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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명 | 강좌후기 | 글쓴이 | 날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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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 꼼지락 – 소리를 내면 세상이 바뀐다 |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꼼지락] 6강, 소심한 사람들의 꼼지락 발표 페스티벌 | 우진아빠 | 2012.12.6 | ||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 꼼지락 : 소리를 내면 세상이 바뀐다' 6강 (12/03, 월) 강의소개 >> 클릭 드디어 마지막 시간, 2012년 12월 3일 오후 7시 언제나 그랬듯이 첫 번째 놀이는 <길고양이>놀이다. 두 번째 놀이는 <조각가>놀이다. 네 번째 놀이는 4명씩짝을 지어, 이래은 선생님이 정해준 장면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또 지난 6주 간의 수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도 표현하고 맞추는 시간도 가졌다. 그렇게 서로 어울려 몸을 풀고 웃고 난 다음, 대망의 발표시간이 왔다. 첫 번째 발표자는
나는 아주 소심해요 유튜브동영상 보러가기 >> 클릭 (현재 미공개) 두 번째 발표자는 세 번째 발표자는 네 번째 발표자는 다섯번째 발표자는 마지막 발표자는 모든 발표가 끝난 후 마지막으로 - 세상을 바꾸지 전에 저부터 바꿀 용기를 주셨고, 제 주변과 연애 할 수 있게 할 시간을 가진 것 같아요! 6주간 함께해준 이래은 선생님을 비롯하여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꼼지락" 다음 학기에 더 업그레이드 된 기획으로 찾아뵙겠습니다! 홍보영상 보러가기 >> http://youtu.be/CSEXEQmDefQ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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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 꼼지락 – 소리를 내면 세상이 바뀐다 |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꼼지락] 5강, 팀별로 기획하기, 리허설 | 우진아빠 | 2012.11.29 | ||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 꼼지락 : 소리를 내면 세상이 바뀐다' 5강 (11/26, 월)
5번째 강의는 평소보다 다소 적은 인원으로 시작했다.
첫 출발은 손가락 인형을 가지고 동영상을 만드것 부터 시작했다.
주제는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꼼지락> 홍보영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두 조로 나눠 한 조는 노래를 선정해 개사했고, 나머지 한 조는 손 동작을 만들었다.
지난 시간에 가져갔던 손가락 인형을 깜박 집에 놓고온 참가자도 있었지만,
마침 간식으로 준비된 빵을 이용하여, 감쪽같이 인형을 만들어냈다.
30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가, 정말 뚝딱 2분짜리 영상과 노래 안무가 만들어졌다.
결과물은 아래 유튜브를 확인해보시라~
보러가기 >> http://youtu.be/CSEXEQmDefQ
이제 지난 4주 간의 배움을 토대로 본인이 소심하게 꼼지락거리고 싶은 주제를 선정하는 시간을 가졌다.
각자 포스트 잇에 자신이 생각하는 주제를 적었다.
<그네와 두환은 하나>, <남영동1985와 26년 관객 3백만돌파>
<눈을 마주치면>
<차를 마셔요, 우리 따뜻해 져요^^>
<12월 20일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싶어요>
<주 20시간 노동제가 되어야 해요>
<이 세상 수많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연말을 따뜻하게 집에서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그렇듯이>
<모두가 내가, 모두의 자신을 찾기를 나의 참나가 되기를>
![]() ![]() 그리고 각자 이러한 주제를 생각하게 된 이유와 부연설명을 나눈 뒤 각자의 실천방법을 정했다.
여럿이 함께 생각하고 의견을 나누니 막연하기만 했던 주제도 금방 <행동계획>이 정해졌다.
때로는 소심한 사람들을 위해 함께 자리에 나서주기로 약속도 했다.
그런한 행동들을 영상과 사진으로 담아 다음 주 마지막 시간에 발표할 예정이다.
하기에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이번 후기에서는 생략~
궁금하신 분은 다음시간에 꼭 오세요!
소심한 사람들의 6주간의 대장정, 드디어 그 끝에 다가서다! 두둥! coming soon
글 : 아카데미느티나무 천웅소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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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인의 여성 예술가, 6가지 정체성 | [6인의 여성 예술가, 6가지 정체성] 종강 후기(멋진 시 한편^^) | 느티나무 | 2012.11.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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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 문화 |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문화] 4강, <활과 리라> | 놀이정신 | 2012.11.23 | ||
[인문학교]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문화와 역사, 3강(11/14)
옥타비오 파스 저/김홍근,김은중 공역 | 솔
옥타비오 파스의 『활과 리라』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 문화'라는 강의를 신청하고 커리큘럼에 나와 있는 도서들을 한꺼번에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했다. 그래서『활과 리라』가 소설이나 혹은 시집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감히 해보지도 않았다. 강의순서대로 책들을 읽고 책장 어느 구석엔가 놓여있던 『활과 리라』를 찾아 첫 장을 펼쳤을 때, 그 때의 당혹감이란...『활과 리라』는, '시론집'이었다. 시도 아니고 시론집이라, 과연 내가 읽어낼 수 있을까?
물론, 읽어낼 수 없었다. 두 장 정도를 읽고 일말의 고민도 없이 책을 덮었다. 이건 내가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구입한 모든 책을 읽어야하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읽으면서 괴롭기만 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내 독서시간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라고 변명하며... 근데 이렇게 책을 읽지 않고서도 강의를 듣는 데 무리가 없을까, 쪼게 걱정하며 느티나무홀에 들어섰다.
옥타비오 파스의 시는 어려워! 느티나무홀에 들어서자마자 교안을 챙겨 읽었다. 책을 안 읽었으니 강의 시작 전 교안이라도 대충 훑어봐야했다. 그러다 빵 터졌다. 역시 구광렬 선생님은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솔직하시다.
필자는 사실 파스의 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지나치게 지적이고 관념적이어서 뼈다귀 부딪히는 소리를 내는 듯해서다 …… 그의 시를 읽노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의 시세계를 옳게 이해하지 못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시가 그만큼 철학적이고 이성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강의도 '왜 옥타비오 파스의 시는 어려운가?'라는 화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파스의 시세계에 영향을 준 것은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당시(1940년대) 유행하던 초현실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동양사상으로 주로 중국과 인도, 일본의 시나 그림 등이다.
강의는 먼저 초현실주의를 낳기까지 세계를 관통했던 사상사의 흐름을 훑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니카라과의 시인 루벤 다리오( 1867-1916)가 파리의 에펠탑을 보고 '예술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시작되었다는 모더니즘. 하지만 당시는 '모던'하다고 할 만한 것들의 등장이 너무 뜸하게 이루어졌고 이러다보니 모던한 것들을 찾기 어려웠던 이들은 신비한 것, 지금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져 고답주의를 낳았다는 이야기들... 그리고 이어지는 모더니즘 이후의 흐름. 이러한 모더니즘이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파괴되자 그 자리에 가장 먼저 허무주의가 등장했고 그 뒤를 이어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미래파, 울트라이즘, 아방가르드 등등이 나타났다....
대강의 흐름만을 알면 된다고 자위하며 강의를 흐름을 숨 가쁘게 쫓는다. 어쨌든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초현실주의의 직격탄을 맞고 자란 파스는 어릴 적부터 그와 관련된 서적들을 많이 접했고 그래서 그런 詩作들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그에게 또 다른 전기가 된 것은 동양에서의 외교관 생활이었다. 일본과 인도에서 머문 기간 동안 그는 탄트라 불교와 일본의 하이쿠(俳句)에 매료되었다.
결국 파스의 시가 어려운 이유는 가뜩이나 어렵게 느껴지는 초현실주의적인 글쓰기(자동기술법)에 동양의 선사상까지 접목시켰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그는 '언어의 모호성'에 대해 비트겐슈타인만큼이나 고뇌했으니, 그는 자신의 시에서 언어를 초월하는 언어를 찾고자 노력했다. 언어에 예속되어 있는,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모두 모호해질 수밖에 없는 철학의 개념들. 그 안에서 파스는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실체가 있음과 말로써만 표현될 수 있는 실재가 있음을 동시에 인정한다.
잃어버린 말을 찾아야 한다. 안으로든 밖으로든 또 그것을 꿈꿔야 한다. 밤의 문신을 읽어내고 정오의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가면 또한 벗겨내야 한다. 햇볕으로 목욕하고 밤의 과실을 따먹으며 별과 강이 쓰는 글자를 해독해야 한다.
-옥타비오 파스의 시 '깨어진 항아리' 中
교안에는 파스의 시 세 편이 발췌되어 실려 있었다. 그 시들을 강의 시간에 함께 낭독해 가며 읽었다. 시낭독 후, 수강생들의 반응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요, 였다. 나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의미의 해체와 의사소통을 거세한 기호들의 나열이라.... 음, 이렇게 되면 그의 시를 읽어보겠다는 생각은 점차 멀어져 가는군...
불교의 선사상 그리고 시간 개념 파스에게 가장 감명적이었던 동양사상은 불교였다. 특히 서양의 직선적인 시간 개념과는 사뭇 다른 동양의 순환적인 시간 개념, 과거와 미래, 현재가 혼재하는 시간관, 찰라와 선불교의 '여기 그리고 지금'의 개념. 그런데 여기서, 구광렬 선생님이 파스에게 강한 태클을 거신다. 자신의 박사 논문으로 옥타비오 파스의 시들을 연구했던 지라 그의 시세계에 나타난 동양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불교관련 책들을 엄청 읽으셨다면서, 과연 그가 동양사상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시를 쓴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셨다. 그러면서 다시 동양의 불교 역사에 대한 기나긴 설명에 들어가신다.
불교는 크게 교종과 선종으로 나뉘고 교종은 텍스트 중심의 공부와 그를 통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반면 선종은 명상과 선 중심의 깨달음을 추구한다. 선종의 1祖는 달마이고 그 뒤를 이어 2조, 3조 쭉 내려오다가 6조인 혜능에까지 이어진 이야기, 그리고 그 뒤를 이는 임제종과 그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의 임제종 이야기까지. 일본인에 의해 서구에 널리 알려진 '젠' 사상은 결국 우리나라의 임제종 영향을 받은 것인데, 파스는 그런 것들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도 없이 동양사상에 대해 떠들고 글에 흉내를 내고 있는 것 같다는.... 강력한 태클!!! 실제로 고광렬 선생님은 파스와 인터뷰를 할 기회가 왔을 때 그것에 대해 물었다 한다.
인터뷰 말미에 한국의 정토불교나 화엄사상 그리고 이조의 성리학 등을 전혀 공부하지 않았던 그에게 필자가 뼈있는 질문을 던졌다. "선생께서는 중국, 일본, 인도 등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하시지만 좀처럼 한국에 관해선 말씀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한국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 무엇보다 한국문화가 서양에 소개되어있질 않아요. 제가 의도적으로 한국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한국에 관해 알고 싶어도 번역된 책들이 없었습니다."
뭐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생각하는 찰나, 그 밑에 그가 덧붙인 부분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故 김남주 시인은 파블로 네루다의 작품을 읽기 위해 옥중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근 5개 국어를 하던 파스에게 김남주 선생의 열정의 반 정도만 있었더라면, 아마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을 지도 모른다.
에휴, 작가가 되기란 참 어렵네요... 쩝~
파스여, 안녕~ 파스의 시라면 꼭 알아두어야 한다며 구광렬 샘이 'Blanco(흰색)'을 추천해 주셨다. 음양오행 사상을 소재로 삼아 쓴 시란다. 왼쪽에는 음에 해당하는 단어들을 나열하고 오른쪽에는 양에 해당하는 단어들을 쭉 나열한 시. 그러다보니 시가 엄청 길어져 보통의 책과는 다른 형태를 지닐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나온 시집의 모양은 아코디언처럼 주름이 잡혀 있는 모양새란다. 여러모로 독특하구나, 파스는. 그러시면서 그 시를 읽어보면 파스가 잘못 적어놓은 단어들이 무척 많다며 동양사상에 대한 그의 이해의 폭과 질에 대해 또 다시 성토의 말씀을... ㅋㅋㅋ
이제 다음 주면 마지막 강의다. 함께 공부하기로 예고돼 있던 루이스 세풀베다의 『파타고니아 특급열차』가 절판이어서 강의는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중남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전반적이고도 총체적인 강의를 해 주실 계획이라고... 수강생들의 반응이 뜨겁다. 나처럼 모두들 이번 강의를 들으며 중남미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리라. 다음 주 강의가 무척 기대된다. 그러나 혹 강의에 못 오시거나 강의를 듣지 못한 다른 분들을 위하여 중남미 문화와 역사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책을 추천해달라고, 강좌지기를 맡은 내가 질문했다(기특해^^).
『메스티조의 나라들』(단국대 출판부) 『중남미사』(김창환, 송산출판사)
근데 어째 이 책들도 쉽게 구하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흑!
글 : 자원활동가 박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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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 꼼지락 – 소리를 내면 세상이 바뀐다 |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꼼지락] 4강, 치열할수록 즐겁게! 유쾌한 상상 101가지 | 우진아빠 | 2012.11.22 | ||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 꼼지락 : 소리를 내면 세상이 바뀐다' 4강 (11/19, 월) 강의소개 >> 클릭 4번째 강의는 '서로의 얼굴을 그려보자'는
그림을 한 번 씩 주고받고 난 후에는 간단한 놀이를 했다. 때로는 '쇼음악중심'의 방청객이 되었다가 '아침마당'방청객이 되었다가 '코메디프로' 방청객이 되었다. Q1. '무슨 일이 있어나요?' '감정노동을 했어요'. '남의 이름을 많이 불렀어요' '반응하기가 힘들어요' 등등 진행자는
![]() ![]() 2.1 리액션 이번 강의의 초대손님은 이번이 두 번 째 방문인 김민식 피디는 김민식 피디는 연출자로서 중요하게 보는 것은 바로 배우들의 리액션인데, 주변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고 오로지 본인의 연기만 몰입하는 사람들이 속칭 '발연기'를 한다는 평을 듣는다고 했다. 우리가 자주쓰는 SNS의 주요 기능에도 바로 이러한 리액션기능이 있는데, 한 참 리액션의 중요성을 설명하 신 후, 마지막으로 김진숙의 한진중공업 크레인 농성이 바로 이러한 반응, 리액션으로 성공적으로 끝나다는 말로 마무리! 2.2 블로그, 유튜브 두 번째 이야기는 블로그, 유튜브이야기다. 이어 <MBC프리덤>, <MBC프리덤-서울역편> 영상을 보여주며, 제작 배경, 뒷 얘기 등을 정말 재밌는 입담으로 설명해주셨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강의가 끝난 후 커밍순.... 글 : 아카데미느티나무 천웅소 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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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 문화 |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문화] 3강, 백 년 동안의 고독 | 느티나무 | 2012.11.21 | ||
[인문학교]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문화와 역사, 3강(11/1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 1. 수강생들이 들고 온 책들 제목이 저마다 각각이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이 있는가 하면 백 년의 고독도 있다. 어느 것이든 약간은 어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구광렬 선생님의 말씀인즉, 제목이 잘못 번역되었다고... 문장 구성 상 제대로 된 제목은 『고독의 백 년』이란다. 고독과 백년 중 백년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또한 여기서 백년의 의미는 a hundred가 아니라 long time이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게 된 계기도 이런 설명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책께나 읽는다는 유명인들의 추천 목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백 년 동안의 고독』... 대체 어떤 소설이길래, 가 이유였다. 그리고 읽고 나서,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도 강한 역사적 의미 내지 억압된 역사의 상징 같은 것을 떠올리진 않았다. 그저 팍팍한 인생살이 대한 담담한 시선과 길고 험한 역사의 흐름 앞에 휘둘리는 인간 군상들에 대한 초월적인 묘사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여전히 내게 잔잔하고 따뜻한 느낌으로만 각인되어 있을 뿐이다.
2. 구광렬 선생님의 강의는 여전히 매력적이고 재밌다. 추운 날씨 탓인지 저번처럼 신발을 벗진 않았지만 전보다 열정의 강도가 떨어지거나 그러지도 않았다. 그의 이야기를 2시간 남짓 듣고 있다 보면 그의 꼬드김에 넘어가 언젠가 우리와 인종학적으로 같은 핏줄(몽고인)인 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의 구원을 위해 그와 함께 행동에 나서게 될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3. 강의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에 『고독의 백 년』에서 대체 ‘고독’은 뭘 의미하는지 물었다.
글 : 박현아 자원활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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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 문화 |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문화] 2강, 네루다 자서전 | 느티나무 | 2012.11.21 | ||
[인문학교]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문화와 역사, 2강(11/07)
두 번째 강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 중 ‘스무 번째 사랑의 시’>라는 시로 강의를 시작했다. 사랑했던 연인을 그리며 쓴 감성적인 시였다. 네루다가 스무 살 때 냈다는 이 시는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다. 체가 전장에서도 이 시를 자주 읽었다는데 그만큼 네루다의 시를 사랑했다. 네루다는 체게바라가 가장 존경했던 사람이며 세계적인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인이지만 중남미의 정치, 경제가 연관된 사람이다.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정치가이기도 한 그는 혁명투사에게 영향을 많이 주는 시인이었다. 칠레의 민중시인인 네루다의 삶을 구광렬 강사님의 유쾌한 강의로 들었다. ‘네루다’ (1904~1973)는 원래 필명이었다고 한다. 가부장적이고 마초적인 아버지가 시인이 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탄압을 피하고자 처음엔 필명을 썼다. 필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찾아보니 체코의 작가 얀 네루다의 성을 빌리고, 파울로에서 영감을 얻은 듯 한 파블로라는 이름을 만들었다고 한다. 네루다는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라는 선생을 만나서 그의 문학적 능력을 인정받고 발전시켰다. 놀라웠던 점은 네루다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두 사람 모두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거였다. 네루다는 여성편력이 심했다고 한다. 부인도 여러 명이라고 한다. 작가의 개인사를 접하니, 세계적인 시인 네루다도 평범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사님이 말씀하시길 네루다에 대해 너무 많이 포장 돼있는데 그 부분을 지적하고싶다(?)라고 하신 게 기억에 남는다.
△ 네루다의 첫 번째 결혼식 사진
칠레에 민중 시인이자 세계적인 시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일포스티노>라는 영화로 유명한 네루다의 삶을 강사님의 유쾌한 강의로 들여다 본 기분이다. 체가 너무나도 존경했던 네루다. 민중 시인이지만 ‘사랑’을 화두로 한 시로 더 유명하다고 한다. 물론 나중에는 저항의식이 가득한 민중시도 집필했다. 네루다의 시를 몇 편 찾아본 결과 <시>라는 작품이 기억에 남는다. 체게바라로 시작해서 네루다까지 온 강의를 들으면서 중남미 역사와 문화를 훑는 기분이다. 앞으로의 강의가 기대된다. -------------------------------------------------------------------- 시(時) - 파블로 네루다
그리고 나, 티끌만 한 존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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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 꼼지락 – 소리를 내면 세상이 바뀐다 |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꼼지락] 3강, 소심하고 유쾌한 체험담 나누기 | 우진아빠 | 2012.11.21 | ||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 꼼지락 : 소리를 내면 세상이 바뀐다' 3강 (11/12, 월)
세 번째 강의는 1층 카페통인에서 진행됐다. 1층 카페에 책상은 다 치워져 있었고, 그동안 참여자들을 반긴 돗자리 대신에 큰 원으로 놓여진 각양각색의 의자들이 참여자들을 맞이했다. 큰 원 가운데에는 사무실에서 나온 각종 재활용품들과 색연필, 크레파스등 사무용품들이 쌓여 있었다. 1. 진행자는 참여자들에게 가운데 있는 잡동사니를 3개만 잡아 서로 붙이고 그려 아무거나 만들어 보라고 했다. 이 수업에는 정말 상상력이 특출난 사람들만 모였나보다. 모두들 5분 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무언가를 뚝딱 만들었다. 사슴벌레 모자, 재활용 필통, 앞머리, 과대포장 등 그리고 다시, 앞에 놓인 잡동사니로 '나무'를 만들어보라고 했다. 이 역시.. ![]() ![]() ![]() 2. 카페 바닥에 포스터 6장을 이어 붙인 큰 종이를 깔았다. 그리고 그 위에 나무를 그리고 다시 포스터를 12등분으로 자른 후 나눠가지고, 각자 가지고 있는 조각을 그림 모양대로 자른다음 그 모양을 예쁘게 꾸민 후 자기가 가장 적극적이었을 때의 모습을 적었다. 마지막으로 각자가 갖고 있는 그림조각들을 벽에 붙여, 원래의 모습이었던 나무모습을 완성했다. '혼자 밥을 먹을때' '이 강의를 들으러 올때, 운동(줄넘기) 할때' '컴퓨터 오락을 2박3일 내내 한 적이 있다' '수업시간에 딴짓을 할때' '6시30분에 출근할때' ![]() ![]() 한 참여자는 '연인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할때' 가 가장 적극적인 행동이었다고 말하면서 그런 적극적인 행동은 적극적인 후회를 불러왔다고 말해 참여자에게 큰 웃음을 줬다. 진행자인 이래은 선생님은 참여자 한 명 한명의 적극적 행동을 소개해주며 소심한 우리들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행동할 때가 있다면서, 이때 함께 사회적 발언을 하면 우리도 할 수 있다고 했다. 혹시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도 있지만, 아까 아무런 상관없는 것들을 이용해 각자가 새로운 작품을 창조했듯이 이러한 행동과 발언이 서로 어울리지 않을꺼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설상 서로 안 맞더라도, 뭐가 어떤가? 내가 할 수 있는 것, 잘 하는 것으로 그런 행동을 시작하면 어떨까? ![]() ![]() ![]() 3. 이번 강의의 초대손님은 문화연대 신유아 활동가였다. '삶을 위해 싸우는 농성과 연대의 예술활동은 하나다' 신유아님은 포크코 비정규직 농성장, 콜트콜텍, 용산참사 농성장 등에서 싸우는 노동자, 예술가들과 함께 공공미술을 설치했으며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를 기획하고 함께 했었다. 그런 신유아님의 활동경험을 통해 문화행동에 대해 보고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시민들에게 관심도 받고 서로 교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는 신유아님의 행동들이 운동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마중물이 되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 ![]() 4. 항상 강의의 마지막은 사회자의 질문에 답하는 시간으로 마무리된다. '무엇을 보았나요?' '무엇이 달라졌나요?' 그리고 이 번 강의는 특별히 과제를 내주셨다. 각자 오늘 발표한 적극적 행동을 하면서 유쾌하게 꼼지락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찍어오는 것이다. 글 : 아카데미느티나무 천웅소 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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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 | [진보, 다른이름으로 저장하기] 5강, 나의 삶은 진보적인가? | 웃으며,함께,끝까지 | 2012.11.12 | ||
아카데미느티나무 20102 가을강좌 [민주주의학교] 진보, 다른이름으로 저장하기 5강(10/22) 후기 ① 1강 <21세기 진보의 재구성> 후기 다시보기 >> 클릭 ② 2강 <21세기 진보의 재구성> 후기 다시보기 >> 클릭 ③ 3강 <21세기 진보의 재구성> 후기 다시보기 >> 클릭 ③ 4강 <21세기 진보의 재구성> 후기 다시보기 >> 클릭
나의 삶은 진보적인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가을, 다섯 번에 걸친 만남을 통해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진보’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사회에 떠도는 수많은 진보 담론들 중에 어떤 것이 진보이고 어떤 것이 진보의 탈을 쓴 보수인지를! 우리는 만남이 이어질수록 ‘멘붕’에 빠져들었고 드디어 마지막 수업, 우리는 “나의 삶은 진보적인가?” 라는 질문 앞에 섰습니다. 마지막 강의답게 세 분의 선생님이 오셨는데요, 각자 젊음, 돈, 예술이 어떻게 진보와 만났는지 재밌게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과연 어떤 진보와 맞닿아 있을까요? ‘네 멋대로 해라’ ‘뜨겁게 안녕’ ‘ 불량소녀 백서’ 등 김현진 선생님은 여러 저작을 통해 젊음과 진보의 만남에 대해서 이야기해 왔습니다. “진보적 매체에 지면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나를 진보적 인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매체와 나의 글이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을 뿐”이라는 김 선생님은 진보가 무엇인지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다만,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그때그때 비위에 맞는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요. 김현진 선생님이 처음으로 삐딱(?)하게 나가게 된 계기는 대안학교 1세대인 자신이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교장선생님과 대판 싸운 일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계속 어떤 것이 내 비위를 상하게 하는지, 그것을 면밀히 검토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고요. 한예종 사태 때 취재를 통해 처음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고, 그러한 고민은 홍대청소노동자 문제, 고공농성장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김현진 선생님은 RT진보, 입진보를 경계하자고 합니다. 내 자식이 식당에서 서빙 일을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내 자식만큼은 서울대에 다니는 진보적인 청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말과 생각이 따로 노는 입진보가 될 뿐이라고요. 진보란 주변 사람들에게 비난을 듣더라도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할 수 있는 각오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에듀머니, 대부업체의 냄새가 강하게 나는 이 이름의 사회적 기업은 말 그대로 ‘돈을 가르칩니다.’ 돈, 엄밀히 얘기하면 ‘돈을 쓰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죠.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돈을 주체적으로 쓰는 법’을 가르쳐준다고 합니다. 이 회사의 대표인 제윤경 선생님은 신용카드를 버리라고 말합니다. 광고를 가급적 멀리하고, 보게 되면 욕을 하라고도 합니다. 신용카드나 광고는 사람들이 필요와 선호를 생각하기 이전에 우선 충동적으로 그 물건을 구매하게 함으로써 결국 제돈 쓰고 유쾌하지도 않은 소비를 하게 한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돈을 쓰지 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자신을 유쾌하게 하는 소비를 오히려 최우선순위에 두라고 합니다. 저축을 하되 자산을 형성하지 않는 저축을 하라고도 하십니다. 제 선생님이 만난 한 택시기사 분은 자신도 사업이 망해서 노숙을 하다 택시운전을 하게 되었는데, 승객들이 동전까지 탈탈 털어 택시를 타는 모습을 보고 짠한 마음이 들어서 이와 관련된 정책을 제안하시더랍니다. 진보란 함께 공감하고 더불어 살며 분노하고 그래서 뭔가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 실천을 위해서는 쫄지 말고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겠죠. 헤어스타일과 복장이 예사롭지 않은 김강 선생님은 강의 내내 혁명가에 어울릴 법한 엄청난 스케일의 사진들을 보여주시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아님 말고!”를 외칩니다. 문래동 예술인 마을에서 오신 김강 선생님은 진보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얘기하면서 다만 “문래동에 처음 들어갈 때 우리 예술인들은 가난했고, 저기 빈 공간이 있으니 한번 들어가보자. 안되면 말고!”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문래동의 빈 건물에 들어가기 위해, 그러니까 남의 건물에 불법적으로 들어가기 위해 점거연습까지 하는 철저한 이들은, 점잖은 윗분들이 보시기에는 정말 위험한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나름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우리 수강생들조차도 “저래도 되나~” 싶었을 겁니다. 온 몸을 이용한 의사 표현은 물론이고, 주거권이나 공간의 확보 등을 위해 대사관 앞에서 침낭을 칭칭 감고 자면서 1인 시위를 한다거나, 캠핑카를 주거공간으로 개조해서 유쾌한 주장을 펼칩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만의 진보의 틀 안에 갇혀 유쾌한 저항의 상상력을 자꾸만 상식 또는 법체계의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우선 저질러 놓고 보는 거죠, 안되면 말고! 그게 원래 늘 ‘합리’를 얘기하는 ‘보수’와는 다른, ‘진보’의 무기 아니었나요? 진보에 대한 다섯 번의 강의를 듣고나니, 언젠가 혜민스님의 페이스북을 통해 들은 이외수 선생님의 ‘존버 정신’에 대한 얘기가 생각납니다. 이외수 선생님이 혜민 스님을 만나 “우리에겐 존버 정신이 필요합니다.”라고 했답니다. 혜민 스님은 “존버 정신이 뭐죠?” 라고 물었고 이외수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스님, 존버 정신은 ‘존나게 버티는 정신’입니다.”라고요. 진보들의 ‘멘붕 탈출’을 위한 우리의 여행은 끝이 납니다. 누군가는 그 답을 찾고 누군가는 여전히 멘붕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적어도 하나의 깨달음은 얻은 것 같습니다. 진보의 길은 한계도 없고 끝도 없다. 다만 늘 고민하고, 버티며, 계속해서 걸어하는 것 뿐이라고요.
후기 글 : 자원활동가 김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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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Ⅱ] 9강 답사 - 여운형에서 박정희까지 비운의 정치가들 | 느티나무 | 2012.1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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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II] 10강, 5.16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 우연필연 | 2012.11.8 | ||
들어가며 안녕하세요. <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 II> 도 어느덧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한국전쟁(남북전쟁) 이후 이승만 정권과 장면, 그리고 박정희 정권을 아우르는 역사를 다루었습니다. 이날 26분 정도가 참석하셨습니다^^ 이날 강의장에 한 시간 일찍(6시) 도착했는데 영상물을 상영하고 있었습니다. 영상물은 이 강의에 참여하시는 한 참여자께서 제공해주셨는데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이승만의 행적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제 학창시절 근대사를 배우며 막연하게 생겼던 의문들이 이 영상물을 통해 점점 해소되어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단절되어 있던 사건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발견하거나 또는 그동안 잃어버렸던 퍼즐 조각들을 찾아 기억의 빈자리에 끼워넣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중반에 윤봉길 의사가 남기신 글귀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개인의 자유는 민중의 자유로부터 얻어진다.” 로 얼추 기억하는데, 보이는 글귀 자체에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무언가가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이날도 이 선생님께서는 조금 늦으셨습니다..(30분^^;;;).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강의에 대한 기대도 더욱 커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선생님의 강의는 역시 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전후 한국의 역사를 다루었습니다.
국군포로 문제 한국전쟁은 근본적으로 같은 민족 간의 전쟁이다 보니 포로 교환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쟁 초기 북한은 포로들에게 사상 교육을 실시하고 전향 여부를 물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풀려나지 못한 포로들을 우리 남쪽에서 추정하기로는 약 5만명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중 254명 정도가 파악되고 있는데 국군포로문제는 오늘날까지 복잡한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그동안 우리 쪽에서 북으로 보냈던 북파공작원의 수도 정확히 추산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들을 대략 7천명 정도로 추정하는데 이중 미귀환자가 얼마정도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아마 정부는 알 수 도 있겠죠..) 이들의 송환은 정치적으로 더욱 민감한 문제일 겁니다.
2005년 8월 열린 제11차 이산가족 상봉에서 정현한 할아버지(왼쪽)가 국군포로로 생이별한 북측의 형 정진현 할아버지를 만나 얼싸안고 있다. 북한은 국군포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날 만남은 ‘특수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졌다. 출처 : 세계일보
어느 국군포로의 수기에 따르면, 북한군 포로 수용소에서는 정신교육을 매일 실시했다고 합니다. 전쟁 직전에 월북했던 사람들이 선동하여 인민군에 입대를 권유했답니다. 이때 국군포로의 실상은 하루 식량은 안삶은 옥수수 배급 두 차례가 전부였기에 춥고 배고픈 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전향, 북한군에 입대했다고 합니다. 특이한 점은 당시 이렇게 북한군에 재입대 했다가 다시 국군에 포로로 잡힌 경우, 전향을 다시 하면 원래 소속인 국군으로 편입시켰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포로수용소에서 자대 배치를 받은 뒤, 전후 1980년대까지 감시를 당했다고 합니다. 이 수기는 이러한 처지에 놓인 국군포로가 증언한 내용이며, 이 분은 자신의 처지와 현실에 울분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남북 모두 포로의 출신성분을 의심했습니다. 사실 상상조차 할 수 없이 힘들었던 당시이기에 우리가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현재 북한에 있는 5만명의 포로들이 자발적으로 남은 것인지, 강제로 남은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경우 인민군인데 전후에 귀환하지 못한 사람들은 지리산에 빨치산으로 남겨졌습니다. 이들을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간주하여 처벌했습니다. 여담으로 이 선생님은 한국전쟁 때 세균전이 있었는지에 대한 의혹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몇몇 증언이 있었다고 했는데, 만일 실제로 있었다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국제적으로 금지된 대인지뢰가 전쟁중, 전후에 매설되어 한반도 도처에 있다고 합니다.
민주주의의 부재, 50년대 한국 정치 1948, 50, 52, 54, 56, 58, 60 순서대로 대선, 총선, 대선, 총선.... 이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한민당과 연합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당시 연합 정당인 한민당은 내각제를 선호했지만 이승만이 대통령 중심제를 주장했습니다. 결국 대통령 중심제가 관철되었고 나아가 내각 임명에서도 한민당은 배제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한민당은 야당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48년 초대 대통령 선거는 간접선거인 반면 52년에는 직선제로 바뀌게 됩니다. 이때부터 이승만의 위기이자 고민이 시작됩니다. 52년 5월 부산 정치 파동으로 헌법을 개정하는데 이때를 가리켜 ‘발췌개헌‘ 이라고 합니다. 대통령은 중임이 불가하기 때문에 이승만이 56년에 다시 대통령을 출마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다시한번 꼼수를 써 54년 초대 대통령에 한해 그 조항을 적용하지 않는 취지의 사사오입 개헌을 단행합니다. 60년대 선거에서 이승만은 대중의 인기가 없었습니다. 사실 이미 56년 선거 때 부통령에 장면이 당선되었고, 대통령 후보로 2등을 했던 조봉암도 이승만을 위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면암살을 시도하고 58년에는 가장 강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조봉암을 간첩죄로 처형합니다. 그래도 불안해서 1960년 우리도 잘 아는 3.15 부정선거를 저지르게 됩니다. 60년대의 3.15 부정선거는 참 웃기는(?) 선거였습니다. 크게 세 가지 부정이 있었습니다. 사전 투표를 조작하여 지지율을 기본 4할로 맞추고, 3,6,9인을 짝지어 공개 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야당 참관인을 투표 당일날 투표소에서 퇴장시킵니다. 자유당 유세에 버스와 트럭으로 청중을 동원하는 모습.
출처: http://dugok.x-y.net/kor-his/eve/3.15masan.htm
한마디로 말하면 50년대 한국의 정치는 이승만을 어떻게 대통령 만들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봐도 무방한 것 같습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했던가요. 우리 국민들의 피와 투쟁으로 얼룩진 4.19 시민혁명을 통해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고 새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이때 민주당이 당선되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아쉽게도 혁신과 개혁의 정치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5.16 군사쿠데타가 벌어지게 됩니다.
5.16 군사 쿠데타와 박정희 사실 이승만이 퇴진하고 5.16이 벌어지기 전까지 장면 정부가 있던 시기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를 두고 의견이 갈립니다. 5.16 쿠데타를 지지하는 세력은 4.19 혁명 이후의 대한민국을 큰 혼란의 시기로 인식합니다. 이러한 시기에 유일하게 근대화 교육을 받은 세력은 군대라고 주장하며 군대에 의한 쿠데타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합니다. 반대의 입장에서는 이 시기를 일종의 과도기로 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주화와 근대화를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가야 하는지의 문제입니다. 이를 둘러싸고 이 선생님은 몇 가지 논점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 4.19 혁명 이후 장면 정부의 혼란이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한 필요한 혼란이었는가 아니면 그냥 무능한 정부로 인한 혼란이었는가? -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었어도 유사한 수준의 경제 성장은 가능했는가? - 민주화와 산업화가 같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이선생님은 역사적 근거를 토대로 박정희의 행적을 알려주셨습니다. 박정희는 일제 강점기 일본의 위성국인 만주국의 군관이었으며 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혈서까지 썼습니다. 만주군 소위로 임관 한 뒤의 행적은 나타나 있지 않는데, 일본 패망 후 즉시 일본군을 탈출해서 광복군의 중위로 가입하게 됩니다. 한편 해방 후 친형 박상희가 남로당의 선전부장이었는데 경찰에 사살되자 이에 남로당에 가입하여 승승장구 하게 됩니다. 그러다 여순 사건을 계기로 군대 내 이른바 빨갱이 색출작업이 진행되자 박정희는 붙잡히게 됩니다. 옛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의 구명운동과 함께 남로당 내부 조직 정보를 누설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어 국군 정보 계통의 군인으로 근무합니다. 특이한 점은 박정희가 쿠데타 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북한에서 친형의 절친한 친구를 특사로 파견합니다. 초창기에는 남북관계가 긍정적인 분위기였지만 미국에 발각되자 돌변, 친형의 절친한 친구이자 특사를 간첩혐의로 처형시킵니다. 여담으로 이 시기 박정희의 과거 기록을 지우기 위한 작업들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국내 기록은 이미 거의 없앴고, 그나마 미국에 있는 자료들은 문서보관소에 가서 대출하고 반납을 하지 않는 방법을 통해 경력 ‘세탁’을 시도하였다고 합니다.
마치며 이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경제성장과 관련하여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미국의 원조는 50년대 이후 중단되었으며 박정희 정부 시절 경제 성장 계획을 수립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함께 진행할 수는 없었을까요? 박정희 정부의 집권 동안 경제 성장을 위해, 또는 정권 유지를 위해 희생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의 신화 이면에는 경부고속도로를 짓다가 사망한 사람들, 또 중단되었다가 막바지 작업을 위해 투입된 군인들의 희생이 있습니다. 당시 학교 진학률이 저조했고 대부분이 공장으로 가서 일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경제 성장은 한 개인의 공로나 업적이라기보다 우리 국민, 시민의 힘으로 이룩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경부고속도로 추풍령 휴게소에 있는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탑
출처 : 루리웹 http://ruliweb.daum.net/news/view/MD20100204143607107.daum
끝으로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과 관련하여 이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제 나름대로 재구성하면서 후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인물이 기념할만한 인물인지 아닌지 판단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해답은 훗날 우리가 그 인물을 기념하는 동상이나 기념관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데려갔을 때, 자녀들에게 이 인물을 본받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여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충북 옥천 옥천군 금강휴게소 인근에 세워진 '경부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
건설현장에서 순직한 77명의 순직자를 기리기 위해 세운 탑. “조국근대화를 향한… 거룩한 초석이 된 것이니… 우리 어찌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은혜와 공을 잊을 것이랴….” 출처 : 지역정보포털 http://www.oneclick.or.kr/contents/nativecult/area09.jsp?cid=805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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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 꼼지락 – 소리를 내면 세상이 바뀐다 |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꼼지락] 2강, 뭐든지 괜찮아 아님말고 | 우진아빠 | 2012.11.8 | ||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 꼼지락 : 소리를 내면 세상이 바뀐다' 2강 (11/05, 월)
1.
![]() 두 번째 강의다. 첫 강의의 여파(?)였는지~ 다들 익숙하고 편안한 모습이었다.
손체조를 시작으로 자연스럽게 강의가 시작됐다.
각자 이면지 종이 한 장씩을 갖고, 마음 내키는대로 3등분으로 잘랐다. 그리고서
첫번째 종이에는 '오늘 제일 많이 들었던 감정'
두번째 종이에는 '그런 감정 때문에 했던 행동'
마지막 종이에는 '그런 오늘의 나의 모습을 명사로 적었다.'
진행을 맡은 이래은 선생님은
각자 돌아가면서 발표를 시키며, 이것이 오늘의 작품명이라 했다.
각자가 발표하는 작품명을 듣고있자니 마치 '늑대와 춤을' 영화에서 나온 인디언들의 이름같았다.
'무덤덤해서 일을 잘한 토끼'
'초초해서 열심히 공부하려 한 빵순이'
'어이가 없어서 웃은 겨울'
'부끄러워 하루종일 쳐박혀 있던 감자'
'조마조마한걸 무시한 사슴벌레'
'약간 따스한 기분에 즐겁게 얘기한 양지쪽에 앉은 곰'
2.
세 명씩 짝을 지어 앉았다.
한 장의 종이에,
첫 번째 사람은 점,선,면을 기하학적으로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은 이것을 기초로 그림을 완성하고
마지막 사람은 작품의 제목을 적었다. 그리고 매 번 순서를 바꿨다.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작품이 하나씩 튀어나왔다.
이를 두고 한 참여자는
'생각이 역전되는 재미, 예측불허의 즐거움 있다'고 표현했다.
![]() ![]() 3.
이어서 오늘 초대손님으로 오신 박재동 선생님의 강의가 시작됐다.
너무 주옥같은 그리고 감명깊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 중 가장 인상깊었던 말씀을 인용하면서 강의 내용은 대신한다.
"일을 잘 하고 못하고의 차이는 목표르 어느정도까지 뒀냐? 라는 것에 차이다"
"1cm를 그려도 그림이다"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미 여러분은 목표에 가까이 온것이다. 가능성이 있다. 너무멀리 있으면 그런 생각조차 안 든다"
"정치민주화, 경제민주화에 이어 예술민주화의 시대도 곧 올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림을 그릴 권리가 있다"
그리고 모두다 눈을감고 머리속의 그림을 함께 그리는 시간이 있었는데,
가슴을 울리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 짧은 글로는 그 감동을 전할 수가 없네~ 머리 속으로 그리는 그림, 장면#1 "푸른 바다가 있습니다" "흰 구름이 떠 있습니다." "큰 조개 안에 코끼리가 있습니다." "배가 떠 있고, 날치(?)떼가 배 위를 넘나듭니다." "갈매기가 날치떼 중 한 마리를 낚아 챕니다." 4.
마지막으로
요즘 선생님이 굉장히 관심을 갖고 계신 "낙서예술"을 모두가 함께 하면서 강좌는 마무리 됐다.
그리고 뒷풀이 시간때는 박재동 선생님이 손수 참여자들의 캐리커쳐를 그려주시는 팬 서비스도 함께^^
글 : 아카데미느티나무 천웅소 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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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교육활동가 평화교육 워크숍: 누구나 맘대로 톡톡 | [네번째 세션후기]평화교육워크숍:누구나맘대로톡톡 - 나와 세계 | 느티나무 | 2012.11.6 | ||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10월의 마지막 날, 평화교육 워크숍의 네번째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진행자가 잔잔하게 안부 인사를 건네며, 지난 시간 레아씨와의 오감을 자극 받았던 워크숍을 놓친것을 안타까워 했어요. 1. 어떤 그림이 나왔을까요? 에그머니나! 한 사람씩 차례가 돌아갈 수록 갈등을 하게 되더라구요. 간단한 그림 그리기에서 무엇을 생각해 보셨나요? 2. 정체성 모자 예쁜 고깔모자를 써보았어요. '이주노동자'라는 고깔은 쓴 분에게 "냄새나 절루가", "짜증나",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 라는 말을 내뱉었을 때, 3. 서울 v s비서울, 젋은 vs 나이듦, 학사이하 vs 석사이상, 영어가능자 vs 불가능자 제목만 봐도 짐작이 되셨나요? "내가 속한 그룹이 계속 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쪽은 한국사회에서 우열하다고 여겨지는 그룹이고, 다른 한쪽은 그 반대의 경우같았습니다. 나는 한 쪽에 계속 서있었는데, 마지막에 다른 한쪽으로 불편한 다리를 잡고 옮겨 걸어가면서(몇주전 다리에 부상을 입어 거동이 조금 불편한 참가자였다)이렇게 나뉘어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속했던 그룹에 있던 사람들도 계속 바뀌고 있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우리는 그저 다를 뿐인데, 이렇게 다름이 차별이 되는구나! 앞서 진행한 모든 활동을 정리하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 그리고 다시 내가 겪은 차별의 순간을 한 문장으로 적고 다른 사람과 교환한 뒤, 바뀐 내용의 차별에 대해서 마치 내가 겪은 이야기 처럼 조원들에게 그 상황을 설명하는 활동을 갖었습니다. 참 다양한 상황의 차별 이야기가 있더군요. 나이 많은 할아버지에게 차별 받은 젊은 여성의 사례, 차남으로서의 집안 내의 차별, 직장에서 권위에 대한 복종 강요... 내가 받은 차별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설명해 주면서, 또 다른 사람이 동조해 주고 조언해 줄 때 나에게 따뜻한 위로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질문, 여기 모여있는 16명의 생각이 얼마만큼 다를 수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각자의 생각은 "달라도 너무~" 달랐지요. <독재자가 군림하는 이웃나라에 미군과 한국군이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연합공격을 할 수 있다>라는 두번째 질문은 첫 번째 질문을 받고 협상하는 과정보다 조금 더 여유있고 빨리 줄이 세워졌다. 역시 이유는 다양했고 정도의 차이도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같이 돌림노래를 배웠습니다. 아프리카 지역에서 평화를 이야기 할 때 많이 부르는 노래라는 설명이 기억이 납니다. "툴라툴라마마 툴라 툴라마마 툴라 투라 에투투 - 움 움마에 움 움마에 움 투루루.......아에! 툴라투 툴라마마 툴라 예~띠 툴라투 툴라마마 툴라 오마에-띠" 그리고 오늘 세션을 모두 마친 뒤 짧은 소감을 날씨로 표현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날씨가 어떤가요? '기분 좋을 정도로 쌀랑한 바람이 부는 시원할 날'. '해가 쨍쨍한데, 그렇게 너무 쨍쨍하지 않아서 좋은 날', '비가 내려 나뭇가지 위에 물방울이 ㅤ맺혀 있고 그 사이로 쌍무지개가 떠있는날'. ' 구름 가득낀 하늘 어딘가 구름 사이 빛이 내리 쬐는 날', '맑은 하늘에 바람이 쉭-하고 지나가는 날', '무슨일이 벌어질 듯한 느낌의 따뜻한 바람이 지나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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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 꼼지락 – 소리를 내면 세상이 바뀐다 |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꼼지락] 1강, 소심해도 괜찮아 그냥 한 번 꼼지락 | 느티나무 | 2012.11.5 | ||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 꼼지락 : 소리를 내면 세상이 바뀐다' 1강 (10/29, 월)
1.
매우 흥미롭지만 한편으론 막연한 제목 탓이였는지,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질문을 동시에 받았던 강좌가 드디어 개강했다.
이 강좌 는 <민주주의학교>부류의 강좌에서는 몇 주 앞서 시작한 <평화교육워크숍>에 이어 처음으로 시도되는 워크숍 형태의 강의이기도 하다.
약 20명 정도의 인원이 워크숍 장소인 3층 중회의실에 모였다.
이들을 맞은 것은 난데없는 돗자리. 그러나 다들 주저 없이 신발을 벗고 돗자리에 둥글게 마주보고 앉았다. 그리고 언제 시작을 알리는 멘트도 없이 서로의 안부를 묻다가 자연스레 워크숍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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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 문화 |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문화] 1강,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 놀이정신 | 2012.11.3 | ||
[인문학교]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문화와 역사, 1강(10/31) 구광렬지음 | 실천문학사
너에게 묻는다 1. 강의를 맡아주신 분은 구광렬.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기도 하지만 사실 그는, 시인이다. 한국어로 쓰기도 하지만 주로 스페인어로 시를 쓰는, 그리고 그 스페인어 시를 스스로 한국어로 번역도 하는, 아주 특이한 사람이다. 이토록 특이한 분이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강의를 했다. 그것도 맨발로...
2. 첫 강의는 ‘체게바라의 홀쭉한 배낭’을 읽고 모이는 자리. 체게바라가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사살 당할 당시 소지하고 있었다는 배낭 안에서 발견된 초록노트 그리고 그 안에 필사된 69편의 시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그 69편의 시는 총 4명의 시인들 작품이었다. 칠레 출신의 파블로 네루다, 페루의 세사르 바예호, 쿠바의 니콜라스 기옌, 스페인의 레온 펠리뻬. 책의 중간 중간 그들의 시가 실려 있어 체게바라가 게릴라전을 펼치던 전장에서 어둠을 밝혀가며 읽고 필사했던 시들을 함께 감상할 수 있던 시간이었다. 체게바라가 웬만한 월드스타 못지않게 유명한 탓도 있고 전에 평전을 읽었던 기억도 있고 해서 책의 내용이 새삼스럽진 않았지만 문학과 혁명의 그 이상하리만큼 끈끈한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듯하다. 아니, 그저 상상을 해 보는 거다.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장에서 배낭에 시집을 넣고 다니는 마음이란 어떤 걸까. 피곤한 육신을 누이고 쉬게 하는 그 짧은 휴식의 순간에 시 한편을 노트에 베껴 적는 마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세계인들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긴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안티-체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도 많은 모양이다. 그 중에서 책에 소개된 유명한 안티-체 인사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칼럼니스트 후안 호세 세브렐리. 그는 다각도에서 체를 비판하고 있다. 그중 한 대목,
“게바라주의는 마르크스주의 혹은 정통사회주의와 충돌하는 것이다. 체게바라는 자연스런 해방을 교조적 카리스마로, 인민동원을 개인적 소집 차원에서, 사회민주주의를 정치적 독재로, 빈자와 노동계급을 농부로, 객관적인 조건들을 주관적인 의지로, 오로지 선진사회에서만 가능한 사회주의를 가장 가난한 국가에서 실현시키려 했다.”
내용이 어려워 몇 번 반복해서 들여다보니, 결국 이 비판의 많은 부분이 체의 개인적인 매력과 카리스마에 대한 것들이라 가벼운 웃음이 났다. 인민동원을 개인적 소집 차원에서 이끌어냈다는 비난의 부분이 무척 우습다. 게릴라 시절 그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농기구를 들고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고 하는데, 이렇게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게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이 남자의 얼굴이 문득 궁금해졌다. 더욱 가관인 것은 객관적인 조건들을 주관적인 의지로 바꾸고 변화시키려 했다는 부분... 객관적인 조건들을 오로지 자신의 신념과 의지로 넘어서려 하는 게 게릴라들의 본분 아니던가, 그게 바로 혁명의 골자가 아니던가 말이다. 천식을 앓으면서도 평생 싸움의 현장을 누볐던 게바라의 착한 눈매에서,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밀림 속을 몇 십일씩 걸어다니며 투쟁했던 호치민의 깡마른 살갗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의 지닌 그 강인한 의지와 정신력이 아니던가. 체를 향해 정치적 바보라 칭했다는 이 인사를 향해 더 이상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일은 여기서 그만 두는 게 오히려 체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문학과 혁명으로 체를 그려내는 책의 내용 때문인지 문득 요즘 읽고 있는 다른 책이 떠오른다. 책과 혁명에 관해 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란 책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 책을 쓴다는 것은 책을 다르게 읽는다는 것과 책을 다르게 쓴다는 것이고 이 행위는 오로지 그 행위 자체로서도 이미 혁명임을 11-12세기에 걸쳐 일어났던 ‘중세해석자혁명’과 ‘루터의 대혁명’, 이 두 사건의 재조명을 통해 밝히고 있는 책이다. 어려운 논증의 과정을 거치지만, 거칠게 설명하자면 이런 거다. 신의 말씀의 왜곡되어 인간의 삶을 옭아매고 있던 중세에 루터가 한 일은 성경을 되풀이해서 읽는 행위, 오로지 그것 하나였다. 그 행위 하나를 통해 세상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성경과 신의 말씀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치는 과정, 그것은 진정한 혁명의 행위였음을... 그래서 책을 읽는다는 건 곧 혁명이며 그런 불가능한 책읽기를 우린 어렵더라도 읽어내야 한다는 것.
체게바라도 그랬던 게 아닐까. 시를 읽으며 그 시가 자신의 눈앞에서 목격하는 낮은 자들의 남루한 삶과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날들, 시를 읽으며 분노하고 눈물짓던 그 시간을 자신의 삶에서 지워버리지 않으려 발버둥치던 순간들. 그의 배낭에 들어있던 시집은 학문과 예술의 한 갈래로서가 아니라 그저 가지지 못한 자들, 너무나 쉽게 모든 걸 빼앗겨야 하는 이들의 삶 한 조각이었는지도 모른다.
3.
그러고 보니 시를 찾아 읽은 지도 아니 서점에서 시집을 사지 않은 지도 너무 오래되었다. 젊은 날 읽었던 그 많고 많은 시 중에서 오늘은 유독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가 떠오른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결국 소설은, 시는, 문학은, 책은, 나에게 ‘묻는’ 놈들이다. 나의 부끄러움을 가리키며 말이다.
글 : 박현아 자원활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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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사Ⅱ | [한국근현대사Ⅱ] 8강, 진주 외공리 산 속에 묻힌 사람들. | 우연필연 | 2012.10.31 | ||
10.18일에 있었던 한국근현대사 II 강좌 후기입니다. 늦은 후기 죄송합니다 ^^; 들어가며 오늘 강의는 이선생님께서 지방출장 다녀오신 관계로 조금 늦게 시작되었습니다.(그래봐야 5분정도 늦으셨습니다^^;) 눈에 띌 정도로 지난 시간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아카데미에 나와주셨습니다. 세어보니 대충 25분 오셨는데 남성은 저와 자원활동가 선생님 포함 여섯 명이었습니다. 다음 학기 역사 강좌에는 많은 남성분들이 관심 가져주시길 기대합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 다루지 못한 토지개혁 부분을 마무리하고 남북전쟁(6.25)과 관련한 쟁점들을 이야기 나눠보았습니다.
위안부의 그림자 흔히들 ‘위안부 문제’ 하면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군에 강제로 동원된 위안부 여성들을 떠올리실 겁니다. 그러나 6.25 시절 한국군에서 기생촌을 운영하였는데 이 때 위안부에 동원되었던 여성들이 다시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시기 현지 여성들을 중심으로 우리 군대에 위안부와 유사한 형태의 조직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위안부 문제는 과거에 벌어진 일제의 만행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를 포함한 전세계에서 자행되고 있는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출처 : http://www.koreahealthlog.com/719
북한사(史)? 그동안 우리는 한반도 3.8선 이남의 역사를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로 배웠습니다. 국사책은 8.15 해방 이후부터 한반도 남쪽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중심으로 근현대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북한사는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 뿐 아니라 대부분 북한사를 알지 못하며 부정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볼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헌법은 우리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헌법을 따른다면 8.15 해방부터 지금까지의 북한 역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북한의 역사와 관련된 논쟁은 세 가지 정도로 말할 수 있습니다. 1.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북한사를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까요? 2.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해방군이고 소련군은 점령군일까요? 당시 미군은 직접통치를 하고 소련군은 간접통치를 했다고 합니다. 미군의 역할은 근현대사를 통해 잘 알고 있지만 소련군의 경우에는 잘 알지 못합니다. 당시 북측에 진주한 소련군의 입장은 “조선의 새로운 국가는 조선인이 건설하는 것이다.” 였다고 합니다. 대신 정치위원회 설립 시 소련이 강제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1:1 비율로 구성했다고 합니다.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공산주의자에게 유리한 조건인 것입니다. 3. 사회주의 혁명인가? 당시 북측에서는 조선노동당 창건을 전후한 1949년 8월부터 10월 사이의 사건들을 사회주의 혁명이라 하지 않고 인민민주주의 혁명으로 불렀다 합니다. 당시 레닌, 스탈린 등이 주장한 ‘사회주의 혁명’ 은 일반적으로 다음의 네 가지 조건을 갖춰야 했습니다. 첫째, 노동자와 농민이 연합한 정권, 둘째, 사유재산 불인정, 셋째, 상공업을 허용하지 않을 것, 넷째, 토지개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 북측은 토지개혁만 실시했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이라 부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1970년대 이후 사회주의 혁명으로 규정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고 합니다.
북한의 토지개혁 북한의 역사는 우리 학교에서 다루지 않으며 일반 대중이 접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북한의 토지개혁은 북한 정권 수립 시기와 맞물려 있기에 우리들은 그 내막을 잘 알지 못합니다. 몰수대상은 일본인의 토지와 일본의 국유지, 친일파와 지주들의 토지였습니다. 지주들의 경우 5정보(1정보: 3천평)이상을 소유한 지주들의 토지를 전부 몰수했습니다. 법령 시행 전까지 기부하면 상관없기 때문에 지주들이 5정보가 안될 정도로만 남기고 다 기부하여 토지 강탈을 면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농사짓는 농민들만 분배대상이었으며 토지개혁에 대한 저항은 미미했고 상당수의 지주들이 월남했다고 합니다. 당시 종교단체의 토지도 몰수했기 때문에 종교적인 기반이 약화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특정 종교나 마을 지도자를 중심으로 잘 운영되던 마을 공동체가 토지개혁을 둘러싸고 계급 간 갈등으로 비화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남북전쟁? 1950년에 발발한 남측과 북측의 전쟁을 우리들은 6.25, 혹은 6.25사변, 한국전쟁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한국전쟁으로 통일했고, 북측은 조선 전쟁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에 대해 생각해볼 점들이 있다고 합니다. 우선 전쟁이 6월25일에 일어났는지의 문제입니다. 이선생님 말씀에 따르면1950년 6월 25일 전에도 38선을 중심으로 소규모 전투가 빈번하게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은 한국전쟁 혹은 남북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을 누가 시작한 것으로 볼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이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었으며 총 21개 국가가 참여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남측을 도와준 16개국과 남북, 그리고 중국, 소련, 일본 도합 21개 국가입니다. 전쟁 전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주장했고 김정일 또한 남진통일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49년 당시에도 소규모 전투가 빈번했다고 합니다. 전쟁의 시작을 6.25로 보는 것이 문제 있다고 이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는데, 이 대목에서 저는 약간의 의문이 들었습니다. 비록 6.25 전에 소규모 전투가 계속되었다 해도, 만일 북측에서 6.25일에 맞춰 대대적으로 탱크와 무기를 준비하여 한꺼번에 밀고 내려왔다면 그때부터를 전면적인 전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날 연평도 사건과 같은 북측의 여러 군사적 시도들을 도발이라고 하지 전쟁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전투의 양상이 점점 확대되어 시작 시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는 있을지 몰라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전면적으로 밀고 내려왔다면 그때부터를 전쟁의 시작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이 땅에 전쟁이 남기고 간 깊은 상처들 하지만 전쟁을 이데올로기적인 시각이 아닌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한 참상들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진주 외공리에서 600여구의 유골이 머리에 총탄자국이 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유골의 의복에 달린 명찰로 경기도의 모 상고 학생도 포함된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대부분은 부녀자였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누가 이들을 정확히 언제 죽였고, 이들이 왜 죽었는지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한국전쟁의 미해결 사건들이 많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초기 남한 정부에서는 평택 이남의 형무소에 있는 사상범을 모두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1500명이 처형되고 도합 3천여명이 처형된 사건이 보도연맹 사건입니다. 또한 전쟁 중에 많은 피난민들이 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했습니다. 한편 전쟁 초기 북측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잔류파 국회의원 중 54인의 국회의원이 전향했다고 합니다. 잔류파 국회의원들 중 김규식, 조소암과 같은 민족주의자는 자의로 남고 나머지는 한강다리가 폭파되어 못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인민군의 공작도 있었지만 전향한 사람들은 공산당 지지성명을 했습니다. 반면에 일반 민중들은 살기위해 부역을 했습니다. 이들은 훗날 북진할 때 공산당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처형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부역 혐의로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들이 오늘날 많이 밝혀졌는데, 고양시 금정굴에서는 1천여명의 민간인이 부역혐의로 굴 안에서 처형되었고 그 유골이 발굴되었습니다. * 외공리 유골들. 출처 ; http://blog.ohmynews.com/malddug/
마치며 이선생님께서는 우리가 이데올로기적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데올로기가 아닌 전쟁의 참상 그 자체를 놓고 일반 백성, 시민들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데올로기적인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기에 아직도 이 땅에 많은 이산가족들과 여러 피해자들이 고통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왜 죽었는지도 모르는 수많은 유골들이 이 땅 어딘가에 묻혀있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인간 생명에는 이데올로기가 없습니다. 진정한 역사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휴머니즘으로 쓰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다음시간에는 답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북촌이 정치적으로 중심지였다고 합니다. 여운형, 박헌영 등이 건국준비위원회로 활동하던 장소를 방문해 그들의 자취를 짚어보고 그 후에 박정희 대통령 시절과 관련된 청와대 주변의 여러 장소들을 둘러보는 코스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날 강의 후에는 강의실에서 간단한 안주와 함께 맥주를 마시며 뒤풀이를 했습니다. 많은 참여자분들이 남으셔서 열띤 토론을 했는데, 여러모로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언젠가는 강의실 밖에서도 이러한 자리가 마련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10월 18일 강좌 후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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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위기와 경제민주화 | [세계경제위기와 경제민주화] 3강 장석준, 99%, Too big to fail | Oversmiler | 2012.10.30 | ||
3강, 99%, Too big to fail
[2012 강좌 후기 ③] 신자유주의가 답이 아니라면 우리의 미래는 어디로?
장석준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부소장의 강의는 2008년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발생한 금융위기가 그 이후 어떻게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쳤고, 정치 사회적 변혁을 촉발시키게 되었는지를 소위 "1968 세계혁명"이라고도 불리는 68년 당시의 상황과 비교하며 설명한다. 이 강의에 귀를 기울이다보니, 1968년의 상황은 물론 2008 서브프라임 사태와 2011 아랍의 자스민 혁명 당시에 그 사태들이 인류와 역사에 주는 의미, 영향에 대해 무관심 했던 나를 돌아보게 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의 새로운 주류로 등장한 케인즈주의 경제는 44년 발동된 브레턴우즈 체제와 더불어 "자본주의의 호황기"를 누리며 30년 동안 승승장구한다. 이 기간 동안 한국을 비롯한 신생독립 국민국가들이 다수 생겨나고 유럽에서는 복지국가가 등장했으며, 노동자조합의 세력도 날로 번창하며 소위 "진보의 시대"가 꽃을 피운다. 그러다가 자본과 노동의 세력이 모두 막강해진 70년대에, 장석준 부소장에 따르면 이 두 세력간의 전면 대결이 불가피해졌고, 이 대결에서 자본의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고 그는 해석한다. 자본과 노동간의 '권력투쟁'이 신자유주의를 촉발하게 되었다는 정치, 사회학적인 해석은, 선뜻 수긍이 가지는 않았지만, 흥미로운 해석이라고 생각되었다.
1971년 닉슨쇼크로 말미암아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되면서 불안정성과 휘발성이 증폭된 경제는 영국의 외환위기, 프랑스 미테랑정부의 개혁 실패, 라틴아메리카의 외채위기, 동아시의 외환위기, 미국의 닷컴버블 붕괴 등 수많은 금융 및 경제위기를 촉발시킨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는 노동과 남반구를 제압하는 금융자본주의가 주도하는 시대로 돌입한다. 그런데 금융세력의 경제지배, 민영화 등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대중자본주의"이론으로 설명되는, 노동자 세력들의 동의 과정이 있었다고 한다. 대중이 스스로를 자본가라고 여기고 자신도 주식투자, 부동산투자를 통해 큰 돈을 벌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말이다.
그럼 이제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이후 전세계에서 일어난 변화들을 살펴보자. 2009년 미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아이슬란드의 경제가 붕괴하고 영국 대학생들의 등록금 인상 반대시위 ,칠레에서의 시위가 일어나고 튀니지에서 한 대졸 무직자의 분신을 계기로 일어난 민주화 열풍이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예멘 등 아랍세계로 퍼져 나갔다. 또한 금융위기의 여파로 재정위기에 몰린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 남부유럽에서도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가 연이어 일어났다. 일련의 사건들의 결과로 아이슬란드에서는 긴축정책을 거부한 좌파-좌파 연정이 들어섰고 아랍 일부 국가에서는 독재정권이 무너졌으며 그리스에서는 '급진좌파연합'이 2차 총선에서 27%의 득표를 받아 제1야당이 되었다. 그리고 2011년 드디어 위기의 본산지인 월스트리트에서 "월가를 점령하라", "우리가 99%다"와 같은 금융자본에 맞서는 시위가 일어나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2008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일어난 시위, 투쟁이 1968 혁명과 같은 점은 청년층이 투쟁의 중심이라는 점이다. 반면 다른 점은 68년 시기의 청년들은 안정된 일자리가 보장되어 있었지만 현재의 청년들은 일자리가 막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차이점은 SNS 와 같은 정보통신기술로 말미암아 권력이 수평화되었다는 점이다.
한편 "점령하라"로 대표되는 청년층 주도의 사회운동의 한계와 도전과제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대다수의 노동자, 서민, 중산층은 신자유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세력으로도 볼 수 있지만, 이제는다수의 지지를 받는 개혁을 정말로 실현시킬 수 있도록, 이들이 개혁적인 정치세력과 결합하는 소위 '정치세력화'가 필요해 보인다.
현재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2008년 금융위기 이전 폭발적인 호황과 성장이라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던 잔치 후에 지금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긴 불황의 터널 속에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 하에서 서민들과 중산층의 삶은 더욱 어려워지고 양극화도 계속 심화되었다. 기득권과 가진 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내놓기에 인색하고, 권력을 쥔 자본세력은 정치권과 노동자들의 요구를 가능한 한 외면하려고 하고 있다. 게다가 기후변화를 포함한 전 지구적인 환경위기까지 겹쳐 인류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이다. 쉽지 않겠지만, 희망을 가지고 인류가 앞으로 매진해야 할 과제는 화폐, 금융 제도 개혁을 통해 친환경적이고 지속가능한 경제 체제를 구축하도록 노력하고, 안정된 경제체제하에서 정치, 경제, 사회 전반적인 민주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중 각자가 정치, 경제,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일처럼 관심을 가지고 적극 참여하며 끊임없이 개혁을 이루어나가도록 서로를 북돋워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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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교육활동가 평화교육 워크숍: 누구나 맘대로 톡톡 | [두번째 세션후기]평화교육워크숍 : 평화의 비전 세우기 | 느티나무 | 2012.10.26 | ||
지난 10월 17일 평화교육 워크숍 두번째 세션의 문이 열렸습니다. 먹을 것이 있으면 낯빛이 밝아지고 기분도 좋아 지는 법^^ 출출함을 달래니, 오늘은 어떤 평화로의 여정을 걷게 될지 궁금했습니다. 손과 손이 만난 다는 것 ![]() 동그란 원에 둘러 앉은 참여자들이 한 명씩 일어나 손을 내밀며 인사를 했어요. " 안녕 (산책) 좋은 아침이야" 한 바탕 인사를 하고 나서 피티의 첫 느낌은 '아주 예쁜 삽화가 그려진 동화책이구나' 였어요. 무심코 봤으면 삽화와 글을 읽어며 아는게 병이다? 갈등의 해결 나와 국가와 세계 폭력 이후의 상황 대안 어떤 지도력 어떤 정체성 동화책에 표현된 각종 상황을 키워드를 통해 짚어 내며 각 조별로 완성한 평화의 비전 꽃이 어떤가요? ^^ 각각의 생각을 협의를 통해 하나로 모으기에 시간이 참 많이 걸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듬성듬성 비어있는 꽃 잎은 앞으로 네번의 세션이 진행되는 동안 채워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모든 결과물들은 워크숍 내내 느티나무홀 벽에 붙여 둡니다.) 10월 27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필리핀에서 오는 레아씨와 함께 웃고 뛰고 노는 세번째 시간을 기대하며! 소략한 2번째 세션 후기를 마칠게요. 소감은 참여자들 각자가 자유롭게 나눌 수도 있겠지요? ^^ 그럼, 다음 시간에 뵐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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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위기와 경제민주화 | [세계경제위기와 경제민주화] 2강 정세은, 유럽 재정위기와 복지의 미래 | Oversmiler | 2012.10.23 | ||
2강, 유럽 재정위기와 복지의 미래, 충남대학교 정세은 교수
경제학 용어는 외계 언어처럼 어렵습니다. 강의 서두에서 PIIGS라는 단어를 듣고 '읭? 웬 돼지?'라고 생각했던 경제바보는 유럽의 재정위기라는 말을 처음 딱 들었을 때, '과도한 복지지출'과 '방만한 재정 운용' 이 정도를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정세은 교수는 단호히 "복지 때문이 아니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의 재정위기는 사실 유로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은 나라라 볼 수 있어, 조기에 잘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로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도적인 두 나라, 독일과 프랑스는 그리스의 채권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지 못했고, 결국 이 불똥이 아일랜드와 포르투갈로 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도 1997~8년 이러한 재정위기를 겪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국민들은 열심히 금도 모았지만, 결국 이를 극복하게 해주었던 중요한 두 가지 동력은 '원화환율의 절하'와 '수출의 증가'였답니다. 그러나 그리스는 유로존 안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환율 정책을 쓸 수 없었고 확장적인 재정정책을 펴기도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즉, 그리스에서 촉발된 유럽재정위기의 원인은 과도한 재정지출 문제도 있지만 유로존 자체가 가진 문제가 더 컸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유로존 자체가 가진 문제는 상당부분 독일의 근린궁핍화 정책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유럽의 경우에는 임금의 결정방식이 나라마다 각자 다르며, 이러한 요인으로 인한 물가상승률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독일의 입김이 센 유럽중앙은행은 여전히 남유럽 국가들의 수출에 불리한 환율과 이자율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일은 1998년 사민당이 정권을 잡고 2년간의 좌우파 노선 투쟁 과정에서 슈뢰더가 집권하면서 우파사민주의가 득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아젠다2010' 이른바 '하르츠개혁'이라는 개혁정책을 발표했는데, 이 주요 내용은 노동의 유연화와 사회보장의 축소, 즉 일하는 사람한테만 근로복지의 혜택을 주겠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독일은 실제로 이 과정에서 노동자의 임금을 많이 낮췄고 가격경쟁력을 가지게 된 반면, 이러한 개혁을 하지 못했던 남유럽의 경우에는 실질이자율이 낮아지면서 주변 국가로부터 돈을 많이 꾸는 유인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부채가 증가하고 수출이 감소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게다가 유로존에 가입함으로써 자본 이동이 수월해진 독일의 기업들이 자신들의 나라에 직접투자할 것이라던 기대는 실제로는 이러한 자본과 설비가 동유럽으로 집중되면서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한 번 외쳐볼까요! 문제는 복지가 아냐! 그렇게 재정이 걱정되면 괜한 재벌이나 대기업들의 세금이나 왕창 깎아 주지마! 우리가 낸 세금으로 멀쩡한 4대강이나 파지마! 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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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사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 <위험사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5강 - 보이지 않는 위험, 나노기술 | 공채원 | 2012.10.20 | ||
아카데미느티나무 20102 가을강좌 [민주주의학교] 위험사회, 어떻게 살것인가 5강(10/10) 후기
나노기술이란 바이러스 보다도 작은 물질단위를 다루는 기술을 의미한다. 흔히 분자의 조합구조를 변형시키거나 원자를 인위적으로조합하여 미립자 상태로 존재시킴으로써 화합물의 반응성을 극도로 향상시키는 것을 의미하곤 한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은나노세탁기는 은에 원래 존재하던 살균성을 나노기술로 극대화시킨 예이다. 나노물질은 매우 작은 입자들이 덩어리지지 않고 서로 간격을 유지하고 있어 표면적이 넓어지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에 따라 단위물질당 반응성도 급격하게 커지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나노기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나노물질은 크기가 매우 작으므로 표피세포 사이를 비집고 인체에 유입되거나 심지어 세포 안으로 투과될수도 있다. 만약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나노물질은 반응성이 극도로 높으므로 인체의 활동에 장애를 초래하거나 세포를 변형시킬 수도 있다. 다행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나노기술의 경우 발전 초기부터 기술에 대한 통제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는 것이다. 덕분에 나노기술 연구소에 사회학자가 참여여 통제의 문제를 고민하고 정부 및 환경단체의 지속적인 감시가 이루어짐에 따라 기술의 진보와 통제가 비교적 동시성 있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기술에 대한 통제의 딜레마'라는 표현을 접하곤 한다. 이는 기술 발달 초기엔 기술 자체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아 통제가 불가능하고 기술이 어느정도 발전하면 기술이 통제가능 범위를 넘어섬에 따라 통제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나노기술은 다행히 기술 발달 초기부터 기술에 대한 사회의 통제가 꾸준히 추구되고 있는 최초의 기술 분야이다. 지금 인류는 기술에 대한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통제에 목마르다. 과연 나노기술이 그 첫 성공 사례가 될지 세상은 그 결과에 주목하고 있다. 강의 : 김병윤, 시민과학센터 운영위원 / 서강대 연구교수 후기 : 공채원 자원활동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