키고자 하는 혈통관념에서 헌강왕의 아들인 효공왕의 성장을 기다린 임시적이고 과도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통일의 경우 통일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던 데에 여왕들의 업적이 있음에도 김춘추에 가려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역사를 해석하는 데 성차별적인 요소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여성들이 어떻게 살고 무엇을 했는지를 찾고 아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여성의 눈으로 역사를 다시 바라봐야 합니다. 왜냐면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은 당시 남성 지배층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눈으로 본 역사는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기에 중요합니다. 현 시대에 여성이 지도자, 리더가 된다는 것에 대해 편견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성에 비하여 여성이 부당하게 폄하되기도 하고, 진보적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여성에 대하여 지니는 인식은 반민주적이고 차별적이고 수구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여성들이 정치적 지도자로 성장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여성의 입장에서 보는 훈련이 부족하여 차별적인 사고를 하고 있음에도 본인이 차별적이고 남성우월주의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성들이 그러한 태도에 불편함을 느끼고 지적하면 ‘너무 예민하다’, ‘피곤하게 군다’는 말로 일축합니다.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억압의 구조입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차별하고 억압할 수 있는 권리는 없습니다.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신라에서 여왕은 비일상적인 상황에서 남왕을 대체하기 위한 방편으로 겨우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여성 인물들을 극히 제한적인 모습으로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앞으로의 강의를 통하여 여성들의 삶을 재발견·해석하고, 이로써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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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어 보는 종교, 전쟁, 평화 | 뒤집어 보는 종교 전쟁 평화 – 전쟁의 종교인가, 평화의 종교인가 | nina | 2016.4.23 | |
뒤집어 보는 종교 전쟁 평화, 첫 강좌는 조용한 질문과 함께 시작하였다. 전쟁의 종교인가? 평화의 종교인가? 올바른 – 그리고 요구되는 - 정답은 아마도 평화의 종교겠거니 라는 생각을 하였지만, 마음속에서 여러 반박들이 동시에 일어났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가운데 ‘종교가 제 구실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의 종교로 보이는 것이다. 참으로는 평화의 종교다.’ 라는 정답과 함께 정답풀이가 시작되었다. 나와 같은 보통의 사람들이 가질법한 질문 – ‘종교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자 ‘종교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에 대한 답변들이었다.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이 무엇인가? 지혜 즉 고차원적 지능, 언어능력, 이족보행 능력 등 많은 인간만의 독특한 특질 중 종교적 행태도 – 현재까지 우리가 알아낸 관찰에 근거하여 - 인간만의 것이었다. 종교 학자 Hans Küng의 “종교 간의 대화가 없으면 종교 간의 평화가 없고, 종교 간의 평화가 없으면 세계 평화가 있을 수 없다.” 을 인용하여 종교를 아는 것이 세계 평화를 진작시키는 첫발이기에 우리에게 종교 연구와 검토의 중요성을 환시시켰다.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 전쟁이 있었고, 여전히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 이슬람 시아파의 과격활동 등이 그 경우일 것이다. 집단간의 무력적 충돌의 원인이 종교인지에 대해 Samuel Huntington은 이를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 로 이해하려 했다. 많이 알려진 유명한 견해이지만 이에 대한 반박이 존재하며, Karl Mark의 이론에 비추어보면 경제적 요소로 분열이 일어나고 종교로 인해 그 세력이 결집하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종교는 무엇이길래 종교로 인해 충돌이 생기는 걸까? 종교는 어어(Uhuh)와 아하(Aha)의 매개였다. 인간은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해 부자유의 상태로 존재하고, 종교는 우리로 하여금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변화를 가져오고, 그에 따라 자유를 갖게 하는 것이다. 경계이전에 ‘어어?’가 있고 경계너머에 ‘아하!’가 있는 것이다. 궁극 변화를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런 종교가, 궁극 변화를 위한 수단의 종교가 어떻게 충돌, 폭력, 갈등의 원인으로 지목될 수 있는 걸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 표층종교와 심층종교의 개념이 등장하였다. 모든 종교는 표층부분과 심층부분을 갖는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표층종교는 이기적인 나 중심에 머무르는 것, 무조건적인 믿음, 신과 나를 분리하고, 쓰여진 말에 집착하며, 배타적인 것이다. 심층종교는 새로운 나의 발견, 이해와 깨달음, 내속의 신과 신속의 나(범재신론)이며, 쓰여진 말의 속내를 살피는, 다원주의적인 것이다. 종교는 표층으로부터 시작하여 심층으로 다가가 진리를 깨우치고 변화해 자유를 얻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다면 종교는 표층에 머무르는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의 일화를 통해 예수의 사랑을 설명하는 종교적 설화는 표층종교 – 종교의 외적 틀이고 – 그러한 이야기 속에서 진리를 알아 자유롭게 되는 것이 심층종교이다. 끝에 다다라 시작에 던지 질문에 다시 답하는 것으로 강의는 마무리 되었다. Q. 전쟁의 종교인가? 평화의 종교인가? A. 평화의 종교이다. Q. 그렇다면 종교전쟁은 무엇인가? A. 종교전쟁은 표층종교끼리의 – 종교의 표면적 규율, Rule의 – 전쟁이다. Q. 요사이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A.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충돌이 아니라,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근본주의 그리스도교와 근본주의 이슬람의 충돌이다. 개인적으로 질의응답시간에 이루어진 논의가 더 재미있었다. 개개인이 경험한 혹은 목격한 종교의 부정적 모습과 표층종교적 부분에 대한 비교대조, 근원적인 공포와 결핍에 대해 종교의 역할을 묻는 질문에 그러한 역할을 무시할 수 없지만 그에 머무르면 구복신앙적인 표층종교에서 심층으로 심화되지 못한 상태라는 논의, 종교의 조직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순간 종교의 이상적 기능의 상실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평소 종교에 대해 갖고 있던 부정적 편견이 사실은 표층종교에 집착하는 종교적 행태에 대한 나의 태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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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으로 기억하는 세월호 | 4월 월례특강. [대중음악으로 기억하는 세월호] | alskdj2010 | 2016.4.19 | |
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 <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1강 | 전활걸고 | 2016.4.8 | |
4월 5일 화요일에 주진오 선생님의 <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첫 강의가 있었습니다. 먼저 단체 OX퀴즈 형식으로 이 강좌에 참여하는 분들이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고, 왜 여성사를 알아야 하며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 5월에 있을 두 차례의 토론을 위해 4개의 조를 구성했습니다. <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1강. 역사 속 말없는 여성들에게 말 걸기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 준비한 몇 가지 질문에 대해 O와 X로 대답하는 형식으로 자기소개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 강좌나 역사, 개인적인 관심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갔고, 질답을 통해 아카데미 느티나무의 역사탐방 소모임 '굴렁쇠'에 대한 소개도 듣는 등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어서 주진오 선생님이 강의를 여는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주진오 선생님은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계시고, 상명대에서 최초로 여성사 강의를 시작한 분이기도 합니다. 또한 다른 사학자 5분과 함께 책 『한국 여성사 깊이 읽기』를 집필하셨습니다. <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강좌의 많은 부분이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역사 속 여성이 몇이나 될까요? 적어도 남성보다 훨씬 적은 수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기록되지 않았기에 기억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역사 연구는 사료에 근거하는데, 이 사료 자체가 문자를 이용해 기록을 남길 수 있는 남성-지배층이 취사선택하여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대 여성의 삶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따라서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남아있는 역사 속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듣기는 어렵습니다. 이렇게 부당하게 배제되었던 여성의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역사 연구 자체도 풍부해질 뿐더러, 현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도 양분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중요한 키워드는 '여성사는 죽은 과거의 이야기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역사 자체가 그렇다고 합니다. 어떤 선택을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개인이 다 경험해볼 수 없기에, 과거의 사실들로부터 간접적으로 배워나가고자 하는 것이 역사인데, 특히 여성사는 그런 의의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여성 문제를 생각해보면 답답한 부분이 많습니다. '여성이 하는' 정치가 여성정치인지, 그렇다면 여성이지만 반여성적 스탠스를 보이는 '명예남성' 정치인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여성혐오는 어디서 나오는지... 이런 문제들에 대한 고민이 현실로부터만 출발하다 보면 놓치는 부분들이 생기게 됩니다. 여성사를 공부함으로써 과거로부터 이런 문제들에 대한 기원과 해결책을 찾을 실마리를 얻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강좌에서는 과거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는 한편, 수강생 간 토론도 하게 될 것입니다. 5월에 두 차례의 큰 토론이 있습니다. 5월 10일에 하게 될 [쟁점토론]은 '열녀: 죽음인가? 죽임인가?'를 주제로 하며, 찬성측(죽음)과 반대측(죽임)을 나누어 토론하게 됩니다. 5월 31일에 있을 [역사인물재판]은 '나혜석: 시대의 선구자인가, 무모한 일탈인가'를 주제로 검사측과 변호사측을 나누어 토론하게 됩니다. 이 강좌를 수강하시는 분은 두 차례 토론 중 한 번은 참가하셔야 합니다. 일단 첫 강의에 오신 분들 중 쟁점토론 찬/반 각 5분, 역사인물재판 검/변 각 4분으로 조가 구성되었으니 혹시 못 오신 분은 4개 조 중 하나로 꼭 참가해 주세요! 주진오 선생님이 '토론에 이기는 법'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논리를 분명히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상대의 반응을 예상하여 그 주장의 논리와 문제점을 잘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별토론인 만큼 조원들 간의 협동과 유기적인 연동도 중요합니다. 토론의 승패는 해당 토론에 참가하지 않는 이들로 이루어진 '배심원'들의 거수로 결정됩니다. 이렇게 첫 강의가 끝났습니다. 이어질 강의와 토론에서 무엇을 배울지, 그래서 얼마나 생각이 달라지게 될지 기대가 됩니다. 또한 여성사를 배우는 것이 정말로 현실의 여성이 겪는 일들에 대한 고민에 도움이 될지도 궁금합니다. 다음 주 화요일에는 '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을까?: 여왕 통치의 성공과 실패'라는 주제의 강의가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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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 정치철학 - 시민정치와 정당정치가 함께하는 민주주의 새로 짓기 | <선거제도와 정당> 3강 | 시민이 | 2016.4.7 | |
<선거제도와 정당> 3/31일 목요일은 김만권 선생님의 "시민정치와 정당정치가 함께하는 민주주의 새로 짓기" 의 세번째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선거제도와 정당"에 대한 강의가 진행되었으며 강의 자료를 바탕으로 내용을 정리하여 작성해보았습니다. "선거제도와 정당" 이라는 주제에서 먼저 봐야 할 것은 선거와 투표인데, 선거제도의 기은 귀족들이 엘리트 즉, 통치자를 뽑는것으로 이는 오늘날과 비슷한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이 선거를와 투표를 통해 승자와 패자가 나뉘게 된다. 현재 우리나라는 승자와 패자가 명백하게 갈리는 양당제 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이에 내가 선택한 것이 뽑히지 않는 경우가 반드시 발생하게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패자의 정제성을 가지게 한다. 또한 선거제도는 매우 복잡하고 국가마다 다양한 선거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체계로 분류하기가 어려우며, 때문에 이론상 무한대를 가지고 있지만 큰 패턴을 가지고 있다. 우선 선거제도가 낳을 수 있는 기준으로 비례적, 비비례적 선거제도로 분류 할 수 있는데, 비례적 선거제도는 각 정당의 의석수를 자신들이 얻은 득표수에 최대한 근접할 수 있도록 하는것이 핵심이며, 비비례적 선거제도는 한 정당이 다른 정당보다 확실히 더 많은 표를 얻음으로써 강하고 안정적인 정부를 구성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또한, 득표수를 의석수로 전환하는 방식에 초점을 두는데 이에 세 가지 방식이 있으며, 첫번째로 "선거구 크기"이다. 이 방식에서 선거구의 크기는 한 선거구에서 선출하는 의원의 수이며, 1인 선출 상대다수제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가 있다. 1인 선출 상대다수제는 현재 미국과 영국이 사용하고 있는 방식이며 각 선거구에서 의원 한명을 선출한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는 스페인이 가지고 있으며 각 선거구에서 평균 7명의 의원을 선출하는데, 이는 정당이 너무 많아지는 현상이 발생 할 수 있다. 두번째로 "기표방식"으로 이 방법은 유권자의 투표방법을 결정하게 한다.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범주형과 순위형이 있다. 범주형은 유권자들이 투표용지에 기재되어있는 여러 후보 중 한명을 선택하는 방식이며, 순위형의 방식은 유권자가 투표용지에 기재되어있는 모든 후보 대상으로 선호하는 순서대로 순위를 표시하는 방식인데 이는 국가의 규모가 작은 경우에 운영이 수월하며 유지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당선결정방식"이 있는데 이 방식은 선거구의 크기가 클수록 비례성이 높아지며, 선거구의 크기가 작을수록 비례성이 떨어진다. 여기에 다양한 방식이 있는데 1인선출 상대다수제, 혹은 1위 대표제라 할 수 있는 "상대다수제" 방식과 대안투표제, 2회투표제의 대표인 "절대다수제" 방식이 있으며 2회투표제는 현재 프랑스에서만 사용하고 있다. 또한 전세계 50%의 국가가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는 "비례제"방식과 마지막으로 민주화 과정에 있는 국가에서 많이 사용되어지는 "혼합형 선거제도"가 있다. "1인 선출 상대다수제"에 대해 알아보면 단순한 제도이다. 당선되기 위해 그 지역에서 최대득표를 얻으면 되며, 때문에 과반수나 절대다수표를 획득 할 필요가 없다. 이 제도는 소선거구제에서 시행되는데 주로 양당제를 낳는 성향이 있기에 안정된 정치체계가 형성 될 수 있다고 주장되며, 유권자가 명확한 한명의 선거구 대표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 중 25%의 지지도 없이 당선 될 수 있는 경우가 발생하며 이로 인해 대표성의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단점을 가지게 된다. 이 제도는 한사람이 이기는 구조이기 때문에 연합해야하며, 때문에 제3당은 어려움을 겪게 되어 계속 연합해야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절대다수제 혹은 대안투표제" 이 제도는 한 선거구에서 대표자를 선택하되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의 50%이상의 표를 얻을 수 있도록 한다. 허나 프랑스처럼 2차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득표최하한선을 설정하는 경우도 있기에 절대다수가 꼭 50%를 의미하는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2회 투표제는 두번의 다른 기회를 통해 투표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써, 비례성을 높이는 동시에 대표자의 정당성을 높여주는 방법으로 2번째 투표를 통해 민주주의의 보루를 지키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의회의 경우 절대다수 최다득표제로 최소득표율인 12.5%를 얻은 후보가 2차투표에 진출하게되며 이 경우에 2차 투표당선자가 반드시 50%의 표를 획득한다는 보장이 없다. 반면, 대통령의 경우 절대다수결선투표제로 진행되는데 1차 투표에서 1,2위를 한 후보자가 2차투표에 진출하며 이 최종후보는 자동적으로 과반수의 지지를 얻게 된다. 이를 통해 대표성과 정당성이 높아지는 장점이 있지만 2번의 투표가 진행되기에 비효율적인 부분이 발생하는것이 단점으로 나타나게 된다. 독일의 "혼합형 선거제도"는 비례대표제와 1인선출다수제의 결합으로 국민이 투표한만큼 의석을 받을 수 있는 구조로 이루어져있으며, 제 1투표는 선거구에 출마한 후보에게, 제 2투표는 정당투표(정당명부)에 행사한다. 또한 선출되는 비례의원의 비율은 50%가 되도록 하며 비례의석 배출에 있어 법정최소조건은 전국 5% 이상이 되도록 한다. 이 제도는 지역구에서 의석 획득이 어려운 군소정당이 제2투표를 통해 의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또한 지역구대표와 비례대표를 같이 쓰기에 혼합형 선거제도를 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2표제를 택하고 있기 때문에 독일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비례대표가 전체의석 수의 15%, 지역구와 비례대표가 5:1의 비율로 지역구 대표의 과다를 보이고 있으며, 정당득표율은 47석 즉, 15%에 해당하는 의석만 적용되어 지역구 의원수와 상관 없는 방식으로 분배되고 3% 이하의 득표는 무효처리되어 의석을 배정받지 못한다. 이처럼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선거제도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 선거제도에 대해 생각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앞서 언급했듯이 현재 우리나라는 양당제를 이루고있는데, 이는 승자와 패자를 너무 명확히 가르게 된다는 것을 느꼈다. 때문에 패자라는 인식이 박히게 되어 3당의 필요성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 3당이 안정적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현재 선거제도가 어떤 방식으로 바뀌어야 할 지 고민해봐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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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 정치철학 - 시민정치와 정당정치가 함께하는 민주주의 새로 짓기 | <우리 정치는 무엇을 잃어버렸나> 2강 | 시민이 | 2016.3.31 | |
<우리 정치는 무엇을 잃어버렸나> 김만권 선생님의 "시민정치와 정당청치가 함께하는 민주주의 새로 짓기" 두번째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이 강의에서는 민주주의에서 도망쳐버린 우리사회와, 민주주의 모델인 샤츠슈나이더의 "책임정당모델"과 마냉의 "청중민주주의"에 대해, 그리고 이 두 모델의 공통점인 엘리트 중심의 민주주의에 대한 강의 내용을 정리하여 작성해보겠습니다. 근대사회 이후의 대의민주주의는 "참여"라는 민주주의의 이상 대신 "제도화와 절차"를 핵심으로 보았다. 제도적으로 절차를 정하고, 그 절차를 지키는 것을 핵심이라고 보고 있다. 하여, 절차적 민주주의를 잘 표현한 <정의론>에서는 공정한 절차가 공정한 결과를 낼 것이라고하는데, 반드시 공정한 결과로 나타나진 않지만 최대한 공정하게 만들 경우 당사자들이 좀 더 받아들일 수 있어 공정성이 담보된다는것이 절차주의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절차화는 제도화와 겹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 중심은 항상 엘리트들, 대표자들만 있다는 것이 문제로 제기된다. 민주주의를 절차화의 한 부분으로만 바라보고, 대표자들의 정치로 환원하는 데 있다. 정치가 제도화 되는 것은 중요하지만 강조되다 보면 제도권 밖으로 확정되는것을 경계하게 된다. 이는 실제 오늘날 민주주의자들이 제도권 정치에 집착하여 시민들의 직접적인 참여 자체를 꺼린다. 이런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아쉬움이 잘 표현 된 개념이 셀든 월린의 "도망자 민주주의"인데 월린은 단순 제도화 속으로 환원하는 당대 민주주의의 이론과 현실에 반대하였다. 월린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정부의 형태가 아닌, 존재방식으로 바라보고 이것은 구성원들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행위자로 변모하는 정치적인 순간에 일시적으로 존해한다고 본다. 하지만 위기와 변화의 시기를 보낼 때 거리나 광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변화에 참여한 평범한 시민들은 이 순간이 지나면 그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이에 따라 "도망자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가 참여에서 멀어졌다는 비판인 동시에 평범한 시민들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정치행위자로 바뀔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전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민주주의에서 도망친 우리사회의 대항민주세력이 제시하는 민주주의 모델이 샤츠슈나이더의 "책임정당모 델"과 베르나르 마냉의 "청중민주주의" 를 닮아있는것을 볼 수 있다. 먼저 샤츠슈나이더의 "책임정당모델"은 정치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빚는 갈등의 균형을 잡는 역할을 정치정당이 해야 한다는 이론으로, 민주주의는 더 좋은 정책을 만들기 위해 정당이 서로 경쟁하면서 만들어진다고 본다. 마냉의 "청중민주주의" 모델은 미디어를 통해 의사소통에 능숙한 새로운 정치엘리트들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통치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안철수 현상"으로 볼 수 있는데, 안철수는 청년 멘토 등 기존 정치엘리트들에서 볼 수 없었던 참신한 미디어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정치를 원하는 이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얻었다. 이처럼 두 모델은 차이가 있지만 명확한 공통점이 있는데, 이는 정치엘리트와 시민들을 나누며 엘리트들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책임정당모델"은 정당엘리트, "청중모델"은 대통령, 수상 등의 국가수반의 역할을 강조하는 점에서 변화의 중심은 시민이 아닌 정치엘리트들이라고 보고 있다. 정치의 중심이 엘레트라고 믿었던 샤츠슈나이더는 민주주의는 정치지도자들과 조직이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책에 대안을 확정하는 경쟁적인 정치체계이며, 시민들은 스스로 통지하지 않고, 통치 능력이 없으며 "투표"를 통해 정치갈등 과정에 참여한다고 본다. 정당은 인민의 요구를 들어주는 집단에 가까운데, 그 요구 또한 정치엘리트들이 정해주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하여, "좋은 텔레비전을 사기 위해 텔레비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 필요가 없듯이" 시민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요구만 할 뿐 적극적일 필요가 없으며 해야 하는 일은 때가 되었을 때 투표하여 대표를 뽑는것이라고 한다. 이런 엘리트중심의 민주주의에 대해 마냉은 "새로운 엘리트의 부상과 다른 엘리트들의 퇴조"라고 말하면서 정치가 엘리트들의 중심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시민들이 선거를 통해 그 엘리트들을 다른 엘리트들도 바꿀 수 있다고 말하고있다. 이렇게 두 모델은 정치엘리트들을 선호하며 시민들을 "구경꾼 유권자"로 보는데, 이는 민주주의의 핵심을 선거 혹은 투표로 환원할 때 나타나며 부정적인 표현으로 쓰면 시민들은 투표기계, 긍정적인 표현으로 쓰면 엘리트들의 공약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한국 정당주의자들은 정당정치에 대해 아무리 불만스럽고 많은 문제가 있더라도 현재는 정당정치를 대신하는, 보다 우월한 민주주의나 공동제 운영원리는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정당 외에 정치참여엔 관심을 두지 않거나 시민사회를 동등한 파트너로 여기지 않고 있다. 최창집은 "정당정치 대힌 시민정치를 앞세웠고, 정당조직보다 네트워크 형성과 온라인상 소통이 더 우월하다고 믿는 방식의 정치는 사회 집단들을 대표하기 어려운 무정형의 정치를 낳을뿐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렇듯, 시민정치는 대안이 아니라고 말하며 "현실에서 출발하라"라고 하는데 과연 정당정치만이 상실되어버린 민주주의를 회복하는데 최선의 방법인지 생각해 볼 필요성을 느끼며. 또한 앞서 월린은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진정한 행위자로 변하는 그 정치적인 순간에 존재한다고 말하였는데, 월린이 말하는 정치적인 순간은 어떠한 순간인지, 그 순간들이 현재 사회에서 존재할 수 있는지, 부족하거나 부재한다면 그 순간을 우리 평범한 시민들이 어떻게 되살릴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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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 정치철학 - 시민정치와 정당정치가 함께하는 민주주의 새로 짓기 | [시민이 짓는 새로운 민주주의라는 전망] 1강 | 선영이 | 2016.3.23 | |
시민이 짓는 새로운 민주주의라는 전망 2016.03.17 (목) 김만권 선생님 2014년 4월 17일에 열려고 했던 강의. 그러나, 바로 전 날 세월호 사건이 터져 열 수 없었다던 강의. 세월호 2주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한 아이의 아빠가 된 만권쌤에게 묵혀 뒀던 이야기를 꺼내 들을 수 있는 7주가 시작됐다. 언제나 그랬듯이, 강의는 한 편의 시를 읽는 것으로 시작이 됐다. 김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을 읽으며 ‘마치 그 집이 민주주의의 집 같았다’며 강의 제목인 ‘시민이 짓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시에서 영감을 받으셨다고 한다.
강의는 안철수 현상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됐다. 자고로 민주주의라는 사회에서는 시민이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필연적으로 결부되어야 하기 마련이지만 지금의 시민들은 선거철에만 반짝하고 동원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셸던 월린은 ‘도망자 민주주의’라고 얘기했다. 이 도망자 민주주의가 야기하는 문제는 대의 민주주의에서 대표자들조차 국민 또는 시민의 요구에 반응하지 않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 도망자 민주주의에서 우리는 그들을 심판할 수 있는 선거일에만 자유로운 시민이 된다.
이렇게 제도권 정치 안에서 시민들에게 반응하지 않는 정치인들을 보며 신물을 느낀 대중들은 정당이라는 기반 없이 정치를 하던 안철수에 대한 기대를 걸었다. (그리고 그는 이후 ‘새정치’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안철수의 정치’로 기대를 무너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기대는 그만큼 정당 민주주의에서 청중 민주주의로 한 발 퇴보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제도권 안 정치인이 더 이상 시민에게 반응하지 않으니 정당보다 인물이 더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집단이 투표하는 것이 아닌 한 인물에 대해 개인이 투표하는 경향이 커진 것이다. 인물의 이미지, 인물이 제기하는 쟁점들만을 비추는 미디어를 통해 주권자는 수동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이러한 청중 민주주의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당 민주주의와 시민 민주주의가 함께 어우러져야 할 것이다.
청중이 되어버린, 더 이상 적극적으로 정치를 들여다보지 않으며 이따금 자극적인 주제가 내던져질 때 냄비처럼 뜨겁게 달궈졌다 식어버리는 시민들. 우리는 ‘시민’이 대안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그러다 언젠가 ‘시민’이라는 단어에 대해 누군가는 엘리트의 단어같은 느낌에 이질감이 든다는 말을 했더랬다. 그럼 대체 ‘시민’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이며, 누구를 뜻하는 단어고, ‘국민’과, ‘인민’과는 어떻게 다를까?
첫 번째로 ‘국민’이다. 이는 나라를 이루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일본 근대화 시기에 ‘people’을 ‘국민’으로 번역하기 시작하며 우리나라에선 국민학교 등 통상적으로 쓰이는 단어가 되었다(사실은 인민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한 가지. 많은 사람들이 산업화 국가를 만든 것은 시장과 자본주의라고 생각하지만, 산업화 시기의 국가(commonwealth) 목적인 ‘공통의 부’를 만들기 위해서는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기 바빠 분열된 개인을 모으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니 ‘국민’이라는 단어는 민족국가의 형성, 그리고 산업화의 시작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어 두 번째로 ‘인민’이다. ‘people’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일상적인데, ‘인민’이라는 단어는 꽤나 낯설다. 아무래도 북쪽 사람들의 단어라는 인식이 있어서일게다. 그렇다면 ‘people’, 즉 인민이라는 단어를 일상적으로 쓰는 미국은 좌파국가일까? (이 말에 수강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national people’이라는 단어가 없는 것처럼, 인민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적 주권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앞서 민족국가의 형성 및 산업화와 맞물린 개념인 ‘국민’의 성격을 떨쳐낸 것으로 보면 된다.
마지막으로 ‘시민’이다. 해외에 나가 서로의 국적에 대해 물을 때. 많은 이들이 ‘nationality’란 단어가 아닌 ‘citizenship’이라는 단어를 쓴다. ‘nationality’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본인의 권리가 있든지 없든지 그 국적 자체를 물어보는 단어지만 ‘citizenship’은 정치적 참여권리가 완전히 보장되는 것, 즉 당연하게도 네가 사는 곳은 그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고로 안정적인 민주주의를 이룬 곳에서는 ‘국민’보다 ‘시민’이라는 단어에서 ‘people’의 속성이 더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시민’은 고대 아테네에서 탄생한 개념이다. 도시를 나누던 성벽 안에서는 인간이 아닌 법이 통치하는 곳을 뜻했다. ‘법으로 지배받는 사회에서 나쁜 법을 개선할 수 있을 때 진짜 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끝까지 얘기하는 용기를 가졌던 소크라테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철학하는 삶과 정치참여의 삶이 서로 상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처형되고 만다. 이런 그리스의 전통을 로마의 공화국이 이어받았지만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로마의 공화주의의 차이점은 민주주의가 반드시 ‘법의 지배’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셜은 시민권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이야기했다. 첫 번째로,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것 같은 시민적 시민권이 있다. 시민적 시민권은 자유주의 사상의 핵심적 가치를 담은 인신의 자유, 사상과 양심의 자유, 의사 표현과 언론의 자유, 재산 획득의 자유를 말한다. 두 번째로 정치적 시민권은 1인 1표의 보통선거권을, 마지막으로 사회적 시민권은 인간적 삶을 보장받는 복지와 분배의 내용을 받는 권리를 얘기한다. 받아야 하는 권리에서 우리가 요구하지 않는 권리로 바뀌고 있기도 하다. 언제 우리가 국가에게 그런 것들을 받았냐는 듯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사람들끼리 공존하는 곳이 바로 ‘사회’의 정의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의 가치를 두고 매일을 싸울 수밖에 없음에도 무너진 민주주의의 잔해만 가득한 이 땅에서 어떤 민주주의를 함께 지어나가야 하는 것일까?
‘시민으로의 당신은, 단순한 투표 이외의 수단 말고도 어떻게 그 부분이 되고 어떻게 당신을 표현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라고 얘기한 미국의 첫 여성 대법관 샌드라 데이 오코너의 말마따나 이를 아는 시민들이 이 시대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아니, 되어야 한다. 앞으로 7주 동안의 강의가 이를 증명해줄 수 있는 강의가 되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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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톡> "우리는 어떻게" | 월례특강 참톡.'우리는 어떻게'-듣도 보도 못한 정치 | alskdj2010 | 2016.3.10 | |
‘정치는 공학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러 정치현상에 대해 컴퓨터나 여론조사 등의 계량적·통계적 방법을 사용해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비롯된 말이지만 이와 같은 방법을 이용해 정치현상을 파악하는 것은 인간의 생물적·심리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기계적으로만 보는 경향을 띠게 되며 과학·공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정치는 공학이 아니라 Art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기와 마음이 같은 사람들이 있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사람이 있을 때 더욱 강해지고 시너지가 생기는 점 등을 통해 공학은 Art라고 생각한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의 사회운동을 4개로 나누어 보았다. 1960년~70년대는 반독재 민주화운동 시대로 활동가와 시민의 정치적 갭은 컸고 비합법적 조직운동이 이루어졌다. 1980년대는 체제변혁에 대한 사회운동이었으며 이전과 같이 활동가와 시민의 정치적 갭은 컸고, 비합법적 조직운동이 이루어졌다. 1990년대~2002년에는 다양한 시민사회단체가 설립되었으며, 시민단체의 연대를 통한 낙선운동이 이루어졌으며, 이때부터 단체의 사회운동이 감소하고 자발적 개인의 사회운동이 증가하였다. 2002년 이후에는 주한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압사 사건 촛불집회, 노무현, 제 16대 대통령을 선출한 선거가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는 네티즌과 시민단체의 사회활동이 쌍벽을 이루는 시기라 할 수 있다. 200년 이후 세계 사회운동의 특징은 5가지를 말할 수 있다. 지도자 없는 지도력, 자발적 참여와 다양한 구조, 조직이 없는 조직, 온-오프라인 융합, 정당과 사회운동단체의 혼종이다. 다수결의 원칙, 이념중심, 특권계급, 권력집중, 하향식, 대의제 정치와 같은 정당정치의 구조적 한계가 나타나고 있다. 바로 부패, 무능, 관료주의, 정치적 무관심, 정치적 독과점 같은 문제들이다. 이에 따라 세계정치는 변하고 있다. 풀뿌리 정치와 참여형 미디어, 직접민주주의·리퀴드 민주주의·대의제의 상호보완, 수평적 네트워크, 집단적 의사결정, 소통하는 리더십과 같은 직접소통과 자발적 네트워킹의 시대로 가고 있다. 스페인의 포데모스, 디사이드 마드리드, 이탈리아의 오성운동, 핀란드의 오픈 미니스트리의 사례처럼 세계정치는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왜 우리는 못하고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인물이 없어서’, ‘공동체의식이 약해서’, ‘정치의식이 낮아서’, ‘기술이 부족해서’ 등의 이유가 아니라 바로 정치적 상상력이 낮고, 정치 경험이 우리를 옥죄는 데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이진순 선생님께서 와글을 설립하였다. 와글은 ‘We All Govern Lab' 시민 모두가 정치주체가 되어 우리 사회를 통치하고 운영한다는 문구를 바탕으로 정치혁신 실험을 위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꿈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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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북 토크 "우리는 왜" | 신년 북 토크 "우리는 왜" 제 3강 <대한민국은 왜?> - 김동춘. | 마음천천히 | 2016.2.25 | |
신년 북 토크 "우리는 왜" 제 3강 <대한민국은 왜?> - 김동춘.
2016년 2월 18일 목요일, 오후 7시~9시
한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불행한가? 그 원인을 알아야 전망을 볼 수 있다. 오늘의 한국을 만든 것은 4번의 전쟁(청일전쟁, 러일전쟁, 태평양 전쟁, 한국전쟁)이다. 이런 위기가 한번 발생하면 100년의 역사가 그것에 의해 규정된다. 전쟁, 외교, 국방은 우리 일상과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정치, 경제, 사회의 판을 완전히 바꾼다. 지금 우리나라 주변에서 진행되는 것이 120년 전의 청일, 러일 전쟁 시기와 비슷하다.
1. 청일전쟁 :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의 주권’을 두고 한반도에서 서로 전쟁을 벌였다. 그럼 그 전에 조선의 주권은 누구에게 있었는가? 조선은 중국에 사대를 하는 국가로 왕의 책봉권을 청나라가 가지고 있었다. 내부 정치는 한국인들이 결정하였으나 최고의사결정(국방, 안보, 외교)은 조선이 독자적으로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청나라는 조선을 차지하려는 주변국가에게 큰 걸림돌이었다. 이러한 청나라가 손을 떼게 하는 것이 청일전쟁이다. - 발단 : 고종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병사를 요청했다. 조선에 청나라가 오려하니 일본이 허락 없이 들어와 청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곧바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내려갔다. - 일본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이유 : 만약에 동학군이 서울을 점령하거나 서울 근처까지 왔다면 조선이 백성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 위로부터의 개혁이 있었을 것이고, 정권은 국민의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권은 외세가 함부로 할 수 없으므로 일본의 입장에서는 동학군을 진압해야한다. - 결과 : 일본이 이기고, 조선은 사실상 모든 통치의 보호국이 되었다. 동학의 우두머리인 전봉준은 재판을 통해 처형되었다. 그 재판의 판사는 조선인이나 뒤에서 컨트롤 한 것은 일본군이다. 이 사건은 이후 120년의 역사를 좌우한다. 우리 사회의 큰 패러다임은 이때 이후로 크게 바뀌지 않았다.
2. 러일전쟁 : 러일전쟁의 승리는 일본이 조선에 대한 확실한 독점권을 가지게 된 것으로써 그 이후 시작될 100년 동안의 조선의 비극의 시작이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수 있도록 가장 강력하게 뒤를 밀어준 나라는 미국과 영국이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러시아보다 일본이 조선을 먹는 것이 자기들에게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전쟁비용의 상당부분을 미국이 대주었다. - 1905년 카츠라 테프트 조약 : 카츠라는 일본 외무부장관, 테프트는 미국 국무부장관의 이름이다. 이들은 뒤에서 조선은 일본이, 필리핀은 미국이 먹기로 하는 밀약을 맺었다. 미국은 언제나 일본이 동아시아 정책의 핵심이고, 일본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며 태평양 전쟁이라는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친구였다. 한국은 그 중간에 끼어있는 나라이며 과거나 지금이나 변방에 있는 부차적 고려사항이다. 지금 사드배치 문제는 그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120년의 반복이다. 남북이 가까워지는 것을 불편해하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며 일본 역시 한반도의 통일을 내켜하지 않는다. 일본의 우익들은 북한의 위협을 과장함으로써 전쟁을 할 수 있는 일본을 만들려고 한다. 자위대를 보낼 지역이 어디가 있을까? 우리의 동의 없이는 한국에 못 들어올까? 전쟁이라는 위기가 발생하면 동의가 어디 있는가? 120년 전에는 동학군이, 120년 후에는 북한이 명분이다.
3. 한국의 국제적 지위 : 한국이 군사적 주권을 행사하지 못 한지 120년이 다 되고 있다. 군사적 주권이 없으면 정치적 주권도 없다. 왜냐하면 국제정치에서는 전쟁이나 그런 상황에서 정치위에 군사가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주권이 없으면 국가가 국민의 입장에서 정치·정책을 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한국은 여전히 반 주권밖에 누리지 못 하고, 국민들은 반의 반 주권밖에 누리지 못 한다. 왜 군사·정치적으로 주권을 갖지 못 한 경우, 국민들이 반의 반 주권밖에 누리지 못 하는가? 첫째, 정책의 최우선이 북한과의 대결구도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북한과의 대결을 위해서는 그 어떤 담론도 1순위에서 2순위로 밀리게 된다. 둘째, 국민들의 불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대변해 주지 못하는 것은 곧 주권의 상실을 뜻한다. ① 역사적으로 한국에 진보, 좌파, 사회주의 정당, 노동당이 없는 이유를 살펴보면, 친일파가 권력을 잡으면서 민족주의의 가치, 정의의 가치를 존중했던 사람들,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이 다 제거되었다. 이후 사회주의 세력이 제거되었다. 그 다음에는 남아있는 우익들 중 중도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6.25때 다 제거 되었다. ② 소신 있는 사람들도 정치권에 들어가기만 하면 소신을 내팽겨 친다. 왜냐하면 다음번에 당선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당선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자금이 필요하다. 정치자금은 누가 주느냐? 돈 많은 사람들이 준다. ③ 우리나라 경제활동 인구 2500만 중 1700만이 노동자다. 그런데 이 1700만 노동자를 대변할 수 있는 정당과 정치가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공권력 혹은 대기업으로부터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내가 국민으로서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각종의 법, 언론, 시민단체가 나를 보호해주지 못한다.
4. 주권 부재의 원인 :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조건이 문제다. 그 조건은 우리가 스스로 민의 힘으로 정치나 사회를 만들고, 바꾸고, 쟁취해갈 수 있는 힘이 아직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결국 국민의 편에 설 수 있는 사람이 그 사회를 다스리는 위치에 올라갈 수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프랑스 혁명은 100년 동안 진행되며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은 그 과정을 통과했다. 그 나라에서 엘리트가 된 사람들은 적어도 국민을 위해서 일한다는 전제 위에서 일한다. 또한 위기가 닥쳤을 때 자기를 희생한다는 전제가 되어있는 사람들이 그 위치에 올라간다. 민이 스스로 쟁취한 권력이 아닌 한계가 오늘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말해주는 것이다.
5. 마무리 : 우리는 제대로 된 근대국가를 만들었는가? 헌법에 나온 내용을 국민들이 스스로 암송해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조그만 것이라도 헌신해 본 적이 있는가? 소리한 번 지른 적이 있는가? 소리를 지른 사람을 곧바로 가두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여러 가지 명분을 활용해서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는 안보의 논리를 깨고 넘어서야만 우리가 제대로 된 국가를 만들 수 있다. 그러면 국민들이 가난해 질 수는 있지만 불의에 목숨을 잃지는 않는다. 해고될 수는 있어도 곧바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안보, 국가, 외세의 문제가 국민의 생활하고 연결되어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겪었던 일을 성찰할 수 있는 국민들의 집단적인 지혜와 지성이 결국은 중요한 문제다. 질의응답
1. 시민이나 약자의 불의를 대변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려면 프랑스 혁명 같은 거대 유혈혁명이 일어나야 하는 걸까요? 점진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바뀌기 힘든가요? 과연 이 순간에 평범한 난 무엇을 해야 우리의 주권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 사람들이 왜 정치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느냐라는 질문은 잘못된 것 같다. 소통이 되면 그 다음에 행동이 나온다. 모임, 동아리에서 친구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해주고, 그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이미 빼앗겨버린 자기의 감성을 있는 그대로 되찾게 해주는 것이 이 사람들을 행동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표출의 방식은 벽을 보고 표출을 하던지, 댓글을 달던지, “이건 틀렸어.”라고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던지.. 이런 것을 통해서 커뮤니티가 살아있게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야 말로 행동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정치적 해결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해결 문제라고 본다. 정치적 행동을 하기 전에 문화적인 소통이 되어야만 그 다음에 정치적인 행동이 나온다. 자기가 속해있는 일상의 영역에서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우선 옆 사람들에게 “어, 이거 곤란한데, 이거 아니지 않아요? 이렇게 해선 안 되는 것 아닌가요?”라고 이야기를 건넬 수 있으면 된다. 그러면 우리 사회가 살아난다. 그렇지 않고 사람들이 전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살아날 수 없다. 2. 요즘 동아시아의 절망을 보는 것 같습니다. 동아시아 3국이 상호 협조하여 세상의 리더로 거듭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요? : 한국은 양쪽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외나무다리를 건너듯이 가야만하는 실정이다. 동아시아 삼국의 단합은 미국이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은 양쪽 사이의 철저한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게 가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3. 변화 가능성 : 장기적으로는 서민들의 이익을(요구를)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이 의회에 진출해서 제 3당정도의 캐스팅보드는 지어야만 여당과 야당이 함부로 못한다. 그래야만 국민들도 주권을 가진 국민이 된다. 그러려면 사회가 바뀌어야 가능하다. 분노를 결집할 수 있는 거미줄 같은 시민사회가 필요하다. 이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우리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시민사회에 참가를 하던, 발언을 하던) 혼자 있어서는 안 된다. 아주 조그마한 행동이라도 하고, 몇 사람이라도 모아서 공부모임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당장의 정치변화는 어렵지만 다음다음다음정도에는 변화의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