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소감,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남겨주세요
강좌명 | 강좌후기 | 글쓴이 | 날짜 | |
---|---|---|---|---|
[경제학 고전읽기 1] 애덤 스미스 <국부론> | [후기] 경제학 고전 읽기 <국부론> 제5강('19.7.2.) - 스미스의 경제적 자유주의 | 고무곰돌 | 2019.7.19 | |
숨가쁘게 달려온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는 시간이 종강을 맞이하였습니다. 지난 4주에 걸쳐 스미스의 생애와 주요 저작의 내용을 살펴보고 도덕감정론의 시각으로 스미스의 경제이론을 바라보기도 하였으며 <국부론>에 담긴 시장이론·분업론·가치론·분배론을 훑어보았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시간으로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이 정의의 법률을 위배하지 않는 한 자신의 이익을 자신의 방식대로 추구하게끔 자유롭게 놓아주는 즉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하라는 주장입니다. 아울러 자기 절제(self-control)를 전제로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와 같이 개인들이 각자의 자연적 자유를 발휘하게 된다면 소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연적 조화 또는 질서가 달성되어 개인과 사회 전체가 균형적인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장의 측면에서 보면 개인의 이기심을 바탕으로 하는 경제활동이 공정한 경쟁의 상태에서 이루어질 경우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죠. 또 경제적 자유주의는 경쟁과 노동이동 등을 제한하는 불합리한 정부의 규제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이 특징인데 이러한 규제가 전반적으로 산업의 자연적 균형을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책의 구성에서도 알 수 있듯 보호관세 및 보조금 지급 등 자유무역을 해치는 중상주의에 대한 비판도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스미스는 중상주의에 맞서 불합리한 규제철폐와 법치주의의 바탕에서 잘살려는 인간의 본성과 보이지 않는 손이 효율적 경쟁시장을 형성하게 되고 저축·투자의 증대와 분업발달 등이 맞물려 경제발전에 이르게 된다는 경제발전의 길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할 것은 그가 도덕감정론에서 밝힌 것처럼 공정함이 토대가 되는 시장경제체제를 구축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신자우주의자들이 정부는 경제에 일절 개입하지 말고 시장에 맡기라는 주장과는 결이 다른 얘기입니다. 이번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는 시간을 통해 많은 분들이 그런 점을 명확히 인식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앞으르도 계속될 경제학 고전읽기 강의에 오늘날 경제 현실을 고민하고 그 기원을 파헤치면서 대안을 모색하는데 관심있는 시민 학생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원활동가 : 민동섭 <더보기> [후기] 경제학 고전 <국부론> 제1강(19.6.4) 애덤 스미스의 생애 |
||||
저자와 함께 <미투의 정치학>읽기 | [후기] 저자와 함께 <미투의 정치학> 읽기 1 - 그 남자들의 '여자 문제' (권김현영) | 빛깔 | 2019.7.12 | |
미투(Me Too)는 한국사회의 뿌리깊은 남성 중심적 성 문화를 뒤흔들었던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성차별적 통념이 얼마나 견고한지, 이를
무너뜨림의 어려움도 드러났습니다. 피해자가 고백한 후의 감당해야 할 몫도 너무나 크고요. 미투운동 이후 다양한 쟁점이 부각된 지금, 어떻게 나아가야 걸까요. 저자와 함께 <미투의 정치학>
읽기 첫번째 시간은 권김현영 선생님의 강좌로 책 전후를 중심으로 풀어나갔습니다.
네
잘못이 아니라는 말의 힘
3차례의 프레임 전환시도
제 모습을 드러낸
존재하는 위력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고, 잘못된 관념과 문화가 있으면 바꿔야 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지켜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의제기를 하면 공공의 적으로 몰아가는 것이 오늘날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사회에도 각 사람에게도 해가 될 뿐 입니다. 이제는 뒤엎어야 하지 않을까요? |
||||
[경제학 고전읽기 1] 애덤 스미스 <국부론> | [후기] 경제학 고전 읽기 <국부론> 제4강('19.6.25.) - 노동가치론 | 고무곰돌 | 2019.7.2 | |
어느덧 계획된 5주중 절반을 넘어서 이제 두 번의 시간만 남았습니다. 6월 25일 네 번째 시간에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중 가치론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상품의 가치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라는 질문이 핵심인데요. 이를 알아보기 앞서 우선 시장가격과 자연가격의 의미를 새겨보았습니다. 시장가격은 우연적 요인과 유효수요에 의해 변동되는 성질을 갖는데 비해 자연가격은 어느 시기 어느 경제에서나 경제의 일반적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평균수준의 임금, 이윤, 지대의 합을 의미합니다. 또 자연가격은 시장가격 변동의 중심으로서 자본, 노동 등 생산요소의 자유로운 이동과 경쟁으로 인해 시장가격은 자연가격으로 수렴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연가격이 가치론의 분석 대상이 됩니다. 스미스는 상품의 가치를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나누었는데 사용가치는 상품의 쓸모를 말하며, 교환가치란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분업사회에서 말하는 가치는 대개 교환가치일텐데 스미스는 노동이 교환가치의 원천이며 진정한 척도라는 노동가치설을 주장했습니다. 노동가치설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각종 물품을 획득하는데 필요한 노동의 양 사이의 비율이 물품들 상호 교환의 유일한 요인이라고 보는 입장이 투하노동가치설입니다. (p.60) 이에 비해 상품교환을 통해 지배하는 노동의 크기에 중점을 두는 것이 지배노동가치론입니다. 나중에 스미스는 투하노동가치설을 포기하고 지배노동가치론을 내세우게 됩니다. 이밖에 일반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자연임금·자연지대·이윤이 포함된 생산비용을 토대로 가치를 바라보는 생산비용 가치론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습니다. 노동가치론은 투입노동량의 측정이 어렵고 사유재산이 존재하는 경제에서는 적용이 곤란하다는 이론적 문제를 안고 있지만 농업만이 가치 창출이 가능하다는 중농주의의 한계를 벗어나 농업만이 아니라 제조업도 가치를 창출한다는 사실을 짚어냈고 리카도와 맑스로 계승되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갖고 있다 할 것입니다.
생산비용 가치론을 구성하는 요소는 임금, 지대, 이윤입니다. 즉 생산비용을 분리해보면 임금, 지대, 이윤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요소 하나하나가 분배론의 논의 대상입니다. 우선 임금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토지 사유와 자본 축적이 없었던 원시시대에는 노동자는 노동생산물 전체를 향유할 수 있었지만 토지의 사적소유가 이루어진 후에는 노동생산물에서 지대와 이윤이 공제되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임금은 어떻게 결정될까요? 스미스에 따르면 우선 임금은 보통 노동자와 고용주간의 계약 또는 협상의 방법으로 정해집니다. 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상황은 항상 노동자에게 불리합니다. 애덤 스미스가 활약하던 당시에도 노동자들의 단합이 금지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고용주들이 은밀히 연합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p.86~88). 그렇다하더라도 임금을 일정 수준이하로 내릴 수는 없다고 스미스는 주장합니다. 자본주의 유지에 필수적인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서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부양할 수 있을 정도의 임금이 지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p.89) 또 다른 방식이 임금기금입니다. 축적된 자본 중 임금으로 지출되는 부분인 임금기금은 노동수요 충당에 쓰이는데 임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수요는 그 나라의 수입 및 자본의 증대와 함께 필연적으로 늘어납니다. 즉 자본축적이 임금기금의 크기를 결정하므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게 되는데 이같은 입장에서 애덤 스미스의 낙관적·조화론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어 이윤의 개념과 의의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윤은 생산비용에서 임금을 제외한 나머지로 보는 임금 공제설이 대표적으로 스미스에 이어 고전학파 경제학을 완성시킨 것으로 평가받는 리카도 이론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이윤은 임금에 비해 더 변동이 심하고 측정하기 힘든데 시장가격만이 아니라 경쟁자들의 행동, 제품의 생산 뿐만 아니라 수송과 보관 등으로부터도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p.115) 이 때문에 정확한 이윤율을 확정할 수가 없고, 대체적인 수준은 이자율을 통해 파악합니다. 이윤율과 이자율은 대개 같이 변하기 때문인데 통상 이윤율은 투자의 위험부담을 보상하기 때문에 이자율보다는 다소 높다고 합니다. 또 이윤은 자본투자의 대가로서 그 크기에 따라 증대하지만 이윤율은 저하되는데 이를 이윤율 저하의 법칙이라 합니다. (p.158) 교수님께서 수업 마지막에 강조하신 부분은 자본 축적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자본은 근검절약에 의해 증대될 수 있다는 근검절약설을 내세웁니다. 낭비 또는 소비는 현재의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욕구이나 저축은 우리의 상태를 더 좋게하려는 욕구로서 저축을 통해 축적된 자본이 분업촉진과 고용증대를 가져오고 이는 국가의 부 확충으로 연결된다는 논리구조를 갖고 있는 주장입니다. 군부 독재 시절 근검절약을 강조하고 소비를 죄악시하며 저축을 강요받았던 경험이 있는 우리에게는 꽤나 익숙한 얘기이기도 합니다. 강의가 끝난후 역사적 관점에서 동·서양 이윤의 격차에 대한 질의, 우리나라는 국가주도의 리더십 기반하에 시장경제를 활성화한 것이 경제성장의 주 요인이었다는 의견, 여타 동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저축률과 은행의 안정성이 담보된 것이 차별적 지점이 아니었는가라는 생각 등이 논의되었고 교수님께서는 인적자본의 확충이 가져온 경제성장의 효과를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시간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국부론 강의 전반을 정리하면서 애덤 스미스의 경제적 자유주의, 케인즈 학파와 시장주의 학파의 이론 등을 비교·분석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 자원활동가 민동섭 - <더보기> |
||||
[경제학 고전읽기 1] 애덤 스미스 <국부론> | [후기] 경제학 고전 읽기 <국부론> 제3강('19.6.18.) - 시장이론과 분업을 중심으로 | 고무곰돌 | 2019.6.25 | |
애덤 스미스의 주요 저작 중 <도덕감정론>에 이어 강의주제이자 핵심인 <국부론>을 본격적으로 살펴보는 세 번째 강의가 지난 6월 16일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에서 열렸습니다. 강의안과 더불어 교재로 쓰이는 국부론 발췌본의 해당 내용을 짚어보면서 그 의미를 파악하고 역사적 맥락과 그 의의를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강의 후반부 내용은 작성 파일의 손상으로 다시 보완할 예정입니다. * 괄호안의 숫자는 국부론(비봉출판사) 번역본의 해당 페이지를 명기한 것입니다. - 자원활동가 민동섭 - <더보기> |
||||
느티나무 미술학교 - 인체드로잉 | [후기] 대체불가능한 시간 - 미술학교 인체드로잉 /황호경 | 그아무개 | 2019.6.19 | |
<나만의 선을 찾아가는 시간 ⓒ참여연대> 그러니까 이 수업, “인체드로잉”에 참여하고자 작정했던 이유가 있었을 터인데, 그것부터 시작 하려고 했는데, 나의 기억력은 간장 종지에 똑 떨어진 간장 한 방울과 같음에 틀림없다. 그 이유라는 것은 오간 데 없다. 봄이 왔다고 하기엔 아직 추울 때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조금 덜 더운 여름이 왔을 때 수업이 끝났다. 그래,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당연히 기억에 없지, 라고 둘러대고 나면 위로가 될는지. 늘 빠른 세월이 서러웠는데 이리 고마운 날이 올 줄 이전에 미처 몰랐다. 그래도 거슬러 올라가보자. 분명 기억하는 것이 있을 게다. 일단, 첫 수업은 빠졌었다. 한달 전에 잡아 놓은 선약이 첫 수업과 겹쳤기 때문이다. 두 번째 수업에서 무엇을 배우고 나는 무엇을 했는지 그 또한 잊었다. 아마 인체를 그렸을 것이다. 그러나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누군가 차려 놓은 간식에 허기졌던 뱃속이 안심했던 것은 단단히 기억하고 있다. 세 번째 수업도 갔었다. 여전히 다양한 간식과 나의 포식은 빠지지 않았었다. 그리고 인체를 그렸을 것이다. 꾸역꾸역 빠지지 않고 출석했다. 간혹 내가 먹으러 가는 것인가 라는 생각에 매우 행복했던, 순간이라 하기엔 매번 그랬다. 그러나 어김없이 인체도 그렸다. <그림그리기전 다함께 당 충전 ⓒ참여연대> 서로의 그림을 보며 동기들과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그러나 남의 그림을 보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선이 어떻다 하는데 무슨 소린지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그림에서 내 것 과 다른 점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말하면 그것이 칭찬이었고 나는 그것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선생님께서는 한 명 한 명에게 이런저런 말씀을 해주셨다. 때론 또박또박 어쩔 땐 역시 어리둥절스런 말씀을 해주셨다. 마음속 느낌과 손맛은 멀고 멀었다. 앗! 그리고 우리 모두의 생애에 첫 누드 크로키. 벗은 누군가를 본다는 것은 둘째고 유난히 짧은 5분과 7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델이 맞춰 둔 알람 소리에 여기 저기 아스라히 퍼지는 한숨과 서둘러 종이를 넘기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들이 문득 그립다. 그리고 서로 모델을 서 줬었다. 다른 사람을 뚫어져라 보고 또 보았던 수많은 10분들. 가슴이 미어지게 짧은 시간들이고 내 맘과 머리엔 앞에 선 사람만 오롯이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큰 재미는 전시의 준비였다. 뭐 대단하다고 벽에 걸어두고 보고 보여주는가 싶지만 나의 무엇이 벽에 걸린다는 것 자체로 뿌듯했다. 먼저 간단한 회의 자리에서 각자 일을 맡았다. 누구는 포스터를 그리고, 누구는 라벨을 만들고 누구는 액자를 사고 또 누구는 시장을 봤다. 벽에 우리가 그린 그림을 걸고 각자의 그림에 솔솔 묻어 나는 동료들의 색깔과 선을 칭찬했다. 그리고 마지막 간식을 진실로 배가 터지도록 무지막지하게 먹었다. 우리 그림은 1주일 동안 오가는 사람들 앞에 나름 자랑스럽게 걸려 있었다. 전시 마지막 날 우리는 같이 모여 우리 작품을 거두었다. 이번엔 몇몇이 모여 간식이 아닌 저녁을 먹었다. 괴상한 자리였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뜬금없이 사랑이란 말이 오갔다. 남에게 지지 않을 만큼 삶에 볶이고 치이면서 사랑 따위 감상이야 이젠 먼 단어가 될 법한 나이들이었다. 대한민국 아줌마들의 명예를 걸고 사랑 말고 우다다 쏟아 놓을 소제는 무궁무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이런 유치찬란한 단어가 튀어져 나왔는지 역시 기억에 없다. 그리고 우리의 낯선 사랑 타령의 마지막은 한 분이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보셨다는 문구로 마무리 되었다. "그 또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그 또는 그녀가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란다.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라니. 어머나 설레어라. 참으로 오랜만에 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액자설치, 조명 조정, 음식 준비 등 전시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가 함께했다 ⓒ참여연대> 취미를 한 답시고 약 1년 반 동안 토요일을 화실에서 보냈다. 개인적으로 사람을 그리기가 제일 어려웠다. 눈, 코, 입, 팔, 다리만 그리면 됐다 싶지만 그 사이사이 뭐가 많아서 골치가 아팠다. 끌어 모을 수 있는 모든 집중력을 쏟아 부어도 보는 것과 그린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깊고 넓었다. 나아가 똑같은 사람은 세상에 없다. 한 명 잘 그려냈다고 하늘을 펄펄 날았던 내 자신감은 다른 사람을 그리다가 땅속으로 여러 번이나 곤두박질 치곤 했다. 그렇게 다르다. 얼굴이, 몸이, 사람이 다르다. 똑 같은 대상을 그려도 첫번째 그림과 두번째 그림이 다르다. 나에게 그린다는 것은 무엇인지 몰랐고 알고 싶었었다. 나와, 다른 사람과, 그 시간과, 그림이 세상에 하나 뿐인 귀하고 소중하여 대체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도 모르게 알아가기 때문에 그리고 있지 않았어나 싶다. 금요일 저녁마다 모여 앉은 우리가 생각난다. 간장 한 방울 같은 기억력 때문에 아직도 얼굴과 이름의 짝이 희미 하다. 그럼에도 다른 목소리와 손으로 오로지 "내"가 되었던 거기 그 수업에서 우리는 엄마도, 선생님도, 딸도 아닌 대체 불가능한 스스로였다. 아름다웠다. “인체드로잉”이 그랬다. <대체 불가능한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들 ⓒ참여연대> |
||||
[경제학 고전읽기 1] 애덤 스미스 <국부론> | [후기] 경제학 고전 읽기 <국부론> 제2강('19.6.11.) - 도덕감정론을 중심으로 | 고무곰돌 | 2019.6.18 | |
애덤스미스의 생애와 주요 저작의 간략한 소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첫 번째 시간에 이어 이번 시간에는 첫 번째 시간에서 미처 다루지 못했던 주요 저작의 내용을 살펴보고 <도덕감정론>의 구성과 주요 골자를 짚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난시간 교수님의 열강이 이어지다 보니 계획된 진도보다 다소 지연되었는데요, 그걸 염두에 두셨는지 상당히 속도감 있으면서도 진지하게 설명해주셨습니다. 강의 전반부에는 저작 중 <철학적 주제에 있어서의 천문학 역사 에세이>라는 다소 생소한 책에 대해 상세히 소개해주셨는데 총 분량은 150여페이지 정도로 학자들의 천문학 연구내용이 100여 페이지를 차지합니다. 제목처럼 천문학의 변동과정 분석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 책에서 눈여겨 볼 점은 과학적 현상을 바라보는 세가지 시각입니다.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움을 증명하듯 surprise 다음에는 왜 그런지 의심하게 되는 wonder 최종적으로는 경이롭게 바라보는 admire의 단계로 이행된다고 하는데 여기서 상상력의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이해(연결)가 안되는 상황에 직면하면 제대로 매끄럽게 설명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있기 떄문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즉 상상력은 사고의 괴리·단절을 매끄럽게 연결해주면서 질서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워하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게 되고 이해한 이후 감탄과 경이로 나아가게 되는 과정에 대해 교수님께서는 철판위에 쇳가루를 올려놓고 그 아래 자석을 갖다대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예로 들어주셨습니다. 슘페터가 독창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다고 평가한 <국부론>에 대해서는 보이지 않는 손, 개인의 이익, 자본, 자유방임주의와 같은 개념들이 각각 Mandeville, 자연법 전통, 중농주의, 로크·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여러 학자들이나 학문적 입장에 분산되어 있던 여러 개념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의미가 있다고 평가해주셨습니다. 이어 오늘 강의의 핵심인 <도덕감정론>을 살펴보았습니다. 1790년 애덤 스미스가 사망하던 해 마지막 수정증보판이 발행된 이 책은 아래와 같이 총 7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단히 논리성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며 마지막 7부는 이론사에 해당됩니다.
가장 중점적으로 살펴본 부분은 동감(sympathy)의 원리였습니다. 동감은 윤리(도덕)의 근거로서 애덤 스미스는 기존의 이성, 신, 양심 등과 같은 선험적인 것들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에서 찾았는데요, 이는 유럽대륙의 이성중심주의와는 결을 달리한 스코틀랜드의 전통으로 허치슨을 시작으로 그의 제자인 흄, 스미스에게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감은 타인과 감정들을 공유하는 인간의 본성으로 동물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 또 하나 지나칠 수 없는 것이 Adam Smith problem입니다. 이는 독일의 역사학파가 19세기부터 제기한 주장으로 도덕감정론의 도덕세계와 국부론의 시장경제 세계가 서로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는 국부론에서 이야기하는 이기심과 도덕이 과연 조화를 이룰 수 있는냐의 문제이기도 한데요, 공정한 관찰자는 타인보다 자기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이기심을 추구하고 경쟁을 통한 부의 추구를 승인하기는 하지만 공정한 행위가 아닌 것은 부정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애덤 스미스의 체계내에서 해결이 가능해집니다. 그렇다해도 의문은 남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독과점 같은 불공정경쟁이 판치는 현실에서 정말 이 두 세계의 양립이 가능하기는 한걸까요? 쉽지 않은 문제라는 교수님 의견에 수강생들의 질문과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현대 주류경제학에서는 egoist와 self-interest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의견. 애덤 스미스의 신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질문, 헤겔의 간주관성과의 관계 등 의미있는 생각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작성 : 자원활동가 민동섭 <더보기> |
||||
한국사회 이슈 따라잡기 공부모임 | [후기] 5/30 한국사회 이슈 따라잡기 3 _한국교육의 길을 묻다 | 마백 | 2019.6.14 | |
한국의 교육 난맥상에 대한 백가쟁명식 논의는 더 이상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의 이해와 관점이 얽혀 있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요구사항과 해결책을 주장합니다. 이런 일들은 정권과 관계없이 지속되고 있는데요. 새로운 대학입시제도 개편안에 대한 권고안을 도출하기 위해 지루한 논의와 소모적인 논쟁이 벌어진 작년의 사례만 봐도 그렇습니다. [한국사회 이슈따라잡기]의 5월 강좌는 이런 교육 현실과 해결책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강사를 맡아 주신 징검다리교육공동체의 강민정 대표는 30여년동안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셨던 경험을 바탕으로 실제 교육 현장의 실상과 개선 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강의의 시작은 교육기본법 제2조에 명시되어 있는 한국 교육의 목적에 대한 것을 살펴보는 것이었습니다.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중략)……..,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목적으로 한다”와 같은 조항인데요,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만큼 잘 구성된 문장입니다. 강의 중에 주목한 것은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에 대한 부분입니다. 기본법에 이미 우리의 교육은 필요한 지식의 전달 만이 그 목적이 아님을 명시하고 있는데, 실제 학교에서의 교육은 긴 시간동안 시험을 잘 보게 하는 아이들을 양성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마음은 한국 교육과 관련된 지표를 보면서 더욱 커졌는데요... 잘 알려져 있듯이, 한국은 국제 학업 평가에서 매우 우수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60~70개국의 아이들과 비교했을 때, 한국 학생들은 수학과 과학 등에서 항상 3~5위 안에 들 정도로 훌륭합니다. 그러나, 이런 시험 성적의 이면에는 전혀 다른 결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 학생들의 학업에 대한 내적 동기(흥미)는 전체 대상국 중 58위에 머물고 있고, 자아 효능감은 62위, 자기 신뢰도는 63위, 자살률 2위 등의 결과도 같이 존재합니다. 이런 결과를 입체적으로 해석해 보면, 한국의 학생들은 공부하는 것에 거의 흥미가 없으면서도, 무슨 이유인지 매우 공부를 잘 합니다. 공부를 그렇게 잘 하는데도, 무슨 이유인지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과 자신감은 매우 낮습니다. 강민정 대표의 말처럼 10대의 파릇파릇한 아이들의 마음 속에 커다란 괴물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여전히 과도한 학습의 부담 속에서 스스로를 갉아 먹는 순간에도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4차 산업 혁명으로 표현 되듯이, 빠르게 개발되고 있는 기술 혁신과 사회 구조 변화는 현재 10대들의 직업 선택을 크게 바꿀 것으로 보입니다. 단순히 미래 사회의 유망 직업 등을 나열 하면서, 아이들을 이런 직업군으로 밀어 넣는 일들이 이제는 거의 쓸모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단순히 정보를 암기하고 있는 것이 무의미해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과 협업하여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존중과 다양한 문화적 소양, 의사 소통 능력이 중요한데요.. 하루 종일 공부 노동에 시달리는 우리 10대들이 이런 능력을 제대로 키워나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강사이신 강민정 대표도 이와 관련된 우려가 많으셨고, 강의 참가자들도 모두 큰 걱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학교를 바꾸어 가는 것에 있습니다. 현 경쟁 위주의 교육 문화를 우리가 법에 명시한대로 학생들이 자립하고 민주시민이 될 수 있게 도와주는 방향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강민정 대표께서는 혁신학교에서 근무하신 경험을 공유해 주셨습니다. 각 지방자치단체의 교육감을 시민들이 직접 선출 하게 되면서, 교육 정책과 철학의 큰 변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혁신학교인데요. 학교가 혁신학교로 지정되고 교육에 대해 교사들이 토론하고 실험 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학교의 분위기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한 내용이어서, 참가자들이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례로 교사와 학생들이 하나의 사안에 대해 큰 의견차이가 있을 경우, 한 자리에 모여 서로 의견을 나누고, 마지막에 투표를 통해 결정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의사결정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런 일련의 과정이 학생들에게 내가 삶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가질 수 있게 하고, 민주주의를 학습하게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시민단체의 경력을 가지고 있는 강의 참가자께서 큰 관심을 보이셨는데, 시민단체라 하더라도 민주적인 의사결정에 큰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학생 시절에 습득하고, 평생 체화 해야 하는데, 우리의 기존 교육은 그렇지 못 해, 어른이 되어 인식이 바뀌어도 태도는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혁신학교를 통해 더 많은 사례가 전파되고, 학생들의 자주권을 더 많이 보장해 주는 변화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강의 후에 질의 응답 시간에도 학교 교육 시스템이 너무 느리게 변화하고 있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강민정 대표는 오랜기간 정착되어 온, 극단적으로 지식의 습득만 강조하는 상황에서, 조금 더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식의 습득보다 기존의 지식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능력을 중요시하는 관점에 기초해, 학교의 시스템을 더 과감하게 개혁해 나가야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특히, 교사의 역할을 강조하셨는데요... 학교는 교사가 변하는 만큼 변하기 마련이어서, 새로운 교육 실험과 혁신에 대한 교사들의 노력이 장려되어야 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더불어 내 아이만 차별화 시켜 유명 대학에 입학시켜야 한다는 부모들의 의식이 교육 혁신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합니다. '내' 아이가 아닌 '우리' 공동체의 아이로 학부모들의 의식이 확장되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고, 많은 참가자들이 가장 크게 공감한 지점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더디게 변하는 학교의 모습에 대한 안타까움이 많이 표출되었지만, 혁신 학교의 사례와 같은 긍정적인 변화를 들을 수 있어서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강민정 대표께서 혁신 학교에 몸 담으시면서 경험하셨던 변화를 직접 설명해 주셔서 더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강 대표님의 말씀처럼, 지금의 교육과 학교 시스템은 세상의 변화와 동떨어져서 표류하고 있습니다. 이를 지적하고, 새로운 전환을 이끌 시민의 요구가 더 커지길 기대하고, 여러 의미있는 사례들이 널리 퍼져 나가길 기원합니다. 후기 정리: 전병옥 / 자원활동가 |
||||
[경제학 고전읽기 1] 애덤 스미스 <국부론> | [후기] 경제학 고전 읽기<국부론> 제1강('19.6.4.) - 애덤 스미스의 생애 | 고무곰돌 | 2019.6.10 | |
왜 역사를 공부하는 가라는 질문에 대해 아리스트텔레스는 “무언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것의 기원과 발전과정을 살펴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경제학의 출발점으로서 현재 자본주의 경제제체의 핵심인 시장의 효과를 강조했던 애덤 스미스와 그의 저작 <국부론>을 이해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의의가 클 것입니다. 특히 정부의 개입을 비효율적이면서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것으로 여기며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시장만능주의, 자유시장주의의 뿌리로 오용하는 경우가 많은 우리 사회의 풍토에서라면 더욱 더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정치·경제·사회·철학·국제 등 많은 분야를 망라해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기르려는 시민들의 배움터 역할을 해온 참여연대의 느티나무 아카데미에서는 2019년 여름학기 고려대학교 김균 교수님을 모시고 경제학 고전읽기 시간 – 아담 스미스 <국부론> - 을 마련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생애는 어떠했을까요? 1723년 스코틀랜드 커칼디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애덤 스미스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는데요, 첫 번째로 그의 전기를 집필한 J.Rae에 따르면 스미스는 심한 건망증이 있지만 강한 집중력에 내성적인 성격으로 고지식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다고 합니다. 기술혁신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한 슘페터는 great synthesizer로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계몽주의 풍토가 강했던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에서 도덕철학을 수학한 그는 1750년 글래스고 대학 논리학 교수를 거쳐 1752년 도덕철학 교수로 부임하게 됩니다. 당시 도덕철학은 자연신학, 윤리학, 법학 및 정치학, 경제학 등의 실용학문으로 구성되어 있던 분야였는데 1759년 우리가 잘알고 있는 <도덕감정론>을 펴내어 일약 유럽의 정상급 학자로 부상하게 됩니다. 1764년부터 2년여 동안 당시 엘리트 교육의 최종단계로 유행했던 그랜드 투어를 통해 볼테르, 중농학파인 키네, 투르고 등과 교류하기도 한 그는 귀국후 1776년 그 유명한 <국부론>을 펴내게 되고 에딘버러 세관장을 거쳐 1790년 세상을 떠납니다.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난 뒤 느티나무의 아카데미의 하이라이트 수강생간 의견 교환 및 질의 응답이 이어졌습니다. 언제나 초반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지만 막상 정리할 시간이 되면 그날 강의의 감상 및 자신의 의견을 얘기하는 시간이 길어지기 일쑤인데 오늘도 정해진 시간을 넘겨 열띤 논의가 펼쳐졌습니다. 질의중 가장 핵심적이었던 것은 도덕감정론과 국부론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두 저작의 관계를 각각 별개로 보는 입장과 서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는 두가지 시각이 존재하며 본인은 후자의 입장에 서있으며 향후 이어질 강의에서 차차 그 부분을 같이 생각해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저녁에 참여연대 부근을 지나가던 한 주민께서 지나가다 강의 안내문을 보고 수강하러 오셨습니다. 처음 참여연대에 오신터라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열띤 강의와 적극적인 참여가 마음에 와닿는다는 소감을 밝혀주셨는데요, 강의가 시작되기는 했지만 애덤 스미스로 가는 입구를 안내하는 내용 정도만 진행된 상태이니 관심있는 분들은 어려워하지 마시고 느티나무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
||||
[제미란의 창조성놀이학교] 모든 사랑을 누비다 - 책과 바느질 | [후기] 제미란의 창조성놀이학교-'사랑을 누비다' | 개똥이 | 2019.6.8 | |
- 낮설음 그리고 설레임이 공존했던 6주는 적당한 속도로 흘러갔다.
다시 시작한 서울살이 5년만에 참여연대 아카데미에 문을 두드렸다. 카페통인에서 차를 마시고 숱한 전시회를 보았지만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번 수업을 선택하는데 두가지 단어가 크게 작용을 했다. 신뢰 그리고 창조성. 이미 ‘제미란의 창조성 놀이학교’ 수업을 경험한 분을 알고 있었고, 그 선생님의 선택이라면 믿고 선택할 수 있다는 신뢰가 있었다. 그래서 그 수업이 무슨 수업인지조차 모르고 기다렸는데 봄학기 프로그램이 오픈되고보니 ‘창조성’이라는 내 인생에 꽤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단어가 포함된 수업명이었다. 그리고 이번 학기에는 바느질로 사랑을 누빈다는 부제가 적혀있었는데,, 바느질과 사랑이 만나서 어떤 창조성을 자극할지 궁금해졌다. 또한 벨훅스의 <올 어바웃 러브>라는 책을 함께 읽을 것도 기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형성된 커뮤니티 안에 들어가는 것은 낮설고 긴장되었다.
이런 설레임과 긴장으로 시작된 창조성놀이학교는 회차가 진행될수록 편안하게 다가왔고 매주 다른 시와 텍스트를 읽고 서로의 경험과 느낌을 나누며 서서히 긴장이 풀렸다. 또한 기존 회원들의 관계를 한 발자국 떨어져 지켜보면서 축적된 시간이 만들어낸 촘촘한 신뢰와 연대감 그리고 짙은 사랑을 볼 수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언어가 존재하고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었고 서로를 향한 존중이 자연스럽게 스며있었다. 매주 여는시와 닫는시를 준비하는 사람은 참여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시를 찾으며 행복한 고민을 했고, 챕터별로 발제를 준비하는 사람은 함께 나누고 싶은 문장을 고르고 발문을 하며 유쾌한 고민을 자청했다. 더불어 바느질로 한땀한땀 수를 놓고 누비는 과정에서 우리는 단순한 반복적 행동이 주는 평화로운 명상의 순간을 맛보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와 개개인의 창조성은 우리들을 디자이너로 만들었다. 가방의 모양을 고민하고 조끼를 재단하고 이불의 배색을 맞추는 우리들은 천과 실 바늘을 친구삼아 창조성놀이학교에서 재미있게 놀았다. 재미있었던 놀이의 경험과 기억은 이미 다음학기에 대한 호기심과 설레임으로 자리잡았다.
마지막 시간에 받았던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을 적는 것으로 후기를 마무리 하려고 한다. - 바느질은 당신에게 무엇이었나? 나에게 바느질은 다른 시공간으로 넘어가는 다리였다. 바늘이 들고나는 반복적인 행위를 계속 하다보면 시간이 흐르다가 멈춘듯한 느낌을 받고 바느질을 하는동안 오르락내리락하는 숱한 생각과 감정들은 어느순간 정적인 상태가 되었다. 그냥 묵묵히 제 속도로 걷다보면 도착하는 그곳이 있고 그 중간중간에 만났던 널뛰는 감정들도 반복적인 행위 안에서 평정상태로 찾아드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또한 뾰족한 바늘이 가는 실과 짝을 이뤄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면을 보고 있으면 ‘시간의 축적’데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난 6주동안 무엇을 경험했나요? 사실 이미 형성된 커뮤니티 안에 흡수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어색함이 있었다. 그러나 한주한주 시간이 갈수록 편안해짐을 느꼈고 서로를 향한 정과 마음씀은 관계의 온기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개인적으로는 ‘3ㅍ’(편견, 판단, 평가)에 집중했었는데 사람과 상황에 대한 내 안의 편견과 판단, 평가가 올라올때마다 짧은 알아차림 명상으로 ‘3ㅍ’을 견제하고 생각과 감정을 환기시키는 연습을 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
||||
[노년 배움 서클] 고령화 시대의 아픔과 돌봄 | [노년 배움 서클] 고령화 시대의 아픔과 돌봄 | annbon | 2019.6.4 | |
지난 1월 마음의 준비도 없이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역시 마음의 준비 없이 홀로 남아 힘들어하시는 아버님을 보면서 전에는 해보지 못한 노년과 질병, 죽음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늙은 부모님이 있는 자식으로서나 노후를 준비해야 하는 중년으로서 내가 얼마나 노년에 대한 생각과 준비가 부족한지 깨달았다. 그런 차에 마침 참여연대에서 ‘노년배움서클’ 강좌안내를 보게 됐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이 강좌가 일회성이 아니라 수년전부터 계속돼온 배움서클의 연장이었는데도 나는 처음 보는 강좌였다니 내가 그동안 얼마나 노년 문제에 관심이 없었는지를 반증한다.
총 5회 모임 중 세 번은 전문가 강의로, 두 번은 독서모임으로 이뤄졌다. 전문가 강의는 노년에 대한 배경지식이나
심각한 고민이 없었던 나로서는 많은 정보를 알게 되고 생각해볼 거리를 얻게 된 유익한 시간이었다. 고령화를
사회적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을 들으면서 고령화가 단순히 접근할 문제가 아니구나… 생각하게
됐고, 현재 우리나라 노인돌봄 제도의 상황과 문제점에 대한 강의에서는 노령화의 속도를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에 놀라기도 했다. 마지막 강의에서는 현직에 계시는 요양보호사의 말씀을 통해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우리 사회 분위기를 또 한번 통감했고 생각보다 허술한 제도와 인프라에 실망했다. 강의
자체도 좋았지만 이후 질의응답이나 조별 나눔을 통해 다양한 연령대와 환경을 가진 구성원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밝히는 다양한 의견을 듣는 것도 좋았다. 두 번 있었던 독서모임에서는 고령화, 아픔, 돌봄 등을 주제로 한 책을 읽고 조별로 모여 각자의 감상을 나눔하고 나중에 다 모여서 각 조의 의견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조별 모임에서 각자의 상황에 따라 책에 대한 감상이 다른 것도 흥미로웠고, 각 조의 구성원에 따라 발표내용이 상이한 것도 재미있었다. 생각해보니 강좌를 듣는 분들이 연령도 환경도 다르고 또 이 강좌를 선택하게 된 이유도 다양하다는 점이 강좌의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노인에 대한 개념은 별로 긍정적이지 않다. 책이나 방송에서 노인의 이미지는 오랜 세월을 경험하면서 더욱 품이 넓어지고 현명해지는 모습이지만 현실에서는 오히려 갈수록 더욱 고집스럽고 탐욕을 부리는 모습을 많이 접한다. 노인이 단순히 돌봄의 대상이나 사회적 부담의 원인이 아니라 지금껏 살아온 오랜 세월만으로도 가치 있고 존경받을만한 사회구성원으로 인식되기를 원한다면 젊은이들의 무조건적인 공경을 강요하거나 ‘내 나이가 어때서’ 같은 수사로 자위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초고령화 사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노인이 생산적이고 주체적인 사회구성원이 되려면 실질적으로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 다각적으로 고민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
||||
권리는 어떻게 권리가 되었나 | 권리는 어떻게 권리가 되었나 | mondragon | 2019.6.3 | |
건물주의 갑질과 세입자의 권리, 동성애 혐오, 난민의 인권 등 요즘 세상을 떠들썩하게 채우는 뉴스들입니다. 이런 권리의 충돌을 현명하게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권리는 계약, 법률, 상식에 의해 주어지며, 각각에서 법률관계가 파생됩니다. 우리나라는 법치주의의 예측 가능성을 통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합니다. 민주주의와 더불어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개념은 법치주의입니다. 법치주의에 의해 기본권을 보장하고, 자의를 배제하고,사법심사제도를 통해 아직까지 법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은 권리를 구제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강아지 앞에서 어떤 짓을 해도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 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대방과 격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에게는수치스러움이 없어집니다. 국민을 개, 돼지로 보고 범죄를 저지르고도 뻔뻔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유명인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런 잘못된 자의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법치주의의 중요한 개념인 자의의 배제가 잘 이루어 져야합니다. 인권에 중하지 않음과 더 중함이없기에 우리 사회 구석 구석 법률이 잘 작용하길 바랍니다. 나는 일상생활에서 격을 따진 적이 없었던가 반성해 봅니다. 유명 놀이공원에서 위급상황 발생시 구조의 어려움이 있다는 이유로 시각 장애인의 놀이기구 탑승 권리를 제한했다고 합니다. 위법입니다. 타인의 권리를 나의 선입견으로제한한 적은 없는지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야 함을 느낍니다. 권리는 확장하고 발전합니다. 부당함을 느낀 소수자의 입법투쟁으로 법률이 만들어지고 그에 따라 권리가 생깁니다. 소수자 보호와 권리보호가법률의 중요한 기능입니다. 상식에 의해 권리가 생겨나기도 하지만, 상식이 지배하는 사회는 위험합니다.
위의 헌법 내용을 마음에 담아 두어, 나의 또는 내가 지지하는 소수자의 권리에 대해 당당히 주장하고 밝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류의 역사는 노인에서 아동으로, 또 여성에서 장애인으로 보편적인 권리가 확장되는 역사였습니다.
혐오하는 것은 권리가 될 수 없습니다. 권리는 공존하기 위한 도구이므로 관계 위에 존재합니다. 흡연을 반대하는 것은 혐연권이 아니라건강을 지키고자 하는 건강권입니다. 혐오가 난무하는 시대에 법에 기대어 제재를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겠지요. 불법의 판결이 나더라도 그것을 즐기고 오히려 이용하는 부류가 있을 테니까요. 사회적 인식변화를 이루어 내는 것이 건강한 사회입니다. 무면허로 자동차를 몰며 사고를 낸 고등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경찰차가 추격하자 차를 버리고 야산으로 도주합니다. 두 팀으로 나뉘어 도망가는바람에 경찰도 두 팀으로 나뉘어서 그들을 쫓습니다. 한쪽 팀은 경찰에게 잡혔는데, 다른 한 팀은 쫓아가서 잡는게 무리였는지 경찰이 총을 꺼내도망자의 다리를 쏩니다. 불행히도 대퇴부 동맥이 명중되어 과다출혈로 사망에 이릅니다. 피해자의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에 승소하여 보상을 받습니다. 과잉 금지 원칙, 비례원칙입니다. 국가의 개입은 최소 침해해야 하고 너무하면 안됩니다. 적법한 제한이냐, 위법한 침해냐를 항상 따져보아야 합니다. 권리의 충돌시 권리1을 배제하고 권리 2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비례원칙에 따라 대안을 찾는 것입니다. 나의 권리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예민하게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질의 응답시간에, 담배 혐오와 동성애 혐오를 비교해 봤는데, 동성애는 존재자체이기 때문에 부정의 논리자체가 성립되기 어렵다는 내용을 공부했습니다. 흡연자도 자신의 흡연이 존재자체라고 주장할 수 있지 않은가 생각되지만 법이 공익을 위해 건강권을 지키기위한 방향성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법치주의의 법률은 방향성 제시만으로도 의미를 가진다는 내용이 법의 한계를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변화와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인상 깊었습니다.
국가는 공익 또는 위험의 여부 정도에 따라 금지, 승인, 면허증 제도, 신고 제도를 마련해 놓고 권리를 제한합니다. 위의 헌법 내용은 재산권제한의 특수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국가는 재산권을 보호하지만, 재산권을 제한하기 위한 근거조항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강사이신 김정환 변호사님이 안타깝게 생각하시는 판례를 들어 주셨습니다.
사회적 기본권은 이렇듯 예산의 제약으로 우선순위에 밀려 최소한의 보호를 하는 형태로 유지되어 왔습니다. 사회적 기본권에 대해서는소송보다는 입법행동이 효과적이라는 배움이 있었다는 판례라고 합니다. 어찌보면 국가에 면죄부를 주어 행정이 더 느려질수도 있습니다. 평등권은 비교가 권리의 근거가 됩니다. 국가인권위원회법에는 성별, 종교, 장애, 나이등 19가지 차별의 유형을 나열하고 차별을 금지한다고되어 있지만 사회적 관습, 인식상 실제로는 많은 불평등이 존재합니다. 19세기 철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당시 사회에서 보기드문 급진적인페미니스트 였지만 계급주의자로서의 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현재 의식이 깨어있다고 자부하는 우리들도 어떤 차별인식의 한계를 갖고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회적 관습보다 앞서는 인권법도 사회의 방향성을 제시한다는데 의미를 가집니다. 사회는 계속해서 발전해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더 활발한 사회의 요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더 평등한 사람은 없고 더 챙겨줘야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나 보다는 타자의 권리를 주장해 주시기를 바란다는 당부 말씀이 있었습니다. 수업은 3회로 짧게 마무리 되었지만 시종 유쾌하고 자유로웠습니다. 어려운 법률용어를 최대한 쉽고 재밌게 설명해 주신 강사님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질의 응답시간도 활발하고 심층적인 질문이 많아 수강자들의 지식의 깊이가 대단함을 느꼈습니다. 성실한 무기 징역수처럼 나만의 테두리안에서 되도록 나와 타인의 결핍을 외면하려 애쓰며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좀더 세심하게 주변을 돌아보고 원하는 것을 정당하게,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며 주장해야 함을 그리고 내게 그런 힘이 있음을 일깨운 3주간 이었습니다.
|
||||
[시민연극워크숍] 나를 찾아 떠나는 연극 여행 | 시민연극워크숍 '나를 찾아 떠나는 연극 여행'을 마치고 : 다시 수요일을 기다리며 | 개똥이 | 2019.5.27 | |
<들어가며> 장면 발표가 끝났다. 한 학기 수업이 아름다운 계절의 바람 속에서 모두의 웃음과 누군가의 눈물과 약간의 울컥함 속에서 막을 내렸다. 올해로 참여연대 연극 수업을 들은 지 4년이 되어간다. 학기로는 7학기가 되었다. 친구의 권유로 시작한 연극 수업은 이제 봄, 가을 제일 먼저 일정을 조절하게 만드는 우선 순위가 되었다. 2015년 늦가을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만난 참여연대 첫 연극의 강렬함을 지금도 기억한다. 가슴 절절한 주제를 시민 배우들의 대사와 몸짓으로, 음악과 시로, 조명으로 그토록 생생한 울림을 담아 전할 수 있다니. 감동을 넘어 전율이 느껴지던 시간이었다. 다음 년도에 망설임 없이 등록을 했고 무대에 올랐고 그렇게 세 번의 공연을 했다. 그리고 2019년 봄 또다시 새로운 연극 수업을 듣게 되었다.
새로운 연극 수업. 이번 봄 학기의 연극 수업은 두 가지 갈래로 진행 되었는데 그 하나가 대본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참여자들의 이야기를 모아 가을 공연의 모티브로 삼던 그 동안의 흐름이 조금 더 구체화되었다. 지금까지는 참여자들이 내놓는 이야기를 듣고 연출 혹은 작가가 각색하여 대본을 썼다면 이번에는 각자가 써온 시놉시스에서 공통적인 또는 함께 더 얘기를 나눠볼 수 있는 부분을 꼭지로 삼아 희곡을 직접 써보는 시도를 하게 된 것이다. 묘하게도 각자의 주머니에서 나온 얘기들은 뭔가 공통점이 있었고 그것을 모으고 다듬어 한 편의 희곡을 만들어 보는 것에 대해 논의하게 되었다. 감격스럽게도 회원 한 명이 밑 작업인 「이야기의 뿌리」를 작성하면서 희곡을 쓰는 대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감사와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가득 담아 하트를 ♡♡♡) 처음엔 누구의 어떤 내용을 써야할지 막막했었는데 이야기의 뿌리와 회원들이 올려준 글을 읽으면서 마음에 움직임이 있었고 나의 경험과 주변의 이야기를 버무려 짧은 글을 완성할 수 있었다.(오~ 이 놀라움) 노년과 죽음, 부양의 문제 등을 다룬 내용이 펼쳐질 텐데 최종적으로 어떤 희곡이 완성될지 궁금하다. 더불어 무한한 기대와 신뢰의 눈빛으로 새로운 극작가의 탄생을 기다리는 중이다. 다만 쓸 수 있을 만큼만 쓰고, 대본 작업으로 인해 너무 힘들어하지 말기를 바란다. 우리에겐 연출님이 있으니까~
다른 한 편으로는 안톤 체홉의 ‘바냐삼촌’을 각색한 김은성 작가의 ‘순우삼촌’을 읽고 몇 장면을 연극으로 발표하는 것이었다. 대본을 함께 읽는 시간은 즐거웠고 인물들의 전사와 말 한마디에 담긴 의미, 몸짓을 연구하는 과정이 새롭게 다가왔다. 배우가 달라짐에 따라 다른 맛을 느끼게 되는 장면들을 보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토요일에 진행된 배우의 몸 풀기와 감각 열기 수업 또한 특별했다. 희곡의 배경인 잠실 섬을 둘러싼 한강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모래밭, 갯벌의 진흙, 발바닥 아래 부드럽고 서늘한 풀의 촉감, 차가운 강물, 물 튕겨내기 발장구 치기 등등 하! 상상만으로도 생생한 오감이 느껴지다니.. 희곡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디테일한 수업은 낯익으면서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날 4월의 눈부신 날 진분홍 박태기꽃 환한, 마당 넓은 집에서 참여연대 연극반 최초의 학기 중 엠티가 있었다. 목련 그늘 아래 평상에 앉아 맛있는 음식과 구운 고기, 그리고 음악을 곁들여 마시는 한 잔의 술은 그 곳이 서울 한 복판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비현실적이었다. 멀리 인왕산? 북한산?이 바라다 보이는 뒤꼍의 탁 트인 풍광은 세상의 시름을 모두 잊게 할 만큼 거칠 것이 없었다. 도도한 몸짓의 두 마리 고양이도 함께 했다. 연출님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물건 나누기 시간은 흥미로움과 놀라움, 부러움을 거쳐 따뜻한 시와 노래로 마무리 되었다. 들었지만 가물가물했던 영화와 책이야기는 기록의 대가 회원의 손을 거쳐 선명한 기억으로 남겨졌다. 손바닥 연극이라고는 하지만 배우들은 준비가 대단했다. 대사를 외우는 건 기본, 의상을 준비하고 신발에 악세사리에 화장까지 완벽. 맡은 역할에 자기만의 색을 입혀 자신만의 향기를 뿜어냈다. 대사 한마디에 동작 하나에 연기에 대한 진솔한 고민이 느껴졌다. 이렇게 열심히들 하다니.. 우리 연대(?) 연극 팀이 새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일까? 직장 일로 바쁘면서도 시간을 쪼개 수업하러 달려오고 일정의 최우선 순위에 연극수업을 놓고 정성 담긴 간식을 마련하고 그리고 발표 준비까지.. 사람. 그 원천은 바로 사람이 아닐까? 서로에 대한 믿음, 의리(문 모 배우의 ‘의리’는 언제 말해도 기분이 좋다), 그리고 지나치지 않은 배려와 관심. 무엇보다 연극에 대한 애정, 이끄는 분의 세심함.. 그래서 우리는 연극반 수업에만 오면 더 많이 웃고, 집중하고, 이해하고, 행복해하는 것 같다. 대학 음악 동아리 뒤풀이에서 단골로 나오는 얘기가 있었다. 사람이냐! 음악이냐! 늘 싸웠던 것 같다. 고뇌했고 마찰이 있었고 서로의 의견에 대해 날을 세웠다. 왜 그렇게 이분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을까. 젊은 날의 과도한 열정과 순수함이었나. 그럼 이제 묻는다. 우리는? 참여연대 느티나무 연극반은 무엇이 중심인가? 질문이 유치하다. 나는 생각한다. 연극은 곧 사람이다. 둘을 떼어놓을 수 없다. 우리 삶의 모습이 곧 연극이기 때문이다.
<나가며> 봄 학기 동안 두 편의 연극을 함께 보았고 수도 없이 뒤풀이를 했지만 언제나 갈증은 남는다. 본 수업만큼이나 풍성한 배움과 나눔이 있는 이야기의 바다이기 때문이다. 이 모 배우 왈 ‘뒤풀이는 뒤로 갈수록 재미있는데 이사 오는 게 어때?’ㅎ 매 시간 수업 장면을 찍어 참석하지 못한 회원을 위해 배려해주신 연출님, 회장님, 따뜻한 미소와 준비로 최적의 장소를 마련해주신 간사님, 평균 연령을 낮춰준 신입 배우님. 그리고 우리들 모두 참 수고했고 감사하다. 모두에게 짝짝짝!! 이제 가을 학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그리고 올 가을엔 어느 배우의 말처럼 단풍놀이를 가고 싶다.
|
||||
박상규 기자의 시민칼럼니스트 되기 | [박상규 기자의 시민칼럼리스트] 나와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 | 개똥이 | 2019.5.16 | |
첫 수강 신청은 너무나 충동적이었다.
평소 팔로잉하고 있던 박 기자님의 페북글을 보고 링크를 타고 넙죽 신청을 진행했다. 정작 입금 날이 다가오자 돈을 넣을까 말까 고민했다. 글은 결국 나 자신의 모든 걸 보여주는 것인데, 너무나 낯선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이 꽤나 크게 느껴졌다. 결국 입금하고 수강을 진행하면서 이렇게 글을 고민하며 써본 적이 있던가? 매 수업 시간마다 글 잘쓰는 팁을 톡톡 논술학원 처럼이 아닌 동네 바둑에서 훈수두는 어르신처럼 던지던 박 기자님의 강의도 참 신선했다. 그 시간들이 지나, 내 글이 한 뭉터기로 모였을 때, 나는 조금은 개운했다. 결국 글은 내 안의 무언가를 뱉어내고자 활자를 늘어 놓는 행위지 않을까? 이번 수업에서도 각자의 내면과 생각, 개성을 글로 풀어내는 수강생 동지들 틈에서 나름 배우기도, 찡한 감동을 받기도... 한 번쯤 나와 내가 사는 이 세상을 돌아 볼 때 듣기 좋은 수업이라는 느낌이 든다. |
||||
[느티나무 독서서클 땡땡] 페미니즘, 민주주의, 에로스 | 독서서클 땡땡,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 개똥이 | 2019.5.12 | |
느티나무 독서서클 땡땡은 페미니즘, 민주주의, 에로스라는 주제를 가지고 11명의 참여자들이 자발적으로 꾸려가는 독서모임이다. 첫 번 째 모임은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에서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을 가지고 시작했다. <에로스의 종말>은 얄팍한 책이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철학적, 미학적 차원은 실로 심오하다. 하여 얼핏 읽어서는 저자의 사랑에 대한 철두철미한 논증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한 줄 한 줄 꼼꼼히 읽고 곱씹었을 때에야 비로소 천천히 찾아오는 중요한 손님들을 맞이할 수 있다. 물론 나는 그렇다는 얘기다. 이미 철학적 사유가 깊은 분들은 책을 읽으면서, 어 이 사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구먼, 하고 곧장 한병철의 사유의 바다에 깊이 뛰어들어 유유히 유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읽기를 반복해야 했다. 1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용된 영화<멜랑콜리아>를 봐야 했다. 또,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장면에 불과하지만 그림들이나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도 알아야했다. 그러고나서야 순수한 외부, 즉 타자의 파국적 침입과 구원에 대한 한병철의 이야기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강한 의미의 타자,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 에로스이고, 우울증이 나르시시즘적 질병이라는 것, 또 이 나르시시즘은 성과주의의 자아가 경험하는 대칭적 타자로부터 기인한다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영화 초반부에는 두 행성이 충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에서 충돌하는 두 존재는 대칭적 존재들의 충돌로 바스러지는 것이 아니라 한 존재가 이질적인, (반드시 이질적 이어야 한다) 또 다른 존재를 삼키듯이, 마치 정자가 난자를 향해 돌진하여 완벽하게 흡수되는 모습과 비슷했다. 이것은 죽음 속에서도 스스로를 유지해 갈 수 있어야 하는 에로스의 본질을 잘 표현해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자아는 자발적 자기부정, 즉 죽음을 통해서 완벽히 비워짐으로써만 타자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죽음 앞에서 겁을 먹고 파멸로부터 스스로를 보존하려는 벌거벗은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감내하고 죽음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해가는 삶이야 말로 에로스적인 삶인 것이다. 여기에 에로스의 부정성이 있다. 극단적인 것과 극도의 부정성을 자기 안에 품음으로써 드디어 완결을 이루는 것이다. 헌데 오늘날 사랑은 긍정화되고 (부정성을 참지 못하고 제거해버림) 그 결과 성과주의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됨으로써 성애는 섹시함이라는 증식되어야 할 자본이 되고 벌거벗겨져 전시됨으로써 이질성이 제거되고 이질성이 제거된 타자를 우리는 사랑하지 못한다. 상처와 추락과 같은 부정성을 이제 사랑은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피치노에 따르면 사랑은 전염병 중에서도 최악의 전염병인데 그 결과는 “변신”이다. 강력한 비대칭적 타자에게 흡수된 자아는 전멸하는 것이 아니라 변신하는 것이다. 한병철은 이것을 헤겔의 말을 빌어 “자신의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화해로운귀환”이라고 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또 한가지는 에로스적 관계에서의 ‘근원적 거리 두기’ 이다. 나를 부정하고 타자와 합일 되는 에로스적 관계를 생각하다가 문득 카릴지브란이 예언자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두 존재는 함께 서 있으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며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다고 우리에게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말하지 않았던가? 하여, 다시 에로스의 종말을 꼼꼼히 뒤져보았다. 그리고 책 속에서 근원적 거리 두기 라는 말을 발견했다. 근원적 거리 두기는 타자가 하나의 대상, “그것” 으로 전락하고 사물화 되는 것을 막아준다. 근원거리는 타자를 그의 다름 속으로 놓아주는, 그 속으로 멀어지게 하는 초월적인 예의를 창출한다… 기타 등등 어쩌구 뒷이야기는 읽어보시길 바란다. 에로스의 종말 서문을 쓴 알랭바디우는 한병철의 에세이를 읽는 것은 랭보가 말한 사랑의 재발명을 위한 투쟁이라고 했다. 거기에 슬쩍 덧붙여 말하고 싶다. 바람구두를 신은 사내, 랭보처럼 다른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바람구두를 우리도 어쩌면 신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좁은 두뇌 속에서 한병철과 같은 철학자를 만나고 이질적인 타자의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독서모임을 계속한다면 말이다. |
||||
한국사회 이슈 따라잡기 공부모임 | [후기] 한국사회 이슈 따라잡기2_검찰개혁, 올바른 방향은?_4/25 한상훈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마백 | 2019.5.9 | |
검찰을 포함한 사법기관 개혁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가 많이 높아졌습니다. 마침, 이와 관련된 몇 개의 법안이 국회의 패스트트랙에 올라 가면서, 국회 내의 갈등과 혼잡한 상황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사법기관 개혁의 가장 중심적인 요소는 전세계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검찰의 권력을 분산시키는 것인데요... 이번 강좌에서는 오랜 기간 검찰 개혁 문제에 대해 연구하고 개선 방안을 제안해 오신 연세대 한상훈 교수로부터 조금 더 깊은 내용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한상훈 교수는 국민들이 일상 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만족감과 행복에 주목 하면서, 검찰 개혁의 시발점은 이런 국민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일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라는 표현처럼, 한국인은 불평등과 불공정성에 매우 민감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에 걸쳐 체득한 불공정성이 바로 검찰의 편파 수사와 제식구 감싸기 등에 대한 행태입니다. 일일이 거론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례들이 있고, 거의 모든 국민들이 인지하고 있어서, 예민한 국민들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를 주기도 했습니다. 특히, 검찰의 비대한 권력이 경제 권력과 결탁하면서, 갑질과 불평등이 국민의 일상에 뿌리 깊게 스며든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제대로된 주체로서 대우받고 활동’하기 위해서는, 다른 표현으로 삶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이런 검찰의 개혁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입니다.
이번 강좌에서 한상훈 교수는 국민의 공감대가 큰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검찰 개혁이 어려웠던 이유를 몇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1. 검찰의 권한이 너무 막강하여, 비판 자체가 쉽지 않았다.
2. 권위주의 정부에게 검찰의 권한은 매우 유용한 도구여서 개혁을 가로 막았다.
3. 권한을 조정해야 하는 국회에 검찰 출신 의원들이 많아서, 법 제정 자체가 쉽지 않았다.
4. 사회 전반적인 인식이 보수적일 때, 검찰의 막강한 권력을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퍼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검찰을 비롯한 권력기관의 개혁에 대한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 사례는 일제시대까지 거슬어 올라 가는데요, 일제시대에 막강한 권력을 쥐고 국민을 탄압하던 경찰의 문제점이 해방 직후에 부각되어 역으로 검찰에게 거의 모든 권력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시적인 사항으로 국정이 안정되면 다시 조정이 이루어 졌어야 하는데, 권력의 맛에 길들여진 검찰에 의해 번번히 좌절되어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검찰 권력의 과대화에 대한 부작용이 심해지면서, 권력을 어떻게든 분산시켜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도 같이 증가했습니다.
수사권을 비롯한 검찰 권력의 분산은 외국의 사례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연방국가인 미국은 수사는 경찰, 기소는 검찰로 분리되어 있고, 각 주의 검사장은 주민의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됩니다. 독일과 일본 등도 모두 비슷한데, 수사의 권한은 경찰에게 주고 검찰은 수사의 보완적인 역할을 하거나 기소만 담당하고 있습니다. 검찰과 경찰에게 권력이 분산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런 사례만 보더라도 검찰에게 모든 권력이 모여 있는 우리의 상황이 얼마나 기형적인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검찰 개혁의 방안으로 많이 거론 되었던 것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설치입니다. 현재도 여러 논란이 있는데요... 1996년에 참여연대 등이 처음 제안한 바가 있으니, 제법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수처는 검찰 및 사법부가 고위 공직자들의 비리를 눈감아주거나,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했던 사례를 바탕으로, 부정부패를 근절하고 검찰의 기소독점을 분산시키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공수처는 고위공직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별도의 독립기구로서, 여야 합의에 의해 수장을 결정하게 됩니다. 현재의 야당이 주장하는대로, 자칫 권력의 야당 탄압 도구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인데, 법률 제정 과정에서 원안의 의미가 후퇴할 가능성이 우려됩니다. 그러나, 한상훈 교수는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시작하는 것에 의미를 두자고 얘기하면서, 오히려 임기가 너무 짧아서 조직의 안정성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운영에 대한 조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강좌 후에 가졌던 질의/응답 시간에도 공수처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특히, 공수처가 검찰 권력의 ‘옥상옥’이 될 수 있고, 야당 탄압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일부의 우려에 대해, 법안의 세부 내용과 제정 취지를 잘 인지해서 대응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전반적으로 한상훈 교수를 비롯한 강의 참가자들의 견해는 검찰 권력은 반드시 분산되어야 하며, 공수처는 하나의 방안으로 의미가 크다는 것입니다.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과 더불어서 말이지요... 공수처는 홍콩이나 몇몇 국가에서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고, 고위 공직자들의 비리를 줄이고 권력을 감시하는 데 매우 효율적인 기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소 복잡한 내용이지만, 시민사회가 이에 대한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압력을 행사하여 법안의 통과를 견인해야 과거 사례처럼 중간에 흐지부지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작성자: 전병옥 (자원활동가) *더보기 |
||||
박상규 기자의 시민칼럼니스트 되기 | [박상규 기자의 시민칼럼리스트 되기] 이야기와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있는 곳 | 개똥이 | 2019.5.7 | |
글을 쓰고 싶었다.
하루에도 수십 장씩 작성하고 읽어 내려가는 보고서가 아니다. 뻔한 주제로 결말을 짓는 사업 홍보물도 아니다. 진짜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정말로 재미있는 이야기로 쓰고 싶었다.
느티나무아카데미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눈에 띄는 수업을 찾았다.
썸네일이 조금 특별해 보였을까? 아니면 ‘시민칼럼 리스트 되기’라는 말이 좋았을까? 이도 저도 아니면 요즘 대세인 박상규 기자를 실제로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수강신청을 마친 상태였다.
< 요즘의 대세(?)인 박상규 기자는 츄리닝을 입고 강의를 했다. 전날 바쁜 일정으로 집에 들리지 못하고 바로 강의장으로 왔다고... ⓒ참여연대 > 마음이 아득했다. 주말도 아닌 평일에 수업을 6주 동안이나 참여하겠다니 야근을 밥 먹도록 하는 대한민국 직장인에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래도 막상 저질러 놓고 나니 걱정과 후회보다는 기대감이 손톱만큼 더 컸던 것 같다. 마음 한 구석에서 조그마한 흥분에 가슴이 뛰었다.
살짝 긴장한 마음으로 첫 수업에 참여했다.
수업의 강사인 박상규 기자님은 첫 수업시간에 엄청난 자기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날 대부분의 시간은 강사의 어린 시절 가족이야기와 양진호 특종 이후의 현재 모습을 이야기 하는데 사용됐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쓰는지 이야기가 나올까 싶은 시점에 별안간 숙제가 주어지며 수업이 끝났다. 뭐지? 나 제대로 온 것 맞아?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 인생의 음식을 주제로 한 첫 숙제부터 시작해서 6주간 다섯 편의 글을 써내려갔다. 엉성한 마무리로 결말을 짓지 못한 처음과 달리 점점 글을 쓰다 보니 어떤 형태로 글을 써내려가야 하는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각자가 준비해간 글을 수강생들이 함께 읽으며 소감을 나누는 합평회에서는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는 솔직한 비평들이 오갔다. 이러한 평가와 조언들은 점차 수강생들을 칼럼가의 길로 한 발짝 들어서게 만들었다.
직접 글을 써보니 왜 강사가 첫 수업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털어놨는지 알게 됐다. 살아있고 생명력 있는 글의 주제는 결국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에서 찾아야 했던 것이다. 이런 글은 평범한 우리를 신문지 칼럼속의 김훈과 고공 크레인 위에 올라선 김진숙처럼 만들었다. 누구나 각자의 인생에서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 들이 있었고,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해서 이것을 글로 엮어 내려갔다.
‘아랑촌’이라는 망해버린 식당을 찾아가는 여정, 졸업생에게 ‘장관부인이 되라’는 말을 덕담이라고 건 낸 교장선생님 이야기, 의뢰인과의 아쉬운 만남을 계기로 새로운 인생을 찾은 기자님, 그리고 내가 만난 학대받는 아이들과 그 밖에 많은 이야기가 전부 수강생 각자에게 추억이고, 삶이 깃든 것이었다. 주제를 생각하고 표현하며 내면을 치유하는 시간들을 보냈다. 강사는 수강생들에게서 그런 주제를 뽑아내는데 능숙한 재주를 가졌다.
<종강 후 뒤풀이. 역시 글도 좋고 술도 좋다. ⓒ 참여연대>
그렇기 때문에 이 수업은 단연 최고다! 이제 수업은 끝났지만 한동안 잊히지 않고 이 시간들을 그리워 할 것 같다.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 그리고 뒤풀이와 막걸리를…….
<뒤풀이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들.. ⓒ 참여연대> |
||||
[와하학교]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한 행동력 프로젝트 | [와하학교 후기] 대수롭지 않은 것에 대한 저항 | 개똥이 | 2019.5.2 | |
<대수롭지 않았던 것이 사실은 아주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서로를 서로가 불리고 싶은 별칭으로 부르며 평등한 서클에서 대화하고 함께 성장했다. 와하학교 덕분이었을까? 나에게는 두 가지 변화가 찾아왔다. 첫 번째는 [부당한 것에 대해 자기표현]을 하게 되었다. 얼마 전 일이었다. 같은 빌라에 사는 나이 많으신 할아버지는 공용 주차공간에서 유독 한자리를 본인의 개인 주차공간처럼 사용하시고, 다른 입주민들 사용을 막았다. 그 자리에 주차를 한 덕분에 할아버지에게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면서, 오랫동안 내 자리였으니 주차하지 말라는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 예전 같으면,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하며 그냥 피했을 텐데, "이 땅이 할아버지 개인 땅이 아니고 공동의 공간인데, 이러시는 건 말이 안 된다."며 나의 의견을 표현했다. 물론, 와하학교에서 배운 대로 유쾌한 저항이 아닌, 서로 목소리를 높이면서 빌라가 쩌렁쩌렁 울리는 다소 불쾌한 저항이 되긴 했지만, 어찌 처음부터 잘 하랴! 이렇게 첫 스타트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와 서로 화해를 청하는 제스처로 마무리가 되었다. 몇몇 입주민들이 그 할아버지와는 대화가 안 통하니 그냥 말도 섞지 말라는 소리를 들은 터이긴 했으나, 그래도 누군가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그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두 번째 변화는 나보다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지난 일요일, 6살 난 첫째 딸은 교회에서 스티커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교회 동생이 자기 엄마를 데려와, 스티커를 한 장 달라고 청했다. 그 엄마도 곁에서 우리 아이가 스티커 몇 장 중 하나 줄 것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분위기에 못 이겨 한 장을 내어주고는, 딸아이는 내게 울상을 지어 보였다. 내가 물었다. "왜? 스티커 한 장을 주고 싶었던 거 아니야?" 딸은 "스티커 한 개를 주려고 한 거야. 한 장은 아닌데, 엄마가 가서 돌려받아줘~" 나는 줬다가 도로 달라고 하는 상황이 귀찮기도 했고, 그 아이 엄마가 나를 쪼잔하게 생각할까 봐 그냥 넘어가고 싶었지만, 딸의 표정은 무척이나 심각했다. 자기의 의사와 다르게 분위기에 의해 억지로 주게 된 것 때문에 불편해했다. "그래... 네가 말을 못 하겠으면 엄마가 도와줄게. 그렇지만, 너도 직접 가야해. 엄마는 너를 돕는 역할이니 시작은 네가 하는 거야." 스티커 한 장을 돌려받으러 갔다. 그 아이 엄마가 스티커를 사러 가야겠다고 했을 때, 다소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스티커를 돌려받고 자기 자리로 돌아온 딸아이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앞으로도 너에게 강요된다고 해서 억지로 할 필요 없어. 네 생각을 표현해도 되고. 그리고 엄마는 도와줄 수 있지만, 스스로를 위해서 나서는 건 네가 하는 거야." 모르겠다... 주차 문제로 나이 많은 할아버지와 불편한 대화를 하는 것과, 6살 어린아이의 스티커 한 장 돌려받는 일이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전에는 대수롭지 않았다. 귀찮았고, 중요해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와하학교를 통해서, 대수롭지 않았던 것들이... 사실은 중요한 순간들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사익을 주장하며 공익을 해치는 사람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줄 수도 있고, 억지로 강요되는 것을 향해 담대히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기회를 줄 수도 있다. 좋은 시민이 되는 첫걸음은, 어쩌면 아주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아주 작게 나와 내 가족, 주변 이웃과 동료들에게 먼저 실천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실로 위대한 변화는 그렇게 작고 단순한 것들로부터 시작하는 게 아닐까 한다. 나의 변화를 환영하고, 그 변화를 이끌어준 와하학교와 꽃잔디님께 감사하다. 후기를 쓸 수 있게 좋은 영향을 끼쳐주신 댄스님을 비롯한, 와하학교의 여러 동지들께 감사하다. 함께 나누고 웃고, 떠들고 하는 시간 동안 나의 [좋은 시민 행동력]은 한 뼘 더 자라지 않았을까? |
||||
키워드로 이해하는 재벌 중심 한국 경제 | [후기] 키워드로 이해하는 재벌 중심 한국 경제 | ohk | 2019.5.1 | |
<쉬는시간에도 쉬지않고 자료를 들여다보았던 학구열 넘쳤던 재벌경제 강좌 ⓒ참여연대> “조양호 회장의 대한항공 연임 실패”,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재벌의 순환출자 규제”.... 요즘 신문의 경제면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위와 같은 이슈들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쉽게 와닿지 않는 용어들에 지레 관심을 거두어들이는 경우도 다수 존재합니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경제 이슈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좌파 독재의 발흥’이나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위협의 시작’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이슈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그러한 의미에서 이상훈 변호사님과 홍순탁 회계사님이 나누어 수업을 진행하였던 “키워드로 이해하는 재벌 중심 한국 경제”는 한국 경제의 핵심 주제인 ‘재벌’과 관련하여, 최근 이슈들을 중심으로 하여 재벌 총수의 지배력 강화와 상속, 그리고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시장 교란적 경제 행위들을 이해하는 길잡이로서 그 의의를 가집니다. 이 수업은 조양호 일가의 대한항공 지배력 강화를 위한 지주회사 전환 과정에서 벌어지는 각종 수법들, 이재용 재판과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속에 숨어 있는 삼성의 상속 로드맵과 같이, 수많은 경제 기사에서 복잡한 용어를 이용해 설명하고 있었지만, 우리가 쉽사리 다가갈 수 없었던 재벌의 영역들에 대한 명쾌한 경제적 설명을 제시합니다.
<'제가 이해한 바는요..'참가자들은 어떻게 강좌 내용을 이해했는지 서로 설명했다 ⓒ참여여대> 참석자들은 본 수업을 통해 재벌의 이미지에 가려진 민낯을 자주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재용의 원활한 상속을 위한 삼성의 공정거래위원회를 대상으로 한 전방위적 로비를 발견했을 때, 그리고 그에 따라 공정거래위원회의 판단이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을 때를 발견했을 때, 참석자들은 삼성의 ‘똑똑함’에 한탄하면서도 지금 한국 경제 시스템, 그리고 정치 시스템에 노출되어있는 각종 공백들을 재벌들이 이토록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와 일부 언론들이 지속적으로 보여줬던 재벌 친화적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해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와 함께, 이러한 사실들을 접함으로써 ‘재벌 개혁’의 성격과 필요성에 대해서도 보다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재벌 개혁 이슈에 대해 “자기가 일군 것을 자기가 지배하겠다는데, 왜 정부가 간섭하는 것인가?”라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재벌은 자기가 일군 것, 즉 “자기가 소유한 것 이상을 지배하면서 기업 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그룹 내 별다른 견제 장치가 부재하기 때문에 “땅콩 회항”과 같은 사건들이 여전히 자행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땅콩 회항”과 같은 이슈는 단순히 당사자가 인격적으로 결함을 가지고 있거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벌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 재벌에서 드러나는 ‘소유와 지배의 괴리’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재벌 개혁의 본질은, ‘자기가 소유한 만큼 지배하도록 하겠다’는 것에 핵심이 맞춰져 있으며, 즉 ‘소유와 지배의 괴리’가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현재의 기형적인 구조를 개혁하여 공정한 시장 질서를 형성하는 것에 목표가 있음을 이해할 때, 재벌 개혁이야말로 누군가가 그토록 부르짖던 “자유시장경제”에서 최소한의 경쟁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반드시 이뤄져야만 하는 과제일 것입니다.
<삼바 분식 회계사건을 전국에서 가장 쉽게(?) 설명하시는 홍순탁 회계사 ⓒ참여연대> 한편 이번 강의는 경제적으로 생소한 개념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난도가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참석자 분들은 어떤 수업보다도 열띤 자세로 수업을 경청하시는 동시에, 다른 참석자들과 활발하게 토론을 진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강연자에게 활발하게 질의해주시는 등 적극적으로 수업에 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이러한 네 번의 수업과 질의응답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제시된 질문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명쾌한 답변은 다같이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이겠지만, 분명한 점은 “우리 또한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재벌의 전횡을 다룬 경제 이슈를 어렵다고 회피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이에 그치지 않고 한 명의 시민으로서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고자 하는 자세로부터 재벌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마지막으로, 적극적으로 강의를 이끌어주신 강연자 분들과 참석자 분들, 그리고 이러한 유익한 시간을 마련해 주신 ‘아카데미 느티나무’에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 오한결 자원활동가
<강좌의 끝은 언제나 뒤풀이로 ⓒ참여연대> |
||||
한국사회 이슈 따라잡기 공부모임 | [후기] 한국사회 이슈 따라잡기1_ 3/28 한미동맹, 이대로 좋은가_서재정 교수 | 마백 | 2019.4.14 | |
2017년 정권교체 이후 한반도를 둘러 싼 국제 정세의 많은 변화가 있었고, 현재까지 진행중입니다. '햇볕정책'으로 명칭되는 것처럼, 북한과의 적극적인 대화를 통해 군사적인 대치 상황을 줄이려는 남한의 정부와 이에 화답하여 경제적인 발전을 이루려는 북한의 태도 변화가 주목됩니다. 여기에 북한이 보유한 핵을 관리하려는 미국 트럼프 정부의 자세 변화가 합세하여 주변 상황을 변화시키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월의 하노이 북미회담의 성과없는 결과처럼, 아직도 갈 길이 멀게 느껴집니다.
이번 강좌에서, 서재정 교수는 한반도 위기의 근본 원인인 한미관계, 북미관계의 역사와 갈등의 변화 양상을 한국전쟁 이후에서부터 시간적으로 분석한 자료를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한국전쟁 중에 중국의 참전에 대비하여 핵폭탄 사용을 실제 계획했다는 점과 이로 인해 북한의 핵 군사력 확보가 절실해졌다는 점은 처음 접해 본 역사적 사실이었습니다. 핵을 통한 이런 갈등은 소련의 붕괴로 세계적인 냉전체제가 붕괴한 이후, 오히려 한반도에 더 집중되었는데요.. 자국의 군사력으로 체제를 지켜나가고 경제 발전을 도모해야 하는 북한으로서는 핵개발에 대한 강력한 내적 동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북한의 핵 개발은 한반도의 국제 정세와 이를 관리하려는 미국의 정책, 남한 정부의 대화 정책 등에 영향을 받아 20여년 동안 여러 차례 변화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현재의 정세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 이후, 강좌 참석자들과의 질의 응답 및 토론 시간이 있었습니다. 강좌에 참석하신 분들의 주요 관심사는 아무래도 하노이 회담 이후 어떤 변화가 예상되고 남한 정부가 어떻게 관리해 나갈 수 있는 것인 지 등등이었습니다. 각국의 정치적인 입장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는 만큼, 서재정 교수는 남한 정부의 보다 더 적극적인 개입과 자세 변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특히, 전통적인 한미 관계의 틀속에 안주하여 수동적인 자세에 변화를 주지 못하고 있는 남한 정부의 한계를 지적하고, 동아시아 국가들과 연합하여 새로운 대외 협상력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교육에 참가하신 분들 중에서는 특히 남한 내부에 있는 무관심과 갈등을 지적하시는 분들이 있었는데요... 이런 내부의 갈등이 남한 정부의 대외 협상력과 국제 회의에서의 입지를 축소시킬 수 있다는 점을 안타까워 했습니다.
강좌는 전체적으로 사실과 배경 지식의 전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참석하신 분들의 다양한 의견 교환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주변의 이해세력들과 그들의 영향력이 집중되어 있는 한반도의 상황에서, 우리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책을 찾아 가는 과정은 지난해 보이기만 합니다. 오늘 강의에서도 이런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 많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을 개척하고 협상력을 키워나가야 한다는 점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치열한 고민과 토론을 통해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이 그래서 더 소중해 보이구요, 이런 차원에서 이번의 강좌도 매우 뜻깊었습니다.
작성 : 전병옥 자원활동가 |
||||
페미니즘, 한국 남자를 말하다 | [후기] 페미니즘, 한국 남자를 말하다 1 - 한국 남자는 왜 억울한가 | 지완 | 2019.3.29 | |
<'한국 남자는 왜 억울해 하는가'를 주제로 강연 중인 최태섭 문화평론가 ⓒ참여연대> '페미니즘, 한국 남자를 말하다' 첫 번째 강의로 문화평론가이자 사회학 연구자이신 최태섭 작가님의 강연을 들었다. 최태섭 작가님은 <한국, 남자>, <잉여사회>, <을들의 당나귀귀> 등 여러 책을 쓰셨다. 강연을 듣기 전에 작가님의 책을 읽고 왔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한국, 남자>에서 2000년대 남성성을 자세하게 다루신다고 하니 나중에라도 꼭 읽어봐야겠다.
강연은 여성혐오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남성성의 역사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 남자에 대한 이해를 돕고, 그들이 왜 이토록 억울해 하는지 알고자 하는 마음에 강연을 들으러 갔다. 점점 심해지는 여성혐오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반쯤 포기한 상태였는데, 강연을 듣고 여성혐오가 남성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여성혐오를 없애기 위해서는 남성성을 파괴해야 한다.
작가님은 조선 후기부터 90년대까지의 남성성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해주셨다. 대한민국 남성성의 역사는 조선 말기 사대부와 변강쇠에서 시작된다. 즉, 조선 말기 한국 남자들은 고결한 선비의 모습을 한 사대부와 성적인 매력을 지닌 변강쇠 사이 어딘가에서, 때로는 둘 다를 취하며 존재한 것이다. 식민지 시대에는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남성성에 대한 사상이 전해졌다. 남성성 형성의 핵심은 남성간의 동질성을 확보하고, 여성과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 즉 여성을 지배하는 것인데, 식민지의 남자들은 이등 시민으로서 공적 영역에서 온전한 권리를 가질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국 여성에 대한 통제를 제국의 남자들에게 빼앗겼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과 건국 이후에는 남성의 노동력과 군사력을 얻어내기 위해 호주제 등을 통해 남성에게 사회적 권위와 지위를 몰아주려는 시도가 있었고, 군복무는 사회적으로 권리가 주어지는 일등 시민의 조건이자, 후방에 있는 여성을 보호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정당성의 근거가 되었다.
강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최근 남성들의 잘못이 드러난 데 따른 그들의 피해의식과 억울함에 대한 작가님의 해석이었다.
<남성이 말하는 박탈감은 여성을 전리품으로 취급해온 비현실적 기대감에서 부터 비롯된 것은 아닐까? ⓒ참여연대>
작가님은 그들이 박탈감을 운운한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그들이 박탈당한 것은 무엇일까? 사회적 불이익, 경제적 상황 약화는 요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경제가 어려운 것은 모두에게 공통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실업률이 올라가고 취업률이 낮아지는 현실은 모두에게 적용되고, 임금격차가 개선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박탈은 어디에서 온 걸까? 작가님은 이를 남자로서 길러오는 과정에서 오는 문제라고 본다. 남자에게 주어지고, 스스로도 가진 성별화된 기대. 예를 들면,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면 예쁜 여자친구가 생긴다'와 같은 것이다. 우리에게는 여성이 마치 리워드인 것처럼 이야기해온 역사가 있다.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 우리는 '그래야 남자지~'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았다. 그러나 현실은 맨날 학교에서 여자애들한테 진다. 즉, 사회가 그들에게 잘못된 기대를 심어주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그들이 느끼는 박탈감은 무언가 박탈당한 것이 아니다. 잘못 주어진 기대가 현실과 다른 것인데, 그것이 현실이 아님을 깨닫는 대신 누군가 빼앗아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태껏 그들의 주 양육자였던 선생님과 어머니, 그들이 생각하는 게임을 막고 있는 여가부 직원들. 여태껏 자신을 통제해온 것은 모두 여성들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쌓아온 기대를 충족하는 것을 빼앗는 사람들을 여태껏 자신을 통제해 온 여성들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그들의 여성혐오와 피해의식, 억울함이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본질주의적이라고 믿어온 남성성은 시대와 역사, 문화에 따라 변하고, 계속해서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사회적으로 구성된 남성성이 파괴될 때 비로소 여성에 대한 혐오가 근절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