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드로잉 |
2022년 가을학기 서울드로잉 후기 |
오돌 |
2022.12.1 |
나의 가을은 충만했다....
그 동안 사회생활로 찌들었던 나의 일상이
지인과 술 한잔 걸치면서 근근히 버티던 나의 일상이
새로운 감정과 새로운 시도,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장소 들로 인해
마음에 여유와 행복이 충만해졌다..
단순히 그림 하나 그릴려고 서울을 돌아 다닌 것 뿐인데.....
새로운 공기를 마신 것처럼 하나하나 새로웠다.
조금은 아쉬운 것은 뭔가 이제는 제대로 그림을 그릴 것 같았는데... 마감이 끝난 버린 전시회와
이제 뭔가 사람들과 더 친해지고 알아갈 것 같았는데.... 끝나 버린 강좌
정말 아쉽다....
다음 주에는 이제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이후에는 2022년 충만했던 가을은 기억 할 것이다.
다음 강좌도 기대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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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꿈투사 워크숍 - 꿈 거울로 참 나를 만나다 |
[꿈투사 워크숍] 꿈. 무의식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힘이 세다 |
조각별 |
2022.11.24 |
꿈. 무의식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힘이 세다
마리 홀 에츠<숲 속에서>
10주간의 그룹 꿈투사 여행을 마무리 지으며, 언제부터 꿈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을까? 란 물음이 올라왔다. 돌이켜보니 어릴적부터 원형이 꿈틀대는 옛이야기를 무척 좋아했지 싶다. 그래서 아이를 낳으면 이야기와 함께 키울거라고, 그 이야기가 세상과 만나는 접점을 만들어줄 거라고 나름 다짐했지만 살다보니 외부에 보여주기 그럴듯한 성을 짓는데 급급해서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꿈꾸기도 잊어버렸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출산 후 아이에게 이야기를 읽어주면서 꿈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전과 다른 결을 가진 꿈들이었다. 온갖 동물들, 미라가 된 나의 모습, 성이 무너져 내리는 꿈들... 그 즈음 팟캐스트를 통해 고혜경 선생님 꿈 강의를 듣고 나의 무의식이 내게 이렇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건네는 이야기가 밤마다 꿈으로 찾아온다는 것을 깨달았고, 동시에 너무 알고 싶었다. 내 꿈이 나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10번의 만남,18개의 꿈 투사를 통해 내가 꿈 속 주인공이 되어 그 속을 거닐며 나의 본연의 힘과 감정, 치부들을 하나하나 면밀히 살펴보고 발견하는 시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 관계안의 부침이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지, 내가 잃어버린 보석은 무엇이었는지, 관계의 삐걱거림 조차 내가 외면하고 냉랭히 대했던 나의 어떤 면의 역동이었음을 절절히 알아차릴 수 있는 매 순간이었다. 함께 한 꿈 친구들의 꿈을 통해 지나간 20대의 나를 다독여줄 수 있었고, 카프카의 <변신>의 그레고리처럼 먹고 사는 데 급급해 감정이 바닥났던 날 울게 해주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또 언젠가 본 그림책의 꼬마 주인공처럼 숲의 동물들과 음악대 행진을 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꿈은 내 안에 있는 본능과 조우하는 찰나를 선사해줬으며 본능의 힘을 믿고 <마당을 나온 암탉>의 잎싹처럼 닭장을 헤치고 나가 너른 황금 들녘의 벼이삭을 맛볼 수 있을 거란 가능성을 열어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문학 작품들도 어쩌면 작가들이 꾼 꿈의 재현이 아닐까? 정말 나 다움이 뭔지, 나로 살지 못하는 시간 동안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지를 성찰해볼 수 있는 시간을 나의 꿈을 비롯 다른 이들의 꿈에서 들여다볼 수 있음은 경이로운 울림으로 다가왔다.
아기 때는 걷는다고 박수받고 넘어지면 함께 아파해주는 시선과 만져주는 손길이 있었다. 그런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지금, 서로의 꿈을 온 마음으로 들여다 보며 때론 감동하고 때론 함께 아파하며 나다움의 길을 찾아가는 데 힘을 보태줄 수 있는 체험은 얼마나 값진지. 꿈은 차별하지 않는다. 잠들면 누구에게나 선물처럼 찾아드는 꿈, 그 꿈을 들여다 본다는 황홀함을 경험할 수 있는 복된 시간에 감사한다.
융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
제레미 테일러 "꿈으로 들어가 다시 살아나라"
저 문장들이 가슴으로 와서 꽂히는 경험은 2022년에 내가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음을!
이번 그룹 꿈 투사 여정을 거치며 건져 올린, 알아차린 내면의 울림을 이제 실제 삶으로 가져와 나 답게 깨어나 살아가라는 뜻임을!
벌써 다음 꿈 모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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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왜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는가? - 적대주의, 반지성주의, 포퓰리즘, 정치적부족주의 |
외롭지 않으려는 오래된 욕망 |
박귬 |
2022.11.21 |
고백하건대 이 강의는 충동적으로 듣게 되었다. 나는 퇴근 후 혼자 보내는 시간을 타인과의 약속처럼 여기는 데다 학구열도 강하지 않다. 비싼 등록금 내고 대학에 다닐 때도 F를 맞지 않을 만큼은 꼬박꼬박 결석을 했고 졸업하면서도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는가?>라는 강의 제목을 보자마자 수강 신청을 했다. 외롭기 때문이었다. 세대로는 이대남(한국 언론이 붙이는 이름은 하나같이 그 대상에 모멸감을 안겨주는 것 같다)에 속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진보를 자처하다 보니, 지긋지긋한 정치적 갈등과 양극화를 피부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한 번 결석할 수밖에 없었지만... 총 네 번의 강의에서 다루어지는 정치적 갈등의 원인과 분석은 분명 눈을 뜨이게 했다. 우선 정치적 적대란 무엇인가. 갈등은 정치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이지만 그 갈등이 극에 달해서 구성원이 사실마저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경우, 민주주의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는다. 적대주의의 요소는 크게 세 가지로 분석된다. 반지성주의, 포퓰리즘, 정치적 부족주의. 그리고 각각의 개념과 양상을 여러 선생님들이 한 주에 한 번씩 맡아 설명해주셨다. 무심코 아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정확한 개념을 몰랐던 것들을 좀 더 명확히 알게 되었고,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공통감각', 다시 말해 '모두가 합의하는 당연한 것'이 무엇일지에 대해서도 고민할 수 있었다.
나 개인적인 문제에 관해 말하자면, 외로움은 딱히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적 외로움을 해소하려는 욕망 자체를 경계할 줄은 알게 되었다. 현 대통령이 당선되는 모습을 새벽에 시뻘건 눈으로 지켜본 이후 스스로에게 던져온 질문이 하나 있다. 나의 울분과 적대감을 일거에 해소해줄 것 같은, 하지만 무능력한 게 분명한 정치인이 나타난다면, 말하자면 '진보의 윤석열'이 미래에 대통령 후보로 나온다면 나는 그에게 투표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의 감정보다는 사실과 이성에 기대어 결정할 수 있을까. 만일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면, 나는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시민들을 조롱하고 비난할 자격이 있는 걸까.
언젠가 유튜브에서 버트런드 러셀이 남긴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미래의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남기고 싶냐는 물음에 러셀은 답한다. '당신이 믿고 싶은 것보다 무엇이 사실인지를 기준으로 판단하라. 그리고 사랑은 언제나 현명하고 증오는 어리석다는 것을 명심하라.' 진보나 보수의 구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기능하게 하려는 자와 그것을 방해하는 자 사이에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조금은 순진한 생각이 든다. 적대주의와 탈진실의 시대에도 최소한의 합의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우리가 놓지 않기를 바란다. 나와 생각이 다른 동료 시민들, 그리고 우연히 나와 생각이 유사한 동료 시민들 모두의 투쟁이 건강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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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왜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는가? - 적대주의, 반지성주의, 포퓰리즘, 정치적부족주의 |
성찰하는 사회를 향하여 |
이지연 |
2022.11.11 |
내가 참여한 강좌(<왜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는가? : 적대주의, 반지성주의, 포퓰리즘, 정치적 부족주의>)는 한국의 상실된 공통감각(공통의 정서적 토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적대주의, 반지성주의, 포퓰리즘, 정치적 부족주의라는 개념과 네 요소 간의 관계를 알아보는 시간들이었다. 적대주의, 반지성주의, 포퓰리즘, 정치적 부족주의 등의 개념은 현재 한국사회를 비판하는데 자주 등장하는 개념들이지만, 본 개념들의 역사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르고 사용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포퓰리즘이 그러한데,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의미는 사실 파퓰러리즘에 가까운 것이고 본래의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도 강좌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
우리는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여러 단어들을 사용하곤 한다. 성찰없이 내뱉는 혐오적 말들을 비판하면서, 성찰없이 개념을 사용한다는 것은 무슨 모순인가. 어떤 사회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특정 개념으로 이름붙이는 것은 필요한 작업들이지만, 현재 한국사회는 이름붙이기에 너무 몰두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현상에 대해 공개적으로 토론하여 해결하는 것이 아닌, 듣기에 그럴듯한 개념들을 끌어와 이름붙이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끌어온 개념에 대한 성찰과 공부는 뒷전이다. 이런식의 이름 붙이기는 현상의 맥락을 가리고, 사회문제들을 관조적으로 보게 한다.
나는 엘리트주의적 정치를 이야기하고자 함은 아니다. 오히려 개념에 대한 성찰 혹은 토의 없이, 단선적 이름붙이기가 엘리트주의적 정치를 부추긴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름 붙이기에서 시선을 떼어, 그 안의, 현상의 맥락을 보아야 한다. 또한 어떤 현상을 개념으로 부르기 전에 많은 공부와 논의가 필요하다. 시민들이 들어본 개념들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아닌, 현상에 대한 충분한 고찰과 성찰 뒤 붙여진 개념에 대한 공감을 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이를 위해 아카데미 느티나무와 같은, 시민들에게 공부할 기회를 제공해주는 주체의 역할이 크다. 모두가 우리 사회를 위해 같이 공부하고, 성찰 할 수 있는 사회의 첫 발을 본 강좌를 통해 볼 수 있었다. 앞으로도 풍부하고 다양한 강좌를 통해 시민의식의 함양과 원활한 토론의 지양분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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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세계화 시대의 국제관계 읽기 |
국제정치에 미치는 보통사람들의 힘 |
남가람 |
2022.11.2 |
올 초에 발생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세계가 정치-경제적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잊지 않게 했습니다. 이 전쟁은 코로나19가 가져다 준 '지구촌' 이라는 단어에 대해 새삼 인식하게되는 것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코로나19와 미중 갈등으로 인해 그렇잖아도 망가져 가고 있는 지구적 차원의 상품 공급망의 작동을 더 위태롭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이 제게 안겨준 걱정과 의문은 공급망 위기에 대한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든 생각은 이 전쟁이 '내 남은 생에 끼칠 가장 중요한 국제정치사건'이 될 것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왜 많은 전문가들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이 전쟁의 진행과정에 대해 예측하는 것에 번번히 실패하는가?'였습니다. 전황에 대한 분석도 제각각인데 전쟁의 결말에 대한 예측은 말해 무엇할까요? 막강한 정보력으로 무장한 전문가와 정보기관들의 능력이 장삼이사를 넘지 못했다는 현실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포스트 세계화 시대의 국제관계 읽기'라는 강좌를 알게 되었습니다. 위의 관심과 걱정, 의문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에서 이 강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강의는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국제관계 읽기를 시도합니다. 그리고 메인스트림 뿐만 아니라 주변부의 쟁점도 우리와 연결시켜 분석해봅니다. 또한 수강자들의 참여를 적극 유도했습니다. 강의시간의 30~50%를 참여자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것에 할애했습니다. 그래서 강의에 참여한 시간은 사람들이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공유할 좋은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이번 강의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소중한 점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보통사람들의 눈높이와 도덕관념에서 바라보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국제정치를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한 박사급 전문가들의 고담준론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시각과 철학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번 강의는 '평범한 우리도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있는 존재'임을 인식하게 되는 뜻깊은 과정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위상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격상되었고, 이제 그에 걸맞는 국제정치 참여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또, 국제정치 사건의 복잡성으로 해당 사건의 일면만을 볼 경우 오판할 수 있음을 사례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초기에 가졌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라는 목적은 강의를 수강하면서 '보통사람들은 국제정치를 어떻게 보아야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게 오히려 이 강좌 수강의 소득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첫 강의시간에 국제정치에 관심있고 시간을 내어 참여하는 분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에 놀랐다는 것을 밝히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함께한 분들에게 고맙다는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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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민주주의를 걷다_용산을 걷다 |
어린 시절의 용산을 다시 걸어보고... |
파란들국화 |
2022.10.20 |
인생의 두 번째 기억은 어머니 일터가 있던 용산 어느 육교 옆을 꾀죄죄해진 곰들이를 안고 걷고 있는 순간이다. 아마도 네 살 때 쯤이었던 것 같다. 육교와 상업 건물들이 드리운 그늘 때문이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기억으로 용산은 왠지 내게 줄곧 어둡고 슬픈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이번에 <민주주의를 걷다 _ 용산편>을 신청한 것은 내 유년 시절을 좀 더 잘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물론 어처구니없는 대통령실 이전 문제 등 사회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용산을 더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답사를 통해 내 안에 있던 용산의 이미지는 충분히 근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민주화 시기까지 우리 사회에서 억압적 폭력적 통치 기능을 하던 땅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영역, 남영동 대공분실, 캠프 킴, 일본군 사령부, 강제징용자 동상이 있는 용산역, 커다란 오동잎과 철책에 가려져 있던 일제강점기 일제가 운영하던 전기회사 본사까지...
남영역에서 삼각지까지 우리 답사 일행을 바라보는 키 큰 포플러 가로수들도 일제 시대에 심어졌고, 이 일대에 롯데제과(남영동 대공분실 옆이 롯데 본사터였다고 한다), 해태제과, 동양제과 등 과자 회사와 공장이 많았던 것도 일본군 간식과 관계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전쟁기념관 건립은 군부독재정권이 자국민에 대한 온갖 폭력의 증거 인멸을 도모하기 위해 육군본부를 옮기고 성급하게 계획하였다는 것도.
답사 출발 전 한종수 작가의 저서 <민주주의를 걷다>를 읽었는데, 아쉽게도 '용산편'이 없었다. 용산편도 상세히 실어주시거나, 아카데미느티나무에서 별도의 안내책자를 만들어주신다면 많은 시민들에게 공부가 될 것 같다. 혼자 돌아보고 듣기에는 아까운 시간이었어서, 집에 돌아와 가족들에게 들려주었더니 아주 흥미진진한 얼굴로 들어줬다. 현 정권이 용산에 어떤 흑역사를 더 보탤지 착잡한 마음이지만...내가 사는 서울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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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클럽 작당] 마침내, 헤어질 결심 |
하나의 주제, 다양한 장르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 |
맨손호랑이 |
2022.8.30 |
작당과의 첫 만남을 돌아보니, 2018년이 그 시작이더라고요. 5년 동안, 일곱 시즌을 함께했다는 것이 나름 새삼스럽기도, 그 시간 동안 함께 나눈 이야기를 생각하니 뿌듯하기도 합니다.
작당은 일 년에 두 시즌, 한 달에 한 번 만나서 시즌 주제에 따라 선정된 책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모임입니다. 작당의 가장 좋은 점은 다양한 장르의 책을 한 가지 주제 안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에요. 세상에 읽을 책은 너무 많지만, 책의 맥락을 잡아 확장하는 것은 쉽지 않을 수 있는데 그것을 할 수 있는 모임이라는 것이 매력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소개 시간이 따로 없다는 것도 모임의 포인트 중의 하나예요. 기억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신상에 대한 이야기를 할 시간을 과감히 없애고, 책 이야기로 서로를 알게 되는 것도 참 재미있답니다. 서로의 생각을 알게 된다는 것이요.
발언 기회나 수위 조절, 아이스 브레이킹이나 참여자의 발언을 듣고, 다음 단계나 다른 생각으로 넘어갈 수 있게 진행을 해주시는 박현희 선생님의 자리도 엄청 소중하고요.
전 문학, 특히 소설을 편식하는 스타일인데, 참여하는 분들 중에서는 소설을 읽어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시거나 사회과학, 자기계발서 분야의 책을 주로 읽는다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전 또 그런 분야의 책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서 조금 놀라기도 했어요. 이렇게 작당은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는 모임이기 때문에 시즌을 함께하면 독서 편식을 고칠 수 있는 단계까지는 아니어도 나의 독서 습관에 조금의 변화는 줄 수 있는 기회가 될 거예요.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모임, 그 속에서 안전하게 지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모임이란 매력 때문에, 제가 5년이란 시간을 길다거나 지루하다는 생각을 할 겨를 없이 흘러온 것 같아요. 매번 다음 시즌의 주제는 무엇일까 궁금하고, 기다려지는 모임입니다. 이번엔 같이 작당해볼까요?
[독서클럽 작당] 마침내, 헤어질 결심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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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교실 - 맞춤지도 |
불협화음이어도 즐거움! |
Beck |
2022.8.16 |
매 분기 기타 강좌가 시작되는 첫 날, 기존 회원과 신입 회원 모두 각자 자기 소개를 합니다. 기타를 처음 배우는 신입 회원들은자기 소개 후에 기타 강좌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말하곤 합니다. 오래전부터 기타가 버킷리스트였다거나, 기타로 꼭 처보고 싶은 곡이 있다는 참여 동기는 단골로 등장합니다.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기타 강좌가 궁금해서 왔다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가 준 기타를 그냥 썩히기 뭐해 왔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들 시작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기타로 노래 몇 곡쯤을 멋지게 칠수 있다는 기대에 차 있습니다.
느티나무 기타강좌를 몇해 째 참여하고 있는 저는 매번 자기 소개 후에 무슨 말을 붙일까 생각합니다. ‘몇달 배워도 기타로 한 두곡 잘 치기 쉽지 않아요’라고 기타 입문자의 달콤한 기대에 고약한 찬물을 끼얹을까 생각하다가 나와 달리 입문하자 마자 기타와 사랑에 빠져 매일 연습에 매진, 몇 달 만에 멋드러진 연주를 할 수도 있지 싶어 꿀꺽 삼킵니다. 기타를 처음 배울 때 손끝과 어깨에 느껴지는 고통에 놀랄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말해줄까 하다가 나보다 손끝이 단단하고 기타치는 자세도 좋아 별 고통 없이 기타에 익숙해 질 수도 있지 싶어 그만둡니다.
고백하자면, ‘나이 더 먹기 전에 악기 하나는 배워야지’하며 호기롭게 시작한 기타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습니다. 제 손가락과 뇌 구조가 기타 치기에 부적절하다고나 할까요. 칠 때마다 어깨와 손에 느껴지는 고통도 힘들었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왼손과 오른손을 서로 다르게 움직이며 철로 만든 6개의 줄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F 코드는 언젠가 제대로 눌러지기는 하는 걸까요. 기타를 치며 노래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머리 속이 엉키는 거 같았습니다. 일 이년이 지난 후부터 조금 편해지긴 했지만 배운지 5년 여가 지난 지금도 기타는 여전히 어렵고 자주 불협화음이 납니다.
그렇지만 제가 기타 강좌에 온 신입회원에게 기타가 어려운 악기라고 겁을 주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타는 아름다운 악기이고 느티나무 기타강좌는 즐겁다는 말을 하려고 합니다. 몇 년동안 매주 모여서 기타를 연습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타와 음악을 좋아해야 하기도 하지만 함께하는 사람들 간의 조율도 필요합니다. 신입회원들이 기타입문 초기에 느끼는 어려움을 넘기면 기타의 아름다움은 물론 좋은 사람들과 함께 연주하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혼자만의 독주를 연습하든 합주를 연습하든 기타를 함께 연주하며 노래하는 일은 따듯하고 즐거운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기타 강좌의 강사님을 언급하지 않을수 없네요. 낯간지러울 수 있어 강사님의 훌룡한 기타 연주에 대한 언급은 삼가겠으나 기타 강좌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의 팔할은 강사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의실에서 뿐 아니라 술집이나 밥집에서도 기꺼이 자작곡을 연주하며 노래 해주시는 강사님의 자유로운 열정도 감사합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와서 보시는 걸로!
* <기타교실> 강좌 이번엔 꼭 해보겠단 결심!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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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클럽 트레일_환경 해방일지 |
Trail_우리의 흔적 |
기회 |
2022.7.14 |
독서클럽 트레일 참여자들의 글을 노션으로 정리했습니다.
노션 페이지
(제목을 누르면 전문이 열립니다.)
나는 내가 좋다
나만을 위해 사는 건 너무 외롭다. 지구와 지구에서 살아가는 다른 생명체와 함께 공존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24시간 중에 20시간은 날 생각하고, 4시간만 다른 것들에게 양보해도 좋지 않을까. 지구를 위해 시작한 일인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고 행복할까?
박혜란_나는 내가 좋다 中
우울이 두터웠던 어느 날의 일기
이 얼마나 고되고 짜증나는 일인가. 그냥 누워 있고 싶다. 내가 움직이며 남기는 흔적, 사용하며 남기는 찌꺼기 뭐 하나 지구에 도움 되는 게 없다, 그렇다고 의욕 찬 계획도 목표도 없다. 인류에겐 미안하지만, 내일 눈 뜨면 어제와 같은 장면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또다시 눈을 감는다.
나에겐 이게 희망이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엿 같은 일상.
김예지_우울이 두터웠던 어느 날의 일기 中
홍정민_소감문
초반엔 나도 그 감정을 동력삼아 더 열심히 행동하고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그렇게 불사 지르고 난 후 결국 남는 것은 끝 없는 비관과 우울이었다. 까맣게 타고 남은 재처럼 부정적인 감정의 재가 마음 한 켠에 켜켜이 쌓이게 된 것이다. 그 후 생각을 고쳐먹기로 결심했다. ‘혼자서 모든 것을 떠안으려 하지 말자. 어떻게든 네트워크를 만들어 동료들과 함께 함으로써 힘들어도 그들과 함께 버텨내자...
홍정민_소감문 中
김지우_소감문
나는 전 세계의 기후위기를 통해 지구를 지키기 위한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계속 책을 읽어보면서 고민을 해볼 것이다. 그러나 친환경적인 제품이나 에너지를 사용하는 방법 말고는 다른 방법들을 찾아보지 못해서 안타까운 심정이 들었다. ... 그렇게 해서 그 방법들을 찾아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전 세계의 기후위기가 더 이상은 발생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날이 올 수 있다는 희망을 한번 가져보기로 한다.
김지우_소감문 中
너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나의 길이라는 것을 이제 알겠다. 수많은 너라는 이름의 당위가 나를 이 길 위에 있게 했다.
하지만 가보지 않은 이 길 위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자주 불안하다. 그럼에도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니가 있기에, 함께 이 길을 걷겠다는 니가 있기에, 너 때문에 나는 이 길을 갈 수 있다.
김기회_너 때문에 中
* 독서클럽 트레일_가보지 않은 길로의 여행 >>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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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시민과 활동가를 위한 애드보커시 학교 |
급진주의자를 위한 전술론은 매력적이다 |
푸른누리 |
2022.7.4 |
참여연대 오랜 회원이지만 아카데미에 참여해보는 건 처음이다.
특별히 애드보커시학교는 늘 눈길이 머무는 교육이었다. 언젠가는 들어보리라 했는데 벼르고 벼르니 듣게 되나보다.
주민들과 마을을 변화시키기 위한 활동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만들어볼까가 늘 고민하던 과제이다. 캠페인을 하고 누군가의 권리를 옹호하는 활동을 하고 지역사회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싶은 활동가로서 잘하고 싶었다.
결론적으로 태호쌤은 전략가가 되어야한다고 하신다.
우리는 배 12척밖에 없고 수많은 적들과 싸워야 하는 이순신과 같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이 캠페인을 하고자 하는가?’ ‘캠페인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기획과정에서 이것만은 놓치지 말자는 거다. 그 과정에서 들은 알렌스키의 급진주의자를 위한 전술론이 강하게 남아있다.
토요일 하루는 특별하게 현장의 활동가를 초대하여 얘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전장연의 장애인 이동권과 관련한 투쟁의 역사와 활동가의 삶에 대해 들었고 요즘 이슈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들을 들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재단의 시설보호종료 아동의 자립지원사업이라는 꽤 성공적인 캠페인을 통해서는 캠페이너의 자세와 캠페인의 목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과 '열여덟 어른'이라는 제목의 효과에 대해서도 공감하는 시간이었다.
사례를 통해 학습한 내용들을 검증해나가는 과정이 또한 좋았다.
네슈빌 민권 운동 영상. 밀양 할머니들의 투쟁을 다룬 영상, 디지털성폭력 피해자의 추모 집회, 김진숙 지도위원의 연설 영상 등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활동가란 무엇인가’를 정의내리는 워크숍은 과정과 방식의 새로운 경험이었다. 우리는 많은 단어를 떠올렸고 집단의 지혜를 통해 아주 평범하고 누구나 고개 끄덕거릴 만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참여하는 수업은 참여자에게는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만 효과는 역시나 좋은 방식이다.
말하기 보다는 듣는 것을 더 좋아하지만 나의 의견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애쓴 나를 칭찬한다. 함께 얘긴 나눈 이야기들을 통해 깨달은 바가 많았으니 함께 수강했던 친구들도 칭찬한다.
캠페인 호소문을 제출하고 강사님의 피드백을 듣는 것 또한 떨리긴 했지만 핵심을 꿰뚫어보시는 통찰력에 감탄을 자아내는 순간이었다.
이 교육의 가장 특별한 점은 멘토링과 AS가 있다는 점이다.
9시 30분 강의를 마치고 늦은 시간에 만났지만 2시간이 훌쩍 지나는 줄도 모를 정도로 즐겁고 의미있는 만남을 만들었다. 30여년을 한 단체에서 활동한 활동가는 어떤 생각으로 지속해온걸까? 참여연대의 역사도 들을 수가 있었고, 활동가로서 나의 고민들에 대해 적절하게 조언을 해주셨다. ‘언제든’ 다시 멘토링을 자처하겠다고 하시니 이 과정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차별금지법 단식투쟁 마무리집회를 참석하기 위해 결석을 감행할 수 밖에 없었던 한번의 수업을 빼고는 꽤 성실한 수강생이었다. 아마도 학습에 참여하는 이들을 환대하고 섬세하고 지원하는 이들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 같다. 강의도 좋았지만 이런 사소하게 보이는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또 오고 싶게 만들고 지속하게 만드는 힘이라는 걸 깨닫는다. 디테일이 참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뒤뜰에 야생화와 문 손잡이에 커다랗게 달려있는 세월호 리본,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는 무지개색 현수막 등 공간이 풍기는 이미지가 참 좋다.
* 강좌 자세히 보기>> 행동하는 시민과 활동가를 위한 애드보커시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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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시민과 활동가를 위한 애드보커시 학교 |
활동가란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
재재 |
2022.6.29 |
7주간 애드보커시 학교를 수강하며 활동가로서 필요한 지식과 사례에 대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캠페인 호소문을 처음 작성해보고 피드백을 받았던 것이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여러 수강자들과 함께 활동가란 어떤 사람인지 찾아가는 시간도 흥미로웠고, 여러 활동가분의 다양한 의견도 들어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활동가는 무엇일까? 저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걸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감한 사람이 활동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랜 경력을 가진 분이 본인을 돌이켜봤을 때 나는 그렇게 용감한 사람이 아니고, 겁도 있지만 옳은 일을 위해 노력한다고 했을 때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활동가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중에 참여자들이 비슷한 표현끼리 분류하고, 마지막엔 투표를 해서 최종 4가지 표현이 선정됐습니다.
활동가란 [조직하는, 소통하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저에게 가장 와닿은 표현은 '활동가란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 이었습니다. 활동가 또한 나의 한계를 극복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2022년 <애드보커시 학교> '나는 활동가다' 워크숍 참여자들이 합의한 활동가의 상
<애드보커시 학교> 강사님과 1:1 멘토링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강사님께서 초보 활동가로서의 고민에도 귀기울여 주시고, 좋은 제안을 해주시기도 하고, 경험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공감하고 자신감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안 되어 집중워크숍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다른 단체 활동가의 캠페인을 기획하고 실제 현장에서 진행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아주 좋았을 것 같습니다.
한가지 제안할 점은, 시민사회 운동 경험이 없거나 활동 초기 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애드보커시 운동 철학과 이론, 기법과 사례들이 다소 생소할 수 있으니, 용어 설명도 덧붙인다면 더욱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
강사님과 진행에 도움주신 선생님께서도 강좌가 마감된 후에도 신경 써주셔서 감사했고, 앞으로도 계속 소통하고 싶습니다.
* <행동하는 시민과 활동가를 위한 애드보커시 학교>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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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클럽 숲] 나와 동물과 지구를 잇다 |
계속해보겠습니다 |
채원 |
2022.6.28 |
한 달에 한 번, 인간들이 동그랗게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눕니다. 주제는 동물입니다. 각자 동물을 위해 하고 있는 활동을 소개하기도 하고, 동물을 존중하는 더 급진적인(우스꽝스러운) 방식을 치열하게 고민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동물을 해치고 제멋대로 이용하는 수만가지 방법에 성실할 정도로 매번 놀라고 실망하는 시간도 빠질 수 없습니다.
외국인 보호소가 국가보안시설로서 내국인의 출입을 통제하듯이, 축산동물의 삶 전체와도 같은 축사와 계류장 역시 관계자 외 출입금지 시설로 운영됩니다. 우리가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는 분리와 은폐의 매커니즘 속에서, 동물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들의 삶을 어렴풋이나마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책과 영상을 찾아 더듬더듬 우리 사이의 빈 공간을 메워가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그나마 배움에 위안이 되는 것은 어디서나 가장 낮은 위치의 동물이 사는 삶이란 비슷비슷한 방식으로 비참해서 저자의 국적이나 책이 쓰인 시기를 크게 고려하지 않고 교재로 삼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번 동물권 독서 모임은 작년 가을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계절이 여러 차례 바뀌었고, 코로나19가 조금 잠잠해지고, 대통령도 바뀌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껴안고 사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었어요. 그것들을 같이 고민해달라고 독서모임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같이 이야기를 하다보면 답이 없다는 것만 답이 되는데, 그 과정이 쓸쓸하기만 하기보단, 조금 기쁘고 희망찹니다. 답없는 문제를 계속 주워 안는 사람들을 집에 가는 내내 떠올리면, 다음달에도, 내년에도, 앞으로 내내 계속 이 모임에 나가고 싶다는, 현실과는 조금 동떨어진 기분만 남게 돼요.
아직도 비건으로 사는 게 쉽지만은 않은 사회 생활 속에서, 동물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생명에게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얄팍한 의지와 다짐의 한계를 매번 날카롭게 인식하는 과정 같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힘이 약한, 덧없고 하찮은 것이야말로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이라는 황정은 작가의 말을 기억하고 있어요.
프루스트가 사랑에 대해 한 말을 빌리자면, 한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동물에게 우리 영혼의 한 상태를 투사하는 행위입니다. 개에게 살아갈 용기를, 돼지에게 결코 꺾이지 않는 의지를 볼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용기와 생명력을 가진 존재이기에 가능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동물의 값어치가 아니고 우리 영혼 상태의 깊이겠지요. 3주간, 느슨한 연대로 넓이와 깊이를 더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만날 날을 기다리며, 계속해보겠습니다.
* [독서클럽 숲] 나와 동물과 지구를 잇다 >>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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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그림 속 숨은 인권이야기 : 새로운 시대, 새로운 불편 |
낯설고 불편해도 깨어있어야 할 인권감수성 |
오상아 |
2022.6.25 |
아무리 좋은 말을 들어도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비주얼에 압도되는 아이들과 그들을 이끌어가는 자본주의의 엄청난 물량공세를 일상으로 마주치는 세상이므로. 시각이 생각을, 생각이 다시 시각적 표현으로 드러나는 것에 어느 순간부터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나는 자유를 누린다고 주장하지만 결코 자유롭지 못한 프리랜서 강사로 살고 있다. 그래도 일말의 작은 선택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일주일에 5일을 아이들과 만난다. 주로 그림책이 나의 소중한 밑천이고, 토론과 글쓰기를 접목한 창의적(?)인 수업을 수년째 고민 중이다. 특히 작년부터 매료된 ‘시각적 문해력’으로 인해 참여연대 아카데미의 <그림 속 숨은 인권이야기>를 만났다. 그림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이끌림도 컸다.
ⓒ 김태권 <그림 속 숨은 인권이야기> 수업자료
‘인권’이라는 말이 붙으면 일단 몸에 힘부터 들어가는 세대여서 그런지 단단한 기대가 있었다. 그림을 좋아만 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처음 보는 그림들이 많았다. 그러나 모든 사물과 이론에 대한 접근태도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해석에 달려 있지 않은가? 김태권 선생님이 펼치는 그림 세상에서 함께 호흡하며 4강을 모두 들었어도 수업시간에 딴 생각을 하는 아이처럼 여러 차례 다른 세상을 기웃거렸다. 그렇게 다른 곳에서 낯선 사유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나뿐만 아니라 강의를 듣는 사람들 대부분 꽤 조용하고 차분해 보였지만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는 아주 줏대 있고 명료했다. 많은 것을 떠먹여 주려는 엄마의 마음으로 소통의 시간을 넉넉히 갖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강사님도 그 부분을 매우 아쉬워하며 4강 때는 질의와 소통의 시간을 일부러 할애하기도 했다. 새로운 발상과 접근에 의한 의견제시에 적지 않은 자극을 받았다며 감사를 표한 강사님의 응대가 인상적이어서 ‘아, 이 분은 생각이나 의견을 나누는 데에 꽤 열려 있구나’라는 호의적인 느낌을 받았다.
주제에 맞는 그림들을 선별하고, 적절한 설명과 주장을 넣어 풍성한 강의로 완성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이 있었을까 하는 감사와 함께, 덕분에 곳곳에 숨어 있던 명작들을 편하게 마주하는 기쁨도 누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프레임’에 의해 의도적으로 편집되는 사진처럼 그림도 작가의 시선에서 세계가 정해진다. 그 한정된 세계를 다양한 각도에서 이리저리 뜯어보고, 다른 시선과 배경도 상상해가며 즐길 수 있는 힘을 갖는다는 즐거운 기대치를 맘껏 부풀리면서 완강했다.
일상에서 흔하게 노출하는 편견, 무뎌진 차별, 죽은 나무껍질처럼 굳은 고정관념들을 예리하게 조각내며 그림 속에서 하나하나 건드려준 ‘숨어 있는 인권’의 발견이 가장 의미가 컸다. 초등학생부터 중고등학생 그리고 성인에 이르기까지 ‘민주시민교육’이라는 주제로 인권감수성을 다루는 강사이므로 더욱 와 닿은 부분이다. ‘결정 장애’와 같이 흔하게 남발하는 말에서부터 ‘난민 수용’과 같은 복잡하고 뜨거운 논쟁에 이르기까지 불편하고 심각한 주제들이 강의에서 거의 다 언급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악한 ‘악의 평범성’도 결국 끈질기고 예민하게 사유하지 않은 태만에서 온 것이 아닌가?
<우리가 함께 사는 문제> 노먼록웰 (1964) ⓒ김태권, <그림 속 숨은 인권이야기> 강의자료
고백하자면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에게 강의에서 언급된 ‘우리가 함께 사는 문제’(노먼 록웰, 1964)와 포드 매독스 브라운의 그림을 보여주고 그림 읽기를 해보았다. 아이들은 흑인 여자아이를 에워싸고 걷는 4명의 백인 남자들이 매우 친밀하고 우호적인 관계이며, 심지어 백인이 아니라 유색인종인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이가 학교에 처음 가는 낯선 길을 힘이 센 어른들이 보호해주는 그림이라고 해석해서 동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반면 부부가 배를 타고 떠나는 그림은 두 사람이 싸웠다, 전쟁이 나서 도망가는 중이다, 배타고 놀러가는 중이다 등등 세세한 부분을 신경 쓰지 않고 분위기만 파악하는데 그쳤다. 나중에 그림의 배경설명을 들은 후에야 다시 한 번 자세히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인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기, 프레임과 규정된 틀을 넘어 다층적으로 바라보기를 통해 어떤 결핍과 과잉이 숨어 있는지를 읽어내고 내 시선과 사유의 왜곡으로 인해 혐오와 부당한 차별이 내재화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나와 내가 만나는 아이들이 오염된 시선이나 해석에 노출되어 배려와 존중이 없는 세상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는 생각은 버릴 수 없다. 함께 고민하고 방향성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숨어있는 인권’처럼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이렇게 간간이 만나 생사확인이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이다. 오래 가물었지만 단비가 올 것이라는 기분 좋은 일기예보처럼 조만간 귀한 강의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그림 속 숨은 인권이야기 : 새로운 시대 새로운 불편> 강좌보기 >> |
서울드로잉 |
서울드로잉, 나를 찾아 떠난 힐링 여행같은 시간! |
착한소비 |
2022.6.20 |
딱히, 무엇때문이라고 하기 보다 누적된 피로감이 있었던것 같다. 수 년간을 다수의 논문을 뒤져가며 내 글쓰기로 완성해야 했고, 터널과도 같았던 그 지겹고도 긴 시간이 끝나 해방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상담자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 녹록치 않았다. 연구와 교육, 임상 현장, 특히 임상현장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의 제각각의 감정, 상처들, 거기다 상담자로서는 충격적인 상실 경험까지. 내 자신이 함몰되어 나락에서 표류하는 것 같은 느낌.... 셀프케어가 필요했고, 뭔가, 표출방법이 필요했다. 그렇게 찾은 것이 서울드로잉이다.
7주간, 매 주 토요일 반나절 이상을 매여있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집안 대소사가 생길지도 모르고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을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이며, 그렇다고 아직 있지도 않을 일을 예상하고 걱정하며 하지 않기에는 서울드로잉, 서촌이며 서울의 근대모습등 유산을 돌며 스케치를 한다는 것은 설레는 도전이었다. 우려와는 다르게 한 번도 결석한 적 없이 마무리 되었다. 아쉬움이라면 매 주 그 장소에서의 느낌, 보기 좋은 한 장면을 성실하게 스케치하고 끝까지 완성하지 못했다는 점.
7주간의 그림 스케치는 내가 다 알고 있는 장소이지만, 겉만 보고 핵심적일 수 있는 우리나라 유산에 머물렀다는 점. 다양한 관점에서 스케치한 그림은 내게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를 다시 정의하게 만들었다. 내게 미술의 배경이고 아름다움이란, 매우 잘 정돈된 아름다운 경치이거나 보는 이로 하여금 한적함과 여유, 풍류를 떠올리는 것들이었다. 각 자가 부여한 어떤 의미의 아름다운 한 장면은 차이와 다양성, 삶의 진면목이었다. 나는 7주간의 아름다운 서울드로잉의 스케치 여행 속에서 자연인으로서의 '나'와 만나고 타인과 조우하면서 '우리'가 되는 경험을 하였다.
미술이라는 매개로 공동체의 동료애를 느낄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참여해서 얻어진 것은 아니었을 거다. 조용히 묵묵히 서포트 해주신 스탭선생님의 친절과 실제 감각으로 느껴진 바에 충실하며 자기 감정을 싣는것을 강조한 선생님의 말씀, 미완성의 작품도 아름다운거 하나라도 콕 찝어 보신 안목과, "예쁘지 않아요~"하시며,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으로, 덜 예쁘더라도 기죽지 않는 당당함마저 갖게 한 큰 힘들이 작동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정동길을 마무리하며 참여자들과 함께한 추어탕을 시작으로 한 점심시간들. 점심을 함께하며 나눈 소소한 담소, 미술관을 돌며 함께했던 좋았던 시간들도 크게 한 몫 했을 것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또 다시 미술여행을 함께 할 것을 설레며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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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드로잉 |
즐겁게 그림 그리기 |
밀취 |
2022.6.16 |
<(위)드로잉 장소, (아래) 내 작품>
중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있다.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 하는 게 시작이었다. 실내에서 갑갑하게 그림을 그리기보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바람과 햇살을 느끼며 그림을 그렸으면 했다. 내 수업이 그랬으면 했고, 내 학생들이 그랬으면 좋겠단 생각이었다. '자유로운 그림 그리기'는 혼자서 그리는 거라고 생각하고 줄곧 혼자서 그림을 그려왔다. 난 그림을 좋아하고, 그리고 싶은 대상이 항상 있었다. 동기부여가 따로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다르다. 그림을 어려워하거나 싫어하고, 그리고 싶은 욕구 자체가 없는 학생들이 많다. 배운 건 입시 미술 뿐이라 어떤 것들을 알려줘야 그들의 개성은 살리면서도 성장할 수 있는지 몰랐다. 미술은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이다. 생각을 전달하는 언어처럼. 귀가 아닌 눈으로 전달하는 것. 거기에 제약과 규칙이 생기면 다 똑같은 그림이 되고, 재미가 없어진다. 난 학생들이 똑같은 그림을 그리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내 말 한마디, 한마디가 두려웠다.
<야외 드로잉 중인 학생들>
그런 내게 야외 드로잉 강좌는 너무 딱이었다. 강좌 선생님도 각자 개개인의 스타일에 맞춰 조언을 해주었고, 격려도 항상 잊지 않았다. 자유롭게 그리되 그 안에서도 지켜야 할 조그만 부분들이 있었고, 그 작은 부분들이 큰 차이를 만들어냈다. '내가 뭘 해줘야 해, 가르쳐야 해' 이런 강박에서 벗어나 학생들 개개인의 선과 시야, 색감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개인의 개성을 발견했다.
학생들은 집중력이 30분을 넘지 못해 징징대면서도 내 말들은 귀담아 들어줬다.
"00이는 얇은 선이 매력적이다. 옆에 여백과 어울려서 여백을 의도한 느낌을 주네?",
"00이는 동화 일러스트처럼 따뜻하고 귀여운 선을 가졌네? 어떤 색감을 가졌을지 궁금해진다" 등의 구체적인 칭찬과 격려.
"여기 열린 선들이 너무 많아서 형태를 알아보기 힘드네. 열린 선들을 닫아주면 깔끔해보일 것 같아",
"나무를 그릴 땐, 나무 실루엣만 따기 보다는 나뭇잎 하나를 관찰해서 그려보고 그걸 여러개 그리면 훨씬 더 살아있는 나무를 그릴 수 있어"
등의 구체적인 조언과 방법, 이 부분들을 알려줘야 한다는 걸 야외 드로잉 강좌에서 배웠다. 그럼 학생들은 얼른 그 부분을 더 채운 다음 물놀이를 하러 갔다.
<학생들 야외 드로잉 작품>
이 강좌를 들으면서 간 모든 곳들이 데이트 코스였다. 산책하기에도 좋고, 사진찍기에도 좋고,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도 왕창 드는 그런 곳들! 매번 좋아하는 사람과 데이트를 가는 느낌으로 '오늘은 어딜 갈까?'하며 기다려졌다. 가을학기 전까지 친구들과 강좌에서 갔던 장소들을 다시 가서 그림을 그리려고 한다. 가을학기가 열리면 그땐 꼭 친구들을 데리고 가고 싶다. 학생들과도 학교 주변이나 근처가 아닌, 좀 먼 곳으로 가서 학생들이 새로운 곳들을 보고, 느끼고, 그릴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고 싶다. 인사성도 밝고, 에너지가 넘쳐서 어딜 가든 함께하면 든든할 것 같다.
이 강좌를 듣고 생긴 변화도 있다. 길거리를 걸을 때 마음에 드는 곳을 만나면 자동으로 “여기 나중에 그리러 와야지”라고 생각한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면 주변에 그릴만한 것을 찾아 그리기도 한다. 이 변화들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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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시민칼럼니스트 되기 : 사적인 이야기의 반란 |
당신들이 내 손을 잡아주셨다 |
나비@@ |
2022.6.16 |
[2022 온라인 ]시민칼럼니스트 되기 : 사적인 이야기의 반란
당신들이 내 손을 잡아주셨다
10년 동안 목에 걸려 있던 이야기가 있었다. 아니, 목까지도 끌어올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가슴 깊숙이 담아놓고 절대 뚜껑이 열리지 않도록 꾹꾹 밟아왔다.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그렇게 살아온 날들의 일부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그 일들은 따돌림, 협박, 강요, 배제, 비난 등의 단편적인 단어로만 내 안에서 떠돌았다.
친구가 갑작스럽게 사고로 세상을 떠났던 일이 내 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가지고 왔듯, 또 한 번 커다란 파도가 밀려왔다. 지난해 말 코로나로 이십오 일 넘게 온 가족이 격리가 되고, 올해 초 시아버지의 부고를 겪었다. 감당하기 어려웠던 충격이 몸과 마음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비밀을 봉인한 뚜껑이 마구 흔들렸다. 과거의 일에 묶여 있던 미움, 고통, 원망이 새어 나와, 현재의 나와 가족들에게 투사의 살을 뻗쳤다. 아이들과 남편이 사소한 실수만 해도 증오와 분노가 솟아올랐다. 과거를 꺼내어 돌아보지 않는다면 도저히 끓어오르는 화를 다스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나에게 찾아온 기회가 홍승은 작가님의 글쓰기 수업이었다. 작년에 카톡으로 하루 10문장 쓰기 수업에 참여했던 적이 있었다. 10문장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작가님과 참여하신 분들의 피드백을 받으며 기운을 많이 얻었다. 이번에는 매주 주제에 맞는 책을 읽으며, 책에서 만난 문장에서 시작해서 1~2장 분량의 에세이를 써보는 수업이었다.
홍승은 작가님을 믿고 어디에서도 못했던 이야기를 전부 꺼내보기로 다짐했다. 그래서 총 다섯 번의 주제 중 네 번은 이미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조금도 즐겁지 않은 내용이었기 때문에 글을 쓰면서도, 다 쓰고 나서도 매번 눈물이 났다. 매주 책을 읽으며 글도 쓰는 과정이 살짝 버겁다고 느낀 적도 있다.
그래도 수업에서 얻은 에너지로 그다음 과제를 쓸 힘을 받았다. 대부분 홍승은 작가님의 책을 읽고 참여한 분들이었고, 수업 분위기도 너무너무 좋았다. 줌 모임과 카페 댓글로 주고받았던 격려와 공감, 응원의 피드백들을 잊을 수 없다. 그 따듯한 마음들이 내가 어떤 이야기를 꺼내도 맥락 없이 비난받거나 배제되지 않을 거라는 안전함의 감각을 선사해 주었다.
참여하신 분들의 글을 읽으며 결코 쉽지 않았을 이야기를 꺼내주신 것에 한없이 감사함을 느꼈다. 마지막 시간에 우리가 소감을 나눴듯이, 나도 이 공간에서는 '더는 비밀을 가지지 않아도 되겠다'라고, '다른 삶에 대한 상상력이 넓어지는 것 같다'라고 생각했다. 안전한 집필 공동체에서 어떻게 나와 다른 분들, 세계가 연결될 수 있는지를 배웠다.
홍승은 작가님의 말처럼, 사소해 보이는 나의 경험도 누군가의 기억과 감정을 위로할 수 있다. 자기 의심과 자책이 나를 찍어누르려 할 때마다 이번 수업을 떠올려보려고 한다. 함께해 주신 새벽님, 알마님, 희붐님, 단지네님, 민들레님, 동글님, 현서님, 커리님, 감자님, 아무님, 당근님, 옷장님, 홍하언니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당신들이 내 안의 날선 단어들을 문장으로 바꾸어 밖으로 꺼내도록 손잡아주셨다.
* 나비 님 글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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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챌린지] 홍승은 작가와 함께하는 하루 10문장 21일 글쓰기(접수마감) |
나를 돌보는 시간, 매일 10문장 쓰기 |
나비@@ |
2022.6.16 |
[2021 챌린지] 홍승은 작가와 함께하는 하루 10문장 21일 글쓰기
>> 2021년 1~2월에 참여했던 수업인데, 직접 후기를 올릴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요^^;
작년에 써둔 후기 올려봅니다.
나를 돌보는 시간, 매일 10문장 쓰기
매일 밤 11시에 홍승은 작가님이 글감을 올려주었다. 글감에 대한 안내도 있었는데, 홍은전, 버지니아 울프, 캐럴라인 냅, 이브 앤슬러의 산문과 김소연, 최진영, 허연의 시가 다정하고 때로는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왜 쓸까'라는 첫 번째 글감에서부터 '우리 사라지지 말자'라는 마지막 글감까지 어떤 날에는 따스함이, 다른 날에는 용기가 배어있었다.
홍승은 작가님도 그날의 글감에 맞추어 10문장을 올렸는데, 그의 꾸준함을 보면서 나도 매일 힘을 냈다. 처음에는 그저 잘 써보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컸다. 그런데 나의 힘들고 괴로웠던 상황과 맞물려서 그랬는지, 글감들이 내 안의 고통을 어서 꺼내보라고 속삭였다. 3주 동안 구체적인 상황을 보여주듯 쓰는 연습을 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나는 고통과 슬픔과 차별에 투쟁하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적고 있었다.
얼마 안 되는 10문장 같았는데 쓰고 나면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어떨 때는 분노가 치밀어올라서 10문장이 훨씬 넘기도 했지만, 번호만 적당히 붙인다면 그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적어도 10문장을 써보자는 모임이니까.
주중 5개의 글을 다 쓰고 나면, 주말에는 글을 모아서 조별로 피드백을 했다. 홍승은 작가님이 올려준 피드백 예시를 떠올리며 다른 분들의 글을 읽었다. 마음에 닿는 글의 제목이나 문장을 적고, 왜 그 부분이 좋았는지와 글을 읽은 후 답장하고 싶은 이야기를 남기면 된다고 했다. 조원들과 함께 서로의 글에 대한 따스한 공감과 감사를 나누었다.
21일의 글쓰기 과정이 모두 끝난 이후에, 홍승은 작가님이 개별 피드백을 주었다. 나에게 적어 준 피드백 전문.
“내가 나여도 괜찮다”는 글 선생님의 말씀과 “나는 어머니임을 잊고 행성이 되었다”는 첫 주의 글부터 강렬하게 읽었어요. 담담해 보이는데 팔딱팔딱 살아있는 글을 읽으면 가슴이 뛰더라고요. 나비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도 주먹을 꽉 쥐게 되는 순간이 많았어요. 나비님 글에 녹아있는 치열한 공부(여러 책과 영화 목록)와 성찰하는 태도가 이런 감정을 부르는 것 같아요. 특히 저는 <행성이 되기까지>가 마음에 오래 남았어요. 그 글을 긴 버전으로 읽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 이후 이야기들은 웹진 시즌 2를 통해서 잘 읽을게요. 앞으로도 행성인 나비님의 집필이 오래오래 이어지길 응원할게요. 감사합니다.
2021년 홍승은 작가님과 함께 하는 하루 10문장 21일 글쓰기 피드백 to 나비
글쓰기 수업에서 과제로 냈던 ☘ 행성이 되기까지_나비
시계가 여덟시 반에 다가가면 나는 분주해진다. 우유를 반 컵씩 두 잔에 나눠 따르고 아이들에게 건넨다. 소독기에서 따뜻해진 칫솔 두 개를 꺼내와 치약을 짜서, 하나는 첫째에게 주고 나머지 하나를 들고 둘째의 이를 닦인다.
"얘들아, 아홉 시다! 이제 자야지?"
첫째는 복슬복슬한 강아지 인형과 자동차 모형 장난감을, 둘째는 자그마한 공룡 피규어 네댓 개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간다. 어두운 방에서 부드러운 자장가를 서너 곡 같이 부르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화 두세 편을 읊어준다. 한 시간 남짓 너무 들뜨지 않는 정도로 놀아주다 보면 어느새 아이들이 잠든다.
안방 구석 화장대 옆에 놓아둔 스탠드를 켜고 반다나 싱의 단편집 《자신이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를 펼쳤다.
책 속의 문장, "이제 알았어, 난 행성이야. 여자, 아내, 어머니 그런 거 말고."
아이들이 잠든 고요한 밤, 나는 어머니임을 잊고 행성이 되었다.
홍승은 작가님은 나뿐만 아니라, 참가한 모든 분들에게 꼼꼼하고 다정한 피드백을 전했다. 글쓴이에 대해 구체적인 칭찬과 상냥한 궁금함을 건네는 그의 피드백들은 글을 놓지 말고 계속 써봐야겠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돌아보면 매일 10문장을 쓰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10문장이었기에 주저 없이 손가락을 키보드에 얹을 수 있었고, 덕분에 10문장이 훌쩍 넘게 내 마음을 돌보아주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하루 10문장 쓰기 수업이 끝난 지 3일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행성이 되기 위해 저녁 9시만 되면 분주하다. 어제는 아이들을 재우고, 록산 게이의 《헝거》를 마저 읽었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되려는 포장 없이, 자기 안의 복잡하고 미묘하게 충돌하는 감정을 솔직하게 적었을 때 얼마나 놀라운 글이 되는지. 록산 게이의 몸과 허기에 대한 사적인 고백은 내 안의 더 깊숙한 이야기를 꺼낼 용기를 준다.
"글을 쓸 때, 자꾸 나를 의심하게 만드는 생각들이 있지요. 이건 너무 사적이야. 사소한 이야기야. 이런 게 글이 될까. 오늘은 익숙한 의심을 의심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쓰겠습니다. 내 일상과 감각과 감정에 권위를 주며 열 문장 채우기."
홍승은 작가님이 둘째 날 글감의 안내로 적어주었던 이 내용을 떠올리며, 오늘은 혼자, 10문장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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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포퓰리즘 시대, 다시 만나는 세계시민주의 |
어서와 '세계시민주의'는 처음이지? |
알리 |
2022.6.7 |
저는 대학, 대학원을 다닐 시절 이주노동자 관련 NGO단체에서 인턴 및 자원활동을 했었어요. 그 때 경험들은 제 마음속에 아직 선명히 남아있어요. 너무 열악한 노동환경, 미등록 체류라는 이유 하나로 쇠창살 뒤에 갇힌 미등록이주노동자의 모습, 국내 노동자와 외국 노동자 간의 갈등까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세계는 점점 작아지는데 사람사이는 왜 더 멀어지는 걸까' 고민을 품고 살고 있어요. 그래서 <포퓰리즘 시대, 다시 만나는 세계시민주의> 강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보자마자, 그동안 고민했던 것들을 이번 강좌를 통해 더 발전시켜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로 강의를 등록했어요! 하지만 솔직히 이야기하면, 철학 이야기라… 너무 어렵지 않을까 망설이기도 했어요. 저 같이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세계시민주의+철학에 대한 강의는 작은 도전이었어요. 결론은… 도전하길 잘했습니다!
#첫 걸음 - 강의를 통해 그 동안 뜻을 분명히 하지 않고 써 왔던 ‘세계평화’며 ‘세계시민’ 등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어요.
첫 강의에서 세계평화에 대한 칸트, 한상원 교수님(강사님), 다른 수강생님들의 의견과 제 생각을 종합해 세계평화를 전쟁과 폭력이 없는 상태를 넘어서서 환대와 연대가 있는 상태로 스스로 정의해보았던 게 기억나요. 바람이 크죠? 그리고 이제는 당연히 여기는 국제기구의 탄생 배경을 칸트의 철학을 통해 이해할 수 있어 유익했어요. 앞으로 국제기구의 기능에 어떤 점들을 기대할 수 있을지, 지금은 어느 정도에 와있는지 판단해 볼 수 있는 생각의 틀이 조금은 생긴 것 같아요.
#생각하는 재미- 철학자들의 시선을 빌려 세계시민사회의 바람직한 모습을 가늠해보고, 그 모습을 현재와 견주어 볼 수 있었어요.
한상원 교수님께서 매 강의때 마다 세계시민사회와 관련된 칸트, 마르크스, 칼 슈미트, 발리바르 철학자들의 서로 다른 생각과 주장을 정리하여 비교해주시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이게 마치 네 명의 철학자가 앉아서 토론을 하고 교수님이 마치 사회자인 것 같은 장면처럼 느껴지네요. 개인적으로 발리바르에 대한 마지막 강의가 기억에 남아요. 세계시민권과 세계시민사회를 발전시킬 방법을 고민하는데 있어…(제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발리바르는 경제적이거나 도덕적 것에 치중된 관점에서 벗어나 국가와 국민의 경계를 인정하는 관국민적(transnational) 관점에서 갈등의 실재를 인정하고 세계정치(Cosmopolitics)를 위한 제도화가 필요하다고 이야기 하잖아요. 발리바르의 철학은 현실적으로 이룰 수 있는 세계시민사회가 어떤 형태를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의 시작점을 제공해주는 것 같아요.
그 동안 어렴풋이 이러면 좋겠다 하는 생각들이 철학자들의 제안을 양분삼아 자라난 것 같아요.
- 우리가 국경을 민주화할 수 있을까? 국가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관계없이 시민들이 동등하고 상호적인 정치적 권리를 가질 수 있을까?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한국사회에서는 이주민과 외국인들에게 어떤 정치적 권리를 가지는 것이 마땅할까? 세계시민으로서 세계정치에 대해 어떤 권리와 의무를 가져야 할까?
#알고 느끼고 있는 것과의 연결 : 세계화=갈등?
세계시민주의 강의를 들으며, 최소집단효과(Minimal group effect)이라는 용어가 머릿속에서 맴돌았어요. 최소집단효과는 임의적인 기준으로 사람들을 나누어도 사람들은 집단을 이루어 집단 갈등을 겪는 사회 현상을 일컫는 사회심리학 용어에요. 이해를 돕기 위해 실험 예시를 소개하면, 한 학급의 아이들에게 수업 중 A와 B의 두 가지 예술품을 보여주고 어느 예술품을 좋아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학생들이 수업 후에도 선호하는 예술품을 기준으로 집단을 나누고 각 집단을 규정하고 서로에 대한 편견을 키우고 서로를 적대시하게 되는 거에요. 즉, 아주 최소한의 조건만 주어져도 사람들은 편을 갈라 싸운다는 걸 보여주어요. 저는 이 현상이 경계는 허물어 지지만 각자의 편은 뚜렷해지는 현재 상황을 함축하여 보여주는 것 같아요. 세계화를 통해 서로가 더 노출되다 보니, 자연스레 비슷한 문화들은 융합되지만 다름을 차이로 서로를 적으로 규정짓는 일들이 더 빈번하고 강도가 심해지는 것 같아요. 물론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최소집단 조건으로 보는 건 무리가 있지만, 사람들이 실재하는 차이보다 그 차이를 더 크게 지각한다는데는 공통점이 있는 거 같아요.
그리고 사람은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집단을 자기 정체성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잖아요. 그래서 세계화가 개인에게는 정체성의 위기를 초래하거나 어떤 집단에 속할 것인지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 같아요. 요즘의 정치는 그걸 부추겨 이용하는 것 같고요. 외부 세계의 가치가 자기가 속한 집단의 가치와 차이가 크면 개인 내적인 갈등은 물론 집단 간 갈등도 커지고요. 그래서 국가간 분쟁이든 이주민과 원주민의 갈등이든 집단 간 갈등은 해결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것 같아요.
- 미래에는 사람들이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처럼 세계시민이라는 정체성을 개인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 세계시민은 우리에게 어떤 정체성으로 인식될 수 있을까요?
- 그렇게 된다면 경제적 지위에 따른 국제질서에서 벗어나 국제적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을 만들 수 있을까요?
저의 강의후기에 있는 많은 물음표들을 보면 아시겠지만, 이번 세계시민주의 강의는 생각의 도화선을 연결하고 불을 붙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강의를 통해 이주노동자 친구들과 함께 했던 활동 기억들이 많이 떠올랐어요. <포퓰리즘 시대, 다시 만나는 세계시민주의> 라는 강의 제목의 마법에 걸린 걸까요. 강의 중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사회적’ 생산에 기여하지만 어떠한 ‘정치적’ 시민권도 누리지 못한다.”라는 말에 공감을 했었는데요. 이 말이 저와 동년배인 이주노동자 친구들과 대구 동성로에서 함께 이주노동자 권익보호를 주장하며 즐겁게 퍼레이드를 한 기억과 다시 만나게 해주었어요. 그 때의 저는 시위활동의 필요성과 내용을 이해하면서도 시위활동을 설명하고 설득하기 위한 ‘말’들을 찾고 싶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는 함께 세계시민의 권리를 찾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었구나’ 하고, 강의에서 배운점들을 통해 그때의 경험들을 다시 표현해봅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소중한 강의를 해주신 한상원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참여연대 운영진분들께도 감사드려요! 이런 강의 더더더 기대해도 될까요? ㅎㅎㅎ 감사와 함께 부담을 드리고 싶어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포퓰리즘 시대, 다시 만나는 세계시민주의> 강좌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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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포퓰리즘 시대, 다시 만나는 세계시민주의 |
철학자의 눈으로 사유하는 세계평화로의 길 |
뚜룹뚜뚜 |
2022.6.5 |
지금 우리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세계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과 뉴미디어의 결합은 실시간으로 다른 국가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화는 하나의 막을 수 없는 흐름이고, 삶의 일부분이다. 세계가 하나가 되어 평화롭게 인류애를 나누며 살아가는 것! 나는 그것이 바로 세계화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의 국제 정세와 국제사회의 현실은 전혀 평화롭지 못하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우리나라를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외국인에 대한 공공연한 혐오와 폭력을 목격했다. 또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강대국인 러시아가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쟁을 자행하는 행위를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이는 모두 세계평화를 위한 인류애적 불문율과 기존의 국제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이다.
도대체 왜 세계는 이렇게 변화하고 있는 걸까? 국적은 달라도 평화라는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가던 그 모습은 대체 어디로 간걸까? 이러한 내면의 물음에 지쳐가고 있을 때 쯤 만난 수업이 바로 ‘포퓰리즘 시대, 다시 만나는 세계시민주의’였다. ‘세계시민’이라는 단어를 보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내가 궁금했던 것들을 세계적인 석학들의 사상을 빌려 정리해 볼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의는 총 4강으로 구성되었고, 칸트, 마르크스, 슈미트, 발리바르의 정치철학을 다루었다.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철학에 대한 논의다 보니 너무 어렵지 않을까 정말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강의를 진행하신 한상원 교수님께서 핵심을 잘 짚어주시고, 열정적이고 흥미롭게 설명을 해주셨기 때문에 집중해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수강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강에서는 임마누엘 칸트의 평화에 대한 이상과 그의 사상을 통한 세계 시민주의 개념의 등장을 배울 수 있었다. 칸트는 인간의 도덕적 신념과 이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국가 간에도 국제법을 통한 사회계약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평화는 자연적인 상태가 아니므로, 영구한 평화를 위해서는 실천적인 노력이 필요하며, 이 바탕에는 모든 인민이 복종하는 세계시민법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세계시민법의 조건 중 외국인을 우호적으로 대하는 ‘환대’를 중요한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부르주아 계급이 세계 평화를 만드는데 커다란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부르주아 계급의 국제 무역을 통한 무역의 세계화는 타 국민들에 대한 환대와 우호를 만들어 낼 것이고, 이는 곧 세계 평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칸트의 이러한 세계 평화에 대한 구상은 국민국가가 발생하기 이전 시대의 이념적 구상이었다.
한편, 2강에서는 칼 마르크스의 국제 시민주의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계급이 주도하는 세계 시장의 확대가 이루어 질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세계 시장을 통하여 피억압 대중의 국제적 교류 양식이 창출될 것으로 예측하였다. 칸트의 생각처럼 부르주아 계급이 주도하는 세계 시장 그 자체로 평화가 이룩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지는 않았으나, 시장을 통하여 대중들 사이의 교류와 연대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중세 코뮨(자치도시)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코뮨 내의 농노에 대한 자유와 이방인에 대한 환대의 정신을 중요한 가치로 당시의 공산당 운동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그는 국제 관계에서도 사적인 개인들의 관계를 규제하는 도덕적 법칙들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국민국가가 지금과 같은 강력한 형태로 살아남을 것이라 예측하지 못하였다.
3강에서는 현실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칼 슈미트의 이론을 배울 수 있었다. 슈미트는 평화로운 인류 공동체라는 관념을 거부하고, 적대 없는 정치라는 자유주의의 관념을 비판하였다. 전쟁의 정당성과 부당함을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도덕적 논의가 전쟁의 파괴성을 강화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전쟁에 신학적 혹은 도덕적인 기준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의 논의에 따르면 전쟁에서의 적은 실존적인 적이다. 단지 이질성을 지니는 존재인 타자로서의 적일뿐, 적이 도덕적으로 선한가? 악한가?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각 지역 특유의 공간적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전쟁 길들이기’는 오로지 교전상대를 정당한 상대로 인정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따라서 슈미트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국제기구의 실현과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구상을 거부한다.
마지막으로 에티엔 발리바르는 국민국가와 세계 시민주의적 전망을 모두 동시적인 위기에 속한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민족주의가 재등장하고, EU내에서 다른 유럽인 그리고 비유럽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의 문제는 지구적 수준에서의 ‘지구적 디스토피아(global dystopia)’로 귀결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현존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상적인 세계시민주의의 구상을 거부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계정치를 통하여 투쟁의 형태로 실천하고 노력하는 관국민적(transnational)관점이 중요하다.
그는 국민국가의 실재성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시민권을 주권의 틀 속에서 사유하는 특권적 지위로서의 시민권에 대한 생각을 버려야한다고 강조한다. 즉, 시민권을 확장하고 타자를 만드는 경계를 민주화해야한다. 경계의 민주화는 경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계약을 구성하는 방향으로 변모하는 것을 의미하며, 정치적 권리를 둘러싼 갈등적 정치의 공간으로서 시민권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강의의 내용은 전공자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수업을 듣는 내내 이와 같이 수준 높은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 너무 감사하고 즐거웠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수강 전 궁금했던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답을 배울 수 있었던 강의라 기억에 오래오래 남을 강의가 될 것 같다.
수업 마지막에 많은 분들이 고민하신 바와 같이 세계 시민주의의 구상과 실현은 다양한 이유로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하나의 지구 안에서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인류공동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인지하고 성찰하게 될 때, 평화를 추구하는 세계 시민주의의 구상이 실현될 기회가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늦은 시간까지 열정적으로 강의해주신 한상원 교수님께 이 자리를 빌려 알차고 좋은 수업을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또한 육아하는 엄마가 몸도 마음도 편하게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좋은 강의를 온라인으로 기획해 주시는 아카데미느티나무에도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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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꿈투사 워크숍 - 꿈 거울로 참 나를 만나다 |
문인가 하였더니 다시 길 |
야시햇살 |
2022.5.30 |
새벽에 눈을 떴다. 요즘은 새벽, 이 시간쯤에 자주 잠에서 깬다. 다시 눈을 감았으나 쉬이 잠들지 않는다. 꿈은 종종 그랬던 것처럼 눈을 뜨자마자 뽀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나 잠에서 깰테니, 너 거기 잠깐만 있어’ 라고 부탁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꿈은 하늘과 땅의 거리보다 더 멀리 가버렸다. 무언가 차곡차곡 서랍 속에 쟁여넣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님 켜켜이 서랍 속 무언가를 꺼내는 것 같기도 한데...아무튼 꿈은 미련 가득한 내 곁을 미련없이 홀연히 떠나 버렸다. 이러다가 문득, 꿈은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세수를 하고 로숀을 바르다가, 옷장 문을 열다가 혹은 출근하다 신호대기 중 건너편에 붙은 광고 플래카드의 ‘OO가구점’ 글자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가구?...아하’ 기억이 살아날 때가 있다. 뿌연 안개 속 깜깜한 장막이 걷히고 곧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순간이다. 그럴 땐 마치 잃어버린 내 소중한 보물을 찾은 것처럼 흥분된다.
십여 년 전쯤 부산에서 열린 워크숍에서 고혜경 선생님의 그룹투사 꿈작업 강좌를 접하게 되었다. 열 명 남짓 사람들이 둘러앉아 각자의 꿈을 나누고 원하는 한 사람의 꿈으로 그룹 투사를 하는 과정은 나에게 낯선 광경이었다. 교양과목으로 ‘꿈분석’을 수강한 이후부터는 가끔 꿈을 기록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꿈으로 무의식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구체적인 작업이 얼마나 흥분되고 경이롭던지... 그때부터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꿈을 더듬어보며 음미하는 일이었다. 어떤 날은 너무 선명해서 생시같기도 하고, 어떤 날은 기억이 흐릿해 안타깝기도 하고, 가물 가물 기억이 나지 않을 때는 혹시라도 남아있는 어떤 이미지나 느낌을 한 가닥 붙잡고는 음미하며 잠잠히 있어 본다. 그러다가 운 좋게 꿈이 다시 돌아와 주면 얼마나 흥분되는지 모른다. 꿈을 기록하다 보면 등장하는 인물이 나의 무언가와 연결되기도 하고 사물을 통한 직관이 올라오기도, 혹은 동물에게서 나의 숨겨진, 아니 숨기고 싶은 모습을 보기도 한다. 의식세계에서 외면하고 검열하여 내 것이 아니라고 밀쳐두었던 감정이나 욕구들을 적나라하게 보는 순간은 속물같은 내 모습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수치스럽기도 하지만 그 낯선 나를, ‘또 다른 나’로 수용하기까지 겪는 나름의 아픔은, 그런 나를 인정한 후에 내게 주어지는 선물, 존재의 자유로움에 비하면 견딜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이 경이로는 세계를 좀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쯤 고혜경 선생님의 ‘꿈에게 길을 묻다’를 읽고 그룹투사 꿈작업 모임을 해 볼 용기를 내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투사작업을 하는 것이 혼자보다 훨씬 풍성한 ‘아하’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매료되어 용감하게 모임을 시작했다. 그러나 구심점 역할을 내가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에 때늦은 후회를 하던 날, 초록색 잎이 풍성한 나무에 빨간 열매 하나가 달려 있는 모습을 담장 너머로 스쳐 지나가며 보는 꿈을 꾸었다. ‘빨간’ 열매는 하루 종일 나와 함께 했고, 모임의 가이드 역할을 잘 해내야 한다는 건 또 다른 나의 페르조나였음을 깨달았고,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꿈이 스스로 그 역할을 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후로 모임은 계속 이어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고혜경 선생님의 그룹투사 꿈작업에 참여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램(공지를 보고 신청하려고 하면 이미 마감!!)이 하필이면 내 인생에서 가장 혼란한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 또한 내게 아주 큰 의미가 있었다. 간절함이 없었다면 이번 봄학기는 포기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언제나 내가 계획한 대로, 결정한 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의 틀(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든 시기고 바빠. 새로운 변화가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이 시점에서 또 새로운 공부를 하기는 힘들어. 그러니 다음에 여유있을 때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편한 마음으로 하자. 이번에는 포기하자!!)이 박살나는 경험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세계에서 눈을 돌려 새로운 세계에 한 발 들이미는 경험은 고통없이는 불가능한 일일테니 말이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힘들거나 지치거나 혹은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오늘 밤 꿈은 나에게 어떤 말을 건넬까’ 생각하면 내가 타인이 되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 궁금해진다. 또 다른 내가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