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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명 | 강좌후기 | 글쓴이 | 날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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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사회학 : 먹거리 대안 찾기 | 희망의사회학 먹거리 대안찾기 1강 | 인혜최 | 2011.11.4 | ||||||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는 10월 24일부터 매주 월요일 6회에 걸쳐 '희망의 사회학 -먹거리 대안찾기'를 주제로 연속
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0월 24일 열린 첫번째 강좌에 "먹거리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 왜?" 를 주제로 원광대 김흥주 교수님이 강의해주셨습니다. 아래는 강좌를 녹취한 내용입니다. 먹거리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에 도움이 되길 기대합니다.(자원활동가 최혜인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먹거리를 생각하며, 개인적 차원의 행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강의를 통해 사회적인 먹거리 문제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food citizen이 되어야 합니다.” 일상에서 먹거리를 선택하는 행위는 나 자신에 의한 일입니다. 수입산 육류를 구입하는 것도, 내가 채식을 하지 못하는 것도 개인적인 실천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입산 육류는 저렴한 가격을 내세우며 선택을 강요하였고, 육식 위주의 문화는 채식을 별난 것으로 바라봅니다. 뿐만 아니라, 먹거리의 생산, 분배 등 보다 넓은 차원에서의 문제들은 사회 구조를 돌아보게 합니다. 이렇듯 지극히 개인적인 줄로 알았던 먹거리 문제를, 사회적 차원의 먹거리 문제로 새롭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먹거리 사회학 ‘먹거리사회학’ 이란 먹거리를 대상으로 한 사회학적 연구를 말합니다. 이 연구에서 먹거리는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영양학에서는 ‘식품’, 우리의 일상에서는 ‘음식’, 국가차원에서는 ‘식량’, 생협에서는 ‘먹거리’.. 이처럼 자신들의 공간에서 먹거리는 각각 다르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먹거리 속에 녹아 있는 ‘사회적 관계’를 살펴보면, 생태성, 관계성, 복지성, 지역성, 교육성, 이 다섯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1. 생태성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은 서로 소통하며 더불어 살아야 하지만, 근대사회는 이를 해체시켜 놓았습니다. 근대사회가 분리시켜 좋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재구조화 하는 것을 ‘생태성’이라고 합니다. 2. 관계성 근대사회 이후 과학기술의 횡포로 분리된,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는 공동체를 파괴하고 우리를 소회시키고 개별화하였습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 우리는 ‘관계성’을 재구성해야 합니다. 3. 복지성 지구에는 전세계인이 먹고 남을 만큼의 식량이 존재하지만, 지구의 3분의 2는 기아에 허덕이는 삶에 놓여 있습니다. 이는 식량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식량분배의 문제입니다. ‘복지’차원에서 불공평한 분배구조를 개선하고 먹거리 정의를 구축해야 합니다. 4. 지역성 거대 곡물회사가 대다수 나라의 먹거리를 지배하여 국가의 식량자급률이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세계가 하나되는 것이 세계화라지만, 세계화는 오히려 모든 관계를 해체시키고 있습니다. 공간적 거리와 사회적 거리가 중시되는 지역성의 개념이 필요합니다. 5. 교육성 먹거리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알고 food citizen을 양성하는 교육이 중요합니다. 먹거리 사회학을 세분화하면 지역차원에서 이루어지는 local scale, 국가차원에서 이루어지는 national scale, 초국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global scale이 있습니다. 이는 거시이론, 일상사례, 신천전략으로 나눠 생각해볼 수 있는데, 우선 거시이론은 다음 강의에서 배우기로 하였습니다. 지역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사례연구는 거대자본에 종속되지 않은 농민과 농민간의 연대로 이루어지는 local food, 마을 만들기 운동인 커뮤니티비즈니스사업 등이 있습니다. 이는 지역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생태적 가치를 지향해야 합니다. 국가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대안먹거리사례로는 식생활교육, 참여와 운동, 공공급식이 있습니다. 친환경무상급식을 통해 국가차원의 일상 교육이 실천되길 희망해봅니다. 초국적차원으로는 공정무역이나 global NGO를 통해 대안먹거리를 위한 행동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먹거리 위험사회 먹거리 위험사회란 광우병, 구제역처럼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 전지구적으로 먹거리 위험이 확산된 것을 말합니다. 먹거리 위험사회는 먹거리 안전에서의 위험, 먹거리 보장에서의 위험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안전한 먹거리는 내가 직접 길러 먹는 것, 신뢰하는 사람이 직접 길러 나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는 같은 지역에서 이웃 간에 가능한 일입니다(local food). 또 먹거리를 보장하는 것은 정부의 몫입니다. 먹거리는 단순히 양적 보장이 아닌, 질적 보장이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지속적으로 제공해야 하고(접근성), 선택의 여지가 있는 양질의 먹거리를 제공해야 합니다(적절성). 또 생태적이고 지역사회에 기반한 먹거리를 보장해야 합니다(지속가능성).
산업사회에는 사회적 계급, 돈의 분배, 실업, 질병 등 ‘복지’를 통해 정책적으로, 기술적으로 제거 가능한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위험사회에서는 개별화, 공포, 불확실성, 불신 등 궁극적인 위험 요소를 제거하기 어렵고, 보다 깊숙이 문제가 내제되어 있기 때문에 소통과 신뢰를 통해 풀어나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산업사회의 기아 문제는 식품의 영양, 사회복지제도로 문제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었지만, 현재의 GMO문제는 예측 불가능하고 과학으로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진정성 있는 정책으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한국인의 먹거리 위험인식 다음은 전국 만19세 이상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인의 먹거리 위험인식에 대한 설문 분석입니다. 한국인이 느끼는 피해가능성에서는 환경오염, 먹거리, 교통사고로 인한 위험인식이 가장 높았습니다. 먹거리 위험인식 중 각 항목별로는 비만, 음주, 방부제 색소 향료 등 식품첨가물로 인한 피해를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식품안전 면에서는 국내산과 수입산 간의 인식 차이가 환연했습니다. 특히 중국산 김치에 대한 불신이 가장 컸고, 일본의 방사능 누출과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졌기 때문인지, 일본산 수산물에 대한 불신도 높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나라 국민의 수입산 먹거리 구매율은 35%에 육박하고, 그 중 육류는 70%정도를 차지합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수입산 먹거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강요된 선택의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식당인식으로는 소규모 식당과 군대급식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낮았습니다. 애초에 관계 속의 먹거리에 대한 신뢰가 높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예상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반면, 호텔식당과 패밀리레스토랑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높았는데, 이를 통해 ‘관계’보다는 ‘시스템’을 신뢰하는 경향을 알 수 있습니다. 생산유통 부분에서는 소규모로 생산을 하는 농민과, 대규모로 생산을 하는 농민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높았습니다. 반면 이 전의 식당에 대한 신뢰도에서는 소규모 식당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낮았는데, 이는 우리사회의 이중구조를 보여줍니다. 반대로 대규모 식품 가공 해외 식품업체와 소규모 식품 가공 식품업체에 대한 신뢰도는 가장 낮았습니다. 정보신뢰에서는 재밌는 결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국회의원, 정부 관료, 식품기업의 광고 순으로 정보신뢰도가 가장 낮았습니다. 반대로 가족과 농민에 대한 신뢰도는 가장 높았습니다. 식품 안전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이 안전하다는 정보보다는 안전하지 않다는 정보를 믿는다는 비율이 75%에 달했는데, 이는 우리사회가 저신뢰 사회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정부정책에 대한 신뢰도 또한 압도적으로 낮았고, 미국산 소고기, 구제역에 관련한 정부의 발표를 신뢰하지 않는 비율도 70%로 높게 나타났습니다. 친환경 농산물에 관련해서는 안전도, 친환경 여부, 생산자에 대해 어느 정도 신뢰하는 반면, 가격에 대한 신뢰도는 낮게 나타났습니다. 친환경 농산물처럼 안전한 먹거리를 생산하는데 생산자의 노력이 배가 되는데, 이러한 노력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결과입니다. 따라서 인식부족 문제를 충족할 수 있는 대안적 가치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먹거리 의식으로는 상당히 진보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GMO, 미국산 소고기 수입, 친환경 무상급식 부분에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비율이 높았습니다. 2008년의 촛불집회가 정당하다는 비율과 유기농업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는 비율은 높게 나타났습니다. 반면 대안농업의 인지도는 대체적으로 낮은 편입니다. 이를 통해 먹거리 문제를 인식하기는 하지만, 행동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먹거리 행동 패턴으로, 패스트푸드와 미국산소고기는 먹지 않는다는 비율이 높았지만, 제철음식과 로컬푸드를 먹는 비율이 딱히 높지 않은 것을 볼 때, 명확한 행동 패턴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또 음식선택행위를 보면 갈비, 김치, 전통 한식의 선택 비율이 높고, 와인, 소시지의 비율이 낮았습니다. 이는 우리의 음식 성향이 서구화되지 않고, 아직까지 지극히 한국지향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먹거리에 대한 정보 확인행동으로 원산지와 유통기한은 적극적으로 확인하지만, 성분과 첨가물은 거의 확인하지 않는 편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전의 먹거리 위험인식 중 각 항목별 심각성에서 방부제 색소 향료 등 식품첨가물에 대한 위험인식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 것을 보아, 우리의 이중적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친환경 식품을 의식하는 정도는 다소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금까지의 데이터를 종합했을 때, 1. 한국인의 먹거리 위험성을 인지하지만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인식의 이중구조). 이러한 이중구조를 해소하기 위해, 먹거리 교육을 통한 먹거리시민, food citizen 양성이 필요합니다. 2. 먹거리 속의 관계를 지향하면서도 호텔에 대한 신뢰도가 높았듯이, 결과적으로 시스템을 신뢰하고 있습니다(신뢰의 다층구조). 또 친환경 식품에 대해 만족하지만 가격을 신뢰하지 못하고, 수입한 식품을 불신하면서도 이를 구매하는 것처럼, 시장합리적 선택, 혹은 강요된 선택을 하는 양상입니다. 따라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연대가 강화되어 대안먹거리체계가 구축되어야 합니다. 또한 먹거리 정의 실현을 위한 관계와 소통에 바탕을 둔 새로운 패러다임의 먹거리 정책이 필요합니다. 3. 2008년의 광우병 파동과 2010년의 구제역, 무상급식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학습효과를 불러 일으켰고, 정부 정책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가져왔습니다(저신뢰 사회). 이처럼 앞으로는 먹거리 지위와 불신으로 인한 사회적 연대성이 강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러한 세력은 정치세력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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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 집의 인문학 7강 집,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 | 느티나무 | 2011.11.1 | ||||||
8월 30일부터 가을학기 강좌 [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가격 대신 ‘가치’가 넘치는 집을 만들자 사람 말고 집을 짓는 동물로는 무엇이 있을까? 개미나 벌은 사람보다 더 정교하게 집을 짓는다. 곤충 다음으로는 조류다. 새가 집을 지을 때 제일 중요한 게 통풍이라고 한다. 까치는 바람이 많이 부는 날 집을 짓는데, 미리 안전점검을 하는 거다. 사람은 처음에 동굴 생활을 했는데 그 때의 생활습관이 언어에도 남아 있다. ‘드러눕다’에서 ‘드러’는 (동굴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일어나다’에서 ‘나다’는 (동굴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두 발로 걷고 정착을 하면서 사람에게 거주 공간이 중요하게 됐다. 정착을 하면서 인구도 증가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OECD 자살률 1위이다. 1인가구가 급증하고 있는데, ‘사별’이 큰 원인이다. 사별하면서 독거노인이 늘어나고 있다. 혼자 사는 노인이 많은데 자살이 증가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다른 국가에 비해 한국과 일본은 유독 고령화가 심하다. 인구 고령화에는 출생, 사망, 이동이라는 문제가 있는데 이동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며느리만 받는다. 베이붐 세대가 고령화되면서 인구 고령화 속도도 빠르다. 지난 2년간 노인 자살이 5배나 늘었다. 옛날에는 자식이 노후대비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생활의 얼개> 재개발, 뉴타운으로 골목이 사라지고 마을이 없어졌다. 집은 ‘사는 곳’으로 심미성, 공동체성, 역사성이 있다. 조용하게 혼자서 하늘을 볼 수 있는 시간을 집에서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명심보감에 “손님이 오지 않으면 집안이 저속해지고, 시서(詩書)를 가르치지 않으면 자손이 어리석어지느니라”라는 말이 있다. 예전에는 집들이, 돌잔치, 장례, 함들이 등 집이 거점이 되는 행사가 많았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집에 손님이 오지 않으면서 부모를 통한 인맥도 형성되지 않는다.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큰 재산 중에 하나가 다양한 인맥이지 않을까?
1인 가구가 늘면서 사회가 위험해지고 있다. 무연사(無緣死)는 죽었는데 시체를 거둘 사람이 없는 것이고, 고독사는 죽는 순간에 혼자 있는 것이다. 1인 가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무연사도 느는 추세다. 일본은 셰어링 하우스(sharing house), 노인홈 등이 있다. 혈연을 넘어선 대안가족 형태이다.
● 집의 인문학 강좌 후기 전편 보기 <2강> 안창모 "우리는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아왔나" <3강> 박철수 "집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 소설을 통해 본 우리들의 집" <4강> 김재영 "집 살live것인가, 살buy 것인가" <6강> 박인석 "내 집 한번 지어볼까 : 내 집 짓기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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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 | 교과서를 통해 본 한국근현대사 4강 | 느티나무 | 2011.10.27 | ||||||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교과서를 통해 본 한국근현대사 4강 후기>를 함께 공유합니다. 글은 김도형 인턴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원문 출처 :http://bit.ly/tzzyD1 역사에서 공간의 의의 '국학'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 나라의 정체성을 이루는 요소를 연구하는 학문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오늘날의 '국학'은 보통 국문학과 국사학을 일컫는다. 하지만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국학은 '지리학'을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사람이 나고 자란 땅을 아는 일이 그 사람과 나라를 이해하는 데에 필수 불가결함을 그들은 모르지 않았다. 물론 오늘날의 우리도 공간에 발을 딛고 흐르는 시간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개인의 시간이 쌓이면 역사가 된다. 즉, 역사도 결국 각각의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역사에는 종종 공간이 결여되어 있다. 한번 질문을 던져 보자. 3.1 운동은 언제 일어났을까? 그리고 한국전쟁은 언제 시작했을까? 이 정도 질문은 누구나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사건이 진행된 공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승만, 김구,
여운형의 차이를 말하는 이는 많지만 그들이 활동한 시대의 미국과 중국, 그리고 한반도의 상황에 대해 정확히 논할 수 있는 이는
드물다. 인간의 행동은 대개 공간과 조응한다. 동학농민운동에서도 남접과 북접의 활동은 전혀 달랐다. 서울과 평양의 독립운동
스타일도 차이가 있었다. 같은 시대에도 공간의 개성은 분명히 있었고 그 차이는 사람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역사의
흐름을 움직일 수 있는 비범한 인물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히틀러와 함께 근대 최악의 학살자였던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경우를 보자. 역사에서는 그가 자행한 대량 살인의 원인을 잔혹한 성격으로 본다. 그리고 생부의 폭력으로 얼룩진 유년기와 개인적 결핍을 그 이유로 든다. 하지만 스탈린이라는 '인간'의 성격을 만들고 발현시킨, 그를 둘러싼 공간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김정인 교수(춘천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는 이런 식의 단순한 접근이 얼마나 무책임할 수 있는가를 지적한다. 한 사람이 나고 자란 '공간'에 대한 충분한 고찰 없이 그를 역사적 인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학생들을 위한 역사 교육에서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아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9월 7일부터 진행 중인 <교과서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 강좌 중 네 번째 강의는 바로 '역사적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교재로 하는 이 강좌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서술 방향과 역사 인식에 대한 전문가들의 담론을 시민들과 나누고 있다. 다음의 내용은 김정인 교수의 강의 <민족운동의 공간 탐사: 서울 평양 찍고 만주 미주까지>를 토대로 재구성 및 정리한 것이다. 교과서 안의 역사공간 현행 역사 교과서에도 한반도 외에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존재했다는 언급이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충실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게다가 그 각각의 공간을 동등한 비중으로 다루지도 않는다. 우선 식민 모국이었던 일본을 보자. 일본에서의 독립운동, 언뜻 듣기에도 쉬웠을 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2.8 독립 선언을 기억한다. 해방 후 일본에 세워진 조선인학교도, 한인 거류민단과 조총련의 존재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정도 규모의 조선인 조직이 존재하려면 일본 내에서 민족운동의 맥이 면면히 이어졌어야 한다는 사실은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교과서에서의 일본 내 민족운동은 2.8 독립선언과 함께 증발해 버린다. 물론 남한 정부의 반공 강박증이 낳은 결과다. 일본 내 민족운동세력은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운동의 영향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민 모국 본토에서의, 아마도 가장 강한 탄압에 직면해야 했을 독립운동의 기록을 그런 이유로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김교수는 강조한다. 이런 식의 무시나 왜곡은 일본 외의 공간에서도 빈번히 이루어진다. 러시아가 대표적이다. 두 번의 혁명을 거쳐 소비에트 연방 성립으로 이어지는 러시아 혁명은 공간의 이름 뿐 아니라 성격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 버린다. 사실 러시아 혁명은 20세기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에서 가장 크고 가장 낙후된 나라의 최하층 노동자, 농민이 들고 일어나 짜르를 죽이고 자신들의 정부를 만든 것이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레닌이 이끄는 이 신생 정치집단은 기존체제를 유지하던 각국 지배층에게 공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소련은 계급해방은 물론 제국주의적 세계질서로부터 피압박 민족의 해방 역시 주창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레닌은 민족자결주의를 말하고 식민지독립을 통해 이를 실행했다. 김교수는 그 충격과 공포를 50년대 미국 중산층들이 원자폭탄에 품었던 두려움에 비견한다. 아마 실제로도 그러했을 것이다. 세계질서가 뒤바뀌는 일도 당시에는 가능해 보였다. 물론 그 공포는 식민지 피지배층에게는 희망이기도 했다. 일제하의 조선민중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교과서의 러시아-소련 관련 서술은 이런 분위기를 충분히 담아내고 있지 못하다. 이유도 일본의 경우와 같다.
구체적으로는 자유시 참변 같은 부정적 사건만을 강조하고, 레닌의 지원금으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한 사실 등은 제대로 언급하지
않는다. 역사적 시각에서 이는 매우 곤란하다. 반공이라는 색안경을 통해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제정러시아나 냉전시대와 달리, 당시의 소련은 전혀 우리의 가상적국이 아니었다. 더욱이 레닌은 3.1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호감을 표한 바 있다. 말하자면, 당시 소련은 국제적 연대세력으로서 광범위한 계층에게 기대감을 줄 수 있었다. 자치론자인 최린마저 소련에서 개최한 극동인민대표회의를 찾았고, 임정개혁을 부르짖던 창조파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도로 블라디보스톡을 내정했다. 일본을 제외하면, 당시 민족운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는 분명 소련이었다. 그러니 박헌영 같은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은 당연히 소련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이들의 행적은 오늘날 남북한 양쪽에서 모두
무시된다. 남쪽은 철저한 반공주의로, 북한은 김일성 항일무장투쟁 중심으로 역사교육의 방향을 잡은 까닭이다. 역시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석했던, 레닌이 인정한 조선의 대표적 사회주의자 이동휘도 교과서에서는 거의 외면당한다. 교과서의 러시아 서술은
그 어느 지역보다도 반공주의에 의해 큰 타격을 받은 셈이다. 이렇듯 일본과 러시아가 교과서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하는 것에 비하면 중국 지역에 대한 서술은 양적으로 매우 풍부하다. 중국
관내와 만주의 운동을 구분해서 언급할 정도다. 이는 물론 양 지역에서 독립운동 양상이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질적으로는
이들 공간에 대한 서술도 충분하다고 하기 어렵다. 중국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은 만주와 관내를 막론하고 매우 복잡하다. 우선 중국 관내에서의 독립운동은 국민당-공산당 간의 역학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중국관내의 조선인 민족운동 세력은 좌우 모두 국민당 정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한편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 혁명이 필요하다고 인식했고, 그에 따라 팔로군과 연합해 항일 투쟁을 벌였다. 이런 이유로 중국 공산당이 조직한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지휘관 중에는 한인들이 많았다. 무정을 비롯한 팔로군 출신의
사회주의자들은 북한 정권 수립 후 인민군에 편입되기도 한다. 이런 정치적 면면을 파악하려면 당대의 중국사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교과서는 군벌들의 할거와 국공합작, 국공내전 같은 복잡한 정치상황을 충분히 설명해 주지 않는다. 만주 서술 문제도 간단하지 않다. 만주는 중국보다 일본과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많고, 우리의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라는 인식도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일본의 괴뢰국가 만주국이 존재했고, 주변 민족들이 섞여 사는 지역이었기에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히 중국 영토인 만주에서 그토록 자유로운 민족운동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나 문제의식은 필요하다. 물론, 교과서에는 그런 건 없다. 실제로는 만주국 성립 이후 독립운동은 불가능했다. 만주군관학교출신 장교들인 박정희, 백선엽 등이 독립군 사냥을 시작한 것도 이 때 부터이지만 이에 대한 언급도 없다. 말하자면, 민족운동 공간으로서 만주에 대한 서술도 깊이 면에서는 매우 미흡하다. 교과서의 부실한 서술과는 달리 국내외를 막론하고 각각의 민족운동은 그 무대가 되는 공간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함흥지역의 높은 교육열을 배경으로 일어났다. 광주의 학생운동과 격렬한 소작쟁의는 빈부갈등과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강했던 전라도의 지역적 특성이 배경이었다. 안동 지역은 조선조 이래 유림의 전통 때문인지 민족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독립운동가를
유독 많이 배출했다. 서울과 평양은 당시에도 최고의 대도시였고, 따라서 모든 분야의 민족 운동이 존재했다. 중국과 만주에서의 독립운동도 한결
같지는 않았다. 상하이는 임시정부의 터전이었지만 30년대 상하이 사변으로 일본군에게 점령된 이후 독립운동이 어려워진다. 한편
베이징은 북경 군사통일촉성회,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등이 자리해, 반 임정 세력의 집결지가 된다. 일본과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2.8 독립선언이후에도, 이승만이 탄핵된 후에도 독립운동의 맥은 끊어지지 않았다. 역전된 남북-역사적 공간, 정치적 공간 한편, 한반도 안에서 민족운동의 공간이라는 개념은 조금 더 복합적으로 봐야 할 필요가 있다. 같은 공간이라도 시대에 따라
전혀 다른 성격과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병운동 지역과 동학농민운동 지역은 겹치지 않았다. 두 운동이 계급적-정치적으로
지향하던 방향성의 차이가 공간에 반영된 결과다. 그런가 하면 3.1운동이 확산되는 지역은 이전의 동학농민운동, 의병운동과 또
달랐다. 기존의 두 운동이 발원 지역을 시작으로 퍼져나갔다면 3.1운동은 서울과 평양으로 대표되는 근대 도시 중심의 시민 대중운동
형태로 전개되었다. 오늘날의 분단현실에서 역사적 공간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일제시대의 남북공간은 정치적으로 지금과 정 반대였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오늘날 남북한 지역의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먼저 평양 중심의 서북지방은 전반적으로 빈부-신분의 격차가 적었다. 특히 함남지역은 반상의 구별도 없다시피 했고 그 중 북청은 '공산국'이라 불렸다고 한다. 지주 소작인간 갈등도 드물고 자산가, 중소지주, 자작농의 비율도 높았다. 평북지역도 자작농 비율이 반을 넘었다. 토지가 척박해 수확량은 적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지조를 대신 부담해 주는 등 지주의 마음 씀씀이가 박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주를 큰집이라고 부를 만큼 관계가 좋았다. 이는 천도교와 기독교 세력이 매우 강하고 상대적으로 유교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지역색과도 무관하지 않다. 평안도에 대해서는 자유평등의식은 높지만 3.1운동 이후 관권, 금권과 타협해 생활문제에 치중하는
경향이 짙어졌다는 평도 있다. 다만 지역주의는 강고했다. 한마디로 보수적이고 자유주의 내지는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그렇다고 이 지역이 중앙정부로부터 소외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조선총독부를 평양으로 옮기자는 주장도 있었을 정도로 평양은 당시에도
중요한 도시였다. 어쨋거나 흔히 생각하는 '북한지역'의 이미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이다. 반면 서울 중심의 기호-호남지방은 여러 의미로 계급갈등이 첨예한 곳이었다. 이쪽은 그나마 소설 등을 통해 익숙한 모습이지만, 서북지역과 비교해 보면 또 느낌이 미묘하다. 충남 지역은 양반의 근거지로 계급사상과 빈부차별이 모두 강했고, 경기도는 아예 반촌과 민촌이 따로 살았다. 전라도는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도 풍부했지만 빈부차가 크고 지주의 횡포가 심했다. 1910년 이후 부터는 동양척식회사와 일본인 자본가의 수탈이 더해졌다. 그 결과 많은 자작농들이 소작을 거쳐 파산과 유랑의 길로 떨어졌다. 그러니 이 지역의 소작쟁의는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전쟁, 사회주의운동이 활발했던 것도 당연하다. 심지어
일제 경찰당국은 호남지역을 '사상의 제일선'이라 불렀다. 말하자면, 사회적-경제적으로 사회주의사상이 자라기 딱 좋은 토양이었다.
김교수는 한국사회에서 호남지역을 소위 '빨갱이 땅'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시점을 이 때로 잡는다. 훗날 김대중이 박정희에 의해
용공분자로 쉽게 몰릴 수 있었던 것도 이시기에 형성된 전라도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다. 이런 지역성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이들 지역이 가진 정치성향과 정 반대인 두 개의 정부가 남북에 각각 수립 되었다는데 있었다. 물론, 이는 미-소의 이해관계와 알력의 결과물이었지만, 바로 그 어긋남 때문에 한국전쟁 후까지 남북한 모두 결코 적지 않은 피를 흘려야 했음을 김교수는 지적한다. 괴리를 공유하게 된 남북 정부로서는, 그 이상의 마찰과 갈등도 공유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 남북한의 사회문제는 거울에 비춘 듯 닮은 부분이 많다. 흔히 남한 초기 좌익의 준동이라는 식으로 설명되는 반체제 운동은 우익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북한에서 똑같이 벌어졌다. 소설 <태백산맥>을 통해 친숙한 빨치산 역시 북한에도 존재했다. 구월산 부대로 대표되는 이들 '반공 빨치산'은
전쟁 전후 북한 지도부의 골칫거리였다. 김일성 본인도 민족주의자들의 암살시도와 반대시위를 수차례 겪어야 했다. 정치적 기반과
정반대의 정부가 들어섰으니 유혈사태는 예견된 거나 다름없었다. 6.25전쟁이 그토록 모질고 잔인한 비극일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이런 배경이 숨어 있다. 이후 후퇴와 수복을 반복하면서 막대한 희생을 치룬 이유도 여기에 있다. 휴전 후에도 남북은 각각 반정부
세력을 무자비하게 토벌하고 나서야 정국 안정을 꾀할 수 있었다.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은 사상적. 정치적 남북 공간과
어긋나버린 정부수립에서 잉태된 셈이다. 타자의 공간과 역사인식 우리에게는 이런 사실들이 새롭다. 이유가 있다. 그동안 우리는 무대와 조연이 없는 1인 활극의 독립 운동을 상정하며 역사를
배우고 또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물론 역사적 상상력의 빈곤이다. 게다가 우리는 과거사 청산을 완수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남는 것은 여유와 배려가 아닌 피해의식과 콤플렉스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독립운동에만 천착한다. 그 무대인 공간과 그 안의
타자에 대한 고민은 없으며,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김교수는 이런 콤플렉스와 빈곤한 역사인식이 반영된 결과물로 남한의 화폐를
꼽는다. 식민지 경험이 있는 국가의 화폐에는 일반적으로 독립운동가의 초상이 들어간다. 일본의 경우는 후쿠자와 유키치 등 근대화의 주역들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 화폐에는 온통 조선시대 인물 뿐이다. 친일논란과 좌우논란에서 모두 자유로울 수 있는 근대 인물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해방 60여년 만인 이제야 간신히 10만원권에 김구 초상이 들어갈 예정이라니 늦어도 보통 늦은게 아니다. 정치적인 제약 외에도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한 공감대 형성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필요하다. 다른 이의 역사를 아는 것은 곧 역사공간의 이해를 뜻한다. 그리고 그
공간의 또 다른 '인물'인 우리를 더 면밀히 이해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는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대표적 인물, 김구와
이승만이 활동한 공간의 예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알다시피 이승만은 전투적인 반공주의자이자 북진 통일론자였다. 보도연맹사건
등을 통해 공산주의자로 추정되는 사람이라면 가리지 않고 죽였다. 그에게 공산주의자는 민족도 동포도 아니었다. 이런 이승만을
이해하려면 당시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알 필요가 있다. 1921년부터 12년간 미국 대통령과 의회는 공화당이 장악했었다. 즉, 미국의 20년대는 경제적 풍요와 보수주의의 시대였다는 뜻이다. 헐리우드 영화, 메이저 리그, 포드 자동차 등 우리가 아는 미국 대중문화의 원형이 형성된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공황과 함께 미국은 심각하고 장기적인 경기침체를 겪는다. 그리고 정치적-문화적으로 강력한 급진주의와 저항의 조류가 대두된다. 실제로 미국사회가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많은 중산층들은 혁명과 체제전복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다. 이들의 불안감은 러시아 혁명으로 실체를 갖게 된 부분도 있다. 훗날 매카시즘 광풍의 전조인 '적색공포' 현상이 이 때 처음 일어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승만은 바로 이 시기를 미국에서 보냈다. 완벽한 이상 국가의 전복을 꾀하는 공산주의자에게 그가 발작적인 증오를 갖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미국은 9.11 전까지 한 번도 본토를 공격 받은 일이 없다. 이승만은 공포의 실체를 직접 겪지 않았기 때문에 타협의 여지도 망설임도 없는 맹목성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부분에서 드러나는 공간 경험의 바탕이 김구와 이승만의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었다는 것이 김정인 교수의 주장이기도 하다. 김구가 활약했던 중국대륙, 그 중에서도 만주는 매우 독특한 땅이었다. 만주족은 중원을 정복한 후 만주 지역을 조상의 성지라 하여 민간인의 출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 조치는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쉽게 했고 청 왕조가 약해지면서 조선, 일본 등 주변 지역에서 밀려난 이들이 만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만주는 중국의 온전한 영토가 아니라는 주변국가의 인식도 이 때 생겼다. 만주국 성립 전까지 비교적 자유로운 독립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이런 이유다. 그리고 현재 중국이 만주 대신 동북지구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도 주변국의 '만주 인식' 때문이다. 어쨌거나, 당시의 만주는 동아시아 유랑민들에게는 새로운 삶의 안식처이자 민족간, 문화간 교류의 매개지역이었다. 반면 만주는
동아시아 세계의 모순이 중첩되는, 변동의 진원지이기도 했다. 또한 모순의 돌파구로서 민족국가 간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면 물리적
충돌의 각축장이었다. 실제로 국공내전 당시 격전지는 중국본토보다 만주지역에 더 많았다. 이런 지역에서 직접 전쟁과 합작을 보고
겪은 김구의 역사인식은 이승만과 또 달랐다. 김구는 기본적으로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끝까지 좌우합작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남북총선거 관철을 위해서는 스스로의 정치생명을 거의 포기해 가면서 김일성을 만나러 갔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를 김교수는 김구의 이런 경험에서 형성된 역사인식에서 찾는다. 반면 이승만의 정치행보와 언행에서 드러나는 역사인식은 당대 미국의 강력한 고립주의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 그렇기에 지도자의 역사인식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듣기에 따라서는 오싹한 이야기이다. 역사인식의 형성은 '공간'이자 '타자'인 인문환경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한다. 환경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사람이
기록한 역사에도 반영된다. 그리고 그 역사를 배운 이들은 역사인식을 공유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도 결국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어떤 역사인식을 가지고 어떤 공간에서 어떤 맥락으로 활동했는가는 역사를 이해하는 근간이다. 하지만 교과서의 틀은 언제나 경직성과 완고함을 특징으로 하기에, 그 틀에 '인간'을 오롯이 반영 하기란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이는 꼭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역사를 배우는 이들이 껍질을 깨고 역사적 공간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 역사교육 현장에서 상상력과 여유가 부활하는 일도 꿈만은 아닐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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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 집의 인문학 6강 내 집 한번 지어볼까 : 내 집 짓기의 경험 | 느티나무 | 2011.10.25 | ||||||
8월 30일부터 가을학기 강좌 [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찾아라, 아파트 경쟁상대를! 2011 참여연대 느티나무 아카데미 가을강좌 ‘집의 인문학’은 작년부터 기획되었다고 한다. 의, 식, 주. 입고, 먹고, 거처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들이다. 이 중에서 주, 즉 집은 대한민국에서 ‘자산증식’의 수단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여전하게 강하다. “주거문화, 부동산 문화를 변화시키는 씨앗이 되면 좋겠다”는 느티나무의 바람에 100% 동의하며 집의 인문학 강좌를 소개한다. 6강은 경기도 용인 죽전동에 두 필지를 매입해 직접 집을 지어 살고 있는 박인석 교수(명지대학교 건축대학)가 ‘내 집 짓기’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 설계 5개월, 건축 8개월
직업에 ‘가’자가 붙으면 그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는 것이다. 진지하게 설계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건축가는 1만 건축사 중 약 1~2백명 정도다. # 녹지를 돈 주고 사야하는 단지 공화국 건축가들은 집을 설계할 때 집은 내 존재의 근거라고 생각하며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그건 의미 없는 관념이라고 생각한다. 매일의 삶과 소망들이 내 존재의 근거이고 이를 채워주는 것이 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단독주택이 매일의 삶과 소망을 실현시켜줄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라기보다는 ‘단지 공화국’이다. 단지화 전략인데, 이것은 국가가 마땅히 해야 할 공원, 하천 같은 공공환경에 투자를 안 해도 되게 만들었다. 주변에 공공환경이 얼마나 없으면 청계천을 와서 거닐까? 선진국 도시는 거의 예외없이 걸어서 5분 안에 하천과 공원이 있다. 우리는 녹지에 대한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주말마다 버스타고 청계천도 가고 북한산도 간다. 단지화는 이런 욕구를 시민 각자가 돈을 내서 구입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돈 주고 산 녹지다. 대신 정부는 돈 한 푼 안 쓴다. 아파트이던 단독이던 ‘단지’여야 평판이 좋다. 큰 단지일수록 녹지가 있고 주차장이 있다. 단지는 내 돈 주고 산 사막의 오아시스다. 우리나라의 공공영역은 삭막하기 이를 데 없다. 단지화 전략은 정부입장에서는 영민한 전략이다. 돈 안들이고 주거문제를 해결하고 건축산업까지 부양시켰다. 이와 비슷한 게 사교육이다. 정부는 교육에 투자를 안 한다. 대신 중산층이 지출하는 사교육비가 사교육 산업을 담당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와 경쟁할 주택모델이 나타나야 한다. 이 주택은 공공공간과 맞닿는 건축으로 지어야 한다. 마당있는 집이 소망인 나는 아파트를 살 때도 ‘땅 찾기’를 했다. 아파트에서는 1층이나 최상층이 가능하다. 홍제동에서 마당을 쓸 수 있는 아파트 1층에서 6년을 거주했다. 즐겁게 살았다. 그런데, 누가 침입하면 어떡하느냐며 민원이 들어왔다. 속내는 “왜 마당을 즐기는 행위를 하느냐”였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땅의 조건은 집 가까이에 녹지가 있고 제1종전용주거지역이며 지구단위계획이 있는 곳이다. 단독주택 지을 땅을 찾으러 판교신도시, 죽전지구, 동백지구 등을 돌아다녔다. 살구나무집은 바로 뒤가 녹지이고 제1종전용주거지역이었다. 땅을 살 때 제1종전용주거지역인지 아닌지 유심히 봐야 한다. 구분 표시는 지역마다 다를 수도 있는데 죽전동은 제1종전용주거지역이 R1이었다. R1은 밀도가 낮아 주로 외곽에 배치된다. 이것은 자연과 가까워진다는 뜻이다. 녹지가 가깝고 용적률이 낮아서 땅값도 싸다. R1은 층수도 2층 이하이고 1층에 점포를 놓을 수 없다. 허용용도도 다중주택을 제외한 단독주택이거나 2가구 이하의 다가구주택이다. R1, R2 용도를 살펴봐야 한다.
# 제안과 도전으로 평당 5백에 집을 짓다 단독주택 하면, 집장사가 짓는 집이거나 ○○사장님 댁 집이다. 집짓기의 양극화다. 건축비는 다가구 주택을 지으면 평당 3백만원대이고 ○○사장님 댁 집처럼 작품주택을 만들면 7백만원 대이다. 나는 건축가에게 평당 “470에 맞춰 달라. 최대 5백이다”라고 말했다. 참고로 국토해양부가 고시한 아파트 기본형건축비는 평당 460~480만원이다. 건축가라면 일반시민의 욕구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건축가가 이에 동의했다. 살구나무집은 공사비 조정과정과 건축가의 제안과 도전을 거쳐 최종 시공비가 평당 505만원이 나왔다. 5백만원 선이면 중산층용 단독주택을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재견적을 3번이나 받았다. 조남호 씨는 시공업체에 다가구 건축 시공비인 평당 300~350으로 견적을 내라고 하고 거기에서 필요한 항목만 올렸다. 싼 것도 중요하지만 꼭 필요한 곳은 좋은 자재를 썼다. 건축가에게 맡겼을 때 시공비가 많이 나오는 이유는 다시 하는 게 많아서다. 건축가는 디테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유명한 어느 건축가에게 “얼마에 집을 짓냐?”고 물었더니 “평당 750만원, 싸면 650만원”이라고 했다. 왜 이렇게 비싸냐고 물으니 “박 교수님, 거기서 평생 사실 거 아닙니까? 아파트는 끽해야 10년입니다. 30년 가도 괜찮으려면 비싸질 수밖에 없어요.”라고 하더라. 실용적인 집은, 단열은 기본이고 겨울에 춥지 않고 여름에 덥지 않은 집이다. 그래서 되도록 겹집이어야 하고 창호는 좁은 게 좋다. 막 지었어도 3년 된 듯한, 10년이 지나도 3년 된 듯한 집이어야 한다. 이런 느낌을 주기 위해 살구나무집 외벽은 벽돌로 했고 지붕은 징크로 했다. 외벽에 돌을 붙이는 집도 있는데, 돌은 내장재지 외벽에 쓰일 자재가 아니다. 평지붕은 10년 지나면 문제가 생긴다. 품격있는 집은 솔직한 재료를 쓰는 것이다. 솔직한 재료는 자기 재료를 드러내 싸도 질박한 느낌을 준다. 집의 형태나 담장이 동네 풍경에 보탬이 되도록 담장을 올리되 흙을 두기도 했다.
# 아파트 한 채로 단독주택 지을 수 있어야 아파트의 동선을 도식화하면 나무구조이다. 아파트는 사람이 다니는 루트가 한 가지이다. 공용 공간에서 만날 사람이 한정돼 있다. 아파트 몇 동 몇 호를 찾아가는 길이 정해져있다. 반면, 그물망 구조는 선택경로가 다양하다. 이 골목에서 들어가고 저 골목에서 들어간다. 만날 사람이 열려있다. 그물망이 소속감을 북돋는 구조라면 나무는 소집단을 만드는 구조이다. 그래서 단지성을 해체하는 것이 주거건축의 큰 과제이다. 단독주택에 살면 청소, 택배, 방범, 난방 등이 불편하다고 생각한다. 청소를 불편하다고 생각해야 할까? 아파트에 사니까 시민이 공공서비스 수혜의 일부를 담당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시민의식이 없어지는 게 아닐까싶다. 아파트에 살면서 공용공간은 책임지지 않고 개인공간만 책임지려고 한다. 두 번째 쟁점은 집짓기를 중산층이 감당할 수 있느냐이다. 올해 4월 이정희 의원이 발표한 ‘각 지자체별 종부세 부과 주택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1418만채의 공동주택 및 단독주택 중 1세대 1주택 종부세 과세 대상인 12억원 이상인 주택은 전국에 총 37,461채(전체주택의 0.26%)였다. 살구나무집을 지을 때 10억 정도 들었는데, 그럼 내가 상위 2~3%에 해당하는 사람인가? 그렇지는 않다. 분당 있을 때 살던 47평 아파트가 제일 비쌀 때 11억이었고 쌀 때가 8억5천이었다. 그 아파트의 대지지분은 23평이었고 땅값은 평당 2850이었다. 말도 안 되게 아파트 땅값이 비싼 거다. 아파트 한 채를 단독주택과 바꿀 수 있다면, 중산층이 감당할 수 있다. 그러면 아파트와 바꾼 집이 훨씬 많아 질 수 있다. 땅콩집도 좋은 본보기다. 아직 우리나라는 허용되지 않지만 외국의 타운하우스도 좋은 예다. ▲ 외국의 타운하우스 모습. 사진=http://www.mountaingetawaysinfo.com/the-confusing-parts-of-townhouse-insurance/ 쟁점 세 번째는 설계비와 건축가의 가치이다. 보통 사람들은 설계비를 많이 주는 것을 이해를 못 한다. 건축설계 기준은 공사비의 설계비(7%) 더하기 감리비(1.5%)다. 공사비를 3억~5억이라고 보면 3천~4천만원이다. 설계는 짓고 싶은 집과 예산 사이의 갈등을 조율하는 과정이다. 건축가는 시공현장에서 빛나는 지혜를 발휘한다. 건축가가 시공현장에서 일하는 거 보면, 나는 저렇게 못하겠다 싶더라. 마지막으로 유지관리비이다. 살구나무집(난방면적 70평)과 분당 아파트(전용면적 40평)의 유지관리비(도시가스․전기․ 상하수도 요금, 보안업체 관리비)를 비교했다. 2월에 도시가스 요금이 백만원이 넘어 깜짝 놀랐는데, 베이크 아웃(bake out) 때문이었다. 이후에는 많이 내려갔다. 1년을 비교하면 유지관리비는 살구나무집이 1만원 정도 더 나올 것 같다. 보안업체 관리비까지 포함한 비용이다. 아파트가 바뀌려면 경쟁상대가 있어야 한다. 아파트와 바꿀 수 있는 집, 아파트만큼 경제성이 있는 집이어야 한다. 살구나무집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굉장히 만족하며 산다. Q&A 2. 단독주택지 보존은 불가능한가? 참고 ② 이정희 의원의 ‘각 지자체별 종부세 부과 주택 조사 보고서’ 보러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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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 | "이명박식 '원교근공'은 틀렸다" [9.11강좌 5강] | 느티나무 | 2011.10.20 | ||||||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와 프레시안은 9.11 10년을 맞아 9월 5일부터 매주 월요일 5회에 걸쳐 '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를 주제로 연속 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0월 17일 열린 마지막 강좌에서는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님이'G2 시대의 세계질서와 한반도'라는 제목으로 강연해 주셨습니다. 아래는 프레시안 김봉규 기자가 요약 재구성한 이남주 교수 강연의 주요 내용입니다. ☞강연 상세 안내 보기 ▲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G2 시대를 논하기에 앞서 과거 중국의 위상에서부터 출발해보자. 근대화 이전 시기 세계 차원에서 힘의 분포를 보면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인구의 규모와 경제력이었다. 인구 규모를 보면 중국이 압도적 1위였다. 당시 경제력에 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경제사가들이 합의한 바로는 전 세계 경제의 약 3분의 1의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 원자바오 중국 총리 ⓒAP=연합뉴스 중국이 대외적 팽장을 할 수 없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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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ODA의 길을 묻는다 | 한국ODA의 길을 묻는다 5강 | 느티나무 | 2011.10.19 | ||||||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9월 8일부터 5회에 걸쳐 '한국 ODA의 길을 묻는다' 시민강좌를 진행합니다. 마지막 강연 '여성, 개발현장에서 소외되다' 중 김현정 글로벌발전연구원 평가컨설팅 실장의 강연을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강의 정리는 자원활동가 송유림 님께서 맡아 주셨습니다. 강좌소개 보기> 여성, 개발현장에서 소외되다
빈곤의 여성화
Women In Development 접근 (WID) 쌀을 나눠줄 때도, 밭일하느라 바쁜 여성들을 한데 모아서 주는 것이 오히려 그들의 일상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나눠준 쌀을 남자들이 팔아서 유흥비로 사용하기도 한다. 교육 사업을 할 때도 여자 아이들은 교육을 받아서 쓸 때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학교에 보내야 하냐고 되물었다. 이렇게 개발사업이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수 없는 상황들이 발생하는 것을 교훈삼아 다시 한 번 ‘빈곤의 여성화는 왜 발생할까’ 그 원인에 대해 연구했다. 수입원도 부재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여성의 수입에 대한 컨트롤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회의 불평등이 아니라 권리의 불평등이라는 것이다. 격리, 조혼, 신부지참금, 여성할례 등도 역시 여성이 권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로 보고 여성에게 뭘 준다고 바뀔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생물학적 성별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역할을 규제받게 되는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Gender And Development’적 접근이 이루어졌다.
Gender And Development 접근 (GAD, 젠더와 개발)
WID와 GAD의 차이 여성이 개발현장에서 소외됐다고 하는데 진짜 소외됐나, 소외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하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민해봐야 한다.
이번 강의는 ‘한국ODA의 길을 묻는다’의 마지막 강의로 개발현장에서 소외된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여타의 이슈들과 더불어 이 문제도 사회적 인식과 고정관념, 구조의 문제인지라 쉽사리 해결방안을 강구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되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더불어 수원국 뿐만 아니라 국내의 여성문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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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ODA의 길을 묻는다 | 한국ODA의 길을 묻는다 4강 | 느티나무 | 2011.10.18 | ||||||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9월 8일부터 5회에 걸쳐 '한국 ODA의 길을 묻는다' 시민강좌를 진행합니다. 네번째 강연 '분쟁국 원조와 원조의 군사화, 새로운 갈등' 중 배재현 경제인문사회연구회 평가팀 전문위원과 박정은 참여연대 평화국제팀장의 강연을 강의 순으로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강의 정리는 자원활동가 송유림 님께서 맡아 주셨습니다. 강좌소개 보기> 1부 분쟁 및 취약국의 정의와 취약국지원 방안 강사 : 배재현 경제인문사회연구원 평가팀 전문위원 9.11 테러 이후 취약국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하지만 ODA를 하는 사람들도 취약국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아직까지 국제사회에서 합의된 취약국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아프간에서 취약국가를 담당하는 기구인 INCAF가 취약국 이해에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니 이에 대해 알아보겠다.
분쟁 및 취약국의 정의 취약국을 정확한 명칭은 ‘분쟁 및 취약국가’이다. 이유는 분쟁지역에서 취약국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취약국에 대한 정의는 국가가 시민들의 안보와 복지를 위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 빈곤, 테러, 질병 등이 발생될 것이 예상되는 경우, 국가들간의 상호관계가 어려운 국가라고 한다. 예를 들어 아프가니스탄은 도와주고 싶어도 도울 수 없을 정도로 접근이 어려운 나라이다. 취약국을 선정할 때에는 정치, 정부, 안보 세가지 요인을 고려한다. 국가의 권위. 국민들이 부여하는 국가 정당성. 행정서비스를 제공할 능력과 의지. 외부적 안보 위기. 내부의 쿠데타 등등을 따져본다. 월드뱅크나 다양한 국제 기구가 이를 고려하는데 취약국에 대한 개념에 근거해서 지정한다기보다 정치적 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INCAF와 취약국가원칙 원조를 담당하는 월드뱅크, UNDP같은 선진원조기관등이 있지만 차별화된 지원방식이 있어야 원조효과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INCAF를 만들었다. 이 기관은 공여국과 분쟁국의 파트너쉽을 조정하고 취약국가에 대한 대응을 향상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Whole of Government 시스템에 의해 원조가 어느 한 쪽에 치우치는 것을 방지하고 개발협력을 담당하는 부처, 경제, 국방부 세 부처가 이상적으로 조화되어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곳이 INCAF이다. 주요업무는 주로 연구이지만 이 기구가 생긴 가장 큰 목적은 취약국가원조 원칙 10가지에 의거한 국제대화를 하기 위함이다. 핵심은 복수 이해관계자가 협의하는 구조인데 한국은 참여하지 않고 있다. 한국정부는 국제 사회가 한국과 얘기하길 원하는 만큼, DAC가입 국가답게 함께 참여해서 끊임없이 얘기해야 한다. 한국은 세계흐름과 원칙이 어떤 건지 알아야 취약국가를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취약국인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은 911 테러 이 후 많은 원조를 받고 있고 한국도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 하지만 ODA는 단순히 도와주는 게 아니라 정치적 개입을 수반하기 때문에 신중히 고려해야만 한다. 취약국가에 원조를 실시함에 있어서 파트너 국가에 해를 입히지 않고 원조효과성을 높일 수 있게 해야 한다. 아프간 원조를 할 때 미국이 본 프로세스를 만들었는데 탈레반을 배제했다. 이렇게 되니 정당성과 안보에 문제가 생겼다. 또한 원조 사업은 NGO가 주로 진행한다. 따라서 아프간 주민은 정부보다 NGO를 더 신뢰하게 된다. 그러나 NGO를 통한 원조규모는 기대치만 높여놓고 실제는 턱없이 부족하다. 대부분 수원국 정부는 중앙집권적이고 국제 사회에 의존하다보니 주민 기반이 취약하다. 따라서 수원국 정부가 주인의식을 갖고 합법성을 가질 수 있게 정부 거버넌스를 향상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한국은 INCAF나 국제 사회 취약국 지원 원칙을 바탕으로 ODA전략을 수립하고 지원해야 한다. 공식적으로 취약국으로 명명하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무례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지양해야 한다. 또한 INCAF국제대화에 일원으로 참여하고 선진원조기관과 소통해야 할 것이다.
2부 분쟁국 원조와 원조의 군사화 강사 : 박정은 참여연대 평화국제팀장 분쟁국가에 원조를 할 때는 ‘왜’ 하느냐에 대한 물음을 재고해봐야 한다. 원조에는 ODA를 통해서 나가는 원조가 많지만 군을 통해 나가는 원조가 더 많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ODA가 매우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왜 이들의 삶이 파괴됐을까. 왜 원조를 해야될까” 라는 얘기는 지금껏 하지 않은 것 같다. 또한 한국이 어떻게 기여할 것이냐에 대한 원칙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 국격제고는 결과이지 ODA원칙이 될 수 없다. 국제관계와 강대국의 이해관계를 벗어난 취약국가는 거의 없다. 대표적인 분쟁국인 아프간, 이라크도 국제정치와 매우 큰 연관이 있기 때문에 그 문제를 벗어나서 원조만을 논하는 것은 공허한 일이다.
분쟁국가 아프간, 이라크 이라크와 아프간을 빼놓고 분쟁국을 이야기할 수 없다. 정치분야, 안전분야가 가장 취약한 나라이다. 군사적 행동을 하고 있는 많은 나라들이 재건에도 나서고 있지만 전쟁비용에 비해 훨씬 부족하다. 전쟁비용은 원조비용보다 언제나 많다. 한 쪽에서는 언제나 파괴하고 있는데 한 쪽에서는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아프간에 파견된 미군은 10만명을 육박하는데 이 말은 아프간의 분쟁이 더 심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군사적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원조의 효과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분쟁부터 평화롭게 해결되어야 한다.
한국의 이라크, 아프간 지원 한국이 분쟁국에 지원하는 원조의 상당부분이 재건지원이 아닌 파병부대 주둔비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프간, 이라크에 대한 지원은 안보문제로 우선 접근하고, 한미동맹 차원에서 군대파병 방식을 주로 취한다. 그러다보니 평화재건 활동이라는 주된 활동내역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고 비공개되기 일쑤이다. 전쟁 직후에 무상원조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이 원조도 군대파병 비용에는 훨씬 못미친다.
원조의 군사화, 이라크 한국 정부는 이라크 재건지원을 위해 파병을 한다고 주장해왔는데, 일례로 이라크 재건지원예산은 자이툰 파병예산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재건지원예산의 반도 치안유지비용이었다. 한국군은 전쟁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쿠르드 지역에 주둔하면서 쿠르드 정보국을 지원하고 쿠르드 민병대 훈련을 지원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정치적으로 굉장히 민감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일이었다. 이게 이라크의 평화재건을 위한 지원일까.
ODA와 아프간 지방재건팀(PRT) 미국의 점령정책의 일환으로 고안된 지역재검팀(PRT)은 대부분 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반군퇴치부터 인도적 지원 활동까지 한다. PRT는 국제안전군(ISAF)의 지휘를 받고 있다. 2003년부터 소수인원만 PRT로 파견한 정부는 지난해 본격적으로 460여명의 PRT를 아프간에 파견했다. 이 중 군 병력이 321명이다. 한국 정부는 아프간 PRT 파견을 아프간의 인도적 재건 사업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PRT는 원조로 책정된 ODA예산을 쓰고 있다. 지난해만 하더라도 ODA 예산의 80% 이상이 군부대 건설에 쓰였다. 하지만 치안이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 바깥활동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 애초 계획했던 재건사업들도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고 있다.
재건활동 실패! 왜? 왜 실패할 수밖에 없을까? 원조를 하는 주체가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고비용 저효율일 수밖에 없다. 또한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단기적인 프로젝트 중심으로 재건 활동을 진행할 수 밖에 없고 지역개발보다는 군사적 목적에 따라 가시적 사업에 치중하고 있다. 또한 원조가 나라별 PRT예산과 규모가 다 다르게 책정되고 현지정책, 현지인과는 무관하게 진행되고 전략적 가치에 따라서만 진행된다. 큰 규모의 원조자금에 대한 사전 조율과 평가가 없는 것도 문제이다. 게다가 PRT는 군에 의한 원조활동이기 때문에 다른 국제구호단체의 활동을 위축시키고 있다. 이 같은 개입은 오히려 부정적인 효과를 낳고 있다. 안보문제에 집중하느라 장기적 통합 구축은 무시하고 정부는 부패해서 국가를 재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우리가 숫자에 무감각해지고 있지만 하루에 죽어가는 사람들의 숫자를 보면 분쟁국은 도저히 정상적인 사회라고 볼 수가 없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다고 얘기하기 전에 왜 밑이 빠졌나를 생각해보자. 혹시 우리가 독을 깨고 있는 건 아닐까. 한국이 군사력으로 원조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번 강연은 ‘원조의 군사화’라는, ODA의 여러 섹터 중에서도 다소 생소한 주제를 다루었다. 군사적 개입과 원조는 별개의 영역이라고 여겼었는데 자금의 통로, 이루어지는 방식, 절차와 평가 등 많은 부분에서 문제점들을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한 전쟁과 재건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은 일이 취약국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상기했고 이에 앞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었다. 국제 사회가 이를 방지하기 위해 INCAF라는 기구를 만들어 소통하려는 모습은 고무적이다. 세심한 연구와 합당한 ODA를 통해 취약국의 분쟁 상황이 개선되었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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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 집의 인문학 5강 어떤 주택정책이어야 하는가 | 느티나무 | 2011.10.18 | ||||||
8월 30일부터 가을학기 강좌 [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헌법이 담은 토지공개념을 정책으로 실현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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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 | "9.11의 시대, 월스트리트에서 종언을 고했다" [9.11강좌 4강] | 느티나무 | 2011.10.13 | ||||||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와 프레시안은 9.11 10년을 맞아 9월 5일부터 매주 월요일 5회에 걸쳐 '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를 주제로 연속 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0월 10일 열린 네 번째 강좌에서는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님이 '사라져 가는 아메리칸 드림과 새로운 체제로의 이행의 시각'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해 주셨습니다. 아래는 프레시안 곽재훈 기자가 정리한 안 교수님의 4강 강의소개 기사입니다. ☞강연 상세 안내 보기 오는 17일 열리는 마지막 강좌는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님의 강의로 'G2 시대의 세계질서와 한반도'라는 주제로 테러와의 전쟁이 거시적 국제정세에 미친 영향 등을 조망해 봅니다.
"9.11 테러, 미국이라는 비행기를 떨어트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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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 집의 인문학 4강 집 살live 것인가, 살buy 것인가 | 느티나무 | 2011.10.10 | ||||||
8월 30일부터 가을학기 강좌 [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부동산 시장에 민주주의 통제는 가능한가 2011 참여연대 느티나무 아카데미 가을강좌 ‘집의 인문학’은 작년부터 기획되었다고 한다. 의, 식, 주. 입고, 먹고, 거처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들이다. 이 중에서 주, 즉 집은 대한민국에서 ‘자산증식’의 수단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여전하게 강하다. “주거문화, 부동산 문화를 변화시키는 씨앗이 되면 좋겠다”는 느티나무의 바람에 100% 동의하며 집의 인문학 강좌를 소개한다. 4강은 MBC 김재형 피디가 강의했다. 김재영 피디는 PD수첩에서 부동산 문제를 심도 있게 다뤘으며 책『하우스 푸어』의 저자이다. # ‘하우스 푸어’를 왜 썼나
▲책 ‘하우스 푸어’ 『하우스 푸어』는 2006년 판교 취재과정에서 생긴 ‘우리는 올바른 (부동산) 정보를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됐다. 부동산 유통정보의 실체를 알리고 싶었다. 취재당시 판교는 비닐하우스가 있는 그냥 땅이었다. 집을 사야하는 입장에서 정보를 유심히 지켜봤다. 2008년 미국은 하우스 푸어(House Poor)가 유행이었다. 하우스 푸어는 집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다. 또한 전 세계가 정점을 찍은 집값이 떨어지는 추세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강남 재건축을 상징하는 말로 ‘은마가 금마가 된다’는 게 유행이었다. 이런 유의 담론이 지속되고 있었다. “아파트는 계속 황금알을 낳는 거윈가?”라는 시각으로 강남 재건축 시장을 바라보게 됐다. DJ정부는 재건축 규제를 모두 풀었다. 이 재건축을 시작으로 PD수첩 프로그램을 제작해 2009년부터 다섯 번에 걸쳐 방송했다. 강남 재건축의 상징인 은마아파트, 도곡동 K아파트, 가락 시영아파트를 다뤘다. 도곡동 K아파트는 인터넷에 (아파트 때문에) 집주인이 자살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가락 시영아파트는 6천 세대가 넘는 아파트로 가장 큰 재건축 단지였다. 그렇지만 당시 실제 사는 세대는 1천 세대정도였다. 현장을 갔더니 현실은 달랐다. 2009년, 우리나라도 하우스 푸어가 시작되고 있었다. K아파트는 실제 자살한 사람이 있었고, 2백세대 중 70세대가 하우스 푸어였다. 가락 시영아파트에는 재건축에 필요한 분담금을 내도 깡통이고, 분담금을 안 내려고 아파트를 팔아도 깡통인 하우스 푸어들이 있었다. 도곡동과 가락동을 보고 얼마나 많은 하우스 푸어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 욕망의 땅, 강남의 재건축(2009년 10월27일 방송) 2000년부터 입법․사법․행정부 1급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신고가 시작됐다. 이들 3천5백명 중 340명 정도가 재건축 아파트를 소유했다. 사법부가 제일 많았고 행정부, 입법부 순이었다. 1급 고위 공직자들은 고급정보를 접하는 파워엘리트들이다. 2006년 이후 재산신고자 중 재건축 아파트를 산 사람이 없었다. 2006년 말은 단군 이래 가장 높게 아파트 가격이 올랐던 시기다. 그런데도 방송과 신문은 재건축을 사두면 값이 오른다며 중산층을 유혹했다.
▲ 2009년 10월 27일 방송된 ‘욕망의 땅, 강남의 재건축’, PD수첩 캡처 DJ가 규제를 풀자 파워엘리트들이 재건축 아파트를 많이 샀다. 은마아파트 442세대 등기부 등본을 다 떼어 분석을 했다. 집 주인이 실제 사는 곳은 많아도 40%였다. 60%는 다 전세를 줬다. 2001년 이후에 집을 산 사람은 평균 빚이 3억이었다. 가락 시영아파트에 사는 상당수는 하우스 푸어였다. 하우스 푸어끼리 싸우고 있었다. 시영아파트로 취재 가기 전날 고등법원에서 재건축 무효판결이 났다. 재건축을 추진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낫을 들고 상대방 플랭카드를 찢고 그랬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사람들이 더 흥분하더라. (청중 웃음) 2006년 말에 17평짜리 아파트를 8~9억에 샀는데 분담금을 더 내라고 했으니….
# 재건축 덧에 걸린 사람들(2009년 11월 17일 방송) 한국사람은 ‘기회비용’이란 개념이 없다. 10억을 은행에 연리 5%에 1년을 넣어두면 5천만원이 생긴다. 10억짜리 아파트에 사는 것은 그냥 월세 5천을 내고 사는 것이다. 2006년 말에서 2007년까지는 (아파트에서) 기회비용 이상을 뽑았다. 그렇지만 그 이후 아파트 값이 빠졌다.
▲ 2009년 11월17일 방송된 ‘재건축 덧에 걸린 사람들’, PD수첩 캡처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은 재건축 분양시장인데, 신도시 분양과 도심 분양이 있다. 2009년 말에서 2010년의 분양시장은 굉장히 재미있는 시장이었다. 보통 아파트는 분양 후 3년 뒤에 입주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2006년 말에서 2007년은 단군 이래 최고로 아파트 값이 올랐던 해이다. 분양가도 폭등했던 시기다. 분양받고 3년 뒤인 2009년은 이미 집값이 떨어지고 있었다. “여의도와 목동의 프리미엄을 다 가져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달았던 B아파트의 분양가는 평당 2천4백이었다. 2009년 말 할인분양을 했는데, 11억 하던 50평대가 9억5천이었다. 재건축은 투기성이 짙다. 분양받은 사람 대부분이 하우스 푸어였다. 광교의 33평 아파트 프리미엄이 5천이었다. 이 아파트를 4억5천에 사는데 3억을 대출받았다고 치자. 3년에 연 6% 이자면 5천4백만원이 이자다. 프리미엄은 기회비용이라고 볼 수 없다. 2009년에 제보가 엄청 많이 들어왔다. 버블 세븐 지역인 용인, 인천자유지역, 판교, 김포, 일산, 서울의 시내를 다녀봤다.
# 2010 부동산, 아파트의 그늘(2010년 1월 12일 방송) 판교 아파트 1천 세대 등기부 등본을 조사했다. 1천 세대의 평균 빚이 3억이었다. 많은 중산층이 빚에 허덕인다는 것이다. 지금은 수익이라도 아파트 가격이 떨어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일산의 한 아파트 역시 위험했다. 김광수경제연구소 선대인 부소장이랑 함께 작업을 해봤는데, 약 1백만 가구를 하우스 푸어로 보더라. 소득대비 집값 비율(PIR, Price to Income Ratio)이 너무 높은 것이다.
▲ 2010년 1월 12일 방송된 ‘2010 부동산, 아파트의 그늘’, PD수첩 캡처 ‘모델하우스’ 얘기를 해야겠다. 아파트를 사면 부자가 된다는 맹신이 왜 생겼을까? 우리는 불안과 희망을 심어주는 사회다. 아파트를 지금 사지 않으면 뒤쳐진다는 불안이 있고, 또 한편에서는 지금 아파트를 사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그런데, 모델하우스를 가면 아파트가 으리으리하다. 조명발, 고급가구에 호수가 꼭 있는 조감도까지. 신도시는 중감도가 중요한데 호수 조망이 꼭 있더라. (청중 웃음) 사람들이 모델하우스를 돌아보며 “내 집이 되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돈이 모자란다. 모델하우스를 나서면 은행이 대기해 있다. ‘내 집 마련의 꿈’을 극대화 시킨 것이 바로 모델하우스다. 모델하우스도 분양가에 다 포함된 거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위해 거액을 들여야 할까? 주택 자가비율이 높다고 선진국이 되는 게 아닌데, 사회가 부추긴다. 부동산 가격이 폭락해도 건설사는 손해 보지 않는다. 언론사의 많은 주요 보직 간부가 아파트에 산다. 가격이 폭락한다는 얘기를 하는 게 쉽지 않다. 많은 신문사 광고가 부동산이다. 구조적으로 언론이 부동산을 제대로 보도할 수 없다. 내 집 마련의 꿈은 신화다.
# 인천은 세일 중(2010년 2월 9일 방송) 신도시를 다녀보니 문제가 많았다. 하우스 푸어가 많았다. 다녀보니, 눈에 띄는 지역이 있더라. 우리나라가 얼마나 거대한 사기집단인지는 송도 국제도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분양당시 대학교가 들어오고, 초고층 건물이 들어서고…
▲ 2010년 2월9일 방송된 ‘인천은 세일 중’, PD수첩 캡처 인천자유구역은 국가가 땅만 댔다. SPC(Special Purpose Company)라는 특수목적법인이 있다. 연세대SPC가 아파트를 분양해서 나온 이익의 일부를 연세대에 줘서 건물을 짓는 것이다. 아파트를 판 돈으로 학교 짓고, 공원 만들고…. 그래서 아파트 분양이 안 되면 짓지 못한다. 대표적인 예가 인천자유구역 청라지구다. 청라지구는 토지공사가 사기분양을 한 거다. 분양 당시 장담했던 개발계획이 무산, 연기되면서 1천4백만원 했던 분양가가 1천 이하로까지 떨어졌다. 지하철이 들어온다고 했지만, 없다. 그래서 인천의 구도심 인프라를 신도심으로 이전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천대가 있던 제물포는 슬럼화 됐다.
# 자본주의 욕망만 작동한 시장 앞으로 어떻게 될까? 아파트 가격, 시장이 어떻게 변할까? 변화의 조짐은 있다. 현재 PIR이 너무 높다. 저소득 대 고소득, 20대 대 40대 등 세대간 소득격차도 너무 크다. 여론시장도 변하고 있다. 아파트 가격에 현혹되지 않는다. 살(buy) 것이냐? 살(live) 것이냐의 정치적 상황도 바뀌고 있다. 2008년 총선은 뉴타운 놀이였다. 서울 48석 중 40석을 한나라당이 가져갔는데, 절반 이상이 뉴타운 바람이었다. 왕십리 뉴타운 쪽에서 자살 직전까지 갔다는 제보를 많이 받았다. 세입자가 아니라, 15평 정도의 지분을 가진 집 주인들이 뉴타운을 막아 달라고 제보했다. 당장 집은 부순다는데 돈이 없어 갈 곳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빚을 져야 그나마 이사가 가능했고 그것도 의정부까지 나가는 상황이었다. 지분 확보를 위해서는 돈을 더 내야한다는 불안감, 이사를 위해 져야 하는 빚, 들어올 때 다시 1~2억을 빚져야 했다. 다음 국회의원을 뽑을 때, 이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뉴타운 정책 결과를 보면, 변화가 도래할 시기가 오지 않을까 싶다. 지난 분당 재보선에서 민주당 손학규 후보가 당선됐다. 그때, 분당 리모델링론으로 이겼다는 분석이 있었는데 올바른 분석이 아니다. 민주당은 전셋값 안정을 바라는 많은 젊은층, 집을 가졌어도 빚이 많아 허덕이는 하우스 푸어들을 대변해야 했다. 분당 리모델링론은 한나라당이 만들어 놓은 뉴타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다.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은 자본주의 욕망만 작동했지, 민주주의는 작동하지 않았다. 인천 청라지구, 서울의 뉴타운, 재건축 등은 민주적 통제가 작동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대법원이 부동산 판결에서 사업이 진행되는 쪽의 손을 들어줬다. 그런데 최근에는 민주적 통제가 없는 곳은 제재를 가하기도 한다. 지금 부동산 시장이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본다. 그 과정에 우여곡절이 있을 것이다. 주거시장 변화를 위해서는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
참고 ① 기회비용(機會費用) : 하나의 재화를 선택했을 때, 그로 인해 포기한 다른 재화의 가치를 말한다. 즉 포기된 재화의 대체(代替) 기회 평가량을 의미한다. 어떤 생산물의 비용을, 그 생산으로 단념한 다른 생산기회의 희생으로 보는 개념이다(위키백과). 예를 들어 내가 100만원을 가지고 있다고 치자. 국채를 매입하면 10만원의 연이자를 얻고, 친구를 빌려주면 11만원의 연이자를 얻고, 정기예금을 하게 되면 12만원의 연이자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이다. 이 때 정기예금을 하기로 결정했다면 기회비용은 11만원이 되는 것이다. 기회비용을 계산할 때는 포기한 것의 가치 중 가장 높은 것 하나만을 인정한다(다음 지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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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ODA의 길을 묻는다 | 한국 ODA의 길을 묻는다 2강 | 느티나무 | 2011.10.5 | ||||||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9월 8일부터 5회에 걸쳐 '한국 ODA의 길을 묻는다' 시민강좌를 진행합니다. 두번째 시간으로 '개발원조가 부른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의 역설' 이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의 강연을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강의 정리는 자원활동가 송유림 님께서 맡아 주셨습니다. 강좌소개 보기> 개발원조가 부른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의 역설 강사: 이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기후변화는 ODA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슈이다. 때문에 최근 환경문제는 ODA보다 더 비중있게 다뤄지고 있지만 두 분야를 아우르는 전문가가 부족한 현실이다. ‘한국 ODA의 길을 묻다’ 두번째 시간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의 이진우 상임연구원과 함께 ‘개발원조가 부른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의 역설’이라는 주제로 ODA와 환경문제의 상관관계에 대해 알아보았다.
다섯 가지 기후변화의 특성을 살펴보다 기후변화는 시차를 두고 발생하는 문제이다. 지금 온실가스를 배출해도 20~30년 후에나 피해가 나타나기 때문에 당장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어렵다. 때문에 빈곤타파만을 추구하는 개발협력현장에서도 에너지 사용량, 온실가스배출량 등등에 대해 철저하지 못하다. 기후변화의 특성을 다섯가지로 나눠서 볼 수 있다.
1. 복합성: 기후변화는 경제성장을 위한 자원의 감소, 음식문제, 환경문제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다. 이렇게 지구의 위기는 복합적이기 때문에 단편적으로 접근하면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다. 기후변화를 단순하게 환경문제로만 접근하는 것은 쟁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2. 확장성: 환경파괴는 생태계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토지 및 산림을 과도하게 개발하면 자원이 줄어들고 이에 따라 석유의 고갈과 같은 자원 위기에 봉착한다. 이는 물가인상으로 이어져 장기 스태그플레이션을 불러와 경제 상황을 악화시킨다. 이 같은 에너지문제는 사회 혹은 국가 간 양극화 현상을 초래할 수 있다.
3. 단계성: 기후변화는 단계적으로 일어난다. 때문에 어느 단계에 얼마만큼 지원할 것인가를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면 미봉책으로 접근할 수 밖에 없다.
4. 가속성: 지난 140년간의 기온변화를 살펴보면, 1700년대 산업혁명 이 후 꾸준히 변화가 일어났고 최근에 더욱 급격히 변하고 있다. 환경문제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5. 국제 사회의 인식: WEF(World Economic Forum)는 2007년 기후변화를 가장 중요한 이슈로 선정했다. 단순히 환경론자들의 문제제기를 넘어서 정치인, 기업인들까지도 금세기 최대 이슈로 기후변화를 뽑았다는 것은 그 복합적인 파괴력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상기후가 일상기후가 되다. 현재 지구의 평균 기온은 산업화 이전에 비해 0.8도 정도 올라가 이상기후가 일상기후가 되어버렸다. 이로 인해 질병의 확산, 수자원 문제, 농업생산량의 감소 등의 문제가 생겨나고 있으며 빈번한 홍수, 폭염, 사막화, 해안지역 침식 등도 발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후변화로 인해 이주를 하게 되는 환경난민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법적으로 이들을 보호할만한 장치가 마련되지 않아 사회문제로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취약성은 제3세계에서 더 두드러지기 때문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해야 한다.
지금의 양상대로라면 식량난이 찾아와 2080년까지 기아인구가 60%이상 증가하고 아프리카 경작면적의 3분의1이 축소될 것이며 10억명의 인구가 물부족, 폭풍, 산불 등등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UN은 새천년개발목표를 만들었다. 이 8가지 목표는 모두 기후변화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통념적인 개념으로 보더라도 기후변화는 모든 면에서 영향을 주고 받는다.
기후변화는 인간답게 살기 위한 기본권이다. 기후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 선진국과 저개발국 그리고 부유층과 저소득층간의 차이가 크다. 때문에 기후변화에 대한 책임을 차별화할 필요가 있다. 에너지를 사용하는 건 기본권이나 다름없다. 라오스에 있는 아이들이 저녁에 책을 못본다고 하여 소형 태양광발전소를 지원했는데 결국 아동들의 학습권이 보장됐다. 효율적인 에너지ODA를 통해 인간의 소중한 권리가 실현된 셈이다.
또한 기후변화는 세대 간 불평등 문제도 낳는다. 현 기성세대는 에너지의 풍요를 누리고 그 책임은 다음 세대가 지게 될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핵 발전이다. 핵 폐기장 유지를 위해 엄청난 유지비를 들이고 있지만 이는 불평등을 야기하는 핵심기제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가뭄 때문에 국제분쟁이 생긴 예도 있다. 수단의 북쪽에 있던 아랍계 민족이 가뭄으로 힘들어지자 농경생활을 하며 석유를 채취할 수 있는 남쪽으로 이주하며 아프리카계 민족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인종과 종교문제까지 결부되면서 인종 말살분쟁으로 번졌다. 에너지를 공동체적으로 사용하는 노하우를 쌓아야 한다. 당장은 불편하고 어렵겠지만 해야만 한다.
에너지 불평등과 기후부정의(불의)를 확산하다 나사에서 밤에 찍은 사진을 보면 북미와 유럽, 동북아시아가 전기를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불타는 숲이 있는 곳을 찍은 사진을 보면 제3세계가 많다. 지구의 두 얼굴이다. 주요국 1인당 에너지 배출량을 보면 호주가 제일 많은데 호주인 한 명이 쓰는 에너지는 챠드에서 600명이 쓰는 에너지와 같다. 태국 짜오프라야강에 도시에서 쓸 물을 공급하기 위해 다섯 개의 다목적댐이 지어져서 해안가 지역에 강물이 공급되지 않고 오히려 바닷물이 해안가쪽으로 범람하여 인근어업 주민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에너지 불평등 문제로 인해 지역 주민들은 생업과 터전을 위협받는다. ODA가 동반하는 환경문제는 쉽게 줄여지지 않는다. 사회구조가 고착화 돼 있고 인류의 개발에는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 이렇게 진행이면 제3세계의 에너지사용량도 늘어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빈곤퇴치를 위해서 저개발국을 현대화하는 것이 과연 옳은 방향인지생각해보게 된다. 저개발국에 도시의 모양새를 갖추기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능사인지 의문점을 가지게 된다.
ODA사업의 실패 사례로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까리안 댐을 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세가지 부정적인 영향이 있다. 우선 수몰지역이 넓기 때문에 생태계가 아예 바뀌어버리는 것. 썩은 물 때문에 생겨난 모기에 의한 질병 확산, 유량부족으로 인한 토양염류 현상 등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지역주민들의 강제퇴거문제가 가장 심각했다. 이 같은 일이 일어나는 원인은 ODA사업 수행시 환경영향평가를 제대로 진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OECD DAC가이드라인을 보면 전략환경평가를 하고 국가전략을 세움에 있어서 환경전략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를 논의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환경에 대한 고질적인 무관심이 원인이다. 우물을 하나 지어도 지속가능하게 관리, 유지할 수 있는 기술전수나 교육을 진행하지 않으면 나중에 문제가 된다. 경제성장 지상주의적 개발방식을 답습하는 것이 모두 환경, 기후부정의 문제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정의를 위해 행동해라 기후정의는 윤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현지인에게 단순히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서 필요한 것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주민과 상의해야 하고 모든 영향이 공평하게 돌아가게끔 해야 한다.
요즘 국제개발협력의 화두는 개발효과성이다. 이는 원조를 넘어서 개발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중요한 영역인 무역, 정책, 농업, 노동과 이주, 인구와 여성, 환경 등 다양한 정책들간의 일관성과 연계성을 중요하게 고려한 접근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크로스커팅이슈들이 ODA를 통해 실행되는 과정과 결과를 종합적으로 논하는 지표인 셈인데 이를 기준으로 21세기 지구에 닥친 가장 큰 위기인 환경문제를 평가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아직은 부족하지만 풀잎 하나, 꼬마 아이 하나도 세심하게 배려하는 정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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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ODA의 길을 묻는다 | 한국ODA의 길을 묻는다 1강 | 느티나무 | 2011.9.30 | ||||||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9월 8일부터 5회에 걸쳐 '한국 ODA의 길을 묻는다' 시민강좌를 진행합니다. 첫번째 강연 '국제사회가 말하는 ODA의 허와 실' 중 양영미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위원장과 이태주 ODA 위치 대표의 강연을 강의 순으로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강의 정리는 자원활동가 송유림 님께서 맡아 주셨습니다. 강좌소개 보기> 1부 국제개발협력논의의 국제적 흐름을 논하다 강사 : 양영미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위원장 ODA라는 것이 우리나라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2005년 즈음이고 세계개발원조총회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이다. 올 11월
부산에서 제4차 세계개발원조총회(The 4th High Level Forum on Aid Effectiveness, 이하
HLF-4)를 개최한다. 이 공식행사를 하기 일주일 전쯤 병행회의로 시민사회 회의(이하 NGO 회의)가 열린다. 이처럼
국제회의에서는 시민사회의 의견을 듣는 관례가 있다. 이번 부산HLF-4에도 NGO 회의가 바로 앞서 열린다. 이 회의의 참여를 준비하는 단위로 국제개발시민사회포럼(Korea Civil Society Forum on International Development Cooperation, KoFID)가 2009년부터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 KoFID는 한국ODA 및 개발정책을 모니터링하며 제언하는 국내 시민사회단체와 개발NGO들의 네트워크이다.
한국, 유일한 원조 성공사례 ?
원조피로 Vs 원조효과성 원조효과성 논의는 주로 “공여국의 자세”로 불린다. ODA에서 ‘원조효과성’이란 단어가 나오기 전에 ‘원조 피로’라는 단어가 먼저 있었다. 아프리카에 20년 동안 원조를 줬는데 이들 나라가 발전이 없었다 하여 공여국들이 지치기 시작한 것을 원조 피로라 칭한다. 1973년, 공여국들은 오일쇼크탓에 지원할 돈이 없자 이들은 빈곤국에 도와줘도 나아지지가 않는다고 핑계를 대며 원조를 줄여갔다. 이후 UN, OECD가 만들어졌을 때 국제사회는 책무성을 논하며 좀 더 효과적으로 원조를 해보자는 취지로 ‘원조 효과성’을 논하게 됐다. 그 맥락으로 2000년, UN은 세계의 빈곤을 없애고 살기 좋은 지구를 만들어보겠다고 선언하고 그 목표를 8개로 정했다.(Millennium Development Goals, 새천년개발목표 ) MDG 8번은 앞에 있는 것들을 하기 위해 GNI 0.7%씩 재원을 마련하자는 파트너쉽이다. 2002년 몬트레이에서 재원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처음 열렸고 2003년, 로마에서 HLF-1이 열렸다. 이어 2005년에는 파리선언, 2008년에는 아크라 행동 의제가 발표됐고 2011년 부산에서 4차로 열리게 된다. 환경, 인권과 개발의 만남 개발을 하다 보면 물리적 환경파괴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경파괴까지 일어난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국제사회는 개발과 사회환경 보존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1992년 리우에서 환경을 생각하는 지속가능한 개발에 관한
회의가 열렸고 요하네스버그에서도 회의가 있었다. 이들 회의에서 공여국들은 ODA를 할 때 환경문제 이외에도 사회환경문제를 통틀어
전반적인 환경파괴의 현황에 대해 논했다. 내년에 다시 기후변화에 대한 문제를 점검하는 회의가 있을 예정이다.
인권이라는 것은 포괄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설명하기 쉽지 않다. 개발과 관련된 것은 사회권이고 이 권리는 대체로 노동권,
건강권 등 집단권에 속한다. 예를 들면, 거주권은 사람이 사는 전체적인 환경에 대한 것으로 ‘웰빙’에 대한 조건을 이야기 한다.
해비타트나 사랑의 집짓기와 같은 거주환경 개선에 대한 개발협력이 폭넓게 인권과 만나는 것 ‘지속가능’이라는 단어가 나오기까지 몇 십 년이 걸렸는데 어느 새 ‘지속가능한 성장’이라고 이야기한다. 성장, 발전… 과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좋은가? 느린 것은 못난 건가? G-20에서 논의됐던 ‘성장’이라는 의제가 HLF-4에서 다시 재현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있다. 2부 한국 ODA의 현 수준 진단과 평가 강사 : 이태주 ODA 위치 대표 한국의 ODA는 도대체 어떤 수준인가. ODA라는 용어가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는 모습은 한 때 NGO열풍이 분 것과 비슷해
보인다. 상식적으로 출발하도록 하자. TV를 틀면 공익광고가 많다. 정부가 우리의 ODA를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얘기하는 레퍼토리는 똑같다. 우리는 50년 전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지만 효율적인 정부, 유능한 관료 그리고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선진국이 되었다고 사방에 선포하는 것. 정말 그렇게 세계에 자랑할 만큼 한국의 ODA는 진정성과 효과가
있는가?
한국ODA의 근본문제 ”DONOR CENTRISM” 공여국 중심주의는 매우 위험하다. 실제 현장에 가보면 뼈저리게 느낀다. 우리나라는 우리 입장에서 줄 뿐 받는 사람이 뭐가 필요한지 대화하지 않는다. 친해져야 하고 신뢰관계가 중요한데 그런 최소한의 접근을 아직도 못하고 있다. 모든 정책과 의사결정방식이 공여국중심이다. 얼마 전에 한국의 국제개발선진화계획이 만들어 졌다. 계획을 보니 실제로는 한국화 계획이었다. 한국형으로 포장되어 있고 한국형컨텐츠를 파는데 주목한다. 개발사업이 컨텐츠사업으로 변하는 상황이 상당히 걱정된다. 현지수준에 맞고 그들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그 사회가 지속적으로 나아질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을 어떻게 끼워 넣을까를 고민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면,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직업훈련센터는 전쟁 중에 만들어진 사업으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엄청나게 많은 돈을
들여 센터가 만들어 졌고 1년에 120명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훈련시킨다. 하지만 매 달 훈련을 중단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전쟁 중이니 1년 넘게 직업훈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직업훈련사업은 한국이 여러 나라에서 하고 있는
사업이지만 정작 현지인에게 효과가 별로 없다. 마사이 마을에 한국수자원공사가 워터 탱크를 만들어 준 사업도 있다. 그러나 이 탱크에 물이 채워진 적은 아직까지 없다. 한국에서 원조 사업을 한다고 마시이족들이 부지와 노동을 제공했는데 주민들에게 돌아간 혜택은 없으니 이들이 한국원조를 반길 리가 없다. .
한국원조엔 오너쉽(Ownership)이 없다 다자기구들은 수원국의 오너쉽을 존중하지 않고 지나치게 정책에 간섭해서 실패했던 원조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실패를 줄이기 위해 지켜야 할 핵심 원칙들을 뽑고자 했던 것이 파리선언이다. 그 중 제일 중요한 원칙은 오너쉽이다. 원조는 받는 사람들에게 결정권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도 이런 원칙들이 지켜지지 않는다. 12월말 HLF-4때 파리선언에 대한 한국 평가서가 공개될 것이다. 일본은 지금껏 경제관계만 고려해서 원조를 했기 때문에 원조한 것보다 훨씬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었는데 한국이 그 전철을 밟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한국원조엔 개발사업을 하는데 필요한 기본이 없다 개발사업에서는 지원 전략과 계획이 중요한데 한국은 20년 넘게 마스터플랜이 전혀 없다. 작년부터 국별 지원 전략을 만들고 있지만 국내의 지역연구자가 거의 없기 때문에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 또한 방법론적인 고민없이 개발사업을 시행하는 경우가 많다. 현지에서는 식수가 부족한데 우리는 우리가 잘하는 IT사업을 지원한다. 또한 한국은 사업선정시 단기간에 가시적 효과를 거두는 사업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한국 개발NGO들도 반성해야 한다. 개발NGO들의 개발사업을 평가해 보면 정부사업보다 훨씬 더 문제가 많은 경우가 있다. 고위관료들만 살찌우고 영향력 없는 사업을 지속하면 안된다.
선의는 선행을 낳지 않는다 OECD
DAC에서도 파트너쉽을 강조하고 있다. 개발도상국의 오너쉽을 강조하고 공동의 개발목표와 전략, 책임, 역할 분담원칙과 협력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참여적인 발전 즉, 주민이 주인이 되고 주민이 주도하는 개발이 필요하다. 농촌마을의 평범한
일꾼들이 세계 석학들보다 그 지역에 대해 훨씬 많은 정보와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두어야 한다. 국제 사회에서 ODA담론을 다룰 때 우선적으로 다뤄야 하는 개념은 ‘사람들의 자립’ 이다. 재원마련을 위해 민간기업들의 참여를 이야기 하지만 사전에 원조에 대한 규범을 공유해야 한다. 사전준비 없이 민간기업들이 ODA사업을 주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또한 아직까지 개발사업을 수행하는 기관들, NGO간의 연대의식이 부족한 부분도 극복해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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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 | "위키리크스, 미국 정부 '막가파식' 전쟁몰이의 부메랑" [9.11강좌 3강] | 느티나무 | 2011.9.29 | ||||||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와 프레시안은 9.11 10년을 맞아 9월 5일부터 매주 월요일 5회에 걸쳐 '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를 주제로 연속 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26일 열린 세 번째 강좌에서는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님이 '새로운 수퍼파워 : 초국적 시민운동과 민주화 도미노'라는 주제로 강연해 주셨습니다. 아래는 프레시안 곽재훈 기자가 정리한 이태호 처장의 3강 강의소개 기사입니다. ☞강연 상세 안내 보기
9.11 이후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의 일성은 '이것은 전쟁행위'라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테러는 경찰 소관인 치안 문제였다. 그러나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나 딕 체니 부통령 등 공화당 군사전략통들은 '미국을 지키는데 국제법이 방해가 돼서는 곤란하다'며 기존의 규범에 대한 예외주의를 정당화했다. 이 때문에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두 가지 논리적 문제가 생겨났다. 첫째, 국제법과의 충돌이다. 쌍둥이 빌딩에 대한 공격을 수행한 자들은 제복을 입은 군인이 아니었고 국가의 공인된 명령체계에 따라 전쟁을 수행하는 정규전 세력도 아니었다. 따라서 비(非)국가 세력에 전쟁 선포가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비국가 세력과의 '전쟁'은 전쟁의 기본 사항을 정한 유엔 헌장과도 배치되고 제네바협정에도 맞지 않는다. 일단 부시가 전쟁을 선포하긴 했는데 상대방을 과연 뭐라고 규정할 것이냐도 문제였다. 군인? 미국은 그렇게 하긴 싫었다. 상대방이 군인이라면 제네바협정에 따라 생포했을 때 전쟁포로로 인정하고 제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테러범? 그렇게 하기도 싫었다. 반인륜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해서는 국제경찰(인터폴)이 수사해야 하고 국제형사재판소(ICC)를 통해 처벌해야 한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적 전투원'(enemy combatant)이라는 개념이다. 둘째, 국내적으로 미국의 헌법 질서에 배치된다는 문제다. '적 전투원'으로 규정한 자들을 잡아서 미국으로 데려오면 미국 헌법에 의해 미국 법을 적용해 재판받아야 하고 변호사 선임권, 묵비권 인정, 고문받지 않을 권리, 3심제 적용 등 권리를 보장받게 된다. 이 때문에 미국 국외에 지어진 것이 쿠바의 관타나모 수용소다. 법률상으로 고문을 허용하는 다른 나라에 비밀 감옥도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비밀 감옥의 존재와 수 등은 공식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랍권과 동유럽 등지에 여러 개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송도 '특별이송'이라고 매우 비밀스럽게 했다. 미국 인권단체가 발간한 보고서를 보면 '사라진 수감자들'이라는 리스트가 있는데 이들이 비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일명 '강화된 심문기법'으로 이름붙여진 사실상의 고문 방안을 도입했다. 잠을 안 재우거나 종교적·인간적·성적 수치심을 주는 등 '스트레스를 주는 취조 방법'을 사용했고 물고문도 허용됐다. 또 아프간을 침공해 테러 용의자를 잡아들일 때 '저 사람이 탈레반이다'라는 증언만으로도 증거 효력을 인정해 체포할 수 있게 했다. 피의자는 증거의 효력을 다툴 권리도 박탈당했고 심문 기한도 '무기한'으로 정해졌다. 미국 헌법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미국 시민의 권리도 제약받았다. 먼저 '애국자법'은 영장주의의 예외를 인정해 이주민을 무기한 구금할 수 있도록 했고 비밀리에 가택수색을 할 수 있게 했다. 애국자법은 또 연방수사국(FBI)이 통신업체나 도서관 사서들에게서 영장 없이도 통신기록, 도서 열람기록 등을 요구할 수 있게 했다. 다 음은 군사력 사용권한의 문제다. 미국 법에 따르면 전쟁 선포는 대통령이 아닌 의회의 권한이다. 의회의 전쟁 선포는 그 요건도 매우 까다롭다. 하지만 부시는 뭔가를 해야 했다. 그러니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비상시 군사력을 사용할 권한이 있다는 개념을 빌려 전쟁을 치렀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이런 방식이었다. 의회는 부시의 군사력 사용을 추인해줬고 이로써 전쟁을 시작하는 방식이 의회의 선전포고에서 대통령의 군사력 사용을 의회가 승인하는 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라크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버락 오바마 등 일부는 반대했지만 의회는 부시의 군사력 사용을 조건부로 승인했다. 부시는 의회가 내건 조건도 지키지 않았지만 말이다.
미국 내 반전운동은 9.11 테러 이후에는 거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2003년 이라크전 반대 운동은 거세게 일어났다. 이후 이라크 바그다드에 있는 아부그레이브 수용소의 인권 실태가 <CBS> 방송에 의해 폭로된 것이나, '다우닝 스트리트 메모'와 '매닝 메모'의 공개는 반전 운동에 동력을 공급했다. 2005년 공개된 이른바 '다우닝 스트리트 메모'는 영국 고위관리들이 2002년 7월 부시를 만난 후 작성한 것이다. 부시를 만난 영국 관리들은 "군사행동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다. 부시는 군사행동을 통해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길 원하고 테러 연계와 대량살상무기(WMD)를 근거로 내걸고 싶어했다. 정보와 사실관계는 정책에 꿰맞춰지고 있었다"고 적었다. 2006년 <뉴욕타임스>에 공개된 '매닝 메모'는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의 외교보좌관 데이비드 매닝이 작성한 것으로 부시와 블레어의 대화를 담고 있다. 부시는 침공을 앞두고 이라크의 적대행위를 촉발할 몇 가지 방안을 블레어 총리에게 제시했는데, 유엔의 비행기처럼 위장 페인트칠을 한 미국 정찰기를 이용해 공격을 유도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이라크에서 WMD가 발견되지 않자 미국은 후세인이 충분히 국제적인 의심을 받을 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이는 '이해할 만한 실수'라고 설명했지만 이같은 메모들은 이라크전이 결코 '실수'가 아님을 보여줬다. 또 허리케인 '카트리나'도 반전 운동의 계기가 됐다. 허리케인 때문에 9.11 당시 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문제는 이것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재해였는데 주방위군이나 구급대원들이 이라크로 차출돼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는 것이다. 테 러와의 전쟁에 대해 반대 운동을 펼친 미국 단체는 여러 부류로 나뉜다. 첫째, 전국적인 반전운동 단체다. '앤서'(Act Now to Stop War and End Racism : ANSWER)나 '낫인아워네임'(Not In Our Name) 같은 단체들이 대표적이다. '낫인아워네임'은 일종의 연대체였는데 '평화로운 내일을 위한 9.11 희생자 가족 모임'도 포함하고 있었다. 9.11 희생자의 유가족들이 '우리 이름을 앞세워 전쟁하지 말라'고 한 것은 미국에 큰 충격과 감동을 줬다. 둘째, 군인 및 피해자 가족들의 단체다. 일종의 당사자 운동인데, 한국과는 달리 미국은 반전 운동에서 예비역 단체의 역할이 크다. 이라크나 아프간에 파견됐다가 전사해 훈장까지 받은 병사의 유가족도 반전 운동에 나섰다. 셋째, 시민권 단체다. 이들은 주로 변론이나 소송 등을 통해 활동했다. 넷째, 국제적 반전운동 단체다. 특히 2003년 2월 15일의 국제 반전 공동행동은 전세계 800개 도시에서 3600만 명이 참여한 최대 규모의 시위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같은해 5월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세계반전모임에서는 26개국 60여 명의 활동가들이 모여 '자카르타 평화 합의'를 열었고 2004년에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부시 등 전범들에 대한 '국제민중재판'을 열기도 했다. 이같은 국제적인 반전 운동은 세계 정세에도 영향을 미쳤다. 반전 운동을 통해 급격히 성장한 것이 세계사회포럼(WSF)이다. 2005년 브라질 WSF를 제안한 브라질의 노동자당(PT)는 나중에 급격히 성장해 룰라 대통령을 배출한다. 그러나 이슬람권의 상황은 사뭇 달랐다. 테러와의 전쟁은 이슬람권에서는 극단주의가 성장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전쟁 전에는 이라크의 알카에다 세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전후 오히려 급성장했다. 이란의 경우도 테러와의 전쟁 전 개혁파가 다수였고 심지어 의회에서 개헌선을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테러와의 전쟁이 일어나고 부시가 이란을 (이라크, 북한과 함께) '악의 축'으로 지목하자 개혁파들은 설 자리를 잃었고 미국에 맞서야 한다는 강경파의 입지가 넓어졌다.
법률적인 방법에 의지한 미국 내의 반전 운동 사례들 중 주목할 만한 것 몇 가지만 살펴보겠다. 첫째, 헌법권리센터(CCR)가 시작한 관타나모 수용소 수감자들의 권리 찾기 운동이다. 일련의 소송이 2002년부터 2008년까지 6년 간 계속됐는데, 2004년 6월 미국 대법원이 관타나모 수감자라 해도 영장에 의하지 않은 구속은 불법이며 구속영장 발행을 요구할 권리를 갖는다고 판결하면서 싱겁게 이기는 듯 했다. 그러나 미국이 국방부에 구속 여부를 심사하는 재심 위원회를 만들고 의회에서 '수감자처우법'을 통과시키면서, 관타나모 수감자는 자신의 구속을 국방부 소속 위원회에 다시 심사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고 학대로부터 법률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게 됐지만 영장이 무제한 청구와 무기한 구금 또한 법으로 보장됐다. '법률에 의하지 않고 구속하면 안 된다고? 그럼 법을 만들지 뭐' 하는 식이었던 거다. CCR 은 또 국방부의 특수군사위원회가 '적 전투원'들에 대한 수사와 재판권을 갖는 것이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아 위법하며 제네바협정에도 위반된다는 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은 2006년 9월 이들의 주장을 인정했다. 그러자 의회는 또다시 '군사위원회법'을 만들어 이를 합법화했다. CCR은 이에 다시 군사위원회법의 위헌 여부를 다투는 소송을 냈고 미 대법원은 2008년 6월 위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유사한 많은 사건들이 현재 각급 법원에 계류돼 있다. 둘째, 역시 CCR이 이끈 것으로 부시 행정부 고위관료들을 '전쟁범죄자'로 처벌하기 위한 소송이었다. CCR은 럼즈펠드를 고문 등 수감자 학대 혐의로 고발했지만 미국 국내에서는 모두 기각됐다. 전범은 국적에 관계없이 처벌할 수 있도록 한 여러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09년 3월 스페인 판사 한 명이 관심을 가지고 럼즈펠드를 조사할 용의를 밝혔지만 스페인 법무부의 만류로 좌절됐다. 셋째,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이 제기한 불법 사찰 및 도청에 대한 소송이다. ACLU는 2006년 12월 <뉴욕타임스>에 폭로된 미 국가안보국(NSA)의 도청사건에 문제를 제기했다. NSA가 영장 없이 미국 시민들의 전화를 도청한 이 사건에 대해 디트로이트 지방법원은 ACLU 측의 승소를 선언했으나 항소심에서는 판결이 뒤집혔다. 또 2007년 미 의회가 기존의 '외국정보사찰법'을 개정해 '미국보호법'을 만들고 해외와 통화하는 미국 시민의 전화에 대해서도 영장 없는 감청을 가능케 하자 ACLU는 이 법률에 대한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현재 진행 중이다. 넷째, 역시 ACLU가 제기한 '국가기밀특권'에 대한 도전이다. 2003년 7월 ACLU는 다른 인권단체들과 공동으로 테러혐의 수감자들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를 접수했으나 미국 정부는 거부했다. 그러자 ACLU는 2004년 6월 관련 자료의 공개를 요구하는 소송을 시작했고 같은해 9월 승소했다. 그러나 공개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또 ACLU는 이른바 '특별이송'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은 CIA의 항공기 운항을 대신해 주는 일종의 용역업체 '제퍼슨 데이터플랜' 사(社)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현재 진행중인 이 소송에서 ACLU는 해당 회사가 '특별이송'의 비인도적 실체를 알고도 영리를 위해 이를 돕는 조달 서비스를 제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의민주주의적 수단에 호소한 사례도 있다. 첫째, 대통령 탄핵 운동이었다. '다우닝 스트리트 메모'가 공개된 이후 2005년 결성된 '애프터 다우닝 스트리트'는 2007년과 2008년 각각 체니 부통령과 부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추진하기 위해 10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 민주당 데니스 쿠치니치 의원이 탄핵안을 발의할 수 있도록 도왔다. 둘째, 예산을 무기로 이라크 철군을 이끌어내기 위한 활동이었다. 1400개 반전단체의 연대체 '평화와 정의를 위한 연합체'(UFPJ)가 여론을 이끌었고 결국 이 문제를 의회로 가져왔다. 그러나 2005년 국방 예산을 빌미로 부시 행정부로부터 '철군 일정표'를 받아내려는 시도는 압도적 표차로 부결됐다. 2006년 중간선 거 후 다수당이 된 민주당은 이라크 철군을 이끌어내기 위해 국방예산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이라크에서 철군을 시작하라고 부시 행정부를 압박했다. 그러나 2007년부터 철군을 시작할 것을 의무화한 '이라크책임법'은 부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부딪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식 이후 발표한 최초의 4개 대통령령에서 관타나모 수용소를 1년 안에 폐기하고 고문을 중단하며 CIA의 '비밀 감옥'을 포함한 구금정책 수단을 재검토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는 의회의 반대 등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또 오바마는 고문 관련 자료를 공개하겠다던 자신의 약속에 대해서도 말을 바꿨고 고문에 연루된 CIA 조사관들도 처벌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이라크, 아프간 철군도 어떻게 될지 불확실한 상태다. 아프간에서는 탈레반과의 평화협상을 시도하고 있지만 협상을 주도해온 부르하누딘 라바니 전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앞날을 알 수 없게 됐다. 또 오바마는 파키스탄 남부 파슈툰족 거주 지역까지 공습 지역을 늘렸는데, 미국이 파키스탄과 개전 선언을 한 게 아니니 이는 불법이다. 이런 면에서 위키리크스 사태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위키리크스 사태는 테러와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사실상 (가능성이) 내재돼 있던 것이다. 테러를 막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미국의 헌법 질서와 시민권, 국제 규범 등에 대해 온갖 예외를 인정한 것이 부시의 논리였다. 이것이 시민권 진영이 전쟁에 대항하는 운동에도 온갖 수단이 동원될 수 있다고 믿게 했을 수 있다. 국가가 지정한 1급비밀을 대중이 모두 알 수 있도록 공개하겠다는 것이다. 위키리크스는 테러와의 전쟁에 대응한 시민들의 자구적 대응과 시민 불복종 운동, 안보 민주화 운동의 아이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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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 집의 인문학 3강 집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 소설을 통해 본 우리들의 집 | 느티나무 | 2011.9.28 | ||||||
8월 30일부터 가을학기 강좌 [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거북아, 거북아! 행복 줄께, 아파트 다오? 2011 참여연대 느티나무 아카데미 가을강좌 ‘집의 인문학’은 작년부터 기획되었다고 한다. 의, 식, 주. 입고, 먹고, 거처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들이다. 이 중에서 주, 즉 집은 대한민국에서 ‘자산증식’의 수단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여전하게 강하다. “주거문화, 부동산 문화를 변화시키는 씨앗이 되면 좋겠다”는 느티나무의 바람에 100% 동의하며 집의 인문학 강좌를 소개한다. 3강은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박철수 교수가 맡았다.
여러모로 밀리는 ‘철수’다. 대세인 안철수, 외모는 배철수… (청중 웃음) 고등학교 때 꿈은 인문학도였다. 초등학교 때 공부를 좀 했는데, 삼촌들이 길을 정해주었다. 얘는 이과라고. 근대 한국사회는 인간을 몇 가지 종류로 나눈다. 문과, 이과, 예체능과… (청중 웃음) 근대 세계가 목표하는 생산적인 인간이 된다. 왜 우리들은 스스로 원하는 것은 학습하지 않을까? 한국사회는 ‘통섭’하라고 해놓고 사회 체계는 그렇지 않다. 통섭하면 안 되는 구조다. 문과, 이과, 예체능계 각 영역만 가지라고 한다. 소설은 근대의 산물이다. 소설이 많이 읽히려면 문자 해독층이 많아야 하고, 인쇄술도 발달돼야 한다. 동시에 뿌려질 수 있는 운송수단이 있어야 한다. 작가가 보는 소설의 시선으로 그 시대의 장소, 상황을 객관적으로 읽을 수 있다. 이런 걸 문학지리학(문학작품 속에서 지리적 공간에 대한 경험과 의식이 어떻게 표현되었는가를 살피는 “지리학적 현상으로서의 문학작품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장소와 공간에 이야기, 역사사실이 있어 고증의 켜를 올리는 것이다. 이 근처 통의동에 보안여관이라고 있다. 시인 서정주가 기거하면서 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들었다. 보안여관에 ‘시인 서정주가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얹히면서 그 시대의 어떤 상황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1930년대부터 2006년까지 숙박시설로 운영된 종로구 통의동의 보안여관. 지금은 갤러리로 운영되고 있다. 사진=네이버 블로그 르허기씨(blog.naver.com/lhaej57)
소설 속에 비친 아파트 대한민국의 56.8%가 아파트에 산다. 우리는 아파트에 살면서 아파트를 좋게 말하지 않는다. 소설도 아파트를 좋게 얘기하지 않는다. (아래부터는 소설 속에서 나타난 ‘아파트’ 모습이다. 강의 교재에 있는 순번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문장과 출처 일부는 편의상 생략했음을 알린다.)
1. “벗어날 수 없는 일상과 버릴 수 없는 욕망, 그 사이의 깊은 절망이 그들을 사라지게 했을 것이다.”(서영인, ‘비약과 소멸의 꿈, 혹은 변신이야기’, 김윤영 소설집『타잔』에 대한 작품 해설, 300~301쪽) 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의 심정이 아닐까 싶다. 아파트 평수 늘리기와 동네 바꾸기가 청장년의 욕망이다. 여기서 절망은 돈이 없다는 것이다.
2. “… 엄마가 아들을 배타적으로 독점하려 들고, 가족 아닌 사람들을 죄다 밀어내고 자기 가족만 배타적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믿고....”(이남희,『세상의 친절』270쪽) 아파트에서 짜장면을 시켜먹고 문 밖으로 내놓는다. 철문 안쪽은 우리 공간이고 밖은 나와 상관없는 공간이다. 일본은 화분을 내놓기 위해 산다. 그렇지만 우리는 안에 들여다 놓고 우리만 보려고 산다. (자기만의) 전용공간 늘리기에는 관심이 많지만 공용공간에는 관심이 없다. 다세대, 다가구 주택은 전용공간에 충실하다. 그래서 이익을 가지려는 건축주가 어수룩한 땅 주인을 만나 다세대, 다가구 건축을 동의하게 만든다. 베란다 확장도 전용공간 늘리기다. ‘나만 좋으면 된다’면서 공공, 공유 공간에 관심이 없다. 그러면서 세상을 탓하는 것은 모순이다.
3. “… 내가 왜 영감이 물려준 버젓한 내 집을 두고 이 아래 위 줄행랑 같은 셋집에 드냐, 들길. 아이고 망했구나 망했어, …”(박완서 ‘울음소리’,『그 가을의 사흘동안』29~30쪽) 줄행랑이란 뜻은 줄줄이 늘어서 있는 행랑이다. 행랑은 대문 양쪽에 벌여 있는 노비나 하인들 주거하던 곳이다. 주거계층에서 상것이다. 늘어선 행랑처럼 아파트 형태가 획일적인 것이다.
4. “아파트에 살던 후배가 땅 집으로 이사 간다고 하길래 덮어놓고 잘했다고 말해주긴 했지만 정작 어디다 집을 샀는지 …”(박완서『그 남자네 집』9~11쪽)
땅 집은 아파트와 단독주택의 본질적 차이를 말한다. 아파트를 ‘공중에 떠다니는 포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타운하우스, 블록형 단독주택, 펜트하우스 등이 관심을 받는다. 이들은 아스팔트든 땅이든 내가 관리할 땅이 있느냐 없느냐의 이해가 있다. 요즘 카페와 길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외부공간과 일상생활의 긴결성이 가까워졌다. 아파트 공간이 갖는 피로도의 분출구가 아닐까.
5. “… 끝없는 직각과 직선의 세계, 어떻게 이렇게도 많은 아프트가 모여 있는 곳이 … 공장을 중심으로 이룬 소왕국. 도시 속의 완벽한 요새.”(김채원 ‘푸른 미로’『지붕 밑의 바이올린』293쪽) 우리나라 도시의 공동주택에는 방음벽이 기본이다. 유럽 도시에서 방음벽을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이미 공간을 철저하게 분리하고 산다. 이것은 사회에서의 분리를 의미한다. 아파트는 공간이 철저하게 나뉘어져, 외부공간과 교류하지 않는다.
6. “…이곳 아파트의 여자들은 남의 흉내를 내기 위해 순전히 남을 닮기 위해 다이어트를 했다. 나는 이런 닮음에의 싫증으로 진저리를 쳐 가면서도 … 철이 엄마나 딴 방 여자들이나 남보다 잘 살기 위해, 그러나 결과적으론 겨우 남과 닮기 위해 하루하루를 잃어버렸다. 내 남편이 18평짜리 아파트를 위해…”(박완서, ‘닮은 방들’『그 가을의 사흘동안』352쪽) 아파트 생활은 철저하게 닮아 있다. 주상복합은 더욱 요새다. 주차장, 사우나, 식당, 네일아트… 수직이동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
8. “잔뜩 발기한 것처럼 여기저기 솟아있는 아파트 덩어리는 다시 거대한 난수표가 된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난수표.”(한수영『공허의 1/4』101쪽) 아파트는 무지무지 욕망이 팽배한 곳이다. 유지비용이 많이 나오는 타워팰리스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더운 여름 날, 에어컨을 가동하는 복도가 시원하니까 각 집이 모든 문을 열고 살았다. 관리실에서 “제발 문 좀 닫으세요”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고 한다.
10. “강남의 외딴섬, 또는 강남의 음지로 불리는 수서의 임대아파트 단지는 그 큰 규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근 주민들의 눈엣가시였다. 우리 학교는 …”(김윤영 ‘철가방의 추적작전’『루이뷔똥』121~123쪽) 수서동에 영구임대아파트가 있다. 이런 플랭카드가 붙은 적이 있다. “살기 좋은 수서에 왠 임대아파트?” “강남 일원동에 장묘공원 왠 말이냐?” 공간 격리가 사회적 격리가 된다. 삶이 갖는 기본 흐름이 있다. 피붙이를 보자. 다양한 인간 군상이 한 가계를 이룬다. 이런 가계의 확대가 마을이고 우리 사회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지금은? 노인들만 사는 노인 아파트가 있다. 젊은 애들은 출퇴근한다. 노인들만 모아놓고 살면 좋을까?
12. “… 나는 내 삶의 깊숙한 곳에 촌충처럼 들이박힌 무료함의 발톱을 빼낼 수가 없다.”(김인숙 ‘술레에게’『그 여자의 자서전』111~113쪽) 아파트, 연립주택의 일상을 표현했다. 조정래가 1973년 발표한 ‘비탈진 음지’ 소설을 보면 농부였던 아버지가 서울로 와 아파트를 보고 처음에는 학교로 생각한다. 그러다가 잘 먹고 사는 누군가의 창고라 생각한다. 나중에서야 아파트가 ‘집’이라고 알게 된다. 아파트를 3D로 잘라보자. 같은 위치, 공간에서 비슷한 일상을 산다.
13. “십오 층 복도식 아파트. 가슴팍까지 올라온 높이로 … 다 같이 시장으로부터 쑥 올라온 공중 한복판에 둥지를 마련하고 중력을 느끼지 못한 채 슬금슬금 떠다니는 포자들일 뿐이다.”(은미희 ‘편린, 그 무늬들’『만두 빚는 여자』174쪽) 아파트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아이들에게 “넌 고향이 어디니?”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14. “… 줄여? 뭘 얼마나 줄여? 32평에서 더 줄일 게 뭐 있어. 몸을 팔았으면 팔았지 이건 절대 못 팔아!”(김윤영 ‘얼굴 없는 사나이’『타잔』59~60쪽) 얼굴 없는 사나이는 IMF가 배경이다. 전 세계 베이붐 세대 중 대한민국의 가장이 가장 불행하다. 자산의 대부분이 아파트다. 네덜란드는 자산 중 45%는 부동산이고 나머지는 다른 종류다. 융자 3억2천을 끼고 산 8억2천하던 집값이 6억2천으로 떨어지고 금리가 올라가면 재산은 재산대로 줄고 이자는 이자대로 는다. 집값이 떨어지는 순간 중산층은 완전하게 무너진다. 한국의 이 중간층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한국은행 총재의 고민이다.
15. “… 찬국은 복처라는 소리에 한없이 낄낄거렸다. … 누구 망신을 시키지 못해 복부인 노릇을 하려고 야단을 쳤지만 …「우리가 무슨 복에 복처를 모시겠나.」처복도 없는 두 남자는 …”(박완서 ‘서울사람들’『박완서 소설전집15』300~301쪽) 복처(福妻), 복부인(福婦人), 처복(妻福)은 이 시대의 신조어다. 과거에 좋은 부인은 육아 잘 하고 부모님 잘 모시는 것이었다. 지금은 월급쟁이의 아내가 남편도 모르게 부동산 굴리는 게 좋은 부인이다.
24. “… 내 집에서의 풍경이 그대로, 확대 재생산되는 순간, 내 집의 풍경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아파트에서 아파트로의 이동. 여자들은 부엌으로, 남자들은 텔레비전 앞으로, 아이들은 …”(공선옥 ‘비오는 달밤’『명랑한 밤길』177쪽) 디시인사이드 부동산 갤러리에 ‘2011년 수도권 계급표’라는 그림파일이 있다. 아파트 평당 가격을 기준으로 계급을 9단계로 나눴다. 1단계는 황족으로 평당 3천만원 이상에서 사는 강남구다. 맨 아래는 노비, 가축이다. 아파트가 대한민국 신분과 경제 지렛대를 가늠하는 아이콘이다.
▲ 2011 수도권 계급표 사진=디시인사이드 부동산 갤러리
37. “… 소연이의 피아노 소리는 초라한 청운연립과 어울리지 않았다. 고급스런 아파트에서나 들려올 법한 소리였다. …”(조영아『여우야 여우야 뭐하니』181쪽) 다세대․다가구를 포장한 것이 ‘빌라’이다. 양재동 빌라는 초호화 저층 빌라이고 상계동 빌라는 다세대․다가구이다.
유럽 개념의 임대아파트는 없어 여러분은 ‘집’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나와 내 가족과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단독주택에 살면서 달라진 점은 아파트 가격표에 관심이 없어졌다는 거다. 아파트, 돈이 지지하는 비율이 높으면 행복한가? ‘돈’에 쫓아다니며 인생의 상당부분을 낭비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자.
아파트라는 삶에서 공동생활, 커뮤니티 가능성이 있을까? 유럽에서의 아파트는 고급주택이 아니다. 사회 저소득층을 위한 사회복지였다. 소셜 하우징(social housing)이라고 해서 관리, 소유가 공동이고 각 개체가 처한 상황에 따라 임대를 다르게 한다. 싱글 맘이고 성별이 다른 아이가 있다면 방3개짜리를 준다. 연 수입에 따라 내는 임대료도 다르다. 가족 구성원에 따라 비용과 크기가 결정된다. 우리나라는 순수한 임대주택이 없다. 아마 영구임대주택정도?
아파트는 결국 우리가 살아야 하는 곳이다. 공급된 지 반세기가 지났다. 애매하게 비난하는 것이 있지만 아파트 때문에 생활이 그렇게 어그러진 것도 아니다. 아파트 독과점이라 경쟁 상대가 없었다. 공동체는 자발성이 없으면 깨진다. 노인정, 부녀회는 뜻을 같이하는 몇 명이 장악하면 나머지가 떠난다. 공동체라고 할 수 없다.
참고 ① 보안여관이 궁금하다면 클릭! ‘청와대 옆 보안여관을 아시나요?’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haej57&logNo=10112650799
② 긴결 : 한글사전에서 ‘긴결’이란 단어는 찾을 수 없다. 다만, 건축과 관련된 글에서 ‘긴결철물’ ‘긴결기구’란 형태로 등장한다. 긴결기구는 ‘구조기구’라고도 하는데, 목재 접합부를 단단히 결박하기 위해 사용하는 철기구를 말한다(출처 : 네이버 블로그, 하람디자인). 긴결철물은 역시 건축에서 서로 맞물리지 않는 것의 일체화를 위해 ‘연결시키는 철물’을 의미했다. 위 글 4번에서 “외부공간과 일상생활의 긴결성이 가까워졌다”에서 ‘긴결성’이란 외부공간과 일상생활의 연결 정도, 혹은 일체감이 높아지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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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 | 교과서를 통해 본 한국근현대사 3강 | 느티나무 | 2011.9.28 | ||||||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교과서를 통해 본 한국근현대사 3강 후기>를 함께 공유합니다. 글은 김도형 인턴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원문 출처 : http://bit.ly/n0f3fm 고종 퇴위 12년 밖에 안됐는데...한국인은 빨랐다 최근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꾼다는 역사교육과정 고시안을 놓고 논란이 치열하다. 고작 두 글자, 그것도 남한체제를 설명할 수 있는 '자유'가 붙는데도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두 글자가 갖고 있는 역사인식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의 시민이 될 학생들의 역사인식은 일차적으로 학교 교과서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역사교과서에 어떤 내용이 실리는지는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올바른 역사관과 시대정신, 그리고 객관성을 바탕으로 역사교과서를 서술해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참여연대 아카데미 인문학교>의 일환으로 9월 7일부터 진행되고 있는 <교과서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 강좌에서는 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교재로 한국근현대사의 서술 방향과 역사 인식에 대한 전문가들의 강의가 이어지고 있다. 아래에서는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김정인 교수의 세 번째 강의<대한민국 임시 정부 있는 그대로 보기>를 정리해 본다. 이하의 내용은 김 교수의 강의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역사를 보는 시각, 임시정부를 보는 시각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 한국인이라면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다. 하지만 그 이름에 지워진 꼬리표는 한두 개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흔히 임정법통론이라 불리는, 일제 강점기 민족독립운동의 총본산이라는 찬사가 가장 익숙하다. 하지만 그저 허망한 외교활동에 목을 매던 우익인사들의 독립운동 단체였을 뿐이라는 비아냥도 있다. 그리고 그 간극은 결코 작지 않다. 하지만 임정이 한국 근대사에서 한 역할을 제대로 알고 온당하게 평가하려면 단편적인 시각으로는 곤란하다. 보다 다원적이고 객관적인 역사관이 요구되는 일이다. 김정인 교수는 일관되게 모든 제도권 역사교육에 의문과 의심을 가져 볼 것을 강조한다. 우선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신년축하 기념사진을 보자.
김구, 이승만, 안창호 등 임정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보인다. 주목할 것은 그들의 복장, 모두 깔끔한 단발에 양장 차림이다. 한복의 상징 같은 김구마저도 어색한 양복을 입고 있다. 갑오개혁 이후라지만, 아직 당대의 대중들은 한복 차림이 많았다. 당시 사진들 중에도 이렇게 전원 양장 차림의 사진은 임정을 제외하면 흔치 않다. 그렇다면 왜? 이 사진은 임정 요인들이 당시로서는 무척 개화된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비밀리에 해외활동을 해야 했던 당시 임정 요인들의 상황을 반영한다. 그저 막연히 가르쳐주는 대로 보고 듣기만 하면 이런 부분은 알 수 없다. 그럼, 눈을 크게 뜨고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읽어 보자. 임시정부란 무엇인가, 임시정부를 둘러싼 논란은 무엇인가 임시정부는 하나가 아니었다. 3.1 운동이후 한성, 만주, 상하이 등 각지에서 임시정부 수립 움직임이 있었고 1919. 4. 11. 상하이를 시작으로 곳곳에서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9월에 이르러 상하이 통합임시정부로 출범하게 된다. 3.1 운동이후 만들어진 이들 임시정부들의 공통점은 민주공화제와 삼권분립을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 헌장도 마찬가지다. 수천 년간 왕이 지배해오던 역사 속을 살아온 한국인들이 이렇게 단기간에 왕이 없는 정치체제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냈다는 점은 독특 하다. 심지어 식민모국인 일본도 입헌군주제였던 시대의 일이다. 기억하고 곱씹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김 교수는 되풀이 한다. 임시정부를 둘러싼 대표적 논란은 외교론과 무장투쟁론의 대립이었다. 특히 1980년대 말, 민주화 이후 학계에 근현대사 연구 붐이 일어나면서 무장투쟁론의 가치는 높아진다. 상대적으로 제도권에서 가르치던 외교론의 입지는 약해졌다. 하지만, 과연 외교론은 무의미한가? 독립투쟁은 반드시 무장투쟁이어야 했는가? 김정인 교수는 한국이 일본에게 망하는 과정이 외교와 조약으로 진행되었음을 강조한다. 우리는 칼로 망하지 않았다. 조약과 도장으로 망했다. 그렇다면, 독립운동은 무력으로 해야 한다는 강박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김 교수는 북한에 대한 콤플렉스와 군부 독재 치하에서 무의식적으로 체화된 군사문화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문(文)을 상징하는 세종로에 무(武)를 상징하는 이순신 동상이 서있는 현재의 광화문 거리는 우리사회에 만연한 무력숭배의 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외교론에 대한 지나친 폄하, 나아가서 임정 자체에 대한 폄하는 김 교수가 경계하는 것이다. 외교를 '자국에 유리한 조건을 만드는 일'로 정의 한다면 임정의 외교 능력은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었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중국 국민당정부와 소련의 지원을 받아내고 그 와중에 맺은 <한국광복군 행동 준승 9개항> 등의 불공정한 협약을 폐기하는 등 오늘날 정부보다도 훨씬 적극적인 외교성과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하는 부분은 좌우합작 단체로서의 임정이다. 1922년 소련의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대회>에서 임정인사들은 레닌을 만난다. 이들 중 이동휘와 여운형은 사회주의 계열, 김규식은 민족주의 계열이었다. 당시 레닌은 3.1운동에 대한 감동을 피력하였고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고 있었다. 피식민지 국가의 지도자들이 이 소비에트의 수장을 만나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들은 소련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았다. 이 후에도 임정은 사회민주주의적 이념인 삼균주의를 수용하는 등 좌우를 초월한 독립운동의 중추이기 위한 노력을 반복하지만 제도권 교육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역사 교과서 속의 임시정부 김 교수에 따르면, 한국 역사 교과서의 독립운동 서술은 항상 일정한 구조를 유지한다. 3.1 운동으로 시작해 임정이 수립되고, 갑자기 청산리-봉오동 전투와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비롯한 의혈투쟁이 나온 후 뜬금없이 한국광복군이 언급되고 해방을 맞이하는, 매우 익숙한 구조다. 이처럼 단순화된 독립운동사 서술 속에서 임정의 위상은 각별하다. 다시 말해 임정법통론은 한국 역사교과서의 독립운동 서술의 근간이다. 해방직후부터 한국 교육에서는 임정의 수립은 곧 주권의 회복이요, 임정은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을 총지휘한 독립운동의 총본산으로 찬양해 왔다. 이는 국정교과서와 검인정 교과서 둘 다 마찬가지다. 유신시대에는 더 심해져 민족적 정통성과 한국적 민주주의의 발현지라는 이미지가 추가 되었다. 김 교수는 이를 상대적으로 취약한 남한 정부의 정통성을 임정법통론으로 보완하려 했을지 모른다는 의견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교과서 서술 안에서 정통성에 대한 집착으로 드러난다. 1990년판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이며 유일한 정통정부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1997년판 고등학교 국사에도 '정통정부'라는 표현이 있다. 국정교과서인 2002년판 중학교 국사에서는 '자유민주주의와 민주공화정의 국가체제를 지향했다'는 표현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자유민주주의와 정통정부에 대한 집착은 반공의 이념적 지렛대가 되어 왔음은 물론, 분단정부의 정통성을 방어하는 임정법통론의 근거로도 작용해 왔다. 하지만 이는 결국 북한을 의식한 발언임을 더 드러낼 뿐 아니라 분단의식을 극복하지 못하고 확대 재생산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때문에 초기 임정이 사회주의 세력과 연관성이 있다거나 좌우합작적 요소를 추구했다는 부분은 교과서에서 의도적으로든 아니든 무시된다. 역시 분단의식의 연장선이다. 특히 초기 교과서 편찬자들의 친일 이력은 이런 경향을 더욱 부채질 했는데, 대표적인 폐해가 역사교육전반에서 해방정국의 대표적인 민족지도자 몽양 여운형이 제외된 일이다. 현재 우리가 공적으로 학습하고 기억하는 민족독립운동의 지도자는 이승만, 안창호, 김구로 모두 우익 계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임정 자체의 침체기 역시 교과서에서 잘 다루지 않는 부분이다. 이 시기 임정은 좌우익간의 이념갈등, 무장투쟁파와 외교파의 노선갈등 외에도 서북파와 기호파의 지역갈등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교과서에서는 지역갈등은 아예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1980년대 말 민주화와 함께 임정법통론에 대한 문제제기와 공론화가 가능해지면서 문제는 심각해진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배제한 채로 이어져온 임정법통론 자체의 진실성에 한계가 온 것이다. 결국 임정법통론자들은 임정의 침체를 좌익분자의 파괴공작에 의한 것으로 호도하기 시작했다. 아니면 이념을 초월한 민족지도자 김구를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로 내세워 그가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임정을 구원한 것으로 얼버무리는 식으로 무마할 수밖에 없었다. 없는 진실을 포장하려다 보니 교과서 서술의 오류는 점점 심해졌다. 임정법통론을 고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무리수를 역사왜곡을 통해 가리다보니 점점 수렁으로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3.1운동 후 대부분의 무장단체들이 광복군 사령부 휘하로 통합되어 임정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는 주장이나, 태평양전쟁 당시 광복군이 중국 각지에서 일본군과 맹렬히 싸웠다는 주장, 그리고 임정의 외교적 노력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어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독립을 약속받았다는 주장 등은 모두 사실 무근이지만 교과서에 버젓이 실리고 있다. 이런 서술들은 모두 광복군의 활약은 명실상부한 대일 전쟁이었고 외교 노선이 한국독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명제를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오롯이 목적론적인 역사서술인 셈이다. 반면 정작 김원봉의 민족혁명당이 합류 하면서 좌우합작적 성격을 되찾은 일은 임정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임에도 교과서에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즉, 임정도 임정법통론도 오늘날 교과서에서는 철저히 남한 지배 권력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담론으로서만 기능하는 것이다. 임정법통론이 가지는 정치적 함의 그렇다면 임정법통론이 교과서를 지배할 만큼 역사해석의 주류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배경에도 어김없이 정치적 안배가 깔려 있다. 김 교수는 해방이후 임정법통 계승이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짚고 넘어가야함을 강조한다. 임정법통론을 공론화 시킨 인물은 역시 이승만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대통령의 '이미지'에 적합했다. 대한제국 황실과 핏줄이 닿아있는 전주 이씨였고, 서울출신이었으며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협회와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한 개화지식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이력도 있다. 당대의 보수든 진보든. 이승만은 그들 모두를 설복할 수 있는 복합적 명망성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에 추대되었음에도 상하이에서의 6개월을 제외하고는 주로 미국에 거주하면서 교포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걷어 활동비로 충당하였다. 김 교수는 이를 재미 동포들이 갖고 있는 일종의 부채의식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고 해석한다. 결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은 국제연맹에 위임통치 청원을 했다는 이유로 1925년 탄핵된다. 그리고 알다시피, 해방 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역시 4.19 혁명으로 인해 하야한다. 두 사람이 동일인물인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물론 이승만의 방식을 무조건 비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해방 후에 친일파로 이루어진 한민당과 손잡고 미국을 배경으로 1948년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하면서도 임정의 법통 계승과 정통성을 주장하는 부분에서는 미국을 무대로 활동했던 이승만 특유의 스타일을 볼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쟁의 현장인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김구가 일관되게 친일파와의 비타협 노선을 걷다가 암살당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임정법통론은 당시에도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훗날에도 문제가 된다. 전두환 정권 당시, 독립운동사를 임정 중심으로 서술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물론 정통성 확립이 목적이었다. 이에 역사학계에서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임정 중심의 독립운동 서술은 풍부했던 우리의 민족운동을 축소, 왜곡시킨다. 뿐만 아니라 정통성을 대한민국만이 계승하였다는 주장은 분단극복을 위한 노력이 결코 될 수 없다. 말하자면, 민족의 길도 통일의 길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물론 항일 무장투쟁을 정통성으로 내세우는 북한에도 똑같은 형태의 문제제기는 가능하다. 이런 정통론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보수든 진보든 스스로가 정통임을 내세우려 하는 순간 독선의 함정에 빠지고 상대방을 배제하게 된다. 결국, 역사를 목적성을 가지고 바라봐서는 제대로 보기 어려운 것이다. 임정에 대해 견지해야 하는 시각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정부에 의해 활용되는 임정법통론의 태생적 문제 역시 여기에 있다.
임시정부 있는 그대로 보기 이날 김 교수가 강의한 강좌의 제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있는 그대로 보기>이다. 정권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서건, 정권의 부도덕성을 공격하기 위해서건 목적성이 전제된 역사관은 시각을 굴절시킨다. 임정에 대한 시각 역시 과대평가나 평가절하가 아닌 직시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김 교수는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과연 임정의 실체는 무엇인가? 과연 임정은 민족독립운동의 총본산이었는가? 그렇다면 그 의의와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우선, 연해주 대한 국민의회와 상하이 임시정부의 통합은 좌우합작이라는 면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임정의 탄생 과정에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연합전선이 형성 되었고 독립운동의 본부라는 정체성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 또한 초기 임시정부는 외교를 통한 독립청원운동에 역량을 집중했다. 프랑스 조계인 상하이는 비교적 안전하고 국제적 활동이 가능한 지역이었다. 임정이 위치한 공간에서 이미 외교노선에 주력하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임정의 국제적 승인과 일본식민통치의 침략적 성격 폭로가 주된 활동이었는데, 이는 현대에 티베트 등 약소국들의 방식과 유사하다. 때문에 외교노선을 함부로 과소평가 하는 것은 위험하다. 당시로서는 약소국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했다고 보는 것이 더 온당하다. 하지만 내부 침체와 파벌갈등은 분명 심각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임정은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게 된다. 소련의 재정 지원으로 1923년 1월 3일 국내외 대표 130여명이 모일 수 있었지만 결국 창조파와 개조파간의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고 만다. 이 때 김구 등의 우익 보수 계열은 임정을 고수했지만, 창조파와 개조파 다수를 차지하던 사회주의 계열이 이탈하면서 임정은 좌우합작 성격과 대표성을 잃게 된다. 이 시기의 임정은 우익 주도의 일개 독립운동 단체 규모로 전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후에는 윤봉길, 이봉창 등의 의거로 잠시 주목받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국민당 정부와 함께 고난의 유랑길을 다니게 된다. 이 시기 임정의 정체성 중 하나는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결집체라는 것이었다. 당시 독립운동의 주류는 좌파 쪽이었다. 그리고 좌익계열에 밀린 임정은 삼균주의를 수용하는 등 좌우합작적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국공합작을 경험했던 김구의 영향력일 것이다. 이 역시 남북총선거를 위해 김일성과 대화를 시도할 결단을 내리게 되는 훗날의 김구와도 이어지는 부분이다. 역시 김 교수가 강조하는 공간과 경험이 형성하는 개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결과적으로 임정은 1942년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의 합류를 계기로 좌우를 포용하는 주요항일역량으로서의 성격을 회복하게 된다. 하지만 흔히 임정의 무력이라 일컬어지는 한국광복군은 최대일 때도 그 규모가 300명 정도에 머무르는 소수 부대였다. 게다가 대부분이 장교여서 실질적인 의미의 무장세력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실제로 광복군은 전투에는 거의 참여 하지 않고 첩보업무 등을 담당했다고 한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임정의 요청으로 폐기되는 1944년까지 굴욕적 협정을 지켜야 했다. 또한 중국정부는 임정을 실질적 정부로 대우하면서도 정식 정부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다른 열강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정의 최종 목표인 국제적 승인에는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임시정부의 의의는? 앞에 썼듯이 임정은 국제열강들에게 정식정부로 승인받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이 때 승인 받지 못한 것은 미군정 시기에도 임시정부가 승인 받지 못하는 결정적인 아킬레스건이 된다. 흔히 임정의 활동, 즉 외교노선 중심의 독립운동이 무의미했다는 평가는 이 부분에서 출발하지만, 이는 사실 역설적으로 임정의 외교 활동이 갖는 중요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성패를 잣대로 삼는다면 무장투쟁 역시 일제를 이기고 나라를 되찾지 못했으니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무장투쟁의 주역인 김좌진, 홍범도를 탓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요는 노력이 가치와 진정성이 있느냐 없느냐 인 것이다. 몇 년 전 동티모르 임시정부는 국제적 인정을 받는데 성공했고 동티모르 공화국 정부로 정식수립 될 수 있었다. 국제적 승인은 그래서 중요하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임정의 외교적 노력이 무가치한 활동이었다고 봐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임정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의의는 단순히 효과적인 평화적 독립운동노선을 제시했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임정은 한국사 최초의 민주 공화정 정부였기 때문이다. 자본이나 기술은 어떠했든지 간에 한국인들의 정신적 근대화는 놀라울 만큼 빨랐다.3.1운동 직후 설립된 모든 임시 정부는 왕정 대신 민주공화정을 채택할 것을 천명했다. 1907년 고종 퇴위 이후 고작 12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는 점, 그리고 수천 년간 왕정이 존속해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혁명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김 교수는 이 외에도 1912년에 일어난 중국의 신해혁명 역시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자국의 왕이 퇴위 당하고 청 제국의 황제는 아예 사라지는 대격변의 시대 속에서 한국 민중은 스스로를 자각하고 민주제와 입헌정치에 대한 풍부한 논의를 전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군주와 국가를 분리시키고 군주를 배제하는 정치, 즉 민주 공화정체였다. 3.1운동이 제국주의와 전제정치를 부정하고 독립에 기초한 공화정을, 신분제도를 부정하고 평등에 기초한 민주정을 제시했다는 것은 이런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이상과 이념은 임정에 의해 해석되고 그 헌법에 규정될 수 있었다. 대한민국임시헌장(1944)과 제헌헌법(1948)은 전문, 총강, 국민의 권리와 의무,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경제, 회계, 헌법개정 및 부칙 등에서 거의 동일하다. 내용면에서도 두 헌법은 3.1운동의 독립정신 계승, 민주공화국, 국민주권, 기본권 보장, 권력분립 등에서 거의 일치한다. 말하자면, 헌법의 근간과 골조는 사실 상 임정시기에 만들어진 셈이다. 극심한 반공이념이 지배하던 미군정 시기에 만들어졌을 현재의 제헌헌법에도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는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이유 역시 초기 임정의 좌우합작적 성격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니,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말은 헌법적으로는 거의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비판과 피할 수 없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임정의 요인들은 일제로부터 독립된 신국가 건설의 방향을 일제 치하에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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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 | "테러와의 전쟁 뒤에는 석유와 군산복합체가 있다" [9.11강좌 2강] | 느티나무 | 2011.9.23 | ||||||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와 프레시안은 9.11 10년을 맞아 9월 5일부터 매주 월요일 5회에 걸쳐 '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를 주제로 연속 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9일 열린 두번째 강의는 '전쟁의 정치경제학 : 대테러 전쟁의 논리와 실재'라는 주제로 김재명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님이 진행해 주셨습니다. 아래는 프레시안 김봉규 기자가 정리한 김재명 교수의 2강 강의소개 기사입니다. ☞강연 상세 안내 보기 "테러와의 전쟁 뒤에는 석유와 군산복학체가 있다" [9.11 기획 강좌] 2강 김재명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2007년에 만들어진 <워 메이드 이지(War Made Easy)>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말 그대로 전쟁이 쉽게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이 다큐는 미국이 2001년과 2003년 각각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할 당시 제작돼 미국인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당했던 베트남
전쟁의 아픈 기억을 되살려냈다.
'소프트 파워' 이론으로 유명한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인류가 경험인 세 가지 국제정치제체가 있다고 했다. 로마 시절의 세계제국제체, 중세시대 봉건체제, 무정부적
국제정치체제다.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와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둘 다 독재자이고 각 나라에서 국민적 저항이 일고 있지만, 알아사드는 리비아의 독재자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로부터 정권을 이어받아 나라를 공포로 몰아넣은 2대 독재자다. 어찌 보면 카다피보다 더 악랄하다고 할 수
있다. /김봉규 기자(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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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 | 교과서를 통해 본 한국근현대사 1강 | 느티나무 | 2011.9.20 | ||||||
지난 7일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에 서 진행된 '교과서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 강좌의 첫 번째 강의 '동아시아 질서 재편으로 본 3·1운동'을 요약 소개합니다. 이날 강의는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김정인 교수(한중일 공동교과서 <미래를 여는 역사> 집필위원)가 진행했습니다. 다음 강의는 '무단, 문화, 민족말살 : 식민 통치 변신의 이해'를 주제로 김정인 교수가 이어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동아시아 질서 재편으로 본 3·1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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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 집의 인문학 2강 한국 근현대 주거의 존재방식 | 느티나무 | 2011.9.19 | ||||||
8월 30일부터 가을학기 강좌 [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산업혁명 없이 발달한 도시주택 변천사
▲ 성저십리 안에서는 묘를 쓸 수 없고, 나무도 벨 수 없었다. 사진출처=www.rekor.or.kr 식민지 아래에서도 도시화는 이뤄졌다. 하층민은 도성 바깥 구릉 위에 몰려 살았다. 1920년대에 굉장히 많아졌다. 초등학교 다닐 때 공동묘지 전설이 있지 않았나?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다. 당시 교육 같은 최소한의 행정서비스를 위해 시역을 확대했다. 초등학교 부지가 공동묘지였다. 1920~30년대에 이장이 많았다. 서울 동북쪽은 한인 주거지였다. 신설동, 제기동, 용두동 등으로 평지였고 가난한 곳이었다. 서울 남서쪽은 일본인 주거지였다. 후암동, 흑석동, 상도동, 대방동, 영등포 등으로 산지였다. 돈이 되는 루트였다. 일본은 상인이나 농사짓는 사람이 평지에 산다. 한남동은 1930년대 일본인 최고의 주거지였다. 민족에 따라 주거지가 명확하게 나뉘었다.
▲ 1930년 1월 12일 조선일보 만평 ‘여성선전시대가 오면(2)’. 왼쪽에서 두 번째 다리를 보면, “나는 문화주택만 지어주는 이면 일흔 살도 괜찮아요.”라고 쓰여 있다. 당시 문화주택을 향한 열망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사진출처=todayhumor.co.kr
▲ 2010년 4월 25일 인터넷 한겨레신문을 보면 문래동에 남은 영단주택 500여 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재개발이 진행되지 않았다면 지금도 볼 수 있을 듯. 사진은 영단주택 골목. 사진출처=http://blog.daum.net/hojinbo/36
▲ 미군이 임시 주둔하는 주거형태였던 퀀셋(quonset). 사진출처=runintosky.tistory.com/
▲ 국내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 마포아파트. 사진출처=podopodo.net/article/critics/detail.asp?seq=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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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 | "테러와의 전쟁, '美 헤게모니' 지키기의 마지막 안간힘" [9.11 기획 강좌 1강] | 느티나무 | 2011.9.15 | ||||||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와 프레시안은 9.11 10년을 맞아 9월 5일부터 매주 월요일 5회에 걸쳐 '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를 주제로 연속 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프레시안 황준호 기자가 정리한 성공회대 김민웅 교수의 1강 강의입니다. ☞강연 상세 안내 보기 "테러와의 전쟁 '美 헤게모니' 지키기의 마지막 안간힘" [9.11 기획 강좌] 1강 김민웅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 '9.11의 역사적 기원과 테러와의 전쟁 10년'이란 주제로 있었던 김민웅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의 첫 번째 강연을 요약해 소개한다. 두 번째 강좌는 김재명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가 '전쟁의 정치경제학 : 대테러전쟁의 논리와 실재'를 주제로 오는 19일 진행할 예정이다. 편집자
9.11의 역사적
기원과 테러와의 전쟁 10년
한반도, 미국의 양대 지배 전략이
중첩된 곳 /황준호 기자(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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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 집의 인문학 1강, ‘지금 다시 생각해보는 우리의 집’ 후기 | 느티나무 | 2011.9.6 | ||||||
8월 30일부터 가을학기 강좌 [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재산증식 아닌 성찰하는 공간으로 바라볼까? 2011 참여연대 느티나무 아카데미 가을강좌 ‘집의 인문학’은 작년부터 기획되었다고 한다. 의, 식, 주. 입고, 먹고, 거처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들이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에서 주, 즉 집이란 ‘자산증식’의 수단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여전하게 강하다. “주거문화, 부동산 문화를 변화시키는 씨앗이 되면 좋겠다”는 느티나무의 바람에 100% 동의하며 집의 인문학을 소개한다. 1강은 건축가이면서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건축과 민현식 교수가 맡아주셨다. 공간, 생각을 부추기다 거주하는 곳은 모두 집이다. 생활하는 곳, 일하는 곳, 영화를 보는 곳 등 길게 혹은 잠시 거주하는 곳은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집(공간)은 단순하게 머무는 곳이 아니라 생각하는 공간이다. 생각하도록 부추기는 공간일 수 있다. 건축가 꼬르뷔제는 “건축을 통해 사회를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꼬르뷔제는 20세기를 대표하는 건축인 프랑스 롱샹의 롱샹교회, 리용의 라 뚜레뜨 수도원을 건축한 사람이다. 꼬르뷔제는 프랑스 파리 세느강에 있는 구세군 건물도 건축했다. 구세군 건물은 노숙자를 위한 숙소이다. 그는 공간을 거치는 동안 (노숙자들이) “나도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구세군 건물을 설계했다. 사유하게 만드는 건축의 대표는 수도원이다. 꼬르뷔제는 수도원 건축을 의뢰 받았을 때 신부로부터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 있는 르 또로네 수도원을 가보라고 권유받았다. 중세 수도원인 르 또로네를 방문한 꼬르뷔제는 이 공간에 감동을 받아 ‘진실의 건축’이란 책을 쓰기도 했다. 공간에 사유(思惟)하게 하는 힘이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곳들이다.
▲ 프로방스 지역에 있는 라 또로네 수도원 내부 모습의 일부. 문을 열면 자연과 관계를 맺고 우리나라 집은 지형과 행복한 관계가 되도록 했다. 산, 들, 강이라는 공간 안에 집, 절, 서원같은 사람이 만든 공간을 넣었다. 우리나라 방은 ‘풍경’이라는 짝이 있었다. 방문이 닫혀 있으면 모르지만 방문을 여는 순간 방과 공간이 관계를 맺는다. 명재고택(윤증고택) 누마루에서 창을 열고 바라보는 모습은 가장 드라마틱한 풍경을 보여준다. 절에 갔을 때 “부처님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둘러보면 좋다. 우리나라 건축에서 루, 정 등은 위대한 자연을 보며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공간이었다. 경상북도 안동 천등산에 있는 봉정사 극락전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다. 봉정사 극락전은 건축 자체는 훌륭하지 않다. 눈여겨 볼 곳은 암자이다. 암자가 우리를 사유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하회마을의 병산사원의 만대루 역시 그런공간이다. 병산서원은 아침에 낙동강을 따라 걸어가면 좋다. ▲ 8월의 명재고택 사진출처 = www.myeongjae.com 이 외에도 멕시코 멕시코시티 둔덕에 지어진 건축가 루이스 바라간의 집, 루이스 칸이 건축한 미국 샌디에고의 소크(salk)연구소도 사유하게 하는 힘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루이스 바라간의 집은 오로지 하늘만 바라보게 지었고 소크 연구소에서는 태평양만을 바라볼 수 있다. 남진이 원망스러운 이유 남진의 노래가사 중에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라는 부분이 있다. 그림 같은 집은 밖에서 보는 집이다. 집에서 밖을 보는 그림이 중요하다. 그래서 가끔 남진이 원망스럽다. 요즘 집은 자본의 논리에 놀아난다. 돈, 재산 축재만 있고 사유가 없는 집이다. 축재보다는 나를 성찰하게 만드는 집에 관심이 있을수록 사회도 나아질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는 ‘집’ 부동산에서 자유로우면 여러 곳에서 살 수 있다. 우리는 집을 뿌리를 내리고 사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을 극복하면 집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 커진다. 참고 참고 ② : 민현식 교수의 건축한 건물로는 신도리코 기숙사, 대전대 기숙사, 로열앤컴퍼니가 있다. 로열앤컴퍼니 옥상은 잘만 이야기하면 방문도 가능하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