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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민혁명과 다른 세상을 위한 사회운동론 | [촛불시민혁명과 다른 세상을 위한 사회운동론] 1강 / 위태로운 시민 : 데이터로 보는 한국 사회 | 조원빈 | 2017.3.10 | |
[촛불시민혁명과 다른 세상을 위한 사회운동론] 1강 / 위태로운 시민 : 데이터로 보는 한국 사회 장덕진_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2017.03.08
별안간 쌀쌀해진 날씨에도 많은 수강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강의실의 불을 밝혔습니다.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위원장님의 진행으로 2시간 여 동안의 강의는 배움의 열기로 가득 찼습니다. 오늘 강좌는 데이터를 통해 한국사회의 현재를 진단하는 내용으로,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님께서 진행해주셨습니다. 1부는 강의로, 2부는 수강생과의 자유로운 질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1. 행복하지 않다. 1945년 이후, 한국은 빠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GDP 세계 11위, 1인당 GDP 28위, 수출 5위, 수입 7위에 이릅니다. 기대여명*은 WHO기준 194개국 중 9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행복할까요? 행복 지수에서 대한민국은 157개국 중 58위 입니다. 앞선 순위와 대조를 이룹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 에 대한 물음으로 강의는 시작됩니다. 국민을 청년과 노인으로 나누었을 때, 둘 모두 행복할 수 없는 사회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특히 노동시장에서 문제는 부각을 나타냅니다. 비정규직은 증가하고, 정규직 전환은 낮아졌으며, 사회보험의 사각과 빈부격차는 날로 늘어갑니다. 삶의 장기적 전망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청년들은 혼인과 출산을 포기할 수 밖에 없고, 종국에는 연애마저 포기해버립니다. 청년들이 사회를 거부하고 있는 겁니다. 노인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의 노인빈곤율은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노인 자살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듯 노인과 청년은 모두 비슷하게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지만, 어찌된 일인지 세대간의 갈등은 줄어들 기미가 없습니다. (*기대여명 (期待餘命, life expectancy) 일정 연령에 도달한 사람이 그 이후 몇 년 동안이나 생존할 수 있는가를 계산한 평균 생존년수를 말한다. 특히 출생시 평균여명을 평균수명이라고도 일컫는다. 이는 사망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잔여평균수명을 예측하고 있는 지표이다. 출처 : 인적자원관리용어사전 )
2. 요지부동의 한국인 그러면, 대한민국을 관통하고 있는 가치관은 무엇일까요? 전 세계의 학자들이 모여 만든 가치관에 대한 그래프(World Values Survey & Cultural Map of the World)가 있습니다. 이 연구에서 대한민국은 세속합리성은 높으며 자기표현은 낮고, 생존 욕구에 매몰되어 있음이 드러납니다. 한 학자는 연구를 통해 '한국인은 '낮은 욕구단계'인 '물질주의'에 머물러 있으며, '조용한 혁명'을 통해 '탈물질주의'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1981~1993년의 시간동안 한국의 GDP는 7배가 상승했습니다. 그러나 가치관에는 거의 변동이 없었습니다. 이는, 한국에는 물질주의자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뜻입니다. 성장과 안보를 최고의 가치로 치부하고 있는 겁니다.
3. 불안사회 : 아무도 벗어날 수 없다. 한국은 공공성이 낮고, 노블레수 오블리주에 대한 행위 실천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관용성 수준은 60개국 중 60등을 차지한 수준입니다. 10억 이상 금융자산 보유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했을 때, 자신이 부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64.8%에 달합니다. 이들을 대상으로 그럼 어느 정도의 자산을 보유했을 때 부자가 되는가를 다시 물으니, 100억 이상이라고 합니다. 왜 100억일까요?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100억 이상의 자산을 보유했을 때라야 다쳐도, 늙어도, 자식한테 재산을 물려줘도, 자신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전한 범위라고 합니다. 이들은 왜 불안할까요? 자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국가, 사회, 공동체의 도움이 전혀 없을 것이라 가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각자 도생의 사회입니다.
4. 이 모든 문제의 배후에 무엇이 있나? 우리는 왜 이런 불안한 사회 속에서 살게 되었을까요? 대한민국은 지금 이중화, 고령화, 민주주의의 상호 제약에 갇혀 있습니다. 그 속에서 무엇 하나를 해결하기에도,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겁니다. 이중화는 세계 공통적인 현상입니다만, 그 나라의 이중화로부터 국가의 정치가 국민을 어떻게 보호하고 있느냐를 보면, 사회가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지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이중화와 양극화 해소는 뒤로 미룬 채, 성장과 안보의 문제를 해결할 것을 외치고 있습니다. 복지논쟁은 제대로 되고 있을까요?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선 공공복지지출이 아닌 가족과 노동을 위한 복지 지출을 올리는 것이 좋습니다. 가족과 노동을 위한 투자는 결국에는 경제활동인구를 높이는 선순환을 부르기 때문이지요. 데이터에서도, 공공복지지출을 올렸던 나라는 그리스, 이탈리아 등 재정불건전성이 높아진 나라인 것으로. 가족과 노동을 위한 복지를 높인 나라는 북유럽 등지의 성공적인 복지국가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이같은 복지지출은 무작정 올린다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 공동체에 대한 신뢰와 거버넌스를 향상시킨 후에야만이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이 건강한 사회로 거듭날 수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선 얼마의 시간이 남았을까요? 2050년이 되면 우리나라의 부양률*은 100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지금의 20대가 50대가 되는 시간이고, 그 때에 소득의 절반을 세금으로 지출해야만 하는 때이죠. 지금은 이 부양률의 증가세가 완만하지만, 당장 6년이 지나면 베이비부머세대가 은퇴하게 되고, 급격한 증가세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부양률, 부양비 扶養比, dependency ratio 생산가능연령인구(15~64세)에 대한 유년층인구(0~14세)와 노년층인구(65세 이상)의 합의 백분비로 인구의 연령구조를 나타내 주는 지표이다. 출처 : 인적자원관리용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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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5인에게 시대의 길을 묻다 | 역사학자 5인에게 시대의 길을 묻다 - 독립운동에서 2017년의 길을 찾다, 김정인 | 누완다 | 2017.3.10 | |
강의 첫 시간, 김정인 교수님께서는 ‘독립운동’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다양한 관점에서 하나하나 분석해 주셨습니다. 자치의 공간, 여러 주체의 탄생, 권리를 위한 투쟁, 사상의 향연, 법에 맞선 정의, 비폭력의 연대로 나누어 살펴보고 2017년 오늘 우리 사회 현실과 나아갈 방향을 찾아볼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강의 내용을 지면으로 옮겨 보겠습니다.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려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3.1 독립선언서 中) - 독립국, 자주, 평등, 생존의 정당한 권리가 바로 우리 독립의 근거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사이에는 민주주의가 남아돌 정도로 많았다.(김산의 말,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서) - 독립운동 자체가 민주주의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는 의미입니다.
◦자치의 공간 ▪주권 자치의 공간, 임시정부 1919. 2. 28. (3.1.운동보다도 먼저) 연해주에 설립되었다.(3.1.운동으로 임시 정부가 세워진 것이 아니다. 3.1.운동은 독립운동을 자극하고 활성화했다.) 임시정부는 군주정이 아닌 공화정을 표방했다. 헌법(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정부의 정당성을 유지시켜 주었다. 임시정부가 승인을 받기 위한 외교 노력은 계속되었다. 중국도 승인하려고 했지만, 결국은 실패한다. 미국이 일찍부터 신탁통치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발적 결사체, 인민자치 국회라 할 수 있는 임시의정원이 있었으며, 지역별로 나누어 실제 투표로 선출했다. 대의제에 대한 훈련도 되어있었다. 사회주의정당, 민족유일당운동, 독립운동정당 세 갈래의 정당운동이 있었다. 합법적인 전국적 정치 결사인 신간회가 있었다. 3년간 활동 후, 사회주의 노선에 의하여 깨지고 만다. 일제 치하라는 영향도 있었다.
◦주체의 탄생 ▪선봉대로서의 학생 휴교령과 동맹 휴학의 시대였다. 학생회를 만들자는 자치체를 획득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광주학생운동은 12월3일에 발생하여 다음 해 3, 4월까지 계속되었다. 이는 학생시위의 전국화였다. ▪노동자 1923년에는 농민이 더 많아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다. 1927년에는 농민과 노동으로 갈라져 노농운동에서 노동운동이 되었다. 임금 격차와 같은 민족차별로 인해 생존권을 위한 파업을 벌였다. 이러한 노동쟁의의 정점은 1929년 원산 총파업이다. ▪여성 여성 스스로 여성을 깨우치려 했던 조선여자교육회는 유료 강연 수익금으로 야학을 열기도 했다. 여성계의 민족협동전선인 근우회는 실제로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활약했다. ▪청년, 어린이 청년이라는 용어는 19세기 말에 등장했다. 청소년이라는 관념도 이때 처음 생겼다.
◦권리를 위한 투쟁 ▪언론운동, 자유롭게 말할 권리를 달라 언론은 현대인의 권리다. - 동아일보 1926년 8월 4일 ▪형평운동, 인간답게 살 권리를 위한 투쟁 1894년 갑오개혁으로 더 이상 ‘백정’이라는 언급은 없어졌다. 조선의 형평운동은 순전히 인권운동에서 시작되었다. ▪교육운동, 차별없는 배움의 권리를 찾고자 일본의 3면1교 정책으로 인해, 학교설립운동이 벌어졌다. 민립(사립)대학 설립 운동과 일반 학교를 못 가는 경우를 위해 서당 설립운동이 일어났다.
◦사상의 향연 ▪저항의 절대동력인 민족주의 신민족주의(보편성을 가진 민족주의이어야 한다.) - 조선을 먼저 알아야한다는 조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민족과 계급 사이에서의 사회주의 일제 시대 당시, 최고의 사상이었다. 민족과 계급 사이에서 고민한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제3의 사상인 아나키즘(무정부주의) 많은 무정부주의자가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신채호는 민중의 직접 행동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는 최종적으로 테러로 갈 수도 있었다. ▪대안의 가치인 민주주의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법에 맞선 정의 ▪고문을 이기고 옥중투쟁에 나서다 대표적인 고문 조작 사건인 105인 사건과 조선어학회 사건이 있다. 옥중 투쟁의 예로 단식 투쟁이 있다. 또한, 1920년 3월 1일에는 3.1.운동 1년을 기념해 옥중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비폭력의 연대 ▪비폭력의 길, 반폭력의 길 비폭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폭력 직접 행동에서 ‘직접 행동’이라는 부분이 핵심이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만세시위”이다. 인도에서는 “연좌시위”가 있다. 반폭력으로서의 ‘의열투쟁’은 비폭력을 지향하는 폭력이다. 이는 ‘테러’와 구분되는데, 목표가 정확하고 불특정 다수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다. ▪연대만이 살 길이다. 평화를 갈구하다. ◦2017년, 민주주의의 향연 ▪문화혁명으로서의 촛불시위 : 자유 평등 연대 평화(집단보다 개인을 더 주목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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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제자를 끌어내린 혁명에서 배우자 | [압제자를 끌어내린 혁명에서 배우자] 2강 미국혁명 | 박윤채영 | 2017.2.2 | |
혁명으로 평가되지 못한 혁명, 미국 혁명
미국 혁명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처음 미국혁명을 들었을 때 잘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처럼 느껴졌습니다. 미국의 옆에 놓이는 단어들로는 개인주의, 사익, 자본과 같은 것들이 익숙했거든요. 그런데, 미국에서도 혁명이 있었습니다.
미국혁명을 말할 때 일반적으로 독립선언서가 선포 된 1776년을 말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1775년에서 1791년의 기간을 혁명의 기간으로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미국혁명의 특징은 피가 아닌 말로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제도를 새로 만드는 방식으로 국가를 뒤집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만드는 데 참여하는 55인의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논쟁과 의제들에 대한 주장을 각종 신문들에 익명으로 계속 발표했습니다. 신문을 읽은 시민들은 그것에 대해 토론하면서 혁명의 과정에 참여했습니다. 이러한 토론과 합의가 16년간 계속되었고 그 결과로 헌법이 새로 만들어졌지요. 제도 중심의 혁명 과정은 유럽 지식인들에게 큰 지적 자극이 되었습니다. 유럽에서 나온 ‘사회계약론’을 실현하는 사례가 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보면 당시 미국 사람들이 어떤 사상에 기반하여 국가 건설을 꿈꿨는지가 보입니다. 독립선언서에는 로크의 ‘통치론’에서 따온 문구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조물주에 의하여 일정한 불가양의 권리가 부여되었으며, 그 가운데에는 생명, 자유 및 행복의 추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자명의 진리로 믿는다.”
로크의 ‘통치론’에는 위에서 행복의 추구 대신 ‘재산’이 쓰여 있습니다. 재산의 정치적 의미는 ‘자신의 의견을 팔지 않을 수 있는 힘’이며 때문에 로크는 개인의 자유를 위해 재산을 중요한 가치로 두었다고 합니다. 뒤이어 선생님의 표현에 따르면 ‘무시무시한’ 구절이 나옵니다.
“어떠한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이다.”
그런데 어쩌다 미국은 혁명의 역사에서 제대로 기억 남지 않게 된 걸까요? 프랑스 대혁명이 워낙 강렬해서 일까요? 그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왕을 단두대에 올린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특히 유럽국가 귀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나도 저기에 올라가 목이 잘릴 수도 있다.’는 위협도 받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 사건은 현재까지도 혁명의 상징으로 다뤄지곤 하지요. 프랑스의 사건은 ‘혁명=폭력’의 이미지를 만들어냈습니다. 거기에 뒤이어 발생한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혁명=폭력’의 이미지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 세계는 단두대를 기억했고 미국마저도 자신들이 이뤄낸 말로 한 혁명의 기억은 상실해갔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실패한 혁명’으로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혁명을 말했다고 합니다. 프랑스는 혁명을 피로 물들였기 때문이고 미국은 자신들의 혁명 전통 즉, 말로 하는 혁명을 상실하고 결과물을 제대로 운용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김만권 선생님은 지금 ‘미국혁명’을 꺼내 오신 걸까요? 선생님은 “우리가 미국혁명이 언제 일어났고 누가 중요했는지 아는 게 뭐가 중요합니까?”라고 말씀하셨지만, 미국의 말로 한 혁명은 지금 한국 시민들에게 꿈을 꿀 수 있는 재료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두대만이 답이 아니다.’ 그리고 ‘단두대가 끝이 아니다.’. 어쩌면 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은 그 이후일지도 모른다고요. 과거를 청산하지 못해서 나라가 이 꼴이 됐다, 는 평가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독일의 사례, 프랑스의 사례를 많이 예로 들지요. 그렇다면 ‘과거 청산’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는 과거 청산이 ‘잘못한 개인 단죄’를 뜻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개인이 또 양산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같은 ‘쓰레기’들을 만들어내는 구조가 계속되는 한 유사한 ‘쓰레기’는 계속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발들이지 못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개헌이 아니라 새로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선생님의 제안이십니다.
그 시작을 ‘혁명’과 ‘헌법’ 제대로 정의하기로 하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혁명(Revolution) : 살던 방식과 전혀 다르게 살아가는 것. 변화의 시도 또는 변화의 실패는 혁명으로 성립될 수 없음, 헌법(Constitution) : 영어 뜻으로 보면 ‘구성’을 의미함. 토마스 패인에 따르면 헌법은 “The Constitution of a country is not the act of its government but of its people constituting a government" "헌법은 정부의 행위가 아니라 인민들의 정부 구성 과정이다.“ 즉, 헌법의 주체는 인민들이며, 헌법은 결과가 아니라 행위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이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혁명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그들의 혁명 기간이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도 미국혁명도 1년, 2년이 아니라 십년 이상의 시간을 통과했습니다. 혁명은 어느 날 짠! 하고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지난한 과정의 결과였던 겁니다. 스스로에 불만을 갖고 변화를 시도하다 또 금방 실망하곤 하는 제 모습을 비춰보니 부끄러워지기도 했습니다. 혁명과 헌법의 공통점은 당대를 위한 일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광장에 촛불이 꺼져도 사람들 속에 있는 꺼지지 않는 촛불이 있다는 것을 재차 확인해가길 희망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10년 후, 우리가 불나방이 아니라 코끼리들의 발걸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질의응답 1. 미국 헌법이 공론장에서 쓰여졌다고 평가하는 이유 엘리트 55인이 만들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들이 아무리 신문들에 자신의 주장을 펼쳐 공공성을 만들었다고 해고 당시로써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도 소수였기에 한계가 있었을 거다. 그러나 인정할 부분은, 그 시대에서는 최선의 방법들을 동원하여 계속 공론화시키려 했다는 점, 그 덕에 헌법 토론이 55인의 토론장이 아니라 시민 사회에서도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시작은 엘리트적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사회로 확산되어 토론되었다.
2. 시민대표 와글에 대한 비판에 대한 생각. 대표자들의 무책임들과 방관, 잘못들이 밝혀지고 대표자들에 대한 불신이 커진 시기에 또다시 어떤 대표를 뽑자고 제안한 것은 시기상 적절하지 않았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표자 없이 당사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경험이다. 그리고 대표자라는 직위의 속성이 ‘권한을 위임받는 자’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우리에겐 대표가 아니라 대의가 필요하다. 현 시점에 지식인들이 해야 하는 역할은 대표자가 아니라 의제를 던져 시민들의 질문과 상상력에 동력을 주는 것. ‘Next to the People'
3. 87년 개헌 헌법에 대하여. 87년에 이뤄진 개헌은 독재의 사슬을 끊은 첫 헌법이므로 개헌 헌법이 아니라 고유 명사 ‘87년 헌법’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87년의 성취가 우리에겐 제대로 남아 있지 못하다. 첫 직선제를 통해 뽑은 대통령이 노태우, 그러니까 전두환 친구였던 거다. 87년 헌법은 유서 없이 물려진 유산이 되었다. 6월 항쟁과 87 헌법의 의미를 되살리고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시 헌법 개정은 소수 앨리트들에 의해, 속성으로 만들어졌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헌법을 만드는 것이 혁명의 마지막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을 또다시 앨리트들의 손에 넘길 것인가도 생각해 볼 문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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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제자를 끌어내린 혁명에서 배우자 | [압제자를 끌어내린 혁명에서 배우자] 4강 - 6월 항쟁 | 박윤채영 | 2017.2.2 | |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않은 30년 전 6월. 한국에서는 군부권위주의정권에 대한 항쟁이 벌어졌었습니다.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 경제 지수와 달리 하나도 변하지 않은, 아니 오히려 빈곤해졌던 국민들의 현실이 항쟁의 불씨였습니다. 항쟁의 횃불을 먼저 든 것은 정치적 억압을 견디다 못한 지식인층과 학생들, 그리고 공업화 과정에서 계층상승을 한 중간층이었습니다. 그에 대해 군부정권은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고 인권과 자유 보장 등의 내용을 담은 6.29선언으로 국민들의 저항을 잠재우려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7월, 인간 이하의 환경에서 무자비한 착취를 견뎌온 노동자들의 조직적 운동이 시작되었고 그 투쟁은 9월까지 이어졌습니다.
<6.29 선언> 1.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한 1998년 2월 평화적 정권이양 2. 대통령선거법 개정을 통한 공정한 경쟁 보장 3. 김대중의 사면복권과 시국관련사범들의 석방 4. 인간존엄성 존중 및 기본인권 신장 5. 자유언론의 창달 6.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 실시 7. 정당의 건전한 활동 보장 8. 과감한 사회정화조치의 단행 등 [내용 출처: 위키백과]
군부정권을 물러나게 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부활시킨 6월 항쟁은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씁쓸한 실패의 역사로 평가되곤 합니다. ‘압제자를 끌어내린 혁명에서 배우자’ 마지막 강의는 6월 항쟁을 씁쓸한 기억으로 남게 한 원인들을 짚어 보면서 지금의 탄핵 국면을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럼 30년 전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6월 10일 거셌던 저항의 움직임은 6.29선언 이후 금방 사그라들게 됩니다. 왜냐하면 저항의 원인이 되었던 의제들을 당시의 정부가 다 받아들였기 때문에 명분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이 시작되었지만 6월의 투쟁의 시작을 연 중산층과 언론들은 그들의 싸움에 냉소하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대통령 직선제로 치러지는 첫 대선’에 몰렸고 민주주의, 인권, 국가폭력 등의 의제들은 문서상의 합의 이후 더 이상 논의되지 못했습니다. 제도적으로 문제들이 처리되니 현실의 문제들이 주요 의제가 되지 못하는, 선생님은 이 상황을 ‘광장정치와 제도정치의 분리’라고 정리하셨습니다. 광장의 투쟁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대선 국면에서 대통령 후보를 두고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진보 인사 후보로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나온 상황이었습니다. 입장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1) 후보를 단일화해야 한다. 2) 민주화의 상징인 김대중이 나가야 한다. 3) 민중 후보 백기완 선생님이 후보가 되어야 한다. 분열된 의견은 합의를 보지 못했고 결국 노태우 후보 당선이라는 참패를 맞아야 했지요. 전두환 이후 노태우 후보의 당선은 한국 정치의 부패 청산을 가로막고 더 악화시켜 민주주의의 진보를 막고 현재 최순실 박근혜 게이트의 직접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88년 12월 ‘민생치안에 관한 특별담화’는 국가폭력을 부활시켰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3당 합당과 노태우 대통령과의 협력을 통한 당선은 정치의 민주성을 더욱 후퇴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세계적으로는 사회주의의 붕괴가 있었고 그 여파로 한국에선 운동권이 쇠락하고, 자본주의적인 소비사회로 빠르게 변화해 갔습니다. 6월 항쟁 이후 한국 사회의 국면 전환은 지금의 최순실 박근혜 게이트가 진행되어 가는 모습과 닮은 부분이 있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와 대선이 맞물려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또 하나, 야당이 정치에서 중요한 Actor가 되지 못하고 그 역할을 시민들이 대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야당은 왜 그러는 걸까요? 선생님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말을 인용하셨습니다. “야당은 잘 하면 집권 못해도 2등이다.” 여당이 워낙 후져서 야당은 방어만 조금 잘 해도 엄청 잘 하는 것처럼 평가 받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직업 정치가로서 표심을 좇아 적당히 중간만 하면 최소한 2등은 놓치지 않을 수 있어왔다는 겁니다. 여기서 야당과 여당은 현재의 야당, 여당을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쩌다 우리는 이런 야당을 갖게 되었는가? 그 원인은 정치 환경과 구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한국 정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유시민씨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죠. 한국 정치는 특권을 필요로 하는 좁은 문인 것이 현실이라고 합니다. 돈도 많아야 하고, ‘올바른’ 이데올로기도 갖고 있어야 하고요.(레드 컴플렉스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거지요.) 야당에 대한 사회 조직들의 후원금도 금지되어 있어 여당의 정경유착이 용이한 환경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사회적으로는 상류층, 이념적으로는 무난 무탈한 사람들이 정치권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소수자, 국민의 다수자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정치권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러한 엘리트 편향적인 국회 구성이 장장 70년이나 지속되어 온 것이 한국 정치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여당이라도 잘 하면 되는데 또 그렇지 못할 사정이 있습니다. 사실 현재 한국 정부와 여당은 관변단체(새마을운동, 부녀회)와 정보기관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고 있다고 합니다. 야당에게 금지된 조직 후원금이 다 여당으로 들어가고 여당은 그들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눈치 보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지요. 이들의 입맛에 잘 맞추면 수월하게 정권을 유지 할 수 있지만 밉보이면 끊임없이 얻어맞게 되는 것입니다. 민주정부도 그들과의 유착을 끊어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고 김대중 대통령은 보수 언론(조중동)과의 타협을, 고 노무현 대통령은 재벌과의 타협을 보셨지요.
여기까지의 내용으로는 암담하기 짝이 없습니다만 이번에는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동춘 선생님은 이번 촛불 혁명의 가능성을 광장에서 찾으셨습니다. 6월 항쟁과 달리 다양한 계층과 연령층이 참여하고 있는 지금의 광장은 운동을 이끄는 세력과 다수 시민이 분리되어 있지도 않고 때문에 세력의 변질이나 분열 같은 87년 때의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적다는 것입니다. 또한 87년의 패배를 기억하는 이들이 지금도 살아있기에 같은 문제를 번복하지 않을 거라는 기대도 걸어봅니다. 하나의 우려는, 87년 6.29 선언 이후처럼 지금 많은 관심이 대선에 쏠려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바뀐다고 민주주의가 실현되거나 부패가 청산되지 않는다는 것을 한국 정부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패와 유착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삼성이 정유라에게 말을 사주는 것을 아무도 문제 삼지 말아야 했던 ‘사정’들이 바뀌지 않는 한, 지금과 같은 문제가 또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다음 대통령, 중요하지만, 그 대통령에게 한국 사회의 다음을 맡기려는 안일함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세대에겐 승리의 경험이 있지만 지금 10대 20대들에겐 그런 게 없다.”며 촛불 혁명이라 불리는 지금의 움직임들에 10대 20대들의 운명이 달려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촛불 혁명 이후, 어떻게 하면 청년들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질의응답>
1)한국의 외교문제에 대해서 현재 한국엔 외교라는 게 없다. 남북관계가 풀려야 한국에 미국 관계의 전환과 외교 노선이라는 게 가능하다. 결국은 국내정치의 문제..
2)재벌 개혁 국정원 개혁 언론 개혁, 구호에서만 그치지 않고 실천으로 가는 길은? 현재의 대선 후보 간의 경쟁이 아니라 촛불국면과 정치권과의 대립 구도 측면이 있다. 현재는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보다 대통령이 어떻게 되느냐에 달려있다. 대선 후보 경쟁 구도로 가는 것은 촛불을 끄기 위한 전략이다. 조직된 시민사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언론에서 대선을 밀 때 그러한 개혁문제를 놓치지 않아야 성공. 방법적으로는... 1 의제를 중심으로 이슈를 계속 바꿔 신선하게 하는 것 2 시민 단체들의 이슈 생산체를 조직. 언론의 이슈 선회를 주도하는 것. 3 광화문 100만 명만큼 지역구 100명 모이는 것이 중요하다. 광화문에서 동네 광장으로. 온라인을 적극 활용해보자.
3)광장정치가 일상 정치로 스며들고 제도정치로 만들어지는 데 중요한 것은? 선거를 민주주의로 착각하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 댓글이라도 달아야 바뀐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부터 학습해야 하는데 그것은 두 단계에서 진행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1 직업사회 - 협의와 책임구조를 만드는 것. 단죄와 적폐청산 가능 구조를 만드는 것. 2 시민교육을 통한 의식 발전과 확장
4)기득권 아닌 사람들이 기득권을 옹호하는 상황에 대해서 정치권력이 책임을 묻게 하는 방식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경우 : 노예적 정치의식을 설득해야 한다. 경찰과 국정원 관료들의 정치적 활동을 알리는 등 정보를 주고 설득해야 한다. 그러나 육십 대 이상은 안 바뀔 것 같다. 일제 식민시대부터 내려온 뿌리 깊은 노예 의식이기에 바꾸기 어렵다.
5)87년의 한계는 시민의 역량의 한계? 왜 386세대들이 그렇게 급속하게 기득권 세계로 넘어갔을까 -당시 대학생들의 계급적 특징 : 중산층. 학생이라는 신분의 근본적인 한계 약간만 타협하면 기득권이 될 수 있는 것. -정치권에 들어가는 386들에게 "당신들이 그동안 고생해서 싸운 거 아는데 정치권에는 자기 혼자 수혈 대상이 되어서 들어가면 안 된다. 살아남기 위해서 결국 당신들도 그 일부가 될 거다."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현장성을 갖고 들어갔기에 좀 더 나았지만 학생회가 되어 학생운동 하다가 뜬 사람들은 사회운동의 경험이 없고 대중 스타의 정체성을 갖고 정치권에 들어간 것이기에 더 문제였다. 변절 했다고 하기 보단 한계를 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음. -경제민주화 사회민주화의 실패
6)비례대표 50석을 늘리면 그것을 누구에게 얼마나 분배하나, 하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것. 비례대표문제는 단순한 정치적 변화가 아니라 사회단체들의 개편 또한 요하게 될 것이다. 사회운동도 정치에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제도정치와 광장 정치가 분리되지 않도록, 온 국민적 의제가 되어야 함 그 외에 한국의 정당정치가 자리 잡을 것을 요하는 문제들이 있다.
7)풀뿌리민주주의가 시간적 여유, 경제적 여유 없는 사람들이 다수인 현 상황에서 가능한가? 극복 가능할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이상적이긴 한데... 지역대표제를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한다. 지역대표는 반드시 지역의 유력자(有力者)가 뽑힐 수밖에 없는 제도. 지역대표가 아니라 직업대표제로 가야 한다. 지역대표야 말로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영속하기 위한 꼼수다. 이것은 중국 선각자들도 예견한 것. 지역대표는 옛날 균질적 구성원이 동네를 형성하고 있을 때나 적절한 것이 아닌가. -새로운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해선 많은 아이디어를 떠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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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제자를 끌어내린 혁명에서 배우자 | 4.19 혁명-성공과 좌절의 이중추 | 따뜻한태양 | 2017.1.23 | |
4.19 혁명총을 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19세기부터 민주주의의 가치와 신념이 내면화되있었기에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희생이 가능했던 것이다.
<3.1 운동 : 비폭력 평화 시위의 기원 > 1)3.1 운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연합, 연대를 이루었다. 여학생들의 참여가 많았으며 인쇄물 배포에 활발했던 운동이었다. 중국의 5.4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비폭력적인 질서있는 시위였다. -만세시위란? 장날, 장터에서 독립선언서 낭독, 연설, 만세합창, 관공서로 시가행진, 만세 합창, 태극기 흔들며 가두시위를 했던 것들을 말한다. -도시에서는 시위 공간으로서의 근대 공원과 시장, 시위 주체로서의 학생 등장하였다.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바로 행동에 옮겼다. 유관순은 동대문에서 시위를 했고 일제의 탄압으로 학생운동이 해산 되었을때 전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중적 자발성 : 전국화, 일상화의 계기, 지신깅ㄴ과 청년학생 등 신세력의 선도, 유림 등 구세력의 동참, 모든 세대와 계층이 조직하고 참여, 만세꾼의 등장
2) 새로 등장한 시위 문화 '조선독립신문' 등 지하신문, '경고문' 등 각종 유인물, 태극기 등 깃발 제작, 애국가 등 운동가 합창 '민심을 자극한 것은 선동적ㅇ니 인쇄물의 배포였다.' -오늘날 시위 문화의 기원으로서의 3.1운동의 만세시위 재조명
3) -푸쓰넨, 조선독립운동 중의 새로운 교훈 첫째, 비폭력의 혁명이었다. 둘째,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한 혁명이었다. 셋째, 순수한 학생 혁명이었다. -베이징 학계 전체 선언 한국인은 독립이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외쳤다.
<3.1 운동 : 민주주의를 향한 대중시위의 기원> 1) -3.1 운동에 대한 민족주의적 해석의 압도 -기미독립선언서 속의 민주주의 독립이란 민족의 자유권과 생존권, 인류 공영의 평등의 실현을 의미
2) - '민족의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는 것은 민족의 정당한 권리이므로 독립해야 한다' : 민족의 독립은 곧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구현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 -조소앙 ' 3.1운동은 민주주의를 그 중심 조류로 한 혁명' -3.1운동을 일으킨 이유는? 식민지 하의 민주주의 권리의 박탈 때문이었다. -손병희 '조선인에게 항상 압박만을 가하고 관리로 채용하지 안흔ㄴ 정치적 차별은 문제다' -오세창 ' 조선인에게 좀 더 자유를 주고 평등한 대우를 해 달라. 교육, 출판, 언론, 집회의 자유를 허용해 달라'
3)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헌장 속의 민주주의 -민주공화제의 독창성, 자유권과 평등권의 주창, 보통선거권의 선진성 -신국가 건설을 위한 독립운동의 사상으로 민주주의 제시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운동이다.
<이승만정부> 1) 이승만 정부의 물리적 기반 : 경찰, 군부, 청년단체 -경찰 : 1952. 정부통령 선거, 1960. 3.15 부정선거 등에서 핵심 역할 -군부 : 일본군, 만주군, 군사영어학교 출신, 미국화된 세력 -이승만의 친위세력으로서의 헌병사령부와 특무대 -청년단체 : 군경의 보조적 억압기구 -대한청년단 : 우익 청년단체 통합, 자유당 출범 시 기간단체 역학 -경찰, 군부, 청년단체의 정치자금 제공
2) 이승만 정부의 반공 이데올로기 -1950. 반공이데올로기 : 친일세력에 의한 민족구의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 -이승만의 북진 통일론: 반공이데올로기 외피를 쓴 내부 통제용 -자유 민주주의 : 반공이데올로기에 종속, 이데올로기적 상징 조작으로 작동 -반일주의 : 반공이데올로기에 체제통합적 요소 제공 -친일파의 중용:행정관료 중 독립운동가 7%, 일제 관료 출신 45%, 법조인 15% -이승만의 반일 주의 통치의 딜레마
3) 이승만 정부의 불완전한 보수 양당구조 -자유당: 1951. 재선을 위한 창당, 사당화 -1952. 부산정치파동 : 부산 등지에 계엄령 선포, 야당 국회의원 50명 연행,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를 말하는 발췌개헌안 기립 표결 -1954. 사사오입개헌 : 종신연임 개헌안, 민국당 용공집단 매도, 개헌정족수인 136표에 한표 부족 -1955. 범야 보수연합체인 민주당 발족 : 파벌간의 집단지도체제 (민국당계, 흥사단계, 자유당 탈장계, 무소속 구락부) -진보당: 평화통일론, 조봉암 간첩 조작 사건
<정부통령 선거와 보안법 파동> 1)1956. 선거 -자유당의 이승만&이기붕, 민주당의 신익회&장면 진보당의 조봉암&박기출 - 못살겠다. 갈아보자 -대통령 자유당의 이승만(56%), 부통령 민주당의 장면 당선
2)1958.보안법 파동 -보안법 적용대상 및 이적 행위 개념의 확대와 허위 사실 유포에 대한 처벌 조항 -3분 만에 법제사법위원회 통과, 야당 의원 구타 감금하고 본회의 통과, 민주당의 무효투쟁 -경향신문 폐간
*예고된 부정선거
<승리의 4.19 혁명> 1) 사회운동의 성장과 통일운동 -노동운동:민주노조와 교원노조 -학생운동:학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피학살자 유족회 결성 -통일 논의 활성화 : 혁신계의 중립화 통일론, 남북협상론, 자주통일론,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2) 4.19혁명의 성격과 의의 -혁명? 의거? 항쟁? -이승만 독재 정권에 항거한 민주항쟁이자 분단문제 해결을 위한 통일 운동으로서의 출발점
<장면 정부 : 승리를 무너뜨리다> -허정과도 정부: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 부정축재자 처리, 개헌에 따른 신정부 수립 -내각제 개헌과 7.29 총선:민주당의 압승, 윤보선 대통령, 장면 국무총리 -장면 정부:대미의존, 민주당 신구파 갈등, 반공법과 데모규제법
<5.16 구데타:4.16의 좌절> 1) 5.16구데타의 발발 -1961.5.16. 제2군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의 군사쿠테다(3,500명) -육사 5기와 8기 및 만주군 출신 주도 -장면 정부의 쿠데타 성공 방조 및 미국의 미온적 태도 -군사혁명위원회(장도영의장, 박정희부의장)와 국가재건최고회의
2)군정기 정책과 민정 이양 -내각부터 읍면장까지 군인 임명, 정당 사외단테 해제, 국가비상조치법 -주앙정보부 설치, 반공법 제정, 국가보안법 개정 -반혁명사건, 정치활동정화법, 부정축재처리법 -재건국민운동, 농어촌고리채정리법, 화폐개혁 -민정 불참 선언 : 군정 4년 연장 국민투표 성명, 박정의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수락 -1963. 대통령 선거 : 박정희 대 윤보선, 15만표의 근소한 차이
* 2010.04.26 박명림의 칼럼 : 4월 혁명 성공 50돌 아침에
느낀점 : 이땅의 부정선거는 모두 사라져야한다. 그것을 가능케하는 선거법 개정을 더 적극적으로 외쳐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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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제자를 끌어내린 혁명에서 배우자 | 압제자를 끌어내린 혁명에서 배우자 1강 - 프랑스 혁명 | 따뜻한태양 | 2017.1.10 | |
압제자를 끌어내린 혁명에서 배우자 1강 - 최갑수교수님 프랑스 혁명 : 1789-1799 혁명의 진화 : 정치혁명에서 사회혁명으로! 1.혁명이란? revolution은 원래는 ‘회전, 천체의 운행’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18세기 이후에는 프랑스혁명 과정에서 근대적의미를 갖게 되었다. 근대적의미란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동아시아는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revolution을 신조어가 아니라 전통한자 그대로 쓰였다. ‘역성혁명’으로 왕족의 성씨가 바뀌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곧 왕가가 바뀌는 것을 뜻한다. 19세기 이후 유럽과 20세기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이전의 방식을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더불어 그 이전의 역사에서 유사한 사건들을 ‘혁명’으로 지칭하게 되었다. 혁명은 근대 이후에 등장하며 ‘근대성’이 핵심적이다. 사회와 정치, 인간의 삶까지도 근본적으로 변혁할 수 있다는 진보관. 기획으로서의 혁명을 말한다. 마르크스가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라고 했다. 사실상 혁명은 인간해방의 계기이자, 부국강병의 첩경이다. 혁명을 겪지 않고는 제대로 된 나라를 이룰 수 없다. 혁명은 근대 사회 및 국가 건설에서의 일종의 ‘성장통’이다.
2. 프랑스혁명? 1)프랑스 혁명의 직접적인 요인은 ‘재정적자’와 사실상의 ‘국가파산’, 군주제의 무능, 구조적요인, 구체제의 모순, 영국과의 ‘제2차 백년전쟁(1689-1815)등이 있다. 2)프랑스혁명에서 중요한 시대구분 구체제: ‘전(前)혁명(1787-1789)’,혁명의 10년, 나폴레옹의 집권(제1통령, 종신통령, 황제), 황정복고(1815) 혁명의회와 헌법제정: ‘제헌국민의회(1789-1791)’와 ‘1791의 헌법’, 입법의회(1791-1792), 국민공회(1792-1795) 및 ‘1793년의 헌법’과 ‘1795년의 헌법’, 원로원과 오백인의회(1795-1799) 체제의 변화: 절대군주제(17세기 초-1789), ‘입헌군주제(1789-92)’, 공화정(1792-1804), 제정(1804-1815), 왕정복고 ‘테르미도르의 반동’을 경계로 그 앞 시기는 혁명의 상승기, 그 뒤는 하락기 및 안정기 3) 프랑스혁명의 진행과정 1.부르주아 혁명(1789.5.-1792.8): 1789년의 세 혁명, 프랑스의 재건작업, 혁명의 진전 2.민중혁명(1792.9-1794.7): 산악파의 승리, 혁명정부의 수립, ‘열월 9일’의 반동 3.부르주아 공화국 (1794.7.-1799.11) 4) 프랑스혁명이 가능했던 이유 1.자코뱅 클럽, 코르들리에 클럽 등 온갖 종류의 정보소통망과 인간관계망이 활발했다. 2.혁명의회, 파리 코뮨, 봉기 쿄문. 선거인회 등이 있었다. 3. 인간관계망의 결절점을 장악하고 액체화된 역학관계 속에서 많은 정보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민주적 지도력’을 갖춘 혁명가들과 동맹가들이 있었다. 5) 혁명적 폭력의 문제 파리코뮌 : ‘피의 일주일’(1871년 5월 21-28일)에 코묀군은 약 1만 7천명(정부측 계산), 3만 4천명(시민측) 사망, 43,522명 체포, 10,137명 유죄선거 (사형 93명, 강제노역 251명 등), 정부군은 약 1천명 사망 6) 프랑스 혁명의 성과 근대국민국가의 등장, 정치계급의 교체와 새로운 사회 지배층의 형성, 기획으로서의 ‘헌법’과 입헌혁명의 전망, 혁명의 이념으로서 자유, 평등, 우애 등
3. 혁명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가? 사실상 혁명은 꾀한다고 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터져나오는 것이다. 다만 혁명이 일어나기위한 역사적 조건들이 있다. 경제적 위기, 지식인의 이반과 집권층분열, 대중의 상대적 박탈감과 불의에 대한 분노, 대안적 전망 내지 저항담론 , 우호적인 국제관계가 있다. 이러한 조건들이 갖춰진다면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4. 우리나라의 제헌헌법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프랑스 혁명은 사회혁명이다. 헌법의 성격이 기존 정치사회질서를 변경시켰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 혁명은 입헌혁명이다. 기존 정치사회질서를 보존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제헌헙법(1948)은 혁명의 산물은 아니지만 세계사적 시대정신을 담아 기본적으로 ‘기획’의 성격을 지녔다. 우리의 민주화 과정을 ‘수동혁명’이라고 간주하나 오히려 기획으로서의 입헌혁명의 성격이 표출된 것으로 보아야한다.
Q: 로베스피에르를 공포정치의 상징으로 이해하는데 어떻게 보아야 하나? Q: 프랑스혁명에서 민중의 주도성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었나? Q: 민주주의란?
프랑스 혁명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더 고쳐나가야할 점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나라에도 사회혁명으로 이어지는 혁명이 올수있을까? 청렴한 정치인을 양산하는 정치구조를 만들 수 있을까? 내가 사는 동안, 이땅에 무너진 자존심을 세워올리고 멋진 자부심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여러고민들이 들었다. 앞으로 치러질 대선에는 대통령이 사생활이 없을 각오를 하고 올라왔으면 좋겠다. 또한 무책임한 정부가 절대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으면 좋겠다. 강연은 재밌었고 사람들의 반응도 아주 좋았다.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파리에 가서 그들의 냄새를 맡아보고 싶다. 1870년대 목숨을 걸고 나아갔던 그들을 더 생각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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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의 시간, 공간, 사람 | [한국 근현대의 시간, 공간, 사람] 2강 한국인의 시간 | 통일과민주 | 2016.12.7 | |
[한국 근현대의 시간, 공간, 사람] 2강 한국인의 시간 ; 새로운 역사 –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역사 후기
강연자 : 전용우
1. 현대인의 시간 : 시간의 물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간은 소비, 활용이 가능한 것으로 인식된다. 마치 시간은 돈처럼 물자가 된 세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의 경제적 사용을 위해 시간을 관리하고 그 관리된 시간에 자신을 맞추려 노력한다.
2. 근대 이전의 시간 : 동양의 관점 시간에 대한 관념은 동양과 서양에서 상이하게 나타났다. 서양의 시간은 누적되고 진행되는 것이었다. BC 몇 년부터 2016년 현재까지 시간이 누적되고 앞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동양에서는 시간이 순환한다고 인식했다. 즉 광무, 건륭처럼 연호를 짓고, 그에 맞춰 광무4년이니 했던 것이다. 10년 후에도 반드시 광무 4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시간의 순환은 국가의 최고 권력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 권력의 자리는 종교가 차지해왔고 근대 이후에도 시간을 장악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인간’의 추상화의 능력을 통한 최고의 소산인 ‘신‘이라는 존재가 ’시간‘을 통해 자신의 뜻을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최고 권력자는 자신의 권력을 통해 자원을 동원하여 천체의 운행을 예측함으로써 시간의 규칙성을 파악하고 관점을 설정하여 자신의 세력 내에 있는 사람의 시간에 대한 관점을 통제한 것이다. 최고 권력자는 주로 종교의 형태로 나타났다.
3. 도시와 농촌의 시간 도시와 농촌의 시간에 대한 관념도 사뭇 다르다. 이를 현대와 그 이전의 시대로 연결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도시의 시간 구분은 세밀하게 관리된다. 이에 반해 농촌의 시간 구분은 그 날의 날씨에 따라 좌우된다. 예컨대 해가 지면 휴식을 취하고, 해가 뜨면 일하고 비가 오면 휴식을 취하고 비가 개면 다시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엄격하지 않고 불확실한 농촌의 시간 구분 속에서 농촌의 삶을 통제하고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종교적 의례였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건 ‘신’이었기 때문이다. 종교는 하나된 활동과 의식을 통해 신의 지배를 입증 및 정당화했다.
4. 근대의 시간 - 기계 시계의 시대 : 자연과 독립된 시간의 출현과 시간의 물화 그러나, 근대에 오면서 시간은 더 이상 천체의 운행을 통해서만 관찰 및 측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계’라는 도구를 통해 계산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이 변화된다. 이제는 시간은 계산 가능한 물자(시간의 물화)로 수용된다. 그러나, 종교 및 권력자들의 시간의 지배열망은 강렬한 것이어서, 종교적 상징물인 높은 첨탑에 시간을 알리는 도구인 ‘종‘을 ’시계’로 대체하며, 시간에 대한 지배를 놓치지 않으려 시도한다. - 한국 근대의 시간 : 근대 서양의 시간과의 충돌 한국 근대의 시간도 유사한 격랑에 맞부딪친다. 구한말 일련의 개항을 겪으며, 서양의 시간과 충돌을 인지한다. 주로 전보를 주고 받는 시간, 통상, 외교와 관련하여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결국, 1895 을미개혁을 통해 태양력을 수용하고 24시제, 요일제를 도입하게 되었다. 서력 채용에 따라 보신각의 타종은 중지되고 도성 전체에 시간을 알리는 오포가 등장한다. 더욱이 전차, 기차의 운행과 전보의 활성화로 서양식 시간은 정착되어 갔다. 또한 서양식 시간의 확대는 제중원 수업시간(오전 7시~오후 4시), 배제학당의 수업(오전 8시 15분 시작) 등으로 나타난다. 한국의 근대 시간의 관념을 나타내는 유명한 노래가 있다. ‘학교종이 땡땡땡’이다. 가사 보건대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라는 가사는 ’시간‘에 사람을 맞춘다. 즉 종소리에 지배되는 파블로프의 개와 같은 인간을 말한다.근대의 시간은 하루를 ‘같은 분량’으로 구분하고 계절에 구애받지 않는 관념을 만들어 낸다. 게다가,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소산된 전등은 낮과 밤의 구분마저 제거하였다. 이것은 과거에 ‘밤’시간을 인간이 아닌 악, 귀신의 시간으로 간주하던 관념에서의 전환이었다. 인간은 새로운 시간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5. 결론 : 우리 시대의 시간 종합하면, 인간은 시간을 계산할 수 있게 됨으로써, 종교의 시간 지배로부터 점차 벗어나고 있고 시간을 물자처럼 활용하고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시간의 물화) 또한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실시간 뉴스를 접하고, 공간을 초월한 시간의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만큼 시간을 분초 단위로 관리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현대인은 우리의 조상들보다 3배나 많은 깨어있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시간에 사람을 맞추게 됨으로써 시간에 대한 인간의 물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자신을 자연에 뿌리박은 생명체라기보다는 균질화된 시간에 딱딱 맞춰 움직여야하는 기계처럼 인식하고 자본은 그것을 통해 더욱 많은 이윤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모른다. 이러한 현대문명의 지속성과 그 안에서 삶의 생태성 회복의 필요성을 고민해 볼 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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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의 시간, 공간, 사람 | [한국 근현대의 시간, 공간, 사람] 4강 한국인의 몸과 마음 | 통일과민주 | 2016.12.7 | |
[한국 근현대의 시간, 공간, 사람] 4강 한국인의 몸과 마음 ; 새로운 역사 –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역사 후기
1. 옛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대한 생각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인간은 몸과 마음이라는 2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고 각각을 달리 봤다. 고대의 성인들이 고행과 단식을 통해 몸을 학대하면, 마음의 영역이 극대화되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보기도 했다. 옛사람들은 몸은 유한하며 성장하다 늙고 죽는 것. 반면에, 마음은 불멸하고, 계속 성장하는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러한 몸과 마음에 대한 관념은 더 나아가, 몸은 소멸하는 것, 동물적 욕망 덩어리로서 죄악을 상징하게 되었고, 마음은 신과 합일할 수 있는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따라서 고정된 몸에 관심을 갖기 보단 계속해서 변화시키고 성장할 수 있는 마음에 관심을 기울였다.
2. 옛사람들의 관심 : 마음 가꾸기 몸은 헛된 것이고 타고 나는 것이므로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신의 발전은 마음을 가꾸는 것을 통해 가능하고 믿었다. 마음을 가꾸는 것은 마음 수련 등을 통해 가능하다고 믿었는데, 이러한 마음의 수련은 몸의 학대를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러한 마음 수련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완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목표점에는 신과의 합일이 있었다. 이 관념의 전제에는 사람다움이라는 것이 동물(罪)과 신(善)의 중간에서 부유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 존재를 ‘신‘에 가깝도록 만드는 것이 마음 수련이었던 것이다.格物致知 誠意正心 修身齊家 治國平天下(격물치지 성의정심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도 이러한 의미에서 誠意正心을 통한 修身을 말한 것이다. 몸과 마음에 대한 이분법적 관념은 옛사람들이 마음수련에 치중하게 했고, 신에 가까워지는 것은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에, 마음은 숭고한 것이고 몸은 비천한 것이라는 구분으로 이어졌다. 고려, 조선 등에서도 ‘부귀자는 내과, 빈천자는 외과’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몸과 마음에 대한 이분법적 관념이 강했다.
3. 몸, 독립하다 그러나, 근대의 혁명적 시간을 겪으며 인간의 몸과 마음에 대한 관념은 변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서구 유럽의 종교적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붕괴하면서 발생하게 되었다. 그 이유인즉슨 중세 기독교가 천명하고 있던 하늘, 땅, 그리고 인간에 대한 생각이 심한 반증과 반박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1543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운동에 관하여”라는 논문은 기존의 생각(‘지구는 중심이고 하늘은 동그랗다‘)을 정면으로 반박하여 하늘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또한 콜럼부스는 ‘유럽의 입장’에서 아메리카를 ‘발견(?)’함으로써, 기존의 생각(‘땅은 평평하고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어 끝까지 가면 지옥으로 떨어진다‘)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중세 기독교 세계관의 붕괴가 진행되면서, 인체 해부에 대해 ’신성모독‘이라는 생각에 반기를 들고, 직접 인간의 몸을 탐구해보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컨대, 베살리우스의 해부학혁명이 있다. 인체의 탐구는 인체를 재발견하게 했고, 인간의 몸도 유기체이며 기계처럼 이루어져 있다는 관념이 시작된다. 인간관에 대한 변화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통해 더욱 강력해진다. 요컨대, 종의 기원은 ’인간은 동물이고, 인간의 본성과 동물의 본성은 다르지 않다.‘라는 것이다. 근대 이후 인간 몸의 탐색과 재발견은 몸의 가치를 인식시켜줌으로써, 기존의 관심(몸<마음)을 ‘마음보다 몸에 대한 관심’으로 변화시킨다. 즉 몸의 느낌과 욕구는 인간의 본능이고 긍정적이라는 인식이 점차 환영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회화에서는 몸에 대한 사실적 묘사로 나타나고 몸을 보는 도구의 발전도 나타났다. 그 도구는 대표적으로 유리거울이었다. 옛사람들은 ‘마음’이 보이지도 않고, 자기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으나, 근대 이후 유리거울은 ‘자신의 모습’에 대한 인식이 가능해지도록 만들었다.
4. 한국인의 몸과 몸에 대한 생각의 변화 서양의학이 전래되기 전 한국인의 몸에 대한 관념도 서양의 것과 크게 다를 것 없었다. 몸은 고정된 것이고 죄악 덩어리였다. 마음은 바뀔 수 있는 것이고 인간이 선해지기 위한 방법은 이 마음을 수련하는 것이었다. 몸이 아픈 상태인 질병이 나타나는 것도 마음과 관련이 있는 것이므로 마음 수련(양생법)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봤다. 질병이 심해져 손 쓸 수가 없을 때는 무당을 부르는 등 영적인(마음에 관련한) 활동을 통해 질병을 치유해야 한다고 봤다. 예컨대 한민족의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질병인 천연두등을 하늘의 벌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서양의학이 전래되고 질병은 귀신 등 마음에 관련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병균이 침투해서 생기는 것이라는 인식도 전해지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질병의 치료에 있어, 의학과 무당의 총성없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후 근대화의 진전은 질병의 치유가 ‘양생‘이 아니라 ’위생’으로 가능하다는 생각이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개인위생과 청결의 수단인 ‘목욕‘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목욕탕, 찜질방 등의 등장과 보편적 확대는 이와 맥을 같이 한다. 또한 공공적으로는 거리청소, 환경미화가 시행되고 정착된다.
5. 좋은 몸 관점의 변화 서구에서 전래된 몸에 대한 재인식은 한국인들의 생각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기존의 좋은 몸에 대한 관점도 급변하게 되었다. 즉, 좋은 몸은 ‘노동과 굶주림의 흔적이 없는 몸‘에서 ’단련된 몸‘으로, ’뚱뚱하고 풍만한 몸‘에서 ’날씬한 몸’으로 급변했다. 이제! 마음보다는 몸에 대해 더 많은 신경을 쓰고, 그 몸을 가꾸는 일이 아주 중요해졌다. 몸을 움직여 단련하는 것이 고행이 아니라 운동이 된 것이다. 국가적 차원에서도 개인의 몸을 단련시켜 국력의 발전을 꾀하여, 체력단련을 권장했다. 몸 꾸미기는 ‘운동‘에 그치지 않았다. 현대 ’의복‘의 다양화와 발달은 나의 몸을 치장하고 가꾸는 수단으로 나타났고, 의복은 개인의 자아를 표현하는 도구가 되었다. 더불어, 인간의 수명에 대한 관점도 일대 변화를 겪는다. 기존에는 인명은 재천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수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몸에 대한 재인식‘은 수명이 전적으로 하늘에만 달린 것이 아닌 인간의 관리로도 연장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6. “내 몸이 나다“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져있다. 허나 마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몸은 볼 수 있는 것이다(유리거울의 역할이 매우 크다). 자신의 정체성은 자신과 타인에게도 보이지 않는 마음보다는 ‘몸’에서 드러난다.“ 이것이 많은 현대인들의 생각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매스컴의 발달과 이를 통해 보여지는 유명 연예인들의 모습은 ‘좋은 몸’의 관점이 변한 결과를 여과없이 보여준다. 매스컴의 환경에서 많은 현대인들은 거울 속의 자신을 ‘그들’과 비교하며 자신의 몸을 가꾸려한다. 압구정역에 즐비한 ‘성형외과’와 ‘헬스장’은 우리시대의 ‘몸에 대한 생각’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것들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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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와 민주주의 - 편견과 오해를 넘어 | [젠더와 민주주의] 4강 [아는만큼 실천할] 성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이야기 | 박윤채영 | 2016.12.4 | |
4강 [아는만큼 실천할] 성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이야기 -양성평등이 불가능한 진짜 이유 이번 시간 우리는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중심질서 역할을 하고 있는 ‘유교’가 만들어 온 한국 내 성 체계를 ‘춘향뎐’을 통해 알아보았습니다. 유교는 중국에서 넘어온 학문으로 인(仁)과 예(禮)를 중시하고 가족, 남녀의 관계에서 지켜져야 할 예(禮)들을 ‘삼강오륜’으로 정리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이전에는 오륜이 강조되었지만 뿔뿔이 나뉜 중국을 통합하려는 시도들 속에서 점점 삼강이 강조되었습니다. 삼강은 ‘신하는 임금을 따르고 자식은 아비를 따르고 아내는 남편을 따라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요. 즉, 남편은 가족 안에서 임금이며 임금은 국가의 아버지인 것이죠. 삼강이 남성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구조는 이러합니다. “심지어 아녀자들이 지키는 도리를 남자인 네가 지키지 않을 것이냐?” 남성과 여성을 대립된 구도로 놓고 대놓고 비교해 남성들의 자존심을 자극시키는 것이죠. 조선 왕들은 삼강에 대해 ‘삼강행실도’라는 책까지 발간하였습니다. 최초로 ‘삼강행실도’를 발간한 것은 세종인데요, 이 책은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그림으로 표현되고 뒤에 글로 설명이 되어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열녀와 효자들의 사례들이 실려 있는데요, 주목되는 것은 열녀들의 사례입니다. 책 이전에 조선 사회에서 열녀는 과부가 된 이후에도 재가를 들지 않은 것만으로도 들을 수 있었던 칭호였습니다. 그러나 책은 열녀의 조건을 바꾸어놨습니다. ‘부모를 보살피러 갈 여비가 없는 남편을 위해 제 몸을 정육점에 팔아 여비를 마련한 아내.’ ‘남편이 죽은 후 들어오는 왕과 다른 남성들의 구애에 이런 유혹이 내가 얼굴이 예뻐서라면 차라리 얼굴을 못나게 하겠다며 스스로 코를 자른 여인.’ 이런 식으로 열녀의 조건은 단순한 정절이 아닌 목숨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와 규범은 여성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춘향뎐’을 통해 엿보겠습니다.
방자와 산책을 나온 이몽룡, 저 멀리 꽃 같은 것이 나풀거리고 있어 자세히 보니 어떤 어여쁜 아녀자였다. 방자에게 그게 누구냐 물으니 방자 왈, 기생 월매의 딸 성춘향이라 했다. 그래? 그럼 이리 좀 데려 와 봐라, 도련님 춘향이는 기생이 아니어 오라 가라 할 수 없습니다. 몽룡은 방자에게 온갖 사정을 하여 결국 내 네게 형님이라 부를테니 좀 이리 데려와라, 하였고 방자는 춘향의 시종 향단이를 설득하여 춘향을 몽룡 앞으로 데려온다. 그러나 춘향은 몽룡의 구애에 대고 그리 원하면 우리 엄마 허락을 맡으러 와라, 하고 매몰차게 떠난다. 깊은 밤 몽룡은 아버지 몰래 담을 넘어 춘향 집으로 가 월매에게 자신의 연정을 말하고 월매는 몽룡의 믿음직한 신분과 됨됨이를 보곤 수락을 한다. 그날 밤 춘향과 몽룡은 ‘어화둥둥 내사랑’ 뜨거운 밤을 보냈다. 사랑 타령이 끝나고 춘향은 갑자기 종이를 딱, 꺼내며 ‘불망기(각서)’를 쓰라 한다. 그 내용인 즉슨, 이몽룡이 성춘향을 모른 채 할 시 이 불망기를 갖고 관아에 가 몽룡을 고발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얼마 후 몽룡은 출장 끝난 아버지를 따라 남원을 떠나야 했고 춘향과의 가약을 아버지께 고하지 못한 몽룡은 춘향에게, 내 너를 데리러 다시 올테니 기다리고 있으라, 하곤 남원을 떠난다. 몽룡이 떠나니 남원 고을엔 변학도가 새로운 사또로 왔는데, 춘향의 명성을 들은 변학도는 자리에 앉자마자 춘향을 데려오라고 명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신하가 고하길 사또님 춘향은 기생이 아니라 오라가라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춘향은 전 사또의 아들과 백년가약을 맞은 사이입니다. 그러나 변학도의 고집을 이길 신하는 하나도 없었다. 춘향아, 내 수청을 들라. 춘향은 나와 백년가약 맺은 지아비가 있기에 수청을 들 수 없습니다, 라며 수청을 거부한다. 그러면서 춘향 말하길 신하는 하늘 아래 두 군주를 모실 수 없고 아내는 하늘 아래 두 지아비를 모실 수 없다 하였는데 어찌 그런 요구를 하신단 말입니까? 그때부터 변학도의 혹독한 고문이 시작 된다. 그 와중에 몽룡은 거지꼴을 하고 남원에 낯을 비춘다. 춘향은 하늘이 무너진 듯하나,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하는 의지는 변치 않았다. 결국. 변사또의 생일이자 변사또가 춘향을 죽이겠다 한 기일이 되었다. 변사또가 춘향의 사형을 집행하려는 그 순간 저 멀리서 갑자기, 암행어사 출두요. 부채로 얼굴 가린 암행어사가 등장을 하고 변학도는 두 무릎 꿇고 어사를 맞이한다. 암행어사는 변핚도의 횡포를 꾸짖는 한편 사또의 수청을 거부한 춘향에게 이렇게 물었다. 네가 내 수청도 거부하겠느냐? 춘향의 답변은 한결 같았다. 같은 하늘 아래 두 지아비를 섬길 수 없습니다. 암행어사 말하길, 춘향은 고개를 들라. 춘향이 고개를 드니 어사는 들고 있던 부채를 내리는데, 부채 뒤에서 나온 얼굴, 이몽룡이었다.
잘 알려진 춘향전. 대부분 지고지순한 한결 같음으로 사랑을 지킨 굳센 여성의 이야기로 해석되곤 합니다. 한 채윤 선생님은 궁금했다고 합니다.
1. 춘향은 자기 목숨이 아깝지 않았을까? 왜 이몽룡이 거지꼴로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도 수청을 드는 대신 죽음을 택한 걸까?
2. 변사또는 왜 춘향이를 바로 죽이려 든 것일까? 설득도 한 번 안 하고, 춘향을 죽이는 게 그에겐 무슨 이득이었을까?
3. 목에 칼을 찬 춘향을 향해 ‘나, 암행어사의 수청도 거부하겠느냐?’라고 한 이몽룡은 무슨 마음이었던 것일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첫 번째 질문부터 풀어볼까요? 춘향은 양반과 월매의 사이에서 생긴 딸입니다. 그 양반의 성을 따서 ‘성 춘향’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초기에는 양인와 첩/기생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에게 양인의 신분을 주는 제도가 잠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춘향은 기생이 아니라 양인의 신분일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변학도는 춘향을 기생으로 취급하며 ‘수청을 들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춘향에게 변학도의 수청을 드는 것은 자신을 기생으로 인정하는 꼴인 것입니다. 즉, 수청을 거부하는 춘향의 굳은 의지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싸움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춘향의 몽룡과의 관계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춘향은 몽룡의 구애에 ‘엄마의 허락부터 받아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호감과는 상관없이 말이죠. 그리고 첫 합방 이후 불망기를 바로 쓰게 하죠. 춘향에게 몽룡은 사랑 이전에 신분을 전환 할 대안이기도 했습니다. 기생의 딸인 춘향이 기생의 삶을 사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습니다. 기생들에게 양반댁의 첩이 되는 것은 그나마 최선의 삶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춘향에게는 몽룡 같은 좋은 집안의 첩이 되는 것이 그나마 인생의 선택지 중 최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변학도의 춘향을 데려오라는 명에 신하가 ‘이미 백년가약을 맺은 사이가 있다.’고 말하는 걸 보면 춘향은 몽룡과의 사이를 온 동네 알린 것으로 보입니다. 춘향에겐 자신과 몽룡의 사이를 사람들이 아는 것이 신분을 지키는 중요한 일이었을 겁니다. 두 번째 질문, 왜 변학도는 바로 춘향을 죽이려 든 것일까? 수청을 들라는 변학도에게 춘향이 한 말 기억하시나요? “신하는 하늘 아래 두 군주를 모실 수 없고 아내는 하늘 아래 두 지아비를 모실 수 없다 하였는데 어찌 그런 요구를 하신단 말입니까?” 이것은 소학에 나오는 구절로, 신하 된 도리 편에 포함 된다고 합니다. 지금 춘향은 변학도에게 ‘너 지금 제대로 된 신하가 아니야.’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니 변학도는 이제 자신의 충심을 만 백성 앞에 증명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아무 아녀자를 건든 것이 아니라 기생에게 명령을 거부당한 것이라는 당위를 얻어야 했지요. 이제 변학도에게 춘향은 수청을 들 대상이 아닌 충심을 증명하기 위해 넘어야 할 대상이 된 것입니다.
세 번째 질문, 몽룡은 어떻게 죽어가는 춘향에게 ‘나, 암행어사의 수청도 거부하겠느냐?’라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건 이런 의미겠죠. 니가 사또정도의 신분에는 만족을 못해 그러는 것이냐, 진짜 마음이 뭐냐. 몽룡의 시험이었던 거죠. 당시 여성들의 ‘정절’은 이렇게도 가혹하게 검증에 검증을 요구받았습니다. 정절을 지키지 못한 여성은 양반댁에서 바로 관비(관의 기생)으로 전락하곤 했지요. 몽룡의 이 대사는 그 시대가 여성에게 얼마나 가혹했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바탕에는 유교, 그 중에서도 삼강이란 도덕이 깔려 있습니다. 한 사회의 강력한 규범은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그 행동들을 좌우합니다. 몽룡과 춘향의 사랑을 부정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 사랑의 깊이와 진정성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들이 보여준 사랑의 방식과 그 사랑을 두고 발생한 사건에 이상한 점을 짚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고방식과 사건을 가능케 한 사회 구조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로 돌아와 우린 다시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왜 춘향뎐을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로 해석하려고 하는가? 그 해석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한 채윤 선생님은 우리 사회에서 당연시 여기는 것들에 깔린 전제들을 뒤바꾸어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선생님께도 '이성애'라는 전제를 바꾸는 것이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합니다. “왜 당신은 이성애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당신은 남성과 여성이 부모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남성들은 성욕을 잘 못 참는다, 는 논리가 무엇을 대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채윤 선생님은 저희에게 두 개의 질문을 더 주셨습니다. 1. 젠더와 민주주의란 말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린 사건, 인물 혹은 장면은 무엇이었는가?
2. 빈부의 격차가 더 큰가 남녀의 격차가 더 큰가?
한 번 답해보시길 바랍니다. 답이 있는 질문이 아니라 질문에 대해 어떤 답변을 내놓는지 자신을 바라보시면 된답니다.
한참 핫 이슈였던 DJ DOC의 노래, 'MISS박 논쟁‘에 대해 다루기도 했는데요, 한 참가자 분의 “그럼 여성 대통령을 어떻게 비판합니까?” 라는 말에 선생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대통령이죠. 공인이죠. 비판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비하 당하거나, 노무현 대통령이 고졸 이라고 비하 당하고, 김대중 대통령이 전라도라고 비하 당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나요? 이 또한 대통령의 업무에 대한 잘못이 아닌 개인의 정체성 일부인 여성이 타켓이 되어 조롱거리가 것은 맞지 않다는 겁니다. MISS라는 것을, 쎄뇨리땅 이라는 말을 다른 의도로 사용했다 하더라도 그 말들이 사회에서 실제로 쓰이는 맥락은 그렇지 않잖아요. MISS라는 말을 우리가 보통 어떻게 사용하죠? 그것이 미스터와 동등한 위치에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Miss, Mrs는 여성을 혼인 유무로 판단하고 호칭 짓는 사고방식이 들어간 호칭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문도 듭니다. 그들의 의도가 그렇지 않더라도 그 말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들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 노래를 굳이 광장에서 불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했다, 라고 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지금 원하면 DJ DOC 노래 찾아서 다 들을 수 있습니다. Dj DOC가 가수 생활을 금지 당한 것도 아니지요. 권리라는 말은 약자가 강자에 의해서 금지 당하고 억압당했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밥 먹는 권리를 일상 적으로 밥 먹을 때마다 쓰지 않지요. 밥 먹을 권리는 사장이 여덟 시간 노동을 시키면서 밥을 주지 않을 때 사용하는 겁니다. 주최측이 만약 DOC의 음악 발행 자체를 막았다면 가수들이 표현할 권리를 침해받은 거지만, 이 경우 가사에 대한 문제제기가 되면서 무대에 서지 않을 것을 합의했다고 보는 것이 더 맞습니다. 이따금 강자들은 약자들의 권리 주장의 논리를 그대로 옮겨서 침해가 아닌 것을 침해당했다고 쓰곤 합니다. 덧붙여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지금 이 논쟁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을 넘어가야 다음 사회를 준비할 수 있지 않겠는가. 분명히 다음 대선 때 여성 대통령 뽑으면 안 된다는 말이 우스갯소리로라도 나올 겁니다. 이런 사소한 것들 다 걸고넘어지고 계속 싸울 필요가 있다. 지금은 조금 과해도 된다.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한 번에 소화하기엔 방대한 양이라 충분히,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번 강의가 끝나고, 나는 왜 젠더 문제,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를 외면하지 못하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찾은 답은 ‘질문이 허용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내 자신의 정체성에 질문하고 당연시 되는 것들에 질문하고, 그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요. 수많은 이론과 탄탄한 논리보단 그 자세를 배우고 싶습니다.
한 달 동안 엄청난 경험과 지식을 전해주신 한 채윤 선생님께 감사하단 말씀 꼭 다시 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 자료 : 책 '섹스 앤 처치' , 영화 '단지 여자라는 이유 만으로', 기사 '[뉴스 앤 조이]미국 복음주의는 45대 45대 10' [젠더와 민주주의] 3강 - [알면서 무시했던] 매우 정치적인 성이야기 후기 바로가기(클릭)>> [젠더와 민주주의] 2강 - [어쩌면 몰랐던] 역사가 만들어낸 성 이야기 성적 차이에 대한 의외로 치밀한 환상 후기 바로가기(클릭)>> [젠더와 민주주의] 1강 - [이상하게 헷갈렸던] 성에 대한 은밀한 이야기 섹스 / 젠더 / 섹슈얼리티 후기 바로가기(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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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역사의 부메랑 | [11월 월례특강 후기] 슬픈 역사의 부메랑 | 고무곰돌 | 2016.12.1 | |
1. 들어가며 11월 3일은 1929년 광주학생의거를 기념하여 제정된 학생의 날입니다. 그리고 비록 군사정권의 연장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전두환 정권의 폭압을 저지시키고 대통령 직선제와 헌법 개정이라는 시민의 힘을 보여주었던 1987년 6월항쟁의 기억도 어언 30년이 다되어갑니다. 지난 10월 마지막 주말부터는 무능·부패로 점철된 박근혜 게이트에 대한 시민들의 촛불이 거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국가의 위기가 불거질 때마다 역사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대한제국 말기의 상황을 언급하는 것이 상례인데 지금 시기도 마찬가지인듯 합니다. 엄중한 국제 정세속에 정권 최고 책임자와 고위 공직자의 무능과 부패로 촉발되는 국민적 분노…….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렇게 안타까운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은 당시의 문제점을 해결 아니 개선조차 하지 못하고 기존의 체제가 유지 아니 더욱 굳건해져왔음을 보여주는 것일겁니다. 이런 안타까운 비극의 역사 반복과 구체제를 종식시키기 위해 시민의 중지를 모아 국민이 주인되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청사진을 마련해야 할 전환기에 흥겹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역사에 대한 깊고 바른 성찰과 의식을 되새긴 이야기 한 마당이 통인동 참여연대 건물 한 켠에서 펼쳐졌습니다. 2. 1+1, 짬짜면, 양념반 후라이드반...... 지난 10월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난 이번 박근혜 게이트에서 많이 접했던 단어 중의 하나가 십상시였습니다. 무능한 황제 대신 내관들이 정치를 쥐락펴락하며 나라를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한 상황을 상징하는 그 내관들처럼 이 어처구니 없는 정부에서 그런 역할을 한 무뢰배들을 뜻하는 것이라는 것은 다들 아실겁니다. 우리에겐 그런 부정적인 의미에 앞서 희화화된 이미지가 강한 것이 내관인데 그런 차림으로 재미있는 강의를 해주시는 걸로 유명한 쏭 선생께서 강의를 맡아 주셨습니다. 11월임에도 꽤 포근했던 저녁시간, 쏭 내관께서는 우선 자신이 걸어온 거침없는 도전기로 첫시간의 포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중앙대학교의 농구부를 위해 본인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모금을 한 이야기, 당시 사랑했던 여학생에게 고백을 하기 위해 건물에 대형 현수막을 걸었던 추억 등을 친절한 신문 스크랩으로 증명하며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큰 웃음을 안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국내에서의 활약을 뒤로하고 본인에게 외국 대학생활의 환상을 심어주었던 모 광고를 보고 별 준비없이 출국을 감행하여 영국에서 벌인 좌충우돌 유학분투기와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필리핀에서 벌인 라면가게를 비롯한 사업을 벌인 얘기 등에서는 웃음뿐만 아니라 경이적인 느낌까지 안겨주었습니다. 뒤 이어 역사를 싫어했던 본인이 아버지의 영향으로 TV사극에 푹 빠지게 되었고 내시복을 입고 궁궐 가이드를 하면서 오늘의 유명세의 바탕인 된 책 발간에 이르게 된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하고 싶은 것을 할때 행복하다”는 자신의 철학을 끊임없이 실천한 그 노력에 감탄과 부러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더 놀라게 했던 그리고 그날의 배움터를 더욱 큰 웃음의 도가니로 만들었던 것은 (강사님의 표현대로) 역사 이야기를 빙자한 자기소개가 한 시간 이상 지났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한 마디였습니다. 하지만 그 웃음을 주는 와중에도 사실에 대해 논쟁을 하는 것이 역사교육의 가치이다, 창의력이 경쟁력이다, 이래서 국정 교과서 발간은 문제다 등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전개해주셔서 고개를 끄덕거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랜만에 여러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같이 큰 웃음을 공유했던 첫 시간을 보내고 16세기 후반 국가운영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7년간의 조일전쟁 후에도 국제정세에 어두워 몰락을 자초한 지배층의 무능, 19세기 후반 미국이 안고있던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과 노동계급의 열악함의 현재형인 대한민국의 민낯에 대한 강사님의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과거의 어두운 역사가 현재까지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은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었고 강사님은 그 해결책을 몇가지 제시하면서 15년 뒤 대선에 출마하겠다는 당차고 유쾌한 선언으로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3. The show must go on 강의내내 웃음과 함께 제 머리를 맴돌던 것은 1990년대 초반 대학에 들어가 지금 역사 강사로 앞에선 쏭내관의 개인사 속 한국의 모습이었습니다. 극복하지 못한 박정희 시대의 관치경제, 정경유착과 같은 어두운 유산이 만들어낸 1997년 11월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가속화된 공공성 해체와 사회 전부문의 양극화로 대표되는 사회경제체제가 지속되고 있는 현실이 눈에 아른거렸습니다. 이같은 문제를 개선해주리라 믿었던 민주적인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들어섰지만 시민들의 기대에 미치치 못했고 뒤이어 시대정신과 동떨어진 이명박근헤 정부가 등장하면서 더욱 더 역사가 뒷걸음치더니 온 국민의 얼을 빼놓은 엽기적인 오늘의 사태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마 주말 촛불 집회에 참여하고 계실 겁니다. 이제는 국민의 힘으로 저 오래되다 못해 낡아빠진 세력을 청산하고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 나라를 한걸음씩 바꿔나가므로써 지긋지긋한 영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힘을 모아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자원활동가 민동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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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학교 - 인도의 과거, 인도의 오늘 | <아시아학교, 인도의 과거, 인도의 오늘> 3강 힌두교와 카스트는 불변인가 | 미요이 | 2016.11.29 | |
1. 힌두교 - 삶의 방식 힌두교는 종교라기보다 사회, 문화적 현상이나 '삶의 한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힌두교는 창시자나 예언자가 없고, 정확한 기원연대를 모름은 물론, 체계화된 교리나 '하지 말라'라는 등의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있지 않다. 힌두들이 다 함께 읽는 유일한 성서나, 일정한 예배의 형식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애매한 측면이 바로 힌두교의 '힘'이 되는 부분이다. 힌두는 삶의 의미와 방식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망라한다. 무슬림 성자의 묘당을 찾는 사람이나 조상을 숭배하는 사람도 힌두이고, 쇠고기를 먹거나 죽은 이를 화장하지 않아도 힌두이다. 힌두가 받드는 바가바드기타에 나오는 "어디에서 어떻게 나에게 오든지, 그들이 내게로 오는 어떤 길을 택하든지 그들은 내 제자이다. 나는 그들을 받아들인다"라는 말 그대로, 힌두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힌두교는 1500-500년경에 성립된 브라만교에 근거한다. 힌두교는 리그베다 등 베다의 전통을 따르는 브라만중심의 브라만교에 북부지방에 존재하던 다양한 민간신앙이 결합되어 대중을 이끄는 독자적 종교이념으로 발전되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각 지역의 다양한 믿음과 실천을 포용하여 전 인도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힌두들은 외부인들이 붙인 힌두교라는 이름 대신에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Sanatna Dharma)', 또는 '영원한 종교'라고 부른다. 2. 카스트 제도 카스트제도는 인도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가장 특별한 제도다. 카스트는 전통적으로 혈통을 통해 세습되면서 형성되었다. 카스트는 흔히 결혼으로 세습되는 직업을 통하여 유지된 직합적 공동 집단의 사회계층제도로 정의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여기에 인도 사회나 문화, 특히 힌두교와 깊은 유기적 관계에서만 존재한다는 점을 짚어 두어야 한다. 카스트의 내부는 다시 계급과 직업문화에 의해 세분되어 그 세부화한 많은 서브카스트가 실생활에서는 실질적 기능을 가진다. 서브 카스트의 정확한 숫자는 확실하지 않으나 3000이상 4000-5000 정도로 보고 있다. 카스트라는 단어는 하나의 유럽 언어로 완전히 다른 '자티'와 '바르나' 두 가지의 뜻을 합친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바르나는 기능, 직업을 지칭하는 것으로 넓은 의미로 말해서 계급을 말하는데, 조화로운 사회의 4계급을 말한다.4계급은 브라만 혹은 사제나 지식인, 크샤트리아 혹은 군인이나 통치자, 바이샤 또는 광범위한 의미의 중산층 계급, 수드라 혹은 농민이나 노동자로 구성된다. 자티는 특정 지역사회를 지칭하는데 때로는 직업을 중심으로 구별되는 특정사회를 말하고, 때로 종교, 종족, 친족관계로 구별되는 특정사회를 정의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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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학교 - 인도의 과거, 인도의 오늘 | <아시아학교, 인도의 과거, 인도의 오늘> 2강 인도 역사의 이해 | 미요이 | 2016.11.29 | |
인도는 '인더스 저편의 땅'이라는 뜻으로 인더스 강 서쪽에 자리한 서양이 바라본 대상이자, 타자의 시선이 만든 상상의 나라였다. 그리스인이 처음으로 호명한 인도라는 상상의 공간을 구체적 국가로 만드는 작업은 근대에 또 다른 서구국가 영국이 마무리했다. 그들에게 인도는 늘 욕망의 다른 이름이었다. '황금의 나라', '부의 땅'으로 알려진 그곳을 찾아 일찍이 알렉산더가 군대를 이끌고 인더스 강을 건넜고, 페르시아와 터키, 아랍, 아프간, 스키타이, 몽골의 세력들이 그 뒤를 이었다. 중세에 이르러 인도로 가는 육로가 막히자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와 바스코 다가마는 해상을 통해 '검은 황금인 향료'의 산지 인도를 찾아 떠났다. 콜럼버스는 여행에 실패하여 카리브해 주변에 서인도를,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서 목적지에 도착한 가마는 동인도라는 이름을 남겼다. 가마의 길을 따라 인도에 도착하여 그곳에 있는 여러 나라의 내정에 깊이 연루되면서 영토의 확장과 '돈벌이'에 나선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벨기에 등의 선발대가 모두 동인도라는 이름을 가진 건 그 결과였다. 그 정치적 투쟁의 장에서 패권을 차지한 영국은 유럽대륙만큼 큰 그 식민지를 '영국령 인도(British India)'라고 불렀다. 곧이어 영국의 통치에 저항한 그곳의 민족주의자들은 그 지리적 수사를 받아들여 '인도국민회의'에 차용하면서 귿르이 세울 미래의 국가를 '인도'라고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947년, 2세기에 걸친 굴욕을 마감하고 영국에서 해방된 그곳은 사상 처음으로 인도라는 국명을 갖게 되었다. 인도라는 이름의 역사가 그렇듯, 인도는 늘 타자에게 목도되고 정의되었다. 구비 전통을 가진 인도는 스스로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명상의 나라, '하늘 호수의' 나라 등 인도에 대한 모든 수술은 외부(타자)의 창작물이었다. 고대에는 긍정적 측면이 강했지만 근데에는 부정정이고 열등한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한 묘사는 서양의 타자성과 서양과 다른 열등한 인도를 강조하는 식민주의의 '힘'과 관련되었다. '비합리적이고 타락한 어린애'와 여성적인 인도는 '합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성숙한' 서양 남성의 통칠르 받아 마땅하다는 논리였다. 인도를 통치한 영국은 피지배자 인도와의 문화적 차이를 강조하고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도를 열등하고 야만적인 사회로 그렸다. '인도라는 나라는 없다'라면서 인도를 지역과 종교, 인종, 카스트로 분열된 사회로 묘사하고, "우리의 지배를 받는 것은 너희들이 분열했기 때문이다"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비역동적인 '힌두교'와 차별적인 카스트제도를 인도의 특성으로 만들고, 카스트를 사회 발전의 걸림돌로, 인도 역사를 종교의 나라로 채색하였다. 불변의 인도, 힌두/무슬림의 갈등도 내재적 특성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외부의 시선과 이해는 역사 없는 인도와 '문화적 측면'의 인도를 강조하였다. 특히 수천 년간 지속되었다고 가정된 힌두교와 카스트 제도는 헤겔이 말한 '불변의 인도'를 예증하고 인도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충분자료로 쓰였다. 인도를 종교(힌두교)와 문화의 나라로 여기는 것은 곧 인도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무능하다는 은유였다. 이는 인도인의 역동성과 생존능력, 곧 역사를 만든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역동성을 소지하고 역사를 가진 영국의 지배를 정당화한 근대서구가 만든 역사서술의 결과였다. 영국은 역사 없는 인도에 역사와 근대, 진보를 도입한 셈이었다. 종교적 인도와 정신주의적 인도, 역동적이고 물질적 서양의 반대명제인 그 이미지는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발전한 나라의 미디어는 요가, 갠지스에서 목욕하는 성자, 신비주의, 불가촉천민을 보여주면서 종교에 찌든 낙후한 인도의 스테레오타입을 재생산한다. '인도의 영광은 힌두교가 번성한 고대와 전통에 있다' '인도인은 운명에 순응하며 모든 일상이 종교와 연결된다.' '인도인은 가난하지만 행복하다' 무역사적이고 무력한 이미지로만 박제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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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의 시간, 공간, 사람 | [한국 근현대의 시간, 공간, 사람] 3강 한국 근현대의 공간 ; 자연이 만든 경관, 인간이 만든 경관 | 문동욱 | 2016.11.26 | |
시공간. 말의 순서에서도 그렇지만 역사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걸어온 여정과 흐름, 즉 시간에 더 많은 관심을 지니는 학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유구히 흐르는 시간은 인식함으로써 존재하는 다소 추상적인 관념인데 반하여 공간은 그 순간에 직접 딛고서 그 안에 있게 하는 기반으로서 실재이기도 하다. 하여 그 실재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구체성을 통해 일련의 믿은 그 자체를 형성하여 인간의 당면한 삶에 영향을 미치며 인간에 의해 변화되는 관계를 맺기도 한다. '공간'의 형성과 변화는 인간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을까. 과거와 현재에 인간들은 공간과 영역을 어떻게, 얼마나 실감하고 인지하였을까. 현대인에게 공간과 영역은 m,km 등 수치로서 인지된다. 동시에 자신이 직접 보고 밟지 않는 곳에까지 매체 등을 통한 간접경험으로써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체감적이고 실재적인 영역이 아니라, 지도를 매개로 한 인식되고 상상된 관념적 인식이며, 이것은 거리와 면적의 계량적 수치, 혹은 교통수단과 소요시간 등으로 계산되어 재정리 구획화되어 있기도 하다. 결국 인간이 실제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공간은 이른바 생활반경일 것이다. 이에서도 현대와 전근대인에게는 차이가 있다. 강사는 출산에서부터를 통해 상징적으로 이 점을 설명한다. 현대인은 병원, 조리원, 자택 등을 출산 전후에서부터 세분된 공간들을 이동함으로써 삶을 시작하는 반면, 전근대인은 금줄, 삼칠일, 백일 등이 상징하듯 이동이 없이 뿌리내린 삶을 시작해 살아간다. 일상과 평생에 이동반경 역시 현대인이 변화된 생활 양식과 교통수단으로 끊임없이 장거리를 이동하는 반면, 전근대인은 대개 토지 고향 향토를 중심으로 한정된 영역에 근거하여 평생을 살아간다. 때문에 공간에 대한 감각이 근본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어떤 변화의 소산일까. 대개 고대 각 문화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공간의 세계관은 천원지방이다. 동시에 땅이 이루는 사각형은 농경이 시작된 후, 구획화와 합리의 산물인 인위적 모습이다. 하여 사각형은 인위와 그것이 이루어지는 공간인 지상을 상징한 반면, 원은 자연, 본디에 존재하던 것으로 하늘이자 신적영역을 상징한다. 건축물 등에서, 혹은 황제의 -천자, 즉 반신적 존재- 상징이 팔각형 등 사각에서 원으로 변해가는 모양을 취하는 것도 이 결과이다. 여하튼 지간에 '천원' 과 구별되는 '지방' 으로서 사람들은 이미 자신들의 세계인 공간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말했듯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근대의 세계는 지극히 좁았으며, 자신의 뿌리내린 세계관에 한정되었다. 여행은 특별한 사유로 이루어지는 고된 여정이었다. 반면 권력자에게는 관념적으로 광대한 영역이 천하, 세상 등으로 존재했으며 이것을 순행 등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체험 체감 하는 한편 인지하고 다룸으로써, 공간 자체를 사유함으로써 소유할 수 있었다. 또한 그런 권력에 의해 탄생된 특별한 공간이 도시였다. 도시는 자연경계가 아닌 특별한 경계 -성벽- 를 지님으로써 구획화된 인위적인 동시에 구별되는 특정한 공간이었다. 그 특별함은 도시의 주인인 권력자와 그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 나눠가지는 신성함으로 조작되었고 '구별되는 공간'으로서 도시의 특수성을 두드러지게 하였다. 산업혁명과 근대화 이후 도시는 종래의 특별히 경계지어진 공간에서 표준적인 생활의 공간으로 변화하였다. 이것은 도시 거주자의 증가 탓인데, 첫째는 도시의 유인요인에 의한 유입 및 거주 인구의 증가, 그리고 도시 자체의 증가에서 비롯되었다. 하여 도시적 삶 자체가 근대적 삶의 표준이 되었는데, 앞서 말했듯 도시는 애초에 인위적이며 기획된 공간이다. 이것은 근대성 역시 마찬가지이며 결국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근대 도시적 삶과 그 공간은 근대성이 압축적으로 표현된 산물이기도 하다. 그 변화된 삶은 교통통신 수단의 발달로 시공간이 압축된 동시에 밀집된 삶이다. 빠른 이동, 빠른 변화, 자력이 아닌 교통수단에 '실려' 이동함으로써 움직임의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되어 주변의 흐름을 바라보게 되는 것에서 인간은 변화와 속도를 하루하루 체감하게 되고, 결국 근대적 감각에서 '안정=지체'라는 느낌을 안겨주어 끝없는 변화를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며 쫓게 변해왔다. 한편으로 시공간의 압축은 인간간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단축하였으며, 거리감의 부재 즉 자기 공간의 박탈에 익숙해지는 동시에 시작적인 도시에 체감적으로 익숙해져 관념까지 근시안적인 단견에 물들었다. 그런 끝없이 변화하고 불안정한 삶 속에서 공간은 일시적인 공간에 불과할 뿐 그 자체로서 본원적인 의미를 지니는 '장소'가 되지 못한다. 그에 대한 목마름, 불변과 지속성에 대한 욕구가 투영되는 것이 불멸이어 보이도록 오래 보내온 시간 자체를 담지하고 있는 문화재들에 대한 애호이며, 동시에 공허함을 달랠 새로운 시대가치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현대 건축물, 이른바 랜드마크들이다. 시간과 공간을 2,3강에서 인간이 어떻게 인식하고 그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지를 확인한 후, 다음 마지막 강의는 그러한 인간 자체는 어떠한 속성을 지니고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며 변화해왔는지 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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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와 민주주의 - 편견과 오해를 넘어 | [젠더와 민주주의] 3강 - [알면서 무시했던] 매우 정치적인 성이야기 | 제주도주도 | 2016.11.25 | |
<젠더와 민주주의> -차별과 혐오는 어떻게 질서와 진리가 되었나?
성경에서의 동성섹스 창세기 오난, 형이 죽게 되자, 형의 부인과 섹스를 해야 했다. 그리고 오난은 질외사정을 해, 하느님께 죽었다고 한다. 이로써 기독교는 임신목적외 섹스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을 했다. 근본주의 개신교에서는 동성 간의 섹스는 임신목적외 섹스이기 때문에 그 역시 부정적으로 보았다.
동성애혐오 정치 세계2차대전 당시, 독일에서는 동성애를 처벌하고 낙태에 대해 반대했다. 사람을 많이 낳아 그들을 군인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런 입장에서 보았을 때 동성애자는 국가반역자였다. 레닌이 집권하던 당시 소련에서는 낙태가 가능했고, 유급출산휴가를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스탈린이 들어서게 되면서 낙태를 불가능하게 했고, 유급출산휴가도 없애고, 이혼을 억압하며, 여성의 몸을 나라의 것으로 생각하였다. 옐친이 집권을 하며 동성애처벌법을 폐지하였고, 이후 푸틴정권이 들어서며, ‘비전통적 성관계선전 교육처벌법’을 제정였다. 여기서 비전통적이라는 것은 동성간의 섹스를 의미한다. 이렇게 하게 된 이유는 동방전교회가 망해갔고, 푸틴과 동방전교회가 도덕, 즉 성생활에 관여하게 되었다. 1949년 중국에서는 동성애가 부르주아의 타락이라고 하며 총살을 하였고, 1950년대 미국에서는 동성애자가 공산주의자라며 동성애자들은 공산주의자 일 수 있다는 이유로 공무원이 될 수 없었다. 대다수의 독재국가 중 러시아에서는 출산율이 낮으므로 동성애는 하면 안 된다고 했고, 우간다에서는 동성애유전자라는 것은 없고 비정상적이라고 했다.
한국과 일본에서의 동성애 과거 고려 목종 때에도 목종과 신하와의 동성애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었고, 그것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은 없었다고 한다. 또 조선에서 일본으로 여행(?)을 갔다 와, 쓴 책에 ‘일본에서 남색이 유행했다’, ‘일본에서 남성이 여성의 옷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는 식으로 쓰였다고 한다. 또 일본에 혼마 규스케라는 사람이 조선으로 여행(?)을 왔다가 쓴 책에서 조선에 남색이 유행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썼다고 한다. 일본은 유럽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동성애를 터부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혼마규스케도 일본의 도덕적 우월을 위해 조선의 남색에 대해 썼다고 한다.
‘호모섹슈얼’의 유래 1869년 의사가 ‘호모섹슈얼’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남성간의 섹스를 형법에서 다루는데 그것이 왜 범죄냐고 하며 만든 단어이다
한국에서의 동성애혐오 운동 2005년 사립학교법(사학법)을 개정하게 되었고, 기독교에서는 개정에 반대를 했다. 대다수 사립학교는 기독교소유이고, 사학법이 개정되게 되면, 이사회가 투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2007년 사학법은 재개정을 하게 되었고, 재개정 2달 뒤 차별금지법이 입법을 예고하게 되면서 기독교에서 공개적으로 동성애반대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추세 -2005년 기독교에서는 추세로 보아 신도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래서 빚을 지고서라도 교회를 지었다. 하지만 근래, 기독교에서 안 좋은 일들이 있어서 신도수는 늘지 않았다. 결국 교회에 돈이 들어오지 않게 되자, 교회는 힘들어졌고, 혐오로서 자신들의 편을 만들며 혐오의 정치를 하게 되었다. 또, 목사는 많다. 하지만 이들이 갈 교회는 줄어들고 있다. 이 목사들은 반동성애단체에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결국, 이후 기독교의 동성애 혐오운동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생각된다고 하셨다. [젠더와 민주주의] 2강 - [어쩌면 몰랐던] 역사가 만들어낸 성 이야기 성적 차이에 대한 의외로 치밀한 환상 후기 바로가기(클릭)>> [젠더와 민주주의] 1강 - [이상하게 헷갈렸던] 성에 대한 은밀한 이야기 섹스 / 젠더 / 섹슈얼리티 후기 바로가기(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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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와 민주주의 - 편견과 오해를 넘어 | [젠더와 민주주의] 2강 - [어쩌면 몰랐던] 역사가 만들어낸 성 이야기 성적 차이에 대한 의외로 치밀한 환상 | 박윤채영 | 2016.11.19 | |
저번 강의에서 우리는 ‘나는 여자/남자입니다.’ ‘너는 여자/남자이다.’ 라는 확신을 향해 의문을 가져보고 그 답변에 대한 사회적 전제들에 생물학적 근거들을 바탕으로 의문을 제기해보았습니다. 우리가 믿어왔던 'XX' 'XY'염색체에 배신(?)도 당했고요, 세상에 많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다양한 염색체 작용과 성기의 형태도 알게 되었습니다. 호르몬이 얼마나 바쁜지, 그리고 성에 대한 ‘상식’들이 호르몬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해왔다는 것을 알고 반성도 해보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여성, 남성에게 인간의 본질인양 부과된 사회적 역할과 규범, 관념들이 형성된 역사를 기독교 역사를 중심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왜 기독교인가? 라는 의문이 먼저 드실 텐데요, 기독교는 그 역사에 비해 단기간에 엄청난 영향력을 전 세계적으로 떨치고 있는 종교입니다. 많은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고요. 그리고 문화적으로 동서양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있는 지금 글로벌 시대에, 서양 문화의 중요한 바탕이어 온 기독교를 알면 지금 우리 사회에 서양문화가 얼마만큼 영향력을 갖고 있는지, 얼마만큼 잠식해 있는지 알 수 있겠지요. 예수가 등장했던 시대의 사람들은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보았습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허구이며 이데아로 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지구에 종말이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때를 잘 넘기기 위해서 극단적인 금욕 생활을 실천하고 있었고요. 또한 계급이 있던 시대였습니다. 노예와 여자, 아이들은 성인 남성의 통치 하에 살고 있었습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사람들이 수학, 과학, 철학을 발달시키고 이성을 중시하고 있었지요. 이 시대 사람들은 아주 많은 신들을 섬기고 제를 지내고 신탁을 받았습니다. 잘 알려진 ‘그리스 로마 신화’가 이때 사람들의 일종의 경전이었습니다. 그런 때에 예수가 등장했습니다. 예수는 ‘평등’ ‘사랑’ ‘유일신’을 말했습니다. 계급에 짓눌린 사람들, 이성에 짓눌린 사람들은 예수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에 위로를 받고 그를 따랐지요. 예수가 죽고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말을 정리하여 기독교를 만들었고 기독교는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오랜 박해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로마는 다양한 신을 인정해왔는데 기독교는 유일신을 주창했기 때문이죠. 이때 사람들에겐 의문이 생깁니다. “그럼 예수는? 죄 있는 자가 인간의 죄를 사하러 왔다고?” 거기에 이런 답변이 돌아옵니다. “예수는 ‘처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에 의해 잉태되었다.” 사람들은 또 질문합니다. “그럼 인간 마리아는? 그도 정자를 통해 태어났으니 죄가 있지 않는가?” 여기서부터 마리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오기 시작하고 마리아의 변천사가 시작됩니다. 마리아의 시작은 가난한 집의 부인이었으나 죄 없는 예수를 잉태한 존재로 만들어지면서 점점 ‘성녀’가 되어 갑니다. 그 시대의 그림에서 그것을 엿보는 방법은 마리아의 옷 색입니다. 마리아의 옷은 검정색에서 점점 빨강(황제의 옷 색) 그리고 빨강과 파란색을 함께 걸치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또한 예수를 잉태시켜준 성령과의 관계 묘사도 달라집니다. 성령을 맞이하는 마리아에서 성령의 절을 받는 마리아로요.
근대로 들어서면서 이성과 과학이 다시 꽃을 피우며 기독교는 그 빛이 쇠해 가는 듯 했습니다. 과학은 근대의 새로운 종교가 되었습니다. 정치는 과학과 결탁하여 과학을 여성들을 통제하거나 열등성을 강조하는 근거로 사용했습니다. 여성의 질을 ‘축축하고 은밀히 숨겨져 있는 곳’으로 표현하였고 출산의 고통은 여성의 원죄에 해당한다며 출산 시 마취제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포유류’라는 분류 항목의 말 안에는 ‘아이에게 젖을 주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 종을 대표하는 모습으로 부각되어 있습니다. 방대한 양이기에 강의를 정리하는 것에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강의의 메시지를 분명히 요악하고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사회에서 정설처럼 얘기되는 것들의 많은 부분은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즉, 시대에 따라 정치, 과학, 종교는 결탁되어 변형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규범과 관념들은 실은 소수 권력의 필요에 의해, 해석되고 변형되어 온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역할은 그것들에 질문을 던지기를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규범에 맞지 않는 나의 모습을 거제하기 이전에 규범에 의문을 제기해보는 것입니다. ‘만약 판도라의 상자를 연 판도라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었다면 어떻게 해석되었을까?’ ‘동양에서 성은 어떻게 얘기되어져 왔지?’ 옳다고 애기되어 지는 것들에,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상식들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남들의 해석에 내 인생과 사고방식을 맡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젠더와 민주주의] 1강 - [이상하게 헷갈렸던] 성에 대한 은밀한 이야기 섹스 / 젠더 / 섹슈얼리티 후기 바로가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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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학교 - 인도의 과거, 인도의 오늘 | <아시아학교, 인도의 과거, 인도의 오늘> 1강 인도와 오리엔탈리즘 | 미요이 | 2016.11.15 | |
<아시아학교, 인도의 과거, 인도의 오늘> 1강 후기 : 11월 9일 저녁 7시, 아시아학교 첫 수업이 있었습니다. 현재 인도문화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이옥순 선생님께서는 조금 일찍 도착해 따뜻한 녹차를 마시며 참여연대 회원분들과 담소를 나누셨습니다. 선생님의 대표적인 저서는 <인도는 힘이 세다>, <인도에 미치다>가 있습니다.
진정한 인도인은 누구인가? - '진짜 인도'란 말은 불안과 열망이 실린, 타자의 눈을 통해 굴절된 이미지입니다. 진정한 한국인이 갓을 쓰고 도포를 휘날리는 양반이 아닌 것처럼 말이지요. 지금까지도 우리는 인도인이 서양의 순수한 타자가 되기를 열망하곤 합니다. 진정한 인도와 인도적인 것을 회복하고, 서양을 닮거나 서양에 감염되지 않은 '대상'으로서의 인도를 찾고 보존하려고 하지요. -이렇게 냉동된, 부정적인 인도 이미지가 팽배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때문일 것입니다. 그 자체로 특수한 존재인 서양은 흔히 타자를 특수하다고 여기며 스스로 보편적인 기준이 되지요. '과거'의 인도를 다시 서술하고 '현재'의 인도를 다방면으로 접근하려는 노력, 그리하여 고정된 인식과 분석의 범주를 넘어 있는 그대로의 인도를 보려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이로써 우리는 고정관념을 넘어서 인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샐러드볼의 인도사회 - 인도는 '다양성'이라는 단어가 뼈속 깊이 박혀있는 사회입니다. 먼저 힌두교를 살펴볼까요. 힌두교는 다양한 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종교입니다. 애니미즘, 조상숭배, 무신론, 불교, 자이나, 기독교, 이슬람 모두 힌두교의 스펙트럼 내 포함되지요. 하나의 강령, 전통, 이단도 모두 힌두교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유연성 덕분에 인도는 영국에 정치적으로는 패배했으나, 문화적, 정신적으로는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식민지배정책에 포용력과 더불어 신축적으로 대응했기에 그 생명력을 잃지 않을 수 있었지요.
비폭력 : 인도의 핵심 이데올로기 - 흔히 카스트제도의 외면적인 모습만을 가지고 인도를 비판할 때가 많습니다. 다다음 시간에 카스트제도에 대해 자세히 다룰 것이기 때문에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카스트 또한 각자가 각자로 살아가는 하나의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인도의 국교를 평등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평등 사상에 기초해서 간디의 비폭력 사상이 퍼졌고, 종교문화적 다양성이 인정되는 것입니다.
인도의 민주주의 - 인도는 전자투표제로 선거를 치릅니다. 인도의 선거를 지켜보며 제가 생각했던 것 중 하나는, 그들이 자신에게 무엇이 이익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자신과 같은 신분의 정치인에게 표를 주거나, 출신 신분 별로 대학입학 정원 수를 배분하는 입시제도를 몇 십년이 넘도록 유지하도록 하는 것 등입니다. - 인도는 가지가 많은, 바람잘 날 없는 나무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형식적으로나마 존재하지요. 물론 어두운 면도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부정부패가 심하고, 정치 문화적으로도 성숙하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모양처럼, 우리는 다양한 앵글을 가지고 인도를 조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한 강의를 들었을 뿐인데 인도가 가진 매력에 빠진 것 같습니다. 특히 저는 인도의 민주주의에 대해, 그리고 평등과 비폭력이라는 가치에 기반한 카스트 제도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주 수업이 매우 기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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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와 민주주의 - 편견과 오해를 넘어 | [젠더와 민주주의] 1강 - [이상하게 헷갈렸던] 성에 대한 은밀한 이야기 섹스 / 젠더 / 섹슈얼리티 | 박은호 | 2016.11.14 | |
강의 자료로 준비해주신 프린트에는 낯선 질문이 있었습니다. 1) 나의 성별은 _____ 2) 그 근거를 세 가지만 찾는다면? 잠시 생각해보셨나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의 성별은 무엇인가요? 남성? 여성?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요? 저는 남성이라고 적었고 근거는 두 가지 밖에 적지 못했습니다. 성기의 모양과 ‘자연적으로는’ 임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썼습니다. 하지만 이건 저의 겉모습만 봤을 땐 알아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겉모습을 보고 그 사람의 성별을 알아낼 수 있는 이유는 과연 몇 가지나 될까요? 그 이유는 모두 동의할 수 있습니까? [성은 허구다] 허구는 없는 것을 꾸며낸 것입니다. 내가 혹은 남이 나의 성을 ‘이것’이라고 판단하고 그에 맞는 태도 등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성은 허구’라고 말해야 합니다. 성별을 구분하는 거에 그치지 않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우리는 그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인 차이에 대해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유전자가 다르다 DNA가 다르다 호르몬이 다르다. 그 다름에 의미를 부여해서 차별의 근거로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강의 중 한채윤 선생님은 고정관념에 의해 형성되는 성의 구별과 그것에 기인한 차별을 깨주셨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정자가 경쟁에서 승리해서 난자와 결합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난자 핵은 세포질로 쌓여있고 또 그 바깥에는 투명대가 있어 1등으로 도착한 정자가 결합하는 게 아닙니다. 정자끼리의 경쟁이 아닌 협력을 통해 난소와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생물학적인 이유로 차별을 말하는 사람들의 공식대로 맞추면, 남성의 특징은 협력하고 다정다감하며 희생하는 것입니다. [모든 걸 하나로 섞어버리지 말고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세요] 한채윤 선생님께서는 몇 가지 신문이나 방송에 방영된 자료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정자는 여성 질 안을 날아가지 않고 질벽에 붙어서 기어갑니다. 그것에 대한 보조자료로 사용된 그림에서 남성의 얼굴과 형상을 한 캐릭터가 철모를 쓰고 낮은 포복을 하면 총을 메고 질벽을 기어갑니다. 이것은 정자가 모두 남성으로 그려진 것의 오류와 남성이 여성을 정복하러 가는 것을 형상화합니다. 애기울음소리에 반응하는 연구를 진행한 자료에서 여성이 더 많이 반응하였습니다. 역시 여성이 아이를 더 생각하는군요. 그러니 아이는 역시 여성이 키우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 실험에서의 오류는 애기울음소리를 듣는 여성과 남성이 성인이라는 것입니다. 충분히 사회에서 교육된 남성과 여성으로 주어진 반응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이의 울음소리에 더 반응한다고 육아를 그 사람이 전담하는 게 맞는 말일까요. 이성애에서 바람을 피우는 이유는 더 우수한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동성애에서 바람을 피우는 이유는 '더 우수한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라고 설명이 될까요? 그리고 이성애에서는 인간의 유한한 생명으로 인해서 유전자를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에 사랑도 하고 섹스도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관점으로 인해서 동성애에 대해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도 그들은 어떻게 섹스를 할까라고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답답해지지 않나요?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에 대해 안다는 것의 효과란 .. 속지 않고 해석한다는 것] 여성 같다 남성 같다라는 체계를 만들고 성역할이 만들어진 사회에서 우린 지금 살고 있습니다. 젠더롤(사회적으로 규정된 역할)이 주어졌기 때문에 여성이 되고 남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지날수록 젠더롤은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고려하였을 때 젠더롤은 사회에 의해 규정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젠더 뿐만 아니라 섹스(생물학적 성)도 만들어졌습니다. 버틀러에 의하면 남성의 성기를 가진 사람을 남성이라고 말하고, 여성의 성기를 가진 사람을 여성이라고 말하며 섹스도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은 99.9%가 똑같습니다. 대부분 같지만 아주 작은 부분에 의해서 서로 매우 다릅니다. 즉 생물학적인 차이가 전부가 아니라 사회가 차이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차이에 주목하는 것에 속지 않아야 합니다. 강의하는 동안 한채윤 선생님께서는 덜 예민한 사람들이 그냥 흘렸을 자료나 해석에 관한 점들을 짚어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제가 얼마나 무감각하게 그런 것들을 받아들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권력자가 자신들의 의도대로 사람들을 반응시키기 위해서 어떤 것을 만들고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을 떄 민주주의는 위기를 겪습니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성 역할 또한 누군가의 의도는 아닌지 생각해보고 속지 않아야겠습니다. 자원활동가 박은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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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의 시간, 공간, 사람 | [한국 근현대의 시간, 공간, 사람] 1강 프롤로그 ; 새로운 역사 –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역사 | 문동욱 | 2016.11.14 | |
작은 역사, 평범한 역사,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가가 이번 첫 강의 제목이였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위해 맨 처음으로 우리에게 던져진 물음은 '역사란 무엇인가' 였다. 우선적으로 강사인 전우용 교수가 밝힌, 그에게 역사의 정의란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연과 사물과 맺어온 관계의 총체' 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인간이 시간과 공간을 인지하는 방식과 모습, 그리고 그것을 변화시켜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혹자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불변이되 시대와 환경만이 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강사의 견해에 따르면 그 변화하는 시대와 관계 맺음으로써, 또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동력으로서 사람 역시 진화의 도정에 있는 존재로서 틀림없이 변화한다. 그렇다고 해도 하여 해서 실제적으로 입에 담아지는 '역사'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역사란 '과거에 있었던 일' 이다. 혹은 게 중 특별한 가치와 의미를 지녔다 여겨져서 선별되어 기억되는 일부이다. 종래의 입장에서 역사는 '과거'의 일이었으며 그것은 동양사에서는 창고의 출납기록이 마쳐졌음을 뜻하는 '역'이란 한자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역사는 정녕 '이미 끝난 것' 에 관한 기록에 불과한가? 현대인은 이른바 역사를 얼마나 역사화 (객관화, 상대화) 할 수 있는가? 우리와 무관한 오랜 예쩐의 사실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E.H.카의 금언대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이며 '산 자가 죽은 자를 되살리는' 일이었다. 그러다 다시, 그 금언은 현재에도 나왔던 당시와 같은 유효성을 그대로 지닐 수 있을까? 어떤 이론의 어지가 없는 것일까? 강사의 견해에 의하면 현대 사회는 급속한 변화가 오히려 일상인 시대다. 새로운 것이 오히려 익숙하며 '새 것(NEW)' 자체가 가치를 지녀 신념으로서 내재화 되어 모든 것의 변화가 당연시 되는 시대이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데 하문 유리는 역사란 (정녕)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 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대화는 온전히 가능한가? 우리는 '과거'라는 거대한 존재 자체와 총체적인 대화가 가능한가? 그 대화를 통해 단숨에 핵심까지 이르는 사실을 전해들을 수 있는가? 우리는 과거를 모두 기억할 수 있는가? 우리의 대화 상대가 되는 과거는 '극히 일부' 일뿐이다. 하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과거는 기억되는 것 뿐이다. 누군가 기억에 남기고자 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전해 이어지는 일부이다. 하여 역사의 승자는 기록하는 자라 하는 것이며, 동시에 승자가 기록의 처분권을 지녀 특정한 기억만을 남기는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기억은 객관적이지 않으며 하나이지도 않다. 같은 것을 보고 다르게 느끼며 해석하듯 기억과 기억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관점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그것은 단지 방향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심도, 즉 부여하는 중요도의 차이이기도 하다. 하여 같은 사건에 대한 대치되는 기억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는 끊임없는 고민이자 논쟁이다. 보편적 동의가 이루어진 듯한 집단적 기억 역시 시대에 따라 변화되기 마련이다. 한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관의 변화가 시각의 변화를 낳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특정한 해석, 기억에만 영구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가능할까. 그리고 정당할까. 실상 그것이 국가권력에 의한 역사의 결정권-해석권 독점이었던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위험성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역사에, 기억에 '옳음' 이나 '바름' 을 부여할 수 이는가. 그것이 합당한가. 이와 같이 기억은 그 자체로도 복잡하기 이를데 없다. 동시에 우리가 과거의 '기억'에 접근하는 것은 기록을 통해서인데 기록은 반드시 모든 것을 남기지 않는다. 기록자가 '중요' 하다고 여기는 것만을 남기며 또한 감추고자 하는 것은 기록하지 않음으로써 사라지게 한다. 헌데 문자라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일부 식자층의 전유물이었다. 때문에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기록은, 그것을 통해 용이하게 대화할 수 있는 '과거'는 글의 가치관으로 걸러진 것 뿐이어 왔다. 하여 역사는 오랫동안 치자의 학문으로서, 그들에게 통치를 위한 자료집의 역할을 하거나 그들의 정통성을 보증하는 위헙의 집대성에 불과한 것이었다. 때문에 영웅과 위인들의 역사였으며 정치와 권력에 대한 기억이었다. 이러한 치자의 지위를 강탈해 전유한 것은 근대의 국가와 민족이었다. 절대적이며 무엇보다 중요한 존재로서 신성성을 가장한 '조국'과 '민족'의 역사였으며, '우리' 의 역사였다. 그 결과는 '우리'와 '저들'의 구분이며, 나아가 집단이기주의와 '저들'의 배제-말살이었으며 그 귀결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집단 학살이었다. 그 충격적인 교훈과 경험에 힘입어 반성과 재고가 이루어져 종래 국가-민족 사관의 해체가 시도되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와 '저들' 의 구별을 뛰어넘고자 한 시도는 애초에 '우리'란 무엇인가로 이어졌다. 그간 '우리' 라는 총체로 묶여 집단적 범주에 포획되어 억눌려 있던 소수자들, 더 작은 집단과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관점이 등장하였다. 하여 그간 귀 기울이지 못했던 목소리, 소수자 약자 그리고 기록되지 않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 즉 본강의 주제인 '작은 역사' 에 대한 탐구와 접근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미시사 일상사 생활사이다. 하면 기록되지 않은 역사에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그것은 다음 강의의 '한국근현대의 시간, 공간, 인간' 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그 과정을 통해서 보다 살펴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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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을 읽다 | [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 읽기](7)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 자비로운 여신들 | lyh1999 | 2016.11.7 | |
정치철학으로 고대 그리스 비극 읽기 마지막 시간(11월 2일)엔 <아가멤논>에 이어서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의 나머지 두 작품을 읽었습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 왕비가 아가멤논을 죽이며 벌어진 복수는 자녀세대인 엘렉트라와 오이스테스에게로 이어지고(<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이 복수는 시민들이 참여한 재판장에서 비로소 마무리됩니다(<자비로운 여신들>). 복수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용서를 다룬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번 시간에는 화해가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이뤄지는 측면을 주목합니다.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제목은 클리타이메스트라와 그의 딸인 엘렉트라를 지칭합니다. <아가멤논>에서 클리타이메스트라가 남편인 아가멤논을 죽이고 정부인 이아기스토스가 권력을 차지하자 위협을 느낀 엘렉트라는 어린 남동생 오레스테스를 도망치게 했습니다. 극이 시작하면 성장한 오레스테스가 아가멤논의 무덤을 찾아오고, 이어 제주를 바치러 등장한 엘렉트라와 재회해 아버지를 죽인 자들에게 복수를 맹세하고, 코로스들이 이를 지지하고 나섭니다. 오레스테스는 친구 퓔라데스와 나그네로 위장하고 아이기스토스의 성에 찾아갑니다. 이들은 오레스테스가 죽었다고 거짓 소식을 전하며 아이기스토스와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접근해 이들을 살해합니다. 그러자 오레스테스는 클리타이메스트라의 혼백이 불러낸 복수의 여신들이 나타난 것을 보게 되고, 도움을 청해 어디론가 도망칩니다. <자비로운 여신들>에서 오레스테스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탁소에 도착해 아폴론으로부터 아테나이로 가 재판을 받으라는 명을 받습니다. 그리고 아테나이에서 아테나 여신이 재판장으로, 시민들이 배심원으로 참석한 가운데 공개 재판이 열립니다. 모친인 클리타이메스트라를 죽인 오레스테스의 유죄 여부를 두고 아폴론이 변호에 나서고, 배심원 투표가 동수로 팽팽히 맞선 결과를 본 아테나가 오레스테스를 지지하며 무죄 판결을 내립니다. 오레스테스를 쫓아온 복수의 여신들이 재판 결과를 보고 아테나이에 재앙을 내리겠다고 위협하자, 아테나는 그들이 지낼 곳을 마련해주고 아테나이를 축복해주도록 설득합니다. 이로써 복수의 여신들은 제목의 '자비로운 여신들'로 거듭나게 됩니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아가멤논>에서 남편살해,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 모친살해의 주제를 다루고 이 두 사건이 <자비로운 여신들>에서 재판이라는 제도를 통해 완결되는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연쇄적인 복수 가운데 벌어진 남편살해와 모친살해 중 어느 쪽이 더 큰 죄인지를 놓고 대립하는 갈등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오레스테이아가 왜 무죄 방면되는지 이유를 살펴보려면 그의 행동 배경에 아폴론의 신탁이 있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내게 이런 모험을 하도록 명령하신 록시아스의 강력한 신탁은 결코 나를 저버리지 않을 거예요")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는 모두 어머니의 손에 아버지를 잃었다는 원한[사적인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레스테스에게는 그 이상으로 신이 부여한 공적인 명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두번째 배경으로는 코러스로 대변되는 시민들이 오레스테스의 복수를 지지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아가멤논의 죽음 이후 아이기스토스의 참주정치에 시달리고 있던 코러스들은 무덤가에서 복수를 맹세하는 남매를 옆에서 계속 지지하며, "아르고스시 전체에 자유를 찾아주었다"고 두 사람을 죽인 일을 칭찬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 복수는 분명히 유혈을 부르는 폭력적인 방식이었고, 때문에 재판을 통한 해결이 불가피해집니다. <자비로운 여신들>의 재판 장면은 지금까지 이어진 사법 제도의 기원적인 측면을 보게 해줍니다. 극중에서 재판은 사건 발생장소인 아르고스가 아니라 아테네에서 열리는데, 그 이유로는 당시 이 지역의 정치적 중심지 역할이 아르고스에서 아테네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한편으론 재판 장소가 변경된 것이 재판이란 실제 사건 당사자와 관계없는 제3자가 판단해야 공정하다는 인식을 보여준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를 제도 전체에 적용하면 제도란 이해당사자가 아닌 외부자가 설계해야 한다는 것, 불가피하게 내부자가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면 제도를 만든 내부자가 이후 그 공동체를 떠나야 한다는 뜻도 됩니다. 재판장에서 복수의 여신들은 클리타이네이메스 편에서 모친살해가 더 큰 죄라고 주장하고, 아폴론은 오레스테스를 변호해 남편살해가 더 큰 죄라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남편과 모친 모두 가족 안의 가까운 인간관계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공적인) 서약을 통해 맺어지는 관계라는 점에서 남편살해는 비혈족살해, 모자 모녀 관계는 혈연을 통해 맺어지는 관계라는 점에서 모친살해는 혈족살해라는 차이가 나타납니다. 이 점에 근거해 복수의 여신들은 오레스테스가 혈족을 살해한 죄인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아폴론은 "제 자식의 진짜 생산자는 자궁에서 태아를 기른 어머니가 아니라 수태시킨 아버지"이며 "어머니 없이 자식이 태어나는 것이 가능하다"라고 주장합니다. 아버지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아테나가 바로 그런 경우이기 때문인데, 아테나 역시 이 점을 근거로 자신은 남자/아버지 편이라며 오레스테스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물론 지금 기준에서 보면 불합리한 논리이지만, 오레스테스에겐 신탁이라는 공적 명분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시민들의 지지가 있었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획득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테나이의 재판은 제도로서의 재판이 가져야 할 덕목들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입니다. 이 재판은 아테나가 11명의 시민 배심원과 전령, 수많은 백성들을 데리고 등장하면서 시작하는데 이는 재판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치뤄져야 함을 알려줍니다. 또한 법정에서 원고와 피고측이 자기 사정을 이야기하게 함으로써 사건을 공동체가 공유하게 하고, 나아가 여기서 성립된 정보의 공정성이 재판을 좌우한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이외에도 아테나는 재판으로 제시되는 제도가 가져야 할 덕목들을 제시합니다. 먼저 아테나는 극중의 재판이 앞으로도 존속해야 한다고 왜냐하면 판결의 공정성은 그 기준인 법이 지속적으로 적용되어야 보장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아테나는 배심원들이 뇌물에 매수되지 않는 나라의 불침번이 될 것을 주문하며 제도가 불의에 단호히 맞서야 함을 지적합니다. 또한 "무정부도 독재도 아닌 통치 형태를 유지하고 두려운 것을 도시 안에서 모두 추방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도시가 정치적 결정을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통치 형태,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용기가 재판의 공정성을 뒷받침한다는 것입니다("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면 사람들 중에 누가 언제나 의로울 수 있겠는가?") 재판의 공정성과 지속성이 중요한 이유는 이후 아테나가 복수의 여신들을 설득하는 대목에서 더 중요해집니다. 재판에서 패한 복수의 여신들은 자신들의 룰이 무너진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하는데, 아테나는 그들에게 이 땅에 머물며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리면 시민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리라고 약속합니다. 이 약속이 지속적으로 지켜져야만 아테네는 그들의 재앙을 피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자비로운 여신들>은 사법 제도가 복수를 끊는 해결책으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고, 또한 이를 위해선 아테네의 약속과 같은 법이 지속적으로 지켜져야 하며, 법의 적용 범위를 복수의 여신들 같은 도시 외부인에게까지 확대함으로써 외부인을 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지금 우리의 법 시스템도 돌아보게 만듭니다. 법은 말의 힘을 통해 화해를 이끌어내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오레스테이아의 경우처럼 법치의 작동은 그 환경이 얼마나 공정하게 만들어져 있느냐에 좌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도 법에 의한 통치는 종종 강조되지만 부조리한 환경이 법치의 공정성을 해치는 경우가 있습니다(ex. 검찰의 기소독점). 갈등 해결책으로서의 법치가 제대로 되려면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잘못된 환경들을 고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번 고대 그리스 비극 강의는 문학적 시각에서 탈피해 정치철학적 시각으로 독해를 시도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비극은 당대의 가장 아름다운 시라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당시 인간들의 고뇌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당시 인간들과 지금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환경이 같을 수는 없지만(예컨대 고대 그리스에서 운명은 이미 신탁으로 내려져 잘 알고 있는 것이었고 그걸 당당하게 맞아들이는 자세가 자유로 칭해졌지만, 마키아벨리 시대로 넘어가면 운명은 예측불가한 것이고 그에 맞서 저항하는 게 자유라는 인식이 생겨납니다), 이들 비극은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의 자유 개념부터 마지막 강의의 화해 개념까지 지금의 정치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들이 지금 고민할만한 이슈들을 고대 그리스 비극들이 앞서서 어떻게 사유했는지 발견하는 기회를 더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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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주인 되는 <헌법 제대로 읽기> | [진짜 주인되는 <헌법 제대로 읽기>] 7강. 헌법개정토론회 : 어떤 나라에 살고 싶으세요? | 아무 | 2016.11.3 | |
세그룹으로 나누어 헌법이 개정된다면 어떤 것을 바꾸고 싶은지, 어떤 것을 새로 만들고 싶은지, 그걸 위해서는 어떤 행동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그룹토론을 하고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팀은 생태적 삶을 지향하는 팀이었고 대략적으로 인간적인 삶을 위한 기본소득, 노동권, 주거권 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다른 하나는 이 생태계의 일원으로써 좀 더 생태적인 삶을 위한 모든 생명을 존중한 삶을 형태를 갖추고자 했다. *더 자세한 기본소득에 대한 정보는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참조(http://basicincomekorea.org)
*사진은 종강파티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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