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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명 | 강좌후기 | 글쓴이 | 날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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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중항쟁 32주년 기념특강 : 오월은 다시 창조적 고통이 필요하다 | 5.18특강 - 오월은 다시 창조적 고통이 필요하다 (5/18) | 느티나무 | 2012.5.24 | |||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5.18 민중항쟁 32주년 기념특강 후기]
밥상공동체로 지켜낸 항쟁
△ 화가 홍성담이 말하는 '오월은 다시 창조적 고통이 필요하다' 특강(사진=참여연대) 강의에 앞서 홍 선생님께서는 본인의 5.18 판화가 전시되고 있는 세계의 여러 미술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언급했는데 듣다보니 정말 많았습니다. 만약 홍 선생님께서 보통 작가였다면 개인의 자랑처럼 느껴졌겠지만 평생을 광주를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하신 홍 선생님께서 판화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5.18의 의미를 생각하니 오히려 듣고 있는 제가 더 뿌듯했습니다. 본격적인 강의가 시작되고 선생님께서는 약 50여 점에 달하는 본인의 5.18판화를 PPT로 보여주며 당시의 상황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특히 ‘유신잔재 척결 대회에 모인 사람들’이라는 판화에서는 모인 군중 한명 한명의 사연과 포즈를 설명해주셨는데, 그 동안은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들까지 사실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설명을 다 마칠 때 쯤, 선생님께서는 ‘시체를 끌어안고 있는 사람’이라는 판화에 가장 애착이 간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한 외국인으로부터 '시체의 발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에서 시체의 발만 보이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그 발이 하얗게 표현된 것이 더욱 인상 깊었다'는 평을 받고난 후 더 애착이 가게 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판화에 나오는 인물 하나하나가 서로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Episode1 첫 번째 에피소드는 밥상에 얽힌 이야기였는데, 항쟁 초기 시민군과 운동권간의 갈등을 해결했던 촉매제 역할부터 광주항쟁 기간 동안 밥이 어떤 역할을 했었는지 설명해주셨습니다. 특히 광주항쟁 당시 총이 5천개 이상 풀렸는데도 불구하고 총기사고, 오발사고, 절도강도사건 하나 없었던, 인류역사상 벌어진 민중항쟁 가운데 도덕적으로 가장 완벽했던 항쟁(어디서 많이 들어 본 표현이죠?)이라고 하시면서 그렇게 되기까지 '광주 여성들이 내 놓은 밥상'이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를 두고 '밥상공동체로 지켜낸 항쟁'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Episode2 두 번째 에피소드는 '당시 부산에 정박한 미 항공모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pisode3 세 번째 에피소드는 '도청 진압 이후'에 대한 얘기였습니다.
△ 특강 중인 화가 홍성담 선생님 (사진=참여연대) 이후 간첩죄로 피고인 신분이었던 홍 선생님과 대법관이었던 이회창씨와 인연, 아시아인들이 K-POP에 열광하는 이유, 등 80년대를 넘어 90년대 2000년대 이야기들을 해주셨고 마지막으로 광주 5.18민중항쟁의 의의를 "광주는 시민을 탄생시켰다!", "현대의 시작을 알렸다."라고 정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아시아 전체의 민주주의에 큰 영향과 교훈을 주었다고도 덧붙이셨습니다. "참여연대도 공동체적 성격이 강화되어야 합니다." 강의가 끝나고 못다한 얘기를 나누는 시간에는 그동안 참여연대 느티나무의 강좌에 참여했거나, 참여연대 회원들이 "나 자신이 겪은 5.18, 그것이 지금 나의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밤늦도록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분이 여행지에서 당일 가져온 주먹밥과 어묵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광주항쟁이 하나의 밥상공동체였다고 하는데, 역시 뒷풀이시간에도 이렇게 아주 맛있는 걸 나눠먹으니 분위기가 더욱 좋았습니다.
글 : 아카데미느티나무 천웅소 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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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그 매력과 두려움 | 공동체 5강 - 사례 : 청년 이그나이트 그리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5/14) | 느티나무 | 2012.5.21 | |||
공동체란 나에게 허상에 가까운 단어다. 실제로 실체가 없기도 하고 정확한 정의를 잘 모르겠기도 하고. 막연하게 드는 느낌은 ‘설레임’보다는 ‘두려움’에 가깝다. 주위에서 쉽게 접할수 있는 사람의 집단이지만 워낙 개인주의가 사람들에게 익숙해져있는 시대라 어딘가에 소속되어있음을 속박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이런 사회에서 어딘가에 완벽한 공동체를 꾸리기란 가능할까? 공동체에 대한 막연한 고민들만 머릿속에 떠오르던 나. 아쉽게도 5강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듣게되었다. 다음시간(6강)에는 실제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다고 하니 논의가 상당히 진행되어 있는 듯. 이번 강의는 마지막 사례발표로, 청년 이그나이트와 온라인 협업공동체 크리에이티브 커먼즈(Creative Commons, 이하CC)에서 각각 한명씩 참여해 자신의 공동체를 소개했다. 1. 청년 이그나이트 ‘전태일을 계승한다’는 말을 듣고 살짝 오해했다. 운동권임을 티내기 위해 그런 줄 알고. 우리 사회에서 ‘운동권’이라는 단어는 그 한마디로 공동체를 규정한다. 경험해 볼 것도 없이 저사람들은 뭔가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는. 그러니 굳이 티를 낼필요는 없을텐데. 왜? 섣부른 걱정과는 달리 좀더 인간적인 의미의 전태일정신을 본받고 싶다는 청년 이그나이트의 대표 김선경씨. 자신의 버스비를 힘들게 일하는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주는 데 쓰고 자신은 몇시간이 걸려 집까지 걸어갔던 그 마음을 계승하고 싶다고 했다. 혼자 살지 않고 타인과 나누려는 마음. 경쟁에 내몰려 남을 돌아보지 못하는 청년세대가 경쟁에서 벗어나 좀더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할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청년의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 미친듯한 실업률 높은 등록금등등. 이러한 문제를 청년들이 힘을모아 해결해나가기 위한 단체가 청년 이그나이트다. 2009년, 같은 고민을 가진 5명이 모여 제일먼저 한 일은 카페를 만든 것. 모임 공간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참고한 모델은 오바마 대통령 당선의 주역이었던 ‘커피파티’와 ‘마을회관’.마을회관의 발상이 참신했는데, 시골의 마을회관처럼 뭐든 필요한 것들이 다 있는 곳을 만들고 싶었다고. 그런 공간을 만들기 위해 청년들은 한푼 두푼 모아 종로 한복판에 카페를 마련했다. 이후 카페를 기반으로 다양한 활동을 했다. 여러 세미나와 선거참여운동, 재개발지역 마을꾸미기 등등. 그들의 취지에 공감, 일을 함께하는 사람들은 5명에서 50명으로 늘어났다. 그는 이번해를 시즌2로 정의하며, 구성원과의 소통을 어떻게 잘 할 것인가, 재정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을 찾을 예정이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집합할 공간을 가진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같이 모여 이야기할 공간이 없으면 그 공동체는 너무도 쉽게 해체 위기에 내몰린다. 약속하지 않으면 만나지 않는 관계를 맺기 때문일까. 언제나 항상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생각만 하는 건 아니니까. 공유하는 공간이 있다면 그래도 조금은 안심할 수 있다. 아무 때나 그 공간에 가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항상 있다니 생각만해도 소속감이 생기지 않는가. 또 그 공간을 기반으로 주위의 지역사회와 교류할수 있는 기회도 생긴다. 그런 점에서 카페를 만들었던 일은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여러 가지 좋은 점에도 불구하고 공간을 가진다는 것은, 돈이 없으면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용기를 내서 공간 만들기를 실행한 이그나이트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입이 안정적이게 자리잡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월세와 세금 등등으로 인건비를 마련하진 못한다. 언젠가 내가 아는 가난한 활동가 언니와 공동체를 위한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그 언니는 공동체 주택을 운영하는 게 평생의 ‘꿈’이라고 했다. 지나가다가 서있는 허름한 빌라를 보면서 입맛을 다시며 하는 말, “저 땅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뭐든 할 것 같은데..”. 재벌들은 너무도 쉽게 가지고 있는, 공간이 없어 공동체에 대한 열망은 여전히 그녀에겐 꿈이다. 2.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Creative Commons Korea, 이하CC) CC의 사례발표는 나에게 뜻밖의 충격이었다. 공동체라는건 고정된 사람들이, 끈끈한 유대감을 바탕으로 지속된다는 나의 편견을 산산조각내주었기 때문이다. 마을공동체 붕괴 이후의 세대인 젊은이들은 예전 어른들처럼 태어날 때 부터 소속되어있는 공동체가 없다. 그러다보니 주로 스스로 공동체를 찾아나선다. 이는 현실세계 뿐 아니라 가상세계인 인터넷에서도 마찬가지다. 네티즌들은 여러 동호회, 커뮤니티들을 통해 비슷한 흥미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CC는 이런 인터넷 환경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사실 CC라는 단체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듣는 나로서는 그들이 하는 일을 이해하기에 좀 어려웠다. 주로 온라인 컨텐츠 저작권 문제에 관련된 일을 하는데, ‘저작자 권리를 보호하면서도 저작물 전파에 제약은 없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를 기반으로 내놓은 저작권 규약이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이하 CCL, Creative Commons License)다. CCL은 아직 한국에서 공식지정된 규약은 아니지만 외국에서는 훨씬 널리 쓰이고 있다고 한다. 하는 일도 다소 생소했지만 조직이 운영되는 방식도 생소했다. 온라인 협업 공동체이므로 일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빠르게 모이고, 일을 한다. 예를들어 ‘저작권 관련 외국 원서 번역’이라는 일이 있으면 하고싶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일을 하는 식이다. 일을 하면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은 모임을 만들어서 공부를 하기도 하고. 또 CC의 멤버가 다른 곳에 가서 중심이 되어 공동체를 만들기도 하고. 쉽게 모였다 흩어지는 인터넷 환경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공동체라서 그런지 결집과 해체가 자유로운 것 같았다. 느슨한 집단도 공동체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좀더 구성원의 다양성을 인정 할 수 없을까, 변하는 구성원들 속에서도 좀더 끈끈한 유대관계를 가져갈 방법이 없을까 등등... 주요 업무에 대한 이야기만 들었을 때는 공동체인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가 고민을 들으며 공동체구나! 라고 생각했다. 관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 이를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보여서다. 사무처와 상근자를 만들기도하고 없애보기도 하고, 서로 평등한 소통을 하기 위해 회의방식을 바꿔보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통해 지금의 CC가 만들어졌다. CC나 이그나이트, 각각 공동체의 특징은 있겠지만 그들의 고민은 모든 공동체가 현재 하고있는 고민일 것이며 미래에 할 고민일 거다. 이번 수업은 수강생에게 실제 공동체 운영에 따른 고민을 한번쯤이라도 미리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지게 했다.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과정은 분명히 다사다난하고 순탄치 않은 과정이다. 하지만 이 경험과 과정은 쓸데없는 게 아니라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 삶의 궤적이 한군데에서 만나고, 그것이 함께 뻗어나가는 과정일테니까. 후기작성 | 신동은(자원활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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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이슬람 사회와 문화 | 문학으로 읽는 이슬람 6강 - 황금마차는 하늘로 오르지 않는다 (5/9) | 칸쵸 | 2012.5.18 | |||
[문학으로 읽는 이슬람 사회와 문화 6강]
참여연대 느티나무 아랍문학 마지막 강좌는 살와 바크르의 책 ‘황금마차는 하늘로 오르지 않는다’로 진행되었다. 살와 바크르는 이집트의 페미니즘 여성 작가이다. 기존의 아랍 여성 작가들의 일반적인 페미니즘 경향은 남성의 억압이 여성 고난의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살와 바크르는 여성 고난의 원인이 남성 중심 사고와 사회적 가치관을 비판 없이 인정하는 남녀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작품들에는 주로 하층민에 속하는 여성들의 고난을 형상화되어 있다. 그러나 그 고난의 원인을 규명하고 남녀 간의 투쟁이나 남성에 대한 여성의 적대적 태도를 지향하기보다는 여성 인격을 폄하하는 사회 관습과 가치관 개혁을 통해 남녀 해방이 이루어지는 것을 그리고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15명의 여성 재소자들은 단지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가 아니라 남성 중심의 가치관에 희생된 희생자이기도 하다. 그들이 정상적인 삶의 범위를 벗어나 교도소에 오게 된 이유는 남성들의 폭압, 권리 침해 같은 계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작가 살와 바크르가 바라보는 여성문제, 사회문제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구체적인 예가 되고 있다. 지난 5강에 이어서 강의를 진행해 주신 김능우 선생님께서는 책에 대한 설명에 앞서 이집트 여성 문학의 발전과정과 여성해방 운동의 전개 과정을 함께 설명해주셨다. 이집트의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은 19세기 후반 시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아랍문예부흥 운동과 무함마드 알리의 현대화 계획에 힘입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점차 여성 교육이 증가함으로써 자신들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던 여성들의 의식은 깨어나게 되었다. 작가 살와 바크르에게도 글쓰기는 단지 억눌린 감정을 발산하는 통로만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구축하는 하나의 방법이자 도구로 작용했다. 수업이 끝나고 1층에 있는 까페 통인에서 김능우 선생님과 함께 하는 뒷풀이가 이어졌다. 수강생들은 대부분이 여성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책 내용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쉽게 형성되었다. 남성들에게 핍박을 받았던 여성들의 복수가 통쾌하게 들렸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집트에서 여성문제를 제기한 남성 지식인들 중 하나인 까심 아민 (1863~ 1908)은 근본적으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다고 말했고 여성의 참여 없이 이집트는 문명국가로 나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났지만 여성은 여전히 소수 집단으로 존재하고 동등하게 대우받지 못한다. 그러나 살와 바크르가 생각했던 것처럼 이 문제들은 여성들이 연대해서 남성에 대항하는 방식만으로 해결 되기는 힘들 것이다. 또한 페미니즘이 하나의 권력 집단이 되는 것도 또한 페미니즘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글 : 최혜진 수강생,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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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정치의 고전으로 오늘을 읽는다 : 시민정치와 시민불복종 | 시민정치와 시민불복종 1강 -소로우가 생각한 시민불복종은 무엇인가 (5/15) | 느티나무 | 2012.5.17 | |||
<시민정치와 시민불복종> 1강- 소로우가 생각한 시민불복종은 무엇인가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
1
지금은 제목조차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예전에 간디와 관련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의 삶이 모순적이라 느껴졌고 그 때문인지 예상했던 것보다 큰 감명을 받진 못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억에 남는 건, 그가 보여준 비폭력 저항운동이었다. 소금을 구하기 위해 바다까지 걸어가는 간디와 그의 뒤를 따르는 기나긴 행렬 그리고 그들의 머리위로 떨어지는 가차 없는 몽둥이질. 그렇게 맞고 터지고 피흘려가면서도 누구하나 부당함을 소리쳐 외치지 않는 그 괴이한 침묵의 저항을 바라보면서, 난 무엇보다 당혹감을 느꼈다. 정의롭다거나 평화적이라거나 그런 지고지순의 가치와는 먼, 이건 아니지 않는가 하는 참담함이 먼저였다.
저항.
이 단어를 들을 때마다 연달아 떠오는 비폭력, 불복종이란 말들이 그래서 내겐 여전히 명백하지 않는 형태로, 판단이 유보된 상태로 내 삶에서 비껴나 있다. 이 강의를 듣기 시작한 건 그래서였다. 무엇이 불복종이고 무엇이 저항인가, 비폭력은 항상 올바른 것인가, 폭력을 동반하는 저항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인가... 이제 유보된 판단을 불러들일 시간이다.
2
첫 시간은 소로우의 이야기다. ‘월든’의 작가로만 익숙한 그가 실은 처음으로 불복종의 개념을 제안한 사람이었다는 조금은 쇼킹한 사실. 그리고 이어지는 그가 남긴 유명한 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실천하며 사는 것, 이것은 곧 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저항해야 한다는 명제와 연결된다. 이것을 좀 더 확대시키면, 잘못을 저지르는 정부에게 는 고집스럽게 맞서야 한다는, 그렇게 우리의 삶은 올바르지 않는 것들과 끝내 타협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는 실천적 강령이 된다. 결국, 내 삶을 내 의지대로 살며 자신의 존엄을 스스로 지키려하는 자는 ‘불복종’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점 없는 정부, 순도 백의 정의로운 사회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터이니 말이다.
이처럼 ‘불복종’은 다만 복종하지 않는다는 수동의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우리의 의지대로 살 수 없게 만드는 이 사회의 폭력적 시스템에서 풀려날 수 있게 대화의 길을 모색하고 구체적인 저항의 활동을 벌이는, 무척이나 적극적인 능동의 의미이다. 나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상대나 세상을 향해 저항하거나 맞서지 않는다는, 그런 좀 이상하고도 논리적이지 않는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다.
3
그럼 무엇이 저항인가? 대체 어쩌란 말인가?
소로우는 이렇게 답한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이런 말도 했다. 악을 뿌리 뽑는 데 자신을 받치는 것이 의무는 아니지만 그러나 적어도 악에서는 손을 떼어야 한다고. 악을 뒷밭침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사람의 의무라고, 그렇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어깨를 밟고 올라서는 일은 하면 안 된다고 말이다. 그가 꿈꾸는 좋은 삶은, 내 삶이 나의 의지대로 흘러가는 것, 그를 위해 남을 짓밟는 짓은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삶이 불가능하게 하는 것들, 그 악의 축을 향해 복종하지 않고 저항하는 것이다.
이런 삶을 실험하기 위해 그는 윌든으로 갔다. 호숫가에 허름한 오두막 하나를 짓고, 먹을 만큼만 생산하고, 최소한의 소비를 하며, 남는 시간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들로만 채웠던 그 소박하고 간결한 삶 앞에서 난 신의 자리 가까이에 다가간 자의 모습을 본다.
4
윌든 호숫가로 갔을 때, 소로우의 나의 28세였다. 강의를 맡아 주신 하승우 샘이 덧붙이신다. 불복종, 저항 이런 거 많이 배우고 다 커서 준비가 충분히 된 다음에 하는 거, 그런 거 아니라고... 맞다. 자신이 스스로를 가치 있게 여기고 그 존엄을 지켜내는 삶을 살고자할 때, 결국 우리는 일어나 싸우게 되는 것일 게다. 내가 여기 있다고,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며, 각자 자신의 삶터에서 걸어 나오는 그 모습이 ‘시민불복종’의 진짜 얼굴일 것이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농민들은 낫과 곡괭이를 들고 일어섰으며, 노동자들은 기름에 전 옷과 굉음을 내는 기계차를 몰고 거리에 섰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있다. 나도 내 삶터에서 들고 일어나 거리로 나가야했기에 몇 년 전 종로 시위 현장에 큰 아이를 태운 우모차를 몰고 나간 적이 있다. 그 모습 그대로가 나의 정체성일 테고, 나의 삶이였을 것이다.
시위현장에서 얼굴도 낯선 이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다가도 때가 되면 아이의 입에 젖병을 물리고 한데서 기저귀를 갈아야 했던, 그 날것의 삶 그대로 말이다.
그 아이가 이제 커서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때때로 난 아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러고 보니, 잘 몰라서 그렇지 그동안 참 불복종의 삶을 꾸준히 살아왔던 것 같기도 하다.
다음 강의는 한나 아렌트다. 소로우가 개인의 양심을 중요하게 인식한 것에 비해 한나 아렌트는 양심의 문제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라는 주장을 한다하니....
다음 강의 또한 무지하게 기대된다.
후기작성 : 박현아 수강생, 자원활동가
강의자료 : 강의자료_시민불복종_1강.pdf
월든(Walden) 북트레일러 ☞ http://youtu.be/IN5vEU8Xz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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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 Ⅰ | 한국근현대사 4강 - 갑신정변의 길을 따라 걷다 (4/28) | 느티나무 | 2012.5.14 | |||
“자, 오늘 여러분은 저와 함께 갑신정변 군이 되어 그 길을 따라가 보는 겁니다.”
참여연대 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 4강은 ‘갑신정변의 길을 따라 걷다’라는 제목의 답사로 진행되었다. 야외수업을 참여하는 수강생들의 눈빛은 초롱초롱했다. 화창한 날씨였다.
갑신정변은 1884년 음력 10월 17일 우정총국의 낙성을 기념하는 축하연을 틈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등 젊은 양반 관료들이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하여 일으킨 정변이다. 이들의 계획은 지금 풍문여고 자리인 안동별관에 화재를 일으켜 소동을 일으키고 전,후,좌,우 군영의 4영사를 죽이면서 시작되는 것이었으나 화재가 생각보다 쉽게 진압되자 민가에 불을 지르면서 거사를 시행하게 된다. 이때 축하연에 참석했던 민영익은 밖에 나갔다가 일본 무사에게 변을 당하였다. 그는 중상을 입었지만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왔고 그 때 연회장에 있었던 독일공사 멜렌도로프는 그를 자신의 집에 옮기고 미국 의료 선교사 알렌의 치료를 받게 한다. 그는 몇 달 뒤 완쾌된다.
갑신정변군은 우정총국에서 창덕궁에 가기 전에 일본 공사관으로 향했다. 그 이유는 일본공사에게 자신들의 거사에 지원을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한 확답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갑신정변을 주도한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지원 없이는 움직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일본 공사관은 예전 공사관이 임오군란 때 전소되었기 때문에 부마 박영효의 집을 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위치는 현재 인사동 안에 있는 경인 미술관 자리이다. 이곳에서 일본 공사에게 병력 지원에 대한 확약을 받은 갑신정변군은 비로소 창덕궁으로 향한다.
갑신정변군은 금호문을 거쳐 숙장문, 합문으로 들어가 고종에게 청이 쳐들어 왔다는 거짓보고를 하고 자신들은 고종을 보호하기 위해 왔다고 한다. 고종은 철종의 부인인 왕대비, 효명세자의 부인인 조대비 등 왕실 식구들을 거닐고 금호문으로 빠져나가 정변군의 비호를 받아 경우궁으로 향한다.
개화파의 입장에서 경우궁은 창덕궁에 비해 규모가 작기 때문에 왕실 가족을 감시하기엔 훨씬 더 수월한 곳이었다. 그 당시 왕이 자리를 옮기면 신하들은 알현을 하게 되어있었는데 정변군은 경우궁에 고종에게 알현을 하러 온 신하들을 한 사람씩 죽였다.
그러나 경우궁은 생활공간이 아니라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사당으로 죽은 이의 혼을 모신 곳이었기에 생활하기에 매우 불편했다. 왕과 왕비는 계속해서 환궁을 요청했지만 개화파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공사는 개화파와 상의도 없이 이를 수용했고 왕과 왕비는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간다. 정변이 일어난 그 다음날 저녁이었다.
셋째 날, 창덕궁에서는 전투가 일어났다. 일본군과 청나라 군대와의 싸움이었다. 이 때 조선의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다 청나라의 편에 서서 일본군과 싸웠다. 정변군이 일본으로부터 병력을 지원받았다고는 하지만 실상 이때 들어온 일본군은 300명이 채 되지 않는 숫자였다. 일본군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후퇴하고 이 때 고종, 홍영식, 박영교는 북관묘로, 왕비, 대왕대비, 세자는 북문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개화파 일행은 거사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을 가게 된다.
급진 개화파들이 일본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이유는 그들의 지지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정변 개입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훈령을 받게 되자 정변군은 힘을 잃고 결국 정변은 실패하게 된다. 그러나 거사가 실패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백성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에게 갑신정변은 급진 개화파가 외세를 끌어 들여 국왕을 속이고 중신을 죽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만큼 개화파는 권력을 장악하는 것에 급급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백성들은 그들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갑신정변은 3일 천하라고들 말한다. 급진 개화파들은 그들이 정변만 일으키면 조선이 근대 국가가 되는 양 무리하게 거사를 거행했지만 그들의 천하는 그들이 왕과 있었던 3일 밖에 지속되지 못했던 것이다. 치기어린 꿈이었다.
참여연대 4강 답사는 개화파의 이루지 못한 개혁의 꿈을 좇아 우정총국에서 일본 공사관으로, 마지막으로 창덕궁에서 일정이 마무리 하였다. 주진오 교수님은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려는 노력이 없다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씀을 끝맺었다. 공감을 얻는 것의 중요성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화두로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기작성 | 최혜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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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그 매력과 두려움 | 공동체 4강 - 문래동 예술인 마을, 용산 빈집 공동체 사례 보기 (5/7) | 느티나무 | 2012.5.10 | |||
<공동체, 그 매력과 두려움> 4강 후기 누군가는 또 다시 누군가와 만나게, 그렇게 돼 있다. 아니라고? 음.... 아님, 말고..... 벌써 강의가 네 번째 시간을 맞았다. 첫날 품었던 공포심과 의문들... 그것들을 잘 기억하고 매 강의에 들어갔다. 그건 공식을 대입해서 풀어내야 하는 수학문제 그런 것의 일종이었다. 문제가 있으니, 해결 공식이 존재할 것이고 그렇다면 답 또한 있을 터이니, 강의 중간 중간 흘려질 공식들을 잘 잡아내서 멋지게 답을 맞춰내리라... 아, 이 범생이의 자세! ㅋㅋㅋ 근데 강의를 듣다보니 커다란, 실로 커다란 문제가 발생했다. 처음에 ‘문제’라고 상정하고 시작했던 것들, 그것들이 사실은 그리 문제가 될 게 없더라는 것. 이러면 공식도 답도 구하기 어려워진다.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해 밖에서 내내 구경만 하던 사람들이 만들어 낸 공포심이 점점 부풀려졌던 것, 그것이 첫 강의 때 제시되었던 각종 문제와 의문들의 실체가 아니었나 한다. 개인의 자유가 어떤 식으로든지 침해당할 것이라는 뭇사람들의 우려 또한, ‘그럼 넌 함께 살지 않는 관계로 무한히 자유로우냐?’라는 반문 앞에서는 할 말을 잃는다. 즉, 첫날 제시되었던 숱한 문제점들과 의문들의 성이 와르르 무너졌다는 게 지금까지 내 입장이다. 그 문제들이 사라지게 된 이유는 어찌 보면 무척 단순하다. 공동체든 아니든, 사는 건 다 지지고 볶는 거, 딱 그 수준인 관계로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 미워하고 욕하고 싸우고 뒷담화가 무성하다. 제일 겁나는 건 누군가 삐지는 일이고, 그동안도 문제가 많았고 또 지금도 새로운 문제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다. 하여 어쩔 수 없이 누군가는 욕먹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는다. 공동체도 그렇게 산다. 뭐 더 폼 날 것도 더 도덕인 삶일 것도 없다. 단, 좀 더 재밌기는 하다. 그러니, 강의를 들으며 발견해 낸 공식과 해답은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하다. 그게 바로 사는 거라는 거! 공동체라고 다르지 않아.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하고 싶은 놈이 나서서 하면 되는 거고, 문제가 생기면 만나서 얘기하면 되는 거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뭐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렇게 흘러간다. 아! 여기서 발견한 공동체의 ‘위대한 정신’은 바로 이것이다. ‘아님, 말고.... ’ 이 너무도 적절한 삶의 자세 앞에서 지금 난 잠시 할 말을 잃고 있다. 근데, 이건 사실 2강 때, 성미산 마을 이야기를 들으며 느낀 점들이다. 그리고 난 4강의 후기를 쓰기로 돼 있다. 그러니 이젠 그걸 쓰자. 문래동예술인마을 : 철공소 노동자들과 예술가들의 만남 예술가들은 어느 시대나 그렇게 가난한 걸까? 문래동예술인마을을 일군 한 무리의 예술가들도 예외 없이 가난했다. 작업공간이 필요한 그들은 문래동에 빈 공간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불법적으로 점거하기 위해 들어왔다. 이른바 스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공간’이 지나치게 사유화되고, 있는 자들에게만 편중되어 있다는 것이 스쾃의 문제의식이다. 근데, 와보니 점거를 할 필요가 없었다. 임대료가 너무 쌌다. 20평 남짓한 공간이 보증금 200에 월세 20만원... 이러니 불법은 불필요해졌다. 얼마든지 합법적으로 예술해도 괜찮은 조건이 아닌가. 그렇게 예술가들은 문래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 이후... 너무도 많은 일들이 그곳에서 벌어졌기에 여기서 일일이 다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재개발 문제를 가지고 지역민들과의 마찰도 있었다. 철공소 노동자들과 함께 산악회도 꾸리고 있다. 텃밭 사업도 하고 지역 아이들과 함께 문화예술 수업을 하기도 한다. ‘문래예술공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그 운영방식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고 풀어야할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강의를 직접 해주셨던 김윤환(예술과 도시사회연구소)씨는 조합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철공소 단지를 포함한 예술마을을 가꾸는 목적의식적 결사체인 예술생산자조합... 그런 조합이 만들어진다면 문래예술공장도 예술인들의 손에 의해서, 마을의 손에 의해서 운영될 수 있을 것이다. 문래동에서 작업하고 있는 예술가들은 개별적 관계망을 가지고 움직인다. 소통구조도 제각각이어서 생산의 시너지가 약하다. 이 네트워크를 조합의 형태로 묶어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래야 창작네트워크가 스스로 사이클을 만들어내 ‘문래동표 물건(작품)’이 탄생하게 될 것이라고... 이런 생각을 말하고 다니는 그는 예상대로 욕을 많이 먹고 있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를 의심한다. 너, 문래예술공장을 차지하고 싶은 거지? 공동체... 참 힘들다. 공동체에서는 나서서 무언가를 제안하는 사람들이 먼저 총 맞는 구조인듯...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공동체의 두려움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가 속한 문래동예술인마을은 계속 무언가를 품고 있다. 그게 공룡알이든 메추리알이든, 품었으니 때가 되면 나올 것이다. 그때, 보러 가면 된다. 주거공동체 ‘빈집’ : 너무 급진적이야.... 혹시 공산당? ㅎㅎ 빈집의 이야기는... 듣는 내내 충격이었다. 우선, 그 탄생신화가 그렇다. 어느 부부가 있었는데, 그들이 자신들의 집을 사유화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내놓았다. 아니, 준 게 아니라, 공간을 공유하기 위해 내놓은 것이다. 필요하면 들어와서 함께 살자.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내가 사는 방을, 거실을, 특히 화장실을 내 준다는 것... 이 얼마나 급진적이 사유방식이란 말인가. 그렇게 살게 된 ‘빈집’은, 그래서 주인이 없다. 그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들 모두가 손님일 뿐이다. 게스트하우스? 뭐 비슷하긴 하지만 그곳에는 호스트가 있으니까 사실 굉장히 다르다. 주인이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가족과 별반 다르지 않은 듯 보인다. 다만, 그 가족공동체가 양성평등이 실현되고 가사노동이 공평하게 분배되고 권위적인 가장의 존재가 없다는 것 그게 일반적인 가족공동체와 크게 다른 점이긴 하다. 식구들이 많으면 많은대로 한방에서 같이 자기도 하고 또 누군가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하면 형편껏 그 요구를 들어주기도 한다. 빈고라는 신협 비슷한 체계도 갖추고 있고 빈집에서 운영하는 가게도 있다. 함께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은 세미나를 만들기도 하고 마을잔치도 하고 연극공연도 하고 밴드 활동도 있다. 하긴, 저희 공동체엔 무슨 무슨 프로그램들이 있어요... 라는 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모여 있으니 맘만 맞으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고 또 아니다 싶으면 바로 엎어질 수 도 있는 거지... 빈집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올해 갓 20살이 된 앳된 아가씨 둘이 와서 이야기에 동참했다. 그들이 했던 말들을 짧게 요약하면, 빈집에서 함께 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변했다, 가끔 부모님 집에 들르는데 그때마다 충격을 받는다, 냉장고를 3대나 두고 쓰다니, 또 웬 음식은 그렇게 많이 하고 버리는지... 그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발언은 들깨의 이야기였다. “처음에 들어올 때 갖고 있던 나 자신의 욕구, 욕망조차 변하더라구요.” 아니, 공동체가 대체 뭐길래 욕망의 구조까지 흔들어 놓는단 말인가... 우리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사유화하기 힘든 것이 살림과 그 살림을 사는 공간일 것이다. 그래서 주거까지 함께하는 공동체가 더욱 위대해(?)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빈집이 유독 튀어 보이는 이유는 그 구성원들의 성격에 있다. 빈집은 무엇인가를 공유하는 이들의 모임이 아니다. 무슨 목적을 이루기 위해 뭉친 사람들도 아니다. 그저 살 곳이 필요한 사람들이 들어와 함께 사는 곳일 뿐이다. 계약기간 같은 것도 없다. 필요하면 들어와서 며칠 같이 살다가 불쑥 나가버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와...진짜... 급진적인 공동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이렇게도 공동체가 되는 거구나 싶다. 물론 이곳에서도 문제는 발생하고 다툼이 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니 미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꿈꾸는 것은 대개가 소통이 있는 삶이다. 하지만 소통은 아름다운 내용의 대화만 오고가는 게 아니다. 오히려 많은 대화가 다른 이 혹은 이토록 불완전한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니 웃을 일 만큼 싸우고 울 일도 있는 게 당연하다. 외려 그런 삶이 더 완전해 보이기까지 한다. 사는 게 그런 거니까 말이다. 지지고 볶고, 싸우고 화해하고, 모였다 흩어지고, 아니면 갈라서기도 하고... 결국 우리는 그런 다툼이 있을까봐 지레 겁먹고는, 아이고 그렇게 피곤하게 살 필요가 뭐 있어 하면서 이렇게 외롭게들 살고 있는 거다. 아니 단지 외로움의 차원이 아니라 뭔가 좀 비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손으로 움켜쥐면 손가락 사이사이로 죄다 흩어져버리는 모래 알갱이 같은 삶. 사진첩을 들추면 온통 내 피붙이 밖에는 다른 얼굴들이 없는 기괴한 삶 말이다. 그러면서 위로한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는데 뭐... 근데 이 강의를 듣다보니 다들 그러고 사는 게 아니었다. 문래동도 그렇고 빈집도 그렇고 일단 몇몇의 사람들이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그려나가니 그 만남이 자꾸 옆으로 번져만 갔다. 그렇게 우리네 삶은,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와 만나게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런 깨달음 속에서 나만 이렇게 게으른 삶을 사나 싶어 또 다시 겁이 난다. 그동안 나의 삶은 구더기 무서워서 장 같은 것은 그냥 마트에서 사다 먹는 삶이었다. 근데 다른 이들과 인생을 나누며 살아가는, 나의 시간과 공간이 타인의 그것 속에서 어우러지는 달콤쌉싸름한 쌈장 같은 삶은 마트에 안 판다. 겁이 나고 무서워도 이제 된장도 담그고 고추장도 담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뭐라고 담그려는 시도를 해봐야 거기서 쌈장이 나올지 구더기가 나올지 볼 수 있지 않을까. 구더기가 나오면 발로 밟아 죽이면 된다. 아예 장독을 엎어버릴 수도 있는 거고..... 아니라고? 아님, 말고.......... 후기 | 박현아(수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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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이슬람 사회와 문화 | 문학으로 읽는 이슬람 4강 - 오르한 파묵<이스탄불> (4/25) | 느티나무 | 2012.5.2 | |||
이스탄불은 오르한 파묵이란 작가를 만든 곳입니다. 오르한 파묵이 만약 이스탄불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과 같은 소설을 쓰지 못했을 거예요.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책에서 도시와 문학에 대한 관계를 연구했었죠. 그만큼 이스탄불이라는 도시는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공간입니다. 나보코프, 네이폴 같은 이민 작가들도 이렇게 말했지요. 현재 터키의 수도는 앙카라이지만 이것은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선포되면서부터 지정된 곳이라고 한다. 그 전까지는 이스탄불은 동방 그리스도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정치, 문화,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던 도시였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 현재의 이스탄불인 것이다. 그처럼 이스탄불에는 과거의 영화를 간직한 문화유산들이 많다. 일례로 이스탄불에 있는 술탄 아흐멧 자미라는 사원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곳은 오스만 제국 14대 술탄 아흐멧 1세가 1616년 준공한 사원으로 블루 모스크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곳은 이슬람의 자존심이라고 할 정도로 아름답다고 한다. 오르한 파묵은 과거 문화, 정치, 종교의 중심지로 찬란했던 이스탄불이 지금은 세계의 변방으로 밀려난 것을 자각했다. 부유하게 자랐던 그에게도 외곽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슬픔과 분노가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글쓰기란 그 깊숙한 비애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사람들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닮아 있다는 낙관적인 믿음을 가지고 언젠가는 자신의 글이 읽히리라는 신념으로 꾸준히 글을 썼다. 그는 터키에도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그것이 서양 문명 중심으로만 흘러가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 문제의식은 역시 그의 작품에 오롯이 녹아있다.
“여러분 오르한 파묵에 대해 알고 싶으면 이스탄불을 먼저 읽으세요.”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해 정말 치밀하게 탐구하는 작가였어요. 질의 응답 시간에 계속되었던 논의들은 우리가 사는 공간에 대해서, 서울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것은 앞서 얘기했던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제기되었다는 도시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글 : 자원활동가 최혜진 수강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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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이슬람 사회와 문화 | 문학으로 읽는 이슬람 4강 - 오르한 파묵<이스탄불> -파묵의 이스탄불 그리고 우리의 서울 (4/25) | 보고타 | 2012.4.27 | |||
오르한 파묵을 다룬 세번째 수업이자, 이슬람 문학 수업의 4강은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을 다뤘다. <이스탄불>은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오른 터키의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자전 에세이이다. 그러나 한 유명한 소설가의 자전 에세이라 하여, 자의식 충만한 예술가의 '난 어떻게 성공했는가'라는 자기자랑 가득한 자서전이라 예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 책의 제목은 '이스탄불'이다.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만큼이나 이스탄불에 대한 서술에 책의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또한 한 때 세계의 중심이었던 도시에서 지금의 변방의 도시로 전락한 이스탄불의 비애어린 영혼이 책의 전반을 지배하는 주요한 분위기로 자리잡고 있다. 그는 그 자신의 삶에 대한 서술이든 이스탄불에 관한 서술이든, 책의 곳곳에서 음울한 흑백의 색깔을 띤 이스탄불의 '비애'를 계속해서 등장시킨다. 이 책에서 그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재능있었고 뛰어났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이 평생을 살아온 고향이자 자신의 문학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이스탄불'과 그 이스탄불 속에서, 이스탄불의 영혼을 흠뻑 머금고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해서 진솔하게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스탄불의 수많은 폐허들과 뒷골목을 아주 좋아했다. 오르한 파묵이 방황하던 젊은이였을 때, 그는 이스탄불의 골목 골목을 수도없이 걸었다. 이 책을 읽은지 몇 달이 지나서 내용의 대부분이 가물가물 하지만 그가 이야기하던 이스탄불의 지저분한, 곳곳에 폐허가 있는 가난한 변두리 마을의 골목들과 그 골목들을 찍은 흑백사진들만은 여전히 인상깊게 남아있다. 그가 말한 이스탄불의 '비애'라는 것도 이렇게 이스탄불 곳곳을 걸으면서 느꼈고, 그도 모르게 흡수했을 것이다. 한 때 세계의 중심이었던, 도시의 과거의 위용을 슬프게나마 보여주는 폐허들, 폐허, 화재터, 허물어진 벽들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는 골목의 빈곤함과 지저분함 속을 걸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 도시 곳곳에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는 '비애'란 영혼을 잠식하는 슬픔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승화된 아름다움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비애'는 그의 예술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의 음울한 영혼과 그 영혼 속에서 비애에 젖어 고군분투하던 오르한 파묵, 그리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과 예술을 발견하고, 창조성과 삶의 원동력을 이끌어 낸 그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파묵의 예민한 감수성에 감탄하게되는 동시에, 그러한 감수성을 자라날 수 있게 해준 이스탄불이 더욱 매력적인 도시로 느껴진다. 이난아 씨와 수강생들 모두가 공감한 것도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 그러면서 모두가 서울을 떠올렸다. 왜 서울을 치밀하게 느끼고 표현해낸 작가는 한국에 없는가, 과연 서울에 예민한 감수성이 자리잡고 발 디딜 틈이 있는가 등등에 대해 모두가 이야기 했다. 난 이날 오갔던 많은 이야기들 중 서울이 "괴물이 되어간다"고 했던 말이 기억에 가장 남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끊임없이 덩치를 키우며 뿌연 김을 토해내는 서울, 온통 콘크리트 빌딩과 아파트들이 빽빽히 숲을 이룬 서울이 떠올랐고, 무서워지는 동시에 안타까웠고, 그 안에 사는 우리가 불쌍해졌다. 젊은 시절의 오르한 파묵처럼 정처없이 걸어다니길 좋아하던 내가 서울의 곳곳을 보며 느꼈던 '멍해지는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그 윤곽이 보이는 것 같았다. 서울이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어떠한 도시인지 조금은 보이는 것 같았다. 서울은 '흔적'이 없는 도시다. 과거로부터 시간이 켜켜이 쌓여온 '흔적'이 온통 사라졌고, 사라지고 있는 도시다. 그로 인해 '쌓여온 시간이 이어져 존재하는 지금의 공간, 그리고 그 속의 나'를 느끼게 할 감수성은 용납되지 않는 도시다. 사실 나는 흔적이 '사라졌다'라는 표현보다는 '살균'되고 '소독'되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이스탄불을 지배하는 감정이 비애라면 서울을 지배하는 것은 '강박'이다. 빈곤함, 지저분함, 불편함, 이러한 모든 것들을 살균하고 소독하려는 도시의 '강박'. 이 강박이 지배하는 도시에서 과거의 흔적을 안고 있는 일부분, 즉 문화유적들과 오래되고 빈곤한 동네들은 쌓여온 시간 따위는 느낄 수 없게 박제화 되었거나 드높은 콘크리트의 위세에 눌려 불안함과 위태로움 속에 연명한다. 서울은 정말 괴물이 되었다. 그러나 너무나 쾌적하고 깔끔한 괴물이다. 강박이 만들어낸 살균과 소독의 풍경은 서울에 사는 우리에게 가해지는, 시선에 대한 폭력이자 감수성에 대한 폭력이다. 그러나 현대화된 서울의 쾌적함과 깔끔함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수업은 오르한 파묵과 이스탄불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시작했다가 우리와 서울에 대해 이야기하며 끝났다. 이 수업에 모였던 한줌의 사람들만큼은 서울에 대한 안타까움과 우리 자신에 대한 불쌍함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의 소유자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짓고 있는 제2롯데월드 건설현장이 떠올랐다. 동시에 서울을 괴물로 만든 것은 불결하고 가난하고 지저분했던 과거와 단절하기 위한 욕망으로 미친듯이 질주해온 '단절의 근대화'라는 생각을 했다. 100층이 넘는 높이를 향해 치솟아 오르는 제2롯데월드는 바로 이 '단절의 근대화'의 정점에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씁쓸했다. 하지만 이러한 광풍 속에서도 감수성을 놓지 않은 사람들이 모였던 수업이 떠올라 조금은 희망을 가져볼 수 있었다. 이난아 씨가 오르한 파묵이 <이스탄불>을 쓴 것은 서서히 거세어지는 이스탄불의 개발 바람에 대한 저항이자 사라져가는 '비애'의 이스탄불을 영원하게 하기 위함이라 하셨다. 이보다는 훨씬 미약할지라도 이 날의 수업도 괴물이 되어가는 서울에 대한 조그마한 저항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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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이슬람 사회와 문화 | 문학으로 읽는 이슬람 2강 - 오르한 파묵<내이름은 빨강> (4/4) | 느티나무 | 2012.4.20 | |||
소설가란 개미와 같은 끈기로 조금씩 거리를 좁혀가는 사람이며 마법적이고 몽상적인 상상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 자신의 인내심으로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 오르한 파묵 -
오르한 파묵은 터키 문학사상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이다. 참여연대 이슬람 문학 2번째 수업은 그의 작품 중 하나인 ‘내 이름은 빨강’을 주제로 번역가 이난아 님이 진행해 주셨다. ‘내 이름은 빨강’은 터키의 전통 화풍인 세밀화에 대한 전문 지식과 세밀화의 역사 지식을 바탕에 깔고 오스만 시대에 실존한 세밀화가들의 예술가로서의 장인정신과 고뇌를 묘사하고 있으며, 이와 대치되는 베네치아 회화라는 새로운 화풍과 전통화풍의 속에서 갈등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배치하면서, 세밀화가의 살인사건의 비밀을 밝혀가는 추리기법을 채용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소설이 지어진 터키라는 나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터키는 기독교 문명이었던 비잔틴 제국에서 1453년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면서 이슬람 문명으로 변모하는 큰 변화를 겪는다. 역사로 보면 유럽국가라고 할 수 있지만 국토의 97%가 아시아 대륙으로 되어 있는 터키는 다인종, 다민족 국가인 터키는 동양과 서양 문명 사이에 있는 국가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내 이름을 빨강 또한 이런 동서양 문명의 충돌을 세밀화를 소재로 해서 그려내고 있다. 베네치아 화풍으로 언급되는 서양화의 터키유입이 결국 살인사건으로 까지 확대되고 있고 그것이 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르한 파묵은 그러한 동양과 서양의 갈등을 통해 터키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나는 왜 나인가. 왜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는 가 하는 물음이 깊숙이 녹아 있다. 이 소설도 역시 여러개의 화자를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 가면서 분신 모티프를 활용한다. 세밀화는 원근법을 허용하지 않는다. 세밀화는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을 위한 것이기에 모든 것은 신의 눈으로, 신의 입장에서 그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그림이 그려지기까지 고군분투하는 세밀화가들의 모습도 잘 그려지고 있다. 작은 그림을 계속 보다가 결국 장님이 되고 말 정도로 그림에 몰두하는 그들의 열정은 ‘빨강’이라는 색으로 대표될 수 있다. 이 또한 세밀화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난아 교수는 소설과 함께 오르한 파묵에 대한 개인적 성향에 대한 설명도 곁들이며 그가 얼마나 치밀한 사람인지,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강한지 곁들였다. 이 소설은 화가가 되고 싶었던 오르한 파묵이 치밀한 조사를 통해 전략적으로 쓴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소설은 작가의 성향에도 영향을 받았고 그가 살았던 터키 이스탄불에도 큰 영향을 받았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스탄불 가보셨어요? 겨울엔 절대 가지 마세요.” 세밀화라는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없는 소재를 가지고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이끌어내는 재주는 그가 말했던 개미와 같은 끈기로 얻어진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후기 : 최혜진 (수강생, 자원활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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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그 매력과 두려움 | 공동체 1강 - 우리에게 공동체는 무엇인가 (4/16) | 느티나무 | 2012.4.18 | |||
코끼리보다 못한 인간들이 모여 ‘함께 살기’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 생각보다 많은 수강생들이 모여들었다. 모두들 외로웠던 것이다. 첫 강의를 맡아주신 김찬호 선생님의 표현대로, 야생에서 살아남기 경쟁을 벌인다면 너구리, 멧돼지, 지렁이보다 못할 인간들이라 우리는 공동체라는 이 이상한 단어에 매달리고 그렇게라도 서로서로 연결해서 좀 더 나은 삶을 살아 보고자 하는 것이다. 뭉치기만 하면 세상의 반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일들을 도모하다가도 정작 세상에 나 하나만 혼자 남게 되면 끼니 한번 챙기는 것조차 미션임파서블이 되어버리는 그렇게 한없이 나약한 것이 인간의 본성이니.... 우리는 어쨌든, 같이 기대며 살긴 살아야겠는데, 그게 어려운 세상이고, 그게 무서운 세상이 되었으니..... 어쩐다? 매력? 아니 아니.... 두려움! 아니나 다를까... 모인 사람들의 입에서 ‘공동체’하면 떠오르는 답답함과 억압적 이미지에 대한 성토의 목소리가 높다. 나도 한몫 거든다. 그러다 괜히 ‘공동체’라는 이름이 시빗거리가 되었다. 이 말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커뮤니티나 마을이라고 바꿔 불러야한다고 누군가 말한다. 그러나 그 말들 또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함께 살기’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이상들을 담아내지 못한다. 뭐가 좋을까? 주객이 전도가 된 느낌이지만 그렇다고 용어 선택에 대한 고민이 그렇게 무의미한 것만도 아니다. ‘공동체’라는 말이 뭇사람들을 겁주고 있다면, 바꿔야한다. 우리가 모여 앞으로 함께 공부하고 고민들을 나누고 할 시간들 안에서 좋은 아이디어가 탄생하길 기다려보는 수밖에... 목표가 같은 사람들의 모임이 공동체?! 누군가 “어떤 부분에 대해서 동일성을 지니고 목표가 같은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해서 그것이 공동체라 할 수 있는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뒤이어 “결국 어느 것 하나라도 동일성이라는 것이 꼭 획득되어져야 공동체인가?”라는 비슷한 맥락의 의문도 뒤따랐다. 그러자 “비전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의 모임 혹은 공동체는 과연 성립이 가능한 것인가?”하는 반문이 나왔고, “근대화 이전의 농촌공동체 시절처럼 지역적 기반이 자연스럽게 삶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현 시점에서 가능한가, 그것이 타당한가?”하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서로 함께 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면서도 어쩔 땐 그 테두리 밖의 사람들에겐 더 배타적으로 느껴지고 오히려 인간들 사이에 경계를 지어버리는 공동체의 무서운 이중성에 대해서도 우리는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와우, 첫 시간인데 우린 이미 종착역 바로 5분전이다. 그 종착역까지가 쉽지 않겠지만, 이 정도의 수준이면 꽤 농도 짙은 공부가 될 것이다. 빡센 거 말구요.... 다른 거! 공동체의 이미지가 좋지만은 않은 것은, 그동안 우리에게 알려진 공동체들이 대부분 좀 빡 센 것들이라 그럴 것이다. 종교 공동체, 마을 공동체, 예술인 공동체 등 다양하게 있는 듯 싶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공동체의 일반적인 얼굴은 일상생활이나 삶터를 공유하거나 더 나아가 노동이나 경제를 공유하는 형태이기 일쑤고 종교공동체의 경우는 세계관 내지 신념까지 공유해야하니 말이다. 평범한 이들이 선뜻 공유하고 나서기엔 너무 빡세다. 그렇다고 혼자서 꿋꿋이 살아가는 것이 널널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다시 원점? 아니다. 이제부터 좀 더 다양한 공동체를 상상해내는 것이 우리에게 남았다. 함께 모여 24시간 이것도 같이 하고 저것도 같이 하고, 니 게 내 거고, 내 게 니 거고... 이런 거 말고, 그런 공동체가 가능하다면 사실 좀 더 느슨한 공동체도 얼마든지 가능할 테니... 각자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은 모양새대로 조각을 이어 붙여 내가 생각하는 ‘함께 살기’의 모습을 구체화하고 밑그림을 그려나가야 한다. 공동체에 대한 기분 좋은 경험들이 점점 늘어나서 공동체에 대한 악몽들을 몰아낼 때, 사람들은 다시 꿈을 꿀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은 ‘실제로는 모두가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는 잊혀진 현실을 다시 각성시켜줄 것이다. 어떨까? 어쨌거나 함께 살아가라는 특명을 받은 우리 외로운 인간들은, 그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이 세상에서 고통 받고 있는 관계로 앞으로도 계속 ‘함께 살기’에 대해 고민하고자 한다. 이 공부가 끝나갈 쯤엔 뭔가 산뜻한 결론이 났으면 좋겠다. 힘들겠지? 그래도 쫄지마!!! 후기 : 박현아 (자원활동가, 수강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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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 Ⅰ | 한국근현대사 1강 - 흥선대원군이 꿈꾼 나라 (4/5) | 느티나무 | 2012.4.13 | |||
“여러분들은 왜 역사를 공부하나요?”
한 질문과 함께 교과서 저자와 함께 하는 근현대사 산책 첫 수업은 시작 되었다. 참여연대 느티나무 홀을 가득 메운 수강생들의 눈은 빛났다.근현대사 수업은 이번 학기 최대 수강생을 자랑하는 강좌이다.
첫 강좌를 여는 주진오 교수의 말은 이어졌다. “물론 옛 것에 대한 호기심, 알고 싶은 욕구 때문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역사는 지금 현실을 이해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기준을 제시해 주기 때문에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역사를 배우며 어떤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떠한 선택을 했고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 볼 수 있죠. 그것들로 내가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를 낳겠구나. 유추해 볼 수도 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결코 내가 파묻고 싶다고 파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행동에 대해 평가는 결국 내려집니다. 누구나 과거의 행동에 대해 변명은 할 수 있겠지만 후대에게도 떳떳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흥선 대원군이 꿈꾼 나라라는 제목으로 시작된 참여연대 근현대사 첫 번째 강좌는 주진오 교수의 열띤 설명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흥선 대원군 하면 쇄국정책이라는 말이 바로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 역사에 쇄국정책이라는 말은 없고 쇄국정책은 일본에서 쓰이던 표현이라 한다. 대원군은 임금이 대를 이을 자손이 없어, 왕위를 이은 임금의 친아버지에게 주던 벼슬로 우리나라에서 살아서 대원군으로 추대된 사람은 없기 때문에 흥선 대원군을 대원군으로 통칭해도 무방하다. 대원군이 권력을 잡게 된 배경도 그의 권력 실각과 연관되어 해석이 가능하다. 대원군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실질적 수렴청정권이 있었던 조대비가 권력을 이임했기 때문인 것이었다. 대원군은 공식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는 권한의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의 정책은 우리나라의 문호개방을 늦춰 우리나라 근대화에 부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의견들을 우리는 쉽게 접한다. 그런데 그 당시 외세는 평화적으로 문호 개방을 요청한 것일까? 대원군의 정책도 당시 시대 정황과 함께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18세기 후반 조선은 서양으로부터 문호를 개방하라는 통상압력에 시달렸고 이양선도 빈번히 출몰했다. 1866년 제너럴 셔먼 호는 평양에 주둔한다. 통상·교역은 조선의 국법에 금지되어 있으며, 외국선의 입항은 국법에 어긋난 영토 침략·주권 침해 행위라고 지적한 조선관리의 만류를 거부하고 난폭한 행위를 자행, 평양 군민과 충돌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셔먼호의 대포에 맞아 조선 군민 중에 사상자가 발생하자 평양감사 박규수가 화공으로 셔먼호를 불태우고, 선원은 몰살하였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서양에게 문호를 개방하지는 않았지만 외국인에게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양 열강의 통상요구를 거절하고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실시하였던 흥선 대원군의 전략은 왕실의 권위 회복을 꿈꾸고 혼란스러웠던 구질서를 안정화 시키려는 것이었다. 대원군은 실제 권력을 잡자 조선시대 마지막 법전이 된 대전회통을 편찬하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이것은 왕권의 강화를 위해 필수적인 것들이었다.
대원군의 서양인에 대한 박해에는 그럴만한 계기가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가 발생하여 프랑스 함대에 의해 강화도에 있는 외규장각 도서들이 불에 타 없어지는 큰 피해를 입었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현군의 묘를 오페르트라는 유대상인이 도굴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무력으로 들어오는 서양 문물에 맞서 전통을 지키려는 명분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 당시 대원군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었다.
그러나 권불십년이라는 말이 있듯이 대원군의 권력은 오래 가지 못했다. 거기에는 당시 대원군이 시행했던 호포제 개혁에 따른 여파도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호포제는 포(옷감)를 가구(호) 단위로 걷게 하는 세금 제도로, 당시 전세 · 군포 · 환곡 즉 삼정의 문란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었던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종래의 군포는 일반 양인 남성에게만 부과되고 양반에게는 부과되지 않았는데 대원군은 이를 개선해 양반층을 포함한 모든 가구마다 호포를 동등하게 부과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인해 양반층은 대원군에게 등을 돌리게 되고 이는 대원군이 권력을 잃고 실각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개혁이란 추진할 수 없는 역량으로 했을 때는 도리어 뒤집어 지고 마는 결과를 낳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대원군은 1874년 권력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1898년 사망했다. 그의 죽음에는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아들이었던 고종과의 불화도 하나의 이유였다. 조선 말기 정치사의 비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교과서 저자와 함께 하는 참여 연대의 근현대사 첫 강의는 흥선대원군이 꿈꾸었던 시대에서 현재 지어진 박정희 기념관 까지 아우르면서 역사적 평가에 대한 다각적 해석을 권했다. 모든 사람이 한 역사적 사실을 똑같이 평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게 설령 잘못된 선택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는지를 인식하기 바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흥선 대원군, 박정희 그리고 많은 역사속의 사람들이 꿈꾸었던 나라와 우리가 꿈꾸는 나라를 비교해 보면서 우리가 바라는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자양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교과서와 함께 하는 근현대사 첫 강의는 이렇게 시작 테이프를 끊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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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버스 김진숙이 말하는 희망과 배움 | 오픈특강 - 김진숙,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2/29) | 느티나무 | 2012.4.5 | |||
김진숙,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이게 아닌데, 내 맘은 이게 아닌데 널 위해 준비한 오백 가지 멋진 말이 남았는데 사랑한다는.... 그 흔한 말이 아니야 그보다 더욱더 로맨틱하고 달콤한 말을 준비했단 말야 - 뜨거운 감자의 노래 ‘고백’ 中
1
2월의 마지막 날, 김진숙씨가 하는 강연을 들었다. 1시간 남짓 이어지는 강연을 듣는 내내 난 ‘사랑’이라는,그 미치도록 진부한 단어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가, 연단에 서서, 그동안 매체를 통해 알고 있던 내용과 그리고 그 어느 곳에서도 들을 수 없는 내용들을 섞어가며 좌중을 압도하고 있을 때, 난 너무 추상적이어서 가끔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사랑’이라는 게 사람 머릿수만큼 존재하는 거라고 투덜거렸던 바로 그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녀는 강의 내내 단 한 번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난 그녀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강의의 소감을 말해야 한다면 흔해서 멀미가 날 지경인 ‘사랑, 그놈’을 가지고 할 수 밖에 없다고... 난 그날 그녀의 수척한 얼굴에서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발견해내지 못했다.
2 그녀는 겨울의 칼바람이 부는 1월의 새벽, 35m 높이의 크레인에 올랐다. 자신의 동료(김주익)가 129일을 살다 목숨을 저버린 그곳... 그 허공을 향해 오르며 그녀가 품었을 숱한 생각과 감정들을 난 상상해 낼 수가 없다. 너무 추워서 내일 올라갈 껄...하는 후회가 들었다고, 좌중을 향해 그런 농담을 던지며 애써 그녀가 잊으려 하는 그 깊고 어두운 마음의 자락을 나로서는 도저히 가늠해 볼 길이 없었던 거다. 애초에 사람이 살기 위한 공간이 아닌 곳에, 이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라는 목표를 가지고,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해가며 오른다는 것 자체가 온통 모순이 아니던가... 의지할 것이라곤 냉기 서린 쇠벽 하나뿐인, 하늘을 향한 그 차갑고 어두운 터널의 끝에서 그녀가 처음 맞닥뜨린 건 먼저 간 동료의 죽음이었다.
“크레인을 향해 올라가던 중 어느 난간 하나를 잡았는데, 소름이 쫙 끼쳤어요. 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곳이 바로 김주익이 죽어간 자리였더라구요...”
그 촉감은 크레인에 오르고서도 1주일이 넘게 생생하게 기억됐다. 그리고 그 기억과 함께 그녀는 그의 시신이 놓여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그의 죽음에 끝까지 냉담했던 세상과의 기나긴 싸움을 시작했다. 50년 가까이 살아낸 이 땅 위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올라간 죽음의 자리. 그 높은 곳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동료들의 지지와 응원으로 간신히 하루하루를 이어갔던 허공 위의 삶. 하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사측과 정부가 똘똘 뭉쳐 퍼붓는 공세는 나날이 집요해져만 갔고 그와 더불어 그녀의 곁을 지키던 사람들도 하나둘 사라져갔다.
“위에서 보면 다 보여요.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 숫자가 줄어드는 거를 지켜봤죠. 나중엔 조합원의 3분의1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더라구요.”
그녀는 말했다. 한진중공업 김주익 지회장이 크레인에 올라갈 때 조합원의 수가 2500명이었다고... 그 숫자가 내내 계속 함께 했다면, 만약 그랬다면 김주익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누군가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동료들이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기에 오히려 그녀의 목소리는 바닥으로 더 낮게 깔렸다. 인간이기에 반드시 지켜내야 하고 또 인간이기에 어떻게든 지켜내고 싶은 것들을 위해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걸어야 하는 세상... 그렇게 가진 모든 걸 버려도 사람답게 사는 거 하나 지켜낼 수 없는 세상... 우리가 가슴에 따스한 무엇 하나를 남겨두고 사는 것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는, 그런 우리들의 세상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바닥으로 다시 바닥으로, 그렇게 낮게만 깔렸다.
3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람이 불면 모든 공간이 함께 흔들리며 울어대는 그 아찔한 높이에서 그녀의 시간들은 어떻게 흘러간 것일까... 그런 시간의 풍경을 가늠해 볼 새도 없이 그녀의 육성이 날카롭게 치솟는다.
“저는 세상에서 곧 잊혀졌습니다.... 답답했지요. 하지만, 퇴로가 없었습니다. 제가 뭐 여러 가지 조건을 달고 그곳에 올라갔더라면, 그 중 몇몇은 양보하고 또 합의하고 그렇게 내려올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단 하나의 조건만을 내걸었습니다. ‘정리해고 철회’... 그러니 이게 해결 안 되면 내려올 방법이 없는 거죠.”
내려올 길이 없는 곳에 올라간, 이 시대 또 한 명의 바보. 그 바보가 아침마다 깨어나 내려다보던 저 아래 세상. 그곳에서 겨울이 지나고 봄의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불고 다시 계절이 바뀌어갈 채비를 하던, 바로 그 무렵이었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버스들이 도착한, 그녀가 누누이 ‘기적’이라 말하는 그 사건이 일어난 건 말이다.
“크레인에 올라간지 157일 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6월 11일에 희망버스와 ‘김여진과 날라리외부세력’이 왔어요. 그때 조합원들이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웃는 걸 봤어요. 그들은 제게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갔습니다.... 그게 도저히 웃을 수 없는 곳에서 웃을 수 없는 싸움을 하는 제게 내내 화두가 되었지요.”
‘웃으면서 싸워야 남들과 함께 싸울 수 있고 그렇게 함께 싸워야 끝까지 싸울 수 있다’라는 명쾌한 답을 얻기까지 그녀는 크레인 위에서 마치 전쟁과도 같은 삶을, 숨 쉴 때마다 끝임 없이 달겨드는 죽음의 기운과 함께 살아내야 했다.
희망이 기적의 얼굴을 하고 다녀간 이후, 그나마 크레인 근처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은 시퍼런 용역들의 등쌀에 떠밀려 모두 다 쫓겨났다. 그녀에게 하루 세끼 끼니를 올려주던 황이라씨만이 우여곡절 끝에 유일하게 남은 자가 되었다. 그 외로운 자리로 다시 그녀의 목숨을 노리는 비수가 날아들었다.
“어느 날 트윗을 통해서 제게 이런 메시지가 왔어요. ‘70년대 암흑의 시기를 전태일이 횃불이 되어 밝혔고, 80년대는 박종철이 그랬고 그리고 이제 그대가 이 시대를 위해 횃불이 될 차례다’라고 쓰여있더군요.”
그녀는 생각했다. 아, 이 싸움은 진짜 내가 죽어야 끝날 것인가.... 아무리 표현하려해도 그저 ‘고통스러웠다’라는 한 마디 외엔 방법이 없는 그녀의 시간들. 그 지옥의 한가운데로 날아든 메시지는 그렇게 그녀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의 다른 한편에선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그녀의 살아있음을 기도하고 있다는 걸, 그 간절한 마음들의 목소리를 그녀는 기억해냈다.
“저녁 여섯시만 되면 잊지 않고 나타나 백배서원을 하시던 분들, 크레인 옆에서 미사를 보시던 신부님과 수녀님들... 그분들을 저는 하나도 모릅니다. 제게 무슨 일만 있다고 하면 서울에서고 부산에서고 쫓아왔던 날라리들, 여름방학을 꼬박 화장실도 없는 크레인 옆에서 보낸 그 많은 학생들... 당신들은 무엇이 그렇게 간절합니까? 어떤 마음으로 이 먼 곳까지 달려오는 겁니까....”
그 질문들을 그녀는 그들과 얼굴을 맞대고 앉아 묻고 싶었다. 그들은 왜 나를 살리고 싶어 하는가... 그리고 끝내 묻지 못했던 그 질문들은 그녀의 가슴 한켠에 쌓여 다시 그녀의 생명을 밝히는 횃불이 되었다. 죽지 않으리라....
“1차 희망버스에 700명이 왔어요. 2차에는 1200명이 왔구요. 3차 때는 진입 자체가 어려워지자 이분들이3시간이나 산을 타고 넘어서 왔습니다.... 어느 날 어디선가 막 무언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어요. 첨엔 절 부르는지도 몰랐어요. 그렇게 30분이 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보니 저 멀리,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사람들이 저를 향해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습니다. 제 이름을 부르면서 말이죠, ‘진숙아!’....”
그녀는 그날 사람들과 그렇게 만났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크레인이 보이는 좁은 공간에 와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면 다시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무리가 올라와 같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댔다. 그녀도 마주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녀는 그날 6시간을 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4 309일. 그 숫자를 새기고 그녀가 내려왔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그녀는 그곳을 살아서 내려왔다. 그녀의 목에 걸린 꽃다발이 의미하듯 그녀는 싸움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그녀는 승리의 결과보다 ‘살아 있음’이라는 것으로 세상이 그녀에게 보여준 사랑에 뜨겁게 보답했다. 누군가의 이름을 간절히 부른다는 것... 그 사랑의 행위 안에서 지켜낼 수 있었던 한 사람의 생명. 그리고 그 살아 돌아온 생명이 다시 세상을 향해 목 놓아 부르는 애틋한 이름들... 이런 사랑을 두고 그 누가 감히 ‘그 흔한 말’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들려주는 가슴 시린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죽어간 핏빛의 이야기들을 듣고 나서도 돌아오는 내내 마음 한 구석에 온기가 남아있었던 건, 한때 그녀의 동료를 죽이고 그녀를 잊었던 세상에 대해 그녀가 다시금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객조차 모조리 사랑하는 이 사랑과잉의 시대에 아직도 흔하지 않은 말로,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언어로 ‘사랑’을 실천하는 자.... 그녀는 그렇게 세상의 중심에 올라 사랑을 외쳤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그리고 세상에 대한 그의 자세를 인간적인 자세로서 전제한다면, 너는... 사랑은 오로지 사랑하고만, 신뢰는 오직 신뢰하고만 교환할 수 있다. 네가 사랑을 하게 되더라도 그 사랑에 화답하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그리고 너의 생활표현으로 너 자신을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너의 사랑은, 무력하고 불행한 것이다...... <1844년 경제학 초고>, 칼 마르크스
우리의 가슴에 남아있는 ‘사랑’은 어떠한가... 그것은 이내 흔하고 진부한 것이 되어 딱딱하게 버려졌는가... 김진숙, 그녀는 강의를 위해 오백가지 멋진 말들을 준비해 왔다. 그리고 이젠 우리가 그보다 더 로맨틱하고 달콤한 말을 준비해야 할 차례다. 내 옆에 선 이에게, 내가 모르는 이들이지만 그토록 나의 얼굴을 닮아있는 그들을 향하여... 우린 그렇게 세상을 향한 뜨거운 고백을 준비해야 한다.
나의 사랑은, 더 이상 무력한 것이 아니다.... 라는 그 사랑의 고백을 말이다.
글 | 아카데미 수강생 박현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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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학교] 2012 한반도 평화구상 - 38선 아래 ‘레알’ 청춘들에게 | 2012 한반도 평화구상 2강 - 북한의 후계체제 이후 북중관계는 어디로 갈것인가 | 느티나무 | 2012.4.5 | |||
세력확장에 나선 미국과 중국,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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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학교] 2012 한반도 평화구상 - 38선 아래 ‘레알’ 청춘들에게 | 2012 한반도 평화구상 1강 - 21세기 동북아의 미래, 제국인가 공동체인가 | 느티나무 | 2012.4.5 | |||
미중경쟁 시대를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1. 중화 질서 속 동북아 주류적 국제정치이론이라 할 수 있는 현실주의에서는 힘의 균형이 이루어진 상태가 전쟁의 가능성을 줄인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세력전이이론(Power Transition Theory)"에 따르면 대국들 사이의 힘이 비슷해질 때 전쟁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2. ‘G2시대와 한반도’
남한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구축된 분단체제와 한미동맹이라는 프레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북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안보적으로 미국과의 협력을, 경제적으로 중국과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본격화된다면 남한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질 것이다. 따라서 지구적 차원에서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이전에 우리는 선제적으로 대응을 해야 한다. 만약 이러한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미중경쟁은 한반도 내에서 남북의 대립을 격화시킬 것이며, 나아가 한반도를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충돌하는 무대로 전락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농업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중화 질서가 상업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의 제국주의적 질서보다 평화적이고 안정적이었다는 주장이 적극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중화 질서의 불안정은 한반도에 전쟁을 발생시켰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한국전쟁까지 동북아 패권교체 과정 속에서 한반도가 전장터가 되었던 역사적 경험이 그것이다. ‘G2시대’를 맞아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한미동맹과 한중협력 관계를 어떻게 조화롭게 유지,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전략이 매우 중요해졌다. 장기적으로 중미간 경쟁이 본격화되면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나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은 중국과 미국, 양자 사이의 선택을 강요받을 것이다. 따라서 다자안보협력은 동북아에서 안보의 딜레마를 피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이다. 즉, 중국과 미국을 개별적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관련 국가가 합의하는 제도와 규범 내에서 동북아 안보와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다. 다자안보로 가는 데 있어 지금의 6자회담 틀은 중요한 실험대가 될 수 있다. 다자안보협력을 논하기 위해서는 관련국들 사이의 신뢰를 강화시키는 것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 특정 국가를 견제하기 위한 군사동맹을 강화하거나 적대정책을 추구하기보다는 동북아에서 평화질서를 구축하겠다는 참가국들의 의지와 그를 뒷받침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관한 논의가 진전된다면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이는 곧 남북관계 복원과 이를 위한 정부의 대북정책이 다자안보협력의 토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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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o정상회의, 이면과 진실 | Rio정상회의, 이면과 진실 1강 - 왜 브라질 리우를 주목해야하는가? | 느티나무 | 2012.4.5 | |||
왜 브라질 리우를 주목해야하는가?
3월 15일 늦은 7시 이대훈 강사와 함께한 강의였다. 참여연대 ‘RIO정상회의, 이면과 진실’의 첫 강의 ‘왜 브라질 리우를 주목해야하는가?’가 시작되었다. 먼저 유엔의 글로벌 의제 설정과 발전을 중심으로 국제정세의 변화를 알아보았다. 40년대에 유엔이 발족하였고 50, 60년대에는 핵경쟁, 냉전-군비경쟁 관련 의제가 중심이었다. 70, 80년대를 거쳐 의제가 인간중심으로 확대되었으며, 90년대에는 ‘인간안보’라는 의제가 새롭게 형성되었다. 이대훈 강사는 ‘인간안보’라는 개념을 상당히 강조했다. 90년에 인간개발보고서가 발간되었는데 나에겐 ‘인간’과 ‘개발’이 합쳐진 이 의제가 매우 색달랐다.
물론 의제 형성에는 현실주의적 장애물이 존재한다고 한다. 국제사회는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즉, 군사력, 경제력이 우위를 차지하고 인권과 평화는 부차적으로 따라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주의적 장애물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대안으로 규범이 형성되고 국제법을 통해 각국을 제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탄소배출제약, 4대강 사업 감시, 민간단체들의 참여 등의 활동이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92년 “지구 정상회의”로 불린 리우(유엔환경발전회의)회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속가능한 발전, 인간개발, 사회개발(고용, 빈곤, 성평등 문제를 중시하는)을 중심으로 '발전=경제개발' 등식에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이다. 예로 지속가능발전의 중심은 ‘인간’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 사회 내 격차 감소와 빈곤 퇴치가 중심이 된다. 반면, 전쟁과 무력 분쟁은 지속가능성을 파괴한다.
지속가능한 발전개념에는 평화, 발전, 환경보호가 상호의존적이며 불가분의 원칙을 가지고 있고 발전 개념은 경제개발이라는 등식을 깨고 발전과 인권을 접목하는 개념으로 발전하고 있다.
발전과 인권을 접목시킨다는 것은 내가 느끼기에 상당히 파격적인 개념이다. 보통 발전한다고 하면 더 나아지는 것을 의미하지만 현실은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발전이 많은 것 같다. 가까이 4대강 사업이 그렇고, 도시발전으로 인해 쫓겨나는 실향민이 그렇고, 회사 구조조정으로 인한 실업자, 무한경쟁시대에서의 개개인이 그렇다. 발전이라는 개념이 현실주의적이고 이 시대에 무시할 수 없는 개념이지만, 발전만 외치는 것은 더 이상 이 시대의 흐름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므로 발전과 인권을 접목시킬 수 있는 것이고 이로써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지속가능한 발전’이 대두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지속가능한 발전, 인간개발, 사회개발 개념이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까지 이 개념이 개개인과 국가에게 영향을 미쳐왔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닌 거 같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더욱더 국제 이슈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지지고 볶는 문제가 그 나라 사람들과 전 인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유심히 살펴볼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번 강의의 주제인 ‘왜 브라질 리우를 주목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바로 ‘인권’을 중시하는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후기 작성자: 이미리 (수강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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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o정상회의, 이면과 진실 | Rio정상회의, 이면과 진실 2강 - 위기의 환경, '그린이코노미'의 진실은? | 느티나무 | 2012.4.5 | |||
[강좌 후기] 위기의 지구환경, 그린이코노미의 진실은
3월 22일 저녁 참여연대 느티나무 홀에서 ‘위기의 지구환경, 그린이코노미의 진실은’ 이라는 조명래 교수님의 강좌가 열렸다. 평소 MB정부의 녹색성장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품고 있던 나는 이번에 개최될 리우+20정상회의와 한국의 녹색성장이 어떤 연관성을 띄는지, 현 정부의 녹색성장의 진정성에 대해 주의 깊게 살펴볼 기회라고 생각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강좌에 임하였다.
우리는 2012년 6월 브라질 리우에서 유엔지속가능발전 정상회의 라는 이름으로 개최될 이번 리우+20정상회의에 앞서, ‘녹색경제’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알아보고 한국의 녹색성장정책의 진정성을 살펴봤다.
녹색경제 vs 한국의 녹색성장
1992년 리우 정상회의에서 ‘지속가능발전’이 대안 발전모델로 채택됐다. 각국들은 2002년까지 국가정책으로 이를 추진했지만, 성과는 전 지구적 빈곤의 심화, 환경의 악화 등과 같이 환경적, 사회적, 경제적 지속가능성이 더욱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지속가능발전이 추진되는 지난 10년간 전 세계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휩싸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승자독식의 시장만능주의 이념인 신자유주의의 발호는 지속가능성의 구현을 가로막았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입장과 평가는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지속가능성 악화에 대해 선진국들은 개도국의 자유교역, 개방화, 민주화 등의 부진에 원인을 돌린 반면, 개도국들은 선진국과 다국적 자본 주도로 세계시장이 개방되고 자본거래가 자유화되어 착취형 개발이 범지구화 된 것에 원인을 돌렸다. 마찬가지로 그 처방에서도 선진국은 자유교역확대, 개방화, 민주화 등을 요구하였으며, 개도국은 자본거래규제, 선진국의 기술이전 및 경제적 원조 확대 등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지구촌 시민사회는 인류 공멸을 초래할 수 있는 기후변화에 주의를 기울였고 각국 정부들은 물질적 부의 생산을 극대화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20년 전의 지속가능발전이란 개념 대신 녹색경제라는 개념이 이번 리우+20정상회의 중심의제로 채택된 이유에는 신자유주의의 득세 속에 ‘환경과 상생’을 전제로 하는 경제 성장을 하겠다는 선진국들의 의도가 숨어 있다.
선진국에서는 녹색경제를 지속가능발전에 이르는 과정으로 간주한다. 즉, 녹색기술, 녹색산업, 녹색소비 등 환경을 이용해 경제적 고부가 가치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경제성장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한국정부는 1992년 리우회의 이후 ‘2000년에 새천년 국가환경비전’을 발표하고, 그 후속조치로 대통령직속 자문기구로 정부, 산업계, 시민단체 등이 참여하는 ‘지속가능발전위원회’를 설치했다. 2007년에는 ‘지속가능발전기본법’을 제정했고 이를 통해 ‘지속가능발전’을 제도화하려는 노력이 이루어 졌다.
그러나 MB정부는 전 정부에서 추진되었던 이러한 노력과 성과를 의도적으로 폄하한 뒤 녹색성장의 하수로 전락시켰다. 대통령 직속 지속가능발전위원회를 환경부 산하 자문위원회로 전락시켰고, 녹색성장위원회는 시민환경전문가 혹은 활동가를 철저하게 배제한 채 시장주의의 환경전문가(환경경제전문가, 기업인 등)들로 구성한 뒤 폐쇄적이며 비민주적으로 운영됐다.
또한 토목 건설적 성장과 개발에 녹색을 덧씌우는 방식으로 녹색성장 정책이 구체화되고 조직화 되었다. 그 예로 ‘원자력에너지 중심 사업’ 이 있는데 이는 국제사회의 정책 방향과 반대의 정책이다. 따라서 무늬만 녹색 일뿐, 실제 기존의 경제중심 성장, 그것도 퇴행적인 토목건설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MB정부의 녹색성장은 회색성장의 한 변형이라고 조명래 교수는 말했다.
이는 결국 한국정부가 녹색성장이란 이름으로 신기술을 개발하고 녹색산업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에너지 사용의 총량이 늘어나 환경오염과 환경파괴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2012년 리우+20이 준비되는 과정에서 MB정부는 국내 녹색성장 정책의 교정이나 보완 없이 정권의 대외홍보 혹은 치적 쌓기 차원에서 한국이 마치 녹색경제와 녹색성장의 선구자인 양 나섰고, 나름의 의제형성자로 행세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녹색성장 이니셔티브에 대한 국제사회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뉜다. 긍정적 평가는 일부 선진국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반면, 부정적 평가는 일부 개도국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 평가는 선진국이 주도하는 리우+20의 전체의제와 그 설정방식에 대한 선진국과 개도국간 입장 차이에서 나왔다.
MB정권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정부가 추진해온 녹색성장은 리우+20의 의제와 일치함으로서, 그 정당성을 대외적으로 확보하는 효과를 누려왔다. 이로 인해 MB정부는 시민사회가 문제제기해 온 녹색성장의 비정당성과 추진과정의 비민주성을 회피할 수 있었다.
위와 같이 리우+20의 중심의제인 녹색경제가 갖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국적이면서 동시에 범지구적인 시민운동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시민사회는 토건중심의 한국의 녹색성장에 대해 녹색경제 차원에서 범지구촌 시민운동과 연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리우+20에 대한 한국 시민사회의 감시와 참여가 지금부터 본격화 되어야 한다.
‘진정한 녹색’ 으로 가는 길
강좌가 끝난 뒤 많은 질문들이 나왔다. 질문자들 중에는 진정한 의미의 녹색에 대해 혼란이 온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조명래 교수는 환경을 관리주의적 관점이 아닌 생태학적 관점으로 환경자체를 합목적인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인간만이 아닌 모든 생태계가 부활할 수 있는 환경이 ‘진정한 녹색’이라는 것이다.
다른 질문 중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질문은 ‘녹색을 국제적인 의제로 제시하고 국내에서도 이를 접목시켜 최우선 국가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 또한 환경에 대한 노력이 아닌가?’ 라는 질문이었다. 정부가 환경에 대한 관심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현 정부는 시민환경전문가를 철저하게 배제한 채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실천적 수단인 거버넌스를 고려하지 않고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으로 정책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을 조명래 교수는 지적했다. 그러면서 1994년 녹색서울시민위원회의 운영 방식과 비교하기도 했다. 녹색서울시민위원회는 정부, 시민, 기업 등 각 분야에서 공동위원장을 선출해 여러 의제를 복합적으로 토론하여 결정하고 실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이와 같은 노력으로 파트너십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각 국가 간의 시민사회단체와의 범세계적인 파트너십을 형성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이번강좌를 들으면서 ‘현 정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녹색성장이 경제발전의 수단이 아닌가’라는 기존의 의문이 확신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렇다고 정부시스템이나 세계적 동향만을 비판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하드웨어의 변화가 아닌 소프트웨어의 변화 즉, 우리들의 의식과 행동의 변화를 통해서 진정한 녹색의 의미가 나온다는 것을 느꼈다.
환경은 곧 생명과의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금 편하자고 여태껏 환경에 무관심하지 않았는가? 정부시스템의 잘못이라고 책임을 미루지는 않았는가? 우리의 의식이 변화해야 토건적 녹색성장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1992년 리우환경회의 당시 캐나다 출신 12살 소녀 세번 스즈키의 연설문 중 ‘여러분이 고칠 방법을 모른다면, 제발 그만 망가뜨리시기 바랍니다!’ 라는 말이 떠올랐다. 훗날 세대가 이런 말을 하지 않도록 현 세대가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남기는 강좌였다.
작성자: 조민지(수강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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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o정상회의, 이면과 진실 | Rio정상회의, 이면과 진실 3강 - 빈곤퇴치 약속 20년, 왜 세계는 여전히 굶주리고 있는가 | 느티나무 | 2012.4.5 | |||
[후기] 빈곤퇴치 약속 20년, 왜 세계는 여전히 굶주리고 있는가
‘Rio정상회의, 이면과 진실’의 마지막 강연은 이성훈 한국인권재단 상임이사와 2012년 6월에 열릴 리우+20정상회의의 전망과 시민사회의 역할을 이야기하고,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10억 인구가 굶주리고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성훈 상임이사는 국제사회가 리우+20정상회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세계 시민사회 활동가들은 유엔이 리우+20정상회의의 의제를 해결할만한 리더십이 없고 인권과 책무성에 대한 논의가 의도적으로 빠졌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녹색경제 vs 그린워시 리우+20정상회의는 3가지 주요 쟁점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녹색경제, 지속가능발전 및 가난퇴치의 관계’에 관한 정책 패러다임이다. 선진국들은 주로 지속가능발전과 녹색경제를 병렬적 관계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개발도상국(이하 개도국)은 반대로 녹색경제가 현재의 세계 위기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지속가능발전모델'을 지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제시민사회는 녹색경제는 경제발전에 ‘녹색’이라는 단어만 붙이고 마치 환경을 위한 정책인양 하는 그린워시(Green Wash) 일뿐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두 번째는 녹색경제에 관한 제도를 구축하는 일이다. 1972년 스톡홀름 ‘유엔환경회의’의 결정에 따라 만들어진 유엔환경계획(UNEP)을 강화하거나 유엔전문기구로 조직을 확대해야 한다는 논쟁이 진행 중이다.
1992 년 탈냉전 직후 국제사회의 많은 아젠다는 기존 제도에 흡수되어 더 이상 논의를 할 필요가 없는 의제들이 생겼다. 그러나 유독 리우에서 논의되고 있는 ‘환경’만은 제도화되지 못했다. 물론 2002년 리우+10회의에서 세계환경기구를 만들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9.11테러 직후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그러한 제안은 쉽게 통과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리우+20회의에서는 이 논의가 본격화 될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리우정상회의에서는 합의된 내용에 대한 이행목표와 지표가 마련될 것이다. 현재 논의는 MDGs(밀레니엄개발목표)의 한계를 극복하기위해 SDG(지속가능발전목표)를 채택하자는 내용까지 왔다. MDGs는 개도국 중심의 편향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고 ‘환경’에 관한 목표가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면, SDG는 경제, 사회, 환경을 통합적으로 담고 있어 개도국뿐만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SDG 채택에 무게를 싣고 있다. 그러나 SDG 역시 보완해야할 점이 있다. 그 내용은 인권적 접근이 부재하고 이행목표에 대한 모니터와 보고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게 때문에 책무성이 없다는 것이다.
1990년대 탈냉전이라는 고무적인 분위기속에서 국제사회는 연대와 협력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2001년 9.11테러와 2008년 전 세계적으로 시작된 금융위기로 국제사회의 공조와 협조는 어려움을 맞게 되었다. 그 와중에 리우+20정상회의가 개최되는 것이라 기대만큼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 이다.
리우+20과 빈곤퇴치 약속 개도국은 '지속가능발전모델'를, 한국과 주요 선진국은 '녹색경제모델'를 지지하고 있다. 다른 것 같지만 이 두 국가들간의 공통점은 ‘빈곤퇴치’를 가장 우선순위에 둔다는 것이다.
1960 년대 UN에서 빈곤에 대한 회의가 시작된 이래, 50년이 넘은 지금에도 세계는 빈곤의 늪에 빠져 있다. 분명 일부국가에서는 빈곤이란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빈곤문제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빈곤은 단순한 생사의 문제를 넘어 사회불안으로 이어져 폭동까지 일으키고 있다. 또한 식량, 에너지, 금융의 위기와 더불어 기후변화까지 세계는 한마디로 총체적 위기 상황이다.
우리는 이러한 원인을 국제적 자본주의 시스템이나, 정치경제적 민주주의 프레임, 국가·시장경제·시민사회의 책임 등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훈 이사는 하나의 틀만 가지고 분석한다면 환원주의의 오류에 빠지기 쉽다고 했다. 한가지의 틀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기 보다는 이미 실행되고 있는 빈곤퇴치에 대한 진단과 처방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리우의 핵심 키워드. 개발! 리우회의의 핵심 키워드는 ‘개발’, 즉 ‘빈곤’의 문제였다. 특히 리우회의는 ‘개발(빈곤)’의 문제를 환경과 연관시킨 회의로 그 중요도가 매우 크다. 국제회의마다 ‘개발’ 아젠다를 제시하고 있지만 문제는 그 다음 단계라고 이성훈 이사는 말했다.
1992년 리우회의 이후 1997년 리우+5회의부터 문제점들이 확연히 들어났다. 먼저 정치적 비전과 리더십이 부족했다. UN은 각 국가들의 합의점을 끌어내기에는 리더십이 부족했다. 더 큰 문제점은 경제위기의 가장 큰 주범인 IMF나 월드뱅크등 은 개혁대상논의에서 빠졌다는 것이다.
이성훈 이사는 빈곤퇴치 노력에 대한 철저한 진단과 처방만이 10억 인구의 굶주림을 해소할 수 있는 첫 발걸음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기업구조와 IMF, 월드뱅크 등의 개혁 없이는 환율위기와 금융위기가 올 때마다 빈곤은 심화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최근 빈곤의 모순에는 투기자본과 기업이 있고 그 핵심은 Wall Street에 있다는 인식으로 ‘Occupy Wall Street’라고 외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일 것이라는 진단이다.
이처럼 빈곤문제와 대안은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개발 패러다임이 진화해도 별효과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환경과 문명, 민주주의, 빈곤 등을 통합적으로 다룰 수 있는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합적 비전을 가진 후에야 구체적인 전략이 효과를 가질 것이라는 말과 함께 이성훈 이사는 강좌를 마쳤다.
국내 환경단체의 역할에 대한 질문에 대해, 이성훈 이사는 한국의 시민사회는 4대강사업이나, 토건적 녹색성장을 비판하기 바빠, 리우+20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환경단체는 환경 이외의 다른 시민단체와 연대하면서 국제연대 활동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강좌는 나에게 리우회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는 환경과 빈곤에 대한 원인과 해결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2007년 말 전 세계 금융위기가 과도하게 특정 분야를 중심으로 성장한대서 시작된 것과 같이 특정 분야를 집중해서 성장(개발)하는 것에 대한 평가가 다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작성 : 조민지 (수강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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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세상을 향해 묻다 | 청년아카데미 1기 잘 마쳤습니다~ | 느티나무 | 2012.1.26 | |||
안녕하세요. 참여연대 시민참여팀 간사 이진선입니다.
지난 12월 27일부터 시작한 참여연대 청년아카데미 1기가 1월 19일까지 총 8회 강좌로 잘 마무리했습니다.
이번 청년아카데미는 '청년, 세상을 향해 묻다'라는 주제로 진행되었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 무엇을 보지 못하고 살고 있는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는 시간을 마련했었습니다. 이번 청년아카데미를 들은 수강생 여러분께서는 다음과 같은 단어를 키워드로 선정해 주셨어요. 함께 공유합니다. 칼슘/ '나'의 자리(정체성)에 대해서 돌아보는 시간... / 번쩍 / 확장 / 트임 / 고민 / 저녁에 보는 거울(많은 생각과 반성을 할 수 있어서)/ 희망/ 새로운 사실들을 알려주는 자극! / 틀깨기 / 뜻깊음 / 한걸음 / 청년이여 쫄지마! 청춘 마지막 8회째에는 강연 이후 1시간 가량 청년아카데미 수강생들과 함께 '청년, 상상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청년아카데미에서 나왔던 강연 주제인 평화/ 동북아/ 노동/ 복지/ 법/ 정의/ 핵/ 시민참여 등을 중심으로 청년들이 꿈꾸는 세상에 대해 마음껏 상상해 보고, 전지에다 그림을 그려가면서 같이 이야기를 꽃피웠는데요. 참 재미난 '상상'을 할 수 있었어요. 한미 FTA가 폐기되고, 핵없는 대한민국이 되고, 최저임금이 2만 5천으로 책정되고... 이런 것들이 현재는 '상상'이지만 우리들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죠. 아래 워크숍때 나왔던 모습들 사진으로 몇 장 공유합니다. 참 즐거워 보이죠? ^^
청년아카데미 강좌 후기는 아래 링크를 통해 들어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1강(12/27 화) 김남훈(레슬링 선수, <청춘 매뉴얼 제작소>저자) 열정 없는 청춘, 어떡하죠? : 쫄면 지는거야! >> http://www.peoplepower21.org/860914
>> http://www.peoplepower21.org/861236
4강(1/5 목) 정태인(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 http://www.peoplepower21.org/864907 5강(1/10 화) 김익중(경주환경련 상임의장, 동국대의대 교수) >> http://www.peoplepower21.org/864931 6강(1/12 목) 이남주(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 >> http://www.peoplepower21.org/866826 7강(1/17 화) 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 >> http://www.peoplepower21.org/866611 8강(1/19 목) 김혜정(환경운동연합 대간사) >> http://www.peoplepower21.org/866618
이번 1기에 이어 다음 2기 개강도 많이 기대해 주세요.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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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 | 복잡했던 해방공간 누가, 어디로 | 느티나무 | 2011.11.9 | |||
어제(8일) 교과부에서 ‘중학교 새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을 발표했습니다. 논란이 되고 있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제시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 문구는 그대로 유지" 됐다고 합니다. 아래 김도형(인턴), 최혜진(자원활동가)가 작성한 역사교과서 6강 "복잡한 해방공간 누가 어디로"의 글을 보시면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힌트는 "제3차 유엔 총회의 정식 정부 승인 문건"에 있습니다. 원문출처 : http://bit.ly/rXdnab해방공간의 쟁점들 1945년 8월 15일, 36년간에 걸친 일본 제국의 지배는 끝을 맺었다. 그리고 3년 간 이 땅에는 정부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미군정만이 존재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미국정부도 한국정부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때 이 땅에 제대로 된 정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이야기하기 쉽지 않다. 아무튼 우리는 그 3년을 해방공간이라 부른다. 역사에서도 해방 3년사라 하여 따로 다루고 있다. 고작 3년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참으로 많은 것들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또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민족국가 수립의 열망과 좌우익 간의 정치 투쟁이 뒤엉켰고, 시위와 폭력, 암살과 실종이 혼재했다. 한편, 미국과 소련에 의해 한반도는 남쪽과 북쪽으로 찢어졌고, 남북 인민의 뜻과 아무 상관없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분단의 첫걸음을 딛게 되었다. 그래서 해방공간의 역사를 아는 것은 독립과 민족의 시간이었던 근대를 넘어 극단의 이념대립과 폭력으로 상징되는 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교과 과정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따로 떼어 가르쳤던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에 서 9월 7일부터 진행 중인 <교과서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 강좌 중 다섯 번째 강의에서는 '해방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교재로 하는 이 강좌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서술 방향과 역사 인식에 대한 전문가들의 담론을 시민들과 나누고 있다. 다음의 내용은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이신철 교수의 첫 번째 강의 <복잡했던 해방공간, 누가? 어디로??>를 토대로 재구성 및 정리한 것이다. 광복은 도둑처럼 왔다 알다시피 모든 것은 1945년 8월 15일에 시작되었다. 같은 날이지만,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한국은 독립을 맞았고, 일본은 패전국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정말 우리는 그때 독립할 수 있었을까? 사실 그건 당시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은 패전국이었고 식민지 조선은 그 일부였다. 당시 한국인들은 일본식 이름을 갖고 일본어를 국어로 사용해야 했다. 더욱이 당시 일제는 전쟁 중이었고 그만큼 폭압적이었다. 독립운동은 중국 등지에서 어렵사리 이루어졌을 뿐, 한반도나 만주에서는 거의 불가능했다. 36년에 이르는 식민지 시기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천황의 신민'으로 나고 자란 아이가 이미 성인이 되었을 시점이다. 한국을 독립국으로 보는 인식은 국내외적으로 미약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당시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건 분명히 말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그 상황에서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을 점령한 두 열강, 즉 미국과 소련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았던 것도 당연하다. 우리나라는 결국 분단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숙명론이 그나마 일리가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해방이자 광복이자 독립이라 불리던 그 순간의 전부를 설명해 주는 건 아니다. 해방공간에는 더 많은 무언가가 존재했다. 그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광복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오늘날 광복절이 언제인지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하지만 정작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던 그 순간, 대일본제국이 패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물론, 15일에 일본 천황의 항복방송이 나오기는 했지만, 라디오 자체가 흔치 않았던 시대다. 일본인들이 패색이 짙어가는 전황을 친절하게 알려 줄 리도 없었다. 그러니 당대 지식인들도 별 수 없었다. 서정주, 이광수 같은 이들은 열렬히 귀축영미를 저주하고 천황폐하만세를 부르짖으며 젊은이들을 죽음의 전선으로 떠밀었다. 오직 여운형을 비롯한 소수만이 국제정세를 면밀히 살피며 해방과 건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광복이 도둑처럼 왔다'는 표현은 그래서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그만큼 갑작스럽게 우리나라는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걸로 '식민지'가 끝난 건 아니었다. 일제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여운형과 교섭을 통해 전권을 건준의 조선인민공화국에 넘기고 일본인들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약속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미국과도 항복을 위한 교섭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일본군은 패전 후에도 미군에게 무장해제 당하기 전까지 한반도의 치안을 담당할 수 있었다. 심지어 9월 8일 미군정이 들어올 때 환영인사를 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시민들에게 발포해 무고한 3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도 일본군이었다. 해방이라지만, 그 시작은 착잡하기 짝이 없었다. 해방 직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도 온건하지는 않았다. 미소 양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는 과정도 어딘가 어긋난 부분이 많다. 일단 한반도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들어왔다. 다만 양국 군대가 들어온 시기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소련은 8월에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진격했고 미국은 9월 8일에야 인천을 통해 들어왔다. 하지만 소련은 미국이 들어오기 전에 먼저 남쪽까지 접수하려 하지는 않았다. 길게는 한 달에 이르는 이 기간에 소련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부터 의견이 분분했다. 소련으로서는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38선 이남까지 내려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반도 분할 점령을 제안한 미국의 요청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그보다는 향후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었던 소련의 정치적 포석으로 해석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 물론, 진실은 알 수 없다. 국내 상황 역시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해방은 갑작스러웠고 권력을 갖고 있던 일본인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정치적 공백을 채운 것은 혼돈이었다. 수많은 정치 세력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이들은 대부분 자치 기구를 만들고자 했다. 중도 좌파 민족주의자이자 당시 국내에서 가장 명망 있는 인물이던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거쳐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박헌영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도 조선 공산당을 결성해 정치 활동을 펼쳤다.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그리고 자파의 정치적 우위를 확립하기 위해 그들은 필사적이었다. 분명 무정부상태였던 해방공간에서 헤게모니의 선점은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당시 국제정세는 그들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연합국은 한국인들의 뜻과 관계없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한반도 내의 어떠한 정치 세력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합의 역시 이미 이루어져 있었다.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이 거기까지 꿰뚫어 보는 것은 사실 무리였다. 어쨋거나 그들은 국제정세를 입체적으로 보고 대처하지는 못 했다. 그렇기에 오늘날 해방공간의 정치활동과 국제정세를 함께 바라보면 허망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패전국 일본은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과정에서도 미국과 소련에 각각 항복하는 등 정치적 공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일본은 해방공간의 치안권을 얻었음은 물론 분단의 운명마저도 한반도에 떠넘길 수 있었다. 점령군인가 해방군인가 일본은 물러갔고 한반도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제일 먼저 논란이 되는 부분은 그들이 어떤 이름을 달고 이 땅에 들어왔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7차 교육과정의 금성교과서에 소련을 '해방군'으로 서술한 부분이 격론을 불러온 이유도 그 이름의 무게 때문이다. 하지만 한번쯤 고민해 봐야 하는 일임도 분명하다. 과연 미군은, 그리고 소련군은 점령군이었는가? 아니면 해방군이었는가? 그 실마리는 양군이 어떤 식으로 한반도와 한국인을 대했는가를 통해 풀어갈 수 있다. 먼저 소련은 공식적으로 소련 '군정'이라할 만한 직할 통치기구를 두지 않았다. 한국인들로 이루어진 인민위원회를 인정했고, 소련군 휘하 특정 부서에서 민정사업을 담당하는 형태로 한국인에게 접근했다. 민족 감정을 자극하기 쉬운 직접 통치 대신 자문역할을 자처하는 것이 소련이 한반도 북부를 지배하는 방식이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소련은 스스로 해방군으로 왔음을 자임했고, 46년 2월부터는 선거를 시행해 한국인 대표를 선출하도록 했다. 물론 이런 통치방식이 순전히 소련정부의 선의는 아니었다. 소련 역시 한반도 내에 그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부가 수립되기를 바랐다. 한반도의 정치지형도가 소련의 뜻에 부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한지역에는 여운형, 박헌영 등 좌익으로 분류되는 이들이 세력을 갖고 있었지만 정작 소련군이 주둔한 북쪽은 조만식 등의 민족주의자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당시 서북지방은 보수적 민족주의자들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황해도는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가 들어온 곳이고 자본가, 지주들의 세력도 강했다. 소련입장에서도 이들을 무시하고 북한지역을 통치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소련은 한반도의 새로운 국가건설에 있어서 사회주의계열과 민족주의계열의 합작체제를 주장했고 모든 기구를 성립할 때도 양측의 인원이 반수가 되도록 조정했다. 다만 기본적으로 중재는 언제나 소련의 몫이었다. 당연히 사회주의 계열에 유리한 상황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상당수의 북쪽 지주 자본가들은 월남을 선택하게 된다. 반면, 미군은 맥아더 포고령을 통해 자신들이 '점령군'으로 들어오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또한 서울에 미군정청을 설립하고 사령관이 전권을 행사하는, 전형적인 직접 통치 형태로 남한을 접수했다. 미군의 통치는 상당히 고압적이었다. 우선 한반도 내에 자생적으로 수립되어가던 모든 정치조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고, 인민위원회는 물리적으로 해산시켰다. 그리고 영어가 가능하며 행정경험이 있는 이들-거의 일제의 관리 출신인-위주로 미군정을 보좌할 한국인 행정조직을 재구성했다. 이는 사실상 일제의 행정조직을 복원한 셈이다. 그리고 남한지역의 유일한 합법정부는 미군정임을 천명했다. 각지를 떠돌며 독립운동을 하던 임시정부요인들은 개인자격이라는 조건을 달고서야 해방된 조국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신탁통치의 진실 혹은 거짓 1차 세계 대전 이후 승전국이 패전국들의 식민지를 독립 역량을 키울 때 까지 대신 지배하는 위임통치론이 등장했다. 하지만 몇몇 위임통치령은 사실상 식민지였다. 이들 중 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존재하던 위임통치령이 국제연합 소속의 신탁통치령이 되었다. 그런데 한국 정치인 중에도 이 위임통치론을 주장했던 이가 있다. 바로 이승만이다. 그는 미국 의회에 "조선은 독립할 의지가 있으나 아직 능력이 부족하다. 지금 일본이 그것을 가로 막고 있으니 우리가 독립할 능력을 키울 때 까지 미국이 일본을 대신해서 우리를 위임통치 해 달라" 며 청원서를 낸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이 일 때문에 1925년에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 당했다. 그리고 20여년 후, 해방 공간에서 다시 신탁통치론이 등장한다. 바로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1면 기사에 쓰인 내용이다. '외상회의에 논의된 조선독립문제- 소련은 신탁통치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독립주장' 36년 만에 맞게 된 해방,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진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정국이었다. 간신히 독립한 조국이 다시 강대국의 사실상 식민지가 될 위기에 처했다는 불안감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사람들은 분노했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이승만과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들은 미국을 지지하며 이 움직임에 편승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동아일보 기사는 오보였기 때문이다. 미국과 소련은 분명히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한반도의 정부 수립 방안을 논의했다. 그 내용은 한반도에 민주적인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것,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해 미, 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한다는 것, 임시 정부와 협의를 거쳐,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4개국이 한반도에 대해 최고 5년을 기한으로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때의 회의 결과는 12월 28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예정보다 하루 전에 미리 회의 결과를 기사로 내버렸다. 그것도 잘못된 형태로. 이는 명백한 왜곡 보도였다. 게다가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미국은 당초 20년 정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소련은 이에 반대했다. 결국, 그 합의점으로 나온 5년간의 신탁통치안이다. 당시 우익의 뜻을 대변하던 동아일보의 의도적 왜곡 보도라는 의심을 거두기 어려운 이 사건은 거국적인 민족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 저항은 좋은 결과로 끝나지 않았다. 특히 좌파들에게는 비극이었다. 소련의 발표를 통해 회의 결과를 정확히 인지한 좌파들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 지지운동을 전개했지만, 이미 반탁으로 기운 대중들은 이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측은 곧바로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조직하여 대대적인 반탁운동에 돌입했다. 게다가 이승만, 한민당, 동아일보로 대표되는 우익세력은 박헌영을 비롯한 좌익을 찬탁론자로, 나아가 매국노로 몰아갔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애국자가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이 시기에 우익의 상당수를 점하던 친일경력자들은 애국자라는 옷으로 갈아입을 기회를 잡았다. 한편 김구의 국민 총동원 위원회는 반탁을 위한 총파업을 지시했고 당시 서울시 공무원의 70%이상이 파업에 동참했다. 이에 놀란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김구를 불러 협박했고 결국 총파업은 끝났지만, 김구는 이 짧은 쿠데타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영향력과 법통성을 선포하고자 한 셈이다. 모스크바 3상회의상의 혼란에 대해서는 두 국가의 신탁통치 개념이 가지는 차이 때문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말하자면, 영어와 러시아어의 어감 차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신탁'을 의미하는 영어 trustship은 권력을 맡기는 의미였지만 러시아어인 oneka의 경우는 일종의 후견이라는 뜻이 더 강했다. 당시 남쪽에서 회의 결과를 '신탁통치'로, 북쪽에서는 '후견제'로 보도한 것도 이런 문화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정부의 정통성, 그리고 정당성 김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노력에도, 결과적으로 한반도에는 각각 남한과 북조선이라고 불러야 할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이들 두 정부는 상대방이 아닌 바로 자신이 정통성과 정당성을 가진 정부라고 주장해 오고 있다. 도대체 정통성은 무엇이며 정당성은 또 무엇일까? 뉴라이트 측의 주장처럼 경제력으로 이겼으니 정통성은 우리가 가져온 것일까? 정통성의 근거는 기존 정치 공동체의 적통 계승여부에 달려있다. 때문에 왕조국가에서는 왕가의 혈통이 흔히 정통성으로 기능한다. 이와 달리 정당성은 민족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지지받고 인정받은 권력에게 부여될 수 있는 부가가치를 말한다. 그렇다면 남북한이 가진 정통성과 정당성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임시정부의 적통을 계승'한다는 제헌 헌법과 유엔에서 인정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말을 근거로 즐겨 내세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두 근거는 모두 설득력이 약하다. 우선 임시정부의 정통성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자. 이승만을 비롯한 임정인사들이 당시 건국정부에 참여 했으니 이는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한반도의 해방공간 정치 지형도에는 적지 않은 세력이 난립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익인 한민당에서 극좌파 조선 공산당에 이르는 다종다양한 정당과 정치세력이 해방공간에는 존재했다. 문제는 이들 모두가 임시정부와 연대하는 세력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임시정부가 해방된 대한민국의 정치권을 대표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물론 임시정부의 정치적 위상과 가치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다만, 대표성과 규모라는 측면에서 당시 임정이 하나의 정치세력 이상이 아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유엔이 인정한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부분도 심각한 오류가 있다. 아니, 사실상 날조에 가깝다. 그 근거의 원문인, 제3차 유엔 총회의 정식 정부 승인 문건에는 '선거가 가능하였던 38도선 이남에서 정통성을 가지는 유일정부임을 인정'한다고 명시되어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제헌 헌법과는 정면으로 부딪힌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인정한 적 없는 한반도 이북 지역의 통치권을 우리만 되뇌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우리의 정통성이 유엔을 비롯한 승인에서 나온다는 발상이 과연 건전한지도 의문이다. 그 생각 자체가 이미 비자주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정통성을 타국의 인정에서 찾을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북한의 경우를 보자. 일단 북한은 무엇보다도 최고지도자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을 십분 활용할 수 있었다. 또한, 건국 초기에 친일경력자 숙청을 완료했다. 북한은 정통성을 주장하기에 남한보다 조건이 좋았던 셈이다. 물론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 경력은 거짓말이 아니다. 하지만 유일한 최고지도자의 대표성을 담보해 줄 수 있을 만큼 절대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숙청당한 이들 중에는 친일파 외에도 반김일성 세력이 적지 않았다. 민족적 과제를 정치적으로 활용했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북한의 정통성도 생각만큼 공고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북한은 정치적 정당성을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이루어졌던 토지개혁과 남북한 총 선거에서 찾았다. 인민에게 지지받고 인민의 손으로 뽑은 정부임을 내세우기 위해서였다. 다만 토지분배는 차치하고서라도 선거에는 문제가 있었다. 실제로 북한은 그들이 주장하는 총선거를 통해 남북한 지역 대의원(최고 인민회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그렇게 1000명이 해주에 모여 남측 대표 210명, 북측 대표 360명을 선출하고 김일성을 최고주석으로 삼아 내각을 구성했다. 하지만 당시 북한에서는 이승만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남한 내에서 남로당은 불법단체였다. 정상적인 선거는 애초에 가능할 수 없었다. 그러니 북한에서 말하는 남북 총선거란 사실 북에서만 이루어진 반쪽짜리 선거였다. 남한 지역에서는 지하에서 활동하던 남로당원 등에 의한 비밀선거가 이루어졌지만 대표성도 실효성도 없었다. 이렇듯 허점투성이였던 선거는 결국 북한 정부의 정당성에도 한계로 작용했다. 결국 비판의 여지는 양쪽 모두에게 충분히 있었던 셈이다. 남북한 양국 정부의 정통성-정당성의 근거와 그 한계를 통해 우리는 해방공간에서 독립 정부가 반드시 가져야 했던 적통의 이상적 형태를 어렴풋이나마 그려볼 수 있다. 한반도 인민의 열망을 대표할 수 있는 정부는 민족 독립운동의 정신과 그 정치적 대표성을 이어받아야 했다. 또한 전 국민의 합법적이고 폭넓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치 공동체임을 떳떳이 자임할 수 있어야 했다. 당시의 남북한 정부 모두 자신들이 바로 그런 정부임을 주장했었고, 이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둘 중 이런 이상에 좀 더 합당한 정부는 어디였을까?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는 분명 아닐 것이다. 독립정부 수립을 위하여 앞서 말했듯이 해방공간은 수많은 정치세력이 난립하는 형국이었다. 크게 보아 좌우익 세력은 비등했지만, 그 안에는 조금씩 노선이 다른 무수히 많은 조직들이 존재했다. 그들의 이해관계와 방향성에서 같은 구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지만 1차적 목표만은 공유하고 있었다. 한반도의 독립이었다. 이는 당대 민중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탁운동 과정에서 당시까지 열세였던 우익세력이 정국 장악의 결정적 계기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도 당시 민중에게 널리 퍼져있던 독립의 열망을 공략했기 때문이다. 물론 각 세력 간 노선은 분명히 달랐다. 특히, 좌우익간의 대립은 격렬했다. 여운형, 송진우, 장덕수 등 좌.우.중도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중요인사가 암살로 목숨을 잃었다. 미소 공동 위원회 중단 이후 좌우 정치세력이 각자 독자 노선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이승만은 정읍발언과 함께 남한 단독선거를 통한 독립정부 구성 쪽으로 방향을 잡고, 친일경력자가 대거 포함된 반탁 운동 세력은 이승만 쪽으로 합류했다. 결과적으로 반탁운동은 남한단독정부 수립운동으로 이어지게 된 셈이다. 김구, 김규식을 필두로 하는 중도파는 남북 분단을 막고 통합정부 수립으로 가는 방향을 꾸준히 모색했다. 김구가 이미 단독정부를 수립한 북측에 협상을 제의하고 북한행을 택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이 때 이루어졌던 남북 협상에서는 김일성, 김두봉, 김구, 김규식이 참석했고 외국군대 철수와 통일 정부 수립을 논의했지만 실질적 성과는 없었다. 김일성측도 이미 단독정부 수립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구의 행보는 결코 가볍게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김구가 서울로 돌아온 날은 5월 6일이다. 남한의 단독선거일은 5월 10일이었다. 그리고 여운형이 죽고 없는 남한에서 김구는 이승만을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일생의 영광이 될 대통령 선거 출마를 사실상 포기하면서, 거의 승산 없는 회담을 위해 북으로 향했다. 그의 이런 의지는 오늘날 우리가 김구를 그저 무모한 민족주의자라는 식으로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분명한 이유이다. 현재 뉴라이트 역사학파에서는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반면, 김구는 정치적으로 실패한 인물이자 테러리스트로 평가한다. 어찌되었건 남한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일개 야인으로 암살당한 김구의 명암이 엇갈리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적 인물의 행보를 정치적 결과론으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신의 정치적 영달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던 이승만과 정치생명을 포기해 가며 좌우 합심의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김구를 정치적 성패만으로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을까. 테러리스트라는 용어도 그렇다. 물론, 김구의 의혈 투쟁을 영어로 번역하면 테러리즘이다. 사실 정확히 의혈 투쟁을 표현할 단어를 영어에서는 찾기 어렵다. 하지만 폭력 투쟁에 의존해야만 할 만큼 억압에 직면했던 당시 상황과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의사들의 결의를 담기에 테러리스트라는 용어는 너무 얄팍하다. 또한 김구의 독립운동이 현대의 테러리즘와 같은 형태도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주로 일본 제국 정부 요인을 대상으로 한 의혈투쟁을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오늘날의 테러와 함께 취급하는 것은 다소 무리수가 아닐까. 역사를 바라보는 자세, 애국자의 자세 2011년인 지금, 남북 분단의 역사도 어느덧 60여 년을 넘기고 있다. 그 60년 동안 남한은 경제발전을 통해 현대국가의 면모를 확립했고, 북조선은 폐쇄적이고 배고픈 사실상의 왕조국가로 전락해가고 있다. 그리고 뉴라이트를 위시한 신자유주의 지향 역사학계 일부에서는 북한의 역사를 실패한 역사로 단정하고 그 존재도 부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회주의의 실패와 "자유 대한"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물론 오늘날의 북한은 이미 사회주의국가라고 보기 어렵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위기에 봉착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을 부정하는 것은 한반도 현대사 자체에서 사회주의의 영향력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의미한다. 이는 생각보다 위험할 수 있다. 동구권의 몰락으로 상징되는 현실사회주의의 실패를 감안하고서라도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될 수 있는 건 역설적으로 사회주의의 역할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최소한 초기 자본주의의 폭주와 비인간성에 제동을 걸고 꾸준히 이의를 제기하는 기능을 했다. 소위 수정자본주의가 그것이다. '자유민주주의국가' 대한민국의 제헌 헌법에도 사회민주주의 적인 구석이 적지 않다. 이는 임시정부에 남은 좌우합작적 성과의 흔적이다. 그 어떤 정치체제도 완벽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각각의 잠재력과 한계가 분명히 있다. 인간이 양쪽의 균형을 잡아야만 그 장점을 제대로 살릴 수 있다. 또한 지금 여기의 애국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애국의 의미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제국주의 시대의 애국은 자국의 조상을 찬양하고 민족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행위였다. 피식민지 민중들의 애국도 본질적으로 이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행동은 애국일 수 없다. 인간이 과거를 기록하고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앞서 살던 이들의 행적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에는 자랑만 있을 수 있는게 아니다. 부끄러움도, 잘못도, 실수도, 악행도 얼마든지 있다. 물론, 그 모두가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다. 러시아인들은 스탈린 시대에 이루어진 대학살을 숨기거나 피하지 않고 그대로 가르친다. 이유도 명쾌하다. 그런 악행들도 그들 자신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덮어야 할 내용을 다투는 오늘날의 우리가 곱씹어 봐야 할 부분이다. 레드컴플렉스는 현대사 전반에 걸쳐 뿌리 깊게 우리의 의식을 지배해 왔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 역사를 두고 덮네 마네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이런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일반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은 장기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편견이 낳을 수 있는 건 또 다른 편견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다 객관적으로 역사를 평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런 시각의 전환을 거쳐 우리 역사교과서가 그토록 혼란스러웠던 해방공간을 어떻게 기술했는지 꼼꼼히 읽어보고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해방공간을 인식할 것인가에 대해서 재차 물어야 할 의무도 있다. 해방공간은 분명 혼란스러웠다. 죽음과 배신과 음모가 소용돌이 쳤고 오늘날 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갈등과 가능성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리고 그 씨앗들 중 열매를 맺은 이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뿌리 뽑혀진 이들의 역사를 지우려 한다. 지금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논쟁도 해방공간에서 시작한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적어도 역사를 공부한 이라면 그렇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덮거나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후세에게 과거를 가감 없이 가르쳐 직접 성찰할 기회를 주는 것이 바로 역사교육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방공간을 둘러싼 쟁점들을 배우는 일은 중요하다. 그리고 역사를 넘어 오늘날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중요한 척도로서 여전히 가치를 지니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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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사회학 : 먹거리 대안 찾기 | 희망의사회학 먹거리 대안찾기 1강 | 인혜최 | 2011.11.4 | |||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는 10월 24일부터 매주 월요일 6회에 걸쳐 '희망의 사회학 -먹거리 대안찾기'를 주제로 연속
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0월 24일 열린 첫번째 강좌에 "먹거리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 왜?" 를 주제로 원광대 김흥주 교수님이 강의해주셨습니다. 아래는 강좌를 녹취한 내용입니다. 먹거리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에 도움이 되길 기대합니다.(자원활동가 최혜인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먹거리를 생각하며, 개인적 차원의 행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강의를 통해 사회적인 먹거리 문제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food citizen이 되어야 합니다.” 일상에서 먹거리를 선택하는 행위는 나 자신에 의한 일입니다. 수입산 육류를 구입하는 것도, 내가 채식을 하지 못하는 것도 개인적인 실천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입산 육류는 저렴한 가격을 내세우며 선택을 강요하였고, 육식 위주의 문화는 채식을 별난 것으로 바라봅니다. 뿐만 아니라, 먹거리의 생산, 분배 등 보다 넓은 차원에서의 문제들은 사회 구조를 돌아보게 합니다. 이렇듯 지극히 개인적인 줄로 알았던 먹거리 문제를, 사회적 차원의 먹거리 문제로 새롭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먹거리 사회학 ‘먹거리사회학’ 이란 먹거리를 대상으로 한 사회학적 연구를 말합니다. 이 연구에서 먹거리는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영양학에서는 ‘식품’, 우리의 일상에서는 ‘음식’, 국가차원에서는 ‘식량’, 생협에서는 ‘먹거리’.. 이처럼 자신들의 공간에서 먹거리는 각각 다르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먹거리 속에 녹아 있는 ‘사회적 관계’를 살펴보면, 생태성, 관계성, 복지성, 지역성, 교육성, 이 다섯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1. 생태성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은 서로 소통하며 더불어 살아야 하지만, 근대사회는 이를 해체시켜 놓았습니다. 근대사회가 분리시켜 좋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재구조화 하는 것을 ‘생태성’이라고 합니다. 2. 관계성 근대사회 이후 과학기술의 횡포로 분리된,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는 공동체를 파괴하고 우리를 소회시키고 개별화하였습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 우리는 ‘관계성’을 재구성해야 합니다. 3. 복지성 지구에는 전세계인이 먹고 남을 만큼의 식량이 존재하지만, 지구의 3분의 2는 기아에 허덕이는 삶에 놓여 있습니다. 이는 식량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식량분배의 문제입니다. ‘복지’차원에서 불공평한 분배구조를 개선하고 먹거리 정의를 구축해야 합니다. 4. 지역성 거대 곡물회사가 대다수 나라의 먹거리를 지배하여 국가의 식량자급률이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세계가 하나되는 것이 세계화라지만, 세계화는 오히려 모든 관계를 해체시키고 있습니다. 공간적 거리와 사회적 거리가 중시되는 지역성의 개념이 필요합니다. 5. 교육성 먹거리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알고 food citizen을 양성하는 교육이 중요합니다. 먹거리 사회학을 세분화하면 지역차원에서 이루어지는 local scale, 국가차원에서 이루어지는 national scale, 초국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global scale이 있습니다. 이는 거시이론, 일상사례, 신천전략으로 나눠 생각해볼 수 있는데, 우선 거시이론은 다음 강의에서 배우기로 하였습니다. 지역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사례연구는 거대자본에 종속되지 않은 농민과 농민간의 연대로 이루어지는 local food, 마을 만들기 운동인 커뮤니티비즈니스사업 등이 있습니다. 이는 지역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생태적 가치를 지향해야 합니다. 국가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대안먹거리사례로는 식생활교육, 참여와 운동, 공공급식이 있습니다. 친환경무상급식을 통해 국가차원의 일상 교육이 실천되길 희망해봅니다. 초국적차원으로는 공정무역이나 global NGO를 통해 대안먹거리를 위한 행동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먹거리 위험사회 먹거리 위험사회란 광우병, 구제역처럼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 전지구적으로 먹거리 위험이 확산된 것을 말합니다. 먹거리 위험사회는 먹거리 안전에서의 위험, 먹거리 보장에서의 위험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안전한 먹거리는 내가 직접 길러 먹는 것, 신뢰하는 사람이 직접 길러 나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는 같은 지역에서 이웃 간에 가능한 일입니다(local food). 또 먹거리를 보장하는 것은 정부의 몫입니다. 먹거리는 단순히 양적 보장이 아닌, 질적 보장이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지속적으로 제공해야 하고(접근성), 선택의 여지가 있는 양질의 먹거리를 제공해야 합니다(적절성). 또 생태적이고 지역사회에 기반한 먹거리를 보장해야 합니다(지속가능성).
산업사회에는 사회적 계급, 돈의 분배, 실업, 질병 등 ‘복지’를 통해 정책적으로, 기술적으로 제거 가능한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위험사회에서는 개별화, 공포, 불확실성, 불신 등 궁극적인 위험 요소를 제거하기 어렵고, 보다 깊숙이 문제가 내제되어 있기 때문에 소통과 신뢰를 통해 풀어나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산업사회의 기아 문제는 식품의 영양, 사회복지제도로 문제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었지만, 현재의 GMO문제는 예측 불가능하고 과학으로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진정성 있는 정책으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한국인의 먹거리 위험인식 다음은 전국 만19세 이상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인의 먹거리 위험인식에 대한 설문 분석입니다. 한국인이 느끼는 피해가능성에서는 환경오염, 먹거리, 교통사고로 인한 위험인식이 가장 높았습니다. 먹거리 위험인식 중 각 항목별로는 비만, 음주, 방부제 색소 향료 등 식품첨가물로 인한 피해를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식품안전 면에서는 국내산과 수입산 간의 인식 차이가 환연했습니다. 특히 중국산 김치에 대한 불신이 가장 컸고, 일본의 방사능 누출과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졌기 때문인지, 일본산 수산물에 대한 불신도 높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나라 국민의 수입산 먹거리 구매율은 35%에 육박하고, 그 중 육류는 70%정도를 차지합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수입산 먹거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강요된 선택의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식당인식으로는 소규모 식당과 군대급식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낮았습니다. 애초에 관계 속의 먹거리에 대한 신뢰가 높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예상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반면, 호텔식당과 패밀리레스토랑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높았는데, 이를 통해 ‘관계’보다는 ‘시스템’을 신뢰하는 경향을 알 수 있습니다. 생산유통 부분에서는 소규모로 생산을 하는 농민과, 대규모로 생산을 하는 농민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높았습니다. 반면 이 전의 식당에 대한 신뢰도에서는 소규모 식당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낮았는데, 이는 우리사회의 이중구조를 보여줍니다. 반대로 대규모 식품 가공 해외 식품업체와 소규모 식품 가공 식품업체에 대한 신뢰도는 가장 낮았습니다. 정보신뢰에서는 재밌는 결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국회의원, 정부 관료, 식품기업의 광고 순으로 정보신뢰도가 가장 낮았습니다. 반대로 가족과 농민에 대한 신뢰도는 가장 높았습니다. 식품 안전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이 안전하다는 정보보다는 안전하지 않다는 정보를 믿는다는 비율이 75%에 달했는데, 이는 우리사회가 저신뢰 사회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정부정책에 대한 신뢰도 또한 압도적으로 낮았고, 미국산 소고기, 구제역에 관련한 정부의 발표를 신뢰하지 않는 비율도 70%로 높게 나타났습니다. 친환경 농산물에 관련해서는 안전도, 친환경 여부, 생산자에 대해 어느 정도 신뢰하는 반면, 가격에 대한 신뢰도는 낮게 나타났습니다. 친환경 농산물처럼 안전한 먹거리를 생산하는데 생산자의 노력이 배가 되는데, 이러한 노력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결과입니다. 따라서 인식부족 문제를 충족할 수 있는 대안적 가치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먹거리 의식으로는 상당히 진보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GMO, 미국산 소고기 수입, 친환경 무상급식 부분에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비율이 높았습니다. 2008년의 촛불집회가 정당하다는 비율과 유기농업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는 비율은 높게 나타났습니다. 반면 대안농업의 인지도는 대체적으로 낮은 편입니다. 이를 통해 먹거리 문제를 인식하기는 하지만, 행동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먹거리 행동 패턴으로, 패스트푸드와 미국산소고기는 먹지 않는다는 비율이 높았지만, 제철음식과 로컬푸드를 먹는 비율이 딱히 높지 않은 것을 볼 때, 명확한 행동 패턴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또 음식선택행위를 보면 갈비, 김치, 전통 한식의 선택 비율이 높고, 와인, 소시지의 비율이 낮았습니다. 이는 우리의 음식 성향이 서구화되지 않고, 아직까지 지극히 한국지향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먹거리에 대한 정보 확인행동으로 원산지와 유통기한은 적극적으로 확인하지만, 성분과 첨가물은 거의 확인하지 않는 편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전의 먹거리 위험인식 중 각 항목별 심각성에서 방부제 색소 향료 등 식품첨가물에 대한 위험인식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 것을 보아, 우리의 이중적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친환경 식품을 의식하는 정도는 다소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금까지의 데이터를 종합했을 때, 1. 한국인의 먹거리 위험성을 인지하지만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인식의 이중구조). 이러한 이중구조를 해소하기 위해, 먹거리 교육을 통한 먹거리시민, food citizen 양성이 필요합니다. 2. 먹거리 속의 관계를 지향하면서도 호텔에 대한 신뢰도가 높았듯이, 결과적으로 시스템을 신뢰하고 있습니다(신뢰의 다층구조). 또 친환경 식품에 대해 만족하지만 가격을 신뢰하지 못하고, 수입한 식품을 불신하면서도 이를 구매하는 것처럼, 시장합리적 선택, 혹은 강요된 선택을 하는 양상입니다. 따라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연대가 강화되어 대안먹거리체계가 구축되어야 합니다. 또한 먹거리 정의 실현을 위한 관계와 소통에 바탕을 둔 새로운 패러다임의 먹거리 정책이 필요합니다. 3. 2008년의 광우병 파동과 2010년의 구제역, 무상급식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학습효과를 불러 일으켰고, 정부 정책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가져왔습니다(저신뢰 사회). 이처럼 앞으로는 먹거리 지위와 불신으로 인한 사회적 연대성이 강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러한 세력은 정치세력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