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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명 | 강좌후기 | 글쓴이 | 날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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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 함께 <미투의 정치학>읽기 | [후기] 저자와 함께 <미투의 정치학> 읽기 4 - 춘향에겐 성적 자기결정권이 필요했다 (한채윤) | 빛깔 | 2019.8.2 | |
‘권리’와 ‘존중’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권리 개념의 핵심은 존중이며, 이를 침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되려 정확한 뜻을 알 수 없거나 제대로 쓰이지 않고요. 그렇다면 이 의미를 어떻게 짚고 넘어가야 할까요? <미투의 정치학> 마지막 시간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크게 3개의 덩어리로 두고 춘향전에 빗대어 설명해주셨습니다.
춘향이 진정 원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18C에 창작 되었을 거라고 추정하는 <춘향전>은 다양한 매체에서 소비되었습니다. 이 고전 소설은 신분 차이를 뛰어넘은 사랑이고, 고난을 극복하고 ‘정조’를 지킨 여성은 신분상승을 얻으나, 이를 건드린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을 담고있죠. 하지만 찬찬히 분석하면 춘향은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거나 맺은 언약이 영원할 거라고 믿지않습니다. 위험과 이익을 빠르게 파악하고, 처신까지 치밀하게 판단했습니다. 반면 변학도는 무조건적으로 춘향을 데려오라고 명령했으며, 이를 거부하자 공권력을 행사해 자신의 안위를 지키려 했죠. 여기서 눈 여겨 봐야할 건 이 두 인물의 대립의 핵심이 ‘정조’가 아니라 위선적인 가부장제 제도를 ‘정조’라는 관념으로 덮었다는 점입니다. 이를 토대로 여성의 삶을 재단했고, 모순을 남겼기 때문이죠.
형법 속에 여전히 존재하는 정조
조선시대 유난히 여성에게만 작동했던 ‘정조’라는 억압은 지금도 존재합니다. 이를 드러낸 것이 2013년에 신고죄 폐지와 경찰의 즉시 조사가능으로 개정 된 형법 297조 (강간과 추행의 죄, 이하 강간죄) 입니다. 우선 형법은 보호법익(어떤 행동이 범죄인지 판단하기 위해 그 법이 보호하려는 이익, 가치가 무엇인지 명확히 정하는 일)이 중요한데, 예를 들어 ‘절도죄’의 보호법익은 ‘재산권’인 셈이죠. 그렇다면 강간죄의 보호법익은 무엇일까요? 1953년 생성 당시 강간죄를 다루던 형법 제32조의 명칭은 ‘정조에 관한 죄’였고, 보호법익은 ‘정조권’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조가 여성의 안전을 비롯 삶 전체를 좌지우지 할 수 없으며, 단적으로 성폭력 문제를 다루는 데 또다른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피해자의 저항 여부 등으로 말이죠. 이를 바꾸려면 보호법익으로 된 정조권을 대체할 새로운 권리 개념이 필요하다고 1980년 말부터 논의되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권리개념이 ‘성적자기결정권’이었습니다.
성적 자기결정권? 명확하게 짚고 이해해야 하는 권리
국내 법조계에서 처음 등장한 건 1990년 간통죄 위헌 여부에 대한 헌법소원 때 였습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 제10조 1항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규정했습니다. 그 후 동성동본금혼법(1997), 혼인빙자간음죄(2009), 간통죄 위헌(2015) 에서 주요한 권리 개념으로 다뤄졌습니다. 위헌 판결 때 국가가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하고 있는지, 침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에 큰 비중을 두었죠. 그러나 이 개념을 단순히 동의 - 거부의 형태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동의와 거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성적 자기결정권’이 아닙니다. 상대의 거부는 의사 표현이자 소통의 과정이며, 피해자는 처음부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상황 자체를 원한 적이 없으니까요. 더불어 이 개념은 ‘신체에 대한 자기 통제’, ‘몸에 대한 권리’ 정도로 축소하는 일도 있는데, 권리를 잘 지켜서 손해 보지 말라는 형태가 아닌, 상대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하고, 자신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 받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대로 꾸려나가는 자율적 주체임을 존중받는 것이다. 또한 누구나 자기 삶의 주체로서 당연히 사랑, 연애, 결혼, 성관계를 언제 어떻게 누구와 할지 혹은 하지 않을지를 타인의 간섭 없이 스스로 결정하는 권리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적 자기결정권' 이다. (p.131~132)” 기억에 남았던 책 한 줄입니다. 모든 권리의 바탕에는 ‘존중’이 들어갑니다. 과연 우리는 당연한 이 전제를 잘 실천하고 있는 걸까요. 이제는 이분법적인 시각이 아닌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시기인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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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 함께 <미투의 정치학>읽기 | [후기] 저자와 함께 <미투의 정치학> 읽기 3 - 젠더 개념과 젠더 폭력 (루인) | 빛깔 | 2019.7.28 | |
젠더(Gender)는 이원적으로 남성·여성을 구분합니다. 후에 사회적으로 구성된 문화적 규범의 분류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죠. 하지만 젠더 개념과 젠더 폭력의 본질적인 의문을 짚었던 적은 적습니다. <미투의 정치학> 세 번째 시간은 트렌스젠더퀴어의 관점에서 바라본 젠더 개념·폭력을 재구성해 트랜스젠더퀴어와 비(非)트랜스를 가로지르는 젠더 폭력 개념의 모색을 중심으로 다뤘습니다. 이 개념 속의 논쟁점
여성 단체마다 ‘성폭력 개념’이 다르지만, 크게 2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가장 포괄적인 개념은 ‘젠더 폭력 혹은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an)’입니다. 한국여성의전화연합 등을 중심으로 남성과 여성 사이의 권력 관계에 따른 폭력을 포괄, 여성에 대한 전반적인 폭력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다만 규범적인 형태로써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죠. 다음으로 협소한 개념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등을 중심으로 한 ‘성적 폭력(Sexual Violence)’입니다. 여성에 대한 전반적 폭력보다 강간, 성추행 등으로 의미를 제한합니다. 이는 성적 폭력으로 해석할 때 동성 간 성폭력, 군대 내 성폭력을 재해석 할 수 있지만, 분리되지 않은 경우가 많죠. 하지만 이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트랜스젠더퀴어가 겪는 폭력을 살폈던 건 드뭅니다. ‘여성’이라는 범위 구성은 무엇이며, 누가 ‘여성’인지에 대해 활발히 논의하지 않았으니까요. 깊이 생각해야 할 관계와 질문들
“어디까지 갔냐?”, “할 껀 다했다.”는 말처럼 연애관계 중 성관계를 맺는 걸 당연시 여깁니다. 그렇다면 외부 성기 형태를 확인해야만 상대의 젠더 범주를 알 수 있는 걸까요? 아니면 섹스-젠더 공식처럼 맞춰서 봐야하는 걸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어렵습니다.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 ‘외부성기 형태’ 그리고 ‘살며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젠더 범주’ 사이의 관계에 대해 한 번도 합의된 적은 없으며, 엄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다른 어떤’걸 얘기 하는 게 젠더인 듯 마냥 받아들여졌죠. 이렇듯 섹스 혹은 젠더를 둘러싼 논의의 역사는 어떤 여성이 되고자 하는지,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여성/남성은 원래 그렇다는 등의 만들어내는 형태로 사유하게 했으며, 외부성기 형태는 젠더와 관련해서 혹은 어떤 개인에 대해 과학적인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는 듯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다시 정립해야 할 시기 물론 젠더 폭력을 여성과 남성 간 권력 위계에 따른 폭력으로 해석한 기존 설명 방식은 이 위계를 밝힐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여전히 이원 젠더 구조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젠더 폭력을 해석하자면 '각 개인에게 여성이나 남성과 같은 특정 젠더 범주를 지정하고, 지정한 젠더에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강압하는 실천'인 셈인거죠. 젠더 규범이 신체적 젠더와 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트랜스젠더퀴어든 아니는 불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건 매한가지입니다. 또한 사회에 맞는 젠더 주체로 살도록 하는 장치 중 하나로 '젠더 지시어'를 들 수 있는데, 분명하게 고착된 대상이 있다고 가정했습니다. 이는 관계 맺음 자체가 젠더 규범에 들어가는 흐름이지만, 삶을 특정 양식으로 규정하는 젠더 폭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범주로 바뀔 지의 가능성마저 차단할 위험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원적으로 젠더를 구분하고, 그 안에서 이 범주가 모든 가능성을 차단한 것이 아닐까하는 고민이 컸습니다. 무엇보다 이를 사유하게 하는 권력 그 자체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해야 폭 넓게 이 문제를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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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공유 or 착취? 플랫폼 자본주의의 본질을 말하다. | [후기] 공유 or 착취? 플랫폼 자본주의의 본질을 말하다(19.7.15.) | 고무곰돌 | 2019.7.24 | |
여러분들은 까대기라는 말을 아시나요? 지옥의 아르바이트라고 불리는 택배 상하차 작업을 뜻하는데요, 택배노동자를 비롯한 특수 고용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나 고통에 대해서는 여러 매체를 통해 접해보셨을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요즘은 정보통신기술과 스마트 폰 등의 대중화에 힘입어 소위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노동 방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택배의 경우에도 자가용을 보유한 공급자에게 로켓배송 고객까지의 스트마일 배송수요를 위탁하는 ‘쿠팡플렉스’란 서비스가 출현했고 배달의 민족 앱을 통해 우리에게 주문음식을 배달하는 우아한 형제들의 ‘배민라이더스’ 등은 우리 주변 곳곳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풍경입니다. 그간 기본소득과 정치철학 관련 강의를 통해 청년과 시민을 꾸준히 만나온 김만권 선생님께서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이라는 주제로 지난 7월 15일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에서 특강을 해주셨습니다. . 상징적으로 표현
요약하자면 플랫폼이란 공급자, 수요자 등 복수그룹이 참여하여 각 그룹이 얻고자하는 가치를 공정한 거래를 통해 교환할 수 있도록 구축하는 환경 2. 플랫폼 자본주의 출현 배경과 성격
3. 플랫폼 노동자 유형
5. 향후 전망 작성 민동섭 자원활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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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 함께 <미투의 정치학>읽기 | [후기] 저자와 함께 <미투의 정치학> 읽기 2 - 여성에 대한 폭력과 미투 운동 (정희진) | 빛깔 | 2019.7.19 | |
오랜 가부장제 문화에서 여성은 독립된 주체가 아니라 남성의 공간, 소유물로 여겨졌습니다. 그 속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계속 이어졌고요. 그러나 2018년 봄부터 지속된 미투(Me Too)운동은 수많은 눈물과 침묵 그리고 생각거리를 담고있습니다. <미투의 정치학> 두번째 시간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미투 운동을 요약하고, 담아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가부장제의 틀 그리고 사문화된 법
착취적 성매매와 가정폭력은 가부장제의 매트릭스(母型)에 해당됩니다. <어머니 – 창녀>라는 형태가 가부장제 사회 속 여성이 다뤄지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벗어나지 못합니다. 가부장제가 생계를 구성하는 원리이기 때문에 무의식으로 작동되기 때문입니다. 근대 이후 대중교육을 거쳐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논의된 건 1994년도에 성폭력 방지법 제정 이후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여성폭력에 관한 관련 법이 생겼습니다. 성매매, 성폭력 그리고 가정폭력 이 3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지만, 사문화(死文化)된 문제에도 들어갑니다. 다시 말해, 여성 관련 법들은 불법과 합법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공식적으론 불법이나 비공식적으론 인정하는 셈 입니다.
크나큰 파급력으로 조금씩 움직이다
어찌 보면 미투는 범죄 신고 ’캠페인’에 불과한데 왜 사회적 파장을 불렀던 걸까요? 신고를 하면 파출소에선 사소한 일로 취급하고, 설령 피해 사실을 말하려면 자신의 평판을 버릴 각오로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 의식의 고양, 다양한 사회적 인프라 그리고 구조적 요인이 맞물리면서 파급력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SNS의 발달로 인해 기존의 성별 정보 격차를 ‘극복’, 숨겨진 범죄를 즉각 가시화된 것도 하나의 요소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극히 일부 현상이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짚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미투의 ‘선별성’입니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쟁점들
먼저 특정한 형태의 폭력만 ‘성폭력’으로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 일 때만 지지를 받고, 올라가는 것이죠. 그러나 폭력의 유형이 다 다르고, 조직 내 성폭력은 은폐 구조에 따라 심한 곳이 달라지는 기준이 됩니다. 이는 노동 시간과 관련이 깊습니다.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기 때문에 착취 아닌 착취인 겁니다. 나아가 노동문제인데 젠더문제로 바꿔서 피해를 가시화, 사소하게 하거나 분열시키는 흐름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음으로 남성 네트워크 상에서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서 성폭력이 되거나 안 되거나 한다는 점 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의 성폭력, 특히 유명 인사일 경우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다는 분노가 크며, 사회는 피해자의 신고 자체를 원인으로 봅니다. 또한 사건 후에도 자신이 활동하는 커뮤니티에서 계속 활동하고, 다시 복귀하는 형태로 이어졌습니다. 정리하자면, 미투의 선별성은 사회의 문화권력에 의해 선택되는 것이며, 정권이 바뀔 때 마다 달라져도 여전히 완벽한 ‘피해자(말을 하지 않는다는 등)’ 와 압도적인 폭력만 ‘성폭력’으로 바라보는 덫에 갇힌 겁니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성 역할'은 스스로를 책임지는 것이다. (p. 107)' 이번 강의를 듣기 전 읽는 내내 눈길이 갔던 문장입니다. 어떠한 사회에서 살고있는지,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하는건지 곰곰히 생각했습니다. 인식을 바꾸는 것 만큼 어려운 일은 없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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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이슈 따라잡기 공부모임 | [한국사회 이슈 따라잡기] 7/4 언론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 시민 _정수영 교수 | 마백 | 2019.7.19 | |
어느덧 ‘기레기’라는 말도 제법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언론산업에 종사하는 저널리스트들에게는 매우 모욕적인 말임이 분명한데, 언론인이라는 사람들부터 스스로를 기레기라 부르며 저들끼리 낄낄거리기도 합니다. 그만큼, 언론을 바라보는 시민들과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 모두 언론의 사회적 기능과 책임에 대해 무시와 체념이 일상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언론에 대한 이런 사회적 맥락에서, 이번 [한국사회 이슈 따라잡기] 강좌는 ‘언론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 시민’이라는 주제를 선정했습니다. 발표는 정수영 교수님이 맡아 주셨는데요, 현재 성균관대학교에 몸담고 계시면서 민주언론시민연합 정책위원도 겸임하고 있습니다. 강의의 첫 부분은 한국의 언론이 얼마만큼 고장 나있는 지 살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세월호 사건 당시에 보여준 언론의 모습은 참담하기 그지없어서, 시민들 개개인에게 언론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가지게 하는 계기였습니다. ‘기레기’라고 하는 표현도 이때 등장했는데요, 그만큼 언론에 대한 실망과 분노는 매우 컸습니다. 저는 80~90년대를 거치면서, 주류언론의 사회적 순기능에 대한 기대를 일찌감치 접었습니다. 이로 인해, 거의 이들 언론을 소비하지 않았는데요, 이렇게 기대감이 거의 없는 제가 보기에도 세월호에 대한 언론 보도는 끔찍할만큼 처참했습니다. 다만, 세월호를 거치면서, 언론의 사회적 기능과 책임에 대해 시민사회 전체가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게 된 것이 그나마 순기능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강의에 참석하신 분들과 발표하신 정수영 교수님도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계셨는데요, 이런 문제의식은 촛불혁명이 일어나 정권이 바뀌어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조중동을 중심으로 한 주류 신문과 지상파 방송의 문제점은 뭘까요? 정교수님은 언론의 자유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국경없는 기자회가 매년 발표하는 언론자유지수에 의하면 한국은 민주주의 정부 시절에는 30~40위, 권위주의 정부 때는 60~70위의 순위에 위치합니다. 언론을 대하는 권력의 자세에 따라 자유지수가 크게 변하는데, 문제는 이렇게 언론의 자유도가 변하는 것과 시민들이 체감하는 언론의 순기능 사이에 아무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올해 한국은 전세계 41위, 아시아 1위의 언론자유도를 가지고 있는데, 자유가 커진만큼 언론이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언론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일이고, 시민들이 정권을 견제해야 하겠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자유가 언론 종사자들의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특권은 아닐 것입니다. 한국의 주류 언론들이 이 점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 지 따져 볼 일입니다.
그렇다면, 언론의 자유가 훼손되지 않으면서, 언론의 사회적 책임과 규제를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는 지가 궁금해집니다. 정교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한국의 언론들은 다양한 윤리강령, 취재보도준칙, 방송강령 등을 자율적으로 수립하고 공유하면서 사회적 책임에 대한 틀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언론 산업이 자유와 규제가 부족해서 현재와 같은 상황에 빠진 것은 아니라는 것인데요.. 실제로 시민들의 평가도 언론에 대해 매우 부정적입니다. 조사 기관에 관계없이, 언론의 신뢰도에 대해 한국은 거의 취하위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대책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정교수님과 참석자들 모두 선명하게 설명하지 못 하는 것 같습니다. 원론적으로 시민의 참여를 늘리고, 시대착오적인 규제들을 혁신해 나가야 합니다만, 조금 더 구체적인 방향으로 모아지기에는 아직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교수님의 의견으로는 현재와 같은 언론 산업 구조와 사업 모델, 즉 수입의 90% 이상을 광고로부터 얻는 경영 구조가 개혁되지 않으면, 자본의 이익에 의해 언론은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고 합니다. 특히, 세상이 디지털 환경으로 전환되면서, 미디어가 다양해지고 있는데, 이로인해 언론사간의 경쟁이 더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경쟁이 치열해지고 수익성이 낮아지면서 언론은 자본의 손아귀에 더욱 놀아나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한국 언론은 권력과 자본 사이에서 건강한 조정자와 감시자라는 본연의 역할을 팽개치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언론사의 이익에만 충실하게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 모든 참가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문제를 풀기 참 어렵다는 생각을 여러 번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시민사회가 당장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은 일본, 영국과 같이 공영방송 중심의 지상파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요, 세금과 다름없는 시청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은 적극적으로 시민들이 개입하여 BBC나 NHK와 같은 신뢰도의 언론사로 거듭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교수님의 대안이었는데요, 참가자 모두 공감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사기업인 신문사와 방송사들은 시장의 논리에 맡기는 대신, 공영방송에 대해서는 끈임없이 혁신할 것을 요구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한국 언론의 답답한 상황에 대해 이번 강의로 부터 제가 얻은 한가지 교훈이고 다짐이었습니다. 후기 작성: 전병옥 (자원활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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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고전읽기 1] 애덤 스미스 <국부론> | [후기] 경제학 고전 읽기 <국부론> 제5강('19.7.2.) - 스미스의 경제적 자유주의 | 고무곰돌 | 2019.7.19 | |
숨가쁘게 달려온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는 시간이 종강을 맞이하였습니다. 지난 4주에 걸쳐 스미스의 생애와 주요 저작의 내용을 살펴보고 도덕감정론의 시각으로 스미스의 경제이론을 바라보기도 하였으며 <국부론>에 담긴 시장이론·분업론·가치론·분배론을 훑어보았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시간으로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이 정의의 법률을 위배하지 않는 한 자신의 이익을 자신의 방식대로 추구하게끔 자유롭게 놓아주는 즉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하라는 주장입니다. 아울러 자기 절제(self-control)를 전제로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와 같이 개인들이 각자의 자연적 자유를 발휘하게 된다면 소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연적 조화 또는 질서가 달성되어 개인과 사회 전체가 균형적인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장의 측면에서 보면 개인의 이기심을 바탕으로 하는 경제활동이 공정한 경쟁의 상태에서 이루어질 경우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죠. 또 경제적 자유주의는 경쟁과 노동이동 등을 제한하는 불합리한 정부의 규제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이 특징인데 이러한 규제가 전반적으로 산업의 자연적 균형을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책의 구성에서도 알 수 있듯 보호관세 및 보조금 지급 등 자유무역을 해치는 중상주의에 대한 비판도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스미스는 중상주의에 맞서 불합리한 규제철폐와 법치주의의 바탕에서 잘살려는 인간의 본성과 보이지 않는 손이 효율적 경쟁시장을 형성하게 되고 저축·투자의 증대와 분업발달 등이 맞물려 경제발전에 이르게 된다는 경제발전의 길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할 것은 그가 도덕감정론에서 밝힌 것처럼 공정함이 토대가 되는 시장경제체제를 구축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신자우주의자들이 정부는 경제에 일절 개입하지 말고 시장에 맡기라는 주장과는 결이 다른 얘기입니다. 이번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는 시간을 통해 많은 분들이 그런 점을 명확히 인식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앞으르도 계속될 경제학 고전읽기 강의에 오늘날 경제 현실을 고민하고 그 기원을 파헤치면서 대안을 모색하는데 관심있는 시민 학생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원활동가 : 민동섭 <더보기> [후기] 경제학 고전 <국부론> 제1강(19.6.4) 애덤 스미스의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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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 함께 <미투의 정치학>읽기 | [후기] 저자와 함께 <미투의 정치학> 읽기 1 - 그 남자들의 '여자 문제' (권김현영) | 빛깔 | 2019.7.12 | |
미투(Me Too)는 한국사회의 뿌리깊은 남성 중심적 성 문화를 뒤흔들었던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성차별적 통념이 얼마나 견고한지, 이를
무너뜨림의 어려움도 드러났습니다. 피해자가 고백한 후의 감당해야 할 몫도 너무나 크고요. 미투운동 이후 다양한 쟁점이 부각된 지금, 어떻게 나아가야 걸까요. 저자와 함께 <미투의 정치학>
읽기 첫번째 시간은 권김현영 선생님의 강좌로 책 전후를 중심으로 풀어나갔습니다.
네
잘못이 아니라는 말의 힘
3차례의 프레임 전환시도
제 모습을 드러낸
존재하는 위력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고, 잘못된 관념과 문화가 있으면 바꿔야 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지켜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의제기를 하면 공공의 적으로 몰아가는 것이 오늘날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사회에도 각 사람에게도 해가 될 뿐 입니다. 이제는 뒤엎어야 하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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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고전읽기 1] 애덤 스미스 <국부론> | [후기] 경제학 고전 읽기 <국부론> 제4강('19.6.25.) - 노동가치론 | 고무곰돌 | 2019.7.2 | |
어느덧 계획된 5주중 절반을 넘어서 이제 두 번의 시간만 남았습니다. 6월 25일 네 번째 시간에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중 가치론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상품의 가치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라는 질문이 핵심인데요. 이를 알아보기 앞서 우선 시장가격과 자연가격의 의미를 새겨보았습니다. 시장가격은 우연적 요인과 유효수요에 의해 변동되는 성질을 갖는데 비해 자연가격은 어느 시기 어느 경제에서나 경제의 일반적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평균수준의 임금, 이윤, 지대의 합을 의미합니다. 또 자연가격은 시장가격 변동의 중심으로서 자본, 노동 등 생산요소의 자유로운 이동과 경쟁으로 인해 시장가격은 자연가격으로 수렴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연가격이 가치론의 분석 대상이 됩니다. 스미스는 상품의 가치를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나누었는데 사용가치는 상품의 쓸모를 말하며, 교환가치란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분업사회에서 말하는 가치는 대개 교환가치일텐데 스미스는 노동이 교환가치의 원천이며 진정한 척도라는 노동가치설을 주장했습니다. 노동가치설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각종 물품을 획득하는데 필요한 노동의 양 사이의 비율이 물품들 상호 교환의 유일한 요인이라고 보는 입장이 투하노동가치설입니다. (p.60) 이에 비해 상품교환을 통해 지배하는 노동의 크기에 중점을 두는 것이 지배노동가치론입니다. 나중에 스미스는 투하노동가치설을 포기하고 지배노동가치론을 내세우게 됩니다. 이밖에 일반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자연임금·자연지대·이윤이 포함된 생산비용을 토대로 가치를 바라보는 생산비용 가치론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습니다. 노동가치론은 투입노동량의 측정이 어렵고 사유재산이 존재하는 경제에서는 적용이 곤란하다는 이론적 문제를 안고 있지만 농업만이 가치 창출이 가능하다는 중농주의의 한계를 벗어나 농업만이 아니라 제조업도 가치를 창출한다는 사실을 짚어냈고 리카도와 맑스로 계승되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갖고 있다 할 것입니다.
생산비용 가치론을 구성하는 요소는 임금, 지대, 이윤입니다. 즉 생산비용을 분리해보면 임금, 지대, 이윤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요소 하나하나가 분배론의 논의 대상입니다. 우선 임금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토지 사유와 자본 축적이 없었던 원시시대에는 노동자는 노동생산물 전체를 향유할 수 있었지만 토지의 사적소유가 이루어진 후에는 노동생산물에서 지대와 이윤이 공제되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임금은 어떻게 결정될까요? 스미스에 따르면 우선 임금은 보통 노동자와 고용주간의 계약 또는 협상의 방법으로 정해집니다. 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상황은 항상 노동자에게 불리합니다. 애덤 스미스가 활약하던 당시에도 노동자들의 단합이 금지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고용주들이 은밀히 연합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p.86~88). 그렇다하더라도 임금을 일정 수준이하로 내릴 수는 없다고 스미스는 주장합니다. 자본주의 유지에 필수적인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서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부양할 수 있을 정도의 임금이 지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p.89) 또 다른 방식이 임금기금입니다. 축적된 자본 중 임금으로 지출되는 부분인 임금기금은 노동수요 충당에 쓰이는데 임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수요는 그 나라의 수입 및 자본의 증대와 함께 필연적으로 늘어납니다. 즉 자본축적이 임금기금의 크기를 결정하므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게 되는데 이같은 입장에서 애덤 스미스의 낙관적·조화론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어 이윤의 개념과 의의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윤은 생산비용에서 임금을 제외한 나머지로 보는 임금 공제설이 대표적으로 스미스에 이어 고전학파 경제학을 완성시킨 것으로 평가받는 리카도 이론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이윤은 임금에 비해 더 변동이 심하고 측정하기 힘든데 시장가격만이 아니라 경쟁자들의 행동, 제품의 생산 뿐만 아니라 수송과 보관 등으로부터도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p.115) 이 때문에 정확한 이윤율을 확정할 수가 없고, 대체적인 수준은 이자율을 통해 파악합니다. 이윤율과 이자율은 대개 같이 변하기 때문인데 통상 이윤율은 투자의 위험부담을 보상하기 때문에 이자율보다는 다소 높다고 합니다. 또 이윤은 자본투자의 대가로서 그 크기에 따라 증대하지만 이윤율은 저하되는데 이를 이윤율 저하의 법칙이라 합니다. (p.158) 교수님께서 수업 마지막에 강조하신 부분은 자본 축적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자본은 근검절약에 의해 증대될 수 있다는 근검절약설을 내세웁니다. 낭비 또는 소비는 현재의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욕구이나 저축은 우리의 상태를 더 좋게하려는 욕구로서 저축을 통해 축적된 자본이 분업촉진과 고용증대를 가져오고 이는 국가의 부 확충으로 연결된다는 논리구조를 갖고 있는 주장입니다. 군부 독재 시절 근검절약을 강조하고 소비를 죄악시하며 저축을 강요받았던 경험이 있는 우리에게는 꽤나 익숙한 얘기이기도 합니다. 강의가 끝난후 역사적 관점에서 동·서양 이윤의 격차에 대한 질의, 우리나라는 국가주도의 리더십 기반하에 시장경제를 활성화한 것이 경제성장의 주 요인이었다는 의견, 여타 동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저축률과 은행의 안정성이 담보된 것이 차별적 지점이 아니었는가라는 생각 등이 논의되었고 교수님께서는 인적자본의 확충이 가져온 경제성장의 효과를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시간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국부론 강의 전반을 정리하면서 애덤 스미스의 경제적 자유주의, 케인즈 학파와 시장주의 학파의 이론 등을 비교·분석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 자원활동가 민동섭 - <더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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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고전읽기 1] 애덤 스미스 <국부론> | [후기] 경제학 고전 읽기 <국부론> 제3강('19.6.18.) - 시장이론과 분업을 중심으로 | 고무곰돌 | 2019.6.25 | |
애덤 스미스의 주요 저작 중 <도덕감정론>에 이어 강의주제이자 핵심인 <국부론>을 본격적으로 살펴보는 세 번째 강의가 지난 6월 16일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에서 열렸습니다. 강의안과 더불어 교재로 쓰이는 국부론 발췌본의 해당 내용을 짚어보면서 그 의미를 파악하고 역사적 맥락과 그 의의를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강의 후반부 내용은 작성 파일의 손상으로 다시 보완할 예정입니다. * 괄호안의 숫자는 국부론(비봉출판사) 번역본의 해당 페이지를 명기한 것입니다. - 자원활동가 민동섭 - <더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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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미술학교 - 인체드로잉 | [후기] 대체불가능한 시간 - 미술학교 인체드로잉 /황호경 | 그아무개 | 2019.6.19 | |
<나만의 선을 찾아가는 시간 ⓒ참여연대> 그러니까 이 수업, “인체드로잉”에 참여하고자 작정했던 이유가 있었을 터인데, 그것부터 시작 하려고 했는데, 나의 기억력은 간장 종지에 똑 떨어진 간장 한 방울과 같음에 틀림없다. 그 이유라는 것은 오간 데 없다. 봄이 왔다고 하기엔 아직 추울 때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조금 덜 더운 여름이 왔을 때 수업이 끝났다. 그래,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당연히 기억에 없지, 라고 둘러대고 나면 위로가 될는지. 늘 빠른 세월이 서러웠는데 이리 고마운 날이 올 줄 이전에 미처 몰랐다. 그래도 거슬러 올라가보자. 분명 기억하는 것이 있을 게다. 일단, 첫 수업은 빠졌었다. 한달 전에 잡아 놓은 선약이 첫 수업과 겹쳤기 때문이다. 두 번째 수업에서 무엇을 배우고 나는 무엇을 했는지 그 또한 잊었다. 아마 인체를 그렸을 것이다. 그러나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누군가 차려 놓은 간식에 허기졌던 뱃속이 안심했던 것은 단단히 기억하고 있다. 세 번째 수업도 갔었다. 여전히 다양한 간식과 나의 포식은 빠지지 않았었다. 그리고 인체를 그렸을 것이다. 꾸역꾸역 빠지지 않고 출석했다. 간혹 내가 먹으러 가는 것인가 라는 생각에 매우 행복했던, 순간이라 하기엔 매번 그랬다. 그러나 어김없이 인체도 그렸다. <그림그리기전 다함께 당 충전 ⓒ참여연대> 서로의 그림을 보며 동기들과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그러나 남의 그림을 보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선이 어떻다 하는데 무슨 소린지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그림에서 내 것 과 다른 점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말하면 그것이 칭찬이었고 나는 그것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선생님께서는 한 명 한 명에게 이런저런 말씀을 해주셨다. 때론 또박또박 어쩔 땐 역시 어리둥절스런 말씀을 해주셨다. 마음속 느낌과 손맛은 멀고 멀었다. 앗! 그리고 우리 모두의 생애에 첫 누드 크로키. 벗은 누군가를 본다는 것은 둘째고 유난히 짧은 5분과 7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델이 맞춰 둔 알람 소리에 여기 저기 아스라히 퍼지는 한숨과 서둘러 종이를 넘기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들이 문득 그립다. 그리고 서로 모델을 서 줬었다. 다른 사람을 뚫어져라 보고 또 보았던 수많은 10분들. 가슴이 미어지게 짧은 시간들이고 내 맘과 머리엔 앞에 선 사람만 오롯이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큰 재미는 전시의 준비였다. 뭐 대단하다고 벽에 걸어두고 보고 보여주는가 싶지만 나의 무엇이 벽에 걸린다는 것 자체로 뿌듯했다. 먼저 간단한 회의 자리에서 각자 일을 맡았다. 누구는 포스터를 그리고, 누구는 라벨을 만들고 누구는 액자를 사고 또 누구는 시장을 봤다. 벽에 우리가 그린 그림을 걸고 각자의 그림에 솔솔 묻어 나는 동료들의 색깔과 선을 칭찬했다. 그리고 마지막 간식을 진실로 배가 터지도록 무지막지하게 먹었다. 우리 그림은 1주일 동안 오가는 사람들 앞에 나름 자랑스럽게 걸려 있었다. 전시 마지막 날 우리는 같이 모여 우리 작품을 거두었다. 이번엔 몇몇이 모여 간식이 아닌 저녁을 먹었다. 괴상한 자리였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뜬금없이 사랑이란 말이 오갔다. 남에게 지지 않을 만큼 삶에 볶이고 치이면서 사랑 따위 감상이야 이젠 먼 단어가 될 법한 나이들이었다. 대한민국 아줌마들의 명예를 걸고 사랑 말고 우다다 쏟아 놓을 소제는 무궁무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이런 유치찬란한 단어가 튀어져 나왔는지 역시 기억에 없다. 그리고 우리의 낯선 사랑 타령의 마지막은 한 분이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보셨다는 문구로 마무리 되었다. "그 또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그 또는 그녀가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란다.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라니. 어머나 설레어라. 참으로 오랜만에 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액자설치, 조명 조정, 음식 준비 등 전시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가 함께했다 ⓒ참여연대> 취미를 한 답시고 약 1년 반 동안 토요일을 화실에서 보냈다. 개인적으로 사람을 그리기가 제일 어려웠다. 눈, 코, 입, 팔, 다리만 그리면 됐다 싶지만 그 사이사이 뭐가 많아서 골치가 아팠다. 끌어 모을 수 있는 모든 집중력을 쏟아 부어도 보는 것과 그린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깊고 넓었다. 나아가 똑같은 사람은 세상에 없다. 한 명 잘 그려냈다고 하늘을 펄펄 날았던 내 자신감은 다른 사람을 그리다가 땅속으로 여러 번이나 곤두박질 치곤 했다. 그렇게 다르다. 얼굴이, 몸이, 사람이 다르다. 똑 같은 대상을 그려도 첫번째 그림과 두번째 그림이 다르다. 나에게 그린다는 것은 무엇인지 몰랐고 알고 싶었었다. 나와, 다른 사람과, 그 시간과, 그림이 세상에 하나 뿐인 귀하고 소중하여 대체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도 모르게 알아가기 때문에 그리고 있지 않았어나 싶다. 금요일 저녁마다 모여 앉은 우리가 생각난다. 간장 한 방울 같은 기억력 때문에 아직도 얼굴과 이름의 짝이 희미 하다. 그럼에도 다른 목소리와 손으로 오로지 "내"가 되었던 거기 그 수업에서 우리는 엄마도, 선생님도, 딸도 아닌 대체 불가능한 스스로였다. 아름다웠다. “인체드로잉”이 그랬다. <대체 불가능한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들 ⓒ참여연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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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고전읽기 1] 애덤 스미스 <국부론> | [후기] 경제학 고전 읽기 <국부론> 제2강('19.6.11.) - 도덕감정론을 중심으로 | 고무곰돌 | 2019.6.18 | |
애덤스미스의 생애와 주요 저작의 간략한 소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첫 번째 시간에 이어 이번 시간에는 첫 번째 시간에서 미처 다루지 못했던 주요 저작의 내용을 살펴보고 <도덕감정론>의 구성과 주요 골자를 짚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난시간 교수님의 열강이 이어지다 보니 계획된 진도보다 다소 지연되었는데요, 그걸 염두에 두셨는지 상당히 속도감 있으면서도 진지하게 설명해주셨습니다. 강의 전반부에는 저작 중 <철학적 주제에 있어서의 천문학 역사 에세이>라는 다소 생소한 책에 대해 상세히 소개해주셨는데 총 분량은 150여페이지 정도로 학자들의 천문학 연구내용이 100여 페이지를 차지합니다. 제목처럼 천문학의 변동과정 분석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 책에서 눈여겨 볼 점은 과학적 현상을 바라보는 세가지 시각입니다.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움을 증명하듯 surprise 다음에는 왜 그런지 의심하게 되는 wonder 최종적으로는 경이롭게 바라보는 admire의 단계로 이행된다고 하는데 여기서 상상력의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이해(연결)가 안되는 상황에 직면하면 제대로 매끄럽게 설명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있기 떄문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즉 상상력은 사고의 괴리·단절을 매끄럽게 연결해주면서 질서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워하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게 되고 이해한 이후 감탄과 경이로 나아가게 되는 과정에 대해 교수님께서는 철판위에 쇳가루를 올려놓고 그 아래 자석을 갖다대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예로 들어주셨습니다. 슘페터가 독창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다고 평가한 <국부론>에 대해서는 보이지 않는 손, 개인의 이익, 자본, 자유방임주의와 같은 개념들이 각각 Mandeville, 자연법 전통, 중농주의, 로크·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여러 학자들이나 학문적 입장에 분산되어 있던 여러 개념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의미가 있다고 평가해주셨습니다. 이어 오늘 강의의 핵심인 <도덕감정론>을 살펴보았습니다. 1790년 애덤 스미스가 사망하던 해 마지막 수정증보판이 발행된 이 책은 아래와 같이 총 7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단히 논리성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며 마지막 7부는 이론사에 해당됩니다.
가장 중점적으로 살펴본 부분은 동감(sympathy)의 원리였습니다. 동감은 윤리(도덕)의 근거로서 애덤 스미스는 기존의 이성, 신, 양심 등과 같은 선험적인 것들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에서 찾았는데요, 이는 유럽대륙의 이성중심주의와는 결을 달리한 스코틀랜드의 전통으로 허치슨을 시작으로 그의 제자인 흄, 스미스에게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감은 타인과 감정들을 공유하는 인간의 본성으로 동물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 또 하나 지나칠 수 없는 것이 Adam Smith problem입니다. 이는 독일의 역사학파가 19세기부터 제기한 주장으로 도덕감정론의 도덕세계와 국부론의 시장경제 세계가 서로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는 국부론에서 이야기하는 이기심과 도덕이 과연 조화를 이룰 수 있는냐의 문제이기도 한데요, 공정한 관찰자는 타인보다 자기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이기심을 추구하고 경쟁을 통한 부의 추구를 승인하기는 하지만 공정한 행위가 아닌 것은 부정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애덤 스미스의 체계내에서 해결이 가능해집니다. 그렇다해도 의문은 남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독과점 같은 불공정경쟁이 판치는 현실에서 정말 이 두 세계의 양립이 가능하기는 한걸까요? 쉽지 않은 문제라는 교수님 의견에 수강생들의 질문과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현대 주류경제학에서는 egoist와 self-interest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의견. 애덤 스미스의 신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질문, 헤겔의 간주관성과의 관계 등 의미있는 생각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작성 : 자원활동가 민동섭 <더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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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이슈 따라잡기 공부모임 | [후기] 5/30 한국사회 이슈 따라잡기 3 _한국교육의 길을 묻다 | 마백 | 2019.6.14 | |
한국의 교육 난맥상에 대한 백가쟁명식 논의는 더 이상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의 이해와 관점이 얽혀 있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요구사항과 해결책을 주장합니다. 이런 일들은 정권과 관계없이 지속되고 있는데요. 새로운 대학입시제도 개편안에 대한 권고안을 도출하기 위해 지루한 논의와 소모적인 논쟁이 벌어진 작년의 사례만 봐도 그렇습니다. [한국사회 이슈따라잡기]의 5월 강좌는 이런 교육 현실과 해결책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강사를 맡아 주신 징검다리교육공동체의 강민정 대표는 30여년동안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셨던 경험을 바탕으로 실제 교육 현장의 실상과 개선 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강의의 시작은 교육기본법 제2조에 명시되어 있는 한국 교육의 목적에 대한 것을 살펴보는 것이었습니다.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중략)……..,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목적으로 한다”와 같은 조항인데요,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만큼 잘 구성된 문장입니다. 강의 중에 주목한 것은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에 대한 부분입니다. 기본법에 이미 우리의 교육은 필요한 지식의 전달 만이 그 목적이 아님을 명시하고 있는데, 실제 학교에서의 교육은 긴 시간동안 시험을 잘 보게 하는 아이들을 양성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마음은 한국 교육과 관련된 지표를 보면서 더욱 커졌는데요... 잘 알려져 있듯이, 한국은 국제 학업 평가에서 매우 우수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60~70개국의 아이들과 비교했을 때, 한국 학생들은 수학과 과학 등에서 항상 3~5위 안에 들 정도로 훌륭합니다. 그러나, 이런 시험 성적의 이면에는 전혀 다른 결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 학생들의 학업에 대한 내적 동기(흥미)는 전체 대상국 중 58위에 머물고 있고, 자아 효능감은 62위, 자기 신뢰도는 63위, 자살률 2위 등의 결과도 같이 존재합니다. 이런 결과를 입체적으로 해석해 보면, 한국의 학생들은 공부하는 것에 거의 흥미가 없으면서도, 무슨 이유인지 매우 공부를 잘 합니다. 공부를 그렇게 잘 하는데도, 무슨 이유인지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과 자신감은 매우 낮습니다. 강민정 대표의 말처럼 10대의 파릇파릇한 아이들의 마음 속에 커다란 괴물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여전히 과도한 학습의 부담 속에서 스스로를 갉아 먹는 순간에도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4차 산업 혁명으로 표현 되듯이, 빠르게 개발되고 있는 기술 혁신과 사회 구조 변화는 현재 10대들의 직업 선택을 크게 바꿀 것으로 보입니다. 단순히 미래 사회의 유망 직업 등을 나열 하면서, 아이들을 이런 직업군으로 밀어 넣는 일들이 이제는 거의 쓸모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단순히 정보를 암기하고 있는 것이 무의미해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과 협업하여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존중과 다양한 문화적 소양, 의사 소통 능력이 중요한데요.. 하루 종일 공부 노동에 시달리는 우리 10대들이 이런 능력을 제대로 키워나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강사이신 강민정 대표도 이와 관련된 우려가 많으셨고, 강의 참가자들도 모두 큰 걱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학교를 바꾸어 가는 것에 있습니다. 현 경쟁 위주의 교육 문화를 우리가 법에 명시한대로 학생들이 자립하고 민주시민이 될 수 있게 도와주는 방향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강민정 대표께서는 혁신학교에서 근무하신 경험을 공유해 주셨습니다. 각 지방자치단체의 교육감을 시민들이 직접 선출 하게 되면서, 교육 정책과 철학의 큰 변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혁신학교인데요. 학교가 혁신학교로 지정되고 교육에 대해 교사들이 토론하고 실험 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학교의 분위기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한 내용이어서, 참가자들이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례로 교사와 학생들이 하나의 사안에 대해 큰 의견차이가 있을 경우, 한 자리에 모여 서로 의견을 나누고, 마지막에 투표를 통해 결정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의사결정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런 일련의 과정이 학생들에게 내가 삶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가질 수 있게 하고, 민주주의를 학습하게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시민단체의 경력을 가지고 있는 강의 참가자께서 큰 관심을 보이셨는데, 시민단체라 하더라도 민주적인 의사결정에 큰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학생 시절에 습득하고, 평생 체화 해야 하는데, 우리의 기존 교육은 그렇지 못 해, 어른이 되어 인식이 바뀌어도 태도는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혁신학교를 통해 더 많은 사례가 전파되고, 학생들의 자주권을 더 많이 보장해 주는 변화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강의 후에 질의 응답 시간에도 학교 교육 시스템이 너무 느리게 변화하고 있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강민정 대표는 오랜기간 정착되어 온, 극단적으로 지식의 습득만 강조하는 상황에서, 조금 더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식의 습득보다 기존의 지식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능력을 중요시하는 관점에 기초해, 학교의 시스템을 더 과감하게 개혁해 나가야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특히, 교사의 역할을 강조하셨는데요... 학교는 교사가 변하는 만큼 변하기 마련이어서, 새로운 교육 실험과 혁신에 대한 교사들의 노력이 장려되어야 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더불어 내 아이만 차별화 시켜 유명 대학에 입학시켜야 한다는 부모들의 의식이 교육 혁신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합니다. '내' 아이가 아닌 '우리' 공동체의 아이로 학부모들의 의식이 확장되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고, 많은 참가자들이 가장 크게 공감한 지점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더디게 변하는 학교의 모습에 대한 안타까움이 많이 표출되었지만, 혁신 학교의 사례와 같은 긍정적인 변화를 들을 수 있어서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강민정 대표께서 혁신 학교에 몸 담으시면서 경험하셨던 변화를 직접 설명해 주셔서 더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강 대표님의 말씀처럼, 지금의 교육과 학교 시스템은 세상의 변화와 동떨어져서 표류하고 있습니다. 이를 지적하고, 새로운 전환을 이끌 시민의 요구가 더 커지길 기대하고, 여러 의미있는 사례들이 널리 퍼져 나가길 기원합니다. 후기 정리: 전병옥 / 자원활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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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고전읽기 1] 애덤 스미스 <국부론> | [후기] 경제학 고전 읽기<국부론> 제1강('19.6.4.) - 애덤 스미스의 생애 | 고무곰돌 | 2019.6.10 | |
왜 역사를 공부하는 가라는 질문에 대해 아리스트텔레스는 “무언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것의 기원과 발전과정을 살펴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경제학의 출발점으로서 현재 자본주의 경제제체의 핵심인 시장의 효과를 강조했던 애덤 스미스와 그의 저작 <국부론>을 이해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의의가 클 것입니다. 특히 정부의 개입을 비효율적이면서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것으로 여기며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시장만능주의, 자유시장주의의 뿌리로 오용하는 경우가 많은 우리 사회의 풍토에서라면 더욱 더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정치·경제·사회·철학·국제 등 많은 분야를 망라해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기르려는 시민들의 배움터 역할을 해온 참여연대의 느티나무 아카데미에서는 2019년 여름학기 고려대학교 김균 교수님을 모시고 경제학 고전읽기 시간 – 아담 스미스 <국부론> - 을 마련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생애는 어떠했을까요? 1723년 스코틀랜드 커칼디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애덤 스미스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는데요, 첫 번째로 그의 전기를 집필한 J.Rae에 따르면 스미스는 심한 건망증이 있지만 강한 집중력에 내성적인 성격으로 고지식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다고 합니다. 기술혁신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한 슘페터는 great synthesizer로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계몽주의 풍토가 강했던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에서 도덕철학을 수학한 그는 1750년 글래스고 대학 논리학 교수를 거쳐 1752년 도덕철학 교수로 부임하게 됩니다. 당시 도덕철학은 자연신학, 윤리학, 법학 및 정치학, 경제학 등의 실용학문으로 구성되어 있던 분야였는데 1759년 우리가 잘알고 있는 <도덕감정론>을 펴내어 일약 유럽의 정상급 학자로 부상하게 됩니다. 1764년부터 2년여 동안 당시 엘리트 교육의 최종단계로 유행했던 그랜드 투어를 통해 볼테르, 중농학파인 키네, 투르고 등과 교류하기도 한 그는 귀국후 1776년 그 유명한 <국부론>을 펴내게 되고 에딘버러 세관장을 거쳐 1790년 세상을 떠납니다.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난 뒤 느티나무의 아카데미의 하이라이트 수강생간 의견 교환 및 질의 응답이 이어졌습니다. 언제나 초반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지만 막상 정리할 시간이 되면 그날 강의의 감상 및 자신의 의견을 얘기하는 시간이 길어지기 일쑤인데 오늘도 정해진 시간을 넘겨 열띤 논의가 펼쳐졌습니다. 질의중 가장 핵심적이었던 것은 도덕감정론과 국부론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두 저작의 관계를 각각 별개로 보는 입장과 서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는 두가지 시각이 존재하며 본인은 후자의 입장에 서있으며 향후 이어질 강의에서 차차 그 부분을 같이 생각해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저녁에 참여연대 부근을 지나가던 한 주민께서 지나가다 강의 안내문을 보고 수강하러 오셨습니다. 처음 참여연대에 오신터라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열띤 강의와 적극적인 참여가 마음에 와닿는다는 소감을 밝혀주셨는데요, 강의가 시작되기는 했지만 애덤 스미스로 가는 입구를 안내하는 내용 정도만 진행된 상태이니 관심있는 분들은 어려워하지 마시고 느티나무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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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미란의 창조성놀이학교] 모든 사랑을 누비다 - 책과 바느질 | [후기] 제미란의 창조성놀이학교-'사랑을 누비다' | 개똥이 | 2019.6.8 | |
- 낮설음 그리고 설레임이 공존했던 6주는 적당한 속도로 흘러갔다.
다시 시작한 서울살이 5년만에 참여연대 아카데미에 문을 두드렸다. 카페통인에서 차를 마시고 숱한 전시회를 보았지만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번 수업을 선택하는데 두가지 단어가 크게 작용을 했다. 신뢰 그리고 창조성. 이미 ‘제미란의 창조성 놀이학교’ 수업을 경험한 분을 알고 있었고, 그 선생님의 선택이라면 믿고 선택할 수 있다는 신뢰가 있었다. 그래서 그 수업이 무슨 수업인지조차 모르고 기다렸는데 봄학기 프로그램이 오픈되고보니 ‘창조성’이라는 내 인생에 꽤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단어가 포함된 수업명이었다. 그리고 이번 학기에는 바느질로 사랑을 누빈다는 부제가 적혀있었는데,, 바느질과 사랑이 만나서 어떤 창조성을 자극할지 궁금해졌다. 또한 벨훅스의 <올 어바웃 러브>라는 책을 함께 읽을 것도 기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형성된 커뮤니티 안에 들어가는 것은 낮설고 긴장되었다.
이런 설레임과 긴장으로 시작된 창조성놀이학교는 회차가 진행될수록 편안하게 다가왔고 매주 다른 시와 텍스트를 읽고 서로의 경험과 느낌을 나누며 서서히 긴장이 풀렸다. 또한 기존 회원들의 관계를 한 발자국 떨어져 지켜보면서 축적된 시간이 만들어낸 촘촘한 신뢰와 연대감 그리고 짙은 사랑을 볼 수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언어가 존재하고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었고 서로를 향한 존중이 자연스럽게 스며있었다. 매주 여는시와 닫는시를 준비하는 사람은 참여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시를 찾으며 행복한 고민을 했고, 챕터별로 발제를 준비하는 사람은 함께 나누고 싶은 문장을 고르고 발문을 하며 유쾌한 고민을 자청했다. 더불어 바느질로 한땀한땀 수를 놓고 누비는 과정에서 우리는 단순한 반복적 행동이 주는 평화로운 명상의 순간을 맛보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와 개개인의 창조성은 우리들을 디자이너로 만들었다. 가방의 모양을 고민하고 조끼를 재단하고 이불의 배색을 맞추는 우리들은 천과 실 바늘을 친구삼아 창조성놀이학교에서 재미있게 놀았다. 재미있었던 놀이의 경험과 기억은 이미 다음학기에 대한 호기심과 설레임으로 자리잡았다.
마지막 시간에 받았던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을 적는 것으로 후기를 마무리 하려고 한다. - 바느질은 당신에게 무엇이었나? 나에게 바느질은 다른 시공간으로 넘어가는 다리였다. 바늘이 들고나는 반복적인 행위를 계속 하다보면 시간이 흐르다가 멈춘듯한 느낌을 받고 바느질을 하는동안 오르락내리락하는 숱한 생각과 감정들은 어느순간 정적인 상태가 되었다. 그냥 묵묵히 제 속도로 걷다보면 도착하는 그곳이 있고 그 중간중간에 만났던 널뛰는 감정들도 반복적인 행위 안에서 평정상태로 찾아드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또한 뾰족한 바늘이 가는 실과 짝을 이뤄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면을 보고 있으면 ‘시간의 축적’데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난 6주동안 무엇을 경험했나요? 사실 이미 형성된 커뮤니티 안에 흡수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어색함이 있었다. 그러나 한주한주 시간이 갈수록 편안해짐을 느꼈고 서로를 향한 정과 마음씀은 관계의 온기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개인적으로는 ‘3ㅍ’(편견, 판단, 평가)에 집중했었는데 사람과 상황에 대한 내 안의 편견과 판단, 평가가 올라올때마다 짧은 알아차림 명상으로 ‘3ㅍ’을 견제하고 생각과 감정을 환기시키는 연습을 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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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 배움 서클] 고령화 시대의 아픔과 돌봄 | [노년 배움 서클] 고령화 시대의 아픔과 돌봄 | annbon | 2019.6.4 | |
지난 1월 마음의 준비도 없이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역시 마음의 준비 없이 홀로 남아 힘들어하시는 아버님을 보면서 전에는 해보지 못한 노년과 질병, 죽음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늙은 부모님이 있는 자식으로서나 노후를 준비해야 하는 중년으로서 내가 얼마나 노년에 대한 생각과 준비가 부족한지 깨달았다. 그런 차에 마침 참여연대에서 ‘노년배움서클’ 강좌안내를 보게 됐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이 강좌가 일회성이 아니라 수년전부터 계속돼온 배움서클의 연장이었는데도 나는 처음 보는 강좌였다니 내가 그동안 얼마나 노년 문제에 관심이 없었는지를 반증한다.
총 5회 모임 중 세 번은 전문가 강의로, 두 번은 독서모임으로 이뤄졌다. 전문가 강의는 노년에 대한 배경지식이나
심각한 고민이 없었던 나로서는 많은 정보를 알게 되고 생각해볼 거리를 얻게 된 유익한 시간이었다. 고령화를
사회적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을 들으면서 고령화가 단순히 접근할 문제가 아니구나… 생각하게
됐고, 현재 우리나라 노인돌봄 제도의 상황과 문제점에 대한 강의에서는 노령화의 속도를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에 놀라기도 했다. 마지막 강의에서는 현직에 계시는 요양보호사의 말씀을 통해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우리 사회 분위기를 또 한번 통감했고 생각보다 허술한 제도와 인프라에 실망했다. 강의
자체도 좋았지만 이후 질의응답이나 조별 나눔을 통해 다양한 연령대와 환경을 가진 구성원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밝히는 다양한 의견을 듣는 것도 좋았다. 두 번 있었던 독서모임에서는 고령화, 아픔, 돌봄 등을 주제로 한 책을 읽고 조별로 모여 각자의 감상을 나눔하고 나중에 다 모여서 각 조의 의견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조별 모임에서 각자의 상황에 따라 책에 대한 감상이 다른 것도 흥미로웠고, 각 조의 구성원에 따라 발표내용이 상이한 것도 재미있었다. 생각해보니 강좌를 듣는 분들이 연령도 환경도 다르고 또 이 강좌를 선택하게 된 이유도 다양하다는 점이 강좌의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노인에 대한 개념은 별로 긍정적이지 않다. 책이나 방송에서 노인의 이미지는 오랜 세월을 경험하면서 더욱 품이 넓어지고 현명해지는 모습이지만 현실에서는 오히려 갈수록 더욱 고집스럽고 탐욕을 부리는 모습을 많이 접한다. 노인이 단순히 돌봄의 대상이나 사회적 부담의 원인이 아니라 지금껏 살아온 오랜 세월만으로도 가치 있고 존경받을만한 사회구성원으로 인식되기를 원한다면 젊은이들의 무조건적인 공경을 강요하거나 ‘내 나이가 어때서’ 같은 수사로 자위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초고령화 사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노인이 생산적이고 주체적인 사회구성원이 되려면 실질적으로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 다각적으로 고민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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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는 어떻게 권리가 되었나 | 권리는 어떻게 권리가 되었나 | mondragon | 2019.6.3 | |
건물주의 갑질과 세입자의 권리, 동성애 혐오, 난민의 인권 등 요즘 세상을 떠들썩하게 채우는 뉴스들입니다. 이런 권리의 충돌을 현명하게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권리는 계약, 법률, 상식에 의해 주어지며, 각각에서 법률관계가 파생됩니다. 우리나라는 법치주의의 예측 가능성을 통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합니다. 민주주의와 더불어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개념은 법치주의입니다. 법치주의에 의해 기본권을 보장하고, 자의를 배제하고,사법심사제도를 통해 아직까지 법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은 권리를 구제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강아지 앞에서 어떤 짓을 해도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 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대방과 격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에게는수치스러움이 없어집니다. 국민을 개, 돼지로 보고 범죄를 저지르고도 뻔뻔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유명인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런 잘못된 자의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법치주의의 중요한 개념인 자의의 배제가 잘 이루어 져야합니다. 인권에 중하지 않음과 더 중함이없기에 우리 사회 구석 구석 법률이 잘 작용하길 바랍니다. 나는 일상생활에서 격을 따진 적이 없었던가 반성해 봅니다. 유명 놀이공원에서 위급상황 발생시 구조의 어려움이 있다는 이유로 시각 장애인의 놀이기구 탑승 권리를 제한했다고 합니다. 위법입니다. 타인의 권리를 나의 선입견으로제한한 적은 없는지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야 함을 느낍니다. 권리는 확장하고 발전합니다. 부당함을 느낀 소수자의 입법투쟁으로 법률이 만들어지고 그에 따라 권리가 생깁니다. 소수자 보호와 권리보호가법률의 중요한 기능입니다. 상식에 의해 권리가 생겨나기도 하지만, 상식이 지배하는 사회는 위험합니다.
위의 헌법 내용을 마음에 담아 두어, 나의 또는 내가 지지하는 소수자의 권리에 대해 당당히 주장하고 밝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류의 역사는 노인에서 아동으로, 또 여성에서 장애인으로 보편적인 권리가 확장되는 역사였습니다.
혐오하는 것은 권리가 될 수 없습니다. 권리는 공존하기 위한 도구이므로 관계 위에 존재합니다. 흡연을 반대하는 것은 혐연권이 아니라건강을 지키고자 하는 건강권입니다. 혐오가 난무하는 시대에 법에 기대어 제재를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겠지요. 불법의 판결이 나더라도 그것을 즐기고 오히려 이용하는 부류가 있을 테니까요. 사회적 인식변화를 이루어 내는 것이 건강한 사회입니다. 무면허로 자동차를 몰며 사고를 낸 고등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경찰차가 추격하자 차를 버리고 야산으로 도주합니다. 두 팀으로 나뉘어 도망가는바람에 경찰도 두 팀으로 나뉘어서 그들을 쫓습니다. 한쪽 팀은 경찰에게 잡혔는데, 다른 한 팀은 쫓아가서 잡는게 무리였는지 경찰이 총을 꺼내도망자의 다리를 쏩니다. 불행히도 대퇴부 동맥이 명중되어 과다출혈로 사망에 이릅니다. 피해자의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에 승소하여 보상을 받습니다. 과잉 금지 원칙, 비례원칙입니다. 국가의 개입은 최소 침해해야 하고 너무하면 안됩니다. 적법한 제한이냐, 위법한 침해냐를 항상 따져보아야 합니다. 권리의 충돌시 권리1을 배제하고 권리 2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비례원칙에 따라 대안을 찾는 것입니다. 나의 권리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예민하게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질의 응답시간에, 담배 혐오와 동성애 혐오를 비교해 봤는데, 동성애는 존재자체이기 때문에 부정의 논리자체가 성립되기 어렵다는 내용을 공부했습니다. 흡연자도 자신의 흡연이 존재자체라고 주장할 수 있지 않은가 생각되지만 법이 공익을 위해 건강권을 지키기위한 방향성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법치주의의 법률은 방향성 제시만으로도 의미를 가진다는 내용이 법의 한계를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변화와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인상 깊었습니다.
국가는 공익 또는 위험의 여부 정도에 따라 금지, 승인, 면허증 제도, 신고 제도를 마련해 놓고 권리를 제한합니다. 위의 헌법 내용은 재산권제한의 특수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국가는 재산권을 보호하지만, 재산권을 제한하기 위한 근거조항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강사이신 김정환 변호사님이 안타깝게 생각하시는 판례를 들어 주셨습니다.
사회적 기본권은 이렇듯 예산의 제약으로 우선순위에 밀려 최소한의 보호를 하는 형태로 유지되어 왔습니다. 사회적 기본권에 대해서는소송보다는 입법행동이 효과적이라는 배움이 있었다는 판례라고 합니다. 어찌보면 국가에 면죄부를 주어 행정이 더 느려질수도 있습니다. 평등권은 비교가 권리의 근거가 됩니다. 국가인권위원회법에는 성별, 종교, 장애, 나이등 19가지 차별의 유형을 나열하고 차별을 금지한다고되어 있지만 사회적 관습, 인식상 실제로는 많은 불평등이 존재합니다. 19세기 철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당시 사회에서 보기드문 급진적인페미니스트 였지만 계급주의자로서의 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현재 의식이 깨어있다고 자부하는 우리들도 어떤 차별인식의 한계를 갖고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회적 관습보다 앞서는 인권법도 사회의 방향성을 제시한다는데 의미를 가집니다. 사회는 계속해서 발전해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더 활발한 사회의 요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더 평등한 사람은 없고 더 챙겨줘야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나 보다는 타자의 권리를 주장해 주시기를 바란다는 당부 말씀이 있었습니다. 수업은 3회로 짧게 마무리 되었지만 시종 유쾌하고 자유로웠습니다. 어려운 법률용어를 최대한 쉽고 재밌게 설명해 주신 강사님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질의 응답시간도 활발하고 심층적인 질문이 많아 수강자들의 지식의 깊이가 대단함을 느꼈습니다. 성실한 무기 징역수처럼 나만의 테두리안에서 되도록 나와 타인의 결핍을 외면하려 애쓰며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좀더 세심하게 주변을 돌아보고 원하는 것을 정당하게,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며 주장해야 함을 그리고 내게 그런 힘이 있음을 일깨운 3주간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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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연극워크숍] 나를 찾아 떠나는 연극 여행 | 시민연극워크숍 '나를 찾아 떠나는 연극 여행'을 마치고 : 다시 수요일을 기다리며 | 개똥이 | 2019.5.27 | |
<들어가며> 장면 발표가 끝났다. 한 학기 수업이 아름다운 계절의 바람 속에서 모두의 웃음과 누군가의 눈물과 약간의 울컥함 속에서 막을 내렸다. 올해로 참여연대 연극 수업을 들은 지 4년이 되어간다. 학기로는 7학기가 되었다. 친구의 권유로 시작한 연극 수업은 이제 봄, 가을 제일 먼저 일정을 조절하게 만드는 우선 순위가 되었다. 2015년 늦가을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만난 참여연대 첫 연극의 강렬함을 지금도 기억한다. 가슴 절절한 주제를 시민 배우들의 대사와 몸짓으로, 음악과 시로, 조명으로 그토록 생생한 울림을 담아 전할 수 있다니. 감동을 넘어 전율이 느껴지던 시간이었다. 다음 년도에 망설임 없이 등록을 했고 무대에 올랐고 그렇게 세 번의 공연을 했다. 그리고 2019년 봄 또다시 새로운 연극 수업을 듣게 되었다.
새로운 연극 수업. 이번 봄 학기의 연극 수업은 두 가지 갈래로 진행 되었는데 그 하나가 대본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참여자들의 이야기를 모아 가을 공연의 모티브로 삼던 그 동안의 흐름이 조금 더 구체화되었다. 지금까지는 참여자들이 내놓는 이야기를 듣고 연출 혹은 작가가 각색하여 대본을 썼다면 이번에는 각자가 써온 시놉시스에서 공통적인 또는 함께 더 얘기를 나눠볼 수 있는 부분을 꼭지로 삼아 희곡을 직접 써보는 시도를 하게 된 것이다. 묘하게도 각자의 주머니에서 나온 얘기들은 뭔가 공통점이 있었고 그것을 모으고 다듬어 한 편의 희곡을 만들어 보는 것에 대해 논의하게 되었다. 감격스럽게도 회원 한 명이 밑 작업인 「이야기의 뿌리」를 작성하면서 희곡을 쓰는 대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감사와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가득 담아 하트를 ♡♡♡) 처음엔 누구의 어떤 내용을 써야할지 막막했었는데 이야기의 뿌리와 회원들이 올려준 글을 읽으면서 마음에 움직임이 있었고 나의 경험과 주변의 이야기를 버무려 짧은 글을 완성할 수 있었다.(오~ 이 놀라움) 노년과 죽음, 부양의 문제 등을 다룬 내용이 펼쳐질 텐데 최종적으로 어떤 희곡이 완성될지 궁금하다. 더불어 무한한 기대와 신뢰의 눈빛으로 새로운 극작가의 탄생을 기다리는 중이다. 다만 쓸 수 있을 만큼만 쓰고, 대본 작업으로 인해 너무 힘들어하지 말기를 바란다. 우리에겐 연출님이 있으니까~
다른 한 편으로는 안톤 체홉의 ‘바냐삼촌’을 각색한 김은성 작가의 ‘순우삼촌’을 읽고 몇 장면을 연극으로 발표하는 것이었다. 대본을 함께 읽는 시간은 즐거웠고 인물들의 전사와 말 한마디에 담긴 의미, 몸짓을 연구하는 과정이 새롭게 다가왔다. 배우가 달라짐에 따라 다른 맛을 느끼게 되는 장면들을 보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토요일에 진행된 배우의 몸 풀기와 감각 열기 수업 또한 특별했다. 희곡의 배경인 잠실 섬을 둘러싼 한강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모래밭, 갯벌의 진흙, 발바닥 아래 부드럽고 서늘한 풀의 촉감, 차가운 강물, 물 튕겨내기 발장구 치기 등등 하! 상상만으로도 생생한 오감이 느껴지다니.. 희곡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디테일한 수업은 낯익으면서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날 4월의 눈부신 날 진분홍 박태기꽃 환한, 마당 넓은 집에서 참여연대 연극반 최초의 학기 중 엠티가 있었다. 목련 그늘 아래 평상에 앉아 맛있는 음식과 구운 고기, 그리고 음악을 곁들여 마시는 한 잔의 술은 그 곳이 서울 한 복판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비현실적이었다. 멀리 인왕산? 북한산?이 바라다 보이는 뒤꼍의 탁 트인 풍광은 세상의 시름을 모두 잊게 할 만큼 거칠 것이 없었다. 도도한 몸짓의 두 마리 고양이도 함께 했다. 연출님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물건 나누기 시간은 흥미로움과 놀라움, 부러움을 거쳐 따뜻한 시와 노래로 마무리 되었다. 들었지만 가물가물했던 영화와 책이야기는 기록의 대가 회원의 손을 거쳐 선명한 기억으로 남겨졌다. 손바닥 연극이라고는 하지만 배우들은 준비가 대단했다. 대사를 외우는 건 기본, 의상을 준비하고 신발에 악세사리에 화장까지 완벽. 맡은 역할에 자기만의 색을 입혀 자신만의 향기를 뿜어냈다. 대사 한마디에 동작 하나에 연기에 대한 진솔한 고민이 느껴졌다. 이렇게 열심히들 하다니.. 우리 연대(?) 연극 팀이 새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일까? 직장 일로 바쁘면서도 시간을 쪼개 수업하러 달려오고 일정의 최우선 순위에 연극수업을 놓고 정성 담긴 간식을 마련하고 그리고 발표 준비까지.. 사람. 그 원천은 바로 사람이 아닐까? 서로에 대한 믿음, 의리(문 모 배우의 ‘의리’는 언제 말해도 기분이 좋다), 그리고 지나치지 않은 배려와 관심. 무엇보다 연극에 대한 애정, 이끄는 분의 세심함.. 그래서 우리는 연극반 수업에만 오면 더 많이 웃고, 집중하고, 이해하고, 행복해하는 것 같다. 대학 음악 동아리 뒤풀이에서 단골로 나오는 얘기가 있었다. 사람이냐! 음악이냐! 늘 싸웠던 것 같다. 고뇌했고 마찰이 있었고 서로의 의견에 대해 날을 세웠다. 왜 그렇게 이분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을까. 젊은 날의 과도한 열정과 순수함이었나. 그럼 이제 묻는다. 우리는? 참여연대 느티나무 연극반은 무엇이 중심인가? 질문이 유치하다. 나는 생각한다. 연극은 곧 사람이다. 둘을 떼어놓을 수 없다. 우리 삶의 모습이 곧 연극이기 때문이다.
<나가며> 봄 학기 동안 두 편의 연극을 함께 보았고 수도 없이 뒤풀이를 했지만 언제나 갈증은 남는다. 본 수업만큼이나 풍성한 배움과 나눔이 있는 이야기의 바다이기 때문이다. 이 모 배우 왈 ‘뒤풀이는 뒤로 갈수록 재미있는데 이사 오는 게 어때?’ㅎ 매 시간 수업 장면을 찍어 참석하지 못한 회원을 위해 배려해주신 연출님, 회장님, 따뜻한 미소와 준비로 최적의 장소를 마련해주신 간사님, 평균 연령을 낮춰준 신입 배우님. 그리고 우리들 모두 참 수고했고 감사하다. 모두에게 짝짝짝!! 이제 가을 학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그리고 올 가을엔 어느 배우의 말처럼 단풍놀이를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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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규 기자의 시민칼럼니스트 되기 | [박상규 기자의 시민칼럼리스트] 나와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 | 개똥이 | 2019.5.16 | |
첫 수강 신청은 너무나 충동적이었다.
평소 팔로잉하고 있던 박 기자님의 페북글을 보고 링크를 타고 넙죽 신청을 진행했다. 정작 입금 날이 다가오자 돈을 넣을까 말까 고민했다. 글은 결국 나 자신의 모든 걸 보여주는 것인데, 너무나 낯선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이 꽤나 크게 느껴졌다. 결국 입금하고 수강을 진행하면서 이렇게 글을 고민하며 써본 적이 있던가? 매 수업 시간마다 글 잘쓰는 팁을 톡톡 논술학원 처럼이 아닌 동네 바둑에서 훈수두는 어르신처럼 던지던 박 기자님의 강의도 참 신선했다. 그 시간들이 지나, 내 글이 한 뭉터기로 모였을 때, 나는 조금은 개운했다. 결국 글은 내 안의 무언가를 뱉어내고자 활자를 늘어 놓는 행위지 않을까? 이번 수업에서도 각자의 내면과 생각, 개성을 글로 풀어내는 수강생 동지들 틈에서 나름 배우기도, 찡한 감동을 받기도... 한 번쯤 나와 내가 사는 이 세상을 돌아 볼 때 듣기 좋은 수업이라는 느낌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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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독서서클 땡땡] 페미니즘, 민주주의, 에로스 | 독서서클 땡땡,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 개똥이 | 2019.5.12 | |
느티나무 독서서클 땡땡은 페미니즘, 민주주의, 에로스라는 주제를 가지고 11명의 참여자들이 자발적으로 꾸려가는 독서모임이다. 첫 번 째 모임은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에서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을 가지고 시작했다. <에로스의 종말>은 얄팍한 책이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철학적, 미학적 차원은 실로 심오하다. 하여 얼핏 읽어서는 저자의 사랑에 대한 철두철미한 논증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한 줄 한 줄 꼼꼼히 읽고 곱씹었을 때에야 비로소 천천히 찾아오는 중요한 손님들을 맞이할 수 있다. 물론 나는 그렇다는 얘기다. 이미 철학적 사유가 깊은 분들은 책을 읽으면서, 어 이 사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구먼, 하고 곧장 한병철의 사유의 바다에 깊이 뛰어들어 유유히 유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읽기를 반복해야 했다. 1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용된 영화<멜랑콜리아>를 봐야 했다. 또,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장면에 불과하지만 그림들이나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도 알아야했다. 그러고나서야 순수한 외부, 즉 타자의 파국적 침입과 구원에 대한 한병철의 이야기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강한 의미의 타자,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 에로스이고, 우울증이 나르시시즘적 질병이라는 것, 또 이 나르시시즘은 성과주의의 자아가 경험하는 대칭적 타자로부터 기인한다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영화 초반부에는 두 행성이 충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에서 충돌하는 두 존재는 대칭적 존재들의 충돌로 바스러지는 것이 아니라 한 존재가 이질적인, (반드시 이질적 이어야 한다) 또 다른 존재를 삼키듯이, 마치 정자가 난자를 향해 돌진하여 완벽하게 흡수되는 모습과 비슷했다. 이것은 죽음 속에서도 스스로를 유지해 갈 수 있어야 하는 에로스의 본질을 잘 표현해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자아는 자발적 자기부정, 즉 죽음을 통해서 완벽히 비워짐으로써만 타자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죽음 앞에서 겁을 먹고 파멸로부터 스스로를 보존하려는 벌거벗은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감내하고 죽음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해가는 삶이야 말로 에로스적인 삶인 것이다. 여기에 에로스의 부정성이 있다. 극단적인 것과 극도의 부정성을 자기 안에 품음으로써 드디어 완결을 이루는 것이다. 헌데 오늘날 사랑은 긍정화되고 (부정성을 참지 못하고 제거해버림) 그 결과 성과주의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됨으로써 성애는 섹시함이라는 증식되어야 할 자본이 되고 벌거벗겨져 전시됨으로써 이질성이 제거되고 이질성이 제거된 타자를 우리는 사랑하지 못한다. 상처와 추락과 같은 부정성을 이제 사랑은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피치노에 따르면 사랑은 전염병 중에서도 최악의 전염병인데 그 결과는 “변신”이다. 강력한 비대칭적 타자에게 흡수된 자아는 전멸하는 것이 아니라 변신하는 것이다. 한병철은 이것을 헤겔의 말을 빌어 “자신의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화해로운귀환”이라고 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또 한가지는 에로스적 관계에서의 ‘근원적 거리 두기’ 이다. 나를 부정하고 타자와 합일 되는 에로스적 관계를 생각하다가 문득 카릴지브란이 예언자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두 존재는 함께 서 있으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며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다고 우리에게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말하지 않았던가? 하여, 다시 에로스의 종말을 꼼꼼히 뒤져보았다. 그리고 책 속에서 근원적 거리 두기 라는 말을 발견했다. 근원적 거리 두기는 타자가 하나의 대상, “그것” 으로 전락하고 사물화 되는 것을 막아준다. 근원거리는 타자를 그의 다름 속으로 놓아주는, 그 속으로 멀어지게 하는 초월적인 예의를 창출한다… 기타 등등 어쩌구 뒷이야기는 읽어보시길 바란다. 에로스의 종말 서문을 쓴 알랭바디우는 한병철의 에세이를 읽는 것은 랭보가 말한 사랑의 재발명을 위한 투쟁이라고 했다. 거기에 슬쩍 덧붙여 말하고 싶다. 바람구두를 신은 사내, 랭보처럼 다른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바람구두를 우리도 어쩌면 신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좁은 두뇌 속에서 한병철과 같은 철학자를 만나고 이질적인 타자의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독서모임을 계속한다면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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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이슈 따라잡기 공부모임 | [후기] 한국사회 이슈 따라잡기2_검찰개혁, 올바른 방향은?_4/25 한상훈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마백 | 2019.5.9 | |
검찰을 포함한 사법기관 개혁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가 많이 높아졌습니다. 마침, 이와 관련된 몇 개의 법안이 국회의 패스트트랙에 올라 가면서, 국회 내의 갈등과 혼잡한 상황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사법기관 개혁의 가장 중심적인 요소는 전세계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검찰의 권력을 분산시키는 것인데요... 이번 강좌에서는 오랜 기간 검찰 개혁 문제에 대해 연구하고 개선 방안을 제안해 오신 연세대 한상훈 교수로부터 조금 더 깊은 내용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한상훈 교수는 국민들이 일상 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만족감과 행복에 주목 하면서, 검찰 개혁의 시발점은 이런 국민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일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라는 표현처럼, 한국인은 불평등과 불공정성에 매우 민감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에 걸쳐 체득한 불공정성이 바로 검찰의 편파 수사와 제식구 감싸기 등에 대한 행태입니다. 일일이 거론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례들이 있고, 거의 모든 국민들이 인지하고 있어서, 예민한 국민들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를 주기도 했습니다. 특히, 검찰의 비대한 권력이 경제 권력과 결탁하면서, 갑질과 불평등이 국민의 일상에 뿌리 깊게 스며든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제대로된 주체로서 대우받고 활동’하기 위해서는, 다른 표현으로 삶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이런 검찰의 개혁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입니다.
이번 강좌에서 한상훈 교수는 국민의 공감대가 큰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검찰 개혁이 어려웠던 이유를 몇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1. 검찰의 권한이 너무 막강하여, 비판 자체가 쉽지 않았다.
2. 권위주의 정부에게 검찰의 권한은 매우 유용한 도구여서 개혁을 가로 막았다.
3. 권한을 조정해야 하는 국회에 검찰 출신 의원들이 많아서, 법 제정 자체가 쉽지 않았다.
4. 사회 전반적인 인식이 보수적일 때, 검찰의 막강한 권력을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퍼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검찰을 비롯한 권력기관의 개혁에 대한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 사례는 일제시대까지 거슬어 올라 가는데요, 일제시대에 막강한 권력을 쥐고 국민을 탄압하던 경찰의 문제점이 해방 직후에 부각되어 역으로 검찰에게 거의 모든 권력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시적인 사항으로 국정이 안정되면 다시 조정이 이루어 졌어야 하는데, 권력의 맛에 길들여진 검찰에 의해 번번히 좌절되어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검찰 권력의 과대화에 대한 부작용이 심해지면서, 권력을 어떻게든 분산시켜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도 같이 증가했습니다.
수사권을 비롯한 검찰 권력의 분산은 외국의 사례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연방국가인 미국은 수사는 경찰, 기소는 검찰로 분리되어 있고, 각 주의 검사장은 주민의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됩니다. 독일과 일본 등도 모두 비슷한데, 수사의 권한은 경찰에게 주고 검찰은 수사의 보완적인 역할을 하거나 기소만 담당하고 있습니다. 검찰과 경찰에게 권력이 분산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런 사례만 보더라도 검찰에게 모든 권력이 모여 있는 우리의 상황이 얼마나 기형적인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검찰 개혁의 방안으로 많이 거론 되었던 것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설치입니다. 현재도 여러 논란이 있는데요... 1996년에 참여연대 등이 처음 제안한 바가 있으니, 제법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수처는 검찰 및 사법부가 고위 공직자들의 비리를 눈감아주거나,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했던 사례를 바탕으로, 부정부패를 근절하고 검찰의 기소독점을 분산시키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공수처는 고위공직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별도의 독립기구로서, 여야 합의에 의해 수장을 결정하게 됩니다. 현재의 야당이 주장하는대로, 자칫 권력의 야당 탄압 도구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인데, 법률 제정 과정에서 원안의 의미가 후퇴할 가능성이 우려됩니다. 그러나, 한상훈 교수는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시작하는 것에 의미를 두자고 얘기하면서, 오히려 임기가 너무 짧아서 조직의 안정성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운영에 대한 조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강좌 후에 가졌던 질의/응답 시간에도 공수처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특히, 공수처가 검찰 권력의 ‘옥상옥’이 될 수 있고, 야당 탄압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일부의 우려에 대해, 법안의 세부 내용과 제정 취지를 잘 인지해서 대응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전반적으로 한상훈 교수를 비롯한 강의 참가자들의 견해는 검찰 권력은 반드시 분산되어야 하며, 공수처는 하나의 방안으로 의미가 크다는 것입니다.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과 더불어서 말이지요... 공수처는 홍콩이나 몇몇 국가에서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고, 고위 공직자들의 비리를 줄이고 권력을 감시하는 데 매우 효율적인 기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소 복잡한 내용이지만, 시민사회가 이에 대한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압력을 행사하여 법안의 통과를 견인해야 과거 사례처럼 중간에 흐지부지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작성자: 전병옥 (자원활동가)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