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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명 | 강좌후기 | 글쓴이 | 날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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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독서클럽 – 혼자 읽기 어려운 책 함께 읽기 2 <위기의 국가> | [김만권의 독서클럽-위기의 국가] 3강: 제2부 근대성의 위기 | 혠벗 | 2015.5.21 | |
'1부 국가의 위기'에서 글로벌리제이션과 그에 따른 위기와 국가의 변화에 대한 두 학자의 생각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몇몇 지점에서 두 사람의 생각이 미묘하게 다르기도 했으나, 현재를 '위기'로 본다는 점, 근대 국민국가가 더 이상 국민 보호라는 자신의 역할을 하려들지 않는다는 점, 그 결과 개인들이 스스로를 보호해야하는 상황에 처했다는 점 등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2부 근대성의 위기'에서는 두 사람의 견해가 갈리고 서로 설전을 벌이는 무척 흥미로운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신 강의록에 100페이지 가량 되는 2부 전체가 무척 꼼꼼하고 이해하기 쉽게 요약.정리 되어 있어, 저는 두 사람의 견해가 갈리는 포인트에 대해서 정리.인용 하는 것으로 후기를 대신하려 합니다. [Point 1] 근대는 과거인가 현재인가 보르도니는 '이미 근대와 포스트 모더니즘을 건너왔다. (아직 어떤 시대인지 알 수는 없지만...) 현재는 또 다른 시대'라고 봅니다. 세계대전 이후 노동의 변화, 탈물질화, 이데올로기의 쇠락이 근대의 붕괴를 보여주며, 그 후 혼란했던 1970년부터 20세기 끝날 때까지가 포스트 모던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바우만은 '우리는 근대가 끝났다는 것을 당장 확신할 수 없으며, 여전히 (액체화 된) 근대에 살고 있다'고 봅니다.
[Point 2] 근대국가가 떠난 자리에 설 새로운 주체는 누구인가? 보르도니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남긴 하나의 가능성으로 다중 (multitude)이 새로운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다중'은 인민(the people), 시민(citizen), 국민과는 구분되는 개념으로 주권자와 사회계약을 맺지 않고, 계속해서 (국가라는) 정치사회 바깥에 있던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보르도니는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면서 단련된 다중으로서의 개인이 국민국가의 빈 자리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한편 바우만은 '우리는 여전히 공위기 상태, 즉 주체의 부재에 따른 위기에 직면 해 있으며, 보르도니가 말하는 다중은 해답이라고 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두 가지 포인트에 대한 두 사람의 신경전이 젠틀한 단어들 사이에서도 비쳐보여 읽는 내내 매우 흥미로웠던 파트였습니다. 수업을 들으시는 분들은 두 사람 중 누구에게 좀 더 설득 당했는지, 혹은 두 사람의 견해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이야기를 더 나눠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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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전문가와 함께하는 나라살림 흥망사 - 국가와 문명의 흥망성쇠, 나라살림의 비밀 | [예산전문가와 함께하는 나라살림 흥망사] 4강 아시아는 어째서 먼저 흥하고 먼저 쇠락했는가 | 아비 | 2015.5.18 | |
지난 시간에 이어 이번 시간에는 서양의 흥망과는 조금 다른 아시아의 흥망을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특히 오랫동안 아시아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중국의 나라살림을 주로 살펴봤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특히나 고대 아시아 국가의 뛰어난 기술력과 제도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어째서 이런 훌륭한 기술력과 제도를 보유한 아시아가 유럽에 뒤처지게 되었는지 또 한번 고민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점점 강의가 진행될수록 이 강의의 본질적인 핵심에 다가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강의를 통해 역사 속 국가들의 흥망사를 살펴봄으로서 또 우리나라와도 연관되어 있는 부분들까지도 배워나가면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나라의 나라살림을 바라볼 수 있을는지, 한국의 나라 살림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등에 대해 배우는 것을 더 기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번 강의에서 첫 번째로 확인 했던 것은 아시아 문명들의 뛰어남이었습니다. 유럽의 문명들과 비교해 봐도 전혀 기술적으로든 체제적으로든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죽은 제갈공명이 중동 현대사를 힘들게 하다” 이 말뜻을 알아보기 위해 우선 중국의 삼국시대부터 알아보아야 합니다. 다들 알다시피 서기 208년 중국에서는 조조, 손권, 유비의 위(魏), 오(吳), 촉(蜀) 세 나라가 자웅을 겨루는 삼국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중 가장 열악한 곳은 유비의 촉나라였습니다. 촉은 영토의 대부분이 내륙 깊숙한 산간 지역이고 인구도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적어서 삼국 중 불리한 조건을 가졌고 가장 큰 문제는 바다에 접하지 않아 소금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소금은 역사적으로 모든 나라들에서 큰 문제가 되었던 필수적인 자원이었습니다. 소금으로 인해 반란이 일어났던 적도 많았고 실제로 우리 식생활만 생각해보아도 소금은 없어서도 안 될 소중한 자원이라는 것을 다들 아실 겁니다. 당연히 촉나라도 소금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큰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바다로 갈 수는 없던 상황에서 제갈량은 소금을 구하는 방법을 고안해냅니다. 그것은 바로 지하수 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염수층을 이용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염수층은 소금이 녹아있기 때문에 소금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위해서는 고도의 굴착 및 시추술이 필요했고 다시 말해 정교한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무려 기원전 4세기경부터 중국은 고도의 기술력으로 소금을 캐냈습니다. 게다가 이런 과정에서 석유와 천연가스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기술력이 프랑스 선교사에 의해 1828년 유럽으로 전달 되었습니다. 게다가 미국은 자국의 철도 건설에 동원된 중국 노동자에게 이 시추술을 배웠고 1859년 이 방식을 최초로 이용했습니다. 당연히도 이런 기술의 전달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옵니다. 석유의 대량공급으로 인해 산업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합니다. 이것이 곧 대량 생산 사회를 만들어 낸 첫걸음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술은 왜 중동을 곤란하게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석유가 잔뜩 매장되어 있는 중동이 전 세계의 관심, 혹은 강대국의 관심을 독점한 탓입니다. 두 번째로 살펴본 제도는 환관제도였습니다. 환관이 중국사에 처음 나타난 시기는 적어도 서기 2500년 이전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고 합니다. 수나라 이후 중국 역사는 환관을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환관의 역할이 커졌습니다. 황제와 사대부가 권력 갈등을 빚게 되면 황제가 자신의 측근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환관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따라서 비약해서 말하면 중국사를 은밀하게 지배했던 관료집단을 환관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보통의 생각처럼 환관이 꼭 나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들이 부패했던 집단이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중국 고대사의 환관 구자량이라는 자가 휘하의 환관들에게 말한 ‘군주를 조종하는 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천자를 한가하게 해서는 안 된다.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천자가 다른 일을 생각할 여유를 주지 말아야 한다. 독서를 즐기거나 유가(공부하는사람)들을 가까이하게 해서도 안 된다. 만약에 황제가 역사를 알고 우려하고 있다면 우리들은 멀어져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환관제도는 과대한 힘을 가진 관료집단의 부패가 역사를 어떻게 바꾸는지 생각해 볼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관료집단을 생각하게 합니다.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권력에 편승하는 관료집단의 존재가 우리나라를 얼마나 병들게 하고 있는지 씁쓸해지는 대목입니다. 이외에도 중국은 여러 훌륭한 제도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국가 차원에서 토지를 정비하여 적절한 토지제도를 도입하고 조세를 위해 보다 더 정확한 통계체계를 쌓는 한편 보다 더 효과적인 조세제도를 도입시켰지요. 경제부분에서도 여러 국가적 차원의 통제를 통해 국가 경제가 보다 더 흥할 수 있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여러 문제를 가져온 수나라의 운하 건설 역시 후에 당나라의 경제 통합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지요. 물론 이런 훌륭한 역사를 가진 대국 중국에도 많은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부패한 관료집단과 정치적인 문제들이 바로 그것이지요. 아마도 다음 강의부터 우리가 배울 한국의 흥망에도 바로 이러한 문제들이 가득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하루빨리 우리의 나라살림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기를 희망하며 이만 글을 마치겠습니다. [예산전문가와 함께하는 나라살림 흥망사] 1강 고대문명의 흥망은 어떻게 달랐을까. 다시보기(클릭) >> [예산전문가와 함께하는 나라살림 흥망사] 2강 세계 제국의 흥망은 어떤 비밀이 있을까? 다시보기(클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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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독서클럽 – 혼자 읽기 어려운 책 함께 읽기 2 <위기의 국가> | [김만권의 독서클럽-위기의 국가]1부 국가의 위기 | 박윤채영 | 2015.5.14 | |
<위기의 국가> 1부. 국가의 위기
위기의 국가는 보르도니와 바우만의 대담이 담긴 책입니다. 때문에 같은 것에 대해 다르게 해석하고 판단합니다. 두 학자의 입장을 그대로 정리해서 옮겨보겠습니다.
1)위기의 정의 위기Crisis 는 그리스어 κρίση에서 나온 말입니다.
보르도니 Carlo Bordoni 보르도니는 이 단어에 대해 “고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판단’, ‘재판 결과’, ‘전환점’, ‘선택’, ‘결정’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과 여기에서 ‘판단 기준’ 등을 뜻하는 ‘크라이티어리언critierion'과 ‘판단에 적합한’, ‘매우 중요한’ 등을 뜻하는 ‘크리티컬critical'이 파생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위기가 가진 ’전환‘, ’결정‘, ’판단‘, ’선택‘의 의미에 주목합니다. 전과 다른 상태로 바뀌어야 하는 때 또는 바뀐 결과가 위기의 진짜 의미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 날 위기는 주로 경제 분야에 침체가 일어났을 때로 표현하는 데에 쓰이고 있습니다. 보르도니는 이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위기‘탓으로 돌리고 있는 거라고 봅니다. 이것을 통해 개인들은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명분을 갖습니다. ’세월호 문제를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 경제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라는 말이 실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위기’라는 단어는 ‘국면’이나 ‘공황’과 같은 단어를 대체하게 되었습니다. 보르도니는 ‘국면’이란 ‘새로운 번영의 단계로 가는 과도기’를 뜻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교적 단기적이며 극복해야 할 것보다는 재충전의 시기입니다. ‘공황’은 국면보다 장기간적인 침체로 회복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케인스의 이론으로 극복될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지금의 위기는 그동안의 것들과 다릅니다. ‘국면’보다 장기적이며 ‘공황’ 때처럼 이론과 정책으로 통제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금융 중심 경제에서는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거나 투자가 발생하기 보단 ‘자본의 이동’으로 돈을 확장하기 때문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니 소비는 줄고 새로운 투자가 없으니 줄어든 소비로 인한 손실을 보상하려 기업은 값을 올리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편에선 아직 위기를 절감하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가 내게 닥치기 전에 있을 때 즐기자! 는 마인드로 소비하는 일명 ‘타이타닉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인간의 노동만이 새로운 가치 또는 부를 창조한다.” -칼 마르크스-
현재의 위기의 특징은 ‘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있다’는 것입니다. 보르도니는 우리가 위기를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특히 ‘공포’에 압도되지 말고 파도를 타듯, 위기를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야 합니다.
바우만Zygmunt Bauman 바우만은 ‘위기’의 의미 중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른다는 ‘무지와 불확실성’에 주목합니다. 위기란 ‘진단과 동시에 행동이 필요하다는 뜻’인데 이것은 원하는 방향으로 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결정하여 행동해야 한다는 모순을 갖습니다. 현재의 위기는 이 어원으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이 바우만의 진단입니다. 즉, 선택한다고 원하는 대로 될 가능성이 별로 없는 위기라는 거죠. 그리고 그 원인을 ‘정치와 권력의 분리’로 보고 있습니다. 과거 공황 때만 해도 사람들은 의지할 대상이 있었습니다. 바로 ‘국가’입니다. 그때의 국가는 ‘사태를 자기 의지와 일치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강한 국가’였습니다. 결정하고 행동하고 그 결과가 원하는 대로 되도록 강제할 수 있는 힘을 가졌었다는 거죠. ‘결정하는 것’이 정치이며 ‘결정이 진행되도록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권력입니다. 1970년대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국가는 국민들에게 해주어야 할 역할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보편적 복지는 국가의 재원 낭비로 여겨지게 되었고 경제 발전을 위해 개인이 그 책임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시작되면서 교육, 보험, 교통, 안전과 같은 국가의 역할은 시장에게 넘어갔습니다. 개인들은 이제 국가의 역할을 시장에서 구매하는 소비자가 됩니다. 지구화로 인해 이제 시장은 지구적 차원으로 거래됩니다. 초국가적 기업들은 국경을 넘어서 세력을 키우고 확장하고 있습니다. 시장이 국가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빠져버린 국가의 역할은 여전히 비어 있습니다. ‘공위기’상태입니다. 이제 시장은 국가가 관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국가는 그것을 관리할 수단도, 자원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국가에게 남은 것은 정치뿐인데 결정을 해도 실행 할 능력이 없습니다. 국가는 자신의 위기를 치료할 능력이 없습니다. 남은 정치의 능력을 끌어올려 ‘주체의 부재’를 채우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2)국가 없는 국가주의 국가의 역할에 지구적 세력들이 개입되면서 각 국가들은 상호의존성이 높아졌습니다. 한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전염되는 것이지요. 그것들은 한 국가 차원에서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의 2차적 문제해결 기구 거버넌스들이 많이 생겼지요. WTO, EU 같은 것들이요. 이제 국가의 의미는 달라졌습니다.
보르도니 전지구적 차원의 문제해결 기구들이 생기면서 지구적 기구들이 국내에 개입하기도 하고 지구적 차원으로 발생 된 것들을 지역적(국내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 생겨납니다. 문제의 발생 원인과 해결이 분리되어 진행되는 것이지요. 한편 지구적 세력들은 문제를 통제하고 원하는 대로 풀어나갈 권력을 가졌지만 지역 정치는 권력을 빼앗겼기 때문에 지구적 세력들의 권력에 종속되었습니다. 지역의(국내의) 법을 따를 필요 없는 지구적 세력들이 원하는 바를 결정하면 국가는 해결해내야 합니다. 이것을 바우만은 ‘현대도시가 거대한 쓰레기통’이 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국가와 시민들의 관계가 변화하고 허술해지자 그 부분을 거버넌스가 채우게 됩니다. EU가 그 대표사례입니다. 그러나 거버넌스에는 민족 국가에 있는 ‘집단적 동일화 요소’가 없습니다. 때문에 시민들은 공동체에 대한 욕구를 정부가 아닌 다른 데서 해소하려고 방법을 찾게 됩니다. 정치의 혼란과 문제 해법들의 혼란이 반정치 감정을 키우게 되고, 이것이 공동체 참여 욕구와 결합하게 되면 전체주의나 민족주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국가는 역할을 시장에 넘겼습니다. 국가의 정치와 권력의 분리는 국가가 책임을 다 하지 않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위기의 국가는 공공복지를 제공하고 보장하는 기구가 아니라 시민에 빌붙어서 오로지 스스로의 생존에만 신경 쓰는 기생충이 됩니다. 시민들은 개인으로 생존하기 위해 점점 시장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우만 현재의 정부에서는 서로 의사결정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중의 구속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뽑는 유권자로부터의 압력과 지구적 세력들의 압력이 그것들입니다. 그래서 정부들은 자꾸, 중요한 사항일수록, 결정을 질질 끕니다. ‘민주주의의 본질적 특징은 인민이 주기적 선택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점’인데 이것은 영토 내 주권 보장을 우선으로 한 베스트팔렌 모델에서는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지구적 세력들의 영향을 받는 지금 시민의 선택의 영향력은 축소되었습니다. 국가가 지구적 세력들에게 역할을 떠넘길수록 시민이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은 작아집니다. 시민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 또한 작아졌습니다.
“정부는 위기의 피해자 중 하나이다. 그리고 각 정부가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취하는 조치가 모든 것을 더 불안정하게 만든다.” -존 그레이
현재의 위기는 주체의 위기이며 영토적 주권의 위기입니다. 국가가 정치와 권력을 다 갖고 있었던 시절의 방식으로는 현재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지구적인 문제를 지역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지금, 권력을 상실한 국가는 혼자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시민들은 국가에게 해결을 기대하지 않게 됐으며 새로운 집단행동의 수단들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광장에서, 공원에서 말입니다.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하랄트 벤처는 이 현상의 근본적 원인들을 대중들의 인식의 발전에서 찾고 있습니다.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오늘날 분노가 우리들 안에 존재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을 털어내려면 광장으로 공론장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 바우만의 의견입니다. 그리고 EU는 또 다른 하나의 실험입니다. 지구적 차원에 지역을 만들어 분열된 원인과 해결을 합치시키려는 실험이지요. 바우만은 쿳시의 질문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전달합니다.
“삶이 왜 경주에 비유되어야만 하는가, 혹은 국민경제들이 건강을 위해 사이좋게 조깅하지 않고 어째서 서로 앞 다투며 달려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분명 신은 시장을 만들지 않았다. 왜 세계는 부지런히 협력하는 벌집이나 개미집이 아니라 검투사끼리 죽고 죽이는 원형경기장이어야만 하는가?”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3)국가와 민족
보르도니 지구적 차원으로 세계가 움직이면서 국가의 경계와 민족의 구분의 의미가 모호해졌습니다. 절대적 주권은 이제 지구적 세력보다 약한 것이 되었습니다. 베스트팔렌 모델에서 국경은 물리적인 것과 동시에 정치, 법, 경제적인 것으로 힘과 관계들의 균형을 유지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균형은 깨졌습니다. 정치, 경제는 지구적 세력들의 영향을 받게 되고 그들은 법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정보의 확장은 민족 정체성, 문화 정체성을 파열시킵니다. 그것을 유지하려 할수록 지금의 세계에서 도태됩니다. 정부는 자기 마음대로 시민들을 통제할 수 없게 됐습니다. 잃어버린 권력을 찾기 위해 정부들은 경제적 동맹을 모색해왔습니다. 시장이요. 정부는 시장과 손을 잡고 국가로써의 권력과는 전략적인 이별을 합니다. 권력과 정치는 다른 차원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의 권력과 정치의 분열은 전략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국내 정치의 묵인이 없다면 초국적 권력들의 임무 수행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게 초국적인 경제 권력에 의존하는 정부가 되었습니다. 정부의 대응 방식의 이면에는 신자유주의 철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실용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초국가적인 이동의 자유를 허용하되 원래 국가의 책임을 대부분 사적 부문으로 넘겼습니다.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통치하는 새로운 지배 형태. 이것이 바로 국가 없는 국가주의입니다.
바우만 주권의 의미는 ‘선택의 특권’입니다. 법을 일시 정지 시키고 법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제할 수 있는, 예외를 둘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지금의 국가전략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 같습니다. 울리히 벡은 독일의 메르켈 총리의 정치 전략을 일컬어 ‘메르키아벨리즘’이라고 했습니다. “메르키아벨리의 권력은 조심스러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욕구에 기초하고 있다. (...) 강제 수단으로서의 주저함. 이것이 바로 메르키아벨리의 방법이다. 그것은 회수하고 유예하고 신용을 거부하겠다는 협박이다.” 자신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협박을 통한 통제가 신 국가전략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략이 나올 수 있는 이유는 과거에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있던 상호 의존 관계에서 한 쪽이 일방적으로 깨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의존 관계는 언제든 바꿀 수 있습니다. 국내 인건비가 비싸면 인건비가 싼 국외로 가면 되는 거지요. 이 국가와의 거래가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국가와 협상하면 되고요. 때문에 ‘양호한 상태에 있게 할 필요성은 자본에게 더 이상 ’경제적 의미‘가 없습니다.’ 의존관계의 붕괴는 경쟁, 이기주의, 사회 분열, 불평등을 촉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확실성, 불안, 두려움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전략에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습니다. 관계자들이 완전히 자격을 잃게 되는 수준까지 이르러서도 안 되며 모두 협상 테이블에 있도록 붙잡아야 합니다. 어쨌든 함께 지내야 합니다. 일방적인 협박은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4)홉스와 리바이어던 근대국가는 리바이어던이었습니다.
보르도니 리바이어던은 본래 성서적 전통에서 몸체가 수많은 인간들로 이루어진 괴물입니다. 홉스는 근대국가를 전체의 규칙성이 머리에 의해 보장되고 각 개인은 그 안에서 전체의 생명 유지를 위해 임무를 수행하는 리바이어던이라 일컬었습니다. 주권자는 전체의 행위를 결정하고 안정을 유지하려 노력합니다. 각 구성원들은 주권자에게 행위 결정권을 위임하며 주권자는 개인들을 대신해 혼란에 대한 해법을 고민하고 결정하고 실행합니다. 개인보다는 전체의 통일성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근대국가, 리바이어던입니다. 그러나 근대국가는 사회적 차별을 먹고 삽니다. 전체의 통일을 위해 이질적인 것들은 배제되고 삭제되어야 하는 존재가 됩니다. 현대의 대의민주주의는 그와 다릅니다. 주권자의 결정에 대해 고민 없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주권자를 뽑고, 주권을 위임합니다. 대표집단 또한 이질적인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어 국가의 동일성을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각기 다른 의견들이 합쳐진 것이 국가입니다. 주권자의 권위는 아래에서부터 주어지며 위임은 절대적이고 원칙은 권력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바우만 근대 국가의 핵심 역할은 질서 유지였습니다. ‘베헤모스’라는 인간의 무질서한 본성을 리바이어던이 통제하는 것입니다. 통제와 질서 유지에 실패하면 국가는 실패한 국가가 되는데, 이것 외에는 어떤 경우에도 국가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질서’가 유일한 국가의 평가 기준이 됩니다. 국가는 질서 유지를 위해 감시와 통제의 방법으로 벌을 주고 권력을 행사하는 하드 파워를 사용합니다. 판옵티콘과 같은 수용소도 그 방법의 하나입니다. 오늘날의 국가가 사용하는 힘은 다릅니다. 자발적 감시와 복종, 질서 유지를 유도하는 소프트 파워가 현대 국가의 방식입니다. 시민을 통제하려 한다는 점에서 근대 국가와 다름없습니다만 시민이 자신이 통제와 감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매우 다릅니다. 신자유주의의 기술의 발달은 개인들의 정보 수집을 용이하게 해주었습니다. SNS와 같은 수단은 시민들의 고해성사를 공개해줍니다. 개인들이 부각되면서 과거에는 위협과 삭제의 대상이었던 개성, 다원성이 훌륭한 것으로 평가 받고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요소로 여겨집니다. 국가의 역할도 바뀌었습니다. 노동과 자본을 연결시켜주는 것이 주 역할이었던 국가의 기능은 이제 시장과 소비자를 연결시켜주는 주선자가 되었습니다. 국가는 자본가의 투자를 유도하고, 소비자의 소비를 유도하면서 시장에 국가의 책임을 상품으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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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독서클럽 – 혼자 읽기 어려운 책 함께 읽기 2 <위기의 국가> | [김만권의 독서클럽-위기의국가] 제1강 지구화의 조건과 국가 | rohsawook | 2015.5.7 | |
4월 30일, 김만권의 독서클럽-혼자 읽기 어려운 책 함께 읽기2<위기의 국가> 수업이 시작됐습니다. 본격적인 수업 시작에 앞서 강좌에 대한 의견들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1)강좌에 대한 기대와 신청동기는, 많은 분들께서 그 전에 들었던 김만권 선생님 수업에 대한 높은 만족도와 선생님에 대한 신뢰로 이 수업을 이어 수강하시는 분들이 가장 많았습니다. 또한 강좌에서 다룰 사회학자인 ‘바우만’에 대한 관심이 동기가 되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2) 국가에 대해 평소 가지고 있던 질문은 무엇인지 또한 나누어보았는데요, 국가의 의미 그리고 정체성은 무엇인가, 국가와 시민의 관계, 국가의 필요성, 국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 우리는 언제까지 국가 권력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가 등의 생각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나누어 본 국가에 대한 질문들이 4주간의 <위기의 국가> 수업이 진행되는 과정에 서서히 답을 찾아가길 바라봅니다.
세계적인 석학 지그문트 바우만(오른쪽)과 이탈리아 사회학자 카를로 보르도니. 바우만과 보르도니의 “위기의 국가”를 본격적으로 읽기 위해, 1강에서는 지구화에 입문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바우만은 ‘액체근대(liquid modernity)’ 개념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 개념은 그 전에 얘기하던 근대성과는 조금 다른 개념의 근대성인데, 본래 ‘modernity’ 개념은 전통과의 단절, 합리화, 신과 봉건주의에서 탈피한 이성과 자본주의를 의미하며 그 개념이 매우 명확합니다. ‘liquid modernity’는 ‘globality’와 관련 있는 개념인데, globality는 상호의존성이 높다는 것 이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것이죠. 누구에겐 기회가 되고 또 누구에겐 위기가 되는데, 선명하지 않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경계가 움직이고 있다’ 즉 ‘액체근대’ 개념과 연관이 있습니다. 바우만은 globality의 예시를 이렇게 들었습니다. 1) 보호망을 스스로 거부한 사람들 2) 사람들이 알아서 ‘걸어나가게’ 만드는 것(위기의 국가의 표지 그림이 나타내는 바입니다) 3)국가가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것. 바우만은 이 책에서 보통 ‘베스트팔렌모델’이라 부르는 것을 ‘포스트 베스트팔렌’ 모델로 칭하였기 때문에, 책을 읽으실 때 포스트베스트팔렌 모델을 베스트팔렌 모델로 바꾸어 생각하시면 이해하기에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위기의 국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구화’의 프로세스를 알아야 합니다. 지구화란, “기술 혁신에 기반하여 기존의 민족국가의 틀을 넘어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환경 등 인간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빠른 속도로, 그리고 대규모로 행해지고 심화되고 있는 상호의존성의 과정입니다. 지구화란 ‘기술 혁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느끼는 ‘경제’ 영역에서의 지구화 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영역을 나누어 사고해야 탈출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지구성(globality)의 조건이 민족국가를 벗어나는 것이라는 것만 이해할 뿐 그 실체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지구화는 정치, 경제, 문화 등의 각 영역에서 각 영역마다의 특징을 가지면서도 서로 얽혀서 진행되고 있는 다면적 현상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새로운 글로벌 거버넌스 체제가 등장하고(WTO, IMF, WB 등) 초국가적 기업이 등장하여 전세계 200대 초국가기업의 생산량이 세계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바우만이 액체근대 개념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경계(고체)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세 가지 형태가 드러납니다-국가 위로 권력이 분산되는 것(대표적으로 EU), 국가가 권력을 쥐고 있는 것, 국가 밑으로 권력이 분산되는 것(대도시 연합). 문화적으로는 하이브리디제이션(모든 문화들이 하나로 섞여드는 현상), 글로컬리제이션, 다문화주의, 문화적 국제주의, 문명의 충돌 등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정치, 경제, 문화적 양상이 모두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 현상을 너무나도 적절하게 표현한 “liquid mdernity”에 더 열광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구화가 진행되면서 정치가 시장에 종속되고, 그래서 권력이 시장으로 이동하여, 권력 없는 정치의 모습이 나타나며, 국가(보호) 없는 국가주의의 형태가 되는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는 다시 정치의 통제 아래 위치할 수 있을까요? 다시 정치가 권력을 찾아올 수 있을까요? 바우만도 과연 그것이 진짜 가능할지, 의문을 가집니다. ‘공위기’라는 것이죠.
‘베스트팔렌 모델’은 지구화라는 현상이 현저해지기 이전의 세계질서를 묘사하는 모델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국민국가 중심의 세계질서, 즉 ‘국가주권’의 절대성을 보장한 체제입니다. 우리에겐 포스트 베스트팔리아, 네오 베스트팔리아의 두 가지 옵션이 있습니다. 과연, 국가는 정말 시장에 손을 든 걸까요, 아니면 혹시 편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걸까요? 국가가 정말 약화된 걸까요, 혹시 더 강한 국가가 뒤에서 조정하는 건 아닐까요?
바우만과 보르도니가 그려내는 세계는 ‘디스토픽 포스트 베스트팔리아’, 즉 근대의 견고한 벽이 액체화되어가는 가운데 국가가 권력을 잃었으나, 새로이 원했던 권력은 형성되지 않아 그 권력의 상실이 오히려 개인의 위기를 낳은 상황, 바로 공위기(interregnum)입니다. 바우만은, 이제 더 이상 국가는 우릴 보호해 줄 생각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개인이 알아서 할 일 이라고 말이죠, 그리고 또한 개인도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이번 시간은 <위기의 국가>를 읽기 위한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 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 본격적으로 1장에 들어가기에 앞서, 홉스에 대해 이야기해주셨습니다. 홉스는 ‘국가의 의무는 구성원의 보호’라고 얘기했습니다. 그 유명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뜻은 ‘각자가 각자의 해석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해석의 다름이 혼란을 만들기 때문에, 그에 대한 질서를 만드는 것이 국가입니다. 개인들은 나의 해석을 버림으로써 보호를 보장받고, 국가는 보호를 해줌으로써 해석의 권위를 가집니다, 즉 판단과 폭력을 독점하는 것입니다.
첫 시간, <위기의 국가>를 위한 큰 그림을 듣고 나니 앞으로의 수업들이 더욱 기대되네요. 선생님 말씀처럼, 이해되는 부분을 중심으로 읽어가며 각자의 해석을 만들면서 우리가 가장 처음에 나누어 보았던 ‘국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어느정도의 답들을 찾아가는 과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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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당대편> | [김만권의 정치철학 당대편]자크랑시에르,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 박윤채영 | 2015.5.6 | |
지난 수업(4월16일), 세월호 1주년 추모식을 앞에 두고 저희는 참여연대 강의실에 않아 ‘호모 사케르’를 배웠습니다. ‘재물로 바칠 수도 없고 누가 죽여도 괜찮은 존재’. 주권을 통해 ‘고립’과 ‘피해’가 정당화 된 존재들. 세월호 유가족들이 그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랬습니다. 나의 부모님이 그러했고 내가 그러했습니다. 아감벤은 우리에게 주권 권력이 무엇을 배제하면서 자신의 힘을 키우는지 알아채야 한다는 조언은 주었지만 호모 사케르로써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일주일간 광화문과 시청에선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또 한 번 큰 실망과 좌절을 했고 그래서인지 강의실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김만권 선생님도 힘든 일주일이셨는지 회의감에 절은 눈빛으로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자르 랑시에르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주제가 낯설었습니다. ‘민주주의가 증오의 대상이 된다.’니. 저는 민주주의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좋은 체제’로만 여겨왔기 때문입니다. 어른들도, 학교에서도, 정치권에서도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것들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고만 했지 ‘이게 다 민주주의 때문’이라고 증오를 표현하는 것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민주주의가 공공 영역을 확대하고 모든 존재의 동등한 발언권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숨겨져 있던 존재들의 발언이 사회로 표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들을 ‘사회 혼란을 야기한다.’며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그들이 바로 민주주의 혐오자들입니다. 민주주의 혐오자들은 민주주의를 ‘이기적 개인들이 삶의 모든 에너지를 개인적 만족을 추구하는 쪽으로 돌리는 형태’로 봅니다. 국가 전체, 공동체 전체의 이익보다 개인의 행복과 이익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자들이라는 것이죠. ‘민주적 인간=이기적 개인+탐욕적 소비자’로 공동재산의 구축을 방해하는 자들로 여깁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다원성에 대한 증오로 이해하니 많은 사람들이 떠오르더군요. LGBT퍼레이드에 진입하여 주기도문을 외우는 보수단체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가운 시선, 사업이 되어버리는 다문화 가정. 집회를 공권력에 대한 위협이라며 비난하는 사람들...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에는 정치의 엘리트주의도 섞여 있습니다. 플라톤의 ‘철인 정치’가 그들의 입장의 대표격이지 않나 싶습니다. 통치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는 것이지요. 플라톤은 정치인의 자격을 ‘통치행위를 갈망하지 않는 자’라고 했습니다. 바로 ‘철인 정치’이지요. 통치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으로 신에게 직접 부여받거나 추첨이라는 행운으로 부여받을 수 있는데 그 추첨이 바로 민주주의의 투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플라톤의 철인 정치에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정치인이 정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철인은 현실 세계에서 이상 세계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사실 현실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가 정치의 임무를 부여 받았을 때, 그는 ‘연민’으로 시민을 통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정치는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권력인 것 같습니다. 정치인들이 지닌 스펙과 재산의 크기를 보면 그러합니다. 선거 기간 길거리는 ‘학벌’과 ‘직위’, 그리고 ‘군대’가 적힌 현수막과 명함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정치인’이라는 자격을 갖게 되는 동시에 얻는 특권과 이득들을 보면 그러합니다. 정치란 무엇일까요? 플라톤의 말처럼 연민을 가진 철인의 통치인 걸까요? ‘우리 지역’의 활성화일까요? 랑시에르는 정치란 권력을 가진 이들의 이득을 위해서, 먹고 사는 것이 일단 중요해서 다음에 해결 되어야 할 문제로 미뤄진 존재들을 겉으로 꺼내서 사회가 그들을 감각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합니다. 감각된다는 것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여 지고 그 소리가 들리고 그에게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존재를 ‘감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감각’되는 방법은 사회의 질서로부터 그 존재들을 불일치시키는 것입니다. 불일치란 ‘몫이 없는 자들’이 다수의 말에 따르는 것을 멈추고 ‘나를 위한 분배를 해 달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합의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권리를 주장하는 일로 사회 안정을 통해 이득을 보는 자들이 매우 두려워하는 일이지요. 불일치 작업은 매우 조용하게, 은밀하게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밤에 다음 날의 노동을 위해서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위해서 모여 학습을 하는 것이 그 예이지요. 학습은 노동자들의 내면에 불일치를 만들어 낼 것이고 그 혼란이 사회로 표출되었을 때 정치적 불일치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이 랑시에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는 헌정의 한 형태도 아니며 사회의 한 형태도 아니다. 인민의 권력이란 사회 구성원 전체의 권력이 아니며 다수의 권력도, 노동계급의 권력도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통치 받을 자격만큼이나 통치할 자격을 가지지 못한 자들(데모스: 자신의 몫을 가지지 못한 자들로서 기존의 나눔의 경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의 고유한 권력인 것이다.“
정치의 역할은 공공 영역에 배제된 자들의 자리를 만들고 그들을 지지하는 것이며 배제된 자들을 감각하려는 노력이 정치인들이 해야 할 노력입니다. 경제 성장이 정치의 목표가 되어선 안 됩니다. 그러나 마냥 정치인들이 바른 정치를 하기를 기대하고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투표라는 형식에 기대도 안 됩니다. 민주주의는 제도도 아니며 정치 방법도, 사회 형태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는 가지지 못한 자들의 권력 그 자체이며 데모스의 권력을 포기하는 것은 정치 자체를 포기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어쩌면 정치인들이 정치를 포기한다면 데모스들이 정치하면 된다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민주주의는 자신만이 보유하는 고유하며 항구적인 행위에만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모습은 철학의 힘을 사용하는 데에 익숙한 자들에게 충분한 공포감과 증오감을 자극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어느 누구와도 공평하게 권력을 나눠 가질 수 있는 사람들에겐 민주주의는 용기와 기쁨을 선사한다.”
‘항구적인 행위’가 민주주의의 운명을 만든다고 합니다. 계속, 움직이라는 말이겠지요. 7강을 통해 만난 철학자들이 똑같이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해라, 계속 해라. 지식인이, 정치인이 대신 해주길 바라지 마라. 직접 해라.” 덧붙여 ‘같이 하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혼자 고립되고 소외된 것이 아니라 너와 같은 이들이 분명히, 도처에 있으니 그들을 찾아서 함께 민주주의를 가지라고 말입니다. 김만권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은폐를 거부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요. 그 누구의 권력에도 자신의 자유를 팔지 않는 것. 한 존재도 무시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혼란이 아니라 ‘고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으로 김만권 선생님이 눈물로 수업을 끝내게 했던 시 중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아빠는 그럼 사랑을 기억하려고 시를 쓴 거야?/어두워서 불을 켜려고 썼지./시가 불이야? 아빠가 사랑하는 나라가 보여?/등불이 있으니까./그래도 멀어서 안 보이는데? 당신이 들고 계신 등불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들고 있는 등불은 무엇일까요..??? 대화(對話) 아빠, 무섭지 않아? 등불이 자꾸 꺼졌지. ―아빠, 갔다가 꼭 돌아와요. 아빠가 찾던 것은 아마 없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꼭 찾아 보세요. 그래서 아빠, 더 이상 헤매지 마세요. ―밤새 내리던 눈이 드디어 그쳤다. 나는 다시 길을 떠난다. 오래 전 고국을 떠난 이후 쌓이고 쌓인 눈으로 내 발자국 하나도 식별할 수 없는 천지지만 맹물이 되어 쓰러지기 전에 일어나 길을 떠난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19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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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전문가와 함께하는 나라살림 흥망사 - 국가와 문명의 흥망성쇠, 나라살림의 비밀 | [예산전문가와 함께하는 나라살림 흥망사] 3강 서양이 흥망을 선점하게 된 이유 | 아비 | 2015.5.4 | |
서양이 흥망을 선점하게 된 이유
이번 시간에는 조금 더 현대로 넘어와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나 영국, 미국 같은 나라들이 어떻게 강대국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몇몇 동영상들을 통해서 수업 내용에 대한 흥미도 더해지며 역시나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강의는 대법관님의 강연 덕분에 참여연대 지하 1층에서 진행하게 되었는데 강의 듣기에는 꽤 괜찮은 공간이었습니다. 또 김밥을 제공해주신 회원님 덕분에 허기를 잊으며 수업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서양이 왜 흥할 수 있었느냐에 대한 대표적인 두 주장에 대해서 우리는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는 장기고착 이론으로 원래부터 서양이 동양을 이길 수 있는 제도나 철학을 가졌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단기 우연이론으로 동 서양 둘 다 성장의 한계에 봉착했었는데 서양이 석탄 자원에 대한 접근의 용이성 등의 행운으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쪽 이론만 맞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이탈리아의 경우 로마 몰락 이후 11세기 들어 몇몇 도시들이 상당히 발전하게 되었는데요. 그 원동력에는 동방 무역을 이용할 수 있는 지리적인 이점이 작용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도시가 베네치아인데 베네치아는 한 때 지중해 전역에 세력을 떨쳤던 해상공화국의 요지로 우리 모두 물로 이루어진 아름답고 낭만적인 도시로 알고 있을 겁니다. 이 도시는 물의 도시답게 적들의 접근을 막기 용이했으며 비록 비잔틴 제국에 귀속되었고 이후 나폴레옹에게 정복되었지만 무려 1천년 가까이 도시국가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는 단순한 무역이 아니라 잘 짜여진 제도가 한몫 했다고 합니다. 먼저 공화국의 형태를 가지고 전쟁 시에도 용병에게만 의존하지 않았으며 사회 인구를 정확히 조사하는 관리 시스템을 가졌는데요. 이 체계적인 인명 관리 제도를 통해 행정 군역 등의 조세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신뢰할만한 자료를 통해 공정한 경쟁을 가능케 했으며 여러 가지 선진적인 경제구조를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현재에 볼 수 있는 계좌이체, 어음 발행 등의 요소뿐만 아니라 해상보험도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복식 부기제도를 통해 투명하게 행정을 수행했고 사회적 부조리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잠깐 당시의 베네치아 근처에 있던 제노바를 살펴보면 독특한 사실을 하나 알 수 있었는데 제노바는 복권으로 정치인을 뽑았다고 합니다. 복권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회 경제적으로 유용한 면을 보이는데 여기에 착안하여 90명의 정치인 중에 5명의 상원의원을 로또를 통해 정했습니다. 로또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는데 이러한 의미의 복권 설계는 그 이름도 유명한 카사노바가 담당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기후변화와 바이킹의 흥망을 간단히 알아봤습니다. 바이킹은 유럽 사회 곳곳으로 진출하며 약탈을 일삼았는데 이들의 진출 목적은 약탈 뿐만 아니라 이주에도 있었습니다. 소빙하기가 끝나면서 바이킹의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며 유럽 곳곳으로 진출했는데요. 이러한 진출을 통해 세계 여러 곳에 식민지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200년 경에 찾아온 소빙하기는 그린란드에 살던 바이킹을 멸종시키게 됩니다. 그 옆에 아이슬란드 역시 소수의 인원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기후변화가 가져오는 영향은 인간의 삶에 크게 영향을 줍니다. 이에 대한 대처와 정책도 한 나라나 민족에 굉장히 중요한 일임에 틀림 없을 것입니다. 그 다음 살펴 본 유대인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러 가지 전세계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민족임에 틀림없습니다. 가장 크게는 나치로부터 당한 인종적 차별이 있을텐데요. 사실 유대인이라는 관념은 종교적인 기준이었지 혈연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나치는 인종적인 유대인을 기준으로 학살을 일삼았기에 이스라엘 역시 정치적 이유로 이러한 기준을 사용하여 정착된 것입니다. 두 번 째 커다란 문제는 팔레스타인 땅으로의 이주인데 이는 그들이 세운 신화로부터 비롯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그 땅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멸망한 것이며 유대인의 민족의식은 멸망이후에나 생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신화와 세계 곳곳에 뻗은 유대 자본의 힘으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이 될 수 있었습니다. 포르투칼은 한때 해상 강대국으로 이름을 날리던 나라였습니다. 여러 관세 정책과 해상보험 제도와 항해할동으로 여러 가지 세계적인 발견들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콜럼버스의 경우에는 왕과의 의견차이로 스페인으로 넘어갔습니다. 스페인의 여왕은 나라차원에서 그에게 투자했고 결국 그는 신대륙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두 나라는 살던 사람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제국주의적 조약을 하며 신대륙의 소유권을 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덕택에 브라질은 포르투칼의, 나머지 남미의 나라들은 스페인의 영토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이 두 나라는 이렇게 유럽사의 패권을 잡을만한 여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이는 무역과 식민지등에서 얻은 부를 국내산업의 발전에 투자하지 않았으며 그것들을 보호하는 제도를 발전시키고 해군력을 강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주도한 대항해 시대는 인류 역사에 많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중심지역이 지중해에서 대양으로 광대한 해외시장과 다량의 염가원료 공급으로 상업혁명, 가격혁명이 발생하였으며 동서양의 만남과 제국주의적 팽창경쟁이 막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대를 지나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르는 제2의 해상 강대국 영국이 등장하게 됩니다. 영국은 처음에 약탈을 통해서 부를 쌓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너트리고 해상 최강국으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이후 도전하는 네덜란드 프랑스를 차례로 극복하고 19세기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무려 3세기 동안 국가 차원의 노력으로 세계의 중심이 되었으며 대영제국이라는 이름을 널리 떨치게 됩니다. 네덜란드 역시 해상 무역의 강국으로 유럽의 중심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들은 선박에 대한 기술혁신을 통해 관세를 줄이고 장기적으로 투자되는 유한회사 형태의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자본금을 유치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프랑스에 점령당하기 전까지 네덜란드는 신뢰를 중심으로 한 무역업과 해양기술 발전, 동인도회사 등으로 해상 강국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미국에 대해 배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미국은 독립 초기 광대한 서부 개척에 국가적 차원에서 힘을 들였고 해상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국익과 안보 등을 위해 투자하기 시작하여 세계대전 후부터 현재까지도 해양 최강국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자국의 영토에 머무르지 않고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새로운 프런티어를 설정할 수 있는 자리로 올라간 것을 뜻합니다. 미국의 부흥에는 이러한 해양강대국의 위상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 정부는 당시 심화되고 있던 토지 소유 문제를 평등하고 또 효과적으로 해결하여 국가의 생명력을 강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링컨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라고 할 수 있는 홈스테드 법인데 이를 통해 우리나라 면적에 12배나 되는 땅을 서부개척 농민들에게 평등하게 나누어줬습니다. 미국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하와이입니다. 하와이는 처음에 태평양을 지나는 외국 선박들의 중간 기항지이자 무역의 중심지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데 미국으로부터 사탕수수 농업 조성을 도움 받으면서 큰 성공을 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에 의한 관세 정책과 일 산업 일 국가 형태의 의존, 또한 왕실 국고의 탕진으로 결국 미국에게 합병당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이번 강의를 통해 여러 나라들의 흥망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강대국이 되는 나라들은 당시에 가장 중요한 사업에 효과적으로 투자했고 또 이로 인해 얻어지는 이익을 효과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반면이 몰락했던 나라들은 효과적으로 나라 정책을 가져가지 못하거나 가져가서 부를 축적했음에도 이를 나라 발전을 위해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국가 정책, 또는 나랏돈이라는 것을 어떻게 투자하느냐 또 투자해서 얻은 이익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흥망이 결정되는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산전문가와 함께하는 나라살림 흥망사] 1강 고대문명의 흥망은 어떻게 달랐을까. 다시보기(클릭) >> [예산전문가와 함께하는 나라살림 흥망사] 2강 세계 제국의 흥망은 어떤 비밀이 있을까? 다시보기(클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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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전문가와 함께하는 나라살림 흥망사 - 국가와 문명의 흥망성쇠, 나라살림의 비밀 | [예산전문가와 함께하는 나라살림 흥망사] 2강 세계 제국의 흥망은 어떤 비밀이 있을까? | 아비 | 2015.4.27 | |
이번 주에 흥망사 강의는 세계 제국들의 흥망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총 열 분정도 참여해주셨고 정창수 소장님의 여지없이 유쾌하고 밀도 있는 강의 덕분에 저나 다른 분들 모드 정신없이 수업에 몰입했던 것 같습니다. 가면 갈수록 더 많은 것을 깊이 배우게 되는 것 같아서 다음 주 강의는 더더욱 기대 됩니다. [예산전문가와 함께하는 나라살림 흥망사] 1강 고대문명의 흥망은 어떻게 달랐을까. 다시보기(클릭) >> 여러분들은 캐번디시 바나나를 아시나요? 현재 우리들이 먹고 있는 단 한 종의 바나나라고 합니다. 과거 1960년대 미국에 바나나 붐이 일어났을 때 그로미쉘이라는 품종이 맛도 좋고 단단하여 중남미의 흔히 바나나 공화국이라 일컫는 다섯 나라들은 모두 그로미쉘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바나나에 치명적인 전염병이 퍼지게 되었고 결국 모조리 그로미쉘로 채워진 바나나 생태계는 멸종위기에 이릅니다. 다행히도 캐번디시라는 품종을 개발하여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또 모릅니다. 언제 새로운 전염병이 나타나서 바나나를 멸종으로 이끌지요. 이 이야기와 흥망사 강의에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그 답은 바로 다양성에 있습니다. 바나나의 경우에 종 다양성이 멸종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세계 역사에서도 이 다양성이 흥망을 좌지우지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대부분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무시하는 나라들은 오랫동안 제국을 유지할 수도 제국으로 발전할 수도 없었습니다. 폐쇄적인 순혈 주의가 환경 변화에 취약한 까닭이지요. 미국을 성장시킨 원동력 역시 다양한 인종과 사람들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번 강의는 바로 이 다양성을 중점으로 흥망을 살펴봤습니다. 가장 먼저 로마 제국을 보면 로마의 경우 포용성과 다양성으로 제국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양한 민족과 나라들에 대한 사회적 통합을 이뤘기 때문에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제국 중 하나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죠. ‘우리 조상들은 능력 있는 자를 이 도시로 받아들였다. 율리우스 가문 등 지금 원로원 의원들도 대부분 로마 본래 혈통이 아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왜 멸망했는지를 봐라. 로마의 창립자 로물루스가 한 통합을 보라. 정복한 땅의 자유민들에게 공적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은 관습이다. 정복당한 자들의 금과 자산을 로마로 가져오게 하자’ 이 말은 로마의 클라우디스 황제가 벨기에 인을 원로원에 받아들일지 말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을 때 한 연설의 일부입니다. 이것을 보면 제국의 지도자가 통합이 가져오는 이득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후에 티베리우스 총독이 과한 수탈을 하는 이들에게 했던 말은 ‘나는 양털을 원하지. 양을 산채로 껍질을 벗기기를 원하지 않는다’ 였습니다. 이런 말 역시 로마의 지도자들이 전략적으로 관용과 포용을 나라의 기조로 채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포용성을 토대로 로마는 오랜 세기 유럽을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의 경우 이러한 다양성의 효과를 극명하게 볼 수 있는 사례입니다. 아테네의 경우 외국인 거주자를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로 봤다면 스파르타의 경우 ‘우리 주변에 사는 사람들’ 로 봤습니다. 또한 시민권에 대한 장벽에서도 두 나라 간에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가 스파르타의 몰락을 가져왔죠. 스파르타 전성기의 8천명의 시민이 나중에는 200명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타 국적 시민에 대한 관용과 포용이 이루어졌다면 스파르타는 그렇게 쉽게 몰락하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나라의 몰락을 가져오는 요소는 이 다양성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역시 낭비적인 세금 사용도 그리스의 몰락을 가져왔습니다. 이집트의 경우를 잠깐 보면 조세 시스템의 부적절성으로 인해 풍요로운 나일강을 가지고도 큰 발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다음으로는 몽골을 살펴볼텐데요. 몽골의 경우에도 여러 부족을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이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인데요. 서로 부족이 다름에도 지금으로 치면 의리나 동료애 같은 것으로 넓은 몽골의 부족들을 통합했고 그 힘을 유럽으로 뻗어나가 가장 멀리 있는 영국까지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도 수만키로에 걸쳐 설치한 역참같은 제도들이 큰 힘을 보탰습니다.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몽골에 있는 카라코롬까지 겨우 일주일이면 도달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슬람 제국의 경우에는 굉장히 계산적으로 개방적인 정책을 취했는데요. 비잔틴과 페르시아지역을 정복했을 때 기존통치 방식과 종교를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또한 국유지만 접수하고 개인 소유 토지는 세금을 납부하는 방식을 채택함으로서 정복자로서는 상당히 의아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바로 세금에 있었습니다. 아라비아 밖의 무슬림은 토지세 납부가 없었고 종교를 인정한 이유도 세금을 걷을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슬람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한 경우도 있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어찌되었든 이러한 방식을 통해 제국은 발전하고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웃기게도 제국 전체가 이슬람화 되었을 때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역시 세금문제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를 해 보면 나라의 흥망이 다양성과 또 세금에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겠죠? 마지막으로 동로마 제국을 살펴보겠습니다. 여태 중점을 맞춘 다양성에서 잠시 벗어나 제국 흥망에 지대한 영향을 준 정책에 대한 설명으로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동로마 제국 다시 말해 비잔틴 제국의 성장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군관구제와 둔전병제였습니다. 군관구제는 지방 행정 제도로 각지의 군사령관이 민정과 군정을 겸하는 제도였습니다. 여기에 둔전병제가 합쳐 전투력과 농업 생산력, 조세 수입을 늘릴 수 있었는데요. 둔전병제는 토지를 주고 농민들이 자신의 토지를 지키기 위해 싸우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훨씬 더 사기가 높았겠죠? 이를 통해 용병들에게 지불하던 재정 지출을 크게 줄이면서도 국방력의 강화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황권을 위협하지 못하게 너무 작은 단위로 군관구를 분할시켰고 귀족과 호족의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면서 농민들이 몰락하게 됩니다. 결국 군관구제는 형식만 남은 채 문란해졌고 이에 따라 제국 역시 멸망으로 나아갔습니다. 2강에서 우리는 다양성에 대한 포용의 여러 정책들을 봐왔습니다. 이러한 포용이 선의에 인해 행해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제국에 이익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에 더해 세금 관련 정책들이 얼마나 나라의 흥망에 영향을 주었는지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굳이 이번 강의를 짧게 정리하자면 다양성 -> 조세 정책 -> 흥망 이라는 도식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의를 모두 마치고 소장님께서 맛있는 통닭집으로 저희를 데려가 주셨습니다. 수업을 들은 모든 분이 참여하여 함께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소장님께서 다음 강의부터는 세금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과연 어떨지 모르겠네요. 저의 경우는 환영입니다. 이 강의를 통해 좀 더 많은 조세 정책들을 배우고 싶으니까요. 아마 다른 분들도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역사적인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분들도 많겠지만 어찌 되었든 소장님의 훌륭한 강의가 벌써 기대됩니다. 모두 한 주 마무리 잘하시고 화요일 날 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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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나무 기자의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 |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7강 - 네트워크는 광대하다. | 피를로 | 2015.4.26 | |
벌써 마지막 글쓰기 강의입니다.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지나간 듯한 느낌이네요. 이번 7강의 주제는 독자와 만나는 방법에 대해서 입니다. 이번 고 기자님의 강좌는 책을 출판하고 싶거나, 자신의 블로그에 애독자들을 만들기 위한 즉, 남들에게 읽히는 글쓰기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자도,문학가도 아닌데 어떻게 자신만의 독자를 만들 수 있을까요? 가장 간단한 방법은 SNS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현재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가 가장 많은 대중이 이용하는 SNS입니다. 각 서비스마다 이용방법과 특징이 달라 독자 만들기를 염두해두고 다음 서비스들을 이용한다면, 각 서비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먼저 트위터는 140자 이내로 한 게시물을 올릴 수 있는 SNS입니다. 140자 이내로 글을 써야 한다는 제약이 부담스러우실 수 있을텐데요. 그럴 땐 글을 나눠쓰거나 다른 곳에 써서 링크를 걸어두는 방법이 있습니다. 만일 트위터와 블로그를 병행하신다면 자신의 블로그글의 링크를 트위터에 올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리고 트위터에는 '리트윗'이라는 기능이 있습니다. 리트윗은 글의 게시자에게 의견형식으로 답을 할 수 있는 기능인데요. 리트윗을 하기 위해선 상대방을 지정해야하기 때문에 단순한 감상보다는 서로의 의견교환에 자주 이용됩니다. 그래서 트위터의 대표적인 기능은 '의견 발산'입니다. 관련 링크 : http://twitter.com/choijinsoon 뉴미디어 전문가 최진순 기자 트위터 페이스북은 트위터와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글자 수 제한이 2000자라 특별하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글의 전문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댓글이 트위터의 리트윗과는 다르게 특정 대상을 지정하지 않아도 달 수 있어서, 단순히 글에 대해 자신이 느낀 점을 쓰거나 감탄사만 남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좋아요' 기능인데요. 이는 자신이 마음에 드는 글에 호감을 표시하는 기능입니다. 이렇게 댓글과 좋아요 기능의 차이로 페이스북은 트위터보다 '공감'이 부각되는 서비스입니다. 관련 링크 : http://www.facebook.com/jinsoon/choi 뉴미디어 전문가 최진순 기자 페이스북 마지막으로 블로그는 두 SNS보다는 폐쇠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게시물 하나하나 올리는 게 두 SNS보다는 무거운 느낌입니다. 때문에 블로그는 두 SNS보다 전문적이고 상세한 글을 쓰기에 용이합니다. 관련 링크 : http://wisdomhouse.kr/new/new/social.php?mid=79 이종진 전 영화전문기자, 현 영화평론가 SNS를 이용해 독자들과 소통할 때 최소 2~3주에 한 번씩은 게시물을 하나씩 올려야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만일 너무 오랜기간 동안 글을 올리기 않게 되면, 독자들이 구독 혹은 팔로잉을 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마지막 강의는 수강생들의 숙제 품평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저는 친구 부친상이 있어 뒤풀이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먼저 끝까지 열강해주신 고나무 기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간사님을 비롯한 아카데미 느티나무 원장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글쓰기 강좌를 통해 저는 제가 가진 컨텐츠가 무엇일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습니다. 평소 관심분야는 다양한 편이었지만, 과연 '나의 어떤 컨텐츠를 써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읽을까?'는 고민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고민을 해 본 결과 '아 이거다!'하는 컨텐츠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지만, 컨텐츠가 떠오른다면 당장 블로그를 만들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상 함께한 수강생분들, 부족한 제 강의후기를 읽어주신 분들도 고생하셨고 원하시는 목표에 한 걸음 다가가셨기를 기원합니다.
1주차 강의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177350 2주차 강의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205289 3주차 강의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235767 4주차 강의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256395 5주차 강의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276801 6주차 강의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3052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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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당대편> | [김만권의 정치철학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당대편>] 5강-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 혠벗 | 2015.4.15 | |
3월부터 매주 목요일 저녁을 함께 했던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철학 <당대편>, 어느덧 반환점을 돌았네요. 다섯 번째 수업에서 다룬 고전은 한나 아렌트의 1958년 작 <인간의 조건>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근대성의 병폐와 ‘악’을 다뤄내면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급진적 악을 다룬 <전체주의의 기원>, 야스퍼스의 영향을 받아 일상의 악을 탐구한 <예루사람의 아이히만>, <혁명론>, <자유란 무엇인가> 등등 흥미를 끄는 제목의 저작이 많습니다. 또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하이데거가 소멸과 맞닿은 사유를 중심으로 철학을 펼쳐나갔던 반면, 아렌트는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생각함이 아니라 행위함’이라며 새로운 시작, 탄생과 행위를 철학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또한 유태인으로서 몇 번이나 끔찍한 상황에서 극적으로 탈출했던 경험은 그녀의 철학과 삶의 자세 곳곳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의 조건>은 얼핏 제목만 보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할 조건과 인간 본성을 탐구한 책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조건>은 인간이 이미 조건 지워졌다는 것, 즉 인간적 제약성 자체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삶과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실존조건이라는 성격”을 가지므로 “인간이 무엇을 하든 언제나 조건 지워진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조건>에서는 이러한 주어진 제약을 다루어가는 ‘활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아렌트는 이 책을 ‘Vita Activa(활동적인 삶)’, ‘Amor Mundi (love of the world)’라고 불러주길 원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조건>은 두 가지 트랙으로 구조화하면 이해하기 보다 쉬운데요, (수업 중 판서 참고) 첫째, 인간의 실존조건에 따른 ‘세 가지 활동적인 삶’으로서 ①노동 ②작업 ③행위, 둘째, 각각의 삶이 위치하고 있는 ①공론영역 ②사적영역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아렌트는 각각의 활동의 중요도가 뒤집히고 각각의 삶이 원래 위치해야할 곳에서 이탈하여, 공론영역과 사적영역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결국 두 영역 모두 사라지게 된 것이 근대사회의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강의록의 순서와 같이 노동부터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노동(Labor)은 생명 유지라는 필요성에서 나오는 동물적 특성입니다.(Homo Laborans)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들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소비해야하죠. 아렌트는 세 가지 활동 중에서 노동(과 소비)가 가장 파괴적이고 지속성이 짧으며, 그렇기 때문에 노동하는 동물은 “무세계성”을 띤다고 표현합니다. 노동하는 동물은 “자기 신체의 사적 성격 속에 갇혀서 누구와 함께할 수도 없고 온전하게 의사소통도 할 수 없는 충족에만 사로잡혀 세계로부터 추방”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세계란 사람들이 모여 같이 무언가를 하는 곳, 즉 공적영역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노동이 있어야 할 곳은 엄연히 사적영역입니다. 그러나 근대세계에서 노동하는 동물이 공론영역에 자리 잡게 되었고, 아렌트는 이를 두고 ‘근대세계가 필연성〔필요성〕에 거둔 승리’라고 표현했습니다. 필요성의 충족만을 위해 힘쓰는 자들이 공론영역을 차지하게 되어 결국 진정한 공론영역은 사라지고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적 활동”만이 존재하게 된 것이 근대의 문제입니다. 작업(Work)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유용성입니다. 노동과는 달리 “자연적 환경과 전적으로 구별되는 인공적 세계의 사물들을 제공”하여 “세계에 지속성과 견고성을 부여”합니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재화를 생산하는 것은 물론, 사회 제도를 만드는 것 역시 작업에 속합니다. 전자의 경우는 사적영역에, 후자의 경우는 공적영역에 위치합니다. 작업을 통해 인위적인 세계를 건설하는 인간은 자연에 대한 객관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으며, 이는 인간이 필요성과 탐욕이라는 자연적(동물적) 특성에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작업에는 공리주의의 문제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유용성의 가치에 사로잡힌 제작인(Homo Faber)에게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합니다. 따라서 작업을 위한 재료를 얻기 위해서 자연에 가하는 폭력은 모두 정당화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목적이 어떤 다른 맥락에서는 다시 수단이 되는 사슬”과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의자 생산의 예를 들어주셨습니다. 의자를 만드는데, 사실은 의자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의자를 책상과 함께 두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면, 의자는 목적에서 수단으로, 1차적 가치에서 2차적 가치로 전락하고 맙니다. 또 의자와 책상을 만들어 내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것들을 방에 놓는 게 목적이라면...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목적이 다시 수단이 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제작자로서 인간은 도구화의 문제, 즉 “내재적이고 독자적인 가치를 상실”하는 문제에 봉착합니다. 행위(Action)는 “사물이나 물질의 매개 없이 인간 사이에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유일한 활동”이고, 그 근본조건은 다원성입니다. 여기서 다원성은 “‘동등성’과 ‘차이성’이라는 이중의 성격”을 가집니다. 동등하게 다른 존재이기에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의미 있어지고, 비로소 말과 행위를 통한 ‘참여’, 즉 정치가 일어납니다. 따라서 행위는 공공영역에 위치합니다. 아렌트가 “제2의 탄생”이라고 부른 참여는 “우리가 결합하기를 원하는 ‘타인의 현존’에 자극 받은”것입니다. “노동처럼 필연성〔필요성〕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고 작업의 경우처럼 유용성 때문에 추진된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아렌트는 행위만이 자유로운 활동이라고 보았습니다.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다원성과 참여의 원형을 발견하고, 폴리스의 발생이 “인간이 사적생활 외에 일종의 두 번째 삶인 정치적 삶을 부여받았음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고대 도시국가에서부터 이미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의 분리가 일어났으며, (근대 이전까지) 뚜렷이 구분되는 실체로 존재해온 것입니다. 공론영역에서 ‘공’이란 누구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폭넓은 공공성을 가진다는 것”과 “세계가 공동의 소유”라는 것을 동시에 의미합니다. 세계에서 산다는 것, 즉 공론영역에서 행위하는 것은 마치 다양한 사람들이 탁자에 둘러 앉은 것과 같습니다. 다양성의 기반 위에서 다르지만 평등한 사람들 사이(in-between)에서 정치가 만들어지고, 정치는 사람들을 이어줍니다. 대중사회의 문제는 탁자의 부재, 즉 정치의 부재인 셈입니다. 아렌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며 “행위(praxis)와 언어(lexis)”만이 ‘정치적 삶’을 구성한다고 했습니다. 힘과 폭력으로는 사람들을 이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편 행위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현상공간으로서 공론영역은 행위와 말의 방식으로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잠재적으로 존재하며, 공론영역을 존재‧보존 시키는 힘이 ‘권력’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결국 자유와 권력 모두 공공의 장에 모습을 드러낼 때, 즉 행위 할 때만 구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렌트에 대한 해석이 갈립니다. 현실적으로 일반 사람들이 공공의 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엘리트주의‧보수주의라고 보는 시각도 있고, 혁명‧시민불복종의 순간에 집중하여 아주 급진적인 해석을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한편 사적(가정)영역은 필요와 욕구의 동인에 의해 이뤄지며, 타인과의 관계가 사라지면서 “삶 그 자체보다 더 영속적인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당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적영역에서의 사적 소유(≠wealth)를 “삶의 필연성을 지배함으로써 잠재적으로 자유로운 사람, 즉 자신만의 삶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참여하는 세계에 들어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사적 소유가 한 인간이 정치적 존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요소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시각은 사적 소유를 문제로 보았던 맑스와도 다릅니다. 근대에 접어들어 ‘민족국가’를 세우면서 사적영역도 아니고 공적영역도 아닌 사회적 영역이 등장합니다. 원래 가정영역의 문제였던 것들이 공적영역으로 나와 이른바 ‘사회’를 형성할 때, 사람들은 부를 통해 정치적 인간이 되는 것, 즉 “공론영역에 접근하기보다, 보다 많은 부를 축적하여 공론영역이 자신들을 보호해줄 것을 요구”했고, 이것이 국가(commonwealth)가 되었습니다.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근대 국가의 본질인 것입니다. 결국 아렌트는 “공적인 것이 사적인 기능을 하는 까닭에 공적인 것이 사라지고, 사적인 것이 유일한 공동의 관심사로 남기 때문에 사적인 것이 사라짐으로써 결과적으로 이 두 영역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앞서 행위만이 자유로운 활동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아렌트는 <자유란 무엇인가>에서 행위와 자유는 동시에 발생한다고 했습니다. 행위가 있어야할 곳은 공론영역인 까닭에 자유 역시 공론영역에서만 구현됩니다. 또한 ‘행위하다’는 ‘시작하다(아르케인)’와 ‘누군가와 같이, 혹은 도움을 받아 완수하다(프리테인)’라는 두 가지 말에서 유래했다는 것에서, 자유는 본질적으로 타자와 세계 속에서 무엇인가를 할 때 발생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근대세계에서 결국 공론영역이 사라지면서, 근대의 인간은 자유를 잃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아렌트는 신학적 세계관에서 우리는 이미 탄생할 때 우주를 한 번 출발 시켜본 존재라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역사는 하나의 덩어리 같아 보이고, 끊임없이 주욱 이어져온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단절의 순간이 있었고, 새로운 시작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역사의 무거운 흐름 속에 나를 끼워 넣어 단절을 만들고 새롭게 시작 시켜야 합니다. 우주를 출발 시켜본 존재인 우리는 행위 할 수 있습니다. 아렌트는 이것이 자유이고, 자유의 본질은 행위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어떤 철학자의 어떤 책을 읽어도 늘 첫 수업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세계의 문제와 함께할 것" 세월호 참사 1주기가 다가오고 있어서 그런지, 이 메세지가 참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지난 주에 수업을 들으면서 많이 어려워서 여러번 다시 읽고 정리했는데도 유독 부족함은 많고, 길이는 긴 후기가 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ㅠ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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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나무 기자의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 |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6강 - 이야기 논픽션쓰기 | 피를로 | 2015.4.14 | |
어느덧 종강까지 1강 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번 시간에 고 기자님께서 강조하신 부분을 한 번 더 언급하겠습니다. <Guardian>지의 과학담당 에디터 Tim Radford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방금 전, 전 당신이 인터뷰한 과학자를 감동시키려고 글을 쓰는 것도 아니요, 당신의 지도교수를 위해서 쓰는 것도 아니며 당신을 어리석게 실망시키는 에디터나 "당신은 작가님이시군요"라고 말해주는 섹시한 여자를 위해서 쓰는 것도 아니다. 당신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0.2초만에 읽기를 중단하고 티비 드라마<파슨스 그린>이나 <푸트니>로 가버릴 수 있는 그런 독자를 상대로 글을 쓴다." 그의 말대로 우리 주변에는 책 말고도 너무나 재미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치열한 경쟁 상품을 제치고 당신의 책이 읽히려면 어떡해야 할까요? 핵심은 첫 문장과 첫 문단에 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인 까뮈의 <이방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드는 알수없는 의문과 함께 저는 이 소설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의 첫인상이 중요하듯 글도 첫 문장이 아주 중요합니다. 일단 주로 독자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으로 시작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통념을 비판하는 식으로 출발한다던지, 재밌는 발언을 인용한다던지 눈길을 끄는 통계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은희 씨의 <하리하라 생물학카페> 중 12편 '심장이 왼쪽에 있는 이유'를 예시로 들겠습니다. 12편은 주제와 관련 있는 오디세우스의 외눈박이 거인과 조우하는 신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외눈박이 거인의 눈은 어디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 인체의 대칭과 비대칭에 관한 본론으로 들어가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신화라는 흥미로운 소재와 연관시켜 독자의 관심을 끄는 좋은 글쓰기 도입입니다. 또 주제와 무관해 보이는 소재 언급으로 출발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남종영 기자의 '돌고래 연구의 윤리 논란'을 다룬 기사가 예로 있습니다. 링크 :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685361.html '사람과 돌고래의 러브스토리? 그녀가 떠나자 피터는 자살했다.'는 돌고래와 관련한 흥미로운 제목과는 다르게 기사는 1960년대에 대한 소개로 시작합니다. 게다가 무려 3번째 문단부터 돌고래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렇게 문단이 자연스럽게만 연결된다면 독자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관련 없어 보이는 정보로 문장을 시작하는 것도 첫문장쓰기의 좋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묘사로 글을 시작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고 기자님의 김종필 전 총리 부인 별세기사를 예로 들겠습니다. 링크 :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680148.html 기사는 장례식장과 늘어선 화환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홀컴 마을은 캔자스 서부, 밀을 경작하는 높은 평원 지대에 있다. 캔자스의 다른 지역 사람은 거기 바깥이라고 부르는 외딴 지역이다. 콜라라도 주 경계에서 동쪽으로 110킬로미터 떨어진 시골인데 굳건한 푸른 하늘과 사막같이 맑은 공기 때문에 중서부라기보다는 극서부라고 하는 것이 어울릴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투리에는 초원 지방 특유의 코맹맹이 소리, 목장 일꾼들의 비음이 섞여있고 남자들 대부분이 통이 좁은 카우보이 바지에 스테트슨 모자를 쓰고 앞코가 뾰족하고 굽이 높은 부츠를 신고 다닌다. 트루먼 카포티, <인 콜드 블러드> 중 주의하셔야 할 점은 원고지 30매(A4 3쪽 정도)가 넘어가는 글을 쓸 경우에는 이야기 형식으로 내용을 풀어나가야 합니다. 글의 내용이 30매 미만이라면, 단순히 글의 논리나 설명만으로도 쓸 수 있지만, 글의 내용이 30매가 넘어가면 이야기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한 권의 논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네 개의 장치를 기억해야 합니다. "논픽션은 소설문학의 기술적 장치를 사용한다."<Telling true stories> 장면을 통한 글구성(Scene by scene construction). 일련의 장면으로 서사를 보여주며 보통의 설명적 나레이션은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다. 대화의 풍부한 사용, 대화는 모든 산문 중에 가장 읽기 쉬우며 주인공의 성격(캐릭터)을 드러내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하지만 논픽션이 일반 소설에 비해 어려움이 있다면, 소설은 허구로 작가가 대화를 지어낼 수 있지만, 논픽션의 경우 사실에 기반해 쓰는 글이기 때문에 인터뷰를 직접 따야 한다는 점이 있다. 인물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디테일.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거나 야망을 보여주는 모든 종류의 디테일. 옷, 가구, 말버릇, 상급자, 하급자에게 대하는 어투 등.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의 영화 <리바이어던>에서 탐욕적인 시장 바딤의 책상엔 그의 탐욕을 대변하는 지구본 모형이 있고, 그위 머리 위에는 푸틴사진이 걸려있다. 즉 단순히 인물을 설명하기보다는 구체적 상황을 묘사해 인물의 성격을 드러나게끔 해야한다. 시점. 독자들을 저자가 아닌 기사 속 인물들의 마음속으로 데려갈 시점에 대한 고려를 해야한다. 1주차 강의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177350 2주차 강의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205289 3주차 강의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235767 4주차 강의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256395 5주차 강의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2768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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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전문가와 함께하는 나라살림 흥망사 - 국가와 문명의 흥망성쇠, 나라살림의 비밀 | [예산전문가와 함께하는 나라살림 흥망사] 1강 고대문명의 흥망은 어떻게 달랐을까. | 아비 | 2015.4.13 | |
[예산전문가와 함께하는 나라살림 흥망사] 1강 고대문명의 흥망은 어떻게 달랐을까.
안녕하세요. 이번 학기 정창수 선생님의 흥망사 수업 후기를 맡게 된 오상윤이라고 합니다. 저는 평소에 나라 살림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이 수업은 단순히 경제적인 부분만으로 살림을 읽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맥락 속에서 살림을 읽는 것이기에 더더욱 앞으로의 수업이 기대됩니다. 1강에서 선생님께서는 먼저 흥망사를 배우는 의미와 이론에 대해서 설명해주시고 우리나라 및 고대 문명들의 역사에 대해 강의를 해주셨는데요.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추가로 신청해주시고 와주셔서 열띤 강의가 진행되었던 것 같습니다. 역사와 경제가 만나니 전혀 지루할 틈이 없었어요. 먼저 흥망사를 시작하기 앞서 간단한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텐데요. 가장 먼저 설명할 것은 조세입니다. 조세란 토지의 경작자가 수확의 일부를 토지의 소유자에게 내는 ‘조’와 토지의 소유주가 토지 경작자에게 받는 조 중에서 국가에 내는 ‘세’를 뜻하는 말인데요. 이는 고려시대부터 구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주나라의 정전법이 그 시초인데 사각형의 토지의 가운데 부분을 공동 경작하여 세금을 내는 제도라고 합니다. 후에는 토지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세금이 걷히는데 어떻게, 얼마나 세금을 걷느냐, 그리고 이렇게 걷힌 세금이 어떤 식으로 사용되었는지 아는 것이 나라살림에 가장 핵심적인 요소일 것입니다. 흥망사 강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나라의 사례를 먼저 살펴보았는데요. 그 첫 번째 대상은 고조선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의 최초 국가인 고조선 역시 세금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결국 이는 국가를 운영하는 데에는 세금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같습니다. 게다가 오랫동안 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을 보아 이러한 조세와 재정지출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추측해볼 수 있겠죠? 우리의 두 번째 논의 대상은 조선의 고종 시대였는데요. 여기에서 나라살림 운용의 중요성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국가 예산은 결국 조세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쓰임이 누구를 위해 쓰였냐가 중요할 것입니다. 가령 국가 예산에 황실만을 위한 예산의 비중이 크다면 그만큼 다른 필요한 곳에 세금이 쓰이지 않을 것은 분명합니다. 고종시대에 바로 이런 문제점이 이루어졌는데요. 황실비 중 제사를 위해 쓰인 비용이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습니다. 요즘 이야기로 쉽게 예를 들면 300조 가량에 국가 예산 중에 30조원을 황실을 위해 쓰며 그 중 6조원 가량을 제사를 위해 썼으며 이 비중이 점차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을지 모르나 국민들이 낸 세금이니만큼 쓸데없는 곳에 쓰였다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국가 세금이 황실비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한제국 전체 중 40%의 예산은 국방비로 들어갔는데요. 당시 나라 상황을 생각할 때 이 비용이 과도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르나 얼마나 효과적으로 쓰였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로 국방비를 사용하다보니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드러났고 결국 이는 나라살림을 잘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보여준 가장 큰 예는 양무호 사건입니다. 고종 즉위 40주년 일본에서 들여온 군함, 양무호가 모습을 드러내는데요. 일본이 영국 상선이던 이 배를 25만원 주고 사온 것을 우리나라에 55만원에 판 것입니다. 당시 국방 예산의 30%가 이 고물 배에 사용되었습니다만 여기에 25만원을 더 들여 수리하고 나중에 일본군에 의해 징발되어 뺏기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소중한 나랏돈을 낭비한 셈이었던 것이지요. 조선 말기의 안타까운 상황만 보자니 가슴이 아픈데요. 다음으로는 다행히도 세종에 대해 배웠습니다. 세종은 관청에 있는 계집종만의 경우겠지만 무려 출산휴가를 주었습니다. 여기에다가 남편들에게도 같이 휴가를 주었다는 점이 놀라운데요. 단지 어진 임금이어서가 아니라 인구가 늘어야 국가의 부가 늘어난다는 필요성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게다가 이러한 복지가 가능했던 것은 재정이 그만큼 튼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튼튼한 재정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바로 공평한 조세제도 덕분이었습니다. 공법이라고 일정한 땅을 농민에게 나누어주고 10분의 1의 땅에서 나온 수확을 세금으로 바치게 하는 고정비율의 조세였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여론조사를 시행했다는 기록을 보아 나라 살림에 대한 훌륭한 고민과 생각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으로는 선생님과 함께 공부했던 흥망사의 이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흥망사를 보는데에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는데 먼저 공공정책의 역할을 통해 나라 살림을 살펴보겠습니다. 콜럼버스의 발견도 의도하지 않는 공공정책의 결과였습니다. 그 덕분에 어마어마한 발견이 이루어졌지만 이를 유지 관리하지 않았기에 결국 나라살림이 성공적이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추가로 조세를 어떤 식으로 걷고 관리하는지 역시 나라살림에 굉장히 중요한데 영국의 경우 징수관, 지출관, 재무관의 분리로 조세 수취를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관리하여 성공적인 나라살림을 가능케 했습니다. 아담 스미스의 유명한 국부론에서도 이런 나라살림에 대한 부분이 나오는데 비싼 마차에 고율의 세금을 물리는 누진세 같은 조세의 방향성 문제, 공공교육, 무상급식에 대한 조세 지출의 문제들을 다룹니다. 이러한 문제제기와 논의들이 의미하는 것은 결국 국가에는 나라 살림이 가장 커다란 부분을 이룬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고대문명에 살림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문자가 세금을 관리하기 만들어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누가 세금을 냈는지를 기억하기 어려웠던 그들은 점토판에 약속기호를 그리기 시작했고 이를 문자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문자는 세금을 걷고 관리하며 사용하기 위해서 지배층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손쉽게 사용하는 문자도 세금을 위해 만들어진 셈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집트 문명을 시작으로 문명들의 흥망사를 직접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집트의 나일 강은 홍수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함께 내려오는 토사들이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나라 살림을 잘 하지 못한 한 예가 나일강에 있습니다. 이 홍수를 막기 위해 지은 나세르 댐이 농업과 어업을 망쳤기 때문입니다. 또한 피라미드와 같은 기념물의 건립을 통해 많은 자원을 낭비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전시행정의 예입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이집트가 망으로 향했다고 귀결 지을 수는 없겠지만 분명히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 사실일 것입니다. 또한 이는 한 나라의 흥망이 어떤 식으로 나라 살림을 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을 보여준 한 예입니다. 두 번째로는 그리스를 살펴보았는데 그리스 문명을 통해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숲에 대한, 즉 환경에 대한 문제입니다. 초기에 많은 함대를 가진 아테네가 스파르타를 압도했지만 산림이 너무 많이 파괴돼서 나무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결국 패하게 되는데 이러한 나무 역시 나라의 재산으로 볼 때 과도한 낭비가 가져오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인구에 대한 관리입니다. 스파르타를 몰락시킨 가장 큰 원인은 인구 감소였습니다. 그러나 이 인구 감소는 어떤 것 때문이었을까요? 바로 부의 집중 문제였습니다. 부유층은 재산유지를 위해 출산을 의도적으로 회피했습니다. 이들이 토지를 독점했던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이가 부유층으로 진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을 보려면 나라 살림에 대한 문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의 출산감소 역시 단순히 독신주의를 지향하는 문화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는 총체적인 경제문제이며 여러 가지 정책들이 동원 되어 해결해야하는 중요한 문제임이 분명할 것입니다.
이번 강의에서 이외에도 다양한 역사적 사실들과 맥락들에 대해서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이 강의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역사가 저절로 이루어지거나 표면적인 이유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많은 역사들이 국가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고 할 때 나라 살림이라는 것이 역사를 움직이고 발전시키고 몰락시키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흥망사 강의를 통해 더 많은 국가의 역사의 이들의 흥망을 경제와 연관하여 배울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더 효과적인 조세정책들과 나라 살림에 대해 생각할 수 있고 결국에는 보다 더 나은 나라를 꿈꿀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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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당대편> | [김만권의 정치철학] 4강 자크데리다 "왜 해체가 정의인가"<법의힘> | 박윤채영 | 2015.4.8 | |
2015년 4월 2일 강의 자크 데리다 <법의 힘> 지난 시간 미셸 푸코에 의해 멘붕(?)과 깊은 우울을 겪으셨나요? 저 같은 경우엔 푸코가 충격적이거나 우울하진 않았습니다만 내가 살고 있는 21세기라 하는 사회 또한 중세와 다를 바 없는 권력의 감시와 규범에 의한 사회구나 하는 생각에, 그리고 “모든 게 구조라면 다시 구조화 하면 된다.”는 희망의 말에 ‘그럼 무엇부터 해야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강의에서 그 ‘시작 할 무엇’-제가 받아들이기로는 살아가는 태도와 방식-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만나게 된 철학자는 ‘자크 데리다’입니다. (이하 줄여서 ‘데리다’라고 하겠습니다.)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란 뭘까요? 사실 해체라는 개념은 하이데거가 먼저 제시했던 개념입니다. 하이데거는 일상 속에서 각 존재들은 자신에 대한 의심과 질문을 통해 근대적 사고방식을 깨는 방법으로 ‘해체’를 말했습니다. 하이데거에게 해체란 일상 속에서 현존재의 일상적 본질을 탐구하는 수단이었습니다. 데리다의 해체는 하이데거의 것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같지 않습니다. 데리다는 자신의 ‘해체’라는 용어는 하이데거의 ‘(존재의)해체’라는 용어와 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데리다와 하이데거의 차이점은 해체하는 대상에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해체는 세계 안에 있는 ‘나’를 확인하고 그 의미와 본질을 찾는다면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는 ‘존재하는 모든 권위에 대한 허물기’입니다. 즉 세계 안에 있는 내가 아닌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해체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데리다는 하이데거와 달리 ‘언어’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언어야 말로 일상성이 가장 강한 영역이며 때문에 가장 중요한 해체의 대상이 됩니다. 특히 언어로 구성되는 담론은 사용자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드러내주며 생활양식에서 사고방식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아주 가볍게 예를 들면 ‘초콜릿 복근’ ‘꿀벅지’ ‘검둥이’와 같은 단어들이 그 사회가 갖고 있는 편견과 시선을 반영한다고 보는 거죠. 때문에 “누구를 위해 여자의 허벅지는 ‘꿀’같아야 하며 남자의 복근은 ‘초콜릿’ 같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어 보이지만 중요한 해체의 시작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데리다는 책‘법의 힘’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이 책은 데리다가 자신의 ‘해체’라는 개념에 대해강의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강의는 당시 데리다를 비판하던 비판법학자들이 데리다에게 질문하고 데리다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비판하는 자와 답하는 자의 모습이 마치 소크라테스가 섰던 법정을 떠올리게 했다고 합니다. 비판법학자들은 해체가 옳은 이유를 증명할 것을 요구했고 데리다는 계속 해체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법의 힘’이라는 책은 데리다의 “왜 해체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가.”에 대한 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판법학자들은 ‘해체는 무책임하다.’고 비판했습니다. 권위의 붕괴는 사회 혼란을 야기할 것이며 기존의 질서가 해체될 때 부득이하게 피해 받게 되는 존재들에 대해 책임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해체하면 뭐가 남느냐! 이것이 그들의 비판이었습니다. 그러나 해체는 파괴가 아닙니다.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는 일종의 ‘분해’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을 분해하여 구성 성분과 본질을 보고 낡은 것은 버리고 틀린 것은 고쳐서 재조립하는 과정. 그것이 데리다의 '해체Deconstruction'입니다. 부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재구축이 목적인 것입니다. 때문에 해체를 무책임한 것으로 보는 것은 틀린 지적입니다. 해체는 기존 질서를 붕괴하고 파괴하는 작업이 아니라 ‘아무런 질문 없이 받아들이는 것들’에 대한 탐구입니다. 구축되어 있는 것은 모두 해체의 대상이 되며 단단한 것일수록 더더욱 해체해야 할 대상입니다. “만약 정의 그 자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법 바깥에 또는 법 너머에 있는 정의 그 자체는 해체 불가능하다. ” 데리다는 강의에서 최초로 “해체가 정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의의 근거이면서 정의 실현의 수단이며 국가를 유지시켜주는 가장 단단한 구조물인 ‘법’의 이중성을 보여주며 해체 가능성을 말합니다. 데리다에게 해체될 수 있다는 것은 그 안에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배제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고 이러한 이중성과 배제성은 부정의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정의 그 자체는 해체되지 않는 다고 말 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법의 해체는 “해체가 정의이다”라는 데리다의 말에 대한 증명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정의의 근거를 해체함으로써 정의를 증명했던 것입니다. 데리다가 보여준 법의 이중성은 ‘폭력성’입니다. 법은 폭력을 막기 위해 폭력(강제성)을 사용한다는 것이지요. 이때 우리가 견제해야 할 것은 ‘폭력이 잘 사용되고 있는가’입니다. 데리다는 발터 벤야민의 이론을 끌어와 법이 가진 폭력의 정당성을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에 대해 얘기합니다. 벤야민은 수단으로서 정당한 폭력은 법제정적이거나 법수호적인 성격 중 하나를 갖는다고 말했습니다. 법 제정적 폭력은 법의 기초를 설립하는 데 사용되는 폭력으로 혁명이 그 예입니다. 반대로 법에는 법을 보존하기 위한 폭력도 작동하는데 법에 복종, 법의 작동에 사용되는 폭력입니다. 이 두 가지 폭력은 서로 긴장관계에 놓여있으며 그 긴장관계는 힘의 조화를 가질 때 그 역할을 충분히 수행합니다. 힘의 조화, 그것은 정의 실현을 위해 중요합니다. 법 보존적 폭력의 힘이 과도한 곳에서 혁명은 어려우며 법은 점점 법을 위한 법이 될 수 있습니다. “정의 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 정의로운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던 우리는 힘 있는 것을 정당하게 만들어 왔다.” -파스칼- 결국 우리는 법이 갖는 폭력성을 배제하고 법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법이 갖는 폭력성을 인정하고 그 폭력성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견제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며 중요한 해체작업입니다. 해체는 한 번 하면 끝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해체는 ‘계속 되어지는 것’입니다. 해체는 기존의 것을 비판하여 정의롭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기존의 것들에서 부조리를 없애는 과정입니다. 물이 고이지 않도록 새 물을 계속 흘려보내는 일 같은 것입니다. 어쩌면 돌을 부수고 다시 뭉쳐 돌로 만드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문에 해체는 이론이라기보다 삶의 철학이며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체하는 삶이 계속되는 한 정의는 계속 미래 시제에 놓이게 됩니다. 데리다에게 정의는 도달할 지점이 아니라‘ 도래할 약속 To Come’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정의의 약속을 믿고 현재를 해체하기를 두려워 하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현재를 부수고 과거를 반성하고 더 좋은 내일을 만드는 것. 그리고 그 내일이 다시 오늘이 되는 것. 그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의 정의’의 가능성입니다. “정의란 언제나 앞으로 찾아올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정의는 언제 찾아올 것으로 남아있으며 찾아올 것을 지니고 있고 찾아오는 중인 하나의 약속이다.” “아마도 바로 이 때문에 정의는 그것이 그저 하나의 법적, 정치적 개념이 아닌 한에서 법과 정치의 변혁이나 개조 또는 재정초를 장래로 열어놓을 것이다.” *선생님이 공유하신 칼럼 정치의 무책임의 폐해: [정동칼럼]세월호법 정부 시행령안 당장 폐기하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3312043085&code=990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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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나무 기자의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 |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5강 - 유혹하는 문장쓰기 | 피를로 | 2015.4.7 | |
4강에서 글쓰기 워밍업을 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웨이트를 시작할 차례입니다. 초보자가 쓸 수 있는 문장 중 가장 좋은 문장인 무엇일까요? 바로 '간결한'문장입니다. 즉 불필요한 수사 없이 필수 성분들로만 이루어진 문장을 뜻합니다. 소설가 조지 오웰은 자신의 에세이 <Politics and the English language>에서 피해야할 표현들을 설명합니다. 먼저 사은유가 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비유의 참신한 가치를 잃은 표현으로, 쟁반같이 둥근 달, 바다같은 내 마음 등이 있습니다. 좋은 비유란 참신하면서도 독자에게 정확한 이미지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사은유 표현이 삼가는게 좋습니다. 다음으로 무의미한 숙어와 허세떠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 표현으로는 쓸데업이 긴 단어(generate와 바꿔 쓸 수 있는 give rise to)가 있고, 한국어 표현으로는 어려운 한자말 표현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웰은 의미 없는 말 삼가기를 강조했는데, 우리나라 말에서는 '정의'가 있습니다. '정의'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무수히 많은 뜻을 지닐 수 있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뚜렷한 이미지를 전달하기 어렵습니다. 이 밖에도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조지 오웰의 말들이 있습니다. 단어를 칠 수 있을 땐 언제든지 짧게 칠 것 능동태를 사용할 수 있을 때는 절대 수동태를 사용하지 말 것. 수동태를 필연적으로 쓰는 경우는 4강에서 말씀한 대로 주어의 흐름에 맞게 쓰거나 행위를 당하는 대상을 강조할 때가 있습니다. 일상어 가운데 대응할 말을 생각할 수 있다면 절대 외국말, 구절, 과학용어는 피할 것 전문가 집단의 언어를 사용하지 말 것 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쓸데없는 수사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가 습관적으로 쓰는 부사, 형용사 표현을 의미합니다. 예를들어, 개발사업은 천연기념물 거북이를 완전히 멸종시켰다. 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저 문장에서 '완전히'가 꼭 필요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강조를 위해 자주 쓰는 표현들 '너무, 좀, 어느 정도, 그냥, 정말, 아주, 갑자기, 굉장한, 어쩐지.' 등의 표현은 최대한 삼가시는게 좋습니다. 또 하나 형용사, 부사를 덜어내는 방법으로 무의미한 부사와 동사의 조합을 '더 강한 동사'로 바꾸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빨리 뛰었다.'를 '그들은 질주했다.' 로 바꿔 쓴다면 독자에게 더 강한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씁쓸히 웃었다.' 와 같이 역설적인 표현이거나 동사의 이미지를 평소와 다른 느낌으로 표현할 때는 형용사,부사 표현이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다음은 형용사,부사를 덜어낸 소설가 김훈의 문장입니다. '저녁에 나는 숙사를 나와 갯가 염전으로 갔다. 종사관과 당번 군관을 물리치고 나는 혼자서 갔다. 낡은 소금창고들이 노을에 잠겨있었다. 나는 소금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마니 위에 엎드려 나는 겨우 숨죽여 울었다. 적들은 오지 않았다.' <칼의 노래> 중 위 문장에서 '슬프다.'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지만 독자들은 엄청난 슬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형용사,부사 표현 대신 훌륭한 묘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상황을 설명할 때 슬프다, 즐겁다 등의 개념어로 서술하기 보다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비유, 대구의 표현법을 활용한다면 독자들에게 훨씬 더 강렬한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유를 할 때 주의해야할 점이 몇가지 있습니다. 일단 정치적으로 올바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꿀 먹은 벙어리'라는 표현은 현시대에 쓰기에 장애인 차별적 성격을 나타내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또 비유가 적절한 이미지를 환기하고 문맥의 흐름과도 어색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번 강의 과제로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1. 휠체어를 타고 움직이는 것은 마치 ( )와/과 같다. 사실 이 문장을 처음 봤을 때 위에서 말한 '정치적으로 올바른가'에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무리 공감능력이 높더라도 제가 휠체어타는 분들의 마음을 완전히 헤아리지는 못할 것 같고, 어떤 식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그분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 표현 중 가장 좋았던 표현은 '발가벗고 걷는 것과 같다.' 입니다. 휠체어로 움직이면 타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단 이미지는 적절히 환기했고, '휠체어를 타고 움직이는 것'과 '걷는 것'의 표현이 맥락에 잘 맞아떨어져 좋은 비유라고 느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힘들지만 그래도 움직일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는 이미지를 환기하기 위해 '옥상에 핀 민들레꽃'이라는 비유를 했습니다만, 이는 '휠체어를 타고 움직이는 것'이 주는 역동적인 이미지와 맞지 않아 좋은 비유는 아니었습니다. 2. 취미를 직업으로 택하는 일은 마치 ( )와/과 같다. 비유를 하기 전엔 일단 자신이 환기할 이미지를 정해놓는 게 좋습니다. 위 문장을 예로 누군가는 '확률적으로 어려운 일이다.'를 또 누군가는 '재정적으로 안정적일 확률이 낮다.' '취미였을 땐 좋았지만, 직업이 됐을 땐 지루해 질 수 있다.'라는 이미지를 전달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일단 이미지를 정한 뒤 그에 맞는 적절한 비유를 찾는 방법이 논리적으로 수월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오랜 친구와 결혼하는 것'이란 표현이 좋았습니다. '결혼 전에는 그 친구가 무척이나 좋았지만, 결혼한 후에는 질려버릴 수 있다.'는 표현이 취미와 직업의 관계와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개념어, 쓸데 없는 형용사,부사 표현을 삼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키가 크다.' 보다는 '그는 키가 183cm이다.'란 표현이 '그는 칠칠치 않다.'보다는 '그는 소변을 보고 오면 종종 바지에 흘린 자국을 남긴다.'란 표현이 훨씬 우리에게 확실한 이미지를 각인시켜 줍니다. 이번 강의의 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남자는 속물이다.'란 표현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바꿔볼까요? 특정한 상황, 행동을 설정하면 됩니다. 오늘 본 표현 중 가장 좋았던 표현은 이렇습니다. '그의 책상은 정리정돈이 잘 돼있다. 신년 선물로 보내준 예술의 전당 다이어리는 책상의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 그의 책상 왼쪽엔 후원하는 아프리카 어린이의 사진이 있다. 그런 그가 늘 입에 담고 다니는 말이 있다. '업소, 강남, 언니.' 문장에서 우리는 그가 예술에도 관심이 있고, 봉사도 하는 사람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업소, 강남, 언니'라는 표현을 달고 달아 이중적이고 속물적인 모습을 아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실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논픽션과 다큐멘터리는 일맥상통합니다. 다큐 감독들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늘 영상이나 장면으로 구현합니다. 수강생들이 다큐 감독이라고 가정하고, 다음 예시를 참조해, 보여주고 싶은 장면을 제시해 봅시다. '한국에서 연애하는 것은 너무 힘들다.' 이번에도 오늘 본 표현 중 제게 가장 인상깊었던 표현을 쓰겠습니다. '소개팅자리, 저녁 7시 남녀. 스타벅스에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웃고 눈빛도 교환한다. 둘은 9시쯤 헤어진다. 남자, 여자에게 안부 카톡을 남기고 여자, 화답해준다. 남자, 애프터 신청을 썻다 지우길 반복한다. 남자의 눈에 고지서가 들어온다. 남자, 카톡을 지우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더 알아본다. 여자,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컴퓨터를 킨다. 내일 취업스터디에서 검사 받아야 할 자기소개서를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취업난에 시달리는, 연애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20대의 비애가 묻어나 개인적으로 인상깊었습니다. 요즘 다큐멘터리는 나레이션 없이 시청자에게 구체적 상황만 제시하는 형식으로 만들어 지기 때문에, 다큐멘터리를 꾸준히 시청하신다면, 본인의 표현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번 강의는 여기까지 입니다. 1주차 강의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177350 2주차 강의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205289 3주차 강의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235767 4주차 강의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2563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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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당대편> | [김만권의 정치철학-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당대편>] 3강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 혠벗 | 2015.3.31 |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철학 <당대편>에서 세 번째로 다룬 고전은 미셸 푸코의 1975년 작 <감시와 처벌>이다. <감시와 처벌>은 그의 대표작이자 동시에 전환점이다. <감시와 처벌> 전, 그러니까 1975년까지 그의 철학이 ‘지식의 고고학’이라면, <감시와 처벌> 이후에는 ‘권력의 계보학’이라고 불린다. 지식의 고고학이란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들, 즉 단절된 지식을 고고학과 같이 발굴하여 해석을 가하지 않고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계보학은 오늘 날 우리의 사고방식과 지식을 권력과 관계 지어 탐구하는 방식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후 철학의 목표는 진리 추구에 있었다. 푸코는 이 ‘앎을 향한 의지’가 참과 거짓을 늘 대조시키고, 거짓은 나쁜 것으로 여겨 배제 시키는 일종의 권력을 낳는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하나의 지식이 ‘진리’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만들어 내면, 이 권력은 배제라는 수단으로 다른 담론의 형성을 막아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지식을 재생산하고, 이 지식은 다시 권력을 강화 시킨다. 이와 같이 진리와 권력의 관계-서로를 재생산하는 관계를 푸코는 ‘진리의 레짐’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는 진리의 레짐이 이미 우리의 일상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데에 주목했다. 일상에 퍼져있는 (종속적) 지식은 권력관계를 구축하고, 개인이 스스로를 조정하고 굴복하게 만든다고 했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이란 이처럼 알게 모르게 일상에 내재되어있는 힘을 의미한다. 푸코는 권력을 “국가 대 개인”의 프레임 속에서 이해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비판의 집중화(centrality of criticism)’라고 불렀다. 그는 앞서 말 한 대로 “권력이 지식과 관련을 맺으며 국가뿐만 아니라 사회 내의 모든 분야와 일상생활(법률, 학문, 사회, 공장, 기업, 학교, 성생활 등)에 구축되어 있다”고 보았다. 보이지 않지만 일상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권력에 대한 비판에 기존의 국가-개인 프레임은 적절치 않다. 푸코는 새로운 연구 방법, 즉 계보학을 창안한다. 계보학은 “특정한 사회기제에 존재하는 지식을 역사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에서 탐구‧비판”한다. 국가-개인 프레임에 비해 훨씬 미시적이고 세부적이라 할 수 있는데 푸코는 이를 ‘비판의 지역성(locality of criticism)’이라고 불렀다. 이 방법론을 통한 연구에서 권력은 “전략으로서 이해되어야”하며, 권력지배의 효과는 “배열, 조작, 전술, 기술 작용 등에 의해 이루어”진다.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권력이 인간의 신체를 다루는 기술, (종속적) 지식을 불어넣는 전략을 분석함으로서 사회를 구성하는 메커니즘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감시와 처벌>은 루이 15세 때 있었던 끔찍한 신체형(신체형벌, 고문) 묘사로 시작한다. 전근대 사회에서 권력이 가하는 폭력은 “‘진실’을 밝힌다는 명목으로 정당화”되고, 구경꾼들에게 왕이 절대 권력이라는 종속적 지식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형벌이 주는 공포감이 “수형자에게 부과된 치욕이 효과”를 “동정이나 영광”으로 역전 시켜, “사형집행인의 합법적 폭력이 불명예스러운 행위로 변화”되는 부작용(?)이 있어,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잔인한 신체형은 사라진다. 근대적 형벌은 정신에 대한 형벌, 자유를 박탈하는 형벌이며 신체는 이를 위한 도구이자 매개체가 된다. 또 단순히 범죄에 대한 징벌에서 범행의 재발을 막기 위한 ‘교정’으로 초점이 바뀌고 처벌의 목적 역시 “죄인을 개조”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푸코는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신체, 다시 말해 “복종시킬 수 있고, 쓰임새가 있으며, 변화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신체, 바로 순종하는 신체”에 주목하였다. 그는 18세기 군대, 학교, 구빈원의 억압적인 규율 중에서 폐쇄적 공간배치와 개인의 서열화가 ‘순종하는 신체’를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규율은 ‘독방’, ‘자리’, ‘서열’을 조직화함으로써 복합적인 공간을, 즉 건축적이면서 동시에 기능적이고 위계질서를 갖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 (...) 그 공간은 개개인을 작은 단편으로 절단하고, 또한 조작 가능한 관계를 수립한다.” 푸코는 건축화 된 규율을 17세기 페스트의 도시와 판옵티콘에서 찾았다. 17세기 페스트가 발생한 도시에서는 “엄격한 공간 분할이라는 행정조치”가 취해진다. 각 가정집의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그고, 매 아침 창문으로 점호를 하는 등 폐쇄, 봉쇄, 배제, 분할과 통제가 주를 이루는 이 조치는 주민들의 안전을 명분으로 개인에 대한 끊임없는 감독과 감시를 정당화한다. 어기거나 반발하면 사형. “위계질서, 감시, 시선, 그리고 기록행위가 구석구석까지 스며든, 페스트에 감염된 도시, 개개인의 신체를 명백히 감시의 대상으로 확장하는 권력의 운용 속에서 꼼짝 못하게 된 도시”의 일상적‧건축적 형태가 바로 벤담의 ‘판옵티콘’이다. 판옵티콘의 구조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이며(강의록 p.49~50 참고), 광인, 병자, 죄수, 노동자, 학생(어린이) 수용을 목적으로 한다. “측면에서의 불가시성”(원형건물의 분할된 부분들과 완전히 분리된 독방들)은 개인들을 완전히 개체화 하고 집단행동을 원천봉쇄하여 질서를 만든다. “가시성”(충분한 빛과 감시자의 시선)은 자율성을 만든다. 여기서 말하는 자율성은 개인이 감시를 내면화하여 더 이상 감시를 받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규율하는 것, 나아가 스스로 ‘권력의 전달자’가 되어 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배제 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푸코는 이 판옵티콘을 “인간의 일상생활과 권력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보았으며, 판옵티콘에서 볼 수 있는 자율성이 “근대적인 개인의 자율성의 실체”라고 말한다. 이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는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공격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민주주의나 전체주의 사회나 똑같이 판옵티콘을 메커니즘으로 하고 있고, 단지 감시탑의 개방성만이 차이이며 이 차이가 메커니즘의 부패를 막는다고 보았다. 이쯤 되니 나는 물론이고 수업을 함께 듣는 분들이 다 같이 힘들어하시고 우울해하셨다. 학교에서 푸코를 배우는 내내 우울했다는 옆자리 언니의 말이 백 번 이해가 되면서 답답함이 목까지 차오르는데, 무거워진 분위기에 당황하신 김만권 선생님께서 <감시와 처벌>과 계보학의 의의를 다시 상기시켜 주셨다. 푸코는 계보학을 통한 권력 비판이 대안을 줄 수는 없다고 인정하면서, 전통적인 프레임 내에서 획일적인 권력 비판과 대안이 잘못 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계보학의 목표라고 했다. 다르게 생각하면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구성’된 것이라면,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우리에게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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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나무 기자의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 |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4강 - 이태백이 아니라 두보다. | 피를로 | 2015.3.31 | |
드디어 글쓰기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4강의 제목이 '이태백이 아니라 두보다.' 인데요. '김훈이 아니라 강준만이다.'라는 표현이 이번 글쓰기 강좌를 듣는 수강생들에게 더 와닿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1강에서 고 기자님께서 "우리는 대문호는 될 수 없지만 강준만식 글쓰기까지는 도달할 수 있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글쓰기를 강준만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할까요? 일단 문장은 간결히 써야합니다. 다음 문장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싸우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있다. 그래서 길이 꽉 막혀있다. 신경질이 난 운전자들이 경적을 울려대고 있다. 한 청년이 디카로 이 장면을 찍고 있다. '~고 있다.'라는 현재진행형 표현이 너무 많이 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로 외국어 번역투로 인해 생긴 습관들인데, 최대한 피하시는게 좋습니다. 문장을 매끄럽게 바꿔보면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싸우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구경을 한다. 그래서 길이 꽉 막혀있다. 신경질이 난 운전자들이 경적을 울려댄다. 한 청년이 디카로 이 장면을 찍고 있다. 정도로 최대한 '~고 있다.'의 표현을 삼가는게 좋습니다. 또 다른 문장을 살펴보겠습니다. 6 25가 끝나고 그는 철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바랐다. 그래서 10월 하순 어느날 그는 집으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것이 지친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것이다. 위 문장은 '~것'이라는 표현이 너무 많이 쓰였단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 문장을 매끄럽게 바꿔보면 6 25가 끝나고 그는 철원에서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10월 하순이 돼서야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전쟁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친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사실은 모두가 안다. 정도로 '~것'의 표현은 '~고 있다.'만큼이나 최대한 피하시는게 좋습니다. '~수'의 표현도 자제하는 편이 낫습니다. 예를 들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물에 젖으면 누전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란 표현보단 '위험합니다.', '물에 젖으면 누전을 일으킵니다.' 라는 표현들이 독자에게 훨씬 간결함을 느끼게 합니다. 글쓰기 걸음마 단계에서는 문장을 최대한 짧게 쓰려는 노력을 하는게 독자에게 간결하고 깔끔한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영어의 수동태 형식의 남용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예를들어 검찰이 동국제강의 횡령과 탈세 등 의혹에 대한 강제수사에 본격 착수했다. 장세주(62) 동국제강 회장에 대해서는 출국 금지 조치가 내려진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동국제강 본사와 장 회장 자택 등에서 물품 거래내용과... 등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검찰은 장 회장이 횡령 자금 일부를 해외 도박에 사용한 정황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위 문장들은 실제 기사에서 직접인용 했습니다. 위 문장들을 읽어보면 정보를 알린 주체가 등장하지 않아 독자들로 하여금 문장의 객체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만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수동태 표현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파퀴아오가 메이웨더에게 잽을 날렸으나 메이웨더가 어깨로 흘려버렸다. 그가 메이웨더로부터 어퍼컷을 당했지만 겨우 버텼다. 파퀴아오의 등에 묻은 땀이 조명에 반사됐다. 그의 관자놀이가 가격당하는 소리가 관객의 함성에 묻혔다. 위의 문장처럼 주어를 일관되게 유지해야할 때, 그리고 동작을 받는 대상을 돋보이게 할 때는 능동표현보단 수동표현이 문장 간 유기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제 글쓰기의 기본요령(문장 간결히 쓰기)를 알았으니, 글을 시작해보겠습니다. 글을 시작할 때 우리가 가장 고려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제목입니다. 잠깐 뇌근육을 풀어볼까요 다음 빈칸에 들어갈 적절한 표현을 생각해봅시다. 글에서 제목은 ( )이다. 저는 랜턴을 떠올렸습니다. 제 연상 과정은 이렇습니다. 제목은 일단 뒤에 나올 글들이 어떤지 예상할 수 있게끔 알려주고, 독자의 시선을 끄는 기능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능에 초점을 맞춰보니 랜턴이 떠올랐습니다. 랜턴은 어둠을 밝히는 기능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제목은 글에서 베일에 쌓인 내용을 독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밝혀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타겟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만한 단어수준에서 참신한 표현이 좋은 비유입니다. 따라서 이번 강의의 제목은 좋은 비유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글을 쓸 때 가제목과 주제문을 머릿속에서 늘 생각해야 합니다. 고 기자님께서는 "생각이 넘쳐야 글이 나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본인의 생각이 분명하지 않으면 글이 절대 명확하게 표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생각이 명확하면 글을 쓰는 이유도 확실하고 수백페이지의 책 내용도 한 문장으로 압축하는 일도 가능해집니다. 방대한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으려면 주제가 아주 뚜렷해야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글을 쓰는 중간에도 끊임없이 주제문을 생각하는 연습을 해야합니다. 참고도서 : <유혹하는 글쓰기>, 김영사, 스티븐 킹 <유혹하는 에디터>, 한겨레출판, 고경태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모멘토, 안정효 <Writing Tools - 50 essential strategies for every writer>, Little Brown and company, Roy Peter Clark 1강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177350 2강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205289 3강 후기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2357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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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나무 기자의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 |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3강 - 인터뷰는 탁구다. | 피를로 | 2015.3.25 | |
이번 3강 주제는 바로 '인터뷰'입니다. 우리가 블로그를 운영하든 책을 쓰든 자신만의 컨텐츠를 잡았다면, 그 컨텐츠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터뷰가 그 방법 중 하나인데요. 하지만 인터뷰 또한 글쓰기만큼이나 초보자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그렇다면 성공적인 인터뷰를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요? 일단 손석희 JTBC 보도 담당 사장의 효과적인 인터뷰를 하나 시청하겠습니다. 관련링크 : http://www.youtube.com/watch?v=pvSYfMEmZjo 손석희 씨의 인터뷰를 보면, 알랭 드 보통의 <뉴스의 시대>의 한 구절을 직접 인용해 질문을 하는 모습을 통해 손석희 씨가 인터뷰를 위한 준비를 정말 많이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손석희 씨가 알랭 드 보통의 작품을 좋아해서 과거부터 그의 저작을 읽어왔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인터뷰를 하는 대부분은 후자의 경우일 확률이 높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사람과 원활하고 성공적인 인터뷰를 해야한다면, 일단 인터뷰를 철저히 준비해야 합니다. <씨네21>김혜리 기자 같은 경우는 인터뷰 전 '그를 아는 3명'과 통화한다고 합니다. 창작활동을 하는 사람과 인터뷰를 할 때 가장 큰 실례는 "대표 작품이 뭐에요?"란 질문입니다. 인터뷰 전 대상에 대한 최소한의 준비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질문입니다. 손석희 씨의 인터뷰로 돌아가서, 손석희 씨가 알랭 드 보통의 작품에 대한 간단한 평을 통해 인터뷰를 자연스럽게 이끌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손석희 씨의 평은 알랭 드 보통에게 '내가 당신과의 인터뷰를 위해 이정도의 노력을 했다.'란 느낌과 동시에 신뢰 또한 줄 수 있습니다. 신뢰가 있어야 인터뷰 대상자(Interviewee)가 마음의 문을 열게 되고, 마음의 문을 열어야 인터뷰의 질이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Interviewee를 철저히 준비하는 것은 인터뷰의 기본 자세입니다. 다음으로 알아야할 사실은 '인터뷰는 단순히 Interviewee의 말을 받아쓰는 게 아니라, Interviewer가 '능동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받아야한다.'입니다. 보통 인터뷰를 할 때, Interviewee가 불편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질문들이 인터뷰의 핵심이자,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일 확률이 높습니다. 우리가 불편한 질문을 해야할 때는 Interviewee와 탁구를 치듯 주거니 받거니하는 식의 대화로 충분한 신뢰를 쌓은 뒤에 해야합니다. 이제 인터뷰의 기본을 알았으니, 인터뷰 과정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도록 합시다. 일단, 인터뷰 사전준비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Interviewee에 대해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터뷰의 목적, 주제, 제목을 머릿 속에 늘 되새기는 것도 중요합니다. 목적을 망각한 인터뷰를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대화의 내용이 방향성을 잃어 인터뷰를 망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인터뷰 목적, 게재일, 주요 질문 등은 Interviewee에게 미리 알리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Interviewee도 미리 질문을 받고, 답변을 생각해서 실제 인터뷰시 원활한 흐름을 가능하게끔 할 수 있습니다. 최소 하루전에는 질문지를 미리보내는 게 좋습니다. 녹음기, 취재수첩, 볼펜, 디카도 미리 점검해야 합니다. 간단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도 상대방의 마음을 열게 하기에 좋은 방법입니다. 마지막으로 인터뷰 장소 정하기입니다. 우선 가장 피해야 할 장소는 커피숍입니다. 낯선 장소는 Interviewee로 하여금 불편한 마음을 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수 인터뷰에는 그들의 작업장이나 공연장을 찾아가고, 요리사를 인터뷰 할 때는 그의 주방을 찾아가는 식으로 Interviewee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장소를 택해야 성공적인 인터뷰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인터뷰 진행에 관한 내용입니다. 인터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Interviewee와의 감정선입니다. 대화를 통해 Interviewee의 마음을 열게 하고 그 상황을 Interviewer가 잘 이끌어야 합니다. Interviewee와의 감정선이 없다면, 그를 파고 드는 깊이있는 질문을 던지는 일은 불가능입니다. 그와 감정선을 형성했다고 해서 상황이 종료된 것 또한 아닙니다. Interviewer의 불편한 질문, 행동 하나에 공들인 감정선이 깨질 수도 있기 때문에 Interviewer는 Interviewee의 상황을 고려해 정말 하고 싶은 질문이더라도 신뢰가 부족하다면 참는 방법 또한 알아야합니다. 흔히 Interviewer가 실수하는 행동 중 하나는 대화에서 비롯됩니다. Interviewee의 신분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부적절한 단어선택은 Interviewee와의 감정선을 한 번에 무너트릴 수도 있습니다. 후기를 쓰는 저도 학교과제로 '유명무실 충무로, 현재와 미래'라는 기사를 쓰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 현재 '충무로 영화 거리의 축제'가 '한국영화인협회'주도 하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한국영화인협회장과 전화로 짧은 인터뷰를 했었습니다. 인터뷰 당시 제가 충무로 영화 거리의 '몰락'이라는 표현을 썼었는데, 전화 인터뷰이기도 했지만, 저의 부적절한 단어선택으로 인해 Interviewee가 바로 불쾌감을 표시했고, 결국 얕고 형식적인 정보만을 얻어냈습니다. 저의 사례를 통해서도 인터뷰 시 대상자의 상황을 고려한 단어 선택은 정말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터뷰 정리 및 기사화입니다. 녹취할 땐 녹음내용을 빠짐없이,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게 좋습니다. Interviewee가 사투리나 비문을 쓰더라도, 있는 그대로 생동감있게 녹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인터뷰의 과정을 알았으니, 이제 인터뷰 기사의 형식을 알아보도록 합시다. 첫번째로 머릿글 + 문답, 문답, 문답으로 이어지는 형식이 있습니다. 관련링크 : http://newsplu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1/22/2010112200189.html 다음 인터뷰 형식의 장점은 실제 대화처럼 쉽게 읽힌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모든 대화가 표준어로 서술되고 정제되어 대화의 생동감이 떨어지고 캐릭터를 드러내는데 한계를 갖는 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두번째로 머릿글 + 문답 + 중간설명 문단 + 문답의 형식이 있습니다. 관련링크 : http://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76167.html 위 인터뷰 형식은 대화의 맥락을 부연 설명해 인터뷰를 읽는 독자의 이해를 한층 도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만, 첫번째 형식과 같은 단점을 갖는 한계 또한 있습니다. 세번째로 머릿글 + 3인칭 시점의 묘사체, 인터뷰 내용은 쌍따옴표로 직접인용하는 형식이 있습니다. 관련링크 : http://theguardian/com/politics/2011/mar/19/ed-miliband-interview 다음 인터뷰 형식은 앞의 두 형식과 다르게 말맛을 살리고 캐릭터를 생생히 드러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보자가 구사하기엔 어려운 형식이라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상으로 3강의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1강 후기 링크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177350 2강 후기 링크 : http://academy.peoplepower21.org/index.php?mid=lecture_board&document_srl=12052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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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당대편> | [김만권의 정치철학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당대편>] 2강. 유르겐 하버마스 | 개똥이 | 2015.3.23 | |
지난 3월 19일. 김만권 선생님의 두 번째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독일의 철학자 유르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하버마스는 누구인지, 어떤 이론을 주장했는지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유르겐 하버마스는 누구인가 하버마스는 사회학자이자 철학자, 현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수장으로 의사소통이론과 공론장이론으로 유명세를 떨친 인물입니다. 아직 생존해 있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구순구개열로 인해 선천적으로 언어장애를 앓았는데 이로 인해 나치 치하에서 열등종으로 분류되는 차별의 경험도 겪게 됩니다. 이런 차별의 경험이 후에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이론을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버마스는 아도르노의 조교로 일하며 사회학 박사과정을 밟게 되었지만, 아도르노와의 갈등으로 대학을 옮기고 가다머의 추천으로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학생운동세력과의 갈등으로 학교를 떠나 과학기술세계 생활조건연구소에서 10년간 연구에 매진하여 <의사소통행위이론>(1981)을 완성합니다. 2. 초기 비판이론가 –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 하버마스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에 대한 설명을 빼놓을 수 없는데요. 비판이론이란 ‘이성에 대한 비판적 신뢰’를 바탕으로 이론과 사회적 실천의 결합을 강조하는,간단히 말해 과학과 철학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판이론의 위기 - 계몽의 딜레마, 길 잃은 이성” 초기 비판이론가였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개인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기 위해 시작된 “계몽”이 과학적 지식만을 강조하여 결과적으로 개인의 사유를 제한하고 억압시킨다고 여겼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이성의 도구화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또 다른 초기 비판이론가인 마르쿠제도 산업사회 속의 인간은 행복만을 추구하는 ‘일차원적 인간’이 되었고 이성을 통한 해방은 불가능하며 문명 이전의 본능인 ‘에로스’에서 해방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3, 하버마스의 사상 하버마스는 초기 비판이론가들이 근대를 ‘도구적 이성이 완전히 지배하는 시기’라고 인식하여 자기파괴적 논리에 빠진 점을 지적하며 도구화되지 않은, 좀 더 포괄적인 이성관 속에서 해방의 가능성을 찾을 것을 제안했습니다. “일상언어에서 합리성의 근원을 찾다.” 하버마스는 인간 개인의 의식 안에 머무는 이성의 합리성 한계를 파악하고, 합리성이 생겨나는 근원을 새롭게 마련하고자 했는데, 이런 차원에서 시도된 이론이 바로 ‘의사소통 행위이론’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성은 의식이 아니라 의사소통 속에 존재하며 그 속에는 도덕-실천적 성격이 들어가 있다는 것인데요. 때문에 하버마스는 일상의 의사소통 구조를 분석하여,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언어의 유효성에서 합리성의 근원을 찾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사소통 합리성의 목적은 바로 ‘상호이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는 “어떤 주장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상호이해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체계와 생활세계” 체계와 생활세계는 하버마스가 이해한 근대사회의 개념입니다. 체계란 경제와 관료적 행정의 합리화가 진행되는 곳이며 이성의 도구·전략적 영역이 중심적으로 자리잡는 근대세계의 영역입니다. 반면에, 생활세계는 사회 구성원들이 보편적 언어의 사용을 통해 주장의 타당성을 따져 상호이해와 합의에 이르기 위한 의사소통이 중심이 되는 사회영역입니다. 생활세계 구성원들은 문화를 통해 세계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얻고, 사회를 통해 구성원 간의 연대와 질서를 배우며, 이 과정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낼 수 있는 인격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번 강의의 부제목이기도 한 “도구화된 세계에서 어떻게 이성을 사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아 보도록 합시다. 도구화된 세계란 도구·전략적 이성(체계)이 도덕·실천적 이상(생활세계)으로 넘어와 생활세계를 지배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는데요. 하버마스는 생활세계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생활세계가 체계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저항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바로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사회운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버마스는 시민사회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해주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하버마스가 말하는 시민사회운동은 체계에 대한 사회구성원들 간에 상호이해와 합의 즉,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지키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강의는 개인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많았는데 강의 후기를 남기면서 다시 이해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았습니다. 후기를 읽으시는 분들께 이해하기 쉬운 강의록이 되었을지 조금 걱정이 앞서는데요. 다음강의 초반에 질의응답시간과 덧글로 질문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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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나무 기자의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 | [사실을 다루는 글쓰기]2강 - 팩트는 신성하다. | 피를로 | 2015.3.17 | |
지난 강의가 글쓰기를 위한 '컨텐츠'에 방점을 찍었다면, 이번 강의는 컨텐츠를 구성하는 '팩트'에 중점을 두고 진행 됐습니다. 우리가 만약 남들이 하지 않는 것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컨텐츠를 잡았다면, 기자님께서는 이제 팩트에 근거한 자료수집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점은 '팩트에 근거한' 자료수집입니다. 그렇다면 왜 '팩트'에 근거해야할까요, 그리고 2강의 제목처럼 팩트는 신성한 것일까요? 2007년 대한민국은 '신정아 사건'으로 떠들썩했습니다. 많은 언론사들이 관련 내용을 보도했는데, 2007년 9월 13일에 문화일보가 '신정아 누드사진 발견'이라는 표제의 기사를 모자이크 처리된 사진과 함께 일면에 실었습니다. 이에 신정아씨는 문화일보를 고소했고 결국 누드 사진은 조작한 사진으로 판명나 당시 문화일보 편집국장이 옷을 벗는 사태까지 있었습니다. 작년, 전 국민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던 '세월호 참사'때는 MBN이 interviewee 홍가혜씨에 대한 팩트체크를 정확히 하지 않아, 방송사고를 일으켰습니다. 이 방송사고는 대중들의 마음 속에 타오르고 있던 언론에 대한 불신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제대로 했습니다. 저번 강의후기에 썻던 것과 같이 지금은 1인미디어 시대입니다. 즉 공식 언론인이 아니더라도, 대중들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는 파워블로거라면 기자처럼 잘못된 팩트로 인해 명예훼손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컨텐츠를 구성하는 팩트가 잘못됐다면, 심각한 피해가 본인에게 돌아올 수 있으므로 '팩트는 신성하다.'란 표현은 어느정도 맞는 듯 보입니다. 그럼 정확한 팩트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을까요? 일단 기본적으로 사건을 서술할 때 항상 5W1H(who, what when, where, why + how)에 입각해야합니다. 앞의 6요소 중 하나라도 빠진다면, 그 팩트는 신성함을 갖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5W1H에 입각해 글을 서술하더라도 고려해야할 점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첫째로 '행위나 사건의 주체와 객체는 최대한 구체적으로 적기' 입니다. 예를들어 검찰이 수사를 했다면 서울중앙지검 소속인지, 어떤 부서, 어떤 직책인지 명확히 표기해야 합니다. 또 냉장고가 불에 탄 사건을 서술할 때도 단순히 개념어인 '냉장고'를 활용하기 보단, 구체적으로 어느 브랜드의 몇년식 제품인지까지 서술하는 게 좋습니다. 둘째로 인터뷰, 사건에 서술되는 인물들의 취재 중 나이를 알아야 할 땐 무조건 '출생년도'를 물어야 합니다. 정확한 팩트의 구성을 알았으니, 이제 팩트를 어떤 방법으로 얻을지 알아볼까요? 첫째로 국가통계포털 사이트에서 통계를 활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배운 여자'는 그 때 극소수였다.'라는 문장 뒤에 국가통계포털에서 '교육정도별 인구 및 비율'자료를 보면, 1955년 당시 여고생은 5만 5300명으로 전체 여성 인구의 0.5%였다.'는 문장을 덧붙인다면, 앞문장에 훨씬 신뢰성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국회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두 도서관은 '납본 제도'(도서관자료를 발행하거나 제작한 자가 일정 부수를 법령에서 정한 기관에 의무적으로 제출하는)에 의거해 국내 최대량의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필자로서 풍부하고 의미있는 컨텐츠를 꾸미기 위해서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손만 내밀면 닿을 거리에 있는 팩트를 이용하기보단 언급한 두 도서관의 자료를 최대한 이용하시는 게 좋습니다. 특히 자료로 회고록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회고록은 사실상 2차자료(단행본)과 달리 가공이 덜 된 1차자료이기 때문에 특정인물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는 데 유용합니다. '공' 또는 '국'자가 들어가는 기관의 문서기록을 노리는 것도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국' 또는 '공'자가 들어가는 국회회의록, 지자체, 공기업 등 모든 기관들은 기록을 남기고, 국민들이 언제든 열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취재하려는 인물 혹은 대상의 관련 인물이 있다면, 인터뷰도 좋은 방법입니다. 인터뷰를 할 때는 현직보단 전직의 사람들을 찾아가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 당국에 대한 좀 더 자유로운 의견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상대와의 교감입니다. 인터뷰를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자신의 또는 자신이 아는 정보를 드러내야 하기에 인터뷰에 방어적 태도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편안함을 주고, 공감을 얻는 게 인터뷰를 할 때 가장 먼저 해야하는 동시에 핵심적인 일입니다. 또 중요한 진술이 있을 땐, 바로 메모하고 녹음기는 상대방에게 압박감을 주지않는 선에서 '전략적'으로 활용하기 그리고 헤어질 때 핸드폰이 아니면 이메일이라도 알아내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정보공개시스템 사이트에서 정보공개청구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실 공식 언론인이 아닌 개인의 신분으로 다양한 인터뷰 특히 정부와 관련한 인터뷰를 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 개인이 그나마 정부에 대한 자료를 얻어 낼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정보공개청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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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당대편> | [김만권의 고전으로 보는 정치철학 당대편]1강 롤스의 정의론 | 박윤채영 | 2015.3.15 | |
지난 목요일(3월12일) 김만권 선생님의 정치철학 당대편, 첫 수업이 있었습니다. 수업은 수강생 분들의 자기소개로 시작되었는데요, 1)수업을 듣게 된 동기와 기대 2)강좌 목록 중 가장 기대되는 학자와 질문거리에 대한 이야기로 진행되었습니다. 수강생 분들 중에는 김만권 선생님의 지난 수업을 들었던 분들이 여럿 계셨는데요, 다들 김만권 선생님의 수업에 감명을 받아 또 듣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수업은 ‘시’ 로 시작되었습니다.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노래>였습니다. 이 시는 김만권 선생님이 대학원에서 방황하던 시절 교수님의 권유로 연세대 원주캠퍼스에 수업을 나가게 됐을 때 원주 가는 버스를 타기 전 뽑아갔던 시라고 하는데요, 첫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읽으며 “이런 세상은 만들지 말자.”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가난한 사랑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달빛이 새파랗게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점 치는 소리 방법대원의 호각소히 메밀묵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되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에 터지는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번 수업의 주제, 존 롤스가 말한 정의는 바로 이 화자와 같은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말 합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인간의 기본적인 것을 포기”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 말이지요. 존 롤스는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난 후 세상을 휩쓴 인간성에 대한 회의감, 근대를 지켜준 이성과 과학에 대한 의심으로 인해 ‘옳고 그름이란 없다.’는 쪽으로 사람들의 논쟁이 옮겨갔을 때 “아니, 그래도 세상에 옳고 그른 것은 있다.”고 외친 철학자입니다. 그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유년 시절을 알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워낙 허약했는데 자신에게 디프테리아가 옮은 동생 두 명이 죽자 충격으로 실어증을 앓았고 그 이후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유난히 강의록을 꼼꼼히 준비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지요. 볼티모어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흑인과 백인의 차이를 느꼈고 그것은 점점 ‘차별’로 인식되었습니다. 여성운동가인 어머니마저 그 차별을 정당하게 생각하는 것을 보며 롤스는 ‘뭔가 잘못됐다.’ 고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경험은 후에 의료, 기회의 평등, 인종 차별과 같은 문제들을 사회의 주요 과제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롤스는 많은 여성 제자들을 양성했고 제자들이 내놓은 롤스에 대한 비판에 대해 성의를 다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이기려 하거나 입을 막으려 하기 보다는 그들의 비판을 수용하면서 자신의 신념은 지켜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롤스가 실천한 민주주의이자 정의였다고 생각합니다. 빌 클린턴은 롤스 사망 후 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교육받은 모든 미국세대들에게 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한 신념을 부활시켰다.” 롤스의 책 청의론The theory of Justice는 롤스의 여러 논문을 합쳐 놓은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롤스는 이 책에 대해 “읽기 어려우니, 일반인은 **정도만 읽으면 된다.”는 안내를 붙였다고 합니다!!!!!!) 흔히 정의론에 대해 갖는 사람들의 오해가 있는데요, 1. 롤스는 불평등을 정당화 한다. 2. 무지의 베일은 인간의 양심과 도덕에 정의를 맡기는 것이다. 3. 롤스는 모두 똑같이 나눠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막시스트(공산주의)다. 이것들이 왜 오해인지 풀리셨으면 좋겠습니다. 정의론의 주제는 ‘정당화 될 수 있는 불평등은 있는가?’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당화될 수 있는 불평등은 없다는 것이 정의론에서 말하고 있는 정의입니다. 롤스는 집안 배경, 신체적 조건, 사회 구조적 차별과 같은 태생적인 불평등을 정당화 하는 특수한 조건들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그러한 조건들을 최대한 평등하게 만들어야 사회 정의가 실현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도’로써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국가주의와는 다릅니다. 롤스가 말하는 제도는 국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람들이 여러 도덕적, 양심적 판단을 할 때 제도로써 사회 정의의 근거와 기준을 제시하여 판단의 부담을 덜고 보다 정의에 가까운 선택들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틀입니다. 현실 사회에서 정의를 행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공익 제보자들이 후에 겪게 되는 사회적 압박감 또는 개인적 데미지, 증인들이 증인 보호 신청을 하는 순간 포기해야 하는 개인의 자유와 삶 등이 정의가 가진 비용Cost이지요. 사람들은 비용에 대한 부담 때문에 정의를 선택하기를 꺼려하기도 합니다. 롤스는 제도가 이 비용의 부담을 덜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은 정의를 선택할 테니까요. “정의의 일차적 주제는 사회기본구조가, 말하자면 사회 주요 제도가 권리와 의무를 배분하고 사회 협동체로부터 생긴 이익의 분배를 정하는 방식이 된다.” 롤스는 정의의 원칙으로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제 1원칙(정치원칙): 평등한 자유의 원칙. 여기에서 그 유명한 ‘무지의 베일’이 나온 것입니다. 무지의 베일은 한 개인이 자신의 조건을 알지 못하면 자신의 최소한의 기본권만을 지키려 할 것이며 그것이 평등한 사회조건을 만들 것이라는 겁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공개되는 공적 장소에서는 개개인은 자신의 조건에만 갇히게 되며 때문에 자신의 조건에만 유리한 것들에 합의하려 할 거라는 것이 롤스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롤스는 제도는 합리적 절차를 따라 정해져야 하며 그것을 정하는 사람은 그 제도의 수혜를 가장 최후에 받게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으로 ‘피자 배분’을 예로 들었는데요, 피자를 가장 공정하게 나누는 방법은 피자를 나눠 주는 사람이 가장 나중에 피자를 갖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순수 절차’라고 합니다. 롤스는 제도의 역할은 분배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어떻게 생산하고 그것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 그것에 무엇을 가장 우선 가치로 둘 것인지에 대한 사회관은 제도로 정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분배는 사회 갈등의 핵심이며 정의는 그것들을 조정하는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제도는 사람들에게 공정에의 우선성을 제시함으로써 갈등을 최소화 하는 역할을 합니다. 롤스가 말하는 공정은 절대 평등이 아닌 롤스가 ‘분배’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유는 극심한 빈곤과 무지가 개인들이 자유와 민주주의, 평등, 정의를 포기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모두가 최소한의 수준의 생활 조건과 지식을 공유해야 가치가 공유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진 자들의 것을 나누는 재분배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갖지 못한 자들에 대한 수혜가 아니라 시작이 공정한 ‘원래적 분배’입니다. “기본적 자유들은 하나의 전체, 즉 하나의 체계다. 하나의 자유의 가치는 일반적으로 다른 자유들을 명시함에 달려 있다.” 덧붙여 김만권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장 자유로운 상태는 내 옆 사람이 가장 자유로운 상태다.” 내 아무리 자유로워도 내 옆 사람이 자유를 잃었다면 언제든 나의 자유로 침해당할 가능성을 갖는다는 의미이며 때문에 내 옆 사람의 자유의 수준이 곧 나의 자유의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의 공정성과 최소한의 생활수준이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는 롤스가 막시스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래야 자유가, 평등이 결과적으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 2원칙(사회경제원칙): 민주적 평등의 조건 a차등의 원칙: 사회 최소 수혜자의 불평등을 보상할 만한 이득을 가져오는 경우에만 불평등은 정당화 될 수 있다. 그러면서 롤스는 진정 자유로운 사회는 마음껏 갖게 하는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가질 수 있는 최대량을 제한하는 사회라고 했습니다. 극심한 불평등이 낳는 상대적 박탈감은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니까요. 롤스가 공리주의(Utilitarianism)를 비판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공리주의는 사회의 모든 것을 Pleasure과 Pain으로 나눴고 행복Pleasure 총량이 최대일 때가 좋은 사회라고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사회 전체의 행복을 위해선 소수의 고통은 감수해야 할 몫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계급사회에서 노동자가 절대적으로 다수일 때 매우 혁신적인 발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임무가 소수자의 보호로 전환되면서 문제적 이론이 되었지요. b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 사회적 우연성, 천부적 능력이 불평등을 정당화 하는 이유가 되어선 안 된다.(분배의 기준이 되어선 안 된다.) 상속세와 누진세가 높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롤스의 눈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성과주의나, 이를테면 국제 대회에서 메달을 딴 소수의 사람들만 고수익 연봉을 받게 되고 좋은 선생들을 만나게 되는 것은 부정의인 것 같습니다. 성과에 상관없이 공정한 배움의 기회, 최소한의 수익 보장이 되는 것이 진정한 정의겠죠. 메달을 딴 사람의 수고를 부정하거나 개인이 그 성과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메달을 딴 사람과 따지 못한 사람의 격차가 어느 이상이 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 제도가 하는 몫이겠지요. 마지막으로 롤스의 전체 이론에서 가장 오해해선 안 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롤스는 사람들의 생활 조건을 개선시켜서 민주주의나 자유를 완성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민주주의와 자유가 보장되어야 사람들의 기본권이 충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사람들이 “민주주의는 먹고 살기 좋아지면 그때 가서..”라는 말은 말 그래도 말.도.안.돼.는 말인 겁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면 우린 모두 먹고 살기 좋아질 것입니다.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쉽게 돼냐, 국민이 정치에도 관심 없고, 투표도 안 하는 걸 보면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는 거 아니냐, 라고 반박하시는 데에 롤스는 미리,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유의 하나하나의 핵심적인 부분을 다 같이 확고히 적용할 수 있으며 이를 보장할 수 있도록 자유를 정의하는 길이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롤스는 우리의 책무는 정치를 참여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정치 참여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투표는 승리를 목적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소수의 의견인지 알고 그것까지도 보호되도록 하는 것을 목표하는 것이라고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유, 민주주의, 평등,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가치관입니다. 롤스는 이것들을 개인이 독단적으로 또는 일부 집단이 주도적으로 추구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현재 대부분의 국가들이 수립한 민주주의의 전제는 평등이며 평등은 모두에게 같은 가능성이 주어졌을 때, 같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가능합니다. 그리고 정의는 그것으로 가는 길이자 방법입니다. 김만권 선생님은 강의 말미에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적어보겠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기지는 못했고요 제 나름의 정리를 적겠습니다. “우리는 세계의 문제와 계속 함께 있기 위해 고전을 읽어야 합니다. 옳다고 믿는 것과 세계 작동 방식 사이의 간격이 커질수록 우리는 문제제기를 하게 됩니다. 그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들이 자꾸 좌절 될수록 우리는 침체되고 정체된 것처럼 느끼게 되고 회의감을 갖게 됩니다. 고전은 그럴 때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왜냐하면 고전은, 세계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끊임없이 함께 있으려 했던 사람들의 기록이자 고민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짜라투스트라가 하루 종일 마을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밤에 산에 올라 펑펑 울고도 다음날 아침 다시 마을을 내려오는 그 마음으로 우리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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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당대편> | [김만권의 정치철학-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당대편>] 오픈특강(3/5) 정치철학으로 본 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 혠벗 | 2015.3.11 | |
2014년 12월,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을 해산하고 통합진보당 의원들의 의원직까지 박탈하는 판결을 내렸다. 헌재의 이번 판결에 대해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특히 해당 법 조항이 없음에도 통진당 의원들의 의원직 박탈 결정은 명확한 삼권분립을 강조하는 시민법 전통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김만권 선생님의 오늘 강의에서는 ‘방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통진당 해산 결정이 헌재의 주장처럼 “우리 민주주의를 방어하는데 적절”했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정치철학적으로 살펴보았다. (강의록 인용은 큰따옴표로 표시했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자유의 세 가지 기본영역을 제시한다. 첫째, 양심의 자유, 생각과 감정의 자유 의견과 주장의 자유, 출판의 자유, 둘째, 사회성의 이름의 억누를 수 없는 개별성의 자유, 셋째,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자유로서 결사의 자유가 그것이다. 밀은 각각의 자유가 독립적으로 존재‧보장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의 체인처럼 모든 자유 일체를 보장해야 비로소 ‘자유로운 국가’라는 것이다. 존 롤스 역시 <정의론>에서 밀이 제시했던 “기본적 자유들은 하나의 전체, 체계”라며, “유리한 조건 아래 이런 자유 하나하나의 핵심적인 부분을 다 같이 확고히 적용할 수 있으며 이를 보장할 수 있도록 자유를 정의하는 길이 항상 존재 한다”고 썼다. 불가피하게 하나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발상은 일종의 기만이라는 것이다. 특히 정치집단 형성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결사의 자유는 단순히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모일 수 있는 자유, 정치 집단을 형성할 수 있는 자유에서 그치지 않는다. 결사의 자유는 관계를 형성하는 자유이기 때문에, 특정 집단에 대한 결사의 자유가 억압된다면 집단 내부의 구성원은 물론이고 연관된 모든 개인, 단체의 자유가 매도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일공산당 사무실이 폐쇄되는 장면ⓒwww.br.de (Bayerischer Rundfunk) 바이에른 방송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사의 자유를 제한했던 사례가 있다. 1956년 독일연방헌법재판소의 독일공산당(KPD) 해산 결정이 대표적이다. 독일 헌재는 바이마르헌법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 정체가 전체주의 정당의 싹을 보고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 나치가 ‘합법적 권력획득’을 했다며 자신들의 해산 결정을 두고 “‘투쟁적 민주주의’의 고백”이라 표현하였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은 헌법의 가치중립적 태도나 민주주의를 방어하려는 헌법적 수단이 부족해서 붕괴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세력과 의지가 너무나 미약했기 때문임이 증명되고 있다.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는 가능하지 않다.”(헌법재판소(2004), 「정당해산심판제도에 관한 연구」) 독일 헌재도 이 해산 결정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고 반성했다. 독일의 공산당해산 사례와 관련하여 칼 레벤슈타인의 ‘방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떠올릴 수 있다. 그는 1930년대 당시 유럽전역으로 확산되어 가던 파시즘으로부터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서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이 희생될 위험이 있다 해도” 예방적, 선제적 공격을 동원해 민주주의를 방어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규율된’ 또는 ‘권위주의적’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이 개념에 내재된 이분법적 논리는 정체 내에서 끊임없이 민주주의의 적을 상정하도록 한다. 결국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호전성이 결국 민주주의를 위험하게 하는 딜레마에 빠지고 정체는 분열한다. 특히 전환기 국가나 민주주의의 공고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나라에서는 민주주의의 심각한 후퇴를 부를 수 있다. 이차 대전 후, 레벤슈타인도 자신의 논리에 오류가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헌재의 결정문도 통진당 해산이 야기할 정체의 분열과 민주주의의 후퇴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건 해산결정은 북한식 사회주의 이념을 추구하는 정당이 다원적 세계관에 입각한 우리의 민주 헌정에서 보호될 수 없음을 선언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상징적인 선언을 위해 민주주의의 가치 훼손을 불사한 것이다. “북한의 상시적인 위협에 따른 ”비상상황“”과 헌법주의에 갇힌 결정이다. 독일 헌재의 오판과 레벤슈타인의 오류를 알면서도 그대로 따른 결정이다.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국 “평화도, 자유도, 민주주의도 모두 안전하지 않은 전투적 민주주의”만 남게 된다. 한스 켈젠은 그의 저서 <민주주의의 방어>에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 한다. “민주주의자는 심지어 민주주의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운동에조차 관용해야 한다. 민주주의자는 배가 침몰하더라도 자신이 든 깃발을 지켜야 한다.” 즉, 민주주의를 방어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이성과 원칙”을 버려서는 안되며,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최후의 수단도 언제나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롤스의 말대로 “자유를 하나의 체계로 해석하고 이 하나하나를 지킬 수 있도록 자유를 정의”해야 한다. 따라서 민주화의 산물이자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제도로서 헌법재판소는 언제나 이 민주적 원칙을 최우선으로 삼아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지 못했던 이번 결정이 과연 ‘민주주의를 방어 하였는가’에 대해 우리는 회의적이다. 그리고 헌재의 “존재와 본질에 관한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수업 후에도 많은 분들이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 그 중에서 수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질문과 답만 추려 옮겨 적었습니다:) (존칭과 존댓말은 편의상 생략했습니다) Q1. 밀이 말한 양심의 자유에서 ‘양심’이란? A1. 양심의 자유는 표현의 자유 속에서 명확히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양심의 자유를 내면에 가둬두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유국가라면 그것이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스피노자가 “우리가 손 댈 수 없는 자유는 우리 내면의 자유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양심의 자유)는 인권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자, 제한 할 수 없는 부분이며 타인의 동의가 필요하지도 않다. 그렇지만 행동으로 표현, 실현 되려면 타인의 정의감에 호소하여 인정을 구해야한다. Q2. 최근 프랑스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으로 표현의 자유의 대한 경계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A2. 우리나라에서도 일베 문제 등을 두고 표현의 자유의 보장에 대해 논쟁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배척하는 관용의 가치-인내와 설득-를 통해서 그들을 품어야 한다. 적대적으로 대하는 순간 그들과 별 다를 게 없어진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사회의 약자, 소외된 사람들이 소속할 곳이 생기면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되면서 비이성적인 폭민이 탄생한다고 설명하다. 일베들도 속할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방향성, 속할 공간을 마련‧재설정해주는 것이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