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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7강] | 뚜빠뚜빠띠 | 2010.4.27 | |||
어느덧 7강입니다. 남은 8강이 조별 시놉시스 발표라는 것을 감안하면, 사료를 토대로 기존 역사드라마를 재고찰하는 것은 마지막인 셈입니다. 매 강의가 끝날 때마다 주은경 아카데미 부원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죠. “우리가 모르는 게 정말 많구나.” 소크라테스는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의 무지를 성찰케 하는 방법으로 문답법을 썼다 합니다, 상대방의 대답이 막힐 때까지 묻고 또 묻는 거죠. 그리고는 이미 떡실신한 상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 저에게는 이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강의가 소크라테스의 물음보다도 곤혹스러운 질문 공세였습니다. 처음 <선덕여왕> 강의를 들었을 때의 공포스러운 좌절감을 기억합니다. 6~7세기 한반도를 종횡무진한 전덕재 선생님의 강의에 정신은 몇 번이고 길을 잃었습니다. 밀실에서도 미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강의 후기를 쓰는 일은 또 다른 고통이었습니다. 희미한 기억 조각들을 어렵게 반추하며 하나씩 꿰는 과정은 많은 인내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아리아드네의 실을 붙잡고 미로를 탈출하는 과정은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머리 속에 작게나마 복원된 과거상를 보며 조금은 이 복잡한 역사의 미로를 견딜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드라마 <제중원>을 중심으로 개화기 병원의 역사를 살펴본 7강도 저의 무지를 통렬하게 드러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괴롭고 즐거운 미로를 알려주신 분은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님입니다. 선생님이 던져주신 아리아드네의 실을 조심스럽게 쥐어 봅니다. 길을 잃을지 모르니 바짝 따라 오세요. 출발~
▲ 주진오 교수 조선 정부가 세운 최초의 근대식 서양 병원, 제중원. 드라마에서 그리는 제중원은 명의(名醫) 알렌의 주도로 세워진 것으로 그려집니다. 알렌은 1858년 미국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1년 동안 콜럼버스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1883년 3월 신시내티의 마이애미의과대학을 졸업하여 의사면허를 취득”, 같은 해 10월 북장로회 선교사로 중국에 들렀다가, 이듬해인 1884년 9월 우리나라에 들어온 인물입니다. 젊은 나이에 짧은 의학 경력, 과연 알렌이 드라마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훌륭한 의사였을지 의문입니다. 실제 그는 임상경험이 부족해 치료 중 환자가 죽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합니다. 아무튼 알렌은 조선 주재 미국 공사관의 무급의사로 일하다, 같은 해 12월 일어난 갑신정변 와중에 외무협판 묄렌도르프의 소개로 민영익을 구합니다. 여기서 알렌은 고종의 신뢰를 크게 얻습니다. 고종의 어의가 되는가 하면, 각국 공사관의 부속의사로 임명될 정도로요.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1885년 1월 알렌은 고종에게 제중원 설립 제안을 하게 되지요. 이 제안에 고종은 알렌에게 홍영식의 집을 줘 제중원을 설립하게 합니다. 홍영식은 갑신정변을 주도해 죽은 인물이죠. 지금 종로구 헌법재판소 안에 그 터가 있는 홍영식의 집을 조정에서 몰수했다가 넘긴 것입니다. 1882년에 폐지된 전통적 대민의료기구인 혜민서의 후신격인 제중원은 1885년 4월에 설립됩니다. 설립 초기 잠깐 ‘광혜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며칠 가지 않아 ‘제중원’으로 부표됩니다. ‘부표’란 국왕의 재가를 받았던 것을 수정할 때 쓰는 용어라고 합니다. 갑신정변으로부터 제중원 설립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넉달. 굉장히 빠르게 일이 진척된 셈입니다. 드라마에서는 제중원을 마치 알렌이 만든 것처럼 그리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조선 정부는 이미 그 전부터 서양의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가령 고종은 1884년 여름, 잠시 조선에 왔던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가 김옥균을 통해 제안한 병원과 학교 설립에 대해 허가의 뜻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 갑신정변이 터지면서 김옥균이 역적이 되자 감리교를 통해 추진되던 방식이 막혀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감리교는 이후 선교 의사 스크랜튼이 1885년 9월에 자체적으로 진료소, 시병원(施病院)을 열었습니다. 제중원 설립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토양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 의문이 생깁니다. 고종이 서양식 병원을 추진할 생각이었다면 여러 방법이 있었을텐데, 왜 굳이 알렌에게 혜택을 주는 방법을 택했나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당시 복잡했던 한반도 주변 정세와 관련이 있습니다. 제국 열강의 한반도 지배 야욕에 고종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임오군란이니 갑신정변이니 하는 사건들에 시달린 고종에게, 미국은 그나마 조선 영토에 대한 욕심이 없는 나라로 비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본이나 청을 견제할 수 있는, 신뢰할만한 나라라는 기대를 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은 조선의 영토보다는 선교나 무역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래서 알렌을 통해 미국을 끌어 들이려는 계산이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알렌은 1901년부터 주한 미국 특명전권공사로 활동하며 친한적인 태도를 보여 루즈벨트와 갈등하다 해임됩니다. 그런 고종의 기대 때문일까요? 드라마는 미국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습니다. 미국 역시 제국주의적 팽창욕에 경인철도 부설권, 운산광산 채굴권 등을 가져간 나라인데도 말이죠. 알렌이 친한적인 태도를 보인 본심 역시 조선의 독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게 빼앗길 이권에 있었습니다. 일본은 악하게 미국은 선하게 그려놓은 드라마의 선악이분법적 민족주의는 오류라는 것이 선생님의 설명입니다. 일본 역시 개화기에 가이세(카이로세) 등 의사를 비롯해,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나라 근대 의학 발전에 기여한 바가 있음에도, 미국의 역할만 지나치게 부각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제중원은 알렌의 책임 하에 운영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가 그리는 것처럼 알렌이 제중원의 1대 원장인 것은 아닙니다. 알렌은 1대 원장은커녕, 1887년까지는 정식 직원도 아니었습니다. 제중원은 엄연한 국가 기구였고 운영권 역시 국가에 있었습니다. 1894년 에비슨이 제중원에 책임을 맡을 무렵에 가서야, 조선정부의 무관심과 불성실 등으로 제중원을 운영하기가 매우 어려워, 운영권이 북장로회선교부에 이관됩니다. 그리고 에비슨은 클리블랜드의 실업가이자 자선사업가인 세브란스가 기증한 재원으로 1904년에 조선 최초의 현대식 병원인 세브란스 병원을 건립합니다. 오늘날의 연세대학교의 ‘세’는 이 세브란스의 첫음을 딴 것입니다. “대한제국기에 제중원은 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해 나갔다. 평소 연합병원의 건설은 물론 의료사업을 효율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에비슨은 건축가 친구인 고든에게 부탁해 40명의 환자를 입원시킬 수 있는 병원의 설계도면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선교부의 요청으로 1900년 4월말 뉴욕에서 열린 만국선교대회에 참석한 에비슨의 강연을 들은 부호 세브란스가 병원 건립 기금으로 1만 달러를 희사하면서 병원 건축을 위한 계기가 마련되었다. 비록 1만 달러의 절반 정도를 병원 건립에 사용하라고 주장한 평양 선교사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세브란스가 금액 전부를 병원 건립에 사용하게 함으로써 무마되었다. 부지 선정 문제로 인해 지연되던 병원 건립계획은 부지 매입을 위한 세브란스의 추가 기금으로 인해 속도가 붙었고, 남대문 밖 남산 기슭 복숭아골에 병원 부지 매입이 이루어졌다. 조선정부의 건축허가 불허, 건축자재 값 폭등 등 여러 어려움이 계속되었지만, 마침내 1904년 9월 23일 새 병원의 봉헌식을 올림으로써 입원실 규모가 40병상인 한국 최초의 현대식 종합병원이 문을 열게 되었다. 병원의 이름은 기증자의 이름을 따 '세브란스기념병원'이라 불렀고, '기념'을 생략해서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세브란스의학교는 1908년 6월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 7명을 배출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드라마 <제중원>의 주인공, 황정의 모델이 된 박서양입니다. 드라마에서는 황정이 제중원 설립과 동시에 그곳에서 일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박서양은 1885년 9월 생으로 제중원이 설립된 해에 태어난 인물이라, 황정에 대한 설정은 백정 부분만 따온 것일 뿐 나머지는 허구입니다. “박서양은 1885년 9월 30일 최하층으로 취급받던 백정 박성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성춘은, 1893년 서울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에비슨이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직접 몇 번에 걸친 왕진을 통해 자신을 성실하게 치료해 준 것에 감명을 받아 개신교인이 되었다. (중략) 여러모로 에비슨과 인연이 있었던 박성춘은 그의 초대로 아들인 박서양의 혼인식에 참석한 에비슨에게 자식의 교육을 부탁했다. 그래서 얼마 후 박서양의 부친의 부탁을 받은 에비슨은 박서양을 병원에 데려왔고, 그의 사람됨을 알아보기 위해 처음에는 병원 바닥 청소와 침대정리 및 잡무를 시켰다. 박서양이 힘든 모든 일을 아무 불평 없이 거뜬히 처리하자 에비슨은 그에게 글공부를 시작하게 하고 1900년 8월 30일 정규과정으로 입학시켰다. 박서양은 1908년 6월 우리나라 최초의 7명의 의사 중 한명으로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졸업 직후 화학을 맡아 강의를 하다가 다음에 해부학을 가르쳤고, 외과에서 근무하였다. 또한 세브란스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학교와 후진양성을 위해 많은 활동을 했다. 그는 1918년까지 학교에 근무하다가 사임하고 만주 용정의 국자가局子街에 구세의원을 개업하였다.”
▲ 질의 응답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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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6강] | 뚜빠뚜빠띠 | 2010.4.20 | |||
엉기조차 벙기조차 엉기벙기 버벙기. 무슨 말인가 싶으시죠? 어릴 적 읽었던 전래 동화 속 주인공 이름입니다. 몇 명 자식을 낳았지만 모두 일찍 죽어버려 애가 탄 부부가 있었습니다. 마침 또 하나의 아이를 갖게되자 이번에는 부디 무병장수하라는 바람으로 지은 이름입니다. 이름이 길어야 명도 길다는 무당의 조언이 있었거든요. 사람의 이름이 간혹 이처럼 어떤 사람에 대한 정보를 함축적으로 드러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이름만으로도 능히 그 사람의 일생이 짐작되는 이가 있습니다. 만덕(萬德). 재산을 털어 굶주린 백성들의 가난을 구제한 여인입니다. 누구의 기대가 섞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주술의 힘이 대단합니다.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여섯 번째 강의는 이름값 톡톡히 한 이 여인의 삶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강의는 약자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가진 정창권 고려대 국어국문과 교수님이 맡아주셨습니다.
교수님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 2세대라 칭했습니다. 저서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나 <향랑, 산유화로 지다>는 그러한 여성관이 녹아 있는 책들입니다. 우리는 흔히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본 여성사를 ‘남성에 의한 종속사’로 보곤 하죠. 하지만 교수님은 적어도 우리나라만은 그러한 역사의 예외지대라고 말합니다. 정치적인 지위가 아닌 일상 생활의 측면에서 봤을 때 한반도 역사상 여성의 지위는 그렇게 낮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령 16세기까지만 해도 매맞는 아내 얘기는 찾기 힘듭니다. 오히려 매맞는 남편이야기만 나오지요. 조선 중종 때는 ‘이러다 조선 남자 씨가 마르겠다’는 (다소 엄살섞인) 우려도 있었다 하네요. 이외에 처가살이라던지, 족보에 남녀의 이름을 모두 기재하는 거라던지, 자녀 간 공평한 재산분배 같은 것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런 흐름이 뒤바뀌어 남녀 사이 불평등이 심해진 것은 우리 역사 속에서 불과 2~300년 사이의 일입니다. 18세기 무렵부터 점점 악화된 여성에 대한 대우가 조선 말,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완전한 관행으로 자리잡았고, 오늘날 우리 사회의 남녀 차별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교수님이 만덕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 ‘여성사 암흑기’에 드물게 성공한 사례에 만덕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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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을 보다 | 과학기술 6강:과학기술과 시민참여 | 생명은 소중해 | 2010.4.19 | |||
<'마지막'이라는 단어>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힘이 세다! 마지막 순간, 마지막 회, 마지막 숨소리, 마지막 세일, 마지막 사랑, 마지막 수업...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다시는 같이 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엄청난 불안을 안고 있어서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단번에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낸다.
<마지막 강좌를 향해> '시민의 눈으로 보는 과학기술'의 4강(회사일때문에)과 5강(황당하게 지하철사고로)을 결석해서 마지막 6강좌는 꼭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강좌에 꼭 가야겠다는 생각에는 지금까지 함께 강좌를 들었던 분들과 마지막 만남이 될 수도 있고 그래서 마지막 강좌를 참석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큰 몫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 과학기술 강좌 자체의 마지막도 함께 하고 싶었다. 하여튼 마지막 강좌를 듣기 위해 긴급한 회사일도 모두 때려치우고 경복궁역을 향했다. 서둘렀지만 퇴근시간가까이에 일이 몰려서(이상하게 퇴근시간만 되면 없던 일들도 생긴다) 6시 12분을 넘기고 말았다. 6시 12분은 정자역에서 선릉역방향 지하철이 출발하는 시간이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6시 12분을 넘겨서 지하철을 타면 늦어지는 것 같고 지하철에 사람들이 많았다.
<언제나 즐거운 지하철 책읽기> 다행이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는 적당한 자리에 서서 '소설 기문둔갑'을 손에 받치고 읽었다. 이 책에 대한 내용은 다 읽었고 뒷부분에 부록으로 있는 기문둔갑에 대한 내용을 읽고 있었다. 정말 시간을 주관하는 신들의 방향을 알고 그 신들과 친하게 지내면 나에게 불운도 비켜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진지하게 책을 읽었다. 뒷부분에 있는 흥미로운 숫자들과(가로세로 더해서 모두 같은 수가 나오는) 붉은 부적이 인상적이었다. 도곡역에서 사람들의 파도에 잘 휩쓸려 3호선으로 잘 환승했다. 어느덧 시간은 7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언제나 지각하지만 7시를 넘겼다는 것이 마음을 급하게 한다.
<빈자리의 행운, 새로운 경험 하나> 아마 옥수역쯤이었던 것 같다. 내 앞에 자리가 하나 비는 행운을 얻었다. 게다가 7자리중에 오른쪽 끝자리였다. 나는 바로 앉았다. 나는 언젠가 왜 지하철 자리는 7자리씩 만들었을까 하고 궁금해했다. 지하철 한 칸의 좌석수는 7*6 + 3*4(노약자,장애인,임신부를 위한) = 54석이다. 54라는 숫자는 예전 초등학교때 한 반의 학생수가 50여명(49, 50, 51)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가방을 안고 가방위에 책을 놓고 읽고 있었다. 아마 약수역쯤에 내 오른쪽 자리가 비더니 누군가가 앉았다. 그 누군가가 앉는 순간 시크한 냄새가 2초동안 났다가 사라졌다. 이 갑작스런 경험에 살짝 눈을 책에서 꺼내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거기에 몸집에 좋은 백인 아저씨가 앉아계셨다. 그 순간 '아, 누군가가 백인에게서 난다는 특이한 냄새가 이런 냄새였구나'하고 생각했다. 누군가 백인에게서 나는 냄새를 얘기했을 때 그 때는 내가 왜 그런 냄새를 못 맡을까 혹시 내 후각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나도 이제 그런 냄새를 맡았으니 내 후각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새로운 냄새 하나를 기억하게 되었다. 하지만 단 2초동안의 경험이었지만 그리 기분좋은 냄새는 아니었던 것 같다.
<조여오는 압박 그리고 해제> 그런데 그 후각 경험은 2초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그후로 또 다른 문제가 지속되고 있었다. 그 분이 나를 자꾸 압박하고 조여오는 것이다. 그것은 그 분의 몸집이 크기 때문이었다. 그 분도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 분에게는 자리가 좁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냥 일어날까 생각하기도 했다. 내가 일어나면 누군가 앉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만약 앉지 않는다면 내 오른쪽에 계신 백인남자분은 당황해할 것이다. 그리고 내 앞에 젊은 여자분이 서 계셨는데 그 분도 내가 일어섰을 때 앉아아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할 것이다. 앉으려니 옆에서 압박할 것이고 자리가 비어있는데 서 있으려니 옆 백인남자에게 미안해할 것이고.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그냥 앉아있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책에 눈을 두고 있었지만 내 앞에 있는 여자분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고 느꼈다. 내가 일어날지를 주시하는 것 같았다. 이런 긴장상황은 곧 해제되었다. 그 백인남자분이 내리셨고 그 전에 내 앞에 계신 여자분도 사라지셨기 때문이다.
<마지막을 향한 달리기> 나는 기문둔갑을 거의 다 읽어갔고 경복궁역에 도착했다. 농학교를 향한 출구를 찾아 서둘렀다. 출구를 나와 뛰기 시작했다. 매번 경복궁역 출구에서 참여연대까지는 뛰어야 했다. 이미 지각이기 때문에. 전에는 뛰는 게 힘들었고 조금 지겨웠지만 오늘은 힘들기는 하지만 아쉬움이 더 켰다. 다시는 이렇게 뛸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역시 '마지막'은 힘이 셌다. 전과 같이 참여연대 3층은 어두웠고 조용했다. 하지만 그 너머 강의실은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 나는 뒷문으로 들어갔다. 아는 몇몇분이 눈을 맞춰주셨고 인사하셨다. 나는 자리를 잡고 강좌를 듣기 시작했다. 다행이 많이 진행된 것 같지는 않았다. 오늘은 국민대학교 사회학과 김환석 교수님께서 '과학기술과 시민참여'에 대하여 강의해주셨다.
강의 내용 (시작) ----------------------- <과학만능주의에 대한 회의> 계몽주의 이후로 과학기술은 '합리성과 진보'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여러 사고들(인도 보팔(1984년): 아직도 보상못받고 있음, 체르노빌(1986) 사고)들로 인해 과학기술에 대한 회의가 제기되었음. 즉, 과학만능주의에 대한 회의이다. 점차 사람들은 과학기술이 만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던 시대로 돌아갈 것인가? 기존에는 국가의 과학기술정책의 결정에 훈련받은 전문가들의 조언을 얻어서 결정했다. 일반 시민들은 그 결정을 통보받는 소비자역할만 했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결정한 과학기술정책에도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서구에서는 1990년부터 시민참여를 통해 과학기술의 민주적 통제를 하기 시작했다.
<과학기술, 또다른 불합리성의 생성> 근대화란 결국 모든 것의 합리화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과학기술을 통해 오랜 불확실성과 위협들을 줄였지만(합리화), 전에 없던 불확실성과 위협들과 대면하게 되었다. 결국 혹땔려다 또 다른 혹이 붙은 격이다. 기존의 불확실성을 합리화시켰지만 과학기술 자체로 인해 또 다른 불확실성이 생겼다. 일상 생활에서 과학기술로 인해 개인의 자유와 복지는 증가하지만 개인의 통제영역밖에 있는 '전문가체제'에 대한 의존이 증가함. 이 전문가체제가 안정과 안전한 생활을 보장못할 경우가 문제이다. 예를 들면, 약사가 권해준 약을 먹었을 때 부작용, 인터넷 사용시 개인정보 유출.
<지금은 '탈정상과학의 시대'> 과학기술이 점점 발달할수록 자연에 개입을 더 많이 하게 됨. 개입이 증가할수록 부작용은 복잡해지고 위험이 커짐. 예를 들면, 원자력발전, 지구온난화, 오존층파괴. '오존층파괴'는 과학자들이 제일 먼저 알아낸 것임. 일반인은 알 수 없음. 과학 스스로가 이런 위험,현상을 설명할수록 과학자체의 불확실성이 드러나고 있음. 가치나 이해관계가 개입된다면 전문가들도 확신못하는 논쟁으로 확대됨. 예를 들면, 4대강에 대한 찬성과 반대에 대한 과학자들의 대립. 찬성과 반성에 대한 과학자(전문가)들의 논리안에는 그들만의 가치나 이해관계가 개입되어 있음. 따라서 지금 시대는 '탈정상과학의 시대'임. '탈정상과학(Post normal science)'이란 '정상과학'이 없다는 뜻. '정상과학'이란 지금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과학 패러다임임. 예를 들면 과거 천동설이 지배하고 있던 시대에는 천동설이 정상과학이었고 누구도 천동설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았음. 하지만 지금은 하나의 정상과학이 있기 힘드므로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전문가들만의 검증과 관리로서는 한계가 있음. 그래서 다양한 시민들의 지식과 의견도 더해져야 함. 예를 들면, 사람들은 비행기 타는 것과 자동차 타는 것 중에 비행기 타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실제 통계를 내보면 자동차 타는 것이 사고날 확률이 높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비행기 타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알려준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이 느끼는 것은 다르다. 사람들이 비행기 타는 것을 더 위험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통제가능성과 선택의 폭이 자동차 타는 것보다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의 심리와 감정적인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한 분야의 전문가의 의견만 믿고 따르는 것보다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어떤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좋다. 아마 이런 측면은 시민들의 의식이 성장했기 때문에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전문가들과 일반시민들은 전문가 집단이 대중을 지배하는 상하관계였으나 이런 과학기술의 불확실성의 증가로 인한 논쟁의 증가는 이것을 뒤집을 수 있는 민주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위험한 기술에 대한 대중적 논쟁들이 근대사회의 기본적 토대에 도전할 수 있는 보다 민주적인 정치의 씨앗을 그 안에 안고 있음" (울리히 벡, <위험사회>, 1992) <위험사회>가 출판되던 시기에 체르노빌 사고가 터져서 이 책 대박났고 저자도 덩달아 유명해졌다고 함. 과학기술의 불확실성에 대한 시민들의 규제 요구에 국가는 고민이 깊어간다.
<잠시 쉬는 시간> 어떤 분이 쓰시는 '종이연필'이 화제가 되었다. 김훈 작가가 쓰신 '공무도하'와 종이연필이 어떤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 김훈 작가는 '마초남'이라고 하신다^^ 김훈 작가는 앞에 가고 부인은 뒤에 따라오는 모습. 마초남도 귀여운 면이 있다고 함^^ 일본에서는 초식남에 질려서 마초남에 대한 호응이 좋다고 함. 나는 쉬는 시간에 김밥을 몇 개 먹었다.
<과거의 모델('과학을 위한 사회계약')의 한계> 2차 세계대전 이후 '과학을 위한 사회계약': 국가세금으로 과학연구 지원, 그 혜택은 사회가 누림. 1960년대말에 대두된 여러 사회운동들은 과학기술의 민주적 통제를 주장하기 시작함. 미국의 환경보호청(EPA: Environment Agency), 기술영향평가국(OTA: Official Technology A~) 설치. 1970년에 이후로 유럽, 미국의 경기하락으로 자금지원 감소, 연구 부정 스캔들로 인해 '과학을 위한 사회계약'모델의 위기가 옴.-> 1980년대 '대중의 과학 이해'(PUS) 사업을 추진(과학계 자체내에서 추진됨, 영국의 왕립과학원(Royal Society)) 하지만 TA 정책과 PUS 정책은 '시민참여'에 대한 한계가 있었음.
<구성주의적 과학기술학(STS)과 시민참여> 1970~1980년대에 구성주의적 과학기술학(STS) 연구가 성장함. 구성주의적 과학기술학의 발견과 통찰은 '과학과 기술은 결코 보편합리적 '지식'이 아니라 우연적, 국지적 요인들이 작용한 '실천'의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내 생각에 우연과 국지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듯 한데... 전적으로 이 통찰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2/3정도는 동의함) STS의 실천적 대안 제시: 숙의민주주의(Delivery Democracy) 이론과 참여적 공공정책분서과 결함.-> 숙의적 방식의 시민참여를 통해과학기술이 구성되는 전 과정(연구, 개발, 이용)에 대한 의사결정을 민주화하는 것이 오늘날 기술사회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 (정확히는 이해 안되지만, 과학기술이 점점 복잡해지고 통제하기 힘들어지므로 과학기술 정책을 세울 때 숙의적 방식의 시민참여가 필수적이라는 뜻 같음.)
<숙의적 방식의 시민참여: 유럽에서의 전환> '숙의적 방식의 시민참여'의 예는 네덜란드의 '구성적 기술영향평가'(CTA)와 덴마크의 '합의회의'(Consensus Conference)이다. 다양한 일반시민들로 구성된 패널들이 전문가로부터 지식과 정보를 얻고 토론하여 정책결정에 반영(보고서 작성). 전문가가 결정하고 시민에게 통보하는 모델은 과거에 해봤지만 분명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 그래서 쌍방향 대화를 강조하는 모델쪽으로 변경됨. 1990년대 후반, 광우병 사건과 GMO 반대운동이 가장 심했던 영국은 새로운 과학정책으로의 전환을 공식 선언했음(2000년에 발표한 <과학과 사회> 보고서='대중의 과학 참여'(PES) 접근으로 이행)(인터넷으로 열람가능). 이런 방향이 나노기술,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 등으로 꾸준히 진행되고 있음. 유럽에서는 시민참여로 정책이 전환되었음!
<시민참여의 여러 방법들> 후원자가 존재(국가 등)하고 숙의적인(시민기여가 높은) 경우는 합의회의(검사,변호사 등의 전문가를 불러서 시민배심원들이 토의하여 영향력행사->보고서 작성), 시민배심원, 숙의적 여론조사(시민들에게 각종 정보 제공, 학습시킴, 분임토의후)가 있음. (나는 여기서 시민들을 '학습'시킨다는 것에 놀랐다. 하지만 시민들도 학습해야 한다는 것을 자주 듣지 못해서 그렇지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닌 것이다.) 후원자가 존재(국가 등)하고 비숙의적(시민기여가 낮은) 경우는 여론조사, 공청회(우리나라의 경우는 결정을 미리 다 해놓고 공청회하여 반영안되는 경우가 많음), 주민투표(스위스는 GMO에 대하여 주민투표했음)가 있음. 자발적이고 숙의적(시민기여가 높은) 시민참여는 환자단체의 행동(에이즈 환자들의 치료제 개발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 과학상점 이 있다. 과학상점(Science Shop)은 네델란드 학생, 교수들이 시작했음. 당장 지여사회에 나가서 과학기술에 대한 문제를 찾아서 해결해줌. 지역사회 문제에 대해 연구하여 논문을 발표함. 지역주민들의 반응이 아주 좋았음. 시민들이 이에 대한 보답으로 국회에 제출-> 네델란드 대학마다 과학상점에 대한 지원이 제도화됨, 현재는 과학뿐만 아니라 사회, 인문학적으로 확대되었음. 자발적이고 비숙의적(시민기여가 낮은) 시민참여는 주민들의 자발적 저항운동(NIMBY) 등이 있음.
<시민참여에 대한 우리나라의 사례> 2001년 <과학기술기본법>부터 시민참여를 명시했음.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가 1997년 11월에 출범하면서 합의회의, 과학상점 등을 국내에 소개했음. 합의회의: 1998년 유전자조작식품, 1999년 생명복제기술에 대한 합의회의 개최, 시민과학센터는 2004년 전력정책과 원자력발전의 미래를 주제로 합의회의 개최. 정부는 숙의적 시민참여 방법에 대해 소극적이었으나 비판을 판고 2006년 유비쿼터스컴퓨팅 기술, 2007년 기후변화협약 대응기술에 대하여시민공개포럼 실시함. 2008년 '국가재난질환(예, 광우병, 신종플루) 대응체계 시민배심원회의'를 개최. 자발적이고 숙의적 시민참여는 환자단체의 활동(의료비용 지원요구 등)과 과학상점(몇몇 대학에서 시도됐으나 큰 효과없이 중단됨, 2004년 대전지역 '시민참여연구센터'(참터) 출범->시민을 위해 연구해 줄 만한 연구자가 부족)
<지구온난화에 관한 전 세계인의 견해(WWViers)> 2009년 9월 26일 덴마크 DBT의 제안으로 38개 국가에서 총 4천명이 넘는 일반시민들이 동시에 참여한 숙의민주적 시민참여 실험을 했음(World Wide Views on Global Warning). 2009년 코펜하겐 기후회의에 일반시민들의 견해를 알리기 위한 의도가 있었음. 코펜하게 기후회의에는 전문가, 환경단체의 견해만 의논될 것이기 때문에 이런 숙의민주적인 시민참여로 일반시민들의 의견을 알리려고 했음. 아시아는 8개국(중국, 대만, 일본 포함)이 참석했고 우리나라는 참가 초청을 받았으나 정부의 비협조로 결국 참가를 포하했음. 부끄러운 일! '환경재단'이 주도했으나 환경재단이 대운하반대 운동을 했음. 정부가 비협조. 결국 참여못하게 됨.
<국내의 후퇴하는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참여> 이명박 정부는 시민참여를 확대하지 않고 오히려 기존의 기술관료적인 태도도 '민주주의의 후퇴'가 벌어지고 있음.->그 결과로서 과학기술의 불확실성과 위험의 강호, 정책결정에 대한 대중의 환멸과 불신이 심화될 것. THE MEATRIX(동영상): http://www.themeatrix.com/intl/korean/
<질문 시간> 1) 페미니즘에서 과학기술을 비판한 이유? -> 출산에 대하여 여성이 통제할 수 있었는데,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산부인과에 의존하여 남성에 대한 의존이 높아짐. 과학기술자들은 대부분 남성, 자연스레 남성권력이 형성, 발휘되는 분야로 인식됨. 여성이 과학기술분야에 약한건 자질부족은 아니다. 뿌리깊은 문화, 관습의 영향이 크다. WISE(Women In Science Engine)운동. 2) NIMBI 현상, 정상적인 방어현상도 NIMBI 인가? -> 국가가 민주적으로 유도, 이해하려는 노력을 제공해야 함. 숙의과정 필요. 대중의 신뢰를 얻어야 함. 3) 책추천해주세요. -> 진보의 페러독스(이메일로 보내준 참고문헌에 있음), 과학기술~, 한국의 과학기술 민주화. 과학기술 이외의 다른 분야도 시민참여를 할 수 있다!
-------------- 강의 내용 (끝)
<참여연대 계단 명화, 마지막 한 컷> 뒷풀이를 위해 우리는 참여연대 건물에서 빠져나갔다. 나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창에 걸린 명화 한점을 보고 내 디카가 담아왔다. 여전히 가로등의 하얀 빛들이 검은 기와지붕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마지막 강좌 뒷풀이(쭈꾸미집)> 경복궁역근처에 좁은 골목으로 갔다. 시골장터를 연상시키는 곳이었다. 우리는 쭈꾸미집으로 들어갔다. 쭈꾸미 요리가 나오고 막걸리와 소주가 몇 번 왔다간 이후에 우리는 자연스레 이야기꽃을 피웠다. 내앞에 계신 교수님, 그리고 내옆에 계신 멋쟁이 여자분과 촛불정신과 1Q84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IQ84는 사놓고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 계신분들 대부분은 야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김환석 교수님은 딸이 2분인데 둘 다 대학졸업하고 20대 중반이시란다. 그런데 딸들에게 정말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면 결혼을 하지 말라고 하셔서 우리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결혼은 여성에게 손해가 많다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 교수님 소막(소주+막걸리)를 즐기신다. 저런 술조합은 처음 봤다. 한미 FTA반대를 위해 분신하신분의 3주년이 얼마전이었다는 얘기도 있었고 오마이뉴스의 10만인클럽이신 두 분을 만나서 반가웠다(나도 10만인클럽이다^^)! 쭈꾸미 삶은 것을 파에 싸서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것은 여기서 처음 먹어봤다. 10시쯤부터 시작한 술자리가 어느새 11시 50분쯤 되어 민수 간사님이 마지막 교수님의 말씀을 청했다. 과학기술 강좌가 다음에 또 준비하고 있다는 말씀도 하셨다. 처음이 있으면 마지막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마지막을 함께 했다. 그래서 또 다른 만남을 기대하게 된다. 처음, 마지막, 그리고 또 다른 만남에 대한 기대, 이런 것들을 반복하는 것이 우리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의 마지막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중간에 오셨던 한 분이 찍어주셨다. 모두 한 잔들 하셔서 얼굴이 재미있으시다^^
<집으로> 우리는 쭈꾸미집에서 나와서 서로 갈 길을 갔다. 나와 지하철을 같이 타신 분은 두 분이다. 그 두 분과 핸드폰 번호를 교환했다. 그리고 최영아님과 양재역까지 가면서 이야기했다. 나는 좋은생각 5월호를 선물했고 영아님은 양재역에서 내렸다. 나는 도곡역에서 분당선을 갈아탈려고 했지만 분당선이 끊겼다. 그 때 시간이 12시 30분쯤. 그래서 다시 3호선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플래폼. 정말 이상했다. 메트릭스에서 네오가 기차를 기다리는 장면같았다. 다음 3호선을 타고 가락시장까지 갔다. 가락시장에서 성남가는 버스를 타려고 했다. 보통 버스는 지하철보다 오래동안 있기 때문이다. 가락시장에서 복정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복정에서 성남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그러는 중에 영아씨에게 문자가 왔다. 잘 갔냐는 걱정이 묻어있는 문자였다. 그래서 복정에서 버스기다리다가 안오면 택시타고 갈 생각이라고 답문을 보냈다. 다행이 1시가까이에 407번 버스가 왔다. 이 버스는 내가 사는 신흥역 성남우체국 앞까지 간다. 1시쯤에 내 집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는 신기했고 고마웠다. 버스에 탔는데 버스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환자처럼 보였다. 대부분 졸고 있거나 이상하게 보였다. 하긴 새벽 1시니 무리도 아니겠지^^ 나는 집에 와서 씻고 2시쯤 잤다. 내일 아침은 피곤하겠지만 마지막 강좌는 내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 덕에 이렇게 후기를 쓰고 있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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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주인이 되는 돈의 인문학 | 돈의 인문학 - 삶이 뒤집어 질 그날까지 '돈'과의 '전쟁'은 계속된다. | 맑은바람 | 2010.4.18 | |||
어릴때 소세지 도시락 반찬이 너무 부러워, 어머니께 조르면, ‘돈 없어 안돼’ 였다. -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소세지반찬’과 ‘돈’이 어떤 관계인지 몰랐으나, 그때는, 막연히, 소세지를 바꿀 수있는 ‘돈’은, 내가 좋아하는 도시락 반찬의 ‘주제’를 결정하는 ‘힘 있는 어떤 물체’ 라고 생각했던것 같다. 이때 ‘돈’은 물물 교환의 수단쯤 되었을까? 아무튼^^‘소세지’ 보다는 덜 중요했다. ^^ 돼지 저금통에 몇 년씩 잔돈을 넣으면서도, 오빠가 저금통 밑을 교묘히? 핀으로 움직여, 숱하게 빼가는 것을 모를 정도로 ‘둔했고’ (언니와 동생은 저금통을 비밀장소에 보관하였다) - 왜 안채워지지? 고민한번에 그냥넘어가기 100 번 이었다. - 돈에 대한 관리력 제로 - 세뱃돈으로 받은 지폐를 언니와 오빠가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겨, 잔돈과 바꾸자하면, 사심 없이 바꾸곤 했다. 부모님은 ‘여자는 공부 많이해도 소용없다 - 돈 많은 남편 만나면 인생 핀 다’ 말씀하셨다. 지금은, 너무 어렵게 삶을 살아온 부모님의 생을 이해하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 으로 이해했지만, 그때는, 부모님 말 씀 중, ‘인생 핀다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고, 도대체 ‘돈 많은 남편의 기준’은 무엇인지 궁금했었다. 세탁기 안에, 세금낼 수표 한 장을 사정없이 돌려, 분분 떨어진 '낙화' 같이 해놓고도, ‘어찌하든 살리려는 노력도 못해보고 (잘몰랐다- ) 옷에 묻은 ‘흰종이 가루’를 어찌 떼어낼지만 고민하고, 답답해 했다. ‘돈’에 얽힌 ‘덤덤한?’ 몇 가지 단상 이다. 어느 날, 부모님이 편찮으셨고, 생사를 오가는 병원 생활 가운데, ‘경제적 책임감’이 주어졌다. 저축도없고, 병원비때문에 , 결국 ‘대출’ 이란 달콤한? 제도를 알게 되었고, 마이너스 통장을 갖게 되었다. 마이너스 통장은 참? 신기? 했다. 덤덤했던 돈과 관련한 나의 일상'을 조금씩 바빠지게도 했고, 앞의 마이너스 (-) 를 보지못해 '빚' 이 마치 '내 저축한 돈' 인양 생각하고 지출하게 하였다. 월급은 통장에 기호(숫자)로만 찍히기 때문에, 마이너스 금액만 줄어들 뿐, 다시 채워졌기에, 내역이 모호해 졌다. 처음엔 ‘빚’을 갚기위해, 용돈을 쪼개고, 야근도 하고, 나름 노력했는데, 어느 순간, ‘돈’을 벌기위해, ‘밥’을 먹고, ‘병’이 나면, 또 ‘돈’을 들여 ‘약’으로 치료하고, 다시 ‘돈’을 벌기위해, '밥' 먹는 행위?를 되풀이 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돈에 대한 개념은 희박해지고, 욕심이 생기고, 카드사용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주, 몇 달을 살다보니, 삶은, '돈' 에 무뎌지는 (실제는, 돈에 지배 당하는) 습관이, 삶이 되어 있었다. 지치기도 하고, 바꿔보고 싶었으나, '돈으로 익숙해진 편리한 삶' 은 , 쉽게 변화지 못했다. 않았다. 우연히, ‘돈의 인문학’ 글을 읽게 되었다. 홀딱 깨었다. 집중해서 읽고, 중요부분은 메모했다. 생각의 변화가 시작되고, 삶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참여연대 강좌를 듣게 되었다. 돈과나, 화폐의 역사, 돈의주인되기, 그리고 마지막, 우리는 무엇을 원하나 까지, 어떤 시간, 어떤과목, 중요하지 않은 시간이 없었다 너무 시간이 짧았다. 후기를 쓰는 지금도 아쉬움이 계속 남는다. ‘돈 에 얽매인 사고와 가치관, 삶‘이 자리 잡은, 나의 총체적인 현재 삶을 갈무리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제일 집중했던^^ 왜 돈의 인문학인지부터 시작하여, 돈의 정체,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것을 찾아 관계속에서 창조되는, 가치와 사회적 유대를 위하여. 라는 총 정리로 마무리 되었던, 마지막 강의가 생각난다.- 진정한 ‘가치’와 '진정한 능력' 이란 무엇인지 제대로 배우는 시간이었고, ''사회적네트워크'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해서도 다시한번 알게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문득, 나는 낯선사람을 얼마나 믿을까?.. 사회적 만용과 맹신부분을 떠올려 보았다. 유년기엔 너무 믿어? 유괴 당한 경험도 있지만, 어른이 되어선 절대 믿지 않음, 아니 믿지 못함, 오히려 믿는 이들을 재점검?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슴을 깨닫고 씁쓸했다. 이 안에는 ‘돈’이 ‘관계’되 있슴은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었다. 또한, 강의를 통해, 식탐은 있으나, 앞으로, 돈 벌기위해 먹지 않겠다 결심하고, 또 조심하겠다 다짐 했다. - ^^ 돈맹 체크리스트에선 E 임을 알고 ‘경악’ 했으나 ‘주위반응’은 ‘당연함’ 이었고, 이에 절절히 ‘반성’하며, ‘돈’을 ‘돈’ 답게 생각하고, 잘 사용 하는 것의 중요함을 '뼈속 깊이' 알게 되었다. 그러더니 작심 3일만에 일?을 치를 뻔했다. - 사람이 홀리는건 순간 이라는것을 꼭 말하고 싶다. 지난 금요일... 통장 정리하러 은행 갔다가, '착하게? ' 생긴 여직원 꾐에 넘어갔다...- 머릿속엔 '돈'에 대한 ‘정의’가 활활 타고 있었슴 에도, ‘인정’에 끌린 건지 ‘홀렸던 건지’ 지금생각하니 ‘경제 재무적 무력감’ 탓 일 가능성이 컸다. 아무튼. 월 15만원을 5년간 부은 다음 다시 5년을 기다리면, (결국 10년 ) 1천만원을 준다는 말에 '혹' 했다. 기간은 생각지 않고, 1천만원 이란 숫자에 '와~우' 생각했고, 머릿속엔 '돈의 인문학' 이 윙윙 거렸으나 잠시 접었다. - 설명을 들어도 그닥? 잘 이해하진 않았으나, 결론 에 '혹' 했던 것 같다. 선생님 말씀처럼 ' 이상품 가입해서 은퇴 준비 안하면 큰일 난다' 혹은, '아직도 이런거 하나 없냐? 늦었다 ' 라는 말도 여지없이 들었다. 낼 모레 지구의 종말이 올때, 돈없어 쩔쩔매면 어쩌려고, 남한테 민폐 끼치지말고, 정신줄 있고, 젊었을때, 조금씩 해놓으라는 그녀말에 왠지 ‘위기감을 느껴’ ‘진짜다’ 라는 맘으로 도장을 찍었다. - 월 15만원...생활비에서 더 쪼개어 부어보자...이건 저축이다. 세뇌했고, 다른 한 쪽 뇌의 울림을 무시했다.. 한 마음 두 생각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다음날.. 머릿속이 꽉차서 어지럽고, 심장이 간질거리고, 뱃속이 더부룩했다. 아무도 없을땐, 빨간불 일때 건너라. 착각하는 것처럼, 녹색불에 건너는것이 당연하고, 그렇게 배웠음에도, 마치 빨간불 일 때, 횡단보도를 당당히 걷는것에 동의한 느낌 이었다. 숫자에 눌려 숨막히는 꿈부터 시작하여, 나의 이중성에 온통 예민하여 , 급기야 착한 나'를 홀딱 꼬인 여직원이 ‘나쁜사람’ 이라 스스로 욕하기 까지 했다. 열심히듣고, 적용하기로했는데, 이것이 무슨짓인가? 배우면 뭐하나...~현실앞에 다시 무력해져, 귀가 얇아 홀딱 넘어가 는것을, 실천하지 못한 무력감과 자괴감이 들었다. 실망했다. 역시 난 안되는건가? 깊은고민에 빠졌다. 주말이 많이 힘들었다.. 작심 3일의 대표적 예였다. 바보같이 ‘지구의 종말이 오면 다같이 죽을건대, 돈이 왜 필요한가? 돈이 무슨쓸모가 있는지?’ 지금도 어려운데, 한달에 15만원을 어디서 쪼개? 그게 다 '빚'인 줄 몰라? 왜 그래? 정신 차려보니, 이제서야 제모습이 돌아왔다.. 나의 장점이자 단점인 '단순, 무식, 용감' 을 가지고, 빨리 제정신 '돌아왔을때' 움직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은행을 찾았다.. "엊그제 가입했는데, 도저히 안되겠어요.. 다른 것도 있어 부담되서요.. .해지해 주세요.." 개미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입은 웃고있으나, 눈은 가재미가 된 ' 그 착해 보이는 은행직원 (이미 모습은 바뀜)' 과 눈도 못 맞춘 채, 말만 했고, 그 직원은, 아직 전산서류 넘어가지 않은 상태라 '해지' 아닌 ' 그냥 취소' 라고 하며, 더 한번 나를 '설득' 하려 했으나 고개숙인 나를 보고 포기 한듯 종이만 내밀었다. 10분 정도. A4 용지 한장에 간단한 '취소싸인' 을 하고 은행을 나왔다. 주말내 괴롭혔던 '신경괴물체'를 멀리 날려 버렸다.. 비로소 자유인이 된듯했다. 또 한번 '돈' 에 '넘어갈 뻔한' 이번 일은, 단 10분만에 지옥을 천국으로 바꿔 놓았지만, 얼마나 '삶' 바꾸기가 쉽지않은지 깨닫게 하는 '작심3일 대표적 예' 였다.
생을 마감할때까지, 수없이 많은 '돈'을 만나고, 함께하고, 같이 갈 것이다. 위와같은일도 비일 비재할 것이다. 아직까지, ‘돈의 인문학’ 통해 배운것처럼 '돈'과 함께, '흔들리지않고' ‘완벽히, 제대로’ 삶을 살아갈 자신은 없으나, 이번 강의를 통해 '돈'에 대해 '제대로 이해' 한것과 '관련한 삶' 을 나누고 배운 것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는 '긍정적 희망' 을 가지고, 앞으로 쭈~욱, ' 돈 과의 전쟁' 을 치뤄보려 한다. '돈'에 대한 생각과 마음과 행동이 완전히 개조되어 ' 삶이 뒤집어 질 그날 ' 까지 계속 해보려 한다.
혹시, 지금 ‘돈’과 함께 살면서 ‘이것이 사는게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진지하게 말하고 싶다. ‘돈의 인문학’을 들어보고, 알아보라고...배워보라고.... ‘돈’을 정말 ‘돈’스럽게 알게된다고 ... .‘돈’맹?을 타파해주신^^ 강사님들과, 수고해 주신 간사님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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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살아나는 과거, 대한민국의 역주행 | 되살아나는 과거, 대한민국의 역주행[5강] | 부엉이의 눈 | 2010.4.13 | |||
3월 8일부터 김동춘
선생님의 <되살아나는 과거, 대한민국의 역주행>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되살아나는 과거, 대한민국의 역주행 5강 “빨갱이 시비는 콤플렉스를 덮기 위한 자기 정당화” ‘빨갱이’ 만큼 한국사회에서 가장 비이성적이며 폭력적인 것이 또 있을까? ‘빨갱이’의 위력은 민주화 이후에도, 민주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여전하다.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누구든지 언론과 여론의 마냥사냥을 감내해야한다. 전체주의에서나 있을 법한 ‘사상검증’이 왜 아직도 있는 것일까? 한사람의 삶을 그 자리에서 정지시키고 그 주변사람들까지 망가뜨리는 ‘빨갱이’는 무엇인가?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되살아나는 과거, 대한민국의 역주행>5강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빨갱이’는 현재진행형인 주제다. 김동춘 교수는 “우리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코드가 바로 오늘의 주제”라고 했다. “국가보안법(1948.11)이 62년이 됐다. 여순사건(1948.10)과 같다. 이 둘은 지금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역사”다. 재밌는 것은 국가보안법이 60년이나 됐는데 이 법을 연구한 법학자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재야 변호사인 박원순씨만이 국가보안법에 대해 책을 처음으로 냈다고 한다. 김 교수는 “국가보안법은 헌법보다 상위법으로 행사됐다. 헌법을 위반한 사례가 무수하다. 그 이념은 극우반공주의와 빨갱이 사냥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한국을 지탱해온 것”이라고 했다. ‘빨갱이 사냥’은 어디서 왔는가? 그럼 이 같은 빨갱이 사냥은 한국에만 있는 것인가? 김 교수는 유사한 형태의 빨갱이 사냥이 있다고 했다. 미국이다. “미국에서는 빨갱이를 ‘Reds’라고 쓴다. 미국에서 적색공포가 온 것은 러시아혁명(1917)발생 후였다. 차르황제 당시에 미국의 부자들이 러시아 국공채에 투자를 많이 했다.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못 받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러시아에 괴물이 나타났다고 생각하게 된다. 미국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러시아 혁명에 대한 공포감이 미국 부자들을 건드린 것이다. 이것이 빨갱이 사냥의 광기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 이후 미국 노동자들의 운동에 대한 탄압도 거세지고 매카시즘이 50년에 나타났다고 한다. 매카시즘이 원조라고 생각했는데 러시아 혁명이 발단이었다니 ’돈‘이 무섭긴 무섭다. 독일에서도 ‘빨갱이’사냥이 있었다. 히틀러 나치 하에서 벌어졌다. 독일 국가에 충성심을 표하지 않는 자들, 국적 없는 유대인들이 그 대상이었다. 김 교수는 “유대인이 좌파, 무정부주의, 마르크스주의자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상 이방인이었던 시간이 길기 때문에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낮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유대인=공산주의’라고 생각해 수용소 감금과 체포를 동시 진행하고, 러시아 스파이로 간주했다고 한다. 빨갱이 사냥의 원조는 미국, 독일인 것이다. “미국의 정치는 일종의 파라노이드(낯선 사람에 대한 의심과 공포) 정치다” - 리차드 홉스테더 리차드 홉스테더가 말한 ‘파라노이드 정치’는 낯선 사람을 과대포장해서 두려움을 갖는 증상을 의미한다. 김 교수는 “19세기 미국의 정치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갈등이었다. 가톨릭은 앵글로색슨 주류에 밀려난 상태고 개신교는 미국의 주류였다. 개신교 사람들은 18세기 미국건국 때부터 가톨릭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 근본주의가 빨갱이 사냥으로 된 것”이라면서 파라노이드(공포) 정치에 대해 설명했다. “한국기독교는 미국기독교 근본주의와 같다. 가톨릭에 대한 공포가 미국 정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빨갱이 공포는 단순한 반공주의와는 성격이 다르다. 정신의학적인 측면이 있다. 극도의 정신적 스트레스와 극도의 자기존재에 대한 위기의식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익숙하지 않은 상대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특별한 트라우마(PTSD)를 갖는 사람들은 공격적이고 비뚤어지게 생각한다. “이것은 (가톨릭에 공포를 가진)기독교 근본주의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본다. 상대에 대한 관용이 없다.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애야 한다. 그래야 평화가 온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화적, 종교적 태도가 전쟁과 결합했을 때 극히 극단적이고 공격적으로 나온다”고 했다. “상대를 악마로 모는 사고방식이 정치적 이해관계와 매스미디어의 선전, 선동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꼭 반공주의가 아니어도 이런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상대를 악마로 모는 심리는 외부에 의해 극단적인 공포가 발생했을 때 드러난다. 1923년 관동대지진(도쿄인근지역)때 동경에 살던 조선인 5천명이 학살당한 사건이 이를 잘 말해준다. 김 교수는 “당시 일본인들은 미친 듯이 조선인들을 잡았다. 지진이라는 위기상황에 조선인에게 광기를 휘둘렀다”고 했다. 전쟁 중인 데다가 대지진이 일어났으니 일본인들의 심리적 공항상태가 광기가 되어 만만해 보이는 조선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얘기다.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인 고 함석헌 선생의 전집에 유학당시 경험담이 실려 있다고 한다. ‘내가 겪은 관동대지진’이라는 글인데 “당시 조선인들은 왜 학살을 많이 당했나? 위기에 처한 일본의 권력이 사회주의에 대한 공포감과 지진으로 인한 경제위기를 조선인들에게 퍼부은 것이다. 이것을 보면 정부에 쓴소리를 계속 하는 명진 스님을 ‘좌파’라고 모는 안상수 원내대표의 발언의 그 기본적 원리가 동일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빨갱이 사냥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김 교수는 미국과 다른 점으로 “의심 가는 사람을 빨갱이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멀쩡한 사람을 빨갱이로 만드는 게 차이”라면서 “그 가족, 주변인에게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미국보다) 한 단계 더 나간 것”이라고 했다. 7~80년대 납북어부들은 “빨갱이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빨갱이를 사람이 아닌 동물로 간주해 동정심과 자비심, 공감 등의 감정을 없애고 죽어 마땅하다는 식의 감정을 이입해 도덕적 부채의식을 면제시키면서 폭력행사를 정당화했다”고 했다. 개인뿐 아니라 관련된 가족들, 지인들까지 빨갱이 취급을 한 것은 일종의 연좌제다. 이것은 국가보안법의 불고지죄를 행사한 것인데 여기서 ‘연’이 두 가지 의미라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연(連)-‘관련된 사람’과 연(緣)-‘혈연, 가족’을 의미한다. 아는 사람과 가족들 둘 다 적용한다는 말이다. 과장해서 말하면 “천륜을 파괴하면서 빨갱이 사냥을 한 것이다. 이것은 전체주의적인 논리”라면서 “MB정부의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제고사 거부 교사 파면을 보면 알고 있는 교사들까지도 공포감을 느끼게 하고, '아는 체 하면 피해를 볼 수 있다', '모른 체 해야 살아남는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고 덧붙였다. 정치적 반대세력은 무조건 ‘빨갱이’ - 여순사건 때부터 제주 4.3사건, 여순사건은 그 연좌제가 명백히 드러난 사건이다. 연루된 민간인들은 다 처벌당했으니 말이다. 김 교수는 “500명 좌익계열 무장빨치산 중에는 산에 올라간 사람과 가족, 실종된 사람과 그의 가족, 단독정부 반대한 사람까지 다 섞여 있었다. 서북청년단은 태극기를 파는 척하며 빨갱이 사냥을 했다. 태극기를 사라고 강요하면서 돈이 없어 못 사는 사람도, 돈이 있지만 안사는 사람도 빨갱이로 만들어버렸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안 하고 애국가를 안 불러도 빨갱이 취급을 했다. 70년대 박정희 시절 애국가 나오면 벌떡 일어났다. 안 일어나면 욕먹었다”면서 비이성적 빨갱이 사냥을 지적했다. 박찬길 검사사건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조만식(기독교 민족주의자)의 제자였던 박찬길 광주지검 검사는 사상적으로 좌익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양심적인 검사였다. 경찰이 ‘빨갱이’라고 잡아도 혐의가 없으면 풀어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경찰들이 좋게 볼 리 없다. 박찬길 검사는 여순사건 때 도망가지 않고 여수에서 숨어있었는데 이를 경찰이 반란군 협조 혐의를 씌워 그 자리에서 총살을 한 것이다. 검사를 재판에 회부하지 않고 경찰이 총살했다는 것은 당시 경찰의 권력을 말해준다. 법무부 당시 권승렬 장관이 경찰 처벌을 요구했으나 경찰반대에 부딪혀 결국 박 검사는 빨갱이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경찰들 위세가 커서 총살한 경찰을 용서한 이 사건은 사법부가 공안권력에 굴절당한 획기적 사건이다. 이후, 국가보안법 걸린 사람 풀어주면 빨갱이로 오해받을 수 있으니까 빨갱이 논리에 검사들이 공안권력에 겁을 냈다고 한다. '그 배후에는 김구가 있다'고 계속 이승만이 흘리고 나중에는 우파임에도 좌익의 배후로 몰려 49년 암살이 정당화 된다. 정치적 반대세력을 ‘빨갱이’로 모는 이분법이 여순사건부터 나타났다고 한다. 한국 빨갱이 사냥의 배경들 - 상처받은 영혼들의 몸부림. 김 교수는 문제의 배경을 남북한의 분단 상황으로 꼬집으면서도 분단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 이전에 정신적 스트레스다. “북한에 큰 책임이 있다. 북한 초기 사회주의 개혁과정을 무리하게 추진했다. 1945~6년 토지개혁 때 중립적인 사람들까지 친일로 몰고 자본가로 간주해 남한으로 쫓아냈다. 중도적 인사를 끌어안기보다 내치는 북한의 사회주의는 지금까지 남한에서 광기어린 반공반북에 대한 감정을 갖게 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사람은 동물이지만 식물적 존재라고 생각한다. 안정적인 것을 원한다. 식물적 존재인 인간을 삶의 터전에서 뽑아 다른 곳에 강제로 살게 했을 때 공포는 남쪽사람들까지도 전부 빨갱이”로 보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기독교인들로 기독교 근본주의와 통하면서 반공색채는 더 진해진다. 강한 친일콤플렉스 제일 결정적인 배경은 한국 우익들의 친일 콤플렉스였다. 해방 후 친일세력들(한민당)은 이승만 하에서 친일경력을 은폐하려했고 그를 위해서는 맹목적인 반공주의로 정치적 입장을 취해야했다는 것이다. 친일행적이 심할수록 극도로 반공주의가 되었다. 빨갱이 시비 벌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전쟁 때 민간인을 학살한 김창룡, 김종원 등이다. 이들은 일본헌병, 독립운동가를 잡으러 다녔던 비밀경찰출신이다. 가장 악질적인 친일파는 친일경력을 덮을 수 있는 것이 중요했다. 미국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도 마찬가지다. 피신할 곳 없는 친일자들의 은신처였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의 행태를 이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김 교수는 “조선일보를 이해하는 데 있어 우익반공주의만으로는 설명 안 된다. 조선일보는 일제 때 친일신문이라는 콤플렉스를 덮고 자기정당화하기 위해 이승만, 박정희 영웅만들기 기사를 계속 내보내는 것이다. 트라우마를 가진 자들과 행동이 유사하다”고 꼬집었다. 그럼 87년 민주화 이후 빨갱이 사냥은 무엇인가? 비판적 지식인, 운동권 출신들이 한나라당으로 들어가면서 자신의 변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김 교수는 또한 “한국에 자유주의자는 없다. 자유주의자가 없는 이유는 반공주의자들이 심각한 콤플렉스를 못 벗어났기 때문”이라면서, “이승만에게는 김구에 대한 콤플렉스, 박정희에게는 친일경력과 김일성에 대한 콤플렉스가 레드콤플렉스로 된 것이다. 레드콤플렉스는 분단 후 거시적으로 만들어졌다. 그것을 만드는 심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통일과 정상적인 국가로 가기 위해 극복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레드콤플렉스는 무의식적으로 정서에 깔려있다”고 했다. 한국의 반공주의는 상처받은 자유주의 정신적 상처가 심하면 공격적이 되고, 과도할 정도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고 한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한국 빨갱이 사냥의 논리다. 전향한 좌파나, 피해 입은 사람들이 극우적 행태를 더 보이는 것은 그만큼 상처가 깊다는 의미다. 김 교수는 마지막으로 “‘좌파’를 이야기하는 것은 한나라당내 입지를 높이고, 출세하기 위해 더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것이다. 특정인을 욕해야 내가 살고, 대세에 편승해야 자신의 안정을 보장받으려는 정치적 심리는 레드콤플렉스를 조장하는데 기여한다. 빨갱이 시비를 강하게 벌일수록 강한 콤플렉스를 의미한다.(친일, 군사정권, 비판적 지식인, 운동권, 애국과 관계없는 기회주의) 극복하지 않는 이상 한국 시민사회는 정상적인 발전은 어렵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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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5강] | 최성호 | 2010.4.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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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를 시작으로 마지막 왕인 27대 순종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 성군이라 칭하는 왕중에서 빠지지 않는 왕이 바로 22대 정조일 것 입니다. 그는 개혁군주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시대를 조선 최고의 부흥기로 만들 었지만 그의 죽음 이후 조선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조선의 전환기로 볼 수 있는데 혹자는 정조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만큼 그의 죽음 이후 조선이 급격히 쇠퇴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번 강의는 정조를 소재로해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MBC 드라마 `이산` 입니다. '이산' 왕의 이름을 함부로?
조선의 22대 왕 '정조'를 말하다. 드라마와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캐릭터일 것입니다. 드라마 '이산'도 마찬가지 입니다. 드라마에서 이산은 상당히 점잖고 근엄하며 말하는 것을 최대한 절제합니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멋있는 남자입니다. 이러한 캐릭터 설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왕에 대한 이미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실제 정조는 드라마 이산에서 보여준 이미지와 비슷할까요?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조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매력적인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공부를 잘했으며 글쓰는 것을 좋아해서 저작도 많이 남겼죠. 26대 왕인 고종도 저작은 많지만 의 경우 자신이 직접 쓴 글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조의 경우는 다릅니다. 저작 대부분이 자신이 쓴 글이며 자신이 쓴 글과 남이 쓴글을 구분했다고 합니다. 대필을 시키면 반드시 대필의 흔적을 남기게 했다고 합니다. 즉 자신의 글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고 능력이 탁월했다는 증거입니다. 정조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도 많은데요. 정조의 제자들은 19세기에 위대한 학자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정약용과 서유구 등이 있습니다. 드라마에서는 정약용이 정조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데 실제로는 그 반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드라마 '이산'의 모습이 실제 정조의 모습일까? 최근까지 정조는 왕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사료에서 너무 근엄하게 번역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얼마전 발견된 299통의 비밀편지를 통해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정조는 저작도 많고 말도 많은 왕이었습니다. 성격은 다혈질이었고 자신 스스로 태양증이라고 말하고 다녔을 정도라고 합니다. 왕임에도 불구하고 우스갯소리를 자주 했으며 속된 표현도 거침없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문제로 신하가 상소까지 올렸다고 하니 짐작할 만하지 않습니까?
드라마에서의 연애. 그리고 그의 관심사 드라마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사랑이야기 입니다. 이산에서도 정조가 '송연'이라는 인물과 연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허구입니다. 사극에서의 연애는 대부분 허구인 경우가 많은데요. 대부분의 왕은 많은 여성과 관계를 맺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가상인물을 만들어 드라마의 소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정조의 경우에는 이러한 가정도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정조는 여자와 사치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여자 관계도 복잡하지 않다고 하는데요. 세종대왕의 경우 자식들이 수십명에 이르지만 정조의 아들은 한 명뿐 입니다. 또한 음식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조는 오직 학문에 관심이 있었으며 관심이 생기는 분야가 생기면 그 주제에 파고드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다른 어떠한 왕보다 자료가 많고 모든 자료들이 상당히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희소성의 원칙에 의해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 상황임에도 정조의 그의 필체도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암살과 독살, 그리고 정순황후. 드라마에서 약 10번정도의 암살시도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과장 된 측면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경우 암살의 문화는 아니라고 합니다. 소현세자의 경우는 예외라고 할 수 있지만 사약을 받을 때도 왕에게 절을하고 예를 갖춘다고 합니다. 송시열의 경우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강했기에 사약을 한사발 먹고도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사발 더 먹고 죽었다고 합니다. 임금이 죽으라고하는데 안죽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충을 중하게 여기는 시대에 그렇게 많은 암살시도는 불가능이라는 것입니다. 드라마 후반부에 역적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정조의 할마니인 정순황후를 골방에 가두고 포박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러한 경우는 불가능 하다고 합니다. 조선시대는 충과 효를 중히여기는데 그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효라고 합니다. 국왕이 효를 부정하면 그 근본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연산군과 광해군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손자가 할머니를 포박하는 일은 드라마에서의 설정일 뿐이라고 합니다. 정조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니라 독살이라는 설이 많습니다. 299통의 비밀편지를 통해 그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 된 감이 있지만 이에 대한 질문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사료와 정조의 나이, 그리고 그가 오랜시간 동안 병을 앓고 있었다는 상황을 고려할 때 독살에 대한 주장은 설득력을 잃을 수 밖에 없다고 교수님께서는 답변해주셨습니다. 드라마 '이산'에 대한 교수님의 평. 드라마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은 정조와 그 시대를 흥미롭게 잘 포착하여 만든 드라마라고 하셨습니다. 소품도 비교적 잘 구현했고 특히나 주인공과 여주인공의 인물이 괜찮았다고(^.^). 다만 정확하게 고증이 안된 부분은 아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부분이지만 '이산'의 경우 조선시대의 책은 두껍고 무겁기 때문에 일본, 중국과 달리 5개의 줄로 책을 엮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6개로 엮은 모습을 포착하시고 스트레스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강의를 듣는 분들 대부분이 그러한 것 까지 하나 하나 살피시는 모습이 놀랍다는 반응이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드라마 이산이 사극 장르를 표방하여 역사를 잘 활용했으며 상상력 발달 차원에서 큰 도움을 주는 드라마라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역사가는 사실을 근거로해서 정확히 저술하는 것이지만 드라마의 연출자는 그러한 의무는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씀과 함께 드라마와 소설이 역사적 사실에 치중하다보면 그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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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주인이 되는 돈의 인문학 | 삶의 주인이 되는 돈의 인문학[5강] | 오드리 | 2010.4.10 | |||
무엇이 삶의 가치를 드높이는가? 강의자/ 김찬호(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1.반성과 성찰을 위한 돈의 인문학 우선 강의의 시작은 현재의 우리를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김교수는 '인간은 이성적이기 보다는 습관에 지배를 받는 동물'이라고 진단하였습니다. 매사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 같아도 실제로 우리를 끈질기게 움직이는 힘은 습관에서 비롯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정관념과 연결됩니다. 경험하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 TV, 휴대폰, 인터넷등이 처음 개발되었을때 그것들의 실용적 가치에 대한 주위의 비판적인 시선 등을 예로 들었습니다. 또한 김교수는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안에서 우리가 경험해야 했던 비현실적인 여러 상황이나, 이미지 노출의 폭발적 증가로 겪는 과잉 감성을 경험하게 되면서 결국 스스로 자아를 설정하고 삶의 방식을 상상하는 것은 옛날의 개인보다 부족한 면이 많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정보의 폭증과 급속한 사회 변화는 결국 개인의 상상력을 위축시켰으며 이는 사회와 시스템에 대해 맹목적 신용이 팽배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김교수는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의 삶의 태도를 성찰하는 것이 인문학이라면 돈은 어디쯤에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이번 강의를 통해 가늠해볼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2. 돈, 지구에 온 목적이 뭐냐? 여기에서 김교수는 돈의 정체를 알기 위한 몇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돈은 물질이 아닙니다. 돈은 숫자이며 기호입니다. 그래서 둘을 같은 등식에 올려놓는 오류를 범하기 쉽지만 "돈을 좋아하는 것을 물신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고 김교수는 지적합니다. 돈을 가진 사람과 그만한 가격의 물건을 가진 사람 중에 누가 더 힘이 셀까요? 물론 품귀현상이나 사재기가 벌어진다면 다르겠지만. 현재로서는 "물건의 공급과잉상태를 고려할 때 돈을 가진 사람이 권력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도 살펴보았습니다. 돈 때문에 행복해지는 경우가 있고 돈 때문에 불행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돈을 쓰고도 기분 좋은 상황이 있고 돈을 얻고도 기분 나쁜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근본적으로 우리는 왜 돈을 추구할까요? 프로이드는 돈을 <불멸에 대한 환상>이라고 정의내렸다고 합니다. 사람의 미모, 건강,권력 등은 모두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돈이라는 것은 휴지조각이 되지 않는 이상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지요. 그래서 흔히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는 든든한 장치로서 돈에서 만족감을 산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3. 주변에 속지 않고 진짜 원하는 것 찾기 "알콜 의존증 환자는 술이 있으면 행복하겠지만, 그들의 행복도를 재는 데 있어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술의 양을 척도로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클라이브 해밀턴 <성장 페티시> 김교수는 우리의 욕망이 진정 자신이 원하던 욕망인지 확실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기 마음을 탐구하는 것, 자기의 존재가능성, 잠재력 등을 계속 새롭게 밝혀내는 작업이 필요할 것입니다. 남들이 갖고 있기 때문에, 혹은 흔히 가질 수 없는 것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원하기 때문에 나도 원한다는 식의 마음가짐이 현대의 마케팅 기법과 얽혀 현대인의 욕망에 들러붙어있습니다. 또한 욕망 뿐 아니라 혐오감 역시 타인에게 종속되어 있다고 합니다. 흔히 손꼽는 장애인시설, 소각장, 정신병원, 화장장 심지어 최근의 노인병원까지 주민들이 설립을 반대합니다. 큰 이유는 본인이 싫기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이사올 사람들이 싫어해 땅값이 떨어질 것 같아서인 경우가 많다고 김교수는 설명했습니다. 나 자신의 욕망과 혐오감이 타인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또한 돈에 대한 갈망 역시 외부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돈은 잘 버는데 '무능한(삶의 가치를 높이는 능력이 낮은)'사람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주어진 삶과 공간을 아끼고 가꾸는 소박한 정신이 진정으로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 될 것입니다. 4. 관계와 유대를 향하여 현재 대규모의 시장은 모든 것의 가치가 가격으로 익명화, 추상화 되어 보편적인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으로 교환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합니다. 이는 잠재적 가치가 발현되는 구체적인 상호작용의 다양한 맥락을 은폐합니다. 정보사회에서 유형의 자산보다 귀중한 것은 정보를 나누면서 함께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관계라고 김교수는 역설하였습니다. 개인이 무엇을 소유하느냐 보다 어떻게 신뢰관계를 맺고 지내느냐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공동의 경험 자원을 공유하여 함께 공명할 수 있는 모형은 모두가 참여하고 공유하며 가치를 이끌어내고 향상시키는 촉매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교수는 우리시대의 청년실업이 큰 문제가 되는 이유는 단순히 돈을 못벌어서가 아니라 인간관계 안에서 공적인 자아를 경험할 기회를 가질수 없게 되는 점이라고 발언하였습니다. 세대의 경계를 넘어 서로 배우면서 성장하는 공간이 구축된다면 '지혜의 클러스터-시장을 통하지 않고서 사회에 접속할 수 있는 회로'로서 작용할 수 있는 가교가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김교수는 이번 강좌를 통해 돈 자체의 증식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자신 스스로의 가치를 증식시킬 수 있는 관심의 공동체를 만들어 볼 것을 강조했습니다. 나의 자산은 바로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란 이야기입니다. 돌봄을 강조하는 구체적인 사회관계가 미약한 우리사회에서는 개인이 시장이라는 개체를 통해 자기를 방어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김교수는 가족, 친구, 선후배, 동호회, 이웃 등 모두가 살아가는 힘을 북돋우며 가치를 만드는 공간을 경청과 응시, 우정과 환대, 돌봄과 소통 등의 방법을 통해 빚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김교수는 마지막으로 외국의 한 서점에 붙어있는 글귀를 소개하였습니다. 5. 정리 <돈의 인문학> 강좌가 5강을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매주 화요일, 안락의 유혹을 가열차게 뿌리치고 총총히 강의에 참가하셨던 모든 분들께 일말의 동지애를 느끼며 마지막 후기를 썼습니다. 그동안 원활한 강의를 위해 애써주신 간사님과 강의 해주신 모든 강사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처음 해보는 자원활동에 매우 즐겁게 참여했었고 그만큼 부족한 점도 많았네요. 같이 강의들은 분들과 다음 좋은 강의때도 또 얼굴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들 건강하게 잘 지내시고 따뜻한 봄기운 많이 받고 힘내시길 바래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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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 삶을 사랑하는 지혜 | 철학, 삶을 사랑하는 지혜[1-3강] | 느티나무 | 2010.4.10 | |||
이 글은 느티나무 자원활동가 박현아님이 보내주신 후기 입니다. 인생에서 철학이 절실했던 순간 내 나이 어느덧 30대 후반. 인생의 절반을 살아내면서 죽음의 공포를 지독하게 느껴 본적이 몇 번이나 있었나. 가까운 이가 공황장애를 겪는 걸 곁에서 그냥 지켜봐야 했을 때조차, 그 사람이 죽음의 공포를 온몸으로 표현해 내는 걸 목격했을 때조차도 난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여자의 몸으로 새 생명을 둘이나 세상에 내보낼 때도 그 아이들의 탄생에서 이미 그것의 일부일 수밖에 없는 죽음을 쉽게 읽어내지 못했다. 무순처럼 아이들이 자라고 평온한 일상들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 즈음이었다, 내가 죽음을 공포로 겪어낸 것은. 잠든 아이들의 얼굴에서 형언할 수 없는 충만함을 느꼈던 그 때, 아 이 순간이 바로 찰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 되어 계속 흘러만 가고 있다는 생각, 죽고 나면 다시는 아이들과 아주 사소한 일조차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들이 실체가 되어 죽음이라는 형상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그건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오로지 혼자서 감당해내야만 하는 무척이나 외롭고도 섬뜩한 공포였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을 때도 그래서 힘들었다. 급기야 <더 로드>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는 잠든 아이들 곁에 누워 그들이 내뱉는 숨소리에서 한참이나 위로를 받아야 했다. 어디선가 읽었던 글귀도 스쳐갔다. 인간이 이루어내는 모든 것들은 결국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의 결과라는 말. 그렇게 죽음과 친해지고 나니 죽음이 도처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죽음은 내가 좋아하는 색조차 생명력을 상징하는 초록으로 바꾸어 놓았다. 철학이 절실히 필요해지는 순간이었다. 원죄와도 같은 죽음의 공포...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삶과 죽음과 인생과 인간에 대해 열심히 생각하는 길 밖에는 없을 터였다. 나는 그렇게 철학 책을 샀다.
▲ 철학아카데미 조광제 원장 1강 제목이 심상치 않다. 내 속을 들킨 것만 같아 교안에 얼굴을 온통 파묻고 읽었다. 철학의 임무는 삶을 긍정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내용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이거다! 빙고! 삶을 긍정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이 어떻게 그렇게 만드는지 근거를 밝히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작동하지 못하도록 뿌리에서부터 잘라내는 일에 행동으로 동 참하도록 하는 것, 더 나아가 왜 우리는 그런 일에 함께 동참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이유 를 밝히는 것, 이것이 철학이다! 진실로 명쾌한 정의가 아닐 수 없다. 바로 내가 애타게 철학을 찾았던 이유들이다. 결국 내가 극복해내야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이 주는 공포였다. 죽음의 공포는 때론 신의 모습으로 때론 국가나 자본의 모습으로 그 형태를 바꾼다. 그 공포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돈에 집착하고 소유에 집착하고 경쟁에 집착한다. 국가보안법의 존재는 죽음과 똑같은 메카니즘으로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으며 삶을 긍정하는 데 바탕을 이루는 인간의 상상력을 근본에서부터 닫아버린다. 결국 민주화의 과정이란, 사람들의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각종 두려움들을 위반하게 만들고 그런 경험을 통해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새로운 경지를 열어나가는 과정이다. 철학은 이렇게 길을 잃은 나에게 다른 길을 열어준다. 2강 사물과 감각속으로 그렇게 삶을 향유할 수 있는 방법에도 종류는 있다. 배타적인 향유와 공유적 향유이다. 이런 논의를 위해 강의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개념어들이 많이도 등장했다. 사유와 감각, 실체와 속성, 현상학, 감각덩어리, 외연과 본질, 감각이라는 수렴, 운동이라는 확산 등등.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삶을 긍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들을 찾아내고 그 공포들이 억눌러 왔던 나의 상상력을 다시 부활시켜 인생을 향유하도록 하고 그 방향은 공유적 항유라는 올바른 길이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여기까지 철학이 나를 이끌었다. 3강 언어와 개념을 거쳐 그렇다면 수렴이라는 과정을 통해 내가 받아들인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확산시켜 타인과 공유하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 이러한 흐름에서, 공유적 향유를 위한 도구로 언어가 등장한다. 나의 삶을 다른 이들의 삶과 튼실히 맺어주기 위한 씨실과 날실로서의 언어이다. 또 다시 이를 위해 강의에서는 한 차례 어려운 개념어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차이와 지속, 존립과 존재, 외부와 내부, 차이와 지속의 통일체로서의 생성, 동일성에 의존하는 지속성, 변화 없이 설명할 수 없는 차이, 동일성의 반복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본질의 반복과 그 두 개념어 사이의 차이 등등. 반복되는 것들을 일일이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언어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반복들을 잡아채기 위한 것들이다. 그렇게 우리는 언어를 이용하여 반복되는 것들을 파악하고 그것들을 이용하여 삶을 더욱 심화, 확대시킨다. 하지만 언어는 반복에만 치중한 나머지 차이는 잡아내지 못한다. 아름다운 여러 사물들을 보고 ‘아름답다’라고 코드화시켜 얘기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때 ‘아름답다’는 코드는 아름다움 그 자체가 아니다. 결국 생성이라는 것은 차이와 지속의 통일체인데 그 중에서 우리는 차이를 잃어버리고 있는 셈이다. 즉, 언어가 지속성을 중심으로 생성에 접근한다면 차이에 중점을 두고 생성에 접근할 무언가가 필요하게 된다. 그게 바로 인간의 감각활동이다. 차이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무력하기만한 언어의 그 빈 공간을 메우는 것이 바로 감각이다.
▲ 철학아카데미 조광제 원장 언어는 “나의 삶을 어떻게 공유적 향유로 메울 것인가”에 대한 답에서 출발했다. 결국 나와 타인이 사용하는 소통의 도구로서 언어가 등장했던 것인데, 우리는 흔히 소통에 감각이나 감정이 끼어들면 제대로 소통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오로지 이성적인 논리에 입각해서만 진정한 소통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소통은 자신의 감각을 오롯이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공동체적 가치를 논하는 차원에서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개념에 의거한 언어적인 소통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합리적 소통이 진정 이루고자 하는 바는 ‘공동체적인 감각의 삶을 더욱 확대시키고 심화’시키는데 있다는 사실 또한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공유적 향유를 위해 필요한 타인과의 소통에서 이성만이 그 주인공이 아님을 철학을 통해 깨닫는다. 철학으로 꿰뚫는 삶 죽음의 공포에서 향유를 위한 삶을 이끌어 내고, 참된 향유란 타인과의 소통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철학적 로드맵! 그 사고의 흐름이 지닌 매끄러움에 다시 한 번 감탄한다. 이 모든 것이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조광제’라는 철학자(현상학자) 덕분이다. 하지만 아직 내가 가야할, 철학과 동행해야하는 길은 끝나지 않았다. 강의 내용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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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 콤플렉스와 역사.. | 별빛소리 | 2010.4.8 | |||
민주주의 학교 강의를 들은 후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해 봤습니다. 복습도 열심히 하려구요..^^ 콤플렉스란 무엇인가? 검색해 보니 '잠재된 감정의 복합체' 라고 한다. 어떤 객관적인 사실, 대상에 대하여 나만의 해석하는 감정의 덧씌움이 아닐까? '이것이 나의 콤플렉스야' 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밝혀버린다면 비이성적인 사유습관을 만들지 않을텐데, 부끄러운 모습에 대하여 혹은 상처받은 모습에 대하여 감추려 하기 때문에 콤플렉스는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의 동기가 된다. 그러나 콤플렉스가 반드시 나쁜 방향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좋은 방향으로 풍부한 이해력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작가 김원일처럼.. 오늘을 만든 역사는 어디에서부터 기인된 걸까? 조선후기의 정치, 남북분단을 만든 상황까지는 일단 생각하지 않겠다. 남한만의 역사를 생각할 때 그것은 과거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시대적 과업을 외면한 역사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청산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권력자들(기회주의자가 대부분일 것으로 생각)은 자신의 과거를 잊기 위해, 묻어버리기 위해 새롭게 부여잡은 기회에 대하여 병적으로 집착한다. 자신의 부끄러웠던 과거를 하얗게 지우기 위하여 어떤 대상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과민반응들을 하는 것이다. 그들의 콤플렉스는 일개 개인의 삶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역사를 바꾸고, 무고한 많은 사람들을 핍박하는 내적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우리가 이들의 콤플렉스를 받아줘야 하는가? 어떤 특수집단의 사회적 생존(성공)을 위해 상식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을 계속 사회에서 몰아내야 하는 것인가? 해방된 지 65년이 지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일제청산은 단지 구시대의 과업에 불과한 것인가? 반민특위의 아쉬운 미결문제일 뿐인가? 언제적 문제인데 아직까지 그걸 걸고 넘어지나? 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용서란 용서해야 할 대상이 분명히 드러날 때 가능한 거다. 우리역사는 한번도 그들을 제대로 단두대에 세운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들의 능력을 활용한다는 속셈으로 새 시대의 옷을 입혀 주었고 새 시대의 선봉인양 행세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용서는 훌륭한 덕목이고, 잘못을 끄집어 내어 단죄하는 일은 그리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냥 용서하고 말지.. 그러나 용서를 빈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잘못된 권위에 부당하게 짓눌렸고, 여전히 새롭게 짓눌리는 사람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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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살아나는 과거, 대한민국의 역주행 | 되살아나는 과거 대한민국의 역주행 4강 | 방준호 | 2010.4.7 | |||
3월 8일부터 김동춘
선생님의 <되살아나는 과거, 대한민국의 역주행>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되살아나는 과거, 대한민국의 역주행 4강 천안호가 침몰했다. 젊은이들이 죽었다. 또다. 서해서 군인이 죽어나갔다. 누가 그들을 죽였나? 속 시원히 대답할 수 없다. 돌아보니 항상 그랬다. 차라리 북한이 그랬다면 속이라도 시원 하겠다. 욕지기 하고, 배상해 내라고 맘껏 따져라도 보겠다. 헌데 그럴 수 없는 상황, 들끓던 여론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지고 책임소재는 흐지부지 되고 마는 일이 아마 이번에도 반복될 거다. 김동춘 선생은 이번 강의에서 ‘금새 잊혀지고 피해자들만의 외로운 싸움이 되버리는’ ‘공정하게 가해자를 가리지 않은 탓에 반성과 사과 없이 뭉개져버린’ 지난 일들을 끄집어냈다. 누가 삼성 중공업을 용서했지? 태안이 그렇다. 닦아도, 닦아도 끝내 남는 기름티에 수백만이 한숨 짓고, 눈물 흘렸던 게 고작 3년 전이다. 근데 벌써 기억이 가물 하다. 우리가 잊고 있는 지금도 태안의 외로운 고통은 진행 중이다. 한 마을서 평균치를 훨씬 웃도는 암 발병 있었다. 보상위원장을 포함해 4명이 자살했다. 주민들은 3조원대 피해규모 말한다. 하지만 손에 쥔 보상금은 아직 없다. 더 큰 문제는 가해자로 지목되는 삼성이다. 삼성중공업은 법원에 50억원의 책임제한을 신청했다. 법원은 끝내 삼성 편들었다. 무책임한 공권력, 끔찍한 거리의 정의 관동대지진, 일제 강제징용자, 제주 4.3, 전쟁기 피학살자, 4.19, 7-80년대 각종 고문조작, 군의문사 사건의 피해자들, 용산 참사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약자들이 무책임한 강자의 횡포에 목숨 잃었다. 언론, 대기업, 때로는 공권력 그 자체에 의해서였다. 절절한 피해자의 역사에 비해, 사과와 화해의 기억은 거의 없다. ‘이미 지난 일’ 이라며 모르쇠로 일관이다. 잘잘못 가리고 원한을 삭혀 주어야 할 국가도 비슷한 말을 한다. 누구도 당신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불신으로 가득 찬 개인의 선택은? 스스로 복수에 나서는 것이다. ‘호미부대’, ‘창녕사건’, ‘사북탄광사건’이 이런 맥락이다. 누군가 피해를 당하고, 그 피해자가 가해자로 돌변하는 악순환! 참담한 일이다. 다시, 지금 우리를 생각하다 책임을 가려야 한다. 책임져야 한다. 이미 늦어버렸다고? 선조들이 저지른 짓에 책임지는 건 억울하다고? 이렇게 말하는 일본 전후세대에게 테츠야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일본 시민권을 가진다는 것은 일본국민으로서 혜택을 누린다는 의미다. 과거의 잘못으로 얻은 것들을 포괄적으로 나눠 받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책임져야 한다.” 같은 말을 우리 스스로에게도 던져봐야 할 때다. 그래설까. 2부에선 태안, 광주와 제주 그리고 또 수많은 피해자를 잊었던 것에 대한 반성이 먼저 오갔다. 그래서 시민단체와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단 이야기도 나왔다. 잊혀지는 역사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끊임없이 현재화하는 것의 중요성을 모두, 새삼 깨달았다. 김동춘 선생은 아이디어로 <7,80년대 부역했던 검사 사전 만들기>, <각 의원의 법안 별 찬/반 투표 내역, 표로 만들어 배부하기>등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차곡차곡 쌓인 원한들 위에 지어진 사회. 그럼에도 불구, 나만큼은 피해자가 아니라 생각 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대면 손해라는 생각에 고개부터 숙인다면, 누구도 믿지 말란 말에 공감한다면, 억울하면 출세하란 말을 버릇처럼 되뇌인다면 그건 이미 불신과 공포 속에 살고 있단 증거다. 모두 피해자인 우리는 때문에 더 큰 목소리로 가해자를 찾아야 한다. 사과 받고 맺힌 응어리 풀어 봅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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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을 보다 | 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을 보다[4강] | bossablues | 2010.4.7 | |||
<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을 보다> 4강 후기입니다.강의 시간에 다루신 주제와 조금 다른 접근을 해봤습니다. 어디까지나 사견이니 강의 내용과 혼동 없으시길 바랍니다. - 자원활동가 한광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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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을 보다 | "왜?"냐고 묻는다면 | bossablues | 2010.4.7 | |||
<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을 보다> 3강
후기입니다.강의 시간에 다루신 주제와 조금 다른 접근을 해봤습니다. 어디까지나 사견이니 강의 내용과 혼동 없으시길 바랍니다.
- 자원활동가 한광희 3월 중순까지 눈이 내렸다. 벌써 봄꽃들이 만발했을 만도 한데, 이제야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아직도 쌀쌀했다가 따뜻하길 반복해서 겨울외투는 오늘도 옷장을 들락날락하고 있다. 이 와중에 태평양 어디 즈음에 있는 섬나라 투발루는 이미 수도가 물에 잠겼고 유적도 남기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수장되는 중이라고 한다. 이유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이란다. 극명한 대조다. 이미 투발루는 콜라병에 새겨진 북극곰과 함께 ‘뜨거운 지구’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다분히 감정적인 이미지는 상식의 차원을 넘어 정치적 구호를 생산한다. 교토를 지나 코펜하겐까지 기후협약은 무시할 수 없는 세기의 화두가 되었다. 엄춘설한에 지구온난화가 왠 말인가? 무슨 근거로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주장은 유엔 산하 기후변화 연구기구인 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에 의해 꾸준히 제기되고 담론화되었다. IPCC와 엘 고어에게 노벨상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2007년 보고서(4차)는 지난 100년(1906∼2005년)간 전 지구 평균온도는 0.74도 상승했고 북극의 바닷물이 얼어붙는 해빙(海氷)범위는 1978년 이후 10년에 2.7%씩 감소했으며 지구 평균해수면은 1993년 이후 연간 3.1㎜씩 상승했다고 밝힌다. 이들은 해수 온도측정이나 위성 관측 등 객관적인 방법을 동원한 것이므로 신뢰할 수 있다고 한다. IPCC가 내세우는 객관적인 자료는 통계다. 숫자와 그래프가 온도상승폭을 보여주거나 예측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나비효과처럼 난데 없이 타격을 입은 태평양 도서국가의 현실, 녹아내리는 빙하, 천재지변을 겪고 있는 제3국가들이 오버랩된다. 놀랍게도 서로다른 시각적 지표들은 서로 얽혀 강력한 인도적 동참을 요구하고 동원시키는 정치적 구호가 된다. 물론 과학은 숫자들을 나열하고 묵시록적인 미래를 예측하는데 총력을 쏟는다. 온난화가 과장된 미래예측이라 폄하하는 입장에서도(브외른 롬보그Bjorn Lomborg로 대표되는 회의주의자들) 역시 똑같은 측정과 숫자 놀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순간 숫자가 난무하는 보고서는 경전이 된다. 말하자면 기후변화 훈고학의 탄생이다. 지구온도 측정들을 위해 어떤 최신 기술들이 동원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론은 50여년 전에 나온 로마클럽보고서의 양식을 그대로 Ctrl+V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할 정도다. 말이 나온 김에 강의시간엔 다뤄지지 않았던 IPCC의 뒷얘기를 해볼까 한다. 지난해 코펜하겐에서 개최된 기후변화회의는 세계정상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킬만한 스케일이었다. 해당 회의는 IPCC의 ‘과학적인’ 보고서에 기초해 열린 셈이다. 문제는 과학적인! IPCC 보고서에서 심심치 않게 오류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가장 큰 사례는 빙하게이트(Glacier Gate)다. IPCC는 2007년 발표한 제4차 보고서에서 “2035이면 히말라야 빙하가 녹아 없어질 것”이라고 적었다. ‘히말라야빙하 소멸설’이다. 결론은 IPCC가 해당 안건이 과학적 근거가 없는 헛소리였음을 인정하면서 일단락 됐다.(자세한 내용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00125131416&Section=05&page=1) 물론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IPCC외부에서 나온 것이다. IPCC는 내부적인 검토를 거쳤다면 분명히 발견했을만한 불명확한 부분을 알면서도 보고서에 실었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위원장인 라젠드라 파차우리가 연구비 충당을 위해 허위내용을 보고서에 실었다고 주장한다.(http://www.timesonline.co.uk/tol/news/environment /article6999975.ece) 문제는 파차우리 개인의 영욕이 아니다. 어째서 내부 과학자들 역시 동조했느냐는 점이다. 설상가상으로 세계적 기후변화연구소인 영국 이스트앵글리아대 기후연구센터의 서버가 해킹돼 이메일 1000여 통과 문건 3000여 건 등이 유출됐다. 이 연구소가 1996년부터 13년 동안 진행한 기후변화 연구 결과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메일과 문건 내용 일부가 인터넷 사이트와 언론보도를 통해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이 센터 소속 과학자들이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이 급박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특정 연구 결과를 공개하지 않았거나 연구 과정에서 데이터를 조작했다는 의심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또 지구 온난화가 시급한 과제가 아니라는 학자들의 논문이 주요 학술지에 공개되지 않도록 분위기를 조성한 흔적도 나타났다. 주요 언론들은 이 사건에 워터게이트 사건을 본떠 ‘기후게이트(climate gate)’라는 이름을 붙였다.(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 artid=200912171056521) 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라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들은 순수한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학적 사실이 100% 무의미한 조작물이라고 단정 짓는 것이 대안은 아니다. 우리의 사고를 조금만 바꿔서 과학과 정치 또는 사회와의 경계를 조금만 흐리게 하는 건 어떨까? 과학이 불확실한 만큼 사회도 불확실하다. 남녀탐구생활이란 프로그램이 생각날 정도로 우리는 과학을 몰라요. 과학도 우리를 몰라요. 결론은 냉소적 과학비판일 뿐이다. 때때로 냉소주의는 무시를 넘어 험악한 음모론으로 흐르기까지 한다. 실제 IPCC 보고서에서 드러난 과장된 오류는 보다 작은 과학적 검증을 거친 명백한 위험들까지 초록에 동색을 입히고 있다. 생태적 회의주의자 또는 반과학주의자들은 온난화는 뻥이라는 주장을 불확실한 상상적 서사로 완성할 뿐이다. 씁쓸하지만 공평하게 매우 대칭적인 구도다. IPCC와 관련된 크고 작은 잡음과 관계없이 국제정치적 장(場)에서 온실가스감축은 최대 이슈가 되고 있다. 냉전시대 이후로 이런 지구적 동맹이 있었을까 싶다. 그리고 공공의 적으로 온실가스를 지명한다. 대다수의 국가들은 아이러닉하게도 썩어도 준치라고 시장 패러다임을 선수로 내세운다. 바로 탄소배출권거래제(Emission Trade, Cap and Trade)다. 간단히 설명하면 국가, 기업, 개인의 수준에 탄소배출허용량(CERs)을 설정하고 잉여량에 대해 거래를 인정하자는 제도다. 시장논리에 따라 배출량이 조절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미 유럽에선 국가 간 배출권 거래제가 시행중이고 대다수 1세계 국가들은 탄소시장도입에 긍정적인 반응이다. 대한민국 정부 역시 2011년부터 시행예정이다. 아무래도 탄소배출권거래제가 다양한 온실가스 중 탄소에 한정하다보니 원자력도 녹색에너지가 되는 모양새다. 우선 탄소배출량을 추산하는 회계과정을 거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단순 생산만 집계하거나 모든 생산물과 생활양식에 기준 탄소배출량을 부과하는 식의 집계방식의 논의가 있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든 우리의 삶에 숫자하나가 늘어나는 것은 자명하다. 기후문제는 국내 기후와 요원하다는 애초 생각과는 달리 평행선을 그으며 진행 중이다. 기후변화 없이도 기후가 삶에 영향을 끼치는 거대담론이 되는 과정이다. 이 지점에서 기후변화는 지식의 정치와 맞닿는다. 홀몸으로 거대담론과 상대하기란 매우 벅찬 일이다. 우선 지식이 된 담론은 인식의 지평에 서서히 스며든다. 따라서 문제를 제기하기 힘든 일상적 상황으로 몰고 간다. 마치 안개 낀 새벽녘에 길을 걷는 것처럼 경험적인 감각에 의지해야 한다. 물론 선험적인 지식에 반기를 드는 건 우연에 의한 것일 수도, 외부적 계몽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다시 지식은 형성될 것이고 또 다른 담론이 시작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지식의 연쇄과정에서 개인의 선택은 되묻는 것이다. 이번 강의에서 다룬 화석연료와 핵발전에서 대체에너지로의 전환은 위와 같은 탄소배출량과 탄소시장의 담론지형에 배치 될 수도 있다. 한편, 1점 전력생산 방식에서 다점 생산방식으로 전환과 같은 논의는 에너지 공동체라는 새로운 형태의 교환형식을 만들 운동의 가능성도 있다. 모든 것의 시작은 지식이 형성되고 유포되는 시점에 던진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질문의 층위는 정치가 작동하는 모든 부분이다. 과학적 결과물에 대한 성찰과 정치적 구호와 실천에 대한 성찰은 다소 불편하지만 불확실한 것에 대처하며 살아가는 현명한 방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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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주인이 되는 돈의 인문학 | 불안의 노예에서 돈의 주인되기 | 오드리 | 2010.4.6 | |||
3월 31일 저녁, <삶의 주인이 되는 돈의 인문학> 제 4강이 열렸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제윤경 대표님께서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다양한 실제 사례를 통해 우리가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재무설계에 대한 상식을 차분히 설명해주셨습니다. 또한 지속적으로 청중의 반응을 살피며 강의의 흐름을 조절하고 농담을 곁들여 흥미롭게 말씀하는 제대표님의 방식덕분에 돈맹에 가까운 저도 큰 어려움 없이 내용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경제 연구소에서는 지난 10년간 물가상승률 보다 임금상승률이 두배이상 올랐다고 발표하였다고 합니다. 자산시장에 가격결졍 매커니즘과 상품시장의 가격결정 매커니즘이 다르고 저개발국가의 생산력 증대로 인해서 글로벌 경제에 생산력 과잉공급상태이으로 노후에 대한 걱정이 지나치게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제강사는 설명합니다. 미래의 물가상승까지 반영해서 9억이니 10억이니 따질 이유가 없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나이가 들고 자녀가 다 커서 독립하는 시기 즉, 자녀에게 큰 돈 들일이 없는 시기가 되면 그때에는 큰 욕심을 버리고 작고 소소한 일이라도 의미있는 일을 찾아서 자신의 꿈에 한걸음 다가가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삶의 주인이 되는 돈의 인문학] 1강 김찬호 선생님 강의 후기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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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 소현세자는 누가 죽였나? | 최성호 | 2010.4.4 | |||
들어가며
▲ 한명기 교수 소현세자는 누구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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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을 보다 | 민주주의 관점에서 바라본 핵발전과 핵폐기물 정책 | ednhunt | 2010.4.1 | |||
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을 보다 2강 예술가란 어떤 존재일까요? 안일하고 지적인 사고를 하는 일에 게으른 인류가 다른 질문과는 달리 이 질문에는 말할 수 없이 끈질긴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그런 건 하늘이 내려준 재능이야!> 어떤 예술가에게 감명을 받은 착실한 사람들은 이렇게 겸허하게 말합니다. 이들의 선량한 견해에 따르면 명랑하고 고상한 감명을 주려면 그 원천인 예술가도 틀림없이 명랑하고 고상할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그리하여 예술가의 이러한 재능이 극히 사악한, 극히 미심쩍은 <재능>일 수도 있다고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위의 인용문은 토마스 만의 중편소설 <토니오 크뢰거>에서 주인공(토니오 크뢰거)이 ‘리자베타’에게 ‘예술가’에 대한 환상을 깨주는 구절 중 하나이다. 나는 이렇게 교육받았다.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지금의 대학원생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한낱 사회학도의 길을 비스듬히 걷는 이 도중(道中)에 이르기까지도, 과학에 대한 일종의 진보적 미래지향적인 낭만성에, 마치 인용문에 표현된 듯한 예술적 재능인 것인 양. 그렇게 존중과 경의와 신뢰와 믿음으로 내 주변 생활세계를 구축해왔었다.
▲ 이영희 교수 핵 폐기물, 시민들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사회적으로 논란과 갈등이 큰 국가전력정책의 결정은 우리의 선량한 믿음으로 지금까지 이뤄져 왔었다. 이것이 일종의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을 만들어냈다. 핵폐기물 관리는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일종의 폐쇄적인 전문가주의를 양산해 내었고 국가 정책의 위험 평가 및 관리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2017년 한국 국토에 핵발전소 총수는 28기에 달하게 되는 고도의 풍요사회 속에서 핵폐기물의 양 또한 점점 증가할 것은 자명하다. 현재 경주 월성원전 인근 지역은 이에 대한 준비가 한창이다. 문제는 이러한 물질에 대한 안전을 그 누가 호언장담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전문가들은 적절한 데이터 기준수치를 들고 와서 지역 주민들에게 안전성에 대해 설득하지만 정작 피해를 입는 사람은 아마도 아닐 듯싶다. 유명했다. 우리나라의 모험심(높은 위험추구경향)은. 일명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는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렇기에 우리나라의 풍토가 안전보다는 속도를, 내실보다는 외형을, 과정보다는 결과를 그리고 미래에 ‘부가될 비용’보다는 현재 시점에서의 ‘비용절약’을 더 중요한 덕목으로 근대화 과정을 보편화시켰다. 경 주 지자체에게 2005년, 중/저준위 방폐장 부지선정으로 3,000억+a의 보상액을 지급한 사례를 보면 이러한 모험심은 여전히 순항중이다. 각성이 필요하다. 우리의 행위는 사회적 행위의 일부에 소속된다면 마찬가지로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들 속에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이 작동할 수 있다. 우리는 비록 전문가는 아니지만 생활세계의 피해를 그 누구보다도 앞서 먼저 당하는 입장에 속한 일반시민이다. 위험의식은 이러한 위험의 가능성에 대해서 ‘비경험’, 혹은 ‘비전문성’으로 새롭게 구성될 필요가 있다. 유대관계의 중심에 불안, 공포가 존재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생명에 기반한 공동성을 추구할 수 있다. 비록 아직까지도 우리들은 ‘과학적 합리성’(새로운 전문가집단)에 다시금 호소하는 역설이 성립될 수도 있지만 심사숙고하는 시민의식! 이것 하나로 뭉쳐진다면 이러한 문제가 지금, 당장 여기에 직면한다 했을 때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연대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더 이상 과학기술은 천부적인 예술적 재능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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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 애정에 눈먼 못된 어미? 천추태후 | 뚜빠뚜빠띠 | 2010.3.30 | |||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며, 또 배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역사학이란 단순히 과거의 사실 조각들을 수집하며 꿰맞추는 지적 퍼즐 놀이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요? 아니면 일차적인 사실보다 한 차원 높은 거대 담론의 알리바이를 확보하려는 현재적 관심의 소산일까요? 그렇다면 그 거대 담론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3월 25일, 고려 초 천추태후가 살았던 시대를 주제로 한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세 번째 강의는 풀리지 않는 질문들을 던져 주었습니다. 강의 오래하는 것 안 좋아하신다던 광운대 교양학부의 김인호 교수님도 결국 수강생들이 던지는 그 질문들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여기, 우리에게 다소 익숙한 대답을 하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2009년 KBS에서 방영된 <천추태후>입니다. 천추태후, 애정에 눈먼 못된 어미? 천추태후. 태조 왕건(1대)의 손녀이고, 경종(5대)의 부인이자, 성종(6대)의 누이이자, 목종(7대)의 어머니이자, 또 현종(8대)의 이모인 여인. 이 복잡한 가계의 원인은 지방 호족 세력과 손잡기 위해 공식적으로만 29명이나 되는 부인을 둔 왕건의 전략에 있습니다. (그래서 고려시대에는 외척의 힘이 굉장히 셌습니다. 왕욱의 딸인 천추태후가 왕씨가 아닌 황보씨인 것만 봐도 짐작이 가능합니다.) 당시까지는 아직 골품제적인 풍습이 남아서 왕족끼리만 특권을 이어가겠다는 생각에 이복형제들끼리만 결혼한 것도 족보 그리길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다 보니 왕위 계승 문제도 복잡해집니다. 심상치 않은 갈등이 예상됩니다. 하지만 수강생 중 누구도 드라마를 본 이가 없다는 걸로 보아 썩 재미있게 작품을 그려내진 못한 것 같습니다. 종래 조선의 유학자들은 천추태후를 애정에 눈이 먼 못된 어미 정도로 치부했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후, 김치양과 눈이 맞아 아들까지 낳은 여성. <고려사>는 그 관계를 ‘간통’이라 표현했습니다. 더구나 그는 아들인 목종(7대)이 18세로 장성했음에도 여성의 신분으로 섭정을 펼쳤습니다. 보수적인 유학자들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겠죠? 다분히 조선의 유교적인 질서가 반영된 평가가 이어졌습니다.
는 사극이 사실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라는 딜레마를 토로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런 사소한 문제보다 좀 더 논란이 될 만한, 거창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나는 꿈을 꾼다. 나의 고려가 대제국이 되는 그날을...” 중무장을 한 천추태후 사진 옆에 쓰인 문구입니다. 천추태후를 고구려 계승의 꿈, 민족성 혹은 자주성 회복과 같은 거창한 담론에 연결지은 것입니다. 이전에도 제국에 관련된 드라마는 있었습니다. 고구려 건국을 다룬 <주몽>, 발해 건국 이야기인 <대조영> 등이 그랬지요. <천추태후>는 이러한 드라마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입니다. 고구려사를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에 대응하려는 의도도 엿보입니다. KBS 다큐멘터리 <한국사 전(傳)>에서도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천추태후를 재평가합니다. 다큐는 목종대의 서경 중시 정책을 북진정책으로 해석합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처럼 말이죠. 천추태후가 불교를 중시하고, 전통행사인 팔관회를 부활시킨 것은 고려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려는 자주 의식의 발로로 읽어냅니다. 이전의 성종은 스스로 송나라의 제후국임을 청했습니다. 팔관회나 연등회를 폐지하고 중추원을 설립해 유학과 중국을 지향한 정책을 펴기도 했습니다. 천추태후는 성종대의 이러한 정책 방향을 되돌려 자주성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종과 현종 대에 받았던 거란의 침략이 목종 대에는 없었다는 점을 들어 실리외교의 결과라는 해석을 내립니다. 천추태후가 고구려 부활을 꿈꿨다? 글쎄요.
하지만 김인호 교수님은 이러한 해석들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대고구려 부활의 꿈이라고 얘기하기에는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입니다. 유일한 근거로 볼만한 게 서경 중시 정책인데, 애초에 서경은 고려 입장에서 굉장히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천추태후가 서경 근처 황주 출신인 점, 그의 연인 김치양이 그 근처인 황해도 동주 출신인 점 등이 천추태후의 의도를 순수하게 보기는 어렵게 만듭니다. 게다가 서경을 주나라의 수도인 ‘호경’으로 개칭한 것도 고구려 계승 의지에 의문을 품게 합니다.
불교 및 전통을 중시했다는 것도 의심스럽습니다. 일단 김치양이 승려 출신입니다. 동주에 사당을 건립하는 등의 정책은 이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더구나 당시 불교며 팔관회와 같은 행사들은 금전을 챙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마치 오늘날 일부 종교나 행사가 그렇듯이요. 성종이 팔관회를 없앤 이유로 재정이 많이 들어 번잡스럽다는 점을 든 것만 봐도 중국 지향이라 단정짓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주성 회복이라는 그럴듯한 포장 뒤에 감춰진 속살에서 풍기는 돈 냄새를 무시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실리외교 역시 과장된 측면이 있습니다. 성종이 송과의 관계를 중시해서 거란의 침입을 불러왔다는 해석을 우리는 많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성종 13년 거란 침입으로 송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거절당하자 송과의 관계를 단절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대라 해서 반드시 일률적인 관계만을 맺은 것을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목종 역시 재위 2년에 송에 사신을 파견해 거란의 위협을 호소한 바가 있고요. 각 지역에 성을 쌓아 전쟁을 대비할 정도로 거란은 여전히 위협적이었습니다. 게다가 거란을 배척하라는 것은 훈요십조에도 기술된 태조 왕건의 유훈입니다. 고려가 후삼국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데에는 거란이 멸망시킨 발해의 유민을 포섭한 것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에 그랬던 거지요. 거란 배척을 일면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김인호 교수
김인호 교수님은 이러한 점들을 근거로 천추태후가 대국을 지향했다는 주장을 반박합니다. 덧붙여 거대 담론에 무리하게 사실들을 엮어 넣으려는 일각의 시도에 대해 무책임하다고 비판합니다. 그러한 시도들이 일종의 콤플렉스라는 것입니다. 대륙 변방의 반도국이 갖는 콤플렉스, 식민지배 경험을 지닌 약소국이 갖는 콤플렉스 말이죠. 교수님은 그런 콤플렉스의 일종으로 우리나라가 일왕을 그냥 왕이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일본은 물론이고 다른 외국은 모두 천황이라 부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왕을 천황이라 불러도 사대를 하는 것은 아니고, 또 그런 호칭이 일왕의 격을 새삼 높이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불필요하게 명분에 집착한 것이라는 비판과 함께 이제 그런 콤플렉스에서 벗어났으면 한다는 바람이 이어졌습니다.
물론 이런 주장에 곧바로 찬반 논란이 이어졌습니다. 한 남성 수강생은 우리가 민족을 강조하는 것, 우리가 국사를 배우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며, 한두 사례로 천추태후의 고구려 계승 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민족주의에 대한 반성에도 불구하고, 현실 정치는 민족과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특히나 우리나라는 주변국의 역사 왜곡에 몸살을 앓고 있는 실정이어서 더욱 반작용이 강하게 일어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주장에 다른 여성 수강생은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19세기 유럽의 제국주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냐며, 굳이 고대사까지 민족주의를 연결짓는 것은 무리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주장을 연상시킵니다. 이 외에도 여기저기서 찬반 의견과 질문이 쏟아졌지만, 시간이 모자라 수강생들의 표정엔 아쉬움이 역력했습니다. 거대 담론이냐, 아니냐 의견은 분분하지만 그것들이 사실에 발 딛고 있어야 함에는 모두가 공감할 것 같습니다. 주변국의 왜곡에 덩달아 왜곡으로 맞서는 것은 이성에 기반해야 할 학문의 장을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치의 장으로 변질시킵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우리는 언제나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에 대항할 힘은 오직 진실에서만 나옵니다. 이 강의가 있던 주에는 2차 한일역사공동위원회의 활동 결과 발표가 있었습니다. 양국의 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이 거짓임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을사조약의 위법성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지 못하고 각국의 의견을 병기하는 선에서 활동을 접어야 했습니다. 더딘 걸음이지만 조금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단단하고 우직한 진실의 힘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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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주인이 되는 돈의 인문학 | <삶의 주인이 되는 돈의 인문학> 제 3강 | 오드리 | 2010.3.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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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근본을 찾아서 강의자/성공회대 김찬호 교수 어느덧 세 번째 강좌가 열렸습니다. 이번 시간은 첫 번째 강좌를 맡았던 김찬호 교수가 비 경제학적인 언어를 통해 경제를 삶의 방식에서 어떻게 접근하고 풀어나갈 것인지에 대해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보이는 숫자가 전부일까?
숫자는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 객관성과 합리성을 담보하며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숫자가 '모든 가치를 아울러 객관적으로 측정된 것인지', '과연 진실되게 현실을 반영하는지', '측정 불가능한 가치를 제대로 환산할 수 있는지'에 있다고 김교수는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월드컵 경기장을 지을 때는 입장권수입과 관광객 유치효과, 이미지 상승에 따른 마케팅 효과 등을 고려해서 짓는 것이 이득이라고 판단, 시작하지만 건축 비용과 그에 따라 눈덩이처럼 커져가는 유지․보수비 때문에 초기 예상과 달리 돈으로만 따지면 적자로 돌아가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경제적 효과나 손실액 같은,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항목은 전문가들이 어떻게 계산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고 이에 비전문가들은 휘둘려서 그릇된 판단을 할 수 도 있는 거지요.
단선적 인과론도 잘 따져보아야 합니다. 복합적인 실체를 몇 가지 제한된 변수들만으로 단순한 모델로 만드는 오류들이 종종 있다고 합니다. 최근의 범죄사건에서 사고가 나면 모든 악을 가해자 혼자 다 구현한 것처럼 몰고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해자의 삶과 환경은 고려되지 않은 채 말입니다. 복잡한 원인 중 하나를 부각시켜 그것으로 끌고 가면 너무나 명쾌하고 그 사람을 극형에 처함과 동시에 악이 종결되었다는 카타르시스까지 느낄 법하니 이런 오류는 때론 유혹적일 것입니다. 최근에 흉악범죄에 따른 사형존폐논란에 따른 각 계의 주장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문득 떠올랐습니다.
허구를 지탱하는 믿음, 믿음으로 구성된 세계
점점 복잡해지는 사회
경제의 재건을 위하여
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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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을 보다 | 과학기술 3강(3.24): 지구 온난화, 기후도 상품이다 | 생명은 소중해 | 2010.3.28 | |||
<일찍 출발 준비, 그러나> 5시 20분쯤 회사를 나가서 저녁을 먹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근무시간이다. 5시 55분쯤 회사를 출발하여 6시2분에 분당선 선릉행 지하철을 탔다.
일찍 탄 덕에 빈자리가 눈에 띄었고 사람들도 덜 붐볐다. 오늘은 조금밖에 지각하지 않겠지 하면서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모털엔진'을 읽기 시작했다.
톰과 헤스터 뷰가 슈라이크로부터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모면하는 장면을 읽으며 '다행이다'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3호선으로 환승해야 할 '도곡역'을 방금 지나쳤다. 앞쪽의 아주머니의 눈빛은 '거 봐, 책에만 열중하다보면 내릴 역을 지나친단다.'라면 꾸중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고민했다. 다시 도곡역으로 돌아올까? 아니면 계속 가서 선릉역에서 2호선을 갈아타고 교대에서 3호선을 탈까? 선릉역까지 가는 것을 택했다. 선릉역과 교대역에서 사람들의 물결에 몸을 맡겨서 환승하고 이제 3호선을 타고 경복궁역으로 향했다.
<경복궁역 도착, 또 뛰었다> 7시 20분에 경복궁에 도착했다. 몇 번출구역을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서울농학교와 서울맹학교를 향해 가면 된다. 그런 학교에 대한 출구를 표시한 곳은 내가 아는 한 경복궁역 밖에 없기 때문이다. 출입구 숫자보다 더 외우기 쉽다. 나는 또 뛰기 시작했다. 뛰면서 생각했다. 벌써 3번째 매주 이렇게 이 시간에 경복궁역에서 참여연대 건물로 뛰고 있다. 참 내가 왜 이렇게 뛰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짧은 거리가 아니었다. 내가 이럴 때 뛰지 않으면 언제 뛰겠는가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참여연대 계단의 명화 한 점> 참여연대 2층까지 비스듬히 놓여있는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건물내에 있는 3층까지 계단을 올라갔다. 2층과 3층 사이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창밖에 한 번 눈길을 주었다. 창 밖의 그 기와집과 가로등은 저번 주와 변함없이 찬란했다. 마치 벽에 명화 한 점이 걸린 것 같았다. 문득 '참여연대'가 '참연대'라고 불러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강의실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들어갔다. 이번 강사님이신 동국대학교 박진희 교수님이 PT자료로 강의에 열심이셨다. 그리고 눈에 익숙한 분들이 보였다. 나는 적당한 자리에 앉았고 볼펜과 메모지를 준비했다. 강의 요약 (시작) ---------------- <지구 온난화의 원인> - 태양에너지, 자연변동성, 우주선 - 온실가스 이외의(태양, 오존, 화산 등) 영향은 미미함. 결국 인간이 원인이냐 아니면 자연스런 지구의 변화냐 의 논란이 많음. 이 논란에서 정치적인 배후나 석유없계의 로비가 있다고 한다. (내 생각은 최근의 기후변화만 보더라도 인간의 석유소비로 인한 이산화탄소 증가가 지구온난화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산화탄소 농도가 현재 385 PPM에서 2010년 650 PPM까지 갈 수 있다고 함.
<기후변화 위기 대응> - 1992 리우 환경회의 -> 유엔 FCC 생김 - 1997 교토의정서: 2012년까지 1990년대(약 370PPM)보다 CO2를 5.2% 줄이자고 38개국 합의했음. - 2009년 코펜하겐 기후회의: 포스트(post) 교토의정서 채택 실패. 2050년까지 1990년대보다 50% 감축 비전에 합의 ('감축'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원자폭탄 감축 합의'가 떠오른다. 하긴 CO2도 원자폭탄만큼 지구 생물체에 위험한 물질이다.) 구체적인 계획이나 합의는 없었음. EU가 적극적이었음. 2030년까지 30% 감축을 제시했으나 미국와 중국은 회의적이었음. - 2010년 멕시코 회의: 역시 2009년보다 기대하기 힘듬...
<시장을 통해 탄소 배출권을 거래하자!> 흐지부지한 상황속에서 많은 나라들이 시장을 통한 감축 방안 지지했음(배출권 거래제, CDM 사업) 여기서 '형평성의 문제'가 생긴다. 나라마다 탄소 배출량이 다르기 때문에 탄소 감축량도 달라진다. 다른 나라보다 더 많이 감축하여 손해보지 않겠다는 논리다(인간의 이기심이란!) 예를 들어, 나라마다 탄소배출권을 일정량(100)씩 주었다고 하자. 1년이 지났는데 덜 공업화된 나라는 주어진 탄소배출권보다 적게 배출(80)하여 탄소배출권(20)이 남았을 것이다. 그 나라는 남은 탄소배출권(20)을 탄소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 주어진 탄소배출권(100)을 초과한 나라들(120)이 시장에 나온 탄소배출권(20)을 살 수 있다. 즉, 탄소 배출권 시장은 탄소 배출권을 사고 파는 시장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실질적으로 CO2가 감축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효과를 못 보고 있음. 그 이유는 근본적인 에너지 발생을 전환하고 교체하는 게 아니라 돈으로 탄소배출권을 사오는 현상 발생.
<청청개발체제(CDM) 사업> 또 CDM 사업을 통해 탄소배출권을 살 수 있다. 나무를 심거나 친환경 개발을 하면 유엔의 담당기구에서 확인하고 일정량의 탄소배출권을 준다고 한다. 선진국에 개발도상국에게 친환경 개발 사업을 하거나 사막에 나무를 심는 사업을 하기도 한다. CDM 사업 역시 문제가 생긴다. CO2를 흡수를 잘 하는 나무만 심음으로써 생물다양성을 위협하고 원주민과의 마찰이 생긴다.
<탄소배출권 거래제와 CDM 사업에 대한 대책> 근원적인 생산, 소비 체계의 변화가 필요하다. 에너지 발생을 화석 연료에서 친환경적인 에너지원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탄소 배출권 시장은 처음부터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상태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지금 전 지구적인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고 있다는 생각이 없는 듯하다. 시장논리에 맡기겠다는 발상 자체가 진정한 위기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귀찮은 탄소배출권에 대한 이슈를 자본주의 시장체제에 맡기고 자신은 발을 빼겠다는 얘기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자연스레 소극적이 될 수 밖에 없고 근본적인 에너지 생산체제를 교체할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탄소배출권 시장은 지구온난화의 해법이 될 수 없다.)
<잠시 쉬는 시간> 잠시 10분간 쉬면서 질문하는 시간이 있었다. - CO2 배출량은 어떻게 측정하나? 나라의 수입, 에너지 총량과 GDP 등을 CO2 배출략으로 환산한다. 생산국에만 CI2 배출량을 부과하는 것은 형평성 문제로 솝국도 부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음(탄소마일리지). 한국은 CO2 배출량이 9위란다. 엄청나게 많이 배출하고 있는 것이다. - 제품, 수입품에 대한 CO2 배출량 공제하는 제도가 있음. - 자동차에 연비 대신 CO2 배출량 표시. - 정부차원이 아닌 민간 차원의 노력은? NGO들의 노력이 있지만 크지 않은 것 같음.
<어디서 그렇게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하지?> 최대 이산화탄소 배출원은 에너지 생산이다. (역시 화석연료가 문제였구나) 에너지 소모의 40%는 건물에서 한다고 한다. 1차 에너지 소비 41%는 전력 생산임. 발전소로 유입되는 2/3 에너지는 열로 소모됨.
<재생가능한 에너지로 전환> 1973년 석유파동으로 재생에너지 연구를 시작했다고 함. 건물에너지: 재생가능한 에너지(태양, 풍력, 지열, 수력(조력), 생물(바이오매스, 생물폐기물) (교수님께서 보여준 그림에서는 풍력만 이용해도 인간이 필요한 에너지보다 많았고 태양은 몇십배 많았다(태양은 지구가 존재하는 한 무한한 에너지). 태양과 풍력만 잘 이용해도 화석연료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이 마음속에서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석유 정점 이론 석유 생산비용 증가> 현재 주로 사용하는 에너지인 석유는 과거 지구의 유기물로써 유한하고 고갈 가능하다. 석유 정점 이론은 석유 생산량의 꼭지가 언제일 것이냐가 논란거리인 듯 하다. 비관론자들은 2010~2011으로 보고 낙관론자들은 2030년 이후라고 한다. 낙관론자들의 이유는 오일샌드(캐나다)와 심해저에 있는 석유때문이다. 하지만 오일샌드와 심해저에서 석유를 추출하려면 석유 생산비용은 점점 증가할 것이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서는 재생가능에너지의 생산비용과 맞먹게 될 것이고 그 시점에서 경제성의 문제로 더 이상 화석연료에 의존하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그래서 석유에너지에서 재생가능에너지로의 전환은 필연적인 것이다.)
<각국의 석유에너지 전환 정책> 덴마크: '에너지 전략 2025' 독일: '재생가능 에너지 확대 전략' 시나리오 영국: '에너지 백서' 한국: 에너지 보급선 확대 (근본적인 에너지 전환은 아님)
<에너지 전환은 가능한가> 현재는 원자력 40%, 재생에너지 1%, 풍력은 증가중이란다. 독일은 풍력, 태양력으로 12%정도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2030년까지 35%까지 증가, 결국엔 재생에너지로 완전 전환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필요한 에너지의 양은 477이고 태양력은 1600이고 풍력은 600이란다(기술수준 포함). 그러므로 우리가 노력을 기울인다면 재생가능 에너지로의 전환은 꿈이 아니라 실제가 될 수있다. 재생가능에너지로의 전환은 가능하다!
<에너지 생산 효율 비교> 1KW 전기 생산 효율은 원자력 60원, 태양 700원, 풍력 105원이란다. 풍력은 이미 5MW 발전기가 상용화되었다. 5MW면 4900가구 14600명이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 국내 기술은 1KW 수준임. 태양력은 1이 입력되면 0.2정도의 출력만 나온다고 한다. (태양에너지는 무한하지만 에너지 효율이 낮구나!) 독일에서는 지붕, 벽까지 태양렬 발전이 가능하다고 한다. 에너지 자립 단지가 있다고 한다. (독일이 재생가능에너지 분야에서 앞서고 있다는 느낌이다. 독일은 핵발전도 현재 발전하고 있는 것이 끝나면 더 이상 핵발전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
<여러 재생가능 에너지들> 바이오 매스: 낙엽, 분뇨 등, 옥수수, 메탄가스 사용. 수소: 에너지 소모과정에서 산소(O2)와 결합하여 물(H2O)이 배출되므로 친환경적이지만 '수소'만드는데 에너지가 소모된다. 바이오 디젤: 바이오 디젤 소비량이 증가할수록 식량으로 쓸 콩이나 옥수수가 감소하는 문제가 발생 바이오 가스: 전기생산과 발열이 동시에 가능, 축분 처리용으로 OK 지열: 친환경, 하지만 문제는 열펌프를 써야하는데 전기가 사용된다는 것. 조력발전: 조수간만의 차이를 크게 하기 위해 댐이 필수-> 환경파괴, 비친환경적이지만 효율 높음. 조류발전: 댐 필요없음. 친환경적이지만 효율 낮음 파력발전: 물레방아들을 사용 소수력: 물의 낙차를 이용한 물레방아로 발전.
<정부의 재생가능에너지 지원 정책> 재생가능에너지는 우리나라 전력시장에서 경쟁력이 없기 때문에 정보에서 지원하는 제도가 있다고 한다. (음, 예전에 뉴스에서 밭에 태양열판을 만들어 전기를 정부에 판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이 때 나도 에너지를 팔 수 있을까 고민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재원부족으로 2012년까지 마감한다고 한다. 발전업자에게 의무적으로 친환경에너지 생산량을 할당하는 제도가 있다고 한다. 여기서 발전업자란 한국전력이나 원자력이 해당되는데 조력발전을 선호한다고 한다. 그래서 인천앞바다쪽에 앞으로 조력발전소를 지을 계획이 많다고 한다.
<재생에너지의 문제와 나아갈 방향-혼합된 분산 에너지 생산> 재생에너지의 가장 큰 문제는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정한 전기를 공급해준다. 하지만 바람불지 않으면 풍력 발전은 멈추고, 비가 오는 날에는 태양력 발전이 멈춘다. 그래서 혼합된 방식이 해결책이다. 태양, 바람, 지열, 바이오매스 등을 혼합한 방식은 어느 정도 일정한 에너지 공급을 가능하게 한다. 분산적 에너지 생산. 에너지 생산자가 소비자가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서 에너지 생산의 가치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독일에서는 태양력으로 집에서 생산된 에너지를 쓰고 남은 전기를 정부에 팔고 있다고 한다.)
<에너지 자립을 이룬 무렉 마을> 오스트리아의 무렉 마을(1700명)은 100% 에너지를 자립했다고 한다(갑자기 '슈렉'이 생각났다^^;). 처음에 농부 몇 명이 모여 유채를 이용한 바이오디젤 회사(SEEG)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폐식용유를 이용한 버스도 등장하고 정부와 대학의 지원으로 자립을 이루었다고 한다. 교수님이 갔다오셨는데 버스기사분이 기름냄새보다 콩기름냄새가 나서 좋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현재는 관광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고 있단다. (매연 대신에 콩기름냄새가 나는 버스가 시내에 돌아다닌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식사시간에는 배가 더 고플 듯함.)
<질문 시간> 1)무렉같은 시골 마을에서는 재생에너지로 에너지 자립이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도시(아파트)에서는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 지붕뿐 아니라 벽면도 태양열 발전 가능. 요즘은 태양력, 지열 등을 이용하여 아파트를 설계하려는 시도가 있음. 의지도 문제지만, 의지만 가지고는 한계가 있음. 정부와 사회 각층의 지원이 필요함. 2) 가장 현실적인 대안 에너지원은? -> 태양력이라고 생각함. 태양은 지구에게는 무한한 에너지. 소형 분산형 에너지 생산에 적합함. 재생에너지의 대형화는 환경 문제를 야기함(소음, 풍경 등). 조력, 풍력 등 소형, 분산형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발전이 바람직함. -------------- 강의 요약 (끝)
<풍부하고 다양한 강의 내용> 지난 2강때 '원자력과 핵폐기물'에 대한 강의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서 좋았다. 여러 측면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강의였다. 박진희 교수님은 수많은 그래프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최대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달하려고 노력하셨다. 그래서 많은 자료들을 준비해오셨고 그 중에 중요한 것들을 설명해주셨다. 마치 아이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려는 부모의 마음이셨던 것 같다. 그만큼 지금의 지구온난화 문제가 심각한 걸까? <자본주의식 탄소배출권 시장 비판>
나는 이 강의의 제목중에 '기후도 상품이다'라는 부분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떻게 기후가 상품이 될 수 있는가? 모든 것을 사고 파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지만 사고 팔지 말아야 할 것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기후'는 사고 파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탄소배출권 시장 자체를 반대한다. '탄소배출권'도 사고 판다는 생각을 가지면 어느 세월에 탄소가 줄어들지 알 수 없다. 모든 것을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다면 돈을 더 많이 모으려고 하지 탄소를 덜 배출하려는 노력은 적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생가능에너지로의 전환에 대한 희망> 이 강의의 중심축은 '화석연료에너지를 재생가능에너지로의 전환'이라고 생각한다. 점점 화석연료에너지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직시하려고 하지 않고 외면하려고 한다. 뭔가 다른 방법이 나오겠지, 누군가 해결해주겠지 라고 생각하며 오늘도 자동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TV를 보고 물을 펑펑 쓴다. 하지만 위기는 바로 우리 코앞에 와 있다. 이제는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이행해야 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불편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전지구적인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다행히 정진희 교수님은 재생가능에너지인 태양력과 풍력, 조력, 바이오에너지 등을 이용하면 충분히 인류가 사용할 만큼의 에너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이제는 인간의 의지와 결단만이 남았다.
<나의 상상들> 집집마다 지붕과 벽은 태양열 발전판이 반짝이는 것을 상상해본다. 아파트의 벽면도 태양열판이 모두 붙어있다. 집들의 지붕과 아파트의 지붕과 모든 건물의 지붕위에는 크고 작은 풍력발전기가 있는 것을 상상해본다. 서해에서는 조력발전이 아니라 조류발전이나 파력발전기가 설치된 것을 상상해본다. 원자력발전소는 더 이상 짓지 않겠다는 정부의 발표를 상상해본다. 모든 헬스장에 전기발전기가 의무적으로 설치되고 자동차의 대수는 줄고 자전거도로가 확장되는 것을 상상해본다. 기업마다 탄소발생을 줄이는 직원이나 고객에게는 인센티브를 주는 게 당연한 사회를 상상해본다. 에너지와 물소비를 줄이는 상품과 노력이 전지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상상해본다. 조금 더 느리게 하지만 더 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상상해본다.
<지구는 단 하나뿐이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인간이 얼마나 존재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더이상은 안 된다. 이제 브레이크를 밟고 조금 더 천천히 가야 한다. 우리 후손에게 더 나쁜 지구를 물려주지 말아야 한다. 왜냐면 지구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 썻다고 버릴 수도 없고 다시 복원하기를 정말 힘들다. 이제 남은 것은 위기인식과 결단과 의지와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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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살아나는 과거, 대한민국의 역주행 | <되살아나는 과거, 대한민국의 역주행> 3강 | 부엉이의 눈 | 2010.3.25 | |||
3월 8일부터 김동춘 선생님의 <되살아나는 과거, 대한민국의 역주행>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강좌는 용산참사나 기무사의 민간인사찰 논란처럼 MB정부 시대에 되살아나는 '과거'를 통해 오늘 한국사회와 민주주의에 대해 성찰하는 자리로 마련되었습니다. 이 글은 수강자 자원활동가 박지숙 님이 작성하신 후기입니다. 4강은 3월 29일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 라는 제목으로 보도연맹 사건과 태안 기름유출 사건을 중심으로 강의가 진행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느티나무
“법을 지켜야 이익이 되는 사회가 돼야 권력자들은 법을 지킬 것” 되살아나는 과거, 대한민국의 역주행 3강
‘유전무죄 무전유죄’,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은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다. ‘법과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돈과 권력이 있어야만 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이 말들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그러나 유난히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MB정부에서 고위공직자들의 범법행위가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나오는 것은 아이러니다. 국무위원들의 청문회는 ‘강부자, 고소영 정부’라는 비아냥대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되살아나는 과거, 대한민국의 역주행> 세 번째 강의는 MB정부 들어 언어의 의미가 변질되고 있는 ‘법치’에 대해 이야기했다. 법 지키면서 살면 성공할 수 없어? 강의는 한국인의 법의식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됐다. 아무도 없는 도로에서 신호를 칼같이 지키는 한국인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김동춘 교수는 무단횡단이나 교통법규위반을 웬만하면 하고, 안 걸리면 장땡이라 생각하는 법의식이 범법에 대한 민감성이 낮은 증거임을 설명했다. 사업을 하는 중소기업인이나 자영업자들이 세금을 제대로 내고서는 남는 게 없는 현실이기에 세금탈루를 하는 것이 보통이고 세금을 내면 바보취급을 하는 것이 한국인의 상식이라는 것이다. 법원과 검찰, 법관에 대한 신뢰도가 최하위인 것 역시 낮은 법의식을 보여준다. 그럼 이러한 낮은 법의식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김 교수는 그것은 바로 권력자들의 범법에서 출발한다고 단언한다. 권력자들은 자기들의 목적에 도움이 될 때만 법을 지킨다. / 스피븐 홈즈 당신이 강자라면 링의 규칙을 지키겠는가? 안 지키겠는가? 권투를 예로 들어보자. 권투는 같은 체급끼리 정확한 룰 아래에서 진행되는 경기다. 그래서 누가 이길지 모르는 진정한 승부가 펼쳐진다. 하지만, 이겼을 때 권력이 있는 당신에게 확실한 이익이 생긴다면 규칙을 지키겠는가? 김 교수는 “대부분은 권력자라면 법을 안 지킬 것이다. 법을 지켜서 이익이 되면 지키고, 불이익이 되면 법을 지키지 않는”게 권력이라고 지적했다. 개인의 범법과 공권력의 범법 중 어느 것이 더 ‘법치’에 치명적일까? 김 교수는 “공권력의 범법은 그 사회의 중심이고 표준”이라고 말했다. 현 국무위원들 대부분이 위장전입은 기본으로 하고 탈세, 뇌물수여혐의, 다운계약 등 차마 셀 수 조차 없을 정도의 범법행위를 저질렀음에도 그들이 여전히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고 사과한마디 안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사회가 정당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기업비리에 대해서 눈감고 특별사면까지 단행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법치’를 하기엔 너무 버거운 당신 김 교수는 “법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법을 지켜야 하는 기관이 불법을 저질러서 문제”라고 꼬집었다. 그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전태일의 외침에서 알 수 있다. 김 교수는 “이 말은 법을 제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지키라는 것”이라면서 헌법의 진보성을 역설했다. “정부수립이후 만들어진 헌법은 당시 사회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는데 그것은 미군정 시절 미국과 독일 헌법의 좋은 것만 들여와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법대로 살다간 사용자들과 권력자들이 내놓아야할 것들이 많았기에 법을 어기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수입되고 주어진 법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힘(정치)의 논리가 앞섰고 결국 힘없는 약자들이 착취당하는 역사가 계속됐단 얘기다. 역대 대통령들의 법 위반 사례들 김 교수는 역대 대통령들의 법위반의 대표적인 사례로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부정선거, 5.16, 1212 등의 군사쿠데타, 사면권 남용을 들었다. 이명박 정부의 건국절 소동 역시 임시정부를 적통으로 하는 헌법을 위반한 사례라고 했다. 그러나 제일 많이 범법한 기관들은 1강에서 지적했던 CIC, 중정(국정원), 기무사 등 수사사찰기관들이다. 특히, 한국전쟁 후와 군사독재시절 정치적 논리에 의해 이들 기관들이 자행한 범법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한국전쟁후의 국가기관이 자행한 범법들 한국전쟁 후에는 계엄법, 국방경비법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계엄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김 교수는 “계엄은 군사지도자가 입법, 사법, 행정을 장악하는 것”이 라면서 계엄을 설명했다. “재판에서 보통의 삼심제가 아닌 단심제로, 입법은 국회의원이 아니라 명령이 대신하고, 행정은 군사적 목적에 종속되는 것을 의미하며, 사실상 준 전제군주하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한국전쟁 후 여순사건 때 계엄이 선포되었으며, 80년 5월 광주가 마지막 계엄이었다. 계엄 시에는 사람을 재판 없이 죽여도 어쩔 수 없었다고 당시를 살았던 한국인들은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김 교수는 “피해자가 국가폭력을 당연히 여기고 이해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경찰에게 두들겨 맞고도 어떻게 데드냐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며, 설명 없이 주민등록증을 보여 달라는 경찰에게 거리낌 없이 보여주는 젊은이들도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랑 다를 바가 없다”고 꼬집었다. 계엄의 공포가 한국인의 내면까지 자리 잡아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반증일 것이다.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은 당시 계엄법이 없었는데도 계엄령이 선포됐다고 한다. 또한 장기수 할아버지들이 한국전쟁후 처음에 잡혔을 때 국방경비법으로 체포가 됐는데 당시 국방경비법이 국회에서 통과된 기록이 없다고 한다. 존재하지도 않은 법들이 헌법 위에 있었던 셈이다. 김 교수는 이 같은 “계엄법, 국방경비법, 국가보안법 등이 국민의 생사여탈권을 좌우했다”고 했다. 또한 재판기록이 없는 군사재판과 민간인을 재판 없이 살해한 약식처형은 사실은폐와 조작 등 모든 과정이 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전쟁과 시장은 쌍둥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오늘의 상황은 ‘준전시상태’가 아니라 전쟁을 하고 있는 상태라고 해야 할 것이다”(박정희 1974.7.16) 군사독재시절에 활동했던 수사관은 당시의 불법구금, 불법수사를 관행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간첩이 아닌 학생, 노동운동가들을 잡아다가 고문, 구타, 심지어 범죄사실까지 조작한 것은 엄연한 불법이다. 특히, 유신말기와 80,81,85년 정권이 위기를 맞을 때 정치적 목적으로 간첩사건들을 조작한 의혹이 있다고 했다. 김 교수는 군사정권이 고기를 잡다가 파도에 밀려 이북으로 월경한 납북어부들을 이야기했다. 6.70년대 이북을 갔다 오고 중정에서 고문까지 받았지만, 한 참 지난 후에 다시 이들을 간첩으로 몰아 정치적 위기를 모면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군산 앞바다 위도 사람들이 간첩으로 오해받고 동네사람들끼리 밀고를 하면서 서로 원수가 됐다는 이야기에서는 조작간첩사건이 인간을 어떻게 파괴시키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김 교수는 “(박정희가 말한)준전시상태는 전쟁을 할 수도 있다는 얘기”라면서 이를 “오늘날은 글로벌 경제전쟁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전쟁은 이겨야 살 수 있으니 끊임없이 싸워 살아남아야 하고 경쟁지상주의인 오늘날의 시장은 1등만이 살아남으니 “전쟁과 시장은 쌍둥이”이라는 것이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어릴 때부터 스펙을 쌓고 친구를 사귈 때도 계산을 하는 게 당연시 되는 것을 생각해보면 손에 총만 안 들었을 뿐 전시상황임은 분명하다. 법치는 어떻게 가능한가? 민주주의의 질(質)을 높여야. 김 교수는 독일 학자 베르너 마이호퍼의 <법치국가와 인간의 존엄>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민주주의의 질(質)을 이야기했다. “민주주의는 선거, 투표, 미디어, 관심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 민주주의가 지켜지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사람이 있어야한다. 이것은 스스로 인격적 자존심이 있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자신의 인격과 존엄성에 신뢰가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예, 아니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인권이 보장될 때 가능하다. 인권이 보장되어야 참여하고 발언하기 때문이다.” 적극적 발언이라는 부분에서만큼은 민주주의는 인권과 비례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스스로 인격적 자존심이 있는 사람들은 완전 밑바닥 계층이 아닌 이들보다 조금 위에 있는 계층으로서, 이들은 상대적으로 교육수준이 있고 조직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참여가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권력자들이 법을 지키도록 하는 방법은 “법이 이익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며 이는 대중들의 저항이 셀 때”라면서 “대중의 저항이 없으면 권력은 견제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결국 적극적 발언으로 저항을 할 때 법치가 실현이 된다는 이야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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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 2강 | 뚜빠뚜빠띠 | 2010.3.23 | |||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 제 2강 : 한국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한 선덕여왕 강연자 : 전덕재 / 경주대 문화재학부 교수
들어가며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라시대를 예로 들자면, 군주에 대한 명칭으로 구분하는 방법이 있겠네요.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왕’ 이런 식으로 말이죠. 고려시대의 학자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역사를, 성골들이 왕위를 이어간 ‘상대’, 태종무열왕(김춘추)부터 혜공왕에 이르는 ‘중대’, 그리고 나머지 기간인 ‘하대’로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역시 고려시대의 승려인 일연은 상고(혁거세왕~지증왕), 중고(법흥왕~진덕여왕), 하고(무열왕~경순왕)로 신라 시대를 나눕니다. 승려인 일연의 입장에서는 불교식 왕명을 택한 법흥왕에서 진덕여왕까지의 시기를 신라의 전성기라 보았던 거죠.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두 번째 강의는 선덕여왕을 중심으로 일연이 말한 불교식 왕명 시대, 즉 ‘중고’ 시기를 살펴 보았습니다. 강의를 맡으신 분은 경주대 문화재학부의 전덕재 교수님. 멀리서 오셨음에도 지친 기색없이 열정적인 강의로, 수강생들의 혼과 진을 완전히 빼놓으셨습니다.
전덕재 교수
불교식 왕명 시대를 연 법흥왕 불교식 왕명 시대는 왕이 불교를 통치 수단으로 이용한 시기입니다. 불교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한 초기 단계에 나타난 것이죠. 통일신라 시대 들어 불교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 불교식 왕명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고시대의 첫 왕인 태종무열왕처럼 말이죠. 불교식 왕명 시대를 연 첫 인물은 법흥왕(法興)입니다. 이름부터 불법(佛法)을 일으킨 왕이라는 뜻이죠. 527년 불교를 공인한 데서 비롯된 왕명으로 추정됩니다.
전륜성왕을 꿈꿨던 진흥왕 법흥왕의 뒤를 이은 이는 진흥왕입니다. 영토를 크게 넓혀 한강 유역을 차지한 것으로 유명한 왕이죠. 그의 본래 이름은 삼맥종(彡麥宗) 혹은 심맥부(深麥夫)인데요, 이는 사미(승려)를 뜻한다고 합니다. 발음부터 비슷하죠. 진흥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요, 각각의 이름을 동륜(銅輪)과 사륜(舍輪, 훗날의 진지왕)으로 지었습니다. 사륜은 ‘쇠륜’이란 뜻으로, 달리 말하면 철륜(鐵輪)입니다. 동륜과 철륜이 있으니, 금륜(金輪)과 은륜(銀輪)도 있겠죠? 이 금․은․동․철륜은 불법(佛法)으로 통치하는 속세의 이상적인 왕을 칭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의 명칭이라 하네요. 아들들을 동․철륜이라 한 것으로 보아, 스스로 금륜왕으로 자처하여 불법(佛法)으로 세상을 다스리려는 진흥왕의 의중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귀족들에 의해 폐위된 진지왕 진흥왕의 뒤를 이은 것은 진지왕이지만, <삼국유사>에 따르면 ‘나라를 다스린 지 4년만에 정치가 문란하여 어지러워졌고 음란함에 빠져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고 전합니다. 귀족들이 화백회의를 열어 물러나게 한 것이지요. 이 때문에 진지왕의 아들인 김용춘(김용수)은 왕위에 오르지 못합니다. 하지만 김용춘의 아들은 훗날 왕위에 오르는데요, 그가 바로 삼국을 통일한 태종무열왕 김춘추입니다.
(진지왕의 아들이자 김춘추의 아버지) 을 요직에 적극 등용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고 이는 김춘추나 김유신 같은 신귀족세력이 등장하는 배경이 됩니다. 김춘추는 물론이고 김유신 역시 전통적인 진골귀족으로부터 괄시받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 어머니인 만명과 결혼할 때 수을부가 강력히 반대했거든요. 수을부는 만명의 아버지로서, 금관가야계 왕족의 후예인 김서현이 탐탁치 않았던 것이겠죠. 아무튼 이 신귀족세력은 629년 고구려 낭비성을 함락시키는 등, 진평왕의 후원을 받아 가문간에 서로 연대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킵니다.
한반도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 579년부터 632년까지 손에 꼽을 정도로 오랜 기간 제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진평왕에게는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었습니다. 석가와 마야부인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면 석가모니가 될 수 있었을텐데요. 기껏 자기 핏줄을 성골이라 해놨더니 정작 핏줄을 이을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진평왕에게는 덕만공주, 천명공주, 선화공주라는 세 딸이 있었습니다. 천명공주는 김춘추의 어머니이고, 선화공주는 서동요의 주인공이죠. 세 공주의 생몰년도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삼국사기>는 덕만이 맏이라 기술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성골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의식 같은 것이 있었나 봅니다. 진평왕이 후원한 김용춘․김서현의 강력한 지지로 덕만공주가 여자임에도 왕위를 계승하게 되니까요. 이 과정에서 631년 칠숙과 석품 등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은 그렇게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선덕’이란 왕호 역시 불경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진흥왕이 꿈꿨던 전륜성왕의식을 계승하여 왕호를 지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으로 분한 이요원은 젊고 아름다웠습니다만, 실제 선덕여왕은 마흔이 다 되어서야 즉위했습니다.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한다면 적은 나이가 아니지요. 진평왕이 너무 오래 제위했기 때문입니다. 진평왕대에 이어서 선덕여왕의 통치기에도 구귀족과 신귀족 사이의 갈등은 여전했습니다. 상대등에도 오른 바 있는 알천이나 비담 같은 인물이 구귀족의 대표적인 존재로 추정된다고 하네요. 하지만 당시 여제동맹의 대외적 압박 속에서, 김춘추와 김유신 같은 신귀족세력이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신라가 백제에게 대야성(합천)을 빼앗긴 후, 김춘추는 고구려․일본 등 사방으로 도움의 손길을 구하다가, 결국 648년 당나라로 가서 나당동맹을 체결하는 데 성공합니다. 김유신 역시 대야성 전투 이후 신라군 총사령관이 되어 백제와의 전쟁을 수행하죠. 결국 둘은 삼국 통일의 주역이 됩니다. 이러한 신귀족의 성장에 비담 등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647년) 결국 김유신에게 진압당합니다. 이후 신귀족은 승만공주(진덕여왕)를 왕위에 앉히고 실질적으로 정국운영을 주도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합니다.
전덕재 교수
최초의 여자인 왕. 선덕은 남성 사회의 뿌리 깊은 편견 속에서 나라를 운영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앞서 언급한 비담이 반란을 일으킨 명분은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였습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당황제가 신라의 사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네요. “그대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고 있으므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게 되고, 임금의 도리를 잃어 도둑을 불러들이게 되어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 이런 부정적 시각들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선덕은 자신이 지혜를 발휘한 세가지 일, 즉 지기삼사(知幾三事)와 같은 설화를 지어 퍼뜨렸습니다. 여자라는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 큰 능력을 보여야 했으니까요. 선덕은 유언으로 도리천(忉利天)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는데요, 도리천은 불교에서 우주를 구성하는 33천(天) 가운데 하나이며 동시에 그 세계 자체를 의미한다 합니다. 그리고 선덕의 그 유언은 도리천에 환생한 후 다시 이 세상에 남자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소망을 얘기한 거라고 해석된다 합니다. 누구보다 남성이기를 갈망한 선덕의 간절한 소망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후대에 들어서도 오랫동안 선덕은 ‘여자’라는 꼬리표를 떼어버리지 못했습니다. 가령 통일신라의 헌안왕은 “우리나라의 옛일에 비록 선덕과 진덕 두 여자 임금이 있었으나,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비슷하므로 본받을 일이 못된다.” 하였구요, 김부식은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거늘 어찌 늙은 할멈이 안방에서 나와 나라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고 했습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두말할 나위 없겠죠. 그들은 심지어 선덕을 여왕이 아니라 ‘여주(女主)’라고 낮춰 부를 정도 였습니다.
선덕이 집권한 기간은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이 북쪽과 서쪽에서 압박해와 대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16년 치세 기간 전쟁으로 시달리느라 정치 개혁에 힘을 쏟을 여력은 없었겠지요. 오늘날 선덕은 김춘추와 김유신을 적극 후원하고 등용해서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여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김유신의 누이와 김춘추의 결혼을 주선한 것도 선덕여왕이었죠. 유명한 오줌싸는 꿈 일화입니다. 김유신과 김춘추 간 연대에 선덕이 모종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수강생 중 한 분은 김춘추와 김유신 역할만 강조돼 정작 선덕은 조력자 역할로 낮춰졌다며 새로운 평가 방법이 없을까 하는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될 성 부른 떡잎이었던 김춘추와 김유신의 재능을 간파하고 중용한 선덕의 용인술이야 말로, 허무맹랑한 지기삼사(知幾三事)를 지어낼 필요가 없을 만큼 멋진 지기일사(知幾一事)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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