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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명 | 강좌후기 | 글쓴이 | 날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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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북 토크 "우리는 왜" | 신년 북 토크 "우리는 왜" 제 2강 <인권 오디세이> - 조효제. | 마음천천히 | 2016.2.16 | ||||||||||||||||||||||||||||
신년 북 토크 "우리는 왜" 제 2강 <인권 오디세이> - 조효제.
2016년 2월 11일 목요일, 오후 7시~9시
1. 서론 상대방의 세계관이나 사상, 관심사에 대해 알고 싶을 때, 좋은 방법은 “어떤 분석 단위로 세상을 보세요?”라고 묻는 것이다. 계급, 젠더, 국가나 민족 등 사람에 따라 세상을 보는 프레임은 다양하다. 그런데 인권을 하는 사람들은 전통적인 분석단위와 굉장히 다른 차원에서 접근한다. 그들은 ‘인간’을 분석단위로 본다. 인권이라는 특수 안경을 끼면 눈앞에 있는 사람이 희미하게 (외모, 인종, 성별, 목적등과 상관없이) ‘사람’으로만 보여야지 그것이 진짜 인권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인권이라는 이야기 앞에서는 100% 인권 친화적이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국제적으로 나와 있는 인권의 종류가 과거에 비해 많이 늘어났으며 계속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인권은 계속 체득해야 하는 것이고, 누구라도 몰라서 실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권을 바라보고, 배우고, 실천할 때 ‘나는 옳고, 저쪽은 틀렸다.’는 식으로 할 필요는 없다. 비슷한 입장에서 같이 깨우쳐주고, 성찰하며 배워나가는 과정이 인권을 향해 가는 과정인 것이다.
2. 인권의 개념 1) 인권 = Human 人間 Rights 權利 - Rights의 이중적 의미 ① 도덕적으로 옳고 정당 ② 법이나 제도에 근거해서 어떤 것을 요구할 자격 - 원래 권리라는 말에는 2가지 뜻이 다 담겨있다. 그래서 우리가 인권이라고 할 때, 내가 요구하는 것 이전에 ‘요구하는 내용 자체가 옳고, 정당하고, 윤리적으로 타당하다.’라고 하는 규범적인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국제적으로는 ①번 의미에 해당되는 권리도 있고, ②번 의미에 해당되는 권리도 있다. 제일 좋은 것은 ①번과 ②번이 같이 해당되는 것이다. 2)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고 정당한가? ①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보편적 권리 ② 이성과 양심에 근거한 가치 ③ 인간의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욕구와 이익을 존중 ④ 이유 없이 차별하지 않는다.
3. 인권의 특징 1) 공적개념 : 인권은 시민과 국가(공적 주체)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였다. 최근에는 공적 주체가 국가, 지차체, 공공기관, 기업, 국제기구 등으로 다양해졌다. 2) 권리와 의무 : [로빈슨 크루소의 질문 – 무인도에 혼자 살던 로빈슨 크루소에게 인권이 있었을까, 없었을까?] 이 질문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요구를 들어 줄 상대방이 없기 때문이다. 권리는 반드시 의무를 수반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양방향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 국민의 4대 의무는 국가가 국민에게 요구함. 3) 세대별 발전 - 1세대 인권(시민적, 정치적 권리) - 고전적 권리들 - 2세대 인권(경제적, 사회적 권리) - 의식주, 의료, 사회보장, 노동과 휴식, 교육, 문화 - 3세대 인권(집단권, 연대권) - 환경, 발전 4) 불가분성 5) 최저기준 설정 : [적어도...정도는 보장해 주어야 한다.] 이 기준은 점차 올라간다. 6) 권리의 역설 : [권리보유의 역설(잭 도널리) - 권리가 있으면 권리가 사라지고, 권리가 없으면 권리가 나타난다.] 인권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고 해서 인권이 잘 보장된다는 뜻은 아니다. 인권 선진국에서는 오히려 인권 용어를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인권용어 사용을 떠나 실제로 인권이 목표로 하는 가치가 실생활에서 얼마나 구현(실천, 달성)되느냐가 중요하다.
2부 질의응답
1. 아이들에게 인권의 좋은 점을 설명하는 법 : 인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인권을 인간 존엄성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많이 본다. 인간 존엄성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길은 평화, 공존, 연대, 상생, 민주적 타협, 시민적 덕성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인권이 하나의 유력하고 중요한 길이기는 하지만, 인권만이 유일무이한 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그런데 인권이 왜 좋은 것이냐(라고 물으면)? 나의 권리를 존중해달라고 요구하고, 주장할 때는 동전의 양면처럼 ‘내가 내 권리를 주장하는 만큼 네 권리도 주장해줄게.’라고 하는 무언의 사회계약적 약속이 붙어있다. 이것을 낮은 차원에서 쉽게 설명하면 “그만큼 너도 같이 받을 수 있는 거야.”라고 하는 역지사지의 상호성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2. 한국 인권상황의 미래에 대한 질문 : 단기적으로는 암울하고, 장기적으로는 희망을 버리기 싫다. 2008년 이후에 국제적으로 한국 인권을 바라보는 지수나 수준들이 계속 내려가는 것을 보아 객관적으로 한국이 안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87년 이후에는 전체적으로 봤을 때 (기복은 있으나) 우리 인권이 향상되는 중이다. 또한 국민들의 교육 수준이 높고, 인권에 대한 의식과 기대치도 높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의 역동성에 대해서 약간은 자신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3. (개인적 경험 소개 후) 인권이 인간관계나 감정의 영역에서 어떻게 존중될 수 있을까? 인권과 인간의 감정은 어떤 관계를 갖는가? : 인권담론이 확산되면서 지금은 인권이 사적인 관계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감정, 개인적인 문제에는 너무 인권으로만 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것과 다른 차원에서 인권과 감정의 문제로 <인권의 사회심리> 라는 것이 있다. 이것에 따르면, ①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잘 되어있어도 국민의 의식이 결합되지 않으면 법이 사문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 ② 보스니아나 르완다 같은 대규모 인권사태 시 사회 심리적으로 사람들이 프로파간다에 취약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인권에서 정서와 감정, 심리의 문제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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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북 토크 "우리는 왜" | 신년 북 토크 "우리는 왜" 제 1강 <공부중독> - 엄기호. | 마음천천히 | 2016.2.11 | ||||||||||||||||||||||||||||
신년 북 토크 "우리는 왜" 제 1강 <공부중독> - 엄기호.
2016년 2월 4일 목요일, 오후 7시~9시
1부 : 강의 1. 서론 1) 교육의 양극화 현상 : 이제는 문화적·경제적 중산층 이상이 아니면 공부라는 테마에 관심이 없어진다. 중산층들은 가면 갈수록 공부문제에 골머리를 앓을 것이고, 더 투자를 하게 될 것이며 그것 때문에 아이들도 더 괴로워질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저소득층, 생산직 노동자, 중소기업에 다니는 부모들은 자녀가 인 서울을 할 가능성이 없다는 확신이 들 경우 공부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input보다 output이 적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이미 한국이 계급계층에 따라 공부를 대하는 태도와 전략이 합리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사회학적 배경 : 한국은 지금 학벌사회가 사실상 해체되고 있다. 과거에는 대학의 서열이 확실했으나 현재에는 학벌이라는 것의 하부가 붕괴되어 몇몇 대학을 제외하고는 대학의 서열이 무의미해졌다. 앞으로 이 경향은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지금 고3 아이들을 보면 공부를 안 하는 아이들이 많다. 왜냐하면 ‘공부를 해서 대학을 나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의미 없는 일을 우리가 왜 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그들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3) 논점 :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아이들을 데려다 놓고, 할 줄 아는 것이 ‘공부’밖에 없는 것이 문제다. 90년대 중반까지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했으나 가면 갈수록 ‘왜 가르쳐야 하는가? 왜 배워야 하는가?’라는 설명이 필요해질 것이다. 교사들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증명해야 할 것이며 그로인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교사들의 정신질환이 심각한 문제이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이 ‘공부중독’이다.
2. 본론 1) 공부중독 현상이 만들어진 이유 ① 사회주도층이 된 486세대의 특수한 경험 : 486세대는 근대 한국 현대사에서 유일하게 공부로 신분상승에 성공한 세대다. 정치·경제·역사적으로 많은 것들이 받쳐준 시기에 공부를 통해 개인의 신분상승과 공적인 사회(민주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다 보니 486세대는 ‘(공부)하면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새겨졌다. 이들이 말하는 ‘공부’는 제도화(학교화)된 공부를 뜻하며 이들은 공부가 문제를 푸는 만능키라고 생각한다. ② 통치 권력의 통치술 : 한국 자본주의는 일자리를 만들 의사도 능력도 없다. 왜냐하면 기술발달 속에서 일자리가 증가할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일자리를 만들지 못 하기 때문에 취직이 안 되는 것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통치 권력의 통치술도 공부중독의 한 요인이다.
③ 주체의 입장 : 이런 압박 속에서 아이들은 실전에 나서는 것이 두려워진다. 이럴 경우 공부 중이라는 것이 좋은 핑계가 된다. 그래서 계속 공부를 하고, 스펙만 쌓는다. 2) 위 세 가지가 딱 맞아 떨어진 상황을 <공부중독>이라고 부른다. 이 현상은 개인과 계급 계층, 국가의 입장에서 한국사회가 처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면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는 알리바이가 되고 있다. 한국의 일자리 문제는 복잡하고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메시아적인 대책은 없다. 지금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가 너희들(청년들)과 같이 노력하고 있으니 포기하지 말자. 두려워하지 마라.’는 메시지와 그런 메시지가 될 수 있는 정책일 것이다. 3) 아이들 : 공부중독 현상으로 인해 학생들에게 우울증, 불안장애 등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① 무기력 : 부모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 “Yes, I can do it!” 때문에 아이들이 무기력해진다. 이 말만 보면 학생이 주체인 것처럼 보이나 그 앞에 숨어있는 말 “(You must say) Yes, I can do it!”을 보면 진짜 화자(교사, 부모, 사회, 체제)가 나타난다. 사실은 자기주도학습이 아니라 타율학습인 것이다. 또한 아이들은 이 말 뒤에 숨어있는 책무성 (If you fail it’s your fault)도 간파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기력함은 아이들의 생존전략이다. 무기력해야 실패한 다음에 받게 되는 비난과 낙오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② 우울 : 열심히 하는 아이들은 ‘할 수 있어! 더 공부해야 돼!’라고 하다가 소진이 된다. 소진이 되는 순간 자신의 잘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우울해진다. 또한 이것이 언제 내 책무로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하는 동안 계속 불안해진다.③ 분노 : 반대로 내 잘못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길도 있다. ‘나는 할 수 있고, 준비가 다 되어있는데 이 사회 때문에, 옆 사람 때문에 안 되는 것이다.’라는 것이 터져 분노로 나온다.
3. 결론 : 우리는 지금 ‘공부중독’이라는 이름으로 다함께 망가지고 있다. ‘더 공부하고, 더 경험하고, 더, 더..’ 라는 식으로 끊임없이 무리수를 두고 있다. 이러한 공부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부의 목적에 변화가 필요하다. 이제 우리는 아이들에게 ‘나를 배려하는 법, 나를 돌보는 법’을 가르쳐줘야 한다.
2부 : 질의응답
1. 교수님의 주된 관심사(대상)는 무엇입니까? 소외받는 계층, 지역아동센터, 다문화, 편부모 등 아동·청소년의 교육에 관심이 많다. 그 아이들을 데리고 우리가 할 줄 아는 것이 공부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대안을 고민 중이다. 더불어 공부를 안 하는 친구들을 위한 교육에도 관심이 있다. 이 친구들은 가면 갈수록 자기 존재에 대한 가치를 찾지 못 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 그들은 스스로도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존재의 가치를 노동에서 찾았다면 앞으로는 <이미 존재하는 것만으로 이 사회에 기여하고 있고, 이 사회의 구성원이며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미 이 사회의 공통의 것을 만들어 가는데 공동의 노력을 하고 있는 존재다>라는 것을 발견·경험·상기시켜주는 교육이 학교에서 필요하다. 이것을 위해 ‘누가 지금 공동의 교육에서 배제되고 있는가? 왜 배제되고 있는가?’에 대한 토론과 교육이 아이들에게 필요할 것이다. 또한 한 아이의 성장은 교사와 부모 공동 노력의 산물이다. 지금처럼 모든 것을 개인의 성과 문제로 만들어버리는 순간 우리 머릿속에서 공동의 노력이라고 하는 감각이 사라진다. 따라서 <내가 이 공동의 노력을 하고 있고, 이것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통의 것이다>라는 감각을 회복하자.
2. 혁신학교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교육에 무관심해진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다른 가능성의 교육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혁신학교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혁신학교는 모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에 대한 좋은 선례가 되어주면 된다. 다양한 형태의 좋은 선례들이 필요하다. 거시적으로는 이 문제를 위해서 제일 먼저 다루어야 하는 것이 대학 입시문제다. (외국의 사례를 들며) 온 국민이 다 대학을 갈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가고 싶을 때 대학을 감으로써 생애 걸친 공부를 하는 것이다.
3. 무기력, 우울, 분노 이 세 가지 길 외에 또 다른 길이 있는가?
우리는 교육의 가장 큰 목적이 아이들의 잠재력을 키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잠재력은 무한하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 아이는 무한한 존재가 되어야 하며 무한하기 때문에 노력하면 다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고전에서 찾은) 교육의 목적은 자기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다. 이는 네 분수를 알라고 주저앉히는 것이 아니라 만용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진짜 할 수 있는 일을 알게 되면 그 다음에 정성을 다해서 살 수 있다.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겸손해지고 배우려 든다. 이것이 지혜이며, 이 지혜가 있어야 자신을 배려할 수 있다. 나아가 남을 배려하고 돌볼 수 있다. 이 지혜로부터 절제가 나온다. 예를 들어, 해녀학교에서 제일 먼저 알려주는 것은 자신의 숨의 길이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아야 죽지 않기 때문이다. 물속에 들어갔을 때 내 숨의 길이가 5분일 수도 있고, 1분일 수도 있다. 5분은 탁월하고, 1분은 지질한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 탁월함이란, 1분의 숨의 길이를 가지고 내가 얼마만큼 물속에서 원하는 것을 잘 할 수 있는가를 말한다. 즉, 주어진 것을 선용할 줄 아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더 배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한계를 밝혀야 한다. 이렇게 내 무지를 드러내는 것을 ‘용기’라고 한다.
4. 마무리 : 사람들이 지혜와 절제, 그리고 용기를 갖추고 살아갈 수 있게 북돋아주는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라고 한다. 이 과정은 절대 개인의 과정이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지혜롭고, 절제하고, 용기를 내면서 살아갈 수 있게 공동의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공통의 목적이 되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고, 공공선이 되는 사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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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 독서클럽 - 혼자 읽기 어려운 책 함께 읽기 5 <포스트 민주주의> | [혼자 읽기 어려운 책 함께 읽기-포스트 민주주의] 제2강. 제도가 된 지구 기업과 새로운 지배 계급 | 리브레 | 2016.1.26 | ||||||||||||||||||||||||||||
콜린 크라우치의 '포스트 민주주의'를 함께 공부하는 김만권 선생님의 독서클럽. 그 두 번째 강의에서는 민주주의를 사실상 장악하고 있는 수퍼리치/초국가기업과 포스트 민주주의 시대의 새로운 사회계급에 대하여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강의내용을 요약하여 강의록을 작성하였습니다.
과거의 자본가들은 정치에 별 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수를 차지하는 육체노동자의 요구에 우선적으로 반응해야 했던 정부 역시 자본가들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는 특별한 동기를 갖기 어려웠다. 그러나 육체노동자의 수가 감소하고 이들을 대체할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정부는 자본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된 정치 및 사회적 쟁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정치 및 군사영역에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제엘리트(수퍼리치)들은 지구화 현상과 더불어 그들의 영향력을 전 세계적으로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등장한 '초국가기업'은 이제 민주주의에 있어 하나의 제도처럼 자리잡게 되었다. 우선, 초국가기업의 등장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70년대에 발생한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중동 오일쇼크는 국가를 경계로 통제된 자본주의를 설계했던 케인즈의 패러다임을 붕괴시켰다. 케인즈의 총수요이론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잉여생산물들이 국경 밖에서 처리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디지털의 등장은 국가 간의 경계를 지우고 케인즈 패러다임의 붕괴를 가속화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기업은 생존을 위해 다른 기업을 먹어 치우며 몸집을 불려갔고, 이러한 현상은 경계(국경)를 넘어서도 계속되어 현재의 초국가기업이 탄생하였다.
이러한 초국가기업들은 '투자하지 않겠다', 또는 '국가를 떠나겠다'와 같은 위협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들의 위협이 두려운 정당들은 '쉽게 떠날 수 없는' 유권자들에게 기업을 위한 정책을 설득하게 되고 유권자들은 사실상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투표를 하게 된다. 이로써 정부는 해당 정책에 대하여 강제적인 민주적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초국가기업들은 그 경영에 있어 '유연성'이라는 명목 아래 끊임없이 정체성을 바꾸는 '유령회사'가 되어간다. 실제 생산은 소규모 생산단위에 하도급을 주고 자신들은 금융부문에 자리를 잡은 채 이미지 관리에 집중한다. 이를 위해 빈번한 적대적/우호적 인수합병이 일어나고 임시고용직이 확대된다. 이러한 이유로 노동자들은 보이지 않게 되고, 고객은 어떤 기업이 어떤 상품을 생산했는지에 대해서도 알기 어렵다. 그러나 빈번한 변화에도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 기업자산의 소유주이다. 그들은 앞서 언급한 '보이지 않음'의 무기를 활용하여 반복적으로 새로운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소유구조의 불평등은 심화된다.
더 나아가 이러한 기업들은 더 이상 상업적 사업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기업의 유연성과 외견상의 효율을 동경하는 정부가 이를 달성할 능력을 가진 민간에 공공사업을 위탁하거나 그 사업들을 민영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와중에 정부는 기존에 잘 운영하던 사업영역에서 조차 그 운영능력을 상실하고 '제도화된 멍청이'가 되어버린다. 이제 기업엘리트들은 영리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비영리부문에서도 정부에 대한 우위를 점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에서 기업가와 정치인의 접촉이 빈번해지며 이러한 특권은 개별 기업을 위해 사용된다.
초국가기업들은 공공성을 가져야 하는 미디어를 장악하고, 미디어를 통해 시민의 정체성을 바꾸기에 이른다. 이들은 극단적 단순화와 감각적 선정성을 무기로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기에 바쁜데, 이 과정에서 정치적 토론의 질과 시민의 능력이 저하된다. 이들과 시청률에 있어 경쟁해야 하는 공영 프로그램 또한 동일한 전략을 구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프로그램의 전반적인 질이 떨어지게 된다. 또한, 이러한 미디어는 소수의 기업에 집중되어 있고, 이들은 미디어를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이끌 수 있다. 따라서 정당이나 여타의 기업들은 이에 영향을 받거나 종속되기도 한다. 미디어가 정치를 제한하는 것이다.
포스트 민주주의 시대에는 육체노동자들이 더 이상 그들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19세기 말에는 노동조합을 통한 육체노동자 계급의 정치참여가 활발했고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가 정치의 주된 관심사였다. 그러나 제조업이 붕괴되고 탈산업사회가 도래하면서 육체노동자의 수는 급감했고, 20세기의 끝에는 육체노동자가 '역사의 패배자'를 대표하게 되었으며, 이들을 대체할 세력조차 마땅하지 않았다. 대안세력을 찾지 못한 정당들은 모든 계급을 두루 대변하기에 이르렀고, 확고한 지지기반을 상실한 정당정치는 위기를 맞았다.
오늘날의 중간계급들은 이질적인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고 단결의 구심점 또한 없으며 노동자와의 동맹은 꺼린다는 특징을 가진다. 명확한 정치의제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이러한 와중에 가장 중요한 변수로 등장한 세력이 바로 '여성'이다. 이들은 전통적 운동양식을 밟았으며, 이들을 '시간제 노동자' 또는 '과세의 대상'으로 보는 기업과 정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성의 권리찾기를 강화해 나가면서 민주주의를 깨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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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 독서클럽 - 혼자 읽기 어려운 책 함께 읽기 5 <포스트 민주주의> | [혼자 읽기 어려운 책 함께 읽기-포스트 민주주의] 제1강. 민주주의의 위기인가, 포스트 민주주의인가 | 리브레 | 2016.1.19 | ||||||||||||||||||||||||||||
콜린 크라우치의 '포스트 민주주의'를 함께 공부하는 김만권 선생님의 독서클럽 겨울학기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수 많은 분들께서 함께 해 주셨습니다. 저자 콜린 크라우치 및 그의 저서 '포스트 민주주의'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과 함께 시작된 강의에서는 우선, '포스트'와 '민주주의'의 개념을 알아 보고, '포스트 민주주의'의 배경과 현상을 살펴보았습니다.
'포스트'의 개념은 아직 불명확 한 것으로 그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콜린 크라우치의 포스트 민주주의에서 '포스트'는 '포스트산업', '포스트모던'에서와 같은 용례로 사용되었다. 즉, 민주주의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민주주의가 가지는 특성은 그대로 보유한 채로 새로운 요소들이 도입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당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개념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및 공화주의/법치주의 간의 관계를 파악해 보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본래 Demos가 주인인 '정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다수가 소수를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매우 독특한 '체제', '시스템'이다. 반면, 자유주의는 하나의 '사상'으로서, 자유주의 사상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정체가 바로 '민주주의'이다. 자신의 자유를 보장받는 방법으로 모든 이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점에서 '평등'의 이념을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와의 접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둘의 결합은 매우 우연한 것이었다.
현재 '자유민주주의'의 용어는 '입헌민주주의'의 용어에 의해 대체되었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많은 경우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다수의 의사와 충돌한다. 이에 이러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기본권'이라는 헌법적 권리로 규정하여 전체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함으로써 이를 보호한다.
민주주의와 법치의 관계를 살펴보면, 민주주의가 반드시 법치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법치는 인간이 인간에게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는 공화주의에서 파생된 것인데, 공화국에서는 인간이 인간에게 굴종하지 않기 위하여 모두가 모여 만든 법에 자신을 종속시킨다.
이와 같이, 시스템으로서의 민주주의에 자유주의와 법치라는 공화주의적 아이디어가 결합한 것이 현재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민주주의'이다.
콜린 크라우치는 그의 저서 '포스트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보장하는 권리와 권력을 대중이 행사하지 못하고 정치 에너지가 소수의 엘리트와 부유한 집단에게 회귀하는 포스트 민주주의의 권력공백현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의 배경에는 '지구화'가 있다.
1980년대 이후의 지구화 현상은 이전에 비해 광범위하며 금융영역과 맞물려 있다는 특징을 가진다. 자본과 기업규모가 비약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초국가기업이 등장하였고 이들은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들에게 유리한 질서와 환경을 형성하고자 한다. 정치인들 역시 기업의 이익을 위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데, 이는 국민/유권자들이 이에 대하여 불평은 하되 저항은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이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실에 저항하지 않는 이유로 우선, 직업구조의 변화를 꼽을 수 있다. 1980년대 이전의 산업사회에서는 육체 노동자 계급이 사회의 특권계급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정치적 주체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소비사회로 변화하면서 육체 노동자의 수가 급감하였고 이를 대체할 정치주체가 등장하지 않아 '정치주체의 공백'이 발생하였다. 신자유주의를 경험하면서 불평등과 개인의 불행을 개인의 문제로 여기게 된 것 역시 정치주체의 공백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공백은 정치고문과 기업 로비스트로 이루어진 새로운 정치계급이 메우게 되었다.
계급구조가 무너지면서 이를 기반으로 했던 정당정치가 무너진 것 또한 포스트 민주주의의 배경이 된다. 정당은 더 이상 보통사람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지 않는다. 정당은 인기 정치인을 발굴하고 선전과 광고를 통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의 의사결정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중/유권자 집단은 정치의 주변인으로 전락하고 소규모 엘리트들이 만들어 내는 신호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서양에서는 불평등을 경험한 청년세력이 이러한 현상에 맞서 새로운 정치주체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의 대기업들은 초국가기업이 되었고 그들과 정치엘리트 간의 긴밀한 관계는 여전하다. 그렇다면 한국은 포스트 민주주의로 이행할 가능성이 높은가? 크라우치가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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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 2 |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2] 9강. 안창호. -'≠?' | 문동욱 | 2015.12.14 | ||||||||||||||||||||||||||||
안창호는 이름은 무수히 들어왔으나, 아는 바는 기실 없는 인물이다. 내가 안창호에 대해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연관검색어 마냥 늘 따라붙는 '도산' 이란 호와, 교과서 늘 나오는 단정한 콧수염과 세련된 정장차림 신사의 사진 뿐이다. 그나마 누군가에게 들은 서북사투리가 심했으리란 말과 엮여져 '그거 좀 안 어울리는데.' 하다가는 사투리가 어때서란 핀잔에 스스로의 편견을 부끄러워했던 기억 정도 뿐이다. 정직히 말하자면 강의를 듣고난 지금도 그에 대해 잘 모르겠거니와, 그 이전에 그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가지도 않는다. 강의의 부제대로 그는 철저하게 '민족'과 결부된 삶으 살았다. 그것은 내게는 별 감흥을 자아내지 못하는 점이고, 보다 솔직해지자면 경계심과 불안감으로 채색된 혐오감을 이끌어낼 뿐이다.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 라는 말은 내 자신 그 당시 살았더라면 소극적인 체제순응자로라도 위험 대신 친일을 택했을 비루한 종자라서인지는 몰라도 이해할 수 없다. 우선 뒤엣 말은 왜 그것이 '민족'이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밖에는 남기지 않는다. 닮아있는 듯 하나 근본적인 차이점에서 출발한 호세 마르티의 말에 감동했던 십대때부터의 기억에 붙들려 있는 탓일지도 모르겠다. "단 한 사람 이라도 고통받는 자가 있다면 그 누구에게도 편안히 잠자리에 들 권리 따위는 없다." 사실 안창호의 말이 내게는 훨씬 편한데 말이다. 호세 마르티의 말은 아직도 때때도 문득 드러눕기 전에 떠오르고 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라도 있을 것임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모든 일과 모든 이에 대한 죄책으로 나를 짓누른다. 그래봐야 잠에 들 것이고, 남기는 것은 싸구려 위선에 불과할 부채감 뿐이지만. 여하간에 비단 나 혼자 누리는 특별한 영광은 없는지라, 안창호의 말이 적당히 내게 신조삼기에는 편리하겠지만, 그 말은 내게 일말의 공명도 불러 일으키지를 못한다. 앞에 말은 마치 무솔리니의 말을 연상시킨다. "국가를 떠나서는 인간과 영혼의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차이인지, 차이가 존재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물론 역사에서 IF 를 가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예견을 가지고 속단으로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 행인지 불행인지 안창호는 38년에 사망했다. 지극한 민족주의자였던 대부분의 임정 요인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정치의 공간에서 그들이 바라던 나라를 건설하지 못했고 그들의 신념을 유의미한 실재적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들의 신조가 어떤 결과를 배태했을지는 다행히도 증명되지 못했다. 비록 권력의 핵심에 거의 근접했던 철기께서 '파시즘이 뭐가 나쁜가. 개인주의에 찌들은 요즘 젊은이들이야 민족을 위한단 것에 질색을 하겠지만.' 란 희대의 명 망언을 당당히 남겨주셔 그들의 의식구조를 선명히 엿보게 해주긴 하지만 말이다. 마찬가지로 안창호 또한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배격하고 '대공大公' 곧 민족을 위하여 온 국민의 생활이 공헌되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립해 내세우기는 했지만 말이다. '극단적'이란 표현은 모호하여 무엇을 극단적이라 할지야 안창호의 속내에 달린 일이지만. 다행히도 우린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휘둘러질 전가보도인지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비록 안창호가 딱 잘라, 개인의 이익보다 사회 전반의 이익이 우선해야 했다고는 했지만. 그의 대공은 어디까지나 민족이었던 것과 연계해 짐작할 수는 충분히 있겠지만. 어쨌든 안창호에게는 그런 전제 아래에서나마 민주적 토론과 공론의 중요성에 대한 존중이 있지 않은가? 안창호는 그것을 강조하지 않았나? 그러니 우리는 안창호를 믿고 신뢰해도 된다. 비록 우리 모두의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결론이 전제되어 있는 하의 자유롭고 민주적인 토론이란 정권을 잡은 무정부주의자 같은 소리지만. 물론 다르긴 하겠다. 민주적인 토론을 통해 얼마나 기꺼이 얼마나 한 개인을 사회에 제물로 바쳐야 하는가, 정도라도 정할 수 있으니까. 팔 하나를 제단에 잘라 올리면 될지, 자비롭게 손가락 하나 그냥 끊어 바치면 될지, 아니면 심장까지 꺼내어 올릴지. 물론 한 개인의 감히 희생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절대 없겠지만. 그의 포용력의 상징 대공주의. 요컨데 대공을 위한 좌우익의 화합과 단결. 그 대공은 다른 어떤 가치나 정의가 아니라 오직 민족이지만. 이미 우익의 관념인 '민족'을 논의가 허용되지 않는 '대공'의 상위차원으로 올리고 그 아래 좌우를 뭉치자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비록 민족이 전제이자, 기반으로서 민족의 힘을 키우기 위한 응집의 수단으로 사회주의를 전락시켜 활용한다는, 근본적 세계관의 차이에 대한 몰이해와 무시가 영 껄끄럽지만 넘어가자. 비록 비슷한 매커니즘으로 당시 독일 지역에서 활동하던 이들 중에 슈트라서 형제가 있지만. 그들이 당내 좌파로서 그런 방향으로 이끌고자 애썼던 당이 비록 민족사회주의노동자당이지만. 그 당을 통칭 나치라고 부르지만. '특수 계급에 좌우되지 않는' '민중 혁명' 의 고아함이 있지 않은가. 비록 같은 맥락으로 계급이 아닌 전민에 기반한 대중혁명을 줄기차게 주장하던 에른스트 룀이 있지만. 비록 그의 소속정당은 슈트라서 형제와 같지만. 그 중에서도 그가 대표하던 조직이 SA, 통칭 돌격대이지만. 넘어가자. 넘어가자. 38년에 죽은 안창호이고, 그의 이념을 계승한 자들이 권력을 잡아본적이 없기 때문에 이 땅에서 이루어져 검증된 적 없는 일들이다. 다만 그리하여 민족주의를 떼어놓고 난다면 안창호에 대해 말할 것은 없다. 그의 활동이 그렇고 사상이 그렇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앞서와 같은 불길함의 그림자밖는 드리워지지 않는다. 하여 나는 더 이상 그에 대해 논할 길이 없거니와, 살펴볼 용기와 엄두도 나지 않는다. 이 땅에서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민족운동가들의 대다수들이 흔히 그렇듯이. p.s. 분명히 안창호는 민족을 내세우고 사회 전반의 이익을 우선하긴 했으나 그의 훌륭한 공언들에서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지 않았다. 비록 민족과 국가의 핵심적인 부분을 제하겠지만, 그러고나면 남은 영역에서는 '자유'를 약속했으니 결코 파시즘과는 다른 것이다. 절대. 틀림없이. "The Fascist State organizes the nation, but leaves a sufficient margin of liberty to the individual; the latter is deprived of all useless and possibly harmful freedom, but retains what is essential; the deciding power in this question cannot be the individual, but the State alone" -Benito Mussolini: What is Fascism, 1932 "파시스트들은 국가를 조직할 것이나, 개인에게 충분한 자유를 남길 것이다. 후자에는 모든 무익하고 해로운 자유들이 제해질 것이나, 본질적인 것들은 보전될 것이다. 이 문제에서 결정권자는 개인일 수 없으며, 오직 국가 뿐이다." -베니토 무솔리니 :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1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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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 2 |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2] 8강. 진독수. -불꽃. | 문동욱 | 2015.12.7 | ||||||||||||||||||||||||||||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2] 강좌의 여덟번째 강의는 '천두슈(진독수)'를 만나보았습니다. 강의 후기 정리는 자원활동가 문동욱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 아카데미느티나무 주- 조직이나 단체가 이름을 정할 때에는 적어도 그들 나름대로라도 그 본의에 가장 걸맞는 것을 심사숙고하여 골라 정하기 마련이다. 물론 때때로 A와 B가 단지 기계적 통합을 하여 AB란 이름으로 하나가 되는 경악스럽도록 저열한 일도 일어나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이야 논할 가치조차 없는 대상이니 젖혀둔다. 언론이나 기관지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된 경우라면 그렇다. 민족정론지를 자칭하며 시작된 조선일보가 그렇고, 남북 평화와 하나된 민중의 표방에서 출발한 -그리고 '우리'말 애호도- 한겨례가 그러며, 시민에 의한 시민의 언론을 칭하는 오마이 뉴스가 그렇다. 외국과 역사를 보아도 그렇다. 인본주의를 표방한 프랑스의 '뤼마니테' 나치 기관지이던 '민족의 감시자'와 '돌진' 이 그렇다. 마찬가지가 소련의 관영 기관지이던 '프라우다'와 '이스크라' 이다. 너무 거대한 소련 정권의 관영기관지로서만 인식되서 문제이지, 그 두개는 본래 혁명조직의 것으로 탄생하였다. 그런만큼 프라우다와 이스크라는 그들의 사명과 각오를 담고 있다. 그들 세계관의 근간인 계급주의적 입장에서 고찰과 계급의식 각성을 위한 '진실' (프라우다) , 그리고 혁명에 대한 헌신을 상징하는 '불꽃'(이스크라). 그것은 집권 이전 소수 혁명가 집단이던 사회주의자들의 나아가고 살아갈 방식에 대한 맹세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와 직접 관련되지는 않으나, 결국에 중국공산당의 창시자인 때문일까. 아니면 바로 그러한 기질의 귀결로 공산주의자 그 중에서도 끝내 좌익 반대파에 이른 것일까. 진독수는 철저하게 그 자신의 의지로 집요하도록 진실을 쫓으며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당대인들과 구별되는 그의 유학 이력부터가 그렇다. 도피성 혹은 그럴듯한 학위를 얻는 대신에 산만하도록 다만 수개월 필요를 느낀 학문을 공부하다 사회문제 역사적 흐름과 사건을 마주하면 미련없이 귀국하여 이에 투신하기를 반복한다. 결국 대다수의 잘나빠진 이른바 신지식인들과 달리 그는 그의 부귀영달을 보증해줄 학력도 이력도 뚜렷히 갖지 못했다. 그에게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사유와 경험을 통해 직접 도달하고 한편으로 끝도 없이 변화해간 사상 뿐이다. 누구도 배신 한 적 없고 어떤 영달이나 기회주의적 처신과도 무관한 그의 변화는 변절이라 부를 수 없다. 그에 있는 것은 끝도 없는 고민 뿐이다. 인민에게 국가는 왜 필요한가? 그에 합당한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것을 건설하기 위해 새 세대는 어떠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문학, 그보다도 언어는 어떻게 정제되어야 하는가? 이런 끝도 없는 고민을 개진하고 스스로 답을 찾는 한편으로, 시대적 흐름에 바쁘게 뛰어들었던 그는 마침내 하나의 답이던 공산주의에 이르러 중국 공산당의 창시자이자 초대 중앙 총서기가 된다. 이에서 사상의 궤적이 종국에 이르는 자들도 많다. 그러나 그의 불꽃은 아직도 심지에서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코민테른과 모스크바로 대표되는 국제 공산주의의 교조적 지시에 대한 반발과 의구의 결과는 직의 상실이었으며, 그 자신이 만든 중국공산당에서의 출당이었다. 진독수는 당내 독재, 관료주의, 일방적 지시자로 변한 프롤레타리아 제구궂의를 느낀 순간 마침내 이에서 돌아섰다. 그가 걸어간 길은 '추방된 예언자' 트로츠키 또한 걷는 길이었으며 때문에 트로츠키주의로 폄하되고 있는 좌익반대파의 길이었다. 당내 민주주의, 민중 여론의 반영, 노동자 국가에서 실제적인 노동자와 당간부-국가관료의 관계 등. 여하간에 결국은 좌익이기에 국민당에 의해 체포된 그는 재판에서 망설임 없이 신념을 드러내고 그에 따라 투옥되었다. 실제적 행위와 무관히, 단지 사상과 신조로 이루어진 감금에서 양심수 정치범이라면 응당 받을만한 성원과 탄원이 국제적으로 이루어져 마침내 그는 석방되었다. 이후 그를 짓밟은 국민-공산 양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을 반제 반파쇼 투쟁의 대승적 차원에서 축성하고 지지하는 한편, 그 자신의 신조와 고귀한 자존심으로 이 모든 것을 꺽는 대신에 양당의 회유를 모두 거절했다. 그리고는 끝내 진독수는 마침내 고립무원의, 하지만 철저하게 오롯이 자존하는 한 사상가로서 여생을 보내다 생을 마쳤다. 그가 마지막으로 천착한 문제는 인권 및 정치적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절차, 원칙, 방법으로서의 민주주의였다. 그의 일생을 통틀어 그는 숨가쁘도록 달렸으며, 고민을 멈추지 않았고 무언가와 누군가를 추종하는 대신에 스스로의 사유로 나름의 답을 찾아 쫓았다. 그 결과 무엇에 적이 된다 해도 머뭇거리지 않았고 숙이지 않았다. 모든 것을 감수하는 동시에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그는 진실을 위해 불꽃처럼 살았다. 가장 고결한 인간 정신의 정수를 볼 수 있는 삶의 궤적을 남긴 몇 안되는 경우일 것이다. 그의 모든 단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이 진정되기 이를데 없던 불꽃이었던 것은 부정될 수 없다. 여전히 그를 우경분자로서 -비록 '착오'로 감면해 주었어도- 규정하며 아직도 완전히 복권시키지 않은 중국공산당에서조차 그러하다. 당의 공식 선전물인 영화 건당위업에서 표현되는 진독수는 그야말로 영웅적인 투사에 다름아니다. 일방적으로 추앙되길 요구하는 이른바 위대함은 반드시 검증받고 난도질 당해야 한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그럴 대상이 아니다. 진독수가, 아니 그 이름을 지닌 한 인간이 살아간 모습이 바로 그러하다. 오늘날 청년 세대가 듣는 소리는 딱 두 종류다. 혹자들은 그것을 진영으로 나누려고 하는데 다르다. 이른바 민주화니 산업화니 하는 것보다는 개개인 퍼스낼러티에 따라 갈릴 뿐이지 대동소이하다. 결론도 같다. 한쪽에서는 질타한다. 무기력하다, 흐리멍텅하다, 고민이 없다, 열정이 없다, 왜 우리처럼 열심히 일하지 않고 불평만 하는가, 왜 우리처럼 처절히 투쟁하지 않고 이 좋은 여건에서 비관주의에나 사로잡혀 있는가. 다른 한쪽은 참 너그럽기도 하다. 모든 것을 이해해주신단다. 힐링을 해주시겠단다. 그 너른 품안에 잠시 안겨 쓰다듬을 받으랜다. 어느쪽이든지간에 결론은 같다. 여하튼 그들은 다 겪어보았고 해보았는데, 다 풀릴 것이란다. 그리고나면 그들은 할만큼 했기에 때가 지났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네가 바톤을 이어받아 분골쇄신 할 차례라 떠민다. 너희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미래는 너희의 것이다. ....그러니 좀 잘 좀 해봐라 쫌. 결국에 모든 것의 저변에 담겨있는 그 마지막 한마디를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할 바보는 청년 중 아무도 없다. 1919년 6월 8일. 진독수는 '연구실과 감옥'이란 글을 매주평론에 기고하였다. 연구실에 들어가는 (당대 중국에 필요한 인재가 되는) 것과 감옥에 가는 (현실 정치와 사회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청년들의 인생에 가장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청년들에 대한 요구이자 응원이며 진타였다. 흔한 말이었다. 그리고 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진독수는 그런 말을 하며 지휘봉, 아니 그보다도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말채찍을 멋지게 휘두를만한 입장에 있었으니 말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중년이었고, 북경대학 문과대학 학장까지 역임하였으며, 잡지 '신청년' 발간으로 대표되듯 청년운동의 창시자이자 주창자였으며, 호적과 함께 백화문 보급을 통한 문학혁명의 첨병에 서있었으며, 그 전달에 있었던 중국 현대사의 최대 사건 5.4운동에 참여한 정신적 지주로서 대학생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가 이미 그와 같은 많은 위업들을 통해 당대에 가장 명망 높은 지식인었으니 말이다. 그는 기꺼이 명령하고 훈계할 법 했다. 그런 진독수는 기고 바로 다음날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북양군벌에 반대하는 '북경시민선언'을 발표하고, 이틀 후인 6월 11일 시내에서 그 전단 인쇄물들을 홀로 직접 뿌려 베포하다 체포되어 구속되어 청년들에게 말하던대로, 연구실을 거쳐 감옥으로 들어갔다. 그는 말한마디를 남들에게 뱉고나면 스스로가 그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간 자였다. 누구도 그를 찾으려면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최선두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쫓아야 하는. 진독수가 아름답노라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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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세계화 시대의 불평등 이해하기 | [세계화 시대의 불평등 이해하기] 제5강 불평등은 왜 위험한가 | 리브레 | 2015.12.2 | ||||||||||||||||||||||||||||
김만권 선생님의 '세계화 시대의 불평등 이해하기' 다섯 번째 강의에서는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불평등의 대가>를 토대로, 불평등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위협하는가에 대하여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동안 '세계화가 만들어 내는 불평등의 세 가지 얼굴(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불평등)'에 관하여 공부했다면, 이를 바탕으로 불평등을 경험한 중산층들이 민주주의에 환멸을 느껴 정치에서 멀어지고 그 결과 민주주의가 후퇴하게 되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강의 내용을 요약하여 강의록을 작성하였습니다.
우리는 경제위기 이후 회복이 찾아오지 않는 불행한 시기에 살고 있다. 즉, 우리의 경제 시스템에는 중대한 결함이 내재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시스템이 이를 바로잡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이유는 정치게임의 규칙이 상위 1%에 의하여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투표를 시민의 의무, '시민적 덕목'이라 여기기 때문에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여 투표에 참여한다. 이러한 시민적 덕목은 정치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신뢰를 전제로 하는 것인데, 이러한 신뢰가 깨지게 되면 사람들은 시민적 덕목을 벗어 던지고 정치에 환멸을 느끼거나 이탈하거나 그보다 더 심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부유층은 이러한 현상을 환영한다. 투표자들이 정치에서 멀어져 그들을 투표장으로 유인하기 위한 비용이 증가할수록 부유층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유층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커질수록 이를 지켜보는 유권자의 환멸감은 더욱 거세지고 이들을 투표장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비용은 더욱 증가하는 악순환이 이루어진다. 정치는 협력의 과정이며 불신을 신뢰로 바꾸어 가는 과정이다. 모든 종류의 사회적 자본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 바로 신뢰이기도 하다. 그만큼 정치 및 경제 전반에 있어 '신뢰'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신뢰를 밑천으로 하는 금융부문에서의 신뢰가 붕괴되면서 그 파급효과가 곳곳에 스며들었고 사람들이 경제 및 정치 시스템에 가지는 환멸도 강해졌다. 이러한 불신과 환멸은 신뢰와 사회계약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에 위기를 가져온다. 이러한 환멸이 증폭되는 가운데, 상위1%가 언론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현상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상위 계층이 그들의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언론사를 매입, 지배하고 관념시장을 제어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미국의 정치 시스템과 경제 시스템에 제공되는 정보에 대한 신뢰마저 무너진다. 엘리트 계층은 광범위한 영역에서 투표가 이루어 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에 교묘한 방법으로 투표권을 박탈하려는 시도들을 벌인다. 이러한 시도들이 성공하게 되면, 유권자들의 의견이 무시되기 쉽고, 모든 유권자가 효과적으로 투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 깨지는 것을 보며 정치 시스템에 대한 환멸감이 강화되어 그만큼 선거가 금권화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주의에 가장 큰 위험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중산층이 정치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정치에 대한 불신이 깊어 정치의 장으로 끌어오기 어렵고 부유층은 법에 얽매이지 않는다. 즉, 양극화와 불평등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이 두 세력은 민주주의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반면, 중산층은 민주주의에서 투표가 가지는 의미, 법치의 필요성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계층이다. 그러나 노동시장의 양극화로 중산층이 공동화하고 있고, 남아있는 중산층마저 자신들에게 혜택을 주지 않는 정치 시스템에 강한 환멸을 가진 채 민주주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Occupy Wall Street나 최근 미국 중산층 백인 젊은이를 중심으로 번진 버니 샌더스 열풍은 이러한 현상을 반영한다. 폴 크루그먼은 "소득의 과도한 집중은 진정한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비단 미국 내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세계화로 인한 불평등은 이미 전 지구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화와 함께 금융시장의 힘이 강해지면서 불평등을 완화하는 조세제도를 제약하고 이는 곧 민주주의에 대한 제약이 된다. 그러나 스티글리츠는 우리가 또 다른 세계를 이룰 수 있으며 세계화를 길들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세계화는 우리 스스로 '선택'하고 빠져든 것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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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 2 |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2] 7강. 요시노 사쿠조. 물거품 | 문동욱 | 2015.11.30 | ||||||||||||||||||||||||||||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2] 강좌의 일곱번째 강의는 '요시노 사쿠조'를 만나보았습니다. 강의 후기 정리는 자원활동가 문동욱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 아카데미느티나무 주- 1920년대는 일본현대사에서, 이채로운 시대에 속한다. 메이지 유신 이래 청일 러일 정쟁을 치르며 정신없이 달려온 국가주의 열차가 잠시 정지한 듯 보이는 시대이다. '데모크라시'와 당연하단 듯이 연결되어지는 이 다이쇼 시기는 민주주의 자유주의가 일시 꽃을 피운 듯이 보인다. 제한적이나마 집회 언론 출판이 종래에 비해, 그리고 만주사변 이래의 15년 전쟁으로 이어지는 이후 30년대에 비해 자유로웠고, 새로운 근대적 사회문화적 변동이 이루어지던 시기이다. 비록 그것이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꺽여버렸지만. 한국에서는 '문화통치'란 미명하에 보다 교활한 회유와 분열 책동이 이루어지던 시대로만 낙인 찍혀있기도 하다. 전적으로 우리 민족의 위업 3.1운 동의 그나마 결실로. 1차세계대전의 참화 이후 전 세계를 휘감았던 이상주의의 호소와 그 힘도 도외시되고, 17년 소비에트 혁명 이후 목소리가 커진 사회주의와 그에 대한 경계심 및 예비조치적 유화정책들의 영향도 외면된 채. 즉 일본 자체에서 이루어지던 변화는 무시되고 식민지이던 조선이 그 인력에도 이끌렸을 가능성은 전적으로 배제된체 말이다. 하기야 아릭부케-쿠빌라이의 내전을 외면한 채 단지 고려가 끈질긴 항쟁으로 몽골에 어느 정도의 인정을 받았다거나, 누르하치-홍타이지의 변화는 외면한체 다만 인조반정의 결과 호란이 일어나거나, 사회주의 탄압로 일본 본국에서 제정된 치안유지법을 조선민족독립운동 탄압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로 설명하는 식의 자의식과잉으로 점철된 '국사' 서술에 무엇을 바라겠냐만은. 그런 의미에서 요시노 사쿠조는 딱 좋은 타겟이다. 일본에서의 그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상징이다. 지식인으로서 언론활동가이자 대중계몽가이다. 민의 삶을 국가의 책임이라고, 그로써 국가의 존재근거로 본 시각, 민의 의향에 따라 정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은 이채로운 것이었으며, 이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참정권 확대를 내세워 보통선거권 투쟁을 이끌고 승리를 이끌어낸 준 영웅이다. 이로써 그는 현대 일본에서까지 민주주의 전통과 계보의 큰 줄기로 남아있다. 반면에 철저히 한국식으로 보았을 때 요시노 사쿠조의 조선관은, 조선'문제'인식과 처방전은 지극히 20년대의 일본인다운 것이다. 직설적으로 국사식의 정서로 표현하자면 교활하고 가식적인 사기꾼일 뿐이다. 일본제국의 식민지 조선이란 전제 하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냈을 뿐이다. 총독부의 압제적 폭정 중단의 요구는 눈속임이고 사기에 불과할 것이다. 자치권 부여 주장은 싸구려 회유이며, 민족운동 진열을 분열시키기 위한 술책에 다름 아니다. 일시동인의 선정을 극악한 민족말살의 전조일 뿐이다. 요시노 사쿠조란 인간은 없고 문화통치란 술책을 부려대는 1920년대의 일제일 뿐이다. 동 시기에 또다른 자유주의 언론인인 이시바시 단잔은 일본의 이익이란 관점에서 대만과 조선에 독립이란 선물을 안길 것을 주장했다. 별개의 문화적 전통을 지녀온 집단을 힘으로 영구히 지배할 수는 없기에 식민지 상실은 언젠가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그때에 패배 내지는 실패로 잃을 채 원한을 살 바에는, 미리 독립을 선물로 주어 우호 속에 우방이자 경제적 권력으로 자발적으로 기쁘게 합류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 자신이 일본인으로서, 일본의 이익을 고려하는 만큼으로 조선인에게는 조선인의, 대만인에게는 대만인의 정체성이 항구할 것이라 본 일관적 논리체계의 귀결이었다. 다른 한 사람, 극우파이자 우승열패의 신봉자이던 기타 잇키의 조선관과 주장도 그러하다. 그에게 조선은 멸망함으로써, 존재할 가치가 없음이 증명된 나라였다. 때문에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들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에게 조선은 이미 없어진 것이고 조선인도 물론 사라진 개념이었다. 일본제국의 새 영토와 새 신민만이 있을 뿐이었다. 때문에 그는 민족동화 정책 따위를 운운하지조차 않았다. 그에게 구 조선인은 지금 당장 일본신민인 것이었다. 하여 총독부를 반대했으며, 일본 본토와 동일 행정 동일 법제 동일 권리 동일 의무의 즉각적인 시행을 주장했다. 그러고나면 그는 본디 일군만민주의자로서, 구조선인에 대한 모든 차별과 편견을 전적으로 타파할 것을 주장했다. 국가주의자인 그에게, 그것은 그것대로 일관적인 논리성을 띈다. 요시노 사쿠조는? 그는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기독교인이며 자유주의자인 한 개인이다. 동시에 현실적인 점진론자이기도 하다. 그의 조선관은 방책으로서는 그에 일관적이기는 하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동정적이고 온정주의적이었으며, 자유주의자로서 무단통치의 폭정을 반대했고, 민의의 반영이 이루어질 자치를 내세웠다. 그렇지만 그는 전제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조선은 반드시 일본의 식민지여야 했다. 개인적으로 그 자체에 분노하고 비난할 생각은 없다. 민족주의자들이란 본래 그런 법이니까. 그것을 민족적 관점 내에서 그나마 넘어선 것은 이시바시 단잔이다. 그는 너무나 당연한 흐름, 말했듯이 자신이 일본인임을 포기하지 않듯이 누군가는 조선인이고 대만인이란 정체성을 붙들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요시노 사쿠조 이하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은 그 정도 일관성을 보전치 못한다. 자민족의 그것만큼이나 타민족의 민족주의를 유념치 못한다. 어쩔 수 없다. 민족주의는 근본적으로 타자에 대한 이해를 거세함으로써만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저열하고 끔찍한 것을 이리저리 구분선을 만들어 방어적 민족주의니 뭐니 하며 귀퉁이를 붙들고 미화하는 자들이야 있다. 그러나 민족주우의 요체는 바로 신채호가 말하지 않았던가. 일본 무산계급과의 연대논의가 나오자 '일본인은 사죄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와도' 라 소리지르던, 끝내 근본적으로 골수 민족주의자였던 그를 자꾸 아나키스트로 눈속임 시키려는 자들이 의지의 문제니 뭐니 그 의미를 곡해하지만, 신채호의 명쾌한 사론이야말로 기실 민족주의의 정수이다.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 한덩이 일체적 '아' 외에는 모조리 한 뭉텅이 '비아'만이 존재할 뿐이다. 비아들은 다양성도 차이도 없다. 무엇도 중요하지 않고 '아'가 아니기 ('비')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아니 한덩이 비와와 할 것은 오직 궁극적으로 투쟁 뿐이다. Mein 'Kampf'의 저자께서 지극히 전율하며 공명하실 정수이다. 아리안인과 조선인으로서 각자 인종의 명운을 위해 서로 맞찌르고 죽어버리는 촌극으로나 귀결되긴 하겠지만. 현실에서 맞부딫히게 되는 문제와, 이른바 시대적 맥락이나 한계는 닿아있는 것이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신념을 초지일관 하는 것은 전후자 모두와 관계가 있다. 그러나 사상과 신념의 일관성과 완결성은 조금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시대와 관계가 없다. 요시노 사쿠조가,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일본인에 한해서만 적용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의 제한적인 '민본주의' 이념도 마찬가지다. '인민을 위한' 정치가 '인민에 의할' 때에 가능하단 점을 안 사람이 그것이 근본적으로 '인민의' 정치가 전제되어야 가능한 소리란 것을 정말 몰랐을가. 그렇다면 모호하기 그지없는 '민심' 에 귀를 기울이는 왕도정치인들 안 될 것이 무엇이고 다를 것이 무엇인가. 인민의 것이 아닌데, 허락된 영역에서 춤추는 것이 인민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는가? 감옥 안의 죄수가 묶여있지 않다면 자유로운가? 요시노 사쿠조는 자신의 논리 자체를 한발짝 내뻗는 것을 중단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근본적으로 그에게 사상은 부재하다. 그러니 그에 기반하는 활동도 표피적으로 많은 것을 이루었어도 근본적으로 공허하기 그지없다. 기둥 없이 지붕을 올릴 수는 없다. 그런 그가 기수였던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것을 전통과 기반 삼으려는 현대 일본의 민주주의에도 미래는 기대할 수 없다. 그건 87년 직선제 이후, 7,8,9 실질적인 노동계 대투쟁을 비롯한 사회변혁 운동을 '민주화가 이미 되었는데''빨갱이 놈들''이익만 챙기는 이기주의'로 매도하던 중산층 시민들의 이른바 민주주의가 환상에 불과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저 우연히 당첨된 복권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것은 모조리 탕진되었다. 어떠한 근본적인 여건의 변화도 없이 다음 세대인 우리에게 정치적 잔고의 파산과 높아진 정치적 소비수준만을 남겨놓은채. 마르크스는 그 무수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하나만은 반드시 옳았다. 하부가 상부를 결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생산관계니 경제관계니 하는 것만이 하부가 아니었던 점에서 그가 틀렸다고는 하지만. 결국 차세대는 하부를 우선 세워야하고 그러기 위해 저변부터 다져야 한다. 그것은 오직 일관성과 완결성으로만이 가능하다. 그것은 시대를 불문하고 명백한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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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세계화 시대의 불평등 이해하기 | [세계화 시대의 불평등 이해하기] 제4강 세계화 시대의 사회적 불평등 | 리브레 | 2015.11.25 | ||||||||||||||||||||||||||||
김만권 선생님의 '세계화 시대의 불평등 이해하기' 네 번째 강의에서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저서 <새로운 빈곤>을 토대로, 지구화 시대의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강의 내용을 요약하여 강의록을 작성하였습니다.
"가난의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들에게 부여하는 가치이다."
과거 산업사회의 도래로 세계화가 확대되던 시기에는 잉여 노동력을 외국으로 옮김으로써 이들이 사회적 불안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을 낮추었다. 이는 근대화의 지역적 차이에 따라 국가간 권력과 힘의 불균형이 현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이제 근대화는 전 지구적 현상이 되었기 때문에 '지역적 잉여의 지구적 배출'은 어려워졌고, 난민 문제 등으로 인하여 오히려 개발도상국으로부터 발전된 국가로 잉여 노동력이 유입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바우만은 이렇게 '말랑말랑한' 경계를 가지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늦은 근대의 시기를 '액체근대'로 정의한다. 견고했던 과거 민족국가의 경계가 약화되고 유연해지면서 이렇게 약화된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소수의 사람들은 경쟁력을 갖는다. 반면, 소비사회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하여 '소비력'을 갖추지 못하는 '잉여'들은 마치 '쓰레기'와 같이 취급되고, 이들은 배출구 없이 갇힌 곳에서 끊임없이 떠돌다 '최하층계급'으로 전락한다.
통일된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여기 저기서 밀려온 '최하층계급'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곱지 않다. 이 계급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들을 '노동윤리가 미치지 않아 일하고자 하지 않는', '부도덕한', 따라서 '도와줄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는다. 이러한 시선을 통해 이들을 사회에서 배제시킴으로써 이들에 대한 도덕적 부담감과 그들 역시 최하층계급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국가 역시 이러한 '쓰레기'들을 관리하기 위해 안전산업(예. 감옥산업)에 집중하기 때문에 과거의 사회국가는 점점 보안국가화 된다. 그리고 사회로부터 배제된 이들은 그러한 시선 속에서 모든 권리의식을 잃고 저항하지 않는다. "불필요하고 쓸모가 없고 버려진 그들은 우리의 눈 밖에 있다." 한 시간 여의 강의 후에는 토론의 시간을 가지고 '우리가 빈자를 바라보는 시선', '직업이 없다는 것이 나에게 주는 의미',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복지' 등에 대하여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노동하지 않는 또는 노동할 수 없는 이들에 대한 각자의 시선을 점검해 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마음이 묵직해지던 시간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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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교육 디자이너 과정 1기 - 새롭게 그리다, 한반도 동아시아 평화에 대한 상상 | [평화교육 디자이너 1기 - 동북아과정] 제8강 나의 평화교육 디자인 선보이기. | 마음천천히 | 2015.11.24 | ||||||||||||||||||||||||||||
평화교육 디자이너 1기 – 동북아 과정 <새롭게 그리다, 한반도 동아시아 평화에 대한 상상>
8강 나의 평화교육 디자인 선보이기
2015년 11월 29일 7시 ~ 9시 30분 강사 : 이대훈, 이미현
마지막 8강에서는 키워드 요약하기, 어휘 찾기, 교육개념 디자인하기를 연습했습니다. 그리고 과제 ‘평화교육 수업 교안 기획서’를 발표했습니다.
1. 키워드 요약 활동 : 진행자가 제시한 주제에 대해 한 사람씩 순서대로 말한다. 진행자는 단계적으로 연습강도를 높인다. 이 활동은 학습자를 참여시킬 뿐 아니라 진행자가 학습자들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1) 주제1 [키워드 요약의 장점] : 예) 연결성, 축적, 상승, 인정받는 경험, 언어의 명료화, 정리 등. 2) 주제2 [한 주간 있었던 일(좋았던/싫었던 일)] : 첫 번째 사람이 이야기한다. 바로 옆 사람이 앞 사람의 이야기를 요약한 후, 자기 이야기를 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는 중 진행자가 작업을 정지시키고 관찰한 것을 질문한다.“학습자가 더 존중받는 기분이 들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교육 진행자로써 요약하는 방식에 좀 더 개선하고 싶은 것은?” ▶ TIP : 공감적 소통. 진행자는 상대를 인정해주고, 학습으로 끌어낸다. 그것을 촉진하기 위해 몸 소통, 이름 호명, 키워드 부각, 명사요약, 어조, 확인하는 과정 등을 사용한다. 3) 주제3 [교육 진행자가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태도] : 첫 번째 사람이 말하면 세 번째 사람이 요약한다. 다시 두 번째 사람이 말한 것을 세 번째 사람이 요약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사람이 전체 요약을 한다. 역시 진행도중 진행자가 개선할 점에 대해 묻는다. ▶ TIP : 몸으로 기억하기, 시선 공유하기.
1) 주어 : 주어를 지칭하는 것은 개별성을 인정하며, ‘내가 당신을 존중합니다.’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2) 명사 : 키워드 요약을 통해 참가자들과 내용적, 감정적 교류를 한다. 3) 동사 : 인정과 긍정의 동사를 찾고, 다양한 동사를 사용한다. 예) 제시했다. 제안했다. 이야기했다. 말씀하셨다. 강조했다. 설명했다. 지적했다. 설득했다. 설명했다. 언급했다. 주장했다. 비판했다. 공유했다. 찾아주셨다. 도와주셨다. 나눠주셨다. 선물로 주셨다 등.
3. 키워드 요약활동 1) 주제 [동북아 평화교육에서 다룰 수 있는 것] : 앞 사람이 말한 것을 다음 사람이 명사(키워드)로 요약한다. 이 때 앞에서 이야기한 개선사항을 반영한다. ▶ 접두사 : “다시 요약하면, 정리해보면, 종합하면~”과 같은 반복의 뉘앙스는 학습자에게 지루함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저는 이렇게 들었는데, 어떤가요?”, “키워드를 한번 뽑아본다면 ~~인데, 어떠세요?”라고 말하여 반복을 피하고, 진행자가 참가자에게 권한을 돌려줄 수 있다. ▶ 되물음 : “제가 요약한 게 맞죠?”라는 표현 대신에 “그렇죠? 그렇지 않은가요?”, 확인하는 눈빛교환, “고맙고요, 너무 좋고요, 멋졌습니다.”같은 감사표시를 사용할 수 있다. 2) 어휘 찾기 : 참가자를 긍정하고 인정하는 동사, 의견의 질을 표현하기 위한 말을 찾는다. 예) 빛난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다. 훌륭하다. 창조적이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공감이 된다. 깜짝 놀랄 만하다. 놀랍다. 뛰어나다. 아름답다. 독특하다. 고유하다. 특별하다. 생각해보지 않은 이야기다. 독보적이다. 독창적이다. 쩐다. 대박. 헐. 엄지척. 자극이 되는 이야기다. 신기하다. 소나기 같이 시원하다.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다. 신비하다. 신기롭다. 신선하다. 기발하다. 소중한 의견 감사합니다. 귀중하다. 상상력을 자극한다. 영감을 주셨다. 독특한 방향이다. 넓은 사고를 갖게 했다. 지평이 확 열린 것 같다. 큰 힘이 되었다. 보석과 같다. 기분이 좋아진다. 흥미롭다. 가치있다. 색다르다. 새롭다. 다채롭다. 가치롭다. 귀하다. 다양하다. 영롱하다. 선명하다. 눈부시다. 찬란하다. ▶ 진행자의 덕목 : ① 참가자의 대답에 형평성을 유지한다. ② 교육의 목표에 충실 한다. 참가자의 반인권적·폭력적인 의견에 단호한 모습을 보일 필요도 있다. 단, 사람에 대한 비난은 피한다. 3) 키워드 목록 수집 : 진행자가 교안에 있는 문장을 하나씩 읽는다. 학습자는 그 문장에 있는 핵심 단어를 모두 고른다. ▶ 대부분 문장의 맨 앞이나 뒤에 강조점(상위 핵심 키워드)이 있다. 해당 교육주제에 대한 키워드가 진행자의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으면 편하다. 왜냐하면 아는 것이 잘 들리기 때문이다. 또한 키워드를 요약함으로써 참가자에게 이야기를 짚어주는 데서 오는 기쁨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평소에 단어중심으로 들으며 기억, 분석, 요약하는 연습을 하자.
4. 교육개념 디자인하기. 1) 어휘 적기 : A4용지를 반으로 나눈다. 왼쪽에 [동북아 평화교육 진행자가 기억하고 있어야할 키워드]를 적는다. 오른쪽에 다른 사람들이 적은 단어를 공유한다. 2) 학습목표, 구성요소, 주제요약하기 : 적는 순서 ①→②→④→③
3) 교육 디자인 설명하기 : “내가 하고 싶은 교육은 ①이다. 이것을 부각시키기 위한 주제로 ④를 잡았다. 주제④를 설명하기 위해 ②를 통해서 ③을 이야기 하고 싶다. 구체적으로 역할극, 자료, 몸 소통 등을 이용하여 ②를 ③에서 ④로 연결시킬 것이다.” 즉, 상징적인 활동(역할극)을 하고나서 Input(정보제공)을 한 후, 실질적인 토론을 통해 동북아교육 주제로 연결시킨다. 4) 숙제발표와 피드백 : 교안을 기획할 때 진행자의 동선·위치까지 계획한다. 연극대본 수준으로 만든다. 어휘는 50~100개 정도 찾는다. 사전 독서자료, 시청각 자료 등을 준비한다. 과제 수행 중심의 배움 진행 시 학습률, 집중도, 실천효과 등이 높아진다. 예) ~에 대해 5가지 생각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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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 2 |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2] 6강. 송미령. - '권력. 여성.' | 문동욱 | 2015.11.21 | ||||||||||||||||||||||||||||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2] 강좌의 여섯번째 강의는 '쏭메이링(송미령)'을 만나보았습니다. 강의 후기 정리는 자원활동가 문동욱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 아카데미느티나무 주- '여자라면 힐러리처럼' .2007년에 나와 제법 팔려나가고 서점의 진열대들을 매우던 책이다. 당당함을 뿜어내는 만큼이나 고압적으로 강제적인 책 제목이지만 생각해보면 한심스럽고 비굴하기 짝이 없다. 지금에 힐러리는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을 한번 치루고, 국무장관을 역임하였으며 다시 미국의 유력한 대권후보이다. 그러나 07년에는? 그녀가 대선 후보 준비를 하고 있기는 하였다. 허나 그때까지 그녀는? 검증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들 기억하다시피 그녀는 영부이인었으며 그게 전부였다. 물론 그녀가 단순히 빌 클린턴의 아내가 아니라,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동지적 존재였으며 정치적 지혜를 지녔으리라고는 모두들 모두들 여기고 있던 바다. 그렇지만 애초에 그 모든 것의 근원이 합당했던가? 어떤 공직도 아니고, 단지 선출된 대통령의 아내이기에, 그리고 대통령에게 개인적으로 지니는 영향력이 과연 합당하고 용인될 수 있는가? 그것이 정당한가? 그녀는 대통령이 공적으로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한을 공적으로 나눠가지는 -부여받는- 공직자조차도 아니었다. 그녀는 대통령이 된 빌이란 한 남자의 아내, 지극히 사적인 관계에 권력의 뿌리를 내린 존재였다. 원칙적으로 그것은 슬어버린 녹에 다름 아니다. 미국이 폐쇄적인 사회라 여성에게 그런 식 외에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참작의 여지는 있다. 그러나 그녀 이전의 여성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백악관에서 당당한 전문가, 안보보좌관으로 시작되었던 콘돌리자 라이스는? 기실 책이 나올때까지의 힐러리는 권력과 명성을 최악의 방식으로 누리던 여성에 불과했다. 그런대도 책 제목이 그리 역겹도록 오만방자한 것은 저자들도, 받아들일 소비자들도 아무 문제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들에게 권력과 여자는 그런식으로 밖에 연결되지 않았으리라. '여자'란 그들에게 그런 존재에 불과했을테니. 송미령은 장개석의 아내로서, 악의적인 비아냥 담긴 표현대로, 그러나 그와 상관없이 딱 들어맞게도 '권력을 사랑한 여인'이었다. 애초에 세상에 권력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만은. 친목모임 술자리 대화라도 화제와 흐름을 자기 바랄대로 이끌고 싶기 마련인데. 여하간 그로써 송미령에게 덧씌워진 것은 유구한 중국사의 전통에 따른 '정치적 악녀'의 표상이다. 그것은 군주를 환락에 이끄는 미색, 이른바 경국지색으로 꼽히는 서시 달기 양귀비와는 전혀 다른 증오의 대상이다. 한 고조의 아내 여후(여치), 당고종의 황후이자 후에 스스로 성신황제에 올랐던 -말년에 그 자리를 유지 못하고 끌어내려진- 무측천, 청 함풍제의 아내이자 동치-광서 연간에 섭정으로 권력을 행사한 자희태후 즉 서태후. 송미령은 신중국의 황제나 다름없는 장개석의 아내로서, 후에 그 자리를 얻는 모택동의 아내인 강청과 함께 이 이미지의 마지막 계보를 잇는다. 강청만은 다르긴 하다. 그녀는 매도당했다기에는 실제로 저열한 악인이었고 동정이나 재평가의 여지는 없으니까. 그러나 스스로 말한대로 그녀는 모택동의 개에 불과했다. 그가 짖으란 상대에게 짖었고 물란 상대를 물었다. 그의 의중을 벗어나서는 아무 힘이 없었다. 그리고는 힘의 근원이 되던 모택동의 사망 직후, 그리 기세등등히 문화대혁명 내내 날뛰던 사인방의 나머지와 마찬가지로 눈깜짝할 사이에 권력을 상실하고 숙청당할 뿐인 존재였다. 그녀는 타인의 도구에 불과했고, 그에서 알량한 권위에 취해있던 역사의 작은 벌레에 불과했다. 민자영을 미화하는 것이 우스운만큼 그녀에게 망국의 책임을 지우는 것은 부당하다. 강청도 마찬가지다. 강청이나 민자영이나 영사적 가치와 의의는 전혀 없는, 부정적인 영향조차 미칠 수 없는 먼지에 불과한 존재들이였으니까. 그러나 이른바 '정치적 악녀'들의 실체는 그와 조금 다르다. 그들은 혹독하고 냉정했으며 때때로 잔인했다. 그러나 그건 정치적 투쟁이 극심한 상황에서 살아남을 모두가 보이는 특성일 뿐이다. 그들이 여성이었기에 반발이 거세어 많은 피를 보았을 수는 있지만 그녀들이 여자이기에 잔인했던 것은 아니다. 물론 한 개인으로서 그런 장벽들을 으깨어버리도록 권력의지가 강하고 지독한 성미들이었던 개인들은 맞지만, 그건 그녀이기 이전에 그 사람들의 퍼스낼러티일 뿐이다. 정치적 악녀들의 신화는 결국 그 정도 인간이 아니고서는 여자는 정치와 권력에 닿을 수 없던 시대와 환경의 적자일 뿐이다. 그러고나면 여후의 치세는 그녀에 부정적이전 사마천마저 인정하도록 '백성의 삶은 평안했다'. 무측천의 시대는 곧 중국인들이 그리 자랑스러워하던 성당기이며 노년의 그녀를 황제에서 끌어내린 복고파조차도 황실의 큰 어른으로 모셔야 하도록 그녀는 권위를 지니고 존경을 받던 존재였다. 서태후. 무수한 날조와 매도의 신화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제국의 구심점이었으며, 때문에 중국이 해체되지 않고 그로써 인도처럼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되는 것을 피했음은, 그리고 조작과 모욕이 이루어지기전까지 그녀가 인민들에게 경애받던 '노불야' 였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과연 송미령은 어떨까. 그것이 궁금하던 터였고 아는 바가 없었기에 기다렸던 강의였으나 아쉽기 그지없다. 솔직히 아직도 평을 할만한 여지조차 찾기가 어렵다. 그녀의 삶이 어쩔 수 없이 중국의 현대사 전체와 얽혀져 있다. 그리고 중국 전체와 국제정세까지 뒤얽힌 그 무대에서 송미령의 역할과 비중은 집어내기 어렵다. 애초에 그녀의 영향력은 결국 비공개적이고 비공식적인 부분에서 더욱 크니. 정적들마저 인정한 그녀의 명민함, 지식, 어학능력과 서양 사회에 익숙함은 장개석에게 큰 조력이 되었을 것이다. 정치적 조언은 물론, 외국과의 협상에서도 그렇고 더더욱이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이미지를 개선하는데 큰 기여를 했으리라. 하지만 도리어 장개석과 국민당의 한 하위에 불과해, 그녀의 주도적인 업적이라 할만한 것은 찾을 수 없다. 그녀는 그 전체에서 일정 이상의 영향력을 지니고 권력을 만끽하며 살았겠지만, 후대인인 나로서는 그녀에 대해 추론해볼만한 근거가 없다. 전설이 된 그녀의 명민함을 보여줄만한 결정이 그녀의 이름으로 난 적부터 없지 않은가. 그녀는 거대한 역사적 존재들의 일부이고 그림자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중국 현대아세, 아시아 역사에 가장 결정적인 것은 1936년 서안사변이다. 시계에서 가장 크고 많으며 일체감을 지닌 4억 인구가 일치항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에 장개석은 반쯤은 떠밀리듯 노구교 사건에서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일본에 맞섰고, 중국은 4년간 일본제국과 홀로 전쟁을 벌였다. 그 4년이 흐르고나서야 미국은 이미 지치고 한계에 이르러가는 일본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태평양전쟁을 승리해 그 힘을 제거했다. 송미령이 없었다면? 남경정권은 서안에서 체포된 장개석을 기꺼이 희생시키고 장학량 동북군-양호성 서북군-중공 홍군과의 내전을 벌였으리라. 장개석의 빈자리를 놓고 왕정위 이종인 풍옥상 하응흠 호종남 손과 송자문 공상희 등이 다투기에 바쁘고, 용운 염석산 서북삼마들은 할거했으리라. 국민당은 분열되고 혼란에 빠진 중국의 각부는 각기 일본에 공순하여 삼켜졌으리라. 미국은 홀로 큰 부담을 무릅쓰는 대신, 전격적으로 아시아에 수립된 거대한 제국을 인정했으리라. 허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는 천황제 군국주의의 보다 짙은 그림자 아래 놓여지고, 세계는 그 위험하고 강력한 존재를 경계하면서도 방관하고 인정했으리라. 서안사변의 수습에서, 장개석의 유고상황에서 송미령은 유일하게 그녀가 전면에 나서 주도적으로 일을 치뤘고 국민당과 중국, 아시아와 세계를 구했다. ...근데 그게 겨우 장학량과의 로맨스로 해석되다니. 트라비아에 불과할 것이 주가 되면 우스울 따름이다. 이로써 중국 현대사 최대의 사건은 단지 한 여자와 그녀의 전 애인과 현 남편의 문제로 전락할 뿐이다. 그런식으로 되면, 장경국이 계엄해제를 비롯한 국민당의 개혁 및 체제이완을 이끈 것도 생략되면서 장새석 사후 권력투쟁도 단지 집안 서열의 일에 불과하게 된다. 국민당 신구파의 갈등은 사라지고, 적장자가 아내에게 승리하는 일에 불과하게 된다. 장개석의 수년에 걸친 구애를 받아들인 시점이 그가 중국의 제1인자가 되고나서야인 것과, 그의 사후 국민당 당권 장악 투쟁에 나섰던 것으로 송미령이 권력을 사랑했음이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말했듯이 그건 그녀뿐 아니라 누구나 어느 정도는 대게 마찬가지이다. 중요한 것은 그 외에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가이나, 그에 대해서는 미루어 짐작해볼만한 것이 여전히 없다. 강의를 통해서도 그녀는 결국 권력을 사랑한 '여인'으로서만이 그려져 기억되고 있을뿐임이 새삼 확인되었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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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교육 디자이너 과정 1기 - 새롭게 그리다, 한반도 동아시아 평화에 대한 상상 | [평화교육 디자이너 1기 - 동북아과정] 제7강. 평화로운 한반도 상상하기 - 분단폭력에서 통일평화로 | 바네사 | 2015.11.18 | ||||||||||||||||||||||||||||
평화교육 디자이너 1기 - 동북아과정 제7강. 평화로운 한반도 상상하기 - 분단폭력에서 통일평화로 2015. 11. 12. 목 자원활동가 주선민 지난 12일, 평화교육 디자이너 1기의 7번째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날 수업에서는 서보혁 통일평화연구원님이 수고해주셨습니다. 수업은 크게 '평화'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돕고, 이를 토대로 한 '한반도 평화'에 대한 논의의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1. 평화의 이해 우선 '평화'라는 말은 아래에서 볼 수 있듯이 문화권마다 각기 다른 의미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평화의 종류 역시 그 기준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크게는 아래와 같은 기준으로 구분지어볼 수 있습니다.
평화로 가는 길 또한 평화를 이루어나가는 과정 또한 여러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는 Peace Making-Peace Keeping-Peace Building의 단계로 나뉩니다.
단계가 올라갈수록 보다 높은 수준, 즉 적극적이거나구조적인 수준의 평화를 달성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각 단계는 중첩될 수 있습니다. 현재 한반도 평화에 대해 논할 경우, 남북한의 물리적 분단 상태 해소, 즉 Peace Making만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분단 상태에서도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논할 수 있듯이, Peace Building에 대한 지향 역시 동시에 이뤄질 수 있습니다. 2. 한반도 평화 상상 한반도 비핵화 현재 한반도의 평화에 대해 논할 때는 소극적 평화에 대한 논의가 지배적인 편입니다. 특히 한반도, 더 나아가 동아시아 평화 문제를 논할 때 “북핵문제”에 대한 고민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부터 6자회담을 비롯한 북-남-미-일 등 관계 당사자들의 수 차례 접촉에도 불구, 북핵 위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한반도 평화체제
현재 한반도 평화체제를 이루고 있는 협정 및 조약들이 다수 존재합니다. 하지만 가장 우선시되어야할 질문은 바로 "평화협정(조약)의 당사자, 방식, 조건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현재 남북한 분단 상황의 당사자는 누구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북기본합의서(1991.12.13) *** 이는 현재의 남북 관계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합의서 중 하나입니다. 특히 현재의 한반도 내의 특수관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결국 북한에 대한 대응방식 및 통일 노선은 현재의 정전상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즉 북한을 특수관계로 이해하느냐 혹은 국가대국가의 관계로 이해하는지가 관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10.4 남북정상선언(2007) 특히 10.4 남북정상선언에서는 수역에 관한 분쟁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선언문 내에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라는 문구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남북 통일 문제의 관계 당사자에 대해 모호하게 표현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문제 해결 당사자를 이해하는 것은 현 한반도 분당 상황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주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편 인권과 북한 인권 특히 최근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뜨겁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비판이 가해지자, 북한은 2009년 북한헌법에 인권에 대한 내용 포함시켰습니다.
국제인권 메커니즘과 방법 그렇다면 북한 인권은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나가야 할까요. 국제적으로 인권 문제 해결법은 아래와 같은 과정을 거칩니다.
그 방법 역시 외교 언술상의 개입부터 경제, 기술력 지원과 같은 비군사적 방식, 적극적 개입까지 다양합니다. 북한인권 문제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고려했을 때, 정책 목표는 일관적이되, 정책 방향은 다양해야 합니다. 즉 다양한 방법론적으로 접근해, 북한 인권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분단 폭력 마지막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분단폭력'입니다. 이는 분단에 의해서, 분단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비인도적, 반인권적 행태로, 메카시즘 혹은 레드 컴플렉스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 전반의 반공 사상과 그 기저를 같이 합니다. 결국 통일이 되지 않으면 분단폭력이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평화운동과 평화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지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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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세계화 시대의 불평등 이해하기 | [세계화 시대의 불평등 이해하기] - 3강 세계화 시대의 정치적 불평등 | 이수종 | 2015.11.17 | ||||||||||||||||||||||||||||
이번 강의는 강의에 앞서, 시 한편을 읽는 것으로 시작됐습니다. 김중식의 사춘기라는 시로서, 신념을 지키며 살아온 자가 마흔 살에 느끼는 회한을 담은 시였습니다. 저는 이 시를 이해하기에 어린 나이였지만, 와닿는 부분이 있었던 걸 보면 김만권 선생님이 좋은 시를 선택해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화 시대의 정치적 불평등은 래리 M. 바텔스의 불평등 민주주의의 내용을 함께 살펴보고 우리의 상황과 대비시켜보며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이 책에서 바텔스는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가 정치적 불평등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가를 분석했습니다. '신도금시대'라고 불리는 오늘날은 1900년대 도금 시대의 엄청난 물질주의와 정치부패와 닮아 있습니다. 경제적 불평등은 심해졌고 물질주의는 횡행하며 정치 역시 불평등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1950년 대 로버트 달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다원주의적이고 경제력이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분석했으나 오늘날 미국은 정치가 경제력을 가진 자들에게 집중된 형국입니다. 오늘날 미국의 정치인들은 못가진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미국의 중산층까지도 가진 자의 이데올로기에 휩쓸리곤 합니다. 이는 감세정책에 대한 지지, 최저임금의 정체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중산층 중 상당수는 검증된 적 없는 '불가피한 불평등',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는 불평등'과 같은 담론에 휩쓸리기도 합니다. 그 사이 불평등은 심화 되었고, 정치인들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못가진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시간여동안 이와 같은 내용의 강의가 끝난 후, 강의를 같이 듣는 분들과 우리 현실에 대한 토론을 나눴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나라의 중산층들도 불평등을 지지하는가?와 같은 질문이 나왔고 많은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우리에게 각인된 낙수효과에 대한 지적도 가난한 사람이 부자의 입장을 지지해주는 착각에 대한 지적도 나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공감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다음 강의에서는 사회적 불평등을 다루게 됩니다. 세계화 시대에 접어들며 우리는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불평등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부분 역시 불평등해졌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최소한의 인권이던, 사회 속의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던간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다음 시간에도 조금 더 많은 분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의 불평등을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지면 하는 바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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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교육 디자이너 과정 1기 - 새롭게 그리다, 한반도 동아시아 평화에 대한 상상 | [평화교육 디자이너 1기 - 동북아과정] 제6강. 평화시민의 역할과 평화시민 되기 | 바네사 | 2015.11.12 | ||||||||||||||||||||||||||||
[평화교육 디자이너 1기 - 동북아과정] 제6강. 평화시민의 역할과 평화시민 되기
2015년 11월 5일 지난 5일에는 평화교육 디자이너 1기 동북아 과정의 제 6강 ‘평화시민의 역할과 평화시민 되기’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날 수업에서는 이경주(인하대 법학과 교수,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소장)님이 수고해주셨습니다. 이 날 수업에서는 인권과 평화권의 개념 및 역사에 대해 들어보고, 평화적 시민의 역할과 위상에 대해 고민해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각자가 생각하는 평화권에 대해 적어보고 함께 공유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자세한 수업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매스미디어에 등장하는 전쟁의 이미지를 보면 마치 전쟁은 ‘화려하다’, ‘멋지다’ 등의 단어와 대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전쟁의 실상은 이와는 다릅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장’의 개념이 모호해지면서, 전쟁의 희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크게 증가합니다. 이전에는 일정한 ‘전장’이 존재했고, 그 안에서 전투를 치르는 군인들이 주 희생자였으나, 전장 개념이 사라지면서 민간인 희생자 수가 크게 증가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1차 대전에서 사망자 수 2천만 명 가운데 일반인 비중 5%였던 반면, 2차 세계대전에서는 전체 사망자 수가 2배 가까이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중 일반인 비중은 48%에 달했습니다. 이는 대량 살상무기의 등장, 공군의 활용도가 높아지면서 ‘총체전’으로 전쟁의 양상이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2차 대전 전후로 평화에 대한 조약이 부재했던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1928년 체결된 ‘켈로그-브리앙 조약 (Kellogg-Briand Pact)’ 조약 (혹은 ‘부전조약)에서는 전쟁에 반대하는 내용의 조항들을 담습니다. 하지만 해당 조약에 강제성이 없어 세계 대전의 발발을 막는 데는 일조하지 못했습니다.
세계 대전 이후 여러 국가들에서는 '평화주의의 헌법규범화’가 진행됩니다. 세계대전 이후 국가권력을 강제하기 위해 평화주의 헌법규범화를 진행한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독일의 기본법, 일본의 평화번법 등이 있습니다. 특히 일본국 헌법의 전문에는 실제로 평화에 대한 언급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헌법 전체에도 평화에 대한 조항의 비중이 높은 편입니다. 실제 일본국헌법의 전문은 아래에 첨부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5조에도 유사한 조항이 존재합니다. 해당 조항은 지난 2003년 이라크 파병 당시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평화권에 대한 이해는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과거 평화권이 단순한 인간의 바람으로 치부되었다면, 이제 평화권은 여타의 인권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보장받아야 할 권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일본에서 평화권에 관련된 투쟁의 대표적인 예시로는 '스나가와 사건’이 있습니다. 일본에 위치한 스나가와 마을에 일본 내 주일미군의 활주로 연장 계획이 발표되었지만, 주민들은 10년 간의 법적 투쟁 끝에 승리를 거둔 사건입니다. 이후 해당 지역에는 별칭 ‘평화공원’이 건립되어, 평화권에 대한 투쟁이 오래도록 기억되고 있습니다. 또한 평화권의 국제화 역시 진행중입니다. 1984년 UN총회 등에서 평화권에 대한 국제회의가 진행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유엔 총회에서의 선언이 다소 추상적인 수준의 결의였다면, 2010년 산티아고 선언에서는 평화권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았습니다. 불복종권과 양심적 병역거부권, 군비축소에 대한 권리, 난민의 지위에 관한 권리 등이 그 예시입니다. 이후 2012년 유엔인권이사회 자문위원회의 평화권보고서에는 평화권의 주체는 개인(individual)와 인민(people)이라고 명시했습니다. 즉, 평화권의 주체는 단순 개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집단도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이 외에도 모든 인간의 안전 보장, 평화교육 및 훈련 등에 대한 내용들을 포함했습니다. 실제 오늘날 평화권의 예시로 인정되는 내용들에는 침략전쟁의 포기, 군비보유의 배제, 집단적 자위권 부인, 국가에 대한 평화저해 행위 배제(무기수출 등) 등이 있습니다.
수업 말미에는 제주도 강정, 평택 대추리, 김포 애기봉 주민들이 '내가 생각하는 평화권’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감상했습니다. 이후 수업 참여자들 개인이 생각하는 평화권에 대해 함께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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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세계화 시대의 불평등 이해하기 | [세계화 시대의 불평등 이해하기] 제2강 세계화 시대의 경제적 불평등 | 리브레 | 2015.11.11 | ||||||||||||||||||||||||||||
김만권 선생님의 '세계화 시대의 불평등 이해하기' 두 번째 시간에는 지구화에 따른 세계질서 재편과 지구화 시대의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알아 보았습니다. 강의 내용을 요약하여 강의록을 작성하였습니다.
1. 지구화와 세계질서의 재편 지구화는 '사람의 이동'이라는 의미에서 인류탄생 이래 지속되어온 현상이나, 현재의 지구화는 기술의 발전과 맞물려 다방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러한 지구화 현상은 주로 경제적 동기에서 시작되지만, 새로운 인구가 유입된다는 것은 새로운 문화의 동반 이동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적 충돌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예. 서 유럽의 난민수용). 즉, 지구화는 우리 삶의 지형 자체를 바꾸어 놓는다.
'베스트팔렌 모델'은 지구화 현상이 현저해지기 이전, 민족국가(nation-state)를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를 의미한다. 이 때, 행위자의 단위는 '민족'이 되며 '국가주권'의 절대성을 보장받는다. 따라서 국가가 자행하는 무도덕 또는 부도덕을 견제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를 극복하여 무도덕한 체제에 도덕성을 불어넣고 국제질서를 '인권' 아래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포스트 베스트팔리아' 프로젝트이다. 롤스의 제자들 또한 정의론의 전 지구적 실현과 세계의 빈곤문제 해결을 고민하는 일종의 세계시민주의자들로서, 이들의 시도는 지구적 정의를 추구하고 이를 위해 국가간 협력을 권장한다는 점에서 포스트 베스트팔리아 프로젝트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확산되는 테러리즘의 여파로 각국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전에 없던 수준의 비자통제를 시행하는 등 '네오 베스트팔리아'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즉, 현재의 세계질서는 열림(포스트 베스트팔리아)과 닫힘(네오 베스트팔리아)의 갈림길에 서있다.
2. 21세기 글로벌 부의 불평등 -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 피케티는 지구적 차원에서 부의 불평등이 일어나는 원인으로 '규모의 경제가 만들어내는 자본수익률의 불평등'에 주목한다. 많은 경제 모형이 재산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의 자본수익률을 동일한 것으로 보지만, 부유한 사람들의 평균수익률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높을 수 있다. 부유한 사람들은 탁월한 자산운용가를 고용해 더 많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으며 위기의 상황을 견딜 수 있는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는 자본의 분배에 있어 근본적인 격차를 만들어내고 불평등의 수준은 무한히 증가한다. '많은 돈이 더 많은 돈을 버는' 불평등이 가속화된다.
국민소득에서 자본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과도하게 증가하고 이렇게 증가한 자본이 세습되어 세습자본주의가 구조화되면서 이러한 불평등은 더욱 공고해진다. 그리고 이렇게 심화된 불평등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피케티는 이와 같은 현상을 국제적 부의 순위, 미국대학기금의 수익률 등 다양한 실증적 자료를 토대로 설명한다. 그리고 불평등을 해결할 방법으로 민주주의 가치 및 제도의 강화와 지구적 누진세 실시를 주장한다. 특히 세습자본에 대한 누진세 실시를 통해 자본의 세습을 억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으나 거의 유일한 대안과 다름없다.
자본가들은 국가 간의 경계를 허물고 복지의 문제를 저지함으로써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고자 한다. 이렇게 국경 없이 움직이는 자본은 국내/개인 차원의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세계의 성장속도가 느려지고 과거와 같은 고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만큼,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분배'의 문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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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 2 |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2] 4강. 히라츠카 라이초. - '그리고 백년' | 문동욱 | 2015.11.9 | ||||||||||||||||||||||||||||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2] 강좌의 네번째 강의는 '히라츠카 라이초'를 만나보았습니다. 강의 후기 정리는 자원활동가 문동욱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 아카데미느티나무 주- 히라츠카 라이초에 대해 어떻게 얘기하여야 할까. 역사에서 그게 누구라도 몇년에 무엇을 했고, 어떤 단체를 만들고, 무슨 글을 썼고 하는 연표 정리는 의미를 잘 모르겠다. 그런 식의 사실관계는 오늘날에는 헌신적인 연구자들의 기여에 따라 포털에서조차도 쉽게 자료를 찾아 볼 수 있으니. 어쨌든 내가 쓰는 것은 강의에 대한 후기이지 않겠는가. 그러고나면 강의에서도 다루어진, 그 당시 여성운동 내에서 이루어진 논쟁들도 흥미롭지만 다루기에는 모자란 역량으로서는 막막하기 그지없다. 정조, 낙태, 폐창, 모성. 이들은 사실 큰 줄기에서 현재까지도, 그리고 영원히는 아니더라도 기약하기 어렵도록의 미래에까지도 끝없는 논쟁과 토른의 거리가 될 법한 것들이니 말이다. 그 각 운동가들의 주장과 주 논점, 접근방법의 차이는 매우 흥미로우나, 내 부족한 역량으로 다루어보아야 강의안을 옮겨적는데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나면 배우느니 도둑질이라고, 악습대로 모호하고 큰 범위로 질질 끌어 돌아보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역사가 분명히 지니는 속성은 그것이 '사실' 못잖게 지니는 '기억'으로써의 입장이다. 역사와 여성이라... '세상 밖으로 나온 여성들' 강의의 주제이기도 한데, 여성이 역사에서 그 이름을 남긴 것은 고대 이래 몇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몇몇조차 썩 아름다운 이름들은 아니다. 당장 우리와 우리에게 익숙한 중국에서는 폭정 혹은 망국의 근원에는 여성과 환관이 있다는 오래된, 편견으로 가득찬 레토릭하에서의 기록들이 대다수다. 그 개개의 퍼스낼러티와 별개로 그 한 인간이 악인인지 여부는 논쟁의 여지는 있겠으나, 설령 그렇다해도 어떤식으로든 그토록 강렬한 기질이 아니었더라면 그 시대에 여성의 처지에서 이름을 남길수 있었을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몇몇 악인 -이른바 악녀- 들의 존재는 도리어, 그쯤 되지 않고서는 이름 자체를 남길 여지도 없도록, 여성이 억압받고 침묵 당해왔음에 대한 증거가 되어준다. 내 개인적으로 부끄러운 것은, 역사에 관련된 전공을 가졌기에 본 강의에서 다루어질 다른 인물들은 적어도 이름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여성 3인에 대해서는? 송미령만은 안다. 그녀 또한 처절하게 권력의 세계에서 살아가며 발자국을 남긴 한 사람으로서. 내가 기억하는 그녀는 때때로 여성임을 수단으로 삼기는 하지만 -그만큼 제약으로도 되었을테니 일방적으로 비난 받을 꺼리만은 아니지 않을까- 기본적으로 정치가이다. 한 사람의. 그것이 송미령 개인은 기뻐했을지 쓰게 웃었을지 모를 일이나,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여성' 의 한 성원으로써 기억되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여치, 성신황제(측천무후), 서태후 그리고 잔다르크 등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다른 인물들을 구태여 남성으로서 기억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그런 것과 별개로, 그들의 삶은 이른바 여성에서 실제적으로 자유로웠다고는 볼 수 없다. 당대에, 그리고 후대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여성'으로서 평가받고 대해진다. 적어도 그것이 평가에 있어서 어떤 식으로든 작용을 한다. 기계적인 공평의 잣대는 무한한 힘을 지닌 현실 앞에 무기력할뿐더러, 특별성 앞에서 차별의 도구가 되기 마련이다. 두서없는 난론이 되어버린 것은 본래도 그렇지만, 올 한해가 페미니즘과 젠더가 폭발적인 그러나 아직 이름 붙이기 어려운 현재 진행형의 현상 그 자체를 빚어내며 아직도 한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 개개 사건이나 어떤 주장, 방식등에 대해서는 입이나 뇌가진 사람마다 제각기 하는 말과 할 말이 있고 생각이 있기 마련이다. 그 자체는 아무래도 좋다. 분명한 것은 '여성'이 개인으로서, 혹은 개념으로서 과거처럼 일방적으로 존재 자체가 깨끗히 무시당하지는 않는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혐오자들조차도, 적시는 할지언정 외면은 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러고나면 그것이 가능해진 시작도 역시 인류의 정점이던 모더니즘의 시대에서 비롯된다. 주제대로, 그때에서야 여성은 세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대로부터, 히라츠카와 초기 활동가들의 시대로부터 100여년이 지났다. 그리고 기억에 대한 투쟁은, 작금의 한국 역사교과서문제와 마찬가지로 어디에서나 가열차다. 교수님께서 강의로 다루어주신대로, 일본 교과서 역시 각 출판사의 필진마다 나타나는 편집방향의 차이들처럼. 우익이라 하는 이쿠호샤 교과서는, 아예 최소한의 검정통과 기준만 충족하고는 모든 것을 제외한 극우 지유샤 교과서보다도 혐오스럽다. 여성운동을 정치 사회 운동에서 분리시킨다. 그리고는 마치 한국에서 쓰이는 '~의 꽃' 과 같은 역겨운 표현인 '나데시코' 일본사로 그것을 이름지어 별개 항목으로 넣어놓는다. 구태여 번역하자면 대강 아가씨들의 일본사쯤이 될법한, 그 천박한 어휘에 걸맞게도, 대표적 여성운동가들의 젊을적, 그들이 바라는 아름다움을 지닌 사진을 실어놓은채. 개인적인 생각으로 극우 지유사의 태도가 차라리 낫다고 본다. 그들은 여성운동가를 증오한다. 최대한 존재 자체를 말살해버리길 원한다. 치명적인 위험으로, 위협적인 존재로 여기기에나 가능한 짓거리다. 그러나 이쿠호샤는? 그들은 너무도 가볍게 깔보고 경시하여, 속된 표현으로 입맛을 다시고 자빠졌다. 그들 보기에 좋도록 뜯어고쳐 진열이라도 하듯, 별개의 영역으로 실어놓고는 '나데시코'들로서 바라본다. 구역질 나오도록 관음증적인 정서가 느껴질 지경이다. 이것이 100년전에 대한, 그 위대한 투쟁이 시작되었음에도 결과인 현재에 '그녀' 들에 대한 그들의 기억이다. 철저한 적이, 음험한 자칭 친구보다 300배는 낫다. 페미니즘에서도, 성적소수자 운동에서도 이따금, 그리고 점증하는 성향 중 하나가 끽해야 서브컬쳐로서의 인정에 만족, 혹은 아예 별개로 독립된 그러나 결국은 외딴 갈라파고스적 하위문화로서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짓고 고립을 고집하는 경향들이 있던데, 그렇게 스스로까지 타자화 됨으로써 결국 앞서 본 것 같은 저열한 관음증의 대상이 될뿐이라는 명백한 사실은 왜 외면하는지 모르겠다. 히라츠카 라이초의 시대로부터 100년이 지났다. 남은 것은 씁쓸함 뿐이다. 백년전 '여성' 이기에 억압받고 차별받던 개인들은 마침내 세상에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흔히 역사에 대해 말이라도 해볼만하다는 10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그들은 한 인간이 아니라 '여성' 으로서 남아있다. 그 또한의 집단 정체성으로서의 굴레이건만 자유로워지기는 커녕, 그럴 엄두도 못내도록 단결이 필요하도록 여전히 '여성'이기에 공격받음으로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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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시니어학교 2기 - 새로운 노인복지와 시니어운동을 위하여 | 푸른시니어학교 제2기 5주차 / 국내, 외 사례를 통해 본 시니어 운동 | 우경 | 2015.11.4 | ||||||||||||||||||||||||||||
http://blog.naver.com/jhw0335/220527230167
강사 : 남경아 (서울시 인생이모작지원단장)
고령화 시대의 도래로 평균 수명을 근간으로 하는 인류의 표준적인 생애 주기에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고 있다. 최근 희망제작소에서100세 시대, 새로운 생애주기를 제안하는 보고서에 보면, 은퇴는 노년기로 진입하는 기점이 아니라, 정체성, 삶의 목적, 일, 사회적관계 등을 재조정하여 고유한 의미를 갖는 새로운 한 시기를 시작하는 전환의 기점에 가깝다고 보고, 고령화 시대, 은퇴 이후의 삶은 노년기의 확장이 아니라, 별도의 구획과 명명이 요구되는 새로운 시기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새로운 생애 주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인생 후반기에 성장과 발전을 연속해 갈 수 있는 새로운 생애 단계를 구획, 설정한 것이다. 이 새로운 생에 단계를 제2성인기(중년전환기+중년안정기)로 명명하고, 연령 범위는 50~60대로 설정하였다. 행복하게 살기위해서는 일, 여가, 관계가 잘 이루어진 삶이 중요함. 노년의 준비는 경제, 건강, 일 뿐만 아니라 '정체성'을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 #100세 시대, 생애주기의 변화 #왜100세 시대, 왜 50+에 주목해야 하는가? #고령화 시대의 '일'에 대한 생각 전환등 중요한 얘기들이 많은데, 모두를 다 기술 할 수 없어 자료화면을 참고로 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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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교육 디자이너 과정 1기 - 새롭게 그리다, 한반도 동아시아 평화에 대한 상상 | [평화교육 디자이너 1기 - 동북아과정] 제5강. 평화교육 디자인 방법 및 실습 | 마음천천히 | 2015.11.4 | ||||||||||||||||||||||||||||
평화교육 디자이너 1기 – 동북아 과정 <새롭게 그리다, 한반도 동아시아 평화에 대한 상상> 5강 평화교육 디자인 방법 및 실습
2015년 10월 29일 7시 ~ 9시 30분 강사 : 이대훈
Ⅰ. 강의 내용 - 표준 교안 사용하여 세션 구성하기 - 배움 촉진을 위한 다양한 실습활동 설명 및 연습
Ⅱ. 강좌 후기 이번 5강은 지난 3강과 마찬가지로 평화교육 세션을 직접 체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역시 두 가지 시선(참여자&관찰자)을 가지고, 실습에 참여했습니다.
1. 강의 진행과정
2. 배운 것 & 느낀 것. 1) 계획 짜는 법 : 세션의 진행 흐름을 상상하여 세션구성하기, 진행자로써 질문하기, 참여자의 예상되는 반응 상상하기, 내용 전달하기, 전체 활동을 주제에 맞게 연결하기 등을 배웠습니다. 2) 시, 그림, 연극을 통해 몰입, 즉흥성, 통찰의 힘을 경험했습니다. 3) 역할극 : 입장에 따라 나의 생각이나 태도가 바뀌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4) '어떻게 하면 좋은 질문을 할 수 있을까?' 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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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공익로비학교 1기> 국회를 흔들어라 선거를 흔들어라 - 공익로비의 원칙과 기법 | [공익로비학교] 제4강, 2015 정치개혁의 쟁점들 | 박스아웃 | 2015.11.3 | ||||||||||||||||||||||||||||
[공익로비학교] 제4강, 2015 정치개혁의 쟁점들 안녕하세요. 느림과 게으름으로 세상에 저항하는 자원활동가 이진용 입니다. 강사님 소개 이번 강사 선생님은 서복경 교수님이십니다. 8년간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활동을 하셨고, 현재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에도 계시며 왕성한 활동을 하십니다. 강의내용 중 인상적인 내용들 위주로 정리했습니다. - 의회정치, 선거정치. 정당정치 측면을 입체적으로 검토해야 정치를 효과적으로 이해. 신문기사들의 다면적 정치보도 부족. 포탈 댓글 반응도 입체적 검토를 못한 내용이 많음. - 국회의원은 4년 단기계약직 고용노동자. 단순한 도덕적 윤리적 관점으로 국회의원 비판하면 논점을 놓치는 문제발생. - 효율을 위해 1당 독재가 어떠냐는 여론조사를 하면 예전엔 20%, 지금은 28%. 예전엔 노인층 높고 젊은층 낮았는데, 현재는 젊은층의 동의가 급격히 늘어남. - 서복경 교수님께서 과거 국회에서 정치관계법, 헌법 비교하며 5년 근무. 정당법/선거법/국회법이 1set으로 움직이는 것 확인. - 양 당이 30년간 국회법. 정치관계법, 선거법 모두 세팅해서 군소정당 난립이란 말은 오해. - 한국 선거제도는 선거때만 이뤄지는 게 아님. 선거 외적활동을 하다가 선거 때 되면 투표하는 것이므로 항상 선거제도는 작동 중. - 역대 총선 투표율이 급격한 하락 중. OECD기준으로 봐도 낙차폭이 큰 이유로, 유권자 2명 중 1명이 투표 안함. 투표한 유권자 2표 중 1표가 사표. 19대 국회는 전체 유권자 1/4만 반영. -"여러분 집의 화장실이 막히면 노동당 화장실로 오십시오"라는 영국 노동당 홍보문구. 일상에 문제 생기면 가장 먼저 찾는 존재가 정치인이어야. 한국은 그것이 안되서 크레인에 오르고 목을 멘다. 자살률, 강력범죄율, 이혼율은 가족해체지표이면서 동시에 정치건강 3대지표. 현재 국회에 문제제기하는 루트가 사실상 없으니 시민들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 해결 중. - 투표수에 비해 의석수를 더 갖는 문제. 두 당에 동의 않는 유권자들이 정치에서 점점 더 멀어짐. 1, 2당이 아니면, 제3당, 아니면 제4당, 지지할 정당이 없으면 유권자 스스로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 OECD국가들은 가능하면 정당에 오시고 아니면 만들라하는데, 한국은 정당에고 오지말고 정당 만드는 것도 힘든 실정. 두 거대정당이 싫은 다수의 사람들이 제금 뭐하는지가 논점. 정당선호 여론조사 때 "없다"란 항목이 없다. 2010년 10명 7명은 지지정당이 없음. - 의회정치 측면에서 검토 중요. 88년에 비해 법안 처리수 22배 증가했지만 국민 1인당 의원수는 제자리 걸음. 미국은 1인당 의원수가 우리의 절반, 독일은 우리의 1/4. 한국 국회가 게으른 축면보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 더 크다. 법안에 소비되는 시간이 너무 부족. 상임위 16개, 국회의원 300명 공무원 100만명을 규율해야 하는 중. - 2015년 선거제도 쟁점 검토. 초선 의원들은 행정부 견제능력이 거의 없음. 다른 나라는 정당에서 도제식으로 배움. 2016년 정부 예산안 첨부파일 열어보기. 예를 들어, 2014년 기준 정부 예산 총괄서는 300page, 이것의 sub page가 3700page 이런식으로 해서 의원 한 명이 봐야할 page가 10000page가 넘음. 현실적으로 3선은 되어야 예산 숫자의미가 보이지만, 3선이면 의원들이 모두 거의 교체되면서 정부 견제하는 힘이 떨어짐. 국회가 젊어지는 장점과 함께 고려해야하 함. 행정관료는 예산과 사업 검토로 콘트롤해야 하는데 초선들이 현황파악과 논점을 잡는 것이 더뎌 요즘은 공무원들이 국회의원을 무서워하지 않음. - 현재 여야에서 논의되는 오픈프라이머리의 문제는 두 가지. 하나는 법제화하여 정당비용을 세금으로 처리해야하냐의 유무. 둘째는 공천권을 당원에게서 뺐는 구조. 그러나, 여야 모두 비용문제를 세금으로 메우려는 논의에 침묵하며 겉만 얘기함. - 선거구 인구편차 조정 중. 지방은 넓어서 선거비용이 많이 필요. 농촌지역은 의원 당 면적이 커서 농촌 유권자의 대표성을 지닌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에 유권자들이 소외감을 느낌. 의원수 확대로 문제를 해결해야하지만 새누리당 반대 중. - 권역별 비례제도 이번에 이뤄질 확률은 0%. 지방에서는 서울 명부제, 수도권 명부제라고 함. 정치인 충원 루트가 수도권이 압도적. 120석 미만으로는 권역별 비례 효과가 떨어짐. 예를 들어 전남과 제주를 묶을 시 소수정당들은 의원을 못냄. 그럼에도 새정련이 권역별 비례를 지지하는 이유는 부산 경남에서 2석이 나오기 때문. - 이지현 선생님 발언 중. 선거구 획정 위원인데, 거의 역할이 없음. 게다가 획정이 2달전 결정되어 현역에 절대적으로 유리. 또한 신인 의원이 자리에 들어가면 기존 시스템에 적응함. - 선거제도 바꾸기 진짜 힘들지만, 2004년 여야 초선(정병국, 남경필, 원희룡, 오세훈/ 천정배, 신기남, 정동영)이 각각 자당에 반기를 들며 시민단체 백업을 받아 선거제도를 고쳐냄. 예견치못한 역효과가 있었음. 앞으로도 10년이 지나도 선거제도가 고쳐지지 않을 수 있고, 정치적 균형에 따라 예기치 않은 속도로 변화가능. 이 균형을 깰 제3당의 존재유무가 중요. - 새누리당이 대통령에 밀리는 이유는 정당이 약해서임. 2004년 선거제도 바뀐 이후 총선 때 당이 의원들에게 해줄 수 있는데 별로 없다. 현재 지구당 대회가 불법이라 이름있는 의원이 얼굴 보이며 다니는 정치로 메움. 게다가 2004년 미디어선거로 바뀌며 입은풀고 돈을 막는다는 구호가 얼핏 옳아 보이나, 정당합동연설회 같은 시민들의 오프라인 커밍아웃효과를 낸 정치정보교환장치가 사라짐. 이후 선거캠페인에서 정당이 보이지 않음. 2004년 제도로 정치상황이 악화된 셈인데, 시민단체 시각으로는 선거자금 투명화가 목표였음. 미디어선거 향후효과를 가늠하기 어려웠음. - 정당 수명이 너무 짧아 시민단체와의 협약을 안정적으로 이행할 역량이 부족. 민주당 계열 대표 평균 임기 8개월. - 60세이상 어르신들 새누리 얘기만 들어줌. 복지관, 경로당, 동네 뒷산, 동네 미용실에서 정보교환이 이뤄지며 요즘은 카톡 네트워크까지 추가되어 대단한 위력. 새누리 이정현이 노인들에게 쏟아붓는 노력과 노하우는 혀를 내두를 지경. 정보가 교차되어야 하는데 60세이상에서는 대다수가 새누리당 정보만 들어감. 변화를 구하는 정치인과 단체들은 위에서보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자세로 접근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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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공익로비학교 1기> 국회를 흔들어라 선거를 흔들어라 - 공익로비의 원칙과 기법 | [공익로비학교] 제3강 선거와 공익로비 | 한정희씨 | 2015.11.2 | ||||||||||||||||||||||||||||
안녕하세요 공익로비학교 워크샵에 참여하고 있는 시민 한정희입니다. 이번주에 있었던 “제3강 선거와 공익로비” 시 간에 느 림과 게 으름으로 세 상에 저 항하는 자 원활동가 이 진용님께서 개 인적인 사 정으로 참 석하지 못 한 관 계로다가 제 가 대 타로 후 기를 올 려봅니다. 후기라는 특명을 받고 중간중간 두뇌 휴식, 즉 멍때리기를 하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하였습니다만 저의 짧은 지식으로 인해 이해 못한 부분도 구멍난 기억력으로 인해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도 존재함을 미리 밝힙니다. 이번 시간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선 거시기의 로비 활동에 대해 배워보는 시간이었는데요, 15년 전과 확연히 다른 모습의 (그러 나 분명 같은 열정의) 이태호 선생님께서 1) 선거의 행위자와 그들의 활동 영역, 2) 선거 시기의 로비가 일반(평소) 로비 와 어떻게 다른지, 3) 선거 시기에 정치개혁을 위해 참여연대가 진행했던 운동의 케이스 스터디를 가지고 열띤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 먼저 선거라는 이벤트에 관련된 행위자를 후보/정 당, 유 권자, 관리자, 기 타-언론라고 정리하셨는데요, 이후 이어진 케이스 스터디들을 보면 이 행위자들이 각각 운동 대상으로, 지지 기반으로, 캠페인 전달 매개체 혹은 파트너로, 직접 대상은 아니어도 개혁 대상으로 선거기간 공익로비에 관여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선거를 통해 후보/정당은 당 내에서 후보선수를 뽑는 공천 과정을 거치고, 공약 정책을 내세우고, 선 거운동을 하는 등의 활동을, 유권자(개 인, 그 룹)는 표라는 파워로 정치권을 심판 혹은 보상하거나, 정책을 관철시키고, 정 치 제도 개혁을 요구하고, 선 거가 공정하게 이루어지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시민들의 이런 활동은 사실 평상시에도 일어나고 있는 활동인데요, 선 거 기간이 특별한 이유는 뭘까요? 바로 정치권이 유권자들의 조직적 요구에 취약해지는 시기, 정치권이 (비 로소) 유권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반 응하고, 유 권자를 찾아오는 시기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정치권을 개혁하기 좋은 타이밍이 바로 선거 시기랍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점점 유권자의 시장이 조밀해지고, 즉 점점 더 다양한 유권자 그룹이 나오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경쟁하고, 정 치권력이 강화되면서 요런 도식이 단선적으로 성립되지 않게 되고 있다네요. 그리하야 선거 시기에 특정 주제를 가지고 공익로비를 할 계획이라면 SWOT 분석을 해 보고 전략을 잘 짤 것을 권유하십니다.
이후 그간 참여연대가 진행하거나 참여해 온 선거시기 정치개혁 운동들의 케이스 스터디 시간이 이어졌는데요, 전부 글로 옮길 수는 없고 몇 가지만 아주아주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1. 1996년, 한겨레와 공동 기획한 참여연대 맑은사회만들기 본부 운동 - 배경: 당 시 선거부정, 불법정치자금 문제가 굉장히 심각한 시기. 정치권이 부패했다는 욕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부패방지를 위한 법을 만들자는 요구에 취약. - 활동: ‘부 패방지법 제정을 위한 서약서를 총선 출마자들에게 보내 O, X 답 변을 받음 - 전략: 후 보자 전원에게 서약서를 보낸 운동 방식은 처음. X를 선택한 후보에게 패널티를 주기에는 참여연대의 파워가 약해서, 패 널티 대신 보상을 주기로. 보상 – O를 선택한 후보 명단 신문에 공개. 압력을 가하려면 표가 있거나 매체가 있거나 해야 할텐데, 이 경우 매체 파워 이용. 서약서를 총선 출마자들에게 보내는 사진을 선관위 이름이 헤드라인으로 나온 선거 관련 기사 밑에 전략적으로 배치. 서약 명단 시리즈로 공개. 참여한 인물 중 유명한 사람 이름 거론하며 미디어 푸시. - 고려할 점: 서명 캠페인의 성공요인? – 전체 프레임이 그 방향일 것. 대세여야. 선거철에는 옳은 이슈여도 유권자들이 전반적으로 반대하는 방향이라면 후보자가 목소리를 낼 수 없을 것. 전국에 서는 불리해도 지역구에서 유리한 이슈도 물론 있음. 예 를 들어 행정수도 이전 같은 이슈. 서명/지지를 위해 더 강한 푸시도 가능할 것. 포지티브 전략을 사용할지 네가티브를 사용할지? 어느쪽을 사용하든지 안할 경우 어떻게 된다는 반대 급부를 확실히 제시해 줘야 함. ‘너 이거 안하면 아웃!’ 그 정도의 반대급부 제시하지 못할 경우 보통 포지티브 전략을 취해. 예로 한겨레 기사에 명단 공개
2. 2000 낙 선낙천운동 (총선연대) - 낙선운동: 떨어뜨리는 것이 목표. 낙선을 통해 영향력을 과시. 평가 기준도 ‘낙선을 시켰느냐 말았느냐’ 4-5년마다 돌아오는 선거를 통해 나쁜짓을 한 사람을 기억하고 표로 심판. 선거 판이 점점 조밀해지면서 낙선운동의 성공률은 점점 희박해지는게 현실이지만 낙선까지는 아니어도 정보를 공개해서 나쁜 전력을 공개하는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 - 전략: 어 떤 기준으로 어떤 블랙리스트를 만드는가가 중요. 리스 트를 단순화, 낙선 리스트 만드는 기준도 간단해야. 낙 선을 끌어내기에 가장 효과적인 기준이 가장 좋은 기준. 처음 기획할 때는 환경단체의 설악산 아젠다, 여성단체의 호주제 아젠다 등 각 단체마다들이 다른 기준을 댔지만 낙선을 끌어내도록 단순화. 낙선 리스트 만들고 그 중 22개 집중 공략 지역 골라서 집중 캠페인. - 운동 과정: 리스트 작성 -> 여 론 환기를 위한 퍼포먼스, 리스트 공개 기자회견 -> 리스트 공개 (보 수언론이 비협조적이었지만 대통령의 지지와 언론사 로비를 통해 낙선 리스트 언론 통해 공개 성공) -> 대중 캠페인 (레 드카드, 유권 자 서약, 티저광고, 여 론조사 등) -> 전 국 투어 통한 조직화. 전 국 투어 후 주요 도시를 22개 집중 캠페인 거점으로 삼아. - 결 과: 성공적. 대상자 명단 86명 중 59명 낙선 (68.6%)- 평가: 단 기적으로는 낙선에 성공. 중장기적으로는 시민운동의 힘을 보여주고 위상을 강화한 효과. 하지만 본질적으로 네가티브 운동이다보니 포지티브 운동이 갖는 장점이 없는 한계가 있음. 예 로, 낙선운동은 인물갈이는 끌어낼 수 있지만 판갈이는 안됨.
이어 대선, 총선에 서 각 후보의 정책을 비교한 정책캠페인, 2011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정치관계법 패키지 개정 청원 운동, 2011~2012년 유권자 표현의 자유 억압에 반대한 유권자자유네트워크, 선거시간 조정 및 투표권 보장 운동, 선관위의 관여 범위 및 역할에 문제를 제기한 움직임 등 다수 사례를 살펴보았습니다. 참여연대의 활동, 민 주화운동에 대해 깊은 지식이 없는 저로써는 숙연하고 경건한 마음이 드는 시간이었습니다. 아, 이 런 노력들을 통해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을 누리는 거구나. 15년 사이 확연한 변화를 보여주신 이태호 선생님 및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었달까요. J 그리고 그 경험들을 짧은 시간이나마 전해 들을 수 있어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다 음 강연도 설레는 마음으로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