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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명 | 강좌후기 | 글쓴이 | 날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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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의 시간, 공간, 사람 | [한국 근현대의 시간, 공간, 사람] 3강 한국 근현대의 공간 ; 자연이 만든 경관, 인간이 만든 경관 | 문동욱 | 2016.11.26 | |
시공간. 말의 순서에서도 그렇지만 역사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걸어온 여정과 흐름, 즉 시간에 더 많은 관심을 지니는 학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유구히 흐르는 시간은 인식함으로써 존재하는 다소 추상적인 관념인데 반하여 공간은 그 순간에 직접 딛고서 그 안에 있게 하는 기반으로서 실재이기도 하다. 하여 그 실재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구체성을 통해 일련의 믿은 그 자체를 형성하여 인간의 당면한 삶에 영향을 미치며 인간에 의해 변화되는 관계를 맺기도 한다. '공간'의 형성과 변화는 인간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을까. 과거와 현재에 인간들은 공간과 영역을 어떻게, 얼마나 실감하고 인지하였을까. 현대인에게 공간과 영역은 m,km 등 수치로서 인지된다. 동시에 자신이 직접 보고 밟지 않는 곳에까지 매체 등을 통한 간접경험으로써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체감적이고 실재적인 영역이 아니라, 지도를 매개로 한 인식되고 상상된 관념적 인식이며, 이것은 거리와 면적의 계량적 수치, 혹은 교통수단과 소요시간 등으로 계산되어 재정리 구획화되어 있기도 하다. 결국 인간이 실제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공간은 이른바 생활반경일 것이다. 이에서도 현대와 전근대인에게는 차이가 있다. 강사는 출산에서부터를 통해 상징적으로 이 점을 설명한다. 현대인은 병원, 조리원, 자택 등을 출산 전후에서부터 세분된 공간들을 이동함으로써 삶을 시작하는 반면, 전근대인은 금줄, 삼칠일, 백일 등이 상징하듯 이동이 없이 뿌리내린 삶을 시작해 살아간다. 일상과 평생에 이동반경 역시 현대인이 변화된 생활 양식과 교통수단으로 끊임없이 장거리를 이동하는 반면, 전근대인은 대개 토지 고향 향토를 중심으로 한정된 영역에 근거하여 평생을 살아간다. 때문에 공간에 대한 감각이 근본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어떤 변화의 소산일까. 대개 고대 각 문화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공간의 세계관은 천원지방이다. 동시에 땅이 이루는 사각형은 농경이 시작된 후, 구획화와 합리의 산물인 인위적 모습이다. 하여 사각형은 인위와 그것이 이루어지는 공간인 지상을 상징한 반면, 원은 자연, 본디에 존재하던 것으로 하늘이자 신적영역을 상징한다. 건축물 등에서, 혹은 황제의 -천자, 즉 반신적 존재- 상징이 팔각형 등 사각에서 원으로 변해가는 모양을 취하는 것도 이 결과이다. 여하튼 지간에 '천원' 과 구별되는 '지방' 으로서 사람들은 이미 자신들의 세계인 공간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말했듯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근대의 세계는 지극히 좁았으며, 자신의 뿌리내린 세계관에 한정되었다. 여행은 특별한 사유로 이루어지는 고된 여정이었다. 반면 권력자에게는 관념적으로 광대한 영역이 천하, 세상 등으로 존재했으며 이것을 순행 등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체험 체감 하는 한편 인지하고 다룸으로써, 공간 자체를 사유함으로써 소유할 수 있었다. 또한 그런 권력에 의해 탄생된 특별한 공간이 도시였다. 도시는 자연경계가 아닌 특별한 경계 -성벽- 를 지님으로써 구획화된 인위적인 동시에 구별되는 특정한 공간이었다. 그 특별함은 도시의 주인인 권력자와 그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 나눠가지는 신성함으로 조작되었고 '구별되는 공간'으로서 도시의 특수성을 두드러지게 하였다. 산업혁명과 근대화 이후 도시는 종래의 특별히 경계지어진 공간에서 표준적인 생활의 공간으로 변화하였다. 이것은 도시 거주자의 증가 탓인데, 첫째는 도시의 유인요인에 의한 유입 및 거주 인구의 증가, 그리고 도시 자체의 증가에서 비롯되었다. 하여 도시적 삶 자체가 근대적 삶의 표준이 되었는데, 앞서 말했듯 도시는 애초에 인위적이며 기획된 공간이다. 이것은 근대성 역시 마찬가지이며 결국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근대 도시적 삶과 그 공간은 근대성이 압축적으로 표현된 산물이기도 하다. 그 변화된 삶은 교통통신 수단의 발달로 시공간이 압축된 동시에 밀집된 삶이다. 빠른 이동, 빠른 변화, 자력이 아닌 교통수단에 '실려' 이동함으로써 움직임의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되어 주변의 흐름을 바라보게 되는 것에서 인간은 변화와 속도를 하루하루 체감하게 되고, 결국 근대적 감각에서 '안정=지체'라는 느낌을 안겨주어 끝없는 변화를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며 쫓게 변해왔다. 한편으로 시공간의 압축은 인간간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단축하였으며, 거리감의 부재 즉 자기 공간의 박탈에 익숙해지는 동시에 시작적인 도시에 체감적으로 익숙해져 관념까지 근시안적인 단견에 물들었다. 그런 끝없이 변화하고 불안정한 삶 속에서 공간은 일시적인 공간에 불과할 뿐 그 자체로서 본원적인 의미를 지니는 '장소'가 되지 못한다. 그에 대한 목마름, 불변과 지속성에 대한 욕구가 투영되는 것이 불멸이어 보이도록 오래 보내온 시간 자체를 담지하고 있는 문화재들에 대한 애호이며, 동시에 공허함을 달랠 새로운 시대가치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현대 건축물, 이른바 랜드마크들이다. 시간과 공간을 2,3강에서 인간이 어떻게 인식하고 그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지를 확인한 후, 다음 마지막 강의는 그러한 인간 자체는 어떠한 속성을 지니고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며 변화해왔는지 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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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와 민주주의 - 편견과 오해를 넘어 | [젠더와 민주주의] 3강 - [알면서 무시했던] 매우 정치적인 성이야기 | 제주도주도 | 2016.11.25 | |
<젠더와 민주주의> -차별과 혐오는 어떻게 질서와 진리가 되었나?
성경에서의 동성섹스 창세기 오난, 형이 죽게 되자, 형의 부인과 섹스를 해야 했다. 그리고 오난은 질외사정을 해, 하느님께 죽었다고 한다. 이로써 기독교는 임신목적외 섹스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을 했다. 근본주의 개신교에서는 동성 간의 섹스는 임신목적외 섹스이기 때문에 그 역시 부정적으로 보았다.
동성애혐오 정치 세계2차대전 당시, 독일에서는 동성애를 처벌하고 낙태에 대해 반대했다. 사람을 많이 낳아 그들을 군인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런 입장에서 보았을 때 동성애자는 국가반역자였다. 레닌이 집권하던 당시 소련에서는 낙태가 가능했고, 유급출산휴가를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스탈린이 들어서게 되면서 낙태를 불가능하게 했고, 유급출산휴가도 없애고, 이혼을 억압하며, 여성의 몸을 나라의 것으로 생각하였다. 옐친이 집권을 하며 동성애처벌법을 폐지하였고, 이후 푸틴정권이 들어서며, ‘비전통적 성관계선전 교육처벌법’을 제정였다. 여기서 비전통적이라는 것은 동성간의 섹스를 의미한다. 이렇게 하게 된 이유는 동방전교회가 망해갔고, 푸틴과 동방전교회가 도덕, 즉 성생활에 관여하게 되었다. 1949년 중국에서는 동성애가 부르주아의 타락이라고 하며 총살을 하였고, 1950년대 미국에서는 동성애자가 공산주의자라며 동성애자들은 공산주의자 일 수 있다는 이유로 공무원이 될 수 없었다. 대다수의 독재국가 중 러시아에서는 출산율이 낮으므로 동성애는 하면 안 된다고 했고, 우간다에서는 동성애유전자라는 것은 없고 비정상적이라고 했다.
한국과 일본에서의 동성애 과거 고려 목종 때에도 목종과 신하와의 동성애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었고, 그것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은 없었다고 한다. 또 조선에서 일본으로 여행(?)을 갔다 와, 쓴 책에 ‘일본에서 남색이 유행했다’, ‘일본에서 남성이 여성의 옷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는 식으로 쓰였다고 한다. 또 일본에 혼마 규스케라는 사람이 조선으로 여행(?)을 왔다가 쓴 책에서 조선에 남색이 유행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썼다고 한다. 일본은 유럽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동성애를 터부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혼마규스케도 일본의 도덕적 우월을 위해 조선의 남색에 대해 썼다고 한다.
‘호모섹슈얼’의 유래 1869년 의사가 ‘호모섹슈얼’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남성간의 섹스를 형법에서 다루는데 그것이 왜 범죄냐고 하며 만든 단어이다
한국에서의 동성애혐오 운동 2005년 사립학교법(사학법)을 개정하게 되었고, 기독교에서는 개정에 반대를 했다. 대다수 사립학교는 기독교소유이고, 사학법이 개정되게 되면, 이사회가 투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2007년 사학법은 재개정을 하게 되었고, 재개정 2달 뒤 차별금지법이 입법을 예고하게 되면서 기독교에서 공개적으로 동성애반대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추세 -2005년 기독교에서는 추세로 보아 신도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래서 빚을 지고서라도 교회를 지었다. 하지만 근래, 기독교에서 안 좋은 일들이 있어서 신도수는 늘지 않았다. 결국 교회에 돈이 들어오지 않게 되자, 교회는 힘들어졌고, 혐오로서 자신들의 편을 만들며 혐오의 정치를 하게 되었다. 또, 목사는 많다. 하지만 이들이 갈 교회는 줄어들고 있다. 이 목사들은 반동성애단체에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결국, 이후 기독교의 동성애 혐오운동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생각된다고 하셨다. [젠더와 민주주의] 2강 - [어쩌면 몰랐던] 역사가 만들어낸 성 이야기 성적 차이에 대한 의외로 치밀한 환상 후기 바로가기(클릭)>> [젠더와 민주주의] 1강 - [이상하게 헷갈렸던] 성에 대한 은밀한 이야기 섹스 / 젠더 / 섹슈얼리티 후기 바로가기(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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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와 민주주의 - 편견과 오해를 넘어 | [젠더와 민주주의] 2강 - [어쩌면 몰랐던] 역사가 만들어낸 성 이야기 성적 차이에 대한 의외로 치밀한 환상 | 박윤채영 | 2016.11.19 | |
저번 강의에서 우리는 ‘나는 여자/남자입니다.’ ‘너는 여자/남자이다.’ 라는 확신을 향해 의문을 가져보고 그 답변에 대한 사회적 전제들에 생물학적 근거들을 바탕으로 의문을 제기해보았습니다. 우리가 믿어왔던 'XX' 'XY'염색체에 배신(?)도 당했고요, 세상에 많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다양한 염색체 작용과 성기의 형태도 알게 되었습니다. 호르몬이 얼마나 바쁜지, 그리고 성에 대한 ‘상식’들이 호르몬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해왔다는 것을 알고 반성도 해보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여성, 남성에게 인간의 본질인양 부과된 사회적 역할과 규범, 관념들이 형성된 역사를 기독교 역사를 중심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왜 기독교인가? 라는 의문이 먼저 드실 텐데요, 기독교는 그 역사에 비해 단기간에 엄청난 영향력을 전 세계적으로 떨치고 있는 종교입니다. 많은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고요. 그리고 문화적으로 동서양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있는 지금 글로벌 시대에, 서양 문화의 중요한 바탕이어 온 기독교를 알면 지금 우리 사회에 서양문화가 얼마만큼 영향력을 갖고 있는지, 얼마만큼 잠식해 있는지 알 수 있겠지요. 예수가 등장했던 시대의 사람들은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보았습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허구이며 이데아로 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지구에 종말이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때를 잘 넘기기 위해서 극단적인 금욕 생활을 실천하고 있었고요. 또한 계급이 있던 시대였습니다. 노예와 여자, 아이들은 성인 남성의 통치 하에 살고 있었습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사람들이 수학, 과학, 철학을 발달시키고 이성을 중시하고 있었지요. 이 시대 사람들은 아주 많은 신들을 섬기고 제를 지내고 신탁을 받았습니다. 잘 알려진 ‘그리스 로마 신화’가 이때 사람들의 일종의 경전이었습니다. 그런 때에 예수가 등장했습니다. 예수는 ‘평등’ ‘사랑’ ‘유일신’을 말했습니다. 계급에 짓눌린 사람들, 이성에 짓눌린 사람들은 예수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에 위로를 받고 그를 따랐지요. 예수가 죽고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말을 정리하여 기독교를 만들었고 기독교는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오랜 박해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로마는 다양한 신을 인정해왔는데 기독교는 유일신을 주창했기 때문이죠. 이때 사람들에겐 의문이 생깁니다. “그럼 예수는? 죄 있는 자가 인간의 죄를 사하러 왔다고?” 거기에 이런 답변이 돌아옵니다. “예수는 ‘처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에 의해 잉태되었다.” 사람들은 또 질문합니다. “그럼 인간 마리아는? 그도 정자를 통해 태어났으니 죄가 있지 않는가?” 여기서부터 마리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오기 시작하고 마리아의 변천사가 시작됩니다. 마리아의 시작은 가난한 집의 부인이었으나 죄 없는 예수를 잉태한 존재로 만들어지면서 점점 ‘성녀’가 되어 갑니다. 그 시대의 그림에서 그것을 엿보는 방법은 마리아의 옷 색입니다. 마리아의 옷은 검정색에서 점점 빨강(황제의 옷 색) 그리고 빨강과 파란색을 함께 걸치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또한 예수를 잉태시켜준 성령과의 관계 묘사도 달라집니다. 성령을 맞이하는 마리아에서 성령의 절을 받는 마리아로요.
근대로 들어서면서 이성과 과학이 다시 꽃을 피우며 기독교는 그 빛이 쇠해 가는 듯 했습니다. 과학은 근대의 새로운 종교가 되었습니다. 정치는 과학과 결탁하여 과학을 여성들을 통제하거나 열등성을 강조하는 근거로 사용했습니다. 여성의 질을 ‘축축하고 은밀히 숨겨져 있는 곳’으로 표현하였고 출산의 고통은 여성의 원죄에 해당한다며 출산 시 마취제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포유류’라는 분류 항목의 말 안에는 ‘아이에게 젖을 주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 종을 대표하는 모습으로 부각되어 있습니다. 방대한 양이기에 강의를 정리하는 것에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강의의 메시지를 분명히 요악하고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사회에서 정설처럼 얘기되는 것들의 많은 부분은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즉, 시대에 따라 정치, 과학, 종교는 결탁되어 변형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규범과 관념들은 실은 소수 권력의 필요에 의해, 해석되고 변형되어 온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역할은 그것들에 질문을 던지기를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규범에 맞지 않는 나의 모습을 거제하기 이전에 규범에 의문을 제기해보는 것입니다. ‘만약 판도라의 상자를 연 판도라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었다면 어떻게 해석되었을까?’ ‘동양에서 성은 어떻게 얘기되어져 왔지?’ 옳다고 애기되어 지는 것들에,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상식들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남들의 해석에 내 인생과 사고방식을 맡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젠더와 민주주의] 1강 - [이상하게 헷갈렸던] 성에 대한 은밀한 이야기 섹스 / 젠더 / 섹슈얼리티 후기 바로가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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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학교 - 인도의 과거, 인도의 오늘 | <아시아학교, 인도의 과거, 인도의 오늘> 1강 인도와 오리엔탈리즘 | 미요이 | 2016.11.15 | |
<아시아학교, 인도의 과거, 인도의 오늘> 1강 후기 : 11월 9일 저녁 7시, 아시아학교 첫 수업이 있었습니다. 현재 인도문화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이옥순 선생님께서는 조금 일찍 도착해 따뜻한 녹차를 마시며 참여연대 회원분들과 담소를 나누셨습니다. 선생님의 대표적인 저서는 <인도는 힘이 세다>, <인도에 미치다>가 있습니다.
진정한 인도인은 누구인가? - '진짜 인도'란 말은 불안과 열망이 실린, 타자의 눈을 통해 굴절된 이미지입니다. 진정한 한국인이 갓을 쓰고 도포를 휘날리는 양반이 아닌 것처럼 말이지요. 지금까지도 우리는 인도인이 서양의 순수한 타자가 되기를 열망하곤 합니다. 진정한 인도와 인도적인 것을 회복하고, 서양을 닮거나 서양에 감염되지 않은 '대상'으로서의 인도를 찾고 보존하려고 하지요. -이렇게 냉동된, 부정적인 인도 이미지가 팽배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때문일 것입니다. 그 자체로 특수한 존재인 서양은 흔히 타자를 특수하다고 여기며 스스로 보편적인 기준이 되지요. '과거'의 인도를 다시 서술하고 '현재'의 인도를 다방면으로 접근하려는 노력, 그리하여 고정된 인식과 분석의 범주를 넘어 있는 그대로의 인도를 보려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이로써 우리는 고정관념을 넘어서 인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샐러드볼의 인도사회 - 인도는 '다양성'이라는 단어가 뼈속 깊이 박혀있는 사회입니다. 먼저 힌두교를 살펴볼까요. 힌두교는 다양한 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종교입니다. 애니미즘, 조상숭배, 무신론, 불교, 자이나, 기독교, 이슬람 모두 힌두교의 스펙트럼 내 포함되지요. 하나의 강령, 전통, 이단도 모두 힌두교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유연성 덕분에 인도는 영국에 정치적으로는 패배했으나, 문화적, 정신적으로는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식민지배정책에 포용력과 더불어 신축적으로 대응했기에 그 생명력을 잃지 않을 수 있었지요.
비폭력 : 인도의 핵심 이데올로기 - 흔히 카스트제도의 외면적인 모습만을 가지고 인도를 비판할 때가 많습니다. 다다음 시간에 카스트제도에 대해 자세히 다룰 것이기 때문에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카스트 또한 각자가 각자로 살아가는 하나의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인도의 국교를 평등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평등 사상에 기초해서 간디의 비폭력 사상이 퍼졌고, 종교문화적 다양성이 인정되는 것입니다.
인도의 민주주의 - 인도는 전자투표제로 선거를 치릅니다. 인도의 선거를 지켜보며 제가 생각했던 것 중 하나는, 그들이 자신에게 무엇이 이익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자신과 같은 신분의 정치인에게 표를 주거나, 출신 신분 별로 대학입학 정원 수를 배분하는 입시제도를 몇 십년이 넘도록 유지하도록 하는 것 등입니다. - 인도는 가지가 많은, 바람잘 날 없는 나무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형식적으로나마 존재하지요. 물론 어두운 면도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부정부패가 심하고, 정치 문화적으로도 성숙하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모양처럼, 우리는 다양한 앵글을 가지고 인도를 조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한 강의를 들었을 뿐인데 인도가 가진 매력에 빠진 것 같습니다. 특히 저는 인도의 민주주의에 대해, 그리고 평등과 비폭력이라는 가치에 기반한 카스트 제도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주 수업이 매우 기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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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와 민주주의 - 편견과 오해를 넘어 | [젠더와 민주주의] 1강 - [이상하게 헷갈렸던] 성에 대한 은밀한 이야기 섹스 / 젠더 / 섹슈얼리티 | 박은호 | 2016.11.14 | |
강의 자료로 준비해주신 프린트에는 낯선 질문이 있었습니다. 1) 나의 성별은 _____ 2) 그 근거를 세 가지만 찾는다면? 잠시 생각해보셨나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의 성별은 무엇인가요? 남성? 여성?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요? 저는 남성이라고 적었고 근거는 두 가지 밖에 적지 못했습니다. 성기의 모양과 ‘자연적으로는’ 임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썼습니다. 하지만 이건 저의 겉모습만 봤을 땐 알아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겉모습을 보고 그 사람의 성별을 알아낼 수 있는 이유는 과연 몇 가지나 될까요? 그 이유는 모두 동의할 수 있습니까? [성은 허구다] 허구는 없는 것을 꾸며낸 것입니다. 내가 혹은 남이 나의 성을 ‘이것’이라고 판단하고 그에 맞는 태도 등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성은 허구’라고 말해야 합니다. 성별을 구분하는 거에 그치지 않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우리는 그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인 차이에 대해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유전자가 다르다 DNA가 다르다 호르몬이 다르다. 그 다름에 의미를 부여해서 차별의 근거로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강의 중 한채윤 선생님은 고정관념에 의해 형성되는 성의 구별과 그것에 기인한 차별을 깨주셨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정자가 경쟁에서 승리해서 난자와 결합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난자 핵은 세포질로 쌓여있고 또 그 바깥에는 투명대가 있어 1등으로 도착한 정자가 결합하는 게 아닙니다. 정자끼리의 경쟁이 아닌 협력을 통해 난소와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생물학적인 이유로 차별을 말하는 사람들의 공식대로 맞추면, 남성의 특징은 협력하고 다정다감하며 희생하는 것입니다. [모든 걸 하나로 섞어버리지 말고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세요] 한채윤 선생님께서는 몇 가지 신문이나 방송에 방영된 자료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정자는 여성 질 안을 날아가지 않고 질벽에 붙어서 기어갑니다. 그것에 대한 보조자료로 사용된 그림에서 남성의 얼굴과 형상을 한 캐릭터가 철모를 쓰고 낮은 포복을 하면 총을 메고 질벽을 기어갑니다. 이것은 정자가 모두 남성으로 그려진 것의 오류와 남성이 여성을 정복하러 가는 것을 형상화합니다. 애기울음소리에 반응하는 연구를 진행한 자료에서 여성이 더 많이 반응하였습니다. 역시 여성이 아이를 더 생각하는군요. 그러니 아이는 역시 여성이 키우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 실험에서의 오류는 애기울음소리를 듣는 여성과 남성이 성인이라는 것입니다. 충분히 사회에서 교육된 남성과 여성으로 주어진 반응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이의 울음소리에 더 반응한다고 육아를 그 사람이 전담하는 게 맞는 말일까요. 이성애에서 바람을 피우는 이유는 더 우수한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동성애에서 바람을 피우는 이유는 '더 우수한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라고 설명이 될까요? 그리고 이성애에서는 인간의 유한한 생명으로 인해서 유전자를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에 사랑도 하고 섹스도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관점으로 인해서 동성애에 대해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도 그들은 어떻게 섹스를 할까라고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답답해지지 않나요?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에 대해 안다는 것의 효과란 .. 속지 않고 해석한다는 것] 여성 같다 남성 같다라는 체계를 만들고 성역할이 만들어진 사회에서 우린 지금 살고 있습니다. 젠더롤(사회적으로 규정된 역할)이 주어졌기 때문에 여성이 되고 남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지날수록 젠더롤은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고려하였을 때 젠더롤은 사회에 의해 규정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젠더 뿐만 아니라 섹스(생물학적 성)도 만들어졌습니다. 버틀러에 의하면 남성의 성기를 가진 사람을 남성이라고 말하고, 여성의 성기를 가진 사람을 여성이라고 말하며 섹스도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은 99.9%가 똑같습니다. 대부분 같지만 아주 작은 부분에 의해서 서로 매우 다릅니다. 즉 생물학적인 차이가 전부가 아니라 사회가 차이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차이에 주목하는 것에 속지 않아야 합니다. 강의하는 동안 한채윤 선생님께서는 덜 예민한 사람들이 그냥 흘렸을 자료나 해석에 관한 점들을 짚어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제가 얼마나 무감각하게 그런 것들을 받아들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권력자가 자신들의 의도대로 사람들을 반응시키기 위해서 어떤 것을 만들고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을 떄 민주주의는 위기를 겪습니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성 역할 또한 누군가의 의도는 아닌지 생각해보고 속지 않아야겠습니다. 자원활동가 박은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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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의 시간, 공간, 사람 | [한국 근현대의 시간, 공간, 사람] 1강 프롤로그 ; 새로운 역사 –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역사 | 문동욱 | 2016.11.14 | |
작은 역사, 평범한 역사,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가가 이번 첫 강의 제목이였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위해 맨 처음으로 우리에게 던져진 물음은 '역사란 무엇인가' 였다. 우선적으로 강사인 전우용 교수가 밝힌, 그에게 역사의 정의란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연과 사물과 맺어온 관계의 총체' 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인간이 시간과 공간을 인지하는 방식과 모습, 그리고 그것을 변화시켜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혹자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불변이되 시대와 환경만이 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강사의 견해에 따르면 그 변화하는 시대와 관계 맺음으로써, 또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동력으로서 사람 역시 진화의 도정에 있는 존재로서 틀림없이 변화한다. 그렇다고 해도 하여 해서 실제적으로 입에 담아지는 '역사'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역사란 '과거에 있었던 일' 이다. 혹은 게 중 특별한 가치와 의미를 지녔다 여겨져서 선별되어 기억되는 일부이다. 종래의 입장에서 역사는 '과거'의 일이었으며 그것은 동양사에서는 창고의 출납기록이 마쳐졌음을 뜻하는 '역'이란 한자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역사는 정녕 '이미 끝난 것' 에 관한 기록에 불과한가? 현대인은 이른바 역사를 얼마나 역사화 (객관화, 상대화) 할 수 있는가? 우리와 무관한 오랜 예쩐의 사실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E.H.카의 금언대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이며 '산 자가 죽은 자를 되살리는' 일이었다. 그러다 다시, 그 금언은 현재에도 나왔던 당시와 같은 유효성을 그대로 지닐 수 있을까? 어떤 이론의 어지가 없는 것일까? 강사의 견해에 의하면 현대 사회는 급속한 변화가 오히려 일상인 시대다. 새로운 것이 오히려 익숙하며 '새 것(NEW)' 자체가 가치를 지녀 신념으로서 내재화 되어 모든 것의 변화가 당연시 되는 시대이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데 하문 유리는 역사란 (정녕)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 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대화는 온전히 가능한가? 우리는 '과거'라는 거대한 존재 자체와 총체적인 대화가 가능한가? 그 대화를 통해 단숨에 핵심까지 이르는 사실을 전해들을 수 있는가? 우리는 과거를 모두 기억할 수 있는가? 우리의 대화 상대가 되는 과거는 '극히 일부' 일뿐이다. 하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과거는 기억되는 것 뿐이다. 누군가 기억에 남기고자 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전해 이어지는 일부이다. 하여 역사의 승자는 기록하는 자라 하는 것이며, 동시에 승자가 기록의 처분권을 지녀 특정한 기억만을 남기는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기억은 객관적이지 않으며 하나이지도 않다. 같은 것을 보고 다르게 느끼며 해석하듯 기억과 기억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관점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그것은 단지 방향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심도, 즉 부여하는 중요도의 차이이기도 하다. 하여 같은 사건에 대한 대치되는 기억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는 끊임없는 고민이자 논쟁이다. 보편적 동의가 이루어진 듯한 집단적 기억 역시 시대에 따라 변화되기 마련이다. 한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관의 변화가 시각의 변화를 낳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특정한 해석, 기억에만 영구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가능할까. 그리고 정당할까. 실상 그것이 국가권력에 의한 역사의 결정권-해석권 독점이었던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위험성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역사에, 기억에 '옳음' 이나 '바름' 을 부여할 수 이는가. 그것이 합당한가. 이와 같이 기억은 그 자체로도 복잡하기 이를데 없다. 동시에 우리가 과거의 '기억'에 접근하는 것은 기록을 통해서인데 기록은 반드시 모든 것을 남기지 않는다. 기록자가 '중요' 하다고 여기는 것만을 남기며 또한 감추고자 하는 것은 기록하지 않음으로써 사라지게 한다. 헌데 문자라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일부 식자층의 전유물이었다. 때문에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기록은, 그것을 통해 용이하게 대화할 수 있는 '과거'는 글의 가치관으로 걸러진 것 뿐이어 왔다. 하여 역사는 오랫동안 치자의 학문으로서, 그들에게 통치를 위한 자료집의 역할을 하거나 그들의 정통성을 보증하는 위헙의 집대성에 불과한 것이었다. 때문에 영웅과 위인들의 역사였으며 정치와 권력에 대한 기억이었다. 이러한 치자의 지위를 강탈해 전유한 것은 근대의 국가와 민족이었다. 절대적이며 무엇보다 중요한 존재로서 신성성을 가장한 '조국'과 '민족'의 역사였으며, '우리' 의 역사였다. 그 결과는 '우리'와 '저들'의 구분이며, 나아가 집단이기주의와 '저들'의 배제-말살이었으며 그 귀결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집단 학살이었다. 그 충격적인 교훈과 경험에 힘입어 반성과 재고가 이루어져 종래 국가-민족 사관의 해체가 시도되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와 '저들' 의 구별을 뛰어넘고자 한 시도는 애초에 '우리'란 무엇인가로 이어졌다. 그간 '우리' 라는 총체로 묶여 집단적 범주에 포획되어 억눌려 있던 소수자들, 더 작은 집단과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관점이 등장하였다. 하여 그간 귀 기울이지 못했던 목소리, 소수자 약자 그리고 기록되지 않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 즉 본강의 주제인 '작은 역사' 에 대한 탐구와 접근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미시사 일상사 생활사이다. 하면 기록되지 않은 역사에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그것은 다음 강의의 '한국근현대의 시간, 공간, 인간' 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그 과정을 통해서 보다 살펴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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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을 읽다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 읽기](7)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 자비로운 여신들 | lyh1999 | 2016.11.7 | |
정치철학으로 고대 그리스 비극 읽기 마지막 시간(11월 2일)엔 <아가멤논>에 이어서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의 나머지 두 작품을 읽었습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 왕비가 아가멤논을 죽이며 벌어진 복수는 자녀세대인 엘렉트라와 오이스테스에게로 이어지고(<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이 복수는 시민들이 참여한 재판장에서 비로소 마무리됩니다(<자비로운 여신들>). 복수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용서를 다룬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번 시간에는 화해가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이뤄지는 측면을 주목합니다.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제목은 클리타이메스트라와 그의 딸인 엘렉트라를 지칭합니다. <아가멤논>에서 클리타이메스트라가 남편인 아가멤논을 죽이고 정부인 이아기스토스가 권력을 차지하자 위협을 느낀 엘렉트라는 어린 남동생 오레스테스를 도망치게 했습니다. 극이 시작하면 성장한 오레스테스가 아가멤논의 무덤을 찾아오고, 이어 제주를 바치러 등장한 엘렉트라와 재회해 아버지를 죽인 자들에게 복수를 맹세하고, 코로스들이 이를 지지하고 나섭니다. 오레스테스는 친구 퓔라데스와 나그네로 위장하고 아이기스토스의 성에 찾아갑니다. 이들은 오레스테스가 죽었다고 거짓 소식을 전하며 아이기스토스와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접근해 이들을 살해합니다. 그러자 오레스테스는 클리타이메스트라의 혼백이 불러낸 복수의 여신들이 나타난 것을 보게 되고, 도움을 청해 어디론가 도망칩니다. <자비로운 여신들>에서 오레스테스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탁소에 도착해 아폴론으로부터 아테나이로 가 재판을 받으라는 명을 받습니다. 그리고 아테나이에서 아테나 여신이 재판장으로, 시민들이 배심원으로 참석한 가운데 공개 재판이 열립니다. 모친인 클리타이메스트라를 죽인 오레스테스의 유죄 여부를 두고 아폴론이 변호에 나서고, 배심원 투표가 동수로 팽팽히 맞선 결과를 본 아테나가 오레스테스를 지지하며 무죄 판결을 내립니다. 오레스테스를 쫓아온 복수의 여신들이 재판 결과를 보고 아테나이에 재앙을 내리겠다고 위협하자, 아테나는 그들이 지낼 곳을 마련해주고 아테나이를 축복해주도록 설득합니다. 이로써 복수의 여신들은 제목의 '자비로운 여신들'로 거듭나게 됩니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아가멤논>에서 남편살해,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 모친살해의 주제를 다루고 이 두 사건이 <자비로운 여신들>에서 재판이라는 제도를 통해 완결되는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연쇄적인 복수 가운데 벌어진 남편살해와 모친살해 중 어느 쪽이 더 큰 죄인지를 놓고 대립하는 갈등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오레스테이아가 왜 무죄 방면되는지 이유를 살펴보려면 그의 행동 배경에 아폴론의 신탁이 있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내게 이런 모험을 하도록 명령하신 록시아스의 강력한 신탁은 결코 나를 저버리지 않을 거예요")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는 모두 어머니의 손에 아버지를 잃었다는 원한[사적인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레스테스에게는 그 이상으로 신이 부여한 공적인 명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두번째 배경으로는 코러스로 대변되는 시민들이 오레스테스의 복수를 지지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아가멤논의 죽음 이후 아이기스토스의 참주정치에 시달리고 있던 코러스들은 무덤가에서 복수를 맹세하는 남매를 옆에서 계속 지지하며, "아르고스시 전체에 자유를 찾아주었다"고 두 사람을 죽인 일을 칭찬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 복수는 분명히 유혈을 부르는 폭력적인 방식이었고, 때문에 재판을 통한 해결이 불가피해집니다. <자비로운 여신들>의 재판 장면은 지금까지 이어진 사법 제도의 기원적인 측면을 보게 해줍니다. 극중에서 재판은 사건 발생장소인 아르고스가 아니라 아테네에서 열리는데, 그 이유로는 당시 이 지역의 정치적 중심지 역할이 아르고스에서 아테네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한편으론 재판 장소가 변경된 것이 재판이란 실제 사건 당사자와 관계없는 제3자가 판단해야 공정하다는 인식을 보여준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를 제도 전체에 적용하면 제도란 이해당사자가 아닌 외부자가 설계해야 한다는 것, 불가피하게 내부자가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면 제도를 만든 내부자가 이후 그 공동체를 떠나야 한다는 뜻도 됩니다. 재판장에서 복수의 여신들은 클리타이네이메스 편에서 모친살해가 더 큰 죄라고 주장하고, 아폴론은 오레스테스를 변호해 남편살해가 더 큰 죄라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남편과 모친 모두 가족 안의 가까운 인간관계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공적인) 서약을 통해 맺어지는 관계라는 점에서 남편살해는 비혈족살해, 모자 모녀 관계는 혈연을 통해 맺어지는 관계라는 점에서 모친살해는 혈족살해라는 차이가 나타납니다. 이 점에 근거해 복수의 여신들은 오레스테스가 혈족을 살해한 죄인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아폴론은 "제 자식의 진짜 생산자는 자궁에서 태아를 기른 어머니가 아니라 수태시킨 아버지"이며 "어머니 없이 자식이 태어나는 것이 가능하다"라고 주장합니다. 아버지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아테나가 바로 그런 경우이기 때문인데, 아테나 역시 이 점을 근거로 자신은 남자/아버지 편이라며 오레스테스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물론 지금 기준에서 보면 불합리한 논리이지만, 오레스테스에겐 신탁이라는 공적 명분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시민들의 지지가 있었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획득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테나이의 재판은 제도로서의 재판이 가져야 할 덕목들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입니다. 이 재판은 아테나가 11명의 시민 배심원과 전령, 수많은 백성들을 데리고 등장하면서 시작하는데 이는 재판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치뤄져야 함을 알려줍니다. 또한 법정에서 원고와 피고측이 자기 사정을 이야기하게 함으로써 사건을 공동체가 공유하게 하고, 나아가 여기서 성립된 정보의 공정성이 재판을 좌우한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이외에도 아테나는 재판으로 제시되는 제도가 가져야 할 덕목들을 제시합니다. 먼저 아테나는 극중의 재판이 앞으로도 존속해야 한다고 왜냐하면 판결의 공정성은 그 기준인 법이 지속적으로 적용되어야 보장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아테나는 배심원들이 뇌물에 매수되지 않는 나라의 불침번이 될 것을 주문하며 제도가 불의에 단호히 맞서야 함을 지적합니다. 또한 "무정부도 독재도 아닌 통치 형태를 유지하고 두려운 것을 도시 안에서 모두 추방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도시가 정치적 결정을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통치 형태,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용기가 재판의 공정성을 뒷받침한다는 것입니다("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면 사람들 중에 누가 언제나 의로울 수 있겠는가?") 재판의 공정성과 지속성이 중요한 이유는 이후 아테나가 복수의 여신들을 설득하는 대목에서 더 중요해집니다. 재판에서 패한 복수의 여신들은 자신들의 룰이 무너진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하는데, 아테나는 그들에게 이 땅에 머물며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리면 시민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리라고 약속합니다. 이 약속이 지속적으로 지켜져야만 아테네는 그들의 재앙을 피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자비로운 여신들>은 사법 제도가 복수를 끊는 해결책으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고, 또한 이를 위해선 아테네의 약속과 같은 법이 지속적으로 지켜져야 하며, 법의 적용 범위를 복수의 여신들 같은 도시 외부인에게까지 확대함으로써 외부인을 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지금 우리의 법 시스템도 돌아보게 만듭니다. 법은 말의 힘을 통해 화해를 이끌어내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오레스테이아의 경우처럼 법치의 작동은 그 환경이 얼마나 공정하게 만들어져 있느냐에 좌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도 법에 의한 통치는 종종 강조되지만 부조리한 환경이 법치의 공정성을 해치는 경우가 있습니다(ex. 검찰의 기소독점). 갈등 해결책으로서의 법치가 제대로 되려면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잘못된 환경들을 고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번 고대 그리스 비극 강의는 문학적 시각에서 탈피해 정치철학적 시각으로 독해를 시도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비극은 당대의 가장 아름다운 시라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당시 인간들의 고뇌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당시 인간들과 지금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환경이 같을 수는 없지만(예컨대 고대 그리스에서 운명은 이미 신탁으로 내려져 잘 알고 있는 것이었고 그걸 당당하게 맞아들이는 자세가 자유로 칭해졌지만, 마키아벨리 시대로 넘어가면 운명은 예측불가한 것이고 그에 맞서 저항하는 게 자유라는 인식이 생겨납니다), 이들 비극은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의 자유 개념부터 마지막 강의의 화해 개념까지 지금의 정치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들이 지금 고민할만한 이슈들을 고대 그리스 비극들이 앞서서 어떻게 사유했는지 발견하는 기회를 더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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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주인 되는 <헌법 제대로 읽기> | [진짜 주인되는 <헌법 제대로 읽기>] 7강. 헌법개정토론회 : 어떤 나라에 살고 싶으세요? | 아무 | 2016.11.3 | |
세그룹으로 나누어 헌법이 개정된다면 어떤 것을 바꾸고 싶은지, 어떤 것을 새로 만들고 싶은지, 그걸 위해서는 어떤 행동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그룹토론을 하고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팀은 생태적 삶을 지향하는 팀이었고 대략적으로 인간적인 삶을 위한 기본소득, 노동권, 주거권 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다른 하나는 이 생태계의 일원으로써 좀 더 생태적인 삶을 위한 모든 생명을 존중한 삶을 형태를 갖추고자 했다. *더 자세한 기본소득에 대한 정보는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참조(http://basicincomekorea.org)
*사진은 종강파티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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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을 읽다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 읽기](6) 아가멤논 | lyh1999 | 2016.10.30 | |
전날(10월 25일) 보도된 국정농단 파문으로 모두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모인 여섯 번째 시간(10월 26일) 강의에서 읽은 작품은 <아가멤논>입니다.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자비로운 여신들>과 함께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 중 하나입니다.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군을 지휘한 왕이지만, 동시에 온갖 악행과 끝없는 복수로 점철된 가계의 역사 가운데 우유부단하고 오만한 행동으로 화를 입습니다. (의도한 스케줄은 아니지만) 정치적 '무능함'과 '잔혹함'이라는 주제가 현재의 시국과 공교롭게도 잘 맞아떨어지고, 그래서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비극입니다. <아가멤논>은 <일리아드> 등을 통해 잘 알려진 트로이 전쟁 직후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기둥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필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미케네와 아르고스의 왕인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막 왕궁으로 돌아옵니다. 그의 부인인 왕비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반갑게 그를 맞이하는 척하며 아가멤논을 죽입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이것이 아가멤논에 대한 복수라고 주장하는데, 이를 이해하려면 아가멤논의 가계도와 함께 극중을 통해 밝혀지는 이전 사건들을 알아야 합니다. (아가멤논의 가계도 참조) 사건들을 시간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아르테우스(아가멤논의 아버지)의 쌍둥이 동생 티에스테스가 아르데우스의 아내를 유혹해 아르데우스의 권력에 도전함 (2) 아르데우스는 티에스테스의 자녀들을 죽이고 티에스테스를 잔치에 초대해 죽인 자식들의 인육으로 만든 요리를 먹임.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티에스테스의 자녀 아이기스토스가 아르데우스 집안에 대해 복수심을 갖게 됨 (3) 아가멤논이 사냥 중에 숫사슴을 마주치고, 숫사슴이 아르테미스 신의 소유임을 알면서도 쏘아죽여 아르테미스의 분노를 삼 (4) 파리스가 아가멤논의 동생 메넬리오스의 부인인 헬레네와 사랑에 빠져 도피, 트로이 전쟁이 발발함 (5) 아가멤논을 총지휘관으로 한 그리스 군대가 배를 타고 출정하려고 하나, 아르테미스가 바람을 멈춰세웠기 때문에 배가 출항하지 못하게 됨. 아르테미스 신의 노여움을 풀려면 아가멤논의 딸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신탁이 내려옴. (6) 아가멤논은 동맹의 서약이 더 중요하다며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치고,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복수심을 품게 됨 (7)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가 불륜 관계에 빠지고, 아이기스토스가 아가멤논을 죽이라고 사주함 (8)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아가멤논과 그가 전리품 격으로 끌고온 카산드라를 칼로 찔러 죽이고, 이후 아이기스토스가 등장해 아가멤논의 재산으로 참주 자리에 오를 의사를 밝힘 정치적으로 독해할 때 <아가멤논>은 정치 지도자의 우유부단함(= 무능함), 복수의 잔혹함과 간교함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일리아드>에서 묘사된 트로이 전쟁 과정은 물론 <아가멤논> 작품 전반을 통해 아가멤논은 우유부단하고 지질한 행동도 곧잘 저지르는 왕으로 그려집니다. 아가멤논은 자신의 책임으로 딸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상황에 처했음에도 반성 없이 딸을 포기하고, 이피게네이아가 가문을 저주할까봐 입을 틀어막기까지 했습니다. 전쟁 중에는 여성을 전리품으로 취하려고 탐내다가 그리스군에 역병이 돌게 만들고, 아킬레우스를 분노케 하여 전황을 불리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극중에선 클리타임네스트라가 그를 추어올리며 맞이하자 신들의 색깔인 보랏빛으로 만든 주단을 밟는 오만한 행동도 합니다. 아가멤논의 행동의 특징은 다른 비극 주인공처럼 스스로 결단하고 상황을 주체적으로 바꾸기보단 상황에 떠밀려서 행동하고, 무엇이 옳은 행동인지 자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가멤논이 우유부단한 왕으로 평가받는 이유입니다. 이후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명확하게 선을 긋습니다. "사악함은 능력이지만 우유부단함은 무능이다." 반면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복수의 잔혹함을, 이아기스토스는 복수의 간교함을 보여주는 캐릭터입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복수를 위해 아가멤논에게 자신이 정절을 지킨 것처럼 거짓말을 합니다. 말과 설득의 기술인 정치에서 정직은 중요한 덕목이지만, 복수는 이와 반대되는 특성을 지닌 것입니다. 또한 그녀는 아가멤논이 딸을 죽인 사실을 상기시키며 자신의 복수가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또한 정의의 여신들을 호명해 이 복수에 정의를 부여하고 합니다. 반면 이아기스토스는 정부에게 복수를 교사해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복수하고, 아가멤논의 재산으로 시민들을 다스리겠다고 선언하면서 복수의 폭력이 참주의 탄생을 부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코러스장은 이아기스토스에게 반발하면서 그와 싸움을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잔인한 폭력으로 잡은 권력은 시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가멤논 가문의 비극은 복수가 또다른 복수를 부르는 악순환입니다. 정치철학적 측면에서도 정치에서 위와 같은 특징들이 등장할 때 정치보복이 반복될 수 있습니다. 연쇄적인 정치보복 문제의 해결책으로 학자들이 제시하는 것은 "용서" 개념입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함으로써 보복의 순환을 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종차별 문제가 극심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제시한 "진실과화해협의회" 모델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가해자의 가해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고, 이 현장에 가해자와 피해자를 출석시켜 용서와 화해를 이끄는 모델입니다. 이 모델에 대한 반론도 물론 존재합니다. 남아프리카의 경우 전세계의 주목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할 수밖에 없는 암묵적 압력이 있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이 협의회가 만들어져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최종적 화해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용서라는 아이디어 자체에 대한 반론도 있습니다. 먼저, 용서란 가해자가 제대로 된 사죄를 해야 가능한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하루빨리 일본의 사죄를 받고 그들을 용서하길 바랍니다. 그러나 일본이 이 문제를 적당한 선에서 묻으려 하고 용서를 빌지 않는데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국정농단 사실을 떠밀린듯 인정하면서도 "순수한 마음으로" 같은 표현으로 자기 책임을 도외시하는 대통령의 (우유부단한) 사과를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가해자가 사죄하지 않거나, 제대로 사죄하지 않음에도 피해자가 용서를 한다면, 그것은 피해자가 트라우마를 덮어둔 채 망각한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천안문사태를 겪은 중국은 학교에서 이 사건을 가르치지 않고 집단적으로 잊으려 합니다. 훼손된 형태의 용서는 집단의 기억에도 악영향을 미칩니다. 제대로 된 용서가 이뤄지려면 집단 전체가 외상적 사건을 정확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가해자의 가해 사실과 그들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명확히 공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제기되는 문제는, 어떤 사건은 결코 용서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가멤논>에도 등장하듯이 아버지에게 자기 자식의 인육을 먹이고, 아버지가 자기 딸을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사건을 용서로 해결한다는 게 올바른 선택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아가멤논이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용서를 구한다면 그 용서는 과연 가능할까요? 다시 말해, 정치적인 무능함은 용서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요? 앞으로 좀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한편 Martha Minow는 <Between Vengeance and Forgiveness>에서 용서에 대한 몇 가지 조언을 주고 있습니다. 먼저 가해자는 언제까지 사죄를 해야 하는가? 사죄의 끝은 피해자가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말할 때까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도저히 용서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일 때 사람들은 대개 가해자보다 용서하지 않는 피해자에게 더 많은 비난을 보낸다고 합니다. Minow는 왜 우리는 가해자의 감성에는 민감하고 피해자의 감성에는 둔감한지를 묻습니다. 즉 제대로 된 용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피해자들에게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말할 수 있는 환경과 권리를 마련해줘야한다는 것입니다. Minow의 지적에 이어받아 마지막으로 제시할 아이디어는, 한국의 이념갈등에 대한 것입니다. 정치적 보복이 끊이지 않았던 현대사를 돌아볼 때, 한국의 진보와 보수는 과연 화해가 가능할까요? 앞에서 살펴본 용서의 개념을 한국의 이념지형에도 적용한다면 어떨까요? 이 고민은 다음주 오레스테이아 3부작에서 더 자세히 다룰 예정입니다. * 구본형의 아가멤논에 대한 칼럼을 링크합니다. 함께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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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주인 되는 <헌법 제대로 읽기> | [진짜 주인 되는 <헌법 제대로 읽기>] 6강. 감시자들 | 박윤채영 | 2016.10.29 | |
그동안 우리는 헌법 내용을 중심으로 한 수업들을 통해 한국 사회의 감춰져 왔던 가능성과 변화를 상상하기 위한 근거들을 배워 왔습니다. 이번 수업에서는 ‘법’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통해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과 법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법은 한 사회의 구성원들의 행동을 통제하고 분쟁을 처리함으로써 그 사회의 자유롭고 억압 없는 민주적 환경을 마련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법의 역할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자의성’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자의적 판단에 사회가 좌지우지 되는 것을 막겠다는 것입니다. 법의 등장은 인간 개인의 자의적 지배 환경에서 법의 지배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국가가 법을 만드는 과정은 정치적 환경의 민주화뿐만 아니라 경제 발전을 위한 전략의 일부이기도 했습니다. 그 사례는 1990년대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서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990년대, 아시아권에서는 법체계와 사법 체계를 구축하는 움직임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체계를 갖추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결과적으로 시장 경제를 발달시키고 사적소유와 재산권 보호, 국제 교류 등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법 집행이 자의적이지 않기 위해서 법의 판단은 법의 정신에 한해서만 이뤄져야 합니다. 때문에 독립성은 법과 법률 조직의 기본 조건입니다. 권력의 정도 소유 재산과 무관하게 모든 사회 구성원을 통제, 조율할 수 있기에 사실상 법은 한 사회에서 가장 큰 권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법은 그것을 집행하는 사람이 있기 전에는 사회적 지침 이상의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법의 판단을 통한 분쟁 조율과 심판을 위해선 수행자를 필요로 합니다. 여기서 법의 딜레마가 발생합니다. 인간을 감시하는 관리인이 결국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시자는 누가 감시할 것인가?” 법에 대한 감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필요로 합니다. 1. 민주적으로 제정되는가? 2. 공정하게 집행되는가? 3. 독립적으로 심판하고 있는가? 감시의 내용은 법의 판결뿐만 아니라 법률가 사회에 대한 감시도 포함됩니다. 왜 법률가 사회가 포함되는 걸까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한국 사회의 역사적 내용과 양성 과정의 문제점을 짚고 가야 합니다. 대한민국에 최초의 법이 등장했을 때, 그 법 내용은 민주주의를 추구했지만 실제 지도자는 독재자였습니다. 독재자는 법을 이용하여 국가를 통제하려 시도했고 독재자의 역사는 법의 역사 또한 바꿨습니다. 이전 이국운 선생님의 수업을 통해 보았듯이, 법의 내용을 보면 통치자의 성격과 본심을 추측할 수 있지요. 이 속상한 역사가 법이 독립성을 가질 기회를 방해해 왔고 그 중요한 법의 성격은 아직까지도 형성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다음은 법률가들이 양성되는 과정을 봐야 합니다. 법은 전문영역이기 때문에 결국 법 전문가가 후대 전문가를 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선후배 관계는 사제 관계이기도 한 것이지요. 때문에 법률 조직은 권위적이고 관료적이고 보수적인 성격을 가질 위험이 큽니다. 이것은 결국 법 집행의 독립성을 위협하는 일입니다. 사실 이미 우리는 법률 조직의 내부적 악습을 공공연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전문적인 집단이라 시민들이 간섭 할 엄두가 나지 않지요.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전문성을 지킴으로써 그 특권을 보호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법률가의 수를 늘리지 않으려 하고 시험을 어렵게 하는 등의 일들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엄두 안 나는 일을 시작한 시민 조직이 바로 ‘사법 감시 센터’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법률 조직의 감시자들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부에서 출현 한 감시자들 ‘민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외부에서 출현한 감시자들 ‘사법감시센터’입니다. 법률 조직의 관료적이고 정치/재벌가와 결탁한 행태에 맞서기 위해 1994년 나왔던 캐치프레이즈가 있습니다. 바로 ‘사법도 서비스다.’입니다. 법률가라는 공적 책임을 사적 이익으로 착각한 법률가 조직을 향한 외침이었지요. 이 외침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은 사회 구성원의 자유와 안전, 존엄을 위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합의한 규칙이자 약속입니다. 우린 법을 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만약 그 방향성이 다수에게 틀리다면 우린 수정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요구하는 민주적인 법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법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 나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법을 평가할 자격과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법은 사회의 윤리 감성과 떨어져선 안 됩니다. 우리 모두 법의 주체입니다. 우리는 모두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어떤 법을 따르고 싶은가?” 그것은 곧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가? 에 대한 질문이 될 것입니다.
[4강 시민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에 대하여] 후기 바로 가기>> [3강 통치구조,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후기 바로 가기>> [1강 헌법 1조 읽기: 민주공화국에서 시민으로 산다는 것] 후기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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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 통찰과 초탈의 놀이 | [10월 월례특강] 유머, 통찰과 초탈의 놀이(김찬호) | 고무곰돌 | 2016.10.27 | |
10월 20일 저녁 7시부터 2시간여동안 진행된 참여연대 아카데미 2016 가을학기 월례특강 후기입니다. 1. 들어가며 밥벌이의 괴로움을 실감하여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요즘보다 더 부아가 치밀어 오르고 헛웃음만 나게 하는 시절이 있었을까? 경찰 물대포로 사망한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둘러싼 억지주장과 공권력의 부검 강행 위협, 사회 현실을 풍자하는 한 방송인에 대한 고발 논란, 최모씨와 그 딸이 청와대와 함께 벌이고 있는 엽기적 행각 등 현 정권의 국정농단이 끝을 모르고 날뛰고 있는 이때, 우리의 정신건강을 챙겨줄 수 있는 유머의 본질과 힘에 대한 고찰, 그리고 경험을 함께 나눌 수 있는 한마당이 참여연대 아카데미 월례특강에서 펼쳐졌다. 2. 강의 개요 우선 강의에서 처음 눈에 띤 것은 좌석 배치였다. 일방적으로 강사를 바라보는 형태가 아니라 난로 주변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것처럼 둥그렇게 의자가 놓여져 서로간의 기운과 느낌, 그리고 눈빛을 한껏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가 느껴졌다. (물론 처음 강의장에 들어섰을 때는 모두들 이게 뭐야 하는 반응과 약간의 부담감을 보이긴 했지만...) 또 자리를 함께 해주신 김찬호 선생님은 한국인과 한국 사회를 빚어내는 일상의 문법을 추적해온 사회학자로서 전문적인 식견을 바탕으로 한국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감정의 응어리인 모멸감을 사회적․역사적인 지평에서 분석한 저서를 내기도 한 최적의 강사이셨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강사라기 보다는 이야기와 토론을 이끌어내는 퍼실리테이터 역할로서 말문을 여셨다. 3. 유머가 뭔데? 최근 감정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경향부터 알려주신 후 웃음(유머)의 성격, 효과 등을 차례로 짚어주셨는데 그저 어렴풋이 느끼고 알고 있던 유머의 실체가 명확히 머리에 새겨지는 기회가 되었다.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윤활유로서 경계심․갈등을 해소하며 시선의 전환을 통해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효과를 주는 유머가 기본적으로 연극과 같은 구조이며 말받아치기 등에서 볼 수 있듯 즉흥적인 성격을 띠고 권력관계가 반영되어 있으며 사소한 것을 포착할 때 그 감각을 키울 수 있다는 관점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풍성한 이야기 보따리가 펼쳐졌다. 그리고 유머라는 소재를 다루는 시간이었던 만큼 간간이 강사님이 준비하신 짤막한 개그까지 곁들여져 더욱더 즐거운 시간이 만들어졌다. 1시간여의 강사님의 쾌도난마형 강의가 마무리된 후 그날 참여한 분들의 진솔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유머에 관한 토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4. 나의 유머는, 나의 삶 우선 제기되었던 주제는 유머감각은 후천적으로 습득이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였다. 아무래도 유머있는 사람이 환영을 받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누구나 한번쯤은 가져보게 되는 질문일텐데 많은 분들이 본인·주변 지인․친지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모님도 원래부터 우스개 소리를 잘 하셨다, 원래는 그렇지 않았지만 교회 모임 등의 종교생활을 통해 자연스럽게 익혔다, 심지어 유머집을 탐독하고 남들 앞에서 자주 써먹어봤다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시간이 가는 줄 모를 정도로 활발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결론적으로 유머는 즉흥적이며 사소한 것을 포착하는 데서 그 감각을 키울 수 있으니 후천적으로 습득이 가능한 분야라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또 한가지 많이 언급된 부분은 성(gender)과 권력관계의 측면에서 바라본 관점이었다. 유머감각 있는 남자는 인기가 있는데 왜 웃기는 여자는 그렇지 못한가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여자에게는 유머 이외에 어필할 수 있는 요소가 있어야 한다, 남자는 망가져 볼 수 있는 기회를 용인하는 분위기가 있다는 사회적 분석과 여성에 대한 남성의 시선의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는 현재 사회 추세까지 언급되며 토론에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즐겁게 이어진 유머에 관한 수다를 마치며 유머는 인간관계와 사회구조 등이 연계된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할 수 있었고 유머를 통해 자기 위로와 성찰이 가능함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야기 과정에서 오간 재미있는 유머를 글로 옮기면 그 감정을 충분히 전달하기 어려워 후기에 담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참석자 개개인이 갖고 있는 유머감각 향상의 노하우를 공유하게 된 것은 하나의 큰 소득이었지만…… ※ 11월 월례특강은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분야 관련 이야기로 알기쉽게 역사를 시민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유명한 쏭내관과 함께 진행합니다. 주변에서 봐왔던 외화와 국내 사극을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낼 예정으로 임진왜란, 병자호란 그리고 근현대사, 우리 역사와 세계사를 넘나들면서 역사관의 지평을 넓혀주는 유익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깊고 바른 성찰과 의식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강력히 추천하고 싶습니다. 자원활동가 민동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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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를 위한 시민경제교실 | [99%를 위한 시민경제교실] 기본소득 시대를 상상하다 | binna | 2016.10.24 | |
2016년 10월 18일, <기본소득 시대를 상상하다>를 주제로 녹색당 전 공동운영위원장이자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 저자인 하승수 선생님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아래 강의 내용을 정리해 드립니다. 기본소득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마다 그 내용이 다양하지만, 기본소득을 대한민국 맥락에 맞게 생각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 유럽과 미국의 맥락도 서로 다르다. 외국의 이론도 중요하지만 한국의 현실에 발을 딛고 살펴봐야 한다. 그동안 기본소득에 대한 오해도 상당히 많았는데 유럽의 맥락을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정책이 그러하듯 기본소득은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 한국은 유럽과 달리 기존의 복지제도와 기본소득이 별로 충돌하지 않는다. 한국은 기본적으로 저부담 저복지 국가이기 때문에 기존의 복지제도와 조화롭게 만들 수 있다. 그럼에도 기본소득은 우리가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실마리이다. 기본소득을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조건 없이 돈을 주자는 것이다. 한국에서 기본소득을 이야기 할 때 제일 먼저 부딪히는 지점은 ‘왜 일하지 않는데 돈을 주는가?’이다. 미국 사회는 공짜로 돈을 주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크기 때문에 임금을 떠올리게 하는 기본소득(basic income)보다는 ‘시민배당(citizen's dividend)’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배당’받는 권리라는 것이다. 유럽은 보편적으로 수당과 복지를 받았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아도 돈을 받는 기본소득에 거부감이 적다. 네덜란드의 기초연금(AOW)는 50년 이상 거주 조건만 충족되면 싱글인 은퇴자의 경우 최저임금의 70% 수준을 지급하며, 재원은 조세(18.9%의 사회보장세)로 마련한다. 네덜란드의 노인 빈곤율은 1.6%수준에 불과하다. 한국의 경우, 노인의 66%가 기초연금으로 월 204,000원을 받고 있다. 수혜자 90% 이상이 만족하고 있으며, 노인 빈곤율이 49%에서 43.8%로 떨어지는 효과도 있었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청년수당을 시행했다. 기본소득과는 거리가 있지만, 한국 사회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일하지 않아도 돈을 받는 경험을 하고 있다. 기본소득을 논할 때, ‘왜 일하지 않은데 돈을 주나?’ 다음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왜 전 국민을 다 줘야 하나?’ 이다. 기초연금이든 어떤 제도이든, 선별하는 순간 지급대상과 지급액은 제한되며 사회가 지향하는 보편적인 비전이 되지 못한다. 노동운동계에서 오히려 기본소득에 반대 입장을 보인다. 유럽에서도 사회민주당이 기본소득을 반대한다. 일자리가 줄어들어 당장의 고용이 불안해지다보니 노조가 위축된다. 노동운동의 입장에서도 최소한의 생활을 가능케 하는 비노동 소득이 필요하다. 노동운동이 수세에 몰리는 상황에서 기본소득이 답인 것이다. 농민운동 입장에서도 기본소득이 필요하다. 농산물 가격유지를 위해 우루과이 라운드 이후 수 십 년 동안 수입 개방에 반대했지만 어찌되었든 시장은 열렸고 쌀값은 떨어지고 있다. 당장 농민들이 폐농을 하는 상황이다. 농민들에게도 농사(노동)와 무관한 소득 즉 기본소득이 필요하다. 안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된다고 생각해 보자. 현재의 상황에서 기본소득 외에 답이 없지 않는가. 노동자 농민 청년의 각개전투로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사회 공동의 비전으로 기본 소득이 유력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강의를 다니다보면, 정작 기본소득이 필요한 사람들이 “왜 일 안 하는데 돈 줘요?” 라는 질문을 한다. 거부감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도 미국과 같이 배당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 적합하다. 미국의 경우, 알래스카에서 1980년대부터 공유자원인 석유에서 발생한 수익을 주민들에게 배당하였고, 이제는 주민들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제임스 한센(James Hansen)은 기후변화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으로서, 탄소배출권 경매수익을 배당금으로 나누는 탄소배당(Carbon dividend)을 주장하였다. 기본소득이 단순한 복지제도가 아니라 정책적인 아이디어로 유효하게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배당의 개념이 낯설지 않다. 제주도 마을에서는 풍력발전에서 발생한 수익을 주민에게 배분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공유자원은 무엇이 있을까? 땅이 가장 큰 공유자원일 것이다. 아직 29%가 국공유지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 국공유지를 민간 기업에 불하해주는 특혜로 쓰이고 있다. 인공적인 공유자원도 많이 있다. 인터넷, 방송 주파수, 금융 시스템도 공유자원이다. IMF로 은행이 망하기 직전일 때, 국민이 세금으로 은행들을 살려주었다. 그리하여 은행이 수익을 내었다면, 왜 이에 대한 국민의 권리는 없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기업의 온실가스 배출도 대기라는 공유자원을 이용하고 파괴하는 행위이다. 이쯤에서 ‘정말 돈을 마련할 수 있는가?’란 질문이 생긴다. 조세 국민 부담률이 GDP의 50%로 세계 1등인 덴마크는 고부담 고복지이므로 기본소득이 달리 필요하지 않다. 핀란드의 국민 부담률은 40%이지만, 세금을 더 걷어 재정을 마련한 후 기본소득을 국가적으로 실험할 예정이다.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한국이 현 24.3%인 조세 국민부담률을 OECD 평균 수준인 34.1%수준까지 끌어올린다면, 추가로 마련할 수 있는 재정규모는 188.6조원이다. 국민 1인당 매월 30만원을 지급할 수 있는 정도이다. 대한민국은 저부담 저복지 국가이므로, 덴마크 핀란드보다 그 도입이 오히려 간단할 수 있다. 1965년에 덴마크의 국민부담률은 29.5%였으나 1971년에 40.8%까지 끌어올렸다. 불과 6년 사이에 11.3%올라간 것이다. 사회적 합의가 된다면 조세부담을 올리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기본소득을 실제화 하려면 단계적인 로드맵이 필요하다. 로드맵 1단계에서는, 소득이 가장 필요한 사람인 만 15세 이상 청년/노인/장애인/농민 4그룹에서 우선 실시한다. 2천만 명 정도가 된다. 2단계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지급한다. 1단계의 재원은 조세 제도를 정상화 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2단계에서는 보편 증세를 한다. 북유럽식 조세구조와 같이, 모든 국민이 소득 규모와 상관없이 소득세를 조금씩은 내게 하고, 고소득층은 누진세를 내도록 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사각지대에 있는 세금인 주택 임대 소득, 주식양도차익, 주식배당소득 등의 징수를 강화한다. 기본 소득(시민 배당) 도입으로 인해, 국민들이 조세와 연 400조 의 예산을 ‘내 것’으로 생각하게 되면 조세 제도가 투명해지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복지국가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최소한의 노후보장, 장애인의 기본 권리, 청년들의 비빌 언덕 정도는 사회가 만들어 주자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로드맵의 1단계 정도는 당연한 복지이다. 기본소득이라는 하나의 보편적 비전을 위해 로드맵 1단계도 기본소득 혹은 시민배당이란 개념으로 접근함이 필요하다. 그래야 더 보편적인 기본소득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자원활동가 김빛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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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을 읽다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 읽기](5) 메데이아 | 라봉 | 2016.10.24 | |
10월 19일 김만권 선생님의 강의에서는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가 주제였습니다. 에우리피데스는 다른 극작가들과 달리 비극의 3요소라고 할 수 있는 신, 도시, 인간 보다는 ‘인간’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또한, 인간 내에 있는 사악함 보다는 시기심이나 질투와 같은 인간 본연의 감정(연애, 질투, 복수, 간계, 광기, 비애)들을 자신의 극에서 많이 다루었다고 합니다. 하나의 극 안에서 사건이 전환 되었을 때 인물의 어두운 측면을 잘 그려냈다는 뜻으로 이해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들은 운명이나 신에 대한 순응보다는 인간의 합리성으로 이 세계의 부조리를 폭로했다는 점 때문에 비극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비극의 3요소를 제대가 갖추지 않았다는 비판입니다. 그래서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은 비극 경연대회에서 몇 번 밖에 수상을 못했고, 결과론적으로 공적인 지원을 받아 비극을 상연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하기도 합니다. 다만, 그리스에서 상연횟수를 비교하면 다른 극작가들의 작품보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이 훨씬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에이루피데스의 메데이아는 모두가 아시다시피 적지 않은 막장요소가 가미 된 작품입니다. 남편이 외도를 한 것도 모자라 가족 간에 배신과 질투가 난무하고 종래에는 엄마인 메데이아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문학적으로만 읽는다면 메데이아는 인간의 배신과 질투가 만들어 낸 가족 복수극이며 인류 최초의 막장 드라마로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정치적으로 읽는다면 “사랑이 정치의 기반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합니다. 작품 안에서 사랑 때문에 발생하는 비극적인 상황들이 수 없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극에서 메데이아는 사랑 때문에 가족을 배신하고, 더 깊은 사랑이 찾아와 기존의 사랑을 버리고, 사랑 때문에 형제를 살해하고, 사랑하던 이에게 버림을 받고, 사랑 때문에 자녀를 살해하고,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복수와 거짓말을 하고, 사랑 때문에 이성을 잃기도 합니다. 이아손 또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용해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돌립니다. 이러한 이아손과 메데이아의 사랑을 기반으로 한 관계는 사랑이 허물어 질 때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둘 간의 사랑이 컸던 만큼 사랑이 무너졌을 때의 배신감과 그 배신감을 시작으로 한 연속된 비극은 가늠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메데이아가 크레온과 이야기를 나누며 내뱉은 탄식(아아, 사랑은 인간에게 얼마나 큰 불행을 안겨주는가?)과 메데이아의 불행을 바라본 코러스의 대사(사랑이 너무 격렬하게 다가오면 사람들에게 명성과 명예를 가져다주지 않는 법)는 사랑의 불행한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런 양날의 검이 정치의 기반이 된다면 어떤 상황이 될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랑과 정치에 관하여 “사랑은 정치의 기반이 될 수 없다. 너무 사랑하면 객관적인 거리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정치의 기반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거리를 두고 인정하는 우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좋아하고 또 모방하기도 했던 세네카는 사랑에 대하여 “사랑이란 감정 자체를 절제 할 수 없고 그래서 사람을 어리석게 만든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만권 선생님은 정치가 이루어지는 공간에서 모든 신뢰를 무너트리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하고, 복수하는 과정에서 거짓말을 서슴없이 한다고 합니다. 또한, 메데이아 자녀살해가 보여주는 것처럼 사랑이 무너졌을 때 사랑하는 이와 만들어낸 것의 파괴(자실살해)는 정치의 영역에서 시스템에 대한 파괴적 열망으로 드러날 수 있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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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주인 되는 <헌법 제대로 읽기> | [진짜 주인 되는 <헌법 제대로 읽기>] 5강. 사회적 기본권과 경제질서 | 아무 | 2016.10.20 | |
10/17 5강 [복지국가와 사회권] 한상희 교수
[첨부사진 : 홈리스와 개]
[4강 시민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에 대하여] 후기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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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를 위한 시민경제교실 | [99%를 위한 시민경제교실] 홍기빈 소장의 <4차산업혁명이 불러올 우리의 미래> | binna | 2016.10.17 | |
2016년 10월 11일, <4차 산업 혁명이 불러올 우리의 미래>를 주제로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홍기빈 소장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후천개벽의 변화가 올 것이나, 혹세무민을 하고자 함은 아니다.’란 전제로 시작된 강의는 많은 생각 거리를 남기면서도 유쾌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래 강의 내용을 정리해 드립니다. 올 초,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클라우스 슈밥 회장이 ‘4차 산업혁명’을 언급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몇 달 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로 4차 산업혁명이 다시 한 번 세간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머지 않아 4차 산업혁명의 기술 혁신으로 인해 사회적 격변이 올 것입니다. 과거 역사를 통해 기술과 사회 변화가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776년 증기기관과 방직기의 발명이 1차 산업혁명으로 정의되며, 2차 산업혁명은 19세기 말에, 3차 산업혁명은 1971년 IBM의 마이크로 칩 생산을 그 시작으로 봅니다. 전례를 볼 때 1,2차 산업혁명이 100년가량 지속 되었으므로, 2050년경이 되면 현재 진행되는 산업혁명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날 것입니다. 현재 제레미 레프킨 등이 3차 산업혁명을 논의하고 있지만 정교한 수준은 아닙니다. 인류 역사에 중요한 사건은 많았으나 산업혁명보다 중요한 사건은 없습니다. 1만 년 전 인류가 정착생활을 시작한 신석기 혁명에 견줄 수 있을 만큼, 200년 전의 산업혁명은 인류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인간이 자연과 관계 맺는 방식, 인간 대 인간이 관계 맺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볼까요? 중화학 공업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물건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종이컵도 그냥 종이가 아니라 왁스가 칠해진 종이입니다. 인간의 물질세계를 구성하는 것들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물질세계가 바뀌면 인간의 정신세계와 생활 방식도 바뀝니다. 100년 전과 오늘날의 순결에 대한 인식 변화도 중화학 공업 즉, 2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피임 도구로 임신의 통제가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홍기빈 소장은 슘페터의 이론을 바탕으로 각 산업혁명 내에 두 번의 국면이 있음을 설명하였습니다. 1776년에 1차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1830년에 기차의 사용으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1880년에 2차 산업혁명 시작되었고 1930년대 이르러 독일의 아우토반을 비롯한 도로가 건설되기 시작하며 2차 산업혁명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1970년대 디지털 혁명으로 불리는 3차 산업혁명이 시작되었고, 2010년에 인공지능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으며, 과거 주기에 미루어 볼 때, 2050년이 되면 완결 될 것입니다. 슈밥 회장처럼 국면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한 용어로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겠으나, 실지로는 3차 산업혁명 내의 두 번째 국면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산업혁명으로 기술혁신이 시작되면 동시다발적인 기술 혁신이 이어지고, 이는 거대한 하나의 기술혁신을 만들어냅니다. 이로 인해 새로운 사업들이 나오면서 경제가 활황이 됩니다. 전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전기의 생산단가가 크게 떨어지면서 전기를 아무 곳에서나 쓸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은 온갖 가전제품을 발명, 생산하였습니다. 산업혁명 내의 두 번째 국면에 들어서면 사회 혁명이 벌어집니다. 1830년에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에 철도를 놓았고, 이는 교통사회로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생각해보면 1830년 당시의 사람들은 ‘그 먼 곳을 왜 가나? 정 가야하면 역마차를 타겠다.’ 했을 지도 모릅니다. 기차로 인해 교통사회가 되는 것이지, 이동을 해야 하므로 기차가 나타난 것은 아닌 것입니다. 또한, 철도에 대한 수익 예측은 무척 불확실 했습니다. 그리하여 막대한 투자금을 모으기 위한 주식시장이 생겨났습니다. 1832년 영국에서는 부르주아들이 자신의 사업에 맞는 법과 제도가 필요했기 때문에 귀족을 몰아내고 의회를 장악하였습니다. 1920년대 파시즘의 본질은 2차 산업혁명 즉, 중화학 공업에 맞는 사회 건설이었습니다. 부르주아들의 자유방임주의 사회와 양립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큰 규모의 기술적 변화는 정치 사회의 급변을 가져옵니다. 옛 기술을 가진 기득권과 새로운 기술적 가능성을 가진 세력이 충돌하게 되고, 이것의 폭력적 발현이 부르주아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이었습니다. 2004년까지만 해도 인공지능의 자동차 운전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2010년을 접어들며 비약적 발전이 있었습니다. 독일의 인더스트리 4.0과 같이 사물-사회-인간-자원이 클라우드 안에서 하나의 호흡으로 연결되는 슈퍼 커넥티드가 구현되면서 산업의 효율성이 온전해 졌습니다. 역사를 통해 알아보았듯,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경제, 사회 조직이 나타날 것입니다. 핀테크로 은행이 불필요해 지고 애널리스트가 아닌 프로그램이 그 기능을 수행할 것입니다. 백선하 같은 의사에게 가느니 오진율 3% 미만인 인공지능 의사에게 가고 싶을지 모릅니다. 로봇이 단지 육체적 노동만을 대체하지 않는 현실에서 좋은 일자리 보장은 난센스일 것입니다. 사람의 소득은 노동에서 비롯된다는 오랜 관념에서 벗어나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18세기 말 계몽주의자들로 시작된 케케묵은 정치제도인 대의제 민주주의는 어떨까요? 소수의 ‘엘리트 전문가’로 운영되는 현재의 정치 제도가 계속 유지되어야 할까요? 바뀌지 않을 제도가 없습니다. 앞선 1,2차 산업혁명은 유혈적 혁명으로 사회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에 평화적으로 그 변화를 이뤘던 스위스처럼,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한국의 사회 혁신 또한 평화적으로 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일단 기술부터 들여오고 보자는 60년대 식 태도가 아니라, 그 기술을 사용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지, 필요한 사회적 혁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진정 필요합니다. 4차 산업혁명의 기술에 매료되는 예찬론적 태도나 염세론적 불안이 아닌, 4차 산업혁명 사회에서는 어떤 인간형이 필요할까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내가 뭘 원하고 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발견하고 발전시킬 줄 아는 사람으로 스스로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새로운 사회에 새로운 규범이 될 인간상이 무엇인지 능동적으로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끝> 자원활동가 김빛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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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을 읽다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 읽기](4) 안티고네 | lyh1999 | 2016.10.17 | |
네 번째 강의 시간(10월 12일) 읽은 그리스 비극은 <안티고네>입니다. 세 번째 시간에 다룬 <오이디푸스 왕>을 쓴 소포클레스의 또다른 대표작으로, 오이디푸스의 비극 이후 그의 딸인 안티고네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안티고네는 죽은 오빠의 장례를 금지한 참주 크레온의 명령에 불복종하면서 죽음을 맞습니다. 정의를 행하려던 주인공이 그 때문에 오히려 대가를 치르게 되는 이야기는 정치철학 측면에서 정의론과 그에 관련된 '판단의 부담' 문제를 결부시켜 읽을 수 있습니다. <안티고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의 죽음 이후 왕좌를 놓고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집니다. 이 전쟁은 폴리네이케스가 타국의 군대를 끌어들여 에테오클레스에게 도전하는 형태로 벌어졌고, 테베 성 바깥에서 싸우던 두 형제가 동시에 전사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왕좌는 오이디푸스의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의 오빠 크레온에게 넘어가고,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에겐 성대한 장례를 치러준 반면, 폴리네이케스는 매국노로 지목하며 시신을 성 밖에서 죽은 그대로 부패하게 내버려두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명령을 어기는 자를 사형하겠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남편과 자식은 바꿀 수 있을지언정 혈육인 오빠는 그럴 수 없다'며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에 흙을 뿌려주고, 이를 말리는 여동생 이스메네와 의절을 선언하기도 합니다. 크레온은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하며 안티고네를 석굴에 가둬 자연사하도록 형벌을 내립니다. 크레온의 아들이자 안티고네의 정혼자인 하이몬이 반발함에도 듣지 않지요. 이는 비극적 결말로 이어집니다. 석굴에 갇힌 안티고네는 목을 매 자살하고, 안티고네의 시신을 발견한 하이몬도 크레온을 비난하며 칼로 스스로를 찔러 죽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크레온의 부인 에우리디케 역시 목숨을 끊습니다. 안티고네가 겪는 갈등은 공동체와 가족 사이에서, 그리고 인간[왕]이 정한 법률과 신의 법[오늘날의 '인륜']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종종 사회의 많은 이슈를 정의와 불의의 충돌로 받아들입니다만, 안티고네의 경우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정의가 충돌한 딜레마를 보여준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안티고네가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러주든 그렇지 않든 둘 중 어느 쪽을 택한다고 해서 이를 절대적으로 나쁜 선택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어느 쪽을 택하든 왕률과 신률 한 쪽을 저버린 대가를 치러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안티고네의 비극은 정의가 확신하기 어려운 선택의 문제임을 드러내며, 죽음과 불명예란'판단의 부담'을 두려워하지 않는 안티고네의 용기는 숭고함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한편 크레온은 참주가 정의라는주제와 어떻게 연루되는지를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크레온은 왕위를 물려받을 때만해도 "통치와 입법으로 검증받기 전까지 한 인간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열린 태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갈등이 격해지면서 자신의 목소리가 곧 도시를 통치하는 유일한 법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또한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금하는 명령을 내리면서 그는 신의 권리도 침범하고, 하이몬을 비롯해 자신을 비판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요컨대 참주에게 있어서 정의란 곧 자신의 법이며, 법의 영역 밖에서 정의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이몬은 참주를 이성적으로 설득하려던 시민들이 실패한 이후 스스로 (참주와 같은) 광기를 보이며 비극적 결말을 맞는 인물인데, 안티고네의 죽음과 더불어 도시의 충고를 듣지 않는 참주가 시민들에게 판단의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정의와 정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안티고네>의 딜레마는 이후 정치철학자 존 롤스에게로 이어집니다. 롤스는 현대사회의 '가치다원주의'가 선택의 딜레마와 판단의 부담 문제를 불러온다고 지적합니다. 주어진 선택지들이 서로 다른 신념의 차원에 존재하고, 또한 모두 합당하기 때문에(또는 합당해 보이기 때문에)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의의 원칙에 '서열'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회 전체가 보편적으로 따를 수 있는 선택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롤스는 현대사회에선 전체 생산량의 성장보다 분배에서 정의의 문제가 발생한다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의 원칙을 스스로 제시합니다.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공리주의는 '쾌락은 늘리고 고통은 줄이라'는 원칙을 내세우지만 개개인의 쾌락/고통을 측정하기란 어렵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효용에만 집중하는 폐해에 빠집니다.) 이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원칙(정치원칙): 모든 이에게 평등한 기본권을 보장해야 한다 제2원칙(사회경제원칙) - (a)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 사회적 우연성 혹은 타고난 개인적 능력이 분배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 - (b) 차등의 원칙: 사회적 불평등은 모든 사람, 특히 사회의 '최소수혜자'에게 불평등을 보상할만한 이득을 가져오는 경우에만 정당하다 이들 원칙에는 '서열'이 부여되어 있어 제1원칙은 제2원칙보다 우선적으로 충족되어야 하고, 제2원칙 내에서도 (b) 원칙은 (a) 원칙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이 원칙에 기반해 롤스는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을 이유로 기본적 자유, 개인의 인생 전망을 실현할 기회 등 기본권을 침해해선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여러 다양한 사회에서 분배의 정의가 구현되고 있는지 살펴보려면 가장 적게 분배받는 '최소수혜자'의 상황을 주목해야 한다는 결론도 이끌어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김만권 선생님의 과거 롤스 관련 강의 내용을 찾아보시면 좋습니다.) 다양한 사회에 정의의 원칙을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롤스의 정의론은 자유주의자임에도 평등의 문제를 다룬 경우라는점에서 주목할만합니다. 또한 역사적으로는 두 번의 세계대전 이후로 잠잠해진 서양 학계의 정의론 논의를 되살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정의의 딜레마는 현대 우리 사회에서도 여러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중 황우석 줄기세포 연구 조작 사건의 경우를 보면, 한 쪽엔 논문을 조작해선 안된다는 연구윤리가 있고, 다른 한 쪽엔 장기적 국익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조작된 논문을 용인하지 않으면 국익에 해가 된다"는 주장이 선택이 가능한 문제, 판단의 부담 문제로 돌변한 것입니다. 그러나 롤스가 제시한 원칙을 적용해 보면 이러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난자 추출, 연구결과 조작 등 논문작성 과정 자체가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이유로 이를 정당화할 수 없다." 최근 백남기 농민의 '병사' 사망진단서를 둘러싸고 불거진 논란 역시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 봐도 잘못된 판단이 논쟁의 대상으로 둔갑하는 현상이 사회 내에서 늘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의사의 사망진단서나 법원의 판결 등 사회 전체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공적 판단과 일반 구성원의 보편적인 믿음 사이에 격차가 커지는 현상은 한국을 비롯한 현대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공적 판단에 대한 신뢰가 사라질 때 우리는 차라리 인공지능에게 판단의 역할을 맡기는 게 낫겠다는 상상을 막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안티고네와 롤스의 정의론은 이 과제를 해결하는데 참고할 좋은 지점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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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주인 되는 <헌법 제대로 읽기> | [진짜 주인 되는 헌법 제대로 읽기] 4강. 시민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에 대하여 | 박윤채영 | 2016.10.15 | |
<4강 시민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에 대하여>
헌법 제 2장은 제10조에서 39조까지로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곳저곳에서 인용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익숙한 구절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 및 구성을 살펴볼까요? 2장의 시작, 10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지 않으신가요? 이 내용은 헌법 전문의 내용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러니까, 10조는 제2장의 전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의 기본 정신이자 중심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 다음은 11조는 이렇습니다.
(1)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2)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3)훈장등의 영전은 이를 받은 자에게만 표력이 있고 어떠한 특권도 이에 따르지 아니한다.
11조의 내용의 핵심은 법 앞에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법치정신의 기본에 대한 내용이면서 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사회구조는 어떠한 계급도, 특권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1조는 10조를 보완해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앞선 수업에서 배웠듯이 자유와 평등은 충돌이 불가피한 가치입니다. ‘권력도 나의 자유다.’ ‘내 돈 내가 마음대로 쓰겠다는데, 왜 국가가 막아서느냐.’ 등의 주장 앞에서 항상 자유와 평등의 딜레마가 발생하지요. 헌법은 이에 대해 어떠한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유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보아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걸까요? 같은 죄를 저지르면 항상 같은 형량을 내리는 것이 평등일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냉철함을 유지하며 법의 항목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요?
그 다음 12조에서 23조까지는 모든 조항 끝에 ‘자유를 가진다.’는 말이 붙습니다. 그리고 24조부터는 ‘권리를 가진다.’는 말이 나오는데, 24조에서 30조는 정부 구성과 정치적 행동에 대한 권리에 대한 내용이고 31조에서 36조까지는 국가에 요구할 권리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어지는 37조는 헌법에 열거 된 국민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예외 상황에 대해서, 38조, 39조는 납세의 의무, 국방의 의부에 대해 명시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점은 12조입니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의 시작이 ‘신체의 자유’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요? 이 조항은 헌법 조문들 중 가장 긴 내용을 담고도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겠지요. 신체의 자유는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개인을 국가는 존중해야 한다, 국민은 국가에 선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조항들은 신체의 자유에 귀속되는 것들로 거주이전의 자유, 양심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등이 있습니다. 이 내용들은 국가라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자유를 위해 가져야 할 책임과 국가가 국민을 위해 이행해야 할 책무 또한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교육, 근로, 사회보장, 환경, 가정에 대한 국가의 역할에 대한 지침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15조 모든 국민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가진다.’가 지켜지기 위해서는 국가가 일자리 환경 조성에 힘써야 하며 선발 과정에서의 불합리함, 불평등 또한 관여하고 개선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지요. ‘제22조 1항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 2항 저작자·발명가·과학기술자와 예술가의 권리는 법률로써 보호한다.’를 지키기 위해서 국가는 국민의 학습권이 금전적 상황과 무관하게 평등하도록 보호해야 하고 블랙리스트 따위로 예술 활동의 기회를 제한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법은 무엇인가? 법에 대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악법도 법이다.’ 바로 소크라테스의 말이었지요. 저는 이 말에 대해 주로 악법도 법이니 지키는 것이 마땅한 도리이다, 라는 해석으로 배워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의문이 들더군요. 정말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우리의 상황도 같은 것일까? 과거 절대군주 사회에서는 그러한 해석이 맞았을지도 모릅니다. 악법도 법이니 지켜야 하지요. 신의 말씀이니 감히 어길 수 없지요. 그러나 현재의 근대사회에서 법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절대적이고 선험적인 사회 규칙이 아니라 반대로 권력에 대한 인간의 독점을 방지하고 사회 구성원들을 권리와 의무로 연결시켜 정치 활동의 틀을 제공하면서 역동을 불러일으키지요. 더군다나 민주사회에서 법은 모든 구성원이 법 제정과 수행자로 참여할 가능성을 갖습니다. 대의정치란 법 제정과 수행의 역할을 나눈 것으로 법 집행의 합리성을 보장하면서도 견제 가능성을 둔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민주사회에서 법이 악하다면 바뀔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말은 민주사회에서 이렇게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떤 법은 악법이다. 그러니 법을 맹목하지 마라. 법은 변한다.” 하지만 법을 제정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최근 통과 된 김영란법만 하더라도 만들어지기까지 몇 해가 걸렸습니다. 그러한 숙고의 과정을 거치더라도 문제는 발생하고 문제제기도 계속 되고 있지요. 이렇게 보면 법은 아주 단단하고 보수적이고 굳건한, 변하지 않을 기둥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법에도 진보는 있습니다. 이국운 선생님은 법 내부에 아주 재밌는 모순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법 창조’와 ‘법 발견’의 다이내믹스입니다. 법 창조는 법 제정을 말하는 것으로 법 제정자의 욕망과 의지의 결합을 중요시 합니다. 법 발견은 법의 해석을 중요시하며 욕망보다는 이성적 법원리와 의지의 결합입니다. 말이 너무 어렵지요. 저의 식대로 쉽게 풀어보자면, 법을 제정한다는 것은 이 사회에서 지켜지도록 하고자하는 어떤 욕망의 발현이며, 법을 해석한다는 것은 그 욕망을 관통하면서도 어떻게 법이 집행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지라는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이성과 욕망의 다이내믹스가 아닐까요? 법은 욕망의 의지이기에 진보할 수 있습니다. 사회 변화에 맞추어 사람들의 욕망은 변화하고 때문에 법에 대한 새로운 요구가 나오는 것이지요. 그리고 법은 해석의 여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진보할 수 있습니다. 과거엔 타당했던 법이 현재엔 악법으로 평가될 수도 있고 인식 변화에 맞추어 과거 판례를 뒤집는 사례가 가능한 것이지요. 근대사회에서 이 다이내믹스는 이런 과정으로 진행됩니다. ‘법 창조의 우위-법발견의 요청-법발견의 우위-법창조의 요청’
헌법재판소는 누구인가? 다시 헌법 내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 수업은 10조와 37조2항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진행되었습니다.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제37조 (1)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 (2)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37조 2항은 국가에게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국가가 책임을 다 하지 못했을 때 면죄부의 근거로 쓰여 왔습니다. 선생님은 10조에 대해 ‘마르지 않는 샘’이라 표현하셨고, 37조 2항에 대해서는 ‘마스터키’라고 하셨습니다. 10조를 근거로 한 소송이 끊이지 않고, 37조2항을 근거로 패소하는 국민 또한 끊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판결들은 37조 2항을 근거로 국가에 대한 국민의 소송을 패소 판결 내려왔습니다.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 또는 공공복리의 측면을 따졌을 때 ‘그다지 위법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이지요 선생님은 ‘헌법 재판관들은 누구인가?’하는 의문을 던지셨습니다. 어딘가 모르게, 자신들은 국민이 아닌 척 헌법의 화자에서 빠져나와, 국가와 권력과 자본의 편에 서고 있지 않는가? 하며 통탄하셨습니다. 법률가들은 자신들이 법의 화자라는 것을 망각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 앞에 선 저 피고인과 내가 같다, 내가 읽고 있는 이 법문 앞에 나는 얼마나 떳떳한가, 이 법을 나는 따르고 싶은가?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법 해석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재벌의 편이 아닌 국민의 편에, 정부의 편이 아닌 정의의 편에 서는 이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명한 ‘배심원’으로써의 헌법재판소가 되는 날을 기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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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를 위한 시민경제교실 | [99%를 위한 시민경제교실] 김상조 교수님의 "구조조정의 정치경제학" | 두둥실 | 2016.10.11 | |
2016년 9월 27일 김상조 교수님의 구조조정의 정치경제학 강의가 있었습니다. 국내외의 경제위기 속에서 우리는 이 난국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이며 나아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교수님의 날카로운 분석과 냉정한 조언으로 본 강의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렇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신뢰의 경제학" 강의 제목에서 언급했듯, 김상조 교수님의 경제학은 정치적인 관점에서 일련의 사건을 분석, 관찰한다는 점을 일단 밝힙니다. 객관적인 사실에서 정치적 힘의 작동을 읽어내고 이를 경제학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위기속의 한국경제를 진단하고 이를 타개할 정치적 제언을 함으로써 한국경제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합니다. 세계는 불확실성이 정상이 되는 시대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이상 높은 성장률로 대변되는 경제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또한 예전과 달리 미국의 경제적 위상도 중국으로 말미암아 세계경제의 패권국 지위를 잃었으며 중국이 미국과의 각축을 벌이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나라는 중국과 동남아의 영향 그리고 인구구조의 변화로 인해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경제적 위기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성장과 분배측면에서 난관에 봉착하였고 그 결과 성장산업을 위시로 한 경제적 견인차도 보이지 않으며 나아가 불평등 및 양극화의 심화 현상이 두드러져 국내 경제는 IMF의 표현에 따르면 "온탕속의 개구리", 즉 위험한 경제위기 속에 놓여있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한국경제는 기존 낙수효과 모델로는 지금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낙수효과 모델에 따라 거시적 순화의 단절측면, 산업간 연관관계의 약화측면, 기업규모별 양극화의 심화 현상을 분석하여 보면 수출중심의 국내경제, 낮은 중소기업의 투자비율, 가계의 지속적인 소득비율 하락, 수출유발계수의 하락, 소규모 기업의 양적 팽창, 소규모 기업의 노동흡수증가, 소규모기업의 낮은 임금 및 부가가치는 우리 경제가 현재의 경제구조로써 지속성장을 하기 힘들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필요한 것은 경제민주화이지만 현 정부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기엔 그 의지가 약해 보입니다. 한국경제는 대기업의 역할에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기업이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재벌의 경제적집중은 이미 여타 기업간 양극화 현상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재벌의 3세 승계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는 기업의 위기를 초래하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이들 재벌기업들은 방만한 운영으로 인해 구조조정 대상으로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구조조정입니다. '구조조정의 과정'이고 '구조조정의 결과물'입니다. 기업은 내적, 외적 조건으로 인해 언제든 구고조정 당할 수 있으며 이는 경제의 순환과정에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구조조정을 통해 국내 경제는 건전하고 투명하며 건강한 체질을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내 구조조정은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법적 제도를 제대로 갖추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국책은행으로 떠넘겨진 구조조정 기업은 여론의 감정적 대응과 정부의 온정적이며 미흡한 대처로 인해 필요한 구조조정 절차는 나타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조조정 기업 근로자들을 기만하는 구조조정 기업 회생절차는 실제 필요한 정책의 실현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김상조 교수님은 구조조정과 개혁과정에서 나타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특히 경제 사회적 약자에게 더욱 가혹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되며, 이론으로만 대변되는 해결방법 대신절충적이고 유연한 대응방법이 필요하며 동시에 시의적이고 거시적 정책관점에 부합하는 정책을 추구하고 사회안전망의 구축은 장기적이며 신중하게 추구해야 함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자유주의적 시장화를 이끌어 온 IMF마저 구조조정과 경제개혁의 사회적 충격을 유의해야 한다는 관점의 변화는 우리가 직면한 경제위기가 단순히 규제완화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경제정책 컨트롤 타워의 시스템화와 리더십의 강화, 다양한 규율수단의 체계적 합리성 제고, 규칙(rule)의 일관되고 예측가능하며 엄정한 집행만이 이 시대의 불확실한 경제상황을 올바르게 이끌수 있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규칙(rule)에 대해 우리 사회는 숙고해야 합니다.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으로 사회이슈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늘상의 문제를 계속해서 반복시키고 있습니다. 예전의 문제가 또다시 언론을 통해 전파됩니다. 신뢰가 사라진 한국 사회에서 개인, 기업 그리고 정부는 규칙(rule)의 부재로 인해 비협조적이며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합니다. 반추하여 보면 한국 사회의 왜곡된 보상구조가 투영된 것으로 이를 규제, 통제하는 매커니즘의 불충분을 의미합니다. 앞선 밝힌대로 일관성,예측가능성, 집행의 담보가 이루어진 규칙(rule)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선 이를 신뢰하고 점증적이며 반복적으로 실천할 상호신뢰의 구성원이 있어야 합니다. 배신행동과 이를 보복하는 배신행동의 끊임없는 반복은 건전한 경제구조를 구축해야 하는 기업과 개인 그리고 정부간 최악의 보상만을 남겨줄 뿐입니다. 먼저 배신하지 않으며, 과거 상대방의 배신행위를 잊으며, 시샘하지 않는 행동은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경제 매커니즘의 초석으로 작용하여 올바른 구조조정, 경제개혁 그리고 나아가 건전한 경제구조를 구축하는데 밑바탕이 될 것입니다. 자원활동가 김경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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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을 읽다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 읽기](3) 오이디푸스 왕 | 라봉 | 2016.10.10 | |
그리스 비극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이 계시다면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안 들어보신 분은 없을 것 같습니다. 오이디푸스 비극은 이야기가 만들어 진 시대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충격적인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언대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리고 종래에는 자신의 눈을 스스로 해한 뒤 도시에서 스스로 떠나게 됩니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문학적으로만 읽는다면 ‘운명을 피하지 못한 자의 비극적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0월 5일 있었던 김만권 선생님의 강연에서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문학적 관점이 아닌 정치적’ 관점에서 들여다보았습니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누구도 자신이 행한 행위의 결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라는 괴물을 해치우고 왕이 된 자”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업적으로 명예로운 자리에 오른 자라고 할지라도, 지난날에 죄가 있으면 그에 대한 응당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예언을 통해 자신이 미래에 어떤 잘못을 저지를지 알고 있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부친살해와 근친상간이라는 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합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한 오이디푸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이디푸스는 한순간의 화 때문에 아버지를 살해하게 되고, 어머니와 근친상간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예언되었던 대로 자신의 현재의 죄(미래의 진실)와 마주하게 되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두 눈을 찌르고 도시를 떠나게 됩니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도 마찬가지지만 그리스 비극에는 ‘합리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그리스 비극에서 주인공들은 최대한 이 비극을 이성적으로 접근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지만, 끝내 이 비극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고 책임을 지게 됩니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이는 “자신이 절대 의도하지 않았던 행위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교훈을 남깁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이디푸스 이야기 또한 (좀 전의 이야기와는 결이 다르긴 하지만)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죄를 지은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죄(진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함을 시사합니다, 이전에 이야기 했다시피 실제로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내리는 처벌로 자기 자신의 눈을 찔렀고, 스스로 도시를 떠나게 됩니다. 68혁명 그리고 부친살해 오이디푸스 이야기와 함께 이날 강의의 또 다른 주제는 68혁명 이었습니다. 68운동은 ‘시대를 바꾼 혁명’으로서 종종 부친살해로 설명되곤 합니다. 긍정적으로 봤을 때에는 부친이라는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억압적인 체제에 항거한다는 의미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로는 아버지를 ‘죽인다는’ 폭력의 개념으로 설명이 되기도 합니다. 68혁명은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그리고 (약간은 결이 다르긴 하지만) 중국의 문화대혁명까지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항거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변화’를 위해 ‘폭력’을 사용했고, 이 변화를 위한 폭력 사용의 합당함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있습니다. 실제로 68혁명은 당시 장기화 되었던 폭력으로 인해 서구에서는 테러리즘으로 보이기도 했고, 중국에서는 실제 엄청난 살생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폭력으로 변화를 만드는데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이 사용했던 폭력의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는 것 입니다. 결국 이들이 사용한 폭력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변화라는 이름으로 가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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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을 읽다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 읽기](2)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 lyh1999 | 2016.10.2 | |
앞으로의 강의를 개괄한 1강에 이어 2강 시간엔 고대 그리스 비극 첫 작품으로 아이스킬로스의 작품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를 다뤘습니다. 아이스킬로스는 지금까지 작품이 전해져내려오는 비극 작가 중 한명이고,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를 비극 3부작으로 만들었습니다. 잘 알려진대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줬다는 이유로 제우스에 의해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먹히는 형벌을 당합니다.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인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바위에 묶인 프로메테우스가 이후 헤라클레스를 낳는 이오와 조우해 제우스의 불길한 미래를 예언하고, 마지막엔 바위 전체가 붕괴해 깔리는 (익숙한) 전개를 그대로 따릅니다. 정치철학적 시각에서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참주정'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참주정은 (완전히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지만) 오늘날 독재정치의 형태로 구현되고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에게 형벌을 가한 제우스는 다른 신들과 인간 위에서 전지전능한 수준으로 힘과 폭력을 휘두르는 참주가 됩니다. 때문에 첫 대목에서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는 같은 혈육인 프로메테우스를 자기 의지에 반하여 바위에 묶게 됩니다. 이때 추상적 개념인 '힘과 폭력'이 무대 위 등장인물로 형상화되어 헤파이스토스에게 제우스의 명령을 따르라고 협박합니다. 정치의 수단이 '말'인 반면 참주가 즐겨 쓰는 수단은 힘과 폭력이며, 연민의 감정이 없고, 권력의 편에 서는 등의 특징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반면 오케아노스처럼 제우스에게는 반대하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프로메테우스에게 제우스에게 복종하라고 설득하는 신도 등장하고, 제우스에게 적극적으로 순종하면서 프로메테우스에게 더 큰 파국을 경고하는 헤르메스 같은 신도 등장합니다. 이들 신들은 참주정치 하에서 지식인들이 취하는 다양한 태도(저항/소극적이고 나약한 순종/노예와 같은 복종 등)를 드러냅니다. 한편 프로메테우스가 만나는 이오는 제우스에게 유혹을 받았으나 헤라의 질투로 인해 먼 길을 떠돌고 있는 중입니다. 이오는 참주가 사랑하는 여자들이 어떤 운명에 처하는지를 보여주는 경우로, 참주의 사랑을 얻은 결과가 다른 이들의 시기와 질투에 시달리는 것임을 경고하는 캐릭터입니다. 또한 비극에 늘 등장하는 코러스들은 이 작품에서 프로메테우스의 사연을 들으면서 그에게 연민을 드러내고, 그의 곁을 끝까지 지키다가 프로메테우스의 비극적 운명을 함께 당하게 됩니다. 이들은 참주의 통치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그에 함께 맞서는 도시의 시민들을 상징합니다. 이 작품에서 참주정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참주정 하에서는 오로지 참주만 자유를 누린다. (2) 모든 사람은 노예다. (3) 참주는 배신을 일삼고 친구를 비롯해 아무도 믿지 못한다. (3) 자의적으로 법과 정의를 행사한다. (5) 정치가 책임에 대한 담론임에도 불구 참주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6) 모두가 자신을 사랑하길 원하고, 프로메테우스 같은 다른 이가 사랑을 받음으로써 자기 권력에 위협이 되는 일을 참지 못한다. (7) 헤파이스토스 같이 참주를 돕고 따르는 자도 위험에 처한다. (8) 참주는 말을 통치 수단으로 쓰지 않으므로 말이 통하지 않고 설득당하지도 않는다. (9) 참주를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고통을 주고 이오 같이 참주가 사랑하는 이들도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공포를 퍼뜨린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 같은 참주에게 저항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참주에게도 바른 조언을 하는 게 지식인의 역할이라는 것이지요. 이로 인해 지식인은 고난을 자초하고 그가 도운 시민들로부터 외면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역할에 충실헤야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참주에게 순종할 때 지식인이 처하는 가장 큰 불행이란 자기보다 못한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플라톤 역시 그런 지식인의 예입니다. 플라톤의 유명한 '동굴의 비유'에서 먼저 동굴에서 풀려나 태양빛을 본 지식인은 진리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사물의 그림자만을 보고 있는 동굴 속 사람들에게 사실을 알리려고 동굴로 돌아갑니다. 또한 플라톤은 (민주정이 아니라) 철인 통치를 선호했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지배자가 철학을 사랑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참주 디오니시오스를 찾아가 정치적 충고를 전했다가 분노를 사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속 지식인상은 이후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와도 연결됩니다. 죽음을 비켜가려고 했다는 이유로 저승에 끌려간 시지프스는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계속 밀어올리는 형벌을 받습니다. 자기 자신만의 기준을 찾기 위해 산 속 동굴에서 수련하던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화를 빚음에도 사람들의 저잣거리로 돌아가기를 반복합니다. 모두 현상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계속 변화를 만들기 위해 시도하는 인물들입니다. 현재의 문제를 바꾸고자 하는 시도는 대개 '그렇게 해도 소용없다'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회의론에 부딪힙니다. 이는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운영, 시민운동 등에서 종종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동굴의 비유, 차라투스트라, 시지프스 등을 통해 우리는 '비효율성'의 몰락을 자초하면서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인물들을 보게 됩니다. 이들이 받는 고통은 '무엇을 해야 옳은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때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사건들이며, 나아가 정의가 곧 비극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는 감상도 갖게 합니다. 또한 '변화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변화를 추구하는 목적 자체를 무너뜨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