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ODA의 길을 묻는다 |
한국ODA의 길을 묻는다 1강 |
느티나무 |
2011.9.30 |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9월 8일부터 5회에 걸쳐 '한국 ODA의 길을 묻는다' 시민강좌를 진행합니다. 첫번째 강연 '국제사회가 말하는 ODA의 허와 실' 중 양영미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위원장과 이태주 ODA 위치 대표의 강연을 강의 순으로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강의 정리는 자원활동가 송유림 님께서 맡아 주셨습니다. 강좌소개 보기>
1부 국제개발협력논의의 국제적 흐름을 논하다
강사 : 양영미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위원장
ODA라는 것이 우리나라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2005년 즈음이고 세계개발원조총회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이다. 올 11월
부산에서 제4차 세계개발원조총회(The 4th High Level Forum on Aid Effectiveness, 이하
HLF-4)를 개최한다. 이 공식행사를 하기 일주일 전쯤 병행회의로 시민사회 회의(이하 NGO 회의)가 열린다. 이처럼
국제회의에서는 시민사회의 의견을 듣는 관례가 있다.
이번 부산HLF-4에도 NGO 회의가 바로 앞서 열린다. 이 회의의 참여를 준비하는 단위로 국제개발시민사회포럼(Korea
Civil Society Forum on International Development Cooperation, KoFID)가
2009년부터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 KoFID는 한국ODA 및 개발정책을 모니터링하며 제언하는 국내 시민사회단체와
개발NGO들의 네트워크이다.
한국, 유일한 원조 성공사례 ? ODA
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이 전란에 휩싸여 많은 것들이 파괴됐을 때 미국 마셜플랜 에 따라 전후 복구를 위해 쓰였다.
한국전쟁 이후 ODA를 받아왔던 우리나라도 최근 공여국으로 전환했다. 이를 두고 한국정부는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한 유일한
나라”라고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선진공여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도 ODA를 받은 적이 있고 태국이나 중국도 원조를 받으면서
주는 나라이기 때문에 한국이 유일하다고 볼 수는 없다. 한국이 전후 가장 처참했던 상태에서 경제 발전을 이룬 것은 충분히 자랑할 만
하지만 여러 사회적, 문화적인 요인이 작용했음을 고려해야 한다.
원조피로 Vs 원조효과성
원조효과성 논의는 주로 “공여국의 자세”로 불린다. ODA에서 ‘원조효과성’이란 단어가 나오기 전에 ‘원조 피로’라는 단어가 먼저
있었다. 아프리카에 20년 동안 원조를 줬는데 이들 나라가 발전이 없었다 하여 공여국들이 지치기 시작한 것을 원조 피로라 칭한다.
1973년, 공여국들은 오일쇼크탓에 지원할 돈이 없자 이들은 빈곤국에 도와줘도 나아지지가 않는다고 핑계를 대며 원조를 줄여갔다. 이후 UN, OECD가 만들어졌을 때 국제사회는 책무성을 논하며 좀 더 효과적으로 원조를 해보자는 취지로 ‘원조
효과성’을 논하게 됐다. 그 맥락으로 2000년, UN은 세계의 빈곤을 없애고 살기 좋은 지구를 만들어보겠다고 선언하고 그 목표를
8개로 정했다.(Millennium Development Goals, 새천년개발목표 )
MDG 8번은 앞에 있는 것들을 하기 위해 GNI 0.7%씩 재원을 마련하자는 파트너쉽이다. 2002년 몬트레이에서 재원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처음 열렸고 2003년, 로마에서 HLF-1이 열렸다. 이어 2005년에는 파리선언, 2008년에는 아크라 행동 의제가 발표됐고 2011년 부산에서 4차로 열리게 된다.
환경, 인권과 개발의 만남
개발을 하다 보면 물리적 환경파괴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경파괴까지 일어난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국제사회는 개발과 사회환경 보존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1992년 리우에서 환경을 생각하는 지속가능한 개발에 관한
회의가 열렸고 요하네스버그에서도 회의가 있었다. 이들 회의에서 공여국들은 ODA를 할 때 환경문제 이외에도 사회환경문제를 통틀어
전반적인 환경파괴의 현황에 대해 논했다. 내년에 다시 기후변화에 대한 문제를 점검하는 회의가 있을 예정이다.
인권이라는 것은 포괄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설명하기 쉽지 않다. 개발과 관련된 것은 사회권이고 이 권리는 대체로 노동권,
건강권 등 집단권에 속한다. 예를 들면, 거주권은 사람이 사는 전체적인 환경에 대한 것으로 ‘웰빙’에 대한 조건을 이야기 한다.
해비타트나 사랑의 집짓기와 같은 거주환경 개선에 대한 개발협력이 폭넓게 인권과 만나는 것
‘지속가능’이라는 단어가 나오기까지 몇 십 년이 걸렸는데 어느 새 ‘지속가능한 성장’이라고 이야기한다. 성장, 발전… 과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좋은가? 느린 것은 못난 건가? G-20에서 논의됐던 ‘성장’이라는 의제가 HLF-4에서 다시 재현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있다.
2부 한국 ODA의 현 수준 진단과 평가
강사 : 이태주 ODA 위치 대표
한국의 ODA는 도대체 어떤 수준인가. ODA라는 용어가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는 모습은 한 때 NGO열풍이 분 것과 비슷해
보인다. 상식적으로 출발하도록 하자. TV를 틀면 공익광고가 많다. 정부가 우리의 ODA를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얘기하는 레퍼토리는 똑같다. 우리는 50년 전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지만 효율적인 정부, 유능한 관료 그리고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선진국이 되었다고 사방에 선포하는 것. 정말 그렇게 세계에 자랑할 만큼 한국의 ODA는 진정성과 효과가
있는가?
한국ODA의 근본문제 ”DONOR CENTRISM”
공여국 중심주의는 매우 위험하다. 실제 현장에 가보면 뼈저리게 느낀다. 우리나라는 우리 입장에서 줄 뿐 받는 사람이 뭐가 필요한지
대화하지 않는다. 친해져야 하고 신뢰관계가 중요한데 그런 최소한의 접근을 아직도 못하고 있다. 모든 정책과 의사결정방식이
공여국중심이다.
얼마 전에 한국의 국제개발선진화계획이 만들어 졌다. 계획을 보니 실제로는 한국화 계획이었다. 한국형으로 포장되어 있고
한국형컨텐츠를 파는데 주목한다. 개발사업이 컨텐츠사업으로 변하는 상황이 상당히 걱정된다. 현지수준에 맞고 그들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그 사회가 지속적으로 나아질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을 어떻게 끼워 넣을까를 고민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면,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직업훈련센터는 전쟁 중에 만들어진 사업으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엄청나게 많은 돈을
들여 센터가 만들어 졌고 1년에 120명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훈련시킨다. 하지만 매 달 훈련을 중단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전쟁 중이니 1년 넘게 직업훈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직업훈련사업은 한국이 여러 나라에서 하고 있는
사업이지만 정작 현지인에게 효과가 별로 없다.
마사이 마을에 한국수자원공사가 워터 탱크를 만들어 준 사업도 있다. 그러나 이 탱크에 물이 채워진 적은 아직까지 없다.
한국에서 원조 사업을 한다고 마시이족들이 부지와 노동을 제공했는데 주민들에게 돌아간 혜택은 없으니 이들이 한국원조를 반길 리가
없다. .
한국원조엔 오너쉽(Ownership)이 없다 다자기구들은 수원국의 오너쉽을 존중하지 않고 지나치게 정책에 간섭해서 실패했던 원조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실패를 줄이기 위해 지켜야 할 핵심 원칙들을 뽑고자 했던 것이 파리선언이다. 그 중 제일 중요한 원칙은 오너쉽이다.
원조는 받는 사람들에게 결정권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도 이런 원칙들이 지켜지지 않는다. 12월말 HLF-4때
파리선언에 대한 한국 평가서가 공개될 것이다. 일본은 지금껏 경제관계만 고려해서 원조를 했기 때문에 원조한 것보다 훨씬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었는데 한국이 그 전철을 밟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한국원조엔 개발사업을 하는데 필요한 기본이 없다 개발사업에서는 지원 전략과 계획이 중요한데 한국은 20년 넘게 마스터플랜이 전혀 없다. 작년부터 국별 지원 전략을 만들고 있지만 국내의 지역연구자가 거의 없기 때문에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 또한 방법론적인 고민없이 개발사업을 시행하는 경우가 많다. 현지에서는 식수가 부족한데 우리는 우리가 잘하는 IT사업을 지원한다. 또한 한국은 사업선정시 단기간에 가시적 효과를 거두는 사업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한국 개발NGO들도 반성해야 한다. 개발NGO들의 개발사업을 평가해 보면 정부사업보다 훨씬 더 문제가 많은 경우가 있다. 고위관료들만 살찌우고 영향력 없는 사업을 지속하면 안된다.
선의는 선행을 낳지 않는다 OECD
DAC에서도 파트너쉽을 강조하고 있다. 개발도상국의 오너쉽을 강조하고 공동의 개발목표와 전략, 책임, 역할 분담원칙과 협력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참여적인 발전 즉, 주민이 주인이 되고 주민이 주도하는 개발이 필요하다. 농촌마을의 평범한
일꾼들이 세계 석학들보다 그 지역에 대해 훨씬 많은 정보와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두어야 한다.
국제 사회에서 ODA담론을 다룰 때 우선적으로 다뤄야 하는 개념은 ‘사람들의 자립’ 이다. 재원마련을 위해 민간기업들의
참여를 이야기 하지만 사전에 원조에 대한 규범을 공유해야 한다. 사전준비 없이 민간기업들이 ODA사업을 주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또한 아직까지 개발사업을 수행하는 기관들, NGO간의 연대의식이 부족한 부분도 극복해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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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 |
"위키리크스, 미국 정부 '막가파식' 전쟁몰이의 부메랑" [9.11강좌 3강] |
느티나무 |
2011.9.29 |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와 프레시안은 9.11 10년을 맞아 9월 5일부터 매주 월요일 5회에 걸쳐 '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를 주제로 연속 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26일 열린 세 번째 강좌에서는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님이 '새로운 수퍼파워 : 초국적 시민운동과 민주화 도미노'라는 주제로 강연해 주셨습니다. 아래는 프레시안 곽재훈 기자가 정리한 이태호 처장의 3강 강의소개 기사입니다. ☞강연 상세 안내 보기
 | ▲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이 26일 '새로운 수퍼파워 : 초국적 시민운동과 민주화 도미노'라는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참여연대 |
"9.11 이후 미국의 대처, 국제·국내법에 모두 위배"
9.11 이후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의 일성은 '이것은 전쟁행위'라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테러는 경찰 소관인 치안 문제였다. 그러나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나 딕 체니 부통령 등 공화당 군사전략통들은 '미국을 지키는데 국제법이 방해가 돼서는 곤란하다'며 기존의 규범에 대한 예외주의를 정당화했다. 이 때문에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두 가지 논리적 문제가 생겨났다. 첫째, 국제법과의 충돌이다. 쌍둥이 빌딩에 대한 공격을 수행한 자들은 제복을 입은 군인이 아니었고 국가의 공인된 명령체계에 따라 전쟁을 수행하는 정규전 세력도 아니었다. 따라서 비(非)국가 세력에 전쟁 선포가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비국가 세력과의 '전쟁'은 전쟁의 기본 사항을 정한 유엔 헌장과도 배치되고 제네바협정에도 맞지 않는다. 일단 부시가 전쟁을 선포하긴 했는데 상대방을 과연 뭐라고 규정할 것이냐도 문제였다. 군인? 미국은 그렇게 하긴 싫었다. 상대방이 군인이라면 제네바협정에 따라 생포했을 때 전쟁포로로 인정하고 제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테러범? 그렇게 하기도 싫었다. 반인륜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해서는 국제경찰(인터폴)이 수사해야 하고 국제형사재판소(ICC)를 통해 처벌해야 한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적 전투원'(enemy combatant)이라는 개념이다. 둘째, 국내적으로 미국의 헌법 질서에 배치된다는 문제다. '적 전투원'으로 규정한 자들을 잡아서 미국으로 데려오면 미국 헌법에 의해 미국 법을 적용해 재판받아야 하고 변호사 선임권, 묵비권 인정, 고문받지 않을 권리, 3심제 적용 등 권리를 보장받게 된다. 이 때문에 미국 국외에 지어진 것이 쿠바의 관타나모 수용소다. 법률상으로 고문을 허용하는 다른 나라에 비밀 감옥도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비밀 감옥의 존재와 수 등은 공식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랍권과 동유럽 등지에 여러 개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송도 '특별이송'이라고 매우 비밀스럽게 했다. 미국 인권단체가 발간한 보고서를 보면 '사라진 수감자들'이라는 리스트가 있는데 이들이 비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일명 '강화된 심문기법'으로 이름붙여진 사실상의 고문 방안을 도입했다. 잠을 안 재우거나 종교적·인간적·성적 수치심을 주는 등 '스트레스를 주는 취조 방법'을 사용했고 물고문도 허용됐다. 또 아프간을 침공해 테러 용의자를 잡아들일 때 '저 사람이 탈레반이다'라는 증언만으로도 증거 효력을 인정해 체포할 수 있게 했다. 피의자는 증거의 효력을 다툴 권리도 박탈당했고 심문 기한도 '무기한'으로 정해졌다. 미국 헌법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미국 시민의 권리도 제약받았다. 먼저 '애국자법'은 영장주의의 예외를 인정해 이주민을 무기한 구금할 수 있도록 했고 비밀리에 가택수색을 할 수 있게 했다. 애국자법은 또 연방수사국(FBI)이 통신업체나 도서관 사서들에게서 영장 없이도 통신기록, 도서 열람기록 등을 요구할 수 있게 했다. 다 음은 군사력 사용권한의 문제다. 미국 법에 따르면 전쟁 선포는 대통령이 아닌 의회의 권한이다. 의회의 전쟁 선포는 그 요건도 매우 까다롭다. 하지만 부시는 뭔가를 해야 했다. 그러니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비상시 군사력을 사용할 권한이 있다는 개념을 빌려 전쟁을 치렀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이런 방식이었다. 의회는 부시의 군사력 사용을 추인해줬고 이로써 전쟁을 시작하는 방식이 의회의 선전포고에서 대통령의 군사력 사용을 의회가 승인하는 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라크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버락 오바마 등 일부는 반대했지만 의회는 부시의 군사력 사용을 조건부로 승인했다. 부시는 의회가 내건 조건도 지키지 않았지만 말이다. 시민운동은 어떻게 싸웠나
미국 내 반전운동은 9.11 테러 이후에는 거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2003년 이라크전 반대 운동은 거세게 일어났다. 이후 이라크 바그다드에 있는 아부그레이브 수용소의 인권 실태가 <CBS> 방송에 의해 폭로된 것이나, '다우닝 스트리트 메모'와 '매닝 메모'의 공개는 반전 운동에 동력을 공급했다. 2005년 공개된 이른바 '다우닝 스트리트 메모'는 영국 고위관리들이 2002년 7월 부시를 만난 후 작성한 것이다. 부시를 만난 영국 관리들은 "군사행동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다. 부시는 군사행동을 통해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길 원하고 테러 연계와 대량살상무기(WMD)를 근거로 내걸고 싶어했다. 정보와 사실관계는 정책에 꿰맞춰지고 있었다"고 적었다. 2006년 <뉴욕타임스>에 공개된 '매닝 메모'는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의 외교보좌관 데이비드 매닝이 작성한 것으로 부시와 블레어의 대화를 담고 있다. 부시는 침공을 앞두고 이라크의 적대행위를 촉발할 몇 가지 방안을 블레어 총리에게 제시했는데, 유엔의 비행기처럼 위장 페인트칠을 한 미국 정찰기를 이용해 공격을 유도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이라크에서 WMD가 발견되지 않자 미국은 후세인이 충분히 국제적인 의심을 받을 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이는 '이해할 만한 실수'라고 설명했지만 이같은 메모들은 이라크전이 결코 '실수'가 아님을 보여줬다. 또 허리케인 '카트리나'도 반전 운동의 계기가 됐다. 허리케인 때문에 9.11 당시 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문제는 이것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재해였는데 주방위군이나 구급대원들이 이라크로 차출돼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는 것이다. 테 러와의 전쟁에 대해 반대 운동을 펼친 미국 단체는 여러 부류로 나뉜다. 첫째, 전국적인 반전운동 단체다. '앤서'(Act Now to Stop War and End Racism : ANSWER)나 '낫인아워네임'(Not In Our Name) 같은 단체들이 대표적이다. '낫인아워네임'은 일종의 연대체였는데 '평화로운 내일을 위한 9.11 희생자 가족 모임'도 포함하고 있었다. 9.11 희생자의 유가족들이 '우리 이름을 앞세워 전쟁하지 말라'고 한 것은 미국에 큰 충격과 감동을 줬다. 둘째, 군인 및 피해자 가족들의 단체다. 일종의 당사자 운동인데, 한국과는 달리 미국은 반전 운동에서 예비역 단체의 역할이 크다. 이라크나 아프간에 파견됐다가 전사해 훈장까지 받은 병사의 유가족도 반전 운동에 나섰다. 셋째, 시민권 단체다. 이들은 주로 변론이나 소송 등을 통해 활동했다. 넷째, 국제적 반전운동 단체다. 특히 2003년 2월 15일의 국제 반전 공동행동은 전세계 800개 도시에서 3600만 명이 참여한 최대 규모의 시위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같은해 5월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세계반전모임에서는 26개국 60여 명의 활동가들이 모여 '자카르타 평화 합의'를 열었고 2004년에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부시 등 전범들에 대한 '국제민중재판'을 열기도 했다. 이같은 국제적인 반전 운동은 세계 정세에도 영향을 미쳤다. 반전 운동을 통해 급격히 성장한 것이 세계사회포럼(WSF)이다. 2005년 브라질 WSF를 제안한 브라질의 노동자당(PT)는 나중에 급격히 성장해 룰라 대통령을 배출한다. 그러나 이슬람권의 상황은 사뭇 달랐다. 테러와의 전쟁은 이슬람권에서는 극단주의가 성장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전쟁 전에는 이라크의 알카에다 세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전후 오히려 급성장했다. 이란의 경우도 테러와의 전쟁 전 개혁파가 다수였고 심지어 의회에서 개헌선을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테러와의 전쟁이 일어나고 부시가 이란을 (이라크, 북한과 함께) '악의 축'으로 지목하자 개혁파들은 설 자리를 잃었고 미국에 맞서야 한다는 강경파의 입지가 넓어졌다. 법률적 대응
법률적인 방법에 의지한 미국 내의 반전 운동 사례들 중 주목할 만한 것 몇 가지만 살펴보겠다. 첫째, 헌법권리센터(CCR)가 시작한 관타나모 수용소 수감자들의 권리 찾기 운동이다. 일련의 소송이 2002년부터 2008년까지 6년 간 계속됐는데, 2004년 6월 미국 대법원이 관타나모 수감자라 해도 영장에 의하지 않은 구속은 불법이며 구속영장 발행을 요구할 권리를 갖는다고 판결하면서 싱겁게 이기는 듯 했다. 그러나 미국이 국방부에 구속 여부를 심사하는 재심 위원회를 만들고 의회에서 '수감자처우법'을 통과시키면서, 관타나모 수감자는 자신의 구속을 국방부 소속 위원회에 다시 심사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고 학대로부터 법률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게 됐지만 영장이 무제한 청구와 무기한 구금 또한 법으로 보장됐다. '법률에 의하지 않고 구속하면 안 된다고? 그럼 법을 만들지 뭐' 하는 식이었던 거다. CCR 은 또 국방부의 특수군사위원회가 '적 전투원'들에 대한 수사와 재판권을 갖는 것이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아 위법하며 제네바협정에도 위반된다는 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은 2006년 9월 이들의 주장을 인정했다. 그러자 의회는 또다시 '군사위원회법'을 만들어 이를 합법화했다. CCR은 이에 다시 군사위원회법의 위헌 여부를 다투는 소송을 냈고 미 대법원은 2008년 6월 위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유사한 많은 사건들이 현재 각급 법원에 계류돼 있다. 둘째, 역시 CCR이 이끈 것으로 부시 행정부 고위관료들을 '전쟁범죄자'로 처벌하기 위한 소송이었다. CCR은 럼즈펠드를 고문 등 수감자 학대 혐의로 고발했지만 미국 국내에서는 모두 기각됐다. 전범은 국적에 관계없이 처벌할 수 있도록 한 여러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09년 3월 스페인 판사 한 명이 관심을 가지고 럼즈펠드를 조사할 용의를 밝혔지만 스페인 법무부의 만류로 좌절됐다. 셋째,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이 제기한 불법 사찰 및 도청에 대한 소송이다. ACLU는 2006년 12월 <뉴욕타임스>에 폭로된 미 국가안보국(NSA)의 도청사건에 문제를 제기했다. NSA가 영장 없이 미국 시민들의 전화를 도청한 이 사건에 대해 디트로이트 지방법원은 ACLU 측의 승소를 선언했으나 항소심에서는 판결이 뒤집혔다. 또 2007년 미 의회가 기존의 '외국정보사찰법'을 개정해 '미국보호법'을 만들고 해외와 통화하는 미국 시민의 전화에 대해서도 영장 없는 감청을 가능케 하자 ACLU는 이 법률에 대한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현재 진행 중이다. 넷째, 역시 ACLU가 제기한 '국가기밀특권'에 대한 도전이다. 2003년 7월 ACLU는 다른 인권단체들과 공동으로 테러혐의 수감자들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를 접수했으나 미국 정부는 거부했다. 그러자 ACLU는 2004년 6월 관련 자료의 공개를 요구하는 소송을 시작했고 같은해 9월 승소했다. 그러나 공개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또 ACLU는 이른바 '특별이송'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은 CIA의 항공기 운항을 대신해 주는 일종의 용역업체 '제퍼슨 데이터플랜' 사(社)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현재 진행중인 이 소송에서 ACLU는 해당 회사가 '특별이송'의 비인도적 실체를 알고도 영리를 위해 이를 돕는 조달 서비스를 제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치적 대응
 | ▲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 ⓒ참여연대 |
대의민주주의적 수단에 호소한 사례도 있다. 첫째, 대통령 탄핵 운동이었다. '다우닝 스트리트 메모'가 공개된 이후 2005년 결성된 '애프터 다우닝 스트리트'는 2007년과 2008년 각각 체니 부통령과 부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추진하기 위해 10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 민주당 데니스 쿠치니치 의원이 탄핵안을 발의할 수 있도록 도왔다. 둘째, 예산을 무기로 이라크 철군을 이끌어내기 위한 활동이었다. 1400개 반전단체의 연대체 '평화와 정의를 위한 연합체'(UFPJ)가 여론을 이끌었고 결국 이 문제를 의회로 가져왔다. 그러나 2005년 국방 예산을 빌미로 부시 행정부로부터 '철군 일정표'를 받아내려는 시도는 압도적 표차로 부결됐다. 2006년 중간선 거 후 다수당이 된 민주당은 이라크 철군을 이끌어내기 위해 국방예산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이라크에서 철군을 시작하라고 부시 행정부를 압박했다. 그러나 2007년부터 철군을 시작할 것을 의무화한 '이라크책임법'은 부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부딪혔다.
위키리크스 사태는 미국의 '자업자득'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식 이후 발표한 최초의 4개 대통령령에서 관타나모 수용소를 1년 안에 폐기하고 고문을 중단하며 CIA의 '비밀 감옥'을 포함한 구금정책 수단을 재검토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는 의회의 반대 등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또 오바마는 고문 관련 자료를 공개하겠다던 자신의 약속에 대해서도 말을 바꿨고 고문에 연루된 CIA 조사관들도 처벌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이라크, 아프간 철군도 어떻게 될지 불확실한 상태다. 아프간에서는 탈레반과의 평화협상을 시도하고 있지만 협상을 주도해온 부르하누딘 라바니 전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앞날을 알 수 없게 됐다. 또 오바마는 파키스탄 남부 파슈툰족 거주 지역까지 공습 지역을 늘렸는데, 미국이 파키스탄과 개전 선언을 한 게 아니니 이는 불법이다. 이런 면에서 위키리크스 사태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위키리크스 사태는 테러와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사실상 (가능성이) 내재돼 있던 것이다. 테러를 막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미국의 헌법 질서와 시민권, 국제 규범 등에 대해 온갖 예외를 인정한 것이 부시의 논리였다. 이것이 시민권 진영이 전쟁에 대항하는 운동에도 온갖 수단이 동원될 수 있다고 믿게 했을 수 있다. 국가가 지정한 1급비밀을 대중이 모두 알 수 있도록 공개하겠다는 것이다. 위키리크스는 테러와의 전쟁에 대응한 시민들의 자구적 대응과 시민 불복종 운동, 안보 민주화 운동의 아이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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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
집의 인문학 3강 집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 소설을 통해 본 우리들의 집 |
느티나무 |
2011.9.28 |
8월 30일부터 가을학기 강좌 [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강좌는 단순히 자산증식의 수단으로서의 집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삶이 엮이는 공간으로서 집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주택정책과 가족의 의미까지 보다 폭넓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강좌소개 보기>>
3강의 강의정리 후기는 자원활동가 이현정 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거북아, 거북아! 행복 줄께, 아파트 다오?
2011 참여연대 느티나무 아카데미 가을강좌 ‘집의 인문학’은 작년부터 기획되었다고 한다. 의, 식, 주. 입고, 먹고, 거처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들이다. 이 중에서 주, 즉 집은 대한민국에서 ‘자산증식’의 수단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여전하게 강하다. “주거문화, 부동산 문화를 변화시키는 씨앗이 되면 좋겠다”는 느티나무의 바람에 100% 동의하며 집의 인문학 강좌를 소개한다. 3강은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박철수 교수가 맡았다.
여러모로 밀리는 ‘철수’다. 대세인 안철수, 외모는 배철수… (청중 웃음) 고등학교 때 꿈은 인문학도였다. 초등학교 때 공부를 좀 했는데, 삼촌들이 길을 정해주었다. 얘는 이과라고. 근대 한국사회는 인간을 몇 가지 종류로 나눈다. 문과, 이과, 예체능과… (청중 웃음) 근대 세계가 목표하는 생산적인 인간이 된다. 왜 우리들은 스스로 원하는 것은 학습하지 않을까? 한국사회는 ‘통섭’하라고 해놓고 사회 체계는 그렇지 않다. 통섭하면 안 되는 구조다. 문과, 이과, 예체능계 각 영역만 가지라고 한다.
소설은 근대의 산물이다. 소설이 많이 읽히려면 문자 해독층이 많아야 하고, 인쇄술도 발달돼야 한다. 동시에 뿌려질 수 있는 운송수단이 있어야 한다. 작가가 보는 소설의 시선으로 그 시대의 장소, 상황을 객관적으로 읽을 수 있다. 이런 걸 문학지리학(문학작품 속에서 지리적 공간에 대한 경험과 의식이 어떻게 표현되었는가를 살피는 “지리학적 현상으로서의 문학작품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장소와 공간에 이야기, 역사사실이 있어 고증의 켜를 올리는 것이다. 이 근처 통의동에 보안여관이라고 있다. 시인 서정주가 기거하면서 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들었다. 보안여관에 ‘시인 서정주가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얹히면서 그 시대의 어떤 상황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1930년대부터 2006년까지 숙박시설로 운영된 종로구 통의동의 보안여관. 지금은 갤러리로 운영되고 있다. 사진=네이버 블로그 르허기씨(blog.naver.com/lhaej57)
소설 속에 비친 아파트
대한민국의 56.8%가 아파트에 산다. 우리는 아파트에 살면서 아파트를 좋게 말하지 않는다. 소설도 아파트를 좋게 얘기하지 않는다. (아래부터는 소설 속에서 나타난 ‘아파트’ 모습이다. 강의 교재에 있는 순번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문장과 출처 일부는 편의상 생략했음을 알린다.)
1. “벗어날 수 없는 일상과 버릴 수 없는 욕망, 그 사이의 깊은 절망이 그들을 사라지게 했을 것이다.”(서영인, ‘비약과 소멸의 꿈, 혹은 변신이야기’, 김윤영 소설집『타잔』에 대한 작품 해설, 300~301쪽)
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의 심정이 아닐까 싶다. 아파트 평수 늘리기와 동네 바꾸기가 청장년의 욕망이다. 여기서 절망은 돈이 없다는 것이다.
2. “… 엄마가 아들을 배타적으로 독점하려 들고, 가족 아닌 사람들을 죄다 밀어내고 자기 가족만 배타적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믿고....”(이남희,『세상의 친절』270쪽)
아파트에서 짜장면을 시켜먹고 문 밖으로 내놓는다. 철문 안쪽은 우리 공간이고 밖은 나와 상관없는 공간이다. 일본은 화분을 내놓기 위해 산다. 그렇지만 우리는 안에 들여다 놓고 우리만 보려고 산다. (자기만의) 전용공간 늘리기에는 관심이 많지만 공용공간에는 관심이 없다. 다세대, 다가구 주택은 전용공간에 충실하다. 그래서 이익을 가지려는 건축주가 어수룩한 땅 주인을 만나 다세대, 다가구 건축을 동의하게 만든다. 베란다 확장도 전용공간 늘리기다. ‘나만 좋으면 된다’면서 공공, 공유 공간에 관심이 없다. 그러면서 세상을 탓하는 것은 모순이다.

3. “… 내가 왜 영감이 물려준 버젓한 내 집을 두고 이 아래 위 줄행랑 같은 셋집에 드냐, 들길. 아이고 망했구나 망했어, …”(박완서 ‘울음소리’,『그 가을의 사흘동안』29~30쪽)
줄행랑이란 뜻은 줄줄이 늘어서 있는 행랑이다. 행랑은 대문 양쪽에 벌여 있는 노비나 하인들 주거하던 곳이다. 주거계층에서 상것이다. 늘어선 행랑처럼 아파트 형태가 획일적인 것이다.
4. “아파트에 살던 후배가 땅 집으로 이사 간다고 하길래 덮어놓고 잘했다고 말해주긴 했지만 정작 어디다 집을 샀는지 …”(박완서『그 남자네 집』9~11쪽)
땅 집은 아파트와 단독주택의 본질적 차이를 말한다. 아파트를 ‘공중에 떠다니는 포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타운하우스, 블록형 단독주택, 펜트하우스 등이 관심을 받는다. 이들은 아스팔트든 땅이든 내가 관리할 땅이 있느냐 없느냐의 이해가 있다. 요즘 카페와 길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외부공간과 일상생활의 긴결성이 가까워졌다. 아파트 공간이 갖는 피로도의 분출구가 아닐까.
5. “… 끝없는 직각과 직선의 세계, 어떻게 이렇게도 많은 아프트가 모여 있는 곳이 … 공장을 중심으로 이룬 소왕국. 도시 속의 완벽한 요새.”(김채원 ‘푸른 미로’『지붕 밑의 바이올린』293쪽)
우리나라 도시의 공동주택에는 방음벽이 기본이다. 유럽 도시에서 방음벽을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이미 공간을 철저하게 분리하고 산다. 이것은 사회에서의 분리를 의미한다. 아파트는 공간이 철저하게 나뉘어져, 외부공간과 교류하지 않는다.
6. “…이곳 아파트의 여자들은 남의 흉내를 내기 위해 순전히 남을 닮기 위해 다이어트를 했다. 나는 이런 닮음에의 싫증으로 진저리를 쳐 가면서도 … 철이 엄마나 딴 방 여자들이나 남보다 잘 살기 위해, 그러나 결과적으론 겨우 남과 닮기 위해 하루하루를 잃어버렸다. 내 남편이 18평짜리 아파트를 위해…”(박완서, ‘닮은 방들’『그 가을의 사흘동안』352쪽)
아파트 생활은 철저하게 닮아 있다. 주상복합은 더욱 요새다. 주차장, 사우나, 식당, 네일아트… 수직이동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
8. “잔뜩 발기한 것처럼 여기저기 솟아있는 아파트 덩어리는 다시 거대한 난수표가 된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난수표.”(한수영『공허의 1/4』101쪽)
아파트는 무지무지 욕망이 팽배한 곳이다. 유지비용이 많이 나오는 타워팰리스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더운 여름 날, 에어컨을 가동하는 복도가 시원하니까 각 집이 모든 문을 열고 살았다. 관리실에서 “제발 문 좀 닫으세요”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고 한다.

10. “강남의 외딴섬, 또는 강남의 음지로 불리는 수서의 임대아파트 단지는 그 큰 규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근 주민들의 눈엣가시였다. 우리 학교는 …”(김윤영 ‘철가방의 추적작전’『루이뷔똥』121~123쪽)
수서동에 영구임대아파트가 있다. 이런 플랭카드가 붙은 적이 있다. “살기 좋은 수서에 왠 임대아파트?” “강남 일원동에 장묘공원 왠 말이냐?” 공간 격리가 사회적 격리가 된다. 삶이 갖는 기본 흐름이 있다. 피붙이를 보자. 다양한 인간 군상이 한 가계를 이룬다. 이런 가계의 확대가 마을이고 우리 사회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지금은? 노인들만 사는 노인 아파트가 있다. 젊은 애들은 출퇴근한다. 노인들만 모아놓고 살면 좋을까?
12. “… 나는 내 삶의 깊숙한 곳에 촌충처럼 들이박힌 무료함의 발톱을 빼낼 수가 없다.”(김인숙 ‘술레에게’『그 여자의 자서전』111~113쪽)
아파트, 연립주택의 일상을 표현했다. 조정래가 1973년 발표한 ‘비탈진 음지’ 소설을 보면 농부였던 아버지가 서울로 와 아파트를 보고 처음에는 학교로 생각한다. 그러다가 잘 먹고 사는 누군가의 창고라 생각한다. 나중에서야 아파트가 ‘집’이라고 알게 된다. 아파트를 3D로 잘라보자. 같은 위치, 공간에서 비슷한 일상을 산다.
13. “십오 층 복도식 아파트. 가슴팍까지 올라온 높이로 … 다 같이 시장으로부터 쑥 올라온 공중 한복판에 둥지를 마련하고 중력을 느끼지 못한 채 슬금슬금 떠다니는 포자들일 뿐이다.”(은미희 ‘편린, 그 무늬들’『만두 빚는 여자』174쪽)
아파트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아이들에게 “넌 고향이 어디니?”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14. “… 줄여? 뭘 얼마나 줄여? 32평에서 더 줄일 게 뭐 있어. 몸을 팔았으면 팔았지 이건 절대 못 팔아!”(김윤영 ‘얼굴 없는 사나이’『타잔』59~60쪽)
얼굴 없는 사나이는 IMF가 배경이다. 전 세계 베이붐 세대 중 대한민국의 가장이 가장 불행하다. 자산의 대부분이 아파트다. 네덜란드는 자산 중 45%는 부동산이고 나머지는 다른 종류다. 융자 3억2천을 끼고 산 8억2천하던 집값이 6억2천으로 떨어지고 금리가 올라가면 재산은 재산대로 줄고 이자는 이자대로 는다. 집값이 떨어지는 순간 중산층은 완전하게 무너진다. 한국의 이 중간층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한국은행 총재의 고민이다.
15. “… 찬국은 복처라는 소리에 한없이 낄낄거렸다. … 누구 망신을 시키지 못해 복부인 노릇을 하려고 야단을 쳤지만 …「우리가 무슨 복에 복처를 모시겠나.」처복도 없는 두 남자는 …”(박완서 ‘서울사람들’『박완서 소설전집15』300~301쪽)
복처(福妻), 복부인(福婦人), 처복(妻福)은 이 시대의 신조어다. 과거에 좋은 부인은 육아 잘 하고 부모님 잘 모시는 것이었다. 지금은 월급쟁이의 아내가 남편도 모르게 부동산 굴리는 게 좋은 부인이다.
24. “… 내 집에서의 풍경이 그대로, 확대 재생산되는 순간, 내 집의 풍경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아파트에서 아파트로의 이동. 여자들은 부엌으로, 남자들은 텔레비전 앞으로, 아이들은 …”(공선옥 ‘비오는 달밤’『명랑한 밤길』177쪽)
디시인사이드 부동산 갤러리에 ‘2011년 수도권 계급표’라는 그림파일이 있다. 아파트 평당 가격을 기준으로 계급을 9단계로 나눴다. 1단계는 황족으로 평당 3천만원 이상에서 사는 강남구다. 맨 아래는 노비, 가축이다. 아파트가 대한민국 신분과 경제 지렛대를 가늠하는 아이콘이다.
▲ 2011 수도권 계급표 사진=디시인사이드 부동산 갤러리
37. “… 소연이의 피아노 소리는 초라한 청운연립과 어울리지 않았다. 고급스런 아파트에서나 들려올 법한 소리였다. …”(조영아『여우야 여우야 뭐하니』181쪽)
다세대․다가구를 포장한 것이 ‘빌라’이다. 양재동 빌라는 초호화 저층 빌라이고 상계동 빌라는 다세대․다가구이다.
유럽 개념의 임대아파트는 없어
여러분은 ‘집’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나와 내 가족과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단독주택에 살면서 달라진 점은 아파트 가격표에 관심이 없어졌다는 거다. 아파트, 돈이 지지하는 비율이 높으면 행복한가? ‘돈’에 쫓아다니며 인생의 상당부분을 낭비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자.
아파트라는 삶에서 공동생활, 커뮤니티 가능성이 있을까? 유럽에서의 아파트는 고급주택이 아니다. 사회 저소득층을 위한 사회복지였다. 소셜 하우징(social housing)이라고 해서 관리, 소유가 공동이고 각 개체가 처한 상황에 따라 임대를 다르게 한다. 싱글 맘이고 성별이 다른 아이가 있다면 방3개짜리를 준다. 연 수입에 따라 내는 임대료도 다르다. 가족 구성원에 따라 비용과 크기가 결정된다. 우리나라는 순수한 임대주택이 없다. 아마 영구임대주택정도?
아파트는 결국 우리가 살아야 하는 곳이다. 공급된 지 반세기가 지났다. 애매하게 비난하는 것이 있지만 아파트 때문에 생활이 그렇게 어그러진 것도 아니다. 아파트 독과점이라 경쟁 상대가 없었다. 공동체는 자발성이 없으면 깨진다. 노인정, 부녀회는 뜻을 같이하는 몇 명이 장악하면 나머지가 떠난다. 공동체라고 할 수 없다.
참고
① 보안여관이 궁금하다면 클릭! ‘청와대 옆 보안여관을 아시나요?’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haej57&logNo=10112650799
② 긴결 : 한글사전에서 ‘긴결’이란 단어는 찾을 수 없다. 다만, 건축과 관련된 글에서 ‘긴결철물’ ‘긴결기구’란 형태로 등장한다. 긴결기구는 ‘구조기구’라고도 하는데, 목재 접합부를 단단히 결박하기 위해 사용하는 철기구를 말한다(출처 : 네이버 블로그, 하람디자인). 긴결철물은 역시 건축에서 서로 맞물리지 않는 것의 일체화를 위해 ‘연결시키는 철물’을 의미했다. 위 글 4번에서 “외부공간과 일상생활의 긴결성이 가까워졌다”에서 ‘긴결성’이란 외부공간과 일상생활의 연결 정도, 혹은 일체감이 높아지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
교과서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 |
교과서를 통해 본 한국근현대사 3강 |
느티나무 |
2011.9.28 |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교과서를 통해 본 한국근현대사 3강 후기>를 함께 공유합니다. 글은 김도형 인턴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원문 출처 : http://bit.ly/n0f3fm
고종 퇴위 12년 밖에 안됐는데...한국인은 빨랐다 최근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꾼다는 역사교육과정 고시안을 놓고 논란이 치열하다. 고작 두 글자, 그것도 남한체제를
설명할 수 있는 '자유'가 붙는데도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두 글자가 갖고 있는 역사인식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의 시민이 될 학생들의 역사인식은 일차적으로 학교 교과서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역사교과서에 어떤 내용이
실리는지는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올바른 역사관과 시대정신, 그리고 객관성을 바탕으로 역사교과서를 서술해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참여연대 아카데미 인문학교>의
일환으로 9월 7일부터 진행되고 있는 <교과서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 강좌에서는 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교재로 한국근현대사의 서술 방향과 역사 인식에 대한 전문가들의 강의가 이어지고 있다. 아래에서는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김정인
교수의 세 번째 강의<대한민국 임시 정부 있는 그대로 보기>를 정리해 본다. 이하의 내용은 김 교수의 강의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역사를 보는 시각, 임시정부를 보는 시각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 한국인이라면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다. 하지만 그 이름에 지워진 꼬리표는 한두 개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흔히 임정법통론이라 불리는, 일제 강점기 민족독립운동의 총본산이라는 찬사가 가장 익숙하다. 하지만 그저 허망한
외교활동에 목을 매던 우익인사들의 독립운동 단체였을 뿐이라는 비아냥도 있다. 그리고 그 간극은 결코 작지 않다. 하지만 임정이
한국 근대사에서 한 역할을 제대로 알고 온당하게 평가하려면 단편적인 시각으로는 곤란하다. 보다 다원적이고 객관적인 역사관이
요구되는 일이다.
김정인 교수는 일관되게 모든 제도권 역사교육에 의문과 의심을 가져 볼 것을 강조한다.
우선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신년축하 기념사진을 보자.
|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신년축하 기념사진 /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서 갈무리
|
김구, 이승만, 안창호 등 임정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보인다. 주목할 것은 그들의 복장, 모두 깔끔한 단발에 양장 차림이다.
한복의 상징 같은 김구마저도 어색한 양복을 입고 있다. 갑오개혁 이후라지만, 아직 당대의 대중들은 한복 차림이 많았다. 당시
사진들 중에도 이렇게 전원 양장 차림의 사진은 임정을 제외하면 흔치 않다. 그렇다면 왜? 이 사진은 임정 요인들이 당시로서는 무척
개화된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비밀리에 해외활동을 해야 했던 당시 임정 요인들의 상황을 반영한다. 그저 막연히 가르쳐주는
대로 보고 듣기만 하면 이런 부분은 알 수 없다. 그럼, 눈을 크게 뜨고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읽어 보자.
임시정부란 무엇인가, 임시정부를 둘러싼 논란은 무엇인가
임시정부는 하나가 아니었다. 3.1 운동이후 한성, 만주, 상하이 등 각지에서 임시정부 수립 움직임이 있었고 1919. 4.
11. 상하이를 시작으로 곳곳에서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9월에 이르러 상하이 통합임시정부로 출범하게 된다.
3.1 운동이후 만들어진 이들 임시정부들의 공통점은 민주공화제와 삼권분립을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 헌장도
마찬가지다. 수천 년간 왕이 지배해오던 역사 속을 살아온 한국인들이 이렇게 단기간에 왕이 없는 정치체제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냈다는 점은 독특 하다. 심지어 식민모국인 일본도 입헌군주제였던 시대의 일이다. 기억하고 곱씹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김 교수는
되풀이 한다.
임시정부를 둘러싼 대표적 논란은 외교론과 무장투쟁론의 대립이었다. 특히 1980년대 말, 민주화 이후 학계에 근현대사 연구
붐이 일어나면서 무장투쟁론의 가치는 높아진다. 상대적으로 제도권에서 가르치던 외교론의 입지는 약해졌다. 하지만, 과연 외교론은
무의미한가? 독립투쟁은 반드시 무장투쟁이어야 했는가?
김정인 교수는 한국이 일본에게 망하는 과정이 외교와 조약으로 진행되었음을 강조한다. 우리는 칼로 망하지 않았다. 조약과
도장으로 망했다. 그렇다면, 독립운동은 무력으로 해야 한다는 강박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김 교수는 북한에 대한 콤플렉스와 군부
독재 치하에서 무의식적으로 체화된 군사문화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문(文)을 상징하는 세종로에 무(武)를 상징하는 이순신 동상이
서있는 현재의 광화문 거리는 우리사회에 만연한 무력숭배의 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외교론에 대한 지나친 폄하, 나아가서 임정 자체에 대한 폄하는 김 교수가 경계하는 것이다. 외교를 '자국에 유리한
조건을 만드는 일'로 정의 한다면 임정의 외교 능력은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었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중국
국민당정부와 소련의 지원을 받아내고 그 와중에 맺은 <한국광복군 행동 준승 9개항> 등의 불공정한 협약을 폐기하는 등
오늘날 정부보다도 훨씬 적극적인 외교성과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하는 부분은 좌우합작 단체로서의 임정이다. 1922년 소련의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대회>에서
임정인사들은 레닌을 만난다. 이들 중 이동휘와 여운형은 사회주의 계열, 김규식은 민족주의 계열이었다. 당시 레닌은 3.1운동에
대한 감동을 피력하였고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고 있었다. 피식민지 국가의 지도자들이 이 소비에트의 수장을 만나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들은 소련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았다. 이 후에도 임정은 사회민주주의적 이념인 삼균주의를 수용하는 등
좌우를 초월한 독립운동의 중추이기 위한 노력을 반복하지만 제도권 교육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 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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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과서 속의 임시정부
김 교수에 따르면, 한국 역사 교과서의 독립운동 서술은 항상 일정한 구조를 유지한다. 3.1 운동으로 시작해 임정이
수립되고, 갑자기 청산리-봉오동 전투와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비롯한 의혈투쟁이 나온 후 뜬금없이 한국광복군이 언급되고
해방을 맞이하는, 매우 익숙한 구조다.
이처럼 단순화된 독립운동사 서술 속에서 임정의 위상은 각별하다. 다시 말해 임정법통론은 한국 역사교과서의 독립운동 서술의
근간이다. 해방직후부터 한국 교육에서는 임정의 수립은 곧 주권의 회복이요, 임정은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을 총지휘한 독립운동의
총본산으로 찬양해 왔다. 이는 국정교과서와 검인정 교과서 둘 다 마찬가지다.
유신시대에는 더 심해져 민족적 정통성과 한국적 민주주의의 발현지라는 이미지가 추가 되었다. 김 교수는 이를 상대적으로 취약한 남한 정부의 정통성을 임정법통론으로 보완하려 했을지 모른다는 의견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교과서 서술 안에서 정통성에 대한 집착으로 드러난다. 1990년판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이며 유일한 정통정부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1997년판 고등학교 국사에도 '정통정부'라는 표현이 있다. 국정교과서인
2002년판 중학교 국사에서는 '자유민주주의와 민주공화정의 국가체제를 지향했다'는 표현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자유민주주의와
정통정부에 대한 집착은 반공의 이념적 지렛대가 되어 왔음은 물론, 분단정부의 정통성을 방어하는 임정법통론의 근거로도 작용해 왔다.
하지만 이는 결국 북한을 의식한 발언임을 더 드러낼 뿐 아니라 분단의식을 극복하지 못하고 확대 재생산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때문에 초기 임정이 사회주의 세력과 연관성이 있다거나 좌우합작적 요소를 추구했다는 부분은 교과서에서 의도적으로든 아니든
무시된다. 역시 분단의식의 연장선이다. 특히 초기 교과서 편찬자들의 친일 이력은 이런 경향을 더욱 부채질 했는데, 대표적인 폐해가
역사교육전반에서 해방정국의 대표적인 민족지도자 몽양 여운형이 제외된 일이다. 현재 우리가 공적으로 학습하고 기억하는
민족독립운동의 지도자는 이승만, 안창호, 김구로 모두 우익 계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임정 자체의 침체기 역시 교과서에서 잘 다루지 않는 부분이다. 이 시기 임정은 좌우익간의 이념갈등, 무장투쟁파와 외교파의
노선갈등 외에도 서북파와 기호파의 지역갈등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교과서에서는 지역갈등은 아예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1980년대 말 민주화와 함께 임정법통론에 대한 문제제기와 공론화가 가능해지면서 문제는 심각해진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배제한 채로 이어져온 임정법통론 자체의 진실성에 한계가 온 것이다. 결국 임정법통론자들은 임정의 침체를 좌익분자의
파괴공작에 의한 것으로 호도하기 시작했다. 아니면 이념을 초월한 민족지도자 김구를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로 내세워 그가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임정을 구원한 것으로 얼버무리는 식으로 무마할 수밖에 없었다. 없는 진실을
포장하려다 보니 교과서 서술의 오류는 점점 심해졌다. 임정법통론을 고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무리수를 역사왜곡을 통해 가리다보니
점점 수렁으로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3.1운동 후 대부분의 무장단체들이 광복군 사령부 휘하로 통합되어 임정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는 주장이나, 태평양전쟁 당시
광복군이 중국 각지에서 일본군과 맹렬히 싸웠다는 주장, 그리고 임정의 외교적 노력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어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독립을 약속받았다는 주장 등은 모두 사실 무근이지만 교과서에 버젓이 실리고 있다.
이런 서술들은 모두 광복군의 활약은 명실상부한 대일 전쟁이었고 외교 노선이 한국독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명제를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오롯이 목적론적인 역사서술인 셈이다. 반면 정작 김원봉의 민족혁명당이 합류 하면서 좌우합작적 성격을 되찾은 일은
임정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임에도 교과서에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즉, 임정도 임정법통론도 오늘날 교과서에서는 철저히 남한
지배 권력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담론으로서만 기능하는 것이다.
임정법통론이 가지는 정치적 함의
그렇다면 임정법통론이 교과서를 지배할 만큼 역사해석의 주류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배경에도 어김없이 정치적 안배가 깔려 있다. 김 교수는 해방이후 임정법통 계승이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짚고 넘어가야함을 강조한다.
임정법통론을 공론화 시킨 인물은 역시 이승만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대통령의 '이미지'에 적합했다. 대한제국 황실과 핏줄이
닿아있는 전주 이씨였고, 서울출신이었으며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협회와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한 개화지식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이력도 있다. 당대의 보수든 진보든. 이승만은 그들 모두를 설복할 수 있는 복합적
명망성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에 추대되었음에도 상하이에서의 6개월을 제외하고는 주로 미국에 거주하면서 교포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걷어 활동비로 충당하였다. 김 교수는 이를 재미 동포들이 갖고 있는 일종의 부채의식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고 해석한다. 결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은 국제연맹에 위임통치 청원을 했다는 이유로 1925년 탄핵된다. 그리고 알다시피, 해방 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역시 4.19 혁명으로 인해 하야한다. 두 사람이 동일인물인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물론 이승만의 방식을 무조건 비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해방 후에 친일파로 이루어진 한민당과 손잡고 미국을
배경으로 1948년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하면서도 임정의 법통 계승과 정통성을 주장하는 부분에서는 미국을 무대로 활동했던 이승만
특유의 스타일을 볼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쟁의 현장인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김구가 일관되게 친일파와의 비타협 노선을 걷다가
암살당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임정법통론은 당시에도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훗날에도 문제가 된다. 전두환 정권 당시, 독립운동사를 임정 중심으로
서술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물론 정통성 확립이 목적이었다. 이에 역사학계에서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임정 중심의
독립운동 서술은 풍부했던 우리의 민족운동을 축소, 왜곡시킨다. 뿐만 아니라 정통성을 대한민국만이 계승하였다는 주장은 분단극복을
위한 노력이 결코 될 수 없다. 말하자면, 민족의 길도 통일의 길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물론 항일 무장투쟁을 정통성으로 내세우는
북한에도 똑같은 형태의 문제제기는 가능하다.
이런 정통론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보수든 진보든 스스로가 정통임을 내세우려 하는 순간 독선의 함정에 빠지고
상대방을 배제하게 된다. 결국, 역사를 목적성을 가지고 바라봐서는 제대로 보기 어려운 것이다. 임정에 대해 견지해야 하는 시각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정부에 의해 활용되는 임정법통론의 태생적 문제 역시 여기에 있다.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 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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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있는 그대로 보기
이날 김 교수가 강의한 강좌의 제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있는 그대로 보기>이다. 정권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서건, 정권의 부도덕성을 공격하기 위해서건 목적성이 전제된 역사관은 시각을 굴절시킨다. 임정에 대한 시각 역시 과대평가나
평가절하가 아닌 직시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김 교수는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과연 임정의 실체는 무엇인가? 과연 임정은 민족독립운동의 총본산이었는가? 그렇다면 그 의의와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우선, 연해주 대한 국민의회와 상하이 임시정부의 통합은 좌우합작이라는 면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임정의 탄생 과정에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연합전선이 형성 되었고 독립운동의 본부라는 정체성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
또한 초기 임시정부는 외교를 통한 독립청원운동에 역량을 집중했다. 프랑스 조계인 상하이는 비교적 안전하고 국제적 활동이
가능한 지역이었다. 임정이 위치한 공간에서 이미 외교노선에 주력하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임정의 국제적 승인과 일본식민통치의
침략적 성격 폭로가 주된 활동이었는데, 이는 현대에 티베트 등 약소국들의 방식과 유사하다. 때문에 외교노선을 함부로 과소평가
하는 것은 위험하다. 당시로서는 약소국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했다고 보는 것이 더 온당하다.
하지만 내부 침체와 파벌갈등은 분명 심각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임정은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게 된다.
소련의 재정 지원으로 1923년 1월 3일 국내외 대표 130여명이 모일 수 있었지만 결국 창조파와 개조파간의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고 만다.
이 때 김구 등의 우익 보수 계열은 임정을 고수했지만, 창조파와 개조파 다수를 차지하던 사회주의 계열이 이탈하면서 임정은
좌우합작 성격과 대표성을 잃게 된다. 이 시기의 임정은 우익 주도의 일개 독립운동 단체 규모로 전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후에는 윤봉길, 이봉창 등의 의거로 잠시 주목받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국민당 정부와 함께 고난의 유랑길을 다니게 된다.
이 시기 임정의 정체성 중 하나는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결집체라는 것이었다. 당시 독립운동의 주류는 좌파 쪽이었다. 그리고
좌익계열에 밀린 임정은 삼균주의를 수용하는 등 좌우합작적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국공합작을 경험했던
김구의 영향력일 것이다. 이 역시 남북총선거를 위해 김일성과 대화를 시도할 결단을 내리게 되는 훗날의 김구와도 이어지는
부분이다. 역시 김 교수가 강조하는 공간과 경험이 형성하는 개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결과적으로 임정은 1942년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의 합류를 계기로 좌우를 포용하는 주요항일역량으로서의 성격을 회복하게 된다.
하지만 흔히 임정의 무력이라 일컬어지는 한국광복군은 최대일 때도 그 규모가 300명 정도에 머무르는 소수 부대였다. 게다가
대부분이 장교여서 실질적인 의미의 무장세력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실제로 광복군은 전투에는 거의 참여 하지 않고 첩보업무
등을 담당했다고 한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임정의 요청으로 폐기되는 1944년까지 굴욕적 협정을 지켜야
했다. 또한 중국정부는 임정을 실질적 정부로 대우하면서도 정식 정부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다른 열강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정의 최종 목표인 국제적 승인에는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임시정부의 의의는?
앞에 썼듯이 임정은 국제열강들에게 정식정부로 승인받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이 때 승인 받지 못한 것은 미군정 시기에도
임시정부가 승인 받지 못하는 결정적인 아킬레스건이 된다. 흔히 임정의 활동, 즉 외교노선 중심의 독립운동이 무의미했다는 평가는 이
부분에서 출발하지만, 이는 사실 역설적으로 임정의 외교 활동이 갖는 중요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성패를 잣대로 삼는다면 무장투쟁
역시 일제를 이기고 나라를 되찾지 못했으니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무장투쟁의 주역인 김좌진, 홍범도를 탓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요는 노력이 가치와 진정성이 있느냐 없느냐 인 것이다.
몇 년 전 동티모르 임시정부는 국제적 인정을 받는데 성공했고 동티모르 공화국 정부로 정식수립 될 수 있었다. 국제적 승인은
그래서 중요하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임정의 외교적 노력이 무가치한 활동이었다고 봐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임정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의의는 단순히 효과적인 평화적 독립운동노선을 제시했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임정은
한국사 최초의 민주 공화정 정부였기 때문이다. 자본이나 기술은 어떠했든지 간에 한국인들의 정신적 근대화는 놀라울 만큼 빨랐다.
3.1운동 직후 설립된 모든 임시 정부는 왕정 대신 민주공화정을 채택할 것을 천명했다. 1907년 고종 퇴위 이후 고작
12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는 점, 그리고 수천 년간 왕정이 존속해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혁명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김 교수는 이 외에도 1912년에 일어난 중국의 신해혁명 역시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자국의 왕이 퇴위 당하고 청
제국의 황제는 아예 사라지는 대격변의 시대 속에서 한국 민중은 스스로를 자각하고 민주제와 입헌정치에 대한 풍부한 논의를 전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군주와 국가를 분리시키고 군주를 배제하는 정치, 즉 민주 공화정체였다.
3.1운동이 제국주의와 전제정치를 부정하고 독립에 기초한 공화정을, 신분제도를 부정하고 평등에 기초한 민주정을 제시했다는 것은 이런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이상과 이념은 임정에 의해 해석되고 그 헌법에 규정될 수 있었다.
대한민국임시헌장(1944)과 제헌헌법(1948)은 전문, 총강, 국민의 권리와 의무,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경제,
회계, 헌법개정 및 부칙 등에서 거의 동일하다. 내용면에서도 두 헌법은 3.1운동의 독립정신 계승, 민주공화국, 국민주권, 기본권
보장, 권력분립 등에서 거의 일치한다. 말하자면, 헌법의 근간과 골조는 사실 상 임정시기에 만들어진 셈이다.
극심한 반공이념이 지배하던 미군정 시기에 만들어졌을 현재의 제헌헌법에도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는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이유 역시 초기 임정의 좌우합작적 성격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니,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말은
헌법적으로는 거의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비판과 피할 수 없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임정의 요인들은 일제로부터 독립된 신국가
건설의 방향을 일제 치하에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
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 |
"테러와의 전쟁 뒤에는 석유와 군산복합체가 있다" [9.11강좌 2강] |
느티나무 |
2011.9.23 |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와 프레시안은 9.11 10년을 맞아 9월 5일부터 매주 월요일 5회에 걸쳐 '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를 주제로 연속 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9일 열린 두번째 강의는 '전쟁의 정치경제학 : 대테러 전쟁의 논리와 실재'라는 주제로 김재명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님이 진행해 주셨습니다. 아래는 프레시안 김봉규 기자가 정리한 김재명 교수의 2강 강의소개 기사입니다. ☞강연 상세 안내 보기
"테러와의 전쟁 뒤에는 석유와 군산복학체가 있다"
[9.11 기획 강좌] 2강 김재명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2007년에 만들어진 <워 메이드 이지(War Made Easy)>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말 그대로 전쟁이 쉽게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이 다큐는 미국이 2001년과 2003년 각각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할 당시 제작돼 미국인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당했던 베트남
전쟁의 아픈 기억을 되살려냈다.
전쟁은 쉽게 만들어진다. 실제로 전쟁을 하는 사람은 미군들이지만, 전쟁을 기획하고 결정하는 건
미국의 대통령이다. 문제는 안 해도 될 전쟁을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워 메이드 이지>는 그런 점을 짚었고 오늘 강의
역시 전쟁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가 주제다. 결국 나오는 답은 교과서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애족애국과 동떨어진, 본질적으로 비즈니스 성격에
해당하는 전쟁을 미국이 벌였다는 것이다.
테러는 '정치적 동기를 지닌 폭력'이라고 정의된다. 우리는 오사마 빈 라덴의 알카에다나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같이 국가가 아닌 조직이나 개인에 의한 정치적 폭력을 테러라고 본다. 하지만 테러의 개념을 실제로 들여다보면 국가 테러로
인한 희생자가가 국가가 아닌 조직이나 단체에 의한 테러 희생자보다 훨씬 많다. 대표적인 게 나치 독일 시절 아돌프 히틀러가 수백만 명의 유대인과
동성애자, 장애인 등 이른바 '열등인간'을 살해한 것이다. 미국은 오바마 정부 들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지만, 이 용어 뒤에
숨은 국가적 폭력을 비즈니스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팍스 아메리카'는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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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명 성공회대 교수. ⓒ참여연대 | '소프트 파워' 이론으로 유명한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인류가 경험인 세 가지 국제정치제체가 있다고 했다. 로마 시절의 세계제국제체, 중세시대 봉건체제, 무정부적
국제정치체제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무정부적 국제정치제체다. 각국이 자기 나라를 자신이 지킨다고 하면서 서로 충돌하는 것이다.
세계정부가 없기 때문에 강대국이 국제법을 어겨도 제재를 할 수 없다.
유엔(UN)은 세계정부가 되지 못하고 갈등조정 능력도
허약하다. 미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결의안도 없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코피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오늘은 국제사회가 슬픈
날"이라고 한탄만 했을 뿐 국제법에 의해 미국을 전쟁범죄 혐의로 법정에 세우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이 됐다. 미국은 강력한 군사력과 월스트리트로 상징되는 자본력,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와 같은 연성(소프트) 파워로 세계를
지배했다. 미국은 로마제국 시절 누렸던 평화를 20세기로 가져와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미국이 세계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끌어가는 세상을
꿈꿨다.
미국의 논리는 패권 체제가 안정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에 대항했던 카르타고 입장에서 보면 그 평화는 로마인들의
것이었고 자신들은 노예 처지였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팍스 아메리카나는 미국의 평화이지 다른 국가의 평화는 아니다. 그래도 미국은 자비로운
패권국을 자처하며 가난한 나라를 도와주고 국제질서를 안정적으로 끌어간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배경에 기초해 미국은 9.11 테러 이후
전쟁을 벌였지만 비판적 지식인들은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가 미국이라고 지적한다. 이라크 바그다드로 진격하는 탱크에 이라크 국민들이 꽃을 던지리라
기대했지만 오히려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미국에 대한 감정만 나빠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파 지식인들은 미국의 패권이 없다면 세계는 암흑시대로
돌아간다고 반박하고 있다.
미국의 숨어 있는 국방 예산
군사력을 보면, 9.11 이후 현재 미국은 총
63개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많게는 한국처럼 몇만 명이 주둔하는 경우도 있다. 142만 명의 미군 중 25만 명에 해외에
있다.
미국의 국방비는 지난해 약 7000억 달러였다. 9.11 테러 전인 1999년에는 3000억 달러 수준이었다. 약 10년
동안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그럼 그 10년 동안 미국 경제가 두 배로 성장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미국의 정부 예산이 두 배로 늘어난
것도 아니었다. 현재 미국의 국가부채가 총 14조 달러다. 지난 10년간 엄청난 부채가 누적됐고 지금 미국의 경제가 힘든 것 역시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쓴 돈 탓이 크다.
미국의 국방비는 2001년부터 계속 상승곡선을 그렸고 오바마 행정부는 앞으로 국방비를 2010년
6980억 달러에서 2011년 6710억 달러, 2012년에는 6310억 달러로 줄이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국방예산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지출이 그 정도나마 줄어들게 된 것이다. .
게다가 미국에는 숨어있는 국방예산도
있다. 집계되는 국방예산은 국방부만 대상으로 할 뿐 미 중앙정보국(CIA) 등에 있는 대테러 전문가들이 쓰는 예산은 들어 있지 않다. 이 숨은
예산을 합치면 미국의 실제 국방관련 예산은 최소 3000억에서 7000억 달러까지 늘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 에너지부에서
핵무기 제조 및 관리에 편성한 200억 달러가 있다. 국무부는 '테러와의 전쟁' 대신에 '해외비상작전'으로 이름을 바꾼 분야에 85억 달러를,
전 세계 친미 국가들의 군 장성을 관리하는 비용인 대외군사기금(FMF)으로 55억 달러를 쓴다. 미 연방수사국(FBI)과 CIA도 테러 대비 및
해외비상작전 예산이 있다. 이런 돈들은 일반인들이 열람할 수도 없다. 미국의 국방예산이 줄었으니 앞으로 평화롭게 갈 것이라는 예상은 단면적인
얘기다.
또 미국의 국방부 예산은 기본예산과 해외비상작전 예산으로 갈려 있는데, 정부가 줄이겠다고 한 예산은 후자다. 5100억
달러에 달하는 기존 예산 중 3000억 달러는 미국 군수업체들이 받아간다. 그 돈은 줄어들지 않는다. 내년도 예산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중동정책 목표, 민주주의 확산이 아니다
냉전 시절 미국의 대소련 전략은 한마디로
봉쇄였다. 세력이 커지는 걸 막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의 대외전략을 물으면 대답이 각각 다르다. 한마디로 말하기 힘든
것이다.
<미국의 거대전략>이라는 책을 쓴 로버트 아트 미 브랜다이스대 교수는 미국의 대외전략에 대해 △ 미국 본토에
대한 공격 방어 △ 유라시아 지역에서 강대국들의 전쟁 방지 △ 값싼 석유의 안정적 공급 등을 들었다. 이 거대전략의 목표는 미국의 지구적
지배력을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는 것이었다.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진단이었다.
레이건 행정부 시절 중동지역을 책임졌던 앤서니 지니
미군 중부군 사령관은 전 세계 석유매장량의 62% 이상이 페르시아만 일대에 있는 만큼 미국과 연합국들은 걸프지역 석유자원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20세기 전반까지는 강대국들이 식민지를 소유해 자원을 가져갔지만 이제는 자유로운 접근, 즉 '효율지배'를 통해 주권은
허울로 남겨놓고 경제를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이 추진한 중동정책의 본질은 민주주의의 확산이 아니었다. 그 나라가
독재국가인지 여부가 아니라 친미 국가인지 여부가 중요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의회도 없는 독재국가지만 미국이 사우디에 민주주의를 얘기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반면에 이란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않았는데 핵무기 사찰을 해야한다고 미국 지도자들은 열을 낸다.
이집트의 경우
주요 산유국도 아니고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은 독재자였지만 오바마 입장에서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미국의 중동정책을 지지하느냐 여부가
문제였다. 무바라크는 미국의 친 이스라엘 일방주의와 석유 정책을 지지했다. 이것이 미국의 이중 잣대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중동
평화를 위협하는 나라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팔레스타인계 지식인으로 몇 년 전 사망한 에드워드 사이드 전 콜롬비아대 교수는 미국의 중동
전략을 '친미국가 만들기'라고 지적했다. 이라크의 경우 미국이 후세인을 제거한 이유는 단순히 석유 확보 차원이 아니라 후세인이 이스라엘에
미사일을 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랍을 연구하는 미국의 전문가들이 미국의 중동정책을 잘못 이끌어간다는 비판도 있다. 일례가 버나드
루이스 미 프린스턴대 명예교수의 동심원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동심원의 맨 바깥에는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 이란 등 정권과 국민 모두
미국을 싫어하는 국가가 있다. 그 안 동심원에는 요르단, 사우디, 이집트, 모로코 등 친미 성향의 정권이 있지만 국민들은 반미 성향인 국가가
있다.
마지막으로 동심원 가운데에는 쿠웨이트, 카타르, 바레인, 아랍에미리트연합(UAE) 같이 상대적으로 정권과 국민 모두 친미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있다. 미국의 중동정책은 그 중심부를 확장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단순 명쾌한 논리를 좋아하는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성격과 맞아떨어졌다. 이에 따라 공격을 당한 게 후세인과 카다피다.
미국의 중동 민주화 논리는 모순이다. 아프간과 이라크를
침공했지만 다른 국가들을 바라보진 않았다. 미국은 우방인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가진 채 팔레스타인을 탄압하는 것을 감싸면서 이란을 친미 국가로
둘러싸 포위하고 있다. 중동의 반미 감정이 높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보통 미국인들은 중동이 왜 자신들을 미워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미국과 석유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와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둘 다 독재자이고 각 나라에서 국민적 저항이 일고 있지만, 알아사드는 리비아의 독재자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로부터 정권을 이어받아 나라를 공포로 몰아넣은 2대 독재자다. 어찌 보면 카다피보다 더 악랄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제사회가 두 나라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나토(NATO)는 리비아 인들의 인권을 지켜준다는 명분으로
공습을 가했다. 시리아는 찬밥 신세다. 이 두 독재자의 운명을 가른 변수는 석유의 유무다. 석유 때문에 카다피는 운명이 고단해진 처지가 됐지만
알아사드는 그렇지 않다.
이익이 있으면 개입하고 없으면 안하는 게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이다. 리비아 석유가 리비아에서는 하루
16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한다. 시리아에서 나오는 석유는 이보다 훨씬 작다. 유럽국들은 리비아의 석유를 탐내지만 미국은 원래 리비아 석유는
별로 수입하지 않았다. 이번 리비아 사태에서 미국은 그다지 개입하지 않은 반면, 프랑스나 영국 등이 있는 나토군이 열심이었던
이유다.
미군은 전 세계 7개의 사령부를 두고 있는데, 이중 산유국이 많은 중동 지역을 관장하는 곳에 중부군 사령부다. 미국 경제의
숨통을 쥐고 있는 중동의 석유 확보를 군사적 물리력으로 뒷받침하는 게 중부군 사령부다.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영화를
보면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의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 잘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블러드 오일'이라는 말도 존재한다. 20세기 들어
석유는 국제분쟁의 주요 원인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진주만 공습도 미국이 일본의 중국 침공을 이유로 석유 공급을 끊으려고 하자 동남아
지역의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거치적거리던 미군을 공격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문제는 석유가 유한 자원이라는 점이다. 석유
지질학자인 킹 허버트에 따르면 미국은 1970년대 석유 생산량이 정점을 찍었다. 2011년에 세계가 '오일 피크(석유생산량 최정점)'을 찍었다는
말도 있다. 2011년이 정점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세계가 오일 피크 시대로 접어든 건 사실이다. 새로운 석유 매장층을 발견한 횟수도
1950년대 이후 계속 줄어왔다.
미국 내 석유 생산량이 정점을 찍고 내려온 반면 수입량은 점점 늘어났다. 미국과 유럽 국가의 석유
시추량은 10년 이내로 바닥이 날 수 있는 반면, 중동 지역은 앞으로 50~100년 동안 석유 생산이 가능하다. 그래서 중동 석유에 대한 실효적
지배가 필요하다는 말이 자꾸 나온다.
미국은 전 세계 인구의 5%를 차지하지만 석유 소비량은 21%에 달한다. 하루 석유 소비량이
2000만 배럴이다. 연간 70억 배럴인데 석유 매장량은 전 세계의 2.2%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석유 수입량 역시 전 세계의 21%에
달한다.
미국으로선 안정적인 석유 공급원을 찾는 게 최대 과제다. 부시 대통령 시절 이전에도 미국 대통령의 가장 큰 관심사는 석유
확보였다. 당시 캘리포니아주 등에서 대규모 정전이 일어나 에너지 문제가 대두되던 시절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은 반미 독재자로 부상해 원유 판매
대금을 달러가 아닌 유로로 받겠다고 나선 후세인의 이라크에게 대량살상무기라는 누명을 씌우고 점령한 것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이라크에 석유가
없었다면 미국의 침공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반미 정권이 들어선 베네수엘라나 이란은 몇 년 전부터 미국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석유의 무기화가 필요하다고 예기한다. 러시아나 중국도 석유시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미국의 심기를 적잖게 건들이고 있다. 미국의 전문가들은
석유가격 상승 원인으로 신흥 경제국인 중국의 수요 증가를 꼽지만 본질은 석유의 수요와 공급 차원에서 경제 외적인 정치 위기가 대두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외정책이 잘못될 경우 지구촌에 엄청난 석유파동이 닥칠 수 있다. 한국도 미국과 동맹으로 묶여 있는데 이에 따른 유탄을 맞지 않을지
걱정되는 부분이다.
또 하나의 미국 경제, 군수산업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밀어붙이는 까닭에 대해 미국의 군수업체와 석유회사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 바 있다. 미국의 국방예산과 마찬가지로 무기생산 기업의
매출 역시 전쟁이 일어난 이후 배로 뛰었다. 일례로 록히드마틴이 올리는 매출은 한국의 국방예산보다 많다. 전 세계 100대 군수기업 중 미국
기업이 45개다.
미국의 무기 수출량도 엄청나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주요 재래식 무기 수출국을 보면 미국은 국제 시장에서
30%를 차지한다. 미국산 무기의 주요 수입국은 한국이 1위고 호주, UAE가 뒤를 잇는다. 파키스탄, 그리스같이 가난한 국가들도 미국의 무기는
엄청나게 들여온다. 중동국가의 국방비 비율은 국민총소득(GNP) 대비 6.8%에 달해 전 세계 평균보다 두 배 이상 높다. 친미 성향의 정권이
'오일 머니'로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사들여 중동을 세계에서 가장 군사화된 지역으로 만들고 있다.
9.11 테러 이전에는 소련의
붕괴로 재고가 쌓여 경영이 엉망이었던 미국 군산복합체는 전쟁으로 호기를 맞았다. 군산복합체란 군부와 방위산업체의 상호의존체제를 일컫는 용어다.
군부와 민간기업, 정치가가 각각의 이익을 위해 유형 무형의 제휴를 유지하면서 때때로 언론까지 끼어들어 국방 지출의 증대를 도모하는 사회적
유착구조를 말한다.
군산복합체 체제에서 퇴역 장성이 군수기업에 입사해 시장을 개척하거나 정계에 로비를 해 새로운 군사 프로젝틀
진행하는 게 대표적인 예다.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부 장관이 물러난 건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재정 지출을 줄이려는 오바마 대통령의
심기를 건들였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현재 리언 파네타 국방장관은 연방정부 예산회계를 맡던 인물이다.
'죽음을 파는 상인'들은
정부에 끝없는 로비를 벌인다. 록히드마틴이 개발하는 스텔스 전투기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오바마 대통령이 지원금을 줄이려고 하자 250명의
의원들이 서한을 보내 말혔다. 군수업계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세력이 그만큼 많다는 걸 의미한다.
칼라일 그룹은 전현직 정부 고위층을
영입해 '안면 자본주의'를 실현한 대표적 예다.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 프랭크 칼루치 전 국방장관,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 등이 퇴임 후
이곳에서 기업의 이익을 위해 일했다. 딕 체니 전 미국 부통령은 에너지기업 핼리버튼의 회장을 겸하면서 이라크 석유시설 복구 사업을 수의계약해
해마다 15만 달러의 연봉을 받고 1800만 달러의 스톡옵션을 보유했다.
미국이 국방예산 중 기본예산은 감축하지 않은 탓에
군산복합체를 당장 해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지만 장기적으로 미국의 대외정책을 평화 지향적으로 바꾸고 군수업계가 무기가 아닌 다른 제품을 만들
수 있도록 함으로써 미국의 경제구조를 개편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석유와 무기 산업을 뒤에 업은 미국의 패권주의적 대외정책의
희생자는 민초 뿐 아니라 일반 미군 병사들이다. 앞으로 우리가 걱정해야 할 건 미국이 계속 이러한 정책으로 반미 국가를 건들여 제3차 석유파동이
일어나고 전쟁으로 번질 가능성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미국의 대외정책을 계속해서 비판해야 하는 이유다.
*[9.11 기획
강좌] <1> "테러와의 전쟁, '美 헤게모니' 지키기의 마지막 안간힘"
/김봉규 기자(정리) |
교과서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 |
교과서를 통해 본 한국근현대사 1강 |
느티나무 |
2011.9.20 |
지난 7일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에 서 진행된 '교과서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 강좌의 첫 번째 강의 '동아시아 질서 재편으로 본 3·1운동'을 요약 소개합니다. 이날 강의는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김정인 교수(한중일 공동교과서 <미래를 여는 역사> 집필위원)가 진행했습니다. 다음 강의는 '무단, 문화, 민족말살 : 식민 통치 변신의 이해'를 주제로 김정인 교수가 이어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동아시아 질서 재편으로 본 3·1운동
교과서에 기재된 3·1운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가까워지는 가운데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 자결주의는 식민지, 반식민지의 민족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그러나 강대국들의 반대로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 독일의 영토에만 적용하고, 독일의 식민지는 위임통치 방식으로 승전국들이 다시 지배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많은 약소민족들은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걸고 있었고, 그 가운데 한국 민족이 가장 먼저 이를 배경으로 대규모 봉기를 감행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그것이 바로 3·1운동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 동아시아 패권 장악을 위한 전쟁
20세기 초 유럽은 삼국협상(영국-프랑스-러시아)세력과 삼국동맹(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세력으로 나뉘어 식민지를 둘러싸고 갈등했다. 양측은 발칸반도에서 정면충돌했으며, 마침내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면서 제 1차 세계대전은 시작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일본 여론도 대체적으로 참전을 지지했다. 참전에 따른 경기 활성화와 이로 인한 경제 성장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러일 전쟁 이후 만성적인 경기침체에 시달리던 일본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유럽 각국의 아시아 무역이 두절되자, 이를 대신하며 유례없는 번영기를 맞는다.
어떻게든 전쟁에 참여하고 싶었던 일본은 1902년 체결된 영일동맹을 기반으로 동맹국으로서 운명을 함께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다. 일본은 독일과 싸웠지만, 전장을 동아시아 밖으로 확대하지 않았다. 일본의 참전 목적은 동아시아에서 독일 세력을 축출하고 패권을 장악하여 제국주의 열강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었다.
중국은 일본과 달리 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나라의 힘이 약하면, 중립선언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법이다. 일본은 중국의 중립정책을 무시하며 제일 먼저 침략을 감행한다. 1914년 9월 일본 육국은 당시 독일의 조차지인 칭따오를 점령하고 산둥성 내 독일의 이권을 접수한다. 1915년 일본은 중국에게 독일의 조차지를 중국에 반환하기 위해 막대한 군사비를 투자하여 참전했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며 5개항 21개조로 된 요구서를 내밀었다.
'21개조 요구'의 골자는 첫째, 독일 조차지인 산둥 지역에서 일본의 권익 확보를 보장할 것, 둘째, 남만주와 내몽골에서 일본의 특수한 지위를 더욱 강화시킬 것, 셋째, 중국 주요 기업에 대한 일본의 참여를 보장할 것, 넷째, 정치,군사,재정 부문에서 일본인 고문을 초빙할 것, 다섯째, 중국의 치안 유지에 일본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할 것 등이었다.
이는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과 지배 과정을 연상시킬 정도로 중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내용들이었다. 이를 모두 받아들인다면 중국 역시 대한제국처럼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수순을 밟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 일본은 위안스카이가 정권에서 물러난 후 실권을 장악한 돤치루이에게 1917년부터 1918년까지 1억 4,500만 엔의 차관을 제공했다. 이는 철도 건설 등 경제적 명분으로 제공되었지만, 실제로는 돤치루이를 옭아매기 위한 수단이자 정치적 군사자금에 지나지 않았다.
동아시아, 특히 중국을 둘러싼 대립구도는 일본 대 영국·미국을 주축으로 전개되었다.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대해 서구열강은 거세게 반발했다. 미국은 각국 간에 평등하게 누리고 있는 중국에서의 특권을 침해하는 중·일간의 어떤 협정도 승인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결국, 미국은 중국에서의 일본의 특수 권익, 일본은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권익을 각각 인정하는 랜싱-이시이 협정을 체결한다.
러시아는 21개조에 불만을 갖고 있었지만 일본과의 관계 악화는 꺼렸다. 러시아는 일본으로부터 무기와 군수품을 수입하는 처지인데다가 일본이 극동 방향에서 공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중국에서 영국과 미국, 독일의 세력 경화를 견제하기 위해서도 일본과의 관계악화는 좋지 않았다. 일본 역시 중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러시아와의 동맹이 필요했다.
동아시아를 무대로 한 열강의 각축전은 종전이 가까워질수록 치열해 진다. 일본은 영국에게 자신이 점령한 구독일령 중 적도 이북은 일본이, 이남은 영국이 위임통치할 것을 제안한다. 이에 영국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을 지지할 것을 약속한다.
이렇듯 일본은 열강의 권익을 교차 인정하는 방법으로 이익을 취한다. 그 목표는 중국에서 특권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서구 열강과의 협정을 통해 일본은 중국에 대한 특수 권익을 확실히 인정받는다.
조선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설치한 조선총독부는 식민 통치의 총 본산이었다. 조선총독부는 행정 조직은 물론 헌병 경찰과 군대 등을 동원하여 조선인의 정치활동을 철저히 금지시켰다. 정치,사회단체는 대부분 해산되었고, 언론과 저술 활동은 거의 불가능했다. 무단통치가 계속되는 동안 공개적인 민족운동도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국내에서의 민족운동은 대부분 비밀결사 형태로 전개되었다.
한편, 일본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자 다음해 5월 러시아에 대한 공동방위를 명목으로 중국 정부에 비밀리에 '중일공동방적협정'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일본과 중국 군대가 극동 지역에서 공동으로 작전을 수행하며, 이를 위해 일본은 중국 군대 안에 연락원을 두는 동시에 중국 영내에 군사기지를 공동으로 건설해 사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중국으로서는 굴욕적인 요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은 한 때 동아시아 근대화의 선두주자로서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던 일본이 자신들의 주권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패권국가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3.1 운동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1917년 3월 러시아 혁명에서 혁명정부를 수립한 레닌은 각 민족의 자결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전후 평화질서의 기초로 자리 잡는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민족자결주의를 역설했다. 바야흐로 '민족자결'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당시 유럽의 정치 관행에서 보자면, 유럽의 양쪽 날개에서 주장된 민족자결주의는 대단히 진보적이며 도전적인 것이었다. 윌슨과 레닌의 민족자결주의는 용어의 동일성으로 인하여 내용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유럽 지역과 패전국에 국한시키려 한 반면, 레닌은 모든 식민지 독립을 주장했다.
물론 처음에 윌슨도 자신의 민족자결주의를 패전국의 식민지 문제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국한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베르사유 강화회담에서 해결 가능한 식민지 문제는 패전국의 식민지 문제였다. 그렇다면, 제 3세계에 반제국주의, 반식민지를 외치던 민중들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다음은 기미 독립선언의 서명자 오세창의 신문조서이다.
문 : 민족자결이란 것은 병합 또는 정복된 전 세계의 모든 나라를 포괄하는 것으로 생각했는가, 또는 직접 전란에 관계가 있는 나라에 국한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가?
오세창 : 그것은 전란에 관계된 나라에 대해서는 실행되고 그 밖의 나라에 대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문 : 그런데 조선에서 민족자결의 취지에 의하여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운동을 하게 된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오세창 : 그것은 세상의 풍조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주창하므로 가담했는데, 하나는 전 세계의 사람이 민족자결로 소요하고 있는데도 홀로 조선만이 침묵하기 있기보다 실행은 되지 않더라도 역사에 남기기 위하여 조선인도 민족자결의 의사가 있다는 것을 발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인도의 독립운동을 전개한 라이(Lajpat Lai)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인도에 적용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패전국뿐 아니라 전승국인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결론적으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당시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반제국주의 운동을 위한 구실이었다. 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3·1운동을 포함한 반식민지 민중의 독립운동 때문이었다.
윌슨은 즉각적이고 급진적인 식민지 해방에는 반대했지만, 식민지 '해방의 전도사'로 부각된 자신의 이미지를 수정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민족자결주의를 통한 미국의 전후 국제질서 수립은 영국과 프랑스, 일본 등 승전국에게는 불편한 일이었다. 결국 1921년 개최된 워싱턴 회의에서 일본은 산둥 지방에 대한 이권을 중국에 양도하게 되고, 이 사건은 미국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대립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3·1운동은 왜 평화적인 만세시위로 전개 되었나
3.1운동을 준비한 세력은 독립 만세 운동의 방향을 세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국내외를 향한 독립 선언, 둘째, 파리 강화 회의, 일본과 미국에 대한 독립 청원, 셋째, 평화적인 만세시위. 왜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과 시민은 독립선언식을 가지고 만세운동을 시작한다. 오늘날 대중의 머리에 존재하는 3.1운동의 이미지는 장이 열린 시골마을에서 한복을 입은 여학우(유관순)가 태극기를 흔드는 모습이다. 그러나 당시 시위의 시작은 도심이었다. 도시에서 시작된 시위는 철도와 간선 도로를 따라 인근 도시와 농촌 지역으로 점차 확산되어 갔다. 3월 중순 전국 화된 시위는 두 달 간이나 지속되었다.
시위가 도시에서 촉발하고 농촌으로 번져가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은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등 중남부 지방의 농촌을 배경으로 확산되었었다. 3.1운동 이후 농촌은 더 이상 민족 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중심공간으로써 그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대신 도시가 그 역할을 확고히 하게 된다. 1926년 6.10만세운동과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도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민족운동이었다. 이처럼 근대화를 거치면서 시위 공간이 변화하는 도정에서 3.1운동은 전환기적 분기점에 해당한다.
무단통치는 조선인에게 권력도 여론도 허용하지 않았다. 때문에 3.1운동을 조직적으로 주도할 지도부가 존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정한 지도부의 조직 없이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 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든 시위를 조직하고 참여하고자 했던 대중적 자발성 덕분이었다. 시민들은 남녀노소를 분물하고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이끌었다. 이런 사람들을 지칭하는 '만세꾼'이라는 단어도 생겨났다. 만세꾼은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기여했다.
2008년 광화문에 촛불을 든 여고생들이 등장했던 것처럼, 3·1운동도 탑골 공원에 태극기를 든 여학생들이 있었다. 시민들은 일본 순사가 시위에 참여한 여학우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것을 보고 더욱 분노했다. 또 당시 인쇄기의 보급은 3.1운동의 촉매재로 작용한다. 각종 유인물과 신문 등의 인쇄매체는 간단한 구호에서부터 시위 계획, 각지의 운동 상황을 알리며 투쟁을 독려했다.
3.1운동은 독립이라는 목적 달성에 있어서 실패한 운동이라고 볼 수 있으나, 3.1운동의 경험은 주체적 시민의식과 운동의식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시위의 주체들은 전쟁으로 인해 나라를 잃은 것이 아닌, 강화도 조약이라는 외교정책의 실패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교를 통한 식민지해방과, 이를 촉구하기 위한 평화적 시위를 진행했다. 또한 3·1운동은 도심에서 민중의 자발적 의지로 일어난 근대적 시위운동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5·4운동, 일본 제국주의 저항운동?
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중국은 독일에게 빼앗긴 산둥성을 되찾고, 주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다. 그러나 1919년 4월 파리강화회의는 산둥성의 이권을 일본에게 넘길 것을 결의했다.
이에 5월 4일 약 3,000여 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강화조약 조인을 거부하라', '반드시 산둥성의 이권을 회수하자', '21개조 요구를 폐지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베이징에서 시작된 동맹휴학은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정부는 학생과 청년들을 대량으로 검거하면서 적극적인 탄압으로 응수했다. 약 1천여 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었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시위는 더욱더 거세졌다. 마침내 6월 28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중국대표단은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조인을 거부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이처럼 5.4운동은 학생이 촉발하고 민중이 동참하여 강화 조약 조인 거부와 매국노 처벌이라는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며 결국 원하는 바를 얻어낸 소중한 역사적 경험이었다. 이 경험은 국민의식이 형성되면서 새로운 주체를 중심으로 국민국가를 수립하려는 운동으로 이어졌다.
동아시아적 역사 관점의 필요
우리를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더구나 현대에 들어서는 이 관계가 한층 더 강화되고 있다. 하지만 반면에 갈등의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특히 한·중·일, 3국은 역사 논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대사>교과서에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 대부분의 역사가 우리 시점, 일방적 시점에서 쓰이고 있다. 한쪽으로 치우진 역사 기술은 평면적인 역사관점을 심어주고 또 그것이 갖는 민족주의, 국가주의적 관점은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를 방해하고 갈등의 해소에 장애가 될 가능성이 크다. 세계사적, 동아시아적 흐름 속에서 우리의 역사를 이해했을 때 비로소 동아시아의 평화적 관계를 형성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
집의 인문학 2강 한국 근현대 주거의 존재방식 |
느티나무 |
2011.9.19 |
8월 30일부터 가을학기 강좌 [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강좌는 단순히 자산증식의 수단으로서의 집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삶이 엮이는 공간으로서 집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주택정책과 가족의 의미까지 보다 폭넓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강좌소개 보기>>
2강의 강의정리 후기는 자원활동가 이현정 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산업혁명 없이 발달한 도시주택 변천사
집의 인문학 2강, ‘한국 근현대 주거의 존재방식’ 후기
2011 참여연대 느티나무 아카데미 가을강좌 ‘집의 인문학’은 작년부터 기획되었다고 한다. 의, 식, 주. 입고, 먹고, 거처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들이다. 이 중에서 주, 즉 집은 대한민국에서 ‘자산증식’의 수단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여전하게 강하다. “주거문화, 부동산 문화를 변화시키는 씨앗이 되면 좋겠다”는 느티나무의 바람에 100% 동의하며 집의 인문학 강좌를 소개한다. 2강은 경기대 건축대학원 안창모 교수께서 맡아주셨다.
대한민국에 노동자 주택이 없는 이유
도시주거와 근대도시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도시주거는 ‘도시에 있는 주택’이다. 시간과 상관이 없다. 근대 이전에는 어느 지역이라도 역사 중심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근대는 도시중심 역사이다. 그 이전 주거와 다르다. 산업혁명은 공업화→자본축적→도시화를 거쳤다. 도시에 노동자가 밀집하면서 주택 문제 해결을 위해 건물이 높아졌다. 유럽의 일반 모습이다.
우리는 산업혁명 없이 근대를 맞이했다. 그것도 식민지로. 유럽의 근대주택은 노동자의 주택이다. 노동력 확보를 위해 싸고 빠르게 공급했다. 우리나라는 산업화 없는 근대화 속에 근대주거가 등장했다. 일제시대에 식민 지배를 하는 일본 사람을 위한 집합주택이 나타났다. 집합주택은 조선정부가 소유한 땅 중 빈 용지에 지었다. 도시변화의 시작으로, 우리나라 근대주거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집합주택은 도시 한복판에 존재했고, 중상 이상의 질을 가졌다.
성저십리로 서울 이해하기
한양(서울)은 도성과 성저십리(城底十里)까지를 이른다. 성저, 성 아래, 십리는 약 4km. 한강부터 성곽까지의 거리가 약 4km였다. 성저십리에는 사람이 별로 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서울에 포함시켰을까? 성저십리 내에서는 묘를 쓸 수 없었고 나무를 베지 못하게 했다. 오늘날 그린벨트 개념이다. 다만, 왕의 묘는 성저십리에 쓸 수 있었다. 그린벨트는 사회주의 국가의 도시계획인데 조선시대에 이런 것이 있었다. 나무는 강원도나 충청도에서 베 한강 동쪽에서 수송했다. 조선시대에 서울을 이해하는 관건은 도성이고 근대시기 서울을 이해하는 관건은 성저십리의 도시화이다.

▲ 성저십리 안에서는 묘를 쓸 수 없고, 나무도 벨 수 없었다. 사진출처=www.rekor.or.kr
식민지 아래에서도 도시화는 이뤄졌다. 하층민은 도성 바깥 구릉 위에 몰려 살았다. 1920년대에 굉장히 많아졌다. 초등학교 다닐 때 공동묘지 전설이 있지 않았나?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다. 당시 교육 같은 최소한의 행정서비스를 위해 시역을 확대했다. 초등학교 부지가 공동묘지였다. 1920~30년대에 이장이 많았다. 서울 동북쪽은 한인 주거지였다. 신설동, 제기동, 용두동 등으로 평지였고 가난한 곳이었다. 서울 남서쪽은 일본인 주거지였다. 후암동, 흑석동, 상도동, 대방동, 영등포 등으로 산지였다. 돈이 되는 루트였다. 일본은 상인이나 농사짓는 사람이 평지에 산다. 한남동은 1930년대 일본인 최고의 주거지였다. 민족에 따라 주거지가 명확하게 나뉘었다.
집합주택 1세대는 관사주택이다. 일제 관료를 위한 주택이다. 2세대는 행랑식 주택이다. 1910~20년대 빈민 한인들의 주거부족 문제가 심각해지자 이들에게 공급된 주택이다. 3세대 부영주택은 경성부에서 공급했다. 4세대는 영단주택으로 전시체제 아래에서 형성된 첫 노동자용 집합주택이다. 이때는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대륙 침략을 본격화 한 시기다. 한반도는 북쪽을 중심으로 병참기지화 됐다. 남쪽은 유일하게 영등포에 군수산업이 있었다. 군수산업 안정화를 위해 군수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집합주택인 영단주택을 공급했다.
연립한옥은 일제강점기 도시한옥의 대표 특징이다. 한옥은 온돌 방식의 난방 때문에 고층화가 어렵다. 온돌은 2층 공간까지 불을 가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시빈민은 땅에 붙어 있는 움막에 살았다. 이를 토막이라고 한다. 토막은 하꼬방, 판자촌으로 이어진다. 토막민을 시 바깥으로 쫓아내고 그곳에서 정착을 유도했다. 해방 이후 판자촌이 철거됐다. 아파트는 저소득층 서민을 위한 2~3층의 목조 주택이었다. 지금의 아파트 개념은 ‘맨션’이다.
한옥만 남향 사랑?
한옥은 근대 도시주택인가? 한옥은 근대 도시주택과 속성이 다르다. 근대화를 겪은 사회는 공공기관이 임대주택을 공급했다. 우리는 1980년대 말까지 주택의 공공 공급 개념이 없었다. 북촌은 지방지주가 서울로 공부하러 가는 자식을 위해 지어졌다. 사무직이나 지주의 자식들이 북촌 한옥에 거주했다. 1910년대부터 집 장사가 있었다. 한옥을 단순화시키고 개량시켜 팔았다. 개량한옥(도시한옥)이라고 불렀다. 근대기 건축가들은 자기를 계몽가로 여겼지만 집 장사들은 사회요구를 받아들였다. 건축가들이 설계한 집은 잘 팔리지 않았다.
문화주택에서 ‘문화’란 위생을 뜻한다. 위생을 책임지는 것이 이슈였다. 사람의 건강을 책임진다는 건데 자본가가 건강한 노동력 확보를 위해 필요했다. 문화주택은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조선일보 만평을 보면 돈을 빌려 문화주택을 지은 것을 비꼬는 내용도 있었다.

▲ 1930년 1월 12일 조선일보 만평 ‘여성선전시대가 오면(2)’. 왼쪽에서 두 번째 다리를 보면, “나는 문화주택만 지어주는 이면 일흔 살도 괜찮아요.”라고 쓰여 있다. 당시 문화주택을 향한 열망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사진출처=todayhumor.co.kr
한옥은 남향 선호사상으로 지어진 주택인가? 당시 한옥은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이 사는 비위생적인 주택이었다. 위생주택을 대안으로 내놓았는데, 아이들 방을 남쪽에 두었다. 아이들을 보호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부엌, 화장실을 개량하고 위생주택을 권유했다. 남향을 선호했다면 안방 위치가 달라졌을 것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대라 가족 삶을 위해 중요한 부엌은 동북쪽에 있었다. 안방은 가장 나쁜 위치에 있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안동 하회마을에 가면 종갓집에도 남향이 아닌 집이 많다. 서양도 남향을 선호했다. 남향집은 비싸서 노동자들에게 선택권이 없었다. 20세기 초 위생 개념이 들어와 ‘남향’이 좋다는 교육이 이뤄지면서 남향이 선호되었다. 우리나라만 남향을 선호한다고 보기 어렵다. 우리만의 독특한 특징은 아니다.
조선이 병참기지화되면서 노동자들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단주택이 들어섰다. 문래동의 영단주택은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자 주택이다. 1940년대 초 조선주택영단에서 지었다. 서양처럼 산업화로 인한 노동자용 주거단지가 출현한 것이다. 상도동, 대방동에도 있었다.

▲ 2010년 4월 25일 인터넷 한겨레신문을 보면 문래동에 남은 영단주택 500여 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재개발이 진행되지 않았다면 지금도 볼 수 있을 듯. 사진은 영단주택 골목. 사진출처=http://blog.daum.net/hojinbo/36
해방이 된 후에도 일제 강점기 표준 주택이 여전하게 영향을 미쳤다. 국민주택 현상공모 당선안을 보면 영단주택과 유사한 안이 많았다. 1960년대에는 퀀셋, 흙벽돌집 같은 실험주택이 있다. 미국이 흙으로 집을 지은 것을 보고 아프리카에서 쓰던 흙벽돌 만드는 기계를 가져왔지만 흙벽돌은 우리나라와 맞지 않았다. 그래서 흙벽돌 안에 화강석을 넣었다. 청량리 부흥주택이 흙벽돌로 지은 집인데, 현재도 남아있다.

▲ 미군이 임시 주둔하는 주거형태였던 퀀셋(quonset). 사진출처=runintosky.tistory.com/
1960년대 도시한옥은 1930년대 형식을 완전하게 갖췄다. 빠르게 공급됐다 사라졌다. 도시한옥 보존이냐 개발이냐는 갈등이 있었는데, 북촌은 4대문의 핵심이고 양반이 거주해 보존 필요성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렇지만 보문동, 청량리 일대에 있는 도시한옥은 역사성이 없다는 이유로 보존되지 않았다. 아파트는 195~60년대에 공급이 시작돼 1970년대 보편화됐다. 1980~90년대 전형화를 거쳐 90년대 이후에는 공급이 정체됐다. 대신 주상복합이 등장했다. 마포아파트는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이다. 원조를 받아 기름보일러와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려고 했는데, 미국의 반대로 층수를 낮추고 연탄보일러를 사용했다.

▲ 국내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 마포아파트. 사진출처=podopodo.net/article/critics/detail.asp?seq=28
나는 세운상가를 ‘2차 세계대전의 사생아’라고 표현한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도시도 공습 피해를 받았다. 소이탄 공격을 받아 불이 났을 때 도시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고 빈 공간을 두었다. 그 중 한 곳이 종묘 앞에서 필동까지의 폭 50m,길이 1200m의 현 세운상가 지대였다. 서울이 폭격을 맞아 종로 일대에 화재가 나면 동대문까지 이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소개도로를 만들었다. 소개도로를 유지하며 건물을 지은 것이 세운상가이다. 1970년대 초반까지는 성공했지만, 1980년 강남이 개발되면서 위상을 잃었다.
직장과 주거분리(직주분리)는 근대주거의 특징이다. 가내수공업이 죽고 대공장 삶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도시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소련은 직주근접 도시계획을 세웠다. 평양은 사회주의 국가의 도시계획이 완벽하게 구축된 곳이다. 소구역 단위로 이동량을 최소화 시켰다. 가장 이상적인 아이디어로 만들었지만 작동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다세대 주택을 바라보는 관점이 일제시대의 건축가 모습 같다. 다세대 주택을 우습게 안다. 북촌의 도시한옥 교훈을 생각하면 좋겠다.
참고
① 문래동 영단주택 관련 기사 “70년 세월 빼곡히…‘영단주택’ 헐리나”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417732.html
② 1960년대 마포아파트 이야기 보러가기 “1962년, 마포아파트 혹은 혁명 한국의 상징”
http://podopodo.net/article/critics/detail.asp?seq=28
③ 세운상가 역사를 좀 더 알고 싶다면 “도성길라잡이 세운상가 역사”
http://blog.daum.net/so_design/8177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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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 |
"테러와의 전쟁, '美 헤게모니' 지키기의 마지막 안간힘" [9.11 기획 강좌 1강] |
느티나무 |
2011.9.15 |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와 프레시안은 9.11 10년을 맞아 9월 5일부터 매주 월요일 5회에 걸쳐 '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를 주제로 연속 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프레시안 황준호 기자가 정리한 성공회대 김민웅 교수의 1강 강의입니다. ☞강연 상세 안내 보기 참고로 프레시안에 연재된 [9.11 10주년 세계의 시각]도 함께 소개합니다. 바로 가기
"테러와의 전쟁 '美 헤게모니' 지키기의 마지막 안간힘" [9.11 기획 강좌] 1강 김민웅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
'9.11의 역사적 기원과 테러와의 전쟁 10년'이란 주제로 있었던 김민웅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의 첫 번째 강연을
요약해 소개한다. 두 번째 강좌는 김재명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가 '전쟁의 정치경제학 : 대테러전쟁의 논리와 실재'를 주제로 오는 19일 진행할 예정이다. 편집자
 | ▲ 김민웅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 ⓒ프레시안 자료사진 |
9.11의 역사적
기원과 테러와의 전쟁 10년
한국 언론에 국제뉴스가 1면에 등장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다 보니 국제적인 문제가 우리의 현실과 어떻게 유기적으로 얽혀 돌아가는지를 알기가 쉽지 않다.
100년 전 동아시아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던 당시와 비교해 보면, 정보의 양은 많아졌을지 몰라도 이해력은 오히려 후퇴한 측면이 있다.
김구 선생이나 여운형 선생은 조선의 운명을 사고할 때 '상해는? 모스크바는? 동경은?' 이런 변수들을 고민하면서 세계적인 네트워크가 머릿속에서 작동했다. 그런 고민을 해야 조선의 정세를 풀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평양에서는? 워싱턴은? 북경에서는?' 이런 고민을 별로 안 한다. 정보 공개 사이트인 위키리크스가 몇 년 뒤에 알려주는 정보만을 가지고 뒷북이나 치고 있다.
마찬가지로 9.11
테러는 왜 터졌고, 그 후 10년 동안의 정세는 어떠했는지를 정리하지 못하면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의 정체를 알기 어렵다. 9.11 이후 미국이 밀어붙인 '테러와의 전쟁'은 우리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2000년 1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발표한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는 게 어려웠던
것도 9.11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군사력의 지배에서 자본의 직접 지배로
좀 긴
시선으로 9.11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세계적 패권의 상층부에는 미국과 소련이 있었다. 세계대전
당시 두 나라는 연합군을 형성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서 그 관계를 더 이상 유지할 이유가 없어지면서 각기 가진 체제적 본질상 적대 관계로 돌아섰다..
1945~48년 한국은
미군정이 지배하고 있었다. 미국은 점령체제를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질서를 한국에 만들었다. 일본 식민지 체제에 협력했던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복권시키고, 그걸 기반으로 미국이 원하는 질서를 만들었다. 거기에 치열하게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들과 좌파들은
제거했다. 파시스트의 정치적 복원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한국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일본,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이 전쟁 후에 제거됐다. 이런 나라들에서 좌파가 집권하면
미국에 불리하니까 좌파를 제거하고 파시스트들을 다시 세운 것이다. 일본에서는 우파들을 결집시켜 자민당을 만들었다. 이처럼 냉전 체제는 파시스트
세력을 복구시켜 미국과 결합해 소련과 대치하는 체제였다. 이 시기 미국의 영향권에 있던 제3세계의 정권은 대부분 파시스트 군사정권이었다.
또한 2차 대전에 참전해 대공황을 극복했던 미국에 있어 전후의 평화는 미국 자본주의 체제에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평화의 시기에도 전쟁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냉전체제다.
그런데 1980년대 말 냉전이 무너지면서 그러한 질서에
의지하는 방식이 의미가 없어졌다. 제3세계에서 군사정권 체제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내부의 심각한 반발과 반미운동의 성장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또한 군사력을 앞세워 자본주의의 패권을 유지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게 됐다. 따라서 냉전이 끝나면서는 자본이 직접 세계를 통치하는 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다. 노동은 통제하고 자본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면서 자본이 직접 세계를 통치하는 시스템이다.
한국이 걸어온 길도
정확히 그 추세와 일치한다. 냉전 시기였던 박정희-전두환 시절은 군사력이 중심이 되던 때였다. 노태우 시절은 군사력과 자본의 힘이 균형을
이뤘고, 김영삼 정부 시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서 자본시장을 개방함으로써 한국도 자본의 통치 시스템으로 들어갔다. 그
때문에 IMF 구제금융을 겪었고, 김대중 정부 시절 일정한 제약을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마침내 '권력이 자본으로 넘어갔다'는 말을 했다.
이명박 정부는? 자본 자체가 권력이 된 것이다.
냉전이 끝나면서 신자유주의는 복음이라고 선전됐다. 미국의 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을 얘기하면서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미국식
신자유주의로 오기 위한 변증법적 몸부림의 과정이었고,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역사를 꿈꿀 필요가 없다고 선전했다.
그렇게 해서 자본이
중심이 되는 시스템이 돌아가게 되었으나, 결국 도처에서 문제가 생겨났다. 중남미 국가들의 금융 위기가 잇달았고, 1997년에는 동아시아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투기 자본이 활개를 치고, 과잉생산이 구조화되면서 문제가 터진 것이다. 빚으로 쌓아올린
부채경제의 파산이었다.
한편으로 사람들이 이런 시스템의 문제를 알기 시작했다. 1999년 미국 시애틀에서는 세계무역기구(WTO) 회의를 열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시위가 일어났다. 자본의 통치가 부를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더 가난해지고 경제는
망가진다는 걸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이 진짜 의도한 것은?
그 과정을 거치면서 미국의
지배자들은 세계자본주의의 패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다시 주먹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미국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다.
10여 년간 뒷방에서 쉬고 있던 조폭들이 조지 부시 대통령의 등장과 함께 다시 밖으로 나오게 됐다.
네오콘들의 핵심 세력은 베트남전쟁 당시 정책 결정자와 이론가들이었다. 베트남전에 대해서는 미국의 제국주의 전쟁이 실패한 것이라는 평가가
있었지만, 네오콘들은 '우리가 더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본다. 세계는 갈등과 무력 충돌을 피할 수 없는데, 그걸 위해서는 어느
한 나라가 중심에서 군사적 헤게모니를 강하게 확보해야 한다고 본다.
그 와중에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이 통합되고 유로화가 통용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유럽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이
탄생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그리고 중국이 부상했다. 미국이 지배하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세력이 많아지고, 체제의 비밀을 다 알게
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을 단숨에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길은 에너지원 장악이다. 독수리(미국)가 날개를 펴서 한 쪽
날개로는 유럽을, 한쪽으로는 중국을 압도하고, 발톱으로는 중동의 원유를 장악하면 유럽과 중국의 성장을 일정하게 저지할 수 있다. 프랑스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했던 것은 그 나라가 정의로워서가 아니다. 미국의 의도를 알았기
때문이다.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란 것은 미국의 바로 그러한 전략에 따라 진행된 것이다. 9.11 테러 사건 자체가
그것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계기가 됐던 것인지는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확실한 것은, 9.11 이후 미국의 외교정책과
네오콘의 전략은 미국 헤게모니의 동요를 차단하고 유럽·중국의 성장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그 행동의 원칙은 정신이나 자본의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군사력을 확실히 장악하는 것이었다.
9.11 이후 미국은 안보국가(Security State) 시스템으로 전환됐다. 9.11이
미국인들에게 준 엄청난 충격은 2차 대전 후 미국에서 불었던 매카시즘 열풍보다 더 강력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줬다.
매카시즘은 한 마디로 냉전 체제가 들어서면서 미국 자본주의 체제와 그
대외정책에 반기를 들 좌파를 제거한 사건이다. 그러나 9.11 이후에는 그보다 더한 일이 벌어졌다. 미국의 시민적 자유가 축소되고, 안보를 위해
민주주의가 축소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의회의 승인 없이 대통령과 소수의 정책결정자들이 전쟁 개시를 결정해 전 인류의 운명을 쥐고
흔들었다. 비판을 봉쇄하고 표현의 자유를 막음으로써 언론들은 숨을 죽였다.
네오콘들은 그렇게 해서 이라크를 침공했는데, 사람들은
이라크 다음엔 동아시아의 북한을 손 볼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자 북한은 핵과 미사일 전략을 더욱 강화하는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되지 않았다. 이라크 전장에서의 저항이 생각보다 강력했기 때문이다. 이라크인들의 치열한 저항이 역설적으로 동북아시아에서의 평화를 가져다줬다고 할까.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도 생각보다 어려웠다. 미군 병사들은 전장 투입 주기가 길어지면서 지쳐갔고, 전쟁의 트라우마를 가지게
됐다.
또한 사람들은 전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게 됐다. 결국 미국은 전 세계에서 두 개의 전선을 동시에 감당할 수 있다고 큰 소리쳤던 '두 개의 전선전략'(Two Fronts Strategy)을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되고 말았다. 제국의 군대는 하나의 지점에만 집중되어야 했다. 그러나 국가적 부담은 덜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심각해졌다.
그 정치적인
결과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이었고, 체제적 부담은 2008년 금융위기로 드러났다. 그러나 오바마가 이 문제를 한 번에 풀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 오바마가 급진적인 선택을 하기가 어려운 시스템이다. 그래서 오바마 개인으로는 정치적으로 희생당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 미국의 정치 현실을 보면 실제로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
 | ▲ 2003년 5월 1일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항공모함 애이브라험 링컨호에서 이라크 전쟁 종전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은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다. ⓒ프레시안 |
한반도, 미국의 양대 지배 전략이
중첩된 곳
동북아시아와 한반도로 시각을 좁혀 보자. 앞서 설명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한반도에는 미국이 요구하는 전쟁
시스템이 구축됐다. 6.15 공동선언과 2007년 10.4 남북 정상선언 같은 것들은 그 시스템을 돌파하기 위한 시도였다. 하지만 부시 정부는
한미 FTA를 통해 한국 내 시장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하는 등 한반도를 그냥 놔두려 하지
않았다.
한반도는 미국의 네오콘적인 군사 시스템과 미국 자본의 질서가 지배하는 방식이 중첩되는 곳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그에 대한
문제 제기나 저항의 강도는 상대적으로 낮다. 유럽처럼 진보적 사회운동의 결과로 형성된 높은 사회의식 속에서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는 힘이 약하다.
한국은 세계
1~2위를 다투는 미국의 중요한 무기 시장이다.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게 안 되는 이유를 미국의 군수산업적 이해와 관련해서 보면 당연하다. 평화체제를
만드는 순간 미국은 최대의 무기 시장을 잃게 된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미국 자본의 이익과 군사적 이익이 중첩된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면 남북관계도 안 되고, 우리의
살림살이도 거덜나는 것이다. 대학 등록금도 화끈하게 낮출 수 없고, 제대로 된 복지정책을 펴는 것도 힘들다.
교육비, 병원비, 노후 보장 같은 걸 하려면 우리의 재정 구조가 평화적인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엄청난 군사 시스템을 돌리기 위해 돈이 쏟아 부어져서는 복지가 실현될 수 없다. 복지
문제뿐만 아니라 환경 문제도 마찬가지다. 제주 해군기지 논란을 보면 환경, 평화, 복지의 문제가 같이 돌아간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시스템을
개혁하고 변화시키려면 미국의 패권 시스템을 정확히 이해하고 분석하고, 그것과 우리의 관계를 잘 짚어 내서, 그 문제를 풀어나갈 고리를 하나씩
풀어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분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연평도에서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는 작년에 충분히 경험했다.
한반도의 분단에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군사적 장치가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이걸 풀어내는 과정은 이 땅에 여러 가지로 중첩되어 있는 미국의 패권적 지배체제의 압박을
해결하는 것이며, 평화체제가 가져올 새로운 미래의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이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민주주의가 세계적 시민의 권리와 위상을
획득하는 기초가 될 것이다. 이걸 도외시하는 일체의 정치와 운동, 그리고 교육과 학문은 이 시대 동아시아가 얽혀 있는 모순을 타파하는 능력을 갖지 못한다.
/황준호 기자(정리) |
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
집의 인문학 1강, ‘지금 다시 생각해보는 우리의 집’ 후기 |
느티나무 |
2011.9.6 |
8월 30일부터 가을학기 강좌 [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강좌는 단순히 자산증식의 수단으로서의 집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삶이 엮이는 공간으로서 집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주택정책과 가족의 의미까지 보다 폭넓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강좌소개 보기>> 1강의 정리후기는 자원활동가 이현정 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재산증식 아닌 성찰하는 공간으로 바라볼까?
2011 참여연대 느티나무 아카데미 가을강좌 ‘집의 인문학’은 작년부터 기획되었다고 한다. 의, 식, 주. 입고, 먹고, 거처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들이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에서 주, 즉 집이란 ‘자산증식’의 수단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여전하게 강하다. “주거문화, 부동산 문화를 변화시키는 씨앗이 되면 좋겠다”는 느티나무의 바람에 100% 동의하며 집의 인문학을 소개한다. 1강은 건축가이면서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건축과 민현식 교수가 맡아주셨다.
공간, 생각을 부추기다
거주하는 곳은 모두 집이다. 생활하는 곳, 일하는 곳, 영화를 보는 곳 등 길게 혹은 잠시 거주하는 곳은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집(공간)은 단순하게 머무는 곳이 아니라 생각하는 공간이다. 생각하도록 부추기는 공간일 수 있다. 건축가 꼬르뷔제는 “건축을 통해 사회를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꼬르뷔제는 20세기를 대표하는 건축인 프랑스 롱샹의 롱샹교회, 리용의 라 뚜레뜨 수도원을 건축한 사람이다. 꼬르뷔제는 프랑스 파리 세느강에 있는 구세군 건물도 건축했다. 구세군 건물은 노숙자를 위한 숙소이다. 그는 공간을 거치는 동안 (노숙자들이) “나도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구세군 건물을 설계했다.  ▲ 밖에서 본 롱샹교회. 출처 = www.anupark.net 동영상 보러가기
사유하게 만드는 건축의 대표는 수도원이다. 꼬르뷔제는 수도원 건축을 의뢰 받았을 때 신부로부터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 있는 르 또로네
수도원을 가보라고 권유받았다. 중세 수도원인 르 또로네를 방문한 꼬르뷔제는 이 공간에 감동을 받아 ‘진실의 건축’이란 책을
쓰기도 했다. 공간에 사유(思惟)하게 하는 힘이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곳들이다.  ▲ 프로방스 지역에 있는 라 또로네 수도원 내부 모습의 일부. 출처 = www.anupark.net 동영상 보러가기
문을 열면 자연과 관계를 맺고
우리나라 집은 지형과 행복한 관계가 되도록 했다. 산, 들, 강이라는 공간 안에 집, 절, 서원같은 사람이 만든 공간을 넣었다. 우리나라 방은 ‘풍경’이라는 짝이 있었다. 방문이 닫혀 있으면 모르지만 방문을 여는 순간 방과 공간이 관계를 맺는다.
명재고택(윤증고택) 누마루에서 창을 열고 바라보는 모습은 가장 드라마틱한 풍경을 보여준다. 절에 갔을 때 “부처님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둘러보면 좋다. 우리나라 건축에서 루, 정 등은 위대한 자연을 보며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공간이었다. 경상북도 안동 천등산에 있는 봉정사 극락전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다. 봉정사 극락전은 건축 자체는 훌륭하지 않다. 눈여겨 볼 곳은 암자이다. 암자가 우리를 사유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하회마을의 병산사원의 만대루 역시 그런공간이다. 병산서원은 아침에 낙동강을 따라 걸어가면 좋다.
 ▲ 8월의 명재고택 사진출처 = www.myeongjae.com이 외에도 멕시코 멕시코시티 둔덕에 지어진 건축가 루이스 바라간의 집, 루이스 칸이 건축한 미국 샌디에고의 소크(salk)연구소도 사유하게 하는 힘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루이스 바라간의 집은 오로지 하늘만 바라보게 지었고 소크 연구소에서는 태평양만을 바라볼 수 있다.
남진이 원망스러운 이유
남진의 노래가사 중에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라는 부분이 있다. 그림 같은 집은 밖에서 보는 집이다. 집에서 밖을 보는 그림이 중요하다. 그래서 가끔 남진이 원망스럽다. 요즘 집은 자본의 논리에 놀아난다. 돈, 재산 축재만 있고 사유가 없는 집이다. 축재보다는 나를 성찰하게 만드는 집에 관심이 있을수록 사회도 나아질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는 ‘집’
부동산에서 자유로우면 여러 곳에서 살 수 있다. 우리는 집을 뿌리를 내리고 사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을 극복하면 집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 커진다.
참고 ① : 꼬르뷔제가 건축한 건물이 보고 싶다면 http://www.anupark.net/corea/web/co_a02-13.htm를 들려도 좋다. 롱샹교회, 라 뚜레뜨 수도원은 물론 그가 감명을 받았던, 르 또로네 수도원 모습도 동영상으로 볼 수 있다.
참고 ② : 민현식 교수의 건축한 건물로는 신도리코 기숙사, 대전대 기숙사, 로열앤컴퍼니가 있다. 로열앤컴퍼니 옥상은 잘만 이야기하면 방문도 가능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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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의 착한 경제학 |
정태인의 착한 경제학 4강 : 복지국가의 성공조건 |
느티나무 |
2011.7.29 |
7월 5일부터 여름학기 강좌로 [정태인의 착한 경제학]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강좌는 인간의 본성과 인간 개개인이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연구(진화심리학)를 바탕으로 하는 행동경제학이라는 프리즘으로 경제학과 현실경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강좌소개 보기>> 4강의 정리후기는 자원활동가 박우용(웅진지식하우스 에디터) 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4강 사회경제와 복지국가
시장 경제와 공공 경제, 사회 경제의 세 박자가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 시장 경제는 경쟁을 통해 효율성을 낳으며 공공 경제는 재분배를 통해 평등을 낳는다. 사회 경제는 상호성을 통해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사회 경제의 대표적인 조직인 협동조합은 한국에도 그 전통이 있었으나 박정희 정부의 ‘새마을 운동’과 함께 사라졌다. 공공 경제의 원리로 전 사회를 조직하려고 했던 것이 ‘국가 사회주의’이고, 시장 경제의 원리로 전 사회를 조직하려고 했던 것이 ‘시장 방임주의’와 ‘신자유주의’이다. 한국의 2008년 총선 공약은 정당을 막론하고 ‘뉴타운 지정’과 ‘특목고 유치’였다. 그야말로 ‘탐욕의 정치’였던 것이다. 지금은 주제가 ‘복지 논쟁’으로 바뀌었으니 일면 진보된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복지 논쟁은 세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1) 보편 복지 vs 선별 복지, (2) 증세가 수반된 복지 vs 증세 없는 복지, (3) (증세를 한다면) 부자에게 주로 세금을 더 걷자는 의견 vs 모두 함께 증세를 부담하자는 주장. 복지가 성공하려면 다음의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1) ‘목적세(복지세)’ 같이 용처를 정확하게 정의해 놓은 세금을 통해 증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건강 보험 하나로 운동’이 같은 맥락의 운동이다. 현재 한국의 건강 보험은 상당히 우수한 수준이지만 ‘보장성’이 낮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이 때문에 민간 보험 수요가 꾸준히 존재하고 있다. 한미 FTA의 큰 문제 중 하나는 건강 보험의 보장성 증가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의료 민영화가 이루어지면 부자들은 건강 보험에서 빠져나가려고 할 것이고, 이는 건강 보험 제도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다. (2) 수혜자 무임승차도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소위 ‘스웨덴 병’이라 불렸던 것(“공짜 점심은 없다”)이 이런 현상을 가리키는데, 실업 수당과 함께 적극적 노동 시장 정책을 펴는 등의 방법이 필요하다. 선별 복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선별 복지를 위해 ‘자산 조사’를 벌이면 그 비용이 계속 증가할 수밖에 없고(자산을 숨기려는 국민과 그것을 밝혀내려는 정부 간의 경쟁) 결국은 비효율적 복지가 될 것이다. (3) 납세자의 무임승차도 해결되어야 한다. 탈세를 막는 강력한 정책이 수반되어야 한다. (4) 수혜자가 얻을 이익에 대한 확신도 필요하다. 그래야 세금 납부에 저항감을 갖지 않을 것이다. (5) 근거리 네트워크의 형성도 필요하다. 협력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조직이 있다면 그곳은 굉장히 능률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6) 복지의 ‘공급 측면’도 고려되어야 한다. 예컨대 한나라당에서 주장하는 ‘아동 수당’의 경우, 국공립 육아 시설이 부족한 한국의 실정 때문에 민간업자의 가격 상승을 부추겨 결국 그 효과가 유명무실해질 가능성이 크다. 설문조사 결과 스웨덴의 경우 복지의 우선순위는 다음과 같았다. 1위: 의료, 2위: 초중등 교육, 3위, 노인 복지, 4위: 아동 수당, 5위: 고용 정책. 여건이 다른 한국에서 같은 조사를 하면 당연히 순위는 다르게 나올 것이다. 복지와 함께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는 경제정책이 중요
복지는 당연히 재정 부담을 가져온다. 이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사전적 예방조치로 양극화가 해소되어야 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복지 재정 지출 확대를 위해 노력했지만, 내외부의 여러 요인 때문에 사회 양극화를 줄이지는 못했다. 때문에 국민들이 느끼는 효과가 적었던 것이다. 복지 이전에 양극화를 줄이거나 해소할 수 있는 거시경제 정책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미 FTA가 문제다. 한미 FTA의 반면교사는 1994년에 NAFTA를 체결한 캐나다인데, 이 나라의 양극화 현상은 NAFTA 체결 이후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지니계수는 우리나라보다 높은 상황이다.
공공성 확보를 위한 시민의 참여가 중요
‘공공성’이란 무엇일까. 이와 비슷한 말로는 ‘공공의 가치’(Public Value)가 있다. 이것은 ‘어떤 시대의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것을 정의하고, 그것을 보장하는 가치’를 말하는 것으로, ‘필수적인 것’의 범위에 대해서는 그 시대 사람들의 ‘합의’가 필요하다. 강의자는 공공성을 띈 재화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정의한다. (1) 필수재: 식량, 의료와 같은 것들로 롤즈(Rawls)의 기본재와 같은 성격을 갖는다. (2) 안보재: 국가 안보를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식량, 에너지 등이 있다. (3) 가치재: 사람들의 단견 때문에 덜 소비되는 것(미래를 준비하지 못하는 것)으로 예전에는 ‘교육’이 대표적인 것들이었다. ‘음의 가치재’(단견 때문에 지나치게 소비되는 것)도 있는데 술, 담배, 도박, 마약 등이며 이는 규제를 통해 소비를 줄여야 한다. (4) 시스템재: 사회 시스템을 구성하며, 무너지면 사회의 여러 부문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들로 금융과 언론 등이 있다. (5) 네트워크 산업: 초기 비용이 많이 들고, 지역에 따라 가격이 크게 달라질 수 있는 철도, 수도, 가스, 우편, 전기 등의 산업이다. (6) 자연: 우리가 공유하는 자연 환경도 공공성을 띈다. 공공성에 대한 합의와 그에 관련된 정책 시행은 결국 국민들이 모두 참여하는 민주주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며, 그 과정에는 반드시 ‘정의’(롤즈의 경우 그 핵심은 공정성<fairness>이다)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 공공성의 영역은 민주주의와 경제의 조화로 구성될 수 있으며 현재 가장 유력한 도구로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가 논의되고 있다(롤즈, 하버마스<Habermas> 등).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은 사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모두 알고 있었던 이야기이며, 공자 등의 성현들도 오래전부터 여러 번 이야기했던 부분이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방관해서는 안 된다. 조금 힘들고, 때론 불편하더라도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만이 민주주의, 더 나아가 공동체를 발전시킬 것이다. |
정태인의 착한 경제학 |
정태인의 착한 경제학 3강 : 사회경제와 협동조합 |
느티나무 |
2011.7.28 |
7월 5일부터 여름학기 강좌로 [정태인의 착한 경제학]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강좌는 인간의 본성과 인간 개개인이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연구(진화심리학)를 바탕으로 하는 행동경제학이라는 프리즘으로 경제학과 현실경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강좌소개 보기>> 3강의 정리후기는 자원활동가 박우용(웅진지식하우스 에디터) 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3강 사회경제와 협동조합
‘국가’와 ‘시장’이라는 두 영역을 넘어, 경제의 제3의 영역으로 ‘사회 경제’를 상정할 수 있다. 국가는 재분배를 통해 ‘평등’을 이루고자 한다. 시장은 경쟁을 통해 ‘효율성’을 이루고자 한다. 사회 경제는 ‘연대’를 통해 박애를 실천하고자 한다(각 영역의 역할은 프랑스 혁명의 세 가지 정신-자유, 평등, 박애-과도 조응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인류는 예로부터 ‘식량 공유 습관’을 갖고 있었다. 사냥꾼들이 짐승을 잡아 식사를 해결할 가능성과 그렇지 못하고 굶어야 할 가능성이 각각 2분의 1씩이라고 가정해 보자. 많은 사람들이 ‘식량을 공유할수록’ 계속 사냥에 실패해서 굶어 죽을 가능성은 낮아진다(1/2 * 1/ 2 * 1/2...). 이는 ‘보험’과 같은 원리이다. 예전 강의에서 언급했던 ‘공유지의 비극’이 실제 역사에서는 드물게 나타난다는 사실도 인류가 예로부터 ‘연대’에 익숙했음을 반증한다.
잠깐 한국의 2007년 <경제> 과목 수능 문제를 함께 살펴보겠다(이 문제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놀이방에서 지각하는 부모들에게 ‘지각 비’를 걷기 시작하면, 지각하는 부모는 오히려 늘어난다. 일종의 면죄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각 비의 액수를 대폭적으로 늘리면 지각하는 부모는 다시 줄어든다. 경제적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 문제의 상황은 실제로 이스라엘 유치원에서 벌어졌던 실험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실험은 원래 ‘구축(Crowding out)’ 효과를 잘 보여 주는 것으로 유명한데, 수능 문제에서는 완전히 왜곡되어 인용되었다. ‘구축 효과’란 제도의 변화가 그 제도의 영향을 받는 ‘인간 자체’를 바꾸는 것으로, 원래의 실험은 ‘지각 비’를 더 이상 걷지 않더라도 늘어났던 지각생이 줄지 않는다는 점에 방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수능 문제는 ‘물질적 인센티브’의 ‘양’이 근본 문제였던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어 ‘인간은 역시 이기적이고 물질에 약한 존재’라는 통념을 강화시켰다.
정태인 선생님은 학술진흥재단에서 BK21 제도를 도입하면서 이와 비슷한 맥락의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BK21은 교수들에게 (논문 게재 매체를 엄격히 한정하고, 그 수를 양화함으로써) 기존보다 꼼꼼하고 원칙있게 지원금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지원금 수령자의 평균 연령이 50대에서 1년 만에 40대로 바뀌는 등,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양화 정책’은 기초 학문, 특히 인문학 연구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고 한다. 이 바뀌 제도에 맞춰 교수들은 천편일률적인 ‘지원금 타내기’ 프로젝트만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연구의 다양성을 크게 훼손되었고, 시간이 충분히 필요한 연구들도 위축되었던 것이다.
사회 경제의 가장 오래된 조직은 ‘협동조합’이다. 협동조합에는 ‘소비 협동조합’과 ‘생산 협동조합’이 있다. 협동조합에 통용되는 7원칙이 있는데, 이것은 예전 강의에서 언급했던, 노박의 ‘협력을 가능케 하는’ 5가지 원칙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이것은 협동조합을 운영하며 경험으로 체득한 원칙들이 학문 이론과도 일맥상통했기 때문이다.
협동조합의 7원칙
1) 민주적 의사 결정: 1인 1표 (vs 기업의 1주(1원) 1표)
2) (국가와 시장으로부터의) 자율
3) 공동 소유와 공동 이용 (vs 사적 소유<배타적 이용>)
4) 개방성과 투명성
5) 협동조합끼리의 협동
6) 교육
7) 공동체에 대한 기여
많은 경제학자들은 협동조합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협동조합의 운영이 쉽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1980년대에는 ‘협동조합은 왜 희귀한가?’라는 주제의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많은 학자들은 ‘자본과 인재 동원’이 수월하지 않기 때문에 협동조합의 운영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협동조합은 왜 희귀한가 라는 주제에 대한 정태인 선생님의 논쟁 정리글 보기>>
그러나 성공한 협동조합은 분명히 존재한다. 스페인의 몬드라곤 협동조합(Mondragon Cooperative)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탈리아의 에밀리아 로마냐(Emilia Romagna)를 또 다른 성공한 협동조합의 예로 살펴보고자 한다.
에밀리아 로마냐는 이탈리아의 한 지역으로 1인당 GDP가 40,000$를 넘는 곳이다. 이곳의 인구는 460만 명 정도 되는데, 기업은 40만 개가 있다. 다양한 중소기업이 존재하는 곳으로 그 생산량의 50%는 수출한다. 이곳의 협동조합은 이 지역에 뿌리가 깊은 ‘공산당’ 계열로, 그들에게는 ‘협력’의 문화가 일종의 전통처럼 자리 잡고 있다. 고가 자동차를 만드는 페라리, 람보르기니와 오토바이로 유명한 두카티가 이 지역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외에도 세라믹, 기계, 농산물, 패션 상품 등이 생산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구분이 희박하며, ‘생산 기술(지식)’은 일종의 ‘공공재’로 공유된다. ‘평판’이 좋고, 신뢰를 쌓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생산 현장에서 활동할 수 있다. ‘기계 산업’이 탄탄하게 이 지역 산업의 토대가 되고 있으며, 기업과 협동조합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정태인 선생님의 에밀리아 로마냐에 대한 자세한 소개글 보기>>
언론의 에밀리아 로마냐에 대한 소개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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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인의 “바깥세상 보기” |
박노자의 <근대한국인..> 3강 후기 |
느티나무 |
2011.7.27 |
7월 8일부터 여름학기 강좌로[근대한국인의 "바깥세상 보기"]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강좌는 근대 한반도인들의 러시아, 중국, 유럽 소국관에 관한 의식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현재 남한인들의 자아의식에 각종 문제들을 제기해는 의도로 기획되었습니다. 강좌소개 보기>>
3강 <유럽소국관>의 정리 후기는 자원활동가 신다음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왜 유럽 소국관인가?
근대 한국인의 미국에 대한 생각이 긍정적 이지많은 않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 제일 먼저 서울의 공사관을 철수 한 나라가 미국이었다. 미국은 대체로 일본을 지지하는 쪽이었고, 한국의 식민통치에 개입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한국인들의 마음에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생겼다.
30년대 후반, 조선이 일본의 속국으로 대미항쟁을 준비하던 때부터는 미국에 대한 비판이 친일지식인에게 거의 의무화 되어 있었다. 주로 미국의 인디언 학살이나, 흑인 차별, 43년 44년 무차별 폭격, 이런 것들이 비판 대상이었다.

박노자 교수
한국전쟁 이후 미군정 때부터 미국에 대한 비판이 현실적으로 불가능 해졌지만 이미 구한말 때부터 미국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는 것을 위에서 알 수 있다. 지금도 미국에 대한 전적인 찬양은 극우주의자들 아니면 잘 없다.
그런데, 유럽에 대한 인식은 좀 다르다. 예컨대 프랑스의 경우, 사람들은 신식민주의 정책, 아랍이민자들에 대한 차별 보다는 똘레랑스(관용)를 먼저 떠올린다. 인권, 평등, 박애 등을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특히 덴마크나 노르웨이 같은 북부소국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긍정일방에 가깝다. 노르웨이를 생각하면 복지국가, 평등 재분배 이런 것들이 떠오르고, 핀란드는 교육제도 등을 떠올린다. 하지만 핀란드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징용제를 시행하며, 철저히 군사화 된 나라라는 것은 잘 모른다.
축약해서 말하자만 미국에 대한 비판은 어느 정도 균형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유럽에 대한 시각은 거의 찬양적인 태도로 일관된다. 이것의 시작은 무엇인가.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을 짝사랑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알아보기 위해서 유럽 소국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다.
우리에게 유럽의 나라들은 어떠 의미인가?
이광수는 조선민족개조론을 주장했는데, 이 민족개조의 궁극적 목표는 앵글로색슨족으로의 개조, 성실, 자유지향, 책임감, 협동성과 독립심. 이 모든 덕목을 완벽히 갖추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럽인들에 대한 찬양적 묘사는 극우파 이광수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중상층인 조선 지식인에게는 보편적 감정이었다. 박승철은 1920년대에 유학을 다녀 왔는데, 그가 본 영국신사는 완벽한 모델이었다.
이런 현상은 개화기 때부터 나타난다. 유럽영웅 전기는 조선에서 가장 잘 팔리는 책이었다. 특히 나폴레옹 전기는 최남선이 발행했던 잡지에 1호부터 연재되었다. 조선의 중산층에게는 유럽의 중산층이 모델이 되는 분위기였다.
유럽에 대한 조선인의 감정은 단연 압도감이었다. 박승철은 처음 파리에 방문 했을 때 “집이 아름답고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작은 차들이 소리를 안내고 달리고 있다. 화려하고 다채롭다”고 묘사했다.
박노자 교수
그렇다면 유럽에 대한 압도감, 모범으로서의 이미지 말고 다른 시각도 있었는가.
세기말적 유럽, 퇴폐적인 이미지의 시각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유럽문명에 대한 환상이 일부분 깨지고, 유럽민족의 타락에 대한 관심이 고조 되었다. 이런 시각을 꼭 부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식민지 조선 중산층은 유럽의 에로티즘이 섞인 센세이션적인 이야기를 은근히 즐기는 분위기였다.
나혜석은 파리에 다녀와서 쓴 기행문에서 ‘혼전동거’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기술하기도 했으나, ‘프랑스 여성에 대한 활동성, 전문성, 직업성 등을 본받아 조선의 여성들도 신여성으로 변화하자’고 전했다 한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도 따지고 보면 유럽의 대국에 관계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조선인의 유럽소국관
조선인들에게 영국이나 독일은 대국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유럽의 대국처럼은 될 수 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지만, 소국에 대해서는 대체로 우리도 닮아 갈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소국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다 못해 긍정일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개화기 1888년대부터 유럽 소국이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모델로 제시된 것을 들 수 있다. 이때부터 조선에는 유럽 소국에 대한 자세한 역사적 이야기가 소개 되고, 소국에 대한 테마가 조선담론으로 제시 되곤 했다.
하지만 개화기 때에는 유럽 소국에 대한 기본적인 것들이 소개 되는 수준이었고, 본격적으로는 식민지 시대에 독립을 찾은 폴란드와 아일랜드가 조선에 가장 근접한 모범으로 제시 되곤 했다.
북부 소국에 대한 인식
유럽소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불대칭성이 명확했다. 북유럽사람들은 비교적 쉽게 조선에 왕래 할 수 있었고, 조선에 대한 기록도 남길 수 있었던 반면, 조선인이 북유럽게 가는 것은 극히 어려웠다.
개화기 때에는 스웨덴 기자들이 조선에 방문하여 자세한 기사를 쓰기도 하고, 1890년대 노르웨이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활동 했다. 덴마크 기술자들은 조선에 기술을 전하기도 하였지만, 조선인이 가서 활동을 하거나, 기록을 남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 했다고 할 수 있다.
2-30년대에야 비로소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갈 수 있었는데, 조선인들이 느낀 것은 강력한 압도감이었다. 사회적 조직성 안정, 단결, 기술, 문명과 자연의 균형 등 모든 측면에서 소국이지만 문명적이라는 느낌을 강력하게 받았다.
덴마크의 농업, 농민조합 이런 것들은 조선인들, 특히 개혁파나 민족주의자들에게 강력하게 와 닿았다. 특히 독일어권의 압도적 영향 안에서도 민족 언어, 정신을 고수했다는 측면이 보수적인 기독교 우파들에게 어필했고 자신의 언어와 민족성을 계승하며 나라를 잘 보존한 측면에서 덴마크는 꿈의 나라, 문명의 최상국이라고 느꼈다.
박승철은 덴마크에 다녀와서, 그 당시 가난한 독일에 비해 덴마크는 “부유하다, 자동차도 많다, 안정적이다”라고 느꼈다고 한다. 특히 덴마크를 여행한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농업의 효율성, 생산성에 놀라고, 덴마크의 농업 기술, 국민조합, 소농경제에 도움이 되는 조합, 농업개량 등을 벤치마킹 하고자 한 것들이 많이 있다.
스웨덴은 조선유학생들이 잘 가는 나라였다. 최영숙은 스웨덴을 보고 인간이 만든 최고의 사회로 표현했고, 돌아와서 스웨덴에 대해 “낙원에 다녀왔다.”고 극찬 할 정도로 스웨덴을 좋아했다.
안정됨, 편리함과 같은 인식은 우리가 아직까지도 갖고 있는 유럽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들이다. 유럽 북부는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의 ‘모델’로서의 위치가 강하다. 해방 이후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의 의사들이 우리 나라에 많이 파견된 것긍정적인 인식이 더욱 강화된 계기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북부가 조선의 현실적 모델이었다면, 아일랜드 같은 경우는 영국제국에서 독립을 되찾았다는 의미에서 조선인들에게 영감을 주는 나라였다. 하지만 유럽의 소국들 중에도 에스토니아처럼 가난하고 불안정한 사회들은 조선이 벤치마킹 할 만한 나라가 아니었다고 하고, 부유하지 않은 나라들은 배울 것이 없는 나라라고 치부하기도 하였다.

박노자 교수
마무리하자면, 대체로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나라들에 대한 긍정일변은 안정성, 조직성, 문명과 자연의 공생적 관계 등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평형적으로 이런 유럽 소국과 우리를 비교하기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스웨덴 같은 경우에는 강력한 농업이 있고, 노르웨이나 덴마크는 농업사회였다고 해도 영국 독일같은 대국과 쉽게 교류할 수 있는 지형적 위치가 있다.
유럽 소국은 이를 이용하여 물질적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20년대만 하더라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은 19세기 말부터 발전해온 강력한 노동운동의 기반이 다져져 있다. 민중운동이나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탄압대상이었던 조선과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였다.
또한 자본과 노동의 타협이 동등한 세력 대 세력으로서 위치를 갖고 있다. 이 바탕에는 강력한 노동 운동이 받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런 전제 위에 복지국가가 유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회를 유지해주는 안정망 등의 배경이 조선과 상당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이런 차이는 간과되고, 보이는 이미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
근대 한국인의 “바깥세상 보기” |
박노자의 <근대한국인..> 2강 후기 |
느티나무 |
2011.7.20 |
7월 8일부터 여름학기 강좌로[근대한국인의 "바깥세상 보기"]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강좌는 근대 한반도인들의 러시아, 중국, 유럽 소국관에 관한 의식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현재 남한인들의 자아의식에 각종 문제들을 제기해는 의도로 기획되었습니다. 강좌소개 보기>>
2강 <중국관>의 정리 후기는 자원활동가 신다음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박노자 교수
- 들어가며
18세기 말까지 중국은 조선인에게 하나의 우주라고 할 수 있었다. 조선의 자아는 중국을 생각하지 않고는 상상 할 수 없고, 중국과 조선은 각각 다른 나라가 아닌 국민적 형제라고 하여도 비약이지 않았다.
조선 지식인에게 중국은 소우주로써 배움의 터전이며, 한편으로는 경계해야할 대상이기도 하였다. 이에 중국에 대한 정책은 조선의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런 중국에 대한 견해는 19세기 후반 더욱 더 재미있게 변한다.
중국은 조선보다 서양기술배우기 운동을 먼저 시작했기 때문에 조선에게 중국은 외부세계와 연결 될 수 있는 통로였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야는 책이었다. 중국에서 들여온 지도들은 김옥균 같은 개화파 들에게는 지리교과서로 사용 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고, 한국 초기 신문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는 상해에서 발행됐던 상해신보에 쓰인 글들을 토대로 기사를 게재했다.
중국이 조선 개화의 관문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중국은 조선과 외부세계의 연결을 어느 정도 선까지만 허가하여 주었고, 조선이 지나치게 외부와 연결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는 중국이 조선을 자신의 영향권 안에 두기 위함으로 보이게 되면서, 김옥균과 같은 급진개화파로 하여금 중국을 견제하게 만드는 구실이 된다.
고종의 명령으로 상해에 가게 된 윤치호의 눈에 비친 중국은 더럽고 반근대적인 나라로 보였다. 윤치호는 중국을 조선근대인들이 가장 멀리해야 하는 나라라고 이야기 하였다고 한다.
19세기 말 중국은 조선인에게 근대화의 산실이라는 생각부터 부정적 타자로서의 시각까지 다양하게 인식되었다. 각각의 인식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자.

1. 전근대로서의 중국
중국이 더럽고 비위생적인 나라라는 인식이다. 이런 인식이
잘 나타난 것은 바로 독립신문이다. 독립신문은 중국에 대
한 우호적 인식 깨뜨리기를 특기로 삼은 신문이었다고 할
정도다.
독립신문은 서양에는 우호적이었지만 중국에는 아주 적대
적이었다. 중국이 조선을 유교화, 보수화 시키고 발전을 가
로 막는다는 논조의 사설을 싣기도 하고, 특히 화교들에 대
해서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심지어는 ‘거머리같은 것들’이
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1882년 미국이 중
국노동자들의 이민을 금지시킨 법이 알려지자 조선 역시 화
교들을 강력 배척하자고 피력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중국을 전근대적이라고 보는 시각은 특히 식민지 시
대에 일본에서 공부하고 중산층 으로 안정적 생활을 영위한
조선인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조선의 여류작가 백
신애는 청도, 상해여행을 할 때에 본 중국인을 야만적이고
더럽다고 묘사했다.
2. 부정적 타자
개별적 중국인들은 어떻게 인식 되었는지에 대해 알아보자. 간도 같은 경우 소작인의 70% 정도가 조선인들이었다. 중국인 지주 밑에서 조선인 소작인들은 많은 착취와 억압을 당했다.
최서해는 가난한 간도 이주민의 아들이었다. ‘홍명(최서해 작)’에서 악질 중국인 지주 은씨는 소작농을 못살게 구고 심지어 아내를 빼앗는데, 결국 폭압을 견디지 못한 소작농은 지주를 살인하고 산으로 도망가는 것으로 끝난다. 주로 중국인은 되놈으로 불리며 비양심적이고 더럽고 음흉한 모습으로 많이 나타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감자’ 에도 이런 중국인 지주가 나온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최서해 같이 공산주의 계급갈등을 배우지 못한 작가들은 주로 중국인 지주와 조선인 소작농의 갈등을 종족간의 갈등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이는 오랫동안 문학계의 주도적인 인식으로 자리잡아 중국을 매우 부정적인 타자로 인식시킨 계기가 되었다.
중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적 시각은 아직도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3. 근대적 희망
청나라 말기 청일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뼈아픈 교훈으로 개혁을 단행했다. 이런 중국의 개혁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상당히 관심을 갖고 주목했다. 중국이 입헌군주국이 된다면, “특유의 완고함을 벗고 강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었다.
혁명이 인민의 애국심을 배양하고 강력한 나라를 만든다는 인식은 구한말 지식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이였다. 그래서 1911년 공화 혁명이 일어났을 때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를 대단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후에 중국 공산당 활동이 본격화되는 20년대 같은 경우에는 조선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중국 공산당과 연대 할 수 있겠다는 인식이 강해졌고, 이 와중에 간도에 있는 사람들(중국인 지주와 조선인 소작농의 갈등)의 문제도 계급연대 과정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의식이 강했다.
독립운동가들과 조선의 지식인들은 대체로 중국을 희망과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중국혁명으로 인한 폭력과 억압에서도 밝은 미래를 생각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4. 다민족, 다문화, 나아가 서양을 접촉 할 수 있는 곳
상해는 국제적인 도시로서, 조선인에게는 작은 세계, 우주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런 도시에는 서양인들도 많이 살고 있어서 상해는 국제 도시, 작은 우주, 혁명 아지트라는 이미지가 강했고, 수많은 문화 예능계 조선인에게는 매력적인 도시의 이미지를 가졌다. 여기에 조선에서 철도를 타고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하얼빈도 위와 같은 이미지가 적용되었다.

박노자 교수
- 마치며
종합해보면 중국에 대한 인식은 근대에 접어 들어 극단적으로 양분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조선에게 세계이자 미래였다. 상해나 하얼빈 같은 도시는 동경의 대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더럽고 비위생적인 문명의 이미지도 같이 공존했다.
오늘날 우리는 위에 살펴본 측면 중, 부정적 인식을 많이 계승 했다. 70년대 리영희 선생은 중국의 정치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후 중국에서 사회주의가 좌절되고 자본주의로 회귀하는 양상을 통해 중국에서 미래를 본다는 시선은 사라졌다고 생각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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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의 착한 경제학 |
정태인의 착한 경제학 2강 : 사회적 딜레마 |
느티나무 |
2011.7.15 |
7월 5일부터 여름학기 강좌로 [정태인의 착한 경제학]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강좌는 인간의 본성과 인간 개개인이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연구(진화심리학)를 바탕으로 하는 행동경제학이라는 프리즘으로 경제학과 현실경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강좌소개 보기>> 2강의 정리후기는 자원활동가 박우용(웅진지식하우스 에디터) 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2강 사회적 딜레미와 그 해법 : 인간은 언제 협력하는가
이번 강의의 핵심 질문은 “인간은 언제 협력하는가”이다. ‘이기적 인간’만 존재하고 있었다면 우리 사회는 벌써 붕괴되어 버렸을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 딜레마’의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시장 실패’는 ‘사회적 딜레마’의 자본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딜레마
1) 공유지의 비극 예를 들어 여러 농민들이 함께 양을 키우는 공유지가 있다고 가정하자. 각각의 농민이 자신의 이익을 늘리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양을 키우면, 결국 공유지는 황폐해지고 말 것이다. 이는 ‘지구 온난화’ 등의 환경 문제로 현대 사회에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1>‘사적 소유’(각자에게 공유지를 적당히 분할한다), 2>‘국가의 통제’ (예를 들어 공유지 사용 시간을 적절히 배분하는 등)가 있을 수 있으나, 전부 문제점을 갖고 있다. ‘사적 소유’의 경우에는, 예를 들어 물이나 공기와 같은 ‘분할할 수 없는 자원’의 문제가 있을 수 있고, ‘국가의 통제’의 경우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는 다국적 문제의 해결(‘지구 온난화’ 등)에는 적용될 수 없는 방법이다.
인류는 그동안 ‘공유지의 비극’을 어떻게 해결해 왔는지 연구한 사람이 오스트롬(Ostrom, 여성으로는 최초로 2009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이다. 그녀는 전 세계 문헌을 수집, 분류하여 공유지의 문제와 관련된 ‘일반 규칙’을 정리했는데, 이를 요약하면 ‘공동체의 자율적 규제’로 말할 수 있다. 약속을 어기는 사람에게 점점 더 강한 처벌을 가하는 것도 규칙의 일부이다.
이 밖에도 2) 공공재 문제, 3) 죄수의 딜레마, 4) 집단 행동의 논리(‘거리의 고장 난 공중전화는 아무도 고치지 않는다’ - 이와 비슷했던 상황이 참여연대가 벌였던 ’소액 주주 운동‘이다)가 사회적 딜레마와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들이다.
게임 이론을 통해 본 사회적 딜레마 1) 죄수의 딜레마 (위피키디아 설명보기>> )
| 상대방 | 나 | | 협력 | 배신 | 협력 | (3,3) | (1,4) | 배신 | (4,1) | (2.2) |
위의 표를 보자. 가로 안의 숫자는 각각 나와 상대방이 얻는 이득을 가리킨다. ‘죄수의 딜레마’ 상황의 경우, 상대방이 어떤 선택을 하든지 나는 ‘배신’을 택하는 편이 유리하다. 상대방이 협력할 것으로 예상될 때는 ‘탐욕’ 때문에, 상대방이 배신할 것으로 예상될 때는 ‘공포’ 때문에, 나는 결국 ‘배신’을 택하게 된다. 현재 한국의 ‘사교육’ 문제가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상대방이 사교육이라는 배신을 할 것이라는 공포 때문에 누구나 ‘사교육을 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미국의 FTA 체결 전략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은 자국과 FTA를 맺게 여러 국가들을 경쟁시켰다. 결국 ‘다른 국가는 다 맺는 FTA를 우리만 안 맺으면 손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2) 사슴 사냥 게임 (위키피디아 설명보기>> )
| 상대방 | 나 | | 협력 | 배신 | 협력 | (4,4) | (1,3) | 배신 | (3,1) | (2.2) |
이는 ‘함께 사슴을 잡기로 약속하고 기다리는데, 내 앞에 토끼가 지나가는 상황’에 비견할 수 있는 상황이다. 나는 약속을 지켜 사슴을 잡던지, 아니면 당장 눈앞에 있는 토끼를 잡던지 선택해야 한다. ‘죄수의 딜레마’와 다른 점은 상대방이 ‘협력’을 택한다면, 나도 '배신'보다는 ‘협력’을 택하는 편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점이다. 이런 경우 나와 상대방이 함께 ‘협력’을 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3) 치킨 게임 (위키피디아 설명보기>> )
| 상대방 | 나 | | 협력 | 배신 | 협력 | (3,3) | (2,4) | 배신 | (4,2) | (1.1) |
치킨 게임은 ‘서로 마주 보고 달려오던 차 중, 끝까지 방향을 틀지 않는 차가 승리하는 게임’에 비견할 수 있다. 치킨 게임에서 이기는 법은 상대방에게 나를 ‘미친 놈’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핵무기 경쟁과 같은 상황이 치킨 게임이라 하겠다. 남북 관계의 경우, ‘햇볕 정책’은 사슴 사냥 게임의 상황을 만들었고, MB의 ‘상호주의 원칙’은 반복적인 죄수의 딜레마 상황을 만들었는데, 후자의 상황에서는 TFT(Tit for tat) 전략을 취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 이는 쉽게 말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응하는 전략을 말한다. 이과 관련한 실험에서는 TFT 전략대로 바로 직전에 상대방이 택한 선택지를 따라 가는 것이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했다. 그런데 ‘반복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는 맹점이 있다. ‘한 번 배신이 시작되면 계속 배신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는 여유 있는 편이 한 번 협력을 택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 북한의 경우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넘어서 ‘치킨 게임’ 전략을 택하고 있다. 일련의 경색국면이 그것이다. 결국 이렇게 대립적인 남북 관계는 ‘바보와 미친 놈의 싸움’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인간 협력의 다섯가지 규칙 사회적 딜레마의 해결책은 ‘이타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상황을 ‘사슴 사냥 게임’으로 만드는 것이 희망적이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개체의 희생’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예를 들어, 여왕벌을 지키기 위한 일벌의 희생이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물음이었다. 생물학자 노박(Nowak)은 <Five Rules for the Evolution of Cooperation>라는 논문에서 협력을 가능케 하는 5가지 법칙을 제시했다. 1) 혈연 선택 협력의 정도는 '혈연관계', ‘근친성’에 따라 좌우된다는 법칙이다. ≪이기적 유전자≫는 이 법칙의 일반론이라고 볼 수 있다. 2) 직접 상호성 A와 B가 상호적으로 (이득을 주고받으며) 협력한다는 법칙이다. TFT 전략을 바탕으로 진행되는 게임에서 한 번 협력을 취하게 된 양자가 계속 협력을 택하게 되는 상황이 바로 이와 같은 경우이다. 3) 간접 상호성 A가 B에게, B가 C에게, C가 D에게, 이와 같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쇄되는 협력 관계를 말한다. 이 경우 ‘평판(reputation)'이 주요한 협력 동기가 될 것이다. 4) 네트워크 상호성, 5) 집단 선택 세부적인 내용에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협력자들의 그룹이 배신자들의 그룹을 이긴다’는 명제를 담고 있다. 개인 간에는 ‘배신자’가 승리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보다 상위 층위인 ‘집단’ 수준에서는 협력자들의 그룹이 배신자들의 그룹을 이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 ‘사회 규범’이 중요한 역할을 하며, 기제의 핵심은 ‘신뢰’이다. 한국의 경우, 세계 가치 조사(World Value Survey)에서 청소년들의 ‘신뢰’ 수준이 세계 최하위를 기록하고 말았다. 이런 세대가 성장할 경우, 소송이 남발되는 비효율적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며, 청소년들이 이렇게 신뢰를 잃은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경쟁 교육’이다. |
근대 한국인의 “바깥세상 보기” |
박노자의 <근대한국인..> 1강 후기 |
느티나무 |
2011.7.11 |
7월 8일부터 여름학기 강좌로[근대한국인의 "바깥세상 보기"]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강좌는 근대 한반도인들의 러시아, 중국, 유럽 소국관에 관한 의식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현재 남한인들의 자아의식에 각종 문제들을 제기해는 의도로 기획되었습니다. 강좌소개 보기>> 1강 <러시아관>의 정리 후기는 자원활동가 신다음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근대한국인들이 갖은 '튀는' 인식, 러시아
러시아는 근대 한국인의 세계관에서 독특한 위치를 갖고 있다. 근대 한국인의 대외 인식은 철저하게 위계적이었다. 19세기 말 이전에는 중화가 중심이었지만 불과 몇 년 새에 그 중심이 미국이나 유럽으로 바뀐다. 이는 근대 한국인들 세계 인식에서 잘 나타난다.
조선시대 한학자 윤치호의 일기에는 흑인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는데, 당시에 미국에서 흑인들의 위치는 가난하고 백인에게 대들 수 없는 하찮은 존재 임에도 불구하고 윤치호는 그들이 ‘영어를 쓰고 미국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철저히 중화 중심의 한학교육을 받은 윤치호조차 불과 몇 년 사이에 서열의 중심을 미국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또한 민경환은 영국에 가는 길에 거쳐야 했던 싱가포르에서 말레이 사람들을 보고 “옷도 안 입고 돌아다니는 미개인들. 심지어 반인반수다” 라고 표현 했지만, 갓 태어난 백인 아기를 보고는 “참 영특하게 보이고 광채가 난다” 라고 기록했다.
중화 중심에서 미국중심으로 바뀐 세계질서에 대한 인식은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렇듯 철저한 위계질서의 세계관을 가진 근대 한국인에게 러시아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근대 한국인들에게 러시아란? 근대 한국인들이 러시아를 인식하는 시각에서 는 3가지가 존재한다.
① 자연의 나라. 정글, 밀림이 살아 있는 나라. 이광수의 작품을 보면, 시베리아나 바이칼 호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러시아에 대한 인식은 자연이 살아 있는 나라. 울창한 정글이나 숲이 있는 곳으로 묘사된다. 조선시대 여류작가 백신애의 작품에서도 러시아는 방랑의 나라, 원시림의 공간으로 나타난다.
②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나라 이태준, 백남훈의 해방직후 소련 기록을 보면, 러시아는 문명의 최전선이라고 정의했다. 이 시각은 비단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일제 시대의 지식인들의 상당수도 러시아를 문명의 최전선으로 생각했다. 당시의 시사잡지인 삼천리 잡지에서는 30년대 초반 기획특집으로 <우리는 아메리카의 문명을 취할까, 러시아의 문명을 취할까>라는 주제로 기사를 썼다. 이는 러시아의 문명이 아메리카와도 견줄 수 있는 고도로 발달된 문명이라고 생각하는 정서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 러시아는 일면 미국보다 나은 문명이라는 인식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③ 한국인들과 묘한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나라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 백계 망명인들이 가장 많이 살던 곳이었다. 하얼빈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많이 가던 여행지 였는데, 러시아 백계노인들이 나라 잃은 슬픔, 애수 등을 느끼며 살아가는 모습은 당시 일제시대를 겪는 한국인들의 정서와 비슷한 동질감을 가졌다고 한다. 이는 한국인으로 하여금 같은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것이어서 러시아는 묘하게 한국인들과 닮은 나라로 인식 되곤 했다.
이 세 가지 시각으로 보아, 철저하게 위계 질서적인 한국인들의 세계관에서 러시아의 위치는 상당히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 문명인식은 어떠했는가? 이제까지 러시아가 한국인들에게 딱 한가지로 분류 될 수 없는 위치의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러시아 근대 문명의 핵심을 알아보자.
① 열강 한성순보에서는 러시아를 조선을 잡아 먹을 수 있는 무서운 나라라고 표현되었다. 유길준은 러시아 군대에 대한 과장된 통계치를 들어 막강한 군대를 가진 나라라고 인식,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1937년 이후로, 러시아는 열강이긴 해도 엄밀히 말하면 적국이었다. 우파 지식인은 소련을 가상의 적으로 설정 하고, 러시아 또는 소련을 악한 열강으로 파악하였다. 여기에 러시아 백계노인들까지 가담해 대일본제국 반공당체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소련은 더욱 악한 열강으로 인식 되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전향을 할 경우엔 적색 제국주의, 소련에 대하여 강한 반감을 드러내야 했다고 한다.
② 후진국 러일전쟁때 친일파들은 러시아를 후진국이라고 인식 하였는데, 왜냐하면 그때까지 러시아는 절대 왕정 국가였다. 공화제나 입헌군주제가 없는 나라는 후진국이라고 하여 무매한 나라로 인식이 되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후진성을 지닌 러시아를 바꾸기 위해서 허무당이 활약을 하였고, 이에 일본의 진보파들은 러시아 혁명에 굉장한 관심을 가졌다.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한국인들도 러시아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여성의 권리가 향상된 측면이나, 토지제도 관련 평가, 민족자치 법률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특히 공산주의 교육학에 대해서는 아주 긍정적이어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는 이것을 집중 취재하기도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소련에 대한 나름의 동경은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30년대에 우파 지식인이나 자유지식인들 일부는 소련의 선진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여전히 후진국으로 인지했다. 이는 나희석이 모스크바를 여행하고 쓴 글에서 모스크바의 사람들은 너저분한 누더기 옷을 입고 다니며 침울하고 우울한 회색의 도시라고 묘사한 것에서 확인된다.
③ 문학과 예술의 나라 최남선은 톨스토이가 죽자 잡지에 ‘토옹의 소고’ 라는 글을 쓰고 톨스토이를 자세히 소개했다. 이광수도 러시아 문학을 좋아했고 최승희 역시, 훗날 회고록에서 러시아에 가서 무용을 공부 하고 싶었다는 심정을 밝혔다. 이는 근대 한국인들이 러시아의 문학과 예술을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까지 살펴 본바 러시아는 근대 한국인에게 ‘다양한 관점과 인식을 가져다 준 독특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근대 한국인들에게 러시아의 이미지는 계속적으로 변해왔다. 한국을 침략할 수 있는 열강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후진국, 나라 잃은 백계 노인들에게는 같은 정서를 공유할 수 있는 민족이기도 했다. 또한 높은 수준의 문학과 예술의 나라라는 인식도 있다.
러시아는 근대 한국인들의 위계적 세계관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이며, 위계 질서적인 한국인의 세계관에 균열을 준 나라라는 점에서 흥미롭게 평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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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의 착한 경제학 |
정태인의 착한 경제학 1강 : 시장은 불패의 신화인가 |
느티나무 |
2011.7.8 |
7월 5일부터 여름학기 강좌로 [정태인의 착한 경제학]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강좌는 인간의 본성과 인간 개개인이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연구(진화심리학)를 바탕으로 하는 행동경제학이라는 프리즘으로 경제학과 현실경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강좌소개 보기>> 1강의 정리후기는 자원활동가 박우용(웅진지식하우스 에디터) 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1강 시장은 불패의 신화인가 :시장경제의 원리와 한계, 시장의 효율성과 시장실패 경제학은 인간과 시장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예를 들어, 완전한 인간과 완전한 시장을 상정하는 사무엘슨(Samuelson)과 애로(Arrow)류의 경제학이 있고, 인간은 완전하지만 시장은 불완전한 것으로 보는 제도 경제학이나 정보 경제학이 있으며, 인간도 시장도 모두 불완전한 것으로 보는 ‘행동 경제학’이 있다. 우리가 <착한 경제학>에서 궁극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분야는 바로 ‘행동 경제학’이다(이에 대한 훌륭한 참고 도서로 최정규의 ≪이타적 인간의 출현(뿌리와 이파리)≫을 추천한다).
인간은 과연 이기적인 동물인가, 만약 그렇다면 언제, 왜 서로 협력할까, 라는 문제는 경제학에서도 중요한 문제이다. 다윈주의, 심리학, 실험 경제학 등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탐구는 계속 있어 왔다.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는 언뜻 보면 간단한 문제인 것으로 보이지만, 위와 같은 의문들과 맞물리는 굉장히 심도 있는 문제이다. 경제학에서 가장 유명한 그래프는 바로 ‘수요-공급 그래프’이다. 수요량(D)과 공급량(S)의 접점인 ‘균형 가격’은 이윤 극대화와 효용 극대화가 만나는 최적의 지점으로 상정된다. 그리고 이렇게 효율적인 지점을 찾아 가는 기제를 흔히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부른다. 허나 우리에게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유명한 경제학자 스티글리츠(Stiglitz)는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다(없다)’라는 말로 이런 기제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사실 애덤 스미스의 고전 경제학은 ‘왕권’이 아닌 ‘다수의 이기심’을 경제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본,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생각으로, 그 밑바탕에는 계몽주의가 깔려 있다. 허나, ‘보이지 않는 손’을 상정하는 고전 경제학의 허구성은 여러 가지 이론으로 비판받아 왔다.
* 옆의 <시장으로 가는 길>은 정태인 선생님이 스티글리츠의 책 중 번역이 가장 훌륭한 책으로 소개해주신 책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시장 실패 이론’이다. 그 내용은 1) 비경합성과 비배제성을 중심으로 하는 공공재(Public goods)의 존재와, 2) 과소 생산되는 ‘외부 선’과 과잉 생산 되는 ‘외부 악’으로 나뉘는 ‘외부성(Externality)’ 효과, 3) 경쟁 시장의 질서가 왜곡되는 독점 현상과 4-1) 필요성이 아니라 ‘가격’에 의해 재화가 배분되는 시장에서 가격의 다양화가 소비자 몫을 기업 몫으로 만드는 현상, 4-2) 가격의 유동성을 허락하지 않는 상품의 존재, 5) 정보의 비대칭 현상(정보 경제학의 연구 분야이다) 등으로 뒷받침될 수 있다. 이를 하나씩 살펴보자. 1) 공공재의 특징은 비경합성과 비배제성이다. 비경합성 때문에 ‘무임 승차’가 발생하며, 비배제성 때문에 ‘공공재를 위해 돈을 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차별되지 않는다. 강사가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공공재 중 하나는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는 양의 외부성을 발생시키지만, 이기적 인간은 굳이 추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방송도 대표적인 공공재이다. 그런데 공공재를 공공재 아닌 것으로 만드는 대표적인 방법이 ‘비배제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료 CATV에 가입한 사람만 볼 수 있는 방송이라던지, 도로 진입을 선택적으로 차단하는 톨게이트의 존재, 수도 꼭지에 달아 놓는 (그리고 공급자가 언제든 수도 공급을 차단할 수 있는) 계량기 등이 이런 경우이다. 지금 종편의 허가 등 방송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2) 외부성은 ‘시장을 거치지 않는’ 특징을 가지며, 외부 선과 외부 악으로 나뉜다. 외부 선의 대표적인 예는 ‘지식(예를 들어, 수학 공식 등)’이다. 이는 한 번 공개되면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것으로, ‘과소 생산’될 수밖에 없다. 외부 악의 대표적인 예는 ‘공해’이다. 이는 시장에서 ‘과잉 생산’되기 마련이다. 이런 현상을 바로잡기 위한 두 가지 대표적인 해법이 있다. 그 중 하나가 피구 해법이다. 이는 보조금과 벌금 등을 통해 외부성을 바로잡는 것이다. 또 하나는 코즈 정리이다. 이는 시장 구성원 간의 ‘차액’ 거래를 통해 이 현상을 바로잡는 것이다. 이는 외부성이 발생해도 국가의 개입이 불필요하다는 근거로 사용되며, 시카고 학파 등이 그들 이론의 주요 토대로 삼았다. 코즈 정리에 따르면 예를 들어 ‘공해’는, ‘배출권 거래’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피구 해법에 따르면 ‘탄소세’를 부과해여 할 것이다). 3) 독점은 대표적인 시장 실패 사례로, 사실 우리가 사용하는 TV, 자동차 등은 모두 대표적인 독점 상품이라 할 수 있다. 독점에는 ‘자연 독점’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생산량이 크면 클수록 생산 비용이 떨어지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분야의 경우 무조건 대기업이 참여하는 것이 이득이다. 예를 들면 ‘네트워크 산업’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전기, 철도, 가스, 우편 등의 산업은 초기 비용은 많이 들지만,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의 경우 이득이 나기 쉽지 않은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런 산업의 경우 보통 공기업이 공공 서비스로 운영하고 있으며 ‘교차 보조’를 통해 인구 밀도가 높고 낮은 곳의 격차를 바로잡는다. 현재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공기업 매각 같은 경우, 사실은 부자 감세로 생긴 적자를 메우기 위한 작업으로, 예정대로 진행될 경우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한미 FTA까지 발효되면 되돌리기 어려운 재앙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공공 서비스의 위와 같은 특징 때문이다. 4) 강사가 가장 큰 ‘시장 실패’로 보는 것은 ‘가격’이 지배적인 수치가 되면서 발생하는 현상들이다. I) 시장은 ‘필요성’에 의해 재화를 배분하지 않고 ‘가격’에 의해 재화를 배분한다. 때문에 능력이 없더라도 재화가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재화가 제대로 배분되지 않는다. 제다가 가격을 다양하게 정함으로써 소비자의 몫이 기업의 몫으로 이전하기도 한다. II) 게다가 어떤 재화는 가격이 오르내리는 것이 ‘치명적’일 수 있다. ‘시행착오’를 허용하지 않는 필수적인 재화(식량, 약)의 경우, 가격의 변동성이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해를 가할 수 있다. 5) 정보 경제학은 시장에서의 ‘정보’ 문제를 고전 경제학이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애컬로프(Akerlof)의 ‘레몬 시장’ 이론이 대표적이다. 이는 재화의 판매자와 구매자 간의 정보 비대칭 때문에 발생하는 상황을 잘 보여 준다. 게다가 ‘이기적인 인간’을 상정하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은 ‘최후 통첩 게임’과 ‘독재자 게임’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고전 경제학은 ‘타인 배려’와 ‘손해를 보더라도 불공정하다고 판단될 때는 응징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앞서 언급했던 스티글리츠는 시장은 ‘유사 외부성’에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예로 ‘금융 위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고전 경제학도 ‘국가 사회주의’도 ‘정보’의 복잡한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
중동 북아프리카 민주화 혁명의 오늘과 내일 |
중동 북아프리카 혁명과 한국사회 |
느티나무 |
2011.5.28 |
[강좌후기] 중동 북아프리카 혁명과 한국사회
중동 북아프리카 민주화 혁명의 오늘과 내일
이번 강의는 ‘중동 북아프리카 민주화 혁명의 오늘과 내일’의 네 번째 강좌입니다. 중동 민주화 혁명을 공부하는 마지막 시간으로 ‘중동 북아프리카 혁명과 한국사회’라는 소주제로 중동 혁명과 한국사회를 연관지어 보는 시간입니다. 한국사회는 중동 민주화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중동은 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중점적으로 알아보고자 합니다. 더불어 이 시간은 중동지역을 경제적 이익의 관점으로만 보는 우리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첫번째 강의 중동에서 한국의 위상과 파병에 대해서: 구정은 기자
중동 교민과 교역 규모 먼저 중동의 한국교민과 교역규모를 살펴보겠다. 외교통상부 자료를 보면 전년 대비 인구수의 증감률이 0%라고 나와 있다. 2010, 2011년까지 인구변화가 없는 게 이상하지만 경향성만은 뚜렷이 보여준다. 주목할 점은 교민들이 석유 나오는 국가에만 많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보면 사우디에 교민 수가 많아야 하는데 외국인의 출입을 제한하기 때문에 14%정도이고, 중동 지역 전체 교민 수가 합쳐서 1만 5천 명에 불과하다.
교역규모를 보면 2010년에 1000억 달러이다. 이것은 EU나 아세안보다 큰 것으로 우리의 석유의존도가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석유를 수입하는 곳은 중동 밖에 없다. 박정희 시절부터 유화산업을 키워왔고, 중동산 석유를 가져와서 수출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래서 석유를 많이 수입해서 많이 쓰고 다시 수출하는 구조이다. 우리의 중동 의존도는 높지만 중동에 대해 가르치는 것도 없고 접하려는 노력도 없다. 단지 건설업체가 들어가 있고 석유를 사는 것 외에 문화적 정치적 교류는 거의 없는 상황이다.
중동에서 한국은 ‘돈 버는 데 중점을 둔 나라’ 신문사설에서는 한국기업이 돈을 잘 벌기 위해서는 정부가 중동과의 관계를 잘 만들어 가야한다는 내용이 많다. 이는 결국 중동과의 관계가 돈으로 귀결된다는 의미이다. 이런 한국의 태도에 대해서 외국에서는 ‘한국 건설 시장의 이해관계 때문에 중동 현지 민중들의 민주화 시위에 한국이 입을 다물고 있다’고 비판한다. 한국은 대기업 건설회사가 돈을 더 많이 벌고 덜 버는 것에만 전전긍긍하는 것이 현실이다. 민주화 시위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원전수주하면 그게 큰 이슈가 되는 것이 그 예이다. 그래서 국제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평가는 냉정하다.
그들은 한국의 경제규모가 12위라는 것을 모른다. 왜냐하면 국제사회에서 하는 역할이 없고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이 대접을 받기 위해서 책임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 중동지역에서 ‘한국은 예전에는 민주화 과정을 겪었지만 이제는 돈만 버는 나라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아프간 파병에서 한국군의 역할은 미미 이상현 박사가 쓴 ‘아프가니스탄(이하 아프간) 파병의 당위성과 과제’라는 글을 살펴보겠다. 한국군의 아프간에 대한 기여는 미미하다. 첫째, 아프간에서 한국군은 미군부대 옆에 있는 정체모를 부대였다. 파병부터 등 떠밀린 모양새였다. 우리나라에서 보수파들은 아프간 파병의 목적이 미국과의 동맹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진정 원했던 것은 전투병 파병이었다. 미국은 동맹국이라면 전투에서 함께 싸워주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미국의 입장에서 인도적 지원은 동맹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프간에서 한국군은 ‘의료지원부대’라는 정체가 모호한 부대였다.
둘째, 지원금액도 너무 적었다. 특히 김선일씨 피랍사태 때, 한국이 사건을 빨리 파악못한 이유가 돈 때문이었다. 한국 사람이 가서 현지 사람들을 도와 주면서 사람을 사귀었다면 그런 사태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부대가 이라크 아르빌에 가서도 한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현지 상황이 위험해서 막사 밖을 나가지 못 한 날이 이어졌다. 한국외국어대 아랍어과 학생들이 통역으로 차출돼서 이라크에 갔는데 실제로 이라크의 아르빌은 쿠르드지역이어서 아랍어를 쓰지 않는다. 이것이 파병의 현실이다. 그 나라에 대한 정보나 지식이 전혀 없다.
이에 반해 동티모르는 성공적인 파병이라고 평가받고 있어 우리의 위상이 올라갔다. 동티모르 파병은 경제적 이득이 아니라 가장 가난한 나라가 독립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한국군이 가서 재건을 도와준 사례이다. 그 후에 동티모르 대통령이 방한하고 고마워했다.
앞으로의 파병은 앞으로 한국군의 파병은 이라크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이라크 전쟁이 났을 때 국제사회가 크게 반대해서 여론이 다 그 쪽으로 쏠려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국익을 위해 파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랍권 방송에서는 전쟁에 찬성한 부시, 고이즈미, 노무현을 연속적으로 다루었다. 미국과 영국은 전쟁을 일으킨 나라였고 가장 처음 파병하겠다고 나선 나라가 일본과 한국이었던 셈이다. 그 때 나와 일본 기자는 창피해서 사람들한테 고개를 못 들었다. 이런 경우 국적이 도덕성과 연결된다. 그 나라 사람들은 ‘한국은 미국의 속국이니까’ 또는 ‘한국은 석유가 필요한가보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컸다. 우리는 파병이 어떻게 진행돼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두번째 강의 국제시사 프로그램 ‘세계는 지금’을 만들면서 느꼈던 소회: 안주식 PD
오늘은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느꼈던 소회 위주로 강의를 하겠다. 2002년에 ‘세계는 지금’ 프로그램을 맡았고 그 전에도 국제사회에 관심이 많았다. 입사 7년차라 프로그램 제작에 몸을 불사를 시절이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을 겪고 국제시사를 못 하겠다고 생각했다. 김선일 씨가 죽고 나서 정신적 충격도 많이 받았고 전쟁을 취재하는 것이 인성을 피폐하게 한다고 생각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사회에 대한 실망이 컸다. 프로그램을 만들어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줘도 한국 사회는 쉽게 변화하지 않았다. 국제시사프로그램을 못하겠다는 생각은 무엇보다도 김선일씨 사건 때문이었다.
김선일씨 사건은 국가살인 김선일씨 사건은 명백한 국가살인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 팔루자 현장에 있었는데 국가가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절절하게 들었다. 한국 언론의 여론주도층이 김선일씨를 바라보는 태도가 도저히 근대국가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김선일씨는 자기가 국가의 희생자라는 것을 안다. 납치범들이 명백히 잘못했지만 그 납치의 원인이 파병이라면, 상식적으로 봤을 때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제1원칙이다. 우리가 공화국인 이유는 시민으로서 국가에게 우리의 권한을 위탁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부는 다음 날 바로 파병 강행을 확정했다. 며칠을 못 참고 바로 파병 결정하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또 국가가 협상을 해서 국민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없어서 더 힘들었다.
이라크 파병을 둘러싼 여론에 실망 두 번째로 한국사회에 실망한 이유는 당시 이라크 파병을 둘러싼 여론이 저급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사실 석유를 위한 전쟁이었다고 하더라도 대의명분으로는 이라크 독재국가를 없애고 민주주의를 확산한다는 것을 내세운다. 우리도 대의명분이나 큰 고상한 가치에 대해 논쟁을 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암묵적으로 ‘살고 봐야 한다’거나 ‘미국 없이는 못 산다’ 그리고 ‘중동의 석유자원 없이는 안 된다’등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국제시사는 국경을 넘어선 보편적 가치, 인권, 자유, 민주주의 등 이런 것들을 논해야 한다. 국제적인 사건 앞에서 가장 정직한 목격자로 보도해야한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이런 것을 말하는 공간도 없고 시민사회도 없다.
국제시사 프로그램의 시청률 국제시사 프로그램의 평균 시청률은 3-4%이다. 이라크 전쟁 후에는 5%-6% 정도가 된다. 거의 시청률이 꼴찌에 가깝다. 이에 반해 제작비는 엄청 든다. 왜냐하면 다 해외 출장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인원을 줄여서 피디랑 카메라맨만 가더라도 10분짜리 만드는 데 1500만원이 든다. 비용대비 효과를 볼 때 방송사가 좋아할 리가 없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취재해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다. 시청자들은 이미 외신보도를 통해 많이 접하기 때문이다.
월드 뉴스는 BBC월드가 가장 잘 된다. 영국은 오래된 제국주의 국가니까 국제시사와 얽힌 군사, 경제문제가 시민들과 직접 관련이 깊다. 거기에 반해 우리는 국제사회와의 고리가 약하다. 이라크 전쟁 반전 시위 때 수만 명이 나온 데는 영국 시민들의 각성도도 그만큼 높다는 뜻이다. 국제시민의식에 대한 각성이 높은 만큼의 시청률을 가지고 있다.
중동 민주화 문제는 석유, 국익, 미국과 연관돼 있어 중동 민주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도 석유, 국익, 돈, 미국에 관한 이 논리들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리비아의 민주화 시위에는 관심이 있지만 중동지역의 민주화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이집트에서는 한국사회가 광주 민주화 운동과 4.19도 겪은 걸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반해 우리는 이집트 민주화 시위 때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 광주 경험을 바탕으로 이집트 민주화 시위에 대해 지지시위를 하고 영어로 블로그를 만들었으면 알자지라에서 취재했을 것이다. 아무도 그 생각을 못 한 게 안타깝다. 결국 우리 안에는 폭력, 속물주의, 사대주의가 들어 있는 것 같다.
마땅히 해야 할 파병은 적극적으로 파병에 대해서 말해보겠다. 해야 할 파병은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아프리카, 중동지역에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많다. 전 세계가 분쟁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도 안전지대 구축을 위해서 기여해야 한다. 때로는 파병하더라도 일이 제한적이고 지역주민에게서 환영을 못 받기도 하지만, 없으면 심각한 내전이 생기는 지역이 많다. 예를 들어 수단의 경우, 북부는 이슬람, 남부는 가톨릭 흑인지역이다. 계속 내전이 이어져서 아비규환의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이 상황에서 평화유지군의 필요성은 절실하다.
한국정부의 파병은 원칙이 없어 우리사회에서는 마땅히 필요한 파병에 대해서는 기초적인 자료 조사도 없다. 우리는 원전을 수주할 때나 미국이 필요로 할 때만 파병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파병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담론이 없다. 386세대가 갖고 있는 속물적이고 이중적인 스탠다드가 있다. 한국사회의 386세대는 미국을 미워하면서도 미국을 의식한다. 그들이 미국을 극복하려면 미국을 의식하지 않아야 한다.
국제사회에서 시민단체의 역할이 커져야 외국에 있으면 한국인은 시민단체에 속한 사람보다 선교활동을 하시는 분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된다. 이에 반해 일본은 외교력에 비해서 시민사회의 활동이 활발하다. 일본은 국가적으로는 비웃음을 사는 약한 외교력을 지녔지만 시민사회는 활성화되어 있어 자원봉사자가 많다. 특히 인권과 관련된 부분에서 많은 활동을 한다. 우리사회 10,20대들이 세계화 척도지수가 높다고 하는데 젊은 사람들이 국제적으로 시민단체 활동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 시민사회와 언론의 역할이 일본만큼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앞으로 정부는 글로벌한 외교력을 가지되, 시민사회단체가 좀 더 조직적으로 국제기구와 상호협조하면서 활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좋은 예로, 핀란드, 노르웨이의 시민단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들은 지난 몇 십 년 동안 인권과 보편적 가치를 추구해 왔다는 점에서 국제적 위상이 높다. 이 국가들은 우리가 열심히 본받아야 하는 모델이 될 것이다.
Q&A
Q. 한국 사람들이 국익과 경제적 논리 속에 점점 속물적으로 변해하는 것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는지?
A. 구정은 : 결국 중동지역에 대해서는 우리도 가해자이다. 우리는 에너지 소비도 세계 10위 국가로 에너지 부문에서 석유의존도가 높다. 개인이 아무리 아낀다고 해도, 산업구조 자체가 에너지를 많이 쓰는 구조이다.
우리가 국익과 돈에 집착하면서 속물적으로 변한 것은 왜일까. 한국인은 미국의 힘과 돈의 논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역사가 꼬였기 때문이다. 해방되고 나서 미국이 한국에 영향을 많이 끼치면서 미국이 하면 옳은 것이라 배우고 체화가 됐다. 신자유주의 논리, 경쟁논리가 팽배하다. 얼마 전 미군에서 지원병을 모집하는데 한국인 지원자가 가장 많았다. 이유는 영어를 배울 수 있고 연봉이 높으며 미국 시민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전쟁으로 누구를 죽이는 집단에 속하는 것에 대해 어떤 도덕적 판단도 없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과연 완성되어 있나. 가치판단은 성숙한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A. 안주식 : 한국 속물주의의 뿌리는 군사주의에 있다. 남자가 군대에 가야 한다는 사실은 폭력을 기반으로 속물로 변하기 쉽다는 것이다. 신병훈련소에 가서 총알을 쏘고 군사훈련을 받으면 ‘이것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훈련이구나’를 느낀다. 이것은 한국 남자에게 심리적인 트라우마를 준다. 그 트라우마는 속물주의, 정글의 법칙, ‘죽여야 내가 산다’는 식의 제로섬 게임법칙을 몸소 익히는 계기가 된다.
Q. 중동 지역에 다른 나라가 개입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A. 구정은 : 민주주의, 인권은 모두가 바라는 일이지만 그것을 이루는 방식은 다르다. 중동은 6차선 도로에 탱크가 다니는데 옆에서는 낙타가 다닌다. 우리나라나 미국이 초고속으로 발전한 경험을 중동지역에 강권하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 한 국가가 자기의 경험을 다른 나라에 억지로 이식할 수 없다. 문화적으로 역사와 전통이 깊은 나라에 부자연스럽게 이식한다는 것 자체가 억지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어느 나라에 얼마만큼 인도적 개입을 할 것인지는 깊은 고민을 해봐야 한다.
Q. 남의 힘을 빌려서 민주화가 되었을 때 당당할 수 있을까?
A. 구정은: 중동지역에서는 남의 손을 빌려서 민주화를 이루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이집트는 그 다음에 곡절은 많겠지만 최소한 우리나라의 노태우정부 정도로는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A. 안주식 : 중동은 한국과 비슷하게 갈 것이다. 자기 손으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렸으니 세세한 과정에서 반동은 있겠지만 민주의 물꼬는 돌리기 힘들 것이다.
파병은 꼭 전쟁을 수행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분쟁을 방지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라크 파병은 최악이었다.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파병을 했기 때문이다. 분쟁을 막기 위한 파병과 정권타도의 파병의 차이는 크다. 이런 것을 유엔이 적절하게 선을 정해야 하는데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시리아 군사개입도 리비아 사태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 군사 개입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경제제재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토론의 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국제문제도 한국 사람이라는 국적을 떠나 보편적인 인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이상적이고 도덕적인 시각이지만 국제저널리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 특히 KBS는 존재근거가 시민사회니까 이런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인은 한국의 시민이기도 하지만 세계의 시민이기도 한다.
Q. 한국사람 대부분이 중동 민주화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이유는?
A. 안주식 : 한국이 중동 민주화에 관심이 없는 이유는 한국정치 때문이다. 남북분단의 정치구조를 바꿔야 한다. 그래야 끊임없는 고민을 바탕으로 외교무대에서 결정을 하고 유엔의 규칙을 지키는 쪽으로 갈 수 있다. 리비아 사태에서 한국이 군사개입을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적극적으로 리비아 사태에 대해 논쟁을 해야 옳다. 실망스러운 것은 리비아 사태에 관해 정당의 성명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구조에서는 제대로 된 논평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중동의 석유에만 관심이 있을 뿐 민주화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이런 구조를 깨려면 정치구조에서의 변화가 있어야 하고 시민사회도 큰 역할을 해야 한다. 정부주도형, 반쪽이데올로기, 재벌과 결탁한 정치집단이 아직 깨어지지 않고 있다.
강의를 들으며
이번 강의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한국사회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한국이 중동 지역과 관련해서는 원전수주와 석유 외에 어떤 문화적, 정치적 관심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불과 얼마 전까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가슴 아픈 과정을 겪었음에도,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는 중동 지역의 민주화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보다 물질과 경제적 이득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경제성장을 이뤄 선진국가로 진입하려고만 했지 문화적 가치의 고양이나 민주주의 성숙에 열을 올린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아이러니한 것은 정부가 국제사회에 기여하는 선진국가가 되겠다고 하지만 정작 세계 보편적인 가치인 민주주의, 인권, 기아방지 같은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오직 1인당 국민소득을 높이는 일, 국가의 경제적 이익에만 치중하다보니 오히려 국제사회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외교에서 독립적인 국가로 우뚝 서지 못하고,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적 사고방식이 강하게 주입되어 ‘미국에 잘 보여야 살 수 있다’는 논리가 만연한 게 안타깝습니다. 어쩌면 미국에서 공부한 교수님들의 강의를 듣고 미국 교재로 공부를 해 온 우리가 미국에 맞춰 사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미국을 벗어나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막혀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미국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와 교육, 분단체제가 우리의 현실을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시민들을 깨우고 세계 보편적인 가치에 대한 인식을 퍼뜨리기 위해 시민사회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이 마음에 무척 와 닿았습니다. 머지않아 국제시사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와는 상관없는 먼 일’이 아니라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이웃의 일’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강좌 기록 및 후기: 국제연대위원회 인턴 장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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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에 대한 7가지 오해와 진실 |
보편주의 복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는 복지?(복지국가 7강) |
느티나무 |
2011.5.17 |
3월 14일부터 [복지국가에 대한 7가지 오해와 진실]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강좌는 복지국가에 대한 막연한 오해나 두려움을 넘어, 복지국가를 통해 시민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복지국가의 구체적인 현실을 통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서구의 복지국가를 넘어서는 한국형 복지국가에 대한 시민의 상상력을 넓혀가고자 합니다. 7강의 후기는 자원활동가 김현민 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7강 보편주의 복지는 무책임한 퍼주기 복지인가 윤홍식 인하대학교 사회과학부/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실행위원
보편주의가 사회적 화두가 되었다. ‘보편적’이라는 말이 한국 사회에서 이토록 불편한 말이었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서두는 늘 이렇게 시작된다. "그렇다면 삼성 이건희 회장 손주들도 무상급식을 주어야 하는가?" 찬성하는 쪽도 이 지점에서는 무언가 석연치 않다. 이번 강의는 바로 이 부분에서 불편한 양 쪽 모두에게 필요한 내용이었다.
보편주의 복지국가의 원칙은 무엇인가 참여연대에서 30여명의 각계 전문가들이 두 달 여간 매주 세미나와 토론을 벌여 한국사회에서 보편주의 복지를 한다면 어떤 원칙들이 지켜져야 할 것인가를 논의한 바 있다. 그 결과 6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번째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보장하는 복지국가이다. 우리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는 계급과, 성, 학력, 거주지역 할 것 없이 시민으로 태어난 그 자체만으로 가져야 한다는 시민권에 대한 이야기다.
두 번째 실질적 민주주의와 좋은 경제성장의 동반자인 복지국가이다. 최근 수치를 보면 97년 이후 빈곤과 불평등 수치가 97년 직전보다 훨씬 높다. 복지국가 하자는 것은 실질적 민주주의 이뤄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보편적 복지국가는 경제에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견인차가 돼야 한다는 주장이 담겨있다.
세 번째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복지국가이다. 일자리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다.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게 우리가 원하는 복지국가이다. 경쟁하는 사회가 됐지만 태반이 백수이고, 일자리를 가진 청년의 태반은 88만원을 받는다. 역사적 경험은 우리에게 결코 시장은 좋은 일자리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문의 지표 보라. 기업의 규모와 투자 규모는 늘지만 고용지수는 좋은 기업일수록 줄어들고, 나쁜 일자리는 늘어나고 있다.
네 번째 노동자, 농어민, 중소상공인, 저소득층, 중산층이 함께하는 복지국가이다. 사실 한국에서 불안한 계층이 중산층이다. 몸 하나 믿고 노동력을 파는데 직업을 잃으면 바로 빈곤층으로 미끌어질 수 있다. 이에 대비한 사회서비스도 없다. 이들 중산층을 포함해 다양한 계층의 이해와 요구를 포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운동하고 연대한다는 것은 이들 모두의 연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다섯번째 여성이 춤추는 복지국가이다. 한국사회는 지독히 성차별이 심하다. 일하는 여성이 늘어남도에 불구하고 홑벌이 부부와 맞벌이 부부의 남성 가사노동 시간 차이는 2분여 밖에 안된다. 돌봄의 책임이 여성에 강제되는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복지국가는 남성도 돌봄에 참여하는 사회로 바꾸자는 것이다. ‘젠더’라는 측면이 중요한 원칙이다.
여섯째는 인간안보를 지키는 복지국가이다. 그동안은 외부의 위험만이 안보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삶을 위협하는 것은 일상의 실업과 빈곤 등이다. 이같은 인간안보 지키는 사회로 변해야 한다. 이 여섯가지 원칙이 참여연대가 올 하반기부터 진행할 복지국가 운동을 관통하는 중요한 원칙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 준다? 보편주의에 대한 비판의 논점은 보편주의냐, 선별주의냐로 나뉜다. 보편은 진보고 선별은 보수라는 이분법적 구조다. 사실 쉽게 말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 주는” 복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복지는 세 가지 선별기제를 가진다. 우선 65세 이상이냐, 아동이 있냐와 같은 인구학적 특성을 기반으로 대상자를 선별하는 것이다. 이어 기여여부이다. 국민연금 납부 정도에 따라 대상자를 선별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자산과 소득에 따라 대상자를 선별한다. 돈 있고 없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선별원칙 중 어떤 것을 취하냐가 중요하다. 모든 복지 정책은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가지거나 또는 세 가지를 조합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앞의 두 가지 근거를 두고 선별 할 경우 보편주의 복지, 마지막을 적용하면 잔여주의적 복지라고 한다.
선별원칙은 보편주의 복지 원칙의 반대가 아니다. 보편주의 복지의 반대는 잔여주의 복지이다. 보편주의 복지도 차이를 인정한다. 아이가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보다 더 많은 육아/보육 욕구 비용 들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단 돈이 많은 사람에겐 하루 세끼, 적은 사람에겐 두끼를 주는 것처럼 경제수준과 소득에 따라 기본적 욕구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 안한다. 자산조사와 소득에 따라 선별하는 잔여주의적 복지에 반대하는 것이다. 통상 선별주의는 원칙이 아니다. 선별적 잔여주의라고 부르는 게 맞다. 자산과 소득에 따라 정책대상에서 선별하는 이러한 정책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선별주의로 표현하고 있다. 이미 대중화 되어 되돌리기 힘들지만 보편주의 복지와 선별주의를 잘 구분해야 한다.
잔여주의적 선별주의 대 보편적 선별주의의 대립은 문제가 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다. 보편주의 대 선별주의의 대립으로 가져갈 때 보편주의 복지의 반대 입장은 무조건 주자 아니냐고 지적한다. 결국 이런 지적에 취약해지고, 선별주의 복지를 대항으로 설정할 때 보편주의 복지는 방어가 어렵다. 선별적 잔여주의, 또는 잔여주의적 선별주의라 지칭하는게 타당하다.
보편주의의 재원은 어디서 와야 할까? 가장 중요하고 논란거리는 진보는 증세를 지지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부자들에게 부유세를 걷자고 하면 반대가 별로 없다. 돈 많은 이들이 돈 좀 내라는 것인데, 한겨레 조사에 따르면, 어떤 나라를 꿈꾸냐는 질문에 국민 70%가 스웨덴 같은 나라라고 답했다. 이어 스웨덴처럼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냐고 묻자 20%만 더 내겠다고 하고 나머지는 지금만큼만 내거나 덜 내겠다고 답했다. 그러면 재원조달 방식을 묻자 잘 사는 사람이 더 내야 다라는 답이 60% 이상이었다. 이게 맞을까? 가진 사람 것을 뺏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자는 것인데, 그들의 작태를 보면 당연하다는 입장도 있고, 통쾌해 보이기도 한다.
보편주의 복지국가는 사회보장세, 소득세, 담배 술 등에 부과하는 죄악세 등의 세금이 무척 강하다. 소득세, 부가가치세 등이 스웨덴에선 25%이다. 만원짜리 물건을 사면 2천5백원이 세금이다. 한국은 10%정도다. 소득역진적이라고도 지적된다. 볼펜 하나를 살 때 이건희 회장과 노동자가 같아서야 되겠냐는 것이다. 진보에서는 소비세, 부가가치세가 맞지 않다, 소득역진적이라고 지적한다. 비역진적인 소득세, 자산/법인세 확대 등을 이야기 한다. 이건 다시 말하고, 그런데 북유럽 세제를 보니 법인세와 자산에 대한 세금이 영국과 미국보다도 낮다. 80년대에 보면 법인세가 마이너스 수준이었다. 주류경제학에서는 시장친화적 조세는 소득세 등이라며 법인세 확대 등은 투자 의지 꺾는다고 말한다. 주류가 싫어하는 세금인 셈이다. 그런데 자유주의 경제 활성화 국가인 미국과 영국 등이 북유럽보다 훨씬 세다. 북유럽은 오히려 약하다. 역설적이다.
스웨덴 사민당은 소득세와 죄악세를 늘려야 한다고 밝힌다. 왜 그럴까. 그것은 보편주의 복지에 대한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보편주의 복지는 남의 것을 뺏어서 주는 것이 아니다. 보편주의 복지는 우리가 낸 것을 우리가 돌려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복지 확대를 위해선 보다 많은 사람이 세금을 부담해야 한다고 본다. 복지 수급자가 재원 담세자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 보편주의 복지의 핵심원리이다.
보편주의는 누가 주도하는가 한나라당을 보면 세출구조에서 조세감면을 말하고 민주당은 전면감세철회를 이야기 한다. 박근혜는 부분감세철회 입장이다. 이 그림을 보면 일반적인 상식과 다른 모습이다. 진보는 부유세에 대해 지지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고민 중이다. 그렇다면 보편주의 복지는 진보의 것이냐는 문제도 나올 수 있다. 한나라당은 지난 대선 때 반값 등록금과 무상교육, 기초노령연금 확대 등을 이야기 했다. 열린우리당은 현실성이 결여 됐다며 국정운영 책임자로서 그것은 표퓰리즘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흐른 후 반값 등록금, 무상보육, 급식, 의료를 이야기 하면 한나라당이 현실성이 결여된 포퓰리즘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보면 과연 진보만 보편주의 복지를 말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서구를 보면 그렇지 않다.
보편주의 복지 국가인 스웨덴의 복지정책은 1930년대 사민당이 주요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기 전에 보수당에 의해 만들어졌다. 당시 사민당은 처음부터 보편주의 복지를 지지하진 않았다. 당시 사민당은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했는데, 좌파의 핵심 테제는 당파성이다. 그런데 맑스의 주장과 달리 노동자 계급은 전체 다수를 차지하지 못했다. 집권을 위해 노동자 외에 중소상공인, 소자본가, 쁘띠 브르주아 등 다른 계층과 연대가 필요했다. 사민당 초기 우선 농민과 손을 잡았다. 50~70년대에는 화이트칼라, 중산층과 손을 잡았다. 그래서 보편주의 복지 국가는 사실상 좌우 날개로 함께 날아야 한다. 노동자 중소상공인 농어민 중산층 여성 진보적 지식인 저소득층이 함께 이끌어야 한다.
이것을 오해하면 보수도 보편주의 복지를 할 수 있냐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한나라당은 자발적으로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서구도 마찬가지다. 왜 한나라당이 기초노령연금 공약을, 이명박 대통령이 무상보육과 반값등록금을 말했을까. 기층민중과 시민이 요구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보수도 조직된 시민이 요구했기에 보편주의 복지를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스웨덴 우파가 집권해도 보편주의 복지를 철회하지 못한 것은 스웨덴 시민이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좌우의 날개로 보편주의 복지는 난다.
이건희의 손자에게도 무상급식을! 지역아동센터 교사들에게 무상급식에 대한 설문을 돌렸더니 과반수가 반대의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주의 복지 국가는 이건희 손자도 무상급식 대상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그런 주장을 할까? 첫째는 중산층이 참여하지 않는 복지서비스는 질이 담보가 안되기 때문이다. 만약 지역아동센터를 중산층 아이가 이용한다고 보자. 지금과 같은 서비스에 대해 중산층은 만족 안할 것이다. 높은 수준의 서비스를 요구할 것이다. 보편주의 복지국가는 복지서비스 수준이 중산층에 맞춰져야 한다고 본다. 만약 공적 제공 서비스에 대해 중산층이 불만을 가진다면 서비스를 이용 안하고 시장에서 구매를 할 것이다. 대부분 이용을 안하면 세금도 안내려고 할 것이다. 이건희 손자도 같이 먹을 급식이 돼야 한다. 그래야 우리 꿈꾸는 평등한 사회에서 모든 아이들이 수준 높은 급식을 먹을 수 있다. 두 번째로 예전엔 열심히 일하면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97년 외환위기 이후에는 회사에 몸 바쳐 충성해도 언제든지 잘릴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빈곤층으로 떨어진다. 미국의 자료에 의하면, 75세가 될 때까지 빈곤을 한번 이상 경험한 확률이 76.0%였다. 미국이 경우지만 우리 시대에 살고 있는 대다수가 빈곤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보여준다. 공적복지는 가난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가난해 질 가능성이 모두에게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세 번째, 그러면 부자에게 걷어 가난한 사람을 주면 불평등이 줄까? 그게 논리적임에도 실제는 나타나지 않는다. 미국은 전체 복지 지출에서 가난한 사람이 차지 비율이 60%이다. 북유럽의 최고 다섯 배인 점은 논리적으로는 빈곤과 불평등이 적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재분배의 역설이 일어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유가 있다. 보편주의 복지의 핵심은 나와 우리가 낸 것, 보편적 증세를 통해 보편적으로 돌려받는 구조이다. 세금을 내야 하는데 나를 위해 쓰이지 않고 저소득층, 가난한 사람에게만 돌아간다면 고귀한 사회적 이상과 철학 때문에 일정 부분 기꺼이 낼 수는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그러긴 어렵다. 그것이 결정적이다. 보편적으로 세금을 내는 나라에선 복지자원총량이 훨씬 크다. 그 총량에서 n분의 일을 나누니 가난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 커진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만 공적복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한국은 보편주의에 어디쯤인가 한국사회를 보면 보편주의 복지가 첫 번째 가난한 사람들만 지지하느냐, 두 번째는 보편주의가 경제성장 도움이 되는가, 세 번째 정치적 조합이냐 시스템과 체제로 만들어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남는다. 결국 보편주의 복지와 잔여주의 복지는 극명해 진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보편주의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박근혜는 잔여주의를 지지한다. 사회보장법 전부개정안 토론회 안을 보면 가능한 많은 사람을 포괄 구제하고 사각지대를 효율화시키자인데, 이게 주로 잔여주의 복지국가 방식이다. 시민권에 기반한 정책이 아니다. 반면 손학규를 제외한 민주당 주류를 보면 보편주의 복지 국가를 지지한다. 다만 국민참여당 유시민 대표는 뭘 지지하는지 모르겠다. 아동양육을 보면 시장지향적이고 일부는 진보적이다. 아직까진 판단이 어렵다.
이전까지 정치 쟁점은 민주 대 반민주, 친북 대 반북 등이었지만 2012년엔 보편주의 대 잔여주의 복지의 논쟁이 일 것이다. 시민들이 복지를 경험하게 되면 결국 복지의 확대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에 조응하는 정치체제는 비례대표제라고 본다. 또한 조응하는 복지정책은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을 보장하는 보편주의 복지라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치와 철학에 대한 것이다. 북유럽의 경우 아동의 천부적 인권을 인정한다. 미래 사회를 이끌 동량이나 노동력 차원에서 보는 게 아니라 아동 자체를 완전히 인격체로 보는 것이다. 당연히 그들에게 필요한 질 높은 서비스에 대해 그 사회에서는 이견이 없다. 과연 한국사회에선 그 사람의 성격과 품성, 근로동기와 상관없이 인간의 존엄성에 따라 누구나 복지를 보장하는 가치에 동의할까? 우리나라는 경제중심적이다. 일하지 않고 게으른 사람에게도 복지를 준다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가 삼십년 넘게 걸려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박정희가 한국사회 모든 돈을 끌어들여 재벌에 집중투자를 하면서 나머지는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그리고 현재 복지가 이 수준이다. 그런데 다음 정권을 진보신당이 잡는다면 복지국가 될까? 보편주의는 정치적 결단의 출발점이지만 시간을 요구한다. 몇 개의 정책 조합이 아닌 체제 변화는 많은 변화를 요구할 것이다. 국민들도 다음 정권에서 진보정당이 집권해도 5년 내 다 한다 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이것은 출발점이다. 집권 하자마자 5년간 복지 확대 마스터플랜을 보여주고 추진해야 하지만 그 5년이 모든 것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해선 안된다. 적어도 수 십년은 흘러야 한다. 앞으로 수 십년간 보편적 복지를 지지하는 정당이 집권해야 된다. 다른 세력이 집권한다 해도 이 방향으로 국민이 요구하는 힘을 가져야 한다. 시민의 조직된 힘으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일상에서도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조직된 힘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쉽지 않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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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북아프리카 민주화 혁명의 오늘과 내일 |
민주화 혁명 이후 중동 북아프리카는 어디로? |
느티나무 |
2011.5.6 |
[강좌후기] 민주화 혁명 이후 중동 북아프리카는 어디로?
중동 북아프리카 민주화 혁명의 오늘과 내일
‘중동 북아프리카 민주화 혁명의 오늘과 내일’의 세 번째 시간으로 ‘민주화 혁명 이후에 북아프리카는 어디로 갈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를 중심으로 중동지역이 민주화 이후에 어떻게 될 지에 대한 조심스런 전망과 함께, 미국이 이 지역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습니다. 지난 주에 이어 구정은 기자와 안주식 PD가 강의를 맡았습니다.
첫 번째 강의 사우디아라비아 중심으로 본 민주화 혁명 이후: 구정은 기자
오늘은 사우디아라비아(이하 사우디)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역사와 전통은 없지만 사우디는 중요한 나라다. 석유지정학에서 사우디의 위상은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사우디만큼 자원을 가진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과정 사우디는 1902년 이븐 사우드가 건국했다. 그는 부족전쟁하면서 사우디를 장악해 나라를 건국했다. 이슬람 조직인 사우드족이 부패한 조직에 맞서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와하비즘과 결합하여 1932년에 사우디라는 통일왕국을 만들었다. 미국 자본계열인 아람코가 석유를 발견해서 채굴을 시작했다. 그 후 이븐사우드가 죽고 나서 장남이 즉위했다.
수니파의 사우디 수니파와 시아파의 다른 점은 혈통을 중시하는가, 부족의 원로들이 과두지배처럼 논의해서 결정하는가 하는 것이다. 시아파에서는 부족장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 순리여서, 장자 여부는 중요하지 않고, 왕정을 이끌만한 능력을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 사우디는 수니파이기 때문에 장자가 주로 왕권을 이어받는다. 압둘 아이즈가 사망한 후 장남인 사우드 빈 압둘 아지즈가가 OPEC창립을 주도했다. 사우드가 쫓겨난 이후 남동생인 파이잘이 즉위하였고 그 다음은 파드가 국왕이 되었다. 그는 미국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다.
1995년부터 2000년 중반까지 사우디에서 시위가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우디는 왕위가 형제간에 계승되었기 때문에 국정운영은 원활했으나 시위에 대해서는 강경 진압했다. 이때부터 테러가 자주 발생하자 미국으로부터 오는 압력도 강해졌다. 파드가 사망하자 형제계승의 관습에 따라 동생인 압둘라가 즉위했다. 그는 서방에서 긍정적으로 봤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시위가 늘어나자 시위대의 요구대로 복지지출을 늘리겠다고 하면서도 다시 시위 자체를 금지하고 강경진압했다.
사우디의 민주주의 사우디 민주주의의 발전 정도는 거의 최하위권이다.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연관성을 생각할 때 중동은 1인당 GDP에 비해 민주주의 정도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언론출판의 자유가 있고 민주주의의 틀을 갖춰나가고 있는 만큼 과소평가된 부분이 적지 않다. 여기에 비해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은 민주 선거가 실시되긴 했지만 부패와 유혈사태가 심각하다.
아랍의 혁명에 대해 아랍은 부족주의 전통, 군사독재정권, 전제군주정의 세 가지 억압이 있어왔다. 이번 혁명은 권위주의에 타격이 될 수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미완의 혁명이 될 가능성 크다. 혁명을 하고 나면 피를 흘린 만큼 정치판에서 시민들이 조금 더 입지를 넓힐 수는 있겠지만 역부족이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이 혁명으로 새로운 민주주의가 탄생하지 않더라도 큰 변화를 모색해 볼 수는 있다. 미국도 아랍 지역의 민의를 조금 더 중요시하게 될 것이다.
타리크 알리(Tariq Ali)의 시각 60년 혁명의 아이콘이었던 타리크 알리는 이번 중동 사태에 대해서 두 가지로 요약했다. 1) 아랍세계 모든 이들이 전제권력에 도전했다. 2) 독재자를 지탱해주었던 서방을 향해 자유와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왜 하필 지금 아랍에서 혁명이 일어났나 2008년 월가의 붕괴로 인한 세계경제위기가 있었다. 이 여파로 중동지역에 실업률이 올라가고 교육받은 노동자들이 대량 실직으로 거리에 쏟아졌다. 경제적 원인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생겨난 측면이 있다. 파키스탄 정부는 시위를 강경 진압한다. 인도네시아는 온건파 정당이 자리 잡아 당분간 온건파로 갈 가능성이 크다. 이집트 시민들도 독재자를 더 이상 받아주기 힘들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지지하던 무바라크도 전복된 만큼 시민 혁명이 더욱 힘을 발휘하고 있다.
중동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어떻게 될까 사우디가 바레인의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고 있다. 미국이 바레인에 자국 해군기지를 둔 것을 보면 전략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미국이 사우디에 시위 진압을 암묵적으로 권유했을 가능성도 있다. 지금 미국은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를 위해 앞장서면서도 민주화를 위해 시위하는 사람들을 억압한다.
앞으로 중동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갈 것인가? 두 가지를 예측할 수 있다. 1) 아랍인들은 자기가 모르는 힘을 깨닫고 있다. 2) 어떤 방향으로 가든 자유를 맛보기 전 단계로는 가지 못한다. 튀니지, 예멘 모델 또는 정권뒤집기 모델 중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유혈충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유혈충돌을 방지하는 시스템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앞으로 사우디, 이집트, 이란은... 사우디의 경우 이집트와 다르게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 정권은 뒤집히되, 방향은 아주 다를 것이다. 사우디는 권력을 감시하는 시민단체가 없는 나라이다. 사우디의 민주화는 왜곡되어 있어 앞으로도 힘들 것이다. 사회적 자원도 없고 극단주의자가 장악할 가능성도 있다.
이집트는 야당이 있지만 시민단체는 거의 없다. 앞으로의 변화 방향은 미국이 이집트 정부가 전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어디까지 개혁을 원할 것인지에 달렸다. 미국은 시위대가 정부를 전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쓸 것이다. 친미정권이 없어지면 미국의 영향력도 약화되기 때문이다.
이란은 지금 아랍국들의 시위를 즐거워하고 있다. 중동에서 영향력이 큰 나라는 미국, 사우디, 이란 순이지만 앞으로 이란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란은 정치력과 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강의 이집트 혁명과 미국의 딜레마: 안주식 PD
지난주 목요일에 KBS '세계는 지금’에서 이집트 민주화 시위 이후 ‘격동의 중동’, ‘미국의 딜레마’ 두 편을 방영했다.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느낀 점을 정리해보겠다.
이집트의 민주화 혜택이 이슬람 단체에게로 이번에 이집트에서는 헌법을 바꾸자는 국민투표가 있었다. 국가위원회가 꾸려져있고 올해 9월에 대통령 선거와 총선거를 치르기 위해서 헌법을 수정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이집트 헌법은 독재를 합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 시위에 나섰던 청년, 시민단체, 재야단체는 헌법개정에 반대했다. 다가오는 6개월 내에 헌법을 수정하고 국민투표를 하면 자기들이 후보를 내고 조직화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천천히 하더라도 좀 더 근본적으로 헌법을 수정하기 위해 대대적인 반대캠페인도 벌였지만 결국에는 헌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무슬림 브라더스(Muslim Brothers)가 여기에 크게 한몫을 했다. 이것은 1920년대에 생긴 집단인데 이슬람주의 정치세력이고 공식적으로 샤리아 법(Sharia Law)을 지지하고 있다. 헌법 개정의 혜택으로 무슬림 브라더스가 제1야당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번 혁명은 형식적 민주주의, 일반민주주의 요구를 하고 있다. 즉 서구식 민주주의를 요구했던 혁명으로 결국 무슬림 브라더스가 가장 큰 수혜자가 될 수 있어 제2의 충돌이 예고되고 있는 실정이다.
*샤리아: 이슬람교에서, 코란을 바탕으로 한 법의 체계
이집트 엘리트 집단인 군부세력에 대해 이집트는 군부의 지위가 다른 아랍권에 비해 상당히 높다. 사회 최고 엘리트 집단이 바로 군부이다. 이들은 '국가의 수호자'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장교가 엘리트 코스의 상징인 미국유학을 갔다와서 영어가 유창하다. 현실적으로 무바라크가 퇴진하게 된 데는 데모의 크기, 시위의 격렬함보다 군부가 무바라크를 버린 이유가 크다. 그럼 왜 군부는 무바라크를 버렸나? 군부는 무바라크를 버리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겠다는 뜻이 컸다. 이집트 군부대는 거대하며 지방 곳곳에 군부대 시설을 갖고 있어 지방권력을 갖고 있는 집단이다. 이들은 무바라트를 끝까지 지지할 수는 없었다. 이들은 앞으로 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세력을 넓히기 위해 움직일 가능성도 있다.
앞으로 이집트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추측은 유동적이다. 제2의 무바라크가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군부 기득권도 유지될 것이고 무슬림 브라더스도 세력을 유지할 것이다. 적어도 5-10년이상 민주화를 향한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미국의 딜레마 미국의 핵심 중동 정책은 다음과 같다. 1) 극단적 이슬람주의 세력은 용납할 수 없다. 2) 안정적인 석유를 공급 받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이 두 가지 모두에서 딜레마에 빠졌다. 미국은 극단적 이슬람주의가 나타나지 않도록 여러가지 방법을 써 왔다. 심지어 독재자 무바라크를 지원해 주기도 했다. 반카다피 세력에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있다. 미국은 이런 세력에게 권력이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아랍국가의 독재를 지원해 왔다. 이런 이유로 인해 형식적 민주주의가 아랍권에서 억제됐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일반민주주의를 무시한 현실이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미국은 민주주의 확산으로 세계에 기여한다고 자부했지만 이번 일은 미국의 위상에 먹칠을 했다. 지금부터 이슬람이 민주화 되면 극단주의 세력 또한 정치에 반영될 수 밖에 없다. 시스템으로 이를 막을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중동의 GCC(Gulf Cooperation Counci:페르시아만협력회의)국가가 전세계에 공급하는 석유의 양은 전체 공급량의 40% 이상을 차지한다. 미국은 GCC국가들이 정치적으로 불안해지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세계적으로 석유 가격이 배럴당 200달러를 넘어가면 대공황이 올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도 있다. 미국은 중동에서의 더 큰 혼란을 막고 민주화 진행 과정을 늦추자는 의미로 자금을 지원해서 시위를 줄이려는 논의도 하고 있다고 한다. 관련하여 미국의 민주당 씽크탱크들은 마샬플랜을 중동전체에 실행해서 빈부 차이를 없애고 민주화 정도에 따라 대규모 지원을 해주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바마도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라 현실적으로는 어렵다.
중동 민주화 시위에서 느낀 점 이슬람이든, 아프리카든, 북극에 살든 사람이 자유를 경험하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것은 세계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이다. 특히 제도적 자유를 경험하면 뒤로 가지 못한다. 중동 북아프리카의 정권은 앞으로 10-20년 동안은 터진 봇물을 어떻게 수습할까를 고뇌해야 할 것이다. 저널리스트의 감각으로 느끼는 것인데 중동이 아무리 이슬람 국가라도 형식적 민주주의의 단계는 어느 정도까지 오를 것이다.
Q&A
Q. '독재, 이슬람 근본주의, 외세'는 서로 적대적이지만 민주화의 도래를 지연시킨 공범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이슬람 시민은 정교분리를 하면서 민주화를 실현하려하는가?
A. 구정은 - 이들은 적대적이지 않는 그냥 공범이다. 무바라크가 심할 때는 미국도 압박하지만 분명한 결탁관계에 있다. 민주화 이후에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민주화된 사회에서는 히잡을 쓰고 싶지 않은데 안 썼다고 때리면 곤란하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민주주의가 말하는 개인의 권리, 자유, 인권을 보장하지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는 위의 세 가지는 모두 민주주의의 적은 맞지만 공범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다. 이란의 호메이니 체제는 반미를 이용해 국민을 억압했다. 외세의 존재를 악용했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역사는 오래됐지만 새로운 현상이기도 하다. 탈냉전시대의 새로운 현상이다. 앞날이 복잡하게 꼬일 것이다. 이슬람 세력이 민주화의 수혜자임은 확실하다.
Q. 기독교와 기독교 근본주의가 다르듯이, 이슬람교와 이슬람 근본주의는 굉장히 다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슬람과 근본주의를 비슷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시각 교정도 해야 한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A. 구정은 - 이슬람주의는 이슬람을 내세우는 사람을 얘기한다. 여자라는 이유로 재산권을 법적으로 제한을 두는 사람과, 부르카를 안 썼다고 염산을 뿌리는 사람은 둘 다 나쁘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둘 다 보편적 인권을 무시한 것이다. 도로에 폭탄을 설치하면 극단이고, 총을 놓고 집에 있으면 온건이니까 온건은 우리 쪽으로 용인하자고 하는 것도 지배의 방법일 뿐이다. 가장 피해를 입는 사람은 아프간 여성이다. 미국이 아프간에 와서 잘 한 것이 탈레반을 쫓아낸 것인데 다시 온건탈레반을 받아들이자고 했다. 이것은 여자들에 대한 온건한 탄압을 받아들이자는 것과 같다. 미국의 이런 접근은 아주 편의주의적인 것이다. 이슬람주의라는 것은 결국 맥락은 똑같다. 이슬람주의를 금지시키는 것은 탄압이 아니라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생각한다. 부르카 때문에 염산테러를 당한 사람이 나타나면 금지시켜야 한다.
Q. 혁명이 일어나는 이유가 실업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한다. 아랍은 경제체제가 없는 상황이다. 선진국에서 경제체제를 도입해서 성장해야하지 않나? 그러면 시민의 힘을 더 모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A. 안주식- 나라가 경제적으로 형편없다가 어느 정도 살만하니 민주주의를 해보자고 하는 시점이 되려면 돈이 그렇게 많지 않아도 된다. 사우디는 1인당 GDP가 높다. 경제적 수준은 민주주의를 진작 요구하고도 남았을 시점이다. 다만 어떻게 해서 일자리를 만들지는 얼마나 자원을 잘 팔아서 투자를 잘 할 것인지에 달렸다.
이것은 사회주의 분배체제와 비슷하다. 석유를 팔고 남은 돈으로 공무원을 만드니 중동 사회주의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경제구조처럼 IT 산업을 발전시키고 산업경제구조를 장기적으로 개선해야 민주화 시위의 성과가 온전히 유지될 것이다.
이슬람은 큰 고민에 빠졌다. 이라크전에서 미군의 횡포가 심해서 이슬람 사람들의 일부가 극단주의자로 바뀐 경우가 많다. 현대 민주주의는 정교 분리없이는 있을 수 없다. 이슬람은 미국제국주의와 종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트라우마를 가진 나라이다. 상황에 따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강의를 들으며
강의에 앞서 구정은 기자가 몇 개의 두건과 히잡을 가져와 보여주었습니다. 구정은 기자는 모래 바람이 심해서 머리에 천을 두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명하면서 직접 써보기도 했습니다. 색색의 히잡은 뉴스에서 탄압받는 여성의 머리에 두른 것과는 달라보였습니다. 어떤 문화가 생긴 데에는 이유가 다 있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중동 민주화에 대한 강의가 이어지고 현장에서 느낀 바를 들을수록 중동지역에서도 결정적 변수는 미국이라는 것이 뚜렷이 다가왔습니다. 지금까지 참고 있다가 폭발한 시민들의 분노도 미국경제의 위기로 맞은 경제난이 큰 이유였고, 앞으로 민주주의의 발전도 결국 미국이 결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미국은 세계에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명분으로 ‘선의의 개입’을 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중동지역의 ‘석유이권’을 위해서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는 것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미국적 사고를 비판적 시각 없이 교육받아온 한국에서 중동 민주화를 아는 것은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때까지는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은 멀리 떨어져 있고 문화적, 종교적으로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관심대상에서 빠져있었지만 아직도 인권이 유린당하는 곳이며, 투쟁을 해야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민주화 혁명으로 이 지역에 관심을 가졌듯이 앞으로도 꾸준히 민주주의를 이뤄가는 과정을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강좌 기록 및 후기: 국제연대위원회 인턴 장유진
다음 강의 4월26일(화) 중동 북아프리카 혁명과 한국사회 강사: 구정은(경향신문기자) 안주식(KBS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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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에 대한 7가지 오해와 진실 |
성장과 복지는 동행이다(복지국가 6강) |
느티나무 |
2011.5.4 |
3월 14일부터 [복지국가에 대한 7가지 오해와 진실]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강좌는 복지국가에 대한 막연한 오해나 두려움을 넘어, 복지국가를 통해 시민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복지국가의 구체적인 현실을 통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서구의 복지국가를 넘어서는 한국형 복지국가에 대한 시민의 상상력을 넓혀가고자 합니다. 6강의 후기는 자원활동가 김현민 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6강 성장과 복지, 세계화와 복지는 상극인가
이정우 경북대학교 교수·경제학 / 참여정부 정책실장
분배와 성장, 이 두 가지는 복지에 관련된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다. 한국 사회에서 복지와 관련된 가장 익숙하고 (또 거의 유일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섯번의 강의를 들으며 복지를 선택하는 것이 곧 성장을 늦추는 것이 아님을 확인해 왔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성장과 더 친숙할 것 같은 경제학자는 또 어떠한 진실을 전해줄지, 기대와 설렘으로 강의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파이(pie)를 언제 맛보나?
이전 역대 보수정부는 성장이란 토끼만 잡으러 다녔다. 분배, 복지 토끼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학계나 시민단체가 분배, 복지를 가끔 꺼냈는데, 무시당했다. 항상 선성장 후분배를 말했다. 성장을 먼저 하고 그 다음 파이가 커질 터이니 나눠야 한다는 것이다. 미리 나누면 파이가 안 커지니 성장이 안 돼 다 가난해진다, 사회주의가 그래서 망했다는 논리다.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수준 낮은 주장이지만 이 주장은 오랫동안 국민들의 머리 속에, 특히 나이 먹은 사람들에게 고정관념처럼 박혔다. 떡을 키운 후 갈라먹자는 이야기는 그럴듯해 진리처럼 들린다. 그래서 쉽게 국민들의 머리를 지배할 수 있었다. 참여정부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성장도 낮고 분배도 개선되지 않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둘 다 놓쳤다고 말한다. 주로 쓰는 두 마리 토끼론이다. 성장과 분배 중 한 마리 토끼만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래도록 우리의 머릿속을 붙잡아 이분법적으로 사고하게 한 이 논리는 과연 진실일까?, 설득력이 있는가? 복지국가 담론은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위험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던 것이 98년 환란이 오면서 실업자도 많이 생기고, 빈부격차도 심해지고, 따라서 상당한 복지 확충을 위한 새로운 제도가 많이 일어났다. 의약분업도 그 때 생겼다. 200여개로 쪼개진 의료보험조합을 건강보험으로 통합한 것도 그 때 일이다. 국민의 정부가 복지국가의 기틀을 만드는데 공로가 많다. 이어 참여정부 때 복지국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분배에 민감한 한국사회
이 교수는 참여정부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을 맡았었다. 그래서 그는 복지가 한국 정치 현장에서 어떠한 민감도를 가지고 있는지 또 얼마나 넓은 스펙트럼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보수언론에 ‘분배주의’라고 분류(?)되면서 비난받았다. 없는 말을 만들어서 참여정부를 분배주의라고, 또 좌파라고 공격했다. 그는 전공이 경제학 중 분배론/불평등론이다. 삼십년 전 미국 유학 시절에 그의 전공 때문에 좌파분배주의로 몰기 좋았을 것이다. 실제로 참여정부가 분배에 좀 더 신경을 쓴 것은 사실이다. 그 전 보수정부에 비해 복지예산을 늘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걸 분배주의, 좌파로 부를 만한가. 그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여전히 분배/복지가 약하다고 본다. 당시 중앙정부 예산 중 복지예산이 참여정부 시작 때 20%였다. 경제예산은 28%였다. 참여정부 말에는 그 숫자가 우연히도 거꾸로 된다. 복지예산이 28%, 경제예산이 20%였다. 이걸 가르켜 분배주의, 좌파라고 온갖 비난을 했다. 정말 과한 것일까? 정말 좌파적인가? 그것을 보려면 다른 나라를 봐야 한다.
OECD 평균 경제예산은 10% 대이다. 복지예산은 평균 55%이다. 10대55로 비교가 안된다. OECD 국가 중 미국은 가장 덜 복지국가이고, 가장 후진적인 복지국가이다. 하지만 미국도 중앙정부 예산을 보면 OECD 평균과 비슷하다. 그러나 한국은 오랫동안 경제예산이 복지예산보다 많았다. 나머지는 행정, 국방 등이었다. 유독 우리나라만 기형적인 예산구조를 가진 것이다. 다들 우리보다 다섯배 정도 쓰는데 우리는 반대했다. 이걸 조금 바꾼 것이 참여정부의 28%이다. 이게 과다한 것일까. 참여정부가 한 30~40%로 올렸으면 좋았겠지만 그랬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우리의 복지수준은 굉장히 늦고 너무나 빈약해 이야기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이다. 이를 정상화하려는데 분배주의/좌파라고 한다. 이런 보수언론 가진 것과 함께 학자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보수이다. 9할이 보수 경제학자이고 보수이다. 분배복지에 대한 식견이 없다. 공부를 제대로 안하고 단순히 분배는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는 보수언론 말을 막연히 맞다고 믿고 있다. 경제학자조차 이러니 국민이 이걸 믿는 것이 이상한 게 아니다.
성장과 분배와 복지, 그들은 정말 삼각관계인가?
그러면 실제로 성장과 분배 복지의 관계가 발목 잡는 관계인가, 그렇지 않다. 보수 언론의 구호인 복지가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는 틀렸다고 많은 경제학자들이 증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세 가지이다. 하나는 분배가 불평등할수록 재분배 요구가 많고 따라서 세금을 많이 걷어 소득을 재분배해야 하는데 그러면 성장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분배가 불평등하면 정치사회적으로 불안정해 외국의 투자가 안 들어오고, 그래서 성장을 저해한다. 세 번째는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문제이다. 분배가 불평등할수록 가난한 집의 인재가 공부를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지나친 불평등은 성장을 저해하는 세 가지 연결통로가 있다. 지난 20년간 경제학자들이 발견한 것이다. 압도적 다수 의견이 분배 개선은 성장에 유리하다고 말한다. 분배가 나쁠수록 성장에는 불리해 진다는 이야기이다. 이 교수는 참여정부 때 이 부분에 대해 강조하려고 글 쓰고 강연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는 2005년 2년 반 일하고 나올 때 글 하나를 남겼다. 다른 것은 알아서 맡겨도 걱정이 안되는데 분배론은 보수가 끊임없이 시비를 걸지만 안에서 잘 아는 사람 없어서 글을 적었다는 것이다. 최성수의 노래 동행의 가사를 인상깊게 들었고 이것을 따와서 “성장과 분배는 동행이다”, 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고 한다. 그렇게 최성수의 동행 이야기를 하면서 성장과 분배도 동행이라고 설명했다.
‘세 가지 메커니즘인 조세재분배, 인적 자본, 정치 불안정을 이야기 했다. 경제학 연구에서 밝혀져 있다, 더 이상 흔들지 마라, 보수는 근거를 가지고 비판해라, 말도 안되는 낡은 레코드를 계속 틀지 마라, 발목 잡는다 하지 말고 자신을 가지고 분배 복지 강화 정책을 계속 해달라’고 남기고 나왔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복지국가 논쟁이다. 그때는 성장분배, 지금은 복지국가로 이름만 다르고 내용은 같다. 지금도 낡은 레코드를 틀고 있다. 분배 복지는 성장의 발목, 복지는 성장을 저해한다, 복지국가는 재정이 나빠져 위기가 오고 국가부채는 늘어난다, 국가 부도로 신용등급이 떨어진다라고 말한다.
지난해 유럽의 포르투갈,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 네 나라가 국가신용부도를 맞았다. 그래서 구제금융을 받고 그랬는데, 이들 국가를 호재로 삼아 복지국가를 격하는데 써먹고 있다. 복지를 너무 해서 국가 부도가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분배 복지가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는 언술이 틀렸듯이 복지국가가 성장 발목을 잡는다는 말은 틀렸다. 이들 국가가 복지 때문에 부도가 났다는 말도 틀린 말이다.
이들은 유럽에서 가장 복지 후진국들이다. 유럽국가들의 복지 발달 정도는 위도가 높을수록 복지 잘되고 낮을 수록 낮다는 게 정설이다. 북유럽은 세금 많이 걷고, 복지지출 많이해 웬만한 의료 보육 학교 급식 등은 무상이다. 이를 탈상품화 사회라고 한다. 그리고 중부유럽이 그 다음이다.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등이다. 이들은 2등급 복지국가이다. 아일랜드와 영국은 예외인데, 위도는 높지만 복지는 실제로는 낮다. 정말 복지 때문에 경제가 망가진다면 제일 먼저 북유럽이, 그다음 중부유럽, 그다음 남부유럽 순이어야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일본과 한국, 무엇이 문제인가
일본이 지진나기 전 신용등급이 한 등급 강등됐다. 이는 복지국가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되었다. 일본 자민당 집권시엔 괜찮다가 민주당이 복지 한다더니 망하지 않더냐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신용등급 하락은 국가 부채가 너무 커서이다. GDP 200%로 엄청 높다. 이 부채가 민주당 집권 일이년 사이에 온 것은 불가능하다. 약간 늘었을 뿐 일 것이다. 대부분 국가부채는 50년 장기집권 자민당의 작품이다. 일본의 별명은 토건국가이다. 토건국가는 복지국가의 반대말이다. 댐 도로 다리 놓고, 과잉 투자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일본은 토건족이 있고, 이들의 이익 위해 정부는 충실히 경제정책을 운영한다. 건설회사들과 유착된 정치가와 관료들이 있고 이들을 토건족이라고 한다. 한국은 판박이다. 한국에도 있다. 이들은 기회만 있으면 건설경기 부양을 주장한다. 우리도 50년을 그래왔다. 참여정부 때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어 잠시 주춤했지만 그전에는 토건족이 원하는 데로 투자가 이뤄졌다. 이명박 정부는 토건족을 위한 4대강 사업에 엄청난 예산낭비를 하고 있다. 토건국가를 탈피해 복지국가로 가야 하는데 이를 막는 게 4대강이다. 22조원를 썼고 2012년에 끝나는데 성과가 없을 것 같으니 지류를 정비해야 한다고 또 20조원을 쓰겠다고 나온다. 이건 다음 정부에 넘겨야 한다. 임기 끝나는 정부가 거대사업을 또 시작할 권리는 없다. 다음 정부에 물어보고 해야 한다. 사실 한다면 지류를 먼저 하는 게 맞다. 홍수는 4대강에서가 아니라 지류에서 난다. 애초부터 순서가 틀린 것이다. 한다면 하천 지류 정비부터 해야 했다.
세계에서 토건 비중 제일 높은 나라 1,2등은 한국과 일본이다. GDP 대비 건설업 비중이 한국은 18%, 일본은 17%이다. OECD 다른 국가들은 절반 정도이다. 우리는 과잉 비대한 토건업 가지고 있고. 이것을 줄여서 복지로, 보건, 의료, 교육, 보육으로 투자해야 정상국가로 간다. 하지만 이를 가로막고 토건비중을 줄이지 않겠다고 한다.
모처럼 참여정부가 복지지출을 늘이고 첫걸음 뗀 것이었는데, 그나마 다른 나라의 절반정도 간 것인데, 더 가야 하는데 못했다.
우리의 파이는 복지를 통해 커진다.
복지국가에 대해 우리나라 보수에서 끊임없이 하는 이야기가 복지국가 위기론이고 한 때 잘나갔지만 위기라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복지 안하는 나라가 먼저 복지를 줄인다. 진짜 복지국가는 복지를 안 줄인다. 진짜 복지국가에 문제가 있고, 노동이나 창의력, 인센티브를 저해하는 게 있어 성장을 죽이고 효율 줄인다면 제일 많이 하는 북유럽이 후퇴를 제일 많이 해야 하는 게 맞는데, 그렇지 않고 여전히 복지국가로 건재하다. 보수당이 집권을 안했을까. 스웨덴의 보수당은 올해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면 보수당이 집권했으니 복지가 후퇴해야 하지 않을까? 집권구호가 복지국가 더 잘하겠다고 약속했다. 91년 한 때 복지삭감을 보수당이 시도했지만 결과는 3년 뒤인 94년 선거에서 참패했다. 그런 쓰라린 경험이 있어서 안다. 보수당도 복지삭감 후퇴 공약을 하지 않는다.
보수 중에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복지는 작은 복지와 큰 복지가 있다는 것이다. 성장은 큰 복지라고 말한다. 이건 교묘한 신조어이다. 전에는 선성장 후분배로 세뇌를 했다. 그러다 복지국가 위기론을 말했다. 이제는 성장이 큰 복지고 복지는 작은 복지라고 한다. 이 말은 선성장 후분배를 교묘히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보여 진다. 성장하면 온 국민이 다 혜택을 받지만, 복지는 일부 가난한 계층만 혜택을 준다는 이야기는 그럴 듯 해 보인다. 따라서 큰 복지가 좋게 보이고 세뇌 받기 쉬운 셈이다. 복지국가는 거대한 세계화의 바람을 이겨낼 수 있을까?
세계화와 복지국가는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세계화와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다면 임금이 싸야 투자가 들어오지만 복지국가는 세금도 많은데 어느 기업이 들어오려 하겠냐는 것이다. 세계화와 복지는 상극이란 것이다. 그럴 듯한데 실제 자료로 검증하면 맞지 않는다. 유력한 가설이 경주가설이다. 아래로 향하는 경주, 위가 아닌 밑으로 내려가는 경쟁이 있다. 외국자본의 유치를 위해 임금을 삭감하고 복지를 삭감한다. 그래서 외국자본에게 매력이 있는 투자처로 보이게 만든다. 그렇게 하다보면 복지국가가 안 된다는 것이 아래로의 경주가설이다. 그럴 듯한데 검증하니 맞지 않는다. 세계화 시대에도 복지국가가 후퇴한 것은 별로 없다. 후퇴한 것은 약한 복지국가이다. 강한 복지국가는 후퇴 안한다. 또 하나 외국자본이 어느 나라에 투자 하는가를 결정할 때 복지국가가 어느 정도 돼 있냐, 법인세가 높으냐 낮으냐, 이런 것은 별로 보지 않는다. 크게 중요한 요인이 못된다. 또 중요한 사실은 복지국가에 가보면 다국적 외국자본이 이들 복지국가에 투자하면 복지국가처럼 행동하고 저임금 저복지 3류 수준 나라에 투자하면 3류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높은 길과 낮은 길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세계화로 자본 이동이 활발하다고 복지국가가 쇠퇴할 이유가 없다. 검증하니 강한 복지국가는 전혀 후퇴가 없고, 약한 복지국가는 일부 후퇴했다. 높은 길은 더욱 높은 길, 낮은 길은 더욱 낮은 길로 간다. 한국은 전형적인 낮은 길을 걷고 있다. 밑으로의 경주가설에서 제일 타당한 가설은 수렵클럽 가설이다. 북유럽 복지국가는 강한 복지국가끼리 모이고 약한 복지국가는 원래 약한데다 더 약해지는 쪽으로 수렴돼 각각 자기들끼리 노는 클럽이 있다. 어느 클럽 속하는 게 중요하다. 그 클럽 중 복지국가는 복지국가 클럽끼리 놀면서 세계화의 영향을 안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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